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가작 광야

2015.10.31 23:2210.31

1

마침내 그 거대했던 문이 닫혀들어 의인은 세상과 단절됐다. 하늘에 스며든 암운이 모든 광휘를 거두었고, 뇌성은 천지사방을 흔들었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묵묵히 앞날을 예고하고 있었다.

내 앞에 선 건 사람이 세운 가장 거대한 역사였다. 낙원을 잃은 하와의 달콤한 실기失機도, 카인의 은밀한 첫 살인도, 더없이 의롭던 에녹의 승천도 이보다 더 장대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이를 위해 의인의 무리와 더불어 잣나무를 베어 잇고 역청을 발라 그 틈새를 막았다. 나무의 거칠고 단단했던 감촉이 손 위에 아직도 생생했다.

그 장엄한 역사 앞에 나는 내 육신의 거죽을 꼿꼿이 세웠다. 한때 내가 가장 사랑했던 것. 뜨거운 혈류가 휘돌고 그로써 숨을 쉬며 세상을 바라보고 소리를 질렀던 것. 그러나 광야에서 내 정신이 피안의 언저리에 닿았을 때, 나는 비로소 지혜를 얻었고 몸뚱이의 거추장스러움과 초라함을 깨달았다. 이제 내 지혜는 눈으로 헤아리지 못할 저 거대한 구조물보다 높고 넓게 펼쳐져 이 의미 없는 육신 위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참된 의인이여, 아직 늦지 않았소. 그 문을 열고 나와 세상을 구하시오.”


하고, 나의 지혜는 소리쳤다. 또 간청하고 협박하며 명령했다. 그러나 의인에게선 아무런 답이 없었다. 지난 칠 일을 그러했듯.

아아, 그대는 결국 그분의 의인으로 남으려는 것인가? 잣나무 벽 밖의 온 세상과 만물을 버린 채?

문득 성난 우레 소리가 내 고함을 파묻었고, 이마 위로 떨어진 한줄기 빗방울에 부르르 몸이 떨렸다. 난 이 빗방울의 의미를 알고 있다. - 너희가 내 뜻을 따라 이 역사를 세웠으므로 이제 나의 역사로 화답하리라는 - 그러니까 그것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참으로 잔인하고 비정한 심판의 도래를 뜻하는 것이었다.


2

처음 이 숲에 이르렀을 때 나는 비루한 도망자였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시발이 된 다툼은 한두 가지 미미한 문제로부터 비롯됐다. 거기에 씨족간의 오랜 갈등이 얽혔고 사소한 걸 사소하게 볼 수 없는 순간이 다가왔다. 바로 그 지점에서 나는 폭력과 유혈의 잔치를 벌였다.

상대는 평범했다. 범상한 육체와 재능을 가졌고, 또 그에 걸맞지 않은 무모함도 있었다. 그런 조합은 필연적으로 치명적이기 마련이었다. 과연 그자가 장사인 나를 두려워 않고 덤벼들었으므로 난 이 나필의 큰 손을 들어 주저 없이 상대의 머리통을 부쉈다.

그가 오래 버틸 수 없으리란 건 자명했다. 그의 가족들은 내 집 앞에 모여 울부짖었다. 난 그들을 몰아냈고, 남자의 부고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들려왔다. 그로부터 얼마지 않아 이취한 내 이복형제가 귀갓길, 날 선 쇠붙이에 목숨을 잃었다. 의義가 없는 세상에선 복수가 법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분쟁은 진창이었다. 오랜 은원과 이해관계를 따라 여러 씨족이 차례로 휘말렸고 습격과 싸움이 이어졌다. 배신은 씨족 간에도, 씨족 내에서도 벌어졌다. 모두 일곱 사람과 나필이 목숨을 잃었다. 다친 이는 셀 수도 없었다.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던 씨족들이 모였다. 그들은 평화의 값을 정했다. 분쟁의 계기가 된 두 사람(혹은 나필)의 목숨. 하나는 이미 죽었고 하나는 이제 죽어야 했다.

난 달아났다. 그것이 내가 한때 사랑했던, 이 육신을 지킬 유일한 방법이었다.


거주지의 경계를 벗어나 산과 들판을 헤맸다. 먹을 것과 쉴 곳을 찾으려 끊임없이 걸었다. 쫓는 자들은 물론, 우연히 마주칠 모든 이들을 피했다. 세상은 홀로 있는 자를 지켜주는 법이 없었다. 여자라면 욕을 보고 남자라면 살해당했다. 걸음은 고단했다. 두려움에 깊이 잠들 수 없었고 몰락한 처지에 분노했다. 피로는 상시였으며 배가 늘 허기졌다.

그러나 선조들의 자취가 희미해진 대지에 이르러, 활기를 잃어가던 두 눈은 아마득한 숲 하나를 보았다. 대낮의 열기 위에 아른대던 그 숲은, 메마른 황야 끝에 어린 생명의 아지랑이였다.

사람과 나필이 버린 옛 땅 위엔 어느새 수목이 우거져 있었다. 높게 뻗은 나무는 가지를 벌려 그늘을 드리웠고 새와 짐승의 소리가 가득했다. 수목 사이, 듬성하게 들어찬 어둠 속엔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까? 나의 무지는 두려움을 환기했지만 오랜 도주에 지친 내 육신은 녹음을 향해 나아갔다.


적당한 터를 잡고 볼품없는 움막을 지었다. 숲 속 생활이 시작됐다. 광대한 숲의 언저리를 떠돌며 떨어진 과실과 작은 짐승들을 내 양식으로 삼았다. 서너 차례 생사의 고비를 겪자 차츰 위협이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었다. 나필의 본성대로 나는 점점 담대해졌고, 그럴수록 내 걸음은 숲의 보다 깊은 곳을 향했다. 결국 내가 ‘그것’과 마주치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것’을 보았을 때 난 숨이 막혔다. 그 장대함 때문에. 숲 한 가운데, 그 숨겨진 대지 위에 드러누워 제 거대한 늑골들을 하늘에 뻗었으니, 그 높이는 족히 서른 암마(אַמָּ֖ה)였다. 일찍이 본 일 없는 거대한 신체였다.

그 아래엔 썩어가는 뱀의 사체를 넘보는 개미들처럼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수목에 몸을 숨겨 다가가자 노랫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박자에 맞춰 높고 단단한 잣나무를 팼다. 가지를 쳐 그걸 다듬은 뒤에는 마소에 묶어 옮겼다. 나무는 판재가 되었고 판재는 ‘그것’의 늑골과 늑골을 잇는 외판이 되었다. 송진이 끓는 솥 옆에선 매듭이 역청에 절여졌다. 연유와 목적을 알 수 없는 노동은 보기에도 몹시 고된 것이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불평을 말하는 법이 없었고, 냇가에서 떠온 한 동이 물에도 늙고 젊은 남녀 모두는 웃으며 함께 목을 축였다.

조화와 평화로군.

이들은 대체 어떤 이들일까? ‘그것’의 장대함에, 그들의 조화에, 낯선 이에 대한 두려움은 어느덧 호기심이 되었다. 나는 식음도 잊고서 이곳에 와 그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사흘 째 되던 날이었다.

한 사내가 동이를 들고 길을 나설 적 가만히 그 뒤를 쫓았다. 냇가에 이른 사내가 동이를 던져놓고 자리를 잡아 앉았을 때, 난 그 건너편 나무 사이에서 가만히 모습을 드러냈다. 소리를 들어 내 편을 돌아 본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홀로였으나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


“안녕하십니까?”


그 물음 같던 인사에 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답을 기다리던 사내는 내처 물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군요. 이 숲에 살고 계셨습니까?”


내게서 아무 답이 없자 그가 물이 찬 동이를 건져 제 옆에 내려놓았다. 그는 뒤이어 내 이름을 물었지만 역시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또 자신의 아비는 누구인지를 먼저 말해주었다. 듣기로 그는 의인의 아들이었으며, 그 이름을 함이라 했다.


“키가 몹시 크네요. 난 당신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어요.”

“난 나필이요. 내 아버지가 나필이었고.”


내 답에 함의 얼굴엔 미묘한 기색들이 스쳐갔다. 호기심과 신기함 그리고 또 무언가. 변화를 보았으되 의미는 알지 못했다. 나는 그제까지 그러한 표정을 마주한 바 없었다.


“당신들에 대해 들은 일이 있어요.” 함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필. 혹은 네필림. 그건 곧 거인을 뜻하죠. 난 당신들을 알고 있습니다. 엘로힘의 아들과 사람의 딸 사이에 난 자손들이라지요?”

“엘로힘의 아들들?” 나는 웃었다. “그건 말로만 전해져 온 전설이며 거짓이야. 너무 희미해진 기억이지. 어느 누구도 엘로힘의 아들들을 본 일이 없었으니까.”

“그런가요? 지금도 저 동쪽 놋 땅에는 카인의 후예들이 모여 살고 있을 텐데.”


그리 대꾸하는 함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담담히 대꾸했다.


“놋은 몹시 먼 곳이 아닌가?”

“그렇긴 하지요. 나 역시 놋 땅엔 가본 일이 없거니와……” 고개를 끄덕이던 함이 이어 물었다. “하지만 이곳 역시 나필과 사람이 왕래하지 않던 땅입니다. 이곳에 있은 지 오래지만 나필이나 사람의 자손을 본 바 없어요. 예까지 온 건 무슨 연유죠? 다른 이들이 더 있습니까?”


이곳에 온 연유? 배신당했고, 홀로 달아났지. 그러나 대답을 하는 대신 나는 찬찬히 그의 말과 얼굴을 살펴 물었다.


“그 말인즉, 당신은 사람이 아니란 건가?”

“나는 물론 사람이지요.” 함이 웃으며 답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בְנֵי־ הָֽאָדָ֔ם)이 아니라는 겁니다. 난 엘로힘의 아들(בְנֵי־ הָֽאֱלֹהִים)이거든요.”


3

의인의 아들이며 전능자의 아들인 함과의 교유는 그렇게 시작됐다. 우린 왕왕 개울가에서 만남을 가졌다. 그는 내게 참으로 많은 것을 들려줬고, 또 많은 것을 물었다.

그는 내게 창조의 역사와 그 신비를 말했다. 난 처음 그러한 전능자의 창조를 믿지 못했다. 그러자 함이 물었다.


“그럼, 당신이나 당신의 선조들은 이 세상이 어떻게 창조되었다고 믿었습니까?”

“어느 누구도 그런 것을 생각해 본 일은 없어. 세상은 예나 앞으로나 늘 이와 같은 모습일 테니.”

“늘 그와 같이, 이제와 영원히?” 함은 예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진실은 엘로힘께서 육 일간 세상천지광명과 사람들을 창조하셨단 것이지요.”


또 그는 첫 선조로부터 자신에 이르는 모든 계보를 얘기해주었다.


“그 칠 일 이후, 엘로힘께선 새로이 사람을 빚고 생령을 불어넣으셨으니, 그의 이름은 아담이요. 그가 내 시조이자 10대조가 됩니다. 내 부친께선 아담의 셋째 아들인 셋의 장손이 되시죠. 놋 땅에 사는 엘로힘의 아들들은 카인의 자손으로, 그는 아담의 장손이었으며 셋의 추방당한 형이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엘로힘은 함의 시조 아담을 낙원에서 추방했고, 아담의 아들 카인은 제 형제를 죽여 광야를 떠돌았다. 새로이 얻은 셋의 자손들은 비록 번창하지 못했으나 엘로힘의 아들들로서 그 명맥을 길게 이어왔고, 함의 고조 에녹은 그 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생전에 승천을 했다고도 했다.

나 또한 그들을 알고 있었다. 전해온 바로 최초의 나필은 엘로힘의 아들들이 그 아비요. 사람의 딸들이 그 어미라 했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 함과 그 일족을 보기 전까지 우리에게 엘로힘과 그의 아들들은 전설이자 비밀이며 거짓이었다. 함이 그런 내게 나필의 역사를 말했다.


“내 선조 셋과 카인의 후예들 중엔 사람의 딸들과 혼약해 아이들을 낳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바로 당신의 선조인 최초의 나필들이죠. 따라서 우리는 촌수를 따질 수 없는, 아주 먼 친척이 되는 셈입니다.”


그러나 그 말 또한 믿을 수가 없었다. 나와 너 사이에 같은 피가 흐른다면 어찌 우리는 이처럼 다른 삶을 살고 있을까?


“우린 선택받은 자들이니까요. 엘로힘의 생기(חַיִּ֑ים נִשְׁמַ֣ת)를 얻었지요. 그건 사람의 자손들이나 당신 같은 나필들에겐 전해지지 않은 것이에요.”


엘로힘의 생기? 내 세상엔 없던 전능자의 질서와 조화를 이름인가? 그렇다. 우리에겐 복수와 투쟁, 음모와 배신이 있었다. 형제도 부모도 종국에는 투쟁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그 모든 건 우리의 비정함과 탐욕, 불신에 연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세계였다. 그곳엔 엘로힘이 없었고 의로움이 없었다.

나는 아무래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만, 그와 그의 아비, 형제와 아내들이 짓고 있는 ‘그것’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그는 답을 주지 않았다.


“그건 당신에게 말해줄 수 없습니다. 당신은 엘로힘께 선택받지 못했으니까요.”


그를 만나 얘기를 나눌수록 내 마음의 진폭이 깊어갔다. 한 끝단엔 동경이, 다른 끝단엔 질투가 자리했다. 난 아직 엘로힘의 존재를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 생전 본 일 없던 이 일족의 조화와 협력이 만일 엘로힘의 선택, 그 전능자의 숨결과 일방적인 사랑에 있는 거라면. 만일 그러하다면.

일족으로부터 추방당해 광야와 숲을 헤맨 그 길 위에서, 내 세상을 채운 모든 탐욕과 질시, 폭력과 충동이, 당위가 아닌 우연이 되고 또 선택이 되어버린다면. 지금껏 이 세상에 의와 죄 있음을 알지 못했건만, 이제 그 모든 것을 알아 죄를 부끄러워하고 증오할 수 있으리라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면 왜? 전능자는 나와 내 일족은 선택하지 않았으며 우리에겐 생기를 주지 않았던 것일까. 어느 날에 나는 함에게 물었다.


“이봐, 함. 만일 엘로힘이 실재한다면, 혹 나 또한 자네처럼 전능자에게로 가 선택을 받을 길이 없을까?”


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길은 들은 바 없습니다. 아마도 어려울 거예요. 난 엘로힘께서 당신을 받아들이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내게 그처럼 영원한 절연을 선고하던 함의 목소리는 어찌 그리도 태연하고 쌀쌀했는가. 나는 그에게 간청하듯 말했다.


“자네가 알지 못한다면 자네의 아비는 어떤가? 그가 정녕 의인이라면 혹 그 길을 알지 않을까? 날 자네 아비에게 데려다 주게.”


내 존재를 제 일족에게 알린 바 없던 함은 내 청이 내키지 않는 듯 주저했지만 곧 마음을 정한 듯 내게 고개를 까닥였다.


“그럼 어디 가봅시다. 그러나 혹시라도 내 아버지의 답에 실망하진 마세요.”


4

내가 그들의 작업장에 나타났을 때, 나를 본 모두는 몹시 놀라는 눈치였다. 여인들은 제 남편에게로 달려갔고, 젊은 남편들은 손에 연장을 쥐어 들었다. 다만 함의 늙은 아비만이 내게로 걸어 와 날 올려 볼 뿐이었다.

함이 그 의인에게 말했다.


“아버님, 이자는 나필입니다. 얼마 전 개울에서 만나 교유를 해오던 차에, 이제 그가 아버님께 묻고자 하는 것이 있어 제게 청을 하므로 이곳까지 이끌어 왔습니다.”


그리고 함은 내게 그 모두를 소개했다.


“이쪽은 나의 아버님과 어머님입니다. 저쪽은 내 형제 셈과 야펫, 그리고 내 부인과 형수님, 제수씨죠.”


그 작은 소란이 있은 후, 함의 아비는 일하다 멈춘 것을 그대로 쉬게 하여 나와 자신의 가족 모두를 천막 안으로 불러들였다. 야펫의 부인이 제 시아비가 시킨 대로 양젖을 떠왔다. 내게 건네는 손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모두가 둘러앉은 가운데 함의 아비가 말했다.


“어린 시절 내 아버님과 함께 멀찍이 나필들을 봤던 일이 있네. 그래 나필인 자네가 저 먼 땅에서 이 숲까지는 어찌 왔으며 또 내게 묻고자 하는 건 무엇인가?”

“사연이야 길고 복잡하지만 들을 가치는 없어. 내가 살던 세상엔 늘 분쟁이 있어왔고, 분쟁엔 으레 보복과 배신이 뒤따르지. 그 결과로 나는 달아나 쫓겨 여기까지 왔어.”

“분쟁이라.” 늙은 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세상 밖 나필과 사람들은 난폭한 자들이지. 그래서 엘로힘께선 유랑자 카인에게 일곱 배의 되갚음을 약속하지 않으셨던가? 놋 땅의 그 후예들은 스스로 일흔일곱 배의 복수를 하겠노라 말했고.”


그러나 함의 아비는 엘로힘의 선택에 대해 묻는 내게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자넨 고독을 느끼고 있군.”


고독?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치 않다. 쫓기며 유랑하고 야생에 걸식할 때 내가 느낀 감정은 고독이 아니라 두려움과 분노였다. 내 세상에는 의가 없었고, 같은 씨족 사이에도 신의가 부족해 배신이 횡행했다. 그러나 함의 아비는 말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결국 고독이었던 걸세. 돌아갈 곳이 없어 우리에게 기대려는 겐가? 엘로힘의 선택을 받고 싶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걸 간구해 얻은 것이 아닐세. 본시 그러하였던 것이지. 난 자네가 선택받을 방도를 알지 못하니 내 무슨 답을 해줄 수 있을까?”


그리 말하던 의인의 숨결이 무거워져 있었다. 함의 형제들이 날 바라보는 눈빛에 또한 측은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나는 불연 마음속에 일기 시작한 분기를 참고 숨을 골랐다. 내 손이 천막 밖의 거대한 골조를 가리켰다.


“그럼 저 또한 엘로힘의 선택인가? 당신들은 여기 모여 대체 무엇을 짓고 있는 거지?”


함의 아비가 함을 돌아보자 함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늙은 의인은 함과 마찬가지로 그 물음에 답을 주려하지 않았다. 그가 그렇듯 함구하자 나는 자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어. 난 엘로힘의 선택을 받지 못한 자란 말이지.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혹 저것이 그 엘로힘이 지시한 일이라면, 내 당신들을 도와 저 짓는 것을 도와주겠어.”


그런데 이때, 늙은 의인의 목소리는 돌연 단호해졌다.


“아니지, 그건 아니 될 말이야.”


내가 무어라 대꾸를 하기 전, 그 곁에 앉았던 함이 앞서 제 아비를 채근하고 나섰다.


“이 자의 도움을 거절할 이유는 뭐랍니까? 그는 나필이라 큰 신체에 힘이 장사예요. 우린 더 빨리 일을 마칠 수 있을 겁니다.”


형제들과 아비가 굳은 얼굴로 함을 돌아보았다. 부정한 일이 될 게야, 하고 의인은 중얼댔다. 그러나 그는 날 의식한 듯 함을 더 꾸짖지 못한 채 내게 시선을 돌려들었다.


“허락할 수 없네. 이건 우리 스스로 이뤄야 할 역사이고 자네의 도움은 필요치 않다네.”


5

그러나 난 묵묵히 숲으로 나아가 잣나무를 패고 가지를 다듬어 옮겨 판재를 만들었다. 송진과 역청을 모아왔고 밧줄의 매듭을 지었다. 늑재를 올려 늑골 사이로 판재를 이었다. 의인과 함의 형제들은 내 도움을 거절했지만 나 스스로 돕는 것까지 막진 못했다.

그렇게 여러 날이 지났다. 난 의인의 가족들과 더불어 식사했고 물과 젖으로 함께 목을 축였다. 여전히 그들은 내게 곁을 주려 하지 않았다. 내 눈길을 피하며 말 나누길 꺼렸으니 내 도움에 기뻐하고 나를 격려해주는 건 오직 함, 그 한 사람 뿐이었다.

난 그를 위해 숲에 나아가 떨어진 과실을 모으고 술을 빚었다. 술이 익어 향이 깊어질 무렵 나는 남몰래 함을 불러냈다. 함은 동이 안의 황금빛 액체를 살펴 내게 물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현명하고 조화로운 엘로힘의 아들도 술은 알지 못하나 보지?”

“술이요?”

“그래, 양조는 사람과 나필의 지식이지. 내가 살던 곳에서는 이처럼 과실이나 곡물로 술을 담가 마셨어.”


난 함에게 술을 권했다. 첫 잔을 마신 그가 얼굴을 찡그렸다. 향긋하고 달콤하며 알싸하겠지. 그 불길이 식도를 넘어 자네의 심장에 치밀 거야. 그리고 자네의 몸과 마음을 그 불이 지배하게 될 걸세. 나와 함은 자리에 앉아 얘기를 나누며 동이의 반이 비도록 거푸 술잔을 나눴다.

함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 나는 그에게 물었다.


“우리가 짓고 있는 저건 대체 무언가? 저게 생긴 대로 혹 배라면, 왜 물가에 짓지 않고 이 숲 한 복판에 짓고 있는 거지?”

“당신은 엘로힘의 선택을 받지 못했어요.”

“하지만 난 자네와 함께 저것을 짓고 있지. 엘로힘이 그걸 막았던가?”


내 은근한 목소리에 함이 동이를 끼고 앉은 채 풀린 눈으로 나를 올려보았다.


“막지 않으셨지요.”

“그래, 막지 않으셨지. 나도 이제 자네 일족과 엘로힘의 역사를 함께하고 있지 않은가?”


동이에서 술을 퍼 올리던 함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저건 테바 즉, 방주입니다. 엘로힘께서 말씀하신 홍수에 대비하고 있는 거죠.”

“홍수?”

“네, 대홍수죠. 엘로힘께서는 세상에 물든 악을 한탄하시고 홍수로 그 악을 일소하리라 하셨습니다. 의로운 자, 즉 내 아비와 그 일족, 그리고 세상의 짐승들을 태워 그 씨를 남긴 뒤 남은 모든 것을 쓸어버리리라 하셨어요.”


함은 술을 들이키며 홀로 말을 이어갔다.


“모든 사람의 자손들과 나필이 그 홍수에 쓸려 사라질 겁니다. 엘로힘의 생기를 얻지 못한 자들은 세상에서 모두 절멸될 거예요.”

“절멸시킨다고? 하지만 내게도 자네와 같은 피가 흐른다 하지 않았나?”


함이 웃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 겁니까? 당신과 내가 같은 존재라고요?”


그는 술동이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은 그저 살덩어리예요. 그분의 영이 머무를 수 없는 자리지. 당신과 당신의 무리들은 엘로힘께 저주 받았습니다. 당신 같은 건 결코 나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없어요.”


난 그제야 비로소, 그와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내게 보여준 감정의 의미들을 알 수 있었다. 그건 경멸과 조소였다. 난 주먹을 단단히 쥐었다. 이놈의 골통을 부숴버릴까? 이 주먹으로 내게 대적한 이들의 머리를 부수고 뼈를 부러뜨렸다. 함이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배틀댔다. 난 주먹을 들어 그가 든 동이를 내리쳤다. 동이는 산산조각 났다. 급히 바닥에 엎어져 남은 술을 그러모으던 함을 버려둔 채, 난 의인의 천막으로 향했다.


6

노아는 이미 밖에 내가 와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기도를 마친 그가 내 편을 돌아보며 전에 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던 것이다.


“들어오게. 그리 어두운 데 서 있지 말고.”


그러나 나는 어둠 속에서 반절만 몸을 내밀어 노아를 바라보았다.


“참된 의인께선 거기 앉아 그렇듯 세상의 멸망을 재촉하고 계셨소?”


등불의 희미한 빛줄기로 드러난 내 반면의 얼굴을 살피던 노아가 담담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함이 말하던가?”


나는 물었다.


“얼마나 대단한 홍수이기에 온 세상이 쓸려나가지? 당신과 당신의 일족들만 살아남으리라고? 난 어떻소? 난 당신과 함께 방주를 지었는데. 완성도 머지않았어. 엘로힘이 당신의 기도에 응답하던가? 혹 나를 함께 구원하리라 하던가?”

“기도에 답은 없었네. 나와 내 가족들은 그저 엘로힘께서 명하신 걸 따를 뿐이고.”

“나도 당신과 함께 그의 명을 따랐어.”

“아니야. 엘로힘께선 자네에게 명한 일이 없으셨지.”


없었다고? 난 그들과 함께 식사하며 땀을 흘리고 방주 짓던 일들을 떠올렸다. 그 모든 노력과 헌신. 그게 엘로힘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던가?


“내가 저지른 일들이 그리도 큰 죄였나? 구원을 받지 못할 만큼? 살인과 폭력? 내가 있던 세상에선 그게 법이고 질서였는데. 난 엘로힘을 알지 못했고 세상엔 의가 없었어. 우리에게 속죄와 구원의 기회란 게 있기는 했나?”

“그러나 그분께선 세상에 홍수를 내지 않고는 그 분의 의를 이룰 수 없다 하셨으니.”


그처럼 잔인한 말이 있는가? 그건 곧 모든 나필과 사람이 사라져야 비로소 그의 의가 이뤄지리란 뜻이었다. 다시 말하면 나는 내 존재 자체로 곧 죄가 되리라는 비정한 선고였다.

내 목 안에서 낮게 으르렁대는 소리가 울렸다.


“난 나필이길 선택한 적이 없어. 다른 모든 나필과 사람의 자손들이 그랬지. 우린 그저 낳음을 당했을 뿐이야. 엘로힘은 어찌 우리 선조를 창조하고는 또 당신들을 창조했나? 왜 우리에겐 사랑과 생령을 베풀지 않고 이처럼 버리려고만 드는 거야?”


그러나 노아는 슬픈 눈으로 힘없이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내 어찌 전능자의 오묘함과 그 무한하심을 알겠나?”


난 그런 노아의 곁을 떠나 천막 밖 어둠 속으로 걸어 나갔다. 거대한 방주의 몸체가 어스름한 달빛 아래 창백한 낯을 드러내고 있었다. 

곁에 놓인 판재를 집어 방주에 휘둘렀다. 방주의 늑재를 발로 차고 흔들었다. 연장을 손에 쥐고 방주의 몸을 때렸다. 무너져라, 테바! 네가 내 육신을 구원 못한다면 넌 아무도 구원할 수 없으리니.

그러나 내 노력과 헌신을 묵묵히 받아오던 방주는 내 분노와 절규를 묵살해버렸다.

손상되지 않는 방주 앞에 난 무릎을 꿇었다. 불가해 그리고 불합리. 기도했다. 온 밤을. 소리 질러. 울었다. 엘로힘이여. 내 기도에 응답하라. 나를 네게 바칠 테니 나를 구원하라, 하고.

내가 벌인 소동과 고함에 노아의 가족들이 깨어나 천막을 걷고 나와 살폈다. 그들은 말없이 날 지켜볼 뿐이었다.

이윽고 조양이 밝았다. 쉰 목에선 더 이상 소리가 나질 않았다. 부은 두 눈의 살덩이가 시야를 가렸다. 난 자리에서 일어났고, 지친 걸음을 옮겨 의인의 숲을 떠나갔다.


7

광야를 떠돌았다. 미치광이처럼. 햇볕이 따갑게 쪼아 들고 건조한 숨결에 갈증은 깊어갔다. 갈라진 입술에서 피가 배어나와 검붉은 딱지가 되어 앉았다.

어느 결부터 머리 위 하늘에선 시체의 고기를 탐하는 새들이 내 뒤를 쫓고 있었다. 혈관을 흐르는 피조차 말라붙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떠랴. 곧 세상을 물이 채우리니. 그때에는 내 갈증도 해소가 되겠지.

햇볕과 그늘 사이 층층 진 적갈색 황야의 절벽을 앞에 두고 나는 쓰러졌다. 눈이 감겨들고 있었다. 나는 일렁이는 열기 속에서 내게 다가오는 어느 사람의 그림자를 보았다. 신기루리라. 내가 광야에서 보았던 그 숱한 오아시스가 그러했듯.

그러나 그림자는 내 곁에 와 앉아 내 머리를 그의 무릎 위에 뉘이고, 물통의 마개를 열어 내 입술을 축여주었다. 내가 신음과 함께 그를 올려볼 적 그는 내게 물었다.


“광인인가? 물도 없이 참으로 오래도 이 광야를 떠돌았군.”


내 웃음소리가 바작바작 타들어가는 짚불의 숨소리 같았다.


“곧 세상이 망하리라는데, 이 광야에서 죽은들 어떤가? 전능자는 끝끝내 내 갈구를 받아주지 않는 것을.”

“세상이 망한다던가? 그래서 이리 떠돌았다고. 답하지 않는 전능자에게 항의하듯?” 그의 웃음은 더없이 차가웠다. “그 또한 결국은 투정이며 간구가 아닌가. 전능자에 대한 그따위 열망이라니. 자넨 엘로힘께서 귓등으로라도 그런 갈구를 받아들이리라 생각했나보지?”


말을 마친 그는 내 입에 물을 부었다. 내 갈증 난 목이 그 미지근한 물을 삼킨 건 불가항력이었다. 그가 내 윗몸을 일으켜주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누더기가 다 된 검은 옷엔 광야의 먼지가 올올이 묻어있고, 지팡이 끝에 꿰여 매달린 작은 새와 도마뱀 따위는 광야의 열기에 바짝 말라붙어 있었다. 깊이 팬 주름이 의인 노아보다도 늙어 뵈었으나 하얀 터럭이 돋은 머리는 아직 숱이 풍성했고, 희번덕거리는 눈에 어린 광기라면 나보다 더 깊고 짙은 것이었다.


“그런 삿된 말을 입에 담는 댁은 대체 누구지? 어찌 이 광야에 있나?”


사내는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꾸했다.


“이 불쌍한 나필아. 자길 구해준 이를 비난하고 있군. 난 너보다 더 오래 이 광야를 떠돌았다. 넌 내 자손이거나 어쩌면 내 아비의 자손이겠지. 내가 어찌 이 광야에 있느냐고? 죄를 짓고 땅을 피해 유리됐어. 주어진 운명을 따라 광야를 떠돌며 자손들의 부흥과 몰락을 바라보고 있지. 그리고 지금은 이렇듯 자네를 만나 얘기를 나누고 있군.”


그가 내게 물었다.


“자넨 내가 누군지 알겠나?”


그래, 물론. 당신은 오래전 자신의 형제를 살해하고 추방당한 영원한 유랑자야. 난 당신의 이름도 알고 있지. 함과 그 아비인 의인이란 작자가 내게 당신의 이름을 말해주었으니.

그는 나를 부축해 그로부터 머지않은 곳의 거처로 이끌었다. 거처라고는 하지만 그저 큰 바위 밑 그늘진 공간에 임시로 자리를 벌여둔 데 지나지 않았다. 식어가던 불씨를 살려 모닥불을 피웠고, 나를 그 곁에 앉혔다. 함께 앉아 내가 추스르길 돕던 그는 내게서 지난 얘기를 듣게 되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신의 선택을 갈구한 나필이라니. 기가 찰 노릇이군. 너흰 버림 받았고 저주 받았어. 구제불능이란 말이야. 엘로힘이 내게 베푼 일말의 동정조차 너희는 받지 못했지.”


그 동정이란 일곱 배의 되갚음을 이름인가? 내가 말없이 바라보는데 사내는 썩은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불길 위에 던졌다.


“그래서 그렇듯 엘로힘을 저주하며 광야를 떠돌고 있었나? 난 버림을 받았노라며? 애초에 그는 널 취한 일이 없는데 어찌 버릴 수가 있단 말이야?”


아니, 난 엘로힘을 저주하지 않았다. 광야 위의 내 걸음과 말은 저주가 아니라 그저 나 자신의 절망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사내는 그 모든 것이 아무래도 좋다는 투였다.


“나의 먼 조카, 그 미련한 우자愚者 노아도 네가 구원에 이를 길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사실 그건 당연한 일이지. 너나 그 녀석들의 조잡한 지혜로는 가당찮은 일이니. 그 지독한 불합리를 이해하고 구원을 얻고 싶다면 스스로 심원한 지혜를 얻어야 해.”

“심원한 지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심원한 지혜지. 내 어미가 취했던 지혜의 과실은 에덴에 있어 다신 구할 길이 없게 되었지만, 여전히 이 땅에는 그런 지혜들이 숨어 떠돌고 있단 말이야.”

“그 지혜가 있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건가?”

“스스로 얻어 깨우쳐야지. 그 지혜를.”


그러나 어디서 어떻게? 내 물음을 짐작한 그가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이 광야엔 말이야. 네 선조들의 영혼이 떠돌고 있어. 이 광야 깊은 곳으로 나아가 네 몸을 바치고 지혜를 구해봐. 내게 그랬듯 네 선조들은 너에게도 지혜를 줄 거야.”


그는 내가 가야 할 곳과 해야 할 일들을 말해주었고, 물이 담긴 가죽 주머니와 구운 메뚜기 따위를 나누어주었다.


“자아, 기력을 찾았으면 이 광야를 계속 걸어. 멸망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광기와 체념의 길이 아니라 지혜와 구원의 길로 떠나란 말이야.”


그는 팔을 휘적대며 나를 배웅했고 나는 그를 떠나 걷고 또 걸었다. 해가 뜨고 지고 달과 별이 뜨고 졌다. 난 그 수많은 걸음 중에 어느덧 내가 찾던 장소에 이르렀음을 알았다. 석양이 붉게 물든 하늘엔 층층이 색이 졌고, 서편 하늘로 장경성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 선조의 영혼들이여. 내 몸을 받으소서.


나는 옷을 벗고 앉아 밤이 오길 기다렸다. 사위가 어둠에 물들었고, 난 문득 내 선조의 영혼들이 광야의 사방 어둠 속에 웅크린 채 내 젊은 육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알았다. 석양의 숨이 다해 완연히 어둠이 짙어지자, 그들은 노란 눈을 빛내며 스멀스멀 내게로 다가왔다.

내 몸은 바닥에 뉘여져 사지가 결박됐다. 그들이 내 살을 발라내고 뼈를 토막 냈다. 난 소리 쳤다. 내 눈앞에서, 내 육신이 해체되고 있었다. 고통은 육체를 넘어 내 정신을 침범했다. 그 고통을 온전히 내뱉으려던 절규가 목 안에 들어찼고, 뒤늦게 따라 온 숨결은 넘나들 구멍을 찾지 못해 목 뒤에서 방황했다.

맙소사, 저주받은 유랑자! 나는 어찌하여 신에게 거짓을 고했던 그 살인자를 믿었던가?

그 영혼들이 내 성기를 자르고 고환을 들어내며 웃을 적, 난 비로소 그들이 내 선조가 아니란 것을 알았다. 그들은 내 가장 먼 선조들보다도 앞서 이 광야에 있었고, 내 가장 타락한 선조들보다도 더 깊이 전능자를 증오했다. 그들은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무리였고 어둠을 횡행하며 먹잇감을 찾아 우짖는 사자였다. 나는 카인이 그들에게 바친 알몸의 번제물이었다.

난 뒤늦게 울며 간청했다. 이 모든 것을 멈추어 달라고. 그들은 거절했다. 난 소리치며 간구했다. 차라리 목숨을 끊어달라고. 그들은 묵살했다. 그들은 내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그 밤은 길었다. 그들은 내 육신을 샅샅이 훑으며 내가 겪는 고통을 즐겼다. 먼동이 터 오르기 전, 그들이 해체한 내 몸을 다시 맞춰가기 시작했다. 그 조각의 틈새마다 온갖 질병과 저주가 들어섰다. 마지막으로 잘린 내 목을 들어 다시 어깨 위에 올릴 때였다. 그 끝이 없을 듯한 고통의 너머에서 거센 물결처럼 몰려오는, 공허함과 지혜를 보았다. 거기에 떠밀린 내 정신이 수 만년의 과거와 미래를 가로질러 생사고해를 건넜고 마침내 피안의 언저리에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8

눈을 떴을 때 내 육신의 거죽은 광야에 누워있었다. 내 몸을 해체해 짜 맞추던 노란 눈의 영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에 내 눈엔 세상의 정연한 질서가 보였다. 빛의 입자가 반사된 수많은 색깔의 알갱이가 보였고, 사물이 거기 있는 이유와 이면의 비밀을 보았다. 바람에 실린 희미한 냄새들도 느껴졌다. 어디선가 썩어가고 있는 짐승의 시취와 더 먼 곳에서 전해져온 녹음의 기운, 그리고 대기를 적셔드는 습기의 냄새를 맡았다. 내 혀끝은 짭짜름한 바다의 염기와 건조한 사막의 씁쓰레한 모래 맛을 느꼈고, 천지사방에서 들려오는 새의 울음, 벌레가 걷고 뱀이 기는 소리, 바람에 움직여 서로 부딪친 풀잎 소리가 세상의 비밀스런 음률로 조화되어 내 귓가에 울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것이 카인이 말한 지혜였다. 지혜를 품은 나는 나이면서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나는 세상 사물에 깃든 창조주의 뜻을 알았고 또 그 이면에 담긴 잔인함을 알았다. 내 지혜는 광대했고 그걸 담은 내 육신은 초라했다. 이제는 더 이상 전과 같을 수 없었다. 나는 은밀한 지혜의 화신이었다.

내 지혜가 홀로 궁구했다. 멸망을. 멸망에 이르는 길을.

세상은 멸망하고. 전능자는 의인 노아를 사랑하고. 의인 노아는 그래서 방주를 지으리라는.

그래서 내 지혜는 말했다. 구원을. 구원에 이르는 길을.

전능자는 의인 노아를 사랑하고. 그러나 의인 노아는 방주를 짓지 않고. 전능자는 그래서 세상을 멸망시키지 못하리라는.

피안의 언저리에서 사고는 그 지평을 열고 불가해의 벽을 넘었다. 모든 비합리는 새로운 관점을 찾아 정연한 논리가 되었다. 이제 나는 다시 의인의 숲으로 향했다. 나는 세상의 멸망을 막아야 했다.


9

함은 노아에게로 가는 나를 막지 못했다. 그는 내 변화를 알아챘을 것이다. 그건 이해가 아니라 직관이었다. 나는 그의 어떤 선조보다 오래되고 지혜로웠으며 또 음험했다.

방주는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노아가 방주 꼭대기에 걸터앉아 셈, 야펫과 함께 천정의 판재에 쐐기를 박고 있었다. 나는 노아를 올려보며 소리쳤다.


“노아. 그대가 정녕 의인이라면 방주 짓는 일을 멈추시오. 그러면 신은 당신을 위해 차마 세상을 멸하지 못할 테니.”


노아와 그 자식들이 손을 멈추어 나를 내려 보았다.


“세상 만물에겐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으니 이는 곧 부당함을 이름이오. 비록 신의 생령을 품지 못했더라도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은 그로서 살아갈 권리가 있지 않은가? 그 모두는 결국 전능자의 창조물이니. 죄업을 쌓은 모든 사람과 나필, 그리고 아직 죄를 짓지 않은 숱한 생명들이 이제 신의 홍수 앞에 스러지리다. 혹 그대의 자식들이 죄 없이 홍수 앞에 남겨진대도 당신은 홀로 그 대업을 위해 방주를 지을 텐가? 이제 노아, 당신의 입 위에 세상 만물의 생사고락이 달렸으니, 의인인 그대는 그 모두를 살피라. 비참한 종말의 생존자가 되지 말고 모두를 구원할 구원자가 되란 말이외다.”


아무 말 없이 나를 내려 보던 노아가 다시 쐐기를 박기 시작했다. 셈과 야펫이 그 아비를 따라 쐐기에 매듭을 걸었다.

나는 방주 아래에 서서 노아를 설득했다. 때로는 협박하고 때로는 간청했다. 나는 셈과 야펫의 동요를 알았고, 함이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을 알았다. 함은 내게 말했다.


“당신과 사람들은 오물입니다. 그 죄업으로 세상을 더럽혔어요. 오물은 그 자체로는 죄가 없으나 청결히 씻어내야 하는 것이 본연의 성질입니다. 하물며 그 일을 전능자께서 정하셨다면 그 섭리와 계획을 우리 사람의 능력으로 추량할 길은 없어요. 체념하고 겸허히 운명을 받아들이세요. 그러면 혹 그분께서 당신에게 은혜를 베푸실 지도 모르죠.”


함이여. 세상 만물에게 일어날 지 알 수 없는 기적에 생명을 맡기라는 네 말은 너무나 가혹하다. 너희 일족과 방주에 선택될 짐승들의 생명이 그 나머지의 생명보다 무겁더냐.

야펫이 내게 말했다.


“이건 예정된 일이고, 우린 엘로힘의 말씀에 순응할 뿐입니다.”


선한 자 야펫이여. 신이 그대들의 선조를 낙원에서 추방한 건,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쟁취한 지혜와 그 자유 의지 탓이요. 이제 그대가 선 곳, 신의 정언이 다스리는 시방정토가 아닐지니. 다섯 욕심과 일곱 감정이 지배하는 이 사바에서도 그대들은 그저 그에게 순응할 뿐이란 말이던가?

셈이 내게 말했다.


“난 당신의 마음속에 도사린 존재를 알아요. 내 일족 최초의 어미에게 과실을 권한 자의 무리죠. 엘로힘께 대적하지 마세요. 내 아비와 우리의 믿음을 흔들지 말고 부디 떠나세요.”


셈, 네 아비의 의로움을 이어 받을 자여. 내 지혜는 네가 알지 못하는 저 피안에 가 닿았고, 이제 나는 앙그라 마이뉴와 아후라 마즈다의 이면성을 안다. 먼 훗날에 네 번성한 자손들이라야 비로소 그 교의를 듣게 되리라.

그러나 의인 노아는 아무 말이 없었다. 묵묵히 제 일을 할 뿐이었다. 방주가 완성되기까지 그는 그렇듯 한결 같은 모습으로 지붕 위를 지키고 있었다.

그날 밤 마지막 지붕의 판재가 엮이자 방주는 완성됐다.

그 이튿날 온갖 생명이 쌍을 지어 몰려왔다. 정결한 짐승은 일곱 쌍이요. 부정한 짐승은 두 쌍씩이었다. 신이 손수 그 방주의 문을 닫았으니 이제 남은 건 세상의 심판뿐이었다.

이레였다. 난 문이 닫힌 방주 밖에서 일곱 번의 밤낮이 오가도록 노아를 향해 소리쳤다. 노아는 아무 답이 없었다. 그러나 난 방주 안의 그가 두 귀를 틀어막은 채 웅크려 내 목소리에 몸부림 치고 있는 걸 알았다.

번민하라. 의인이여. 그 문을 열고 나오라. 그 잣나무 벽 밖의 만물을 구원하라. 이제 그대의 선택 앞에 세상의 운명과 만물의 목숨이 달렸도다.


10

칠 일이 지나 깊은 샘이 터지고 하늘의 창이 열렸다. 노아는 끝내 응답하지 않았다. 나는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로 올라 세상이 잠겨가는 것을 보았다.

난 신을 향해 소리쳤다. 우리를 창조했으나 곧 우리를 파멸시킨 이여. 우리를 내버린 그 비정함을 저주하노라. 당신의 이 거대한 역사 앞에 희생될 모든 생명들은, 죄가 있든 없든 모두가 다함께 당신을 저주하리라. 그리하여 당신은 그 저주의 상흔으로 우리를 기억할 것이고 마침내는 슬퍼하게 되리라.

아흐레 째 되던 날 저 너머 광야에서 밀려든 물살이 숲을 덮쳐왔다. 물살은 노아의 방주를 옮겨갔고 나를 물속으로 끌어갔다.


11

비는 사십 주야 후에 그쳤으나 땅 위의 물은 나날이 늘어갔다. 온 하늘 아래 높은 산을 모두 뒤덮고도 열다섯 암마를 더 차올랐다. 백구십일이 넘도록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었으며 땅에서 살아 움직이던 모든 살덩어리, 새, 집짐승, 들짐승, 땅에 우글거리던 모든 것,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숨지고 말았다. 방주 밖에서 신을 저주하며 소리 지르던 어느 나필도, 심판의 날까지 광야를 떠돌아야 했던 카인도 비로소 그 물길에 휩쓸려 사라졌다.

방주의 문이 열린 건 비가 그친 후로 백오십 일이 지나서였다. 방주가 제 몸을 드러낸 아라랏 산 위에 걸쳐지자, 의인 노아는 방주의 창을 열어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보냈다. 어느 날에 비둘기는 올리브 잎을 물어 왔고 의인은 세상의 홍수가 끝났음을 알았다. 이윽고 방주의 문이 새로운 세상을 향해 열렸다.

가족들과 함께 방주의 입구로 나선 노아는 그 자리에 선 채 세상의 변화를 살폈다. 날짐승들의 지저귐이 창공에 가득했다. 백구십 일의 주야로 위세를 부렸던 암운도 이제는 땅 위 모든 생명과 함께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대지가 드러낸 맨 살 위엔 햇살의 온기가 내려앉았고, 방주의 동물들은 제 짝과 더불어 살 곳을 찾아 떠났다. 실로 완벽한 조화요. 평화의 풍경이었다.

노아는 아들들과 며느리들이 마른 땅으로 달려 나가 대지의 나신을 밟고 뛰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감동해 울고 또 희망차 웃었다.

생육되고 번성하리라.

그들은 노아의 손자를 낳고, 그 손자들은 다시 아이를 낳아 이 땅에 충만해질 터였다. 이제 세상은 오롯이 노아와 그 자손들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있었다. 존재를 박탈당한 모든 피조물들의 시신과 절규 위에서.

그래서 이 늙은 의인은 문득, 사위에 드리운 적막함과 고독함을 깨달았고, 여전히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말씀들의 무게를 알게 되었다.

양 팔을 가만히 감싸 안은 노아가 부인의 곁에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終,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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