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가작 잃어버린 화요일

2008.02.29 23:1602.29

(1)설탕과 은행

"젠장."

물론, 행복해야 할 금요일 저녁에 어울리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머그컵에 담긴 티백위로 뜨거운 물을 붓는 중 설탕의 부재를 깨달았을 때, 이 단어가 자동적으로 입 밖으로 튀어나온 건 자연현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월요일에 설탕봉지를 비우면서 새로 사와야겠다는 생각을 한 기억은 났지만, 지금까지 사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찬장 안을 살펴봤지만 역시 설탕봉지는 없었다.

그래도 이미 물을 부은 이상 마시기는 마셔야 했다. 티는 까짓 설탕 없이도 우유만 넣으면 마실 만하니까, 라고 자기위안을 하며 나는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냈다. 유통기한이 아슬아슬한 우유를 머그컵에 적당히 따르고 다시 넣어놓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연 순간,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하나 보였다. 혹시나 해서 그것을 꺼냈더니 설탕봉지였다.

가끔 냉장실에서 냉동실의 위력을 지 멋대로 보여주곤 하는 우리 냉장고의 개성 때문인지 설탕봉지는 얼어버린 듯 굳어 있었다. 하지만 부엌 벽의 협력 아래 몇 번의 가혹한 폭행을 가한 다음, 나는 티에 필요한 만큼의 설탕가루를 얻어 낼 수 있었다.
  
이번엔 설탕봉지를 제대로 찬장 안에 넣어두고는, 티스푼으로 티를 휘저으며 생각했다. 나는 언제 설탕을 사서 냉장고에 넣어 둔 걸까. 미스터리다. 그리고 잠시 후, 티스푼에 휘감겨 버린 티백 끈을 풀어내면서 왜 내가 생각 없이 티스푼을 움직여 댔나 생각했다.

시작은 설탕이었다만, 티를 다 마셨을 때 내 사고는 복잡한 생각의 미로 속에서 '사이가 틀어진 어학원 친구하고는 어떻게 해야 할까?' 파트를 헤매고 있었다. 기억력도 나쁜 주제에 집중력도 떨어지는 내 뇌에 살짝 의심을 품은 것이 결코 심한 처우는 아닐 것이다.

사실 설탕 따위는 어쨌든 상관없지. 현실로 돌아와야 할 필요를 느낀 나는 창가에 쌓여있는 우편물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 은행에서 온 편지는 확실히 현실의 시궁창속으로 나를 집어 던져 주었다. 눈물 나게 고맙기도 하지.

22일 자로 한도액을 초과해 인출한 관계로 15파운드를 기본으로 내야 함은 물론 매일 6파운드씩 추가로 지불해야 할 돈이 늘어난다는 그 내용은 제대로 내 머리를 때리고 있었다. 실제 추가 지출액은 단 2파운드 42펜스. 은행 놈들은 모두 흡혈귀의 직계자손이라더니. 한화로 10만원 상당을 앉아서 잃게 생겼다.

평소라면 불가능할 한도액을 초과한 인출이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 아니, 그 전에 내가 무슨 일로 계좌 한도액을 초과할 정도로 돈을 쓴 거지? 문제의 22일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나는 기억을 더듬어 보기 시작했다. 오늘이 25일, 금요일이니까 22일이면 화요일. 화요일이면 나는...

...뭘 했더라?

(2)신문과 히스 레져

당연하게도, 삶의 모든 것들을 기억할 수는 없다. 3일 전 전철에서 세 걸음 너머에 서 있었던 사람이라든지, 혹은 친구가 5번째로 말했던 때의 2번째 문장 같은 것 말이다. 그런 사소한 것들을 위한 사람의 기억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이건 좀 아니다. 나는 화요일의 기억만이 통째로 없었다. 마치 협박편지를 쓰기 위해 가위로 오려진 글자처럼, 일주일 중 화요일의 기억이 텅 비어 있었다. 신기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답답했다. 도대체 그 화요일 날 무슨 일이 있었기에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부엌에서 나와 계단을 걸어 올라간 후 내 방문을 여는 그 순간까지 나는 화요일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었고, 덕분에 방안으로 첫걸음을 내딛은 순간 몸이 붕 뜨는 진기한 현상을 체험하게 되었다. 녹색의 새끼 케라토사우루스가 손가락으로 부리는 초능력이나 복잡 무쌍한 반중력 장치가 없어도 사람은 공중에 뜰 수 있다. 단, 그 다음 순서로 추락이 결정되어 있다는 사항을 명시해야 하지만.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기에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고통을 온 몸으로 표현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아픔이 어느 정도 가시고 나자 나는 바로 용의자 탐색에 들어갔고, 그다지 어렵지 않게 지하철에서 받은 공짜 신문을 지목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슬랩스틱 코미디에 쓰이던 바나나 껍질보다 이쪽이 3배 정도는 더 위험해 보였다.

용의자 신문에게 쓰레기통 행을 언도하고 형을 집행하려는 순간,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신문의 날짜는 21일, 그러니까 월요일 자였다. 내 청소 성격을 볼 때 화요일의 신문을 찾는 것도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신문을 보면 화요일에 대해 뭔가 기억날 지도 모른다. 생각이 났을 때 바로 실행하라는 가훈 같은 건 없었지만, 잠시 인생의 지표로 삼기로 했다.

하지만 신문들을 찾기 위해 방안을 헤집고 뒤집다 보니 뭔가 더 찾기 어려워만 지는 것 같아 먼저 최소한의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다 마신 음료수 캔을 치우고, 책상 위를 정리하고, 빨래를 정리하는 등등.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If you want me, satisfy me~'를 부르며 청소기를 돌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말끔해진 방을 보면서 착잡한 기분을 느끼기는 처음이었지만, 진귀한 경험에 만족하기 이전에 수확한 신문지들의 날짜를 확인해 보았다. 18일, 21일, 23일, 24일, 25일... 화요일, 즉 22일의 신문은 없었다. 공짜 신문도 안 챙기고 도대체 화요일에 뭘 했는지 궁금하다. 그 날은  TV편성표도 확인 안했단 말인가?

잠시 후, 나는 내가 바보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신문은 그 전날의 사건을 싣는 곳이다. 즉, 22일의 사건은 23일 신문에 나와 있는 것이다. 비록 당일 어떤 기사를 읽었는지를 확인 할 순 없지만, 적어도 그 날의 뉴스 토픽이 뭔지는 알 수 있다.

22일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배우 히스 레져의 죽음이었다. 이제 막 좋아지려고 하는 배우였는지라 이 소식을 듣고 아쉬워했었다. 했었다. 응? 잠깐. 했었다, 라면 이건 화요일의 기억의 단편일까? 잠시 마음을 들뜨게 하던 내 뇌는 바로 그 기억이 신문기사를 읽은 수요일의 것일 수도 있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깊게 생각해 보니 그의 죽음을 수요일 아침에 신문에서 본 기억은 나지만 화요일에 뉴스에서 본 기억은 나지 않았다. 젠장.

미안합니다, 히스 레져. 당신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당신이 죽은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도움이 안 되는 걸로 판명된 신문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신문속의 히스 레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트맨 영화 속의 조커 분장을 한 그의 입술이 실룩거리며 저승에서 가져온 듯 한 장난기가 섞인 음성을 내뱉었다.

" Why so serious?"

(3)인터넷과 그리니치 표준 시각

번개 맞기, 물에 빠지기, 혹은 머리(주로 후두부)를 단단한 물체로 강타. 흔히 기억을 되찾는 방법으로 쓰이는 것들은 왜 이렇게 하나같이 과격한 걸까. 그러고 보니 최면술도 있었군. 하지만 지금 내가 처박혀 있는 런던에는 아는 최면술사가 없다. 사실 한국에도 없지만.

별 생각 없이 기억상실을 인터넷 검색란에 토닥거리고 있으니 많은 얘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주로 영화, 드라마 얘기가 많이 나왔는데 사람들에게서 눈물을 짜내기 쉬운 소재라서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잊어버리거나 자신의 행복한 삶, 혹은 불행한 삶을 잊어버리는 그들의 거창한 기억상실과는 달리 내 경우에는 '화요일에 뭘 했는지 기억 안나요.'이다. 갑자기 느껴지는 이 초라함은 뭘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인터넷 서핑을 하다 보니 영화 '메멘토'까지 오게 됐다. 영화 주인공이 단기 기억상실 때문에 자신의 온 몸에 기억을 기록하는 걸 보자 예전에 본 카메라 광고문구인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도 생각났다. 기록이라. 그래, 기록.

런던에 어학연수를 온 이래 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다가 짧은 일기를 계속 올리고 있었다. 국제전화비용의 강력함에 차마 전화를 하지 못하는 친구들에게 근황을 알리기 위해 쓰는 것이었다. 화요일에도 썼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거의 매일 써 온 만큼 가능성이 있다.

로그인하고 확인해보니 과연, 게시판에는 22일에 쓴 내 글이 있었다. 드디어 제대로 된 실마리를 찾았다는 생각에 바로 클릭해서 내용을 읽어본 나는 1분 후 허탈함에 몸을 침대에 내던지고는 요동을 쳐댔다.

군만두를 요리하다 실수로 달심을 현세에 강림시켜 몸소 요가 파이어, 아니 요가 플레임을 하게 만들었다는 게 22일의 글 내용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사건을 기억한다. 일단 그 불길 자체가 꽤 임팩트가 강했고, 그것 때문에 부엌의 그을음을 플랫 메이트들 몰래 제거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이건 월요일의 기억이다. 어째서 화요일에 월요일의 사건이 쓰여 있는 거냐, 라고 따지려 했지만 누구한테 따져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베개를 집어 던지고 이불을 발로 차면서 광란의 시간을 보내고 나니 내가 충분히 이성적이 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머리에서 정보를 하나 툭 던져줬다. '런던과 서울의 시차는 9시간이다, 병신아.'
    
아.

런던에서의 월요일 밤은 서울의 화요일 아침. 즉 내가 잃어버린 런던의 화요일의 기억은 아마 서울의 수요일 아침에 인터넷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투덜거리면서 침대에서 내려와 게시판의 23일 올라온 글을 확인하자 이번에야 말로 빙고라는 느낌이 들었다.

(4)매머드 상아를 파는 백화점과 전화번호 너머

화요일 일기에 따르면, 나는 타이 친구 핏과 함께 백화점에 갔던 모양이다. 파격 할인이라고 한 홍보와는 달리 실제 할인 품목은 B급 품목에 한해서 라는 사실에 런던 내 백화점 할인의 실태에 실망했다는 게 기본 베이스였다. 덧붙여 백화점에서는 매머드의 상아도 팔고 있었다. 가격은 75000파운드. 한화로는 1억이 넘는다.

백화점에서 매머드 상아를 판다는 사실이 인상 깊었는지, 아니면 그 가격이 인상 깊었던 건지 머릿속 어딘가 에선 그걸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선사시대에 멸종한 그 거대짐승의 상아는 군데군데 금이 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이었다는 기억이 튀어나온 것이다.

이 기세를 타고 나머지 기억까지 전부 되살려 내서 어디다 돈을 써댔길래 은행에서 말도 안 되는 편지를 보냈는지 알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나머지 내용이라고 있는 건 샤넬 핸드백 홍보 모델을 봤다는 것과, 그 모델 다리가 예뻤다는 게 다였다. 정말로 모델의 다리가 예뻤었는지 그 기억 역시 복구되었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건지. 내게 필요한 건 이런 쓸데없는 기억이 아니라 내 돈의 행방이란 말이다.

가볍게 좌절하고 있는데 휴대폰에서 무슨 곡인지 모를 음악이 흘러 나왔다. 알람인가 싶어서 보니 아는 형한테서 온 전화였다. 이제 밤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시간인데 왜 전화했는지 궁금해 하면서 받자 다짜고짜 금요일 밤에 플랫에 있는 나를 비난해댄다. 살짝 짜증나서 나는 천하의 능력 없는 인간쓰레기라서 펍이나 클럽이 아닌 플랫에서 금요일 밤을 보낸답니다, 라고 농담 같은 진담으로 대답해 주자 상대방은 그제야 본래 전화 건 목적을 말했다. 다음 주의 아는 여자 동생 생일날 어떻게 할 거냐는 거였다. 어쩌긴, 지가 알아서 하겠지. 그래도 그건 너무 성의 없어 보이는 말이라 월요일에 어학원에서 만나면 물어본다는 식으로 얼버무렸다.

통화를 끝내기 전에, 나는 혹시 내가 화요일에 뭘 했는지 기억 나냐고 물어보았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네가 모르는 걸 내가 무슨 수로?'였다. 맞는 말이다. 당사자는 나니까.

다시 대기 화면을 띄우고 있는 휴대폰을 보다 무의식적으로 최근통화목록을 열어보았다. 최근것 부터 하나씩 내려가면서 날짜를 확인하자 22일에는 단 하나의 통화기록이 있었다. 이름이 저장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기억나지 않는 번호였다는 게 문제지만. 게다가 송신한 번호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 실마리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화를 걸기에 왠지 모를 두려움이 느껴졌다. 이 번호 너머에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이름도, 성별도, 얼굴도 모르는 미지의 사람. 전화를 걸면 부리부리한 검은 눈의 외계인이 빨간 버튼을 눌러 내 기억을 지울 수도 있다. 혹은 나쁜 기억을 지워주는 신약 개발에 미친 제약회사 사람들이 주사를 놓으려 달려올 수도 있다. 진부한 상상들이지만, 진부하기에 그것들은 때론 그럴 듯하게 들린다.

그 위험성을 존중해 그냥 이대로 넘어가면 어떨까. 어차피 은행에 돈을 내야 하는 건 이유를 알든 모르든 해야만 하는 일이니 딱히 이유를 몰라도 상관없다. 일주일 중 하루의 기억의 중요성? 어차피 시일이 지나고 나면 잃어버릴 하루에 불과하다. 딱히 붙잡으려고 애 쓸 필요가 없다.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말이지.

나는 다시 한 번 은행에서 날아온 편지를 읽어 보았다. 이성은 아주 손쉽게 거문고자리까지 날아가 버렸다. 편지를 방구석으로 집어 던진 후 나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신원미상의 수신자를 기다렸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사무적이면서도 웃음이 양념으로 가볍게 쳐져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레드포드 로지 정신병원입니다. 무엇을 도와드..."

나는 전화를 끊었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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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rror 08.03.11 23:37 댓글 수정 삭제
    해파리 님께는 "내 눈에는 악마가" 보내드렸습니다. 건필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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