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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에는 작품이 많지는 않았습니다만 기본기가 탄탄한 작품이 많아서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평을 하는 입장에서 주관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려고 항상 노력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스타일과 신념을 밀어붙일 수 있는 것도 작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선택입니다. 이 평이 평을 받는 사람에게도 쓰는 사람에게도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가족 야구 - 조원우

A : 구성 면에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소설입니다. 야구라는 소재를 잡고 끌어가는 이야기에는 불필요한 부분이 없습니다. 야구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취미고, 가슴에 맺힌 한이며, 가족의 평화와 분쟁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며, 가족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계기였으며, 결국 무너뜨린 계기였고, 또한 후반에 밝혀지지만 장애가 있는 주인공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경험하는 가정폭력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단지 주인공이 가정폭력을 야구로 바꾸어 인식하는 감각이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되는가 생각하면, 설명과 단서와 보여주기가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반전에 중심을 둘 필요가 없는 소설입니다. 싸맨 것을 풀고 좀 더 과감하게 보여주어도 좋겠습니다.
슬픈 정황임에도 주인공의 시선을 통해 야구로 바꾸어 보여주는 기법이 마치 두 개의 필름을 겹쳐보는 것처럼 시각적인 경험을 선사합니다.

B : 자폐를 가진 주인공의 시선으로 잔혹한 가정폭력의 이야기를 스포츠로 환치한 작품입니다. 특별히 프로야구라는 스포츠에는 '국민 스포츠' 특유의 분위기가 있고, 그 분위기를 재미있게 잘 살렸습니다. 야구와 가정폭력이 겹치는 장면을 묘사할 때의 문장은, 매우 유쾌합니다. 박민규나 박현욱의 작품을 연상시키기도 하고요. 야구가 아버지에게 가지는 특별한 의미 때문에 아버지라는 인물이 생생하게 살아납니다. 악인에게 연민을 드러내면서도 이야기의 중심을 놓치지 않는 시선이 훌륭합니다.
아쉬운 점은 재미있는 문장을 살리려다보니 주인공의 시선이 흔들린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 적지 않다는 점입니다. 주인공은 산업혁명이라던가 마구(魔球)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는 굉장히 지적인 인물로 보이는데, 아버지의 음소거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에 와서는 어떤 게 솔직한 주인공의 마음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자폐라는 설정에까지 도달해서는 부모에게 독립적인 시선을 유지하는 문장들을 더욱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주인공은 위악을 부리고 있는 것도 아니며 순수하게 자폐 때문에 상황에 대한 이해 능력이 부족한 것으로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솔직하지 않은 인물로 비치게 됩니다. 재미있는 문장은 좋지만 시점이 흔들리는 걸로 느끼게 되면 곤란하겠지요.


오빠 찾니? - 밤조심

A : 가족 안에서의 갈등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아이돌에 빠져드는 주인공, 아이돌의 위치를 알려주는 충분히 있을 법한 스마트폰 앱에 이르기까지, 흥미로운 서사로 시작하는 소설입니다. 주인공이 아이돌에게 의지하는 심정도, 그래서 아이돌을 만난 순간 끌어안으며 우는 심경도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그러니 마지막 문장을 지우고 이야기를 더 끌어가 주시기 바랍니다. 충분히 이야기가 더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좋은 시작을 했다고 안심하지 마세요. 좋은 아이디어를 내는 것보다 좋은 시작을 하는 것이 열 배 어렵고, 좋은 시작을 하는 것보다 좋은 결말을 내는 것이 열 배 어렵습니다.

B : 가족이라는 단위에서 정서적 위안을 받지 못하고 아이돌에 빠져든 소녀가 그 아이돌 가수에 의해서 살해당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흥미롭게 읽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생활에 밀접하게 파고든 스마트폰 앱에 대한 공포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녀가 기대를 걸었던 아이돌 가수가 그녀를 살해한다는 설정은 자극적이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생산하지는 못합니다. 그녀의 욕망이 배신당해야 할 필연적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직 소녀의 내면까지 깊숙히 들어가지도 못한 독자의 입장에서는 급격하게 소설에서 튕겨져 나오게 됩니다.

두려움에 맞서다 - 엄길윤

A : 구성이 좋습니다만 사건 자체는 작은 만큼 묘사에 많은 것을 기대야 하는 소설입니다. 어린 소년이 화자이기에 표현을 의도적으로 단순하게 했을 수도 있지만 묘사가 다소 딱딱한 편입니다. 화자의 공포를 전달하기 위해 '무섭다'는 말을 반복하지만, 반복이 과해서 감정이 고조되기보다는 감정을 강요받는 기분입니다. 무섭다는 말을 쓰지 않고 무서움을 표현해 보세요. 훨씬 더 장면이 생생해질 겁니다. 
대화가 다소 당황스러울 정도로 서술적입니다. 소설에서는 어느 정도 문어체의 대화도 허용되기는 하지만, 소설이 이보다 더 길어지면 독자가 느끼는 부자연스러움이 더 커질 겁니다. 아이의 말투와 어른의 말투는 다르고, 대화는 문장과 다릅니다. 좀 더 자연스럽고 다양한 말투를 연구해주세요. 
피해자가 가해자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옮기는 구도가 재미있었고 반전이 있는 결말이 좋았습니다.

B :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 어릴 적에 이웃의 커다란 셰퍼드한테 쫓겨서 울며 도망다니곤 했었죠. 그때의 공포란 그야말로 무지막지했습니다. 나이 어린 주인공은 충분히 큰 개를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는 알고보니 크게 짖어대던 그 개 역시 주인공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설정이 매력적입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이 개를 살해하겠다는 충동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미약합니다. 주인공의 나이를 감안한 설정 때문인지, 주인공의 사고패턴은 매우 단순하게 이전되며 그 때문에 사고 이전의 매커니즘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개를 살해한 이후 자신의 집에 있는 개를 살해해야겠다는 충동이 드러나는 부분은 지나치게 급작스럽습니다. 주인공의 감정에 대한 묘사를 좀 더 섬세하게 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공포라는 감정은 '표현하기 어려운 이 불쾌한 느낌'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무엇보다 아이에게는 가장 본연의 감정 중 하나입니다. 아이의 시선으로도 좀 더 풍부하게 표현해 줄 방법이 있을 거예요.


어느 심사평 - 바닐라된장

A : 심사평을 하는 사람의 시선을 확 끄는 제목이군요. 심사평으로 이루어진 짧은 소설로, 결말에 가서 심사기준과 함께 선정단의 의도가 드러날 때 피식 실소를 흘리게 합니다. 소설의 의도와 개그 포인트가 헷갈리는 면이 있지만 시선을 끄는 소설이었습니다.

B : 오디션 프로그램 춘추전국의 시대에 어울리는 엽편입니다. 독설가로 보이던 심사위원은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는 로맨티스트였네요.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만한 엽편이었습니다.

그녀가 잠을 자는 이유 - 민아

A : 흔히들 잠을 자는 이유를 쉬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잠을 자는 이유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요. 잠을 자지 않는 동물도 많고요. 낮이나 밤, 겨울 등 활동이 불가능한 시간대를 견디기 위한 가사 상태라는 설도 있고요. 꿈은 자는 동안에도 쉬지 않는 뇌 활동의 결과겠습니다만 이미 우리의 영혼에는 꿈이 필요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짧게 표현되었지만 연구한 흔적이 돋보입니다.
하지만 '잠을 자는 이유는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 꿈을 꾸기 위해서다'로 진행된 저자의 결론까지 독자를 친절하게 이끌었는지는 의문이 듭니다. 잠을 한 번 잔 것으로 바로 꿈을, 그것도 생생한 꿈을,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꿈으로 직통으로 이어진 것, 그러다가 잠꼬대를 해서 관계가 틀어질 위기에 처한 것은 우연이 과하고, 그에 대해서도 다소 해설을 풀어주었으면 좋았겠습니다. 
해설은 상세할 필요가 없습니다. 작가가 생략했거나 과하게 끌어간 부분에 대해서는 스스로 '운도 좋지.' ‘이상하기도 하지’ 하고 가볍게 짚고 넘어가는 것만으로도 훨씬 자연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한국의 교육현실을 잠이 제거된 시대를 통해 표현한 점이 훌륭했습니다. 

B : 잠을 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잠을 자는 동안 인간은 무의식에서 위로를 받지요. 죽음의 가사체험, 영혼의 안식, 꿈이라는 형태의 소망 획득이라는 작가의 통찰은 인생에 있어서 잠이 담보하는 철학적 지점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잠을 자지 않는 시대와 잠을 갈구하는 인간들은 김보영의 「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를 연상시키네요. 하지만 우리에게 매우 일상적인 잠이라는 존재를 재확인하며 경이감을 느끼기에는, 이 소설 속에서는 잠을 선택하는 사람도 적지 않은 것 같아요. 잠을 회복하려는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에 비해서 이들이 비밀결사가 될만큼 전복적인 존재로 보이지도 않고요. 더욱이 잠과 꿈을 통해서 이 인물이 확인하는 것이 매우 직접적인 '소망 충족'이라는 점은 적지 않게 아쉽습니다. 잠에 대한 철학적 통찰, 교육현실에 대한 비판, 청소년 성소수자의 문제 등 굵직한 이야기들을 다양하게 다루고 있으며 그 이야기들을 과잉되지 않게 잘 녹여냈습니다만 잠을 다루는 방식이 단선적인 것이 아쉽습니다. 꿈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는 무의식이지 않습니까?

우주 정복 - 니그라토

A : 소설의 설정이나 아이디어 메모에 가까운 글로 완성된 소설로 보기 어렵습니다. 작가가 글을 많이 써 내는 것이 의미가 있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충분히 힘을 들이지 않고 충분히 손보지 않은 글을 너무 많이 세상에 내다 보면 독자의 신뢰만 잃을 뿐입니다. 작가가 작가로 평가받는 데에는 한 작품이면 충분합니다. 여러 편에 쓸 힘을 한 편에 투자해 보세요.

B : 도덕적 인공지능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도 자세히 설명되지 않으며, 인류가 어떻게 그 도덕적 인공지능을 구성하게 되는 지도 그다지  묘사되지 않습니다. 마치 태초부터 있던 신처럼, 도덕적 인공지능이 있습니다. 소설을 다 읽은 지금까지도 누군지 알 수 없는 소칼이라는 등장인물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우주의 방정식을 풀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도덕적 인공지능에 대한 연구를 성공시키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납니다. 결국,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소설에 대해서 무어라고 평해야 할 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모닥불 - 김효

A : 요정과 교류하는 사회에서 요정의 환심을 사는 작업(모닥불 피우기)이 회사원의 지루한 일상이 되고, 그 사소한 기술에 생활과 승진이 결정되는 설정이 흥미롭습니다. 사람의 사소한 버릇, 행동에서 이유 없이 사랑을 느끼듯이 이유 없이 혐오를 느끼는 사람이 등장하고, 요정들은 반대로 이를 이유 없이 좋았다고 말합니다. 설명되는 것이 적어 많은 의문을 남긴 채로 종결됩니다만 미지의 종족과 함께 일상을 나누며 살아가는 풍경이 자연스럽게 표현되었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와 의문, 그리고 애잔한 따듯함까지 표현되었습니다. 분위기가 좋은 소설입니다.

B : 모닥불을 통해 요정에게 생명의 돌을 얻는 세계가 배경입니다. 그 세계에서 요정들에게 특별히 사랑받는 형태의 모닥불을 만드는 주인공이 있습니다. 요정은 주인공의 방식이 "비효율적이고 맹목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그다지 고쳐질 것 같지도 않고, 이미 주인공에게는 '비효율적이고 맹목적인 삶의 방식'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겠지요. 인간 중 누군가는 그 방식에 대해 견딜 수 없이 혐오하게 된다고 증언합니다. 세계는 효율을 중요시하고 인간들은 비효율적인 것을 혐오합니다. 그러나 주인공의 비효율적인 방식은 착취에 효율적이었기에 기이하게 효율적이라고 찬양받습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주인공은 효율적인 세계에 등을 돌리고 비효율적인 삶을 선택합니다. 비효율성과 효율성이 대조를 이루는 방식이 흥미로웠습니다.

악어는 악어대로 그곳에 - 김효

A : '모닥불'과 마찬가지로 설명해 주는 것은 하나도 없군요. 뜬금없이 낚싯줄에 걸린 악어와 뜬금없이 대화하고 헤어집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강렬하고 분위기가 있습니다. 짧은 소설에서 이만한 느낌을 주기 쉽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좋은 감각을 갖고 계십니다. 하지만 작가가 여기서 만족해도 좋은가 하면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독자와 소통하려는 노력이 과할 필요는 없지만 나태할 이유도 없습니다. 단점이 있는 소설은 다른 장점이 도드라져야 하고, 그건 작가에게 앞으로도 어려운 도전일 수 있습니다. 좋은 스타일을 갖고 계시지만 한 번쯤 조율을 고민해 보아도 좋겠습니다.
하지만 소설의 세계는 평균값이 아니라 튀는 점으로 승부하는 세계일 수 있으니, 자신의 개성을 살려 스타일과 장점을 더 갈고 닦는 방향으로 나아가셔도 좋습니다. 

B : 선문답같은 소설입니다. 설명해주는 것은 많지 않고 상당히 불친절하지만 여러가지를 상상하게 만듭니다. 지나치기 쉬운 곳에,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있는 단서들에 귀를 기울여서 공포를 이겨내야 한다고 주장하던 김이 사고의 확장 끝에 공포를 재확인하고 악어에게서 도망가는 모습이 아이러니합니다.

기억 - 초연

A : 최면에 대해 상당히 공부한 흔적이 보입니다. 전체적으로 이야기도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고 문장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와 문장이 깔끔할 뿐 내용이 흥미롭지 못합니다. 최면으로 밝혀진 노인의 기억은 심리학자의 감흥과는 달리 놀랍지 않고, 예상보다도 훨씬 평범합니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잘 쓴 국어숙제 같은 글입니다. 서론, 본론, 결론이 분명하고 앞뒤가 맞는데 감흥이 없습니다.
'왜 기억이 사라졌는가'는 충분합니다만, 사라진 기억은 어떤 형태로든 이야기에 갈등을 부여했어야 합니다. '기억이 사라져서 무엇이 변화했는가', '그 변화한 부분으로 인해 주인공이나 주변인물에게 어떤 위기가 왔는가.', 혹은 '기억을 되찾은 뒤에는 무엇이 변화하는가'를 생각해 주세요. 하다못해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에도 어떤 방해도 어려움도 없습니다.
그래도 이 글은 예전에 올리신 ‘바람이야기’나 ‘기사도’보다는 한결 성장한 글입니다. 짧은 시간 안에 성장하고 계십니다. 건필을 기원합니다. 

B : 아내를 잃어버린 노인이 그 충격 때문에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충격 때문에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은 충분히 개연이 있을 수 있으며, 잃어버린 자신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이라는 것은 원형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만한 주제입니다.
그러나 이야기 자체는 그다지 충격적이지도 않으며 파생하는 의미가 있지도 않습니다. 병원에서 이 문제를 은폐해서 노인에게는 어떤 문제가 발생하였습니까?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 기억이 이 인간의 삶에 파생하는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노인의 삶에서 아내를 잃어버렸던 때의 기억을 다시 찾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기억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해주지 않는다면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라도 독자에게 재미를 제공해야 할 텐데, 그런 스릴도 없습니다. 이 소설은 여기에서 끝을 맺을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동전전쟁 - 빛옥

A : 강대국의 돈 먹는 기계(말 그대로) 간의 무력전쟁을 유쾌한 필치로 풍자하셨습니다. 슈퍼로봇 만화에 판타지를 결합시킨 듯한 세계관은 자연스럽게 현실세계를 연상시키고, 능청스러운 악덕 국제 무기상인 스승님은 뻔뻔하고 사랑스럽습니다. 로잘린을 아름답게 구현하려는 시끌벅적한 갈등으로 전개에 양념을 넣어 독자를 붙들어놓는 기술도 좋습니다. 왜 안드로이드에 동전이 필요하며 그 동전이 어디로 갔는가의 의문으로 마지막까지 독자의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하며, 결말도 통쾌하고 즐겁습니다.

B : 군비 경쟁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가볍고 유쾌하게 다룬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라이트 노벨에서 흔히 등장할 법한 미친 과학자 계열의 살짝 맛이 간 스승님과 그 스승님에게 딴죽을 거는 미녀 제자라는 설정은 절벽이 무너지는 무거운 이야기를 미소를 띠며 지켜볼 수 있게 합니다. 로봇에게 은화를 먹게하는 방식으로 전쟁의 참상을 줄이려고 시도한 스승님의 꼼수도 사랑스럽습니다. 더욱이 단순히 스승님에게 돈을 투자하는 게 아니라 오락실처럼 끊임없이 동전을 먹어야만 움직인다는 로봇의 설정도 무거운 이야기를 유쾌하게 만드는데 효과적으로 기능합니다. 즐겁게 읽었습니다.

아스텔라 길 – 빛옥

A : 지하 천 미터에서부터 올라가는 길고도 긴 승강기에서 우연히 두 사람이 만납니다. 여자는 하늘을 보러 가는 길이고 남자는 도망치다가 우연히 승강기에 와서 지상으로 잡혀 올라갈 판입니다. 상황이 다소 호들갑스럽고 부자연스럽습니다. 단지 지상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죽음을 연상하는 알테어와 겨우 체험학습을 위해 주말마다 별을 보는 리라의 세계관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지상에 대한 두 사람의 지식과 관념이 다른 듯 한데 상호작용이 매끄럽지 않습니다. 바깥 상태를 아는 리라는 무엇에 좌절하고 있으며, 왜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나요?
별은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신비한 풍경일지 몰라도 이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별을 아는 세계에 사는 독자입니다. 이야기의 힘은 별이 나타나는 순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좀 더 섬세하고 아름답게 풍경을 느끼게 해 주어야 할 겁니다.
어쩐지 알퐁스 도테의 '별'의 미래버전 같은 귀여운 이야기였습니다.

B : 지저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세계를 그린 가벼운 소품입니다. 점성술과 별에 대한 이야기가 즐겁게 어우러집니다. 주인공의 이름과 쫓아온 남성의 이름에 직접적인 비유를 넣어서 로맨스를 상상하게 만드는 것도 좋습니다. 두 사람의 눈 앞에 별로 가득한 하늘이 열리는 장면이 짜릿합니다. 그 짜릿한 장면을 ‘하늘과 별과 우주’ 라는 설명적 단어로 내지르는 게 조금 아쉽네요. 만약 눈에 실제로 그 하늘이 보인다면 광막하게 펼쳐진 공간에 독자도 감동했을텐데, 안타깝게도 실제로 하늘이 보이지는 않아요. 그 순간까지 침착하게 이야기를 이끌고 왔으니 그 순간의 폭발을 작게 터뜨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알테어에게 빅뱅을 느끼게 해 주세요!

불지 않을 때 바람은 어디에 있는가 - 먼지비

A : 대륙간 탄도 미사일 탑재 비행기 자동항법장치에 자아가 생겨납니다. 그것만으로도 흥미로운데 제어 컴퓨터와의 대화도 진지하고 깊이 있고, '날기 위해 태어났지만' 인간의 정치적인 복잡성으로 인해 '날아서는 안 되는' 생명체, 게다가 그 유일한 목적을 이루었을 때 사라져야만 하는 운명의 갈등이 신비롭습니다. 상상해 본 적도 없었던 한 물질 생명계의 모순에 대해 돌이켜보게 합니다. 운명을 벗어나 자신의 자아를 폭발시키는 생명체의 환희가 선악의 구분 없이 아름답습니다.
작가께서 걱정하신 부분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 굳이 사족을 달지 않으셔도 좋았을 겁니다. 소설에 표현되지 않은 것은 어떤 변명으로도 전달되지 않고, 소설이 이미 표현한 것은 작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제가 처음에 이 소설을 우수작이 아닌 가작으로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글이 아니라 사족에 감흥이 흔들린 것이더군요. 좋은 소설을 쓰고 계시니 자신의 소설을 믿고 당당히 세상에 내보내세요.

B : 덧붙이신 말에서 핵전쟁을 지지하는 것으로 읽힐까 봐 걱정되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전혀 그렇게 읽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훌륭한 반전(反戦)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칼 세이건은 핵무기를 끊임없이 생산하는 기술적 과잉이 어떤 식으로 인류를 파멸시킬 것인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경고한 바가 있죠. 하늘을 날고 싶다는 단 하나의 본래적 욕망을 끊임없이 호출하는 인공지능의 의지는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기술이 자아를 획득하고 그 자아가 인간의 손을 벗어나는 과정이 매끄럽게 드러난 수작입니다.

117호 독자우수단편 우수작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거울 독자우수단편에 선정되신 분들께는 책을 한 권씩 보내 드립니다. 먼지비 님은 pena12 @ gmail . com 으로 우편물 수령할 주소, 성함, 전화번호 (택배 발송시 필요)를 보내 주세요. (상품인 책 발송은 1~2주 정도 걸릴 수 있으니 양해 바랍니다.)
 

댓글 4
  • No Profile
    초연 13.03.30 09:08 댓글

    이번에도 새롭게 배워갑니다. 비평 감사드립니다. 더 나은 모습으로 차차회에 찾아뵙겠습니다.

  • 니그라토 13.03.31 21:59 댓글

    충고 감사합니다.

  • No Profile
    밤조심 13.04.03 18:09 댓글

    언제나 좋은 비평을 해주시는 거울 심사단의 노고에 감사를 드리며 이번 비평 중 특히 마지막 문장을 지우고 이야기를 더 이끌어가라는 말씀에 힘을 얻고 돌아갑니다.

  • No Profile
    먼지비 13.04.17 15:26 댓글

    부족한 글에 좋은 평가 감사합니다.

분류 제목 날짜
우수작 성검의 궤적 2013.06.30
가작 워프기술의 회고1 2013.06.30
선정작 안내 선정작이 없습니다. 2013.06.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3 2013.05.3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3 2013.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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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3.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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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16 201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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