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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갈매움과 돗뫼

2012.10.20 01:3610.20

  갈매움은 저 흰머리산 자락에서 흘러내린 오래 묵은 숲의 주인이었는데, 그녀가 싹을 돋우고 숨을 내쉬는 뭇 산 것들을 보살핀 지 벌써 천년이 넘었다. 일대에서 가장 나이든 나무가 아직 여린 가지일 적에 그 위를 뛰어넘으며 놀았으며, 근방에 그녀보다 오래된 신은 없었다. 그래서 정기를 먹고 제법 분별이라도 생겨난 영물들은 그녀가 지나가면 뒤따르는 보이지 않는 바람 속의 잎 내음을 맡고 머리를 숙였고, 해마다 구석구석 뻗어 내린 산줄기를 따라 팔도의 신령들이 문안인사를 올릴 적이면 온 숲이 밤에도 훤하고 낮에도 어두컴컴하곤 하였다. 숲은 언제나 잎새가 자라나는 소리로 부산하고 젊은 나무들이 저들끼리 몸을 흔들며 웃어대는 소리로 가득했고, 갈매움의 춤은 그치는 일이 없었다. 그녀는 비온 뒤 먼데 비치는 산의 색처럼 가장 오래된 신령이었지만, 언제나 새로 돋아나는 움처럼 생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땅을 타고 알 수 없는 떨림이 울려 왔다. 처음에는 어디에서 뿌리에 갈라진 바위가 뒤늦게 몸을 뒤트는 소리나 너무 가파른 사면이 기지개를 켜는 모양이라고 여겨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점점 진동이 빈번해지자 어린 싹들은 잎을 한껏 뻗기 무서워했고, 짐승들은 불안해하며 자꾸 고개를 돌려 산 쪽을 보았다. 마침내 갈매움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볼 요량으로 숲을 달래고 떨림이 시작되는 곳을 향해 떠났다. 이슬에 젖은 울창하고 오래된 숲을 지나 가장자리로 갈수록 점점 녹색은 옅어지고 드문드문해졌다. 숲의 외곽지역에 이르렀을 즈음 숲 신령은 바짝 말라붙은 잎을 보았고, 아직 여름 소낙비의 위세가 가시지도 않았는데 벌써 떠나간 생이 있다는데 놀랐다. 다시 한 번 살폈지만 어떤 마마나 손이 감히 숲을 침범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풀 주위를 돌며 숨을 불어넣고 생기를 북돋으려 했다. 그러나 이미 맥이 끊어지고 정이 흩어진 풀은 한 줌 기운에 잠시 들썩이다 곧 먼지로 풀썩 무너졌다.

  둔중하게 약한 지진이 느껴지자, 갈매움은 고개를 들고 그 너머로는 초록이 한 점도 없는 것을 깨달았다. 의아한 마음이 뭉게뭉게 피어나 죽은 흙 위로 봄 천둥처럼 급하게 걸음을 내딛으니 온 땅에 우스스 바람이 일고 빗방울이 날려 잎사귀가 함께 내린다. 숲 신령의 발이 닿은 자리는 삽시간에 생기에 가득 차서 푸르게 몸을 뒤틀며 터 오르는 움들로 부산해졌다. 그러나 발을 떼자마자 몇 걸음 가지 않아 싹트던 것들은 도로 사그라들고 줄어들어 남은 것은 얼룩덜룩한 돌꽃 뿐이다. 갈매움은 발자국을 돌아보고 이 땅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렸다. 허공에서는 톡 쏘는 고약하고 메마른 냄새가 났다. 숲 신령의 옷자락에 감기며 따라오던 바람들이 기겁해서 어서 되돌아가자고 숨이 차서 졸라대다가, 서둘러 길게 꼬리를 끌면서 도망쳤다. 하지만 이대로 죽은 땅을 버려두고 돌아갈 수는 없으므로, 갈매움은 계속 걸음을 옮긴다.

  초록빛 발밑으로 생기가 급속하게 빨려 나갔다. 갈매움은 치맛단 끝이 너덜너덜해지고 쇠약해져서 갈색으로 변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걸음을 빨리 했다. 흡사 마른 모래 위에 물을 부으면 흔적도 없이 스며드는 모양새다. 갈회색과 적흑색의 흙은 한 번도 산 것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숲 신령의 걸음걸음마다 매달리며 허겁지겁 굶주림을 채웠다. 갈매움이 숲을 거닐 적에는 언제나 뭇 날벌레들과 춤추는 바람에 날리는 잎사귀들과 작고 깔깔거리며 떠들어대는 정들이 함께였건만, 침묵하는 능선에서는 그녀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오래되고 강대한 신령이었기에 폭포처럼 기운이 새나가는 것도 견디면서, 숨을 고르고, 고약한 악취가 떠도는 산을 올라갔다. 황량한 불모의 땅에 녹색 점으로 아스라이 흔들리며 걸었다.

  안개가 감도는 새벽에 떠났건만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에는 숲 신령의 바람 같은 가벼운 발걸음으로도 이미 해가 머리 꼭대기에 와 있었다. 올라서 보니 산 위는 큰 손으로 한 움큼 푹 떠내기라도 한 듯이 꺼져 있는데 밥주발처럼 둥그런 분지 안은 거울처럼 반반한 물이 정오의 해를 되비치고 있었다. 뼈처럼 흰 돌만 가득한 사면을 타고 내려갔다. 물이 이처럼 많은데도 기묘하게도 분지 안에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수면에 몸을 가까이 기울이자, 무언가 아주 낮게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아래에서부터 울려오는 것이 들렸다. 물은 아주 차갑고 정결했지만 그녀도 그 바닥이 어디까지 이르러 있는지 알 수 없었고, 단지 깊고 깊음만이 끝없이 감돌고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면서 숲 신령은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바로 그 때 어린 목소리가 들려와 갈매움은 화들짝 놀랐다.

- 안녕, 넌 뭐야?

  고개를 들어보니 한 소년이 물 위에 서 있었는데,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다가온 기척이 없었을 뿐 아니라 수면에 비치는 그림자가 없었기 때문에 갈매움은 눈앞의 모습이 단지 하나의 상일 뿐 진정한 모습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가장 오래 묵은 숲 신령조차도 그 아래 숨겨진 것이 무엇인지 간파할 수 없었다. 한참동안이나 소년을 살펴보다가, 갈매움이 물었다.

- 넌 뭐냐?
- 내가 먼저 물어봤는데. 답해주지도 않고 도로 물어보다니 예의가 없구나. 넌 뭐니?
  주위를 빽빽하게 에워싼 기갈을 달래기 위해 구름처럼 정기를 두르고 있었기에, 그녀가 숲 신령이라는 것은 아무리 둔한 토정도 알아차리지 못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갈매움은 상대가 범상한 존재가 아닌 것을 직감하며 말했다.

- 미안해, 내가 무례했구나. 나는 갈매움, 흰머리산에서 흘러내린 숲의 가장 오래된 이파리, 자라나는 새싹의 손짓, 잠자는 나무껍질의 꿈이고 수액이 흐르는 강이다. 지저귀는 숲, 나뭇가지들 틈을 지나는 바람, 영그는 열매 속에 아직 자라지 않은 씨앗, 가장 깊게 내린 뿌리이고 가장 멀리 뻗은 뿌리이지. 이 일대의 모든 나무들과 산맥을 타고 뻗어나간 자손들이 내 이름을 안단다. 뙤약볕이 쏟아져 내릴 때 가지에 물이 올라오는 소리가 내 이름을 속삭이고, 장맛비가 떨어져 내릴 때 부서지는 동그라미들이 내 이름을 부르지. 그런데 너는 내 이름을 묻고, 나는 네가 뭔지 모르겠구나.

- 흠, 난 그렇게 긴 건 모르겠는 걸. 난 돗뫼야. 내가 뭐냐고 물어보면 그냥 돗뫼라고 할 수 밖에 없지. 돗뫼라는 이름이 진짜라거나 영영 변치 않는 거라고 할 순 없지만 말야. 그냥 딱히 따로 부를 말이 없어서 돗뫼라고 하는 거야.

  소년이 노래하듯이 이야기했지만, 돗뫼라는 이름은 숲 신령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녀가 알지 못한다면 그 일대에서 소년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터였다. 갈매움은 눈앞의 상대를 주의 깊게 살피면서 다시 물었다.

- 넌 누구냐? 토정이냐, 산신이냐, 터 주인이냐? 이 일대에 숨 쉴 줄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고, 흙과 모래는 물과 뿌리를 모르고, 바람은 텅 빈 채 움직일 줄 모르고 숨어있는 게 너 때문이니? 초록이 발붙이지 못하고, 냄새 맡을 줄 아는 짐승들은 몸을 피하고, 정기도 머물지 않는데 신에게 고하는 이도 없어. 땅이 아주 죽어 버린 거야. 네가 산신이나 터 주인이라면 네 땅을 이렇게 내버려두지는 않겠지. 여기서 뭘 한 거니?

  아이가 별다른 일이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 난 이 아래에서 잠자고 있어. 계속 가만히 누워있는 건 아니고 가끔 뒤돌아 눕지. 아래는 깊고, 어둡고, 내가 잠자고 있어서 붉어. 물론 자는 것도 나쁘진 않은 일인 건 틀림없어. 깨어 있으면 금방 피곤해지고 지쳐버리니까, 조금만 지나면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하품이 절로 나오면서 몸이 축 가라앉아. 그러면 난 금방 잠들어버리고, 저 아래 부딪히는 땅들에서 올라오는 기운을 받아들이면서 다시 깰 때까지 정신없이 잠만 자는 거야. 하지만 지금은 일어날 때가 되었으니까, 잠자는 것보다는 일어났을 때를 얘기해야지. 난 잠잘 때는 그래도 조용한 편이지만 한번 깨어나고 나면 정말 굉장하지. 잠에서 깨서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면 정말 상쾌하거든. 그건 말로 이루 다할 수가 없는 느낌이야. 이름처럼 말이지. 그런 기분으로는 아무래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게 되거든.

  소년이 말을 마치자 마치 그 말에 맞장구를 치기라도 하듯이 우르릉 땅이 울었다. 숲 신령은 깊은 곳에서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서서히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아이는 그녀가 이제껏 알아온 것들보다 훨씬 큰 것임이 분명했고, 그게 무엇인지는 그녀도 알지 못했다. 생기가 전혀 없는 죽은 땅은 잠 때문이고 숲 신령을 이곳까지 오게 한 지진이 깰 때가 가까워진 탓이라면, 그것이 일어났을 때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 네가 일어나면 어떻게 되지? 돗뫼가 네가 아니지만 너를 돗뫼라고 부르듯, 그를 이름지어 말하면 뭐라고 부를 수 있니?
- 음- 좋아, 어렵긴 하지만 한번 말해볼까. 나야 아직 작은 아이에 지나지 않으니까, 겨우 나 정도가 일어나는 게 그렇게 큰일은 아니야. 그래도 덮고 있던 돌 껍질을 들추고 산 이불을 젖히고, 땅 속에 묻혀 있던 몸을 길게 펴고 한껏 늘려 일어서지. 그렇게 서면 지평선이 동그랗게 보이고 가슴이 탁 트이면서, 저 위의 하늘 덮개가 웅웅 울리도록 외치고, 아무것도 거칠 것 없이 손발을 이리저리 휘둘러보는 거야. 그럴 때마다 난 큰 소리로 웃고, 숨을 들이마신 다음, 다시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곤 하지. 그건 정말 말로 다 이를 수 없는 느낌인 거야! 내가 돗뫼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그리고 내가 돗뫼라는 것을 한껏 알게 되는 그런 거지.

  이 말을 듣고서야, 갈매움은 이 어린 소년이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말 이면에 감추어진 진정한 힘을 깨닫고 전율했다. 아이처럼 눈을 반짝거리면서 그처럼 신나는 일이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를 제지하거나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터져 나오는 웃음처럼 당당하고 자유로운 존재였다. 깨어나면 생을 즐기며 유희하고, 오직 그 자신의 기쁨만이 모든 활력을 소진시켜 그를 도로 잠들도록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잠시 죽음과도 같은 평온함으로 돌아간다 해도, 넘치는 기쁨이 그를 다시, 또다시 연거푸 생의 환희 속으로 소환해내는 것이다.
  비록 갈매움이 강대한 신령이고 근방의 누구도 비할 수 없는 존재였건만, 갈매움이 큰 강이라고 한다면 지금 그녀의 앞에 있는 것은 흡사 세상의 모든 물이 흘러 도달한다는 가장 낮고 깊은 웅덩이인 바다처럼 광대했다. 그것이 일어난다면 마치 바다가 뒤집혀 거꾸로 흐르듯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날 것은 자명했다. 두려움이 숲 신령을 사로잡았고, 갈매움은 눈앞의 아이에게 호소했다.

- 하지만 돗뫼여, 그렇다면 네가 잠든 동안 그 위에 머물게 된 것들은 어떻게 되지? 어떤 것이 네 펄럭이는 옷자락에 걸리고도 무사할 수 있나? 누가 네 춤사위를 피해 달아날 수 있지? 네 기쁨은 다른 모든 것들의 슬픔이 되고, 네 깨어남은 다른 모든 것들의 잠이 될 터인데. 아이의 형상을 띄고 있지만, 그대는 눈 감은 채 울지 않고 웅크려 앉아 있다가 일단 날개를 펴고 한 번 깃을 치면 단숨에 구만리장천을 나는 붕새이다. 북해의 고래를 사냥하는 용이고 봉우리에서 골짜기로 내리닫는 범이며 지나는 길에 남겨두는 것이 없는 맹렬한 바람, 이리저리 뒤틀며 제방을 부수고 갈아 헤친 논밭을 뒤덮는 강줄기이다. 강대한 자여, 네게는 한 조각 측은한 마음이 없는가? 네 잠 위에서 구물거리며 살아가던 물생들이 가엾지 않는가? 네게 기대어 사는 것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작디작은 생들을 꺼트리지 말아다오.

  갈매움의 말에 돗뫼는 좀 놀란 듯 보였다. 그러나 눈을 한 두 차례 깜빡이더니, 이윽고 배시시 웃었다. 소년의 미소는 킥킥거리는 웃음이 되었고, 마침내 폭소로 변했다. 그러자 한 가닥 바람은 사나운 강풍이, 반반한 수면은 일백만의 손짓하는 떨림이 되었고, 분화구 전체가 땅거죽이 몸을 덜거덕대며 떨고 깊숙한 지맥들이 삐걱거리며 신음하는 소리로 가득 찼다. 숲 신령이 뒤로 한 발 물러설 때, 소년이 웃음을 거두고 엄숙한 얼굴로 말하기 시작했다.

-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무리 네가 작다고 해도, 신령이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다니! 잘 들어봐, 너는 몸을 활짝 펴며 숨을 들이킬 때, 저도 모르게 미소 짓지 않을 수 있니? 깊은 곳에서 춤이 솟구칠 때 춤추지 않을 수 있니? 네가 스스로 네가 아니게 될 수 있니? 아무리 참으려 애써도 참을 수 없이 간질간질해지고, 온 몸에서 새로운 깃이 돋아나고 돌 사이로 녹은 물이 졸졸졸 흐를 때. 겨울터럭을 봄 터럭으로 털갈이하고, 짝을 찾는 뭇 짐승들이 부르는 노래. 부드럽게 이마를 맞대고 목을 부빌 때 네 심장의 떨림.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 수 있니?

  소년은 갈매움이 물러선 만큼 다가섰고, 그 목소리는 굉음을 넘어 장중하게 울려 퍼졌다. 눈앞의 형체는 그대로였지만 서서히 변모가 일어나고 있음은 숲 신령도 느낄 수 있었다.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소년은 부쩍부쩍 자라났다. 분지 전체가 소년의 입을 빌어 말하고, 지진이 그 말을 숲 신령에게 되풀이했다.

- 숲 신령이여, 그대는 피 흘리는 노루를 아껴 새끼를 먹이려 사냥하는 범을 쫓은 적이 있는가? 허리가 끊어지는 풀을 위해 주린 노루를 쫓은 적이 있는가? 아무리 작은 신령이라도 동시에 모든 곳에 임재하기에 다만 스스로 그러하게 내버려둘 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는 것이 그를 얽매지 못한다. 너는 모래알 틈으로 뿌리를 뻗으려 애쓰는 한 포기 초정이나 열매 한 두알 더 맺을 것을 염려하는 목신이 아니라 숲 전체를 관장하는 신령이니 이를 모른다고 할 수 없겠지. 이제 네가 네 숲을 들어 나를 구속하려는 것이 그와 무엇이 다른가? 순리가 어느 한 편을 들어 다른 한 편을 치더냐? 만물을 한가지로 보는 하늘이 노루와 범을 가르고 너와 나를 가르겠느냐?

  폭풍을 이기려 애쓰며 갈매움이 외쳤다.
- 그러나 문득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느끼지 않는가! 바닥에 오글대는 개미떼를 보면 무심코 발을 피해 딛지 않던가! 나고 병들고 늙고 죽어지는 괴로움이 억겁의 윤회에 사무친다. 아우성치는 소리가 허공을 메운다. 고통의 바다에 허우적거리는 중생이 울부짖는 소리가 넘쳐흐른다! 열반의 광륜 안에서도 세상은 사멸하지 않기에, 진정한 깨달음을 얻은 자도 스스로 원을 세우고 건지고자 돌아왔다! 불타는 집 안에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작은 즐거움에 열중해 있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 불 속으로 돌아왔다! 부디 자비를, 그대의 소맷자락에 걸려 부서지는 것들을 보아다오! 어진 마음을 베풀어 그대의 너무도 큰 춤에 짓밟히는 것들을 보아다오!

- 네가 말하는 것들은 그 모든 것들에 비하면 너무도 작다! 슬픔은 기쁨을 이길 수 없고, 죽음은 삶을 이길 수 없고, 엄숙함은 웃음을 이길 수 없는 법. 허공을 내리닫는 떨림이 흔들림 없는 하늘만 반사하던 산정 호수의 고요한 명상을 깨뜨리고, 한 줄기 전조에 사방의 바람이 일제히 몸을 뒤집고, 참던 웃음을 일단 터뜨리고 나면 도저히 참지 못하고 온 몸을 흔들며 눈물이 맺히도록 웃게 되지. 웃음을, 생을 감히 슬픔과 죽음을 설교해서 막으려 한단 말이냐!
  작은 신령이여,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사로잡으려 하지 마라. 죄책감으로 환희를 구속하려 들지 마라. 감히 연민하지 말라! 덮어씌우는 밤은 돋아나는 아침을 막지 못한다. 그 빛살이 한번 깨뜨려져 풀려나고 나면 누구도 그것을 꺼뜨리거나 가릴 수 없고, 시체의 평온 속에 영원히 잠들 수 없고, 그 자신을 두렵게 하는 비밀을 감출 수 없다. 작열하는 생을 무엇이 막을쏜가! 생 스스로가 살아나고 나면, 죽음 그 자신조차 그 앞에서 감히 입을 열지 못한다!

  모습을 더 이상 눈으로 볼 수 없었지만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주위를 가득 메웠다. 그것은 걷잡을 수 없이 컸고, 어떤 이름이나 말로 실체를 사로잡을 수 없는 것이었고, 맹렬히 부풀어 오르는 것, 막을 수 없는 것, 결코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난타하는 진동 속에서 갈매움은 그 무엇도 닥쳐오는 것을 막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거대함 앞에서 숲 신령은 부서지는 수면에 휩쓸리는 이파리처럼 작았다. 갈매움은 이를 악물고 답했다.

- 알았다. 강대한 신령이여, 그대는 너무도 큰 나머지 옮겨놓는 발아래에서 부서지는 것들을 보지 못하는구나. 세계 알을 깨뜨리고 나오면서 그 위의 작디작은 도시들이 무너지는 것을 염려하지 않는구나. 어떤 말도 그대가 원하는 바를 행하는 것을 막지 못하지. 그렇다면 남은 것이라고는 오로지 하나뿐이다- 힘과 힘이 맞부딪혀 누가 더 강한지 겨루는 것, 관철시키는 것, 살아남는 것이 살아남는 것! 오라, 강대한 신령이여! 작은 갈매움이 큰 돗뫼에 맞서리라!

  모든 것이 광폭하게 흔들렸다. 하늘과 땅의 구별이 깨어져 위가 아래 같고 아래가 위 같은데, 형체가 온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오로지 격렬한 떨림뿐이었다. 바위덩어리들이 흡사 공깃돌마냥 이리저리 까불리는 것이 어느 한 가지 방향이 아니라 저들끼리 부딪히고 깨어지고 휙휙 불똥과 파편이 함께 날렸다. 발아래에 쩍쩍 금이 가고 땅이 물과 한가지로 파도치며 요동친다. 숲 신령은 소년이 그 모든 것의 안에서 웃는 것을 보았다. 목소리가 혼돈을 뚫고 또렷하게 들려왔다.

- 좋다. 네가 여섯 번째로구나.

  그러나 갈매움이 미처 그 말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보기도 전에, 돗뫼는 분화했다. 폭풍 속에서 화산신의 눈은 타올랐고, 웃음은 불이었으며, 단숨에 폭발했다. 그 안에서 끝없이 세계가 쏟아져 나왔다. 거대한 기쁨의 한복판, 시작이자 끝의 탄생, 곧장 치솟아 오르는 힘. 섬광이 거푸 번쩍이고, 충격파와 소리가 뒤늦게 따라잡았지만 곧 공기가 남김없이 밀려나며 아무 소음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찰나에 이미 그것은 거기에 있었는데 그것이 없기 전에는 아직 시간이 시작되지 않았으므로, ‘없기 전’이라는 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순환이 아니라 회전 안에 회전이, 그 안에 또 회전이 돌고 있었기에, 원은 곧 나선이 되었으며, 크고 크고 또 큰 양의 기운이 샘처럼 솟구쳤다. 생장하는 힘, 터지고 퍼지고 부풀게 하는 힘, 가득하게 하고 뜨겁고 모든 것을 삼키는 힘이 작열했다. 있음, 있음, 있음만이 없음 없이 있었다. 그것은 무궁하고, 무진하고, 무량했다. 불이 임했다.

  갈매움이 얼굴을 확확 스쳐가는 불줄기에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폭발의 중심에서 튕겨져 나와 부풀어 오르는 불 한가운데를 녹색 유성처럼 날고 있었다.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추락하는 번개와 같이 곤두박질쳤다. 그 주위로 바위와 재가 쏟아져 지면을 후두둑 때린다. 숲 신령은 신음하며 일어나려 했지만 곧 멈추었다. 그을음을 덴 상처에서 털어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점점 돗뫼가 커지는 광경을 멍히 쳐다보았다. 끝은 쳐다볼 수도 없는 빛으로 백열하고, 일천 가지 수인을 맺은 팔을 벌리며 순수한 힘 자체가 높이, 더 높이 일어선다. 땅이 아물거리면서 녹아 위로 말려 올라가고 허공에 집채만 한 바윗돌들이 무게의 사슬에서 풀려난 마냥 덩달아 떠올라 위로 떨어졌다. 갇혀있던 불이 해방되고 끓어오르며 화구를 넘어 달린다.

  귓가에서 작은 소리들이 종알거리기 시작했고, 왁다글닥다글하는 소란으로 변했으며, 급기야는 비명으로 가득해졌다. 흰머리산 아래 모여 살던 뭇 산 것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일제히 부르짖기 시작한 것이다. 갈매움은 언제나 온 숲의 모든 감정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물론 사냥감의 고통과 두려움도 있었으나 사냥꾼의 허기와 고양감도, 자라는 잎의 환희도 그를 뜯는 사슴의 평온도 모두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은 모든 숲의 감정이 단 한 가지로 합쳐졌다. 찢어질 듯하고 조각 조각나는 공포가 숲 신령의 안을 가득 채웠다. 최초의 폭발보다도 이 순수하고 원초적인 감정의 쇄도가 갈매움에게 더 큰 타격을 입혔다.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하고 날카롭게 외치는 고함소리가 그녀를 난자했다. 갈매움은 고통에 비명을 질렀고, 귀를 틀어막고, 울컥 피를 토했다.

  숲 신령이 쓰러지자 공황이 숲 전체를 메웠다. 네 발로 기는 것, 날개로 나는 것, 터럭 돋은 것, 뿔 달린 것 할 것 없이 연거푸 솟는 불에서 등을 돌려 날아난다. 무릎 꿇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숲 신령 주위로, 등허리에 불똥을 뒤집어쓰면서 무리가 달린다. 숲 신령은 그 질주 속에서 한 방향만 보는 눈길을 함께 보고 있었기에, 그에 실려 돗뫼로부터 급속히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곧, 아직 힘줄이 채 여물지 않은 어린 것들과 뼈마디가 굳고 딱딱해진 느린 것들이 뒤쳐지면서 짓밟히기 시작했다. 어미를 부르며 울부짖는 소리와 헐떡이는 단말마가 대기를 가로질러 퍼져나간다. 갈매움은 그 미어지는 고통에 몸을 흠칫 떨었지만, 그제야 정기를 추스르고 부서져라 이를 악물며 일어섰다. 그녀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그녀의 숲을 지켜낼 수 없는 것이다. 갈매움이 정신을 차리자 처음의 찢어지는 듯한 공포는 가셨지만, 그 다음은 온통 불타고 있는 갈래진 미로 속에서 우왕좌왕하는 혼란이 밀려온다. 하지만 돗뫼가 거침없이 밀려오고 있기에 그 마저 돌볼 틈이 없다. 갈매움은 길게 부르짖고, 다시 한 번 길게 울면서 화광이 가득한 숲 위로 날아올랐다. 숲 신령의 출정에 나무들이 몸을 떨고, 이파리들이 바람에 휘말려 흩날린다.

  공중에서 보니 최초의 격렬한 분화 후로도 화구는 거푸 불을 뿜어대고 있었다. 연신 산이 몸을 흔들고, 그 때마다 시커먼 연기 꼬리를 끄는 화산암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붉고 꿈틀거리는 용암이 사면을 가득 뒤덮고, 비늘지며 또아리 틀고 몸을 뒤틀며 흘러내린다.숲에게 산은 언제나 기대온 터전이었건만, 그 아래에서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크고 오래된 힘에 비하면 이제까지 숲이 산이라고 알고 있던 모습은 극히 작은 것에 불과했다. 갈매움이 단순히 나무 하나에 깃든 목정이 아니라 숲 그 자체이듯이, 돗뫼 역시 한갓 산주인이 아니라 지금 산산히 무너지고 있는 얇은 껍질 아래에서 깨어나고 있는 그 모든 것일 터였다. 지축을 울리며 다시 폭음이 들려왔다. 다가오는 불을 보면서 갈매움은 길게 부르짖었고, 숲 신령이 우는 소리에 온 숲이 일제히 호응하여 반향을 일으킨다. 뿌리들이 전율하고 줄기들이 흔들렸다. 따닥따닥 끓어오르면서 숲을 향해 달려오는 불의 선 위에서 엷은 열기들이 미친 듯 춤추었다.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갈매움은 언제나 그녀의 광대한 숲을 내려다보며 바람을 타고 순행했건만, 이제 다가든 돗뫼에 비하면 한점 초록은 너무도 작아 보였다. 빙 둘러싼 불이 죄여 들어온다. 숲 신령은 눈을 감고 땅 속에서 맹렬하게 물을 빨아올리는 목마른 뿌리와 줄기를 따라 껍질 아래를 콸콸 흐르는 수액을 그렸고, 그러자 나무들은 그렇게 했다. 껍질이 불면서 짜작 짜작 갈라져 떨어지고 더 두텁고 폭신폭신한 새 껍질이 돋아나 감쌌다. 황금색 꿀 같은 진액이 그 아래 가득해지며 나무들에 생기가 넘쳐흐른다. 잎맥이 뚜렷하고 진해져 흡사 살아 있는 얼굴처럼 보였다. 갈매움은 불티 섞인 숨을 들이마시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뿌리들이 튀어나와 서로 단단히 얽매고, 아름드리 줄기들이 울끈 불끈하며 몸을 기울인다. 불이 달려온다- 대기가 팽팽히 당겨지고, 훅훅 덤벼드는 열기를 느끼며 숲은 충돌을 대비했다. 가까워지고- 가까워지고- 거리는 자꾸 자꾸 좁혀들어- 마침내 흐르는 불이 노도하며 갈매움에게 뛰어 올랐다.

  돗뫼에 닿자마자 그녀의 한껏 내뻗은 손들은 모조리 불타버렸고, 갈매움은 타들어가는 이파리, 재조차 남기지 못한 옹이들, 움푹 꺼져들고 불타는 땅 위로 내동댕이쳐지는 나무들을 느꼈다. 숲 신령은 절규했지만-숲 전체가 그녀와 함께 비명을 질렀다-손을 거두지 않았다. 끊어진 줄기로부터 수액의 강이 솟구쳤고, 흘러넘치고 몸을 틀면서 화마에게 덤벼들었다. 진이 자글자글 끓어오르며 김이 솟구치고, 나무껍질이 탁탁 튀며 몸통까지 뒤틀린다. 그토록 풍부하던 수액도 형편없이 쪼그라들고 순식간에 굳어버리자 멈추지 않을 것만 같던 유장한 흐름도 말라버린다. 그 자리에는 주먹만 한 호박들만 남아 화광을 주위에 되쏘고 있었지만, 돗뫼는 거침없이 그것들마저 감싸 안았고, 결정들은 남김없이 타버렸다.

  간단히 첫 방어선을 돌파한 불이 숲을 유린하기 시작하자 갈매움은 더 뒤로, 더 넓게 물러났다. 나무 하나 하나가 쓰러지는 것을 느끼며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 가장 나이든 나무들을 일깨운다. 오랜 세월 동안 해와 달의 정기를 받아 분별을 갖춘 영물들은 오래 묵은 솔방울을 흔들어 떨어뜨리고, 잔가지를 그러쥐어 떼 내며 깊숙하게 내렸던 뿌리를 들어 발길을 옮긴다. 숲 전체가 버석버석 울리며, 잎은 구름처럼 두르고 아름은 비할 데 없이 두꺼운 고목들이 숲 신령을 돕기 위해 걸어 나왔다. 갈매움조차 아직 어린잎일 때 막 새싹을 피워내던, 숲 자신만큼이나 오래된 나무들이었다. 자손들이 불에 먹히는 광경에 분노하여 숲이 진군했다. 돗뫼가 가까워지자 이내 불이 옮겨 붙어 소용돌이치면서 줄기를 따라 날름날름 타오르고, 훅훅 불어오는 열기에 잎사귀도 까맣게 죽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 않고 노호하며 흐르는 불 속으로 달려든다. 불똥이 산산이 튀고 작은 불꽃들은 빛을 잃고 검댕 속으로 떨어져 짓밟혔다. 가지를 도리깨처럼 휘둘러 적을 때려눕히고, 연이어 몸을 젖히며 강타를 날려댄다. 껍질을 화기에 침범당하고 머리에 횃불처럼 불을 이고도 끄떡없이 맞서 싸웠다.

  이 맹렬한 반격에 닿는 것을 모조리 불태우며 거침없이 진군해오던 돗뫼도 한 순간 주춤한 듯 했다. 그러나 멀리서 몸을 떨어 올리는 포성이 울리며 달아오른 바위들이 쉬지 않고 떨어져 내리고, 얇은 돌 껍질을 떠밀며 꿀럭 꿀럭 검붉은 용암이 흘러나와 숲의 돌진을 가로막았다. 발목 잡혀서 진군이 멈춰선 사이 불길이 재빠르게 돌아 들어와 퇴로를 가로막았다. 너무 깊숙하게 들어온 나머지 완전히 포위된 것이다. 돗뫼는 불을 연이어 몰아쳐서 나무들의 숨통을 하나씩 꼼짝없이 끊어 놓는다. 불티로 흩어지면 그 위로 다시 불이 뛰어들고, 불티로 흩어지면 그 다음 불이 또 뛰어들었다. 거인들은 서서히 죽어가면서도 마지막 숨까지 싸웠건만, 위로 타오르고 아래로 녹아내려, 마침내 심도 껍질도 온 데 간 데 없었다.

  불이 길게 피어오른다. 휘릭, 휘릭, 휘릭하고 갈래진 끝을 흔들며, 온 몸으로 핥고 뱃가죽으로 갉으며. 수천 장의 손짓하는 잎사귀, 두께 없이 겹겹이 겹친 꽃잎이건만 줄기도 가지도 없다. 휩싸고 펄럭이고 나부끼고 맴돈다. 물기는 죄다 마셔 없애고 부드러운 것을 딱딱하게 만들어 마침내 쩍쩍 금가 터지고 뒤틀려 불똥을 튀길 때까지. 새빨갛게 빛나는 웃음으로 너울거리는 춤. 불그스레한 기운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어른대는 열기가 맹렬하게 피어올라 닿는 거리 안의 모든 것을 바싹 마르게 하고 이윽고 불붙게 한다. 아주 작은 점에서 핑그르르 휘도는 연기가 피어올라, 껍데기가 삐적 삐적 말리며 속이 드러나고, 검게 번지는 그을음, 곧이어 보일 듯 말 듯 흔들리는 거의 투명한 불꽃. 제 모습을 드러내기 부끄러운 듯 살래살래 저으면서 살짝 떠오른 채 한 발 한발 허공을 딛는다. 따닥따닥 튀겨가며(그 불똥은 눈을 감아도 눈꺼풀 안쪽에 길게 잔상을 남긴다) 다시 크게 흔들어 또 세차게 튀기고, 우적우적 씹고 물어뜯어 남김없이 재로 만들기. 먹는데 열중하면서도 눈을 똑바로 뜬 채 다음 먹이를 찾아 주위의 모든 것을 탐욕스럽게 살피고 있다. 불이 옮겨 붙는다. 몸을 늘려 가늘어지고, 한껏 숨을 고르면서 더 크게 타오르다가, 딛은 곳이 사그라들어 우지끈 무너지는 통에 떨어진다. 그러나 그 떨어진 자리에서도 점점이 상처에서 흐른 피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다.

  갈매움은 큰소리로 외쳐 독려하며 함께 싸웠으나 고목들은 차례차례 쓰러졌고, 마침내 마지막 나무 위에서 악머구리 같은 불에 둘러싸였다. 저마다 기세 좋게 외치며 기어올라 숲 신령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겨 뜯어내려한다. 숲 신령은 숨을 고르고, 껍질에 손을 대어 정기를 불어넣었다. 분명한 죽음 한 가운데에서 생이 뒤돌아보자, 곧 모든 나이테마다 다시 생기가 감돌고 불에 상한 껍질에 새 순이 솟아오른다. 거인은 발치에 날뛰는 작은 불들을 잊고 봄을 기억해낸다. 빠르게, 깊게, 넓게, 모든 방향으로 자라고 크고 생육하는 힘. 뿌리가 파고드는 만큼 줄기가 자라 오르고, 줄기가 자라 오르는 만큼 뿌리가 파고든다. 사방과 위, 아래의 여섯 세계로 확장되는 진정한 자신. 불길이 미쳐 날뛰며 쉴 새 없이 핥아대지만 그 속에서 나무는 점점 더 단단히 여물고 푸르러진다. 숲 신령은 모든 것을 무로 돌아가리라는 선언에 감히 도전하여, 손실을 벌충하고도 남을 만큼 산출해내며 점점 더 크게 자란다. 결코 굴하지 않기에 죽음 앞에서도 창생을 멈추지 않는 생명, 절망 속에 뿌리내리고 꽃피우는 희망. 신목은 온통 숲으로 충만하여, 두터운 잎 그림자 사이마다 별이 빛나고, 그 위로는 바람이 숨 쉬는 소리, 안개가 거죽에서 흘러내리고 한 가지에 순과 열매가 동시에 맺힌다. 이것은 갈매움이 처음 땅에 뿌리내린 가냘픈 새싹에서 눈 뜬 후로 천 번을 반복해온 것이었으며, 온 숲이 기억하고 간직하는 꿈이었다. 갈매움은 그로써 강대한 적에게 대항하고자 했다.

  그러나 곧 기반이 뒤틀렸고, 용암이 분출해 나와 물을 찾아 더듬는 뿌리들을 낚아채었다. 빠르게 흐르는 점성 있는 융용한 돌이 열배로 두꺼워진 껍질을 차근차근 먹는 동안, 아래로부터 연이은 비보가 줄기를 타고 달려 올라가며 신목에 넘치던 생기가 금세 빛을 잃는다. 걸죽한 불이 착실하게 태고의 거인의 발을 갉아먹어 그 심부까지 침투하자 왕이자 왕좌는 신음하며 몸을 흔들었다. 그 고통에 갈매움이 절규하자, 신목이 최후의 힘을 다하여 가지에서 온갖 나무의 잎사귀가 돋아나고 꽃이 움터 올랐다. 불에 휩싸인 한복판에서 삽시간에 허공에 매달린 숲이 출현하였으나, 이미 불길에 파 먹힌 줄기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배반했다. 신령한 나무가 우지끈 부러져 곤두박질치며 그 모든 꿈도 기억도 소용없이 불 속으로 떨어졌다. 너울대는 불에 사로잡힌 숲 전체가 탄식하고 몸을 떨었다. 그러나 녹은 땅은 자신이 거둔 공적에도 무감동하게 그저 제가 계속 해오던 것을 충실히 반복했고, 꺾여버린 숲-나무는 불과 흙 양자의 힘에 의해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허공에서 팔랑팔랑 뒤집히며 떨어지는 나뭇잎 위에 작디작은 갈매움이 매달려있다. 불가 재를 뒤집어쓰고 참담하게 패배한 채, 절망에 잠겨 필사적으로 손을 움켜쥔다. 뜨거운 바람과 물결치는 열기, 아른대는 아지랑이가 제멋대로 부딪히고 불어 날리고 떠밀어대어, 한조각 잎사귀는 불 위를 정신없이 팽글팽글 돌고 치솟았다 가차 없이 떨어지는 것을 반복한다. 한바탕 크게 뒤집히고 나자 별안간 자세가 안정되었는데, 겨우 고개를 들어보니 작은 불티의 형상을 한 돗뫼가 눈앞에 내려앉아 있었다. 불이 닿은 자리부터 연기가 솟으며 잎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환한 웃음에 숲 신령은 격노했다- 한 때 잎사귀 달린 것들이 터럭 난 것을 사냥하며 어두운 숲을 헤매고 돌아다녔다는 태곳적 전설처럼, 사납게 울부짖으며 덤벼들었다. 맞붙어 씨름하자 삽시간에 팔을 타고 불이 옮겨 붙고 허공에 뜬 잎사귀의 녹색도 빠르게 검은 색으로 그을린다. 그러나 갈매움은 마지막 힘을 짜내서 증오어린 함성과 함께 적에게 쏟아 부었고, 번져가던 검은 자죽이 멈칫하더니 이미 타버린 자국이 빠르게 생으로 돌아오며 선명한 녹색으로 불타오른다. 갈매움의 손아귀 안에서 돗뫼의 웃음도 산산이 부서지며 빚을 잃었고 그대로 가루가 되어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생기 넘치는 이파리 위에는 작은 숲 신령뿐이었다. 하지만 이 작은 승리에 포효를 내지르기도 전에 불로 가득한 지면이 순식간에 눈앞으로 달겨들었고, 작은 이파리는 숲 신령과 함께 화라락 타버렸다.

  황급히 눈을 떴을 때 갈매움은 신목의 마지막 이파리가 타버린 자리에서 엄청난 거리를 물러난 곳에서 재생하고 있었다. 나이든 나무들이 적에 맞서서 깊숙이 들어간 동안, 불은 이미 광대한 영역을 잠식해 들어온 것이다. 가파른 사면에서 상당한 거리를 흘러내려왔기에 이곳은 비교적 젊고 낭창낭창한 아이들만 자라는 어린 숲이었다. 적에 맞서 싸울 만큼 굵은 줄기나 두터운 껍질을 가진 나무는 없고 처음 겪는 가뭄을 해갈하는 빗방울과 유연하게 휘어지는 가지에 기뻐하는 젊은 나무들뿐이었다. 숲 신령이 이토록 먼 곳까지 이르자 한편으로는 신기해하고 한편으로는 경외를 느끼며 조심스럽게 몸을 숙였다. 그러나 이런 환영을 받을 새도 없이, 반대편에는 화광이 온통 붉게 번쩍이고 바람을 타고 재와 타버린 나무들의 마지막 단말마가 실려 오고 있었다. 호기심을 뒤엎는 두려움이 줄기 사이로 둔중하게 번져간다. 오래된 숲은 이미 화산신의 거침없는 발걸음 아래 모조리 타 버렸고, 남은 것이라곤 몇 대씩이나 어린 자손들뿐이었다. 이토록 어린 숲은 불과 싸우기는커녕 죽음이 무엇인지조차 깨닫지 못한 채 단숨에 타버릴 터였다.
  숲 신령은 밀려드는 불의 물결을 향해 탄식하며 날아올랐다. 손가락을 곧장 쑤셔 박아 가슴을 짜개어 열었다. 벌어진 상처에서 농익은 열매에 맺힌 이슬처럼, 가지 속을 힘차게 흐르는 황금색 수액처럼 정기를 흩뿌리며 그녀가 외쳤다.

- 자라라, 자라거라, 어서! 새 잎을 피워 올리고, 가지를 단장하고, 물을 한껏 들이켜라! 춤추는 신록, 닿지 않는 바람인 나 갈매움이 너희의 열매와 씨앗을 축복한다. 어린 줄기는 여물고, 부드러운 거죽도 굳세어져, 촘촘한 잔뿌리는 닿지 못한 곳이 없고 잎사귀는 한껏 벌여섰다. 삶은 춤이고 멈추지 않는 것이니, 모두 살아라! 춤추라! 내가 곧 너희이고, 너희가 곧 나이니, 모든 잎과 뿌리와 줄기가 영화롭구나! 자라라! 자라나라!

  이런 축복은 일찍이 유래가 없는 것이었기에, 갈매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직 작고 가느다란 잎사귀에서 떨어지는 그림자조차 밤처럼 어두워졌다. 숲은 몸을 떨면서, 생을 찬미하고, 폭발하며 증식한다. 바람이 잎사귀를 흔들고 지나가는 사이에 계절이 휙휙 지나가며 나이테가 수십 겹을 더했고, 열매가 땅에 떨어지는 즉시 어린 열매가 달린 줄기가 자라나며 아직 그 열매가 여물기도 전에 그 안에서는 뿌리가. 꽃 봉우리가 연달아 멍울을 터뜨릴 때 이미 물든 단풍이 나리고, 다시 꽃이 질 때는 새롭게 돋은 잎이 한 끝부터 벌써 색이 변하고.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몸을 비비대며 자라난 줄기들이 뒤엉켜 빠직빠직 신음하나, 뒤틀려 터진 틈바구니에서조차 잎을 치렁치렁 가득 단 가지가 솟아올라온다. 숲 내음은 진해지다 못해 달콤한 냄새를 풍기고, 언뜻언뜻 취하게 하는 발효한 냄새도 섞여 있다. 순식간에 숲이 빽빽해지고 어두워지고 가득해져서, 천년동안 모인 정기를 흠뻑 들이킨 나무들은 마치 제가 그만큼의 세월을 살아온 마냥 분별이 생겨 눈을 뜨고 처음으로 줄기와 가지를 움직여본다.

  본디 이처럼 순리를 어그러뜨리는 일은 감히 신령이 범해서 안 되는 금기였으므로, 행위가 인과를 낳아 죄가 칼날처럼 숲 신령을 난자하고 얇게 도려 떠내었다. 그러나 갈매움은 갈기갈기 찢겨나가면서도 멈추지 않고 생장을 계속했다- 아직 북풍의 채찍질도 뙤약볕의 갈증에도 익숙하지 못한 어린 나무들이 순식간에 자라나 수백 년 묵은 고목들처럼 아집을 깨닫고 자기를 형상 짓는다. 숲의 피에 취한 채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혹투성이 뿌리로 겨우 걸음을 내걸으며 비척비척 화산신을 막으러 걸어가서는 순식간에 타 죽으며 비명을 질러댄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생긴 분별과 아집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업장이 태어나 숲 신령을 불처럼 태웠다. 마구 뿜어져 나오는 숲 신령의 피가 떨어진 자리에서 무성한 초록이 자라나 숲의 어둠을 더했다.
  닥쳐오는 죽음을 향해 앞 뒤 가리지 않고 쇄도하는 나무들 틈에서 갈매움은 피범벅이 된 채로 빠져 나왔다. 달려드는 숲은 갈매움을, 세상을, 혹은 아직 아무도 부른 적이 없는 자기 이름을 외치며 족족 돗뫼에게 덤벼들어 삼켜진다. 돌아오는 것은 모두 죽음, 죽음, 죽음 뿐, 순리를 따르고도, 어기고도 화산신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숲 신령은 지축을 뒤흔드는 돌진 위로 귀중한 정기를 길게 흘리면서 날개 치며 날아올라, 하늘을 우러르며 울부짖는다.

- 하늘이여! 하늘이여! 이 모든 것을 굽어보고 있지 않으신가! 이 부르짖음이 들리지 않으신가! 여기 낮은 곳에서 작디작은 우리가 죽어가고 있나이다. 구물거리는 어린 물생들을 가엾이 여기시어, 비를, 불을 꺼뜨릴 비를 주소서! 하늘이여! ...

  그러나 갈매움의 피를 토하는 듯한 절규도 이지를 초월하는 광경 앞에서 맥없이 끊어지고 말았는데, 이는 일천 번의 봄과 겨울을 겪은 신령조차 본 적이 없는 광경이니, 일찍이 숨 쉬는 것 가운데 이를 눈으로 보고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화구에서 치솟은 불기둥은 똑바로 하늘로 향하며 돌로 된 구름을 노을처럼 둘러 끝으로부터 곧장 피어오르게 하니 흡사 산이 거꾸로 뒤집힌 듯 했다.  넓이을 알 수 없고 두께를 측량할 수 없는, 대지를 마주 본 대지가 중력의 영을 거슬러 유영했다. 새까맣고 쉬지 않고 부풀어 오르는 절벽이, 화광을 받아 탐욕스레 붉게 빛나면서, 말문이 막힌 숲 신령의 머리 위를 지나쳐 수평으로, 수평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늘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오로지 저 강대한 화산신이 모든 것을 뒤덮고 있을 뿐- 처음 하늘이 열리고 신단수로 하늘 자손이 뭇 신들을 이끌고 널리 산 것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내려설 때 광경이 이와 같았으랴! 휘몰아치는 혼돈의 틈마다 붉게 번뜩이는 번개가 불거져 나와 섬뜩한 빛을 내뿜고, 그 너머로 아무것도 없는 막막한 우주가 들여다보이는데, 모든 것의 한 가운데 가부좌 틀고 앉아 아래를 가리켜 삿된 것을 멸하고 삼라만상을 무상으로 되돌리는 인을 맺은 채 꼼짝하지 않는 눈감은 공허. 그것이 서서히 텅 빈 눈을 뜨자 세계가 종말을 느끼고 전율했다- 꿈틀거리는 밤에서 약한 천둥소리가 울리고, 피처럼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초열지옥 속에 아우성치는 중생에게 닿지 못하고, 일만팔천 번뇌의 고통으로 맹렬히 타오르는 화기에 증발하며 그들의 머리 위 허공에서 그대로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 아아!

  갈매움은 더 이상 뜻이 닿는 말을 잇지 못하고, 외마디 고함을 내지른다. 그 절망에 찬 부르짖음은 아무도 듣는 이 없었다. 아무도. 그녀는 혼자였다- 위로는 뒤틀리는 혼돈에 덮인 하늘에서 희망을 주었다가 다시 빼앗는 거짓된 비가 떨어져 내리며 조롱하고, 아래로는 그녀가 모든 것을 바쳐 지키고자 했던 숲이 형상을 잃고 뭉그러지고 있다. 그 한복판에서 섬전처럼 고통이 관통하고 지나가 그녀는 허공에 꿰어 찔린 채 몸부림쳤다. 너무 증식한 나머지 숲은 한 덩어리진 괴물로 부풀어 오르며 곧게 선 화산신을 향해 허우적허우적 기어간다. 오직 환하게 빛나는 불이, 환희 속에서 춤추고, 웃음을 터뜨리며 발치를 굽어본다. 그 눈부신 광휘에 비하면 너무도 작고 추악한 형상이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고 몸을 웅크리며 흐느껴 울었다. 그 모든 것을 보면서 홀로 남은 숲 신령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다시 비통한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녀 자신조차 그 비명소리를 듣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림자가 없는 불, 언제나 “그렇다!”라고 말하는 불, 어린아이처럼 웃는 불이 몸을 숙여 그녀와 과잉의 숲을 기꺼이 포옹했기 때문에.

- 나는 돗뫼. 하지만 이름은 내가 아니고, 나란 단지 여기서 춤추는 것. 춤추는 것은 무엇이든 내가 될 수 있다. 보라, 여기 내가 춤추며 온다. 소맷자락이 걸릴까 저어하지 않고, 내딛는 걸음이 막힐까 머뭇대지 않으며. 팔을 휘두르고, 그 끝에서 허공을 가르는 것은 내 손. 저기 작은 불이 이는군. 내 춤에 눈뜨고 일어나 자기도 춤추고 있어. 자, 모두 생이라는 선율에 몸을 맡기자. 이것은 떨림, 부질없는 것, 허공을 가로질러 나는 것. 이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고, 오직 지금만이 있으니, 나는 여기서 더 변모할 수 없는 자로 웃는다. 누가 춤추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자유로움, 기쁨, 생이여! 누가 웃지 않을 수 있을까? 이토록 아름답고, 이토록 짧고, 죽음이 닥쳐올 것이 이처럼 분명한데? 설령 지쳐서 물러난다 해도, 그건 잠시의 휴식일 뿐, 나는 춤이요 춤꾼이니 다시 벌떡 일어서 생을 향해 날렵하게 도약한다. 그러니 지금 이 단 한 번의 웃음이 마지막이라 해도, 영원히 원을 그리며 순환하는 이 세계를 위하여, 내 손을 잡고 한 곡 더 춤을. 보라, 여기 내가 춤추며 온다...



  흰머리산의 맹렬한 분화는 장려한 원시림들을 모조리 태워버리고도 해동성국의 용천부까지 휩쓸고 지나갔다. 구름 같은 재는 열 개의 해가 몸을 쉬는 부상도까지 닿아 여러 날이나 갓 돋은 아침의 얼굴을 창백하게 했고, 사서는 괴력난신을 언급하지 않으려 애쓰며 대사면령을 베풀게 한 하늘 북소리를 기록했다. 영원히 계속되는 마지막 같던 불이 다시 잠들고, 땅 속의 온기가 식은 다음에도 오래도록 일대는 번들거리는 유리질의 현무암 사막으로 남아 있었다. 지치지 않는 비가 무릎 꿇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적셔 참을성 있게 죽음과 생 없음을 무수히 씻어 내리고, 해마다 찾아오는 겨울이 무심한 광택을 금가게 한 후에야, 더러는 바람에 날리고 더러는 잠시 쉬었다 가는 날짐승, 길짐승에 의지해 도달한 씨앗들이 가까스로 싹을 틔웠다. 매번 부질없이 말라죽으면서도, 나무가 흙을 꿰뚫는 오행의 원리를 따라 돌을 쪼고 두드려 깨는 가느다란 뿌리들이 산의 살을 조금씩 먼지로 바꾸어놓고 쓰러져 죽는 제 살도 흙에 더했다. 십 수년이나 지나서야 야트막한 관목이 눈 속에서 추위를 견뎌내 이듬해 봄을 맞이하고, 가늘지만 더 키가 큰 것들도 조심스레 새 잎을 틔웠다. 이렇게 해서 아직 자기를 알지 못한 채 태동하는 일곱 번째 숲은 서서히 다시 태어나고, 파멸을 기억하는 여행자들은 평원을 횡단하며 죽음으로부터 재생하는 생을 보고 감탄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짧은 생애보다 더 오랜 세월을 내다보려 애쓰는 이들은 깊은 아래의 처소에서 꿈꾸며 기다리는 돗뫼의 잠-Ia! Ia! Ignis Fhatagn!-을 기억하고 쉽사리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생명이 언제나 스스로 다시 돌아오는 것처럼 죽음 역시 결코 죽는 법이 없으며, 성스러운 출생의 순간에도 환영받지 못하는 참관인은 그 순간은 침묵을 지키며 잠자코 한 구석에 서서 새로운 계약의 순간을 지켜본다. 이어지는 모든 길들의 모퉁이에는 그 불길한 그림자를 한 발 앞서간 전령처럼 드리우고, 아무리 피하려 발버둥 쳐도 결국에는 가능성과 개연성의 종국에서 싸늘하게 웃으며 틀림없이 통행료를 징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들은 초원에 가득히 흔들리는 풀꽃의 영화를 보면서도 바람결에 날리는 불티와 흩어진 재를 생각하고, 줄기 가득히 물이 달리고 이파리끼리 몸을 부산히 부비며 숲이 돋아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갈매움의 파멸과 절규를 생각하기에 생을 기뻐할 여력이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몸에는 검은 옷을 휘감고 손에는 적배지를 든 창백한 사자가 문을 두드리는 날까지 오로지 그 방문만을 두려워하느라 하나하나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세면서 매일이 몰락하는 것을 슬퍼한다. 아직 이름 지어지지 않은 일곱 번째 숲은 여섯 번째 숲 갈매움이 될 수 없고, 황혼녘 옥좌에서 끌어내려져 살해당하는 태양은(그 피가 천공을 물들이는 것을 보라) 다음날 새벽에 새로운 태양이 반역자들을 거꾸러뜨리고 영광에 휩싸여 즉위하리라는 사실에 위안을 얻지 못할 것이다. 어떤 것도, 그 누구도 갈매움과 그녀의 파멸을 기리는 이들, 모든 곳에서 종말을 보는 이들을 위로할 수 없다-엄혹한 사실에서 애써 고개를 돌린 채 달래려는 이들 역시, 예정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으므로.

  하지만 언제나 “그렇다!”라고 말하는 이들, 영원히 순환하는 생은 곧 영원히 순환하는 죽음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끝없이 스스로를 다시 생으로 소환해내는 이들, 염도 없고 원도 없이 어느 곳에나 임하고 어느 때에나 재하는 이들은 잠든 돗뫼가 무엇을 꿈꾸고 있는지 알고 있으며, 그렇기에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다. 왜냐하면 변치 않는 것은 왕관이 아니라 금이고, 이름 지을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이름이 아니며, 생이란 죽음을 건너뛰어 다음의 생으로 민첩하게 도약하는 것,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밀어 올리는 것이고 멈추지 않는 투쟁, ‘좋다! 그렇다면 한 번 더!’라고 외치는 것이기에. 그들은 죽음과도 같은 깊디깊은 잠 아래에서 가볍게 코를 골고, 길게 숨을 뿜어내고, 이따금 돌아누우며 소년이 춤을 꿈꾸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 춤은 불이며 동시에 숲인데, 그 숲은 돋아나는 별로 되어 있고, 흔들리는 잎사귀는 섬광, 손짓하는 가지는 영감처럼 번뜩이며 스쳐 지나가는 유성이다. 심연으로부터 무한히 샘 솟아나온 은하수 강물이 그 줄기가 되고, 뿌리는 억겁의 허무를 가로질러 벼락처럼 갈래져 웅얼거리고 길게 숨을 내뿜고 들썩이는 모든 잠들에 그 끝이 닿았다. 우주 나무에 매달린 열매마다 세상이, 그 열매 속의 씨앗이 꿈꾸는 열매마다 또 알알이 맺힌 세상들이. 이윽고 텅 빈 어둠에 예감으로 전율하는 새벽이 밝아오면 모든 켜마다 숨어 있는 불(그래서 나무를 문지르거나 돌을 두드려 불씨를 얻을 수 있다)은 다시 기대에 차서 몸을 흔들면서, 탄생하는 별과도 같이 불티를 뿌리고 불꽃을 피워 올리며 춤추는 숲으로 자라나기를 꿈꾼다. 그러므로 언젠가 돗뫼가 다시 일어나 춤출 때, 불타는 숲이 두려움도 연민도 없이 광휘에 휩싸여 웃을 수 있다면 별로 된 숲은 마침내 징조로 가득 찬 밤에서 내려와 지상에 강림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불도 숲도 없고 오로지 산만이 있을 것이며, 빛을 둘러쓴 흰머리산은 회전하는 우주 아래에서 웃음을 터뜨리며 춤추고 노래할 것이다.

- 나는 흰머리산, 하지만 이름은 내가 아니고, 나란 단지 여기서 춤추는 것. 춤추는 것은 무엇이든 내가 될 수 있다. 보라, 여기 내가 춤추며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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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글쓰는 사람은 글로만 말해야 하는 법이지만, 개인적인 일로 글이 막히는 바람에 오랫동안 무얼 제대로 쓰질 못하다가 조금이라도 회복하기 위해 다른 작품을 재해석해보기로 한 것이라 조금만 군말을 덧붙이겠습니다.
  이 재해석본의 원작은 디즈니의 fantasia 2000 중 불새the firebird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를 영상화한 것입니다. 이 작품을 보고 처음 느꼈던 불편함은 불새가 절대악처럼 묘사된다는 점이었고, 그다음으로 느낀 불편함은 다 끝난 뒤 숲이 되살아난다고 해도 불새 역시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냥 잠들어 있는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재생의 희망을 그리고 있다고 하지만, 최후의 심판이 지난 후 천년왕국이 도래할 것이라는 류의 기독교적-일직선적 시간관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없는 듯  보였습니다. 그래서 평소 쓰던 취향대로, 도가적인 뼈대에 불가와 니체를 섞어 넣고 재생보다 파괴의 묘사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를 나름대로 다시 써 보았습니다.
  사실 내용도  재해석이라지만 원래는 남의 것이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구도도 이전에 쓴 것들을 끌어다 쓴 별 볼 일 없는 졸작입니다만; 재활치료 정도라 생각하고 너그러이 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덧 : 유투브에서 the firebird를 볼 수 있는 주소입니다. 꼭 비교할 필요는 없지만 참고하고 싶으신 분은 봐도 좋을 듯. (굳이 비교하자면 불새가 깨어나는 2:45초부터의 '카츠제이 왕의 죽음의 춤' 부분 정도만 봐도 무방할 듯 합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2XGRmaiCpP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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