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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무기를 부수는 자

2006.12.30 13:1612.30

43호 독자 우수 단편은 inkholic님의 '채널(The Channel)" 과 화룡님의 "무기를 부수는 자" 두 편입니다. 단편 평은 아래 "채널(The Channel)" 상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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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right a 2005 by박 찬일(Chaneel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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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하다 보면은 별 이상한 일을 다 보기 마련이지만, H강을 끼고 있는 융성한 상업도시 S에서 겪었던 일 만큼 이상한 일은 없었다. 비록 시 관계자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머릿글자를 사용해 표기하지만, 나의 좁은 머리로 생각해 낸 이니셜인 만큼 누구나 금새 그 진짜 이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부탁컨데 현명한 독자들이여, 이 글의 존재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길 바란다. 내가 누군지 알아내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은 또 왜일까.

세월의 흐름은 누구도 막을 수 없고 세월이 가져오는 변화는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던가. 그러나 몇년 전 보았던 S 시의 번화한 모습을 기억하는 나에게 전쟁터와도 같이 변한 S시의 모습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내가 곳곳을 떠도는 유랑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늘상 새로운 것을 접하기 때문에 변화에 익숙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주길 바란다. 나는 유랑자이기 때문에 변화에 민감하다. 내가 한번 본 것은 무엇이든 내가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내 머리속에 남겨진다. 내가 지나쳐간 모든 장소에 대한 기억은 몇년이고 그대로 기억된다. 따라서 변화는 나에게 무척 낯선 것이다. 나는 영원히 현재만을 배회하기 때문에, 새롭게 던져진 현재는 나에게 혼돈을 가져온다. 항상 미래를 기다리며 변화와 접해 사는 당신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S시의 변화가 누구도 기대하기 어렵던 방식의 변화라는 것이었다. 나 뿐만이 아니라 당신들도 S 시의 변화에 대해 들으면 좀 놀랄 것이다. H 강을 끼고 중개무역도시로 출발한 S시의 놀랄만한 발전은 곧 S 시를 부유한 상업도시로 만들었고, S시는 곧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근처 지역의 경제 뿐만 아니라 정치에까지도 간섭을 하는 중심도시로 발전했다.

이곳저곳을 떠돌던 나에게도 S시의 소식은 곧잘 들려오곤 했다. 워낙에 강성한 도시가 된 S시는 어딜 가도 한번쯤 언급되곤 했으니까.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꿈과 야망의 도시, 낭만과 황금이 넘쳐흐르는 동경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그런 S시였다.

상업도시의 변화란 눈부시게 빠르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어느정도 대비를 하긴 했다. 웬만한 것을 보아도 놀라지 않기로, 하늘 아래 가장 크다는 N시 만큼이나 S시가 커졌어도 놀라지 않기로 다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친 여행자를 맞은 것은 굳게 닫힌 성문이었다. 아니, 굳게 닫힌 성문이라니? 난 잠시 내가 S시가 아닌 다른 도시를 찾아온 줄 알았다. 대낮에 상업도시가 문을 걸어잠그고 있으면 그것은 상업도시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제는 제 아무리 대도시가 된 S시라지만 그 근본은 상업도시이다. 아니, 상업을 포기하더라도 대낮에 성문을 걸어잠그고 있으면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나는 성문을 두들기며 소리쳤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한참 있다가 머리 위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때까지 전혀 신경쓰고 있지 않았지만, 망루 위에는 사람이 있었다. 창과 칼과 방패를 들고 온몸을 갑옷으로 감싼 병사였다. 병사는 나에게 소리질렀다.

“물러가시오! 성문을 열지 않소.”
“여보시오, 병사양반. 지치고 힘든 여행자를 이렇게 내쫒는 법이 어디있단 말이오. 반나절 길을 걸어왔는데. 게다가 이 백주대낮에 성문을 걸어잠그고 있는 법은 또 어디있소. 좀 열어주시오.”

한참 나를 물끄러미 내려보고 있던 병사는,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더니 다시 소리를 질렀다.

“아 글쎄 안된다니까 그러네! 거 딱하게 됬소만 다른 데로 가보시오. 성문을 열 수 없소.”

곳곳을 떠돌며 몇가지 편법을 몸에 익힌 나였다. 물론 그것이 나쁜 것이고 법에 어긋남을 알지만, 방랑의 생활은 때론 어둠의 기술들을 필요로 하게 했다. 천지에 맹세코 남에게 피해를 준 일은 없다. 때로 나 자신을 곤궁에 빠트리게 한 적은 있지만. 그러나 내가 잔꾀를 부리려다 나 자신에게 불운을 가져온 그 일은, 나의 모든 모험이라고 불릴 수 있는 여행의 속이야기들을 기술한 다른 책에서 읽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S시에서의 이 특별하고 기괴한 이야기만은 다른 이야기들과 따로 다뤄져야 하기 때문에 나의 잡다한 여행 이야기는 과감하게 넘어가기로 하자.

아무튼 편법을 익혔다지만 대부분의 편법이 나의 얄팍한 전낭에서 꺼내진 돈 몇푼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이기 때문에, 나는 아예 편법을 시도해 볼 수도 없었다. 병사는 망루에서 꼼짝않고 내가 물러나기만을 종용했기에, 나는 결국 제풀에 지쳐 발걸음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나의 충직한 친구인 D(이 역시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 싫어하는 그 때문에 사용하는 머릿글자이다)는 도시에서 멀지 않은 곳의 작은 언덕에서 야영을 하자고 이야기했다. 당시 그와 나는 서로 알고 지낸지 두 달이 조금 넘은 사이였는데, 나보다도 더 오래 세상을 떠돈 그는 오래된 방랑자 답게 차갑지 않은 현명함과 뜨겁지 않은 열정을 겸비한 진짜 방랑자였다. 그의 조언은 대체로 옳았으며 그때그때 최선의 판단이곤 했다. S 시에서 가깝기 때문에 치안이 그런대로 정비되어 있고, 주변이 들판이기 때문에 혹시라도 다가올 위협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으며, 무엇보다 S시가 다시 개방했을 때 빨리 들어갈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가며 그는 나를 설득했다. 언제나 그의 판단을 믿곤 하던 나는 그 순간만큼은 왠지 내키지 않았으나 그에 대한 신뢰는 깊었다. 아, 그렇다고 내가 이제와 그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오래된 방랑자마저도 알아차릴 수 없는 어떤 기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그의 오판을 탓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의 판단은 옳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그런 판단을 내렸기 때문에 나는 재빨리 S시를 떠나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았고, 덕분에 내가 어떤 여행에서도 만날 수 없었던 진귀한 경험을 할 수 있었으니까.

아무튼 그와 나는 부산하게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아니, 사실 부산을 떤 것은 나뿐이었다. 가끔 사람들은 나와 같이 떠돌아 다니는 이는 아무데서나 쉽사리 잘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인데, 사실 그렇지도 않다. 예를 들어 나 같은 경우는 추운 데서는 자지 못한다. 그게 추운 데서 잠들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여행지식 때문에 추운 데서 잠들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그저 나의 성격이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추운 데서는 절대로 자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땅을 약간, 깊어야 손가락 마디 하나 들어갈 정도로 땅을 파고 그 안에 두꺼운 담요를 깔고 그 위에 다시 더더욱 두꺼운 담요를 덮어야만 잠 들 수 있었다. 덧붙여 그 곁에 불을 피웠다.

더운 것을 싫어하는 D는 불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망토만으로 몸을 감싸고 잠들곤 했다. 한가지 그가 나보다 유리한 것이 있다면 짐승들의 습격이 있을 때 훨씬 빠르게 행동에 나설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나는 결코 추운 것을 견딜 수 없고, 그래서 그의 배낭에는 없는 두꺼운 담요를 두장이나 짊어지고 다녀야 했다. 게다가 이렇게 부산을 떨며 잠자리 준비를 마치고 나서야 그와 나는 한가롭게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다.

베이컨을 굽는 냄새는 짐승을 끌어모으기 좋아 여행자들은 베이컨을 굽기보다는 삶았지만 나와 D는 걱정없이 베이컨을 구웠다. 적어도 S시가 지척인 이곳에 짐승이 꼬일 리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꼬치에 베이컨과 치즈를 꿰어 굽고 동시에 차를 끓였다. 여느 날의 야영보다 호사스런 저녁식사였지만 나도, 그리고 D도 모두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멋진 식당이 가득한 S시를 코앞에 두고도 못 들어가고 있자니 화가 쌓일 수 밖에 없었다.

“이거 맛있는 냄새가 나는걸. 좀 끼어도 되겠소?”

베이컨이 거의 다 익을 무렵 내 등 뒤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나와 마주앉아 내 등뒤로 다가오는 그를 알아차렸을 D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면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시오.”

나와 D가 별달리 적대하는 뜻을 보이지 않자 그는 웃으며 자신의 나귀를 한켠에 세우고 땅에 잽싸게 말뚝을 박았다. 나귀를 말뚝에 매어놓고 짐을 내려놓는 폼이 한두해 굴러먹은 폼이 아닌 듯한 행상인이었다. 나이는 마흔 쯤 되었을까 하는 그 행상인은 자신의 짐에서 사과 몇 알을 꺼내었다. 며칠째 벌판만을 여행한 나와 D에게 과일은 얼마든지 베이컨과 맞바꿀만한 것이었다.

“사과라. 이것 참 반가운데.”

D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사과를 꼬치에 꿰어 불 위에 살짝 얹었다. 날로 먹는 사과도 맛있지만 구워먹는 사과도 별미중의 별미였다. 사과가 타는 향긋한 냄새는 절로 기분이 풀어지게 만들었다.

“무엇이 당신을 여정의 길에 오르게 했는지, 그거나 좀 들어봅시다.”

짐을 다 정돈하고 나와 D의 사이에 끼어 앉은 상인은 엉거주춤하게 D를 돌아보았다. 상인도 상당히 여행을 오래 한 듯 보였지만 진짜 정통 방랑자인 D의 어투는 나도 재밌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그는 은유적인 듯 하면서도 직설적이었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다가도 곧장 화제의 중심을 찌르기도 했다. 이전의 화제와 전혀 이어지지 않는 화제를 갑자기 꺼낼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달변이기도 했기에, 그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상인이 뭐 특별한 이유가 있겠소. 돈 벌러 왔지. 그보다 당신들이 더 궁금하군. 이 위험한 동네에는 무슨 일이오?”
“바로 그 점이 나로 하여금 당신에게 괜한 질문을 하게 만든 이유요.”

상인은 이런 대화에는 별로 흥미가 없는 것 같아 보였지만, 정보가 부족한 나와 D에게 호의를 베풀 만한 아량은 갖추고 있었다.

“지금 S시는 큰 위기에 처해서 계엄령을 선포했소. 때문에 수로는 물론 육로도 끊겼지. 그러나 S시가 아무리 큰 도시라 하더라도 그 안의 인구가 얼마요. 게다가 농경도시도 아니니 보급물자 없이는 버틸 수 없을 터, 매일 새벽 동틀 즈음에만 잠시간 상인들의 출입을 허용하오. 사실 그 시간을 이용한 피난 행렬이 더 많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나와 같은 행상인이 언제 그런 큰 도시에서 돈을 벌어 보겠소. 지금처럼 큰 상인들의 왕래가 끊겼을 때 한몫 잡아 보자는 거지.”

확실히, 나귀에는 행상인 치고는 좀 과하다 싶을 정도의 짐이 실려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소금과 같은 비싼 물건까지 갖춘 것이 준비를 단단히 한 모양이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D가 질문했다.

“전쟁이라도 난게요? 만약 그렇다면 나와 같은 떠돌이는 당장 도망쳐야 겠지만, 전쟁이 났다는 소식은 어디에서도 들은 적이 없소. 전쟁이 났는데도 내가 듣지 못한 거라면, 귀가 어두워진 떠돌이의 앞날은 험난할 뿐이라오. 그러니 말해주시오. 정확히 뭐가 문제요?”
“차라리 전쟁이라면 나을지도 모르지. S시의 병력과 자금력이라면 웬만한 적은 무서울 수가 없소. 게다가 S시가 함락되도록 놓아 둘 만큼 호락호락한 이 나라도 아니고.”

나는 잠시, 전쟁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S시를 계엄령에 들게 할 만한 요소를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똑같은 생각을 한 모양인지,나와 D는 동시에 상인에게 반문했다.

“역병이오?”

상인은 아니라고 대답해서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해 주었지만, 동시에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그러나 상인은 쉽게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았고, D도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장사하기 전에 이런 얘기를 하면 재수가 없는데 하고 상인은 투덜거렸지만 D는 지치지도 않고 그를 괴롭혔다. 결국 상인은, 베이컨을 다 먹고 난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괴물이오.”
“괴물? 지금 괴물이라고 하셨소?”

약간 못 미더워하는 D의 말투에 상인은 약간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는 퉁명스럽게 고개를 끄덕였고, 곧 그의 표정은 당황으로 바뀌었다. D는 진짜 노련한 방랑자였으며, 독특하면서도 적응할만한 화법의 소유자였고, 나중에 나올 이야기지만 뛰어난 전사이며, 동시에 열정적인 이야기 수집가이기도 했다.

“괴물이라니? 어떤 괴물이오? 설마 괴물 떼는 아니겠지? 어떻게 생겼소? 직접 봤소? 아니면 이야기를 들었소? S시가 계엄령을 선포할 정도면 굉장한 놈이 틀림없겠군. 그렇지 않소?”

소나기처럼 퍼붓는 질문의 공세에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나조차도 질릴 정도였으니, 그 당황한 상인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짐작이 간다.

“하나씩 질문하시오, 하나씩. 그러니까 일단 괴물이란 건 나도 본 적은 없소. 풍문으로만 들은 거지. 풍문이기 때문에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도 확실하지 않소.”

그리고 상인은 괴물에 대해 아는 바를 하나씩 풀어나갔다. 괴물은 강력하며, S시로부터 이틀 정도 거리에 있는 산적떼를 박살내며 등장했다고 한다. 기습적으로 상인들을 약탈하고 산속으로 숨어들어 S시도 골치를 썩고 있던 그 산적들의 기지가 초토화 된 소식은, 가까스로 살아남은 세 명의 탈주자 ? 산적들에게 포로로 잡혀있던 여행객들 ? 에 의해 S시로 알려졌다.

처음에는 S시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괴물 이야기를 믿었더라도 별로 심각하게 여기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있고 며칠 뒤부터 북쪽도로에서부터 들어오는 수송물량이 급감하더니 곧 북쪽도로에서 나타난 괴물 때문에 수송이 끊길 거라는 연락이 S시에 와 닿았다.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S시는 다급히 정찰조를 보냈고 12명의 정찰조가 손도 못쓰고 전멸한 현장을 확인한 후에야 긴급히 계엄령을 발동시켰다는 것이다.

“이상하군. 괴물이라면 토벌대를 조직할 일이지 어째서 계엄령을 내린 거요?”
“그런 것까지는 잘 모르오. 아무튼 난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할 테니 먼저 좀 자겠소.”

D는 상인을 붙잡고 늘어지는 대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D가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D는 자신만의 생각에서 빠져나올 줄을 몰랐다. 심심해진 나는 괜히 이리저리 뒤척거리다 오래지 않아 잠들고 말았다. 별로 불침번이 필요한 지역도 아니었거니와, D가 깨어있다면 안심할 수 있었다.

그날 나는 아주 푹 잤고, 다음날 아침에 D가 흔들어 깨웠을 때는 온몸에 기운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D는 푹 잔 모양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전혀 고단한 기색이 없어 보였다. 거기에 상인까지 합친 우리 일행은 해가 막 뜨고 있는 새벽 무렵에 S시에 들어갔고, 전날에 나를 막았던 바로 그 문지기의 손으로 검문을 받은 뒤 성문 안으로 들여보내졌다.

상인과는 성문에서 헤어졌다. 나와 D같은 한가한 방랑자와 그는 근본적으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S시를 방문했기 때문에 행로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바삐 걸음을 옮겨 멀어져간 그와는 달리 나와 D는 조금은 느긋한 발걸음으로 S시를 둘러보기로 했다. 아무리 계엄령이 내려졌더라도 S시는 S시였다. 건물들은 크고 화려했으며 곳곳에 설치된 분수대들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완전히 무장한 병사들이 곳곳에 보였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S시는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쨌든 S시는 좀더 거대해졌고, 좀더 화려해 져 있었다. 나도 S시를 오랫만에 방문하는 것이었지만, D는 S시를 언제 방문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랫만에 S시를 방문한 것이었다. 나와 D는 어느새 새로 생겨져 있는 건물이며, 좀더 복잡해진 길과 단장된 광장의 모습들에 감탄하고 있었다. 나는 지난번에 들렸을 때 한번 가본 적이 있는 여관으로 가려고 했으나 놀라울 정도로 바뀌어져 있는 도시 한복판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나만 믿고 있던 D가 함께 길을 잃게 된 것은 자연스런 이치였다. 그는 한밤중에 산속에 던져놓아도 아무렇지도 않아 할 만큼 훌륭한 길잡이였지만 이런 도시에선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길찾기를 포기한 나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묻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저쪽에서 한 병사가 걸어오고 있었다.

“저기, 길 좀 묻겠습니다.”

커다란 투구 때문에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었을까, 병사는 그냥 나를 지나쳐 가 버렸다. 나는 약간 무안해졌지만 어쨌든 다시 다른 사람을 찾았다. 골목 어귀에서 장바구니를 들고 오고 있는 한 아주머니를 발견한 나는 그 앞으로 달려갔다.

“저기…”
“미안하지만 바빠요.”

거기서 알아차렸어야 했지만, 나는 순진하게도 앞서의 두 사람이 몇 안되는 불친절한 S시민의 일부인 줄로만 알았다. 불친절한 S시민이 친절한 S시민보다도 더 많다는 것을 진즉에 알아차렸다면 1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서 무안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11번째 질문하고 또 다시 면박에 가까운 무시를 받고 나서야 나는 길을 묻는 것조차 포기하고 말았다. 결국 나와 D는 그 근방을 헤메이다 아무 여관이나 들어가야 했다.

그 여관에 일단 여장을 풀고 여행물자를 보급하기로 한 나와 D는 아침겸 점심 식사를 하면서 또다시 놀라고 말았다. 이전 S시에 들렸을 때 묵었던 여관 겸 주점의 맛있는 식사를 기억하고 있는 나로써는 나와 D가 야영하면서 먹는 것보다도 맛이 없는 식사에 화가 날 지경이었다. 게다가 그 가격을 들었을 때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S시가 번창하는 도시고 물가가 오르고 있을 테지만, 성의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식사에 그만큼의 돈을 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도시가 계엄령 하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애써 분을 누른 나는 물자보급을 위해 거리로 나왔다. 길을 알려주는 사람 없이 몇시간이나 헤메어 건량을 파는 상점을 찾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비싼 가격에 건포, 건과를 구입할 수 있었고 이가 빠져버린 단검을 대체하는 데에는 완전히 바가지를 뒤집어 썼다. 여관에 돌아와 보니 D도 우리 둘의 옷을 세탁하고 여벌의 조미료를 구하는 데 무척이나 애를 먹은 모양이었다. 우리는 S시의 명물이라던가 둘러볼 만한 유적 등은 다 포기하고 최소한의 여행물자만을 구입해 최대한 빨리 다른 곳으로 떠나기로 합의를 보았다.

“…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어.”

풀러놓은지 얼마 되지도 않은 짐을 다시 꾸리고 있던 나는 잠시 그를 돌아보았다. D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어떤 소문이?”
“여러가지로 복잡한 소문들. 이 정도의 괴물이면 지원을 요청 할 만한데도 S시는 중앙정부에 서신을 보내지 않았다더군. 그리고 몇몇 지주가 도피하려다가 계엄령이 내려지는 바람에 꼼짝없이 갇혀 있다던가…”
“흉흉한 소문들 뿐이군.”

도시는 차가워지고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건 계엄령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것은 좀 더 근원적인 문제였다. 나는 나름대로 많은 경험을 쌓았다고 자부하는 방랑자이며, 이런 류의 차가움을 이미 다른 도시에서도 겪어본 적이 있었다. 다만 다른 곳에서는 그 위에 덧씌워져 그 날카로움을 완화해 줄 여유라는 게 있었다. S시는 계엄령 때문에 여유가 사라져 냉정한 날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고, 외지인에게 그것은 가혹한 배척이었다.

나와 D가 최대한 빨리 S시를 떠나기로 합의를 보는 데는 성공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 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마찰을 빚었다. 나는 괴물이 나타나는 북로를 피해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싶어했고, D는 오히려 북로로 가고 싶어했다. 나는 처음으로 그의 길 선택에 의문을 표했다. 신기한 이야기를 수집하는 D의 취미는 익히 알고 있었고 나도 그런 이야기에 흥미를 가졌지만 그렇다고 도시에 계엄령이 내려지게 할 만큼 무서운 괴물이 있는 쪽으로 뛰어들어 목숨을 걸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D의 화술은 결국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들고 말았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나는 지금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게 살아남았고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때 D가 나를 꾀어 북로로 가게 한 점에 있어서는 약간의 앙금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찌되었건 나와 D는 북로로 방향을 잡았다. 괴물이 나타난다는 북쪽 도로를 따라 쭉 가다보면 S시만큼 크지는 않지만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마을이 꽤 여러개 있었다. 더 가다보면 T산이 나오고, 바로 그 T산에 있는 산간마을들이 우리의 목적지였다. 나는 걱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S시가 계엄령을 내리긴 했지만, 괴물이 S시쪽으로 간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만약에 나와 D가 북쪽에 있는 마을들로 갔을 때 오히려 그 괴물이 북쪽 마을들에 있으면? D는 괴물이 북쪽도로에만 있지도 않을 것이며 서쪽으로 갔을지 동쪽으로 갔을지 알 수 도 없다고 말했다. 어느 정도는 옳은 말이었지만, 만약이라는게 있었다.

불안한 내 마음과는 달리 D는 마치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별로 편하지 않은 침대에서 한잠 자고 난 우리는 새벽에 S시를 떠났다. 다행스럽게도 그날 하루 종일 우리는 아무런 것과도 마주치지 않았다. 숲을 관통하고 있는 길이니 위험한 야생동물들과 마주칠 만도 한데 토끼 한 마리도 만날  수가 없었다. 어떤 점에선 오싹하기도 했다. 그 괴물의 출현에 짐승들도 겁을 먹었다는 징표이기도 했으니까. 다르게 생각하자면 그 괴물만 아니라면 우리의 여정을 방해할 만한 어떤 짐승도 없다는 뜻도 되었다. 하긴 원래는 통행이 빈번한 도로였으니 아주 위험한 맹수는 없을 터였다.

하루 종일 걷고 또 걸어 마침내 막  해가 저물 무렵에 우리는 어떤 자그마한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은 아담했다. 그리고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오싹한 기분이 들 정도로. 마을을 둘러싼 울타리는 잠겨 있지 않았고 나와 D는 방해 없이 마을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잠시 사람을 찾아 돌아다녀 보았지만 마을 안에는 사람은 커녕 쥐 한마리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았다.

“다들 피난을 떠난 모양이야. 가재도구도 중요한 것은 다 가지고 갔군.”
“괴물이 무섭긴 무서운가 본데. 아무래도 겁나는 걸.”

사람들이 없다고 다른 마을을 찾아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통행량이 빈번한 도로라지만 밤의 숲길은, 문제의 그 괴물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위험했다. 나는 적당한 빈 집에 들어가 화덕에 불을 피웠다. 솥은 피난갈때 가져 갔는지 없었지만 어쨌든 완전한 노숙보다는 훨씬 낳았다. 짚으로 남은 침대는 가져갈 수 없었는지 방에 그대로 놓여 있었기에, 나와 D는 식사를 마치자 마자 침대에 누워 편안히 잘 수 있었다. 적어도, 자정 즈음의 울음소리만 아니었으면.

깊이 잔다고 하더라도 방랑자는 잠귀가 밝은 편이다. 게다가 고요한 밤을 뒤흔든 울음소리는 잠귀가 밝지 않은 이라도 누구나 놀라 깰 만큼 컸다.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굴려 일어났고 바로 옆방에서 자고 있던 D도 번개처럼 뛰쳐나왔다. 울음소리는 한번으로 끝난게 아니었다. 다시 찾아온 쥐 죽은 듯한 고요 속에서 내가 뭔가를 잘못 들었나 하고 의문을 가질 때 쯤 무시무시한 울음소리는 다시 한번 나와  D의 고막을 때렸다.

나는 아직까지 그와 비슷한 어떤 다른 소리도 들어본 경험이 없었기에 표현에 곤란을 겪고 있다. 굳이 비교하자면 호랑이와 같은 낮고 굵은 목소리의 소유자가 늑대와 같이 긴 울음을 토해내는 것과 같다고 할까? 그러나 그 어떤 무서운 짐승을 데려온다 하더라도 내가 들은 그 울음소리와 같은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무시무시했고, 또 처절했다. 지옥의 시뻘건 구덩이에서 기어올라온 악마만이 그런 소리를 내지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D를 돌아보았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큰 놈. 아주 큰 놈이다. 아마도 사나운 놈일 테고.”

숨막힐 것 같은 공포가 나를 짓눌렀지만, 나는 노련한 여행자들의 대응책을 알고 있었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재빠르게 짐을 둘러맨 나는 벽에 등을 기댔다. 그 사이 D는 문 밖으로 나가 땅에 귀를 대고 있었다. 내가 나가자, 그가 손짓했다. 도로 집 안으로 들어가라는 손짓이었다. 곧 D가 뒤따라 들어오더니 문을 닫고 빗장을 걸었다.

“이 쪽으로 오고 있는 것 같군.”
“… 뭐? 그럼 큰일 아냐? 나가서 도망쳐야지!”
“어디로? 다시 S시로? 어려울걸. 왜냐면 놈은 지금 굉장히 가까운 데에 와 있고, 우리가 지금 마을 밖으로 나가면 놈과 마주칠거야. 어떤 괴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숲의 어둠이 우리를 숨겨 줄 수 있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어. 얌전히 이 안에 있는 게 상책이지. 가능하다면 놈이 그냥 S시 쪽으로 가줬으면 좋겠는데.”

그 생각은 나도 했다. S시는 강력한 방비를 갖췄고, 적어도 내가 본 바로는 전쟁이 벌어져도 충분히 적을 막을 만큼 견고한 성벽을 갖고 있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병사들의 숫자도 많았다. 어떤 괴물일지는 몰랐지만 S시가 괴물에게 당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내가 그때 상상하고 있던 괴물은 사나운 야수 정도였으니까.

어느새 나도 괴물의 발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괴물이 가깝게 다가왔다. 거대한 것이 대지를 울리는 소리였다. 쿵, 쿵, 하고. 그리고 거기에 섞여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키기긱, 찌링, 끼익… 악마의 조소와도 같은, 혹은 악마의 신음과도 같은 알 수 없는 소리였다. 진동이 점차로 커져 가자, D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놈은 S시로 가는 게 아니라 나와 D가 숨어있는 마을로 오고 있었다. D도 이 정도로 큰 놈일 줄은 예상을 못했는지, 얼굴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D는 나를 돌아보고 있지 않았지만 내가 그에게 원망의 눈길을 보내고 있음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짐승이나 괴물들은 후각이 아주 좋다고 알려져 있었다. 나는 괴물이 나와 D의 냄새를 맡고 우리를 죽이기 위해 이 마을로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살려고 발악은 해 봐야지 하는 생각에 나는 등에 둘러멘 짐을 벗어서 내려놓고 칼을 들었다. 그걸로 괴물과 싸워 이길 생각은 없었다. 나는 늑대 같은 것은 커녕 들개 한 마리도 싸워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운이 따라 준다면 괴물이 덮쳤을 때 어떻게든 내 한 목숨 빼낼 수는 있을 지도 몰랐다.

내가 돈주머니도 버리며 몸을 가볍게 하고 있는 동안, D는 나무로 된 창문을 살짝 밀어올려 열었다. 창문 틈새로 밖을 정탐하려는 것이었다. 한참동안 D는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쿵쿵거리는 발걸음 소리도 멈추었기 때문에 나는 혹시 시간이 멈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D는 미동도 없이 밖을 내다보고 있었으며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화덕은 진작에 불을 꺼 두었기에 방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나는 저 집에 들어가서 잘게요.”

여자 목소리? 나는 한순간 내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거기에 동의하는 듯 괴물의 것으로 추정되는 그그렁 거리는 소리가 났다. 다음 순간 창문 틈새로 밖을 내다보던 D가 팩 하고 돌아섰다.

“뭐… 뭐야?”
“눈이 마주쳤어… 일단 숨자.”

D는 빠르게 나와 내 배낭을 잡아 끌었다. 우리는 조금 전까지 내가 자고 있던 방으로 들어와 숨었다. 털썩, 하고 뭔가 무거운 것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고 곧 저벅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나는 D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소리가 날 까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숨을 죽이고 터질 듯 요동치는 심장을 애써 달랠 뿐이었다. 아니길 바랬지만 달칵 하고 문 열리는 소리는 분명 우리가 있는 집의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잠시 뒤 문을 닫는 소리가 났고, 두리번 거리며 돌아다니는 발걸음 소리가 이어졌다. 얼마나 칼을 꽉 움켜쥐었는지 손에 피가 통하지 않는 기분이었다.

“여기 있는것 알아요. 나와 주세요.”

간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온갖 상념이 내 머리를 스쳤다. 마녀니 요괴니 하는 생각도 물론 그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해는 끼치지 않아요. 그를 깨우지만 않으면… 아!”

마지막의 작은 탄성과 같은 비명은 너무도 작은 소리여서 나도 잘 들을 수가 없었다. 바로 내 옆에 붙어 있던 D가 번개처럼 뛰어나간 것이었다. 나도 바로 방 밖으로 나왔다.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D는 뛰어난 실력의 전사이기도 했다. 오랜 여행으로 다져진 것인지 아니면 그 전부터 이미 익히고 있던 실력인지는 모르지만, 그와 함께한 여정 내내 그의 실력에 감탄하고 감탄할 뿐이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내가 나갔을 때는 그는 이미 등뒤에 붙어 한 팔로는 여자의 양 팔을 봉쇄하고 다른 손에는 칼을 들고 여자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그것도 보통 인질을 잡고 협박하는 식으로 여자의 바로 뒤에 나란히 서서 목을 겨누는 것이 아닌, 여자의 등에 자신의 옆을 대고 있는 식이었다. 후에 D가 가르쳐준 것이지만 그렇게 하면 만약에 있을 여자의 반항에 좀더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말고 묻는 말에만 대답하시오. 아가씨를 해치고 싶지 않으니까. 첫째, 밖의 괴물은 뭐지?”
“… 무기부터 내려놔요.”
“방금 전에 내가 한 말은, 묻는 말에 대답하는 것이 아니면 벤다는 뜻이었소. 다시 질문하지. 밖의 괴물은 뭐요?”
“설명해 주겠어요. 무기를 내려놔요. 내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들의 안전을 위해서.”
“나를 납득시켜보시오.”

D가 여자를 봉쇄한 동안, 나는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문의 빗장을 걸었다. 밖의 괴물로부터 빗장이 얼마나 소용이 있는 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심할 수가 없었다. 물론 빗장을 걸고도 별로 안심되지는 않았지만.

“난 당신들을 해치고 싶지 않고, 그도 당신들을 해치고 싶어하지 않아요. 그가 당신들이 여기 있다는 것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녀가 말한 ‘그’가 밖의 괴물을 뜻한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D는 금새 알아챈 듯 바로 말을 이어갔다.

“해치고 싶어하는지 안 하는지는 어떻게 알지?”
“해치고 싶어했다면 이 집과 함께 당신들을 뭉게버렸겠지요. 지금 그는 잠들었고, 때문에 내가 소리만 지르지 않으면 아침까지 계속 잘 거에요. 하지만 그가 당신들이 나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것을 본다면, 절대로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날 거에요.”
“… 자랑은 아니지만 난 꽤 많은 괴물들을 죽여본 바가 있는 몸이오.”

여자는 피식 웃었고, D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D에게 잡혀있는 여자를 살폈다. 목소리에서 알아차리긴 했지만, 상당히 젊었다. 이십대 초반? 아니면 그보다 어리던가.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그녀가 꽤 미인축에 드는 인물임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모양새는 추레했다. 옷은 평범한 옷이었지만 지저분했고, 마치 평복을 입고 오래 여행한 듯한 모습이었다. 얼굴은 미인인 편이었지만 역시 지저분했고, 머리칼도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다. 하지만 담담한 기품은 그녀가 뭔가 대단한 사람인 것 처럼 느껴지게 하고 있었다. D가 그녀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는데도 오히려 D가 위축되어 있었다.

“어떻게 하면 절 풀어주시겠어요?”
“음… 당신이 밖의 괴물을 죽이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그렇게 해서 내 동료가 괴물을 죽이고 그 죽음을 내가 확실히 확인한 뒤에.”

설마, D가 진담을 한 것이라고는 생각치 않았다. 나는 정말로 그렇게 해야 할 까봐 겁먹은 표정으로 D를 쳐다보았다. D의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져 찔끔 했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내가 괴물의 눈에 칼을 꽂는다느니 하는 식의 동화속 왕자님이나 하는 일을 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여자는 D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되면, 나도 그를 깨울 수 밖에 없어요. 그렇게 되면 곤란한 건 당신들이지요.”
“당신이 소리지를 틈도 없이 죽이고 도망갈 수도 있지.”
“그건 좀 무섭군요.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시죠?”

D의 탐색은 거기까지였다. 그는 그녀를 풀어주었다. 그녀는 D의 손에 잡혀있었던 양 팔이 아픈 듯 쓸어내렸지만, D는 별로 미안해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고 비록 그녀를 풀어주었다 하더라도, 그 거리에서 D는 언제라도 그녀의 목을 베어 버릴 수 있었다. 나는 그가 칼을 휘두르는 것을 본 적이 있었고, 덤벼들려던 자세 그대로 목이 떨어진 늑대를 기억했다.

“최대한 빨리, 당신이 여기 있는 이유와 저 괴물과의 관계, 저 괴물의 정체를 설명해 주시오. 그러면 그 다음을 생각해 보지.”
“그 전에, 그를 괴물이라고 부르는 것을 그만둬 주세요.”
“왜, 당신 남편이라도 되나?”
“제 형부에요.”

내가 켁켁거리자 D가 나를 째려보았다.

“왜, 놀랐나보군요?”
“조금. 당신 아들이라는 소리보다는 덜 놀랍지만, 뭐. 그렇다면 당신 형부는 당신 언니와 결혼할 당시부터 저런 모습이었소? 아니면 나중에 저렇게 변한 거요?”
“후자에요.”
“흠.”

나는 그녀의 말을 믿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했지만 답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믿어도 될 것만 같았지만, 밖의 괴물 때문에 그럴 엄두가 안 났다. 적어도, D는 함부로 그런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아직까지 빼어든 검을 집어넣지 않고 있었다.
“일단 앉으시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까.”

D의 태도는 상당히 부드러워져 있었다. 검은 여전히 빼어들고 있었으나 더 이상 그녀를 향해 겨누어져 있지는 않았다. 물론 똑바로 겨누고 있지 않더라도 언제든 그녀를 공격할 채비가 되어 있음은 분명했지만.

“당신이 이야기하게 두고 싶지만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도 곤란하고, 당신이 어떤 수를 써서 밖의 당신 형부를 깨울지도 모르니까. 내가 질문해서 요점만 파악하는 식으로 하겠소. 아까와 마찬가지로.”
“마음대로 하세요.”

여인은 의외로 순순히 D의 요구에 응했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처음부터 별다른 반항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과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은 우리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목숨이 걸린 일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조심해도 모자랄 일이라는 것 쯤은 여행자들의 철칙이었다. 우리는 사회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만큼 사회의 울타리에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존재들이었다.

“우선, 얼마전에 산적 기지를 초토화 시키고 S시에서 보낸 12명의 정찰조를 죽인 것은 당신 형부요?”
“… 맞아요. 하지만…”
“아, 제반 설명은 나중에 듣겠소. 다음 질문. 저런 모습이 된 지 얼마나 되었지?”
“이제 한 달 정도…”
“저렇게 변한 이유는?”

여인은 침묵했다. D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사이 나는 아까 D가 매달려 있던 창문 틈으로 밖을 살폈다. 그리고 희미한 달빛 아래로 들어난 광경이란! 나는 아직도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가끔 꿈에 나올 것만 같은 끔찍한 그 모습을.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는 그 순간 신을 찾으며 헛소리를 했다고 한다. 신이 자신이 만든 창조물들에게 자비심을 갖고 있었다면, 결코 그런 추악한 모양새를 의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한때 인간이었고, 세상 전체를 배반하는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지 않는 한 그런 모습으로 변하게 된 것은 신의 섭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물론 내가 놀라 나자빠진 것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의 추악함은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마을의 공터에 누워 있는 괴물의 모습은, 달빛에 드러난 극히 일부의 부분만으로도 충분히 흉악했다. 때는 여름이었지만 서늘한 한기가 날 뒤덮었다. 그건 거대한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집 한채는 우습게 짓밟을 만큼 거대한 그것은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나무등걸처럼 갈라지고 일그러진 피부의 틈새에서는 시뻘겋고 뭉클거리는 벌레와 같은 것들이 꿈틀거렸다. 살거죽 전체에는 옅은 회색빛의 진물이 흘렀고, 희무끄레하게 보이는 얼굴은 지옥을 배회하는 망자의 그것이었다. 안구는 사라지고 없었고, 대신 퀭하게 빈 자리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물과 같은 것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무엇보다도 나를 전율시킨 것은 그 몸에 수없이 돋아난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그것들은 어떤 질서를 갖고 배열된 것이 아니었다. 막무가내로, 어떤 곳에는 많이, 어떤 곳에는 적게 돋아난 그것들은 내부에서부터 살을 찢고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어떤 괴물의 뿔이, 어떤 괴물의 가시가 무섭다 할 것인가? 잠든 듯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괴물의 가슴에서 튀어나온 칼과 창날들은 가슴이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주변의 살들을 찢어내고 있었다.

“어때요? 무섭죠?”

나는 알 수 없었지만, D는 그 때 나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마치 분을 바른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녀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지만, 그녀의 질문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등골을 타고 흐르는 차가운 전율에 온몸이 뻣뻣해져 있었다. 나는 천천히 창가에서 뒷걸음질 쳤다.

“그가 처음 변했을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크기도 보통의 사람 크기였고… 아니, 처음 변했을 때 모양은 변하기 전과 똑같았죠. 그는 마을에서 제일 잘생기고 성실한 남자였어요. 적어도 우리 가족에게는 그랬죠.”

D는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독백하도록 내버려 두었을 뿐이었다.

“사실, 나도 어렸을 때부터 형부를 좋아했어요. 하지만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 언니라면 그것도 괜찮다고 여겼죠. 사실 난 나이도 한참 어렸기 때문에 그의 아내가 되기에는 무리가 있었죠. 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줬어요. 당연히 두 사람은 결혼했고, 그는 행복한 남편이, 내 언니는 행복한 아내가 되었죠…”

그녀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때의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아마 그녀의 눈에 들어왔던 것은 어슴푸레한 빛에 회색빛으로만 비춰보이는 벽 뿐이 없었을 텐데.

“행복을 깨트린 무엇이 있었군…”
“네, 그건 정말 생각치도 못한 일이었어요. 어느 날 갑자기 S시에서 사람들이 찾아왔어요.”

S시의 이름이 나오자 나는 잠시 뜨끔해졌다. 그리고 곧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저 괴물을 탄생시킨 이유가 S시에 있다면, S시는 응분의 보상을 치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S시가 돈으로 해결 할 수 있을 만한 일이 아닐 것이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던 간에, 그녀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그들은 우리 마을의 일부를 원했어요. 상인들이 많이 지나다니니까, 도로를 넓혀야 한다고. 이 마을처럼 도로 옆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우리 마을은 도로 위에 있었죠. 도로는 우리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갔고. 도로를 넓히는 것 까진 좋았는데, 넓어진 도로 옆에 큰 여관을 짓고 싶어했어요. 값을 제대로 치루어 준 다고 했지만, 형부는 힘들게 가꿔온 밭을 버리고 싶지 않았어요. 그들은 웃돈까지 얹어준다고 했지만 형부는 완강히 거절했죠. 그들은 엄청나게 화를 내며 우리를 저주했지요.”

나는 대충 이야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상인들은 이해타산에 능하고, 무엇에든 값을 치룰 줄 안다. 그러나 때로 값을 메길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값을 제대로 매겨주는 데도 땅을 팔지 않겠다는 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들은 성급하지 않았어요. 혹시 용병들을 고용해 마을을 습격하나 걱정했지만 꽤 오랫동안 아무 조짐도 나타나지 않았어요. 우리는 안심했죠. 하지만… 어느날 세무원이 나타났을 때 우리는 그들의 복수가 시작되었음을 알아차렸어요. 도로가 넓어졌기 때문에 우리 마을은 어느 순간부터 상업으로 돈을 버는 마을로 기록되어 있었고, 세금은 평소 내던 것의 열 배가 넘었어요. 마을의 모든 돈을 다 모아도 세금을 낼 수가 없었지요. 그러자 병사들이 들이닥쳤어요.”

나와 D는 묵묵히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점점 숨이 답답해지고 있었다.

“병사들은 마을에서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압류해 갔어요. 식량 한 톨, 동전 한 푼 남기지 않고. 물론 마을 사람들은 저항했지만, 병사들을 이길 수는 없었어요. 절망적이었죠. 추수가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것을 거둬 갔으니.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더라구요. 며칠 있다가 산적들이 들이닥쳤어요. 그들은 이전부터 우리 마을에서 얼마만큼의 상납금을 받아가고 있었지요. 그런데 상납금을 낼 돈이 어디 있어요. 그들은 그나마 우리가 S시의 병사들로부터 숨겨 놓았던 식량들을 다 가져 가려 했어요.”

나는 이보다 더 한 일도 본 적이 있었다. 더욱 지독한 학정을 펼치는 영주도 많았고, 풍성한 추수를 거두고도 산적에게 모든 것을 빼앗겨 굶어 죽는 사람들도.

“언니는 죽어도 못 준다고 버텼어요.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었죠. 그 해 겨울을… 언니는 어떨 지 몰라도, 언니 아기는 풀뿌리 같은 걸로는 버틸 수 없을 테니까. 평소에는 그렇게까지 악독하게 굴지 않았던 산적들이었어요. 어쨌든 우리는 그 전까진 꼬박꼬박 상납금을 냈으니까. 하지만… 힘으로 빼앗아가는 그들의 등 뒤에서 언니가 칼로…”
“찔렀군요.”

그녀는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다.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기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 나의 마음에 그 한 단어가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나는 그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악에 바친, 그러나 무력한, 그래서 더더욱 한 맺힌…

“칼에 찔린 산적은 죽어버렸고, 산적들은 눈이 뒤집혔어요. 언니는,”

나는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 모습만 변하지 않았을 뿐이지, 여인은 밖의 괴물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스스로의 몸 속에서 튀어나온 칼날들로 천천히 저며지는 고통과 스스로의 입으로 그때의 참상을 이야기하는 고통은 내가 감히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 거대했다.

“… 네 조각이 났지요. 언니 뱃속의 아기는 작아서 네 조각 내기가 어려웠던지 그들은 세 조각으로밖에 나누질 못하더군요.”

그리고 그것이 끝이 아니었지만, 이 이야기를 읽고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해 나는 여기서 설명을 그만두겠다. 그것은 나 자신이 더 이상 떠올리기가 싫을 정도로 끔찍한 이야기이며, 행여나 꿈에라도 나타날까 두려운 이야기인 것이다. 인류가 행한 수많은 범죄 가운데 이토록 끔찍한 일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고, D는 얼굴이 조금 찌푸려져 있었지만 묵묵히 그 이야기를 다 들었다. 나는 그만 귀를 막아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여인의 고통의 크기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 어떻게 제 정신으로 저 이야기를 할 수가 있는 것일까?

곧 알아차렸지만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것 자체가 그녀가 이미 실성했다는 증거였다.

“형부는 산적들이 다 없어진 다음에 도착했죠. 그가 발견한 것은 엉망이 된 마을과, 언니와 아기의 시체와, 언니의 시체 옆에 쓰러져 있던 저였죠. 살아남은 사람은 몇 없었어요. 저도…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요? 나는 말렸지만, 형부는 숲 속 깊숙한 곳에 산다는 마녀를 찾아갔어요.”
“… 마녀?”
“네, 마녀. 그녀는 형부의 부탁을 들어주려 하지 않았지만, 형부는 거의 반 강제로 비술을 얻었어요. 그는 그걸 마셨고, 처음에는 아무것도 변한 것 같지 않았지요.”
“마녀가 비술을… 혹시 그 이름을 아시오?”
“… 잘 모르겠어요. 무슨 심장인가 하는 것으로 만든 약이었어요.”

나는 D의 얼굴에 나타난 당황함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맥없이 주저앉아 칼을 놓아 버렸다. 나도 여인도 그의 설명을 필요로 했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한참이나 그러고 있던 그는 웅얼거리는 소리로 물었다. 풀벌레 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하지 않았다면 무슨 말을 하는 지 거의 듣지 못했을 것이다.

“원망하는 자의 심장. 나도 어디선가 전해들을 이야기일 뿐이지만… 원망하는 자의 심장은 그것을 먹은 자에게 기이한 힘을 주지. 원한이 크면 클 수록 그 힘은 거대해지오. 원망하는 자의 심장을 먹으면 그 사람의 육체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불사에 가까운 힘을 얻게 되지. 더 이상 인간의 육체가 아니라, 한 마리의 마수로써… 묻겠소. 당신의 형부는 아마 날 달린 무기로부터 어떤 상처도 입게 되지 않을 테지. 맞소?”
“아니… 저…”
“아, 정정하겠소. 상처를 입지 않는 게 아니라… 입어도 소용이 없는 것이겠지. 그는 무기를 삼키고 그 만큼 몸이 늘어나오. 맞소?”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D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다행히 D는 부연설명을 할 필요를 느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무기를 삼킨다는 것은, 소화가 되는 것이 아니오. 말 그대로… 그냥 그 몸안에 들어차는 거지. 지금 당신 형부의 몸은 거의 늘어날 만큼 늘어났다고 봐도 좋겠지. 그 안에 창이며 칼이며 도끼며 화살이며… 이름을 열거할 수 있는 모든 무기들이 들어찼을 테니. 그것들은 상처를 내고 움직임을 방해하고 고통을 주겠지만 결코 그를 죽게 할 수는 없을 거요.”
“… 맞아요.”

여인은 약간 놀랍다는 듯이 D를 바라보고 있었다. D는 지금 굉장히 심란한 듯 했다. 지금까지 그와 함께 해 오면서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그의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당신… 당신은 언제까지 그를 쫓아다닐 생각이오?”

아마도 괴물에 대한 것을 물어오리라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D는 여인을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한 질문을 찔러넣었다. 애초부터 대답을 원한 것이 아닌 질문이었기에, D는 여인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기실, 여인으로써는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생각해 본 적 없겠지.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소. 어쨌든 당신은 살아있고,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거요. 알고 있겠지만, 그는 당신 말을 알아듣지 않소. 알아듣는 것처럼 보여도, 단지 낯익은 목소리에 조금 누그러지는 것 뿐… 언제까지 그가 벌이는 복수극을 볼 생각이오?”
“그러면… 안되나요?”
“죽을 수도 있소. 그는 강해졌지. 저주를 뒤집어 쓴 것이나 다름 없지만, 어쨌든 강해졌어. 하지만 결국 그는 죽은 거요. 원망하는 자의 심장이 주는 힘에도 결국 한계가 있으니까. 그러면 당신은?”
“죽으면 안되나요?”

이번에는 D가 당황할 차례였다. 수차례 언급했지만 그는 노련한 방랑자다. 그에게는 살아남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아무리 끔찍한 상황에서도 그는 충분히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 적당한 감성과 적당한 이성을 갖추고 있으니까. 그러나 이성이 마비되어 버린 사람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설명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자신이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니까. 그가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 여인은 일어섰다.

“형부를 깨우지 않을 거에요. 그리고 당신들도 어서 갈 길을 가세요. 나는… 잘 모르겠어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지만 그를 두고 갈 수는 없어요.”

상황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녀는 더 말을 붙여볼 여지를 남겨주지 않았고, 우리도 굳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붙잡을 방법이 없었다는 쪽이 좀 더 정확했다. 나는 주섬주섬 짐을 챙겼고, 아까 내팽겨친 돈주머니가 혹시 풀어지지는 않았는지 점검했다. 여인은 조금 전까지 내가 자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와 D는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왔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D는 나에게 칼을 짐 안에 숨기라고 이야기했다. 적어도 괴물이 깨어난다 하더라도 아무 무기가 없는 우리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찌 되었건 괴물은 깨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도둑처럼 살금살금 마을 밖으로 빠져나왔다. 달빛 아래 드러난 괴물의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사실 집채보다도 큰 거체를 보지 않고 빠져나간다는 것은 눈을 감고 나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괴물의 얼굴을 보지 않는 것 뿐이었다. 괴물의 얼굴을 보면 나까지 슬퍼질 것 같았기에.

아무 말이 없어도 나와 D는 충분히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적어도 그 상황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는 달렸다. 밤의 숲길을 걷는 것은 위험했지만, 우리는 그 어떤 산짐승도 함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믿음은 들어맞았고, 우리가 밤새도록 달려 S시에 도달할 때까지 우리는 개미 한 마리 보지 못했다.

보통 사람보다는 단련된 체력을 가진 나와 D였지만 솔직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그것도 낮에 이미 고단한 여정중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좀 무리였다. 그래도 나와 D는 불평 한마디 없이 그 긴 거리를 쉼없이 달렸고, 해가 뜰 때 쯤에는 S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날 우리가 북쪽 도로로 나갈 때 의심스런 눈길을 보내던 파수병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우리를 들여보내주었다. 마음에 드는 표정은 아니었다. 우리가 간밤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면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가 갑자기 궁금해졌지만, 한시가 급했다.

보통 성문을 통과하면 시내로 들어가는 다른 이들과 달리, 성루 위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을 뛰어올라가자 파수병들이 놀라 뛰어왔다.

“뭐, 뭐요!”
“아, 헉, 그러니까, 다른 용무가 아니고, 안내가 필요해서 그렇소.”

파수병들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하도 숨이 가빠 다시 말하는 게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지경이었는데 못 알아들은 얼굴을 하자 그냥 나 죽었소 하고 누워버리고 싶은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서 나 대신 D가 똑같은 말을 반복해 주었다. 그는 그래도 나보다는 덜 지쳐 있었다. 파수병들 중 한 명이 되물었다.

“안내라니? 무슨 안내를 말하는 거요?”
“당신들의 최고 통수권자. 시장님에게 안내해 달라는 거요.”
“시장님에게 안내 해 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이유가 뭐요?”

지금 숨 넘어가게 생겼는데 이유고 뭐고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심각한 회의가 들었다. 파수병들은 미친 사람을 쳐다보는 듯한 표정으로 우릴 보고 있었다.

“당신네들을 위협하는 괴물의 정체와 피해를 안 입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주려고. 이 정도면 됬소?”

확실히, 우리가 그들에게는 실성한 사람처럼 보일 것이라는 것 쯤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조롱기 어린 미소와 동정심이 가득 묻어나는 시선은 감내하기 어려웠다.

“자 자, 이만 돌아가 보시오. 시장님은 그렇지 않아도 바쁘시고, 당신이 아니더라도 조언해 줄 사람은 많소.”

그들은 우리를 둘러싸고 떠밀어 내었다. 귀찮은 날파리를 쫓아내는 듯한 동작이어서 화가 폭발할 지경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밀려 두어 계단 내려가야 했지만, D는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주 급하오. 당신들과 실갱이할 정도로 한가한 것도 아니고. 한 명만 나와 내 동료를 시장님에게 데려다 주면 되지 않소? 당신들은 연락병도 없소?”
“하, 이거 정말 미치게 하네. 이보쇼, 당신 대체 직업이 뭐요? 당신이 무슨 현자라도 되오? 응? 괴물을 잡아 본 적은 있소? 뭘 좀 알면서 지껄여야지.”

D는 그다지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분명 답답해하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해코지를 당하지도 않을 것이고, 해코지를 할 것이라고 생각되지도 않았지만 나는 상황에 전혀 진전이 없음을 깨달았다. 뭔가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고 생각하고 막 고민하던 찰나에, 그 다른 방법은 저절로 찾아들었다.

“무슨 소란이냐?”
“아, 사령관님! 잘 오셨습니다. 아 글쎄 이 사람들이 막무가내로 시장님을 뵙게 해 달라면서…”

사령관? 나와 D는 동시에 새로 등장한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인물을 외모로만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사실, 어떤 사람의 성격을 파악할 때 외모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잘 생기고 못 생기고를 떠나서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이 대충 짐작이 가니까. 사령관이라는 남자는 생긴 것 부터가 차갑고 잔인했다. D를 보면 그에게서 노련한 방랑자의 느낌을 얻을 수 있듯이, 사령관이라 불린 남자는 정말 사령관처럼 생겼었다. 사령관은 사령관이되, 때에 따라서는 아군도 거림낌없이 희생할 수 있는 그런 사령관. 적들이 죽어가는 것이 단지 승리의 영광으로만 보이며,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승리를 만끽하고, 또 그럴 만한 실력이 있는 사령관.

“뭔가? 계엄령 하에서는 때에 따라서 즉결처형도 가능하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
“그건 시민에 한해서지요. 외부인에게는 적용이 안 됩니다.”
“군사행동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외부인은 적으로 규정, 사살하지.”
“결코 당신들에게 해 되는 일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큰 도움이 되겠지요. 저와 제 동료는 밤새도록 달려와 이것을 알려주려고 하는 데, 당신 병사들이 이렇게 저희를 막으면 오히려 병사들이야말로 처형당해 마땅한 겁니다.”

사령관의 날카로운 눈이 한번 D를 훑고, 다시 병사들을 훑었다. 파수병들은 그럴리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만약에 하는 생각에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었다. 파수병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사령관은 별 말 없이 우리들에게로 돌아섰다.

“그래서, 무얼 알려주겠다는 건가?”
“여기서는 말씀드리기가 좀 곤란하지만, 괴물에게서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는 방법입니다.”
“괴물에게서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는 방법? 하하, 그런 거라면 걱정 없네. 내가 이미 다 준비해 놨으니까.”
“괴물이 어떤 놈인지 아시기나 합니까?”
“알지. 그러니 가 보시게.”
“괴물을 그냥 죽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괴물을 직접 보았고, 괴물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공격하던 피해만 늘 뿐입니다. 우리는…”
“계속 떠들면 군사행동에 반하는 행동으로 간주하겠네.”

명백한 추방령이었다. 척 보기에도 그는 우리에게 관심이 없었다. 나는 이런 종류의 사람을 몇번 만나본 적이 있었다. 잔인하고 냉정하고, 오만한데다가 독선적이기까지 한 인물. 이런 인물은 남의 말을 전혀 귀담아 듣지 않는 전형적인 형태의 인물이었다. 특히, 자신이 일단 내린 결정에 대해서는. 사령관이라는 말을 미루어 보아 그는 괴물을 상대할 계획을 다 세워 놓았을 텐데, 이미 준비되어있는 계획에 새로운 변수가 끼어드는 것을 용납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D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쯤에서 이미 상대가 난공불락의 고집불통임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소란인가?”

차갑고 냉정한 사령관의 목소리와는 조금 다른 목소리였다. D와 나의 시선이 새로운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했다. 사령관이라는 사내보다 적어도 이십살은 더 많아 보이는 장년의 거한이었다. 나는 재빠르게 새로 등장한 자의 모습을 훑었다. 거만하고 완고하기는 사령관과 엇비슷해 보였으나, 차갑다기 보다는 다혈질적인 성격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치안대장이시오? 여긴 별일 없소이다. 단지, 웬 외부인들이 생떼를 쓰길래. 치안대장께서 직접 신경쓰실 일이 아니외다. 가서 주민통제나 해 주시지요.”

사령관의 말에 조롱기가 묻어 있는 것도 놀라웠고, 치안대장이라면 한 도시의 치안을 담당하는 존재이니만치 군대가 주둔하지 않는 이상 시장을 제외하고 한 시의 최고 군통수권자인데 사령관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도 놀라웠다. 무엇보다도 치안대장이 한참 어려보이는 사령관에게 쩔쩔매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허, 험. 아니, 무슨 생떼이길레 사령관이 곤란해하시오 그래? 이봐, 자네들!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소란을 피우나?”

난 이때라고 생각했다. 바늘끝 들어갈 틈도 없는 사령관에 비해 이 사람은 좀 말이 통할 것 같았다. 확실히, 치안대장은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원하고 있었다.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바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사람을 구워삶을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다. 사령관이 뭐라고 나서기도 전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예, 저희는 이 부근을 여행하는 여행자였습니다. 전날밤에 S시를 거쳐 북쪽 도로로 갔었는데 그만 간밤에 괴물과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그 괴물을 상대하는데 도시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갖고 있어서 시장님과 만나려구요.”

그때 치안대장의 얼굴에 떠오르는 희색이란! 조금 후에 알게 되었지만, 치안대장은 원래부터 S시의 치안대장이었다. 그러나 시장은 괴물의 위협이 닥쳐오자 용병대를 하나 고용하고, 그 용병대장을 시의 모든 군사력을 거머쥔 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치안대장으로써는 어쨌든 임시로나마 자신 이상의 직위를 가진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야 했지만, 결코 즐거울 리가 없었다. 그에게는 뭐가 되었든 사령관의 뜻과 반할 건수가 필요하였고, 우리는 아주 좋은 핑계거리였던 것이다.

“아, 그런 일이라면 진작 말하지 그랬나? 내가 시장님을 뵙게 해줌세.”
“치안대장!”
“왜 그러시오?”

사령관의 얼굴에서 조소가 사라지고 무섭게 냉막한 표정이 드러났다. 치안대장은 약간 뜨끔한 듯 했지만 최대한 뻔뻔스럽게 행동했다. 나와 D는 당연히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여행객이 되어 슬그머니 치안대장의 옆으로 가서 섰다.

“쓸데없는 정보로 시장님의 귀를 흐트럽히지 않았으면 좋겠군. 괜히 내 작전을 망치지 말고.”
“아아, 쓸데없는지 아닌지는 들어봐야 하지 않겠소이까? 아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정보라면 들어봐야 하지 않겠소?”

사령관의 날카로운 시선이 나와 D를 찔렀다. 그 정도로 겁먹을 우리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한 시선도 몇번이나 받아본 적이 있었으니까. 우리는 아주 당당하게 치안대장의 뒤를 따랐고, 치안대장은 등 뒤로 쏟아지는 사령관의 따가운 시선을 은근히 즐기는 듯 했다.

치안대장의 목적이 애초부터 괴물을 막을 만한 방법을 찾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사령관이 싫어할 만한 짓을 하고 싶었던 것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령관은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도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를 용병 나부랭이’라느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의 작전이란건 실패할 게 뻔하다’ 라는 식으로 사령관에 대한 유치한 적개심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나와 D가 시장에게 어떤 정보를 제공하려고 하는 지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으니, 사실 시장이 이런 자에게 괴물을 상대할 군통제권을 주지 않은게 당연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런데 저희는 지금 어디로 갑니까?”

한참 사령관을 깎아내리는 데 열중하던 치안대장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했다. 그는 잠깐 주위를 둘러보더니, 지금까지 묵묵히 그를 에스코트하던 병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다행히 길을 물어보는 것은 아니었다. 그 정도로 무능했다면 나와 D는 고개를 젓고 그 자리를 벗어났을 것이다. 병사는 미리 달려가 우리가 도착하는 것을 알리도록 명령받았다. 병사에게는 좀 미안했지만, 치안대장의 설명을 들으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함부로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가 안내된 곳은 S시의 심장, S시의 모든 부가 흘러드는 곳, S시의 모든 것을 상징하는 탑이었다.

S시의 심장, 그 탑의 고유명사는 따로 있지만 그러면 굳이 S시의 이니셜을 사용하는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니까, 알 만한 사람들은 또 다 알테니까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앞으로는 S시의 심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겠다.

S시의 심장은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아 있었다. 아마도 현재 있는 모든 건축기술의 최고의 정수만을 모아 만들었을 이 탑은 사실 애초에 나와 D가 S시로 관광을 오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급하게 S시를 떠나는 바람에 멀리서 다른 건물들 위로 치솟은 꼭대기밖에 보지 못했지만, 결국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니 감회가 남달라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아주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마치, S시의 모든 변화를 상징하는 것이야말로 이 S시의 심장이 아닐까 하는. 황금의 부, 화려한 명예 뿐 아니라 차갑고 어두운 것들 마저도 말이다.

치안대장이 가까이 다가가자 경비병들이 길을 비켜 주었다. 양 쪽으로 창을 들고 도열한 경비병들의 모습에 나는 괜스레 주눅이 들었다. 탑은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지는 형태였다. 아주 심하게 벌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위가 아래보다 더 넓다는 것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위로 올라갈 수록 좁아지는 것이 탑의 당연한 모습인 줄 알았던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저런 형태의 건물이 유지가 될 정도라면, S시의 심장을 건축하는데 들어간 돈은 정말 천문학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탑 안으로 들어서자 수없이 많은 문들이 나를 반겼다. 탑의 구조는 단순했다. 정 중앙에 기둥이 있고, 그 기둥을 따라 나선형 계단이 끝도 없이 감고 위로 올라간다. 각 층에는 둥근 벽을 따라 방들이 늘어서 있고, 각 방은 말하자면 일종의 개인 금고인 셈이다. S시에 사는 사람들의 것이 아닌 것들도 많았고, 심지어는 S시에 드나드는 상인도 아니면서 멀리서 굳이 이 탑에 개인의 금고를 두는 사람들도 많다고 치안대장은 설명했다.

나는 각각의 방 안에 얼마나 많은 재화가 쌓여 있을 지 감히 상상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다시 한 번 놀란 것은 탑에서 각 층을 이동하는 방식이었다. 시장은 지금 탑 정상에 있다고 들었기에 저 까마득하게 높은 높이를 걸어 올라갈 생각을 하며 계단쪽으로 가던 나는 자연스레 기둥쪽으로 가는 치안대장때문에 무안당하고 말았다. 치안대장은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기둥에 붙어있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얼른 그 뒤를 따라 들어간 나와 D는 갑자기 바닥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기겁을 하고 말았다. 치안대장은 나와 D가 당황해 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피식피식 웃었다. 화도 났지만 그 순간 내 감정을 지배한 것은 경이였다.

막대한 부가 잠자는 이 탑에 아마도 나와 D같은 이가 발을 들인 것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나는 마치 탑이 나를 거부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만약 건물이 말을 할 수 있었다면, S시의 심장은 틀림없이 말했을 것이다. 어디서 이런 촌놈들이 들어오느냐고.

덜컹, 하고 다시 한번 나를 기절하게 만든 진동은 우리가 어느새 탑의 꼭대기에 도착했다는 신호였다. 움직이던 바닥은 멈추었고, 나와 D는 잔뜩 주눅이 들은 체로 움직이는 바닥에서 걸어나왔다. 치안대장은 갑자기 얼굴을 딱딱히 굳히고, 아주 정중한 동작으로 앞을 향해 절했다. 무의식중에 나와 D도 그를 따라하고 말았다. 그래야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인사는 그정도면 됬고. 그래… J, 손님들을 모셔왔다고?”
“예, 숙부님.”

치안대장이 내 앞에서 비켜서자, 숨 막힐 것 같은 강렬한 황금빛이 나에게 쏟아졌다. 눈이 빛에 익숙해지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어렴풋이 의자가 보였고, 거기에 앉은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고, 주변에 도열한 호위들이 보였다. 눈을 찌푸리자 겨우 빨간 융단이 바닥에 깔려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너무 갑자기 밝아진 실내 때문에 나는 몇 번이나 눈을 깜박거리고서야 사물들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허리에 칼을 차고 있는 건장한 호위병들이 좌우로 도열한 뒤로 푸른 하늘이, 그리고 S시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눈부신 빛은 한낮의 태양이 내뿜는 빛이 열려진 발코니로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었고. 화려할 거라고 짐작했던 커다란 의자는 이제 보자 딱딱한 회색빛 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돌로 만든 의자에는 초라한 노인이 한 명 앉아 있었다. 그렇다, 이미 장년의 나이인 치안대장에게 삼촌 소리를 듣는 것을 보면 결코 젊은 나이는 아닐 터였다. 노인의 얼굴에는 이미 저승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돌의자에 얹히다 시피 한 쭈그러든 육체는 다 녹은 양초처럼 보였다. 허나 그 눈빛은 아직도 살아 있었다. 아니, 살아 있을 뿐 만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봐왔던 어떤 눈보다도 맹렬한 전사의 눈이었다. 검을 들고 방패를 들지는 않았으나, 항상 자신보다 강한 것과 맞섰고 그리고 결국 승리를 거둬온, 쟁취의 의미를 아는 전사의 눈.

“나는 본래 여행자들과의 환담을 마다하지 않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니 만치 잡설은 필요없고 본론으로 들어가 주길 바라네.”

시간이 없기는 이쪽도 비슷했던 지라, D는 지체하지 않고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가 어떤 식으로 괴물을 만났는지를 이야기했다. 우리가 어떻게 마을 안으로 들어갔고, 괴물과 조우했으며, 여자를 만났다는 부분까지 이야기 했을 때, 묵묵히 듣고 있던 노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본론으로 들어가라고 한 것은, 당신들의 요구사항을 말하라고 한 거였지 상황설명을 하라고 한 게 아니었네. 먼저 요구사항을 말해보게. 그걸 받아들이지 안 받아들일지에 대해 날 설득하는 것은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

누군가와 대화하면서 주도권을 뺏겨본 일이 별로 없었을 텐데도, D는 그다지 당황해 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우리의 요구사항을 말했다. 한 문장으로, 추호도 주저하지 않고, 평상시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말투로.

“모든 병사들의 무장을 해제하십시오.”

노인은 웃었다. 얼굴에 비틀린 주름들이 가득해졌다. 순간 나는 왠지 모를 오싹함을 느꼈다. 마치 괴물의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처럼, 가슴이 꽉 메이고 차가운 무언가가 등골을 훑어내렸다. 다 죽어 가는 육신 속에는 괴물 만큼이나 강한 전사가 도사리고 있었다.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전사가.

“설득해 봐.”

나는 주변에 늘어선 병사들을 곁눈질했다. 그들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고 꼼짝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아까보다도 더 크고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혹여 D의 발언을 고깝게 받아들이고 우리를 해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와 활로를 찾기도 어려웠다. 호랑이 굴 한 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셈이었다. 나처럼 속으로는 걱정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한 척을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태연한 건지 D는 여전히 평온한 어조로 설명을 시작했다.

“제가 보았을 때, 지금 괴물은 그냥 괴물이 아니라 사람이 마녀의 비술로 변한 괴물입니다.”
“마녀의 비술로 변한 괴물이건 그냥 괴물이건 괴물이긴 마찬가지야.”
“네, 하지만 그냥 괴물과는 달리 마녀의 비술로 변한 괴물은 공격대상을 정하는 데 있어서 제한을 갖습니다. 저와 제 동료가 간밤에 만난 여인이 해준 말로 미루어 보아 그 여인의 형부, 지금의 괴물은 ‘원망하는 자의 심장’ 을 먹었고, 원망하는 자의 심장이 갖는 효과에 대해서는 몇가지 아는 것이 있습니다. 괴물의 모습이나 지금까지의 행동을 볼 때 원망하는 자의 심장을 먹은 것으로 확신합니다. 그리고, 원망하는 자의 심장은 정말 괴물스러운 힘을 부여합니다. 그 육체를 잠식한 원망하는 자의 심장은 원한과 증오를 모두 힘으로 바꾸지요. 그러나 한 가지 맹점은, 괴물로 변한 이상 더 이상 이성을 갖추지 못하기 때문에 원수와 원수 아닌 자의 구분을 거의 하지 못한 다는 것입니다.”

노인의 눈은 여전히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도저히 알아낼 수 없었다. 단지 흥미를 보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벌써부터 반감을 품고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설득되고 있는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눈이었다.

“원수와 원수 아닌 자를 구분할 수 없고, 단지 흐릿하게 기억 속에 남은 형상으로 원수를 찾아 내는 겁니다. 그 원수의 형상은, 무기를 든 자. 그는 무기를 든 자, 공격해 오는 모든 자들을 부숴버릴 겁니다. 그리고 무기를 삼켜버려, 그만큼 더 커지겠지요. 그러나 무장을 해제한다면? 아무도 무기를 들지 않고, 아무도 그를 공격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그는 그저 지나가 버릴 겁니다. 무기를 든 자를 찾아서, 원수를 찾아서.”

노인은 웃었다. 웃음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정말 즐거워서 웃는 웃음도 있고, 비웃음도 있다. 정말 많은 종류가 있지만 어이가 없어서 웃는 웃음도 있다. 지금 그의 웃음은 마지막 종류의 것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무장 해제를 했는데 괴물이 그냥 지나가 버리지 않으면?”
“괴물이 그냥 지나간다에 제 목숨을 걸겠습니다.”

만약 노인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면 나의 목숨도 덤으로 얹어졌을 것이다. 다행인지 아니면 불행인지, 노인은 D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인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우리를 불렀다.

“가까이 와 보게. 이 쪽으로.”

나는 좀 우물쭈물하면서 앞으로 나섰다. 나름대로 많은 여행을 했다고 자부하지만 사실 나는 호위 병사를 둘 정도로 높은 사람의 앞에 나선 적은 한번도 없었다. 나와 D가 그의 앞에 서자 놀랍게도 노인이 후들거리면서 일어났다. 놀라 달려온 치안대장의 부축을 받아서야 겨우 걸음을 옮길 수 있을 정도 였지만 아직 몸을 일으킬 만한 힘이 남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웠다.

걸음을 옮기는 것이 무척 힘겨운지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는 손짓으로 뜻을 전했고, 우리는 그의 뒤를 따라 발코니로 자리를 옮겼다. 노인은 저 멀리 펼쳐진 지평선에 시선을 던졌다. 아, 그것은 정말로 멋진 광경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 올라와 있음을 실감했으며, 내 발 아래 끝도 없이 펼쳐진 대지를 볼 수 있었다. 시의 남쪽으로 무한대로 뻗어나가는 황무지. 그 가운데를 흐르는 한 줄기 강물과, 그 강에 기대어 허허벌판에 세워진 거대한 도시. 벅찬 경이가 날 감쌌다. 경배하라, 인간의 위대함을.

나는 순간적으로 S시에 대해 깊은 애정을 품게 되었다. 이 거대한 도시를 일궈낸 명예의 일부가 나에게도 있는 것처럼, 이런 거대한 도시를 지은 인간의 하나임이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다. 만약 그 상태가 좀 더 지속되었다면, 나는 정말로 S시에 대한 애정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 광경을 내가 처음 S시에 들어오자마자 볼 수 있기만 했었어도, 순수하게 이 광경을 볼 수 있는 여행자의 입장이기만 했었어도 나는 S시를 경배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미 그 뒤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먼저 보고 말았다.

“어떤가.”
“멋지군요.”

노인의 물음에 D는 평이한 어조로 답했다. 화술이 좋다는 것은 단지 말재간이 뛰어난 게 아니라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고 상대를 자신의 페이스로 끌어들이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뜻이다. D는 특히 그런 쪽에 능해서, 심드렁한 그의 어조는 노인에게 조바심을 일으켰다. 허나 D에게는 불행하게도 나 라는 사람은 그런 쪽에 그리 능하지 않아, 노인은 내 얼굴에 서린 경탄의 표정을 읽고 만족하는 모양이었다. 이야기의 주도권은 여전히 노인이 쥐고 있었다.

“이 도시를 세우기 위해 내가 어떤 노력을 들였는지 아는가. 이 도시는 내가 피땀 흘려 세운 거 야. 내 평생을 바친 도시, 아니, 이 도시 자체가 내 평생일세.”

보통 노인이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 할 때, 그들의 얼굴을 회한에 젖는다. 그러나 그는 S시의 시장이었고, 지금도 S시의 시장이다. 한 단체의 장은 강건해야 하며 노인은 그 점을 잊지 않았다. 힘없는 육체와는 다르게 여전히 불타는 눈동자가 나를 스쳐 D를 향했다. 단지 스친 것만으로도 나는 흠칫 놀랐다. 육체가 얼마나 젊은가, 육체가 얼마나 강한가와는 관계 없다. 그것은 기백의 문제다.

“내가 이 도시를 세우면서 겪은 일들을 일일이 설명해 줄 수는 없네. 그러나 알아두게. 세상에 무엇보다도 강한 힘은 돈과 칼이라는 것을.”
“그러나 시장님에게도 아무 것도 없는 시절이 있었을 테지요. 돈도, 칼도 없는.”
“도박이 있었지. 젊음을 건 도박. 그러나 도박은 다만 도박일 뿐이야. 도박은 계속된 힘을 부여하지 못하네. 그리고 자네는 나에게 도박을 요구하고 있어.”
“저는-.”
“저기를 보게.”

노인은 D의 말을 끊으며 한쪽을 가리켰다. 저 멀리, 그의 도시 언저리, 작은 집들의 사이로 유난히 번쩍이는 것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나는 그것이 한 무리의 병사들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후의 강렬한 햇빛이 그들의 갑옷을 찬란하게 했다.

“저것이 바로 나의 힘이네. 칼, 내가 돈을 주고 산 칼들이지. 저들이 언제부터 여기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나? 저들은 괴물을 막기 위해 급히 불러모은 어중이 떠중이들이 아닐세. 사령관을 만났다니 알겠지. 그들은 괴물을 막기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라 산적들을 토벌하기 위해 준비된 것이네. 아주 오래 전부터, 내 힘이 되기 위해. 그 대상이 괴물로 바뀌었다고 해서 그들의 힘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야.”
“시장님은 평화로운 방법을 버리고 일부러 피를 부르려 하시고 있습니다.”
“이보게. 나도 젊었을 때는 도박을 좋아했네. 하지만 이제 도박 같은 것을 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었어. 내 나이에 맞는 것을 해야 겠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에 목숨을 맡기기 보다는, 미리 준비할 줄 아는 지혜가 더 낫네.”

노인은 어느새 우리의 앞으로 나아가 발코니에 기대어 서 있었다. 세찬 바람이 연거푸 몰려와 그의 백발을 흐트러트렸다. 노환으로 깡마른 그의 몸과 헐렁한 옷가지는 바람에 날려가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뒷모습에서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전사였고, 전사의 방식으로 괴물을 상대할 것이다. 방랑자의 방식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괴물, ‘그’와 그의 처제가 S시에 방문한 것은 오후 느지막해서였다. 결국 아무 성과 없이 시장의 앞을 물러나온 우리는 그제서야 겨우 늦은 아침 겸 점심 겸 저녁을 해결하고 있었다. 전날 밤 이후로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체 장거리를 달린데다가 S시에 들어와서도 심하게 체력을 소모한 우리는 겨우 지친 몸을 쉬며 체력을 회복하려고 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내가 막 따뜻한 오트밀을 한 입 먹는 순간, 병사들의 찢어지는 듯한 고함 소리가 울려퍼졌다. 빈 속에 잘도 고기를 쑤셔넣던 D는 사레가 걸려 켁켁거렸고, 나는 끔찍하게 배가 고팠음에도 불구하고 입맛이 싹 달아나 식사를 중단해야만 했다.

올 것이 왔다, 그런 심정이었다. D는 말없이 일어나 식당 주인에게 음식값을 지불하고 거리로 나왔다. 계엄령 하인데다가 드디어 괴물이 나타났으니 식당 주인은 빨리 식당 문을 잠가버리고 싶어했으므로 우리가 나가려 하자 아주 반기는 얼굴이었다. 그래서인지 D가 동전 2개를 부족하게 지불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정신없이 북쪽 문으로 달려갔다. 병사들이 막아서 성벽까지는 갈 수 없었지만, 대신 우리는 근처의 3층집 하나를 찾아 들어갔다. 그 집은 물론 문을 잡아 걸고 있었다. 나와 D는 서로를 도와가며 근처의 큰 상자를 발판삼아 2층의 테라스로 올라갔고, 다시 거기서 3층의 옥상으로 기어올라갔다. 어차피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발사!”

오후였고, 북쪽 문이었기에 햇살은 옆에서부터 쏟아져 들어와 사수들의 시야를 방해했다. 하지만 훈련된 사수들에게 그런 것 쯤은 아무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다. 애초부터 표적의 크기가 큰 탓도 있었고. 수십장의 종이를 차례대로 넘기는 소리가 들릴 때에야 나는 옥상에 올라설 수 있었다. 수 많은 화살들이 하늘을 날았다. 괴물은 피하지 않았다. 멀었기에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 옆으로 날아간 화살 몇발을 제외하고는 전부 명중이었다. 물론 괴물은 전혀 피해가 없는 듯 여전히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만둬!”

내 외침은 사령관에게도, 사수에게도 닿지 않았다.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호기심에 다가오는 민간인들을 통제하는 병사들의 고함소리와, 발사를 명령하는 사령관의 외침과, 화살의 날카로운 파공성만이 모두의 청각을 지배하고 있었다. 세번, 네번, 일제사격은 계속되었다. 괴물은 계속 걸어왔고, 북쪽 숲에서 완전히 벗어나 아무런 장애물이 없는 벌판으로 나왔다. 괴물은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똑바로 걸었다.

“빌어먹을, 그만두란 말야! 보고 쏴!”

그렇게 고함을 친다고 될 일이 아니란 것은 알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홉번째 일제사격 때, 괴물의 발뒤꿈치 언저리에서 작은 무엇인가가 멈추었고, 땅으로 쓰러졌다. 그것은 더 이상 괴물을 따라오지 않았다. 아무도, 정작 그 화살을 발사한 사수도, 다른 어떤 사수도, 사령관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내가 북쪽 숲으로 가는 길 언저리에 버려진 가련한 여인의 시신을 수습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다음날의 일이었다.

죽은 여인의 형부가 마침내 달리기 시작했다. 사령관은 더 이상 일제사격을 명령할 수 없었고, 대신 사수들의 의지와 판단에 맞긴 자유사격을 명령했다. 화살은 그야말로 빗발치듯 쏟아져 내렸다. 괴물은 그 모든 화살들을 고스란히 맞으면서도 전혀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눈 좋은 사수들이 더 이상 어렴풋한 형체가 아니라 또렷한 괴물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쯤, 괴물은 힘차게 팔을 휘둘렀다. D가 황급히 내 머리를 잡고 땅바닥에 찍어누르지 않았다면 나는 이마 한복판에 칼을 꽂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죽을 뻔 했다는 공포가 나를 사로잡기도 전에 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괴물은 여전히 아까와 같은 속도로 돌진해 오고 있었고, 어느새 해자 앞까지 육박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괴물을 막기 위한 사수들은 태반이 성벽 위에 쓰러져 있었다. 괴물의 팔에 박혀있던 많은 무기들, 태반은 바로 사수들이 직접 쏘아낸 화살들이 거꾸로 그들에게 쏟아져 내린 것이다. 개 중에는 전부터 괴물에게 박혀 있었던 칼이며 창도 있었다. S시를 관통하여 흐르는 H강의 물길 일부를 돌려 만든 해자는 대단히 깊었으나 괴물에게는 고작 허리까지밖에 차지 않는 것이었다.

안쪽에서 보기에, 성문은 난공불락의 어떤 것으로 보였다. 원래도 튼튼할 성문에 세 개나 되는 강철 빗장을 달은 데다가 그 위에 통나무를 덧대었고, 다시 목재로 만들어진 버팀목으로 문을 받쳐 놓았다. 차라리 성벽보다도 더 튼튼하게 만들어졌다고 할 만한 그 성문을, 괴물은 두 번 주먹으로 찍어 균열을 내었다. 그 사이 성벽 위에서는 부상자들을 끌어 내렸고 살아남은 사수들이 화살을 쏘았다. 몇몇 병사들이 성벽 위로 커다란 기름통을 날랐고 펄펄 끓는 기름이 괴물에게로 쏟아졌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괴물을 단지 화나게 할 뿐이었다. 쾅, 쾅 하고 성문이 울릴 때마다 나는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을 느꼈다.

한 순간 성문의 중심부가 박살나며 괴물의 두 손이 그 구멍을 쑤시고 들어왔다. 문은 힘없이 부서져 나갔고 마침내 괴물은 그 거대한 몸을 성문 안으로 들이밀었다. 괴물은 정말로 컸다. 성문이 조금만 낮았더라도 괴물은 고개를 숙이고 들어와야만 했을 것이다. 전날밤에 보았던 누워있는 형체로 그 크기를 짐작하긴 했지만, 이제 보니 웬만한 이층집은 그의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성문의 뒤로는 여러 개의 목책이 엇갈려 배치되어 있었고, 각 목책의 뒤에는 창병이 3 명씩 서 있었다. 그러나 이미 성문을 부술 수 있는 괴물의 힘 앞에서 내 키보다도 낮은 목책이 얼마나 도움이 될 수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목책은 괴물이 발로 차자 부서져 나갔고, 창병의 경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니, 어떤 운 나쁜 창병은 괴물의 복사뼈 밖으로 삐져나와 있던 칼날에 꿰여 덜렁거리고 있었다. 그의 시체는 한동안 괴물의 발 옆에 매달린 체 끌려다녔다.

태양 아래 드러난 괴물의 모습은 간밤보다도 더 흉측했다. 괴물의 파괴력은 간밤에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고, 병사들의 용기도 상상 이상이었다. 용감한 병사들이 달려들어 괴물의 몸에 각자의 무기들을 꽂았다. 괴물은 피하지 않았고, 전설 속의 용처럼 단단한 껍질로 튕겨내지도 않았다. 원망하는 자의 심장을 먹은 괴물, 무기를 부수는 자는 자신의 몸에 꽂힌 무기들을 흡수했다. 무기들이 박힌 상처에서 꿈틀거리는 것들이 기어나와 무기들을 휘감았다. 쩔그렁 쩔그렁 쇠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괴물의 살갗 바로 밑에 꽉 차 있는 무기들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괴물이 팔을 휘두르자,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피했다. 그러나 괴물은 가차없이 병사들을 쓸어내었다. 병사들 중 일부는 그 팔에 깔려 한 줌 핏물로 화했고, 어떤 병사들은 칼날에 난자당했다. 괴물의 팔과 단단한 보도블럭이 부딪치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대체로 보도블럭이 깨진 돌조각이었지만 개중에는 부서진 쇳조각들도 섞여 있었다.

참혹한 죽음이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죽음은 값어치를 했다. 수적들이 상선을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H강을 따라 배치된 공성병기들은 S시의 시장이 대여료를 지불하고 일주일 전부터 준비해 놓았었단다. 성문을 부수고 성벽을 허무는 무시무시한 발리스타가 거기 놓여 있었다. 한 대도 아니고 두대 씩이나. 네 사람이 한 조가 되어야 겨우 감을 수 있는 타륜을 돌려 감은 시위는 터질 것 처럼 팽팽해 져 있었다. 나는 공성병기가 작동하는 것을 처음 보았지만, 저 어마어마한 크기의 통나무가 과연 발사될까 하는 의문은 머리속에서 싹 지워지고 말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발사 직전의 발리스타는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과도 같은 힘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간단하게 걸쇠의 한쪽 끝을 눌러주는 것으로 발사의 과정은 끝났다. 한계까지 늘어났던 철사와 아교와 쇠 심줄의 시위는 지금까지 병사들이 힘겹게 감아 놓은 타륜을 맹렬하게 거꾸로 회전시키며 풀려나갔다. 동시에 발리스타 위에 얹혀져 있던 것이 사라졌다.

괴물은 간밤에도 들었던 그 섬뜩한 괴성을 질렀다. 피가 싸늘하게 식고,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도 그보다는 아름다운 소리를 지를 것이다. 고통과 분노로 괴물은 뒷걸음질 쳤지만, 끝내 쓰러지지 않았다. 거의 괴물의 팔뚝만한 통나무 두 개가 괴물의 가슴팍에 박혀있었다. 그 크기에 걸맞게 제 위력을 발휘한 발리스타는 괴물의 가슴팍을 꿰뚫어 그 안에 가득 찬 무기들을 박살내고 거대한 화살촉을 괴물의 등 뒤로 내밀고 있었다.

괴물의 뒤로, 북문으로 가는 길가에 늘어선 집들은 쇠의 파편과 나뭇조각과 흉물스런 괴물의 살점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런 가공할 파괴력을 가진 발리스타였기에, 두 번째 발사를 허용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괴물은 힘겹게 앞으로 움직여 발리스타를 짓밟았다. 병사들은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한동안 괴물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무런 행동도 안하고 멈추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만, 괴물은 그 자리에 서서 소화불량을 해결하고 있었다. 괴물의 키가 갑자기 낮아지면서 가슴팍 끝에서부터 늘어난 살들이 쇠뇌를 덮어버렸다. 꿈틀거리는 것들이 그 쇠촉을 휘감아 안쪽으로 잡아당겼고, 괴물의 살갗은 찢어지기도, 늘어나기도 하면서 그 거대한 쇠뇌를 끝끝내 집어삼켰다. 이 과정 내내, 나는 헛구역질을 했기에 그 광경을 자세히 지켜보지 못했다. 아니, 지켜보지 않았다는 게 옳으리라. 그건 정말 꿈에라도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다.

소화를 끝낸 괴물은 이번에는 길가로 시선을 돌렸다. 병사들은 더 이상 덤벼들지 않았고, 단지 멀찍이서 포위하듯 진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공성병기로도 어쩌지 못한 괴물을 그들의 미력한 칼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괴물이 길가로 시선을 돌렸다는 것은, 괴물이 길가의 집들을 장애물로 인식했다는 뜻이었다. 파괴는 한순간이었다. 벽돌로 만든 집들이 잠깐 사이에 허물어졌다. 나는 그 안에 사람들이 없었기를 간절히 기원했지만, 그건 헛된 기원이었을 뿐이다. 괴물이 팔을 들어올리자 그 밑에서 핏덩어리가 뚝뚝 묻어나왔다.

내가 정신이 나갔던 모양이다.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칼을 뽑아들었고, 그것을 괴물을 향해 던졌다. 살갗을 뚫고 박히나 싶었던 내 칼은 괴물의 몸 안쪽 어딘가에 있는 다른 무기와 부딪친 모양인지 텅 하는 소리와 함께 튕겨나왔다.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괴물의 주의를 끄는 데는 성공했다. 다만 문제는 저만치 있는 병사들이 나를 구하기 위해 달려와 줄 확률이 없다는 데 있었다.

병사들에게 가 있던 내 시선이 정면을 향했을 때, 괴물의 아무것도 없는 눈, 구역질나는 그물 같은 것이 들어찬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절망적으로 웃었고, 옆으로 몸을 날렸다. 뭐가 뭔지 알 수도 없는 찰나의 순간 격렬한 고통이 옆구리를 쑤셨다. 나는 바닥에 뒹굴고 있었고, 3층 옥상에서 떨어졌지만 그래도 돌로 된 도로보다는 덜 단단한 것이 바닥에 있어서 죽지는 않았떤 모양이었다. 내 밑에 깔린 것은 봉투에 담긴 지저분한 음식물 쓰레기였다.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으나 독한 냄새도 정신을 빨리 차리는데 도움이 별로 안 되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일어서자 괴물은 어느새 내가 올라서 있던 건물의 지붕을 날려버린 손을 다시 들어올리고 있었다.

미처 몸이 반응하기도 전에, 괴물의 주먹이 내리꽂혔다.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사신은 아직 이 미욱한 여행자를 데려갈 생각이 없었던 모양인지, 내 앞에 D를 데려다 놓았다. D는 자신의 검을 빼어들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건 기적같은 일이었다. 건물을 한방에 때려부수는 괴물의 주먹을 D가 칼 한자루로 비껴낸 것이었다. 물론 정면으로 막았다면 D도 나도 한꺼번에 한줌 핏물로 화했을 터였지만, 그는 노도와도 같은 힘을 옆으로 흘려냈다. 비록 그의 검은 산산히 부서졌지만 어쨌든 그 한번의 공격을 흘린 것으로 족했다. 우리는 미친듯이 달렸고, 괴물은 우리가 죽어라 달린 거리를 두 걸음 만에 따라왔다. 다행인 것은 방금 전 괴물이 삼킨 쇠뇌가 육중한 무게로 그 걸음을 느리게 하고 있다는 점 정도였다.

미친듯이 달리던 나는 내 등 뒤로 내리꽂히는 어두운 그림자를 감지하고 옆으로 굴렀다. 방금 전까지 내가 있던 자리에 어마어마한 주먹이 내리꽂혔지만 다행히 나는 무사했다. 다시 한번 몸을 일으키는데 눈앞이 핑 돌았다. 체력이 한계에 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지러움에 간신히 벽에 손을 짚고 일어나기는 했는데, 도저히 괴물의 다음 공격을 피할 힘이 나지 않았다. 나를 괴물의 손아귀에서 구한 것은 한 명의 외침이었다. 저 만치, 동문으로 연결되는 길에서부터 무엇인가 시커먼 것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길죽한 검은 몸체와 그것을 실어 나르는 수레. 맹세코 나는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언뜻 무슨 무기로 보였지만, 거대한 발리스타조차도 쓰러트리지 못한 괴물을 검은 원통으로 쓰러트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랬다. 그 검은 것을 싣고 있는 수레 바로 뒤에 말을 타고 따라오던 사령관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괴물의 시선을 그 쪽으로 유도했다. 덕분에 나와 D는 재빨리 골목 한켠으로 숨을 수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우리가 S시의 한복판에 와 있음을, 조금 전 내가 짚고 일어선 벽이 탑 ‘S시의 심장’ 임을 깨달았다. 어느새 하늘은 붉은 노을이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해가 지지는 않은, 그래서 파란 하늘이 여전히 보이지만 불분명한 회색빛의 경계선 너머로 구름은 아름다운 주홍과 붉은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괴물은 탑을 등지고 서서 포효했다. 그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저 시커먼 원통을 깨부수고 싶어했다. 그가 가진 원한만큼이나 강력한 주먹이 다시 하늘 위로 치켜올려졌다. 천지를 울리는 굉음이 터져나왔다.

그건 대포라고 불리는 신무기였으며, 시장의 요청으로 군에서 보내준 물건이었다. 아직까지 제대로 된 파괴력 시험을 거친 적이 없는 무기였기에 군의 신무기를 이런 용도로 사용하게 허락해 주었던 것이다. 대포의 위력은 단 한 번의 발사로 극명하게 드러났다. 괴물의 가슴에 거대한 철환이 박혀들었고, 발리스타 때와는 비교도 안되는 양의 쇳조각과 살점들이 폭발하듯 흩날렸다. 괴물은 쓰러지듯 탑에 기대었다. 뒤이어 달려온 두 문의 대포가 추가되었다. 세 문의 대포는 한꺼번에 불을 뿜었고, 괴물의 몸이 탑에 박혀들었다. 한 발은 빗나갔고 한 발은 가슴팍에, 다른 한 발은 허벅지께에 맞았다. 대포의 재장전은 발리스타 만큼이나 오래걸리는 일이었지만 그 긴 시간 동안 괴물은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다만 괴물의 증오에 찬 눈만이 허공에 분노를 던질 뿐이었다. 세 번째 발사에서 대포 일문이 반동을 견디지 못해 수레바퀴를 부러트려 먹었다. 바퀴가 부서진 대포에서 발사된 포환은 괴물의 머리를 날려버리고 그 뒤의 탑에 틀어박혔다. 다른 두 문의 대포는 착실하게 괴물의 가슴팍이 있던 자리를 때렸고, 괴물과 함께 탑을 붕괴시켰다. S시의 심장 동쪽 외벽은 그렇게 허물어졌다. 심한 먼지구름과 포연으로 시야가 터무니없이 제한되어 있었기에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다만 나는 무너지는 탑 사이로 쏟아지는 금화의 폭포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무기의 파편들과, 괴물의 선혈 대신 흘러내리는 붉은 노을을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이것으로, 이 지루한 이야기의 끝에 무언가 대단한 반전이라도 있었을 거라고 기대한 당신들에게는 좀 미안한 일이지만, 이야기는 끝이다. 나와 D는 그 다음날 S시를 떠났으며 가는 길에 한 가련한 여인의 시체를 길가에 묻어주는 일을 마지막으로 당분간 그 지역에 가까이 가지 않았다. 그 후로 나와 D는 몇가지의 흥미로운 모험을 같이 했지만, 이 이야기는 여정 내내 우리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결국 여정의 어느 날 나는 D에게 새로운 목표를 제시했다. 그 목표에 D도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며, 좀 아쉽긴 했지만 우리는 서로 작별을 고했다. 물론 1년 뒤에 그와 나는 S시에서 다시 만날 예정이다. 내가 새로 제시한 목표는 영웅찾기였다. 이 목표는 괴물이 쓰러지던 날 S시에서 D가 했던 말 때문에 생각해낸 것이었다. 그날, 시장은? 아, 물론 그는 살아 있다. 고령으로 좀 쇠약한 것만 빼고는 ? 우리를 영웅이라고 부르며 약간의 상금을 보내왔다. 시장이 정확히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괴물을 쓰러트린 건 우리가 아니라 그 대포인데도.

아무튼 그 때, 상금을 전달해 주는 병사에게 D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이 세상에 영웅은 없습니다’ 라고. 비록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시도 자체를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점에서 그는 나와 뜻이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고향으로 돌아와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혹 이 이야기를 읽은 당신들이 아는 사람 중에 영웅이 있다면 제발 나에게 좀 알려주길 바란다. 우리는 괴물이 아니면서도 무기를 부수는 자, 폭력이 아닌 것으로 폭력을 꺾는 자, 승리를 거둘 때 남에게 패배를 안기지 않는 그런 영웅을 찾는다. 혹시, 당신은 영웅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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