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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미련(未練) : 아차상

2007.10.27 13:3010.27

하늬비



   시간은 오후6시가 넘었지만 계절이 여름인지라 아직은 해가 낮게 떠있다.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공원은 저녁 빛을 받아 전체적으로 어스름했다. 자동차 매연을 하도 뒤집어써서 작은 먼지덩어리 같은 회양목. 그 키 작은 나무 안쪽으로 펼쳐진 푸석푸석한 잔디밭. 다시 그 건너의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낡은 벤치와, 벤치에 눕듯 기대앉은 꼬질꼬질한 자켓 차림의 사람까지. 여름 저녁 공원의 정경은 모든 것이 어둑어둑하고 몽상처럼 흐릿했다.
   주위가 어두웠지만 아직 해가 떠있는 탓인지 가로등은 들어와 있지 않았고, 나는 그래서 벤치에 반쯤 누운 그 사람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로등이 켜졌더라도 때가 탄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그의 얼굴은 볼 수 없었으리라. 나는 그 대신 앞섶이 열린 꼬질꼬질한 자켓 안쪽의, 역시 꼬질꼬질한 티셔츠의 가슴 부분이 살짝 부풀어있는 것을 보며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
   모자를 젖혀들자 잠에 취한 열네다섯 살 정도의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으음……”
   막 잠에서 깨어난 여자아이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벤치에서 일어났다. 여자아이는 내 손에 들린 자신의 모자를 거칠게 낚아챘다. 그 아이가 나를 보는 시선에는 적개심과 불안, 잠을 깨운 것에 대한 약간의 짜증 밖에 없었지만 내 기분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사실, 더 이상 쌀자루를 어깨에 메고 공원을 돌아다니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던 참이었으니까.
   “갈 데가 없니?”
   내가 먼저 말문을 열자 여자아이는
   “아니에요……”
   일방적으로 대화를 끊고는 달아나려고 했다. 그건 곤란하다. 나는 재빨리 여자아이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 괜찮아. 나도 너처럼 가출했던 적 몇 번 있으니까. 내가 사줄 게 그냥 밥이나 한 끼 먹고 가지 않을래? 너처럼 같이 다니는 애들도 없으면 밥도 챙겨먹기 힘들잖아?”
   여자아이는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나를 위아래로 관찰했다. 하지만 뭔가 수작을 부리는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금 내 행색은 나시티에 반바지, 발에는 슬리퍼를 질질 끌고 있고 어깨에는 10kg짜리 쌀포대까지 하나 지고 있다. 이런 꼴로 다니는 인신매매범이 있다면 나도 한번 보고 싶을 지경이다.
   잠깐의 실랑이와 몇 분에 걸친 설득 끝에 여자아이는 반신반의하면서도 내 뒤를 따라오게 되었다. 어깨에 쌀자루를 메고 공원과 역 주변을 돌아다닌 지 두 시간만의 쾌거였다. 뭐, 사실은 이러려고 나왔던 게 아니라 엄마가 쌀이 떨어졌다고 해서 그저 쌀을 사러 나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재진이 녀석의 소개로 알게 된 이 공원이 갑자기 떠올라서. 알게 된 후로는 자주 애용하게 됐지만, 설마 우리 집에서 이렇게 가까운 곳에 가출청소년과 청소년노숙자가 많이 몰리는 명소가 있는지는 몰랐다니까.
   그나저나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면 엄마한테는 또 뭐라고 하나. 두 시간이나 되어서 돌아온 거며, 또 여자아이를 데려왔으니 한소리 징 하게 듣게 생겼다. 그러잖아도 하도 가출소녀를 집으로 데려와서 밥을 먹이는 통에 쌀 10kg이 3주를 못 간다고 야단이신데. 형은 또 얼마나 놀려댈꼬. 자기도 식객처지인 삼촌은 차라리 가만히 있지만 아버지도 은근히 무언의 압력을 주시고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나는 허름한 지상4층의 상가 건물로 척척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을 걸어 올라갈 때는 약간의 잡음이 있었다.
   “어디가요?”
   “이 위에 우리 집. 나 옥탑에서 자취하거든.”
   “……‘사준다’고 했잖아요.”
   “막 사온 쌀로 밥해줄 건데? 왜. 그럼 너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래?”
   나는 어깨에 짊어진 쌀포대를 툭툭 쳐보이고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계단 홀을 통해 내 뒤를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여자아이는 옥상 문을 열고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옥상으로 올라왔다.
   “어? 임마. 또 무슨 혹을 달고 왔어? 이번에도 밥해 먹이려고?”
   옥탑에서 제일 먼저 고개를 내민 것은 기타를 손에 든 형이었다. 나는 말없이 입술로만 웃어보이고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아버지! 삼촌! 나와 봐요, 호민이가 또 여자애 데려왔어요!”
   형이 소리를 치자 이윽고 옥탑 문을 통해 사람들이 우루루 밖을 내다보았다. 입장이 입장인지라 잠깐 쳐다보고 군말 없이 고개를 집어넣는 삼촌. 무척 불만스럽지만 어차피 엄마가 실컷 바가지를 긁을 테니 놔둔다는 눈빛의 아버지. 그리고 실컷 바가지를 긁는 엄마.
   “아이고 이것아. 죽어라고 알바 뛰어서 번 돈을 그렇게 이름도 모르는 계집애들 밥값으로 날리고 싶으냐? 그래, 니 돈이지 내 돈 아니니까 냅두라고? 에이 이것아. 애미가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어쩜 성격이 그리 바보 같니. 쯧쯧쯧쯧.”
   나는 다만 머쓱하게 웃으며 쌀포대를 옥탑 벽에 기대어 내려놓았다.
여자아이는 조심스레 옥상을 한번 둘러보고, 그것도 모자라 옥탑 안쪽으로 슬쩍 고개를 들이밀어 보고는 물었다.
   “오빤 여기서 혼자 살아요?”
   “응. 보증금 없이 월세 12만원. 죽이지? 내가 이 건물 주인의 약점을 좀 잡았거든.”
   나는 낄낄거리며 옥탑에서 냄비와 프라이팬을 꺼내 옥상 바닥에 놓인 LPG가스레인지 위에 올렸다. 그리고는 쪼그려 앉은 채 옥탑 옆에 붙은 조그마한 가건물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거 내가 만든 샤워장이다? 밤에 공사장에서 슬레이트 쌔벼와서 만들었는데, 온수도 나오고 안에서 잠글 수도 있어.”
   냄비에는 꽁치 캔 뜯어서 김치찌개를 끓이면 되겠고. 프라이팬은 뒀다가 있다가 삼겹살 가져와서 구워야지. 나는 호스에서 받은 물로 쌀을 씻어 전기밥솥에 쏟아 넣으며 여자아이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넌 씻고 와. 밥하려면 어차피 시간 걸리니까. 냄새도 나고 꼴이 그게 뭐냐?”
   여자아이의 표정은 점점 어처구니없게 변해갔다. 하기야, 내가 이렇게 말하면 대게의 여자아이들의 반응은 저랬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또 돌아가는 애는 거의 없더라. 나는 냉장고에서 삼겹살이 담긴 봉지를 꺼내와 흔들어보였다.
   “너 나오면 고기 구울 테니까 후딱 씻고 나와.”
   여자아이는 또 다시 주저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에는 샤워장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샤워장에서 쏴아 하는 물소리가 흘러나왔다. 벌써 몇 번이나 봐온 광경이지만, 여자애들은 왜 저리도 경계심이 없을까. 하기야 경계심이 있는 애였다면 애초에 여기까지 따라오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윤지는 나를 전깃줄로 꽁꽁 묶거나 수갑, 족쇄를 덕지덕지 채우기 전에는 절대 내 앞에서 샤워 같은 걸 절대로 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고기는 또 왜 굽니? 네가 한 달에 몇 푼이나 번다고, 저 샤워하는 물 값에 또 밥값에……. 에휴. 그렇다고 네가 끼고 살 것도 아니면서 왜 그러니 얘야.”
   “에이, 나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상관없잖아요 엄마. 저금도 계속 늘고 있으니까 너무 그러지 마세요.”
   엄마는 내 말에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팔짱을 끼시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셨다. 잠자코 지켜보시던 아버지도 한 말씀 하셨다.
   “그래, 벌써 2천만 원을 모았다고 했지? 혼자서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모은 건 대견스럽다만 아버지는 다른 게 걱정이다. 그렇게 모을 줄만 알고 자길 위해 하는 거라곤 가끔 이렇게 가출한 여자애를 데려오는 것뿐이잖니. 남자가 좀 놀면서 돈쓸 줄도 알아야지.”
   이쯤에서 형이 한번 이죽거릴 법도 한데, 가장 법석을 떨어야 정상인 그 형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옥탑 안에서 기타 줄을 퉁기는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마침 내가 왔을 때 한참 삘을 받았던 모양이다. 뭐, 그래서 다시 들어갔나 보지. 아버지의 말을 받은 것은 시종일관 입을 다물고 있던 삼촌이었다.
   “형님도 참 별걸 다 걱정하시네요. 전 매사에 열심이고 보기 좋은데요. 그리고 호민이가 뭘 놀 줄을 모른다고 그러십니까. 그래, 윤지랑 사귈 때만 해도, 어……음.”
   삼촌은 뒷말을 흐리며 내게 미안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오바하시기는. 걔랑 헤어진지도 벌써 2년이 다돼 갑니다만? 그러니까 그렇게 말조심하시는 게 저로선 되려 부담스럽네요.
   “네, 뭐. 저도 지금이 낫다고 생각해요.”
   나는 적당히 대답하고는 꽁치김치찌개의 간을 보았다.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하기야 자취를 오래하면 요리솜씨는 저절로 느는 법이니까. 나는 띄엄띄엄 말을 걸어오는 가족들에게 적당히 대꾸하며 옥탑에서 상을 꺼내오고 냉장고에서 김치와 밑반찬을 꺼내는 등 상을 차렸다.
그 무렵 여자아이가 샤워장에서 나왔다. 물기에 젖은 머리칼이 개인적으로 상당히 플러스 요인이 되었다. 거기에 잘 씻겨놓고 보니 피부도 제법 하얗잖아. 쌀자루를 메고 다니는데 지쳐서 닥치는 대로 데리고 온 건데, 이거 상당히 운이 좋았다는 느낌이다.
   “누가 왔었어요?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아니, 전화 좀 했어. 됐으니까 먹자. 자, 여기 앉아.”
   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서 한 번 보여주고는 돗자리를 편 상 앞으로 여자아이를 앉혔다. 원래는 방에서 밥을 먹지만 가끔 이렇게 방밖에 돗자리를 깔고 먹는 것도 괜찮다니까. 왠지 소풍 나온 기분이잖아? 내가 이렇게 말하자 여자아이는
   “전 그래도 집에서 먹는 게 좋아요……. 거지처럼 길거리에서 먹는 건 지긋지긋해……”
   랜다. 보아하니 초짜이거나 가출에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다. 하기야 일행도 없이 혼자 다니는 애들은 대개 그렇지.
   “넌 왜 집에서 나왔니? 어, 말하기 싫으면 말 안 해도 되는데 그냥 묵묵히 밥만 먹기는 뭐하잖아. 괜찮으면 얘기 좀 해봐.”
   여자아이의 부모는 여자아이가 열 살이 되던 해에 이혼했다고 한다. 단둘이서 살던 여자아이와 어머니는 사이좋은 모녀였지만 어머니에게 애인이 생긴 후로 사이가 틀어졌다. 여자아이의 말을 빌면 그 남자를 사귄 후 어머니가 변했으며, 그 남자는 어머니가 없을 때 자신에게 치근거리기까지 했던 징그러운 작자로, 그 사실을 어머니에게 말했지만 어머니는 도리어 남자의 편을 들며 자신에게 꼬리를 쳤다고 욕을 했다나. 여자아이는 그때부터 가끔씩 가출과 귀가를 되풀이하게 됐다고 한다.
   사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금 정신이 산만했는데, 돗자리 주위에 빙 둘러선 가족들이 여자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마다 한마디씩 했기 때문이다. 여자아이의 부모가 이혼을 한 대목에서 엄마는 여자아이의 아버지를 욕했고, (내)아버지는 여자아이의 어머니가 애인이 생긴 후로 변했다는 말에 큰 소리로 쯧쯧쯧 혀를 차셨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두 분이서 서로를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리시더니 갑자기 냉랭한 분위기를 띄시지 않는가. 대체 왜들 저러시는지. 거기에 여자아이가 어머니와 애인의 일로 하소연하거나 노숙하며 있었던 일을 얘기할 때는 형이 손에 쥔 기타를 꺼떡거리며 띄엄띄엄 키키킥 거리지를 않나.
   “그래, 엄마가 애인이 생긴 다음에 변했단 말이지……”
   내가 말끝을 흐리자 여자아이는 정말이라고, 너무 심했다고 자기 입장을 힘껏 강변했다.
   “내가 언제 아니랬어? 세상에는 자기 친딸을 건드리는 개 같은 부모도 있는데 너희 엄마 경우야 드물 일도 아니지. 그리고 나도 안다니까. 아무리 변치 않겠지 믿었던 사람이라도 변하는 건 어느 날 한순간이라는 거. 특히 여자들 마음은 뭐 그렇게 확 돌변하는지. 나도 학창시절 내리 6년을 사귀던 여친이 갑자기 헤어지자고 했을 때는 충격 먹고 한 달 넘게 밥이 목구멍으로 안 넘어갔다니까?”
   나는 두 손으로 목을 조르며 ‘웨엑’하는 제스처를 해보였고 여자아이는 작게 피식 웃었다. 그 다음부터는 대화가 한결 쉬웠다. 간간이 엉뚱한 잡담도 했지만 여자아이는 자기 어머니를, 나는 윤지를 주로 비난하며 따사로운 대화를 이어갔다. 결국 냉동실에 처박아뒀던 고기도 꺼내오고 비장의 소주도 한 병 까서 몇 잔이 돌아갔다. 술이 들어가 점점 커지는 서로의 목소리와 맞장구치는 소리 속에서 주위는 완전히 깜깜해져버렸다. 거리를 밝힌 불빛들은 멀리, 옥상의 경계선 밖에서 허상처럼 반짝였다. 혼자서 쓰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상가건물의 옥상에는 묵직한 어둠이 들어찼으며 나와 여자아이가 마주앉은 네모난 형광등 빛 밖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고요했다. 소주 몇 잔에 얼굴이 빨개진 여자아이는 자고 가라는 내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자니?”
   한 평 반 남짓한 옥탑에는 창문이 뚫려 있었지만 옥상 위에는 가로등 빛도, 다른 건물의 불빛도 거의 흘러들지 않는다.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 채, 여자아이의 숨소리는 내 옆자리의 어둠 속에서 길고 고르게 이어졌다. 나는 여자이이를 향해 돌아누웠다.
   이불 위를 조금씩 기어서 여자아이에게 다가가 어깨에 팔을 둘렀다. 술과 고기냄새가 조금 배었고 티셔츠도 빨지 못해서 찌든 냄새가 났지만 여자아이의 머리카락에서는 좋은 샴푸 냄새가 났다. 그것도 어차피 내가 쓰는 샴푸 냄새였지만. 나는 만족했다. 그래 그렇지, 어떤 사람이건 비누로 씻으면 비누 냄새가 배고, 샴푸를 쓰면 샴푸 냄새가 배는 법이다.
   싸구려 과일샴푸에 취해 내가 여자아이의 목덜미에 코를 비비는 동안 여자아이의 숨소리가 조금씩 가빠졌다.
   부스럭 소리와 함께 여자아이의 팔이 올라왔다. 나를 밀쳐낼 줄 알았던 그 팔은 자신이 입은 티셔츠의 옷깃을 잡고 목 위로 끌어올렸다. 여자아이는 상체를 조금 일으켜서 티셔츠를 벗더니 이불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잠시 꼼지락거리다가 다시 입고 있던 바지를 뭉쳐서 옥탑 한구석으로 툭 던졌다.
   나는 “센스 있네?”라든가 하는 말을 주억거리며 여자아이를 껴안았다. 보들보들한 피부에서 바디샴푸 냄새가 물씬 났다. 샴푸 냄새가 나는 목덜미. 가는 어깨. 갈비뼈가 만져지는 옆구리와 허리. 다리에 닿는 허벅지와 무릎과 종아리. 만지고. 쓰다듬고. 주무르고. 비볐다.
   여자아이가 격양되어 나를 꽉 끌어안을 즈음 나는 입을 열었다.
   “혼자서 너무 업되지 마. 나 더 이상 안 할 거니까.”
   여자아이의 얼굴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둠에 가로막혀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보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 왜 데려왔어요?”
   “그냥. 이러려고. 토실토실하고 폭신폭신한 걸 껴안고 자면 기분 좋잖아. 그런 날은 꿈도 좋은 꿈 꾸더라고.”
   별로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내놓은 내 대답에 여자아이는 입을 다물었다. 그 후로는 내가 목덜미를 비벼도, 브래지어 끈이 만져지는 등을 쓰다듬어도 여자아이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할 수 없이 변명의 말을 몇 마디 덧붙였다.
   “내 옥탑 봤잖아. 여기 엄청 살풍경하다고. 겨울엔 춥지, 여름엔 덥지, 알바하고 돌아오면 온통 사방이 콘크리트뿐이고 얘기할 사람도 하나 없어. 가끔 헛것이 보일 정도라니까. 너무 외로워서.”
   그 후로 나는 조금 더 여자아이를 만지다가 껴안고 잠이 들었다. 여자아이를 껴안고 잤으니 오랜만에 푹 자고 좋은 꿈을 꿨던 것 같지만 꿈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얌마, 일어나! 윤지가 아침밥 다 했다.”
   형이 머리를 발로 걷어차는 통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이 인간이 또 무슨 헛소리를, 하고 중얼거리며 졸린 눈을 비비자 옥탑 문이 열려있고 돗자리와 어제 고기를 구워먹었던 상이 펴져있었다. 그리고 그 옆 가스레인지 앞에 한 명의 여자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일어났어요?”
   여자아이가 쪼그려 앉은 채 내게 인사를 했지만 나는 시선을 바닥으로 깔았다.
   “또 인가……”
   “네?”
   “아니, 아냐. 냄새 보니까 김치볶음밥 했구나? 어제 먹고 남은 삼겹살 썼나보지?”
   나는 옥탑에서 걸어 나오며 쪼그려 앉은 여자아이의 머리를 푹 눌러 쓰다듬었다. 그대로 호스가로 가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 이를 닦았다. 여자아이가 그릇 두 개에 김치볶음밥을 덜어놓은 상 앞에 앉을 때까지도 나는 줄곧 여자아이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음. 어차피 내 밥에 내 김치에 내 삼겹살이지만. 요리해줘서 고마워. 아침에 일어났을 때 바로 밥이 되어있는 게 정말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잘 먹을게.”
   “네. 근데 오빠 왜 계속 고개 숙이고 있어요?”
   “아니, 그냥…….”
   슬쩍 고개를 들자 상 맞은편에서 윤지가 이상하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나는 깊게 한숨을 푹 내쉬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여자아이가 이런저런 얘기를 해서 거기에 대답을 했지만 내가 무슨 말을 들었고 무슨 대답을 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김치볶음밥이 입으로 들어갔는지 코로 들어갔는지도.
   여자아이가 내 그릇까지 호스가로 가져가서 설거지를 했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지만 호스 가에 쪼그려 앉아있는 뒷모습은 분명한 윤지였다. 설거지를 하는 윤지에게로 엄마가 다가갔다.
   “얘 윤지야. 그 여자애가 저 먹을 거랑 호민이 거만 만들고 우리 먹을 건 하나도 안 만들었지 뭐니. 하룻밤 먹여주고 재워줬는데 그렇게 뻔뻔할 수가 있다니.”
   윤지는 설거지를 하면서 엄마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이에요 정말. 어제도 호민이가 제 욕 할 때 그렇게 같이 욕을 하더니, 어쩜 가족들한테도 그런데요? 어머니는 저기 앉아계세요. 제가 아침밥 차려드릴게요. 아버지, 삼춘, 오빠도 다들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이것만 설거지하고 금방 상 차릴게요.”
   윤지가 활기차게 한 명씩 호명하자 가족들이 하나 둘 옥탑에서 걸어 나와 상 주위에 빙 둘러 앉았다. 나는 설거지를 하던 여자아이의 팔을 붙잡았다.
   “너 이제 가봐라.”
   나는 쪼그려 앉아있던 여자아이를 억지로 끌어 일으켜 옥상 출구까지 등을 떠밀었다.
   “오빠? 왜 그래요? 네?”
   “이씨! 가라면 가지 뭔 말이 많아!”
   여자아이를 내쫓고 옥상 문을 쾅 닫아버렸다. 계단 홀 외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오래 그렇게 있지는 않았다. 아침부터 아르바이트 스케줄이 빡빡하다. 옷을 챙겨 입고 옥상 계단을 내려왔다. 여자아이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르바이트들을 끝내고 돌아온 저녁시간. 엄마가 하도 윤지 타령을 해대는 탓에 나는 다시 공원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온 애를 왜 내쫓니. 네가 데리고 오는 애들은 예의도 모르는 애들뿐이잖니. 윤지 덕분에 간만에 밥 좀 먹는 줄 알았는데, 넌 우릴 굶겨죽일 작정이니.
   혼자 다니는 가출소녀라는 게 흔한 것은 아니다 보니 공원과 지하철 역 주변을 한참이나 돌아다닌 끝에 겨우 적당한 아이를 발견했다. 옷은 낡았지만 어제 데리고 왔던 여자아이처럼 씻지 못해서 꼬질꼬질하지는 않았다. 갈 곳 없는 초짜가 아니라 거점을 구해놓고 일하기 싫어서 그냥 거리를 쏘다니는 닳고 닳은 가출소녀 같았다. 내가 그 아이를 발견했을 때도 그 아이는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잡담을 하고 있었다.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던 그 아이를 나는 술 얘기로 간신히 꼬셔서 집으로 데리고 왔다. 소주를 두병 까서 먹이고, 어제의 그 여자아이처럼 캄캄한 옥탑방의 옆자리에 눕혀서 재웠다.
   “뭐야. 진짜 안 할 거예요?”
   굳이 욕할 거리도 못 되지만, 그 아이는 처음부터 한번 하는 걸 목적으로 따라왔던 모양이다. 그 후로도 그 아이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한참동안 깜깜한 옥탑방 안을 굴러다녔다. 나이도 겨우 열대여섯 남짓한 아이가. 세상 참 말세다.
   내가 잠자코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자는 줄 알았는지 그 아이는 묘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옷자락이 스치는 사각소리. 가볍게 조깅이라도 하는 것처럼 거칠어진 숨소리. 소리를 죽였지만 나지막이 들려오는 콧소리. 응……, 으음…… 흑.
   아주 가지가지 한다, 씨팔.
   집어치우고 꺼지라고 버럭 소리를 지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차라리 잘됐다. 저런 골빈 애라면 당분간 윤지로 보일 일은 없을 테니까. 물론 오래 데리고 있을 생각도 없지만.
   사각거리는 소리는 어느 순간 멈췄다. 그 아이는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그러다가 작게, 하지만 워낙 좁은 옥탑방이고 그것도 바로 옆자리에 누워있었기에 똑똑히 들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병신새끼.”
   그 아이가 잠들고 한참이 지나서도 나는 잠들 수 없었다. 잠이 올 리가 있나. 다 뒤집어 엎어버리고 싶은 기분인데!
   나는 옆자리에 누운 그 아이를 거칠게 쏘아보았다. 사람 기분을 이렇게 뒤집어놓고 계집애는 기분 좋게 쿨쿨 자고 있었다. 입속으로 온갖 욕들을 중얼거리다가 문득,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밤중에 불을 끈 내방에서 사람 얼굴이 이렇게 잘 보일 리가 없는데?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 얼굴은 절반은 쿨쿨 자는 계집애의 얼굴이었고 절반은 눈을 말똥말똥하게 뜬 윤지의 얼굴이었다. 아니, 정정. 처음에는 이마와 코, 입술을 수직으로 갈라 오른쪽 반이 윤지의 얼굴이었다가, 코 아래 인중에서 입술과 턱 부분이 윤지의 얼굴이었다가, 얼굴의 왼쪽 절반이 윤지의 얼굴이었다가, 코와 눈과 이마가 윤지의 얼굴이 되었다. 계집애의 얼굴에 투영된 ‘윤지의 얼굴인 영역’은 시계방향으로 빙빙 돌고 있었다. 멈추지 않고, 느릿한 속도로 계속해서 빙빙 돌았다. 잠깐 동안 이런 영상을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윤지의 모습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쌍한 호민이.”
   윤지의 입술이 말했다. 계속해서 윤지인 영역은 얼굴 중심에서 90도만큼 이동하여 왼쪽 눈으로, 다시 90도 회전하여 양쪽 눈으로 나를 동정하는 시선을 보냈다. 윤지인 영역은 오른쪽 절반을 거쳐 입과 턱 부분으로 넘어오자 잠시 멈췄다. 윤지가 다시 말했다.
   “넌 시달리고 있는 게 아니야. 네 스스로 괴롭히고 있는 거지. 잊지 못한 게 아니라 잊으려 하지도 않고 있잖아. 난 이미 널 완전히 잊었는데.”
   나는 대답하는 대신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방문을 열고,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옥상으로 나왔다.
   주위에 고층 건물도 없는 상가의 옥상은 바로 앞도 잘 분간할 수 없는 새까만 덩어리 같았다. 앞으로 걸어가면 나 자신도 모르는 새에 옥상 끄트머리까지 가서,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하지 않을까 하는 망상이 들 정도로. 물론 정말로 그렇게 캄캄한 암흑은 아니었다. 아무리 후미진 곳이라도 사람 사는 도시이고 불빛은 멀리서나마 비추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옥탑 외벽에 등을 기댔다. 방에서 나왔을 때부터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으로 나는 오랜만에 친구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신사에서 무료 배포하는 클래식 대기음이 몇 바퀴나 돈 후에야 녀석은 전화를 받았다.
   [뭐냐 새끼야.]
   근 한 달만의 통화인데 인사하고는. 뭐, 녀석 답다면 녀석 답지만 말이다.
   “아니, 뭐. 그냥. 너 지금도 와우 하냐?”
   [당연하지 씩새야. 넌 아직도 옥탑에 처박혀 있냐? 너도 걍 와우나 다시 하라니까.]
   “좆까. 그거 중독성 있어서 이번에 하면 노가다 하다 병원 갈걸. 그리고 돈 벌어야지.”
   [무식한 새끼. ……너 왜 집에 안 들어가냐? 너네 집 그렇게 못살지도 않잖아. 너 그러다 진짜 정신병원 간다?]
   “우리 집은 고시 병 걸린 삼촌 하나 먹여 살리는데도 벅차네. 삼촌이 고시 패스하면 그때 생각해보지.”
   녀석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너 아직도 계집애들 데리고 오냐? 그리고 바로 내쫓고? 윤지 잊기 싫어서 거기 들어갔다메. 근데 넌 대체 윤지를 잊고 싶은 거야, 잊기 싫은 거야?]
   “당연히 잊기 싫은 거지 새꺄. 계집애들이야 기분전환이고. 상관없잖아? 이런 응어리를 평생 마음에 묻어두고 그걸 삶의 원동력으로 해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는 거라고.”
   녀석은 또 다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야…… 그럼 존내 비참하잖아.]
   “뻑큐다! 씩새야.”
   수화기를 통해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좆까지 말고 담에 술이나 쏴라. 부자 친구새끼를 술 안 얻어먹고 어따 써먹냐.”
   [웃기시네효. 나도 돈 없어.]
   녀석과는 몇 마디 더 얘기를 나누다가 억지로 녀석이 술을 사는 것으로 얘기를 해놓고 전화를 끊었다. 옥탑 안에 있었을 때부터 눈은 어둠에 익어있었을 텐데, 어쩐지 고개를 들어 바라본 옥상 위의 전경은 조금은 밝아진 것 같았다. 반대로 옥탑 외벽에 기대앉은 팔과 다리는 점점 무거워져, 이대로 아침까지 일어나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의 응어리를 삶의 원동력으로 삼는다. 내가 한 말이지만 참 그럴싸한 소리를 한 것 같다. 6년을 사귀고 단칼에 차여, 그 후 2년 만에 일에 미쳐 2천만 원을 모았다. 이 정도면 썩 나쁘지 않은 계산 아닌가? 덕분에 정말로 반쯤은 미쳤는지도 모른다는 것은 그저 스스로 부리는 엄살일 뿐이고.
   나는 바닥에 앉은 채, 지금이라도 불쑥 가족들이나 윤지가 걸어 나올 것 같은 새카만 옥탑방의 입구를 돌아보았다. 방안에서 쿨쿨 자는 계집애의 얼굴에는 아직도 윤지의 얼굴이 떠있을까? 아니겠지.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조금 지쳤을 뿐이다. 그래서 바보 같은 짓도 많이 하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아무 것도 잘못하지는 않았다. 분명, 아직 아무 것도 빗나가지 않았다.
   지금 내게 걱정되는 것이 있다면 이대로 옥탑 밖에서 자서 아침이 됐을 때 방안의 계집애가 나를 얼마나 이상한 녀석이라고 생각할까…… 하는 정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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