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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옥과 해골

2014.03.01 15:5003.01

옥과 해골



그대의 얼굴이 보고 싶었소.

구중궁궐 속의 그대가 드디어 황금 용마루에 오른다는 소식을 들은 날부터 나는 못 견디게 그대의 얼굴이 보고 싶었소.

새 천황이 그려진 반딱한 종이돈이 펄럭이던 날부터 나는 그대의 얼굴이 죽도록 보고 싶었소. 그대를 볼 날을 손모아 고대하며 그대의 얼굴이 그려진 새 지폐를 열심히 모았다오. 옥좌에 오르는 그날 축복 어린 파란 하늘 아래 빛나는 그대의 얼굴을 보기 위하여. 그대는, 그대는 그랬던 나를 아시오? 내가 그대를 그토록 애타게 보고자 했던 것을. 

그대가 천자가 되던 날, 나는 조선말 편지를 품에 넣고 있다가 잽혀서 십일 일 구류를 살었소. 그대가 나를 잡어넣지 않았더라면, 돌로 깎은 꽃과 같은 그대의 얼굴을 내게 보여주었더라면, 나는 다시는 그대를 만나러 가지 않았을 것이오. 단 한 번 우러러본 그대의 얼굴을 가슴에 품고 일생을 살았을 것이오. 그대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마누라 몰래 숨겨놓은 돈뭉치를 품은 양 뱃속이 뿌듯했을 것이오. 

그러나 그대는, 눈부신 태양같은 그 얼굴을 내게 보여주지 않았소. 그래서 나는 서러웠소. 돈 주고도 못 보는 것이 그대의 얼굴이 아니었소. 감옥소에 들어앉아서도 아쉽고 서러워 눈물이 났소. 눈물이......

믿지 않겠지만, 그대 얼굴이 참말로 보고 싶었소.


그대여, 그대여......알고 있소? 조선땅은 봄만 되면 허연 피를 흘린다오. 흰 옷 입은 사람들이 산과 들에 널려 먹을 것을 찾는 풍경을 보노라면 땅이 가난을 못 이겨 허연 피를 흘리는 것 같앴소. 겨울 내내 가난으로 살가죽이 마르고 뼈가 바스라진다오. 하지만 그런다고 죽지는 않소. 배가 고프다고 해서 사람이 금방 죽지는 않소. 죽을 때는 따로 있소. 

겨우내 이빨을 맷돌처럼 갈면서 버티다 보면 이윽고 봄이 찾아오오. 연두빛 풀잎이 언 땅을 비집고 손을 내미오. 봄 햇볕이 고양이 솜털처럼 하늘하늘 흩날리기 시작하오. 차돌처럼 얼어 있던 몸이 볕양 아래 풀어지면 겨우내 겹치고 겹친 원한도 녹아나고 마오. 그렇게 보릿고개가 되면 허여멀건한 무명옷을 입은 사내와 아낙과 어린애와 할미가 갓 낳은 눈먼 짐승 새끼처럼 땅 위로 복복 기어나오오. 개중 가장 숟가락질 많이 해본 짐승이, 마치 광합성이라도 하듯이 쭈글어 오그라붙은 손을 마른 이파리처럼 내민다오. 무심한 볕양이 늙은 짐승을 내리쬐오. 따닷하다... 중얼거리는 순간 이윽고 그 짐승은 돋보기로 햇빛을 쪼인 가랑잎처럼 실그러져 버렸다오.

아아! 그 모습을 바라보는 불쌍한 짐승들이여! 굶고 또 굶어 풀잎처럼 마른 짐승들이여! 그리하여 나는 고픈 배를 움켜쥐고 대판으로 갔소. 동경을 갔소. 그러나 먹을 것은 없었소. 지유도 없었소. 끝없이 굶주림에 쩍 벌린 수많은 입천장만 있었소. 원한에 독이 받친 싯누런 이빨들만 가득했소. 밥통이 텅텅 비다 못해 쳐보면 챙챙 하니 되놈 악기 소리만 나오. 챙챙 챙챙챙 챙챙챙. 나는 결심했소. 이 맑디맑은 밥통에 쌀밥 대신 폭탄을 채워 주기로. 그러면 영원히 배고프지 않을 것이오. 

그리하여 나는 폭탄의 말을 찾았소. 독립운동도, 사회주의도, 아나키인가 무산자 운동도 해보고 싶었소. 팜플렛도 읽었소. 대학 책도 읽어보았다오. 그러나 어디로 오라, 누구를 찾으라, 무엇을 하라는 말은 없었소. 대신 세상은 이러이러하다는 말만 죽 적혀 있었소. 그리고 맨 끝터리에, 그러므로 혁명하라는 말만 적혀 있었소. 읽고 나면 바뀌는 것은 없었소. 생각을, 사상을 바꾸라는 말 뿐이었소. 사상, 사상만이 오직 존엄하였소. 그런데, 사상을 바꾸면, 조선놈이 어디 달라지오? 진짜 일본놈이 되오? 그대여, 그대는 과연 내가 일본놈이 되길 원하였소?

나는 그 대답이 듣고 싶어 그대를 보러 떠났소. 그러나 그대는 나를 감옥에 처넣었소. 그때 나는 보았소. 세상 빛을 보고 태어나서 딱 한 번 돈이 쓸모가 없는 곳을 처음 보았소. 흙덩어리 위에 그토록 돈이 쓸모가 없는 곳은 다시없을 것이오. 바로 감옥소요.

품속에 황금 금괴를 넣고 들어온 놈도, 밥통에 다이아몬드를 깔뜩 채워 넣고 들어온 놈도, 조금만 지나면 식은 밥 한 덩어리에 그래 피흘려 번 보화를 꾸역꾸역 게워 내바치게 되오. 옆채기서 보기에도 억울하오.

멋모르는 이는 감옥소 안이야말로 돈이 목숨이요, 팔다리 안 짤리우고 온전케 해준다며 떠들지만 눈먼 소리요. 차라리 돈 없는 게 속 편하고 맘 놓이는 데가 감옥소요. 배암이 진주를 동그라니 말고 있어봤자 땅꾼 눈에 띄면 뭐하겠소. 껍데기만 홀딱 벗겨지지 않겠소. 것두 모자라 감춘 거 있나 입은 옷 벗겨 탈탈 털고, 입구멍 똥구멍 헤치길 제 양치질보다 자주 해댄다오. 그럴 바에야 짜내도 마른 오줌밖에 안 나오는 놈으로 찍히는 게 편하다오.

감옥소에선, 진주 산호 한 보따리 싸 바쳐도 하얀 백미밥 한 그릇 못 사오. 뜨뜻한 사골국 냄새도 못 맡소. 나는 한 어떤 이를 보았소. 그늬는 가슴 속에 하도 오래 품어 미지근해진 벽옥 가락지 꺼내놓고 일케 말하더오. 

내가, 속병이 깊어 약 한 첩 먹어야 하겄는디 부디 부탁하오. 하면서 조카뻘이나 될까 싶은 간수 청년에게 내밀었소. 

간수 청년은 가락지를 보고 청하는 죄수 얼굴 한번 보고 

기다려보. 하고 나직하게 말하면서 은근히 손을 내밀어 가락지를 가져갔소.

나는 그 가락지를 본 적이 있소. 가끔 그 속 아픈 친구가, 한밤중 똥통에 걸터앉아 가락지를 꺼내 달빛에 비춰보는 걸 보았소. 내 알기로 그늬는 가족이 없소.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워줄 마누라도, 혼수로 품에 넣어 보낼 딸내미도 없었소. 내 추리에 그늬는 마음에 드는 아낙을 만나면 가락지를 내밀고 같이 살자 할 요량이었던 모양이오. 아낙이 나타나기만 기다리면서, 그때 손바닥에 슬며시 쥐어줄 순간을 생각하면서 피를 내고 고름을 짜서 번 돈으로 산 것이오. 그렇소. 고 동글동글한 물건은 그래 희망이라는 말과, 아니, 행복이라는 말과도, 똑 닮아 있었던 것도 같소. 아마 달빛을 받아 그래 보였나 보오. 아무튼 그늬는, 속이 아파 한 달이 넘게 끼니마다 밥 한두 술 밖에 못 넘기다가 못 참고, 가락지를, 희망을, 장래의 마누라를, 미래의 귀여운 딸내미를, 당분간 간수 청년의 손에 쥐여주기로 한 것이오.

그늬는 보름이나 지나 겨우 약을 받아 먹었소. 그리고 달포 후에 배를 앓다가 실려 나갔소. 실려가던 그늬가 숨이 붙었는지 말았는지 나는 모르오. 그러나 나는 후일 또한 보았소. 부산항에 머물면서 배를 기다리다가 왜년들이 술 따르는 집엘 갔소. 들어가니 오사까로 넘어가려는 조선 뜨내기들이 박실했소. 들어가보니 뚝 잘린 나무 쟁반을 들고 걸음치는 여급의 통통한 손에 끼워진 몹시 윤이 나는 가락지를 보았소. 달빛에 푸르스레 빛이 나는 가락지를. 간수 청년의 손에 넘어가던 그 동글한 물건을. 간수 청년이 이 여자에게 준 건지, 감옥소를 그만두고 살림이라도 냈는지 알 도리가 없었소. 아니면 전당포 금고에서 금고로 굴러다니다가, 헐값에라도 넘어갔는지 모르겠소. 나는 여급의 손을 보면서 술을 마셨소. 창자에서 알코올 김이 올라와 뇌수를 훈훈하게 덥혔소. 뜨거워진 눈에 술 나르는 여자치고 희여멀건한 손빛과 퍼어런 벽옥 빛깔이 어룽어룽했소. 

나니 고레? 다까이 모노까! 

야요, 니세모노요.

손님에게 손목을 잡힌 여급이 빠져나가면서 소리를 꽥 질렀소. 니세모노......아아, 난 그때 지갑에 든 돈 전부를, 아니 내 전재산이라도 몽땅 줘버리고 그 여급 손가락에 꽂힌 가짜 가락지를 사고 싶어서 가슴이 훨훨 탔소.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섰소. 더 마시고 싶었소. 청국인 가게에 가서 고량주를 퍼부었소. 아예 뻐근할 정도로 가슴이 불탔소. 그러나 유리도 녹여내리는 고량주도 내 가슴뼈에 얼어붙은 슬픔을 녹이지는 못하였소. 나는 길바닥에 쭈그리고 얼굴을 엎디었소.

지나놈들, 그러니까 당하지!

뜨내기 인부 몇 놈이 전깃불 아래 쭈그리고 앉은 내 옆을 지나갔소. 고량주가 속을 할퀴며 쏟아져 나왔소. 나는 방금 쏟아낸 내 속엣것과 다시 얼굴을 대면하였소. 핏방울도 몇 군데 보였소. 푸르스름하고 맑은 벽옥빛 같은 건 아무데도 없었소.

돈으로 아무것도 못 사오. 아무것도 못 사오. 돈으로 뭐든지 살 수 있다고 믿어 마지않는 그대는, 티 없는 바보요. 가락지를 주고 엉뚱한 약 한 첩 겨우 얻어먹은 죄수마냥...... 돈이 그리 귀하다면 나는 죽어 돈이 되겠소. 황금이 되겠소. 그대 궁궐 용마루를 장식하는 은덩어리가 되겠소. 


여기 나는 다시 감옥소 안에 앉아 있소. 이번엔 속 아픈 놈도 간수 놈도 없소. 나 홀로요. 그렇지만 여기로 각양각색 왜놈들이 찾아온다고 하오. 내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려고 그 먼 북해도에서 여기까지 온다고 하오. 

하지만 아무도 나를 만날 수 없소. 내 얼굴 보기가 천황 보기보다도 어렵소. 그때, 끌려가면서 무섭게 등 뒤에서 울리는 징이 찢어지는 듯한 노호가 마냥 기뻤었소  기쁘기 한량없었소.

조센진까―!

그렇소. 조선놈이오.

그리하여, 이 조선놈은, 텐노헤이카처럼, 구중궁궐에 갇혀 있소. 아무도 이 옥안을 배알치 못하고 있소. 찾아오는 수천의 왜놈들은 비록 이 얼굴은 보지 못한다 해도 내가 오도카니 갇힌 강철 벽을 올려다보기 위해 발바닥의 고달픔을 마다하지 않소.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오는 턱수염 파아란 젊은 뱅고시놈의 표정을 보면 이 몸을 배알하려는 열광자들의 숫자를 알 수 있소. 그대의 찬양자 못지않은 숫자요. 매일같이 알 스는 파리떼같이, 늘어나오. 

그 뱅고시는 옥안을 배알하는 성은을 입은 유일한 몸이오. 올 때마다 나를 어서 꽃 피는 천당에 보내어 드리자는 상소가 적힌 종이 두루마리를 들고 오오. 나를 천당으로 모시는 가지각색 방법이 전국에서 답지하오. 나는 처음에는 재미있게 읽다가, 가끔 모가지 밑에 베고 자다가, 문득 생각이 들어 그 주옥같은 상소문들을 골라 잘 비벼서 뒷간을 닦는 데 쓰오. 그때마다 그놈들의 혓바닥으로 뒤를 닦는 기분이 드오. 매우 상쾌하오. 

하루는 뱅고시놈이 찾아와 상소문을 내놓지도 않고, 말도 없이, 찻물에 눈동자만 빠뜨리다가 가방에서 두툼한 종이 묶음이며 연필 뭉치를 꺼내다가 내 앞에 가지런히 놓았소. 뱅고에 필요하니 이제까지 살아온 내 일생을 모두 솔직히 적어달라는 말을 남기고 뱅고시는 물러갔소. 내가 살아온 인생을 모두 적어달라며. 

그날밤 나는 뱅고시놈이 주고 간 종이 묶음을 베개 삼아 침소에 들었소. 듣자 하니 옛날 왜년 귀족들은 텅 빈 나무통으로 베개를 만들어 그 속에 일기를 써서 넣었다 하오. 등잔을 끄고 누우면 베개 속에서 일기장이 소살소살 귓가에 속삭이겠소. 그 운치에는 못 미치지만, 나도 한동안 종이 묶음을 베개 삼아 자려오. 

그런데 아직 이 종이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소.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이 베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소. 그저 입 잘린 동무처럼 내게 눈으로 호소하오. 답답하오. 말좀 하고 싶소. 답답해 죽겠소. 말좀 하게 해주소. 그런데 말하면 아프오. 죽소. 그저 아프오. 뒤지도록 아프오.

게으름 피우지 말고 어서 쓰라는 듯 만년필과 잉크가 차입됐소. 반들거리는 새것이오. 나를 천당으로 보내줍소사 상소를 올린 벌레들에게 꼭 몇 마디 내려주십쇼 하는 정성이 느껴졌소. 종이를 담요 속에서 꺼내어 노끈을 풀었소. 그동안 종이에는 머릿기름이 배어 어느새 누래졌소. 종이가 나를 보고 있지도 않은 입을 벌려 주욱 찢어 웃소. 그 웃음을 보니 왠지 뱅고시놈이 불쌍해졌소. 내 변론을 맡은 일본 제일 운수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니, 뱅고시놈이 비굴하게 웃는 모습이 떠올랐소. 일본 제일 폭한을 만나, 겁먹은 눈알을 한 주제에 입만 겨우 벌려 웃고 있었소. 말 못 하는 입이라도 웃을 줄은 아는 법이오. 쥐----익. 찢어지도록 쥐------익.

좋다. 입을 그려주마꼬. 

값비싼 만년필이었소. 손에서 굴려보니 무어라고 써 보고 싶기도 하였소. 그러나 이 숙제를 하고 나면 고이 두지 않고 누가 덧쓰지말란 법이 없지 않소. 그러면 어떡하나. 기껏 열심히 써보았자 언놈이 고쳐쓸지 누가 알겠소. 그대가 내리는 칙어도 실은 신하들이 이리저리 만지고 광내준 거 아니오. 그리 되긴 싫어 만년필만 손장난 삼아 매냥 굴려보다가 갑재기 재미있는 생각이 났소. 

요걸 죄다 조선말로 써놓으면 어떻겠소. 

그럼 저 뱅고시놈이 읽지 못할 게 아니오. 내 목을 벨 검사놈도 읽지 못할 게 아니오.

아니 아니오. 혹시 저 뱅고시가 왜놈인 척 하고 다니는 조선놈일지도 모르오. 바로 나처럼. 왜놈이라 조선말 모르는 척 하고 있다가 다 읽어보는 게 아니오.

그게 아니라 실은 왜놈들이란 전부 다 조선놈인데, 하카마 입고 왜말 하면서 꼭 왜놈인 양 하고 다니는 게 아니오. 왜놈인 척 하고 있으니 조선말로 쓰면 다 알아보는 거 아니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절로 손이 무릎을 탁 쳤소. 아하 그렇구나! 그래서 이제까지 조선글로 글을 쓰고 조선말로 욕을 해도 왜놈들이 다 알아듣는 거로구나! 그렇구나! 아하 그렇구나! 왜놈들이란 게 실은 다 왜놈인 척 하는 조선놈이로구나! 그럼 천황놈도 조선놈이로구나! 왜놈인 척 하는 조선놈이로구나!

나는 조선놈이로소이다. 왜놈처럼 생기고 왜말도 잘하고 왜놈 노래도 잘 부르지만 조선놈이로소이다. 천황 폐하께서 폭탄을 맞고 나서 물으셨나이다. 조선놈이 던진 것이냐고 물으셨나이다. 신하가 대답했나이다. 예이 벼락을 맞을 조선놈이 던진 것이 맞사옵니다. 그러자 폐하께서 조선놈이 던진 것이로구나 하셨나이다. 그렇게 나는 조선놈이 되었소이다. 아예 옹글진 왜놈 행세도 못하고 조선 엽전도 못 되고 상해서 떠돌던 구역나는 아편 찌꺼기가 비로소 조선 사람이 되었나이다. 천황 폐하의 성은으로 조선 사람이 되었나이다. 오로지 되놈이 만들다 귀찮아 집어던진 폭탄을 몸소 맞아주신 천황 폐하의 은혜로소이다. 크핫핫핫핫하! 크핫핫핫핫하! 천황 폐하의 은혜에 보답코저 이 벌레 모조리 자백하겠나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입속부터 창자 끝투리까지 몽땅 토해 내겠나이다!

조선놈이 되어서야 끝내 지유(自由)인이 되었소. 지유를 얻었소. 지유가 무엇인지 아시오니까. 지유가 무엇인지. 자유가 아니라 왜말로 굳이 지유라고 하는 이유를 아시겠소. 조선땅에는 지유가 없소. 자유라는 말만 있소. 지유가 없소. 그래서 지유라고 하오. 

왜 지유가 중한지 아시오. 그대는. 세상에 돈이야말로 소용이 없기 때문이오. 

지유만이 소용에 닿소. 지유가 모든 소용을 끌어안소. 돈조차도 지유의 팔 안에 폭 감겨 있소. 

일찍이 내 애비가 화류병에 걸려 누웠을 때, 경성 의원이란 의원은 모조리 우리 집에 모여들어 대청마루를 버선으로 광을 냈소. 온갖 약을 지어 먹고 침을 맞고 뜸을 뜨고 사추리가 다 썩어들면서도 무릎 짚고 일어날 힘만 나면 그놈은 붉은 등 매단 집까지 벌레처럼 기어갔소. 지랄맞은 그놈이 왜 그랬는지는, 몇 년 후에야 나는 알았소. 유녀의 뱃속을 열심히 헤치던 중 깨달았소. 그때 나는 헐땍이며 외쳤소. 

"아부지, 이런 거였소! 이런! 거였소!" 

모든 진리는 여자 다리 사이에 있다는 어떤 왜중 말이 틀리지가 않았소. 그때야 이 못난 아들은 썩은 아비를 이해하고 왜년의 뱃속에서나마 진심으로 석고대죄를 하였소. 아비가 왜 그 지랄을 했는지. 그것은 지유 때문이었소. 아비의 그 모든 화류귀신 들린 병은 지유 때문이었소. 지유가 화류봉을 안고 있기 때문이오. 온갖 귀신과 궁핍과 처절을 끌어안고 있기 때문이오. 그것들을 안고 나는 기꺼이 실신하오.

지유는 모든 소용을 끌어안고 있소. 돈도 여자도 지유의 품속에 들어있소. 그러나 나는 가난했소. 가난한 조선놈이었소. 그러나 조선땅 위에 널린 가난에 지해 내 몸의 가난은 가벼웠소. 그러나 돈 잘 벌어 출세하라는 편지쪽 한 장 품었다고 그대는 즉위하는 날부터 십일 일 동안 나를 옥 속에 가두었소. 원망하지 않소. 그날 그대는 천황이 되었고 나는 자유의 왕이 되었기 때문이오. 옥에 갇혀 똥그란 희망의 고리를 보았기 때문이오. 

돈은 숫자로 말을 하오. 숫자는 돈의 언어요. 그 말을 듣지 마시오. 그 말을 한 번 들으면 영원히 돈의 말로만 말하게 되오. 지유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소. 나는 옥 속에서 돈으로도 못 살 지유의 말을 들었소. 그대의 지유의 말은 그대가 직접 만드시오. 거미줄로 명주를 짜듯이 정성 들여 만드시오. 구중 궁궐의 가장 따뜻한 뱃속 깊숙히 들어앉은 그대여. 


허나 가난으로만 지유의 말을 짤 수가 없었다오. 그래서 조선놈들이 산낙지처럼 허우적대는 거대한 뻘밭같은 대판을 떠났소. 눈물처럼 짠 바다를 건너 가난의 씨실을 메워줄 날실을 찾으러 상해로 갔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사러 갔소. 분노를 사러 갔소. 지긋지긋하게 욕심많은 이 목숨을 주고 분노를 사러 갔소. 어두운 저승의 짠물 너머 목숨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쇳물같은 분노를 사러 갔소.

하하하. 그대의 얼굴이 갑자기 부드러워지는구료. 그렇소. 그대가 가장 궁금해하는 이야기오. 창수 영감 이야기요. 허나 그대는, 보경사 49호에 직접 들어간다고 해도 창수영감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오. 대신 때묻은 문간에 퍼런 청옷을 입고 쭈그리고 앉아 걸레질을 하는 바위처럼 둥그런 문지기놈만 찾을 수 있을 것이오. 

나는 여기가 가정부냐고 물었소. 문지기는 대답은 않고 마룻바닥만 닦고 있었소. 나는 독립운동을 하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말했소. 문지기는 마루를 계속 닦으면서, 여기는 조선 사람이 서로 돕고 살려고 만든 민단이라고 대답했소. 나는 다시 나도 조선 사람이라 조선 사람을 돕고 싶어서 찾아왔는데, 노동을 하면서 독립운동은 못 하느냐고 물었소. 문지기는 말없이 걸레만 바닥에 문질렀소.

돌아서서 민단을 나오는데 어떤 중국 보이가 나를 잡았소. 

여보시오.

돌아보자 보이가 말했소. 

저어기 가서 자전거를 하나 들치기 해오시오.

뭐요, 그건 도둑질이 아니오? 

그러자 보이가 돌아서면서 말했소. 

하기 싫으면 관두시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귀신이 등을 떠밀고 다리를 끌어댕기는 것처럼 미친듯이 달려갔소. 자전거! 자전거! 철도역 앞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던 자전거 한 대를 훔쳐타고 쇠줄에 불꽃이 튕기게 페달을 밟았소. 머리칼이 곤두서는 것 같았소. 민단 앞에 돌아오자 문지기가 서 있었소. 나는 그 앞에 자전거를 쓰러뜨려 놓고 돌아섰소. 가려는데 문지기가 말했소. 

다음달 오늘 한밤중에 찾아오시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걸어갔소. 굶은 배가 쪼그라들고 식은땀이 나서 부들부들 떨렸소. 그러나 깨달았소. 내 등을 떠밀던 귀신의 정체를. 바로 '사상'이라는 것을.


그 이후에도 나는 상해서도 돈을 버느라, 역시 일본놈이 되었소. 창수 영감과 독대하기까지 일 년 반이 흘렀소. 나는 그때까지 소처럼 일하고 돈을 벌었소. 술을 마시고 여자를 샀소. 민단 사람들과 놀면서 왜놈 말을 하고 왜놈 노래도 불렀소. 하지만 창수 영감은 나를 쫓아내지 않았소. 그대처럼 조선말 편지를 지녔다고 감옥소에 집어넣지 않았소. 다만 나에게 이렇게 말했소.

가정부라고 있지만 아무 힘이 없소. 고작 부인회나 어린이회 돈이나 대 줄 정도요. 그러나 정 의거를 하겠다면 그런 조직 같은 건 필요가 없소. 의지만 굳건하다면 혼자 힘으로 얼마든지 해 낼 수 있소. 하겠다면 내가 돈과 폭탄을 대어 줄 수는 있소. 군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나는 술잔을 놓고 창수 영감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대답했소. 

하루 빨리 나는 죽고 싶소이다.

영감은 똥그란 안경 뒤에서 침침한 눈을 내리깔았소.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서야 영감이 입을 열었소. 

기다리시오. 그리고 몸을 아끼시오.


내가 몸을 아낄 리가 있겠소. 무어 이리 한심한 놈이 다 있느냐고 그대가 비웃는 모습이 영화처럼 떠오르오. 나는 일본에서처럼 자고, 영화 보고, 술 먹고, 여자 사고, 커피 먹고 음악 듣고 하면서 놀았소. 그러면서도 나는 하늘을 향해 빙글빙글 날아가는 폭탄 꿈을 꾸었다오. 폭탄은 팡 하고 진주 가루가 흩어지듯 무지개 빛살을 터뜨렸소. 그 눈이 머는 듯한 무지개 빛살을 보면서 나는 입안에 시디신 과일맛을 느꼈소. 혓바닥 돌기를 간질이는 통통한 과일의 맛. 그대같은 귀한 몸이 매일 먹는 과일맛......

천황 폐하를 죽일 수 있겠소.

천황은 신과 함께 있는 장식인데 죽여서 뭐 합니까. 그보다 총리 대신이나 고관놈을 죽이지요.

아니요, 천황을 죽이는 게 백배 낫소. 온 세계 신문에 널리 실릴 거요.

그렇소. 그대가 코웃음치겠지만, 어리석은 내가 창수 영감을 믿은 건 중국 돈 삼백 불을 받고 나서였소. 폭탄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쇠 냄새까지 맡고 나서도 창수 영감을 믿지 못했소. 그 많은 돈다발이 풍만하게 손바닥에 안겨오는 순간까지. 창수 영감은 얼이 빠진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나를 이끌고 라 메종 빠이제로 들어갔소. 그리고 사진을 찍었소. 두 장, 형에게 보내달랬던 사진, 그러나 신문에 나 버린 사진, 목에 독립선언서를 걸고, 양손에 폭탄을 든 사진. 세 번째 사진은 왜 찍었는지 나도 모르겠소. 다음날 중국 요리를 사주고 나서 창수 영감이 다시 한 번 나와 함께 사진을 찍었소. 그 사진은 끝까지 신문에 나지 않았소. 창수 영감이 나와 기념 사진을 찍었다는 걸, 나는, 밧줄에 목이 감긴 채 왜놈들에게 사진을 찍히기 전까지 깨닫지 못했던 거요. 

사진을 찍고 나서 창수 영감이 가만가만히 말했소. 나도 군 덕분에, 명성을 높일 것이오. 그리고 말없이 서 있던 나를 데리고 누런 등이 걸린 여관으로 들어갔소. 들어가서 영감은 창문을 닫고 발을 내리고 문을 걸어잠갔소. 안고 온 보따리를 풀자 흰 비단 주머니와 보라색 복대 그리고 폭탄 두 개가 싸여 있었소. 나는 시커먼 호수처럼 보따리 안을 들여다보았소. 폭탄 두 개가 갓 낳은 쌍둥이처럼 나란히 누워 있었소. 

영감은 내게 바지를 내리라고 시켰소. 그리고 말했소. 동지. 이제부터 잘 들으시오. 폭탄을 일본까지 갖고 갈 방법을 가르쳐 주겠소. 폭탄을 길죽한 비단 주머니에 넣고 다리 사이에 끼운 다음 양 끝을 복대로 친친 감는 것이오. 이렇게 하면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오. 내가 먼저 해줄테니 다음 번엔 동지가 혼자 해 보시오. 금방 익힐 것이오. 

영감은 이렇게 말하면서 내 앞에 무릎을 꿇었소. 나는 숨이 막힐 듯 몸이 달아올랐소. 숨을 몇 번 고른 후에야 나는 차고 있던 주홍빛 훈도시를 풀어 내렸소. 창수 영감은 폭탄을 넣은 비단 주머니를 내 다리 사이에 밀어넣고 양 끝을 내가 잡게 한 다음 복대를 단단히 감았소. 잘 감아야 하오. 잘 감지 않으면 폭탄이 두 발 사이로 뚝 떨어져 동지의 몸부터 반 동강이 날 테니. 나는 비단 주머니를 든 채 영감의 뜨겁고 거친 손이 내 다리와 배를 스치고 지나가는 감촉에 전율했소. 어떤 여자의 손이나 입술보다도 지독하고 뜨거운 느낌이 났소. 무릎 뒤에서 땀이 흘러내릴 무렵 영감은 일어섰소. 배는 복대로 꽉 감겨 있었고 폭탄 두 개가 내 사타구니를 단단히 누르고 있어서 바지를 끌어올릴 수가 없었소. 내가 머뭇거리자 영감이 다가왔소. 자, 내가 도와 주리다. 겨우 바지를 끌어올리고 허리끈을 묶자 깊숙히 고인 한숨이 막힌 하수구 뚫리듯 흘러나왔소. 영감이 몇 발자국 물러서더니 말했소.

조금 부해 보이는구려. 

내가 대답했소.

오버코트를 걸치면 괜찮을 것입니다.

불편하지 않소?

조금 답답하지만은 복대를 여유있게 감으면 됩니다.

복대를 꽉 감지 않으면 폭탄이 흘러내릴 것이오.

훈도시를 위에 감으면 됩니다. 복대보다 나을 것입니다.

영감은 잠시 말이 없다가 대답했소.

폭탄이 터지지 않도록 조심하여 몇 번 연습을 해 보시오. 오늘은 여기서 묵고 내일 숙소로 돌아갑시다.

창수 영감은 그날밤 나를 남겨놓고 민단 사무소로 돌아갔소. 나는 앉아 있다가, 답답하여 여관 문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나왔소. 

눈이 내리는 밤이었소. 차갑게 언 길거리에 개새끼 한 마리 없었소. 텅 빈 거리에서 하늘에서 언 바닷물이 내려오는 듯하였소. 길거리은 눈밭으로 변해 달빛을 발하고 있었소. 갑자기 이 눈밭에 철갑 알맹이를 던져볼까, 그러면 창수 영감의 굳고 뭉친 얼굴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조선을 떠나고 처음으로 웃었소. 즐거웠소. 저절로 청루에 발길이 옮겨졌소. 참으로 즐거웠소. 내 불알은 무쇠로 만든 폭탄이라네! 흥얼흥얼 노래를 읊으면서 나는 지나 계집의 사타구니 속으로 참으로 유쾌하게 걸어들어갔소. 

칠 일 뒤, 소화 6년 겨울 비단에 싸인 폭탄을 불알 아래 껴안고 대판 항구에 도착했소. 그것이 나의 조선놈 되는 첫 번째 발길이었소. 조선놈 되기가 참으로 어렵소. 안 그렇소? 옥상옥 여관방은 너무 좁아서 여자도 부를 수 없었소. 그래서 주로 카페에서 놀았소. 그날밤도 여급들과 떠들다가 문득 일어났소. 

조또, 쓰뜨레.

내가 간 곳은 과자점이었소. 폭탄을 넣을 상자가 필요했기 때문이오. 치수는 미리 재어 종이에 적어 놓았소. 산 것은 겨울에 먹는 화과자였소. 카페에 들어가서 상자를 테이블에 던졌소. 

여어, 다베떼요.

꺄아 하고 여급들이 굶은 고양이떼처럼 달라붙었소. 상자는 순식간에 비었소. 다 먹어치운 여급 중 한 여자가 술을 한 잔 더 들고 와서 내 앞에 놓았소. 아리가또요. 얼굴을 보니 저녁을 못 먹은 눈치였소. 굶었냐고 물으니 고개를 저었소. 그러면서 앞에 놓인 술은 먹지 않았소. 술을 권하지 않으니 여자가 조심스럽게 주머니에서 연필과 종이를 꺼내어 놓았소.

벌써 계산인가?

이에, 아노…

여자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소. 와다시노 나마에와 세이지데스. 세이지? 와다시와…음악 소리가 높은 카페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더 작아지더니 들리지 않았소. 대신 연필과 종이를 내 앞으로 밀었소. 여자의 부탁은 자신의 이름을 종이에 써달라는 것이었소. 학식 있는 분 같아서. 여자가 덧붙였소. 나는 세이지, 静枝라고 쓰고 돌려주면서 말했소.

내가 글을 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나?

저어…

여자가 화과자 상자에 붙은 영수증 종이를 가리켰소. 거기에 내 서명이 있었소. 기노시타 쇼조. 

이름을 써 받아서 무엇을 하려는가?

여자가 고개를 숙였소.

손수건에 새기려고…

손수건에?

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가족이 없는가?

고향에 있습니다. 

더 물으려는데 카운터에서 유코, 조또 이데스까 하고 불렀소. 여자는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혼또니 아리가또 고자이마시다, 하고 인사하고 급히 사라졌소. 고향이 어딜까. 나는 잠시 유코가 조선 여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소. 하지만 세이지는 조선 이름이 아니오. 어디에서 쓰는 이름인지 생각해 봤지만 알 수가 없었소. 나는 상자를 들고 일어섰소.

여관방 다다미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소. 이름을 써달라고 부탁한 여자가 계속 생각났소. 손수건에 새긴다니 더 글자를 좋게 써 줄 걸 후회가 났소. 내 필체가 여자의 손수건에 남는다니 자미도 났소.

머리맡에 둔 상자에는 이미 폭탄이 들어 있었소. 기노시타 쇼조. 나는 상자에 붙은 영수증을 뜯어 조각조각 찢어서 화로에 넣었소. 나는 무엇을 남겨야 할까. 잡히면 기노시타가 아닌 조선 이름으로 남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기분이 나쁘지 않았소. 일본에서 쓸 수 없었던 이름이 일본 역사에 길이 남게 되리라 생각하니 한층 더 기분이 좋아졌소. 

갑자기 창수 영감의 말이 떠올랐소.

나도 동지 덕분에 이름을 남기게 될 것이오. 

이름, 이름, 이름만 남기게 되는 것인가? 아, 사진도 찍었지. 그럼 이름과 사진만 남기게 되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아쉬웠소. 결심을 하고 처음으로, 죽게 되면 내가 누구인지 사람들이 궁금해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소. 갑자기 나에 대해서 쓰고 싶었소. 내가 누구인지, 천황을 죽인 남자가 누구인지 남기고 싶었소. 오밤중에 등불을 켜고 화로를 끌어당겼소. 대학 노트를 펴고 카페에서 가져온 연필을 달렸소. 쓰다가 이런 것까지 써도 되나, 싶은 것도 그냥 마구 써내려갔소. 스무 쪽이 넘어가자 날이 밝았소. 보통학교 시절 국어를 열심히 배운 것이 결국 이렇게 쓰이나 싶어 코웃음이 났소.

다 쓴 것을 내려다보니 다시 창수 영감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소.

고문을 당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런 경우에는 다 털어놓아도 괜찮소. 나에 대한 말을 해도 관계없소.

선생님에 대한 말은 절대 내지 않을 것입니다. 왜 저질렀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하면 좋겠습니까.

아무 말 할 필요 없소. 동지가 할 말은 독립선언서에 다 적혀 있소. 

사진에 들고 찍은 것 말입니까. 

이렇게 말하자 창수 영감은 나를 돌아보았소.

왜놈들은 조선글로 써 놓아도 다 알아본다오.

그럼, 그때 왜 조선글 편지를 품었다고 잡어넣었는고…다시 울화통이 북받쳤소. 다음날 나는 밤새 쓴 글뭉치를 박박 찢어 쓰레기통에 집어넣었소. 더러운 쓰레기통에 글자들이 처박혀 있는 걸 보니 속이 다 내려가더오.


그후 그대가 도쿄 경시청에 오는 날까지 나는 카페에서 놀고, 영화를 보고, 마작하고, 비가 오면 여관방에서 피아노 카탈로그를 들춰보며 지냈소. 사상이 담긴 책 따윈 거들떠보지도 않았소. 글자를 보면 구역이 났소. 그리고 그날 아침이 왔소. 나는 그제 밤에 산 여자에게 물었소.

비가 오는가?

이에. 기요이데스.

소까. 테데이께.

여자가 부스럭거리며 옷을 집어들고 나갔소. 볕이 들지 않는 여관방은 차고 어두웠지만 바깥은 분명히 비가 오지 않았소. 비가 왔더라면, 아마 이틀 정도는 더 놀았겠지 생각하자 조금 아쉬웠소. 

내의를 입은 위에 신사복을 걸쳐 입고, 빗은 머리에는 헌팅 캡을 썼소. 나사 천을 댄 검은 구두를 신고 폭탄은 보자기에 잘 싸서 옆구리에 안았소. 포켓에는 며칠 전 우연히 얻은 헌병대장의 명함을 넣어 두는 것도 잊지 않았소. 채비를 다 차린 다음, 갖고 있던 돈을 몽땅 꺼내어 밥 한 끼 먹고 택시 탈 돈만 제하고 화로에 넣었소. 지폐 속의 그대 얼굴이 돈뭉치와 함께 불탔소. 이제 진짜 그대의 얼굴을 폭탄의 불길로 태울 차례였소.

눈알에 찬물을 붓는 듯한 맑은 날씨였소. 겨울이지만 햇빛만은 강렬했소. 우동집에서 국수가락을 끌어넣은 뒤 황궁 앞 역으로 갔소. 외투도 못 입은 사람들이 분주했소. 헤치고 나가려는데 한 아이가 가로막았소. 사내앤지 계집앤지 모를 얼굴에 아무렇게나 깎은 머리였소. 시커먼 갈옷 소매에 걸친 바구니에는 샛빨간 양귀비꽃이 담겨 있었소. 아이는 내 앞을 가로막으면서 조선말로 말했소.

아저씨 이 꽃 하나 사오.

뭐냐. 그걸 팔려느냐.

나는 아이를 떠다밀었소. 아이가 소매를 붙잡았지만 얼른 뿌리쳤소. 조선말이 또 들리면 순사놈들이 우루루 달려와 잡아갈 것 같았소. 아이가 소리를 빽 질렀소.

아저씨 고쪽으로 가면 죽소!

그 소릴 듣고 상해서 자전거 훔칠 때처럼 걸음을 재게 놀렸소. 사람들 속에 들어가고 나서야 골목에서 잠시 땀을 훔칠 수 있었소. 배라먹을 조선놈이…라고 생각하자 어디선가 라디오 소리가 들렸소. 그대가 환궁하고 있었소. 다시 얼음물 먹은 뱀처럼 정신이 번득 났소. 지나는 택시를 잡아탔소. 천황 폐하께 갑시다! 택시가 오르막길을 붕붕 달려가 멈추자마자 뛰어나렸소. 경시청 앞이었소. 언 길바닥에 엎드린 노인들과 경찰들이 벌레처럼 우글거렸소. 나는 빨갛고 흰 손깃발을 든 인부에게 물었소. 

헤이카가스키사데스까?

인부는 타월을 두른 머리를 내두르더니 말했소.

즈으기 오오.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홱 꺾었소. 거기에, 그대가 있었소. 붉은 깃발을 만 검은 가마가 오고 있었소. 서리가 부서지는 듯한 신음소리들이 일어났소. 과연 그대였소. 그대의 가마가, 흔들리며, 금빛 국화를 찬연하게 치켜들고 다가왔소. 나도 벌벌 떠는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갔소. 노끈을 매단 유리창에 멀건 사람 얼굴 같은 것이 비치는 것 같앴소. 눈이 멀 것 같았소. 폭탄이, 꿈에서 본 듯이 칼로 그은 포물선처럼 날아갔소. 그리고 소리! 그 소리! 무지개가 찢어지는 소리! 얏따! 라고 외치는 순간, 외치고 싶었소! 아부지, 이것이 자유의 느낌이요! 자유의 맛이요! 억만금을 주고도 못 사는 유쾌한 맛이요!

기분이 너무나도 좋아서, 나는 두 번째를 던질 것을 홀닥 잊어버리고 말았다오. 그 다음은…그 다음 일은…그대가 더 잘 알 것이오.

경찰들에게 얻어맞고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 끌려갔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소. 지금도 창수영감이 내 샅을 쓰다듬던 타는 듯한 감촉만 온몸에 생생하오. 그날밤 바로 폭탄을 던졌어야 했는데! 후회가 나오. 그 만들다 만 지나놈들, 옘병맞을…그놈들은 채소잎으로 폭탄을 만들어 왔던가! 그때 내 뜻대로, 내 지유대로, 눈 내리는 밤에 던져보았으면! 나, 내 지유의 말은, 끝내 터지지 못한 지나산 폭탄음이오.

영감, 미안하오. 부디 미안하게 됐소. 펄펄 끓는 쇳물도 언젠가 식고 만다오. 내 피는 이제 식어버렸소. 어쨌든 끝이오. 삼십 평생 온갖 화류짓으로 너덜너덜해진 내 몸뚱이도 조금 있으면 영원히 얼어버리게 되오. 어차피 내 몸뚱이는 이 이상의 여인을 받아들일 수도 없소. 수많은 쾌락의 밤을 돌이키면 기억나는 건 쾌감이 아니라 구역감이라오. 술을 마시고 드러눕게 하면 이부자리에 네 활개를 쭈욱 펴는 여자의 겨드랑이 털이 얼마나 더러워 보였는지. 그런 구역이 지나놈들이 집안에 복덩어리라며 쌓아 두는 먼지더미처럼 이 가슴에 넘쳐 있소. 샹하이 조계 뒷골목에서 썩었는지 죽었는지 모르게 될 바엔 감옥에서 잠깐 고생하다 깨끗이 목매달리는 게 낫지 않겠소. 이제까지 아무나 붙어먹고, 양놈 흡혈귀들이 악귀처럼 설치는 샹하이까지 밀려나서 굴러다니다가, 죽을 때에는 깨끗하게 말이오. 

아편 냄새가 나오. 이 옥 안에서, 달콤한 아편 냄새가 나오. 지나인들의 피와 살이 타는 냄새요. 그와 함께, 대마초 타는 냄새도 나오. 조선인들의 골수를 사르는 냄새요. 그 한 대를 피우고, 이걸 피면 배가 안 고파져서 좋다면서, 하얀 옷 입은 짐승이 웃음을 지으며 비틀비틀 걸어가오. 그 가련한 짐승들의 가시덩굴처럼 굽은 다리들. 그 두 향기가 내 몸뚱이에 스며들어 지유를 갈구케 하는 매독의 영토를 밭갈고 있소.

자유롭고 싶었서. 자유롭기 위해 아무나 짓밟고 싶었소. 그 ‘아무나’는 후환없는 이가 적당하오. 그동안 그 후환없는 이를 찾아내기가 안 되기에, 결국 좁디좁은 살덩이 굴 안으로 들어가 다시 요동치는 도리밖에 없었소. 그 폐쇄공포적인 열기와 조임 속에서만 자유를 느꼈소. 자유롭다니, 그게 누구 아가리에 처 넣을 말이오. 내 마음껏 아무나 잡고 짓이기는 게 바로 자유요. 더러운 발로 사람의 몸을 짓밟는 순간만이 유일한 자유와 해방이오. 그래서 십여 분 동안 남의 몸을 마구 파헤치는 해방감을 위해 수많은 남자들이 길 잃은 소녀든 밤의 여인이든 가리지 않는 것이오. 본국에선 인력거에도 감히 못 타는 더러운 인부들이 반도에만 오면 먼지로 물든 검은 침을 내뱉으면서 활개치고, 제국 인민의 민권을 만끽하오. 본국에서는 명함도 못 내미는 시민권이 엉뚱하게 반도에서 진리의 빛을 향유하오. 저런 놈들이 만주로 넘어가면 옳다꾸나 하고 군도를 들어 대륙의 다리 사이를 난도질할 게 뻔하지 않소. 반드시 하겠소. 무슨 일이 있어도, 교토의 신궁을 화염에 물들여 주고 말겠소. 지고꾸를 만들어 주겠소. 아니 지옥이오. 지옥은 조선말로 해야 하오. 지옥만큼 쾌락이 어울리는 곳은 다시 없소. 한낮의 맑고 아름답고 깨끗한, 지유에 넘치는 우에노 공원을 공포와 경악으로 넘쳐나는 지옥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그대여, 그대가 매일 밥 먹고 차 마시는 옥그릇은 누가 만드는 줄 아시오. 돈벌이를 찾아 교토의 하수구를 뒤지고 다닐 때 딱 한 번 마주친 깨끗한 일자리가 바로 그거였소.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 그대의 손이 닿는 향렴이라도 만들고 있을지도 모르오. 그때 백옥을 깎아 붓대를 만들던 옥장이 말하였다오.


금이 탐나 사람을 죽이는 자는 많다. 그러나

옥이 탐나 사람을 죽이는 자는 없다.


그대는 이제 아시겠나이까. 나는 무엇이 탐나 그대를 죽이려 하였는지. 그대의 목숨이 나의 자유요. 그대의 만세일계를 끊는 것이 나의 푸르른 자유요. 자유라고 쓸 수 없는 나의 지유요. 하얀 피 흘리는 이 땅의 처절한 자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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