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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토크쇼

2009.08.29 00:1608.29

<토크쇼>

루퍼스 모하임의 토크쇼는 사프란 전역에서 가장 시청률이 높은 토크쇼다. 얼마 전 시판에 나온 녹색 사과 엔터테인먼트의 ‘녹색 사과 V306 수정구’가 저소득층이 열광할 만큼 값이 저렴해 수정구 보급에 크게 공헌한 결과, 시청률도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예전에는 마법사를 배출한 집에 옹기종기 모여 수정구를 시청했다면 최근에는 집집마다 수정구를 들여놓는 가정이 급속도로 늘어나는 추세였다. 덕분에 저녁 시간에 가장 인기가 높은 루퍼스 모하임의 토크쇼는 시청률이 65%에 육박한다는 통계청의 발표가 있었다. 이곳은 루퍼스 모하임의 토크쇼를 시청하려는 마을 사람들이 이미 옹기종기 모여 앉은 브록 씨의 정육점 가게.

“아, 광고 한번 기네. 아, 무슨 자사 프로그램 광고를 저렇게 뻔뻔하게 오래 해?”
수정구를 바라보던 요크 씨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 시끄러워! 곧 시작할 테니, 조용해! 내 경고하는데 토크쇼 시작하면 요크는 입 다물고 있어. 저번처럼 또 떠들면 가만 안 둘 테니.”
“아, 둘 다 시끄럽네. 이제 시작하네요. 봅시다, 좀. 자기네들 수정구도 아니고, 초대해주신 브록 씨도 조용히 계신데, 거 참. 말 많네!”
“알았네, 알겠어.”

‘시작한다’는 말에 정육점을 운영하는 브록 씨 가게에 모인 시청자들이 숨을 죽였다. 드디어 수정구의 빛이 잠시 암전되면서 검은 천을 걸어 놓은 벽으로 ‘루퍼스 모하임 토크쇼’의 로고가 빛과 함께 방안을 비추기 시작했다. 로고를 바라보던 요크 씨가 다시 또 중얼거렸다.

“오늘 초대 손님이…”
“아이, 시끄럽대도. 어련히 자막이 나올 텐데. 쉿.”

이때 수정구에서 토크쇼의 주인인 루퍼스 모하임이 해골이 그려진 선장 모자를 쓰고 걸어 나왔고, 그의 등장에 맞춰 노출이 과한 여성 연주자들이 하프와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루퍼스 모하임은 모자의 챙을 왼쪽에서 오른속으로 한번 둥글게 훑은 다음 특유의 손동작으로 콧수염을 살짝 만진 다음에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시청자, 여러분. 루퍼스 모하임입니다. 먼저 오늘의 초대 손님을 화면으로 만나보시죠.”
루퍼스의 말이 끝나자 화면이 바뀌면서 오늘의 초대 손님이 소개되었다. 화면에는 핏자국이 섞인 글씨로 ‘의심의 군주’ 아포레티아라고 적혀 있었다.

“아포레티아!!”
“뭐라고? 오늘의 초대 손님이 의심의 군주라고?”

저마다 놀라는 함성을 내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아무도 이 소란에 의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아포레티아! 그는 공포의 군주가 키운 제자 중의 하나로 사프란은 물론이고 지중해를 건너 요그람 대륙에까지 악명이 높은 어둠 계열의 마법사였다. 사족을 달자면 공포의 군주는 늘 제자를 키우다가, 훌륭한 자질을 가진 제자는 공포의 군주 스스로가 죽이기 일쑤였기 때문에 ‘제자’로 활동하는 마법사는 극히 드문 편이었다. 때문에 대부분 ‘공포의 군주’의 제자로 알려진 사람들은 마법을 배우다가 공포의 요새를 스스로 탈출한 자들이었고 ‘의심의 군주’로 알려진 아포레티아도 그 중 하나였다. 그 후 공포의 군주를 피해 공포의 요새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무인도에서 수 년간 머무르다가, 어느 정도 마법을 완성한 후 요그람 대륙에서 활동하고 있는 마법사였다. 물론 그의 실력은 ‘군주’ 급이었고, 군주로 불리게 된 이후에는 어둠 마법 학원 프렌차이즈 사업과 저주 및 암살 사업에도 수완과 마법을 뻗쳐 실력과 재력 면에서 급성장한 신흥 군주 중의 하나였다. 물론 이 모두가 공포의 요새에서 탈출했다는 명성 때문에 다소 쉽게 주류에 편입한 경향도 분명 있었다.

“대단하군. 루퍼스의 섭외력이 이제는 군주들에게까지 미치는군. 그나저나 아포레티아가 정말 본연의 모습으로 토크쇼에 등장할 수 있을까?”

얌전히 있던 정육점의 주인인 브록이 드디어 한마디를 했다.
“글쎄. 얼굴이라도 가리고 나와야지. 공포의 군주가 괜히 공포스러운 마법사겠는가? 탈출한 제자들도 종종 잡으러 다닌다는 소문이 있네.”
“그래도 의심의 군주도 이제는 실력면에서 자신이 있으니 이런 공개 토크쇼에 나왔겠지. 자자, 조용!”
“오늘 시청률 신기록을 갈아치울 지도 모르겠군. 지난 번에 대도적 헬탄을 초대했을 때보다 시청률이 더 높을 거야!”

광고 화면에서는 또 다시 녹색 사과 엔터테인먼트가 최근에 신상품으로 밀고 있는 ‘녹색 사과 V306 수정구’의 광고와 지중해 마법사 연합의 인증을 얻은 마법 입문용 지팡이인 ‘지중해의 빛’ 신제품이 화면에 흐르고 있었다. 광고가 끝나자 다시 자리에 앉아 있는 루퍼스 모하임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또 다시 수염 한쪽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수염 끝을 하늘 방향으로 쫑긋 세운 후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시청자, 여러분! 깜짝 놀라셨습니까? 보시다시피 오늘의 초대 손님은 의심의 군주로 널리 알려진 아포레티아 마법사입니다. 놓치지 말아야겠죠? 여러분, 드디어 모시겠습니다. 큰 박수 부탁 드립니다. 의심의 군주! 아포레티아 마법사입니다!”

이때 초대 손님이 등장하는 출입구의 커튼이 젖혀졌으나, 그 곳에는 펄럭이는 커튼만이 정적 속에서 춤을 췄고, 밴드 연주자들은 오늘의 초대 손님이 커튼 사이로 보이지 않자, 순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손님 입장 음악을 불안하게 연주하고 있었다. 다시 화면이 루퍼스의 얼굴을 비춘 순간, 루퍼스의 눈썹이 올라가며 놀랬다는 표정으로 초대 손님의 자리를 바라봤고, 이어 손으로 자리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이미 의심의 군주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화면에는 잡히지 않았지만 의심의 군주는 이미 자기가 앉을 자리를 미리 살펴보고 조사하느라 모습을 감추고 나와 천천히 주변을 조사했으며, 광고가 끝나갈 때쯤에 이미 앉아 있었던 것이었다.

“와하하, 반갑습니다. 여러분! 큰 박수로 환영해주십시오. 이미 자리에 나와 계십니다!”
루퍼스의 소개에 아포레티아가 앞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검은 두건을 눌러 쓴 터라,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이때 루퍼스가 아포레티아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시청자 여러분들을 위해 두건을 벗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럼요.”
의심의 군주는 밝은 목소리로 대꾸하며 눌러쓴 두건을 벗었다. 그때 수정구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묘한 탄성이 흘러나왔고, 브록 씨네 정육점에서도 예외 없이 다양한 탄성이 흘러 나왔다.

“아니, 저렇게 젊다니! 30대인가? 아니, 20대 후반처럼 보이는군.”
“어라, 생각보다 어리잖아? 근데 이렇게 얼굴을 노출해도 될까? 금발에 하얀 얼굴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구!”
“30대 마법사로 알려졌는데, 벌써 군주의 위치에 올라서다니, 정말 대단해!”

사회자인 루퍼스도 놀랐는지 탄성 섞인 음색으로 말했다.

“와우! 놀랐습니다.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
“올해로 37세입니다.”
“무척 동안이시군요. 저랑 세 살 차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감사합니다.”
“하하하.”

루퍼스는 껄걸 웃으며 또 다시 수염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자, 어렵게 모신 자리인 만큼 최대한 많은 얘기를 할 수 있게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공포의 요새 탈출 과정도 궁금합니다만, 역시 시청자분들은 아포레티아 씨의 스승님이라고 할 수 있는 공포의 군주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무척 궁금해 하실 것 같습니다. 먼저 이 이야기부터 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아포레티아는 금발 머리를 왼손으로 쓸어 넘긴 다음 옛 일을 회상했는지, 입가에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물론이죠. 제게 마법을 가르쳐주신 스승님이시니까요. 저도 할 말이 많습니다. 혹시 방송을 보고 계실 수도 있고요.”
아포레티아가 중계 수정구를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스승님, 안녕하신가요? 하하하. 잘 지내시리라 믿습니다. 요새도 제자들을 많이 죽이신다는 얘기가 또 들리는데 조심하셔야죠. 이제 나이도 있으신대요. 노후는 어떻게 준비하시려는 지 모르겠네요. 하하. 복수는 하셨는지 모르겠네.”

마지막 말을 중얼거리듯이 마친 아포레티아는 중계 수정구를 향해 눈을 찡긋거린 후에 루퍼스를 보며 말을 이었다.
“아, 그런데 스승님 이야기부터 하면 조금 긴데, 괜찮겠습니까?”
“그럼요. 여기 시청자들분들이 모두 괜찮다고 하실 겁니다.”
“좋습니다. 아, 그게 벌써 27년 전이군요.”
“10살 때 처음 만나셨군요.”
“그렇습니다. 그때는 사실 그 분이 공포의 군주라는 걸 몰랐습니다.”
“모르셨다고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그 분의 명성은 40년 정도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하하, 일단 제 얘길 들어보시죠. 제가 살고 있던 마을이 여기서 동쪽으로 가다가, 푸른 오징어 항구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마그람 섬에 있었습니다. 오늘 출연을 결심한 것도 오랜만에 고향에 들리려는 생각도 있었고요. 겸사겸사 방문했던 겁니다.”
“마그람 섬에서 자라셨군요. 경치가 좋기로 유명한 섬이죠.”
“마그람 섬에서 또 숲이 우거진 곳으로 가면 조그만 마을이 있었는데, 이곳에 어느 날 자선 사업가라고 밝힌 중년의 남자가 찾아 왔었죠. 검은 중절모에 검은색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신사였습니다. 이때 마을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었는데, 자선 사업가라고 밝힌 이 중년 신사가 제자들과 함께 마을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대부분 마법으로 해결했습니다.”

루퍼스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꾸했다.
“그 중년 신사는 물론 공포의 군주였겠군요. 아포레티아 님을 비롯한 마을 분들은 그 분의 정체를 몰랐을 테고요.”
“물론 그랬죠. 여하튼 이 분의 마법이 대단했습니다. 고질적인 식수 부족 문제도 해결했고, 당시 식중독과 전염병에 걸렸던 아이들을 많이 치료해줬습니다. 당시에는 빛의 마법을 구사하는 마법사로 보였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미 식중독과 전염병 등을 퍼뜨린 게 아마 제자들과 공포의 군주 본인이었을 겁니다. 그때 마을의 대표이셨던 할아범이… 이름이 생각나질 않는 군요. 여하튼 그 할아범이 제 스승님에게 무엇을 요구하든지 최대한 들어주겠다고 말씀하자, 스승님이 말하기를 ‘마을에 자질이 좋은 아이들 몇 명을 제가 데려다가 가르치고 싶습니다’라고 하시더군요.”
“자질이 좋은 아이들이요? 아포레티아 씨가 거기에 뽑힌 겁니까?”
“뭐, 그런 셈이죠. 그날 동네에서 15세 미만의 아이를 모조리 불러모아 조그만 대회를 열었습니다. 한 뼘 정도되는 막대기를 나눠 받은 다음에…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군요. 제자들이 아이들을 저마다 붙잡고 ‘지트로네’라는 주문을 알려줬습니다. 그래서 토너먼트가 벌어졌는데, 규칙은 간단했죠. 두 명이 마주보고 막대기를 서로를 향해 겨눈 다음에 ‘지트로네’라는 주문을 외우는 겁니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으면 둘 다 탈락이었고, 주문이 성공해 상대방을 이기면 승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지트로네는 어떤 마법이었습니까?”
“간단한 염력인데… 사실은 이미 막대기에 장난을 쳤던 게지요. 아주 작은 정신력이나 의지에도 반응하도록 지트로네라는 마법이 걸려있던 지팡이들이었습니다. 즉 의지가 강한 아이들이 대부분 지트로네를 발사했고, 그걸 얻어 맞은 아이들은 어른의 주먹에 맞은 것처럼 나뒹굴었죠.”
“그럼 그 지트로네로만 싸워서 이긴 아이들이 공포의 군주의 제자가 된 겁니까?”
“네, 저를 포함해서 세 명이 뽑혔고, 저는 그때 3등을 했었습니다.”
“1, 2등은요?”
“1등은 아마 공포의 요새에서 거침 없이 마법을 배우고 익히다가 원인 모를 이유로 죽임을 당했고, 2등의 행방은 모르겠습니다. 제가 탈출할 때까진 공포의 요새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공포의 군주는 왜 그렇게 아이들을 모으고, 또 죽였던 겁니까?”
“음, 어디까지나 추측입니다만, 스승의 마법은 강할 때와 약할 때가 있었습니다. 즉, 마법의 원천이 공포였던 것이죠. 그래서 특히 아이들을 선호했고 공포의 요새로 데려간 이후에는 매우 엄격하게 제자들을 대했습니다. 정말 뛰어난 제자들은 앞서 말씀 드린 대로 바다에 빠져 죽거나, 갑자기 피를 토하거나 그런 일이 잦았습니다. 제자들은 대부분 공포에 사로잡혀 살았고요.”
“정말 끔찍했겠군요. 자, 다음 이야기는 잠시 광고를 본 다음에 듣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오늘의 초대 손님, 의심의 군주 아포레티아 씨였습니다. 잠시 후에 뵙죠!”

시청하던 요크 씨가 또 다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니, 무슨 중요한 순간만 되면 광고를 내보내고 지랄이야!”
“헛, 화장실에라도 다녀와야겠네. 대체 공포의 요새는 어떻게 탈출한 거래?”

사람들이 화장실에 다녀오고 물을 마시는 사이에 광고가 끝나고 다시 수정구는 아포레티아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이어서 루퍼스의 말이 이어졌다.
“계속 하시죠.”
“사실 저는 처음부터 스승을 믿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라면?”
“아, 마그람 섬에서부터 말입니다.”
“왜죠?”
“생각해보세요. 마법이라는 게 얼마나 오래되고 깊은 학문입니까? 저는 처음부터 막대기가 이상하다고 의심을 했었죠. 아니나 다를까, 정신을 조금만 집중했더니 상대방이 지트로네 마법을 맞고 나동그라지는 겁니다. 저는 제가 이런 마법을 구사할 단계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팡이에 특정 마법이 걸렸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눈치가 꽤 빠르시군요.”
“네, 그런 후에 1등과 2등을 살펴보니 평소에 기가 강한 녀석들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본래 심약한 아이들을 꺾고 올라가더군요. 그래서 느낌이 좋지 않아 일부러 이 녀석들한테는 져줬습니다.”
“일부로 3등을 하신 건가요?”
“네. 공포의 요새… 그러니까 스승에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확신했죠.”
“어떤 게 이상했죠?”
“스승을 제외하고 어른이 없었습니다.”
“다 아이였단 말씀인가요?”
“아이까진 아니더라도 가장 나이가 많은 선배가 스물 다섯이었습니다. 마법 실력도 형편 없었고, 오히려 살림살이를 맡은 집사라는 느낌이 강하게 왔었죠.”
“스승의 교육은 어땠습니까?”
“교육이라고요? 교육이라.”
아포레티아가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그건 교육이 아니었습니다. 저희는 그저 스승의 실험 도구였죠. 공포를 원천으로 하는 마법을 직접 실험할 대상, 공포를 만들어내는 심리적인 현상을 연구하기 위한 대상, 공포에 사로 잡힌 인간이 보이는 행동 습관을 조사하기 위해서 쓰인 도구였을 뿐입니다.”
“공포의 군주는 왜 그런 실험을 계속 했던 겁니까?”
“왜냐고요? 하하. 복수 때문이죠.”
“복수요?”
“네, 이 이야기는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공포의 군주는 복수할 대상이 있었고, 그 대상 역시 마법사라고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스승의 실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마법사라고 하더군요. 그는 끊임 없이 복수를 갈망했고, 본인이 가진 어둠의 마법을 키우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아포레티아 씨의 이야기로 되돌아와보죠. 스승에게는 어떤 것을 배웠습니까?”
“가장 기본적인 마법을 배웠습니다.”
“기본적인 마법이요?”
“네, 매일 마법 책을 읽고 주문을 외웠지만 가장 기초적인 마법이었습니다. 가사 노동에나 쓸만한 마법들이었죠. 파괴력이 전혀 없는… 그런 와중에 조금씩 배울수록 스승과의 격차가 엄청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 사실을 먼저 깨달은 제자들이 공포감에 휩싸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그 중의 하나였죠. 스승이 똑바른 마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 곳에 갇힌 상태고 스승은 절대로 올바른 마법을 가르쳐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무서우셨겠습니다.”
“네.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어떻게 이겨내셔서 탈출하신 겁니까?”
“일단 눈에 띄지 않아야 했습니다. 돋보이는 제자들은 언제나 감시를 당했죠. 아무리 기초적인 마법이라도 수련을 거듭하다 보면 스스로 깨닫는 게 적지 않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죠. 전 절대로 제가 익힌 마법을 온전하게 펼친 적이 없습니다. 대회라도 열리면 늘 졌습니다. 주로 가사 노동에 집중했고 앞서 밝힌 25살의 선배가 돌연 실종됐을 때 그가 맡았던 집사의 일이 대부분 제게 돌아왔습니다. 저는 항상 만족스러운 듯 일을 했고, 마법을 배우는 것은 뒷전이었죠.”
“집사가 되셨군요. 그렇다면 마법도 많이 배우지 못하셨을 텐데 바다로 둘러싸인 섬에서는 어떻게 탈출하신 겁니까?”
“저는 탈출한 게 아니라, 돌아가지 않은 겁니다. 앞서 말했듯이 오랜 기간 동안 집사로 일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스승의 다양한 작업을 돕는 조수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시기에 공포의 요새에 입문했던 동기들이 대부분 죽거나 병이 들자, 스승은 또 다시 충성심이 높은 제자들을 데리고 또 다른 실험 대상을 모으러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오호라, 그 일행에 참가하셨군요. 감시가 엄하지 않았습니까? 쉽게 도망칠 순 없었을 텐데요.”
“네, 출발하기 전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보라색 가루를 머리 위에 뿌리고, 하늘 위로 보라색 가루를 날린 다음 눈처럼 내리게 했습니다.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말했죠. 시간의 저주를 내렸다고, 공포의 요새로 되돌아오면 저주를 풀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아포레티아 씨는 어떻게 저주를 푸신 거죠?”
“그날 저주를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스승의 물품은 대부분 제가 관리를 하고 있었고 가루 약이 저주에 사용된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죠. 즉 효력이 없는 가루를 맞고 공포에 떨다가 대부분 공포의 요새로 돌아간 셈이고 전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이후에는 보시다시피 이렇게 여기서 토크쇼에 나와 있군요.”
아포레티아가 환하게 웃었다.
“대단하십니다. 아포레티아 씨! 정말 의심의 군주라는 이름에 손색 없군요.”
“과찬이십니다.”
“자, 어느덧 시간이 흘렀습니다. 저희 토크쇼 전통의 질문을 드려야 할 시간이네요. 자, 아포레티아 씨에게 마법이란?”
“마법이요? 하하, 제게는 삶과 같은 것이죠. 또 저는 알려진 별명대로 의심이 많습니다. 마법은 의심을 풀어주고, 불확실 한 것을 경계하도록 도와주는 힘이 되죠. 생명을 유지시키는 첫 번째 장치가 의심이라면, 마법은 제게 살아갈 힘을 불어주는 에너지와도 같습니다. 의심과 합쳐진 마법. 제 스승인 공포 마법과는 노선이 다르지만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반드시 동네 친구들의 복수를 하러 떠날 계획도 있습니다.”
“그렇군요. 혹시 오늘 출연하신 것을 후회하지는 않으십니까? 그간 원한이 있거나, 혹은 공포의 군주 본인이 아포레티아 씨를 추격하게 될 수도 있을 텐데요.”
“흠, 그런 것은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보고 계시는 이 얼굴은 저의 본래 얼굴이 아닙니다. 당연히 오늘 이후에는 제 모습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도록 조치를 취할 겁니다.”
“향후 계획은 어떻습니까?”
“일단 제 사업을 키우는 것이 가장 큰 계획이자 목적입니다. 어둠 마법 학원 프렌차이즈 사업이 조금씩 영역을 넓히고 있고, 곧 있으면 이 마을에도 지점이 들어올 예정입니다.”
“사업에도 재능이 있으시군요.”
“네, 이게 다 저의 의심 덕분이죠. 돌 다리도 의심을 해보는 성격이거든요.”
“자, 그럼 잠시 광고를 듣고 와서 오늘의 토크쇼를 마무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광고 보시죠.”

루퍼스가 화면을 향해 미소를 짓자, 수정구의 빛이 암전되더니, 천연의 휴양지라 불리는 마그람 섬이 비춰졌다. 이어 비키니를 입은 미녀들이 물놀이를 하는 장면이 흐르고, 핑크색 고래가 지나가는 장면과 함께 ‘마그람으로 오세요’라는 문구가 무지개 빛으로 감싼 채 화면을 수놓았다. 이어서 화면은 다시 아포레티아와 루퍼스를 비추고 있었다.

“자, 아시다시피 저는 토크쇼의 진행자이면서도 사프란의 조언자로 알려졌습니다. 끝으로 제게 궁금하신 점이나, 고민이 있으시다면 말씀 하세요.”
“음, 마법사의 고민이야 다들 마찬가지일 겁니다. 아무래도 같은 마법사를 갑작스레 만나면 서로 회피가 가능하지만 일류 암살자나 정체를 숨긴 검사 계열의 자객을 만나면 아무리 의심을 해도 통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때문에 사업을 확장하는 도중에는 종종 이러한 무리들에게 습격을 받곤 합니다. 이럴 땐 딱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질 않는 군요.”
“음, 어느 정도 예상했던 질문입니다. 시청자 분들도 아시겠지만 저도 어렸을 때부터 마법을 공부했던 터라, 이렇게 초대 손님과 함께 마법 얘기가 나오면 지팡이를 움켜쥐던 손의 힘줄이 불끈불끈 거립니다. 제가 아는 선에서 최대한 답변을 드리자면 암살자는 두 가지 타입이 있습니다.”
“두 가지 타입이요?”
“네, 첫 번째 타입은 임무 완수를 목적으로 하는 타입이고 두 번째는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타입입니다. 물론 실력의 높고 낮음은 여기서 별개로 하죠. 어차피 높은 실력을 갖춘 암살자라면 그 어느 누구라도 피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먼저 임무 완수를 목적으로 하는 타입은 암살의 단계가 있습니다. 장소, 시간, 목적, 도구 등에 신경을 쓰죠. 때문에 의심이 나는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을 때는 부유의 마법을 몸에 걸어 놓는 것이 좋습니다. 다가 오는 사람이나 도구가 몸과 가까이 올수록 하늘 방향으로 휘어지게 되는 마법이죠. 혹시 아포레티아 씨는 이 마법을 배우셨습니까?”
“네, 기초 서적에서 익힌 이후에 수련을 쌓진 않았지만 원리는 체득하고 있습니다.”
“다행이군요. 이것과 본인이 즐겨 사용하시는 의심과 마법을 적절히 혼합하면 크게 어렵지 않을 겁니다. 연습에 따라서 암기도 튕겨낼 정도의 방어막이 형성되니까요. 문제는 두 번째 암살자입니다. 신분을 노출 시키지 않는 다는 것은 그만큼 조심스럽다는 얘기입니다. 또한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도구를 사용하거나, 사람이 많은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도 없죠. 또 아포레티아 씨처럼 변장을 하고 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
“갑자기… 무… 슨… 짓…”
아포레티아가 웃었다.
“아, 관통 당했는데 말을 하시네요? 혹시? 아, 그 부유의 마법이라는 것이군. 다행히 급소를 피했나 본데, 출혈 정황 상 살아남긴 틀린 것 같소, 루퍼스 모하임.”
“왜… 나…를?”
“하하하. 이 봐요. 말을 많이 하지 말아요. 피가 계속 흐르니까. 아시다시피 나는 저주와 암살 사업에도 영역을 뻗치고 있소. 당신을 암살해달라는 부탁을 받아서 오늘 초대 손님으로 온 거요. 어허, 또 말을 하려는 군. 그냥 쉬고 계시오. 토크쇼는 내가 알아서 마무리할 테니.”

이때 밴드 연주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커튼 밖으로 퇴장했는데, 그 모습이 절박한 동작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루퍼스 모하임이 토크쇼 사회자로 부임한지도 3달 밖에 안 된 상황이었기 때문. 이어서 아포레티아의 환한 미소와 함께 보라색 가루가 하늘에 뿌려지면서 새로운 로고를 담은 빛이 중계 수정구를 향해 발사됐다.

“기대하시라! 의심의 군주가 진행하는 토크쇼! 이름하여 아포레티아 토크쇼! 제가 반드시 공포의 군주를 스튜디오로 모시겠습니다!”
“와아! 대박이다!”

이번에는 요크 씨의 커다란 외침을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다들 흥분한 눈치였다. 이어서 브록 씨가 말을 받았다.
“내가 뭐라 그랬나? 루퍼스의 집권은 3개월이 가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지 않나. 아무런 도구를 가지고 나오지 않은 아포레티아를 보고 방심했나 보군. 그는 암살자 타입의 마법사였어!”
“기대되네! 오늘 시청률 좀 올랐겠는데?”
“자, 이제 다음 초대 손님은 누가 될까?”
“쉿, 조용히! 광고, 끝났네.”

수정구에는 아포레티아가 웃으며 서있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토크쇼를 맡게 된 아포레티아입니다. 내일 초대 손님을 소개해드리죠. 암살자, 검은 구름의 명성을 아십니까? 제가 토크쇼를 맡게 되면 첫 출연을 하기로 약속했던 지인입니다. 기대되지 않으십니까? 그럼 내일 저녁에 뵙겠습니다!”

브록 씨의 정육점은 다시 환호성으로 휩싸였다.
“와우! 암살자! 검은 구름이라니!”
“이봐, 나는 공포의 군주가 한번 초대됐으면 좋겠어. 완전 기대돼!”

그렇게 수정구의 불빛이 꺼지는 동안 루퍼스 모하임의 시체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핏자국만을 남기고 스튜디오에서 치워져 있었다. 수정구 속에서는 갑자기 시체가 사라진 것을 의심하는 아포레티아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모습을 감췄다. 화면에는 붉은 글씨로 자막이 흘러나오며 토크쇼가 끝났다.

“다음 시간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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