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우수작 way to mother

2014.03.01 15:4703.01

꿈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남자는 지금이 꿈이라고 말했다. 남자는 말쑥한 정장을 입고 곱게 빗어 넘긴 머리를 가진 중년 신사였다. 대부와 보스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신사는 엄숙한 목소리로 이제 지구, 대자연이 더 이상 인간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권여와는 꿈속에서 최근 유럽에서 폭발한 핵미사일을 떠올렸다. 신사는 권여와의 연상을 알았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간이 고대부터 저지른 모든 전쟁과 재해를 보여줬다. "대자연은 인간을 자연의 흐름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너희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불타 사라질 것이다." 권여와가 말을 걸기 전 남자는 사라지고 여자가 나타났다. 중년의 고운 인상을 가진 여자는 머리에 수녀처럼 면포를 덮고 있었다. 여자는 권여와 앞에 무릎 꿇고는 기도하는 것처럼 양손을 모았다. "하지만 대자연은 인간에게 한번 기회를 줄 거예요. 그 기회를 어떻게 활용할지는, 살리기로 선택된 한명의 여자와 한명의 남자에게 달렸지요." 꿈은 끝났고 모든 일은 꿈에서 예시한대로 이루어졌다.

 

권여와는 2층 카페 창문으로 거리를 내다봤다. 녹음기를 켰다. "건너편에 산부인과가 보여. 우리의 목표에 생각보다 빠르게 도달했어. 그런데 불청객이 있네." 여와는 녹음기를 끈 다음 다시 되돌려 들었다. 약간 어눌하고 늘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창밖 놈들의 숫자는 4마리였다. “우와 최후의 여자다! 뭐하는 거야?” 여와가 고개를 돌렸다. 햄스터 한 마리가 창 아래, 움츠린 여와의 발끝 앞에 서 있었다. “지금 나를 추적하는 놈들을 엿보고 있어. 조용히 해줘.”...“인간! 너 내 말을 알아듣는 거야?” 여와가 지겹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6개월 동안 만난 개, 고양이, 호랑이, 쥐한테서 어떻게 우리랑 말을 할 수 있지 라는 질문을 들었어. 대자연이 나를 선택했으니 대자연에게 물어봐."...“호랑이를 봤어? 어디서?”...“지금 쥐가 나한테 말을 걸고 있어. 미래에 태어날 너도 나랑 같은 능력을 갖고 태어날지 궁금해.” 여와는 녹음기에 대고 또박또박 속삭인 후 껐다. 다시 되돌려 들으니 어색한 부분 없이 많이 나아졌다. “인간. 지금 누구한테 말을 거는 거야? 인간들은 모두 죽었잖아. 혹시 최후의 남자야?”...“최후의 남자가 대한민국에 있는지 미국, 일본에 있는지 어디에 알아? 유럽 남자이면 좋겠지만..이거 녹음기야.” 창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놈들 중 한 마리가 허리가 뒤로 꺾여 진 개를 끌고 왔다. 개는 멍멍 짖었다. “이제 인간들도 없는데, 같은 짐승끼리 왜 이러는 거냐?” 놈들은 낄낄대며 웃었다. 웃음소리에 으르렁 짐승의 포효가 섞였다. 놈들은 거대한 원숭이었다. 주둥이는 툭 튀어나오고, 이마의 머리털은 벗겨졌다. 온 몸의 털은 대부분 빠졌다. 상체에 인간의 작은 옷을 억지로 끼어 넣어서 인지 옷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올라 있었다. 원숭이들은 입술만 들어 웃다가 뚝 그쳤다. 원숭이 중 한명이 앞으로 나섰다. “여기 보잘 것 없는 짐승이 우리를 짐승이라 칭한다! 정말 그런가?” 원숭이들은 양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봐라! 우린 짐승이 아니다. 멸종한 인간을 대신하기 위해 자연의 흐름에서 진화한 신 인간이다! 너 하등한 개! 인간에게 복종했듯이 우리에게도 봉사하겠는가?“ 바닥에 힘겹게 누워있던 개는 혀를 내밀어 늘어뜨렸다. ”허리가 부러졌는데 어떻게 봉사하겠는가? ..한 원숭아?“ 원숭이들이 길길이 날뛰며, 흥분했다. 주도적으로 말을 하는 원숭이가 손바닥을 펴자 원숭이들이 침묵했다. 시내 거리에 엄숙한 침묵이 깔렸다. 원숭이는 손바닥을 편 채 시내 사방을 천천히 둘러봤다. ”보라! 이 하등한 개는 신 인간을 인정하지 않는다! 과거 인간들이 그랬듯 우리는 복종을 거부하는 모든 짐승들을 처벌하겠다! 봐라! 세상아! 봐라! 짐승들아!“ 원숭이는 손바닥을 말아 쥐고 엄지를 세웠다. 엄지를 아래로 내리자 주위 원숭이들이 개에게 달려들었다. 여와는 끝까지 보지 못하고 창 아래로 숨었다. 호랑이에게 괴물이라는 소리는 들었지만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햄스터는 찍찍대며 여와에게 바깥 사정을 물었지만 여와는 침묵했다. 조용해지자 여와는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원숭이들은 갈가리 찢겨진 개의 사체를 하나씩 들고 둥글게 서있었다. 서로 등지고 원형으로 서 있는 모습은 보이기 위한 작위적인 연출로 보였다. 원숭이들이 입은 옷에 개의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원숭이들은 관객들 앞에 선 배우들처럼 몸을 당당히 세우고, 시선을 정면에 고정시켰다. 잠시 후 기대했던 박수갈채나 반응이 없자 실망한 듯 개의 시체를 내던졌다. 원숭이들은 시내 골목을 향해 네발로 걸어갔다. 골목에 들어갈 때 어깨를 쫙 피고, 좌우로 몸을 위협적으로 흔들었다. 여와는 고등학교 때 육상부였지만 저런 괴물들과 달리기를 할 생각이 없었다. “햄스터. 너 호랑이 얘기가 궁금해? 나를 도와줄래?” 햄스터는 몸을 세우고 여와와 눈을 마주쳤다. “난 네 또래의 인간들에 대해 잘 알아. 먹을 걸 쌓아놓고, 굶으며 몸을 말리고, 낮에 자고 밤에 돌아다니지. 집을 놔두고 밖에서 잠을 자며, 거짓말에 능숙하지.“ 여와는 햄스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너 애완용이었구나. 호랑이 얘기가 싫다면 이것은 어때?“ 여와는 등에 맨 배낭에서 초콜릿을 꺼내 포장을 벗겼다. ”난 건너편 산부인과에 꼭 가야해. 가기 전 네가 정찰해줘.“ 햄스터는 여와의 팔뚝을 타고 초콜릿을 향해 달려갔다. ”왜 산부인과라는 곳을 가야해?“ 여와는 피식 웃다가 빠르게 정색했다. ”여자가 산부인과 가는 이유가 뭐겠어?“

 

해가 저물어 시내에 어둠이 깔렸다. 여와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인류가 모두 사라진 6개월 동안 인터넷은 일부 지역은 접속 되지 않거나, 다수의 사이트가 다운됐어도 작동은 했다. 하지만 모든 핸드폰들은 1주일 이내로 통화나 인터넷 사용을 할 수 없었다. 기지국 문제인지 인력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바보 같은 햄스터 하루 종일 살피나?" 여와는 빠르게 자신의 입을 막아 혼잣말을 멈췄다. 햄스터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여와는 창밖을 살피고는 조심스레 1층으로 내려갔다. 건너편 산부인과까지 가는 발걸음을 가늠했다. 시내 도로는 황량할 정도로 비어 있었다. 여와는 빠르게 도로를 가로질러 건너편 산부인과 빌딩까지 뛰었다. 들어서자마자 계단을 찾아 2층까지 단숨에 뛰어올랐다. 계단 옆 유리로 밖을 내다보며 혹시 괴물들이 봤는가 싶어 동정을 살폈다. 아무도 없자 여와는 손전등 빛으로 복도를 돌아다녔다. 화장실 옆 벽에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산부인과는 3층이었다. 여와는 3층으로 올라갔다. 산부인과 입구는 방화문으로 잠겨 있었다. 여와는 복도 구석에 있는 소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자 혼자 6개월동안 살면 무슨 일이든 가능했다. 여와는 소화기로 방화문의 손잡이를 내려쳤다. 내리칠 때마다 소리가 복도에 크게 울렸다. 여와는 최대한 빨리 끝내려 소화기를 머리끝까지 올렸다가 문손잡이를 향해 내려쳤다. 큰 소리와 함께 손잡이가 아래로 꺾였다. 여와가 손잡이를 잡고 흔들자 문이 열렸다. 방화문 안에 유리문이 있었지만 잠겨있지 않아 쉽게 열렸다. 여와는 산부인과의 조명을 키려다가 멈췄다. 데스크로 조그만 조명 스탠드 찾아 켰다. 여와는 데스크 안쪽으로 들어가 스탠드의 불빛이 창밖으로 나가지 않게 했다. 녹음기를 꺼내 입에 갖다 댔다. "애야. 그 탐욕스런 햄스터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어. 다음부터는 절대 쥐를 믿지 말아야겠다. 나쁜 햄스터. 너 선불로 먹은 초콜릿 배탈나버려라....아까 나는 혼잣말을 했어. 녹음기 없이는 절대 혼잣말하면 안 된다는 규칙을 깼다. 규칙을 어기면 안 된다. 목표를 위해서는 자기통제가 필수다. 너도 세상에 나오거든 명심해라." 여와는 녹음기를 끄고 되돌려 들었다. 이상한 점은 없었다. 계속 이 수준을 유지하겠다고 다짐했다. 조심스레 산부인과 창문에 커튼을 쳤다. 여와는 원장실, 진료실, 간호사 휴게실, 초음파실 등 산부인과의 모든 방을 뒤졌다. 여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와 달라서 당황했다. 분명 산부인과에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여와는 원장실 컴퓨터를 켰다. 통신사마다 종류가 다른 모뎀들 중 어떤 것은 아예 불이 들어오지 않아 접속이 안 되는 경우도 있었다. 여와는 모뎀을 찾아, 작동됐던 모뎀의 한 종류라는 걸 알아냈다. 여와는 인터넷에 접속했다. 인공수정을 치자, 여러 정보가 떠올랐다. 여와는 정보를 살피다가 냉동 정자는 불임클리닉이 있는 대형병원에만 저장한다는 글을 봤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급하게 떠나느라 정보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여와는 정보를 점검하려 배낭에서 노트를 꺼냈다. 근방에 불임클리닉이 있는 대형병원을 검색했다. 산부인과 설명에 정자보관소가 나와 있었다. 프린터로 약도를 인쇄했다. 노트에 적어둔 인공수정 정보를 인터넷과 대조 확인했다. 정자는 기증받아 액체 질소 통에 보관되는데 온도는 -196도였다. 이런 보존을 동결보존이라 불렀다. 질소 통을 열 때 단열장갑을 사용해야하고, 용해 할 때는 까다로운데 38도의 온수에 천천히 용해시켜야 했다. 주입은 주사기에 호스를 연결해 주입했다. 이 방법은 돼지, 소에 사용하는 인공 수정 법이었다. 인간의 경우에도 기본적인 방법은 같지만 온도라든지 용해방법에 대해 모호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인간의 경우에는 의사가 직접하고 상담할 때 말해 주기 때문에 구체적인 정보는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인간의 경우에는 복잡한 이름의 약물을 먹어야 했지만 필수는 아니었다. 필수사항은 가임기에 병원에 찾아오는 것이었다. 예정된 생리날짜가 2주 정도 남았다. 가임기는 이미 시작 되서 남은 기간은 오늘을 포함해, 삼일 남았다. 전기가 끊기면 냉동 보관된 정자들이 죽을 게 분명했다. 정자들은 미세한 온도 차이에도 쉽게 죽는다. 언제 전기가 끊길지 모르는 상황에서 꼭 이번 가임기 때 임신해야했다. 페이지를 넘겨 호랑이를 그렸다. 꼭 적어놔야 할 정보가 또 있었다. 호랑이를 만난 날, 여와는 자살하려 했다. 슈퍼마켓을 털어 술을 잔뜩 들고 걸었다. 그때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났다. 호랑이는 친절한 목소리로 여와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물었다. 여와는 녹음기를 켰다. “애야. 산부인과에 왔는데, 정자가 없어. 내가 잘 몰라 일을 그르칠 뻔했구나. 호랑이 때문에 허겁지겁 떠나느라 경황이 없었지. 호랑이는 처음에 자신을 노련한 사냥꾼이라 소개했지. 최후의 남자가 어디 있는지 물었어. 모른다고 하니 그럼 종족의 대가 끊기냐고 서운해 했지. 그때 술 마실 때마다 떠올렸던 기억이 생각났어. 졸업한 선배의 남편 몸에 이상이 생기자 병원에 저장해놨던 정자로 임신한 얘기였지." 여와는 호랑이 그림 옆에 번호를 1,2,3 썼다. 1 옆에 대자연의 의지가 인간에게 굴복당한 자연의 일부, 전기를 해방시키려, 발전소를 멈추려 한다 라고 썼다. 느낌표를 그리고 곧 끊길 거다 라고 썼다. 2 옆에 괴물 원숭이 얼굴을 그렸다. 나를 찾아다니는 괴물들이 있다고 알려줬다. 라고 썼다. 다시 1 옆에 쓴 글에 가로를 치고 전기가 끊기면 기증된 정자를 모은 보관소가 위험할 것이다. 액체 질소 통 작동이 멈출 것 같다 라고 썼다. 3 옆에 호랑이 얼굴을 그렸다. ”나는 선배의 이야기를 설명하며 가임기가 시작 될 거니 어쩌면 임신할 수도 있다 말했지. 호랑이는 대자연의 기회를 살릴 방법은 종족 번식밖에 없다고 나를 설득했어. 내가 주의 깊게 듣지 않자 으르렁 대며 인간 암컷은 약해서 시시하대. 세 번째 위험은 자신이라며 미래의 태어날 네가 목적이래. 정말 노련한 사냥꾼이었어. 만약에 네가 언젠가 호랑이를 만난다면 재빨리 도망쳐야 한다. 너를 위해 다 기록해 놓을게.“ 녹음기를 되돌려, 자신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여와는 발음이 느렸지만 많이 이상하지 않아 안도했다. 산부인과 유아모델 사진을 프린트했다. 컴퓨터 옆 육아 책을 배낭에 넣었다. 녹음기를 켰다. "애야. 목표를 이루려면, 운동할 때처럼 동기부여와 목표 구체화를 해야 되. 여기 예쁜 아기 얼굴이 있단다. 너도 이렇게 예쁠 거야. 이번 밖에 기회가 없고, 내가 아는 게 많지 않아. 잘 되지 모르지만 잘 될 거야. 호랑이가 아이를 가지라며, 당장 떠나지 않으면 잡아먹겠다 위협할 때 무서웠지만 분명히 말했어. 난 도전하는 성격이라고. 난 도전할거라고. 호랑이는 위협으로 내가 목표를 세우도록 일깨워주고, 동기부여를 해줬지. 하지만 절대 위협에 굴복해서 너를 임신하려 시도하는 게 아니야. 내 진짜 목표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하자.”

 

여와는 산부인과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날 새벽 일찍 산부인과를 나섰다. 빌딩 앞을 떠나기 전 초콜릿을 꺼내 도로에 내려놨다. “신용 없는 쥐야. 많이 먹고 배탈 나라.” 여와는 인쇄된 약도를 살폈다. 대형병원 위치는 시내외곽 산 아래에 위치했다. 여와는 도로를 걸어 시내를 벗어났다.

 

여와가 시내를 벗어나 차도용 육교 위에 섰다. 발아래에 바다와 내륙 강을 잇는 하천이 흘렀다. “인간! 거기서!” 여와가 뒤돌아보니 원숭이들이 네발로 달리고 있었다. 여와는 달리려하다가 주위를 살폈다. 원숭이들의 속도보다 빠를 수 없었다. 여와의 눈에 육교 위에 멈춰선 자동차들이 보였다. 여와는 자동차들 앞 유리에 다가가 뭔가를 찾았다. “인간! 우리는 인질을 데리고 있다!” 여와는 자신이 찾는 것이 자동차 안에 있자 배낭에서 부탄가스를 꺼냈다. 취사를 위해 휴대용버너와 함께 챙기고 있었다. 여와는 육교 위의 돌로 운전석 문을 부수고, 문을 열었다. 여와는 운전을 할 줄 몰랐다. 노린 것은 운전석 위의 지포라이터였다. 여와는 돌의 뾰족한 모서리로 부탄가스에 작은 흠집을 냈다. 지포라이터를 켠 채 부탄가스와 함께 자동차 밑에 밀어 넣었다. “인간! 움직일 경우 인질을!”...“닥쳐! 난 가족도 친구도 잃었어! 얼어 죽을 인질이야!” 여와는 육교 반대편을 향해 달렸다. 앞장서던 원숭이가 높이 뛰어올랐다. 착지하는 순간, 자동차가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은 주변 자동차에 불을 질러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원숭이는 온 몸에 불이 붙어 바동대다가 육교 난간 밖으로 떨어졌다. 여와는 폭발 소리가 들리자 멈춰 서서 몸을 돌렸다. 원숭이들은 불이 나자 두려워서 달리기를 멈추고 뒤로 물러섰다. 여와는 불 앞까지 다가가 건너편 원숭이들을 봤다. “인간! 너 암컷! 감히 우리를 공격했겠다!"...“억울하면 이 불 뛰어넘고 와봐. 암만 잘난 척 해봤자. 불 무서워하는 것 보니 짐승이야. 짐승!” 원숭이 무리 중 주도자가 앞으로 나섰다. 윗입술을 올리고 끼끼 거리는 울음소리를 냈다. “너는 우리를 공격하고 능멸했다. 먼저 우리의 말을 무시했지. 예고대로 인질을 처형하겠다!” 주도자 뒤 다른 원숭이가 손에 쥔 뭔가를 씹고 있었다. 초콜릿이었다. 주도자 가 손에 쥔 것을 내보였다. 햄스터였다. “인간 제발 살려줘!”...“뭐 하는 거야?! 햄스터는 아무 상관이 없어! 풀어줘!”...“네가 당황하는 걸 보니 정확히 인질을 잡은 것 같군. 우리가 이래도 짐승인가?”...“알았어. 원하는 게 뭐야? 원숭이...?” 주도자는 웃으며 햄스터를 쥔 손을 꽉 쥐었다. 쥐의 단말마가 터져 나오자 여와는 비명을 질렀다. “이거다. 다시는 네가 우리를 무시하지 않는 것. 우리를 똑바로 봐라.” 주도자는 손을 펴서 으깨어진 쥐의 사체를 자신의 이마에 비볐다. 쥐의 내장과 피가 주도자 이마를 물들였다. “누가 감히 이런 잔인한 행동을 하겠는가? 과거 인간이 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신 인간이 이럴 수 있다! 봐라!” 다른 원숭이들이 주도자를 감싸고 박수를 쳤다. 주도자는 양팔을 벌려 눈을 감고 박수소리를 음미했다. 눈을 다시 떴다. “자 이제 우리의 목적을...” 주도자 눈에 들어온 여와는 부탄가스를 불에 던지고 있었다.

 

여와는 최대한 대형병원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을 빙빙 돌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 놀이터 화장실에 들어갔다. 화장실 청소도구 중 대야를 꺼내고 그 안에 소변을 봤다. 불 속에서 부탄가스가 폭발하자 원숭이는 새되고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주도자가 입술을 삐죽 세우고 몸을 숙였다. 양 손가락으로 거칠게 가슴팍을 긁었다. 옷이 찢겨나가고 상처에서 붉은 피가 돋아났다. “네가 어딜 가든 네 냄새는 지울 수 없다! 네가 만나는 모든 동물을 갈기갈기 찢고, 네가 머무는 모든 곳을 파괴하겠다! 네가 멈출 때까지!” 여와는 약도와는 반대 방향을 향해 달렸다. 그 후로 일정한 목적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여와는 대야의 소변에 자신의 운동화를 담갔다. 어렸을 적 스파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군견들에게 쫓기자 냄새를 없애려 자신의 발에 소변을 누는 장면을 본적이 있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소변을 찍어 자신의 옷과 머리에 뿌렸다. 병원 반대편 지역에서 빙빙 돌다가 냄새를 지웠으니 원숭이들은 추격이 힘들 것이었다. 여와는 약도를 펴고, 현 위치와 병원 위치를 파악하고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신중을 기하기 위해 최대한 먼 방향으로 우회해서 병원으로 향했다. 날이 어두워졌다. 들개로 변한 애완견들이 거리를 방황하는 모습이 보였다. 여와는 근처 공원으로 갔다. 완벽한 성공을 위해 몸에 다른 냄새를 씌우려 공원 화장실로 들어갔다. 6개월 동안 사람 손이 닿지 않아 악취가 진동했다. 창문이 있어 바깥을 살필 수 있는 구석 칸으로 들어가 좌변기 위에 앉았다. 여와는 좌변기 위로 다리를 올려 무릎을 감쌌다. 이곳에서 밤을 보내면 앞으로 가임기가 내일 하루 남았다.

 

여와는 추위에 잠에서 깨어났다. 창밖이 어두운 걸 보니, 새벽이거나 한밤중이었다. 여와는 스트레스를 받아 생리주기가 틀어지지 않기를 빌었다. 생리주기가 틀어지면 가임기도 변했다. 추워서 잠이 오지 않았다. 연습을 하려 배낭을 열었다. 인공수정에 대해 적은 노트를 꺼냈다. 노트 표지 안쪽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은 반복숙달이라고 적혀 있었다. 여와는 배낭에서 손전등을 꺼내 노트를 비췄다. 말없이 읽다가 동물과 인간 인공수정 과정은 매우 흡사하다 라고 쓴 후, 그림을 그렸다. 주사기에 연결된 호스. 자궁을 그려 호스와 연결했다. 계속 노트를 읽다가 냉정 정자 융해시 융해기 필요라 적었다. 옆에 물음표를 그려 넣었다. 무엇인지 모른다는 뜻이었다. "아마 봐도 모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몰라." 여와는 뺨을 가볍게 때려 혼잣말한 벌을 주었다. 페이지를 넘겨 동물 수정에 관한 인쇄물을 꺼냈다. 읽은 후, 다시 페이지를 되돌려서 4-5도의 얼음물, 15도의 수도물이라 쓰고, 그러나라고 덧붙였다. 융해 후 가능한 빨리 주입해야한다 라고 쓰고, 가장 안전한 융해법은 38도의 온수. 온도계를 그렸다. 옆에 병원에 있겠지라 썼다. 버너와 부탄가스를 그렸다. 이걸로 가열해서 온도를 맞춘다. 여와는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고는 빨리 주입해야한다 옆에 가로를 치고, 융해 후 빨리 주입해야 수태률이 높다라고 썼다. 수태율을 엑스치고 임신률이라 바꿨다. 줄 밑에 크게 인간과 동물의 인공 수정 과정은 매우 흡사하다. 꼭 그래야 한다라고 썼다. 여와는 검토하다가 갑자기 옛날 기억을 떠올렸다. 고등학교 때 육상부였지만 프로가 되지 못했다. 졸업 후 집에서 놀다가 선배의 권유로 지방으로 내려가 해수욕장 안전관리 알바를 했다. 하루는 알바관리 담당자의 아이가 아파서 보살펴 주느라 담당자가 지각을 했다. 관리소의 차장이 담당자의 사정을 이해해주지 않고, 심하게 질책했다. 담당자는 마치 당연한 걸 받아들이는 덤덤한 표정이었다. 여와는 아이가 갓돌이 지났기에 자주 아픈 게 당연했기에 사정을 알아주지 않는 차장을 욕했다. 하지만 정작 담당자는 초연했다. 이러한 태도는 눈앞의 질책이나 생계유지보다 더 상위의 의무를 행했기에 오는 당당함이었다. 여와는 담당자를 이해하지 못했다. 여와는 다른 연습을 하려 녹음기를 켰다. “애야...옛날에 아이 때문에 혼나는 부모를 봤는데 나는 이해하지 못했어. 나 같으면 억울해서 항변 했을 텐데. 부모라면 이 정도 희생쯤은 감수할 수 있다는 배짱이 있었어. 평소에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왜 너를 임신하려 하냐면, 인류가 모두 사라진 6개월 간 나는 이상해졌어. 동물들의 말이 들리기 시작하는데 너무 두려웠지. 동물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혼잣말인지 대화인지 구분 못할 때가 많았고, 혼잣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 못했어." 여와는 노트에 새까만 원을 그리고 그 안에 자신을 그렸다. ”대화는 단순히 말의 교환이 아니야. 대화의 대부분은 말보다 분위기, 억양, 말투, 눈빛에 좌우돼. 동물들과의 대화는 항상 붕 뜬 느낌이야. 접촉할 수 있지만 접속할 수는 없었어. 난 항상 불안하고 혼란스러웠지." 여와는 노트에 벽을 그리고 양 옆에 동물과 여와 자신을 그렸다. 추가로 벽 그림을 어둡고 길게 늘어뜨렸다. ”고립감 속에서 난 살기를 포기했지. 하지만 이대로 죽는 게 너무 억울했어. 그때 대자연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게 됐어.“ 물이 가득 찬 컵을 그렸다. ”인간은 어렸을 때, 목표 기대치를 가득 채워, 커가면서, 세상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며, 점점 줄어들지.“ 물이 줄어든 컵을 그리고 옆에 여와가 테스트에서 떨어진 실업팀 마크를 그렸다. ”하지만 아무리 줄어도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 다시 채워 넣을 수 있다는 희망도 있지.“ 산산 조각난 컵과 엎질러진 물을 그렸다. ”대자연은 나에게 어떠한 희망도 목표를 이룰 기반도 없는 지옥을 선사했어. 나보다는 차라리 모든 인간들에게 대자연을 존중할 기회를 줬어야 했어. 준비도 안 된 나를 인간 대표로 뽑아놓고, 기회를 준다 라...이건 공평하지가 못해. 부당하다고. 반발심이 들었어. 토너먼트라면 인간은 졌겠지. 하지만 최후의 남녀가 살아있는 이상, 이 경기는 리그전이 될 수 있어. 잘한 경기만 모아 승률을 뽑아보면 최후에는 이길 수 있어. 컵이 완전히 깨진 것이 아니라고 느꼈어. 최후의 남자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어떻게 찾을지 방법이 없었지.“ 여와는 남자 얼굴을 그리고 엑스를 그었다. ”호랑이와 만나, 인간을 만든다는 엉뚱한 생각과 인공수정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어. 룰이 어려워도, 경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역전할 수 있어. 내가 싸울 첫 번째 경기이자 목표는 나의 외로움이야. 나는 동물들이 아닌 사람과 대화를 하고 싶다. 만지고 싶고, 느끼고 싶어. 내 곁에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 너는 지금 내 곁에 없지만 나를 살게 하는 힘이야. 이번 경기를 잘 치룬 다면, 아마 우리 둘이 다음 경기를 같이 치룰 거야. 이렇게 하나, 둘씩 해낸다면..” 여와는 웃는 아이 얼굴을 그리고, 녹음기를 껐다. 다시 되돌려 들으니 거의 완벽했다. 연습하니 확실히 갈수록 나아졌다. 잠들려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배낭을 뒤져 아이 사진을 꺼내 손전등을 비추었다. "머리가 좋지 않아 계속 읽고, 쓰고 있어. 내일 목표를 이룰 거야. 같이 기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여와는 녹음기 켜는 것을 잊었지만 이 정도 혼잣말은 용납했다. 여와는 아이 사진에 입을 맞추었다.

 

다음날 아침, 여와는 공중 화장실에서 나왔다. 옷에 밴 냄새를 맡아보고 얼굴을 찡그리며 만족했다. 여와 앞에 거대한 짐승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호랑이였다. “아둔한 인간. 빨리 떠나라. 미친 원숭이들이 근처에 있다.” 여와는 배낭을 벗어 방패처럼 앞으로 내밀었다. “어떻게 여기 있는 줄 알았지?”...“냄새를 없앤 것은 제법이나. 놈들은 다른 짐승들에게 너에 대해 물었다.” 여와는 어제 저녁에 봤던 들개들을 떠올렸다. “너는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지?!”호랑이는 입을 벌려 이빨을 보였다. “네 아이한테 볼 일이 있으니 항상 네 곁을 맴돌 수밖에. 인간은 암컷이 약해. 너는 내 상대가 될 수 없어. 꼭 수컷을 낳아라.”...“아들을 낳을지 딸을 낳을지 모르지만 너 따위에게 지지 않게 키울 거야.” 호랑이는 얼굴의 줄무늬를 활짝 피며 웃었다. “왜 대자연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고, 말도 똑바로 못하는 너를 선택했는지 항상 궁금했어. 선택된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으나 끝까지 살아남을 자질은 갖췄군.” 여와는 인류가 사라진 6개월 동안 대화 상대가 없어서 성대근육이 수축했다. 말하는 동물들을 무서워하다 뒤늦게 대화해서 발음이 뭉개진 줄도 몰랐다. 동물들은 여와의 엉망인 된 발음에 신경 쓰지 않았다. 홀로 살아남은 고립감속에서 여와의 정신 상태는 갈수록 나빠졌다. 우연히 혼잣말을 하다가 울음소리로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는 여와의 정신은 무너졌다. 그때 자살을 결심했다. 여와는 녹음기를 꺼내 보였다. “너 때문에 경기가 시작됐지만, 끝내는 건 나야! 이제 내 목표가 됐어! 혼잣말을 줄이고, 발음도 매일 연습하고 있어. 아이에게 바른 말을 가르칠 거야!”...“모든 암컷들은 어미가 되면 강해지지.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발음이 제법 좋아졌다. 넌 꼭 수태할 수 있을 거다. 내 장담하지.” 호랑이는 뒤돌아 여와에게 등을 보였다. “자 가라! 호랑이대 만물의 영장, 인간 대결에서 누가 진짜 최강자인지 겨루는 것은 오로지 호랑이만이 가질 수 있는 자격이다! 내가 저 놈들에게 한 수 가르쳐 줄 테니. 너는 내 미래의 호적수를 낳아라!” 여와는 병원 방향을 향해 달렸다. 등 뒤로 사방을 울리는 호랑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여와는 대형병원 주차장을 가로질러 병원 현관 유리문 앞에 도달했다. 멀리서 호랑이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여와는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병원 안은 조명이 켜진 상태여서 환했다. 여와가 데스크로 가서 건물 안내도를 찾아보려하는데 순간 모든 조명이 꺼졌다. 여와는 주차장으로 뛰어나가 주차유도등을 봤다. 유도등의 불도 꺼져 있었다. 발전소가 멈춘 게 틀림없었다. 냉동 정자보관소의 온도가 떨어질 게 분명했다. 여와가 안내도를 찾으러 허겁지겁 들어오는 사이, 병원 로비의 조명이 다시 켜졌다. 예전처럼 밝지 못하고 흐렸다. 여와는 알바 할 때 머문 원룸 오피스텔이 정전됐을 때 들은 관리소의 설명이 떠올랐다. 일정 규모 이상 건물지하에는 연료식 비상발전기가 있는데, 정전 됐을 경우, 다시 정상적으로 전기가 들어올 때까지 비상 발전기가 대체한다고 말했다. 여와는 안도의 숨을 쉬며 뒤돌다가 유리문 밖에 서 있는 원숭이들과 눈을 마주쳤다. 피투성이의 원숭이들은 유리문 건너편에 일렬로 서있었다. 원숭이들의 손에는 호랑이의 다리가 들려 있었다. 주도자가 유리에 얼굴을 갖다 대고 입술을 들어 이빨을 보였다. 끼끼 웃으며, 죽은 호랑이의 머리를 자신의 얼굴 옆에 들어 올렸다. 딸랑이 장난감을 아이에게 흔들어 보이듯 호랑이 머리를 흔들었다. 주도자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웃었다. 눈은 가늘어져서 여와를 뚫어지게 노려봤다. 여와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등 뒤에 엘리베이터가 느껴졌다. 여와는 침착하게 숨을 가다듬고 원숭이를 노려봤다. 주도자는 기대했던 반응이 안 나오자, 크게 울부짖으며 호랑이 머리를 유리문에 던졌다. 유리에 튕겨 나온 호랑이 머리에서 혀가 삐죽 튀어나왔다. 주도자가 다시 호랑이 머리를 던져 유리문을 산산조각 냈다. 동시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여와는 엘리베이터에 들어가자마자 아무 층이나 막 눌렀다. 원숭이들이 유리조각을 밟고, 돌진했다. 엘리베이터가 문이 닫히고 상승하자마자 쿵하는 충격음과 함께 크게 흔들렸다. 여와는 눌러진 층을 확인했다. 4층과 6층이었다. 엘리베이터가 4층에 도착하자 문이 열렸다. 여와가 열림 버튼을 누르고 머리를 내밀었다. 양 복도 끝에서 쿵쾅거리는 걸음소리가 들리더니 계단 문이 크게 들썩였다. 여와는 서둘러 닫힘을 눌렀다. 6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분노에 가득 찬 원숭이들의 울음소리가 엘리베이터 통로에 메아리쳤다. 6층에서 문이 열렸다. 여와는 배낭을 엘리베이터 문 사이에 끼어두고 계단 문에 접근했다. 문에 근접하자 쿵쾅거리며 올라오는 걸음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엘리베이터 안으로 돌아갔다. 최상층은 9층이었다. 여와는 9층을 눌렀다. 9층에서 문이 열렸다. 9층 로비는 탁 트여 다른 층보다 넓었다. 여와가 엘리베이터를 나와 살피다가 뒤돌아봤다. 엘리베이터 스위치 옆에 정신과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양 끝에 계단 문은 다른 층과 달리 견고한 안전 바가 달려 있었다. 여와는 가까운 방문을 열려했다. 격리병동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여와는 문 옆의 열쇠고리에서 열쇠를 찾아 격리병동을 열었다. 격리병동에는 좁은 복도와 복도 양 옆에 격리실이 있었다. 복도로 들어가 격리실의 문을 열었다. 격리실에는 침대와 책상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사소한 생활도구나 위생시설도 없었다. 천장에는 투명한 플라스틱에 가려진 형광등이 있었다. 그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여와는 다시 나왔다. 급탕 실이라 써진 방문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전자레인지가 있었다. 여와는 가위로 전자레인지 옆 커피포트에서 전기 코드를 잘라냈다. 입으로 전선을 물고 피복을 벗겨냈다. 구리선을 바닥에 밀착시키고 커피포트로 눌렀다. 코드를 콘센트에 꽂았다. 계단 문이 부서지는 커다란 충격음과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있는 거냐? 모습을 드러내라!” 여와는 배낭에서 부탄가스를 꺼내 전자레인지에 넣고, 1분 버튼을 눌렀다. 경기에 임하기 전 준비운동을 하듯 천천히 몸을 풀고, 긴장을 이완시켰다. 원숭이들이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와는 원숭이들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리는 로비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나 여기 있다!” 원숭이들이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처럼 으르렁댔다. 주도자가 팔을 마구잡이로 휘둘러 원숭이들을 때렸다. “가만히들 있어! 신성한 순간이야!”...“신성한 순간이라니 무슨 뜻이지?” 주도자가 가슴을 내밀어 몸을 부풀렸다. 툭 튀어나온 주둥이를 내리고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주도자의 이마에는 햄스터의 피와 내장이 말라붙어 있었고, 뺨에는 호랑이의 피가 흘러내렸다. “우리의 방황이 끝나는 순간이다. 인간! 우리를 인정해라!” 여와가 이해 못하는 표정을 짓자, 주도자는 양손을 가슴에 얹었다. “대자연이 인간에게 벌을 내려 세상에서 모든 존재를 지웠다. 그 이후 우리는 인간의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다 생각했다. 실제로 우리의 행동은 크게 변했다. 이것은 대자연의 흐름에 거스르는 현상이 아닌 흐름에 새로운 물결이 더해졌다는 걸 의미한다. 우리는 대자연의 허락을 얻었다. 다음은 너다! 인간! 우리를 인정해라. 오로지 인간만이! 최후의 인간 바로 너만이 우리를 신 인간으로 인정할 수 있다! 다른 하등 짐승들의 의견은 무의미하다!” 여와는 어이없어서 웃었다. “그래서 나를 그렇게 쫓아 온 거야?” 주도자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에게 만물의 영장자리를 내놓아라.”...“인간에게 꼭 허락 받아야 한다 라. 아무리 날뛰어도 짐승은 짐승이야. 너희 동물원 출신이지?” 주도자는 윗입술을 들어 올리며 끼끼 웃었다. “이 순간에 꼭 필요한 일이 있지. 너의 아기집에 우리의 씨앗을 뿌려, 인간과 우리의 피를 섞는 것이다. 이것은 커다란 의미가 있는 행동이다.” 여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러운 새끼들.” 주도자의 눈은 가늘어지고 앞발로 바닥을 짚고 달려들 자세를 취했다. 여와는 시간이 다되자 몸을 돌려 뛰었다. 주도자는 끼끼 거리며 비웃었다. 그때 급탕실의 전자레인지가 폭발했다. 원숭이들은 폭발에 혼비백산했다. 여와는 격리병동의 복도를 달렸다. 원숭이들은 여와를 쫓으려다가 천장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에 놀랐다. 천장의 화재감지센서가 작동해 스프링클러가 터졌다. 9층 전체가 물세례를 받았다. 여와는 격리실에 들어가 침대에 올라갔다. 격리병동과 격리실 천장에는 화재감지센서와 스프링클러가 없었다. 화재가 날 기구가 없고, 반입금지이기에 애초에 설치할 이유가 없었다. 원숭이들은 물세례에 난동을 피우며, 고함을 질렀다. 여와는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원숭이들의 고함은 날카로운 비명으로 바뀌었다. 여와는 급탕 실 바닥에 까놓은 전선을 떠올렸다. 감전. 격리실의 형광등이 잡음을 내며, 빠르게 깜박였다. 원숭이들의 비명소리가 복도를 지나 여와에게 들렸다. 형광등이 깜박이다가 갑자기 꺼졌다. 로비 쪽도 전기 차단기가 내려간 듯 어두워졌다. 여와는 침대에서 꼼짝하지 않고 천천히 다가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뭔가가 질질 끌리는 소리를 내며, 격리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시꺼멓게 탄 앞발이 격리실 문을 잡았다. 주도자가 들어섰다. 비틀거리며 눈을 깜박였다. 눈은 붉게 물들여 있었다. “인간이 우리를 인정했다...이제 바나나를 줘.” 여와는 고개를 저었다. 주도자가 앞으로 쓰러졌다. 주도자 이마의 햄스터의 내장부분이 시커멓게 타들어가 있었다. 여와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원룸 오피스텔에서 살다보면, 정전되거나 소방센서가 오작동하는 일이 흔했다. 여와는 그때 소방센서의 작동원리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됐다. “여자 혼자 6개월 동안 살면, 못하는 일이 없지. ...” 여와는 주도자의 시신을 걷어찼다.

 

비상발전기의 작동이 멈춰, 병원이 정전됐다. 여와는 서둘러 냉동 정자 보관소를 향해 달려갔다. 산부인과를 뒤져 위치를 파악하느라 늦었다. 보관소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에 있어 한참을 헤맸다. 아직 5분밖에 지나지 않아 온도는 많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지만 정자는 미세한 온도 차이에도 죽을 수도 있었다. 보관고는 거대한 육류 냉장고 같았다. 여와는 주변을 뒤져 단열 장갑을 찾아냈다. 포장지를 읽어 몇 번이고 사용방법을 숙지했다. 장갑을 끼고, 조심스레 보관고의 안전장치를 젖히고 문을 열었다. 안에 온도는 선선했다. 전혀 냉동의 온도가 아니었다. 여와가 손전등으로 안을 비추자 무릎 높이의 프레온 가스통처럼 생긴 통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액체 질소 통이었다. 여와는 통을 들어 겉을 살피다가 통에 어떠한 전기적 장치가 없는 것을 알았다. 통에 붙은 냉매 게이지와 온도계를 읽었다. -196. 냉매 게이지는 1/5의 정도 남아 있었다. 여와는 통 표면의 설명서를 읽었다. 액체 질소 통은 전기적 장치가 필요 없었다. 냉매만 보충해주면 반영구적으로 사용가능했다. 정전과 무관했다.

 

버너 위, 냄비 안에 주름진 용기, 스트로우가 있었다. 여와는 온도계를 집어넣어, 38도를 확인했다. 여와는 마지막으로 노트를 꺼내어 과정을 점검했다. 스트로우를 열어 주사기로 내용물을 빨아들였다. 호스를 연결했다. 바지를 벗고, 침대 위에 올랐다. 자신과 연결하기 전, 망설였다. 여와는 왜 목표를 이루기 전 주저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침묵 속에서 시계바늘 소리가 재촉하듯 반복되자 호스를 연결하고 주사기를 눌렀다. 내용물이 여와 안으로 들어갔다. 여와는 모든 작업이 끝난 뒤에 호스를 제거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고개를 돌리다가 배낭에서 삐져나온 책이 보였다. 산부인과에서 가져온 육아책이었다. 갑자기 선배와 남편이 떠올랐다. 맞벌이를 하느라 아이를 부모님에게 맡기고 주말마다 찾아갔다. 선배와 남편은 주말마다 찾아가는 것을 아이에게 미안해했다. 여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아이는 너무 어려 누가 부모인지 모를게 분명했다. 누가 아이를 보든 상관없지 않을까? 아직도 이해가 안 갔다. 그래서 두려웠다. 여와는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어깨를 흔들며 훌쩍였다. 녹음기를 꺼내어 작동시켰다. “애야. 드디어 목표를 이뤘어. 근데 왜 이리 처량할까? 아무것도 모르는 난 어찌하려고 널 세상에 데려오려 할까? 널 어떻게 키울까? 너무 두렵고 무섭지만, 약속할게. 널 위해서 반드시 좋은 부모가 될 게. 최후의 남자도 찾아내어 너에게 아빠로 주고, 나도 네가 태어나기 전까지 훌륭한 엄마가 될게. 부디 아무 이상 없이 건강하게 태어나 줘. 사랑 없이 임신했지만 누구보다도 사랑해줄게. 이게 다음 내 목표야. 믿어줘.”

 

여와는 병원인근 역에 정착했다. 역은 백화점과 연결됐다. 백화점은 지하는 대형마트여서 자급자족하기 충분했다. 여와는 백화점 한 구석에 침대를 끌어와 보금자리를 꾸몄다. 여와는 하루에 세 번씩 주기적으로 순찰을 돌았다. 위험한 동물은 보이지 않았다. 대형마트에서 가져온 통조림과 인스턴트를 버너로 가열해 식사를 만들어 먹었다. 서점 코너에 가서 육아책을 모두 가져와 침대 옆에 쌓아놓고 읽었다. 하지만 글로 단순히 엄마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당연히 어느 정도 엄마와 아이에 대한 지식을 가졌을 거란 전제를 둔 육아 책들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여와는 책에서 초음파 사진을 오려내 벽면에 붙여두었다. 책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어도 아이에게 중요한 부분은 줄을 그어가며 통째로 외웠다. 2주 째 되던 날, 여와는 약국에서 가져온 임신테스트기를 사용했다. 흐리지만 분명히 두 줄이었다. 임신이었다. 여와는 배를 만져봤다. 자신 안에 생명체가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날 밤 여와는 스스로에게 보상을 주려 맥주 두 캔을 마셨다. 그 후 3개월이 지났다. 여와는 배가 조금 부풀어 올랐지만 아직도 엄마가 되는 법을 몰라 초조했다. 여와는 식사 준비를 하러 마트에 내려가다가 갑자기 신 것이 먹고 싶어졌다. 평소에 아껴둔 과일 통조림 코너로 갔다. 황도 한 캔을 꺼내어 그 자리에서 뚜껑을 열었다. 황도 물을 마시다가 태아는 모체의 영양섭취에 영향 받는다는 육아정보를 떠올렸다. 여와는 더 맛있고, 신선한 것을 먹어 아이에게 주고 싶었다. 여와는 과일코너로 갔다. 정전으로 냉동장치가 작동되지 않아 과일들이 썩어있었다. 여와는 썩어가는 과일 속을 한참 뒤졌다. 썩지 않고, 먹을 만한 부위를 잘라내어 아주 조금 먹을 양을 확보했다. 여와는 천천히 꼭꼭 씹어 먹었다. 생각해보니 어디든지 과일들은 썩어 있을 게 분명했다. 신선한 과일을 얻으려면 직접 농사지을 수밖에 없었다. 여와는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없었다. 태어날 아기는 한동안 혹은 오랫동안 신선한 과일을 맛보지 못하고 통조림 밖에 먹지 못할 것이었다. 녹음기를 꺼내서 켰다. “아기야. 미안하다. 엄마만 혼자 맛있는 거 먹어서. 엄마가 정말 미안해. 엄마를 용서해주렴.” 여와는 그 순간 선배를 이해했다. 벌써 엄마가 되어 있었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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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제목 날짜
우수작 way to mother 2014.03.01
우수작 맹렬한 호랑이보다 맹렬하게 2014.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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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화초가 2013.12.15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3 2013.11.30
가작 소녀 2013.11.30
가작 광고 (본문 삭제) 2013.11.30
선정작 안내 독자 우수단편 선정3 2013.10.31
가작 춘곤증 2013.10.31
선정작 안내 독자 우수단편 선정1 2013.09.30
선정작 안내 선정작이 없습니다. 2013.09.30
선정작 안내 독자 우수단편 선정3 2013.08.31
가작 발톱 2013.08.31
선정작 안내 선정작이 없습니다. 2013.07.3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3.07.3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3.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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