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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불멸에 대하여

2012.02.24 23:1702.24

불멸에 대하여.


“너에게 해줄 말이 있어.”
그녀가 말했다.
어느 정도 숨이 진정된 소년은 슬슬 느껴지는 한기에 이불을 가슴팍까지 끌어올렸다.
“뭔데 누나?”
그녀는 소년에게 고개를 돌렸다. 머리 밑에서 먼지 구름처럼 자몽 향기가 올라왔다. 소년은 그 향기가 좋았다. 밤새 맡았으면 하는 그 냄새. 그녀의 몸 곳곳에서 그런 향기가 났다. 목에서도, 팔에서도 가슴에서도 그 곳에서도. 정말 신비로운 여자였다.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웃으며 말했다.
“뭔데 그래?”
“들을 준비 됐니?”
마치 옛날 얘기를 하려는 할머니처럼 말하는 그녀에게 소년은 문득 호기심과 낯설음을 느꼈다.
“무슨 얘긴데?”
“니가 믿지 못할 얘기야.”
“남자였어?”
소년이 장난스레 물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정말 그러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지금 이 순간 상관없었다. 소년은 첫 관계로 인한 부품과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 꽉 차 있었다.
그래, 지금 이순간은.
“난 죽지 않아.”
그녀가 말했다.
“죽지 않는다고?”
소년이 물었다.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면서.
“그래, 난 죽지 않아.”
그녀가 침착하게 말했다. 침착하게. 소년은 이게 지금 무슨 말인가 속으로 끊임 없이 되뇌었다. 순수한 사랑이었다. 전혀 약에 취하거나, 술을 마신 후 관계를 가진 것이 아니었다. 고로 취한 것도 미친 것도 아니건데.
소년은 농담이라 생각했다.
“뱀파이어야?” “아니야.”
“좀비야?”
소년이 이빨을 드러내다 눈깔을 뒤집으며 말했다. 소년은 웃었고 눈깔을 원래대로 뒤집었을 때 그녀도 웃고 있었다.
그녀는 소년의 갈색빛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점점 손을 밑으로 내렸다. 목, 어깨 이불 밑까지. 소년은 응큼한 생각이 들었으나 그녀는 소년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소년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작은 심장의 울림이 느껴졌다.
“난 거짓말 하면 심장이 뛰어. 알지?”
“알지.”
소년이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이야기가 점점 진지해지고 있었다.
“난 죽지 않아.”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은 뛰지 않았다.
“그래.”
소년은 왠지 웃음이 나와 웃었다.
“믿을게.”
“늙지도 않아.”
“그래.”
“나이도 먹지 않고.”
“그래, 안 늙으니까.”
“아니. 그 말이 아니야.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뜻이야.”
“그래, 그거 좋네.”
“쉽게 생각할 게 아니야. 나는 나이를 먹지 않고, 평생 이 나이야. 영원한 스물 한 살이라고. 그게 뭘 뜻하는지 알아?”
“뭘 뜻하는데?”
“네가 곧 내 나이를 뛰어넘는다는 뜻이야.”
“아니지. 아니야. 누나는 늙지는 않지만 나이는 먹지. 늙지만 않을 뿐이야. 그러니까 젊은 479살. 380살. 256살이 될 수 있다는 뜻이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영원히 늙지 않는 대신 내가 얻은 제약이야. 난 영원히 스물 한 살이야. 즉, 다른 사람이 내 나이를 넘으면 난 자동적으로 너보다 어린 여자가 돼. 그게 내 제약이야.”
소년이 장난스레 웃었다. 그 말이 너무나 허황되게 느껴져 어느덧 장난스레 그녀의 젖꼭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누가 그랬는데?”
“나와 계약을 맺은 사람이.”
“그게 누군데?”
“말해줄 수 없어. 말하고 싶지 않아.”
“알았어.”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아.”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진지하게 받아들여줬으면 좋겠어. 왜냐면 넌 이제 곧 스물 한 살이니까.”
소년이 고개만 까닥 들어 바로 앞에 시계를 쳐다보았다. 10시 50분. 앞으로 1시간 10분만 더 있으면 다음 해였다. 소년은 그 자리에 굳어서 한 초 한 초 흘러가는 걸 지켜보았다.
그녀가 소년의 몸을 만졌다. 소년은 뭐라 해야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화제를 돌려볼까 했지만 자신을 쳐다보는 고양이처럼 동그란 눈은 소년에게 어떤 대답을 원하고 있었다.
소년은 자리에 누워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년은 어떤 말을 해야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갈망하는 것이었고.
“사실이야?”
소년이 물었다.
“사실이야.”
그녀가 진지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나와 만난 수많은 남자에게 난 항상 이런 말을 해왔어.”
“스물 한 살보다 더 먹으면 어떻게 되는데, 그럼?”
“난 항상 스물 한 살이야. 그러니까 너에게 난 항상 스물 한 살이고, 너는 날 영원히 스물 한 살로 기억하는 거야.”
“이해가 잘 안 돼. 그럼 누나와 쌓았던 추억들은 모두 사라지는거야?”
“그냥 날 스물 한 살로 생각할 뿐이야. 네가 마흔 살이든, 육십 살이든.”
소년이 환희에 차 소리쳤다.
“겁나 좋은거네.”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별로 좋은 게 아니야.”
“얘기해 줘.”
소년이 마침내 말했다. 소년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진지한 눈빛이었다. 그녀는 애써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녀에게도 늘 떨리는 일이었다. 몇 명의 남자와의 삶을 살아왔지만, 항상.
“뭘?”
“모르는 척 하지마. 얘기해달라고. 나 말고 다른 남자랑 지내왔던 삶을. 궁금해.”
“말하고 싶지 않아.”
“웃기지마. 말하고 싶어 죽으려고 하잖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알고 싶잖아. 장난으로 받아들이는지, 진지하게 받아들이는지. 그리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어떻게 할 건지에 대해서도. 자 말해. 들어줄게.”
그리하여 그녀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용히, 천천히, 성스럽게… 추억은 항상 성스러운 법이니까.

그녀가 시계를 보았을 때는 9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차가운 북풍이 창문을 때리고 있었고 바깥은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휘날리는 눈발만이 생동감을 가져다 줄 뿐이었다.
그녀가 안락의자에서 커피를 막 마시고 있을 때 동쪽에 있는 문이 열리고 눈발과 함께 한 남자가 들어섰다. 남자의 정수리는 문 천장에 거의 닿을 듯 했고 짧게 깎은 머리에 들어난 살은 추위에 하얗게 질려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남자의 거뭇거뭇 난 솜털이 아니었다면 곰이나, 그런 비슷한 종류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몰랐다.
솜털이 난 소년의 어깨에는 차가운 북쪽의 사슴이 얹어져 있었다. 사슴의 키는 거의 그녀만 했지만 남자에게 얹혀 있을 때는 조그만 토끼처럼 보였다.
소년은 문을 닫고 사슴을 내려놓자마자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입술마저 얼어붙어 차가운 기운이 그녀에게 확 끼쳤지만 그녀는 그 느낌마저 좋았다.
소년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아주 운이 좋았어. 늑대에게 당해 다리를 절뚝이는 사슴을 만났거든.”
그녀는 꽁꽁 얼어붙은 사슴을 바라보았다. 사슴의 몸 군데 군데에는 확실히 할퀸 자국이 나 있었다. 그녀는 순간 그것이 짠하다고 느껴졌지만 차가운 북쪽의 땅에서는 그런 동정심 따윈 필요 없었다. 동정심은 곧 죽음으로 연결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죽은 물고기처럼 눈이 멀어버린 사슴을 한참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질은 어떻게 하는 거야?”
소년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 안락의자에 앉히며 말했다.
“내가 손질할게.”
“나도 손질하는 걸 배워야지.”
“가만히 있어요. 그런 건 나중에 배워도 늦지 않아. 게다가 잡아서 바로 손질했어야 했는데, 주위에 사슴을 쫓던 늑대들 때문에 바로 온 거야. 지금은 혹한에 꽁꽁 얼어서 칼마저 부러질 걸. 일단 좀 녹여야 해. 뭐 따뜻한 거 없어? 배고픈데.”
“어제 먹던 거 줄게. 기다려.”
그녀가 다시 자리에 일어서며 말했다. 소년은 그녀에게 다시 앉으라고 했지만 그녀는 애써 부엌으로 향했다.
소년은 사슴을 벽난로에 옮겼다. 털이 타지 않게 적당한 거리를 뒀지만 곧 그녀와 태어날 아기를 위해 빨리 녹이려 조금 더 가까운 거리를 두었다.
“난 곧 스물 한 살이야.”
소년이 말했다. 등을 돌린 채 음식을 하고 있던 그녀의 머리가 끄덕이는 게 보였다.
“누나 말이 사실이라면 난 누나에게 반말을 해야겠지.”
“아직도 믿지 않는 거야?”
여전히 등을 돌린 채 그녀가 말했다.
“믿을 수가 없으니까.”
“믿도록 해. 이번 하루가 지나면 넌 스물 한 살이니까.”
“내가 누나를 영원한 스물 한 살이라고 생각하는 게 말이 돼?”
“어쩔 수 없어.”
“뭐 좋아. 그러면 그런 가보지. 그럼 미리 연습 좀 해볼까? 야.”
그녀는 피식 웃었다. 지금까지 만난 모든 남자가 그렇듯 그 또한 믿지 않았다. 사실 이런 얘기를 누가 믿겠는가? 영원한 스물 한 살이라니. 제약이라니. 그녀 또한 자신의 얘기에 신빙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씁쓸해졌다. 이번 남자는 차가운 북쪽의 땅에서 자란 사냥꾼이라 그런지 그런 얘기 자체를 믿으려고 하질 않았다. 생각보다는 행동이 먼저였고 고집불통에다 거칠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또 사랑에 빠져버렸다.
다시는 사랑을 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영원히 묻혀 살 각오로 북쪽에 땅까지 왔지만 스물 한 살의 뜨거운 피가 그녀를 또 사랑으로 이끌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번 남자는 최초로 연하였다. 물론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그녀는 서쪽의 땅에서 무역을 하던 자신의 바로 전 남편을 생각했다. 지금은 그렇게 좋아하던 바다에 영원히 묻혔지만 다른 사람이 그러하듯 그녀 또한 영원히 그를 잊어버린 게 아니었다. 그녀의 전 남편이 그랬고 전전 남편들이 그랬듯이 모두들 그녀를 떠났지만 그녀는 항상 모드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끔찍한 고통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늙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들은 영원히 그녀를 스물 한 살로 기억하는 것.
자신의 자식들마저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지고, 기억의 혼돈을 방지하기 위해 자신을 새엄마로 생각하는 것. 그것은 모두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또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녀는 스스로를 걸레라고 생각했다.
소년은 스물 한 살이 되었다. 생일이 지난 소년은 뭔가 달라진 거라고는 보이지 않았지만 스스로를 어른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녀를 보자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다.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이 한 치의 거짓도 없이 펼쳐졌지만, 단 하나. 그녀가 몇 살인지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것은 곧 그녀에 대한 정체성 혼란으로 찾아왔다. 어른이 된 소년은 속이 울렁거리는 걸 느끼며 눈길을 아예 돌려버렸다. 그때 그녀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토해버렸을 지도 몰랐다.
그녀는 그의 몸을 껴안았다. 따뜻하고 다부진 몸의 감촉이 좋았다. 그녀는 밤 사이 차가워진 코를 그의 몸에 박았다.
“좋은 아침이야.”
그녀가 속삭였다.
“좋은 아침.”
남자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생일 축하해.”
“그래. 어….”
남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를 만난 순간부터 입에 달라붙었던 그 단어가 문득 생각나지 않았다.
“스물 한 살.”
그녀가 여전히 그의 몸에 코를 박은 채 말했다.
“이제 스물 한 살이네. 나랑 동갑이야.”
남자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막혀있던 콧구멍이 뻥 뚫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아, 스물 한 살. 동갑이지. 너랑 나.”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렇지.”
남자는 이제야 살겠다는 듯 지끈지끈했던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모든 체증이 확 내려간 느낌이었다. 이제 절대 잊어버리지 않으리라.
절대로.
남자는 아침의 갑작스런 혼란에서 벗어나자 자리에서 일어나 어제 밤 사이 녹이던 사슴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여전히 이불 속에 있었다. 혼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녀와 그의 아기가 태어나고 몇 해가 흘렀다. 남자는 어느새 서른 살이었고 그녀는… 영원한 스물 한 살이었다.
아기는 어느새 아이가 되어 아빠가 잡아온 사냥감에 관심을 가졌다. 아이는 사냥꾼이 되고 싶어 했다. 아빠 또한 아이를 훌륭한 사냥꾼으로 키우고 싶어했다. 남자는 아이가 8살이 되면 사냥을 가르칠 예정이었다. 물론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도시에서 살고 싶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따뜻한 남쪽 지방이 무엇보다 간절했다.
한 평생을 차가운 북쪽 바람과 싸워온 남자는 그녀의 말을 단박에 거절했다.
“안 돼, 그럴 순 없어.”
“부탁이에요. 여보.”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언제부턴가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그에게 존댓말을 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다.
“난 한평생을 사냥만을 해왔어. 그런데 따뜻한 남쪽 지방에서 뭘 하라고? 하루 종일 조그만 사무실에 처박혀서 펜이나 끄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지? 안 돼, 그럴 순 없어.”
“당신은 북쪽 지방에서 태어나서 누구보다 강인하고 부지런해요. 남쪽에 가서 사람들이 하는 걸 조금만 배우면 당신도 수월하게 일을 할 수 있고, 타고난 부지런함으로 금방 성공할 수 있어요. 제가 장담할 수 있어요.”
“어떻게 장담하지? 당신은…”
그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또 두통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녀에 대한 과거를 생각하려 하면 항상 머리가 지끈거렸다. 분명 오래된 것 같은데… 아이는 벌써 7살이었다. 그러나 7년의 세월이 기억이 나질 않았다. 마치 그녀와 어제 산 것만 같았다. 그 이상 깊이 갈수록 머리가 죄어왔다. 그럴 때마다 그녀가 나섰다. 그녀는 놀랍게도 모든 것을 다 기억하고 있었다. 가끔은 7년, 그 이상을 기억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겨드랑이 털이 열아홉에 났다는 것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 말한 기억이 없는데도 말이다.
“뭘 말하고 싶은 거예요?”
그녀가 걱정스레 물었다. 복잡한 걸 싫어하는 남편은 항상 이럴 때마다 죽을 것처럼 괴로워했다. 두통으로 지끈거리면서 자신을 쳐다볼 때, 그녀는 그가 자신에 대한 의문을 폭발할까 늘 두려웠다. 그것은 늘 그녀를 따라다니는 걱정이었다.
물론 그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딴 두통을 겪느니 차라리 생각을 안 하는 편이 나았다. 그는 손을 내저으며 애써 생각을 다른데 돌리려 애썼다.
“됐어. 됐어.”
그가 다급히 말했다. 자신에게 외치는 것과 다름없었다.
“아무튼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지? 당신은, 겨우 스물 한 살이잖아.”
머리가 탁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는 두통 뒤에 찾아오는 편안함을 느꼈다. 그녀가 스물 한 살이라는 걸 인정할 때마다 늘 편안함이 찾아왔다. 당연한 건데도.
그럴 때마다 그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그는 나이를 말할 때마다 얼음 조각처럼 빳빳하게 굳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 나이에 놀라는가? 별 것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맞아요. 전 모르죠. 스물 한 살이니까요.”
그녀가 말했다.
북풍의 찬 바람이 여러 번 창가를 때릴 때, 아이는 부쩍 커졌다. 아이의 몸은 아버지처럼 다부져졌고 키는 자신의 엄마보다 훨씬 자랐다. 세상에 질문을 던질 줄 알았으며 질문에 답을 구할 수도 있었다. 한참 생각할 게 많은 열 세 살이었다. 그리고 소년은 의문을 품었다. 자신의 엄마에 대해.
소년은 자신의 엄마가 보고 싶었다. 자신과 여덟 살 차이나는 새엄마 말고. 진짜 엄마를.
아버지도 그에 대해 마땅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멍텅구리 고집불통이었다. 마을의 선술집에서 얻은 양키들의 담배나 피어대며 총이나 손질하는 것이 전부였다. 엄마에 대해 물을 때마다 머리를 감싸쥐다 곧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질러대며 당장 꺼지라고 소리치곤 했다.
새엄마인 그녀는 자신의 아들에게 잘 해주고 싶었다. 어느새 자신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나이차가 날 때 새엄마가 되어버렸지만 그녀는 수많은 자식을 낳았고, 그 대부분 자식들과 사춘기의 고민을 같이 털어놓진 못했지만 옆에서 지켜보며 그들을 다루는 방법을 간접적으로나마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어쨌든 엄마였다.
사냥꾼의 자식은 거칠었다. 그녀의 손길을 바로 앞에서 거절했다. 얘기를 나누려는 자신과 늘 거리를 두려고 애썼고 심할 때는 고래고래 악을 쓰며 침을 뱉곤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술에 잔뜩 찌든 아버지에게 멱살을 잡혔고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가 사냥을 나간 날이면 자식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아이는 자신의 엄마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그런 것이 있냐는 표정으로 멍청한 표정을 짓는 아버지와, 자신과 대화를 걸려는 스물 한 살짜리 엄마 사이에서 고독한 사춘기를 겪었다.
산업화가 급격히 이루어졌다. 북쪽 지방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양키 놈들이 이곳까지 산업화의 손을 뻗쳤다. 굳건히 서 있던 나무들이 밀리고 북쪽의 고립된 자원(석윤지, 석탄인지 나발인지.)을 얻기 위해 거대한 건물들이 지어졌다.
그들은 부족한 식량과 비싼 모피를 위해 동물들을 남획했고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었다. 남자는 술로 세월을 보냈다. 예전에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순록을 잡았다면 이제는 한달에 한 번 꼴로 순록 다리를 얻을 수 있었다.
완전히 파산이었다. 이미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반 이상을 차지했다. 떠들썩했던 선술집도 예전에 비하면 파리를 손님으로 받아야 할 지경이었다.
그런 그에게 위안이 있다면 자신과 스무 살 이상 차이나는 아내였다. 그는 보드카에 진탕 취한 날이면 늘 아내 자랑을 해댔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기억이 당연히 없어진 사람들은 그녀는 양키 놈들이 이 지역을 보고 느끼듯 새로운 지대의 자원이었고 신비로움의 대상이었다.
그처럼 한 평생 사냥만 해온 구닥다리(이것이 요즘 그들이 사냥꾼들을 말할 때 꼭 붙이는 수식어였다.)가 저렇게 예쁘고 무엇보다 젊은 아내를 얻은 지 의아해했다.
물론 그것을 그가 기억할 리 없었다. 이미 젊을 적 추억은 굳이 그녀 때문이 아니더라도 술에 쓸려 내려갔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로라를 보여주며 사랑을 약속했던 젊은 날의 순수했던 낭만과 사랑보다는 어떻게든 하루하루 살기 위해 숭어처럼 퍼덕이는 고독한 가장이었다. 스물 한 살의 아내와 그와 비슷한(몇 살이더라?) 아들을 위해.
“지금이라도 남쪽으로 가는 건 어때?”
40년 선술집지기 애꾸눈 푸른 눈발이 말했다.
“자네는 끽해야 마흔이잖아. 아직 아내도 젊으니(대체 어떻게 만난거야?) 도시로 내려가 새 삶을 시작해보라고.”
그가 보드카를 목구멍으로 넘기며 말했다.
두통이 또 밀려왔다. 이말 어디서 들었는데. 그녀가 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왜 한참전의 일 같은데 그녀가 여전히 젊어 보이지?
“말 마쇼. 두통이 밀려와요.”
푸른 눈발이 술잔을 수건으로 닦으며 껄껄 거렸다.
“또 아내 생각을 했나?”
그는 선술집지기를 바라보다 말없이 술을 삼켰다.
소년은 이제 제법 총을 잘 쐈다. 굳이 술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미 망가질대로 망가진 아버지에게 사냥을 바라긴 무리였다. 소년은 이제 전적으로 가장이었다. 소년이 사냥을 나가기 위해 총구에 기름칠을 하고 있을 때 그녀가 말했다.
“오늘은 눈발이 좀 어때?”
소년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스물 한 살. 젊고 예뻤다. 마을의 젊은 여자들을 통틀어서 가장 예뻤다. 그런데 내 엄마다. 소년은 마음 한 구석에서 꿈틀되는 어떤 것을 느꼈다.
“눈발이 어떻게 날리던 상관없어요. 오늘은 무조건 사냥을 나갈 거니까.”
소년은 그렇게 말하고 총구 손질에 전념했다. 뭐라 더 말을 나누고 싶었지만 그것이 잘 되지 않았다. 분명 자신의 엄마였지만 자신의 진짜 엄마도 아니었고 어떤 막이 자신과 그녀 사이에 쳐진 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겪어야 하는 또 다른 고통이었다. 자신의 자식들은 자신을 어머니라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이가 몇 살이던 상관 없었다. 자식들은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할 나이차가 나면 자연스럽게 자신을 친엄마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이 자식과 그녀 사이의 제약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기억의 혼돈은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그리고 스물 한 살이 되면… 그녀는 그 날이 곧 다가옴을 알고 있었다.
정확히 2년이 더 흘렀다. 남자는 도시로 떠나기로 작정했다. 이곳은 더 이상 희망이 없었다. 그는 식구들에게 짐을 싸라고 말했다. 스무 살이 된 소년은 이곳을 떠나기가 싫었다. 이 곳은 평생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터전이었고, 이곳의 북극성, 길들였던 동물들, 바다와 잠깐의 여름이면 문득 솟아나는 푸른 풀밭의 경이로움을 모두 포기할 수 없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강제로라도 소년을 데려가고자 했다. 그가 이 곳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소년 때문이었다. 자식을 좀 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시키려는 마음. 적어도 자신처럼 살게 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가장 컸다. 도시로 떠났다가 고향을 찾아온 푸른 순록은 자신의 교육 수준이 도시의 초등학생과 별반 차이가 없다며, 자신들을 미개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어차피 떠나야 한다면 가급적 빨리 떠나야 한다고 충고했다. 무엇보다 자식 교육을 위해서라도.
그는 늘 그렇듯 아이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 멀리 던져버렸다. 열 여섯부터 사슴을 어깨에 맨 타고난 북극의 전사인 그의 힘에 아들은 저 멀리 날아가 뒹굴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아들에게 달려갔고 그가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쳤다.
“멍청한 후레 자식! 지금 누구 때문에 가는지나 알고! 나란들 이 곳을 떠나고 싶으냐? 하지만 현실을 봐, 이 병신 자식아! 이미 이 곳은 양키놈들의 손에 넘어갔어! 떠나지 않으면 모두 굶어 죽는 거야!”
아들은 밀려있던 분노가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의 무관심, 낯선 여자의 어설픈 사랑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고독하게 보냈던 소년은 드디어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었다. 소년은 자신을 어루만지는 어머니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소리쳤다.
“이것 놔요! 그래요! 당신 잘났어요! 그렇게 잘나서 평생 술에 꼴아 사셨나? 적응을 하면 되잖아! 사냥감이 없으면, 양키놈들 밑에 기어가서 먹고 살면 되잖아! 우린 사냥꾼이야! 사냥꾼은 자신의 땅을 포기하지 않아! 양키 놈들 밑에서 일하면 사냥으로 버는 돈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 수도 있어요! 굳이 도시까지 가지 않아도…”
“다 네 놈 인생을 위해서야!”
그가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그녀는 재빨리 남편을 막아섰다. 남편은 차마 그녀를 뿌리칠 수 없었다. 한 손바닥도 안 될 만큼 작고 연약해서도 그랬지만 그녀의 몸짓엔 어떤 위엄이 서려 있었다. 처음 술을 마시고 자신의 자식이 그렇듯 아버지에게 슬픔을 담은 술주정을 부렸을 때 아버지의 곰만한 손바닥을 말 한 마디로 막았던 증조할머니의 그 어떤 것이었다.
  그녀가 남편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만해요. 충분히 잘못했어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당신은 알거야.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 나도 더 이상은 못 봐줘요. 진정해요. 멍청하게 굴지 말란 말이야.”
추운 겨울에 피는 인동초 같이 소란 속에서 대조되는 차분한 그녀의 말은 집 안의 분위기를 확 가라앉혔다. 소년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꿈틀꿈틀 올라왔다. 그것이 무엇인지 소년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의 옆에 늘 있으며 대화를 걸려 했던 자신이 거부했던 불쌍한 여자의 뒷모습은 분명 아니었다.
소년은 집을 뛰쳐나갔다.
그녀는 따라나섰다.
차가운 눈발이 그녀의 전신을 때렸다. 20년. 20년 짧은 세월 동안 그녀는 눈발을 이렇게 맞아본 적이 없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몸을 꽁꽁 얼려버리는 차가운 추위였다. 20년 짧은 세월이 한 평생 도시에 있었던 그녀의 몸을 추위에 적응 시키진 못했다.
그녀가 아들을 여러 번 불렀을 때 아들은 멈춰섰다. 굳이 그녀 때문이 아니라 집에서 멀리 나와서 그런 것이기도 했다.
“꺼져버려.”
아들이 아랫입술을 윗이빨 사이에 넣으며 말했다.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으려는 행동이었다.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아무렴 자기 자식인데. 외로움에 옴짝달짝 못할 때마다 눈물이 터져 나올 때마다 하는 아들의 유별난 행동이었다.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닥쳐!”
아들이 소리쳤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그러나 아들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눈물이 나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죄였다. 같이 늙어주지 못한 자신의 죄.
그녀는 아들을 안고 싶었다. 몇 살 이후로 안아보았던가? 그녀는 아들에게 다가가려 두 팔을 벌렸지만 아들은 끝끝내 그녀를 거부했다.
“당신이나 가버려. 도시에.”
그녀는 아들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어루만져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에서야 아들과 단 둘이, 깊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었다. 차가운 눈발은 아무 상관없었다. 아들은 소리치고 있었다. 자신을 안아주라고.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수많은 자식을 낳았고 키웠듯 그녀에게 이런 상황 쯤은 순록을 굽는 것만큼 간단한 것이었다.
“난 가지 않아.”
“웃기지마.”
“어디든 가지 않아. 너와 함께 있을 거야.”
“지랄 하지마!”
“난 네 엄마야.”
“한 살 차이가 엄마라고?”
그녀는 침을 삼켰다. 한 살 차이가 엄마라고? 두 살 차이가 엄마라고? 다섯 살 차이가 엄마라고? 자식들은 늘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아득한 기분을 느꼈다.
늙는 것이 싫었다. 철없는 시절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여자였고 누구보다 매력 있었다. 열여섯부터 수많은 남자를 홀렸으며 이미 여러 가정을 파탄 냈다.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었다. 이미 300년은 더 된 이야기니까. 아무튼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던 청년이 있었다. 시인이었는데 몰락한 귀족이었다. 그녀는 동양과 서양의 모든 미를 가진 돌연변이였고 그렇게 시인은 왈츠를 추는 그녀에게 홀렸다. 시인은 수많은 시로 그녀에 대한 마음을 노래했고, 사랑에 대해 무감각했던 그녀는 돼지 넓적다리에서 완두콩을 먹는 것처럼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와 잠자리도 가졌다. 젊고 순수했던 시인은 그녀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하나의 순리에 불과했지만.
늘 그렇듯 그녀는 그에게 금방 싫증이 났다. 무엇보다 돈이 없었고 다른 것보다 멋이 없었다. 펜만 놀리는 멍청이는 더 이상 필요 없었다. 갖은 가죽으로 치장을 한 화려한 귀족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바쳤던 시인의 수많은 문구를 이용해 그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그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나는 늙을 것이고 타락할 것이에요. 영원히 스물 한 살, 이 마음을 간직할 수 없어요. 당신에 대한 사랑이 점차 식을 것이고 사랑보다는 부를 탐하게 되겠죠. 전 그것이 싫어요. 영원히 스물 한 살이 될 순 없겠죠. 그러니 타락은 어쩔 수 없는 절차. 영원히 스물 한 살이 되지 못한 날, 용서하지 마세요. 나의 입술이여.’
그녀가 스물 다섯이 되던 해, 장문의 편지가 도착했다. 역시 300년은 더 된 이야기라 기억할 수 없지만 그녀의 마음에 영원히 화살처럼 박힌 그 문장은 기억할 수 있었다.
‘내 영혼을 바쳐 그대를 영원한 스물 한 살로 만드리오. 당신은 이제 사람들에게 영원히 스물 한 살로 기억될 것입니다. 순수한 스물 한 살, 바로 그때만으로. 그대의 숨결로부터.’
300년이 흘렀다. 그녀는 영원히 스물 한 살이었다. 정신만은 300년 영원히 ‘성숙’했다. 사랑이 부질 없다는 것을 그녀는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가슴은 아니었다. 가슴은 영원히 사랑을 꿈꿨다. 최악의 저주. 그것은 미완성된 사랑이 나은 최악의 결과였다.
그녀는 성당 옥상에서 그대로 추락해 온 몸이 박살났던 그처럼, 온 몸이 박살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스물 한 살이라고? 아니야. 난 몇 백 살은 더 먹었다고. 몇 백 스물 한 살이야. 어쩌면 더 먹을 수도 있고.
그녀는 아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줄까 했다. 그러나 성숙한 정신은 그러기를 원치 않았다. 필요가 없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부질 없을 테니까.
그녀는 자신에 대한, 분노, 절망, 무력감, 수치심, 비참함을 모조리 느끼며 어찌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녀는 이럴 때 미소가 최고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소는 눈물보다 나으니까.
그녀는 미소지었다.
“그러게, 고작 스물 한 살인데.”
그녀는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창가를 바라보았다. 눈발이 여전히 휘날렸다. 모든 것을 집어 삼킬 것만 같았던 눈발이었다. 처음 이 곳에 왔을 때 그렇게 느꼈다. 여전히 그 느낌은 강했다. 눈발은 한 치 앞도 안 보이게 했다. 그녀는 침대에서 신음하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수척해질 대로 수척해진 모습. 이미 깡마른 남편에게 생기란 찾아볼 수 없었다.
인간이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그녀는 한평생 눈발과 싸우며, 눈의 자식들을 잡던, 그래서 정복한 것만 같았던 사람이 사람이 만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고 마침내 나이가 들어 모든 것이 붕괴되어 여전히 거칠게 휘날리는 젊은 눈발 앞에서 초라하게 늙은 모습을 보며 인생이란 덧 없다 느꼈다.
그녀는 그래도 모든 것을 집어 삼켰던 자본주의 앞에서 꿋꿋이 자신의 삶을 지켜낸 강인한 사냥꾼의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스물 한 살의 모습으로.
“오늘 아들이 돌아와요.”
남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죽음의 바로 앞. 고작 백 살도 못 산 인간이 몇 백 살이나 많은 젊은 여자 앞에서 물기 빨린 물고기처럼 바르르 떨고 있었다.
남편이 뭐라 속삭였다. 한기가 가득한 집 안에 남편의 입김이 새어나왔다.
“뭐라고요?”
남편이 또 뭐라 말했다. 입김이 나와 말을 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냥 숨을 몰아쉰 것일 수도 있었다.
“…들.”
“네?”
“아들.”
“네. 아들이 와요. 아들이.”
“…다.”
“예?”
“고마워어어어.”
그가 힘을 짜내며 말했다. 그녀는 대충 무슨 말인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녀가 차가운 입술에 침을 묻히며 천천히 되물었다. 뭐라고?
“아들을 키워줘서 고맙다고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웃었다. 속에서 뭔가가 울컥했다.
“별 말씀을.”
“사랑해.”
노인이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열렸다. 차가운 눈발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돌아보았을 때 무슨 곰 한 마리가 서 있는 줄 알았다. 키가 크고 건장한 남자가 한 눈에도 좋아 보이는 윤이 반질반질한 코트를 입고 서 있었다. 남자의 정수리는 거의 문 천장에 닿을 듯 했다.
아들은 여전히 차갑고 묵묵해 보이는 눈을 하고 있었다. 도시에 가도, 십년이 흘러도 그것은 변치 않았다.
“아들이 왔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이 들어섰다. 그 뒤로 뭔가가 줄줄이 들어왔다. 아들의 아내, 아들, 딸이었다.
아들은 그녀를 힐긋 쳐다보다 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저 왔어요. 아버지.”
그리고 그는 엄마를 보며 가볍게 목례했다.
“저 왔어…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와요. 많이 춥죠?”
아들은 아내와 자식들에게 손짓하며 집 안으로 불러들인 뒤 문을 닫았다. 아내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남편에게 말은 들었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자신보다 5살이나 어렸다.
“어머니.”
아들이 말했다. 그녀는 며느리를 향해 목례했다. 며느리는 얼떨결에 똑같이 목례했다.
“반가워요.”
“아, 반가워요. 어머…니?”
그녀가 남편을 바라보았다. 남편은 아무래도 좋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미소 지었다. 아들이 저렇게나 컸다니. 정말 뿌듯했다. 아들의 차가운 눈은 여전하고, 자신을 잘 기억조차 못하는 것 같았지만(누구나 그랬으니깐.) 일단 자신의 자식이라는 것이 뿌듯했다. 자신이 인간(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이었을 적, 수많은 남자와 잠자리를 가지고 아기도 몇 번 낳었다. 그건 확실히 기억났다. 어쩌면 시인의 아기도 뱄을 수도 있었다.
그때, 정말 그때 사랑했더라면, 누구라도 진심으로 사랑했더라면 지금만큼 뿌듯했을까?
아들과 눈이 마주쳤다. 아들은 북쪽의 전사답게 차가운 푸른 눈을 간직하고 있었다. 연기가 가득한 도시의 회색빛에 결코 더럽혀지지 않을 푸른 눈이었다. 아들은 곧바로 눈길을 돌렸다. 모든 걸 읽을 수 있었다.
스물 한 살이 엄마라니. 난 인정 못 해. 아버진, 정말 구닥다리야.
그녀는 이해했다. 그럴 수밖에. 그러나 마음속으로 뿌듯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는 잘 자란 아들이 고맙고 대견스러웠다.
그녀는 미소 지었다.

“그래서?”
소년이 물었다. 그녀는 어느새 촉촉해진 눈가 때문에 눈을 깜빡였다.
“그래서?”
그녀가 되물었다.
“그래, 어떻게 됐어?”
“남편은 죽었어. 얼마 뒤에.”
“그리고?”
“난 거기를 떠났지. 아들과는 장례식 때 본 게 마지막이야.”
“그게 다야?”
“응.”
“아들과의 조우도 없었어?”
“아들은…”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눈가가 더욱더 촉촉해졌다.
“이미 100년도 더 된 이야기야.”
소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소년은 그녀의 빨개진 콧등, 붉으래 해진 볼, 입술을 보며 사랑스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를 껴안고 싶었다. 소년은 그렇게 했다.
“난 영원히 널 기억할게.”
소년이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믿진 않았다. 모든 남자들이 다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녀는 소년의 등을 토닥였다. 앞으로 몇 시간 후면.

아침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눈을 떴다. 그녀가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좋은 아침.”
남자는 말을 하려 입을 열다 잠시 현기증에 가만히 있었다. 그녀가 재빨리 말했다.
“스물 한 살이네?”
남자는 속이 뻥 뚫리는 걸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그녀의 미소가 잠시 사그라졌다. 그러나 다시 활짝 피어났다. 그녀가 미소 지었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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