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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발톱

2013.08.31 22:5508.31

발톱

 

 

 


꿈속에서 귀신이 그의 엄지발톱을 씹어 먹었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 헐떡인다. 악몽이다. 옆자리의 아내가 몸을 뒤척이며 잠에서 덜 깬 목소리를 냈다.
“당신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아니......화장실. 더 자."
차가운 맨바닥에 발바닥을 딛자 소름이 올라와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식은땀에 푹 젖은 런닝이 등짝에 들러붙어 끈적하니 기분 나빴다. 아침부터 영 꿈자리가 뒤숭숭하다. 그는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캬악, 가레를 내뱉고 샤워기를 틀었다.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나오며 무심코 거울을 본 그는 거울에 비쳐 보이는 시커먼 덩어리에 기겁을 했다. 으악! 검고 긴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하품을 하며 문을 연 아내가 눈을 껌벅였다.
"왜 그래요? 화장실에 벌레 있어요?"
"당신 때문이지! 귀신인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그 머리 좀 어떻게 해!"
꿈속의 귀신이 떠올라 더 기분을 잡친 그는 빽 소리 질렀다가 아차, 하고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도 그녀는 별로 화난 기색이 아니었다.
“아침부터 뭘 그렇게 소릴 질러요? 당신보다 내가 더 놀랐네요. 상 차려 놨으니까 국 식기 전에 얼른 들어요.”
언제나 차분하게 그를 위해서 애써주는 아내에게 소리를 지르다니 반성해야 한다.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며 남자는 욕실을 나오다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나오며 문고리에 걸친 수건을 그녀는 가만히 집어들어 수건걸이에 걸고 허리를 굽혀 하수구에 머리카락을 치운다. 목이 늘어난 티를 입고 휴지로 머리칼을 집어내는 그녀는 연애 시절 보다 예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꼼꼼한 성격 덕에 그는 도움을 많이 받는다. 와이셔츠는 아내가 매일매일 다려놓는다. 넥타이며 손수건도 마찬가지다.
가지런히 마련된 정장을 하나하나 챙겨입던 그는 양말을 신다 엄지발가락을 내려다 보았다. 넙적한 발톱은 아무 이상 없다. 그는 괜히 엄지손가락으로 발톱을 문질러 발가락에 제대로 붙어있는가 확인했다.
옷을 다 차려입고 부엌으로 나온 그는 갓 지은 밥냄새에 기분이 좋아진다. 아내는 요리를 잘 한다. 오늘은 잡곡밥, 갓김치에 조기구이, 부추오이무침, 깻잎, 부대찌개와 더덕생채다. 어느 반찬이나 아내의 정성이 듬뿍 담겨 있다. 그는 뜨끈한 국물을 떠 마시고 꽉꽉 눌러 그득하니 담은 밥을 듬뿍 떠 입 안에 넣었다.
"오늘따라 밥이 잘 됐는데?"
"당신도 참, 그럼 이제까진 안 됐단 말이에요?"
부러 삐진 시늉을 하며 고개를 휙 돌리는 아내에게 남자는 아냐아냐! 정말 맛있어, 여보. 하며 손사레를 쳤다. 입술에 침 바를 필요도 없는 진실이다.
밥 두 공기를 깨끗하게 비우고 그는 일어섰다. 거하게 먹었더니 저절로 트름이 나온다. 끄윽, 하고 위장에 더부룩하게 찬 가스를 빼내자 아내가 그릇을 치우다 얼굴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렸다.
"어휴, 냄새. 그거 안 하기로 했잖아요."
"당신 밥이 너무 맛있어서 나오는데 어떻게 해?"
남자가 너스레를 떨자 아내는 됐어요, 됐어. 하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나 다녀올게. 오늘 회식 있어서 좀 늦을지도 몰라."
"알았어요. 대신 내일 일찍 들어와요?"
단란한 인사를 주고받고, 그는 함박웃음을 머금고 아내의 뺨에 입맞췄다. 상냥한 그의 아내는 살짝 웃고 설거지를 하러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는 신중하다. 지하주차장에 들어갈 때까지 방심하지 않는다. 아니, 주차장도 안 된다. 핸드폰에는 문자가 왔다는 표시가 새벽부터 떠 있었지만 그는 차 안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야 핸드폰을 꺼내 비밀번호 일곱 자리를 신중하게 꾹꾹꾹 누르고 문자에 답했다. 전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그는 오늘 그녀에게 0교시 수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혜진아, 오빠도 보고 싶지. 어젯밤부터 네 생각이 나서 어쩔 줄을 모르겠더라. 오늘 시간 된댔지? 우리 어디 갈까? 혜진이 뭐 먹고 싶어? 오빠도 너 사랑해♥♥♥]
아내는 전화 통화밖에 못 하는데 핸드폰이 최신형이면 뭐 하냐고 핀잔을 주지만 무엇이든 다 쓸모가 있는 법이다. '특수문자가 뭔지는 알아요?' 하는 그녀에게 '그런 것 알아서 뭐 해? 핸드폰으론 전화만 할 수 있으면 되지.'라고 그가 말한 지가 엊그제 같지만, 사람은 필요성이 있으면 금방 새로운 지식을 습득한다.
오늘 저녁 혜진이와 데이트를 할 생각에 그는 벌써부터 들뜬다. 처녀 적 아내만큼 명품가방과 유명 브랜드 옷을 좋아하지만 그녀가 봉긋한 가슴을 부비며 달라붙어 애교를 부릴 때면, 그는 능력만 되면 백화점을 통째로 사 주고 싶을 정도다. 인사과 이부장에게 소개 받은 등산 동호회에 혜진을 동행해서 갔을 때, 그녀는 그와 같은 나이대의 남자들이 옆구리에 낀 영계들 중에서도 최고로 젊고 싱싱했다. 고 탱탱한 엉덩이와 잘록한 허리에 찰싹 달라붙는 등산복을 입고 산을 쑥쑥 오르는 걸 뒤에서 따라가면 일주일치 눈보신이 족히 되었다. '오빠, 나 이제 더 이상 못 걷겠어.'라고 칭얼거리는 혜진을 조금만 더 걷자며 뒤에서 밀어주면 그녀는 '아이, 오빠도 참'하고 뒤돌아보며 앙큼하게 눈웃음을 쳤다. 이제 삼십대를 넘어가며 피부도 늘어지고 애교도 신선함이 떨어진 아내와 질적으로 달랐다. 등산 모임에서 남자들끼리 따로 갖는 술자리에서 그들은 '역시 김부장은 알아줘야 해. 어디서 저런 어린애를 만났어?'하고 그를 칭송했다.
그는 뿌듯한 마음으로 핸드폰에 혜진의 사진을 띄웠다가 설레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사랑의 문자를 하나 더 날린다.
[오빠 회사 끝나면 바로 연락할테니까 기다려♥♥♥ 사랑한다 하루에 열두번도 더 너 생각해 혜진아 오빠 맘 알지?]
문자에 하트표 담을 때마다 -s-s-s 핸드폰 버튼음이 경쾌한 소리를 낸다. 아침이면 매번 하는 일이다. 이제 일터에 나갈 준비가 다 되었다.


***


시퍼렇게 죽은 입술을 일그러뜨려 허연 이빨을 드러낸 여인이 그의 발치에 엎드려 있다. 양말이 벗겨져 그의 발가락이 추운듯 오그라들었다. 그 발가락에 입술을 가져간 그녀는 아드득, 발가락 채로 그의 엄지발톱을 씹어먹는다. 아드득 드득 드드득 원수를 씹듯 이빨을 움직이는 그녀의 눈은 핏발이 서 무시무시하게 그를 노려보고 있다. 이빨이 살을 파고들고 으드드득 뼈가 갈리는 순간 발을 불타오르는 숯덩이에 쑤셔넣은 듯한 통증이 엄지발톱께부터 시작됐다가 전신에 번지기 시작한다. 그는 비명을 지른다. 지르고 지르고 또 질러도 그녀는 으드득 으드득 쇠가는 소리를 내며 발톱을 씹는다. 원한을 담아 꾸준히. 그의 첫째 발가락을 완전히 잘라내려는 것처럼......그는 헐떡거리며 잠을 깼다.
"오빠, 왜 그래? 아이 참, 왜 영화관에서 잠을 자고 그래. 나랑 영화 보는 거 재미 없어?"
귀엽게 칭얼거린 그녀는 '어머, 이 식은 땀 좀 봐.'하고 그의 이마를 만지더니 손수건을 꺼내 그의 눈썹 위를 닦았다. 향기로운 냄새가 그의 코끝을 스치는 그녀의 손목에서 났다. 심장이 열여덟살 더벅머리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마냥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많이 피곤한가 보다, 오빠. 그냥 나갈까?"
"우리 혜진이 보잖아. 오빠 안 피곤해. 그냥 딴 생각 하다가 깜박 졸았나 봐."
그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며 팔걸이 위에서 겹친 혜진의 손을 꼭 잡는다. 아직 악몽으로 놀란 가슴이 뛰는데 그것이 꿈속의 발톱 씹는 여인 때문인지 옆자리에 앉은 젊고 탱탱하고 이쁜 혜진이 덕분인지 그는 잘 모르겠다.
"혜진이는 어때? 영화 재미없어? 나가서 다른 거 볼까?"
"아냐, 너무 재밌어. 그냥 난 오빠가 걱정돼서 그러지."
그녀는 영화관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아도 그가 훤히 아는 도톰한 입술을 그의 귀에 가까이 대고 애교있게 말했다. 그녀의 숨결에 귓가가 간질거린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뿌듯한 충족감이 뻐근하게 그의 가슴을 채웠다. 그래 그까짓 악몽이 알게 뭐냐. 그저 꿈일 뿐이다. 신경쓰지 말자. 내겐 요렇게 앙큼하게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혜진이가 있고 집에서 따순 밥과 칼 같이 다려진 와이셔츠를 가져다 주는 아내가 있고 젊은 청춘을 부려먹힌 만큼 돈을 갈퀴로 긁어낼 수 있는 직장이 있다. 꿈은 꿈이니 잊고 인생을 즐기자. 그는 영화관의 결코 편안하지 않은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앉으며 영화 관람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10분 후에 잠이 들었다가 복도까지 뒤흔드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기절할 듯 놀란 혜진이도 놔두고 허겁지겁 바깥으로 나온 그는, 신발과 양말을 벗고 엄지발가락을 조사했다. 방금 전 꿈속에서 귀신에게 씹힌 발톱에는, 놀랍게도 살이 죽은 듯한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보라색에 가까운 그것은 그에게 아직도 욱신욱신 징을 연달아 울리는 듯한 통증을 선사하고 있었다. 따라나온 혜진이, 그의 발톱보다 허옇게 질린 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괜찮냐고 물었다. 그는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이상하게 나올 것 같았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땀방울이 이마에서 코끝에서 목덜미에서 뚝뚝 떨어졌다. 바깥 공기가 서늘했다. 그는 침을 삼키고 오빠 오늘 좀 일찍 가봐야겠다, 고 했다.
평소라면 혜진을 그녀 집 앞까지 태워주고 차 안에서 몇 번을 쪽쪽거리며 한참 헤어짐을 아쉬워했을 것이나 오늘은 달랐다. 그는 조금 삐진 것 같은 혜진을 열심히 달래 겨우 택시를 태워 보냈다. 다음 데이트엔 백화점 쇼핑 같이 가자 하는 말에 그녀는 조금 마음이 풀어진 듯 이모티콘이 잔뜩 들어간 귀여운 문자를 보내왔다. 그는 흐뭇하게 웃었지만 꿈을 생각하니 또 등골이 오싹하다.
그는 신호등에 걸린 차를 세우며 네비게이션으로 글자를 쳤다. 미아리 점집 거리. 원하는 루트를 찾아낸 그는 재촉하듯 엑셀을 밟았다.
2층 점집을 계단을 올라가 들어가니 장군 그림을 뒤에 걸고 곰방대를 뻑뻑 피던 무당이 허이구, 아조 시체가 걸어들어 오네! 하고 한마디 했다. 섬뜩한 그는 구두를 망가뜨릴 기세로 허겁지겁 올라갔다. 양말 바람에 나무 바닥이 차다. 주춤주춤 다가가 앉자 무당이 상 옆의 콩을 한 줌 집어 흩뿌리더니 툭 던지듯 말했다.
"여자 관계가 복잡하군, 복잡해!"
"아니, 그걸 어떻게......"
"못할 짓 많이 했어! 여자한테나 애기한테나!"
"모...못할 짓이라뇨, 전 그냥......"
"예끼 이 놈!!"
벌컥 내지른 소리에 그의 어깨가 세 치는 튀었다. 목에 핏줄을 세운 무당이 상을 탕탕 치자 옻칠을 새까맣게 한 상 위의 콩이 펄쩍펄쩍 튀어 올랐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말이 되는 소리를! 네가 끊은 목숨이 벌써 두셋은 되는데 감히 장군님 앞에서 무엄하게 거짓을 말해! 내가 누군고 하면 천지신명의 명을 받아 팔만 군사를 무찌르고 하늘길에 오르신 장군님을 받드는 몸인데! 나라운도 아니고 벼슬운도 아니고 고 하찮은 남녀관계 몇 가닥을 바로 못 볼까! 당장 네 잘못을 고하고 머리를 조아려도 못마땅 할진데 어디서 거짓을 고하고 있어! 무엄하다, 무엄해!"
쇳소리가 쟁쟁 고막을 긁는데 도무지 오금을 펼 수가 없다. 그는 아니, 그게 아니구, 하고 우물쭈물거리다 또 한소리를 되게 들었다. 그는 자꾸 목구멍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겨우 냈다.
"결혼 전에......몇 명 만나긴 했지요. 다 그렇잖습니까?"
"근데 왜 그리 원한이 덕지덕지 진흙덩어리마냥 들러붙어 떨어지려 들질 않어? 보아하니 한두명 죽였구만! 멀쩡한 처자를 저세상 보냈어! 보아하니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자겠구만!"
짐작 가는 여자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약간 따끔거리는 심장을 달래며 애써 멀쩡한 목소리를 냈다.
"뭐......뭐가 붙었습니까?"
"아무렴, 붙었구 말구!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이미 일어나 버린 일 어쩝니까? 그만 두고 귀신을 어떻게 쫓아내는지나 알려주세요."
무당은 숟가락 자국 같은 쬐끄만 눈을 더 이상 없을 만큼 가늘게 떴다가 쯧쯔, 하고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바, 방법이 없습니까?"
"정성이 부족해, 정성이!"
"예?"
"정성이 부족하다고! 어허, 이 사람 아주 콱 막혔구만! 여자 많이 사귀어 봤으면 눈치코치 빠를텐데 왜 말귀를 못 알아들어? 장군님이 움직이시기엔 정성이 한참 부족해! 그럴 마음이 들게 만들어 보란 말일세!"
무당은 앉은 키가 그보다 작은데도 거만하게 내려다보듯 앉아 부채를 다른 손바닥에 탁탁 두드렸다. 그는 무언의 시위를 깨닫고 허겁지겁 주머니를 뒤졌다. 급히 온 터라 그의 지갑 속에는 현금이 얼마 없다. 만 원짜리 세장과 주머니에서 꺼낸 구깃구깃한 오천 원이 전부다. 걸어둔 코트 주머니를 뒤지자 운 좋게 동전 한 움큼이 걸려나온다. 찾은 현금을 어설프게 쏟자, 콩이 흩어져 있는 상 위를 십 원, 백 원, 오백 원짜리 동전들이 굴렀다.
"지금은 이것밖에......"
무당은 마음에 차지 않는 듯 눈썹을 치켜세우지만 그의 필사적인 얼굴을 보자 한번 봐 준다는 듯 손에 방울을 잡고 흔들며 중얼중얼 주문 같은 것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는 의심 반 믿음 반으로 조마조마하게 답을 기다렸다. 무당이 한참 만에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속죄를 해야지!"
"......속죄요?"
"그럼 해야지 안 하고 배겨? 부모보다 먼저 간 고 망할 년이 왜 죽었는데?"
점차 불러오던 배를 떠올린 그는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고 투덜댔다.
"죽었으니 보상금도 못 받는 여자한테 무슨 속죄를 합니까. 성당이나 절에 가서 기도라도 합니까?"
"그러면 좋고, 굿을 하면 단번에......"
"굿......이라 하시면......"
"아, 씻김굿 몰라! 죽은 님들 불러서 원한 원념 원망 훌훌 털어 보내고 산 사람 앞에 해 끼치지 마시고 고이 저승으로 물러나 주십시오, 하고 이르는 거! 자네 같은 망나니들한테 당한 여자들 저세상 가게 만들려면 그 수밖에 더 있나!"
무당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이르는데 그의 다음 질문은 정해져 있었다.
"어...느 정도 정성을 들여야 됩니까? 그, 씻김굿이라는 거."
무당은 뚱하니 보다가 '한 삼사백 하지!'하고 참으로 당당하게 말했다. 무당이면 다 돈 많이 드는 굿하며 생돈 빼앗으려 든다는 주변 사람들 말이 딱 맞다. 시뻘건 염료로 칠한 부적이라든지, 귀신을 쫓는다는 복숭아 나뭇가지 같은 것을 바랬던 그는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차가운 나무 바닥에 엉덩이가 시려 그는 벨트를 바로 잡으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돌아나오는 그의 뒤통수에 무당이 불퉁거렸다.
“내가 틀린 말을 하남. 그러니깐 죄를 왜 져! 남자가 허우대 멀쩡하다고 여자 인생 말아먹으면 되는 줄 알어? 오뉴월 서리가 얼마나 지독한지 겪어봐야 굿한다는 얘기가 나오겠네, 그랴!”
남자는 무당의 넋두리 같은 잔소리를 듣지 못한 척 빠져나왔다.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았다. 이리저리 내팽개쳐진 구두를 어설프게 찾아 신는 그의 귓구멍에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쑤셔박혔다.
“두고 보셔! 또 무당집 안 넘고 배기나 보자!”
그 소리가 옛날의 그녀가 질러대던 목소리와 겹쳐진다. 한, 선, 희. 그의 긴 여자 편력에 그녀 이름 석 자를 뚜렷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이별이 특별해서였다. 두고 봐! 사람 이렇게 망가뜨리고 어디 잘 사나 보자! 악에 받쳐 카랑카랑하게 인적 없는 공원을 울리던 목소리. 소프라노에 가까운 목소리가 예뻤던 대학시절 애인. 소란을 대비해 그는 선희를 찻집 대신 한적한 공원 벤치에 데려가 이별 의사를 털어놓았고, 그녀는 이제 조금씩 불러오던 배에 보호하듯 손을 얹고 듣고 있다가 한마디 했다.
“그럼 아이는?”
그는 다소 짜증스레 반문했다.
“내 말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그만 헤어지자구.“
“아이는?”
“맘대로 해. 지우든지 낳든지.”
“나쁜 놈!“
뺨을 때리는 그녀의 손을 예상했던 그는 쉽게 피했다. 부른 배 탓인지 차마 달려들진 못하고 붉어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던 그녀는 그를 날카롭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긴 머리칼을 헝클어뜨리고 날선 목소리로 무시무시하게 소리쳤는데 사람 없는 공원의 바람은 스산했다.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시기였다. 자살자가 잘 어울리는 황량한 풍경이었다. 실제로 그 공원에서는 여러 번 자살 사건이 일어났다.
어쩌면 그 공원으로 데려가며 그는 약간 기대한 것도 같다......물론 그가 선희를 죽여 자살한 것처럼 꾸미는 추리소설 같은 짓은 벌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귀신을 본다면 놀라 유산할 확률도 있다고, 지극히 낮은 가능성을 점쳐 보았을 뿐이었다. 울면서 소리치는 그녀를 남겨놓고 돌아선 그의 등 뒤로 울음에 겨운 목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졌고 이후 컨디션이 안 좋을 때 꿈에 나타나 그를 가끔 놀래키곤 했다.
그 년 때문이야. 그 년이 지금 나한테 붙어 있는 거야. 그는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처녀귀신 안 되게 해 준 것도 그 아닌가. 근데 어디 은혜도 모르고 멀쩡한 유부남 꿈에 나타나서 설치고 있는가. 도저히 상식으로 이해가 안 가는 짓거리였다. 하기사 귀신년놈들에게 상식이 통할 리가 없다. 그렇다고 무당에게 순순히 굿값을 바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삼사백이 무슨 애 이름도 아니고."
그는 차 핸들을 틀며 욕설을 잇새로 질겅이다 아! 하고 도 튼 소리를 내며 무릎을 두드렸다. 귀신이 화가 났다면 무덤에 찾아가 절을 하면 낫지 않겠나. 그래도 안 되면 절에 가서 공양이라도 해야겠다. 어쨌든 삼사백은 절대 안 된다. 아무렴. 그의 엄지발톱이 다 씹어먹혀도 절대 안 될 말이다. 그는 마침 들어온 빨간 불에 브레이크를 밟는다. 구두 속의 엄지발가락이 새삼스레 욱신거렸다. 꿈속에서 그의 발치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허연 이를 드러내던 귀신이 떠올라 그는 마른 침을 삼키고 운전대를 꽉 쥐었다.


***


일주일간은 정신없이 바빴다. 야근이 세 번 있었고 외국 바이어를 접대하는 회식 자리가 두 번. 주말 낮부터 사장님을 모시고 골프. 이쁜 혜진이가 있을 등산 동호회 약속까지 취소하며 열심히 일하는 동안 그는 시도 때도 없이 핸드폰을 확인했다. 마침내 그가 기다리던 번호가 떴을 때, 그는 지금 그가 있는 자리가 아침 밥상을 차리는 아내 앞이라는 것도 잊고 얼른 폰을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OO대 미술 교육학과 조교실입니다. 한선희 학생 연락처를 찾으셨던 분이죠?"
"예, 예. 맞습니다. 정말 절친했던 후배였는데 제가 아무리 찾아보려 해도 연락이 안 되서 말이지요......하하."
원하던 것을 얻어낸 그는 만족스럽게 폰을 닫다가 아내의 눈을 보고 찔끔거렸다. 밥을 푸다 만 아내는 보기 드물게 싸늘한 눈초리로 그를 보고 있었다.
"누구예요?"
"대......대학 조교야. 예전에 알던 후배랑 연락이 끊겨서 말이지."
"그럼 친구들한테 물어보면 되지 왜 대학에 전화를 걸어요? 친구들이랑 연락 끊겼으면 십년 전에 다니던 대학에 남겨진 연락처가 제대로 된 거겠어요?"
"이 친구가 대학에서 일하던 애라 그래......아, 왜 그리 의심이 많아? 다 사정이 있어서 전화를 건 건데 이렇게 아침부터 사람 기분 나쁘게 할 거야? 집에서 일하는 당신에게 내가 바깥일을 하나하나 다 보고 해야 돼? 남편이 하는 일을 그렇겠거니~ 하고 이해해 줄 수는 없어?"
민망스러움에 그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아내는 입을 벌리고 멍하니 그의 호통을 듣고 있다가 시선을 돌렸다. 주걱을 움직여 밥을 마저 담는 아내의 어깨가 작았다.
"......누가 의심한데요, 앞뒤가 안 맞아서 물어본 거지. 빨리 먹고 어서 가요. 늦겠어요."
“여보."
얼른 의자에서 일어난 그는 가느다랗게 떨리는 아내의 어깨를 뒤에서 감싸안고 속삭였다.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갑자기 따지니까 놀라서 그랬어. 평소에 당신이 안 그러던 행동을 하니까......"
"이이가 닭살 돋게 왜 이래요. 정말 늦었으니까 빨리 먹고 가요. 회사 늦으면 안 되잖아요."
아내는 이슬처럼 고인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내며 말했다. 아내를 만족스레 달랜 그는 식탁으로 돌아가 아내가 고봉으로 퍼 준 밥을 먹으며 오늘 혜진을 몇 시 쯤에 만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선희의 집을 알게 되니 일주일 동안 심란했던 마음이 안정됐다. 지방에 있는 선희의 집에 그는 출장 가는 길에 들러 무덤에 향을 피우고 돌아올 것이었다. 저번 주가 정신없이 바빴던 만큼 이번 주는 반대로 한가로울 터였다.
"여보, 발 아파요?"
현관에서 그의 재킷을 입혀주던 아내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니야, 하고 고개를 가로 저은 그는 구두를 반쯤 신고 구둣주걱을 찾다 어이쿠 하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어머나, 여보! 화들짝 놀라 부축하는 아내에게 그는 휘휘 손사레를 쳤다. 괜찮아, 여보. 발을 잘못 디뎠어. 걱정하는 아내를 겨우 뿌리치고 지하주차장까지 내려온 그는 차에 타자마자 혜진에게 사랑이 듬뿍 담긴 메세지를 보내는 대신 구두를 벗고 양말도 벗었다. 그의 엄지 발가락은 퉁퉁 부어 바늘로 쿡 찌르면 고름이 나올 것 같다. 일주일 동안 빠짐없이 꿈에서 그녀를 보았다. 귀신이 매일 물어뜯는 발톱은 이제 시꺼매져서 썩은 이빨 같다. 쑥 빼면 빠질지도 모른다. 남자는 겁이 난다.
"빨리 처리를 해야지, 빨리. 이러다 발병신 되겠네."
목 막힌 소리로 중얼대던 그는 양말을 신다 발톱을 잘못 건드려 악 소리를 내고 말았다. 정수리를 쇠못을 대고 망치로 땅 치는 듯한 통증이었다. 지른 비명이 좁은 차 안을 울린다. 그는 생리적으로 새어 나온 눈물을 글썽이며 구두를 마저 신었다.


***


그리고 오후, 그는 예전에 뛰쳐나갔던 무당집에 찾아 들어갔다. 가자마자 상을 뒤엎을 듯 성큼성큼 다가간 그는 눈을 부릅뜬 무당에게 큰 소리로 을러댔다.
"야, 이 개잡놈의 사이비야. 뭐? 귀신이 더덕더덕 붙어 있어? 그걸로 속아 넘어가는 사람 많든? 아주 입술에 기름칠을 했구만. 그러고 굿판을 벌여야 되니 삼사백을 내놔? 누굴 호구로 아나 뭐 이런 씨발년이 다 있어?"
"어허!!!! 장군님 앞에서 무엄하게!!"
상을 탕탕 치는 무당 앞에서 그는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아 씨발 진짜 속 터지네. 원혼은 무슨. 그 년 팔팔하게 살아서 유학까지 다녀왔는데!"
무당은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가 다음 순간 아하, 하고 탁상을 쳤다. 상 위의 검고 붉은 콩들이 팝콘처럼 튀겼다.
"그럼 산자의 원념이구나! 요즘 여자들은 하도 기가 드세서 살았어도 죽은 년처럼 원한을 아주 그냥 시퍼렇게 불태워. 그러니까 정성이 부족하니 장군님 눈이 크게 안 뜨인 거 아냐! 밝게 뜨여야 뉘가 무슨 수를 쓰는지 알지! 무턱대고 막아주십시오, 하며 참새 눈물 만큼 정성을 쓰니 죽든 말든 까무라치든 알 게 뭐람!"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 하는구만? 응?"
"하이고, 우리 장군님 말 안 믿을 거면 여기 왜 왔어! 썩 나가!"
"안 그래도 나간다! 내가 사이비 무당한테 점 쳐달라고 온 줄 알아? 되도 않은 헛소리 들은 거 따지러 왔지. 씨발 내 돈 아까워 죽겠네. 여기 다신 오나 봐라!"
그는 씩씩대며 발을 돌렸다. 그의 아기를 베고 자살했다고 대학가에 소문 났던 한선희는 멀쩡히 살아 있었다. 아이를 지웠는지 낳아 딴데로 보냈는지, 어쨌든 그녀는 유학을 갔다 와 지금 결혼하고 잘 산다고 그녀의 부모는 말했다. 후배의 죽음을 처음 듣고 애도를 표하러 간 선배 흉내를 내던 남자는 넋 놓고 돌아오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무당년 말 전부 싸그리 지어낸 소리였어! 해서 거하게 한소리 쏟아내려 돌아왔는데 영 속이 시원치 않았다. 내가 잘못했소 빌지도 않고 오히려 큰소리를 탕탕 치는 것을 들으니 속에서 천불이 오를 지경이었다.
신발에 발을 구겨넣는데 엄지가 부어오른 쪽은 차마 마구 넣을 수가 없었다. 아까보다 훨씬 부어오른 것 같았다. 아침에 구두를 신은 게 기적 같다. 그가 현관에 쭈그리고 앉아 구두를 조심조심 신는데 어느새 뒤에 온 무당이 복숭아 나뭇가지로 그의 어깨를 세게 후려쳤다.
"이놈, 나가라 이놈! 재액을 이끌고 와, 재액을! 온몸에 더덕더덕 원한이 붙었구나! 화를 불러올 것이야!"
"씨팔! 미친년이 별 꼴값을 다 떠네. 그거 저리 안 치워?"
손을 뒤로 내저어 무당이 치는 나뭇가지를 쳐내려다 그는 손가락을 아프게 후려맞고 악 소리를 냈다. 어깨며 등이 몇 시간 동안 두들겨 맞은 것처럼 쓰리게 아팠다. 그는 욕을 내뱉으며 구두 뒤축을 구겨신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허겁지겁 나가는 뒤로 무당이 소리쳤다.
"살아있는 년이 아주 원한이 넘치네 그랴! 철못으로 쾅쾅 박아대는데 안 아프고 배기겠어? 발 다음엔 다리고 팔에 머리야! 고 다음엔 요 가슴 깊숙한데 염통이지! 급살 맞기 전에 여자 정리해! 인생이 불쌍해서 말해 주는 거야!"
무당은 자기 넙데데한 가슴을 퉁퉁 두드리며 걸걸하게 말했다. 그는 쌍시옷으로 시작하는 단어 몇 개를 내뱉고 현관문을 열다 고꾸라졌다. 무릎을 붙들고 끙끙대던 그는 체면도 잊고 엉엉 울고 말았다. 다리가 쇠꼬챙이로 궤뚫리는 것처럼 아팠다. 죽을 것 같았다.
결국 그 자리에서 응급차를 불러 병원에 실려 간 그에게 의사는 "심하게 부딪치셨군요." 말만 했는데 무릎에는 야구방망이로 후려맞은 것 같은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넘어져서 생긴 상처라고 하니 의사는 놀란 기색이었다. 간 김에 발가락도 보여주었더니 의사는 간호사에게 아주 대단한 처치를 시켰다. 발톱 옆에서 고름을 한 시간 동안 빼내니 하늘이 노랗게 보일 만큼 아팠다. 항생제 한 통을 받고 나오며 그는 거의 울 것 같았다. 다리 병신이 된 기분이었다. 절뚝이며 대로로 나와 텍시를 잡은 그는 집으로 가다 혜진의 전화를 받았다.
"오빠! 왜 이렇게 안 와?"
"응?"
"......오늘 나랑 내 친구 커플이랑 놀러 가기로 했잖아. 잊었어? 같이 둑에 가기로 했으면서!"
"그, 그랬나?"
그러고 보니 일주일 동안 바빠서 못 만난 대신, 월요일 저녁에는 꼭 만나기로 했다. 그녀가 신나게 떠드는 것을 발가락이 아파 한 귀로 흘러넘긴 대가다. 혜진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며 울먹이는 것을 그는 간신히 달랬다.
"지금 어디야? 데리러 갈게."
무당집에 세워둔 차로 가는 동안 퇴근시간이 되어 택시비가 배로 들어 그는 울툭불툭 올라오는 쓴소리를 간신히 눌렀다. 혜진은 한번 삐지면 달래는데 일주일은 걸린다. 것도 비싼 레스토랑 데려다 주고 새 옷을 사 입혀야 간신히 풀릴까 말까다. 물론 이쁜 혜진이에게 들이는 돈은 눈꼽만큼도 아깝지 않았지만 그동안 부리는 신경질이 장난이 아닌 것이다.
그는 자기 차로 약속 장소에서 단단히 골이 나 기다리는 그녀를 태워 집 근처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러고도 혜진은 삐진 기색 한가득이어서 그는 거의 애원하다시피 빌었다.
"혜진아, 오빠가 요즘 너무 바빠서 너한테 제대로 신경을 못 써 미안해. 회사 일이 워낙 바빠서 말이야. 오빠 이해하지?"
"......몰라."
"우리 이쁜 혜진이 왜 그래? 자꾸 이렇게 오빠 맘 아프게 할 거야? 오늘 안 그래도 아파서 병원 다녀왔는데 혜진이까지 힘들게 하면 오빠 정말 속상해."
"병원? 오빠가 왜?"
꿈에 발톱을 씹어먹는 귀신이 나와서 무당집을 갔다 나오다가 넘어졌다. 말하기엔 너무 황당하고 어이없는 말이라 그는 꾸역꾸역 올라오는 말을 집어삼키고 그냥 일이 좀......하고 얼버무렸다. 잠깐 조용해졌던 그녀의 입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 여자 임신했어?"
어어? 하고 영문 모른 남자가 어설픈 반응을 보이자 혜진은 더욱 날카롭게 캐물었다.
"오빠 부인 임신했냐구!"
"아, 아, 아니야! 혜진아, 오빠가 절대로 밤에 그 사람한텐 손 안 댄다고 했잖아. 나한텐 너밖에 없어. 맨날 나만 보면 얼마나 싸한데. 집에 들어갈 때면 또 우리 혜진이랑 헤어져서 무덤에 들어가는구나, 하고 한숨밖에 안 나온다니까."
그는 황급히 부정했다. 억울했다.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하긴 하지만 피임은 철저히 하고 있었다. 아내도 동의한 사항이었다. 그들은 둘만의 신혼 생활을 충분히 즐기고 난 후 아기를 갖기로 가족계획을 세웠고 지금까지 착실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는 연신 부정의 말을 쏟아냈다. 혜진은 간신히 수긍하는 기색이었다.
"......알았어, 오빠. 그런데 병원엔 갑자기 왜 갔어?"
혜진에게 무릎을 보여주자 그녀는 깜짝 놀라 호들갑스럽게 그를 걱정했다. 내심 기분이 좋아진 그는 혜진이 집에 들어간 후 차를 출발시키려다 잠시 머뭇거렸다. 그냥 넘어가려 해도 지금까지 마음에 걸리는 소리가 있었다. 그는 결국 익숙하지 않은 버튼을 눌렀다. 귀로 들으나 전화 너머로 들으나 듣기 싫은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씹어뱉듯 말했다.
"발 다음에 다리라는 게 무슨 뜻이요?"
"아까 그 더덕더덕 화가 붙은 불쌍한 인간이네. 다신 안 온다며?"
"씨팔 내가 전화를 걸었지 내 발로 거길 갔나! 쓸데없는 소리 말고 말하쇼. 발 다음에 다리란 게 무슨 뜻이냐고!"
"이 놈, 장군님 뫼시는 사람 앞에서 하는 소리 좀 보게!"
대번에 목소리를 높여 무엄함을 꾸짖는 무당을 남자는 간신히 참아넘겼다. 급한 것은 따로 있다.
"발 다음에 왜 다리냐고!"
"그야 살아있는 년이 자길 버린 놈 처죽이는데 바로 목을 따리?"
무당의 냉한 소리에 남자는 꼴깍 침을 삼켰다. 무당은 흥이 나서 더욱 신나게 떠들었다.
"인형 하나 만들어 못 들고 탕탕 박아대야지! 여시 같이 앞에선 아양 떨고 뒤에선 다리에 팔에 머리에 가슴팍에 쾅쾅 못대가리 박으면서 죽일 놈 개폐인 되고 몸 작살나는 거 감상해야지! 단박에 깨꼭 넘어가면 이때까지 당한 세월이 억울해서 어쩌누. 참고 넘긴 세월이 아까워서 어쩌누."
"......아 쓰펄 말을 해도......"
"이런 소리 듣기 싫었으면 가운뎃다리 간수나 잘 했어야지!"
바락 수화기에서 튀어나온 소리에 마음이 삽시간에 불편해졌지만 전화를 끊을 수는 없다. 그는 괜히 아픈 무릎을 문지르며 꿍얼댔다.
"목소리 좀 죽이쇼. 그래, 뭐, 어쩌라고. 어째야 되는 거요?"
"정성이 부족한 중생에게 내가 뭔 말을 해. 커험."
"그러지 말고 좀 알려주쇼!"
남자는 앓는 소리를 내지만 무당은 요지부동이었다. 수화기 건너 무당을 어르고 달래고 꼬집고 쥐어뜯고 닦달해서 그는 겨우 한마디를 들었다.
"고 여시를 찾아야지!"
"어.....어떻게요?"
어느새 존대를 하는 남자가 흡족한지 무당은 한결 느긋한 목소리로 일렀다.
"그거야 알아서 해야지! 그런 다음 고년을 닦달해서 어디 숨켰는지 알아내야 하는 게야!"
"뭘......뭘 숨길 걸 알아냅니까?"
"뭐긴 뭐야, 원수놈을 본따서 요리조리 꾸미고 뱃속에 손톱 넣고 머리카락 붙여 놓고 손발 팔다리 개구지게 만들어서 쾅 박음 딱 아프게 만들어 놓은 인형이지!"
듣기만 하는데도 목덜미가 선뜩했다. 남자는 식은땀이 흐른 뒷목을 손바닥으로 닦았다. 이건 사람 닮은 인형을 만들어 못을 박아 아프고 병들게 한다는 저주 인형 얘기 아닌가. 어린애들 유치찬란한 괴담집에나 나올 얘기를 직접 귀로 들으니 터무니없기도 한데, 헛소리로 넘기기엔 구두도 못 신고 찍찍 끌고 나온 병원 슬리퍼 사이로 삐져나온 발가락이 욱신거렸다. 특히 엄지발가락은 호두알만큼 퉁퉁 부어 발을 끌 때마다 숯불 덩어리를 붙인 것처럼 화끈거렸다.
"아 씹......그걸 어떻게 찾느냐고."
"이제까지 한 말 털끝도 안 들었구만! 정성이지 정성!"
"그 놈의 얼어죽을 정성 타령......"
"뭬야?"
카랑카랑하게 되묻는 목소리에 그는 뒷말을 겨우 삼켰다. 무당이 말한 계좌로 그로선 피눈물 나는 거액-거래처랑 치르는 하루치 술값-을 이체하고 나서야 그는 몇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고년은 네 주위에 있는 여시여!’ - 근처에 있는 여자다.
‘아주 꼬랑지를 살랑살랑 대고 있구마.’ - 자신과 썸씽이 있던 여자다.
‘눈치가 아조 네 놈 백배여, 백배!’ - 눈치 빠른 여자다. 나보다!
‘바로 옆에 숨겨두고 시치미 뚝 떼는구마. 찾으면 보일테니 머리통에 구멍 뚫리기 전에 찾아서 가져와!’ - 내 주변에 숨겼다. 찾으면 나올테니 포기하지 말자!
그는 부리부리한 매의 눈으로 사방을 훑기 시작했다. 재무과의 이대리? 판매과에 조부장? 마케팅과 인턴들? 다 사원급일 때 그와 썸씽이 생기기도 했고 생길 뻔 했다가 아슬아슬하게 결혼에 골인했거나 그와의 불장난을 받아줄랑 말랑 했던 여자들이었다. 이쁜 우리 혜진을 만나기 전에 그는 참으로 많은 방황을 했더랬다.
‘니 가까이에 있어! 손톱 쪼가리랑 머리카락 가닥을 짚풀 배떼기에 쑤셔넣고 쇠못으로 쾅쾅 박는 거여! 뭔 짓을 저질렀기에 숨 붙은 년 원념이 이리 깊다냐. 정성이 없으면 눈꼽맨치도 해결해 줄 생각 없으니 알아서 해! 자고로 망자 산자 할 것 없이 정성이여! 정성 없으면 아무 것도 안 되는 게야!’
직장에서 거래처 접대비로 기십 만원을 쓰고 춤과 노래와 망가짐을 한꺼번에 치르는 영업사원들이 제일 잘 아는 말을 무당에게서 들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죽은 것이나 산 것이나 다 정성이 중요하다! 목숨줄이 달려 있다! 에이 이 지랄맞은 세상, 하고 그는 카악 가래침을 올려 뱉고 화장실 물을 내렸다.
점심시간이 막 시작된 참이었다. 남직원들이 저 삼거리에 새로 생긴 국밥을 먹으러 나갈 때 그는 배가 아프다며 슬슬 뒤로 빠졌다. 수다스런 여직원들도 지금쯤이면 다 나가 사무실은 텅 비어있을 터였다. 그는 슬금슬금 빈 사무실로 숨어들어가 심증이 가는 여자들의 자리를 뒤지기 시작했다. 선반 사이와 서랍 안과 책상 아래는 물론 쓰레기통 안도 휴지를 다 꺼내가며 착실히 뒤집어 엎었다. 열리지 않은 서랍은 마스터키로 열었다. 얼굴이 벌개지도록 땀을 비질비질 흘리며 립스틱이 묻은 휴지와 기름종이가 찬 쓰레기통을 뒤지던 그는 발걸음 소리에 기겁하며 엎었던 쓰레기들을 주워담고 엉금엉금 기어 제 자리로 돌아갔다.
“어머, 부장님. 어디 아프세요?”
“괜찮으세요?”
“박카스라도 사 드릴까요?”
책상에 엎드리자마자 들어온 여직원들이 걱정스러운 듯 한마디씩 던졌다. 그는 아냐아냐, 하며 짐짓 죽어가는 척 목소리를 냈다. 어느 직원이 따뜻한 차를 놓아준다. 그의 부서 직원들은 영계는 아니지만 몸매가 삼삼해서 볼 맛이 나는데 이렇게 마음씀씀이까지 고우니 그는 참 자신이 복이 많은 사내구나 싶었다. 얼른 무당이 말한 죽일 년을 찾아 해결을 보고 건강을 되찾고 싶다. 그는 저녁 때 늘상 하던 칼퇴근을 하는 대신 먼저 직원들을 독려하여 먼저 보내고 점심시간에 못 뒤진 책상들까지 마저 뒤졌다. 못 만나 미안하다고 혜진에게 전화로 싹싹 빌면서.
집에 일찍 들어간 그는 오랜만에 아내의 정성어린 보살핌을 받았다.
“여보, 이 멍은 어디서 났어요? 정말 아프겠어요. 잠시만 기다려요.“
이쁜 혜진이와 달리 피부의 탱탱함도 적고 너무 자주 봐서 지겨운 기미가 있지만 아내는 누구보다 정성껏 그를 살핀다. 멍에 약을 발라주고 그가 숨겨왔던 발톱에도 냉찜질을 대 주었다. 다른 집 마누라들은 의심이 많아 어느 술집을 갔는지까지 꼬치꼬치 캐묻고 영수증을 확인하며 따진다던데 그에 비하면 자신의 아내는 천사였다. 그는 얼음주머니를 발에 댄 채로 아내가 바치는 쌍화탕을 마시며 느긋하게 TV 연속극을 시청했다.
다음날 아침 아내의 애정을 만끽한 그는 기분 좋게 현관을 나오다가 왼손 검지를 현관문에 찧었다. 손톱이 제 자리를 벗어나고 뭉개진 살점 새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데 그는 구급차를 부르자는 아내의 말에 간신히 고개를 젓고 손수건으로 대충 감싸고 나온다. 병원으로 가는 동안 피가 손수건을 물들이고 손을 타고 흘러내려 와이셔츠 소매를 더럽혔다. 콧물 눈물을 줄줄 흘리며 병원에 겨우 도착한 그가 손가락을 치료 받고 나온 동안 회사 출근시간은 훌쩍 넘어갔다. 지각이었다.
병원에서 깜박 잠이 든 그는 꿈에서 머리카락에 가려 얼굴이 안 보이는 귀신이 자기 손가락을 어금니 아래 넣고 아득아득 씹는 꿈을 꿨다.


***


손을 붕대로 두툼하게 둘둘 묶고 느지막하게 회사에 발을 들였다. 지랄맞은 상사는 피 묻은 붕대를 보고도 ‘병원에서 좀 더 빨리 처리를 해 달라 하지...’하고 볼멘 소리를 했다. 그의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든 말든 근무시간을 잡아먹은 것이 못마땅하다는 태도였다. ‘빨리 처리를 해? 내 손가락이 무슨 결재 도장만 찍으면 끝나는 서류냐, 이 염병할 놈아.’ 그는 속으로 궁시렁대며 고개는 넙죽넙죽 숙여 예예, 앞으로 그리 하겠습니다, 하고 맘에도 없는 맞장구를 쳤다. 겨우 자리에 돌아와 앉으려니 아직 뜨끈한 커피로 하루의 시작을 안 한 것이 떠올랐다. 사무실에 여직원이 없는 걸 보니 또 급탕실에서 하릴없이 수다 떨며 노닥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커피 좀 타오라 할랬더니......”
귀중한 업무시간을 낭비하는 쪽은 자신이 아니라 여자들이다. 그는 투덜거리며 무거운 엉덩이를 비적비적 들다 하룻밤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또 퉁퉁 부어오른 발가락에 신음을 삼켰다. 겨우 발을 질질 끌고 급탕실로 가던 그는 빼꼼 열린 문 사이로 도란도란 들려오는 여직원들의 목소리에 발을 멈췄다.
"정말 왕재수야. 오늘 아침에 들어오는데 내 가슴 쓱 훑는 눈길 봤어? 진짜 소름 끼친다니까."
"어제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일찍 보내줬는데 오늘은 어떨지 모르겠네. 또 자기 일 다 밀어주고 술자리 가는 거 아닌가 몰라?"
"일 주고 야근 하라고 남기면 차라리 낫지. 일은 일대로 주고 회식자리에 여자가 따라야 술이 맛난다며 끌고 가 봐. 게다가 3차 노래방까지 끌고 가서 부르스 추자고 하면 어우, 정말......저번에 그 새끼 손 엉덩이로 내려가는 거 봤지? 신입 애가 우니까 뭐 그리 호들갑이냐고 있는 대로 면박 줬잖아. 변태 새끼."
"그래놓고 다음날은 왜 일 안 했냐고 따지잖아. 진짜 토한다니까. 할 시간을 주기나 했냐고. 등신 같이 지 일 지가 처리 못하고 떠맡긴 주제에 뭐가 어쩌고 어째? 시발놈 누굴 호구로 아나."
"저 인간이랑 결혼한 여잔 뭐 하고 산대? 회사에서 저러고 다니는 거 아나 몰라. 모르겠지?"
그는 혈압이 올라 말도 제대로 이을 수 없다. 저년들이 감히 누구 욕을 하는지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온다. 좁아터진 화장실 거울 앞에 모여서 화장 고치며 수다 떠는데 근무 시간 다 보내는 발톱의 때만도 못한 년들이 감히 누구에게 쌍욕을 한단 말인가? 그는 그동안 쌓였던 온갖 울화를 명치에 뭉치고 고함을 칠 준비를 한다. 제대로 문도 닫지 않고 뒷다마를 까는 망할 년들을 오금을 저리다 못해 지리게 만들어 주겠다. 그는 혈압이 올라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급탕실 문을 벌컥 열려 손잡이를 잡다가 문득 튀어나온 단어에 급히 숨을 들이켰다. 한달 전 들어온 신입의 목소리에 그의 염통이 단번에 쪼그라들었다.
"근데 있잖아요......언니, 어제 점심시간에 저 사람 혼자 남아있었죠? 아무래도 찜찜해서 말하는 건데......"
뭔데 뭔데? 말해봐 어서. 고참 여직원들이 재촉했다. 신입은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제 책상 밑에 있는 휴지통 있잖아요. 원래 담겨 있던 거랑 모양이 영 다른 거 있죠? 왜, 어제 감기 걸려서 제가 휴지 많이 썼잖아요. 근데 그게 싹 뒤집혀서......그 전날 립스틱 지운 휴지가 맨 바깥으로 나와 있더라구요. 오늘은 저 너무 기침 많이 하고 그래서 립스틱 안 바르고 왔거든요."
"어우, 야. 설마. 회사에서 들킬지도 모르는데 진짜 그런 변태 같은 짓을 하겠니? 말도 안 돼."
"근데......그러고 보니 나도 서랍 안 어지럽던데."
"나도 나도! 바닥에 깔아놓은 생리대가 나와 있더라고. 난 내가 잘못 놓고 잊어버렸나 했지."
"......내 슬리퍼 말야, 책상 아래 놔 뒀는데 점심 먹고 나서 와 보니 저 뒤로 밀려 있더라? 난 청소 아줌마가 다녀갔나 했는데......그 인간 진짜 우리 물건 건드린 거야? 정말? 사무실에 CCTV 없어?"
"있으면 좋겠네. 진짜 확인해 보고 싶다. 그 인간, 진짜 쓰레기통 뒤지는 거면 진짜 개새끼지, 개새끼. 어디서 남의 물건을 뒤져? 이 회사 진짜 거지 같네."
여자들의 난폭한 성토를 들으며 그는 뒷걸음으로 슬슬 물러났다. 벌써 등판에 식은땀이 한가득이다. 부어오른 발톱이 구두 속에서 불 붙은 양 욱신거렸다. 땀 차고 후끈거려 찝찝한 발을 구두 밖으로 낸 그는 양말을 벗다가, 우르르 급탕실에서 몰려나오는 여직원들과 눈이 마주쳤다. 막 양말을 벗는 그를 일별하는 그녀들의 눈이 혐오감과 적대감으로 번뜩이는 착각이 들었다. 그는 욕설을 씹어삼키며 책상으로 고개를 돌리고 후끈거리는 뒷목을 문질렀다. 오냐오냐 하며 봐줬더니 기어올라 뒤에서 호박씨를 까고 있었어? 어디 두고 보자 그래. 볼펜심이 휘어지도록 손가락에 힘주어 싸인을 하고 서류를 넘기다 그는 아얏! 하고 서류를 떨궜다. 종이에 손가락을 베였다. 유난히 깊게 베인 검지에 핏방울이 맺혔다. 오늘 양손이 다 왜 이래. 손병신 되겠네. 그는 투덜거리고 휴지를 뽑아 상처를 눌렀다. 하루 후에 그는 의사에게 '곪았습니다'라는 진단을 받고 고름을 짜내며 병원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그 날 밤 그는 싸늘한 여자 귀신이 오른손 검지 손가락을 손톱으로 긁어대고 아득아득 씹어대다 깔깔 웃는 꿈을 꿨다.
남자는 하루하루 말라갔다. 손뼈가 나가고 팔꿈치가 아리고 어깨가 뻐근하다 못해 통증이 심해져 가보니 너무 책상에 오래 앉아 있어서 생긴 근육통이란다. 요즘 컴퓨터를 많이 이용하는 현대인들이 흔히 걸리는 병이라며 의사는 자세를 바로 하고 앉으라는 말만 건성으로 했다. 닦달을 하여 받아낸 약은 겨우 진통제였다. 남자는 발가락과 무릎에 붕대를 칭칭 감은 다리를 절뚝이며 깁스를 한 손가락을 약봉지에 집어넣어, 손톱이 빠진 손끝이 다른 곳에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여 알약을 꺼내 삼켰다. 발가락이 아파 요즘은 운전을 못 해서 그는 택시를 탔다. 하루 쯤 아내의 시중을 받으며 푹 자고 싶었지만 일년치 병가를 이미 다 써서 회사에 심히 눈치가 보였다.
회식 자리도 요즘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아, 거기 김부장. 한 잔 받아.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잔병치레를 왜 그렇게 자주 해? 믿고 일 맡길 수 있겠어? 몸 관리도 다 실력이야, 실력. 예전엔 사람이 빠릿빠릿 살더니 요즘 정신이 딴 데 가 있구. 집에 무슨 있나?"
소주잔에 술을 따라주며 사장이 하는 말에 남자는 그저 "아이구, 아닙니다! 별 일 없습니다."하고 답하며 고개를 꾸벅였다. 여기저기 성한데 없이 붕대 감은 것 보면 당연히 금주해야 되는 것을 알텐데 술을 그득그득 따라주는 사장에게 속으로 속으론 욕설을 퍼부으면서. '내가 낫든 말든 일만 잘하면 된다 이거지?' 웃으며 석쇠 위에서 타는 고깃점을 뒤집고 연신 건배 제의를 하는 회사 사람들도 원망스러웠다. 그는 '에이 씨발, 몰라. 설마 다리 병신 손 병신 되겠어.'하는 마음으로 소주잔을 받는 족족 들이키고 안주를 젓가락에 잡히는 대로 입에 쑤셔넣었다. 분명 비쌀 한우인데 어째 마누라가 건강식이라고 차려주는 풀떼기 반찬에 녹즙보다 못했다. 혜진이 '오빠, 아~'하면서 입에 먹여주는 과자보다는 훨씬 못했다.
그는 설탕 덩어리 같은 과자 종류는 안 좋아했지만 귀엽고 예쁘고 애교도 깜찍하게 잘 떠는 혜진이는 그에게 집에서 만들어 봤다며 쿠키를 구워 와 오빠 한 입 나 한 입 하며 반씩 나눠먹었다. 장모님이 음식점을 해 손반찬을 잘 만드는 만큼 연애시절에도 그에게 직접 만든 음식을 한상 차려주길 좋아했던 아내와는 겪은 적이 없는 재미였다. 책에서 현모양처를 쏙 빼온 듯한 아내는 한식을, 여우 같은 깜찍한 혜진은 양식을 좋아한다. 완벽했다. 그가 느끼기에도 절묘한 조합이었다. 몸과 마음이 고생스러운 이 시점 남자는 새삼 두 여자가 제 삶의 낙인 것을 느끼고, 그녀들을 선택한 자신의 현명함에 뿌듯함을 느끼는 것이었다.


***


오늘도 혜진은 만들어 봤다며 빵을 구워 와 그에게 먹여주었다. 아픈 발과 손의 통증을 무릎쓰고 차를 끌고 온 보람이 있었다. 혜진은 베이킹이니 뜨게질이니 손으로 이것저것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출장을 핑계대고 회사를 나와 혜진이 재료를 사는 상가까지 차를 몰아 데려다 주며 한낮의 은밀한 데이트를 즐기곤 했다. 요즘 혜진은 퀼트 바느질에 푹 빠져 있어, 천이며 솜을 한가득 사서 핸드폰 고리에 다는 작은 솜인형 같은 것을 만들어 가방에 달고 남자에게도 주곤 했다. 처치 곤란한 선물이었지만 오목조목 팔다리가 달린 것이 꽤 귀여워 선물이라며 아내한테 줬더니 무척 좋아해 그도 기분이 흐뭇했다.
운전대를 잡은 그의 입에 작게 뜯은 빵을 쏙쏙 넣어주던 혜진은 그의 머리에 문득 눈길을 주더니 아, 하고 감탄사를 토했다.
"오빠, 흰 머리!"
똑 뽑힌 흰머리는 다 새어 아프지도 않았다. 그는 약간 슬프게 새치를 봤다. 세월의 흐름이 새삼 박혔다. 그래도 흰머리는 그나마 양호했다. 오늘 아침 그는 머리를 뗀 베개에서 뭉텅이로 뽑힌 머리칼을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던 것이다. 욕실에서 머리를 말리던 아내가 놀라 뛰쳐나왔는데 그는 아내의 정신 사납게 헝클어진 머리에 타박할 생각도 못하고 넋이 나가 있었다.
흐르는 세월에는 장사 없다더니. 남자가 슬프게 한숨을 쉬는데 혜진이 오빠, 저기저기! 하고 손가락질했다. 그녀가 찾던 상가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가 차를 멈추자 그녀는 가방에서 지갑만 꺼내 들고 얼른 뛰어나갔다. 금방 다녀올게! 라는 기운찬 말과 볼뽀뽀를 남겨두고. 남자는 누가 볼까봐 깜짝 놀라 차창 밖을 살피면서도 흐뭇함이 혼재되어 아직 입술 감촉이 선명한 뺨을 문지르다, 그것을 보았다. 빠끔히 열린 가방 안에 든 솜인형을. 정장 같은 쥐색 옷을 입고 넥타이를 맨 남자 인형을.
남자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헤집어 반쯤 보이는 인형을 끄집어냈다. 털실을 꿰멘 머리가 반밖에 안 남은 머리가 너덜거리며 따라 올라왔다. 중간에 가방 지퍼에 걸려 핀으로 고정한 머리타레 한 뭉치가 뽑히며, 솜으로 빵빵한 머리에 꽂혀 있던 시침핀이 쑥 빠져나갔다. 등골에 오싹함이 주룩 타고 흐르며 관자놀이가 지끈 아파왔다. 숨쉬기가 힘들고 눈 앞이 부예졌다. 그를 꼭 닮은 솜인형이 손에서 떨어져 데구르르 차 바닥을 굴렀다.
갑자기 똑똑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혜진의 높은 목소리가 울렸다. 남자는 화드득 튀어올랐다. 문 밖에서 품에 한가득 종이봉투를 안은 혜진이 짐 너머로 그를 보았다.
"오빠! 오빠, 문 좀 열어줘. 나 지금 손이 없어서......오빠?"
허겁지겁 차키를 돌린 그는 앞뒤 보지 않고 엑셀을 눌러밟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 때문에 핸들이 마구 떨려 차가 기우뚱거렸지만 그는 연신 엑셀을 밟으며 백미러를 공포에 질린 눈으로 훔쳐보았다. 갑작스러운 차 출발 때문에 뒤로 나동그라져 엉덩방아를 찍은 혜진이 황당해 하는 얼굴로 그의 차 뒤꽁무니를 보고 있었다. 쫓아오지 않는다. 미친년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그러고도 남자는 족히 30분을 달려서야 차를 세웠다. 어느새 한강이었다. 차에서 나와 떨리는 손으로 담배 한 개피를 빼 문 남자는 연기를 폐 깊숙히 들이마셨다가 뱉어내며 펄떡이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세상에. 혜진이. 믿을 사람 없다지만 혜진이 그럴 줄이야. 남자는 스트레스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한강 바람에 시린 눈을 끔벅였다. 매캐한 담배연기가 눈에 들어갔는지 눈물이 찔끔 나왔다. 우린 서로 참 행복한 줄 알았는데 왜 그랬을까? 자꾸 이혼을 독촉했는데 안 하니 마음에 안 들어서? 일부러 복수하러 의도적으로 접근했나? 과거에 만났던 여자들 중 친인척이 있었나? 아내와 그의 단란한 신혼생활을 보고 질투했나? 아무리 억하심정이 있었어도 사람 마음을 가지고 이렇게 장난을 치다니! 폐부를 꿰뚫는 배신감에 그는 몸서리쳤다.
미친년에게 짓밟힐 뻔한 유부남의 순정을 추억하며 그는 담배 한 대를 다 태웠다. 차에 들어가자 조수석에 혜진의 가방과 떨어진 인형이 바로 보였지만 남자는 애써 무시했다. 마음 같아선 한강에 던져버리고 싶었으나 무당에게 들고 가야 후환이 없을 것 같았다. 가서 굿인지 뭔지 그걸 하고, 내 인생 한때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혜진을 떨쳐내고 새 인생을 사는 거다.
갑자기 차 안을 가득 채우는 벨소리에 남자는 기겁했다. 허둥지둥 안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보자 화면에 뜬 발신자는 혜진이었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버튼을 눌렀다. 다소 화가 난 목소리가 그래도 아직 한 점 애교를 띠고 흘러나왔다.
[오빠? 지금 어디야? 나 다리 아프고 배고파. 나 바로 옆에 있는데 그렇게 갑자기 출발하는 게 어딨어? 나 깜짝 놀랐단 말야. 무슨 일 생겼어? 많이 바쁜 일 아니면 이리 와서 나 태우고 가면 안 돼? 짐 이거 너무 무거워. 나 팔 빠질 것 같아, 오빠.]
말미가 콧소리로 맺어지는 아양 떠는 목소리에 그는 하마터면 흔들릴 뻔 했다. 그러나 그래선 안 된다. 이미 그를 닮은 인형의 참혹한 실상을 보지 않았던가. 넋 놓고 있다가 여우에게 간 빼먹힌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남자는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나 인형 봤다, 혜진아.”
[응? 인형? 아, 가방에 그거? 아직 완성 다 못했는데 벌써 봤어? 머리카락만 마무리하면 오빠 서프라이즈 선물로 주려고 했는데! 우리 요번에 만난 지 몇 일 짼지 오빤......]
시치미 뚝 떼고 둘러대는 솜씨가 아주 텔런트 급이었다. 남자는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씹할년.”
[...뭐? 오빠, 지금 뭐라고 했어?]
“개년아. 네가 사람 맘을 가지고 놀아? 내가 개호구로 보였냐? 앞에선 온갖 아양 다 떨며 남자 등골을 다 빼먹고 뒷구멍으로 호박씨를 까?”
이하 그는 그녀를 확실하게 떼어내기 위한 욕설을 마구 쏟아냈다. 방언 터지듯 정신없이 욕설을 쏟아내며 남자는 요 몇 달 쌓였던 스트레스가 다 쓸려 나가는 쾌감을 맛봤다. 그러고 보니 혜진을 만나면 데이트 비용은 무조건 제가 내고 그녀의 취미생활에 쓰는 돈도 가끔 콧소리에 이끌려 대주고 맛집 경치 좋은 곳 찾는다고 기름값 비싼 이 시대에 시외로 고속도로로 셀 수 없이 뺑이 돌았던 옛날이 떠오르며 울분이 새롭게 차올랐다.
한바탕 가슴에 묵혀두었던 시름 근심을 쏟아내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긴 트름을 한 기분으로 가슴을 펴니 혜진이 심호흡하는 숨소리만 폰 건너로 들려오고 있었다. 기분 좋게 통화 중지 버튼을 누르려 하는데 혜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개새끼.]
항상 콧소리 섞인 고운 말만 쓰던 혜진이라 상상이 가지 않는 앙칼진 목소리에 남자는 멈칫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야말로 속사포 같이 퍼부어지는 말의 홍수는 어마어마했다. 미친놈아네가뭐좋아서사귄줄아냐돈주니까사겼지배나온아저씰나같은영계가좋아해주면고마운줄알아야지잘해줘도지랄이야솔직히네가해준게뭐있다고, 로 시작하는 가히 10분이 넘는 욕설 퍼레이드를 그는 입을 떡 벌리고 듣고 있다가 갑자기 쿡 관자놀이를 찌르는 통증에 허둥지둥 전화를 끊었다. 액정에서 손을 떼는 그의 손가락이 충격과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백일이 넘게 사귀었지만 혜진의 본성이 이럴 줄은 몰랐다.
아직도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그는 신음했다. 애인은 떠나갔어도 그에게는 다정한 아내와 근사한 집이 있었다. 문득 마음의 고향, 편안한 가정, 혜진만큼 매력적이진 않아도 사랑스러운 아내가 무지막지하게 보고 싶어졌다. 차 시동을 건 남자는 집 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아직 해가 안 진 대낮에 집에 들어가기는 오랜만이었다. 그의 집은 아직 디지털 도어락을 달지 않았다. 근처 가게에서 케이크와 꽃다발을 사 온 그는 열쇠로 슬그머니 문을 열었다. 한창 청소를 하고 저녁을 준비하고 있을 아내를 깜짝 놀래키기 위하여. 요즘 혜진에게 투자하다 보니 아내에게 제대로 된 이벤트 하나 마련해주지 않았다. 순진한 면이 있는 아내는 분명히 기뻐하며 그대를 껴안고 뽀뽀해 주고......불타는 밤을 보낼 것이다. 혜진과 같이 하면 꼭 빠지는 모텔비도 절약되고 다음날 아침 밥상도 호화로워지고, 일석이조 아닌가!
쿵, 하고 바닥이 울렸다. 그는 화들짝 놀라 꽃다발을 놓칠 뻔했다. 어디서 수도관 공사를 하나? 남자는 열이 올라 후끈거리는 이마를 훔쳤다. 심장이 쿵쿵 뛸 때마다 아픈 관자놀이도 쿡쿡 쑤시며 날카로운 통증을 호소했다. 아무래도 오늘 스트레스가 심했나 보다. 하기사 귀엽고 순진하게만 보였던 애인이 뒤에서 그런 무서운 짓을 벌이고 있었을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 아닌가. 그는 손등으로 이마를 닦다가 다시 쿵, 들려오는 진동에 머리를 움켜잡았다.
쿵.
아무래도 아스피린을 먹고 푹 쉬는 게 낫겠다. 안방에 약상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아내한테 물이라도 달라 할 생각으로 부엌으로 먼저 들어갔으나, 그녀는 없었다.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어 고이는 침을 삼킨 그는 점차 심해지는 두통에 끙 앓고 꽃다발과 케이크를 탁자에 놓았다.
쿵.
대체 무슨 소리지? 그는 관리실에 항의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양말 바람인 그가 마룻바닥에 퍼지는 진동을 느낄 정도였다. 낮시간이니 밤에 공사를 하는 것보다야 낫지만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도 전업 주부도 생각하지 않고 이런 소음을 내다니 매우 무례했다. 시청에 신고는 한 건가? 남자는 머리를 움켜쥐듯 잡고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쿵.
소리는 안방에서 나고 있었다. 그는 새삼 욱신거리는 발을 절뚝이며 안방 문에 손을 댔다. 제대로 안 닫혀 있었는지 그가 손바닥을 얹자 문은 소리없이 열렸다. 아내는 걸레질을 하는지 침대 아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일이 힘든지 어깨를 들먹이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쿵.
바닥을 보는 아내의 눈 흰자위에 시뻘건 핏발이 서 있었다. 묶지 않아 긴 머리카락이 새까맣게 늘어진 사이로 허연 이빨이 드러났다. 그녀는 손에 쥔 망치를 들어올렸다가 내려찍었다.
쿵.
정수리가 찌르듯이 아프며 현기증이 돌았다. 불식간에 주르르 코피가 입술을 타고 흘렀다.
쿵.
아내가 그의 인형 머리에 쇠못을 박고 있었다.
쿵.

-End.
(2013.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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