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가작 곶자왈에서

2012.01.27 23:4101.27








  그때 나는 예감을 받았던 것 같다. 얇은 입술을 앙물고 선 여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가 내면을 감추지 못하고 두려움에 젖은 눈으로 어떤 도움을 갈구하듯 나를 쳐다보았을 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히고 그보다 더한 충동에 휩싸이리라는 것을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게 불분명하다. 내가 올레길을 다시 걷기로 마음먹은 것도 충동적이었던 것 같다. 며칠 전 신문의 '전국' 란에서 올레길들 중 네 개 구간이 내년 1월 1일부터 15년 간 폐쇄될 것이라는 기사를 본 것이다. 생태보존이 이유였다. 당시에는 그런가보다 지나쳤지만 얼마 뒤에 폐쇄되는 구간들을 다시 떠올렸다. 그 중에 곶자왈 구간이 있었다. 6년 전 곶자왈 안에서 느꼈던 그 원시적 내음과 먹먹하던 적막을 잊지 못하고 있었기에, 폐쇄되기 전에 다시 한 번 그 안을 걸어보자 스스로를 충동한 것이다.
  결심이 서자 나는 쓰고 있던 작품을 멈추고 트래킹 준비에 들어갔다. 영화사 PD에게 전화를 걸어 괜한 하소연을 늘어놓으며 시간을 번 다음, 올레길 첫 번째인 시흥-광치기 올레에서 시작해 송악산으로 통하는 화순-모슬포 구간을 거쳐 내륙으로 들어가 곶자왈을 걷는 3박4일 일정을 잡았다. 익숙하게 시작해서 절경 해안을 본 뒤 목적지로 향하는 계획이었다. 사람들이 드문 평일을 택해 제주도로 날아간 나는 그날은 제주시에서 묵고 다음날 아침 일찍 일주도로 순환버스를 타고 시흥리로 향했다. 오랜만에, 게다가 충동적으로 시작한 올레길은 제법 설레기까지 했다. 고적하게 선 초등학교와 말미오름 밑 검은 돌담들은 옛 기억을 불러 일으켰고 평일이어서인지 올레꾼들도 보이지 않았다. 여정의 첫 걸음은 언제나 후회를 불러오는 법이지만 그것마저 즐기며 오름을 올랐다. 허벅지가 긴장하는 것을 느낄 즈음, 정상에 올라 소, 말의 통행을 막는 차단막 앞에서 숨을 돌릴 때였다. 앞쪽에 두 사람이 보였다.
  남자와 여자는 소들이 풀을 뜯는 좁은 능선 길 울타리 앞에 서 있었다. 그들 역시 오름을 올라온 뒤 쉬는 중인 듯했다. 두 사람을 보고 나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은 큼지막한 배낭을 여자가 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아무런 짐도 없었다. 그러나 차단막을 지나 그들에게 다가가자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남자가 시뻘게진 얼굴로 넋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여자는 남자와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초연하게 오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자가 초보자였던 것이다.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올레길은 그저 풍광 좋고 걷기 편한 그런 길이 아니다. 산과 바다와 마을을 변화무쌍하게 관통하는 올레길들은 각 구간마다 오름과 같은 난코스들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구간들을 완주하는데 대여섯 시간씩 걸리고 그것을 며칠씩 걸어야하기 때문에 초보자들에겐 여간 고된 것이 아니다. 시작부터 말미오름이 버티고 있는 이 구간은 남자에겐 꽤나 부치는 길이었으리라. 서른 전후로 보이는 남자는 나를 의식하곤 시선을 돌려 경치를 두러보는 척을 했다. 나는 그가 초보자임을 확신했다. 올레꾼과 눈인사도 나눌 줄 모르는 그는 제 몸뚱이 하나 가누지 못하면서 여자 친구 손에 이끌려 올라온 것이다. 길을 걷다보면 그런 연인들을 종종 만나곤 한다. 서툴지만 풋풋하고 생기 넘치는 젊은 연인들.
  하지만 내 인상은 여자에게서 깨져버렸다. 아담한 체격에 평범한 등산복 차림인 여자는 긴 머리를 뒤로 묶어 단정하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내 시선을 잡아 끈 것은 그녀의 눈초리였다. 내가 지나가자 여자가 길을 비켜주면서 나를 의식했고 시선이 마주쳤는데, 작고 하얀 얼굴에 가늘게 다문 입술 위로 그녀의 애매한 눈빛이 뭔가 말하는 듯했다. 아니 말을 한다기보다는 그녀의 내면이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두려움이었고 자신도 모르게 도움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갈구에는 다른 망설임이 있었다. 내가 그녀의 시선을 떨치지 못하고 응시하자, 그녀는 차마 내면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시선을 돌려 나의 관심을 피해버린 것이다. 그 짧은 순간에 나는 그녀가 내 뒤의 남자를 의식하는 걸 눈치 챘고, 두 사람의 관계가 첫 인상처럼 좋은 관계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어딘가 어색했고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바람과 절경에 둘러싸인 오름 정상에서, 그들에게선 흥분이나 설렘이 보이지 않았다. 어떤 생기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두 사람 사이에 긴장이 감도는 걸 느끼곤 호기심이 일었지만, 돌아보지는 않고 지나쳤다. 그리고 그들에 대해선 잊어버렸다. 두 사람에게 관심을 지속시키기엔 오름 아래 펼쳐진 검붉은 들판과 그 너머에 우뚝 선 일출봉의 풍광이 너무나 강렬했던 것이다.


  성산포항 입구를 지나 일출봉 아래에 도착해선 광치기 해변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쉬었다. 해안절벽 위 가게에서 감귤과 보리빵 따위를 내놓고 팔고 있었다. 나는 배낭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아 쉰다리 한잔을 시켰다. 등 굽은 할머니가 느릿한 몸짓으로 냉장고에서 쉰다리를 따라 주었다. 6년 전에 왔을 때도 여기서 쉰다리를 마셨는데 할머니가 나를 기억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제주 전통발효음료인 쉰다리의 새콤함을 음미하며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기만 한 하늘과 일출봉에 감탄하는데, 내가 올레꾼임을 알아본 할머니가 어느 코스로 가느냐고 물었다. 곶자왈로 들어가려 한다고 하자 할머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년부터 문이 닫히는데 가 봐야지."
  할머니는 올레꾼들 때문에 곶자왈이 많이 상했다고,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정해진 길을 벗어나면서 숲이 엉망이 되고 더 이상 독초도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다른 여행자들처럼 나는 호기심으로 듣는 척을 해주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손님에게 올레꾼들 험담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이내 곶자왈 자랑을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제주도민들도 올레길을 자주 걷는데 그중 곶자왈을 최고로 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와산 곶자왈(바로 내가 들어가려는 구간이다) 안에 있다는 늪지대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좁고 굽이굽이로 난 길을 따라가다 가장 중심인 곳에서 몇 발자국 벗어나면 바닥을 뒤덮은 덩굴들 사이로 늪이 물웅덩이마냥 숨어있어. 그치만 물웅덩이라고 얕보다간 큰일이 나지." 할머니는 당신 아들이 노루가 빠져 죽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했다. "조심성 없게도 덩굴과 돌무더기 속에 숨은 늪을 보지 못하고 빠진 놈이었어. 팔다리랑 등까지 잠긴 놈이 긴 목만 주욱 빼고선 허우적대고 있더라고. 크고 동그란 눈알만 끔벅거리면서 바동바동 점점 빠져들어 갔지. 어찌 도와줄 수가 없더라고. 물웅덩인 줄만 알았던 늪이 덩치가 어른만큼 커다란 놈을 천천히, 그리고 끈질기게 잡아당기더라니까. 반시간 동안이나 말이야."
  할머니는 당신 아들이 봤다면서도 당신이 직접 경험한 것처럼 늘어놓았다. 곶자왈 지면이 화산암괴들로 이루어진 것을 아는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그 안의 원시성을 경험했었기에 노루가 눈만 끔벅거리며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광경은 상상할 수 있었다. 녀석은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숲의 공포를 온몸으로 느꼈으리라.
  할머니는 곶자왈이 문을 닫는 것은 나라가 하는 일들 중 그나마 잘하는 짓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왕 문을 닫으려면 30년은 족히 닫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30년이나 폐쇄되는 곶자왈을 상상할 순 없었지만, 할머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그저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내가 두 사람을 다시 발견한 것은 다음날 오후였다.
  광치기 해변 인근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루를 묵은 나는 아침 일찍 화순리로 향했다. 거기서부터 해안을 따라 송악산까지 나아갔다. 거대한 퇴적암들이 펼쳐진 길은 올레 해안구간들 중 가장 인기가 있는 곳이고 나 역시 좋아하는 길이다. 아침 일찍 시작하기도 했고 쉬지도 않고 걸은 덕에 오후가 좀 지나니 어느새 송악산 입구에 도착해 버렸다. 모슬포 항까지는 한 시간 남짓이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여서 송악산 절벽 밑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주차장 아래 해안가 술집에서 간단하게 멍게와 소라를 주문했다. 한라산 소주 한 병도 시켰다. 송악산 위로는 바람이 그리는 새털구름들이 시시각각 다른 형상들을 펼쳐내고 있었다. 무슨 드라마 촬영지라는 곳에서는 관광객들이 사진들을 찍고 있었고,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버스들은 연신 중국인 관광객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모두들 우르르 오름을 올라가 기념사진을 찍고 해안가 절벽 밑으로 내려와서는 다시 사진들을 찍었다. 그리고는 바쁘게 버스와 렌터카들을 타고 다음 촬영지로 이동해갔다.
  소라와 멍게를 다 비우고 한라산을 두 잔 가량 남겼을 때였다. 주차장 계단 위로, 송악산을 향해 난 올레 표식들이 매달린 길을 따라 걸어오는 올레꾼 둘이 보였다. 송악산을 넘어가는 해 때문에 역광으로 보였으므로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어제 말미오름에서 지나쳤던 두 사람임을 직감했다. 남자는 여전히 맨몸으로 해안풍경과 관광객 여자들을 살피며 걸어왔고, 이제는 제법 여유까지 보이며 즐기는 모습이었다. 여자는 어제처럼 배낭을 메고 몇 발자국 뒤에서 따라왔다. 남자는 종종 멈춰 서선 여자를 돌아보며 기다려 주었고, 그러면 여자는 걸음을 재촉하긴 했지만 이내 다시 발길을 늦추며 남자와 거리를 두었다. 의도적으로 그러는 것인지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제는 초보인 남자를 여자가 끌고 가더니 오늘은 그 반대라고 생각하면서 혼자 웃었다. 그러다 이내 다른 생각이 들었다.
  다섯 시간을 내리 걸은 뒤에 마신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두 사람을 지켜보면서 나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던 순간을 다시 떠올렸다. 무심히 지나쳤던 그 눈빛이 뒤늦게 나를 사로잡았다. 비로소 나는 두 사람이 궁금해졌다.
  그들과 어느 정도 멀어질 만큼 시간을 두고서 송악산을 올랐다. 내 앞뒤로 오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족이거나 연인들이었다. 나는 두 손을 잡고 서로의 얼굴을 보며 눈빛을 마주치고 다시 실없이 웃으면서 오름을 오르는 연인들을 보았다. 그때서야 두 사람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제 송악산 너머로 기울며 깃털구름 사이로 붉은 기운을 내뿜기 시작하는 서쪽하늘을 보면서, 나는 그 사내에 대해 간파할 수 있었다.
  자고로 감정이나 마음 따위는 믿을 것이 못 된다. 그것들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규정하고 옭아매는 덫일 뿐이다. 사랑 또는 연인이라는 단어들. 그 감정을 사랑이라고, 자신들이 사랑하는 연인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그들 사이에는 어찌할 수 없는 관계만이 남게 된다. 남자와 여자라는 힘의 역학만이 작용하는 것이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군림하려는 관습에 매달린다. 그리고 여자라는 이름의 약자는, 그 강자의 속성에 조금씩 스스로를 잠식당하다가 마침내 자신의 모든 가치를 내어주고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내 앞에서 걸어가고 있을 그 여자처럼 말이다.
  아마 그녀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이 연인이라는 믿음으로 몸과 마음과 자신이 가진 다른 모든 것을 내주었으리라. 지속되는 역학의 관계에서 조금씩 양보했고 그러면서 자기 안의 구멍 또한 커져갔으리라. 여자가 자신들의 관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자각했을 때는 이미 늦다. 그때부터는 체념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내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을 때 발견한 두려움이 그것이었다. 그녀는 뒤늦게 깨달았을 것이고 그런 관계가 언제까지 지속되어야 하는지 막막했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종류의 두려움이다. 그것이 쌓여 가면, 그것은 어느새 두려움을 넘어 공포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게 된다. 내가 그녀에게서 엿보았던, 그녀 스스로도 감추지 못하고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모든 것은 불분명하다. 내 직업적인 상상일 수도 있고 단지 술기운을 타고 퍼지는 몽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예측하건데, 충분히 이질적이고 아무런 생기도 찾아볼 수 없는 그들 사이에 좋은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는 것이다. 아마 이 올레길이 끝날 때쯤이면 그들의 관계도 파탄이 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 징조를 보고 말았다.
  생각들을 풀어놓으며 올레길로 빠지려 할 때였다. 올레길을 계속 가려면 송악산 정상 바로 밑에서 섯알오름으로 통하는 샛길을 따라 내려가야 하는데, 그 밑쪽 언덕 위에 두 사람이 보였던 것이다. 비록 멀었고 바람소리 때문에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다투는 모습에서, 이어 위압적인 태도도 한 손을 들어 다가가는 남자의 행동에서, 그럴 때마다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치는 여자의 몸짓에서, 나는 쌓여왔던 두 사람의 관계가 기어이 폭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내 주위에는 송악산 정상을 오르는 사람들과 석양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 여념 없는 사람들과 다시 하산하는 사람들뿐이었다. 올레꾼은 없었다. 두 사람이 내 쪽을 돌아본다면 나는 오름 정상을 어슬렁거리는 관광객들 중 하나로 보였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올레길을 따라 내려가길 주저하며 그들을 지켜보았다. 두 사람은 분명 주위에 인적이 없기 때문에 서로의 감정을 터뜨렸을 것이고, 그런 둘만의 공간에 끼어들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 마흔이 넘었어도 그러한 광경을 지나치기란 난감한 일이다. 나는 그들의 상황에 연루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남자가 여자를 걷어차는 것이 보였다. 배낭을 멘 여자가 중심을 잃고 언덕 반대편 아래로 굴러 떨어지며 모습을 감추었다. 나는 살의를 느꼈고 그것이 내 것이었는지 남자의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남자는 언덕 위에서 아래를 향해 뭐라 소리를 쳤다. 그리곤 뛰어 내려가 역시 모습을 감추었다. 바람소리에 비명이 섞인 것 같았고 언덕 반대편 아래의 상황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타인이라는, 제3자라는 관습이 나를 묶어놓고 있었다. 내 자신의 경직에 짜증이 일면서도 어쩌지 못하고 있는데, 언덕 반대편에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섯알오름으로 통하는 샛길을 따라 걸어갔다. 여자는 고개를 숙인 채 걸었고 남자가 뒤에서 종자나 포로를 몰듯 재촉하며 뒤따랐다. 남자는 이미 힘을 발산한 뒤였고 여자는 그것에 완전히 제압당한 모습이었다.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면서 나는 다시 살의가 일었다. 이제는 그것이 내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어쩌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 송악산을 다시 내려갔다. 여자가 별 탈 없이 걷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나 하면서.


  구간의 남은 길을 포기하고 최남단해안로를 따라 모슬포 항으로 들어갔다. 내 걸음이라면 그들을 따라잡을 것이 분명했고 그 사람들을 어떻게 지나쳐야 하는지 난감해서였다. 도로 위를 걸으면서 내내 찜찜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은, 그들이 내 올레길을 완전히 망쳐놓았다는 것이다. 그자도 그자지만 여자에게도 짜증이 일었다.
  그녀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자와 올레길을 걸으려 한 것일까. 올레길을 걸으면 이미 끝나버린 것이 분명한 자신들의 관계가 다시 좋아질 것이라 생각한 것일까? 그것은 허튼 생각이고 부질없는 바램일 뿐이다.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라지만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그녀가 그토록 자신의 내면을 드러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자라면, 그자는 상당히 억압적이고 노골적인 악의가 체질화된 자임이 분명하다. 여자들은 왜 자신들의 부조리한 상황에 저항하지 않는가. 자각도 못할 만큼 이미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것일까? 어쩌면 그녀는 애초부터 무지가 몸에 밴 여자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천성적으로 타인에게, 특히 남자라는 존재에게 거역할 줄 모르는 수동성을 타고 났을지도 모른다. 괜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 그녀와, 나는 뜻밖에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모슬포 항에서 저녁을 먹고 하모리 체육공원 근처 게스트하우스에 숙박을 잡았다. 어제 성산에서 묵을 때는 남자 방에 올레꾼 두엇이 있었는데 오늘은 나뿐이었다. 송악산 밑에서 마신 술기운이 아직 남았고 그 후에 본 것 때문에 개운치도 않아서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자기 전 담배를 피우기 위해 마당으로 나갔다. 올레꾼들을 위한 쉼용 탁자들이 있었는데, 맨 끝 탁자에 그녀가 앉아있었다. 이제 막 게스트하우스에 들어왔는지 아직 등산복 차림이었고, 혼자 멍하니 넋을 놓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옆 탁자에 앉으며 나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어디서 오셨어요?"
  그때서야 여자가 흠칫 돌아보았다. 나의 등장을 몰랐던 것 같고 두 눈은 여전히 자신을 감추지 못하고 드러내고 있었다.
  "저는 서울에서 왔습니다. 서울에서, 오셨나요?"
  "예." 그녀는 잠시 스스로를 진정시키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만 고향은 여기예요."
  나는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그러나 그래봤자 아무 도움도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방식대로 말했다.
  "아까 절울이오름에서 당신을 봤습니다." 절울이오름은 송악산의 제주 이름이다. 그 의미를 알아챈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내 시선을 피했다. "어제 오전에도 만났었죠."
  그녀가 다시 나를 보았다. 그녀와 나 사이에 어제처럼 눈이 마주쳤고, 비로소 그녀는 나를 기억하는 듯했다. 그녀의 얼굴에 경계보다는 안도가 자리 잡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은 대개 그런다. 나는 이제 처음 만난 낯선 이가 아니라 그녀의 기억 속에 지나쳤던 올레꾼들 중 하나였다. 친밀감의 영역으로 들어선 것이다.
  나는 그자가 보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남자 분은 어디 계시죠?"
  그녀는 더 이상 경계하는 표정 없이 먼 곳을 보았다. 그런 행동으로 자신들 사이에 문제가 있음을 시인했다. 그녀는 그저 '작은' 다툼이 있었을 뿐이라고 했다. 그 자가 '조금' 화가 났고 그래서 '잠시' 시간을 갖기로 했단다. 그자는 지금 다른 곳에, 가까운 모텔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내일 아침에 다시 만날 거예요." 그녀는 그자를 변호라도 해주듯 덧붙였다. "다시 걸어야 하니까요."
  이 무지하고 수동적이기만 한 여자는 아직도 희망을 놓지 않은 건가?
  "남자친구와 헤어지세요." 나는 짜증이 일면서 말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나이잖아요."
  나는 내가 처지를 망각했음을 깨달았고, 긴장으로 스스로를 꽁꽁 묶는 그녀를 보았다. 길에서 한번 마주친 올레꾼 따위가 아픈 데를 건드린 거였지만, 그녀는 고개를 돌리거나 한숨을 쉬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차마 억누르지 못하는 것들을 내뱉어 버리기로 마음먹은 듯 보였다. 어쩌면 속내를 털어놓고 이야기를 들어줄 상대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모래밭에 밀려오는 파도에게 혼잣말 하듯 소곤거렸다.
  "그 사람은 남자친구가 아녜요." 그녀는 다시 머뭇거렸고, 끝내 자신을 털어놓지 못했다. 단서만을 말했다. "그 사람은······ 제 남편예요."
  남편이라, 남자친구가 아니라 남편. 그녀는 결혼 4년차라고 했다. 올레길을 걷는 모습으로는 알아보지 못했는데, 가까이서 다시 보니 앳된 얼굴이었다. 이제 스물한둘이나 되었을까. 나는 이제껏 추측했던 그녀를 다시 정의해야만 했다. 그녀는 스스로에 대한 정체성을 채 갖기도 전에 구속되어 버렸다. 어린 나이에 굴복한 본성이 빠져나오기란 보다 힘든 법이다. 그러고 보면 그녀가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매순간 자신을 드러내는 것도 당연해 보였다. 그녀의 두려움은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뿌리가 깊었고 이미 박제되어 있었다.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고, 그것이 스스로를 자극했다. 나는 지갑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그녀 앞 탁자 모서리에 올려놓았다.
  "제 주변에 사람들이 좀 있어요." 그것은 충동적이지만 어떻게든 돕고 싶다는 순진한 의도였다. 아니 순진한 의도뿐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사 법률변호사와 상의하면 조언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작년에 취재할 때 친해진 장형사에게 도움을 청해볼 수도 있다. "원하신다면,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만."
  그녀는 무슨 뜻이냔 듯 명함을 살피다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비로소 어떤 의미인지 눈치 챈 것 같았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제안은 혼란을 함께 준 듯했다. 그녀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고 낯선 올레꾼의 제안을 받아들여도 되는 것인지 경계했다. 받아들인다면 정말로 도움 받을 수 있는 것인지 의심하고 있었다. 당연한 반응이다. 오랜 기간 억눌려온 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구원의 손길에 겁부터 집어먹으며 머뭇거리게 마련이다. 그 짧은 시간에, 나는 그녀가 주저하고 갈등하면서 자신 안에 박제되어 있는 것을 직시하는 걸 보았다. 그것을 이겨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무지와 수동성을 들여다보았고, 그것을 외면해야 하는지 거부하며 극복해야 하는지를 망설이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작은 눈망울에 안정이 찾아왔다. 그녀는 결심을 한 듯했고 갈등이 사라진 눈빛으로 명함을 보았다. 나는 그녀가 마지막 한숨을 쉬고는 그것을 집어 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는 어느새 다른 두려움을 머금고는 내 쪽을 보며 굳어버렸다. 나는 그녀가 나를 보는 게 아님을 깨닫고 뒤를 돌아보았다. 조그만 마당 건너 대문 앞에, 그가 서 있었다.
  그는 모텔에서 씻고 나온 듯 젖은 머리에 슬리퍼 차림이었다. 굳은 채 우리를 보고 있었고,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분노와 살의를 느꼈다. 이번에는 내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여자 앞에 앉은 낯선 사내에게 질투와 악의를 품었고, 나라는 존재를 탐색하면서 자신이 제압할 수 있는 상대인지를 가늠하고 있었다. 그런 젊은 부류들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태연히 그 시선을 받아주었다. 그러자 그는 비굴하게도 나에게는 더 이상 적의를 드러내지 못하고 그것을 여자에게로 돌렸다.
  이미 구속당해버린 그녀는 남자의 눈빛을 거역하지 못했다. 자신을 극복하려던 의지는 어느새 밤공기 속으로 흩어져버렸다. 그가 눈길로 명령을 내리자, 그녀는 잠시 갈등하며 나와 탁자 위 명함을 번갈아보았다. 나는 다시 한 번 그녀가 그것을 집어 들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시선을 피하고는 일어나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 나를 지나치는 그녀가 떨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남자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맞았다. 전적으로 나를 의식한 행동이었다. 그는 당당하게 수컷의 승리감을 드러내고는, 그녀에게 뭐라 소곤거리며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나는 낭패감에 사로잡혀 끌려가듯 걸어가는 여자를 보았다. 이제 걸음마다 확연한 공포를 읽을 수 있었다. 내 안에서 끌어 오르는 어떤 것을 느꼈다. 나는 잠자리에 드는 것을 포기하고 게스트하우스 주인에게 근처에 술집이 있는지를 물었다.
  외면하기 위해선 술이 필요한 밤이었다.


  오래된 아스팔트와 검은 돌담들을 따라 걷다가 꺾이는 곳에, 우거진 관목들 사이로 곶자왈 입구가 입을 벌리고 있다. 앞에는 간세자리 표식과 함께 '길을 잃을 위험이 있으니 조성된 길만을 따라가라, 유해한 독초들이 자생하고 있으니 식물을 함부로 만지지 말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담배가 다 타들어갈 때까지, 나는 그 앞에서 숲으로 들어가길 망설이고 있었다. 막상 여기까지 오니 들어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어젯밤 늦게까지 마신 술 때문에, 숙취 때문인 것 같았다. 아니, 그건 아니다. 나는 내가 왜 머뭇거리는지 알았다. 왜 이렇게 찜찜하고 모처럼 만의 올레길을 즐기지 못하는 것인지 분명 알고 있었다. 아침에 게스트하우스를 나서면서 주인에게 물으니 어젯밤에 체크인한 여자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 부류의 사내들이란, 으레 그렇듯 자신의 여자가 외간남자와 같이 있는 꼴을 보지 못한다. 질투에 사로잡힌 그자가 그녀에게 분노를 쏟아냈을지 모른다 생각하니 죄책감까지 일었다. 그녀가 궁금했고 인근 모텔들을 둘러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그거야말로 부질없고 어처구니없는 짓이었다. 그저 그들이 간밤에 화해했기를 바라면서 곶자왈로 향했다. 그러나 버스에서 내려 마을구간을 한 시간 넘게 걷는 동안에도 온갖 생각들이 계속해서 따라붙었다. 더 이상 내가 기대했던 올레길이 아니었다. 이런 기분으로 곶자왈로 들어가 봤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하늘을 보니, 이제 머리 위로 올라오기 시작하는 태양이 따가워지고 있었다. 나는 꽁초를 비벼 끄고 입구 반대편 작은 언덕배기로 올라갔다. 듬성한 나무 사이로 햇살이 새들어오는 곳을 찾아 배낭에서 돗자리를 꺼내 깔고 그 위에 누웠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면서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비록 충동적이긴 했지만 설레는 기분으로 이곳까지 날아온 이유를 되새겼다. 그런 연인, 아니 그따위 젊은 부부에게서 관심을 끊자고 나 자신을 세뇌했다. 그들 때문에 15년 간 걷지 못할 곶자왈에서의 마지막 추억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긴장이 점차 풀리고 몸이 늘어졌다.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선선했고 햇볕은 얼굴을 따뜻하니 달궈주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옅은 잠결로 빠져들었다. 꿈결 속에서 나뭇가지에 부딪치는 바람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이어 발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두 사람의 것이었고 대화 소리도 들려왔다. 투박한 사내의 목소리는 뭔가 사소한 것과 개인적인 것들을 떠드는 것 같았다. 주눅이라도 들었는지 다른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낮았고 여전히 내면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싫으면 그만 걸어도 돼요."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꿈결로만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리고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나무들 사이로 돌담길을 따라 걸어오는 두 사람이 보였다. 오늘은 남자가 배낭을 멨고 여자는 맥없이 그를 따라오는 중이었다. 두 사람의 목적지도(제주가 고향이라는 여자의 제안이었을 것이다) 곶자왈이었던 것이다.
  "싫기는, 네가 가보고 싶어 했잖아." 그가 아량이라도 베푸는 듯 여자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걱정된다는 듯 덧붙였다. "너야말로 걸을 수 있는 거야?"
  그때서야 나는 여자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챘다. 여자는 여전히 수동적이고 자신을 버티며 걸었고, 어색하게 걸었다. 손으로 허리를 잡고 어정쩡하니 무릎을 벌린 채 팔자걸음이었다. 그녀는 지쳐보였다. 거리가 좀 있었고 나무들 사이로 드러나는 모습이라 확신할 순 없지만, 힘들게 걸음을 옮기는 모습에서 지난밤 질투와 분노에 사로잡힌 수컷에게서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무력하게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곶자왈 입구 앞에 서는 두 사람 사이에 긴장이 흐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자는 경고문을 읽더니 그것을 비웃으며 여자 손목을 잡고 이끌었다. 그녀는 마치 헤어 나올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떨어지듯, 남자에게 이끌려 숲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을 삼킨 곶자왈의 목구멍은 다음 먹이를 기다리듯 여전히 입을 벌리고 있었고, 나는 한동안 그것을 노려보았다. 햇살에 달궈진 얼굴 위로 온갖 충동이 타올랐고 무력감과 회피하고픈 마음이 지글거렸다. 나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멍하니 정신을 산란시키고는 다시 담배를 물었다. 한 시간 가량 지난 후에 나는 곶자왈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생각하니 나와는 관계도 없는 감정들 때문에 곶자왈을 포기한다는 것이 바보 같았다. 내년이나 내후년 쯤 분명 후회가 찾아올 것이었다.
  그 좁은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주저 끝에 내린 결정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느릿하니 삼십분쯤 나아가자 내 호흡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곶자왈 안은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생태가 파괴되어 폐쇄한다는데 그럴 필요가 있는지조차 의아할 정도였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길 주위로 화산암괴들과 온갖 나무와 식물들이 펼쳐져 있었고 그 모든 것들 위를 덩굴들이 제멋대로 휘감으며 퍼져나갔다. 어느새 하늘까지 가려버린 숲은 그 원시성을 되찾아 온전한 생명력을 내뿜고 있었다. 힘은 빛과 소리마저 차단해 숲 본연을 펼쳐보였고 그 위를 적막으로 짓눌렀다. 보이는 것은 습기를 머금은 눅눅한 녹색뿐이었으며 들리는 것이라곤 내 숨소리뿐이었다. 한 번도 쉬지 않은 걸 깨달은 나는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며 한동안 서 있었다. 먹먹한 정적이 찾아왔다. 비로소 내 안에 휘몰아치는 온갖 충동을 진정시킬 수 있었고, 감정의 고요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웅크리고 있는 진정한 나를 볼 수 있었다. 그가 말을 걸어왔다.
  아무래도 말이야, 그자를 어떻게 해야겠어.
  숲 안을 굽이굽이 뻗은 길은 내 안을 휘저으며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직시했고 실행에 옮길 수 있을지 가늠해보았다. 내가 사람을 죽여 본 것은 스릴러 작품에서가 고작이었다. 습작 시절에 선생들은 말하곤 했다. "네가 시나리오에서 아니면 언제 사람을 죽여 보겠니, 죽일 수 있을 때 제대로 죽여 봐." 덕분에 나는 내 인물들에게 이입할 수 있었고 제법 제대로, 그렇게 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내 충동이 현실 속 인간과 대면했을 때, 내 의지가 그를 해칠 수 있을까. 그 현실성에 주눅 들어 버릴 것이 분명하다.
  나는 숲의 정적 속을 부유하듯 떠 걸었고 그러면서 두 사람을 되뇌었다. 여자를 떠올리자 능욕의 순간들이 그려졌다. 비명과 울음 끝에 저항마저 체념한 그녀의 눈망울이. 그 위에서 짓누르는 발정 난 수컷의 몸짓이······ 그것이 그자였는지 다른 욕구에 휩싸인 나였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녀를 떠올릴수록 내 안의 목소리가 커져갔다는 것이다. 발걸음이 빨라지고 숨소리가 거칠어질수록 점점 확고해졌고 어느새 나는 계획까지, 시나리오 하나를 그리고 있었다.
우선 내가 드러나선 안 된다. 이런 류의 모든 계획이 그렇듯 그것은 당연하다. 그녀를 위험에 처하게 해서도 안 된다. 욕구는 당장 쫓아가 그자에게 내 의지를 표출하라 말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일만 커질 뿐이다. 올레길에서 뒤통수가 깨져 죽은 남편이 발견된다면 아내가 가장 먼저 의심받게 될 것이다. 신중하게 도모해야 한다. 나는 직업적으로 윤곽을 잡았고 시퀀스를 그렸고 세부적인 트리트먼트를 짰다. 먼저 두 사람 뒤를 쫓기로 한다. 그들이 올레길을 다 걸은 후 서울로 돌아간 뒤에도 쫓는다. 행동은 그 이후라야 하고 불의의 사고여야만 한다. 그자는 밤길에 강도를 만나거나 뺑소니를 당할 수 있다. 어쩌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겠다. 그자가 소주에 농약을 타 마시거나 한강 다리 위에서 뛰어내리는 것이다. 어떤 방법이건 녀석이 자신의 최후를 알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아니,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해서 나는 작업 때 으레 쓰는 감정의 극대화를 활용하기로 한다. 그 마지막 순간에, 놈은 자신이 얼마나 쓰레기였으며 왜 죽어 마땅한지를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곶자왈 안에서 되찾은 내 원시적 본능이었고, 이제껏 억눌러왔던 원초적 의지였다.
  흥분과 희열이 일었다. 공포에 질리는 그자의 표정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고 그녀의 연약한 몸뚱이를 떠올리면서 나는 발기했다. 나는 태고의 생명력 속에서 주체할 수 없이 생동하는 본능과 확고한 의지에 놀랐다. 인간의 도덕률 따위는 무시해도 좋다 충동하는 숲의 마법에 감동했다. 나는 진정으로, 곶자왈 속에 있었다.
  이제 그들을 피할 이유가 없었기에 속도를 냈다. 그자를 쫓기 위해서라도 두 사람 꼬리를 물어야 했다. 내가 멈춰선 것은 정적을 깨는 소리 때문이었다. 앞쪽에 얽혀 자란 육박나무 너머에서 들리는, 숲을 헤치는 소리였다. 그들이라고 생각했으나 구불구불 이어진 길 쪽이 아니었다. 다시 소리와 함께 숲에서 검붉은 커다란 것이 튀어나왔다. 노루였다. 녀석은 무엇에 놀랐는지 육박나무 사이를 뛰어넘어 내달려왔다. 그러다 나를 발견하곤 급격하게 방향을 틀어 무성한 덩굴 사이를 껑충 뛰어넘어 도망쳤다. 어디선가 날카롭게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랍고 신기한 마음을 쓸어내리던 나는 문득 두 사람이 보이지 않음을 인지했다. 이미 두 시간 넘게 걸은 뒤였다. 그녀의 상태와 내 속도를 감안했을 때 지금쯤이면 두 사람을 발견해야만 했다. 길을 벗어난 것인지 살폈지만 나는 길 위에 있었다. 안 좋은 예감을 억누르며 다시 길을 쫓았다. 더 속도를 내고 유심히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온몸이 땀으로 젖고 옅어진 숲 사이로 햇살을 다시 보게 되고 기어이 곶자왈을 빠져나올 때까지도 두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 초조해진 나는 앞쪽 언덕으로 쫓아올라가 살펴보았다. 시야가 확 트이며 마을을 향해 이어진 올레길이 보였다. 여전히 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당황했다. 어떻게 된 거지? 시간적으로 그들이 이미 곶자왈을 관통해 마을 너머까지 멀어졌을 리는 없다. 나는 분명 길을 따라 나왔다. 그들이 길을 잃은 것일까? 그자라면 모르지만 그녀는 분명 경험 있는 올레꾼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들을 놓쳤고 그녀를 구해낼 기회도 사라졌다 생각하니 불쾌했다. 이어 다른 불안이 몰려왔다. 곶자왈 안에서, 두 사람 사이에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닐까? 그자가 또 다시, 그녀가 지금쯤. 깊은 숲속에 쓰러져 있는 여자가 그려졌다. 무성한 덩굴 사이에서 고통과 공포로 흐느끼고 있을 그녀의 모습이. 생각이 거기로 미치자 난감함이 나를 옭아맸고 늦어버린 내 선택에 화가 치밀었다. 이제 분노는 온전하게 나의 것이었고, 나는 그것을 발산했다. 그 감정을 결에 새기며 뒤쪽 언덕 아래로 펼쳐진 숲을 살폈다.
  그때 그들이, 아니 그녀가 모습을 나타냈다. 애초 내면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는 멀리 보이는 모습으로도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숲 끝에서 나온 그녀는 비틀거리고 허둥대면서 길을 따라왔다. 뭔가에 사로잡혀 이끌리는 듯했다. 아니면 숲의 생명력에 압도되었다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 같았다.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상태를 알아볼 수 있었는데, 온통 흙투성이였다. 어깨와 팔은 젖은 채 잎들과 이끼가 달라붙어 있었고 단정하게 묶어 늘어뜨렸던 머리는 산발한 채였다. 얼굴에는 나뭇가지에 긁힌 듯한 상처도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하는 것 같았고, 올레꾼을 발견하자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다 나라는 걸 알아보곤 헐떡이던 숨을 고르며 아는 체를 했다. 다시 만난 것에 반가워하는 기색까지 엿보였다.
  나는 그녀를 바위에 앉히고 물통을 꺼내 건넸다. 그녀가 반쯤 남은 물을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었다. "남편 분은요?"
  "그 사람이요," 그녀는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헤어졌어요."
  목소리는 의외로 낭랑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작은 등에 흙투성인 채로 매달린 배낭을 보고 말았다.
  "헤어졌다고요?"
  "예······ 어제 밤에요."
  모든 것은 불분명하기만 하다. 텅 빈 물통을 들고 내게 말하던 그녀의 담담한 목소리가 진짜인지, 숙취와 감정에 휩쓸리다가 언덕 위에서 보았던 것이 꿈결인지.
  "어젯밤 모텔에서," 그녀는 마치 머나먼 기억을 회상하는 듯했다. "그 사람하고 이야기를 나눴어요. 밤새도록······. 우린 시작부터 조금 어긋나 있었어요. 저는 철이 없었고 갈 곳도 의지할 사람도 없었죠. 그 사람 밖에는 없었어요. 오직 그 사람만이 절 보듬어주었죠. 아니 최근 들어선 모두 거짓이었고 절 이용했던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요. 어쨌든 그때, 그 사람은 제게 잘 해줬어요. 좋은 사람이었어요."
  정말로 모든 것이 불분명하다. 그녀는 여전히 그자를 이해하려 하는 것일까.
  "어제 밤에 아저씨랑 이야기를 나눴던 게 도움이 됐나 봐요. 그 사람에게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거든요. 내 말을 들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으니까요······. 아무튼 우린 밤새 이야기를 했어요. 그 사람과 나에 대해, 사소한 것까지 다 말예요." 그녀는 머뭇거리더니 강조하듯 덧붙였다. "처음으로 내 얘기를 했어요."
  마을 쪽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곶자왈 안에서 들은 소리를 떠올렸고, 나를 지나쳐 달아나던 노루를 기억했다.
  "남편께서 순순히 들어주시던가요?"
  "그게,"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사실 그 사람은 나와 대화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말보단 행동이 앞서는 그런 사람이거든요. 처음에는 비웃었어요. 내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죠. 그리고는 또 저를······." 그자가 어떻게 나왔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진정시키고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더니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어요, 이번에는 요."
  내면을 감추지 못하는 여자의 눈빛이 빛났다. 그녀는 정말 용기를 내고 있었다.
  "나는 지금처럼 살 순 없다고 했어요. 앞으로는 지금처럼 살 지 않겠다고 했고요. 지난 4년 동안 털어놓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속내를, 모두 털어놨어요."
그녀의 메마른 입술을 보며 나는 쉰다리 한잔을 마시고 싶어졌다. 성산의 가게 할머니가 늘어놓던 말들이 기억났다.
  "그 사람은 적잖이 당황했던 것 같아요. 내가 그렇게까지 나올 줄은 예상 못했던 거예요. 나는 그 사람이 당황하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세요? 기뻤어요, 그 사람이 내 말에 당황하고 긴장하는 것이."
  그때 그 노루는, 어른 덩치만큼 커다랗던 녀석은 어쩌다 화산암괴와 덩굴 사이에 숨은 늪으로 들어간 것일까.
  "그 사람은 이내 돌변해 화를 냈어요. 다시 욕을 하고 때리면서, 죽일 듯이 나를 몰아붙였죠."
  숲이 자신만의 세상인줄 아는 녀석은 뭔가를 쫓아 생달나무와 후박나무와 육박나무 사이를 내달렸으리라. 돌무더기와 덩굴 사이로 숨은 늪 쪽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번엔 나도 지지 않았어요. 난 헤어지자고 말했어요! 고삐가 풀려버린 말처럼 울면서 애원했어요. 나를 놔달라고, 그래야만 한다고 했죠. 그 사람 곁에 있다간 정말로 죽을 것 같았거든요. 제 심정을 이해하시겠어요?"
  녀석은 자신의 튼튼한 다리로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으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저 물웅덩이로만 여겼는지 모른다. 그러나 녀석이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늪이 끌어당기기 시작했으니까.
  "내가 단호하게 나오자 그 사람이 태도를 바꾸더군요. 이번에는 울면서 사정을 했어요. 자신이 잘못했다고, 앞으로는 잘 할 테니 그만 화해하자고 말예요."
  아, 생생하니 보이는 듯했다. 다리와 등까지 빠져든 녀석이, 기다란 목을 치켜들고 공포에 질린 커다란 두 눈만 끔벅거리는 광경을.
  "그 사람이 그렇게 나오니 저도 흔들렸어요. 내가 너무 심했던 게 아닌지, 그 사람이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하지만 저는 결심을 바꾸지 않았어요. 마지막 기회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이 기회를 놓치면 그에게서 영영 헤어 나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그렇게 된 거다. 녀석은 그렇게 늪으로 빠져들었던 거다. 곶자왈은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는 마법의 숲이니까.
  "그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
  노루는 지금 깊고 빛 없는 늪 바닥에 누워 있다.
  "그냥 가버렸어요." 그녀는 곶자왈의 그 먹먹한 정적 속에 홀로 서 있는 듯했다. "나라는 애한테 질렸다는 듯이, 이제 나한테 미련 따윈 없다는 듯이, 그렇게 가버리더군요."
  "그렇군요."
  나는 그녀의 얼굴에 생기가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이제 두려움이나 공포 따위는 없었다.
  "그래서 혼자 곶자왈을 걸은 거군요."
  "그래요, 그렇게 된 거예요······ 곶자왈을 포기할 순 없잖아요, 마지막 기회인데."
  "그렇죠, 15년 동안 들어가 보지 못할 테니."
  내가 말했다. 그리고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요?"
  "계속 걸으려고요." 그녀는 내 말을 잘못 알아들은 듯했다. "동쪽 해안도로가 새로 올레길로 조성됐대요. 거기를 걸어보려고요."
  온전하게 자신을 되찾은 그녀는 수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에게서 처음 보는 미소였고, 나는 풋풋하다고 생각했다. 젊은 여자의 미소는 언제나 풋풋하고 사랑스럽다.
  나는 옷에 붙은 잎과 이끼들을 떼어주었고,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꼴을 의식하고는 흙을 털어냈다. 그녀는 손목에서 머리끈을 빼 머리를 묶으며 일어섰다.
  "안 가세요?"
  나는 그녀와 며칠 더 올레길을 걸어볼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먼저 출발하세요." 나는 바위에 반쯤 누우며 말했다. "오늘은 햇볕이 좋네요."
  이해한다는 듯이 그녀가 웃었다. 나까지 후련해지는 웃음이었다.
  그녀는 마을을 향해 난 길을 따라 내려갔다. 내가 기억하는 걸음으로 어정쩡하니 걸어갔다. 그렇지만 다시 생동하기 시작한 그녀는 풋풋하니 생기가 넘쳤고, 그렇게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나는 따사한 햇볕 속에서 흐뭇하니 그녀의 뒤를 지켜보았다. 성산의 가게 할머니 말이 떠올랐다. 이왕 곶자왈 문을 닫는 거, 30년은 족히 닫아도 괜찮겠다. 그리고 문득 의문이 일었다. 이곳이 고향인 그녀는 애초에 늪을 알았던 것일까? 그곳으로 가기 위해 그자와 올레길을 걸었던 것인가? 이미 말했지만 모든 것은 불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그녀가 원시의 생명력 안에서 진정한 자신을 보았으리라는 것이다. 그녀는 태고의 숲에 비밀을 하나 묻어놓았다. 이제 그녀는 행복해지리라. 원시적 본능에 눈 뜨고 원초적 의지로 가득했던 자신만의 비밀로 인해서. 장 그르니에도 말하지 않았던가, 비밀이 없다면 행복도 없다고.
  그 비밀은, 또한 나의 것이기도 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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