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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그가 기울어졌다

2011.12.31 00:2812.31


그가 기울어졌다


두 개의 찻잔이 책상 위에서 흔들렸다. 책상 또한 진동했고 그와 접한 방바닥까지 파동이 전해져 내렸다. 방바닥을 디딘 내 두 발 저만치 아래에는 두 명의 남녀가 침대 위에서 숙면을 취하고 있었고 그들 옆 소형 탁자 위의 시계가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진이 갓 멈췄을 때야 나는 두 발을 천천히 떼어 침대로 가 앉았다. 소포로 배달된 박스가 내 옆에 놓여 있었다. 내용물의 개봉여부와는 별개로 발신인의 이름에서부터 나는 놀라고 있었기 때문에 침대에 앉고서도 한참을 상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날이 밝아올 무렵에야 책상의 물기를 닦아내고 홀로 마신 찻잔 두 개를 개수대에 넣었다.

‘어디서 샀어?’
‘시장에서.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진 않더라.’
‘그래, 예쁜 걸로 잘 골랐네.’
‘같이 살게 된 첫날인데 소감이 그것뿐이야?’
‘그래, 좋다. 완전.’

다음 날 아랫집에 물어봤을 때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한 걸 보면 분명 어제 일이 지진은 아니었던 듯 했다. 그렇다면 내 방안에서만 지진이 발생했단 소리일까. 물론 이따금 이 마을에서 여진을 경험해보았기 때문에 이사 온 지 일 년 남짓한 아랫집 여인의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었다.(그녀가 들려주는 남편 얘기 또한 그랬다) 우편함 앞에서 우연찮게 마주쳐서 물어보았을 뿐인데 여자는 왜 이제야 아는 척을 하냐는 듯 있는 얘기 없는 얘기 전부 끄집어내며 반가워했다. 그렇게 긴 시간동안 아랫집에 머무른 건 처음 있는 일이어서 장장 네 시간이나 그 집 공기를 들이마시다 저녁 7시 정각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그야말로 녹초가 되어있었다. 그녀가 없는 공간에서 겨우 숨을 돌리고는 곧바로 침대로 가 쓰러졌다. 한 가지의 질문이 만 가지 사담으로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던 데다, 소포의 발신인과 헤어진 뒤 사람들과의 접촉을 기피해온 탓에 아랫집에 앉아서도 여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긴장한 채였다. 그래서인지 그녀가 전한 모든 이야기를 귓속에 담아두고 돌아왔음에도 그녀가 했던 말 중 무엇 하나라도 인상에 남는 구절이 없었다. 다음번에 또다시 그녀와 대화할 일이 생긴다면 지금보다는 좀 더 부드러운 반응을 보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 녹취자의 입장으로 들었던 것뿐이다. 그녀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이라면 남편과의 불화를 연고도 없는 생판 타인에게 속 시원하게 얘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 흡족해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 그녀의 비밀이 내게 버려졌다.

시트에 파묻혔던 몸을 돌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여리고 수줍게 생긴 것과 달리 무척 화통했던 그녀의 표정과 몸짓을 떠올린다. 생김새로 보면 오히려 내 쪽이 수다스럽게 보일 테지만 나는 줄곧 그녀의 얘기를 듣기만 했다.

박스는 여전히 어제와 같은 위치에 놓여 있었다. 이 방의 시간도 내가 문을 열고 나간 순간부터 더 이상 흘러가지 않으려고 버텼던 듯 그대로였다. 아까 점심때 구석으로 치워놓은 테이블을 끌어와 박스를 그 위에 내려놓았다. 버리지 않는 이상 언제까지고 내용물을 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박스의 위치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면 어제의 나는 어디서 잠을 잔 것일까. 아마 잠을 자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신혼부부의 사생활 얘기를 듣느라 뻐근해진 눈두덩을 실컷 문지르고 나서 앞에 보이는 박스에 다시금 주목했다. 두 손을 뻗어 보통의 소설책 크기만 한 박스의 테이프를 뜯었는데 반으로 접힌 쇼핑백 속에 연애 초기에 그에게 빌리려고 했는데 둘 다 잊어버렸는지 어쨌는지 받지 못했던 오버사이즈 티셔츠가 들어 있었다. 일없이 티셔츠를 꺼내 내 몸에 한번 맞춰 본 뒤 다시 내려놓았다. 그때 장난을 치다가 향수를 쏟는 바람에 냄새가 지독할 정도로 뱄었는데 지금은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다. 당연하다.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려 했지만 내 심장은 누군가에게 불시에 공격을 당한 듯 빠르게 뛰고 있었다.

‘버리려고?’
‘싸게 팔아서 샀는데 너무 커서 못 입겠어.’
‘나 빌려줘.’
‘그냥 너 해.’
‘빌려줘, 돌려줄 때 또 만나면 좋잖아.’
‘참나.’  

아랫집 여자와 나눈 몇 시간의 대화가 힘들었는지 어느 틈엔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고 새벽 3시쯤엔 감은 눈 속의 허공을 무대로 수천 가지 꿈을 양산해내고 있었다. 그 시각 아랫집에서는 알 수 없는 기계의 작동으로 덜커덩 덜커덩, 내 침대에 파동을 전하고 있었고 꿈속의 나는 연기를 중단한 채 무대 위를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내 위를 뒤덮은 천장이 눈앞에 보이는 전부여서 내가 왜 잠에서 깬 것인지 영문을 몰라 눈만 껌뻑거리고 있는 채였다. 아랫집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섰을 때는 기계소리가 규칙적으로 순환되는 중이었다. 아무리 들어보아도 그 소리의 주범은 세탁기였다. 나는 2년 전부터 오래된 산부인과 폐건물을 개축해 만든 허름한 15평짜리 원룸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또 아랫집 부부와는 일여 년 전부터 이웃사촌으로(명분만 그러하다) 지내왔기 때문에 쉽게 단정 지을 수 있는 소리였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연유에서 이해할 수 없기도 했다. 새벽 늦게 잠이 드는 내가 장담하건데 그녀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새벽에 세탁기를 돌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생활을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했었다. 아랫집 부부도 그 사실을 어렴풋이 피부로 느끼고 있었던 터라 두 커플이 어느 날 우연히 만나면 말을 하지 않아도 소소하고 정다운 분위기가 형성되곤 했었다. 성격차이, 취향차이 등등을 내세우며 그 자리에서 서로의 흉을 보기도 하고 마구 웃기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반전되었고 아랫집 부부가 아닌 다른 누구와 마주친다 해도 인사는커녕 그냥 지나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만큼 마음 둘 곳이 없었다는 얘기다. 궁극적으로 결혼을 원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둘 다 같은 미래 속에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 고민들이 우리 사이에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앉아 더 이상 서로를 볼 수조차 없도록 부추겼다. 하지만 서로를 좋아하는 것은 결단코 분명한 사실이었고 오래된 커플이 으레 그러하듯 귀찮은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쉽게 헤어지겠다는 마음을 먹을 수가 없었다.

“빨래?”

내가 새벽녘의 세탁기 사건을 얘기한 것은 이튿날 열 시경이었다. 아랫집 여자가 그렇게 되묻자마자 나는 퍼뜩 알아차리고 아니에요, 라며 돌아섰다. 이 아파트의 겨울 복도는 산등성이에서부터 피어난 안개가 자그마한 마을을 지나 한참을 흘러간 뒤 마침내 결착되어지는 자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농경지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골마을이 바로 옆에 있어 높게 솟은 건물이라고는 이곳밖에 없었던 것이다. 안개를 맞은 아랫집 여자는 재밌어하는 얼굴로 코를 훌쩍였다.

“여기 사는 게 제일 좋을 때가 바로 지금 같은 때에요.”

나도 여인의 말에 수긍했다. 번화가에서 담배 연기를 정통으로 맞는 것보다야 안개를 맞는 편이 훨씬 나은 것 아닌가. 내가 이토록 어불성설을 늘어놓는 것은 안개를 대체할 수 있는 비교대상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랫집 여자를 면전에 두고 무례를 저지르면서까지 그 대상을 찾았는데도 정말 죽도록 떠오르지 않았다.

“안개를 대신할 수 있는 것? 사람의 입김?”
“아.......”

그런 게 있었구나, 사람의 입김. 바로 눈앞에서 여인의 입김이 펄펄 새어나오는 데도 나는 왜 진작 알아보지 못했던 걸까. 그야말로 안개 그 자체였다. 안개와 입김이 한데 섞여 서로 방향을 달리 한 채 공기 중을 떠돌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낭만적으로 보였다.

한동안 낭만을 즐기다 집으로 돌아왔는데 곧바로 또 한 차례 지진이 있었다. 나는 중심을 잡지 못해 침대 위로 쓰러졌고 엎드린 그 자세 그대로 지나간 추억에 억눌려 있었다. 그때 이후로 지진은 이전 것이 맛보기인양 본격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물론 아랫집에 있을 때는 지진 따위 일어나지 않았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오늘은 편지 세 통이 집으로 발송되었는데 책상 위로 옮겨놓고 바로 아랫집으로 달려갔기 때문에 그동안 내 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는 까마득하리만치 알지 못한다. 그건 둘째 치고 그날 이후를 기점으로 아랫집 여인에게 일어난 변화에 대해서 먼저 말해야 할 듯싶다. 지진이 손에 잡힐 수 있을 만큼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면 그녀의 머릿속은 나에 대한 맹신들로 점철된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녀 스스로의 인생을 하나하나 에피소드형식으로 들려주면서 지금의 남편에게서 받지 못한 소중한 무언가가 나를 통해서 새삼 각인되었고, 더 깊게는 나로부터 구원 받고 있다는 생각에까지 미친 것이다. 아랫집 여인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그들의 집으로 불러들였고 내가 주인의 얘기를 잘 들어주기만 하는 수신형 곰 인형인양 자기네들 인생 얘기를 들려주었다. 비록 둘 다 피곤과 나태가 불거진 얼굴이긴 했지만 우리가 나눈 인생의 대화는 소녀들처럼 쉼 없이 계속되었다.

그날은 남편의 부재로 아홉 시경까지 대화가 이어졌다. 어쩌면 나는 일부러 귀가시간을 늦췄는지도 모르겠다. 아랫집에서 뒤늦은 저녁을 먹고 나서 집으로 돌아온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책상 위에 놓인 편지에 눈을 두었다. 세 통의 편지가 조금의 변화도 없이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역시.......”

역시나인가. 지각의 암반이 온전치 못해 벌어진 말 그대로의 지진현상이 아니라 내 속에서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가설이. 나는 tv를 켜놓고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애초에 진지하게 읽을 생각이 없었다는 얘기다) 이제 막 시작하려는 듯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사회자가 시끄러운 말투로 오프닝 인사를 했고 발신인 역시 따분한 인사로 편지를 시작했다.

‘이상하지.......그냥 네가 생각날 때마다 택배를 보내고 싶었어. 내용물은 즉흥적인 거라 앞으로도 뭘 집어넣을지 나도 모르겠어. 하하. 크게 신경 쓰진 말아줘. 내 스스로 널 잊는 방법을 고안해낸 거니까. 혹시 모르지. 네가 지겹다 느낄 즈음엔 오지 않을지도. 아니, 박스 속에 아무것도 없을지도 몰라.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내가 널 잊었다, 그렇게 생각해줘......’

미련 없는 듯 손에 있던 편지지를 아무렇게나 던졌다. 편지지는 진공상태처럼 느릿느릿 솟아오르더니 허공에서 한차례 진동하는 듯 보였고, 이내 그가 되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꿈쩍할 수 없었다. 그는 만화책 두 권을 한쪽 어깨에 끼고 침대 위에 앉아 나를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고질적인 딜레마인양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이거 재밌어?’
‘재미없어.’
‘넌 다 재미없어, 왜?’
‘무슨 말이야.’
‘뭐든 물어보면 재미없단 말 뿐이잖아.’
‘그렇게 꼬투리 잡을 게 없어? 세탁기나 돌려.’
‘이 새벽에 무슨 세탁기야.’
‘아랫집에 아까 외출하던데 뭘. 내일 아침에 셔츠 입고 나가야 돼. 면접 생겼어.’

아침에 일어나보니 집에 물이 새는 것 같았다. 장마가 끝난 지는 몇 달이 훌쩍 넘었다. 바닥이 흥건한 걸 보면 아랫집에서 가만있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외출해서 돌아오는 길에 물어보았더니 천장에 물이 새는 일은 없었다고 전해 들었다. 나는 전과 같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회사에서 콘티 작업을 하던 중에 수영을 할 줄 몰라 바다 한가운데 덩그러니 떠있었던 우리의 여름 바캉스 한 장면이 떠올랐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천장에서 물이 떨어져내려 책상 위를 온통 적시고 있었고 침대 시트는 새로 갈아야할 만큼 젖어 있었다. 나는 분명 동요하고 있었다. 얼마 안 가 그에게서 또 한 부의 택배가 도착했지만 일주일이 지나도록 열어보지 않았다.

아랫집 남자가 볼썽사나운 얼굴로 찾아온 것은 열어보지 않은 택배가 도착한 지 3일이 지나서였다. 잠결인데도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아랫집 여자가 떠올랐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일주일 넘게 아랫집 여자와는 복도에서조차 얼굴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녀를 잊고 살았다니 명백한 하드 디스크 오류다. 옛 애인이란 블루 스크린이 그녀에게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던 걸까.  

“어쩐 일이세요? 이렇게 늦게.”

티 쪼가리 한 장만 걸치고 있는 내 얼굴과 온몸엔 피곤이 묻어 있었다. 그는 미안한 듯 나를 보더니 결례라는 걸 알고 있지만 이것만은 꼭 말해야 한다는 듯 입을 떼었다.

“아내가 사라졌어요.”

나는 연극의 첫 대사 같은 그 문장을 한귀로 흘려듣고 있었다. 입고 있는 티셔츠가 늘어질 대로 늘어져 있었지만 그런 창피함마저 종식시킬 만큼 졸음은 만삭이었다.

“언, 언제.......?”

그렇게 되묻던 두 눈이 그가 들고 있는 청바지로 향했다. 아랫집 여자가 남편이 싫어해서 청바지를 한 번도 입어 본 적이 없다면서 내게 빌려달라고 했던 청바지다.

“아, 이거 혹시 은효 씨 건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가 2주 전에 잠시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했는데 그 이후로 아무리 연락을 해도 받지 않아요. 그래서 은효 씨한테 찾아온 거예요. 많이 친했잖아요, 둘이.”

많이? 조금은 친했나? 아니, 아예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섭섭하지 않을 정도다. 퇴근하고 돌아왔을 때 내가 본인의 방에 앉아 있었던 적이 많아서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또 그렇다고 아니라고, 우리는 서로의 생일도 모르는 남이라고 얘기할 수도 없었다.

“네.......근데 그 청바지는.”
“세탁기 안에 들어가 있었어요.”

그럼 그동안 빨래를 하지 않았단 얘긴가? 아랫집 남자에게서 내가 그녀에게 빌려준 청바지를 받아들었는데 모래가 옷 전체에서 흘러내렸다. 아마 지금쯤 남자의 집 안과 아파트 복도엔 듬성듬성 모래밭이 형성돼 있을 지도 모른다.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많은 모래를 청바지 속에?

바다.

“바다에 갔다 왔나 봐요.”
“바다요? 아내는 바다를 싫어하는데요.”

‘바다가 좋아요. 머릿속에 집어넣기 벅찰 만큼 힘든 일이 있을 때 거기에 빠뜨려버리면 모든 게 끝나는 기분이에요.’

여자의 말과 남자의 말이 동시에 공기 중에 흩뿌려져 나를 기분 나쁘게 휘감았다.

“그럼 여행을 놀이터로 갔을까요? 바다를 싫어한다는 거 확실해요? 아는 척 하긴 싫지만 제가 들은 바론 바다를 좋아한다고 했어요.”

남자는 혼란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럴 리가 없다고 대꾸했다. 아내가 뭘 좋아하는지 하나라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세요? 라고 곧바로 응수하고 싶었지만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모르는 남자에게 아무리 얘기해봤자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나는 청바지를 받아들고 남자를 돌려보냈다. 손을 조금만 움직여도 청바지에서 모래알이 떨어져 내렸다. 어쩌면 이건 여자의 힌트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찾으러 와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남긴 힌트. 하지만 남자는 둘만의 추억이 있을지도 모르는 그 바다로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런 낙막한 예감이 들었다.

모래알을 쓸어 담은 김에 밀린 청소와 빨래를 했다. 그 어느 때보다 열심이었다. 본인 때문에 여자가 떠났다는 걸 모르는 남자에게 화가 나기도 했고 남자 하나 못 잊어서 환상나부랭이를 만들어내는 내 자신이 밉기도 했다.

오후 여섯 시경, 빨래냄새가 찌든 손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저녁거리를 사기 위함이었다. 차를 타고 이십 분 정도 거리에 편의점이 있었다. 아랫집 부부의 결혼생활을 내 멋대로 상상하고 추측하다보니 어느새 큰 길 옆으로 편의점 로고가 나타났다. 차를 세우고 그쪽으로 걸어가는데 어떤 남자가 카운터 위로 군것질거리를 잔뜩 올려놓는 게 보였다. 뒷모습만 보아도 아랫집 남자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들어가지 않고 전면 창에 서서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의 존재가 불편해졌다. 왜일까. 나는 그녀를 찾으려는 열정이 전혀 없는 사람인데 여자를 찾는 걸 도와달라고 할까봐서? 아니면 그와 그녀, 그들과 관련한 거의 모든 이야기가 내 머릿속에서 활개를 치고 있어서? 모르겠다. 도대체 그녀는 내게 어떤 존재였던 걸까. 친구? 심심할 때 흥밋거리를 제공해주던 사람? 아님 0?

그가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확인하고 편의점에 들어섰다. 필요한 것에서부터 필요하지 않은 것까지 죄다 구입했다. 한동안은 먹는 걸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무의식적으로 1층 계단을 올려다보았는데 아랫집 남자가 비닐봉지를 양손에 들고 본인의 집 앞에 서 있었다. 나를 발견하고 반갑다는 표정을 짓더니 맥주를 마시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그의 흉을 본 것이 미안해서였는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가 뭘 샀는지 궁금한 것도 아니었는데 아랫집 남자는 내가 비닐봉투 속을 살피고 있다고 느꼈는지 주절주절 말을 꺼내놓았다.

“아까 편의점에 들렀는데 아내가 한 일주일 전엔가 거기 들렀다고 하네요. 그날이 제 생일이었거든요. 아마도 선물 포장지를 산 것 같아요.”

그의 얘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2층 계단과 복도를 거쳐 집 앞에 다다랐을 때에도 머릿속 공간은 온통 택배 박스들로 채워져 있었다. 개봉되지 않은 미지의 택배. 테이프가 틈새 없이 둘러쳐진 박스들이 내 방에 차곡차곡 쌓여간다. 그들 스스로의 정체성도 알지 못한 채 세월은 덧없이 흘러가고 내용물은 본래의 감을 잃은 듯 퇴색된다. 나는 그런 악취 속을 헤매고 있었다.

한동안 공상에 빠져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참, 아랫집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지. 나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현관문을 열었다. 문짝이 조용히 뒤로 젖혀졌다. 분명 발을 안으로 들이자는 생각을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박스를 뜯었는데 안이 텅 비어 있다면 도대체 그땐 어떻게 해야 할지 대안이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뭐해요? 안 들어가고.”

마음이 급해진 남자가 내 옆을 비켜 들어갔다. 창문을 열어놓고 간 탓에 냉한 공기가 우리를 덮쳤다.

“병따개 있나요? 근데 여기 정말 춥네요. 불은 때고 살아요?”

나는 신발을 벗다가 발끈했다.

“아내가 돌아오길 바라는 사람 맞아요?”
“네? 무슨 그런.......”
“남편이 아내가 가출했을 때 보편적으로 하는 행동들 대충 대충 건드려놓고 나중에 아내가 돌아오면 네가 없는 동안 내가 이만큼 널 찾기 위해 수고를 했다, 뭐 이렇게 생색낼 거 아니에요?”

‘요즘 썩 사이가 좋지 않아요. 남편 일이 바빠지긴 했지만 퇴근해서 제가 인사를 하면 받아주지도 않고 침대로 가버려요. 말다툼까진 아니지만 어느 날 진지하게 남편의 무관심에 대해 토로했는데 들은 체 만 체 하면서 밥을 달라더군요.’

아랫집 남자는 아랫집 여자가 자신에게 마이너스가 될 만큼 무리한 일을 저지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자를 찾는 일에 힘을 들이지 않는 것이다. 주제넘은 생각인가.

그의 부탁대로 아랫집에서 맥주를 마셨다. 정말 맥주밖에 마시지 않았다. 남자는 급한 일이 있는 사람처럼 한 번에 캔을 비우고는 청바지에 대해 물어보았고 나는 지금 빨랫줄에 걸려 있다고 간단히 대답했다. 우리의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더도 덜도 말고. 아랫집 여자와의 대화가 그리울 만큼 짧았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아랫집 여자는 여전히 행방불명이었다. 내가 보기엔 남편의 마음속에서 이미 오래전에 행방불명된 여자였다. 남자는 아내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며 굳이 내게 그것을 보여주었다. 내용은 대부분 공백이었고 글자 수를 채운 건 한 줄도 채 되지 않았다. 이제 그만하려고 해. 근데 당신한테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아. 아랫집 남자는 내게서 시선을 돌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이제 어떡하죠? 라고 물어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자는 여자가 돌아오리라고 생각했다. 며칠 뒤 두 통의 편지가 추가로 배달되었다. 남자는 택배 직원에게 한사코 받지 않겠다고 고집 부리다가 억지로 편지를 건네받고는 휴지로 가득한 쓰레기통에 그것을 쑤셔 넣었다. 또 얼마 후엔가 편지가 왔다며 나를 아랫집으로 불러냈다. 몇 주는 밀린 듯 보이는 설거지거리가 주방 식탁은 물론이고 냉장고 위에도 팽개쳐져있었다. 아랫집 여자 없이 그가 할 수 있는 집안일은 없어보였다. 침대 쿠션위에 뒤집어진 재떨이를 보고 아연실색한 나는 편지 내용 따위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죄송해요, 급하게 부른다고 치우지를 못해서, 라고 하던 남자의 사과조차도 가식으로 여겨졌다. 결국 편지 두 통을 남자의 손에서 기분 나쁘다는 듯 낚아채고는 집으로 올라왔다.

‘당신을 만나서 8년 간 이야기를 나눈 것보다 한 달간 은효 씨랑 얘기한 게 더 많아. 내가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모든 것들이 당신에게 가 닿지 않고 내 머릿속에서만 시작되고 끝이 났어. 그런데 어떻게 나보고 돌아오라는 말을 할 수가 있어? 이제 더는 연락 마. 이혼서류는 곧 보낼 테니.’

나는 편지를 접어 택배 박스 옆에 고이 놓아두었다.

그로부터 몇 달이 흘렀고 마을 어귀서부터 바람에 실려 날아온 낙엽들이 창밖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그 즈음 나는 지진을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그와 모든 걸 함께했던 방에는 이제 단 몇 초도 앉아 있을 수 없을 정도였다. 온 사방에서 그의 그림자가 나타나 내 얼굴 위를 뒤덮었다. 그러던 중에 소식이 뜸하던 아랫집 남자가 갑자기 저녁에 나를 불러냈다. 내키지 않았지만 간절한 남자의 목소리에 마음이 동했다. 문을 열자마자 남자는 창문을 꼭꼭 닫았는데도 찬바람이 심하게 분다는 둥, 하루 종일 아내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는 둥 횡설수설했다. 얼굴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많이 수척해보였다. 내가 다가가 창문을 확인했는데 바람이 들어올 틈새구멍조차 두꺼운 비닐에 의해 막힌 상태였다. 나는 깜짝 놀라서 남자를 돌아다보았다. 그래, 맞다. 그도 나처럼 과거의 추억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 그의 가슴 속에서는 바람이 불고 있다. 세상이 흔들리지 않는데 내 속에서는 모든 것들이 흔들린다. 나는 그를 세상에 하나뿐인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그도 이런 내 모습에 놀란 듯했다. 아내에게 전혀 미련 없는 듯 말했던 그도 실은 아내가 그리웠던 것일까.

“그리우면 그립다고 해요.”
“무슨.......말씀이세요? 전 아내가 돌아오든 말든 상관하지 않아요. 벌써 몇 개월짼데. 괘씸하다면 괘씸했지.”

자존심을 지키려는 그의 모습이 도리어 더 안쓰러워 보였다.

“당신을 떠나기 며칠 전인가, 당신이 바람을 펴는 것 같다고 했어요. 물론 지금의 당신이야 발뺌하겠지만 저는 그녀의 친구로서 그녀의 직감을 믿고 있어요.”
“바람이라뇨. 말도 안돼요.”
“언젠가 새벽까지 당신이 오지 않는다며 우리 집에 찾아왔더군요. 연락도 되지 않고 걱정만 잔뜩 하고 있기에 제 전화로 대신 걸어보니 언제 그랬냐는 양 전화를 받더군요. 그때 아내 분 표정이 어땠을 거 같아요?”
“그, 그건.......”

그때였다. 남자가 머리를 감싸 쥐더니 인상을 구겼다. 두려움에 떠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침대에서 일어서더니 둘만 있어도 비좁은 방을 바람을 피하듯이 옮겨 다녔다. 나중엔 옷을 움켜쥔 채 구석에 가서 쪼그려 앉더니 가까스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물어왔다.

“당신이 말한 게 이거였군요. 그럼 아내가 생각날 때마다 이런 게 나타나나요? 없앨 수는 없어요?”
“논지를 피하시는 군요.”
“그게 아니에요. 정말 바람이 분다니까요.”
“당신의 추억 속에선 바람이 부나 보네요. 아이러니하게도.”
“맞아요. 이곳으로 오기 전에 살던 곳이 언덕지대여서 아내와 데이트를 할 때 바람이 많이 불었던 것 같아요.”

스스로가 만들어낸 환상이 한 꺼풀 꺾이자 그는 차를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잠시 후 찻잔 두 개가 테이블 위에 놓여졌다.

“바람은 맞아요? 어떤 여자였죠? 지금도 만나요?”
“무례하군요.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다른 여자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럼 아내에게 왜 그렇게 무관심하셨죠? 왜 그런 오해를 하게끔 행동하셨어요?”
“잠깐 권태기가 왔던 것뿐이에요. 전화도 받고 싶지 않고 대화도 하기 싫어지더군요. 마구 따지다가도 제가 뭐라고 하면 금세 백기를 드는 아내가 재미없기도 하고 조금 귀찮아졌어요.”

그런 말을 하던 중에 남자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이전 것은 폭풍전야였던 모양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바람이 회오리로 변하여 집안의 모든 물건을 헤집어놓고 있었다. 그때 느닷없이 내가 만든 지진마저 강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내 방이 아닌 곳에서 지진이라니 납득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집은 내가 사는 집과 비슷한 구조와 가구들로 채워져 있다. 내 머릿속 과거의 환상이 충분히 착각할 만한 공간이었다. 옷걸이가 넘어지고 스탠드가 떨어져 부서졌다. 벽과 바닥 시트에 균열이 일었다. 남자와 나는 각자의 세계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침대 아래로 피신해야했다. 사방에서 돌풍이 일었고 주방기구들이 짤랑짤랑 흔들리는 소리가 청각을 옥죄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데? 계속 이런 식으로 싸우다간 같이 못 살아.’
‘.......지금 헤어지자는 소리야?’
‘지금 이렇게 싸우는 건 현실이 아니야. 이건 우리의 판타지야. 진짜 현실은 앞으로 제대로 된 수입도 없이 생활해야하는 우리라고! 근데 이대로 살 수 있겠어? 비현실적인 사랑싸움이나 하면서?’

끔찍할 정도로 생생했다. 두려움에 나도 모르게 남자를 껴안았다. 남자는 바람소리 때문에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하더니 귀를 틀어막고 눈을 감았다. 우리는 도망가는 일에도 능숙하지 못했다. 문 하나만 열면 옛 사랑과의 추억을 피할 수 있는데 미련하게 피하지 않는 것이다.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아내가 그랬어요. 나 같은 남자와 사는 여자는 살해당한 거나 다름없다고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너무 충격이었죠. 그렇게 다투고 나서 아내가 여행을 간다고 했어요. 저도 화가 나서 어디든 좋으니 가버리라고 소리쳤죠.”
“왜 진작 그 얘기를 안 한 거예요? 당신 진짜.......”

이기적이야. 이 말을 끝내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보였다. 이미 남자에겐 내 말이 들리지 않았으니까. 얼마 뒤 지진이 멎고 바람이 잦아들었을 때는 그와 함께 울고 있었다. 자신을 압박하며 휘몰아치던 무언가가 삽시간에 사라지자 우리는 급격히 외로워졌고 또 슬퍼졌다. 어느 순간엔 네 명이 함께 울고 있는 듯했다. 우리는 눈물을 닦고 또 닦았다. 나중에 눈물이 마를 즈음엔 본래의 내 자신을 되찾은 듯 마음이 평온해졌다. 엉망진창이 된 방안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남자가 부은 두 눈을 내리깔고 고해성사하듯 말문을 열었다.

“이제 알겠어요. 아내가 저를 얼마나 챙겨줬었는지. 근데 돌이킬 수가 없어요. 그럴 자신이 없어요.”

남자는 내가 자신의 집에서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택배 박스를 열었는데 편지는 들어있지 않았다. 아니,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텅 빈 상자였다. 즉, 그가 나를 잊었다는 의미였다.

다음날 아침, 웬일인지 일찍 눈이 떠졌다. 그동안 배달된 택배 상자들을 겹쳐들고 1층 복도로 내려갔는데 머리가 까치집이 된 남자가 난간에 기대어 아침 해가 기우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입김이 눈앞에 있었다. 나도 모르게 남자의 옆에 서서 태양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지난밤에 여울처럼 절박해보였던 남자의 눈빛이 조금씩 안정감을 되찾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따뜻함이 느껴졌다. 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어 다시금 태양을 쳐다보았다. 순간 남자친구의 얼굴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그는 천천히 기울어졌다. 서산 아래로 천천히 기울어졌다. 그리고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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