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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 내용

안녕하세요. 1월 평가단 김보영, 앤윈입니다.
A와 B는 계속 바뀝니다.

신인작가를 평가하는 기준은 언제나 기성출판 작가보다 높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신인 시절에 가는 곳마다 거절당했던 작품이 기성작가가 되고 나니 베스트셀러가 되더라는 이야기는 흔합니다.
마케팅이나 인지도의 문제도 있겠지만, 우리가 작품을 볼 때에는 그 작품 하나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금까지 써 온 작품 전체를 같이 녹여서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알려진 작품이 없는 신인이, 작품 하나만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대단한 일인가 생각합니다.
소설에 바치는 혼과 정성만 보자면 여느 기성작가보다 더 깊은 감동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평을 하는 입장이지만 오히려 많이 배웁니다.

12월 16일부터 1월 15일 자정까지 올라온 26편의 작품을 심사했습니다.
이번 달에는 좋은 작품이 많아 경합을 벌인 작품이 많았습니다. 별님의 ‘변신로봇 V’, 빈테르만님의 ‘모든 색은 검게 물든다’, 먼지비님의 ‘죽음을 두려워하다’도 가작 후보에 올랐습니다.
많은 고민 끝에 민근님의 ‘몽유기행’과 뒤마님의 ‘바람기억’ 두 편을 가작으로 선정합니다. 두 작품 모두 한 사람은 우수작으로 선정했지만 한 사람은 동의하지 않은 작품입니다. 평이 갈리는 작품은 보편적으로 무난하게 잘 썼다고 평가받는 작품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작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두 분의 건필을 기원합니다.



완벽한 죽음을 팝니다. - 지현상

A : 딸의 병원비를 더 이상 댈 수 없어진 아버지가 악마와 거래를 해서 자신의 죽음을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도 여유롭게 살아가지 못하는 세태를 파고든 점이 훌륭하고, 특히 간절하게 소원하면 이루어진다는 흔한 덕담을 꿈속에서 나타나는 악마와 연결 짓는 발상이 재미있습니다. 악마의 ‘악마다운’ 소원 이루기 방식도 매력적입니다. 악마 그 자체를 세계의 룰로 치환해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구성적 비유까지 전반적인 완성도가 높으며, 문장도 걸리는 데 없이 쉽게 잘 읽히는 글입니다.

B : 사람들이 쉽게 목숨을 끊는 시대, 죽음조차도 소비되고 농담거리가 됩니다. 마몬은 잔인하면서도 친절하고, 계약대로 고객의 요구에 맞는 완벽한 죽음을 선사하고, 순환구조의 결말도 좋습니다. 
마몬과 주인공의 대화로 소설의 대부분이 진행되면서도 사실상 주인공이 계약서에 사인하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능동적인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것, 기지를 발휘하거나 스스로 생각하거나, 뭔가를 희생하는 것도 없이 그저 수동적으로 끌려갔다는 점에서 지면이 다소 소비된 감이 있습니다. 
깔끔한 소설이었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다 – 먼지비

A :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시대를 바꾸어서 기계장치로 변주한 듯한 이야기입니다. 주교가 신의 영향력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시 그 인격을 재창조해내는 부분이 첨부된 것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매력이 있습니다. 주교의 실험이 인간세계 특유의 복잡한 구조의 탓으로 완연하게 실패로 돌아가는 과정 역시 매끄럽습니다. 문장들은 그 자체로서 훌륭한 문장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전반적인 소설의 분위기 – 번역된 옛날 소설 같은 – 를 형성하는 데에는 효과적입니다. 이 분위기를 유지한 채 문장으로도 훌륭한 문장이 되도록 노력한다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특히 마지막에 ‘내리비치는 빛’의 비유가 좋습니다. 시대의 진실이 무엇인지 더는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을 잘 은유한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단, 그 비유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굳이 추기경의 말을 지나치게 장황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서사 내용과 서두의 인용문이 썩 어우러지지는 않습니다. 특히 주교부분까지 내려가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인용문으로 서두를 시작할 수는 있으나, 그러려면 인용문의 내용이 소설을 전반적으로 갈무리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겠지요.

B : 어느 종교적인 시대를 배경으로 두 종류의 생명이 태어납니다. 전기적 자극으로 태어난 유기적인 생명, 그리고 정교한 기계장치를 통해 태어난 무기적인 생명. 사람들이 이를 보고 느끼는 것이 생명의 신비가 아닌 죽음의 공포라는 점이 독특하고 흥미롭습니다. 완전히 다른 성질인 유기적인 생명과 무기적인 생명의 죽음에 대해  양쪽 다 설득력 있게 묘사한 점이 아름답습니다. 
시계의 형태나 죽음, 마지막 순간 주교에게 어둠이 내려앉는 묘사에서, 오를로이 천문시계나 시의회가 다시는 그런 것을 만들지 못하게 시계공의 눈을 멀게 한 일화며, 시계공이 눈이 먼 채로 탑에 올라가 그 시계를 멈추게 했다는 일화 전체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군요. 유기생물을 만드는 방법으로 라이덴병을 활용한 것도 멋집니다. 밀러가 무기물에서 유기물을 합성한 방법도 전기 자극이었지요. 암암리에 역사적 사실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이야기에 힘을 부여합니다.
힘 있고 우직한 소설입니다. 대단할 것이 없다고 쓰셨지만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괜찮지 않은 이야기 - 피바라기

A : MTF인 친구를 평생 지켜주기 위해 노력한, 그러나 성공하지는 못한 착한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소설 안에는 매우 슬픈 서사가 길게 늘어져 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이 많은 서사들을 소설로 묶어냈다고 하기에는 긴장감이 전혀 없습니다. 묘사도 거의 없고, 이야기를 진행하는 과정도 일관되게 설명입니다. 시선의 이동도 없으며 사건을 확대해서 보여주는 것도 없습니다. 확대가 없으니 당연히 멀리서 보여줄 수도 없겠지요. 이야기의 흐름 자체만 두고 이야기하자면 단정하긴 하지만 독자에게는 감정의 파동을 불러올 수 없습니다. 그저 멀찍이 서서 누군가의 삶을 아무런 감정 없이 지켜본 느낌입니다.
소설은 특이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사소한 이야기라도 괜찮습니다. 그 이야기 안에서 삶의 보편성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친구의 헌신은 아름다웠으나 그 헌신이 왜, 어떻게 존재했는지는 읽히지 않고, 그저 어딘가에 미담으로 소개될 수 있을 만한 뻔한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B : 장르독자와 순문학 독자가 같은 작품을 두고 평이 갈리는 일이 많은데, 그 이유는 독법의 차이가 큽니다. 장르독자는 서사를 중심으로 보는 반면에 순문학 독자는 문장과 묘사를 봅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순문학의 서사는 일상과 현실에서 찾을 수 있고, 어쩔 수 없이 서로 비슷한 면이 있는 관계로 ‘무엇을’ 그렸나보다는 ‘어떻게’ 묘사했는가가 중요합니다. 반면, 장르소설은 ‘어디서 본 듯하다’는 것만으로도 평이 깎이곤 합니다. 이 소설은 순문학의 소재와 서사를 갖고 있으므로 ‘어떻게’에 더 공을 들이셔야 합니다. 
고아와 트랜스젠더는 좋은 소재지만 우리 주변에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할 때에는 좀 더 깊이 들어가세요. 한국의 고아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트렌스젠더들은. 
예전 서울 시립 고아원에서는 ‘아이들이 사람에게 정을 붙이거나 기대는 버릇을 없애기 위해’ 영유아들을 1년 단위로 담당 엄마를 바꾸는 제도를 오래 시행했다고 합니다. 두 살, 세 살이 되어 엄마가 바뀐 아이들은 너무나 당황해서 옛날 엄마를 부르며 밤마다 다른 방을 찾아다니며 울었다고 해요. 현실에 존재하는 소외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실 때에는 1) 일반적으로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2)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불합리한 무엇인가를 찾아보세요.
친구가 커밍아웃을 했을 때 그 어떤 오해도 편견도 덧붙임도 없이 따듯하게 안아주는 장면이 좋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흔한 이야기 - 피바라기

A : 사냥을 잘 하던 한 여성이 적군을 발견하는 정찰부대의 대장 역할을 수행하게 되면서 전쟁의 필연적 귀결, 누군가를 죽게 한다는 자명한 사실 때문에 결국 패망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자체가 지나치게 부실합니다. “적을 데려오는 년”이라는 말 자체도 너무 함축적으로 사용되어서 독자에게 불친절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짧고 부실한 이야기인데도 소설 내부의 화소들이 과용되었습니다. 굳이 소녀가 윤간을 당하고 아비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아이를 임신해야 할 필연적 이유는 없으며, 마지막에 옛 상관이 내린 ‘명마’는 실제로 주인공에게 어떤 역할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서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 소설에 이야기는 있지만 주인공 개인을 이해할만한 구체적인 진실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평론가 신형철은 “세상 사람들이 ‘외도를 하다 자살한 여자’라고 요약할 어떤 이의 진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톨스토이는 2천 쪽이 넘는 소설을 썼다. 그것이 <안나 카레니나>다” 라고 서술한 바가 있습니다. 모두에게는 온전한 삶의 이면이 있습니다.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굳이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 이면을 바라보겠다는 선언이라고 생각합니다.

B : ‘괜찮지 않은 이야기’보다 좋지 않습니다. 줄거리만 있을 뿐 소설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제목을 자학적으로 지으시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부끄러워하는데 그 자식이 누구에게 사랑받겠습니까? 쓸 때만은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세요. 누구와 비교할 것도 없습니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그래야 최소한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좋은 작품이 나옵니다.


드래곤의 땅 – Leia-Heron

A : 안젤리나라는 이름의 성녀가 드래곤이 존재하는 이단의 땅에 가서 성전(이라고 쓰고 제국주의 전쟁이라고 읽어야겠죠)을 수행하려 하나, 결국 실패하고 신의 제단 앞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안젤리나에게 ‘신앙’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강하게 신을 신뢰한다는 것은 결국 신이 지고의 진리임을 고백하는 행위이며, 그것에는 이견도 회의도 있을 수 없습니다. 드래곤을 중심으로 해서 진리와 기준의 가변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묘사해냈습니다만, 이 소설의 중심인물이자 관점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성녀 안젤리나입니다. 작가 자신이 신과 신앙에 대해서 좀 더 고찰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안젤리나의 깨달음으로 대단원을 이루는 당혹스러운 결론을 피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이지만, 그것을 피하려다보니 안젤리나 자신의 캐릭터가 불분명해지는 난점을 낳았습니다. 소설 초반의 안젤리나가 가졌던 신앙심과 소설 결말의 안젤리나가 보여주는 신앙심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자신이 믿고 있는 진리가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그 외에도 사람을 보기 귀찮아하는 성녀, 금식기도를 드리고 싶어하지 않는 성녀, 그러면서도 타인의 고통을 고려하는 성녀, 타인의 말을 잘 듣지만 그러면서도 제멋대로 구는 성녀 등 안젤리나의 성격은 일관되게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초반의 안젤리나에 대한 설명은 완전히 불필요합니다. 굳이 그녀의 상황을 설명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관객을 직접적으로 그녀의 삶에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B : 십자군 전쟁은 시대 전체에 상처를 남겼고 또 시대 전체를 성장하게 했습니다. 종교가 믿음의 영역을 넘어 현실에 발을 들인 연후, 완전히 다른 종교와 가치관을 가진 문화와 접했을 때 인간의 인식에 왔던 충격, 진리라 믿었던 것이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과 깨달음이 수많은 사람에게 동시에 왔던 시대의 이야기는 수많은 영화와 소설, 매체에서 계속 회고되었습니다. 용이 어느 지역에서는 괴물이나 악마로, 어느 지역에서는 신으로 받들어지는 것도 그만한 문화충돌의 충격을 줄만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이토록 많이 반복된 이야기, 이미 오래전 시대에 인류에게 한 번 지나간 충격을 반복하려면 지난 시대에 했던 것보다 더 깊은 이해와 고민이 필요합니다. 전형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만큼 어려운 도전은 없습니다. 


피를 먹는 기계 – 사이클론

A : 매우 예전의 소설들에서 나타나는 기계에 대한 원시적 공포를 바탕으로 한 공포소설입니다. 예전의 소설들을 패러디하고 싶었다고 이야기하기에는 현재적 의미가 너무 부족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 기계에 대한 공포는 소설 안에서 몇 번 언급되는 러다이트 운동 시절의 것보다도 훨씬 더 예전 시대의 공포들입니다. 러다이트 운동 때는 이미 기계가 충분히 보급되어서 노동자들의 생계를 위협했을 때니까요. 지금에 와서 다시 기계에 대한 공포를 불러온다면, ‘특정한 기계에 대한 공포’거나, 혹은 그 기계를 수단으로 커트너가 무엇을 이행하려 했는지 정도는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이 공포에는 아무런 근본적 이유가 존재하지 않고, 공포로 나아가는 과정이 그 이유를 불식시키지도 않습니다. 더욱이 소설 내의 화자가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심지어는 등장인물들의 감정과 의도까지도 모두 설명해 주는 것 역시 공포와 긴장을 반감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화자가 그런 식으로 타인의 감정을 추측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독자는 알 수 없습니다.
초반의 인용문을 사용하는 방식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텍쥐페리는 1900년대의 인물이고 러다이트 운동은 1800년대에 일어났고 제임스 와트는 1700년대의 인물입니다. 제임스 와트와 러다이트 운동은 와트의 삶 후기에 겹치는 부분이 존재하지만 생텍쥐페리는 완전히 별개의 시대에 살았던 인물입니다. 생텍쥐페리의 기계에 대한 언급은 기계를 통해 인간성이 상실되는 경험(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 및 자연의 상실에 대한 경험(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에 대한 것이었으므로 이렇게 인용되는 게 적합하지도, 정당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소설 내부에 있는 책을 인용하는 것이 훨씬 분위기를 고조시켰으리라 생각됩니다.

B : 실존인물인 매튜 볼턴과 제임스 와트를 소재로 러브크래프트 풍의 스팀펑크 공포 소설을 쓰셨습니다. 증기기관의 시대는 기계의 낭만과 추억을 표현하는 소재로 주로 활용되는 편인데, 그 시대를 기계에 대한 공포를 표현할 무대로 잡은 점이 놀랍고 재미있습니다.
기계가 사람을 어떻게 먹게 되었는지에 설명은 자세하지 않습니다만 이런 장르의 소설에서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긴장감을 부여하는가, 얼마나 공포를 전달하는가 하는 것이니까요. ‘기계와 피’를 인용하는 것으로 끝내셨는데, 작가의 주제를 그대로 말로 전달해버린 것이 되어버려, 그 인용구들을 조금 더 솜씨 좋게 작품에 녹여내었다면 좋았을 거라고 한층 높은 기대를 해 봅니다.


Bag of holding –빈테르만

A : 물건들을 집어넣었다가 언제든 꺼낼 수 있는 도라에몽의 주머니(!)같은 가방에 대한 비극적인 공포소설입니다. 단순히 물건 뿐 아니라 인간의 기억과 의식까지 잡아먹고 새로운 의식을 덧씌운다는 점에서 인과를 기반으로 한 소설적 미덕과 여전히 혼란을 놓치지 않은 공포소설적 미덕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가방을 머리에 뒤집어 쓴 자가 과거를 여행하는 기이한 ‘의식의 흐름’이 매우 재미있습니다. 역사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작가의 의식이 엿보이는 부분도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결말 부분에서 반전을 통해 사건의 추이를 설명하는 부분은 매우 짜릿합니다.
그러나 “깨어나시오! 깨시민으로 다시 태어나시오!” 라는 부분은 당혹스럽습니다. ‘깨시민’이라는 단어는 최근 한국의 정치사회의 스펙트럼에서 태어난 것이라는 점도 있지만, 그보다는 단어의 뉘앙스가 조롱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자신을 지지해 주기를 바라며 대중을 노골적으로 조롱하는 선동가는 없겠죠. 제목에는 불필요하게 영문이 사용되었습니다. 굳이 영문을 사용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심지어 우리의 두 주인공은 한 명은 프랑스인이오, 한 명은 영국 출신이지만 러시아에 있죠), 영문으로 제목을 표기해서는 흡인력을 높이기 어렵습니다. 이 경우에는 영문 제목에 별다른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B :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무엇이든지 넣을 수 있는 가방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가방 안에 직접 들어가서 내용물을 확인해보는 서두부터 흥미를 자아내고, 보나파르트 시절의 프랑스라는 이국적인 배경을 택했음에도 크게 부자연스럽지 않은 전개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전개하는 과정에서 다소 무리가 있지 않았나 합니다. 가방 안에 들어간 물건만이 아니라, 그 물건에 포함된 기억까지 볼 수 있다는 건 갑작스럽고, 쉽게 연상하기 어렵고, 연상하기 어려운 만큼 상황에 혼란이 옵니다. 결국 가방이 잘못된 기억을 보여주고 가방에 들어간 사람의 모습이 주인으로 변하는 것도 갑작스럽습니다.
환상소설을 쓰는 작가는 낯선 세계로 독자를 인도하는 안내인입니다. 조금만 더 차근차근 중간단계를 밟아서 친절하게 독자를 끌어당겨 주세요.


239Pu – Leia-Heron

A : 데이비드 매콜리의 <미스터리 모텔>이라는 그림책이 떠오르는 단편입니다. 2000년 이후의 북아메리카를 후대의 고고학자들이 ‘발굴’하는 내용인데요. 이 소설에서도 현재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물건들을 완전히 오해해서 들고 다니는 미래세계 사람들에 대한 흥미로운 예측도를 보여주고 있네요. 하지만 이 소설의 경우엔 그런 꼴을 우스워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가볍게는 일본의 괴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피폭’에 대한 공포에서 출발해 핵무기와 핵전쟁에 대한 공포까지 나아갑니다.
하지만 이 소설의 결말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푸른 빛을 뿜는 광석으로 묘사한 점으로 보아 이 소설에서 묘사하고 있는 단검의 재료는 우라늄으로 추정됩니다. 우라늄을 모아놓고 떨어뜨리는 것만으로 ‘버섯구름’으로 묘사되는 거대한 폭발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핵분열 과정이 필요합니다. 핵융합 혹은 핵분열 과정이 필요하지 않다면 소설 내에서 묘사된 그 ‘버섯 구름’을 만들기 위해 미국은 뭐 하러 그 많은 돈을 투자해서 맨하탄 프로젝트를 완성했겠습니까. 결말의 개연성은 일차적 문제지만 결말이 급작스럽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보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 전에 나타난 단검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지, 이 화소들을 결말의 장소로 연결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상태로는 모든 화소들이 각자 따로 존재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B : ‘공성전’이나 ‘던전’이라는 말, 던전 곳곳에 있는 아이템을 찾아내는 전개가 게임소설이나 TRPG소설인가 싶다가 마지막에 세계의 정체가 밝혀집니다. 
하지만 해결되지 않은 점이 많습니다. 맨 처음에 묘사된 왕의 무덤은 무엇이었을까요? 악령이나 괴물은? 비밀장치와 비밀통로는? 핵에 대한 지식이 사라진 시대에서 200년이 지나 그 지식은 어떻게 다시 알려진 것인지? 던전은 건물을 뜻하고, 똑같은 크기의 외날단검은 손잡이가 플라스틱인 식칼, 금괴가 쌓인 방은 은행이었으리라 생각은 들지만 드러나는 면이 없어 명확히 추측하기 어렵습니다. 괜찮은 단서는 239Pu뿐이고 확실히 드러난 것도 마지막에 사람들이 왜 현기증을 일으켰는지 정도밖에 없습니다. 좀 더 단서가 풍부하게 제시되고, 늘어놓은 요소들을 잘 마무리 지었다면 좋았겠습니다.


바람 이야기 – 초연

A : 가벼운 성장 로맨스 소설입니다. 짧은 게임 프롤로그 가기도 하고 장편의 서두 같기도 합니다만 단편으로서의 응축력은 현저히 부족합니다. 사건이 주인공의 삶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없기에 독자는 주인공이 서사 내에서 얼마나 성장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주인공이 바람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주인공의 삶 그 자체에 영향을 미치기보다는 단순히 주인공이 사건을 진행해 나가는 수단으로서 가볍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심지어 제목은 ‘바람이야기’이며, 소설의 서두부터 바람이 등장합니다. 주인공이 어떻게 바람과 대화를 하게 되었는지, 어떤 식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지는 전혀 설명되지 않습니다. 즉, 바람이라는 소재는 이 소설에서 전혀 매력적으로 작용하지 못했습니다. 중심적인 소재를 선정했다면 그 소재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 이 소설 안에서 그 소재는 주제를 드러내는 데에 있어 무엇이 될 것인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더불어 맞춤법은 가장 기본입니다. 맞춤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작가는 독자에게 신뢰를 얻을 수 없습니다. 

B : 긴 장편의 서막 같은 단편입니다. 그리고 본편은 짧은 에필로그로 정리되었네요. 이 에피소드로 장편을 시작하시면 괜찮습니다만 단편으로는 불성실합니다. 장편이라고 해도 곧 뭔가 사건이 일어나야 독자가 붙어 있어줄 것 같습니다.
단편 독자는 장편 독자만큼 너그럽지 못합니다. 장편의 주인공들은 수다를 떨고 가벼운 말장난을 하고, 아침밥을 먹고 평범한 하루를 보내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겠지요. 그들이 그럴 수 있는 까닭은 이미 독자들이 그들과 친해졌기 때문이고, 친구나 가족을 구경하듯이 지켜봐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단편의 주인공들은 독자가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고, 친해지기 전에 이야기가 끝나버립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짧은 시간에 뭔가를 어필하려면, 무엇을 보여주어야 할지 생각해 보세요.


기사도 – 초연

A : 기사도를 지키면서 살고 싶었던 한 기사가, 자신이 지금까지 믿고 있던 신념의 불합리성을 깨닫고 잘못 걸어왔던 길에 대한 속죄의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은 전반적으로 주인공의 감정을 상황을 통해 보여주는 방식이 아니라 서술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런 방식은 독자의 공감을 얻기 어렵습니다. 독자와 등장인물은 구체적인 경험들을 함께 하면서 공감대를 형성하기 마련입니다.
주인공이 훌륭한 기사가 되고 싶어 했던 이유는 그저 ‘훌륭한 기사는 훌륭하기 때문에’입니다. 이 명제가 설득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주인공이 ‘죄책감마저 희미해’지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장면들은 거의 그려지지 않고, 한 가지 에피소드만 단편적으로 그려질 뿐입니다. ‘죄책감마저 희미해’진 주인공이 왕에 대한 강한 충성심과 신념을 가지고 반란군을 생포 및 잔혹하게 고문하는 상황임에도 주인공은 반란군의 말 한 마디에 너무도 쉽게 흔들리고 신념을 바꿉니다. 그 과정도 그저 서술로만 나타나 있습니다. 그 사이의 화소는 하나도 없죠. 굳이 소설이라는 형식을 선택하는 이유는, 이 형식이 타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재현함으로써 어디에도 없는 유일하고도 보편적인 진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은 유일하면서도 보편적이니까요. 이 기사의 삶에서 작가가 찾으려고 했던 ‘이 기사만의’ 진실은 무엇입니까?

B : 주인공은 기사단이 기사도를 잃었다는 것에 좌절하지만 뭐가 어때서 그렇다는 건지 독자가 알 길이 없습니다. 반란을 진압한 기사단장이 반란군이 왜 반란을 했는지도 모르고 반란군은 고문당하면서 ‘왕이 왕답지 못하고 귀족이 귀족답지 못하다’는 교과서적인 말을 하네요. 이 사람은 어떤 대단한 사람이기에 그 어떤 개인적인 경험도 없이 인생을 걸고 고문을 견딘단 말입니까? 
일상대화에서도 “걔 정말 나빠.”라고만 반복하면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왜, 무슨 짓을 했는데?”라는 질문에 답할 만한 내용을 생각해 주세요. 
실존인물을 소재로 한 점이 흥미로웠고, 또 흥미로운 인물이군요. 그 사람의 일화와 역사적 상황을 더 많이 조사하셔서 디테일을 많이 넣는다면 좋은 소재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나비 – 유리아나

A : 짝사랑의 한을 품은 여인이 삶과 바꿔서라도 사랑을 이루는 백일몽을 선택하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의 결말까지 쉼 없이 내달리지만 결말을 철저하게 잘 숨기고, 바깥에 있는 서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방식이 세련됩니다. 단순히 한과 복수에 대한 이야기를 벗어나,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도를 뒤집는 조합을 통해 특별하고도 아름다운 시대물을 만들어냈습니다.
아쉬운 점은 대사와 문장입니다. 서사의 매끄러움에 비해서 대사는 별다른 고민 없이 쓰여진 흔적이 여러 군데에서 엿보입니다. 문장 부호를 사용하는 방식이나, 어절 한두 개만 내뱉는 대사에서 특히 그러합니다. 더욱이 이 소설에서 장면의 진행은 압도적으로 대사에 실려서 흘러가고 있습니다. 소설은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소설의 대사는 시간차를 두고 시각적으로 읽히지 않습니다. 한 줄이라고 할 지라도 대사는 등장인물의 성격, 분위기, 사건 진행에 모두 큰 영향을 미칩니다.

B : 모든 것이 완벽하고 행복해 보이는데도, 어째서인지 무엇인가를 계속 두려워하는 한 여인, 그리고 차츰 그 여인의 과거와 실체가 드러납니다.
라노벨의 문법이 조금 보입니다. 저자께서 어느 장르를 지향하시는지 알 수 없으나, 혹시 라노벨이 아닌 소설을 생각하신다면 몇 가지를 생각해주세요. 느낌표를 여러 개 넣고 싶을 때에는 느낌표 여러 개가 뜰만한 묘사와 문장을 넣어주세요. 느낌표 하나를 넣고 싶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문장으로 표현해주세요. 말줄임표는 가능한 쓰지 마세요. 의성어를 독립적으로 쓰지 마시고 의성어가 들어간 문장을 쓰거나 그 의성어를 문장으로 묘사하세요. 말을 반복하고 싶으실 때에도 반복하는 대신 감정이 고조될 만한 다른 문장을 넣어주세요. 
전개가 좋고 감정표현이 섬세하니, 그 점을 고려해서 한 번 이 작품을 다시 정서해 보셔도 좋겠습니다.


무제 – 김진영

A : 성경의 다양한 화소들(헤롯의 아기 살해, 아브라함의 떠남, 광야의 천사 등)을 이어 붙여 놓은 것 같은 이야기입니다. 고전적이며 신화적인 이야기를 사용하는 것은 분명히 나름의 효과가 있습니다. 독자에게 이 이야기가 인간 본연의 역사적 상징 및 본성들과 깊숙이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죠. 하지만 이 소설의 경우 그 부분에 대해 상당히 의문을 갖게 합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이 무엇을 위해 쓰여졌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소설이 무엇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적어도 이야기로서 어떤 등장인물의 삶에 대해 통찰할만한 지점은 제공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일 그 통찰의 지점을 제공할 수 없다면 이미 ‘성경’의 존재를 알고 있는 독자들은 이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할 이유 자체가 사라집니다.

B : 한국에서 예수님이 나셨군요! 한국의 어느 고전신화인 듯 지켜보다가 예수탄생설화를 연상시키는 전개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전개하실 생각이 없으셨나봅니다. 조용히 끝난 결말이 아쉬웠습니다.


아기 새  - 김진명

A : 귀여운 한 편의 동화 같은 글입니다. 집에서 출발해 여러 가지 난관을 겪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동화의 구조를 철저하게 따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이 가지는 파장은 굉장히 미약합니다. 이 동화가 A – B – C – D – A의 과정을 가지고 있다면 일반적인 동화들은 A – B – C – D – A’의 과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행을 떠나서 여러 가지 난관을 겪었다면 아기 새는 자신이 겪은 일들에서 나름대로의 일반화를 도출하고 떠나기 전의 자신과는 달라져 있어야 합니다. 형태와 위치상으로는 같은 모습을 취한다고 할지라도 주인공의 내면은 더욱 성장해 있어야 합니다. 소설의 시작과 끝에서 주인공이 성장하지 않았다면 성장하지 않을만한 이유들을 만들어 주어야죠. 아기 새는 다양한 난관을 겪지만 그 난관은 아기 새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심지어 날개도 아기 새의 어떤 노력도 없이 그저 나았습니다. 아기 새가 겪은 두 번의 외도가 이 녀석에게 어떤 삶의 의미가 될 수 있을지, 이 아기 새의 일생 중 이 부분을 왜 독자가 지켜보아야 하는지 알 수 없군요.

B : 예쁜 동화입니다. 새를 주인공으로 하는 동화는 보통 ‘나는 것’을 배우는 주제로 가기 쉬운데, 이 소설에서는 날개를 다친 새가 달리는 법을, 그리고 헤엄치는 법을 배우려 노력합니다. 아기 새가 어디에서 정착할지 궁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습니다. 하지만 상처가 나아 다시 나는 것으로 결말을 내니 허무하네요.
만약 아기 새가 날개 없이 사는 방법을 지금보다 좀 더 연구하고 탐구한다면, 그리고 독자가 납득이 갈 수 있는 방법으로 성공한다면 어른과 아이의 마음을 같이 울릴 수 있는 좋은 동화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전달자 – 유이립

A : 핵 전쟁 이후 초토화된 한반도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신임 대통령의 고군분투를 그린 이야기입니다. 북한이 ‘악의 축’이라고 명명된 이후부터 한반도에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가 공유할만한 두려움을 핵 전쟁이라는 인류 공통의 두려움으로 치환 해 풀어나갔습니다. 특히 이형종들이 발생하는 과정은 방사능 자체에 대한 두려움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뜻을 전하러 왔다던 특사가 결말 부분에서 자신이 대통령임을 밝히는 반전에 가장 무게가 실려있습니다.
의회 정치가 사람들의 삶을 본질적으로 해결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의회 정치에 대한 사람들의 환멸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는 데에 비하여 스스로가 사실은 대통령이라고 밝히는 부분에서는 선출된 대통령이라는 사실 자체에 굉장히 권위를 실어주고 있는 점이 모순적입니다. <전달자>라는 제목은 특사의 역할 뿐 아니라 대통령의 역할까지 은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국민대통합’이라는 노골적인 문구가 몇 번씩 등장함으로써 은유가 무의미해집니다. 도입부분의 식인종이 된 이주노동자들의 경우, 왜 한국에서 평범하게 노동을 하며 살아가던 이주노동자들이 핵전쟁이 일어나고 나자 식인종으로 변모할 수밖에 없었는지 설정을 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슈퍼 홍 씨 가문의 경우에는 여러 모로 고민한 설정의 흔적이 보이는데, 이주노동자 식인종의 경우에는 ‘이주노동자’라는 이유로 그저 태깅한 것처럼 보일 우려가 있습니다. 맞춤법은 가장 기본적인 부분입니다. 반드시 확인하도록 합시다.

B : 핵전쟁 이후 디스토피아 세계의 한국을 배경으로, 투표할 수 있는 사람을 모두 끌어 모아(3만 5천명!) 그 중 20%의 득표율로 당선된 민주정부가 국민 대통합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고 재미있습니다. 혼란의 세상에서 방송인의 자존심을 지키는 디제이와 한국에서라면 충분히 나올법한 슈퍼 홍씨 가문의 설정도 흥미로운 요소입니다.
이 작품은 좋은 면이 많은데도 초반에 평가가 상당히 깎였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는 왜 그렇게 쉽게 하나로 묶고 그렇게 간단히 표현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는 우리나라 말을 못할 뿐이지 자기 나라 말 잘 할 텐데요. 그리고 왜 한국인은 식인종이 안 되었나요? 


왕의 숲 – 뒤마

A : ‘약탈자’에 의해 생명의 왕을 잃어버린 숲이 진정한 왕을 되찾기까지의, 아름답고 황홀한 전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소설 안에서 독자가 시선을 함께 하는 인물은 ‘하얀’이지만, 사실 소설의 숨은 주인공은 약탈자로 표현되는 현재의 ‘왕’입니다. 생명의 왕을 만나서 진실로 구원받은 것은 숲 이전에 숲을 약탈했던 그 자신입니다. 자신이 숲을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스스로는 어찌할 수 없는 왕의 안타까움과 절망이 훌륭하게 그려집니다. 나중에 ‘은달’이라는 왕을 만났을 때 소멸과 생성의 두 세계가 화해하는 과정은 꿈처럼 아름답습니다.
다만 이전의 ‘왕’이 그렇게 괴로워 할 선택(약탈)을 어째서 해야만 했는지가 너무 불분명합니다. 단지 그는 태어나서는 안 되는 존재였을까요?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기에는 모든 생성은 소멸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소멸이라는 자연 그 자체의 화두를 너무 악한 것으로 전제하는 것은 생과 사 모두를 전제하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설득력 있는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B : 동화적인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잔인한 왕과 한 신묘한 아기와 그 아기를 키우게 된 가족의 이야기가 교차됩니다.
하얀, 하나, 은달이라는 이름이 예쁘기는 하지만 다른 문장에서도 등장하는 일반명사를 쓰는 바람에 호칭이 헷갈리는 면이 있습니다. (하얀의 이름이 얀이면 하나는 ‘나’일까요?) 하나는 하얀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일 듯한데 말투나 행동이 구분이 가지 않고 하얀과 동년배 어린애로 느껴집니다. 
세계관이 모호한 것은 상관없지만 묘사의 폭이 좁습니다. 작가의 시선이 인물에 계속 클로즈업으로 밀착되어 있어, 지금 묘사된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자신이 카메라 감독이라고 생각하고 가끔 하늘이나 지평선, 좀 더 큰 화면을 보여주세요.


달의 숨 – 뒤마

A : 홍길동전이라는 소설의 핵심을 파고들어 나간 점이 훌륭합니다. 홍길동전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열망을 홍길동전이라는 소설에 투영하여 꿈을 꾸고, 현실을 부정하는 과정을 치밀하고 아름답게 엮어나갔습니다.
하지만 소설 내에 인용이 과다해서 소설의 숨을 죽이는 측면이 있습니다. 각주 1, 5, 6, 9, 10의 경우는 역사서가 아니므로 굳이 달아 줄 필요가 없는 주석들입니다. 2, 3, 4, 7, 8의 경우에도 굳이 작가 자신의 말이 아닌 인용구로 처리했는지에 대해 분명한 이유가 보이지 않습니다. 작가 자신의 말로서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인용구가 가지는 효과가 분명할 뿐 아니라 인용이 가지는 상징이 커야만 작가가 자신의 말을 포기하고 타인의 말을 가져오는 것이 용인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처럼 인용구가 많다면 오히려 인용을 하기 위해 인용을 했다는 혐의를 떨칠 수가 없습니다. <달의 숨>이라는 제목이 서사와 맺고 있는 관계도 희미하며, ‘달의 숨’이라는 단어를 마지막 장면에서 한 번 언급한 것으로는 소설 내의 상징을 확대하기 어렵습니다. 제목은 서사를 아우를 수 있어야 합니다.

B : 홍길동전을 모티브로,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자개함 속의 고상이가 등장합니다. 판소리를 연상시키는 운율 속에서, 소설 하나를 통해 가슴에 꿈을 품고 살 수 있게 된 사람들, 작가로서 이보다 더 두근거리고 아름다운 풍경이 있을까요. 자개함을 여는 순간 꿈이 끝나고 확률로만 존재하던 작은 생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으로 끝나는 상징적인 결말도 아름다웠습니다.
세 작품을 보여주셨는데 시적이고 가락 있는 묘사가 이 시대에 가장 어울리지 않았나 합니다. 즐겁게 보았습니다.


단단한 세계 – 겸군

A : 세계에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는 자신밖에 남지 않은 상황을 배경으로 한 재난 소설입니다.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를 연상시키는 장면(총을 들고 다니며 경계하는 장면, 마켓에 가서 적당히 필요한 물품들을 집어오는 장면)들이 적지 않게 등장합니다. 여러 번 사용된 클리셰 같은 장면이니만큼 어떤 식으로 변주할지에 대해 좀 더 고민해 보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소설은 주인공의 생존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세계에 홀로 남은 주인공의 외로움이 가장 주된 화두인 것도 아닙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생존보다는 타인의 존재, 정확히는 타인과의 갈등에 가장 무게를 두고 움직입니다. 자신을 위협하는 타인에게 총을 쏘는 등, 사소한 상황들은 이해가 갈만큼 첨예하게 구성했습니다. 그러나 거시적인 상황들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어째서 사라졌는지에 대해 주인공은 왜 탐구하지 않으며, 주인공을 위협한 집주인은 자신의 집에 들어와 있는 타인에 대해 왜 이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 것입니까? 주인공은 계속해서 자신의 여자친구와 친구에 대해 언급하지만 주인공이 그녀와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것들은 서사의 진행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모든 인류가 사라진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배신이 처절하게 남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주인공의 심리뿐 아니라 그 심리에서 기인하는 일들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서사의 줄기도 뻗어줘야 할 것입니다. 주인공이 계속해서 여자친구의 배신을 괴로워했다는 것 외에는 마지막에 여자친구의 방에 안착하는 이유와 연관된 화소는 전혀 없습니다. 주인공의 행동에 인과를 부여해 주십시오.

B : 어느 날 세상에서 사람들이 나만 남기고 모두 사라져버립니다. 이 소설에서는 좀비나 괴물, 무정부주의자들 같은 외부의 위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직설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애인을 잃은 주인공에게는 하다못해 고독감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도시의 자원을 혼자 쓰는 관계로 생존조차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독자의 감정을 최초로 불러일으키는 사건이 다른 사람의 출연이나 위협의 등장이 아닌 도서관이 불타는 장면이라는 사실이 이 소설의 독특하고 매력적인 점입니다. 이 세계에서 지켜져야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닌 사물이고, 사물을 불태우고 다니는 사람은 공포와 혐오와 적대의 대상이 됩니다.
욕심 부리지 않은 전개, 이 상황이 이어질지, 끝날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끝나는 조용한 결말도 좋았습니다.
제가 조금 더 욕심을 부려 보자면, 이 세계에서 마지막에 풀어야 했던 갈등은 방화범이 아니라 헤어진 여자여야 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인과관계가 있든 없든, 이 소설은 그것으로 시작했으니까요.


세계 – 은비

A : 이 줄글은 소설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소설은 서사, 즉 내러티브입니다. 인과관계로 연결되어있는 이야기들의 집합입니다. 이 소설에는 서사는 없고 관념과 이미지뿐이며, 그 이미지조차도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습니다.

B : 끝인가요?


잿빛 우물 – 은비

A : 이 소설에서는 서사가 조금도 진행하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대장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고 나서 자신의 삶을 회의하면서 집안에 틀어박혀서 세계와 내 집이 다르지 않기에 한 발짝도 나오지 않고 이야기 밖으로 빠져나갑니다.
공간의 이동이 없고 주인공과 타인과의 접촉이 없이도 얼마든지 서사는 진행될 수 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은 단 하루의 삶을 통해 한 여성의 일생을 그려내죠. 주인공의 심리만으로도 얼마든지 서사는 진행시킬 수 있고, 소설 내부에서 서사를 진행할만한 요소들은 이미 충분합니다. 이 소설이 서사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주인공이 ‘마모된 부품처럼 스스로가 폐기된다’는 절망적인 인식에 어떻게 도달했는지를 보여줘야 합니다.

B : 끝인가요?


어린왕자와 여우 - 은비

A : 생텍쥐페리의 익숙한 소설 <어린 왕자>를 변주한 이야기입니다. 어린 왕자에게 진정한 우정과 사랑이 어떤 의미인지를 가르친 여우와 왕자의 관계를 생존을 위해 서로 대치하며 투쟁을 전개하는 관계로 변주함으로써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충격을 줍니다. 그러나 굳이 이 이야기가 변주 된 맥락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만인에게 익숙한 이야기를 변주한다면 그 이야기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시사점과 통찰이 어디에 있었는지 찾아내고, 그 통찰의 맥락을 인지한 채 이야기를 뒤집어야 합니다. 이야기의 소스들만 가져오고 원래 이야기의 흔적을 찾아낼 수 없는 이야기로 만드는 것은 가져 온 소스들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행동입니다. 당연히 책임감이 없는 작가는 독자에게 매력도 신뢰도 줄 수 없습니다.

B : 어린왕자가 한 장짜리 무협활극이 되었군요. 크게 웃었습니다만 앞서의 두 편과 마찬가지로 완성된 소설로 보기 어렵습니다.


변신로봇 V - 별

A : 아버지가 개발한 변신로봇 V와 그 로봇을 조종해서 세계를 구하는 동생들을 지켜보는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위험에 맞서 싸운다는 명문 하에 진짜 위험을 조장하고 있는 시스템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고찰이 훌륭합니다. 단정하면서 수선 떨지 않는 문장이 상황을 관조하는 내용과 어우러져 점점 위험이 극대화되는 상황의 아이러니를 확장합니다. 시사적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엽편입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서사가 단편적이며,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회상하는 어머니의 대사가 지나치게 주제를 표면으로 드러냅니다. 

B : 로봇 만화를 보면서 시청자들이 느낄 법한 마음을 대변해주는 소설이로군요. 그러니까 지구는 사실 너희들 때문에 파괴된다고! 하지만 익숙한 부분이 많은 반면에 비틀어 보여주는 부분이 적어서 아쉽습니다. 조금 더 패러디가 풍부하고 깊었다면 더 좋은 작품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모든 색은 검게 물든다 – 빈테르만

A : 여전히 문제시되고 있는 ‘인간이 자연에 어디까지 도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 그 중에서도 유전자의 문제에 천착한 소설입니다. 기존 권력에 맞서서 ‘자연적 인간’을 지키려고 했던 조현우는 압도적인 과학적 가능성 앞에서 그의 동지들을 배신하고 기존 권력의 일부가 되고 그 안에서 자신을 ‘구원자’라는 최후의 권력으로 곧추 세웁니다. 선동과 선전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자신이 설득해야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를 선동가들이 어떻게 구분해내는지에 대한 통찰이 뛰어납니다. 주인공과 그의 동지들 사이에서 이견이 드러나는 부분 역시 상황의 진행과정과 매끄럽게 맞물려서 나타납니다. 특히 가독성 있게 전투 장면을 그려내는 작가의 감각은 가히 압도적입니다.
아쉬운 점은 조현우가 영상을 보고 ‘포자이론’에 설득되는 과정이 지나치게 압축적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조현우의 삶 전체의 관점이 변화하는 순간입니다. 변화의 감정 그 자체는 잘 묘사했으나 그 변화를 독자들에게 설득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또한 제목이 주제의식을 과도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선과 악을 전제하고 있는 제목이며,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도 제목에 이미 다 들어가 있습니다. 좀 더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제목을 사용하길 권합니다.

B : 과감하고 스케일 큰 디스토피아물입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쉘터 안에 사는 여러 나라의 천재적인 아이들, 열등인자와 우등인자로 나누는 것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는 아이들과 교수의 대립이 앞으로의 전개를 궁금하게 합니다.
하지만 드러난 진실과 이 상황의 연결고리가 적습니다. 정체불명의 변이생물과 싸우기 위한 방법이 그 변이생물의 약점을 찾을 병기를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유전적으로 진화시키는 쪽으로 사고방향을 돌린 것은 뭔가 중간설명이 빠진 듯싶고, 그렇다 해도 왜 미리 알려주지 않았는지도 의문입니다. 후반에 변이생물과 싸우는 과정을 보면 사람의 혈액에 있는 글로불린이 필요한 모양인데, 사람의 피는 매일 생겨나고 사라집니다. 괜히 사람 죽이거나 분류할 것 없이 자주 헌혈해서 실험해도 되지 않았을까요.
무엇보다 중간에 끝나버린 것 같아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습니다. 혹시 이야기가 더 있는데 글이 잘린 걸까요.


사소설 – 너구리맛우동

A : 봉제 인형 여우가 구미호로 변해서 인간과의 우정을 쌓아간다는 내용의 매우 사랑스러운 환상 소설입니다. 제목이 <사소설>이다 보니 작가 분이 궁금해지기까지 합니다. 기이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라서 소설의 분위기가 독특하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화소가 많은 점이 도드라지게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서사가 매끄럽게 엮여있다고 보기는 어렵겠습니다. 특히 여우가 마법의 힘을 잃어버리고 다시 일상의 세계로 복귀한 인과의 과정이 분명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차분하게 여우에게서 샴푸 냄새를 맡는 장면, 일상으로 돌아온 여우를 받아들이는 장면은 가슴 따뜻했어요.

B : 분명히 어딘가 슬프고 비틀려 있고, 환각 속에서 무너져가는 풍경인데도 귀엽고 따듯하고 위로받는 기분이 듭니다. 서둘러 짐을 싸는 의사며 수도꼭지를 틀 줄 아는 오리까지 모두 사랑스럽습니다. 작은 소설인데도 완성도가 높습니다. 즐겁게 읽었습니다.


별자리와 꿈의 기원 – 너구리맛우동

A : 설화의 형식을 가지고 와서 제목 그대로 <별자리와 꿈의 기원>에 대해 만들어 낸 이야기입니다. 밤이라는 소재와 눈꺼풀 안쪽에 붙은 자수라는 소재는 유기적으로 잘 결합해서 어딘가에 있을 법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설화는 원형적 서사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서 보편적으로 드러나는 심상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것 자체만으로는 그 무의식적 바탕을 자극하는 것에 그친다는 이야기입니다. 설화가 연구적 가치를 가지는 것은 바로 그것이 캔버스이자 바탕색이기 때문입니다. 설화적 이야기를 현실에 다시 차용해 온다는 것은 그 바탕색 위에 어떠한 색을 입혀서 재조명하겠다는 선언입니다. 아름답고 어딘가에서 전해질 법한 이야기지만 여기에서 멈춰서는 아직까지는 캔버스의 빛깔 밖에 보지 못한 느낌입니다. 바탕색을 칠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스케치를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B : 별자리와 꿈의 기원을 말 그대로 다시 쓰셨군요. 113호에서도 나온 이야기지만, 우리가 축약본이나 남은 기록으로 접하는 신화나 민담도 그 원본은 아름답고 풍요로운 상징과 묘사로 가득합니다. 그 축약본을 막연히 모사하는 것만으로는 감동을 주기 어렵고 새로운 신화를 만드는 것은 물론 더 어렵습니다. 이런 작품을 아주 많이 쓰신다면 혹시 의미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몽유기행 – 민근

A : 사이비 종교 교주인 아버지에게 쫓겨 인생이 뒤흔들리다가 죽고 나서야 자기 삶의 진실을 깨닫고 진정한 삶을 찾는다는 내용의 이야기입니다. 사건의 서사를 쫓아가는 과정이 짜임 있고, 갑갑하고 눅눅한 분위기의 형성이 훌륭합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문장이 추상적이라서 구체적인 상황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선명하지 않은 비유가 과다합니다. 아카데믹한 단어들이 자주 사용되나 이런 단어들이 주인공의 성격 설정이나 상황 묘사에 특별한 효과를 불러오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불필요하게 논문을 연상시켜 읽는 데에 걸림돌이 됩니다. 
과거의 삶을 바꾸고 싶은 욕망은 매우 보편적인 욕망입니다. 이 욕망을 드러내는 방식으로서 선택한 죽음과 재탄생이라는 소재는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서사 중간에 드러나는 주인공의 감정이 지나치게 설명적으로 주인공의 입을 통해 서술되고 있습니다.

B : 평이 많이 갈렸네요. 저는 보면서 내가 이 작품을 평할 자격이 되는가를 한참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에 감탄했고 제 글을 반성했습니다. 자욱한 안개 같은 죽음의 텁텁한 내음이 음산하게 흐르는 가운데에, 죽음에서 깨어나 제 자신을 살해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 기묘한 환상성과 처연한 현실감, 정밀하고 유려한 묘사에 푹 빠져들었습니다.
평이 갈리는 작품이 간혹 있죠. 그런 작품은 보편적인 대중성을 띠지 않는다 해도 혼이 담겨 있다고 믿습니다. 글에 혼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은 기술이 따라갈 수 없는 재능입니다. 건필을 기원합니다.

115호 독자 우수단편 가작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바람기억 – 뒤마

A : 비평자끼리 평이 많이 갈렸습니다. 저는 서정성이 강하게 도드라지는, 아름다운 문장이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이 문장들이 차분한 서사 진행과 어우러져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야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인간 세계와 주인공의 갈등이 깊어져 가고 고통이 더해질수록, 강이 자신을 소모해가면서 주인공과의 우정을 지켜나가는 과정은 과정 자체의 역설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이해린’과 ‘강’이라는 인격의 연대를 넘어서서 인간과 자연 그 자체의 연대에 대한 비유로 읽히는 부분들도 본질적인 충격이었습니다. 천 년이라는 시간과 강이 용으로 변했을 때의 시각적 효과 등, 인간과 강의 압도적인 시공간 스케일의 차이에도 경이감을 느꼈습니다. 
이 경우, 현실과의 개연성 면에서 제가 알고 있는 정보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장력과 분위기의 형성은 한 순간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를 느끼는 감성이 예민한 것은 작가에게 있어서 쉽게 가질 수 없는 재능입니다. 부디 그 감각을 잃지 않고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매력적인 이야기에 비해 제목은 그리 매력적이지 못합니다. 바람의 매개체 역할을 서사 안에서 더 확대하지 않으면 그다지 의미가 없는 제목이 될 것입니다.

B : 아버지에게 학대받고 사는 주인공이 ‘강’이라는 이름의 용을 만나며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슬픈 이야기인데도 묘사가 동화적이고 밝군요.
이 소설은 ‘한국의 현대 시골’을 무대로 삼은 것으로 보이는데도  시대나 지역이 헷갈리는데, 그건 소설이 묘사하는 무대가 ‘한국의 현대 시골’과 부합하지 않는 면이 많아서입니다. 
현대 한국은 인구가 많고 좁은 나라입니다. 시골인구와 도시인구의 격차가 크고 지역사회가 밀착되어 있고요. 한국에 있는 웬만한 호수는 웅덩이가 아닌 이상 이름이 있을 거예요, 웬만해서는 관광지일 거고요.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호수의 존재를 상상하기 어렵군요. 시골이라면 마을 사람들이 서로를 알음알음 알거고, 아버지가  애를 학대한다면 소문이 파다할 겁니다. 주인공이 고등학생이라면 자취를 하거나 도시로 갈 가능성도 높습니다. 기차역이 있는 소도시라고 생각해보려 해도 그런 곳이라면 가까운 숲은 마을 사람들이 수시로 오갈 겁니다. 마을에서 과수업을 하면 일거리도 많을 텐데, 주인공은 엄마에게 일을 떠맡기고 놀러만 다니네요. 
그렇지 않은 지역, 그렇지 않은 가정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사소한 불협화음이 하나둘씩 쌓이면 현실감이 사라집니다. 오히려 무대를 과거나 가상의 세계로 했다면 몰입이 쉬웠을 것 같습니다.

115호 독자 우수단편 가작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거울 독자 우수단편에 선정되신 분들께는 책을 한 권씩 드립니다.
민근님과 뒤마님은 pena12@gmail.com으로 우편물 수령할 주소, 성함, 전화번호(택배 발송시 필요)를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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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테르만 13.02.01 16:03 댓글 수정 삭제

    비평 감사드립니다. 우려하던 부분을 모두 짚어주셔서 부끄러우면서도 많은 참고가 됐습니다.


  • No Profile
    뒤마 13.02.01 16:13 댓글 수정 삭제

    어... 음... 어어어!!! 에에에?!!!!

    아..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그냥 심사만 받으려고 전에 쓰던 글을 올렸을 뿐인데 이렇게 가작까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고민을 하고 퇴고도 진득하게 하고 올릴 걸 그랬어요. 다음달엔 좀 더 노력해보겠습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심사평도 너무 감사합니다. 뭔가 더, 시각이 넓어진 것 같네요^ㅁ^ 와, 메일 꼭 보내겠습니다!!!

  • No Profile
    초연 13.02.01 18:34 댓글

    비평 감사드립니다. 받고싶던 비평을 받은지라 기쁩니다. 심사를 받고자 꽤 오래 전에 썼던 글을 그대로 올렸는데, 맞춤법이 틀려있었다니... 기본도 못 지켰군요... 그 점은 죄송합니다. 비평을 거름삼아 더 좋은 작품을 써서 찾아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지현상 13.02.01 21:35 댓글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ㅎㅎ 다만 제 이름은 지현사 가아니고 지현'상'입니다.^^

  • 지현상님께
    No Profile
    김보영 13.02.02 23:32 댓글

    으아 죄송합니다. 고쳐달라고 부탁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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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ia-Heron 13.02.03 12:50 댓글

    아... 이거 생각 밖인데요. 저는 239Pu라는 제목만으로 너무 많은 것들을 까발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ㅇㅅㅇ;;


    물론 전반적으로 부족함을 지적하신 부분들은 공감하며 앞으로 고쳐나가야될 부분입니다.

    시간을 내주셔서 글을 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_ _)


    일단 푸른 빛을 뿜는 금속은 우라늄이 아니라 제목 그대로 239Pu, 그러니까 플루토늄입니다. 임계질량은 이상적인 상황에서는 10kg이며, 239Pu는 반감기가 2만4천년입니다.

    작중에서는 고대던전이 1만년 가량 되었다는 묘사가 있습니다. 고로 적어도 플루토늄 막대의 70% 이상은 아직 붕괴하지 않고 플루토늄으로 남아있는 상황입니다.

    발견된 플루토늄은 반구형태 하나를 제외하고는 전부 기다란 막대형태며, 막대형일 경우에는 임계질량이 커져서 10kg 이상이라도 연쇄반응이 일어나지는 않지만 작중의 인물들은 마지막에 그것들을 하나하나 쌓아올려버리며, 나중에는 감마선을 쬐어 현기증을 느끼며 그대로 전부 한 자리에 엎어버립니다. 그렇게 임계질량을 넘는 플루토늄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면 연쇄반응이 가속화되어 결국 폭발합니다.


    맨하탄 프로젝트에서 난점이었던 것은 238U 사이에 0.7%밖에 존재하지 않는, 핵폭탄에 사용할 235U을 농축하는 것과, 떨어뜨려놓은 우라늄/플루토늄을 원할 때 합칠 기폭장치 같은 것이지, 그것으로 핵폭탄을 만드는 것 자체는 그렇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고리모양으로 만든 우라늄을 외부에 장착한 폭약으로 우그러뜨려 임계질량을 넘게 하거나, 앞뒤로 분리되어있던 우라늄을 터뜨려야 하는 시점에 충돌하게 하여 임계질량을 넘도록 하는 것이 핵폭탄을 터뜨리는 방법입니다.


    방사성 물질로 만들어진 단검은 나오지 않습니다 ㅇㅅㅇ;

    초반에 언급된 단검은 플라스틱 포장재에 감싸여있는, 플라스틱 손잡이를 가진 은빛 단검입니다만, 그것은 주인공이 던전 탐사에 뛰어들게 하는 계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플루토늄을 발견해서 그것으로 칼을 만들어야겠다 하는건 나오지만, 플루토늄으로 만든 단검은 안나옵니다.


    그리고 현실에서도 1700년대에는 핵무기에 대한 지식이 없던 상황이었지만, 1900년대에는 핵폭탄을 사용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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