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우수작 너는 눈을 감는다

2014.03.31 22:2703.31

너는 눈을 감는다.
너는 눈 감은 채로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린다. 마지막으로 본 지 벌써 칠 년이 지났건만 상상 속 그녀는 어제 본 것처럼 선명하다. 새치가 희끗희끗 보이는 단발머리로부터 마르고 엄격해 보이는 얼굴과 또 볼품없는 몸매까지 너는 어머니의 모습을 오감 그 자체로부터 불러올 수 있다.

네 어머니는 너를 경멸한다. 비웃음마저 담기지 않은 싸늘한 표정으로 너를 내려다본다. 차가운 시선은 날아드는 칼날이 되어 네 심장에 꽂힌다. 영혼으로부터 느껴지는 네 고통을 그녀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는 네게 말하기 시작한다. 너는,

하고 그녀가 입을 연다. 명백한 적의를 담은 대기의 파동은 그 위에 실린 감정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늪과 같은 바닥으로 추락한다. 어둠 속에 녹아들어 스멀스멀 기어온다. 코를 찌르는 증오의 악취가 네 사지를 마비시킨다. 무너지는 너를 향해 그녀는 말을 잇는다. 태어나지,

하고 이어진 다음 어절이 너를 후려친다. 우아한 어조로 곱게 포장한 혐오감을 너는 네 감정의 일부처럼 분명히 느낄 수 있다. 네 가슴은 저릿하게 아프고 이내 불길하게 두근거린다. 너는 어머니의 메마른 입술을 바라본다. 비틀린 그 입술엔 멸시가 담겨 있다. 찌르르 울리는 통증 속에서 너는 문득 다음에 이어질 단어들을 짐작하고야 만다. 이윽고 그녀는, 진심을 담아, 씹어뱉듯, 선언한다. 말았어야 했다, 라고.

지금의 너는 상상할 수 있는가, 너를 낳아 준 어미에게 네가 태어나지 않았어야 했다는 말을 듣는 기분을? 그때의 넌 상상할 수 없었고 그래서 더욱 고통받았다. 열여섯 살의 정신은 그런 충격을 견딜 만큼 견고하지 못하다. 하물며 몇 년이나 반복해서 그런 말을 듣는다면 정신이 무너져 내린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네 어머니가 네게 처음으로 진심을 털어놓았던 그날부터 스물두 살 되던 해에 집을 나오기 전까지의 육 년간 네 인생은 완전히 망가졌고 너는 손상을 돌이킬 수 없었다. 너는 그 시절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시간이 한참이나 흐른 뒤에도 너는 과거에 얽매인 삶을 살게 된다.

무엇이 너희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너와 네 어머니의 관계가 처음부터 줄곧 이랬던 것은 아니다. 기억마저 희미해져 가는 그 밝았던 어린 날 너는 사랑스러운 딸이었고 그녀는 자애로운 어머니였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어머니는 언제나 너를 반기며 정성이 담긴 식사를 차려 주었다. 저녁에는 어머니의 무릎에 올라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고 밤이 되면 어머니는 네 머리맡에 앉아 네가 잠이 들 때까지 온갖 신비로운 환상이 깃든 옷장 속의 나라와 마법의 잠에 빠진 공주, 그리고 머나먼 나라 어느 저택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화원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정말이지 행복한 시절이었다. 사소한 문제들은 상관없을 만큼 웃음이 넘치는 나날이었다. 네가 살던 집은 아담하고 아름다웠다. 너는 거실의 넓은 창문에 걸린 부드러운 벨벳 커튼을 좋아했다. 바다를 향한 창문으로는 일몰이 보였다. 커튼을 치면 네모난 사각 창틀과 그 너머로 날아다니는 새나 잠자리들이 커튼 위에 검은 자욱을 남기곤 했다. 석양빛이 거실 바닥에 커튼과 같은 무늬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미처 가리지 못한 틈새로 태양 한 조각이 떨어지는 황혼 즈음을 너는 좋아했다. 노랗게 반짝이는 일광은 너를 안아주던 네 어머니의 온기, 그 향그럽던 체취와 닮아 있었다.

무엇이 너희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너는 열다섯 번째 생일을 맞던 해에 당한 사고를 떠올린다. 당시 너는 촉망받는 소설가 지망생이었다. 교내 백일장이나 지역 대회는 물론 전국 규모의 공모전에서까지 대상을 놓친 적이 없을 정도로 너는 실력이 출중했다. 네가 가진 재능은 또래 아이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어서, 문학 선생은 너를 천재로 여기며 가까이 두었다. 예고 진학은 물론이고 좋은 대학에 가는 것도 문제없다며 너를 추켜세웠다.

네 언어에는 힘이 있었다. 너의 문장엔 산을 뒤흔들고 계곡을 울릴 목소리와 광활한 대양 위를 활공할 날개가 있었고, 너의 단어엔 남주석과도 같은 청명함이 깃들어 있었다. 푸르게 타오르는 네 담대한 심장은 네 글이 갖춘 정제되지 않은 힘을 완벽히 다스렸다. 이제 너의 정신은 쇠락해 한때 눈부시게 빛났던 그 세계의 그림자만이 네 안에 남았지만, 그 무렵의 너는 그 힘이 너를 인식의 지평선 너머 머나먼 곳에 존재하는 찬란한 왕국으로 데려가리라 믿었다.

너는 그날의 사고를 떠올린다. 그날은 네가 지망하던 예술고등학교의 입학 실기평가 날이었다. 아버지는 괜찮다며 마다하는 너를 바래다주기 위해 출근도 한 시간이나 미룬 채 운전대를 잡았다. 과묵하던 그답지 않게 너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으며, 당신의 딸은 분명 잘해낼 거라고 너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러느라 네 아버지는 차선을 이탈한 승용차를 보지 못했고, 달리는 속도 그대로 맞은편에서 오던 차와 충돌했다. 그날 너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아버지는 죽었다. 너는 언어를 잃었다. 

너는 비유창성 실어증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장애를 얻었다. 전두엽의 브로카 영역이 손상되어 단어 선택에 어려움을 느끼는 거라고 했다. 설명은 정확했다. 이전에 네가 숨 쉬는 것처럼 자유롭게 빚어내던 단어들을 너는 더이상 떠올리지 못했다. 네 영혼의 깊은 우물로부터 언어의 샘물을 길어올리려고 할 때면 너는 마치 안개를 퍼올리려 하는 것과 같은 답답함을 느꼈다. 글을 쓸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소설가가 되려는 꿈은커녕 예술고교 진학마저 너는 포기해야만 했다.

할 수 있어, 하고 어머니는 말했다. 팔에 석고를 두른 채 누운 네게 그녀는 병원 앞 서점에서 책을 한 권 사다 주었다. 폐쇄증후군에 걸린 프랑스 인이 눈 깜박거림만으로 완성했다는 책은 분량이 무려 180쪽이나 되었다. 어머니는 네게 책을 안겨주면서,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다면 어떤 시련이라도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엄마는 우리 자랑스러운 딸을 믿어, 하며 네게 속삭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네가 다시 말할 수 있게 된 후에도 언어의 힘은 끝내 네게 돌아오지 않았다.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던 그 숭고한 반짝임은 다시는 네 문장에 깃들지 않았다. 이제 네 글은 발에 채는 평범한 고등학생의 글에 불과했다. 사실을 깨달은 너는 글쓰기를 그만두었다. 네 어머니가 변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네 어머니는 나이 많은 여자였다. 일하느라 시기를 놓쳐 불혹에 가까워서야 결혼한 네 어머니는 네 또래의 부모님들보다도 한참이나 나이가 많았다. 더 어릴 때엔 그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한 해 두 해가 지나며 그 부끄러움은 안타까움으로 변했다. 너희가 어른이 되어 사회에 자리를 잡고 나면 네 친구들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을 보답할 수 있겠지만 네게는 시간이 부족했다. 풍수지탄이라는 고사의 의미처럼 어머니가 너를 언제까지나 기다려주지는 못할 터였다. 너는 조금이라도 일찍 성공해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었다.

네가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것 역시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어머니가 네 글을 무척 좋아했었으니까. 네가 잠자는 것도 잊어버린 채 밤새 쓴 소설을 수줍게 어머니에게 내밀면 어머니는 네가 시험에서 일 등을 했을 때보다도 더욱 환하게 웃어주곤 했다. 그래서 너는 글을 썼다.

시끄러운 소란도 떠들썩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도시 한 켠의 작은 동네에서 너의 존재는 독보적이었다. 큰 대회에서 몇 번인가 수상하고 나자 너는 유명인사가 되어 근방에서는 네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네가 길을 가다 마주친 아주머니에게 인사라도 하면, 자연스레 네가 그렇게 글을 잘 쓴다며? 하는 질문이 돌아오는 것이었다.

네가 그렇게 글을 잘 쓴다며? 그렇게 물어오는 그녀들의 눈빛에는 놀라움이나 대견함과 함께 약간의 질시도 담겨 있었다. 우리 아이도 저 애처럼 재능이 있다면 좋을 텐데, 우리 애도 특출나다면 좋을 텐데, 하는 시선. 남편과 자식 외에는 내세울 것이 없는 그들은 자식의 별것 아닌 명예조차 훈장이라도 되는 양 과시했다. 하물며 네 어머니는 어떠했겠는가. 친구들이 한창 자식 자랑을 할 시기에는 아이는커녕 남편도 없이 일에만 매달렸던 그녀였다. 아직 어린 너를 키우면서 친구들의 장성한 자녀들이 사회로 진출하는 모습을 보며 네 어머니는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았을 터였다. 그렇기에 모두를 경탄케 하는 늦둥이 딸의 재주가 그녀에겐 더욱 자랑스러웠으리라.

네가 더이상 글을 쓰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그녀는 너를 격려하는 일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죽었을 때보다도 더 넋이 나간 사람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어떤 때에 그녀는 평소처럼 자애로웠다. 그러나 또 다른 때에는 대수롭지 않은 것에 대해 불같이 화를 내거나 사소한 일로 신경질적인 울음을 터뜨렸다. 생의 의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무기력하게 앉아있거나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 온종일 생각에 잠겨있기도 했다. 너는 마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 자신인 것처럼 구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사고의 흔적이 어머니에게만 남은 것은 아니었다. 네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 턱이 없는 동네 아주머니들은 여전히 너를 향해 네가 그렇게 글을 잘 쓴다며? 하고 물어왔다. 너는 글을 잃었건만 사람들이 너를 바라보는 시선은, 너에게 거는 기대는 전혀 변한 것이 없었다. 이제는 글을 쓰지 못해요, 하고 대답해봐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길을 가는 사람 모두를 붙잡고 이야기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는 글을 잃었습니다, 정말이에요, 하고.

'네가 그렇게 글을 잘 쓴다며?' 그 악의 없는 질문은 줄곧 너를 괴롭혔다. 누구에게든 털어놓고 싶지만 동시에 아무에게서도 어떤 이야기도 듣고 싶지 않았던 너는 멋쩍게 웃으며 대화 주제를 바꿨고, 사람들은 그것을 겸손함으로 오해했다. 아무 말도 하기 싫다는 네 생각이 오히려 그들을 더욱 집요하게 만들었다. 네가 얼마나 글을 잘 쓰는지에 대한 질문은 한참이나 그림자처럼 너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정작 '아줌마들'의 사회의 일원이자 상처 입은 너를 대신해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해야 할 네 어머니는 나서는 일 없이 침묵만 지켰다. 오히려 집 안에만 틀어박혀 그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으려고 들었다. 너는 어머니가 일의 전말을 설명해주기를 바랐지만 어머니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나 너는 어머니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그 일은 네 어머니에게도 크나큰 아픔이었으리라. 네 어머니도 그 집 딸이 그렇게 글을 잘 쓴다면서요, 하는 질문을 듣는 것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으리라.

네 어머니의 우울증은 점점 심해져만 갔다. 시간이 흐르며 그녀의 무기력증은 갈수록 정도를 더했고, 폐경기 증상까지 겹쳐 그녀의 정신 상태는 극히 불안정해졌다. 그녀가 들어앉은 방은 한낮에도 두꺼운 커튼에 가려 햇빛이 들지 않았다. 문을 열면 벽에 걸린 낡은 시계가 똑, 딱, 똑, 딱, 하고 울리는 소리만이 적막이 감도는 방을 채웠다. 어머니는 그 방에 앉아 의미 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곳엔 말도, 울음도, 부스럭거리는 소리조차 없었다. 어머니는 그저 똑, 딱, 똑, 딱, 하는 시계 소리만을 하염없이 듣고 있을 뿐이었다.

어머니가 시계 소리를 벗어난 것은 네가 그렇게 글을 잘 쓴다며? 하는 물음이 차츰 줄어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녀는 장을 보고, 요리를 했으며, 밀린 청소와 빨래를 했다. 종일 입을 다물고 있느라 목소리가 잠기긴 했지만 먼저 네게 말 거는 일도 생겼다. 그러나 그 어느 행동에도 생기는 없었다. 너희 모녀가 사는 집은 마치 죽은 이의 무덤처럼 음울하게 변해갔다. 디링, 너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하얀 빛을 뿜는 액정에는 달력 어플리케이션에서 보낸 알림창이 떠 있었다. 엄마 생일, 내일. 까맣게 잊었던 날짜였다. 스크린 위에 떠오른 여섯 글자는 네가 집안의 문제에 대해 방관자가 아닌 주인공임을 상기시켰다. 너는 소설을 쓰지 않게 된 이후로 열지 않던 랩탑의 전원을 켜고 인터넷을 통해 잔액을 확인했다. 여러 대회에 출품해 받은 상금이 아직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네 어머니는 종종 중요한 모임이나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에 참석할 때 에메랄드색 가죽 가방을 들었다. 앞면에 커다란 금색 버튼으로 포인트를 넣은 가방은 아버지가 출장 중에 스위스 인터라켄에서 사온 명품이었다. 명품이라고는 해도 상상 못 할 만한 가격은 아니었건만 어머니는 절대로 그 가방을 쉬이 들고 나가는 법이 없었다. 여제의 손에 들린 왕홀처럼, 스스로의 명예를 높여야 할 때에만 가방을 들었다. 그마저도 네 아버지가 죽은 뒤로는 검은 방안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하염없이 금색 똑딱이 단추만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너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가 보기에 어머니는 죽은 아버지의 기억에 매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정체되어 있었다. 네가 보기에 네 어머니에게 필요한 것은 추억에 잠길 매개체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힘을 줄 새로운 바람이었다. 새 가방을 사주자, 너는 결심했다. 아버지가 사다 준 것처럼 값진 명품은 아닐지라도, 누구와 만날 때 들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그런 새 가방을.

다음 날 저녁 너는 케이크와 가방을 사 들고 어머니의 앞에 앉았다. 선명한 색채의 과일이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 위에 초를 꽂는 네 모습을 보며 어머니는 잠긴 목소리로 웬 거니, 물었다. 웬 거니. 오늘 엄마 생일이잖아. 그렇게 대답하며 너는 네 어머니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입 속으로 네 대답을 되뇌었다. 생일. 이윽고 그녀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 생일. 너는 마주 웃었다. 응, 생일. 엄마 생일.

케이크에 긴 초와 짧은 초를 각각 다섯 개씩 꽂고 불을 붙인 뒤 미리 포장해 둔 선물을 내밀었다. 어머니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상자를 열어 가방을 꺼냈다. 가격을 맞추기 위해 발품을 팔아 간신히 산, 네 아버지의 가방과는 정반대인 빨간 가방이었다. 네 어머니는 처음엔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이윽고 사고 이후로 처음 보여주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언제 슬퍼했었느냐는 듯 즐겁게 웃으며 뭐 이런 걸 다 샀느냐고 네게 물었다. 그런 어머니가 너는 너무나 좋아서, 우리 사랑하는 엄마 활짝 웃게 해주려고 샀지, 했다. 

우리 딸 엄마랑 술 한잔 할까? 하고 네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말하며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꺼내오는 어머니를 향해 너는 황당하다는 눈길을 보내었다. 엄마, 엄마 딸은 미성년자란 말야. 괜찮아, 원래 술은 어른들에게 배우는 거야. 그리고 지금부터 익숙해져야 나중에 사회에서 흉한 꼴 안 보이지. 그렇게 말하며 어머니는 빈 잔에 술을 채웠다.

태어나 처음 받아본 술잔에 너는 복잡미묘한 기분이 되었다. 어머니는 무슨 심정으로 아직 어린 딸을 술벗 삼은 걸까? 어릴 적 네가 한 모금 마셔보겠다고 졸라도 몸에 좋지 않다며 주지 않던 그녀는 어떤 기분으로 네 잔을 채웠을까? 네 어머니가 너를 보호의 대상이 아닌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다행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혹시,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기댈 곳이 없어져서 어쩔 수 없이 딸인 네게 의지하기 시작한 걸까?

안 마시고 뭐 해? 하고 어머니가 물었다. 너는 어머니를 잠시 바라보다가, 네 모든 고민을 머릿속 깊은 곳에 넣어 자물쇠를 채우고는, 그녀를 향해 대답했다. 건배 문구를 고민하는 중이야. 그러자 네 어머니는 킥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들뜬 목소리로 아이디어를 내기 시작했다.

우리 딸의 첫 음주를 위하여, 건배! 어때? 그게 뭐야, 유치하잖아. 그리고 첫 건배를 음주를 위해서 하는 경우가 어디 있어? 새 만년필로 처음 쓰는 글귀가 나 만년필 샀다, 인 것 같잖아. 그런가? 그럼 즐거운 술자리를 위하여! 로 할까? 그거나 그거나. 오늘은 엄마 생일이니까, 엄마의 쉰 다섯 번째 생일을 위하여, 같은 게 좋지 않아? 네 어머니는 까르르 웃으며, 싫어, 그건. 나이 많은 게 무슨 자랑이라고. 그냥 우리 딸이 다시 글을 쓰기를 바라며 건배, 이걸로 하자, 했다.

아이, 참! 너는 신경질을 내며 술잔을 홱 들어 올렸다. 기분을 망친 네가 술을 그냥 마셔버리려고 하자 어머니는 깔깔 웃으며 잽싸게 손을 들어 너를 제지했다. 미안, 미안해. 농담이었어. 다른 걸로 하자. 너는 원망하는 눈길로 네 어머니를 노려보며 투덜거렸다. 엄마는 그런 농담이 재밌어? 그러면 차라리 엄마가 그만 좀 집에 있고 밖에 나가서 사람 좀 만나길 바라며 건배하는 게 어때? 네 어머니는 여전히 낄낄거림을 멈추지 못한 채 눈을 흘기는 네 팔을 잡아당겼다. 아니, 아니야. 그녀가 말했다. 아냐, 좋은 말을 찾았어. 앞으로 펼쳐질 두 모녀의 새로운 삶을 위해, 건배! 너희는 웃음을 터뜨리며 서로의 술잔을 부딪쳤다.

엄마는 말이지, 하고 잠시간의 침묵을 깨고 네 어머니가 내뱉었다. 술기운이 올라 살짝 달아오른 뺨을 만지작거리며 그녀는 또 한 잔 술을 비웠다. 엄마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어. 어릴 적의 너처럼 재능이 넘치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엄마는 글로 자신을 표현하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그런 삶을 꿈꿨단다.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없던 시절에 태어난 엄마는, 하면 안 되는 말들을 글로 다 적어내고, 글로도 쓸 수 없는 것들은 그냥 무시하면서, 그렇게, 살고 싶었어.

너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이야기에 당황했다. 그때껏 어머니는 한 번도 네게 자신의 꿈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너는 어머니에게도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었을 거라는 당연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면서부터 어머니인 양, 너는 마치 그녀가 밥 짓고 청소하고 빨래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처럼 생각했었다. 어머니도 당연히 인생에서 무언가를 바랐을 텐데, 너는 단 한 번도 어머니의 꿈에 대해 관심을 가져보지 않았다.

그런데 너희 외할아버지는 엄마가 글 쓰는 게 무척 싫으셨나 봐. 언제나 여자의 본분은 집안일이라면서 천박한 글쟁이 흉내를 낼 시간에 부엌이나 살피라고 엄마에게 말씀하셨거든. 엄마가 끓어오르는 열정을 참지 못하고 몰래 조각글이라도 쓸라치면, 어느새 나타나셔서는 노발대발하셨어. 여자애는 그러면 안 된다고 엄마를 심하게 꾸짖으셨어.

외할아버진 분명 엄마를 너무 사랑하셔서 그러셨을 거야.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가는 게 여자가 누리는 최고의 행복인 시대였고 할아버지는 그분 나름대로 엄마가 행복해지길 바라셨던 거지. 그분이 생각하신 행복의 기준이 엄마의 기준과 달랐을 뿐 너희 외할아버지도 엄마를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걸 아니까 무작정 고집만 부리지는 못하겠더라. 그래서 엄마는 일단은 외할아버지 뜻대로 하기로 했어. 아직 어릴 때였고 시간은 많았잖아? 글은 언제든 쓸 수 있으니까, 우선은 현실적인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한 거야.

엄마가 보기에 그 시대 사람이 성공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공부였어. 정말이지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변해서 따라가기도 벅찬 시절이었으니 거꾸로 무엇이든 배워 두기만 하면 어딘가엔 써먹을 곳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면 엄마에게도 양인들이 말하던 자아실현의 기회라는 게 올지도 모른다고 상상했어.

자아실현, 어찌나 아름다운 말인지! 엄마가 어렸을 때라고 하면 너는 여자들이 집안일만 해야 했던 시절이라고 생각할까?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어. 지난 세기 초에 영국에서 벌어진 여권 신장 운동 알지? 수많은 여성 운동가들이 참정권을 위해 싸웠지만 정작 여성이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은 것은 세계대전 이후였잖아. 너무 많은 남자가 죽어서 대체 인력으로 여성의 참여가 필요해진 후에 말이야. 이 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았어. 엄마가 여자도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그나마 엄마가 전후 세대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거야.

그래서 엄마는 공부를 하기로 했어. 꿈은 여전히 소설가였지만 글을 배우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으니까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것들만 열심히 배웠지. 그런데 막상 공부를 시작하고 보니까 너무 막막하더라.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데다 별로 하고 싶은 일도 아니니까 도무지 흥미가 붙질 않는 거야. 공부하는 한 시간 한 시간은 그렇게도 긴데 하루하루는 또 어찌나 빨리 가는지, 도대체 감을 잡을 수 없더라니까. 그러다 슬슬 요령이 생긴다 싶으려니 어느새 졸업할 때나 되고.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에게 공부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던 것 같아.

그런데 말이지, 공부를 하면 할수록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은 점점 커져가더라. 아는 게 많아지니까 머릿속에서 이야기가 넘쳐 흐르는 거야. 세상엔 저런 일도 일어나는구나. 저건 그런 원리로 작동하는구나. 이런 느낌으로도 글을 쓸 수 있구나. 배우는 것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엄마 머릿속에 들어와서는 나에 대해 써달라고, 나와 놀아 달라고 칭얼대는 것 같았어. 그래도 엄마는 꾹 눌러 참았어. 글은 나중에도 쓸 수 있으니까, 언제든지 쓸 수 있으니까 하는 생각으로 열정을 억눌렀어. 일단은 현실에 집중하자, 그렇게 생각했어.

그렇게 현실에만 집중하며 살다 보니 어어 하는 사이에 엄마는 미용사 일을 하고 있더라. 지금 미용사라고 하면 별로 대단하게 들리지 않겠지만 그때만 해도 미용사란 건 수많은 여자들이 선망하던 최고의 직업이었단다. 힘들거나 궂은일도 아니고 배운 것이 많아야만 할 수 있는 일도 아닌 데다가 무엇보다도 미용사 일은 돈이 꽤 되었으니까. 엄마가 원하던 직업은 아니었지만 엄마는 그 일도 마음에 들었어. 손님의 머리 뒤에 서서 사각거리며 가위질을 하고 있노라면 이야기들이 엄마를 찾아와 속삭이는 것 같았거든. 수다스러운 손님이 오면 다양한 계층의 손님들이 그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사건에 대해 들을 수 있어서 좋았고, 말 없는 손님의 머리를 잘라줄 때엔 머릿속에서 상상의 실타래가 얽히는 거야. 글을 쓰진 못했지만 그래도 좋았지. 직접 쓰는 건 다음에도 할 수 있으니까, 그때는 상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했었어.

그런데 한참을 그렇게 일만 하다 보니까 어느새 나이만 많고 볼품없는 여자가 되어버렸지 뭐야? 손은 거칠고 쭈글쭈글하게 갈라져서 보기 싫고, 얼굴엔 주름만 가득하고.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누가 그렇게 나이 든 여자를 좋다고 하겠어? 아는 사람을 통해 재취자리 하나 겨우 얻을 수 있었지. 그게 네 아빠였단다. 네게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처음에 엄마는 네 아빠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 아무리 엄마가 마흔이 다 된 노처녀였기로서니, 변변히 내세울 것 하나 없는 홀아비가 어디 눈에 차기나 했겠니?

엄마가 아빠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건 네 아빠와 계속 만나보면서 무뚝뚝한 줄로만 알았던 그 남자가 사실은 성실하고 배려심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그이가 엄마의 꿈을 지원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었어. 풍족한 것까진 아니더라도 안정적인 직업을 가졌고 또 어쨌든 혼자 사는 것에 비해 역할 분담도 될 테니까. 생활에 대한 부분은 내가 책임질 테니 당신은 일을 그만두어도 됩니다, 라고 엄마 눈을 들여다보며 말하는 모습이 어찌나 듬직하던지, 이 남자라면 내 인생을 맡겨도 되겠구나, 싶더라니까. 그래서 확 잡아버렸지.

뭐, 요즘 아이인 너는 이미 짐작했겠지만, 사람 사는 게 그렇게 딱 계획대로, 조건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더라. 무식한 옛날 여자인 엄마만 나이 사십 먹도록 그걸 몰랐었나 봐. 결혼하고 처음 얼마간은 신혼이니까 글 같은 거 쓸 겨를이 없었고, 널 임신하고 나니까 또 책상 앞에만 앉아있을 수가 있나. 태교에 뭐에 바쁜 데다가 자세도 조심해야 하고 또 뭣도 조심해야 하고 온종일 기분은 엉망에 도대체가 뭘 쓰고 자시고 할 상황이 아니었지. 그뿐이겠어? 너를 낳고 나니까 몸은 만신창이에 그 조그마한 것이 어찌나 손이 많이 가는지, 넌 아마 짐작도 못 할 거야. 밤낮 구분 없이 두 시간마다 깨어서 젖 물리고 기저귀 갈고 달래서 또 재우고… 사람이 잠을 못 자니까 온종일 정신이 몽롱하더라고. 그런 정신으로 글은 무슨 글이겠어? 쓰겠다는 생각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고 정신없이 살았지.

네가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고서는, 글쎄, 말도 마라. 밥 먹이랴, 공부시키랴, 전쟁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니까. 아이를 가르친다는 건 어미 짐승이 새끼에게 씹은 먹이를 토해 주는 것과 비슷해. 부모가 가진 지식을 소화하기 쉽도록 잘게 씹어서 입에 넣어줘야 한다구.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도 그렇지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예절이나 규칙, 그리고 타인과 교류하는 방법까지도 전부 부모의 노력을 한 번씩 거쳐서 아이들에게 전달되는 거야. 너 어릴 적에도 네게 먹일 지식을 씹어 주느라 고생 좀 했지. 그런데 그러다 보니 정작 엄마 자신을 위해 뭔가를 소화시킬 시간은 없더라.

지금 네가 느끼기엔 엄마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온종일 집에만 있는 엄마가 뭐가 그리 바쁘냐고 생각하겠지? 엄마도 그렇게 생각해.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도대체 왜 그렇게 할 일이 많았는지, 또 어쩜 그리 매일 시간이 부족했던 건지 이해가 안 된다니까. 그렇게 신기할 정도로 정신없이 살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이 시간이 남아도는 거 있지? 누군가가 하루를 잡아 늘이기라도 한 듯 매일매일이 견딜 수 없이 길고 지루해진 거야.

아침에 일어나서 밥상을 차리고 너와 네 아빠를 깨워. 그리고 두 사람이 아침을 먹는 동안 네 도시락을 준비하는 거야. 식사를 마치고 나갈 준비를 하는 둘의 뒷바라지를 하고, 두 사람을 보낸 다음에는 설거지와 집 안 청소, 그리고 빨래를 하지. 그러고 나면 이제 점심 먹을 때가 되니까 전날에 먹다 남은 찌개나 잔반을 혼자 데워서 먹어. 그러고는 네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하염없이 앉아서 온종일 TV만 보는 거야. 날마다 방송되는 연속극이나 퀴즈 프로그램, 버라이어티 쇼나 뭐 그런 것들을.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아서 머리가 점점 굳어가는 느낌을 너는 아니? 시간은 남아도는데 할 일은 없어서 마치 아편을 찾는 중독자처럼 다급하게 무엇이든지 시간을 때울만한 일을 찾게 되고, 만약 찾지 못하면 고통스러우리만치 불안하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그 기분을 말이야. 그래도 TV를 보고 있으면 넘쳐 흐르는 시간의 바다에 휩쓸려 허우적대지는 않아도 되니까 마냥 앉아서 화면 속의 사람들이 저들끼리 웃으며 바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의미 없이 보고만 있곤 했지. 그렇게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어.

어느 날이었을까, 아마도 네가 아직 초등학생이었을 무렵의 어느 겨울날이었을 거야. 네 아빠는 출근하고 방학 중이던 너는 친구들과 영화를 본다며 아침부터 집을 나섰지. 날이 추워서 밖에 나가는 대신 평소처럼 담요를 덮고 TV를 켰어. 춥지 않았으면 나갈 곳이 있었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지만. 마지막으로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게 언제인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아서 네가 좀 부럽긴 했지. 그렇다고 대낮부터 혼자 영화 보러 가긴 뭐하니까 평소처럼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머릿속 어딘가의 낡은 서랍 한 켠에서 해묵은 꿈 하나가 슬슬 고개를 들더라.

그건 글을 쓰는 꿈이었어. 항상 나중에도 쓸 수 있다는 생각으로 미뤄왔었는데, 그때가 바로 그 나중이었던 거야. 글을 쓰자, 라고 생각했어. 오랜 시간 소중히 간직해 온 꿈을 이루기에 충분한 시간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일상의 일부로 느껴질 만큼 익숙했던, 쓰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서 쓸 수밖에 없었던 글이, 갑자기 너무나 멀게 느껴지는 거야. 글은 언제든 쓸 수 있다고, 꼭 지금 쓰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게 미뤄뒀는데, 막상 글을 쓸 시간이 생기니까 도무지 써지지가 않더라. 손에 잡힐 듯 말 듯 한 꿈이었는데, 이젠 만년설이 덮인 산꼭대기처럼 멀게만 보이는 거야.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 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꿈을 잃은 원통함을 쏟아내기라도 하듯 서럽게 울었다. 너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한 채 네 어머니의 눈물을 지켜보았다. 같은 꿈을 꾸었고 또 그 꿈을 똑같이 잃어버린 너는 어머니의 설움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러지 못할 터였다.

네가 겪은 것이 지진이나 해일 같은 파괴적인 손실이었다면 네 어머니의 삶은 오랜 세월에 걸쳐 풍화되고 침식되어 더는 생명을 품을 수 없게 된 메마른 사막과도 같았다. 일을 위해,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 온 그녀의 인내는 그녀가 간직해 온 평생의 꿈을 닳아 없어지게 만들었을 뿐 그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다. 평생을 참으면서 살아왔는데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삶은 어디에 있는가? 그녀가 미래를 열망했던 어린 시절과 눈부시던 젊음과 확신에 찬 장년기와 따뜻한 황혼은 전부 어디로 사라졌는가? 그녀가 소모한 인생을 되돌려줄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아무도 없었다. 원망할 사람조차 없었다.

엄마 많이 취했다, 이제 그만 들어가서 자자. 너는 어머니를 부축해 안방으로 들어갔다. 비틀거리는 어머니를 간신히 침대에 눕히자 어머니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너는 옆에 앉아 가만히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깡마른 어깨가 조금씩 들썩였지만 이내 잦아들었다. 네 어머니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사실은 너를 조금 질투했었어. 나는 꿈을 포기했어야만 했는데 너는 마음대로 도전할 수 있었고, 거기에 더해 재능마저 가졌었으니까. 내가 가지지 못했던 것들을 너는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너를 더 예뻐하려고 했어. 너에 대해 조금이라도 안 좋은 감정이 들면 그때마다 더욱더 너를 사랑하려고 노력했어. 그리고 네가 글을 못 쓰게 되었을 땐, 엄마가 네게 저주라도 건 듯한 기분이 되어서 어찌나 미안하고 안타깝던지. 너는 엄마가 이루지 못했던 것을 대신 이뤄줄 아이였는데, 그렇게 생각했어야 했는데. 엄마의 말도 안 되는 질투심 때문에 네가 그런 일을 당한 것만 같아 스스로가 너무 미웠어. 너를 볼 낯도 없었고.

너는 네 어머니가 쏟아내는 진실들을 들으며 사고 후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다친 딸을 붙잡고 건강을 염려하는 대신 글쓰기를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던 어머니의 행동은 분명 이상했다. 그것은 필경 죄책감 때문이었으리라. 너는 돌아서서 안방에서 나왔다. 네가 문을 닫으려 할 때 어머니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네가 태어나기 전까지 엄마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단다. 너는 조용히 네 어머니의 말을 되새김질했다. 문이 닫히기 직전, 자조적인 웃음이 섞인 어머니의 목소리가 문틈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정말이지, 너를 낳지 말았어야 했는데. 너는 문을 닫았다.

너는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을 텐데. 네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너는 어머니의 방 문 앞에 주저앉아 그 말의 의미를 곱씹어보았다. 어머니는 너를 낳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작가의 꿈을 포기해야만 했던 것이 너를 낳았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 너는 당장에라도 닫힌 방문을 다시 열고 그것은 네 탓이 아니었노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너를 낳지 않았다면 네 어머니는 분명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겠지만, 그런 삶 대신 평범한 가정주부로서, 한 아이의 어머니로 사는 생을 택한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너를 낳기로 한 사람은 네가 아닌 네 어머니였다. 너는 너를 향한 어머니의 책망이 부당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어머니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너는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았다. 너는 본능적 모성애라는 기만적 환상을 믿지 않았다. 모성애는 사회적으로 훈련된 특성일 뿐 본능이 아니다. 네가 다른 누구보다 너를 가장 사랑하듯, 네 어머니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그녀 자신인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너는 그녀가 네 어머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머니가 너를 그녀 자신의 인생보다도 더 사랑할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너의 존재는 어머니의 입장에선 그저 자신의 인생을 방해한 혹덩이일 뿐이었다. 그래서 너는 네게 생명을 준 것을 후회하는 어머니를 원망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잠든 방 문에 기대앉아 너는 네가 없는 그녀의 인생에 대해 생각했다. 글을 쓰고 싶었던 그녀, 그러나 그럴 수 없었던, 사람들의 머리를 다듬으며 환상 위를 산책했던 그녀. 네 아버지와 결혼하고 너를 낳은 그녀, 네 어머니. 그녀가 글을 썼더라면 너는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네가 없는 세상에서 그녀는 행복했으리라. 상상의 성운(星雲) 그 거대한 가스 구름 안에서 끊임없이 탄생하는 이야기의 별들과 함께 언제까지고 빛을 발하며 무한한 우주를 채웠으리라. 그 흠 없는 세계에서라면 그녀는 너를 낳지 말았어야 했는데, 같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네가 없는 세계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 찬란함에 압도되어 흘린 눈물 한 방울이 네 뺨 위로 굴렀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는 네가 학교 갈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기 직전에야 깨어났다. 미간을 찌푸리며 일어났으면 깨우지 그랬냐고 말하는 네 어머니는 간밤의 일을 기억하지 못 하는 듯 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너를 낳지 말걸, 하고 후회하던 그녀의 표정이 떠올라 가슴 한 켠이 아릿해져 왔다. 너는 그녀가 곤히 자는 것 같아 깨우지 않았다고 대답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그런데 엄마, 어제 무슨 이야기 했는지 기억나? 글쎄, 모르겠네. 건배하고 술을 마신 것까지는 생각나는데 그 다음 기억이 없어. 아아, 정말이지. 확실히 나이가 들었나 봐. 술은 조금 줄이는 것이 좋겠어.

그 후로 얼마간 너는 친구들과의 만남도 미뤄가며 어머니와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 노력했다. 네 어머니가 집에 홀로 남아 외로운 시간을 보내면 그녀의 우울증은 심해지기만 할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너는 어머니와 함께 산책하고 쇼핑을 하고 식사를 했다. 그리고 괜찮다는 어머니의 손을 잡아끌고  영화를 보러 갔다. 너무 오랜만이라서 어색해, 하고 네 어머니는 말했다. 너는 진작에 그녀에게 신경 쓰지 못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집에 있을 때에도 너는 네 어머니를 위해 행동했다. 너는 집안일을 도왔고, 안마를 하거나 포옹하는 것으로 애정을 표현했다. 네 어머니가 텔레비전 앞에 앉아있으면 너는 그 옆에 앉아 함께 쇼 프로그램이나 드라마, 뉴스 따위를 보았다. 뉴스의 대부분은 네가 그다지 관심 갖지 않는 정치 문제나 시사에 관한 내용인데도 그랬다.

어머니는 특히 뉴스를 즐겨 보았다. 어느 날인가는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뉴스를 보며 울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 이전 해에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대구 지하철 참사의 범인이 옥중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당시 피해자들의 사연을 함께 방송한 것이었다. TV 화면에는 죽은 아들의 영정을 부여잡고 오열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송출되고 있었다. 

네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녀는 네 어깨를 바스러져라 끌어안았다. 그 사람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남겨진 사람들은 또 얼마나 아팠을까. 엄마는 네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상상만 해도 정말 몸이 떨리도록 무서워. 사랑하는 우리 딸, 엄만 너 없인 못 살 것 같아. 너는 엄마가 가진 전부니까.

너는 어머니에게 남은 전부였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으니까. 네가 태어났기 때문에 그녀는 꿈을 펼칠 기회를 놓쳤고, 네가 글을 썼기 때문에 그녀는 남편을 떠나보내야만 했다. 네 어머니는 너로 인해 모든 것을 잃었고, 그래서 그녀에게는 너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너를 사랑했다.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네 어머니의 상태는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나빠지기만 했다. 잠깐 사이에 인자한 어머니와 다 망가진 폐인 사이를 오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때의 너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가엾고 한심하고 지겨운 네 어머니는 네게 어떤 존재였는가. 그리고 그런 어머니의 애정을 갈구하며 집착하던 너를 그녀는 어떤 감정으로 마주했었던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여겼던 원망스러우며 사랑스러운 딸은 그녀에게 어떤 존재였는가. 

너는 사고 이후로 어머니가 가장 아름답게 보였던 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것은 아침, 한여름의 열기가 이슬에 젖은 흙을 갓 데우기 시작하는 칠월인지 팔월인지의 어느 아침이었다. 잠에서 깬 네가 거실로 나왔을 때 네 어머니는 부엌에서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김이 피어오르는 냄비에서는 달근한 냄새가 풍겼고 열린 창문으로는 새 지저귀는 소리가 났다. 쾌활한 노래를 흥얼거리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한 조각 햇볕이 떨어졌다. 어머니가 그렇게 유쾌해 보이는 것이 너무나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너는 잠깐 네가 보는 광경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음 순간 그 광경은 지울 수 없는 각인이 되어 네 뇌리에 박혔다. 한 인간이 모든 것을 잊고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모습이 그토록이나 아름답게 보인다는 사실을 너는 알지 못했었다. 어머니의 콧잔등을 타고 내려온 햇살이 그녀의 입술과 맞닿은 순간, 귀퉁이가 헤진 앞치마를 두르고 삼만원 짜리 파마를 한 중년 여자의 모습은 자애로운 성모의 그것으로 화했다. 그녀의 입술에 걸린 부드러운 미소가 너무나 좋아서, 너는 요리하는 네 어머니의 뒤에 서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녀가 만드는 것이 무슨 요리인지 물어보았다. 응. 글쎄, 할인 마트에 가니까 소갈비를 엄청 싸게 팔지 뭐야. 그래서 잔뜩 사왔어. 갈비찜 해서 우리 수험생 따님 몸보신도 좀 시키고, 또 너희 아빠도 드시고 힘내시라고.

뭐? 너는 물었다. 너는 네 어머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봐 봐. 얘는? 우리 이쁜 딸내미하고 니 아빠하고 먹이려고 사왔다니까. 어때, 맛있겠지? 그게 무슨 말이야, 너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며 다시 채근했다. 엄마, 방금 아빠라고 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응? 어머니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그래, 네 아빠. 우리 딸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느라 매일같이 고생하시는 아빠 말이야. 

아빠는 죽었잖아, 엄마! 제발 그만 좀 해! 악에 받친 울부짖음을 들은 네 어머니는 움찔하며 너를 돌아보았다. 그새 밥이 다 되었는지 전기오븐 옆에 놓인 압력밥솥이 안내음을 냈다. 딩동댕동. 취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밥솥 뚜껑에서 취이이이 하는 소리가 났다. 네 어머니의 표정은 무엇인가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빠르게 굳었다. 죽었다고. 그 메마른 어조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낀 너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 엄마. 아빠는 벌써 삼 년도 더 전에 돌아가셨잖아. 그랬었지. 순식간에 꺼져버리는 불꽃 같았다. 밝았던 빛이 사라진 곳에는 전보다 더한 어둠이 남았다. 네 어머니는 그랬었지, 하고 중얼거리더니, 손에 쥔 부엌칼을 손목으로 가져갔다. 

엄마! 너는 기겁해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도대체 왜 그래, 무슨 짓이야! 네 어머니는 네 손을 뿌리치려 발버둥치며 비명을 질렀다. 이렇게 살아서 뭐해?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나아! 너는 터진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 하고 어머니를 붙잡았다. 엄마, 엄마, 하지 마. 그러지 마, 했다. 이거 놔, 이거 놓지 못해? 안 돼, 못 놔. 절대 못 놔. 왜 그러는데! 그러자 네 어머니는 너를 밀치며 악에 받쳐 소리쳤다. 더러운 년, 지 애비 잡아먹은 년! 너는 어쩔 줄 모르고 어머니를 부둥켜안았다. 힘 풀린 다리로 주저앉아 어머니의 다리에 매달렸다. 엄마, 엄마. 나 엄마 딸이야. 나 못 알아보겠어? 엄마, 나 울잖아요. 엄마 때문에 나 울고 있잖아요, 응? 나 좀 안 울게 해주면 안 돼?

악어가 말이지, 머리 위에서 들려온 어머니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사람을 잡아먹는 악어는 먹히는 사람의 죽음을 애도해서 눈물을 흘린다는 거야. 그리고 그 사람을 전부 소화시키고 나면, 새로운 희생양을 찾아 돌아다닌다고. 어머니는 거의 실신할 정도로 울고 있는 너를 내려다보며, 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건, 악어의 눈물이란다. 발작과 자해를 번갈아 반복하는 어머니를 견딜 수 없어진 네가 집을 뛰쳐나간 것은 그 후로도 삼 년이나 지난 뒤였다. 

무엇이 너희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네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은 그 날의 사고는 원인이었을까, 아니면 예정된 파국으로의 수렴을 앞당긴 촉매에 불과했을까? 네 어머니가 품었던 원망과 울분은 네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존재했었다. 그것은 사고와 무관하게 네 어머니의 가슴을 침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고가 너희 모녀의 관계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고 너는 생각할 수 없다. 한 사람이 죽고 두 사람의 삶이 망가졌던 그날의 일이 없었더라면 네 어머니의 한도 어떤 방식으로든 보상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네가 아니면 네 아버지가 그리 해 주었을 것이다.

무엇이 너희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너는 어머니가 베개에 머리를 묻고 울던 그녀의 쉰 여섯 번째 생일을 떠올린다. 닫힌 방문에 기대앉아 눈물 흘리던 너를 기억해낸다. 무엇이 너희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어쩌면 너희는 망가진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정확하게 인과의 시곗바늘을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지 한계까지 감긴 태엽이 너희를 너무 멀리 떠밀었을 뿐일지도.

이 벽 너머에 어머니가 계십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를 부르는 사람을 바라본다. 검은 제복을 입은 경찰의 표정은 친절하지 않지만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도 않는다. 당신의 요구대로 당신에게는 그녀가 보이지 않겠지만 저 거울 뒤편에 계신 당신의 어머니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지 않아도 될 한마디를 구태여 덧붙인다. 원래대로였다면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을 겁니다. 

너는 반사유리 너머로 있을 어머니의 위치를 가늠해본다. 뭔지 모를 얼룩이 묻은 거울 표면을 바라보자 유리 너머로 두 개의 얼굴이 보인다. 그곳으로 초점을 옮기면 갈라 놓였던 얼굴은 하나로 합쳐진다. 네 얼굴이다. 사 미터 떨어진 유리에 어린 팔 미터 앞의 너는 칠 년 만의 재회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무표정을 유지한다. 긴장도 원망도 손으로 건드리면 바스라질 것 같은 어릴 적의 추억도 없이 다문 입술을 너 스스로도 해석할 수 없다. 

안심하십시오. 경찰이 설명한다. 문은 단단히 잠겨 있고 당신이 신호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탁자 위 버튼을 누르면 벽 너머에 계신 어머니와 연결될 겁니다. 대화의 내용에 따라 제가 제재를 가하거나 대화를 중단시킬 수 있습니다. 너는 거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문을 열고 나가기 전에 경찰은 네게 질문한다. 이런 요구를 한 것은 당신이 처음입니다. 당신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신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는 그 목소리에는 조금 전과 같은 불쾌함 대신 너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이 담겨 있다. 집을 떠나고 너는 작은 신문사에 취직하여 기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힘이 들었지만, 너는 바로 그 일상의 피곤 속에서 너를 예속하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묻어버릴 수 있었다. 그러다 취재 중에 알게 된 교도소장에게서 생활고에 시달리며 몇 번이나 절도를 저지르다 결국 수감되었다는 네 어머니의 소식을 들은 것이 바로 며칠 전의 일이었다. 너는 그에게 부탁해 특별한 방식의 면회를 요청했고, 그렇게 너희는 벽을 사이에 두고 앉게 되었다.

너는 취조실의 안쪽에, 네 어머니는 반사유리 너머에. 그것이 네가 선택한 면회 방식이었다. 너와 네 어머니 사이의 유리 벽을 통해 너는 어머니를 보지 않으면서 그녀가 너를 볼 수 있게 만들었다. 경찰이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그 부분이었다. 어머니를 보고 싶지 않았다면 면회를 오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너는 번거로운 방식을 선택하면서까지 어머니에게 네 모습을 보였다. 경찰은 그 이유를 궁금해했다.

그것은 복수입니다. 너는 더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문다. 경찰은 네 의도를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럼, 잠시 뒤에 뵙겠습니다. 그는 나가서 문을 닫고, 너는 탁자 위의 버튼을 누른다. 웅 하는 전자음이 들리고 뒤이어 꿈에서도 잊을 수 없었던 목소리가 들린다. 딸, 우리 딸, 내 딸아. 엄마를 보러 왔구나. 

아니. 그 반대예요, 나를 엄마에게 보이러 왔어요, 하는 말은 입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니? 잘 있었던 게지? 어디 아픈 데는 없고? 그동안 몇 번이나 너를 찾으려 했었는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어. 내가 일부러 엄마를 피했으니까요, 하는 말도 입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우리 딸, 엄마가 보고 싶지 않았던 거야? 네, 엄마, 보고 싶지 않았어요, 하는 말도, 당신을 잊고 싶었어요 하는 말도, 입 밖으로는 나가지 않는다. 단지 너는 생각한다. 지금도 나는 당신을 보고 있지 않습니다.

왜 말이 없니? 스피커를 통해 전달되는 파동을 타고 젖은 불안이 녹아든다. 우리 딸, 뭐라고 말 좀 해 보렴. 엄마 목소리 안 들려? 이봐요, 마이크가 고장 난 것 같은데 좀 봐주겠어요? 우리 딸이랑 얘기해야 하는데, 내 목소리가 안 들리나 봐요. 이리 좀 와 보세요, 빨리. 우리 예쁜 아이와 얘기해야 해요. 어서요. 제발 이것 좀 고쳐 주세요, 네? 얘기를 해야 해요. 제 목소리 좀 들리게 해 주세요. 제발 좀 도와주세요. 제발, 제발 부탁해요. 빨리 좀 고쳐달라고! 마이크는 정상입니다, 하는 경찰의 목소리는 거리 때문에 억눌린 것처럼 들린다. 그가 네 어머니를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너는 계획한 일을 시작한다. 

너는 자리에서 일어나 네가 앉았던 의자를 들고 문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의자 등받이를 문 손잡이 밑에 비스듬히 끼워 세운다. 그걸로도 모자라 너는 철제 테이블을 쓰러뜨려 의자 다리를 누른다. 그 소란에 벽 너머가 조용해진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너는 대답 대신 걸어가 거울 앞에 선다. 직감적으로 불길함을 감지한 경찰이 뛰쳐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막아놓은 문이 요란하게 들썩이기 시작한다. 쾅쾅대는 소음을 배경으로 너는 보이지 않는 어머니와 대면한다.

왜 그러니? 무슨 일 있어? 왜 문을 막고 그러니? 엄마 지금 무서워지려 그래. 우리 딸 착하지? 어서 문 열어.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은 무표정하다. 싸늘하고, 어둡다. 어쩌면 냉정하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들리는 말만은 표정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설마, 이상한 생각 하는 건 아니지?

무표정한 너는 옷 속에 숨겨온 물건을 꺼낸다. 플라스틱 나이프. 조잡하고, 투박하며,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만큼 날카롭다. 그것을 쥔 손이 올라갈수록 네 어머니에게서도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히 느껴진다. 그게 뭐니? 뭐하려고 그래? 안 돼, 그러지 마. 안 돼. 안 돼. 그거 내려놓으렴.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그녀의 호소에도 네 손은 멈추지 않는다. 이윽고 너는 칼을 목 앞에 가로로 세운다. 폐부를 찌르는 비명이 터져 나온다.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어느새 네 어머니의 절규에는 울음이 섞여 있다. 끊임없이 쾅쾅대는 문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요동치고 비스듬히 기대어진 탁자는 쓰러질 듯 위태롭게 흔들거린다. 그러나 소음은 네게서 일말의 주의도 끌지 못한다. 한 사람의 하늘이 무너지기 직전의 바로 그 시점에 너는 거울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천천히 미끄러진 칼끝이 네 목에 닿는 순간 네 어머니의 세
    은 
                                                                               
                                                          내
                                       린
        다
                     녹
                      아
                         내린세상이물처럼흐른다흘러서바닥없는검은구멍으로끝없이빨려들어간다검게입벌린무저갱이모든빛을꺼뜨리며커진다혼돈위에지어진세상은지반을잃고허물어져검은구멍으로떨어지고빛을잃은촛불은공허에잠기며희망의자리를절규와절망과슬픔과고통과분노와혼란과억울함의손길이감싸채운다세상은전과변한것이없건만네어머니는세상이녹아버렸다는사실을온몸으로느낄수있다미안해.

미안해, 하고 네 어머니가 말한다. 미안해. 그녀는 그렇게 말한다. 엄마가 잘못했어. 그때는 엄마도 너무 경황이 없어서, 엄마가 의지하던 모든 것이 전부 무너져내려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아니, 그냥 엄마가 미안해. 그러면 안 됐는데, 못난 엄마가 네게 상처를 줘 버렸어. 잘못했어. 용서해 달라고 하지 않을게. 엄마를 미워해도 괜찮아. 그러니 제발, 제발 너 스스로를 상처 입히진 말아 줘. 

그러나 네 귓가에 속삭이는 것은 기억 저편의 다른 목소리이다. 제발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는 것과 똑같은 목소리로 네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고 후회하는, 저주와도 같은 소리이다. 너는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그리고 기억의 얼레를 감아 스스로를 가장 빛났던 시절로 보낸다.

스물아홉 살, 네가 삶을 포기하기로 결심한 나이이다. 너는 어머니를 만났지만, 그녀를 보지는 않았다. 

스물다섯 살, 너는 어머니의 기억에서 벗어나 자신을 위해 살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꿈을 꾸지 않게 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스물두 살 되던 해에 너는 집을 나왔다.

열여섯, 너는 처음으로 네가 없는 세상에서의 어머니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네가 없었더라면 어머니는 훨씬 더 아름다울 수 있었다. 

열다섯, 언어를 잃었다. 네 인생이 망가지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열 둘, 네가 쓴 소설이 처음으로 백일장에서 수상했다.

일곱 살에 너는 처음으로 글을 썼다. 그것은 심술쟁이 여우로부터 푸른 꽃밭을 지켜내는 작은 소녀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여우를 쫓아낸 소녀가 저녁 식탁에 앉아 엄마에게 자기 무용담을 들려주는 것으로 끝이 났다. 

여섯 살엔 공원을 걸었다. 

그 이전의 기억은 없다. 

몰려든 직원들과 경찰은 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포기했는지 막힌 철문 대신 유리 벽을 부수기 시작한다. 몇 번인가 둔탁한 타격음이 들리더니 유리는 이내 깨어진다. 쨍그랑 하는 높은 파열음을 마지막으로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다. 반짝이는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형광등 불빛을 산란시킨다. 당황한 표정의 경찰이 뭐라 소리치며 네게 달려든다. 그것은 복수입니다, 하고 네가 말했을 때 아마 그는 너의 복수가 어머니에게 네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 자체라고 생각했었으리라. 너를 버린 어머니에게 네가 당신 없이도 이렇게 잘 살고 있다고, 너는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런 복수이리라 짐작했으리라. 그러나 너는 버림받지도 않았고 행복하지도 않았다. 너의 복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거울 속에 네 얼굴이 있던 위치에서 너는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다. 네 어머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안된다고 외치고 있다. 네 어머니의 눈물에, 너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라고 부르며 울던 그녀의 모습이 겹친다. 울부짖는 그녀를 바라보며 너는 마음속으로 꺼내지 않을 말을 되뇌인다. 
 
엄마, 그건 악어의 눈물이에요.
 
너는 눈을 감는다. 눈을 뜨면 네 세상은 한없는 수렁으로 무너져내린다.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우수작 이야기의 우물 2014.11.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4.10.01
가작 그들의 방식 2014.09.14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5 2014.09.01
가작 기억이 남긴 흔적들 2014.09.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 2014.07.31
선정작 안내 선정작이 없습니다. 2014.07.3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4.07.01
우수작 아르바이트 2014.05.31
가작 누이의 초상 2014.06.15
선정작 안내 선정작이 없습니다. 2014.06.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4.06.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3 2014.04.30
가작 텅 빈 지하철에서 (본문 삭제) 2014.04.30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7 2014.03.31
우수작 너는 눈을 감는다 2014.03.31
가작 나랑 바꿀래 2014.03.3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3 2014.03.01
가작 옥과 해골 2014.03.01
가작 모든 것이 폭로되었다 2014.03.01
Prev 1 ... 8 9 10 11 12 13 14 15 16 17 ... 2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