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가작 사진관

2009.12.26 23:4512.26

웃기면서도 으스스한 기분. 처음 그 사진관 앞에 걸려 있는 사진들을 보았을 때 들었던 느낌이다. 달도 없는 밤이라 그런 건지는 확실치 않지만, 평범한 사진들에게서 묘한 기운이 다가왔다. 사진 속 인물들이 문제였다.

[왜?]
[살아있는 것 같았어. 마치 밥을 먹고, 일을 하다가 그 자리로 들어와 틀 안에 앉아 있는 느낌이랄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너도 지나갈 일 생기면 한 번 봐봐]

같이 저녁을 먹던 룸메이트는 실없는 소리할 여유가 있으면 시험 범위나 한 번 더 복습하라며 웃었다. 말하면서도 나 역시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식사를 마치고 내가 설거지를 할 동안 재빨리 옷을 바꿔 입고 가방을 맨 그는 아르바이트를 다녀오겠다며 힘차게 문을 열고 나갔다.

집안 정리를 하고 시계를 보니 벌써 밤 9시. 자기에는 이르고 놀러 나가기에는 늦은 시간이다. 시험이 코앞이지만 책이 눈에 들어오질 않아 창문을 활짝 열고 기대어 담배를 한 대 입에 물었다. 차가운 공기가 뺨에 닿아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아..]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 사진관에 걸려있던 사진들 중 소녀의 얼굴. 나는 산책을 간다는 핑계를 대며 집을 나섰다. 뭔가가 목에 걸리는 듯 한 기분이 확인을 하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바램을 가지고 길을 따라 걸었다. 그 사진관은 버스 정류장 바로 뒤에 있다.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한번 쯤 돌아다보며 구경할 만도 한데 생각해보면 아무도 그곳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나 역시. 그런데 왜 갑자기 보게 된 걸까?

사진관은 여느 때와 똑같이 하늘색에 가까운 흐릿한 전등불 2개가 양 옆에서 사진들을 비추고 있었다. 흰 페인트라도 칠한 것 같은 얼굴의 사람들이 상반신만 보이는 게 바닥 쪽에, 내가 찾던 소녀처럼 전신이 다 나온 이들이 위쪽에 배치되어 줌인, 줌아웃의 효과 같았다.

[어?]

모든 순서가 지난번과 똑같고, 옷도 모습도 달라진 건 없지만 전체적으로 사진들이 한 칸씩 이동해 있었다. 그 외에는 딱히 이상한 건 없었지만, 소녀의 눈을 본 순간 직감적으로 느꼈다, 눈의 시선이 바뀌었음을. 단발머리의 새카만 눈을 안경 속에 감춘 소녀는 처음 보았을 때 시선이 어색했다. 앞 또는 밑이나 옆이 아닌 그 사이, 즉 힐끔거리는 순간을 포착한 사진이라 유난히 눈에 들어왔었다. 그 당시에는 뭔가 묘하다는 생각만 했지 무엇이, 어떻게 그런지는 몰랐다. 지금 이 순간, 사진을 다시 보니 시선은 앞을 향했다. 나와 눈을 마주치는 게 힐끔거리지도 않고 웃지도 않는 평범한 눈이었다. 만약 처음에 본 그것을 잊었다면 그렇고 그런 사진으로 지나쳤을 것이다.

[야! 너 뭐하냐?]

뒤돌아보니 룸메이트가 떠나가는 버스의 매연에 캑캑거리며 서 있었다.

[왜 벌써와?]
[주인집에 급한 사정이 생겨서 금일휴업]
[저런..차비만 버렸네]

그는 끄덕이며 내 옆에 다가와 나란히 섰다. 이게 그거냐며 묻기에 끄덕였더니 위 아래로 찬찬히 살펴본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기다렸다. 내가 느낀 그 기분이 뭔지 알아줄까?

[별거 없구만. 니가 요즘 시험 준비하느라 몸이 허해진 모양인데..기력보강 되게 술 한 잔 살 테니 가자~]      

낄낄거리며 웃던 그는 나를 잡아끌고 집 근처의 포장마차로 갔다. 이상하지 않다는 데 뭘 더 말할 수 있겠냐 싶어 쓸데없는 인생 고민에 대해 털어놓으며 술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을 때였다. 룸메이트가 일을 하다가 다쳐서 병원이라는 연락이 왔다. 부산에서 올라온 녀석이라 보호자 대신 나를 불렀다. 택시를 잡아타고 알려준 병원으로 달려가 보니, 이마를 한창 꿰매는 중이었다. 어린 아이라면 손이라도 잡아주며 울지 말라고 달래주겠지만, 딱히 할 일도 없어 응급실을 나와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벽에 붙어 있는 ‘23회 대한 심장 학회 정기 세미나’의 소식도 읽고, ‘이 달의 친절 직원’이 누구인지도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래도 그가 나오질 않아 하품을 하며 긴 복도를 걸어갔다. 병원을 한 바퀴 돌고 오면 나올 것이라 계산했기 때문이다.

[아이고..은영아..내 새끼..]

바닥의 안내선을 따라 오른쪽으로 두 번 정도 꺾었을 때 반대편에서 침대를 밀고 오는 간호사와 울며불며 이름을 부르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정면에 서 있기도 뭣하여 자연스럽게 지나쳐가다가 슬쩍 은영이라는 여자를 보았다. 그 순간 다리가 휘청했다. 오른 손으로 벽을 집으며 숨을 들이켰다. 그 여자는 사진관에 붙어있던 사진들 중 하나 속에 있던 사람이 분명했다.

[한참 찾았잖아! 보호자로 온 놈이 여기 있으면 어떡해!]

갑자기 등을 치며 짜증을 내는 룸메이트의 목소리에 정신을 가다듬고 앞을 바라보았다. 은영이라는 여자를 실은 침대는 어느새 복도 저 너머로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벽에 등을 기댔다.

[좀 전에 실려 간 여자 봤어?]
[누구?]
[은영이라는 여자 말이야]
[몰라. 너는 이 와중에도 여자 타령이냐! 그렇게 예뻐?]
[아니, 그게 아니라..그 여자..사진에서 본 사람이야]

룸메이트는 여전히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한 표정으로 나를 볼 뿐이다. 정신없이 계산을 마친 후 그와 함께 버스에 올라탔다. 30분 후, 그 사진관이 있는 정류장에 내렸다.

[저 여자야]
[확실해? 잠깐 본거잖아]
[맞아]

나와 그는 사진관 유리창에 바짝 붙어 아래쪽에 있는 여자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의 그녀는 웃는 표정이다.  

[이 여자..죽었을까?]
[뭐?]
[죽었을 것 같아]

그는 기분이 나쁜 듯 유리창에서 떨어지며 나를 잡아 당겼다. 오늘따라 날씨마저 을씨년스럽다고 투덜대며 빨리 집으로 가자고 중얼댄다. 나는 한 귀로 흘리며 고개를 들어 일전에 본 소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시선이 다시 옆을 향했다. 눈동자가 눈에 띄게 움직인 것은 아니지만, 갈색 눈은 분명 옆을 보는 것 같다.

[너 미쳤냐? 사진관 속의 사진을 왜 찍냐?]

주머니에서 꺼낸 핸드폰으로 소녀의 얼굴을 찍었다. 지금은 낮이지만 하늘이 흐려 플레쉬가 터졌는데, 유리창 때문에 전체적인 얼굴에 빛이 반사 돼 버렸다. 일반적으로 보면 망친 사진의 전형이지만, 룸메이트가 잡아끄는 통에 다시 찍을 수가 없었다. 그대로 저장을 한 뒤 질질 끌려 집으로 돌아왔다.    

                                                          *

사람이란 뭔가에 집착을 하면 마치 고립된 실험실 쥐가 벗어나려고 같은 행동을 되풀이 하듯이 매달리게 된다. 꼭 귀신에 쓰인 듯 한 그런 기분? 여러 가지 생각을 곱씹으며 보내다보니 시간이 빨리 흘러가 어느새 시험을 치루는 날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기본 학점이 3.0 이상은 돼야 취직 서류 전형에 명함이라도 내밀 수 있기 때문에 다들 눈이 벌게져서 시험에 응했다. 나도 몇 페이지에 뭐가 나오는지 눈 감고 말할 만큼 책을 본 후라 자신감 있게 쓱쓱 쓰고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사람이 뜸한 벤치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무는 데 핸드폰이 울렸다.

[나 좀 전에 그 남자 봤어]
[뭘 봤다고?]
[그 왜..머리 벗겨진 아저씨 기억 안나? 사진관에 걸려 있던 사람 말이야]

룸메이트였다.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외치는 폼이 상당히 다급했다. 사진관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다리부터 소름이 돋아 올랐다.

[어디서? 확실해?]
[응. 우리 아버지랑 비슷하게 벗겨져서 기억하고 있었거든. 근데..좀 전에 사고 났어]
[뭐?]
[교통사고가 났는데..그 남자였어]
[확실해? 네가 어떻게 봤어?]

룸메이트는 사고가 나는 순간 버스 안에 있었다고 한다. 몰려오는 졸음을 참으며 밖을 쳐다보는데 갑자기 커다란 굉음이 들려 돌아보니 승용차와 덤프트럭이 부딪히며 승용차의 앞부분이 덤프트럭 밑으로 들어갔다. 주변의 교통흐름이 멈추며 수많은 목격자들이 차에서 뛰어내려 사고 현장으로 다가갔다.

[승용차에서 연기가 새어나와서 다들 위험하다고 말하는데 119가 왔어. 해체 작업이 20분이 넘게 걸려서 운전자가 사망했을 거라고 생각했지. 절단기 같이 생긴 것들로 차를 잘라내고 운전자를 꺼냈는데 피가 철철이라..]
[그 남자가 운전자야?]
[아니..그게..지나가던 행인]
[뭐?]
[운전자는 승용차가 찌그러지면서 같이 죽은 거 같고..내가 본 사진 속 그 남자는 덤프트럭 앞에 쓰러져 있었어]

룸메이트의 목소리 뒤로 아까부터 시끄러운 잡음들이 들려왔다. 통화를 하는 동안 목소리가 점점 높아져 시험을 마치고 지나가던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이정도면 티비에 나올 거야. 근데 나 아르바이트 늦었거든, 나중에 마저 이야기 해줄게]
[야! 야!]

내가 잠시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겸연쩍은 미소를 보이는 동안 그는 바쁘다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10여분의 통화시간이 표시된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로써 두 명째다. 사진관에 걸린 사진들 속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걸까?

                                                       *

유진이와 저녁 데이트가 잡혔다. 둘 다 전공 시험이 끝나 홀가분한 기분으로 영화를 본 뒤 밥을 먹기로 약속했다. 시간이 좀 남아 영화관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군밤을 사서 가방에 넣은 후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 매표소 앞으로 갔다.

[꽤 오랜만에 보는 거 같아. 시험은 잘 봤어?]
[그럭저럭]
[시간이 좀 남았는데 뭘할까?]
[오락!]

유진이는 차분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부시고 때리는 액션 스포츠를 좋아한다. 그래서 둘이 오락을 하면 화려하고 펑펑 터지는 총이나 칼싸움을 하자고 끌고 간다. 오늘도 30분 정도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이 마스터를 했다고 자랑하면서 나와 대전을 하고 싶다는 총 쏘기 게임 앞으로 뛰어가 동전을 넣고 나에게 손짓을 했다. 화면을 보니 건물에 숨어 있거나 도망가는 상대방을 찾아 쏘면 되는 지극히 단순한 형태였다. 그녀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화면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입으로 투다다다 총소리까지 내며 게임에 푹 빠져들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영화가 끝나고 근처 분식집에 저녁을 먹으러 들어갔다. 구석 자리에 앉는데 어느새 9시가 넘었는지 뉴스가 티비에서 흘러나왔다. 뜨거운 라면을 후후 불어 입에 막 넣는 중에 “오늘의 사건 사고” 코너에서 낮에 들은 덤프트럭과 승용차의 충돌 전말이 들린다.

[어우..승용차 운전자 가족들은 완전히 날벼락이잖아]

유진이는 먹던 것을 멈추고 티비를 보려고 몸을 돌렸다. 그녀의 머리 너머로 119 대원들의 구조 작업이 보인다. 승용차는 룸메이트의 말처럼 앞이 완전히 빨려 들어가 운전자가 살아있을 가능성이 제로였다. 기분이 가라앉는 걸 느끼며 다시 라면으로 고개를 숙이는 찰나에 이 사고의 원인이 갑자기 대로변에 쓰러진 행인 때문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 입이 벌어졌다. 들것에 실려 흰 천이 덮힌채 가는 모습을 보니 이미 죽었음이 확실했다.

[저 사람..왜 뛰어든거래? 어..왜 그래? 아는 사람이야?]
[아니..몰라]
[얼굴이 하얗잖아. 어디 아파?]
[아니 사고가 처참하다 싶어서..놀랐나봐. 밥이나 먹자]

이미 라면은 맛을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기계적으로 입에 넣으면서 머리 속으로는 유진이를 빨리 보내고 사진관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찜찜한 느낌이 압도적으로 나를 잡아당겼다.

그녀를 버스에 태워 보내고 택시에 올라탔다. 평소의 나라면 돈이 아쉬워 급하지 않고서는 이용할 일이 없지만 1시간 이상을 버스 안에서 초조하게 있기엔 마음이 급했다. 총알 같이 달려 익숙한 버스정류장에 내렸다. 여전히 사진관은 하늘색의 초라한 불빛 두개가 사진들을 비추며 나를 반겼다. 유리창 앞에 다가가서 자세히 보니 사진은 다시 한 개씩 자리를 이동한 상태다. 지난번에 보았을 때 대머리 남자는 상단의 오른쪽 끝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하단의 오른쪽 끝에 상반신만 보인다. 또한 은영이라는 여자는 하단으로 이동했다. 사진들이 자리를 움직이고 나자 상단의 왼쪽 끝에는 처음 보는 유치원 옷을 입은 여자아이가 새롭게 자리 잡았다. 왜 사진들은 자리를 이동하고, 사라지는 사진은 어디로 가는 걸까? 사진 속의 사람들은?

                                                          *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을 검색했다. 사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몇 군데를 훑어보니 남자는 59새로 갑작스런 심장마비가 원인이었다고 한다. 평소 지병이 없어 가족들도 의아해한다며 기사는 마지막으로 승용차 운전자가 사망하고 덤프트럭 기사가 중상을 입었다고 전했다.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기사를 되풀이해 읽었다. 읽고 또 읽으면서 핸드폰을 열어 지난번에 찍은 소녀 사진을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빛에 반사되어 보이질 않는다. 얼굴 표정도 마찬가지다. 그저 전체적인 윤곽만이 다가올 뿐이다. 잘못된 사진은 의미가 없지만 왠지 지울 수가 없다. 이 사진을 지우면 사진관 속에서도 사라질 것만 같은 기분..

[여기..언제 문 여나요?]
[몰라요, 본 적이 없어서..]
[네?]
[주인이 허구헌날 외출중이라고 푯말 붙여놓고 닫아 놔요. 그리고 보니 주인 찾는 손님들도 본 적 없네. 학생이 처음인 것 같애]

버스 정류장 옆의 간이매점에 물어보니 사진관은 항상 잠겨 있다고 한다. 주변 상인들도 주인이 누구인지, 월세는 어떻게 내는 건지 신기하다며 혀를 찬다.

[사진? 사진이 왜?]
[아니..그냥 아는 사람 거라서..궁금해서요]
[한번도 신경 써서 보질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
[네. 고맙습니다]

매점에서 산 커피를 마시면서 물어보니 사진에서 이상한 점을 못 느끼는지 시큰둥한 반응이다. 더 알아낼 것도 없어 돈을 지불하고 사진관 앞으로 다가갔다. 이 사진관은 존재감이 없는 게 분명하다. 사람이란 건 지나가다가 대충 보았어도 동네 어디쯤엔가 있다는 정도는 알기 때문에 가끔이라도 찾기 마련인데 손님이 오는 걸 본 적 없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나 역시도 버스 정류장을 하루에도 1-2번씩 이용하는데 사진관이 그 곳에 있음을 얼마 전에야 알았다. 그 동안 그 자리에 무엇이 있다고 생각한 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옆을 보니 현관문에는 “잠시 외출중”이라는 푯말과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휴대폰을 꺼내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가는 소리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누가 받을까? 뭐라고 물어봐야 할까?

                                                         *

[나도 탐정일 도와줄까?]
[탐정은 무슨..말은 고마운데..이젠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생각해보니까 그 사진관 니가 말해서 처음으로 거기 있다는 걸 안게 맞아. 이 동네에 20년을 사셨다는 할머니도 모르시는 걸 보면 생긴지 얼마 안 됀 걸 수도 있어. 어느 쪽이든 기분 나쁘네]
[기분이 나쁘다고?]
[뭐가 스멀스멀 다가오는 것 같잖아]
[근데 너 아르바이트 안가냐?]
[내일까지 쉰다]
[왜?]
[주인집에 사고 났어. 그 집 딸이 유괴 당했는데 중상인 채로 발견됐데]
[저런.]
[지난번에 금일 휴업한 날 유괴범한테서 전화가 온 거였데. 조금만 빨리 돈을 마련했어도 무사했을 거라고...거참..]

룸메이트는 쉬는 게 좋으면서도 주인집에 안 좋은 일이 생겨 가봐야 한다며 옷을 찾아 꺼내 입었다. 나는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처다보다가 수업에 갈 준비를 시작했다. 10여분 후에 우리는 같이 집을 나섰다. 그와는 버스정류장 근처에서 헤어졌다. 나는 평소대로 버스를 기다리고 그는 반대편에서 나를 바라보았다. 버스가 몇 대인가 지나가는 걸 보는데 갑자기 그가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8차선 도로라 차량 흐름이 많아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보아 사진관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뒤를 돌아보니 현관문이 살짝 움직이는 게 보였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몇 걸음 만에 달려가 현관문을 잡았다. 그러나 문은 잠겨 열리지 않았다. 그 순간 확실하지는 않지만, 사진이 있는 중앙 부분에 쳐져 있던 붉은 커튼이 살짝 흔들린 느낌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자 룸메이트는 손을 입 주변에 대고 크게 외쳤다. 사람 들어가는 거 봤어..혹은 사람 들어가는 거 같았는데..중에 하나였다. 문을 소리나게 흔들고 발로 찼다.

[이봐. 뭐하는 거야?]
[아...주인이 들어가는 것 같아서..근데 문이 잠겼어요]
[그래? 왜 난 못봤지?]

매점의 주인이 다가와 물어본다. 나의 대답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진관을 힐끔거렸다. 룸메이트가 정말 본 게 분명한지 물어보려고 핸드폰을 열었다. 급한 마음에 터치폰의 버튼을 잘못 눌러 사진 앨범이 열렸다. 최근에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이 사라졌다. 바로 그 소녀의 사진이. 놀라 사진관 중앙을 보니 사진들이 자리를 또 이동했고, 소녀의 상반신과 대머리 남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

나는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다. 도로에는 아무것도 없다. 차도 사람도. 오로지 나만이 있고, 사진관의 하늘색 불빛이 보인다. 정확히는 등 뒤에서 비치는 상황이라 보인다기 보다는 느껴진다, 사진관의 존재감이.

[왜..내가 여기 앉아 있지?]

혼자 중얼거리지만 대답은 나도, 누구도 할 수 없다. 그 때 휑한 거리 저 멀리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저벅..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온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지금 영화 속에 있다면 죽은 이들이 좀비처럼 걸어와 나를 공격해야한다. 상상대로 되든 안 되든 한 편으로는 이런 이상한 상황에 끌려들어간게 희안하다는 생각이 들어 한기가 느껴졌다. 두통이 시작되면서 눈가에 이슬이 맺힐 무렵 저벅저벅의 주인공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소녀와 대머리 아저씨, 그리고 유치원 꼬마 아가씨였다. 은영이라는 여자는 보이지 않아 의아했다.

새로운 사실에 집중하는 사이, 그들은 방향을 바꾸며 나를 처다보았다. 누가 먼저 랄 것도 없이 한꺼번에 내게 달려들자 고약한 냄새와 차가운 손이 덮쳐와 소리를 질렀다.

[헉!]

순간 눈을 번쩍 뜨자 내 방의 천장이 보인다. 꿈, 꿈이었다. 목 뒤쪽이 땀에 흠뻑 젖어 베개가 축축했다.    

[따르르릉~따르르릉~전화왔어요~전화 받으세요~]

핸드폰이 울렸다. 목이 컬컬해 물을 마시며 전화를 받으니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은 룸메이트였다. 탁자 위의 시계는 어느새 새벽 1시다.

[나 못 들어간다고 전화했어]
[왜? 무슨 일 있어?]
[주인집 꼬마가 죽었어. 지금 장례식장인데 도와드리려고 남았어]
[어..그래. 수고해라]
[문 잘 잠그고 자. 가끔 열린 채 있던데..]
[알았어]

전화를 끝내고도 멍한 기분이 사라지질 않는다. 잠이 덜 깬 건지, 또 다른 누군가의 죽음이 마음에 걸려서 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기분이 찜찜하다. 이런 시기에, 몇 다리를 건넜지만 나와 연결 된 누군가가 이 세상을 뜬 건 마치 사진관이 보이지 않는 그물로 잡아간 것 같다는 망상이 들게 한다. 너무 깊숙이 빠져들다 보니 사진관이 살아있는 걸로 상상하는데다 모든 걸 의심하는 중이다.

                                                 *

룸메이트는 이틀 밤이 지나고서야 집에 돌아왔다. 그 사이 학교도 방학을 해 나는 집에서 딩굴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슈퍼에 한 번, 만홧가게에 두 번 나간게 다 일 정도로 두문불출이다.

[집 좀 치우지, 이게 다 뭐냐? 피난민 수용소가 훨씬 깨끗하겠다]
[좀 있다가 할게. 만사 귀찮다]
[뭐 땜에 그렇게 축 쳐져 있는 거야? 누가 또 죽기라도 했어?]
[아니]
[참, 사진관에 들어간 그 남자 만났어?]
[남자?]
[응. 버스에 막 타려고 하는데 현관문이 닫히면서 웬 남자가 들어가는 뒷모습을 봤어. 그래서 알려주려고 버스 보내버리고 소리 지른 거지]
[문 잠겼던데. 매점 주인도 누가 들어가는 거 못 봤데]
[그래? 분명히 봤는데..]

룸메이트는 입술을 꿈틀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해결 안 나는 대화를 멈추고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갔다.

[전화 이야기 해준다더니..통화 된 거야?]
[어]

내 말에 룸메이트는 놀란 듯 씻다만 얼굴을 문 밖으로 내밀며 재촉했다. 그 날 사진관 앞에서 건 전화는 저음의 남자가 받았다. 자다 깬 듯한 나른한 목소리는 누구냐고 물었다. 당황하여 말을 제대로 못하면서 타이밍을 놓치자 건너편에서는 깊은 한숨을 쉰 후 “사진관 문은 닫혔습니다”라는 일방적인 말 한마디 후에 끊어졌다. 곧바로 다시 걸었지만 없는 전화번호로 나왔다.

[지금 한 번 걸어봐]
[지금?]
[그래. 진짜 없는 번호인지 궁금해. 정말이면 소름끼치잖아]
  
그가 재촉하는 바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핸드폰을 열고 통화기록을 살폈다.

[번호가 없어]
[그새 지웠냐? 바람 피우는 것도 아니면서 기록은 왜 지워?]
[지우지 않았어. 그 번호만 없어. 앞 뒤 다 있는데 그 것만 사라졌어]

내 말에 룸메이트는 징그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다가와 핸드폰을 뺏어 확인했다. 우리는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거 그만 하자. 기분 나빠서 싫다]

그는 그렇게 종지부를 찍어주고는 다시 화장실로 들어갔다. 나도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나는 평범하게 태어나, 평범하게 학창 시절을 보냈고, 지금 대한민국 그 누구보다도 보통의 사람이다. 막말로 이렇게 살다가 급사해도 가족이나 친구이외에는 관심 받을 수 없을 만큼 바닷가의 모래 같은 존재다. 그런 내가 왜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일에 개입을 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혹시나 나에게 초능력이나 뇌 어딘가 잠들어 있던 미지의 능력이 깨어난 걸까?

유진이와 밥을 먹으면서 그동안의 일을 말하자 수저를 내려놓으며 가보자고 한다. 그에 당황하여 그냥 다 지나간 일로 생각하는데다가 더는 신경 쓰고 싶지 않다고 대꾸하자, 나보고 겁쟁이 같다고 놀렸다.

[알았어. 가자, 그럼]
[오오..기대돼..뭔가 확~튀어나오면 어쩌지?]

유진이는 소풍 전날 밤의 어린 아이처럼 눈까지 반짝이며 즐거워한다. 화끈한 스포츠를 좋아하는 성격이 여기서도 나타나니 당혹스러울 때가 많다.

[여기야?]
[응]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사진관 앞에 갔다. 유진이는 두 줄의 사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잠시후 현관문을 열려고 두 손으로 밀었다.

[어?]

유진이가 힘을 세게 주었는지 문이 갑자기 밀려들어가며 몸도 휘청했다. 그동안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려있다는 사실에 놀라 나는 그녀를 잡아주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괜찮아?]
[응, 뭐 그럭저럭. 조금 아픈 정도..]

유진이는 비틀거리다가 현관문을 감싸고 있던 철재 프레임에 무릎을 부딪쳤는지 작은 비명 소리를 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붙잡자 별거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우리는 문을 활짝 열었다. 안은 빛이 전혀 없는 어둠이라 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으로 사물을 확인해야 했다. 몇 걸음 걸어 들어서니 여느 사진관처럼 정면에는 사진을 찍을 수 있게 의자가 놓여있고 중앙에는 카메라가 보였다. 다만, 천장에는 빨래 줄처럼 생긴 굵은 줄이 여러 개 가로질러 매어있고, 사진들이 집게로 고정돼 나풀거렸다.

[특이하다, 그치?]

유진이는 사진을 보려고 까치발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아무런 대꾸 없이 반대편을 살폈다. 그 곳은 정면에서 보면 사진들이 진열된 공간으로 붉은 천이 가로막아 내부와 외부를 구분해준다. 천이 닿아있는 바닥에는 이동한 사진들처럼 다음번에 들어갈 예정인 듯이 액자에 넣어진 사진이 기대어 있었다. 햇빛이 들어와도 어두워 사진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액자를 들어 현관문 근처로 와서 살펴보다가 발을 헛디뎌 떨어뜨렸다.

[깨졌네..발 조심해]

유진이가 급히 다가와 나를 잡아끌었다. 유리가 산산 조각난 액자는 거꾸로 뒤집어져 바닥에 팽개쳐졌다. 유진이는 쭈그리고 앉아 액자를 집어 들었다.

사진 속에는 젊은 남자가 웃으며 농구공을 잡고 있었다. 역동적인 포즈로 제법 잘 찍은 사진이지만, 액자에 들어있다는 사실 만으로 소름이 돋았다.

[우리 그만 가자]

나는 유진이를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그녀는 내 부탁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주변을 탐색했다. 그러다가 어디쯤에서 가져온 것인지 10여장의 사진을 들고 왔다.

[신의 영역을 보는 느낌이 들어. 앞으로 누군가에게 일어날 일을 평범하기 그지없는 우리가 미리 아는 거잖아. 미래를 안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싶으니까 신기해]
[하지만..기분 나쁘잖아]
[썩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아. 그냥..티비를 보는 거 같아. 드라마랑 뭐가 그렇게 다를까 싶네]
[하지만..이건 실제로 일어날 일들이라고]
[그래서?]

유진이는 여전히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반문한다. 나는 뭔가 더 말하고 싶지만, 정확히 무엇을 말해야할지 모르겠어서 입을 다물었다.

                                                       *

사람에게 주어진 운명이란 게 있는지 궁금하다.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정해져 있다면 사는 일에 치열해지거나 욕심을 가지지 않을 것 같다. 어차피 몇 월 며칠에 죽는다면 돈을 더 벌려고 뛰어다니는 일들이 쓸데없다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

[너네..말해봐]
[뭐?]
[이상해. 뭔가 있는데..]

몇 일동안 유진이가 집에 나타나자 그가 마침내 따져물었다. 유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음 한 편으로는 고맙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고개를 돌렸다. 사진관에 들어갔던 날 우리가 본 액자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어왔다. 그녀의 말처럼 드라마를 듣고 있는 기분. 나와는 하등 상관없는..약간 기괴하고 무서운 느낌의 여름용 단편 드라마가 흘러나오는 듯 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 룸메이트가 말없이 일어서자 당황하여 따라 일어났다. 그는 우리를 보지 않고 집을 나섰다. 빠르게 걸어가다가 모퉁이를 돌자 뛰어서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숨을 헐떡이며 현관문을 잡아당겼으나 문은 처음처럼 굳게 잠겨 있었다. 그는 정면의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대고 살폈다. 우리가 마침내 도착해 허리를 잡으며 유리창에 기대자 그는 침을 꿀꺽하며 한 발짝 물러섰다. 유진이와 나는 상단의 왼쪽에 그 액자가 걸려있는 걸 보았다.

[문을 따자]
[어떡해?]
[기술자를 불러야지]
[그건..불범 침입이잖아]
[지난번에는 정당한 방문이었고?]

유진이의 되묻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실행력 있는 그녀는 나와 룸메이트를 남겨두고 열쇠 기술자를 찾아 사라졌다. 남은 우리는 유리창 앞의 시멘트 계단에 앉아 기다렸다.

[요즘은 이런 저런 생각 때문에 잠이 잘 안와. 길을 걷다보면 온통 두려운 것들 투성이야. 공사장에선 꼭 뭔가 내 머리위로 떨어질 것 같고, 신호등이 바뀌어서 건너다보면 차가 갑자기 나를 치러 다가올 것 같아. 여기를 알고부터 생긴 두려움이야]

그의 말을 들으며 앞을 보니 정말 겁나는 일이 가득하다. 지금 지나가는 버스에서 내리던 사람이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오토바이에 치는 사고가 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고, 반대편에서 아이스크림을 들고 뛰어가는 아이가 넘어져서 머리를 잘못 부딪쳐 죽지 않을까..싶기도 하다. 1초, 1초가 삶과 죽음의 갈림길 같다. 어떻게 이런 세상에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지 한편으로는 놀랍다.

[지난번에 심장마비로 죽은 남자..이해가 되. 만약에..만약에..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면..매일 두려움에 떨다가 심장이 멈춘 거 아닐까?]
[그런 이야긴 그만 하자]

양 손으로 얼굴을 비비며 말을 하는 그에게 그만 하라는 제스처를 했지만 그는 열기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들어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는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에게 보인 그 남자는 저승사자 일 거야. 이곳은 명부 같은 거고]
[명부?]
[죽을 사람의 사진이 나열되고, 죽은 사람은 사진이 사라지잖아]
[흠..무슨 뜻인지 이해해]
[그러니까..여긴 글이 아닌 이미지로 된 명부야. 세상이 달라졌으니까 형태도 변하는 거지]

그는 그 뒤로도 이치에 맞을 것 같으면서도 아닌 듯한 자신의 논리를 펼쳤다. 이미 죽은 이들이 10다리 쯤, 20다리 쯤 건너면 결국 다 아는 사이일 거라는 말도 함께..묘하게도 그 생각에 동의하는 데 유진이와 작은 가방을 든 남자가 다가왔다.

[여기 문이요?]
[열쇠를 잃어버렸어요. 장사를 해야 하는데..이래서는 손님을 못 받잖아요]
[네..잠시만 기다리세요]

남자는 가방에서 작은 도구 두 개를 꺼내 무릎을 꿇고는 현관문에 달린 열쇠구멍 속에 끼웠다. 우리는 그 남자를 감싸듯이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마침 매일 열려 있던 건너편 매점도 닫아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은 없었다. 5분 정도가 지났다 싶을 때, 현관문이 밀리며 열렸다. 남자는 고맙다고 너스레를 떠는 유진에게서 돈을 받아들고는 중얼거리며 돌아섰다.

[사진관이 있는 걸 몰랐네..]
[이번에 새로 열었어요]

유진이는 웃으며 자연스럽게 대꾸했다. 남자가 사라지자 우리는 현관문을 활짝 열고 들어섰다. 갑작스러운 움직임 때문인지 먼지가 가득 피어오르는 게 보인다. 유진이, 나, 룸메이트 순서로 들어선 뒤 현관문을 닫았다. 대신 정면의 붉은 커튼을 옆으로 젖혀 햇빛이 들어오게 했다.

[누가 보면 어떡해?]
[봐도 장사하는 줄 알겠지. 그리고 사람들은 남의 일에 큰 관심이 없으니까 걱정 마]
[그..남자가 오면?]
[차라리 잘 된 거지.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을 테니..]

10평 정도의 사진관을 구석구석 살피다보니 사진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개중에는 파노라마처럼, 혹은 이야기처럼 진행되어가는 듯한 연속체도 있었다. 그것들을 바닥에 순서대로 내려놓았다.

[이거..왠지 진행되는 느낌 같지 않아?]
[그러네]
[이 사람..아직 사고가 나질 않았어]
[왜 그렇게 생각해?]
[봐봐..마지막 사진이 걸어가는 듯 하잖아. 뭔가 일어나기 직전이라는 느낌이 안 들어. 쭉 연결해서 보면서 느껴봐]

사진관 앞에 걸려있는 한 사진 속의 남자였다. 파노라마 사진들의 제일 마지막에는 가방을 매고 거리를 걸어가는 모습이다. 얼굴 표정도 걸음도 보통 사람이다. 유진이의 말처럼 아직은 문제가 없는 듯 하다.

[이 남자..누군지 찾을 수 없을까?]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지]

우리는 그렇게 이 잡듯 안을 뒤지다가 별 소득 없이 나왔다. 그 때 나나 룸메이트는 서둘러 나가느라 유진이가 사진을 들고 나왔다는 사실을 몰랐다.

                                                  *

갑자기 새벽부터 비가 쏟아졌다. 내린다기 보다는 퍼붓는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의 장대비였다. 게다가 천둥이 가까운 곳에 떨어졌는지 땅이 울리는 듯한 느낌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에서 깼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다. 다시 누워도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티비를 켜고 커피를 탔다. 룸메이트는 하품을 하면서 내가 건네준 쓴 커피를 한 입 마셨다.

[유진이..요즘 연락이 없네. 니들 싸웠냐?]
[아니. 바쁘데]
[뭐 땜에? 시험도 다 끝났고 방학인데..]
[글쎄..통화도 잘 안 돼]

룸메이트는 옆구리를 쿡 치며 신경 좀 쓰라는 조언을 한다. 너무 풀어주면 떠나간다고..그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이 쓰여 오늘은 유진이를 찾아가 보려고 생각했다.  

9시 무렵에 아침을 대충 먹고 유진이의 집으로 갔다. 그녀의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집에는 동생과 그녀뿐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유진이가 외출했다는 말을 들었다. 동생은 귀찮다는 듯 한 마디를 덧붙인다. 요즘 언니 얼굴 보기 힘들다고..뭐가 그리 바쁜지 새벽에 나가 새벽에 들어온다고..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사진관 앞에 내려 지나치려는데 문이 조금 밀려 있는 게 눈에 띄었다. 혹시나 롬메이트가 말한 예전의 그 남자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한 걸음에 달려가 문을 벌컥 열었다.

[유진이?]
[어? 응]

눈에 익은 옷차림의 여자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찰랑이는 머리를 보니 유진이가 틀림없어 이름을 불렀다. 화들짝 놀란 유진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그냥..사진을 좀 볼까해서..]

그녀의 눈이 퀭한 게 하루 이틀의 행동이 아닌 듯해 화가 났다. 옆으로 다가가보니 바닥에는 사진들이 일렬로 배열되어 있었다.

[그만 하고 가자]
[나..그 남자 죽는 거 봤어]
[무슨 남자?]
[우리 다 같이 여기 들어왔을 때 사진에서 본 가방 든 남자]
[어떻게 봤는데? 니가 아는 사람이였어?]
[아니..찾아냈어]

그녀의 말에 당황하여 바닥에 앉았다. 나를 보는 표정이 어둡지만 언제나처럼 거침없이 설명한다. 집에 가져간 사진을 연구하다가 남자의 주변에 보이는 풍경을 단서로 위치를 찾아냈고, 며칠을 잠복하다가 드디어 그 남자를 봤다고 한다.

[어떻게..죽었니?]
[누가 뛰어가다가 툭 쳤는데..가방이 떨어지면서 내용물이 쏟아졌어. 그걸 줍는다고 쭈그리고 있는데 갑자기 골목에서 나온 오토바이에..]

유진이는 말을 흐렸다. 나는 그녀를 잡아끌어 사진관에서 나왔다. 집 앞까지 말 없이 갈  동안 죽음에 대해 생각했는지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

[죽음이란 게 정말..신의 영역일까? 만약에..만약에..보통 사람이 관여할 수 있다면? 너라면 살릴래..그냥 그대로 둘래?]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가만히 있자 그녀는 손을 흔들며 들어가버렸다.

                                                 *

유진이는 새로운 취미 생활이 된 듯 연락이 안 될 때면 사진관에 있었다. 나와 룸메이트가 그 곳에 발길을 끊기로 결정하고 그녀를 설득할 때도 이상하게 고집을 부렸다. 그곳이 어떤 종류의 마약이든 그녀는 헤어날 수 없는 듯 눈길이 공허해보였다.

서로가 그 문제로 말다툼이 많아지면서 연락이 뜸해지던 어느 날이었다. 유진이의 동생이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와 비몽사몽간에 휴대폰을 열었다.

[언니가 이틀 째 연락이 안 돼요]
[어디 놀러간 거는 아니고?]
[그건..아니라고 생각해요. 나갈 때 아무 것도 없이..아..사진을 보면서 나갔다온다고 한게 다였어요]
[사진?]
[네. 언니 방에 온통 도배된 사진들 중 하나인 거 같은데..하여간 그걸 들고 나간 후에 전화도 안 받고 오지도 않아요]

나와 룸메이트가 집으로 달려가 방문을 열었더니 동생의 말대로 벽면 가득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 방대한 양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이정도면..집착이다]

룸메이트 역시 당혹스러운지 문가에 서 있는 동생을 흘끔 본 뒤 속삭였다.

[거기 있겠지?]
[가보자]

벽면의 사진을 건드리기가 꺼림칙하여 그대로 두고 집을 나섰다. 그와 나는 사진관에 도착할 때까지 각자의 생각에 사로잡혀 말없이 버스에 앉아 있었다.

[문이 잠겨 있네]

롬메이트가 현관문을 흔들었지만 굳게 닫힌 문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제 어디를 찾아봐야 하냐?]

우리는 담배를 피고자 진열장 앞의 시멘트 계단에 걸터앉았다. 룸메이트가 건네주는 쓰디쓴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는데 뒤에서 진동과 소리가 느껴졌다.

[유진아!]

룸메이트가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그에 나도 뒤돌아보니 진열장 안에서 액자의 위치를 바꿔 놓는 유진이가 보였다.

쾅쾅쾅.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유리를 두드렸다. 우리와 그녀 사이의 유리창은 이 세계와 저 세계를 가르는 벽이라도 되는 듯 유진이는 고개 한 번 들지 않았다.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듯하다. 나는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발로 유리창을 부서져라 찼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얼마나 두드렸는지 주먹과 발에 통증을 느끼는데 뒤에서 누군가 팔을 잡으며 제지했다. 경찰이었다. 신고가 들어간 것인지 빨간 불을 번쩍이는 경찰차가 도로 가까이에 주차한 채 우리를 기다린다. 그 경찰에게 말을 꺼내려는 데 액자 정리를 마친 유진이가 빨간 천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게 보였다. 급해진 마음에 온 몸을 유리창에 부딪혔다.

                                              *
[그만해]

룸메이트가 내 말 중간에 그렇게 말했다. 마법이란 게 정말 있다면 나는 그것을 이 순간 느꼈다. 미칠 것 같던 감정과 두려움이 불러온 혼돈, 그리고 두서없이 진행되던 말들이 그의 한 마디에 싹 사라져버렸다.

[끝입니까?]
[네]

경찰서에서는 내 말을 듣던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룸메이트의 그 말이 끝나자마자 떠들어대던 내가 입을 닫았으니 황당할 것이다. 아니, 그들의 얼굴을 정신 차리고 살펴보니 이미 내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게 표정으로 나타난다. 하긴 나라도 정신 나간 소리라고 생각 할 테니 그들을 탓할 것도 없다.

[유진이가 왜 우리를 못 보는 거지?]

더 잡아둘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경찰은 몇 마디의 훈계 후에 우리를 보내주었다. 유리가 깨진 것도 아니고, 사진관 주인이 영업 방해와 폭력 등으로 고소를 한 것도 아니니 당연한 결과다. 시장 한 켠에 자리잡은 경찰서에서 나와 터벅터벅 사진관 쪽으로 걸어가면서 물었다.

[유진이가 그 명부의 관리자가 된 거 같아]
[뭐?]
[액자가 자리를 바꾸는 게..그동안 누군가가 한 일이겠지. 어쩌면 내가 본 그 남자였을지도 모르고. 그런데 유진이가 어떤 순간부터 그 일을 물려받았지 싶다. 아니라면..우리를 보지도 못하고, 들리지도 않는 것에 대해 다른 무슨 설명을 할 수 있겠어?]

우리의 짧은 대화는 거기서 멈췄다. 사진관 앞에 당도했기 때문이다. 이제 하루가 저물어 밤이 되었고, 하늘색에 가까운 형광등이 진열장에 켜졌다. 빨간 천이 약간씩 움직이는 게 안에 유진이가 있다는 표시라 생각했다. 나도 룸메이트도 그 앞에서 말 없이 지켜보았다. 그리고 새벽이 다가올 무렵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

유진이네 집에서는 실종신고를 했다. 경찰은 나에게 찾아와 지난번에 말했던 스토리를 다시 요구했지만 나는 되풀이 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의 선택에 대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을이 되어 개학을 한 캠퍼스는 매일 나에게 바쁘게 살 것을 요구한다. 매일 아침 학교에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 사진관을 들여다보고 그녀가 잘 있는지 확인한다. 그리고 하루가 끝나 집에 돌아갈 때 그녀가 있는 사진관 앞에 서서 작게 인사한다. 굿 나잇.

그 사진관이 언제까지 그 자리에 존재하게 될지, 사람들의 기억에서 또 언제 지워질지는 모르지만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동안에는 매일 확인할 것이다. 또한 그녀가 사람들의 죽음을 묵인하고 진행시키는 것에 만족한다면..나는 그녀를 사랑했다는 마음 때문에 눈감아 줄 것이다.

아마 그녀는 자신의 역할이 끝날 때까지 그 사진관을 지킬 것이다. 그런다가 그 남자처럼 밖으로 나갈 수 있을 때가 되면, 누군가 물려받을 사람을 찾을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내가 그때까지 그 곳을 알고 지낸다면 밖으로 나오는 그녀를 꼭 한 번 만나 물어보어야겠다. 하여 나는 하루에 한 번씩 전화를 한다. 존재하지 않는 번호에..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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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애자 10.01.14 14:27 댓글 수정 삭제
    평범한 소재일 수 있는 사진을 재미있게 마무리 하셨네요. 좀 더 끌어당기는 문장이면 좋은데..약간 아쉽지만 잘 읽고 갑니다. 다음 글을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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