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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독자우수단편 선정단 앤윈, pena입니다. 

이달은 기승전결의 전통적인 이야기구조보다는 단편의 집약성에 기댄 소품이 많았습니다. 몰입보다는 소재의 기발함과 비약적인 반전이 용이한 단편소설의 특징을 이용한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그러면서도 완급조절,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부분을 제대로 짚지 못하는 미숙함이 보였습니다. 독자가 이야기를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어떤 부분은 생략해도 충분히 상상으로 메꿀 수 있는지, 어떤 부분은 세세하고 구체적이어야만 이야기의 특징과 개성을 획득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감이 필요합니다. 감은 그냥 길러지는 것이 아니지요. 많이 쓰고 읽히며 정진하시길 바랍니다. 언제나 여러분의 건필을 빕니다. 

이번 달에는 認님의 {기태의 둥지}를 가작으로 선정하였습니다.



칭소마라 - 프레싱

A: 사무직에서 생산직으로 밀려난 한 노동자가 자신의 가치를 점점 상실해가다가 결국 해고를 당하면서 느끼는 감정적 고양(혹은 침몰)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흡인력이 있고 재미있어요. 특히 그 중에서도 ‘다쳐도 다치지 않는 손’은 노동력에 대한 은유로서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사무직 직원을 해고하지 않고 생산직으로 돌리는 상황에 대한 맥락이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회사가 이 직원을 괴롭힐만한 특별한 이유(징계)가 있지 않는 이상 왜 굳이 이렇게 행동을 하는지 현실적 설명이 필요해 보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반전은 특히 재미있었습니다. 딱히 전 기분이 개운해지진 않았지만요.

B: 첫 줄부터 예정된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듯 불안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그 길대로 죽 달려나간 단편입니다. 너무나 예상 가능하며 인물의 동기나 주위를 둘러싼 환경 등이 몽뚱그려진 희미한 인상으로만 남아 있어 이입하기 어렵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상징성이나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하여 소설의 배경이나 인물을 흐리는 경우를 보는데, 때로는 구체적이고 세밀한 묘사와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조사가 소설을 더욱 보편적으로 만든다는 점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일관된 분위기를 끝까지 끌고 간 필력이 인상적입니다. 



니그라토 - 우주의 가장자리

A: 매우 복잡하게 설정을 짰다는 생각이 듭니다. 종족도 다르고 천문학적 설정도 다르고 그 부분에 대해 설명을 하는 데에 긴 분량을 사용하였습니다. 성별이 무화된 종족이라는 게 특별히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게 아쉽기는 하지만 분위기를 만드는데는 나름대로 역할을 하고 있네요. 그 종족 중에서도 특별히 ‘남성성’을 상실하지 않은(못한) 주인공은 모험을 찾아 다이슨구를 종단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종단이 불가능한 이유가 어느 적대세력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스토리 자체는 재미있으나, 이게 너무 압축되어 있어서 어떤 설정 나열집처럼 보인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반드시 분량이 훨씬 더 많이 확보되어야만 스토리로서 기능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B: SF의 매력, 또는 경이감이라 하는 것에는 땅에 발붙이고 사는 비루한 일상 너머 거대한 우주나 우리의 근원을 파헤쳐가는 비교불가 스케일 또는 발상의 전환이 필수적으로 들어갑니다. 니그라토님의 우주의 가장자리는 스케일과 비일상이란 면에서 그러한 SF의 덕목을 지닌 작품입니다. 그러나 발상이 소설로서 빚어지기 전 모래알과 같은 상태랄까요. 이 모래에 끈기를 얹고 모양을 빚어 만들어낸 도자기를 기다립니다.



엄길윤 - 자각몽

A: 꿈속에서 인간의 감각은 둔해지지만 완전히 상실되지는 않죠. 그 점에 착안해서 만든 짧고 재미있는 공포소설입니다. 처음에는 이런 저런 욕망을 실현시키려던 주인공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핵심적인 공포의 근원이 등장하면서 핵탄두와 커다란 벽 등 자각몽 속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실패하고 나자 자신의 세계가 멸망했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의 부상이 좋습니다. 다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묘사가 조금 더 있어서 마지막 장면의 복선으로의 연결고리를 좀 더 확고하게(동시에 상징적으로) 해 준다면 마지막의 경이감이 더 커질 것 같네요.

B: 노트 정리를 하려고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자각몽을 꾸었다는 시작 부분은 아주 평범하고 뜬금없습니다. 그러나 자각몽 속에서 알 수 없는 적을 맞이해서 이리저리 피해다니는 과정이나 자기 몸이나 상상력을 동원하는 부분이 흥미진진하여 뒤를 궁금하게 만드는 흡입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그 적의 정체와 결말이 반전으로 맺습니다. 별 인과도 없지만 필력으로 결말까지 독자를 끌고 가고 황당하나 가장 적절한 결말로 맺기까지 작가의 솜씨가 돋보였습니다.



깃 - 편의점 아르바이트

A: 주인공의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이해하겠으나 이 뭉클뭉클한 것(슬라임 비슷한)이 대체 뭘 의미하는 것인지, 실제로는 무엇인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제가 뭘 잘못 읽은 것인가 여러 번 다시 읽어봤지만 역시 잘 모르겠네요. 그러므로 주인공의 인생이 이것과 어떻게 연관되어 망가졌는지도 알 수가 없네요. 취객의 자존심을 ‘젓가락질에 부서지기 쉬운 생선 속살’ 같은 식으로 묘사한 부분들은 매력적인데, 비유가 매력적이라는 자신이 있다보니 그런 비유를 너무 과잉되게 사용하는 경향도 있어 보입니다. ‘휘저은 진흙탕처럼 흐트러지는 평온함’ 같은 비유는, 실제로 주인공이 평온하다는 인상을 줄 우려도 있고, ‘같은 색 물고기떼’ 라고 학생들을 비유한 경우는 맥락이 첨예하게 와 닿지도 않습니다.

B: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은 키우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시원스레 풀리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어머니에게 집에 가겠다고 전화를 하고,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를 보여주었어야 이 소설이 완성된다고 봅니다. 상황을 그리는 것은 발단이자 밑바탕, 배경일 뿐입니다. 섬세하게 분위기를 그려내는 묘사에 장점이 있으니 튼튼하고 매끄러운 바닥과 주춧돌은 놓였습니다. 기둥과 지붕을 얹어주세요.



칭소마라 - 반복

A: 시간과 공간이 뒤흔들려서 여러 번의 나를 반복한 끝에 나의 불행한 운명을 답습하게 되는 나의 이야기가 섬뜩합니다. 이야기의 서사가 불분명해서 분위기가 형성되는 지점이 물론 있습니다만, 이야기 자체를 첨예하게 만들어주면 섬뜩함의 낙차는 훨씬 강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행복해지겠다는 주인공의 결의와 반복이 겹쳐지는 부분을 읽으면서 짜릿했습니다.

B: 프레싱과 같은 작가라는 것을 알고 보아서 그런지 몰라도, 수미쌍관의 구조가 같은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파국을 목격하고, 그 파국은 결국 자신의 것이 되는 이어짐이죠. 문제점도 장점도 비슷하지만 이 작품의 경우 '반복' 자체에 더 집중하여 독자 입장에서 이야기를 따라가기 더 쉬웠습니다. 



바닐라된장 - 점

A: 음악을 좋아하는 여성 노인이 가족들에게 버려지고 나서 기대를 버리고 자아를 내팽개치는 과정을 벽에 생긴 ‘점’이라는 상징물로서 표현하는 기술이 훌륭합니다. 노인을 묘사하는 방식이 특히 멋지네요. 소변과 변을 보는 장면으로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감탄했습니다. 재즈를 좋아하고 화장을 하는 노인의 꼿꼿한 성격이 특히 매력적이네요. 그런데 벽의 점이 마지막을 장식하기에는 너무 연결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드네요. 점이라는 상징물이 참 좋은만큼, 노인의 구체적인 삶과 점이 좀 더 밀착되어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B: 점과 스피커의 음악을 통해 노파가 죽음을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관념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끔찍하고 고독하고 비루한 장면들로 이루어졌으나 그 모두를 감싸안는 상징적인 분위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느낌도 준다는 점이 대단합니다. 다만 여러 장면으로 쪼개서 보여주는 묘사들이 좀 더 명확하고 선명했으면 좋겠습니다. 노파의 눈에 세상이, 또한 세상이 노파에게서 멀어지는 모습을 표현한다고 해서 독자의 눈까지 흐릴 필요는 없으니까요. 



認 - 기태의 둥지

A: 다시 어마르들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워낙에 ‘바보 서사’를 좋아하는 편이라 마지막에는 눈물까지 그렁거렸습니다. 전형적인 바보 서사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착하고 순수한 바보(하지만 사실은 현인이죠), 그 바보가 적응하지 못하는 계산적인 세상, 그 바보를 지켜보는 평범한 화자가 등장합니다. 어린 시절의 첫사랑 서사가 녹아든 부분도 참 좋아 요. 그 와중에 어마르라는 소수종족의 싸움이 있고 그 안에 말려들어서 불행해지는 바보의 이야기는 정치소설의 전형적인 양태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재미있습니다. 연작 소설이라는 것을 제가 알고 있으므로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지만, 역시 이 소설이 단편 하나만으로는 설명이 너무 부족할 수밖에 없군요. 서사가 진행되는 방식이 조금 단출한 게 살짝 아쉽긴 하네요. 조금 더 디테일들을 많이 부여해 줘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기태 오빠 메일 쓰는 거 너무 귀여워요!)

B: 어쩐지 비유적인 의미의 외계인인 것만 같은 어마르인 연작입니다. 여전히 섬세한 디테일과 실감나는 묘사, 차분차분 눈밭을 걸어나가는 것 같은 필력이 돋보입니다. 언제나 어마르는 타자의 눈으로만 바라볼 수 있을 뿐, 행동이나 정말로 입 밖에 낸 것만으로 독자는 판단해야 한다는 점이 아마도 이 연작들의 정체성을 더욱 잘 나타내주지 않나 생각합니다. 타자를 바라보는 우리를 바라볼 수 있는 작품을 계속 써주시길 기대합니다.


독자우수단편 가작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선정되신 분께는 거울에서 책을 보내드립니다. 가작에 선정되신 認님께서는 pena12 @ gmail.com 으로 택배를 받으실 수 있는 주소와 연락처를 남겨주세요.
댓글 5
  • 14.12.01 09:53 댓글

    잘근잘근 여러 작품 뜯어 보시느라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좋은 평 감사 드립니다.^^

  • 니그라토 14.12.01 12:50 댓글

    친절한 감평 감사합니다.

  • No Profile
    바닐라된장 14.12.01 22:43 댓글

    평가 감사합니다.

  • No Profile
    엄길윤 14.12.03 06:41 댓글

    소중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 No Profile
    칭소마라 14.12.04 22:23 댓글

    평가 감사합니다! 프레싱 쓸 때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고 반복 쓸 때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아서 분위기를 일관되게 가져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디테일이 계속 부족하네요. 더 재밌게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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