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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12광년의 고독

2012.03.30 23:3103.30


자기를 향한 그것을 본다. 자신이 가진 그것과 같은 것. 우주처럼 시꺼먼 총구를. 12년 전에 자신을 향했을 그 무섭고 지긋지긋하며 증오스런 총구를.
남자는 방아쇠를 당긴다. 거대한 총신이 뒤로 밀려나 가슴을 강타한다. 남자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총열이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간다. 오그라들었던 가슴받이가 다시 부풀어 오른다. 남자는 자신의 총에서 발사된 탄환을 좇는다. 탄환은 하늘 높이 사라져 더 이상 반짝이지도 않는다.

그것의 탄착점을 확인하는 것은, 24년 후가 될 것이다.

*

남자는 전화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 아직 새벽이었다. 수화기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알았네, 알았네, 하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다가 “알았어, 그렇게 하지.”하고 귀찮은 듯이 대꾸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누구야?”
옆에서 잠이 덜 깨 잠긴 목소리로 아내가 물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일어나 방에서 나갔다. 널찍한 거실 한편 베란다의 유리로 바깥 새벽의 동트는 풍경이 비쳐드는 중이었다. 그는 거실 한가운데 서서 잠시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푸르스름한 빛으로 세상이 완전히 밝혀질 무렵, 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달력을 보았다.
벌서 12년이 흘렀다.
불현듯 일주일 전 있었던 자신의 생일 파티가 생각났다. 열 살 난 손자가 케이크의 촛불을 자기와 함께 불어 꺼 주었었다. 12년 전의 이날 또한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그때 그의 아들은 아직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그러자 비로소 그것이, 12년 전의 기억이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었다는 것을 그는 실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날, 12년 전의 오늘을 생각하면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손에 잡힐 듯 생생했다. 그것이 그렇게 오래된 과거의 일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나 당시엔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손자의, 10년의 유년기로 추억될 날들을 반추하자면 또다시 까마득한 옛날의 일이라는 것이 실감되어 혼란스러워지는 것이었다.
그는 상념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흔들고는 욕실로 들어가 몸을 씻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12년 전 오늘에 몸을 씻으며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지켜보던 시선을 떠올리고서 그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남자는 거울을 보았다. 12년 전 오늘에도 그는 거울을 보았었다. 아니, 24년 전, 36년 전에도 그랬었다. 그 얼굴은 모두 달랐다. 문득 그는 자기가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으나, 이내 더 큰 혼란에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12년 전, 24년 전, 36년 전의 오늘이 한순간, 투명한 셀로판지에 그려진 그림들이 겹쳐지듯 한 번에 겹쳐져 보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 거울에 비치는 것은 59세의 그였다. 그는 자기가 너무 늙어 버렸다고 생각했다. 총을 다루기에는 너무 늙은 게 아닐까, 하고…….
뚱뚱한 그의 아내가 아침 식사를 차리고 있었다. 식사는 간단했다. 딸기잼을 바른 토스트 두 쪽과 달걀 프라이 하나, 오렌지 주스 한 잔. 그가 가뿐한 몸 상태를 위해 아내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아내는 식탁의 자기 쪽에다 푸짐한 아침을 차리고 먹기 시작했다.
12년 전에도 이랬었다. 24년 전에도. 식탁의 모양과 딸기잼의 상표가 바뀌었을 뿐 그날들과 다름이 없었다. 맛은 어땠더라. 맛도 기억이 날 것 같았다. 아마 같은 맛이었으리라. 그렇지만 착각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이고 긴장한 탓에 맛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지금처럼.
그렇게 생각하자, 그날들의 불안했던 느낌마저 떠오르는 듯해 그는 불쾌해졌다. 기시감의 야릇한 느낌으로부터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이 감정을 그때도 느꼈던 것은 아닐까 의심스러워져 한동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자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맛있게 아침을 먹는 아내를 그는 바라보았다. 아내는 12년 전이나 24년 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때는 그녀도 토스트를 먹었었다.


“오늘 컨디션은 어때요?”
“괜찮은 편이야.”
“다행이네요.”
“탄착점(彈着點) 예상지는 나왔어?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그의 옆에 서서 건조한 사막을 걷고 있는 남자는 그와 함께 36년간 일해 온 지구방위군 소속의 이로, ‘스페이스건(Space Gun)’의 사격통제관리를 맡고 있었다. 그는 신물이 난다는 양 어깨를 한 번 들썩이고는 말했다.
“어디든 떨어지겠죠, 뭐.”
담당관은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자기 아들의 직장과 결혼에 대해, 그리고 아들이 올해는 꼭 보내준다고 약속한 남쪽 휴양지에 대해 늘어놓았다. 간간이 불어오는 모래바람에 기침을 해대면서.
그는 스페이스건이 있는 곳을 향해 사막을 가로질러 걸어가면서 끈기 있게 남자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러다 돌멩이를 밟고 발목을 삐끗했다. 그는 발목을 부여잡고 욕설을 뱉으며 자책했다. 12년 전에도 같은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때도 사격이 있고서 몇 주나 통증 때문에 고생했었다.
“어이쿠, 괜찮아요? 가서 진통제를……. 아, 혹시 사격에 지장 있을까요? 가서 파스라도 붙여요. 사무실에 있어요.”
“……저번에도 이랬잖아. 그때도 같은 말 했었지. 사무실에 파스 없었어.”
“그랬어요? 잘 모르겠는데…….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자기 여행 얘기로 돌아갔다. 거기에도 모래가 있을 테지만 해변의 모래는 먼지만 일으키는 여기 모래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둥.
발목이 아픈 탓도 있겠지만, 그는 아까 보였던 남자의 반응에 씁쓸해졌다. 12년 단위로 생생한 자신의 기억이 정말로, 심지어 그와 관련이 있는 모든 이들에게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는 남자가 사무실 책상 서랍 안쪽 구석에서 찾아낸 파스를 발목에 붙였다. 이윽고 거대한 총기(銃器)의 뒷자락에 붙은 딱딱한 좌석으로 가 앉았다.
그의 앞에 놓인 기다란 총신(銃身)은 돔형 구조물의 개방된 천장을 지나 푸른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 있을 검은 우주를 향해, 그곳 어딘가에 있을 또 다른 푸른 행성과 그 행성 어딘가에 있을 또 하나의 ‘스페이스건’을 향해 그것은 뻗어 있었다. 윙 소리를 내며 기계가 움직여, 그가 앉은 좌석을 총기만큼이나 거대한 조준경의 입안대(入眼臺) 가까이로 밀어 넣었다.


36년 전 그가, 이 아직도 딱딱한 받침판이 얹히기도 전의, 철제 프레임만으로 의자 모양을 이루고 방석을 얹은 게 전부였던 그곳에 처음 앉았을 때, 그는 막 의사에게 주의사항을 듣고 처음으로 자기공명영상장치에 들어가는 환자처럼 두려워하고 있었다. 기계로서의 ‘스페이스건’은 아직 그 모양만큼이나 불안정한 상태였고, 과학자나 기술자 중 그 누구도 향후 발생할지 모를 불미스런 사태의 가능성에 대해 아주 간단히 언급만 했을 뿐 안전을 보장하겠다거나 책임을 지겠다고 장담하는 이가 없었다.
딱히 반드시 그걸 해야만 한다는 강압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 흔한 다혈적 기질을 전혀 지니지 못한 젊은이 특유의 유약한 소심함으로 무장한 그로서는, 엉겁결에 사로(射路) 깊숙이 들어앉아 한껏 기대와 우려로 가득한 눈길에 둘러싸인 상황에서 그것을 거부하거나, 유예하거나, 재고를 요청할 용기가 없었다. 그저 이제라도 잠깐만 기다려 달라거나 못하겠다고 말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 속에서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이내 좌석이 움직여 반쯤 개방된 거대한 총의 내부로 그의 몸을 삽입시켰고, 앙상한 팔 모양의 철골들이 움직여 그를 고정시킴으로써 그는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 상황이 그쯤 되자, 길지 않은 시간 줄곧 그를 괴롭혔던 망설임은 약간은 김빠진 후회, 아니 차라리 선택권을 빼앗긴 자가 상황에 순응하며 느끼는 안도감에 가까운 것으로 돌변했다. 그는 오히려 차분해졌다. 방금 전까지의 극도의 긴장으로 인해 참기 힘든 요의가 찾아왔다는 것만 빼면.
첫 저격의 기억이 실제보다도 두렵고 끔직한 것으로, 창피스러운 것으로 느껴지는 까닭은 아마도 그 때문이리라.
남자가 처음 총을 쏜 것은, 정확히 말해 핵추진 펄스 아광속(亞光速) 자체로켓과 소량의 고효율 핵융합 탄두가 실린 탄환을 총기 내 핵펄스, 즉 약실(藥室)에서의 제한된 핵폭발에 의한 반발력을 추진력 삼아 대기권 밖으로 날려 보낸 것은 지금으로부터 36년 전, 아직 그가 23살의 청년이었을 때였다.
2년 동안 그리 유명하지 않은 지방대를 다니며 터무니없이 비싼 등록금을 내기 위해 학자금 대출을 이미 네 번이나 받은 상태였던 그는 졸업 후의 취업마저 불분명해지자 군 입대를 결정했고, 그러한 연유로 군에 들어온 지 2년이 지나 병장 계급장을 달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런 그가 그 거대한 총의 사수, 다시 말해 우주 너머 12광년(光年) 거리의 어느 행성에서 지구를 겨냥하고 있을, 알지 못할 저격수를 향해 마찬가지로 저격수가 되어 총을 겨누게 된 까닭은 생각만큼 극적이진 않다.
지금으로부터 72년 전에 의문의 미확인비행체가 지구에, 그리고 그중 가장 강대한 국가의 상공에 나타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아마 지구인들에게 무언가 말하려고 한 것 같았는데, 그들의 착오 때문인지 아니면 기계의 오작동 때문인지 지구인들은 그들이 말하려는 바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두려워진 지구인, 아니 지구의 모든 국가를 대표한다고 자부하는 최고 선진국의 지도자들은 자기들 나라의 상공을 온통 뒤덮고서 알아먹지 못할 말만 지껄이는 그 신경 쓰이는 물건과 그 안에 든 존재들을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모든 무기를 동원, 전력하여 그들의 우주선을 공격했고, 역시나 지구인들이 알지 못하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지 외계인들은 아무런 대응 없이 심각한 피해를 입은 채 황급히 지구를 떠났다. 곧 과학자들이 그들의 퇴각 경로를 추적했으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과학자들은 외계인들이 재빨리 태양계 밖으로 도망갔거나, 지구인들이 입힌 심각한 피해로 인해 우주공간에서 소멸했으리라 추측했다.
한동안 온 지구를 들끓게 했던 이 사건이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가던 무렵, 그 사건으로부터 24년 뒤이자 지금으로부터 48년 전에, 인류는 다시금 그것을 상기하게 되었다. 그들 행성으로부터 지구에 대한 선전포고가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인즉슨, 서로의 행성에서 고갈되어 가는 중요지하자원을 대체할 비활성잉여자원의 개발과 교환을 위한 우호적 토론과 협상의 목적으로 보낸 사절단을 무참히, 일방적으로 공격하여 파괴한 야만적인 행태에 대해 철저히 응징하겠다는 것이었다.
과학자들은 악의에 차 있으면서도 묘하게 예의와 격식을 차려 작성한 그 선전포고문이 광입자통신을 통해 온 것이라며, 24년 전에 나타났던 우주선도 아마 이와 같은 수준의 과학기술에 기초한 우주항해술을 가진 것이라 가정할 때, 그들의 행성은 지구로부터 12광년 거리에 위치해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면서 그것이 작은개자리의 α별인 프로키온보다 조금 더 멀리 떨어진,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에 딸린 행성 중 하나일 거라는 추측을 내놓았다. 그들은 그 행성에 ‘Bull G1644+57’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과학자들은 지구를 향한 외계인의 공격이 임박해 있을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이에 범지구적 차원에서 대책이 논의되었고, ‘지구방위군’이라는 연합적 성격의 우주군(宇宙軍)이 창설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지구방위군에겐 우주의 공격으로부터 지구를 방위할 만한 마땅한 수단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해에 최초의 탄환이 날아들었다. 그것은 북미 대륙의 사막 한가운데 떨어져 땅에다 커다란 화구(火口)를 만들었는데, 다행히도 불발탄이었다. 과학자들은 이것을 회수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것이 아광속의 속도로 우주 공간을 가로질러 지구에 다다랐을 것이라고, 즉 외계인들의 선전포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발사된 것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들은 이것이 날아왔을 약 756,864AU의 거리, 대략 113,529,600,000,000km의 거리와 이것의 탄착점, 대기권 진입 이후 포착된 탄도곡선(彈道曲線), 탄도정점(彈道頂點) 등을 계산하여 오차범위 1,981마일, 다시 말해 ±3,188km로 ‘Bull G1644+57’의 위치를 추정했다. 그리고 그들은 지구 문명이 이룩한 과학기술의 정수를 총동원하여, 지구방위군의 외계인의 공격에 대한 반격의 수단으로서 그것의 모조품을 만들어내고자 안간힘을 썼다.
그러한 과학자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은, 그로부터 11년 뒤였다.
사실 당시까지의 연구나 ‘대(對)행성용 우주저격 라이플’, 곧 ‘스페이스건’의 완성도가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계 각국의 지도층과 지구방위군은 최초의 공격으로부터 12년 후에, 자기들의 공격이 실패했음을 깨달은 시점에 외계인들이 다시금 포격을 가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구가 직면한 심각한 위험일 뿐만 아니라, 지구의 대표를 자처하는 이들로서 그들의 자존심과도 관련된 문제였다. 그들은 과학자들을 재촉했다. 그리하여 과학자들은 급한 대로, 최초 포격으로부터 24년이 되는 해가 오기 전에, 일단은 대략의 조준과 발사가 가능한 ‘스페이스건’의 시작기(始作器)를 만든 것이었다.
얼마간 저 거대한 스페이스건을 어디에 설치할 것인가를 두고 논쟁이 일었다. 실무적인 면에서도 그랬지만, 이것은 상당히 상징적인 문제이기도 했다. 열띤 토론이 계속됐고, 인류의 기원인 아프리카 대륙에 설치하자는 의견, 남극 대륙이나 북극의 얼음 위에 설치하자는 의견, 가장 위대한 종교의 본산에 설치하자는 의견(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논쟁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등이 난무했다. 그러다 마침내 선정된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최초의 피탄(被彈) 지점’이었다. 이것은 앞서 거론된 지역들이 외려 그것이 지닌 상징성 때문에 포격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한 번 ‘오폭된’ 지점을 그들이 다시 ‘정확하게’ 포격할 까닭이 없다는 점이 고려되었다.
남은 문제는 이 불완전한 총으로 저 불분명한 표적을 정확히 조준하고, 또 단 한 번만 주어진 기회임을 알면서도 대담하게 방아쇠를 당길 냉철하고 유능한 저격수를 찾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각 군의 내로라하는 일급 저격수들의 지원이 잇달았다. 지구방위군의 담당자들은 한동안 얼굴 높이까지 쌓아올린 서류를 밤새 검토하느라 녹초가 될 지경이었는데, 과중한 단순 업무에 강박증상을 호소하는 이들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즈음 유명 시민 단체, 비정부기구 등에 의해 ‘평화에 반하는 비인도적 살상 무기의 운용 시 발생하는 방사선의 유해성’에 관한 논란이 점화되면서 지원자들의 발길이 거짓말같이 뚝 끊기고 말았다. 이에 고육지책으로 지구방위군은 꽤 좋은 우대를 조건으로 내걸고 저격수에 대한 평생 고용과 고액 연금 지급을 약속했다. 그러나 방사선 피폭이라는 위험을 무릅쓸 만큼 매력적이지도, 신뢰감을 줄 만큼 인상적이지도 못했던 모양이다. 스페이스건의 전임 저격수 자리는 여전히 공석이었다.
그들은 조급해하기 시작했다. 이제 1년 후면 외계인의 공격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위험 시설 등 주요 시설에 타격을 입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러다가 문득 그들은 깨달았다. ‘우리가 서둘러 공격을 한다고 한들 12년 전에 발사되어 날아오는 탄환을 막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내부에서 자조적인 의견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차피 12년이나 걸려서 날아들 포탄으로 지구가 큰 타격을 입을지 어떨지도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일을 진행시킬 까닭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자행성(自行星)의 안전을 위해서가 아닌, 자칫 두 문명 간의 위험한 자존심 대결로 치달을 가능성도 있으므로(이미 그런 양상이 농후했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성급하게 일을 진행시키기보다는 차근차근 장기전까지 고려하여 보다 효율적인 대비를 하자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아직도 연구 중이며 앞으로도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스페이스건에 대한 지속적인 보강과 주요 위험 시설의 방비, 그리고 우주 저격에 특화시킨 특급 저격수의 양성 따위를.
몇 주 뒤, 남자는 초심자 대상 우주저격수 훈련 프로그램의 지원자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전역을 앞두고 생계 문제로 고민하던 그는 저격수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안정적인’ 평생직장을 선택하기로 한 것이다. 과거의 어떤 실험에 참가했던 젊은이들이 그랬듯이 그는 방사선 피폭 따위에는 무지했으며, 찝찝하기는 했어도 큰 관심은 없었다.
이듬해, 두 번째 탄환이 지구에 떨어졌다. 그것의 탄착점은 당시 지구에서 가장 부유하던 나라 중 하나의 몇 안 되는 빈민지역 중 한 곳이었다. 이번에도 오발탄인 듯싶었는데, 행운이 끝난 것인지 불운인 것인지, 불발탄은 아니었다.


그는 광주리를 닮은 타원형 입안대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둥글고 가로로 길쭉한 모양의 기계 안쪽 양 옆으로 스피커가 내장돼 있어 군인들과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의 통제와 지시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입안대 아래 작은 화면을 통해 안면 근육과 입을 열심히 놀려 조잘대는 그들의 얼굴도 볼 수 있었다. 훈련 시 수없이 반복해 들었던 주의 사항과 딱히 다를 것 없는 모든 말들을 그는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들었다. 엄숙한 의식과도 같은 절차가 모두 끝나자, 남자는 화면으로부터 시선을 떼고 입안대 깊숙이 눈을 가져다 대었다.
화면은 검었다. 그러나 잠시 뒤 밝아오더니, 한순간 화면 가득 먼지처럼 뿌려진 별들이 나타났다.
아까까지의 불안도 모두 잊은 채 그는 감탄했다. 그토록 많은 별을, 사진을 통해서 또는 텔레비전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렇게 두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있었던가. 그가 보고 있는 광경 또한 텔레비전이나 다를 바 없는 화면을 통해서라는 걸 그는 완전히 망각한 채였다.
뒤이어 행성 하나가 화면 안으로 확대되어 들어왔다.
확대됐다고는 해도, 그것은 그가 어린 시절 잡지의 사진을 통해서 본 화성이나 금성처럼 그저 둥근 행성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푸르렀다. 마치 지구처럼. 사실 그가 사진으로 본 지구의 그것만큼 푸르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해 푸르스름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분명, 한눈에 보기에도 생명을 품고 있을 성싶은 빛깔을 띠고 있었다.
그는 굉장히 새삼스럽고, 순간적이며, 딱히 논리적인 근거를 동반하지도 않는 황홀경과 같은 감동 속에서 그것을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우주로 나가서 자신이 떠나온 별을 보고 비로소 사랑에 빠져 버린 초급(初級) 우주인처럼.
“12년 전의 영상이네.” 과학자가 말했다.
“저것이 바로 자네가 파괴해야 할 목표물이지.” 군인이 말했다. “정확히는 저 별 어딘가에서 자네처럼 우리를 겨냥하고 있을 누군가가 되겠지만.”
“시뮬레이션에서 한 것처럼 표적을 향해 쏘면 되는 거네.” 기술자가 말했다.
남자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저격수의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기술자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은 확대하지 못해. 저게 한계라네.”
과학자는 이 말로써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는 양 덧붙였다.
“어차피 12년 전 모습이야.”
“그럼 그를 어떻게 쏴야 하는 겁니까?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쏜단 말입니까?”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군인이 말했다.
“괜찮아. 저쪽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우리 탓이 아니야. 그러니 자, 쏘게. 어서 쏴. 막 쏘라는 얘기가 아니야. 자넨 오로지 이걸 위해 훈련을 받았지. 훈련 받은 대로 신중히 쏘게. 주어진 건 한 발뿐이야. 단 한 발뿐이라고. 신중히 쏴야 해. ……보이지 않아도 말이야.”
그는 잠시 잊고 있었던 요의를 다시 느끼기 시작했다. 불편한 감각이 방광을 감싸고 금세 조여 오기 시작했다. 그는 벨트로 고정되어 움직이지도 않는 다리를 덜덜 떨며, 한동안 별의 이곳저곳을 녹색 격자로 대중없이 훑었다. 그러다 방아쇠를 당겼다. 격자가 빨간색으로 바뀜과 동시에 굉음이 터져 나왔다. 엄청난 반동이 그의 몸과 총열을 뒤로 밀어붙였다. 화면이 까맣고 구불구불한 선들로 뒤덮였다.
그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잃었던 의식을 비로소 되찾고 아찔함을 실감할 때쯤, 총은 이미 커다란 탄피를 내뱉은 뒤였고, 밀려났던 제 몸의 일부를 도로 끌어당기는 중이었다. 그의 방광은 충격을 견디지 못했다. 과학자와 기술자 들은 당황과 경멸이 뒤섞인 눈으로 막 방뇨하기 시작한 그와 막 포격이 끝난 스페이스건을 번갈아 보았다. 군인은 ‘그야말로 일급 저격수답다’며 별 감흥 없어 보이는 찬사를 날렸다. 그리고 그 군인의 뒤에서, 앞으로 36년간 그와 일하게 될 작달막한 남자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남자는 멋쩍어졌다. 아무리 지난 일이라지만, 그날의 일을 떠올리면 한없이 열없어지고 그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첫 경험의 소중한 기억이라고 해도.
그가 그러는 동안에 그의 오랜 동료는 12년 전의 저격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었다. 아마 12년 전뿐만 아니라 24년 전, 36년 전의 저격에 관한 자료까지 뽑아 들여다보며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리라. 남자는 그가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아닐까 싶어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곧, 아까 전 그가 불과 12년 전의 기억, 자신에게는 생생하기만 한 그날의 일조차 기억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안심하면서도 한편으론 서글퍼졌다.
언젠가 그는 손자가 어째서 할아버지는 12년 전, 24년 전, 36년 전의 이야기만 하냐고 물어 놀란 적이 있었다. 그는 내가 정말로 그랬던가 싶어 기억을 더듬어 보았는데, 그 자신이 느끼기에도 놀라우리만치 그의 기억은 항상 12년 주기의 당시의 언저리만 맴돌고 있었다. 심지어 자기가 손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그날의 기억조차 그는 끄집어 낼 수 없었다. 그날 그는 젊은 시절부터 이따금 써 왔던 일기를 모조리 꺼내 읽어보았다. 기록된 날짜는 매년 그의 ‘저격 기념일’을 전후로 며칠간에 불과했고, 그나마 12년 전, 24년 전, 36년 전의 각 해에는 꾸준히 쓴 듯했다. 내용은 대부분 저격에 관한 것이었다. 저격수로서의 고뇌, 불안, 긴장, 부담, 회의……. 그리고 그 감정들에서 비롯된 끝없는 단상들과 그것과 관련된 기록들, 주변인들의 말들……. 같은 날짜만을 중심으로 점점이 뿌려졌다가 희미해지기를 반복하는 그의 지난 삶의 기록들.
그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기록된 하나의 정신병력(精神病歷)처럼 보였다.
그에게 있어 12년 단위로 찾아오는 순간을 맞았던 인생과 나머지 세월 동안의 인생은 완전히 분리되고 단절되어, 흡사 다른 시공에서의 각각의 삶같이 느껴졌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이 다른 이들과 다른 시공간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연속되는 시공간 위에서 살아가는 다른 이들로부터 철저히 유리된, 완벽하게 고립된 12년 주기의 자기만의 공간에서.
그러다 문뜩, 그는 자기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자는 화면에 떠오른 행성을, 언제나 조용한 그 둥근 별을 바라보았다.
저 별 어딘가에, 이 우주에서 나와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는 유일한 존재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그를 바라보듯이 그도 나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카운터가 ‘제로(0)’를 가리키고 나서 한참 후에,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남자의 쇠약해진 몸이 장려하면서도 살벌한 모양의 거대한 기계가 행한 한 차례의 격심한 딸꾹질에 무력하게 휩쓸려 다녔다. 흉골을 모조리 으스러뜨릴 것 같은 통증이 현기증의 아득함에 실려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와중에 그는 생각했다.
제발 죽지 말아줘.
남자는 자신의 형편없고, 줄곧 희박한 확률의 요행에만 의지해 온 저격을 이때만큼 위협적인 것으로 느낀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저격이, 이제껏 늘 그래왔듯이 표적에서 멀리 빗나가기를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그런 그가 총을 쏘기 전 자신이 본 행성의 모습이 이제껏 자기가 봐 온 그것과 조금 다르지 않았나 의심하게 된 것은, 잠자리에 눕고 나서였다.


그가 자신의 유일한 친구를 향해 총을 쏜 그날, 아니 그해에, 그들로부터의 공격은 없었다. 그러나 지구인들은 안심하기는커녕 새삼 미적지근한 불안감에 시달리며 한 해를 보냈다. 총탄이 언제 날아들지 몰랐기 때문이다. 이 예측 불가능한 위험에 대한 두려움은 어쩌면 다음 공격이 있기까지 11년간 지속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구방위군은 ‘Bull G1644+57’에 대한 관측 결과, 비록 12년 전의 모습일 테지만 아무튼 어떠한 변화가 분명히 감지되었다고 발표했다. 아직 무어라 말하긴 힘드나 어쩌면 중대한 변화일지도 모른다고 그들은 부연했다. 그러면서 지난 세월 동안 철저히 대비하여 온 만큼 설사 포격이 있다고 해도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호언했다.
진정 효과는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구인들이 뭔가 효과적인 대비책을 세웠다거나 그러고자 노력했던 것도 아니다. 그들은 특유의 호들갑을 떨기는 했으나, 이제까지처럼 똑같이 살았다. 언제 있을지 모를, 그것도 있기나 할지 모를 단 한 번의 치명적인 위험과 이제껏 이룩한 자기들의 삶을 맞바꾸고 싶지 않았으므로. 다만 그들은 마음 한구석에 막연한, 깜부기불 같은 불안감을 지니고 있었을 뿐이다.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들에 의해 외계의 적으로부터의 공격이 중단된 이유에 대한 지루한 논쟁과 예측이 오가는 가운데, 마침내 남자는 다섯 번째 저격의 날을 맞았다.
어느덧 일흔이 다 된 그는 한껏 긴장하여 스페이스건의 조준석에 앉았다. 화면에 낯선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까지 함께 해 왔던 사격통제관리담당관이 은퇴하고 새로운 담당자가 온 것이다. 다들 쉬쉬했지만, 전 담당관이 암에 걸렸다는 얘기가 돌았다.
실은 그도 이해에 새로운 저격수에게 임무를 넘길 예정이었다. 그러나 지난 저격 이후 그들의 공격이 없었던 까닭에 예정은 변경되었다. 이임(離任)은 무제한 연기되었고, 유사시에, 그들의 공격이 재개될 시에 곧바로 그가 응사하기로 한 것이 그대로 세월만 질질 끌었다. 결국 백발이 성성해지고 비좁은 조준석 안으로 뻣뻣해진 몸을 구겨 넣기도 힘겹게 된 그가 다시 ‘이날’을 맞아 기어이 그 딱딱한 의자 위로 몸을 밀어 넣게 되었다.
통제실의 모두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나이든 남자와 일체가 된, 이제는 골동품이 돼 버린 스페이스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하루 종일 기다렸고, 남자도 기다렸다.
남자는 내심 바라고 있었다. 저 우주 너머의 또 다른 자신이 제발 방아쇠를 당겨주기를.
지난 12년간 그는 이전 같은 정신병적인 고립감에 휩싸여 살지는 않았다. 그들의 포격이 없었던 까닭이지만, 일반인의 관점에서 봤을 때 그것은 결코 근본적인 탈출이나 치유라고 할 수 없었다. 그가 느끼기에도 단지 확실했던 경계가 약간 불분명해진 정도였다. 마치 물감이 번지듯이.
그것은 그에게 더 큰 고독감을 안겨 주었다. 네 번째 저격의 날 이후 12년의 세월, 그간 그를 노년으로 훌쩍 접어들게 만든 그 짧지 않은 세월 동안 고독은 경계를 잃고 점차 확대되어 어느 순간 그를 분리가 아닌, 세상의 이면에 가득히 번져 존재하면서도 그것에는 속하지 않는, 반투명한 무채색의 존재로 만들었다. 유백유리 벽에 갇혀 있던 지난날의 자기기만적인 우수(憂愁)는 용해된 색채에 실려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이제 그는 잿빛 기운 감도는 반투명한 장막 아래서 그 위에 비쳐드는 세상을 바라보며, 하얗게 불탄 채 얼어붙은 온갖 열의의 재 가운데 묻힌 듯한 지극한 외로움에 떨고 있었다. 더욱이 자신의 유일한 친구라고 믿고 있던 이마저 잃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한층 그를 고독하게 만들었다.
그날 남자는 이제까지보다 세 배나 두꺼운 방격(防擊) 가슴받이를 걸치고 사격 준비에 임했다.
그날 또한 그들로부터의 포격은 없었고, 그도 발포하지 않았다. 그가 화면을 통해 본 행성은, 그의 착각인지는 몰라도 어쩐지 전보다 황폐해 보였다.
그는 가슴 한쪽이 아릿해짐을 느꼈다.
마침내 남자는 스페이스건에서 내려왔다. 그의 나이를 고려하여 간간이 허용됐던 잠깐의 휴식 시간을 제외하고 열다섯 시간만에 내려오는 것이었다.
몇 시간 뒤, 지구방위군의 공식 발표가 있었다. ‘외계로부터의 위협’이 종식되었음을 알리는 발표였다.


다시 12년이 흘렀다.
한때 인류를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고는 해도, 12년의 세월이 더 지나는 동안 그 ‘위협’은 분명 존재하기는 했으나 공포를 각인시킬 만큼 뚜렷한 형태를 띠지는 못한 채였다. 그렇기에 그것들은, 한때의 환영에 불과했을 뿐이며 우행(愚行)에 지나지 않았다는 조소를 은연중에 띤 채 사람들의 기억에서 엷어져 가기 시작했다.
남자에게 있어 그것은 기회였다. 유리된 시공간의 벽을 허물고 뛰어넘어, 혹은 장막을 찢어내고 뛰쳐나가 아마도 그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공유하고 있을 일상으로 돌아갈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그는 결국 실패했다. 이미 완연한 노인이 된 그와 같은 이들에게 ‘현재’란 오직 지난 시간, 지난날의 기억과 추억으로써 구축되고 유지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자신만의 시공간이 와해된 이래 그는 과거의 기억이 거의 남지 않은, 희미하게만 남아 있는 상태의 되찾아든 유년기와 같은 삶을 새로이 시작하고자 노력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그가 속하지 않았던 과거의 시공간이, 이미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진 그 부서진 파편들이 아직도 ‘기억’이라는 형태로 그의 주변인들에게, 그와 마찬가지로 다 시든 추억을 양식으로 삼아 살아가는 그들의 머릿속에 부서진 그대로 오롯이 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 누구도, 그가 12년 주기의 삶 속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다시, 12년의 세월이 흘렀다.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와 함께 살면서 결코 단 한 번도 그의 고독을 공감하거나, 분담하거나, 공유할 수 없었던 그의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지 6년째 되는 해였다.
95세의 남자는 아주 긴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뜻밖으로 짧아질지 모를, 그러나 그로써 또 다른 영원한 여행의 출발로 이어질지 모를 그런 여행을.
그는 다시 한 번 그 사막으로, 자기 생애의 기억들이 점점이 구심을 이루고 있는 그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커다란 총 대신, 거대한 우주선 발사장이 있었다.
우주선은 남자를 태운 채 푸른 하늘을 향해 쏘아 올려졌다. 적요한 폭풍을 일으키며 발사된 그것은 이내 푸른 하늘을 지나, 검은 공간을 꿰뚫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우주선은 오랜 시간 ‘그들’의 기술을 연구한 결과 태어난 것이었다. 그것은 남자가 보았던, 아니 보아 왔던 그 별을 향하여, 자신의 기원을 향하여 나아간다. 12광년의 거리를 지나서.
“영감님, 당직 승무원만 빼고 다들 동면(冬眠)에 들 건데, 어쩌실래요?”
선장이 남자에게 물었다.
“아니…, 난 됐네.”
“그러다 가기도 전에 돌아가시면 어쩌시려구요? 그렇게나 가고 싶어 하셨잖아요.”
“쓸데없는 걱정 안 해도 돼.”
남자의 말에 선장은 발끈하여 뭐라고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당직 승무원과 노인을 뺀 모두가 동면에 들어갔다. 남자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밤의 정적에 귀 기울이며, 조그맣고 둥그런 창을 통해 멀어져가는 지구를 바라보았다. 푸른 별은 이내 쏜살같이 사라졌고, 이윽고 그는 영원 같기만 한 침묵 가운데 놓여졌다.


2년이 흐르고 44일이 더 지났을 때, 우주선은 ‘Bull G1644+57’에 다다랐다. 동면에서 깨어난 선장은 남자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눈치였다.
상공을 선회하며 내려다본 행성의 모습을 보고 그들은 그 흔한 탄식조차 내뱉지 않았다. 분명 지구의 그것보다 훨씬 더 찬란했을 문명은 흡사 어느 한순간에, 순식간에 삭아버린 것처럼 보였다. 아직도 그 모든 것들이 멸망의 순간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그것들은 마치 오랜 세월 쌓여 잿빛으로 굳은 먼지의 성채처럼 금방이라도 사그라질 듯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탐사대원들에 의한 조사가 끝난 후, 남자는 그 별에 남기로 했다. 그는 그곳에서 삶의 마지막을 보낼 작정이었다. 아무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그들은 남자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품을 얼마간 남기고서 그곳을 떠났다.


40일 동안 황폐한 도시의 사막을 헤맨 끝에, 남자는 그 이질적 문명의 낯선 표현형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낯익은 무언가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총기였다.
기다란 총신을 우주를 향해 뻗고 있는 위태로운 살상의 기계. 수차례 자신의 손에 의해 위험한 탄환을 내뱉었던 그것과 닮은 듯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모습을 지닌 그것…….
남자는 멀리서 그것을 지켜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금방이라도 부서져 산산이 흩어질 듯한 폐허들을 지나, 남자는 그것의 조준석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리고 거기에 앉아 있는, 또 하나의 자신을 보았다.
그는 아직도 저 12광년 너머의 자신을 겨누고 있었다. 아니, 아직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왈칵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잿빛의 그를 손으로 건드리자, 그는 먼지인지 쇳가루인지 모를 가루로 화해 무너져 내렸다.
기어이 남자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거기 그렇게 주저앉아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냈는지 남자는 알지 못했다.
남자는 노쇠한 몸을 일으켜, 또 다른 자신이 앉아 있던 그 자리에 앉아 보았다. 조준경에 얼굴을 가져가 보았다.
검은 화면 가운데, 푸른 별이 떠올라 있었다.
남자는 그것에서 눈을 떼었다가, 다시 갖다 대었다.
그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신의 고독했던 삶을 닮은 그 별을.

12년 전의 지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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