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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영구평화론

2012.02.24 23:1902.24





바다 끝 남쪽의 마국의 왕인 마왕은 골치가 아팠습니다.

세계정복을 위해 마족을 규합해 마국을 세우고 그 국왕이 된 지도 어언 천 오백 년. 마국
의 건국과 함께 시작된 1차 마왕전쟁에서 마왕과 마왕군은 승승장구했습니다. 강대한 인간
의 왕국 시드로니아를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병합하는가 하면 그 외에도 수많은 왕국과 제
후국들을 쑥밭으로 만들고 봉신으로 삼기도 했죠. 그런 마왕의 군대 앞에 인류의 명운은 금
세 다할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하나하나가 강력한 마족은 전쟁을 몰랐습니다. 특별한 전술도 없이 끊임없이 전진,
전진하는 것만으로 세력을 넓혀가던 마왕군은 일순간 어떤 점에 도달했습니다. 아니, 그때
는 그런 점이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죠. 그 점의 이름은 공세종말점. 아무리 강력한 마왕군
이라도 보급은 필요했습니다. 길어진 보급선과 모자란 물자, 그리고 때마침 준동하기 시작
한 게릴라 탓에 쌓여버린 피곤 탓에 마왕은 1차 마왕전쟁을 시드로니아를 병탄하는 데에서
멈춰야만 했습니다. 인간의 맹주인 시드로니아가 멸망했으니, 다른 나라들은 언제든 집어삼
킬 수 있다고 생각한 마왕은 그 뒤로 백 년 동안 내정에 힘써 국력을 기르고 세계를 정복하
기 위한 두 번째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나약한 인간 군대 따위야 첫째 전쟁 때보다 강력해
진 마왕군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지요.



막을 수 있었습니다.

막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 백 년 동안 인간들은 국제연합이니 국제방위군이니 하는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단일 지휘체계 아래서 국적보다 인류 전체에 더 신경을 쓰는 조직이고 군대
였지요. 수많은 인간 왕국의 영토가 재나 먼지로 변해버렸지만 멸망한 나라는 없었습니다.
민간인은 조직적으로 후퇴하며 청야했고, 각국의 전쟁 지도부는 유사시 계승 서열이 정교하
게 짜여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인간의 군대가 야전에서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던 1차 마왕전쟁 때와는 달리, 국
제방위군은 전번의 전쟁 때에 비해 반 정도밖에 진격하지 못한 채로 보급이 끊기고 고립된
마왕군의 주력을 궤멸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인간들이 센풀로스의 승리라고 부르는 이 전
투에서 인간의 군대도 반 이상이 죽거나 다쳤지만 마왕군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아
니, 오히려 더 심각했습니다. 마족은 수명이 긴 만큼 수도 적은데다가 세대교체 주기도 무
척 길거든요. 이번에도 마왕은 군대를 물러야만 했습니다. 2차 마왕전쟁은 이렇게 끝났습니
다.

그리고 천 삼백년이나 되는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기나긴 세월동안 제 3차 마왕전쟁은 일
어나지 않았습니다. 마왕이 세계정복의 야욕을 포기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강력한 마족
들의 수가 줄어든 상황이었지만 마왕은 아직도 국제연합보다 큰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구 시드로니아 왕국령과 그 땅 위의 인간들이었죠. 마왕은 세계 인구의 반이나 되는
국력으로 끊임없이 국제연합과 작은 전쟁을 치러 왔습니다. 마족들의 다음 세대가 전면에
부상하기 전까지 인간 왕국들의 힘을 깎아 두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마족들의 다음 세대가 싸울 수 있을 만큼 자랐고, 때마침 인간 왕국들은 유
례없는 내분에 휩싸였습니다. 요지에 위치한 약소국인 이베스 공국의 계승권 문제로 두 강
대국이 전쟁을 시작했고, 인류 세계가 완전히 둘로 나뉘어 인간끼리의 전쟁을 시작했던 것
이죠. 마왕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세 번째 마왕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인간들의 전쟁도
이제껏 유례없는 규모였지만 마왕의 군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병력만 백만
이 넘는 수였습니다. 마왕은 이번에야말로 세계를 정복하리라 다짐했습니다.



···만.

아무리 많은 군대라도 기관총과 대포와 전차는 당해낼 수가 없죠. 어느새 과학기술을 눈부
시게 발전시킨 인간의 군대 앞에 마왕군은 상대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3차 마왕전쟁의 첫
전투이자 유일하게 전투라고 부를 수 있는 전투인 쇼에즈 전투에서 마왕군은 단 10분만에
갈려 나갔습니다. 국제방위군과의 전투도 아니라, 계승전쟁의 전장이 된 약소국 이베스 공
국군 부대와의 전투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마왕군의 백만 대군이 사라지자 인간들은 계승
전쟁을 치르던 것이 언제였냐는 듯 일치단결해 국제방위군을 결성해 전차와 전투기를 앞세
우고 구 시드로니아 왕국령으로 진격했습니다. 그리고 구 시드로니아 왕국령 곳곳에서 봉기
가 일어나 마왕의 세력을 축출하고, 축출하고, 축출하기를 한 달. 제 3차 마왕전쟁이 일어난
지 한 달 만에, 그리고 마왕이 세계정복의 야욕을 드러낸 지 1400년만에, 마왕의 세력은 인
간의 생활권 안에서 완전히 축출돼 바다 끝 마국에 국한되었습니다.



이것이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의 일입니다. 그리고 지금, 마국은 국제연합에 의해 강제로
개항당해 인간의 관광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와아아! 못된 마왕이다!”

“죽어라, 마왕아!”

마왕을 둘러싼 어린이들이 몽둥이나 벽돌, 쇠파이프 따위를 들고 마왕을 마구 두들겨 패고
있었습니다. 한때 세계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던 마왕인데, 인간 꼬맹이들에게 폭행당
하면서 사진이나 찍고 있어야 하는 현실에 마왕은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습니다. 다 때려엎
고 이 꼬맹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국제방위군이 당장 마왕에게 핵
미사일을 선물해 줄 테지요.

“허허허···.”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도구가 도구인지라 인간이 맞는다면 (비록 아이들이 휘두르는 물건
이기는 해도)어디가 부러져도 제대로 부러졌겠지만 마족 중에서도 가장 강한 마왕의 몸은
무척이나 튼튼했습니다.

“어? 마왕 운다!”

“마왕이 울었다! 내가 이겼다! 와아아!”

“엄마! 나 마왕 이겼어!”

하지만 마음은 그리 튼튼하지 못했나 봅니다. 마왕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을 본 아이들은
인간의 승리를 자축하며 일부는 마왕을 놀리며 가일층 모질게 매질하고, 일부는 그 모습을
사진기에 담고 있던 제 부모에게 달려가 마왕을 해치웠다고 재잘대며 자랑을 해 댔습니다.
마왕을 옆에서 지켜보던 국제방위사령부 점령군 고문관이지 마왕파크의 매니저 국제방위군
대위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마왕은 대위의 시선에서 깊은 굴욕감을 느꼈습니다.

“···.”

“···.”

둘은 그렇게 한동안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마왕은 결국 참지 못하고 30살이나 되었
을까 하는 인간 대위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말았습니다. 대위도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돌렸
습니다. 아무리 전쟁범죄자에 마왕이라고는 해도 일단은 한 나라의 왕인데···. 서럽게 눈물
을 흘리는 마왕의 모습을 본 인간의 어린이들도 양심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무언가가 외
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야, 니가 너무 쎄게 때려서 마왕 울잖아.”

“나 쎄게 안 때렸어. 살살 때렸어.”

“거짓말 하지 마. 니가 때리고 나서 울었잖아.”

“마왕 불쌍하다···.”

마왕은 불쌍하지 않았습니다. 세 차례의 마왕전쟁에서 모두 패했어도, 인간에 의해 마국이
강제 개항당했어도, 마왕성이 마왕파크로 전락해 꼬맹이들에게 아무 말 못하고 얻어맞고 있
을 때에도, 마왕은 불쌍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린이들이 마왕을 보고 불쌍하다고 말했
을 때, 마왕은 비로소 불쌍해졌습니다. 그 자리에 머리를 감싸고 쭈그려 앉아 불쌍한 자세
를 잡은 마왕에게 마왕을 울린 아이가 다가왔습니다.

“마왕아. 많이 아파?”

“···.”

“미안해···.”

“···.”

하지만 마왕은 대답이 없었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불쌍한 마왕이 될 것 같았거든요. 지금
도 충분히 불쌍하지만. 사과하는 꼬마와 말 없는 마왕. 그 주변으로는 뻘쭘한 공기만이 퍼
져나갔습니다. 보다 못한 대위가 말했습니다.

“얘들아. 마왕 점심시간이다.”

마왕에게는 거의 구원과도 같았지요.

“마왕이 배가 많이 고픈가봐. 평소에는 더 세게 맞아도 안 우는데.”

“정말요? 마왕아, 배 많이 고파?”

“그럼. 마왕이 배 안 고팠으면 얼마나 튼튼한데? 자. 자. 마왕 밥 먹게 보내 주자. 밥을 먹
어야 이따가 우리 어린이들이랑 놀 때 더 잘 얻어맞지?”

“···.”

그러니까, 그나마 말입니다.

“그럼 마왕 괜찮아요?”

“#$#$^#$#$”

“#!%%$&#%&!#$&*^@#”

대위와 꼬맹이들이 무어라고 떠들었지만, 마왕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탓에 아이들을 모
두 떠나보낸 대위가 마왕에게 꼬맹이들 갔다고 말을 하는데도 마왕은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다가 대위가 마왕의 어깨를 움켜잡고 흔들었을 때에야 고개를 들었습니다.

“마왕님.”

“···.”

“애들 갔으니까 식사라도 하시고 좀 쉬고 오세요.”

그 말에 마왕은 하늘을 올려다 봤습니다. 새하얀 태양이 남쪽 하늘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
습니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매니저의 자비 덕에 마왕은 조금이나마 추가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됐습니다. 시커먼 눈물 자국으로 예쁜 얼굴을 더럽힌 마왕은 비척비척 일어서
서 꾸벅 인사하고 터덜터덜 걸어 직원용 화장실로 향했습니다.



-



“마왕님. 어디 갔었어요? 한참 찾았네.”

마왕성 연회장을 개조한 직원 식당 한쪽 구석에서 깨작거리던 마왕에게 마왕의 충실한 부
하 아큐브가 다가와 말을 걸었습니다. 마왕이 아큐브를 한 번 흘기고는 다시 식판에 고개를
쳐박고 입을 우물거렸습니다.

“뭐 하러 왔어?”

음식을 입에 넣은 채 마왕이 퉁명스레 물었습니다. 아큐브가 마왕 맞은편 자리의 의자를
끌어다 앉고는 고개를 푹 숙여 마왕에게 소근거렸습니다.

“세계정복요.”

“뭐?”

“세계정복 말이에요. 방법을 생각해 봤어요.”

아큐브의 말에 마왕의 눈에 생기가 돌았습니다. 입 안에 든 음식을 서둘러 삼키다 사래가
들린 마왕이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숨을 골랐습니다. 아큐브는 숙였던 허리를 꼿꼿이 펴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마왕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마왕도 허리를 펴고 말했습니다.

“얼른 말 해 봐.”

“그러니까···.”



-



마왕은 웃고 있었습니다. 3차 마왕전쟁이 마왕의 패배로 끝난 이후로 백 년 만에 지은 웃
음이었습니다. 마왕의 비원인 세계정복이 천 오백 년 만에 거의 이루어질 수 있게 됐으니까
요. 마왕의 충직한 부하 아큐브의 계획 덕이었습니다.

마왕은 인간의 공주를, 그중에서도 강대국의 공주를, 그중에서도 왕위 계승 서열이 높은
공주들을 납치한 뒤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제 자신의 장인어른들이 죽기만을 기다리면 됩
니다. 장인어른들이 죽고 나면 마왕의 아내가 된 공주들이 국왕이 될 테고, 그러면 마왕은
합법적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인간들은 거세게 반발했고, 각국 왕실과 인민들의 고발로 인해 마왕은 국제사법재
판소에 제소되어 피고인으로 소환되었습니다. 그리고 원고인 국제연합 법무관은 마왕의 불
법적인 공주의 납치와 강제 혼인을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재판장을 맡은 국제사법재판소장
이 주요 참고인인 힌델로스 공주 이스피나에게 물었습니다.

“참고인은 피고에 의해 불법적으로 납치되어 강제로 혼인한 사실을 인정합니까?”

마왕은 자신이 있었습니다. 1,500년이 넘도록 갈고 닦은 테크닉으로 공주는 조교가 끝나
있었으니까요. 공주가 짧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법정 안이 크게 술렁였습니다. 재판장은 의사봉을 마구 두들기며 소란을 진정시키려고 노
력했지만 결국 유별나게 소란스럽게 떠드는 참관인 한 명을 퇴장시켜야만 했습니다. 간신히
진정된 법정에서 재판장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자의로 마왕성에 가서 자의로 혼인에 동의했습니까?”

“마왕성까지의 이동에는 다소간의 분쟁이 있었습니다만 피고와 합의한 바이며, 혼인은 저
의 자발적인 동의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원고의 표정이 급속도로 일그러졌습니다.

“법정에서의 거짓 증언은 위증죄에 해당하는 중범죄입니다. 거짓이 없습니까?”

“물론입니다. 제 증언은 모두 사실입니다.”

재판장이 잠시 고개를 숙이고 숨을 고르다가 말했습니다.

“마왕이 이스피나 공주를 납치해 강제로 혼인했다는 원고측 주장은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하, 하지만 마왕의 세뇌마법에 의한 증언일 수도 있습니다!”

재판장이 마왕에게 시선을 돌리자 마왕은 섬뜩하리만치 아름다운 입술을 비틀며 말했습니
다.

“사실이 아닙니다. 국제연합 측 의료진에 의한 정신감정서를 참고자료로 제출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변호인에게 꽤 두툼한 서류봉투를 건넸고, 마왕측 변호인인 아큐브가 그
봉투를 재판장에게 전달했습니다. 재판장은 날카로운 눈으로 봉투를 가져온 아큐브와 마왕
을 한 번씩 노려본 뒤 봉투 안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 한 장 한 장 넘겼습니다. 고요한 법정
안에 종이 넘기는 소리가 크게 울려퍼졌습니다. 그 외에는 이따금씩 참관석에서 침 삼키는
소리만 나고 있었고··· 꽤 긴 시간 뒤, 서류철을 다 넘긴 재판장이 탁 하고 서류를 내려놓는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거기로 쏠렸습니다. 재판장이 입을 열었습니다.

“참고인이 세뇌에 의해 위증했다는 원고측 주장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재수없는 미소를 짓고 있던 마왕의 다문 입술이 이제는 쭉 찢어져 입을 벌리면 사람 머리
통도 집어삼킬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웃음은 판결문 작성을 위해 휴회하는
동안에도 그치질 않았고, 판결문이 낭독되기 시작하자 오히려 더욱 커졌습니다.

판결문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전략) 따라서 피고 마왕과 힌델로스 왕국 공주 겸 왕위계승자 이스피나 사이의 혼인
관계에는 어떠한 불법이나 강요에 의한 요소도 없다고 인정되므로 피고의 혼인관계는 승인
되며···(중략) 또한 이스피나 공주의 계승권 유지는 혼인한 왕실 여성의 왕위계승권을 보장
하는 힌델로스 왕국의 국내법과 기혼 여성의 상속권을 보장하는 국제연합 헌장의 정신 모두
에 합치되므로···(중략) 이에 본 법정은 원고측의 소송을 기각하는 바이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나머지 세 왕국의 공주와의 혼인의 효력과 왕위계승권에 대한 재판
에서도 판결은 동일했습니다.



-



마왕은 합법적으로 인간 왕국 중 네 강대국의 왕위계승권을 획득했습니다. 이제 마왕은 그
네 왕국의 국왕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됐습니다. 물론 인간 왕국들이 아무 대응을
않은 건 아니었습니다. 최강대국인 힌델로스 왕국 이하 마왕의 장인 나라 넷은 부랴부랴 왕
실전범을 개정해 마족과 혼인한 여성의 왕위계승권을 박탈하려 했지만 이번엔 오히려 마왕
이 그 네 왕국을 제소했습니다. 이와 같은 왕실전범 개정은 위헌적인 소급입법이며 마족에
대한 종족차별이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국내법과 국제법의 빈틈을 집요하게 노린 아큐브의
논리 탓에 네 왕국의 노력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마왕은 기타 국가의 공주들을 똑같은 방법으로 납치하고 결혼한 후 혼인의 효력을
인정받았습니다. 당연히 공주를 납치당한 국가들은 소송을 걸었지만, 당연히 모두 패소했습
니다. 전 세계 왕위계승권의 삼분의 일이 마왕에게 넘어간 뒤에야 각국은 전범국가(마국 하
나 뿐입니다) 공민과 혼인한 왕실 인사의 계승권을 박탈하도록 하는 새로운 계승법을 제정
했습니다만, 이제는 의미가 없었습니다. 말이 세계 왕위계승권의 삼분의 일이지, 마왕이 계
승권을 차지한 나라들의 국력과 군사력은 전 세계 국력과 군사력의 80%를 훌쩍 넘었으니
까요. 이제 마왕은 천 오백 년의 비원, 세계정복에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까웠습니다.



-



힌델로스 왕국의 수도에 위치한 국제연합 본부에서는 국국의 국제연합 전권대사들의 회의
가 벌써 한 달이나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탓에 국제사회에서 각국의 주권을 대표하는 사
람임에도 불구하고 전권대사들은 제대로 쉬지도 못해 머리는 푸석푸석하고 얼굴은 부르튼데
다가 눈은 차라리 흰자위와 검은자위가 아니라 붉은자위와 검은 눈꺼풀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야 어울릴 지경이었습니다. 품위 유지의 의무가 있는 전권대사였기에 다른 때였다면 대사
직에서 경질될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그 누구도 전권대사들의 품위 문
제를 걸고 넘어지지 못했습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구두에 난 흠집, 재킷에 묻은 보풀, 유행
이 지난 넥타이, 촌스러운 휴대전화 벨소리나 심지어는 모공이 넓다 따위의 트집을 잡아 상
대국 대사의 품위 문제로 시비를 걸기 일쑤이던, 그래서 세계 패션 발달에 기여한 바가 다
대한 전통적인 두 앙숙 국가인 힌델로스와 펠로니카의 대사들도요.

이번 안건은 그렇게나 중요했습니다.  마왕의 위협이 이토록 강력했던 적은 없었으니까요.
두 차례의 마왕전쟁은 인류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였지만 인류는 극복했습니다. 3차 마왕
전쟁은 아예 논외입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습니다. 모든 인간 왕국의 멸망까지는 앞으로
길어야 30년도 남지 않았습니다. 마왕에게 계승권을 헌납해 버린 10대 왕국의 국왕 중 가
장 젊은 왕도 벌써 40살이나 된 마당이니 말이죠.

기나긴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여러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하고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마왕을 독살한다? 마족의 예민한 미각과 후각은 음식
에 섞인 독을 쉽게 간파해 낼 겁니다. 마족의 감각을 속일 수 있는 미량의 독이라면 마왕의
건강에 어떠한 위해도 끼칠 수 없을 테고요. 군대를 파견할 수도 없었습니다. 허약한 하급
마족이라면 모를까, 마왕처럼 강력한 마족을 죽이려면 핵 정도는 필요했습니다. 그렇다고
핵을 쏠 수도 없었습니다. 핵 사용 금지 조약에 가입할 수 없는 전범국가인 마국이니 마왕
성에다 핵을 쏘는 것 자체에는 아무 문제될 거리가 없었지만 마왕성에는 마왕의 아내가 된
각 왕국의 제 1 계승권자인 공주들이 있었습니다. 왕족에 대한 공격은 반역과 같은 뜻입니
다. 하물며 핵 공격인데 더 말 할 필요가 있을까요? 게다가 핵 공격으로 마왕과 함께 왕위
계승권자가 죽어버리고 난 뒤에는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왕족들의 내전이 이어질 게 뻔했습
니다. 세계 국력의 80%가 내전이라는 밑 빠진 독 안으로 빨려들어갈 테지요.

그래서 국제연합은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해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



“···군사분과위원장님 보고가 있겠습니다.”

다른 전권대사들과 마찬가지로 눈썹 아래부터 입술 위까지 시커멓게 타들어간, 국제연합
주재 힌델로스 전권대사 겸 국제연합 군사분과위원회 위원장이 연단에 올라섰습니다. 위원
장의 손에 들린 보고서 뭉치는 두텁기 그지없었지만 그 내용을 줄줄이 읽을 필요는 없었습
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거든요.

위원장은 몇 시간만 더 깨어 있는다면 픽 하고 쓰러져 숨을 놓을 것만 같아 보이는 세계
각국의 대사들을 쭉 둘러보고 심호흡을 했습니다. 고요한 회의장 안에 마이크로 증폭되어
크게 울려퍼지는 위원장의 심호흡 소리는 한숨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다들 알고 계시리라 보입니다만···.”

위원장은 헛기침으로 바싹 마른 목구멍에 습기를 조금 더해주고 말을 이었습니다.

“특수부대에 의한 각국 왕위계승권자 구출 작전은 실패했습니다. 작전경과는 보고서 내용
을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특수부대는 동화에 나오는 용자 같은 게 아니었습니다. 특수부대를 기습적으로 투입해 공
주들을 구출한 뒤 핵을 날려 마왕을 없애버리겠다는 대담무쌍한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
았습니다. 마족의 감각 중 예민한 것은 미각과 후각만이 아니었던 것이죠. 인류의 마지막
희망은 마족 경비병들의 예민한 눈에 발각돼 작전지역에 투입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모두 생포당해 약식 군사재판에서 처형당했습니다.

위원장의 짧은 보고가 끝난 뒤의 정적을 깬 것은 이베스 공국의 전권대사였습니다. 대사는
자신의 의자에 걸쳐두었던 외투를 몸에 걸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말 없이 회
의장을 빠져나갔습니다. 대사 추방까지 각오해야 할 무례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습니다만
사무총장은 물론이고 대사도, 참관인도, 그 어느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따라 하나둘씩 자리를 떴습니다. 빈 의석이 사람이 앉은 의석보다 많아졌을 때 쯤 사무총장
이 의장석에서 입을 열었습니다.

“···.”

시체가 그 정도 크기로 말할 수 있을까 싶은 목소리였습니다. 군사분과위원장이 사무총장
의 입 모양을 읽고 대답했습니다.

“아무리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본다고 해도, 이젠 남은 수가 없잖습니까, 사무총장님.”

공주들이 납치되고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패소한 이후 각국 국왕들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
되었습니다. 힌델로스 국왕은 길어야 5년이라고 전 세계 사람들이 쑤군대고 있을 정도지요.

“이제 인류는 5년 뒤면 멸망할 겁니다.”

“아니, 10년이오.”

사무총장이 위원장의 말을 바로 되받았습니다.

“귀국 국력으로 세계정복은 무리지. 우리 펠로니카 정도나 되면 몰라도.”

“펠로니카 왕국 재래식 군사력은 핵개발이다 뭐다 해서 반토막 난 거 다 압니다.”

둘은 전통적인 앙숙 국가의 구성원 답게 유치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낄낄거렸습니다. 5년인
지 10년인지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사무총장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래, 위원장은 이제 뭘 할 생각이오?”

“글쎄요. 힌델로스-마국 연합왕국 외교관이 되지 않을까요?”

사무총장도 위원장도 피식 하고 웃었습니다. 말이 안 되는 소리였습니다. 마왕이 기존 국
가의 권력 시스템을 그대로 내버려 둘 리가 없었으니까요. 위원장도 그걸 알고 있으니 그저
허탈하게 웃을 뿐 방법이 없었습니다. 둘은 각기 연단과 의장석에 서서 서로에게 서 시선을
돌린 채로 명하니, 이제는 텅 비어버린 회의장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탓에 키마넬 아
툰 교수, 힌델로스 출신의 국제연합 비상대책회의의 참관인이자 세계 제일의 철학자가 의장
석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얼굴이 길고 눈이 찢어진 키마넬이 “사무총
장 각하.”하고 입을 열었을 때 두 사람이 화들짝 놀란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아, 아툰 교수님. 무슨 일입니까?”

“한참 전부터 발언을 요청했는데 신경을 못 쓰신 것 같더군요.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각
하께 발언권을 요청하려고 의장석까지 왔습니다.”

아툰의 입이 그렇게 말하고 굳게 닫혔습니다. 사무총장이 대답했습니다.

“발언권이라니. 회의는 이미 끝났는걸.”

“각하께서는 아직 휴회나 폐회를 선언하지 않으셨습니다. 법적으로, 회의는 진행중입니다.”

물론 그렇기야 하죠.

“그리고 실질적으로는 끝장났고.”

위원장이 퉁명스레 투덜거렸습니다. 사무총장이 위원장에게 끼어들지 말라고 핀잔을 준 뒤
키마넬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는 끝장났고.”

사무총장 딴에는 농담이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키마넬과 무표정한 얼굴로 말 없이 자신을 비난하는 위원장의 시선에 사무총장은 괜히 헛기
침을 몇 번 했습니다.

“험, 험. 게다가 회의가 끝나지 않았다 한들 우리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소.”

“존경하는 사무총장 각하.”

키마넬이 사무총장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방법이 있습니다.”

“어디 한 번 들어나 봅시다.”

“발언권을 주시겠습니까?”

키마엘 교수는 가느다란 눈을 반짝이며 사무총장에게 물었습니다. 듣는 사람도 없는데 그
런 절차가 필요하냐고 되묻는 사무총장이었지만 교수는 아직 법적으로 회의는 진행중이며,
따라서 합법적인 절차에 의해 발언권을 얻고 발언해야 한다고 강변했습니다. 결국 사무총장
은 교수에게 발언을 허락했고, 교수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켜진 마이크에 대고 발언했습
니다. 사무총장과 위원장, 교수. 이렇게 셋 뿐인 드넓은 회의장 안에 교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처음에는 시큰둥하던 둘이었지만 교수의 말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눈에는 생기
가 돌아왔습니다. 이윽고 발언이 끝났고, 이제 두 사람에게는 거지같은 몰골에 어울리지 않
는 활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사무총장이 품 속에서 전화기를 꺼내 꺼져 있던 전원
을 켜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 비서관인가? 아, 그래. 그래. 얼른 각국 전권대사들 전부 다시 소집시켜 주게. 뭐? 아
니야. 방법을 찾았어.”



-



그로부터 3년. 힌델로스 국왕 디모콜리 3세의 수명은 사람들의 생각보다 더욱 짧았습니다.
실의에 빠진 60살의 노인은 죽었고, 1주일간의 애도 기간을 가진 뒤 왕위는 마왕에게 넘어
갔습니다. 이제 대관식도 끝난 지금, 마왕은 마침내 세계의 양대 초강대국 중 하나인 힌델
로스의 왕위를 합법적으로 획득했습니다. 하지만 홀 안 왕좌 앞에 덩그러니 서 있는 마왕의
표정은 빈말로라도 밝다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왕은 자신의 대관식에 참관인으로 참석해
대관식의 주인공인 자신보다 더욱 큰 관심을 받고 있는 한 인간, 힌델로스 왕립 제1대학 철
학과 석좌교수인 키마넬 아툰 교수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거리가 가까웠다면 당장이라도
씹어먹을 것 같은 기세였습니다.

“교수님, 교수님께서 제안한 개헌과 대대적인 개각 조치가 마왕의 왕위계승을 노린 대응이
었다는 분석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주변도 시끄럽고 거리도 멀었지만 둘의 대화 내용은 마왕에게 또렷하게 들렸습니다. 기자
가 교수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며 물었습니다. 늙은 교수는 표정을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사실과 다릅니다. 저는 단지 세계의 평화와 지성 종족의 공영을 바라는 철학자로서 문명
의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한 제 나름의 노력을 한 것 뿐입니다.”

교수의 말을 들은 마왕은 머리 끝까지 피가 쏠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국왕이 죽
기 겨우 세 시간 전에 발표된 힌델로스 왕국에서의 개헌과 개각은 왕에게서 거의 모든 권력
을 빼앗아 갔습니다. 내정의 두 팔인 조각권과 입법권을 베어내고, 외교의 두 팔인 전쟁권
과 조약 체결권을 빼앗은 것이죠. 뿐만 아니라 거기에 더해 입법부와 사법부 모두가 국왕에
대한 탄핵소추권까지 얻고, 왕실전범의 폐기로 인해 국왕도 일반 법률의 지배를 받게 됐습
니다. 힌델로스 국내법에 의해 사형을 언도받을 수도 있게 된 것이죠. 마왕은 오히려 힌델
로스 왕국의 헌법이라는 감옥에 갇힌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교수님, 각계 각층에서 왕권의 제한이 어떤 점이 세계 평화와 관련이 있는지에 대
해 의문을 표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데요. 이 점에 대해서 해명해 주실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교수 주위로 몰려든 다른 기자들이 그에 동조하는 기색을 보였습니다. 교수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말했습니다.

“기왕의 정치체제, 즉 전통적인 군주정 체제에서는 전쟁이 매우 쉽게 일어납니다. 권력이
군주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군주의 결정을 제어할 수단이 없었습니다. 국가가 군주의
사유물처럼 취급되었으므로 군주는 거리낌 없이 전쟁을 결정하고 수행하도록 할 수 있었습
니다. 단적인 예가 기왕에 정당한 전쟁 사유로 승인되던 ‘왕실에 대한 모독’과 같은 것이죠.
하지만 이번 개헌을 통해 우리의 소중한 국가는 외국과의 분쟁을 군사력에 의지하기보다 국
제연합의 중재를 통해 해결하기를 더 바라게 될 것이라고 저는 감히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미 선진 각국은 헌법에 의해 보장된 권력의 분립 원칙을 지키는 공화정 체제였
는데요, 굳이 군주권을 사실상 완전히 박탈한 것은 다분히 새 힌델로스 국왕을 겨냥한 것이
아닙니까? 일각에서는 교수님을 ‘마왕의 마수로부터 세계를 구해낸 철학의 용자’라고까지
부르고 있습니다.”

젊은 기자가 곧바로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언뜻 마왕에 동조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전에
준비된 질문이었고 당연히 교수가 준비된 대답을 끌어내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교수는 여
전히 표정을 조금도 바꾸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이전까지 구시대적인 전쟁권과 외교권, 그리고 행정 및 입법권이 한 기관에 집중된 정부
형태는 사실상 인류 세계가 맞서 싸워야만 했던 적이라는 공포를 이용해 독재자가 절대권력
을 유지할 유용한 도구로 이용되어 왔습니다. 사실 그 인류의 적이라는 개념도 허상에 가까
웠다고 할 수 있지요. 제 3차 마왕전쟁 이후로 마왕과 마국은 더 이상 인류에게 위협이 되
지 않게 됐으니까요. 그리고 기왕의 공화정체를 언급하셨는데, 좋은 지적입니다만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요. 독재자의 전쟁 공포증 유발이 공화국적 이상을, 사회를 더더욱
풍요롭게 해 줄 기술의 발전과 자유로운 무역정신을 저해하고 있었다고 말입니다.”

교수는 침을 꼴깍 삼키고 말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갔습니다.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는 위협은 이제 단 하나도 남
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풍요로운 평화와 비참한 전쟁 중 어느 것이 좋은 것인지 알
며, 또한 더 좋은 것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이제 전쟁을 쉽게 일으키는, 자의적으로 철권을
휘둘러 대는 권력기구, 즉 전제적 군주정치의 시대는 갔습니다. 이로써 평화의 정신은 저해
받지 않으며 오래도록 수호될 것입니다. 또한···.”

마왕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홀 한가운데에 놓인 왕좌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앉을 때의
충격으로 머리에 쓴 순금 왕관이 위로 들썩였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떨어지지는 않았습니
다. 틀림없이 마왕이 홀 한가운데 있고 교수와 기자들이 가장자리에 있건만 마왕은 넓은 홀
의 구석진 곳에 움츠러든 채 쭈그리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왕의 귓가에 인간들이 떠드는 소리가 왱왱거렸습니다. 키마넬 아툰 교수는 평소에도 공
공연히 ‘인간의 이성은 그가 추구하는 사사로운 이익을 공공의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곤 했는데 지금 교수의 말이 바로 그랬습니다.

물론 힌델로스의 개헌으로 전쟁 없는 세계, 영구평화가 찾아올 수도 있었습니다. 세계 제
일의 철학자와 세계 제일의 국제법 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낸 세계 평화 청사진이니
까요. 하지만 그들의 발뺌에도 불구하고 이 개헌의 목적은 틀림없이 마왕의 권력을 말살시
키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왕이 계승권을 얻어낸 나라들에서만 이런 조치가
취해졌을 이유가 없지요. 마왕은 소리를 죽여 가며 신음소리를 냈습니다. 인간들이 내는 소
란에 거의 가려진 작은 소리였지만 감각이 예민한데다 스스로가 낸 소리이기까지 하니 마왕
에게는 또렷하게 들렸습니다. 마왕은 손으로 눈을 가렸습니다.

“···추가로 차차 주요 10대 강국 뿐만이 아닌 세계 모든 국가가 이와 같은 체제를 도입해
세계에 항구적인 평화가 이룩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램입니다.”

“그 말씀은 약소국에 체제 이식을 강요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외교적으로 큰 문제
가 될 수 있을 텐데요.”

“저로서는 답변해 드릴 수 없는 부분입니다. 저는 철학자이지 외교관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교수님···.”

마왕은 귀를 막고만 싶었지만 마족의 예민한 감각은 귓구멍을 막는 것으로는 소리를 차단
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마족이라는 것이 이토록 저주스러웠던 건 3차 마왕전쟁의 항복
조약에 서명할 때, 영원히 치욕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선고받았을 때 이후로 처음이
었습니다.

“마왕님.”

왕좌 위에 찌그러지다시피 앉아있는 마왕에게 누군가가 다가와 말했지만 마왕은 응대할 기
분이 아니었습니다. 마왕은 화를 누그러뜨리려 노력하며 상대를 정중하게 돌려보내려 했습
니다.

“인터뷰는 교수하고 하세요.”

“···마왕님.”

“···모르시나본데, 이젠 나도 법적으로 힌델로스 국민으로서 무분별한 언론에의 노출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습-.”

“저에요, 아큐브.”

마왕은 천천히 눈을 가린 손을 떼고 고개를 들었습니다.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힘없이
자신의 충실한 부하 아큐브를 쳐다보는 마왕의 눈빛에 아큐브는 안쓰러워하며 슬쩍 고개를
돌렸습니다. 마왕은 다시 손으로 눈두덩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왜 왔어?”

“세계정복··· 말인데요···.”

“···.”

아큐브는 마왕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절대로 성공하리라 생각했던 계획이 처
참하게 실패한 상황이니만큼 마왕이 세계를 정복하려는 야욕을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한
참동안 대답이 없는 마왕을 아큐브가 재촉했습니다.

“···저기, 마왕님?”

“···얼른 말 해 봐.”

정말이지 대단했습니다. 세계정복에의 야욕은.

“그러니까요, 힌델로스 왕국 내탕금을 이용해서, 중요한 기업들을 인수하면···.”

아큐브는 활짝 웃었습니다. 그러면서 꽤나 두툼한(그래서 어디서 났는지 모를) 기업들의
재무제표 뭉치를 마왕에게 들이밀고는 천 오백 년 동안 이루지 못하고도 여전히 그 꿈을 포
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마왕의 귀에 새 계획을 속삭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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