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가작 퍼퓸 스캔들

2015.08.01 00:0408.01



1. 
엄청난 향기였다. 
운의 연구동 구역을 들어서자마자 레레는 압도되었다. 정신없이 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왜 회장이, 장스트리가 조사를 지시했는지가 이해되었다. 
향기는 강렬하거나 자극적이지 않았다. 가지각색의 향은 은은하게 감각을 어루만졌다. 아무 향도 없는 듯한 순간의 공기조차 신선한 무색무취의 향기를 품고 있었다. 
얼 마 전부터 소문이 돌긴 했었다. 운의 연구동 향기에 홀려 다른 연구동 사람들까지 모여든다는 얘기였다. 장스트리는 그 소식에 연구동까지 갔다 온 모양이었다. 며칠 후에는 몸이 안 좋아졌다며 병원에 갔지만 가는 와중에도 못내 걸렸는지 병원 초입에서 사무 처리 사인을 했다고 들었다. 하기야 운은 비테라틱의 연구자고 몇 번이고 경고를 받은 연구자에게서 눈을 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레 레에게는 얼마쯤의 두근거림이 있었다. 처음의 기초조사라는 건 독특한 울림이 있는 법이다. 더구나 운에게는 기본적인 호기심이 있었다. 운과 본격적으로 얘기해 보는 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기대되는 일이었다. 향기의 경이로움까지 더해져 일은 오랜만에 구미에 맞았다. 일이 배당된 것에 불만이 없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제 일 꼭대기 층에 위치한 운의 연구실에 도착할 때까지 레레는 머릿속에서 물어봐야 할 질문과 조사 보고서에 쓸 말을 생각하면서 적당한 긴장감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긴 복도를 지나 운의 연구실 문을 열었을 때 머릿속 생각들은 휘발해버렸다. 
운의 연구실에 운의 발명품들이 들어차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몸과 똑같은 온갖 인종과 성별의 수많은 인조 신체가 나체인 채로 연구실 공간마다 가득 차 있는 광경에는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레레를 놀라게 한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장스트리는 이것까지를 알았던 것일까? 신들은 눈을 뜨고 있었다. 인체형 기능품인 ‘신’들의 눈, 논란의 눈이 뜨인 채였다. 
‘수상한 정신 기능을 내세우면서 영구 방향제라고 사기 치는 섹스돌.’ 
십여 년 전의 비판 기사 제목과 함께 잊고 있던 사실을 레레는 떠올렸다. 
어떤 발명품들은 창작자의 원래 기획에서 갈라져 나온 부산물들이다. 운이 처음에 만들려고 한 것은 섹스돌도, 방향제도 아닐 것이다. 다른 무엇을 만들려다가 나온 부산물로서의 기업형 발명품들. 
운이 처음에 기획한 것은 무엇이었나. 
레레가 알기로, ‘신’은 ‘신(神)’이었다.


2. 
운은 날개를 편 나비 같았다. 
레 레가 잠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사이 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헐렁한 바지와 셔츠에 소매 폭이 넓고 큰 카디건 차림이었다. 두 팔을 벌려 환대의 뜻을 보이며 걸어 나오자 운의 소매는 경쾌하게 팔락거렸다. 가벼운 포옹을 하면서 레레는 반갑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그랬다.
거의 삼십년 전, 비테라틱 부속학교에서부터 사람들은 운을 의식했다. 운은 누구보다 먼저 최신의 학술 논문을 이해하고 발전시키는 아이였다. 동시에 아무도 보지 않는 옛 종교 경전들과 각종 문헌들을 탐독하며 글을 썼고, 이 과정에서 비테라틱 특유의 자폐성도 보이지 않았다. 
실 무자인 교사들은 비테라틱을 대변하는 일반 정치인이 될 거라 꿈꿨고 조사자인 교사들은 연구자들을 온전히 이해하고 능가할 수 있는 조사자를 점쳤다. 그래서 운이 연구자를 선택했을 때, 연구자인 교사들은 으쓱거렸고 보였던 조사자와 실무자 교사들은 서로 겸연쩍어했다. 
그렇게 주목받는 연구자로 출발한 운은 실제로 승승장구 했다. 인상적인 논문들을 줄줄이 기고했고 회사에 도움이 되는 혁신적인 기술들을 내놓았으며 마침내는 ‘신’이라는 제품을 출고시켰던 것이다. 
그 러나 그 ‘신’이 정점이었다고 레레는 냉정하게 평가한다. ‘신’ 이후로 운의 연구는 질이 낮아졌다. 연구뿐만 아니라 대외관계에서도 운은 균형을 잃은 적이 많았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기초조사관과 연구자로 마주하게 된 것은 딱히 좋은 만남이 아니었다.
다행히 운은, 
“좋은 커피가 들어왔어요. 커피 내려줄게요.” 라며 사교적인 모습이었다. 
레레는 자기가 거의 커피 중독자라는 걸 운이 알고 있다는 게 반가웠다. 커피 자체는 물론이고. 운이 커피를 가지러 간 사이 레레는 손님처럼 자리를 잡았다.
앉 자마자 소파 맞은 편 자리에 있는 신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방에 가득 찬 신들과는 다르게 이 한 채만 눈이 뜨여있지 않았다. 한 쪽 눈이 얼마쯤 열려 있긴 했다. 그러나 그건 열렸다기보다 광대뼈가 손상돼서 벌어진 것이었다. 몸의 형태도 찌그러져 있었다. 쇄골과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여기 저기 신체 조직이 터져 몸체가 하얗게 굳어 있는 부분이 많았다. 
돌아보니 불량품이거나 파손품인 신들이 꽤 많았다. 심지어 소파 옆 책장에는 눈을 떴지만 머리통만 남아 있는 신 몇 채가 책과 종이 더미에 섞여 있었다. 자기를 쳐다보는 신의 머리통을 봤을 때에는 약한 염오감이 들었다.
‘신’이 출시되었을 때 레레는 그나마 중립에 가까웠다. 그러나 대다수의 조사자, 조사관들은 심정적으로 ‘신’을 좋아할 수는 없는 이들이다.
비 테라틱같은 대기업이 골목상권이 섹스돌 사업에 뛰어들 명분은 없었고 그 섹스돌 사업에 굳이 얄궂은 감성의 ‘신’이니 ‘정신’이니, ‘환기’니 하는 말을 덧붙여 언어자원을 낭비할 필요도 없었다. 얄팍한 감수성의 상술이라고 조사자들부터 비판했다. 운이 조사자들에게서 신망을 잃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당장 눈앞 신의 몸통에서 보이는 투명한 돋을 문신의 설명구가 레레는 얼마쯤 부끄러웠다.
1. 신과 마주하고 자신의 손을 신의 눈 위에 댑니다. 
2. 신과의 접속(1)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문제를 사유합니다.
3. 신과의 접속 및 전달의 상호 연결을 확인하는 입맞춤을 합니다. 
4. 3까지의 과정은 재확인, 반복이 가능하고 하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5. 이후 원하는 시간, 장소에서 신과 마주한 채 호흡을 합니다. 
-> 5의 반복 행동은 당신에게 신체와 정신의 쾌적한 환기를 제공합니다. 
-> 5의 반복 행동을 통해 신이 갖고 있던 향기는 당신에게 맞춰 변할 수 있습니다. 
-> 5의 꾸준한 반복은 신을 반안(半眼) 및 개안(開眼)하게 할 수 있습니다. 단, 반안과 개안은 사용자의 의지와 정신력에 비례하므로 반안과 개안은 보장되지 않습니다. 
-> 5의 반복을 통해 반안에 성공했을 시, 신은 당신에게 반영구적인 향기를 제공할 것입니다. 개안의 경우, 신은 영구적인 향기를 제공함과 동시에 2의 단계에서 당신이 제기했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개안이 되었을 경우 제작사에 문의하십시오. 
주의 사항 : 신의 눈을 인위적으로 열지 마십시오. 신은 곧 파손되며 이에 대한 보상 및 배상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조사관들이나 일반인 반대자들은 낯뜨거워했지만 신의 판매율은 좋았다. 
신 은 성기 기능까지 완벽했던 최고의 인형이었다. 설명서에 쓰여 있는 마인드 케어외의 기능으로 쓰였으리라는 건 불 보듯 환한 일이었다. 더구나 신은 눈이 뜨이지 않는다는 점과 향이 난다는 점 때문에 완전한 인간형 섹스돌이 아니어서 과도한 세금 없이 비교적 적절한 가격으로 공급이 가능했던 상품이었다. 
신 을 구매한 이들 중에 비테라틱을 귀찮게 한 이들은 없었다. 개안하는 신이 단 한 채도 없다는 사실 역시 문제 되지 않았다. 몇몇 경우, 신이 눈꺼풀이 열리거나 반안했다는 소식이 있긴 했다. 때문에 신이 개안하지 못하는 건 전적으로 소비자들의 탓으로 돌려졌다. 
우 습게도 눈이 뜨이지 않는다는 점은 더 많은 신을 팔아치우는 데 도움이 되기까지 했다. 신의 눈꺼풀을 억지로 열면 신은 정말 사람과 같았다. 그 신과 섹스한 사람들은 열린 눈 때문에 파손된 신에 대해 불평하는 대신 몇 채의 신을 더 사들였던 것이다. 
“얼마 만에 보는 거죠? 신년 총회에서 보고 처음 보는 건가?”
운은 큰 잔에 커피를 내어오면서 레레의 맞은 편, 망가진 신 옆에 앉았다. 
“고마워요, 운.”
레레는 웃으면서 답례를 했다. 운의 말대로 오기 전 이트를 통해 기초조사에 대한 고지 합의를 빼고는 9개월만이었다.
“들어오면서 솔직히 놀랐어요, 운. 진짜 뭘 만든 거예요?”
커 피를 한 모금 마시고 레레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부터의 이야기가 필요했다. 질적 변성에 관한 획기적인 새 발명품이라는 소문에 비테라틱을 떠들썩하게 했다가, 결국에는 섹스돌이라는 얘기에 조사자들과 연구자들을 김빠지게 했는데 얄궂은 상업적 멘트를 십여 년의 시간을 들여 보강한 제품이라니.
그러나 레레의 경탄을 운은 비껴갔다. 
“응? 알잖아요. 내가 뭘 만들었는지. 신이잖아요. 사람들의 아편. 예수며 석가며 이런 저런 신화의 신들까지 통틀어서 이렇게 손에 잡히면서 위안과 안식을 주는 게 또 어디 있겠어요. 내가 만든 게 바로 ‘신’이죠.”
운은 말하면서 자신의 옆에 있는 망가진 신의 머리칼 안에 손가락을 넣어 애무하며 쓰다듬고는 보란 듯이 신을 끌어당겨 안았다. 
그 모습에 레레는 ‘신’ 프로젝트에 대한 경계심과 운에 대한 양가감정이 새삼스럽게 상기될 수밖에 없었다.


3. 
‘신은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존재로서 기능합니다. 때문에 신은 존재 자체로 충분히 구상됩니다. 물론 상품으로서의 신은 존재만으로는 부족하겠죠. 그래서 예전부터 있던 신의 기능을 강조했습니다. 구원.’
레레는 커피를 몇 모금 마신 다음에 이트에 손을 대고 예전의 기록을 재생했다. 
신의 발표회 때 신을 소개한 운의 모습이었다. 
발 표회는 한 번 미뤄진 적이 있었다. 조사관들의 내부 비판이 일반사회와 연계되어 제법 논란이 되었었지만 그런 일로 신작 발표가 미루어지지는 않는다. 회사차원에서 연구동의 지분을 문제 삼아 실무진과 연구동의 알력이 심했다는 사내 루머가 오히려 타당성이 있어 보였다. 갈등을 겪은 뒤라 그런지, 소개말을 하며 신을 선보였던 운의 얼굴은 살벌할 정도로 오만하고 도전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십여 년 사이 운은 노회해졌다. 신을 껴안는 비릿한 행동에서 레레는 무엇을 읽어내기가 어려웠다. 위악을 떠는 것인지 냉소를 보이는 것인지, 자포자기인 것인지 득의양양한 것인지. 
별 다른 방법은 없었다. 레레는 정석대로 갈 뿐이었다. 
“이 향기 나는 섹스돌이 사람들한테 효과 좋은 아편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어요. 박사님. 그 와중에 제품에서 기존과는 다른 이상증상이 나타나는 것 같은데, 난 이게 ‘신’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하는 거구요. 그래서 운. 당신이 원래 생각했던 ‘구원하는 신’이란 게 뭔지 알고 싶은 거랍니다.”
레레는 박사라는 호칭과 이름을 동시에 쓰며 물어보았다. 
‘구원하는 신’을 발표회 때 말했지만, 결국 결론은 정서적인 자위 기능을 전면에 내세운, 향기 나는 섹스돌이었다. 그러나 원래의 기획, ‘구원하는 신’이 그렇지는 않았으리라. 
연 구자들은 자신들이 구상하는 것을 현실화시키고 싶어 한다. 설혹 그 구상이 상식과 도덕에, 안전에 위배되더라도 말이다. 동시에 그들은 자신의 구상과 그 의미를 사람들에게 납득시키고 이해받고도 싶어 한다. 이 욕망은 거의 본능과도 같았다. 대체적으로 이 욕망은 충족되지 않는다. 대중에 대한 무시와 혐오를 내비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런 만큼 레레는 그들이 갖고 있는 열망의 강력함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솔직하게 물어볼밖에. 그리고 이 꾐에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넘어오곤 한다. 
운 역시 레레의 질문에는 어쩔 수 없어 하며 신을 품에서 놓고 입을 열었다. 
“신은.”
레레가 기대했던 반응이었다. 
“차 원을 초월해서 존재를 존재로 존재케 하는 존재죠. 통상적으로 한 존재를 생명에서 죽음으로 옮기거나 죽음에서 삶으로 옮기는 존재가 있다면, 그걸 신이라고 부르는 게 대표적이죠. 죽고 살고의 문제도 결국은 차원의 문제니까요. 더 나가서 삼차원의 존재를 사차원, 아니면 십이차원의 존재로도 존재케 할 수 있는 존재가 신이에요.”
말을 하는 운의 얼굴에서 십 여 년 전 발표회 때의 삭막한 기운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신의 첫 기획 보고서를 쓸 때나 보였을 법한 얼굴이었다. 
“신 이 권능이나 기적이라는 단어하고 붙어 다니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에요. 한 차원에서 설명되지 않는 현상이 어떻게 가능한가? 가망이 없는 사람이 갑자기 살아난다든지 하는 거 말이에요. 차원 안의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경우가 있긴 해요. 하지만 도저히 차원 안의 논리로 설명 불가능한 일들이 생겨요. 신이 존재를 다르게 존재시켰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보통 그런 일을 기적이라고 부르는 거구요.”
이트는 조용히 그러나 빠짐없이 이 상황을 기록하고 있었다. 
“ ‘구원’은 그런 신으로 인해 존재의 변화를 겪는 거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 현세, 혹은 현세의 나라는 존재를 차원적으로 변화시킨다는 게 내 정의상의 ‘구원’입니다. 열반이나 해탈, 승천 같은 단어로도 표현되죠. 해탈하거나 승천한다고 하는데, 그게 그냥 하늘로 날아가는 걸 말하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개인적으로 신의 기능을 표현할 때는 열반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했는데 기획 차원에서도 이건 태클을 많이 받을 것 같아서 그냥 ‘구원’이라고 했어요. 나중에 실무진 얘기 들어보니까 그건 잘 한 것 같더라고요. 물건 팔기에는 확실히 ‘구원’이 낫잖아요. 사람들은 ‘열반’이나 ‘해탈’보다는 ‘구원’이 더 쉽다고 생각하니까. 어쨌든 신의 기능은 분명해요. 구원이든, 해탈이든 존재의 변화를 가능하게 할 것. 따라서 만들어진 신은 그 기제로 기능할 수 있어야 하죠. 최소한 차원 조정이 가능할 정도의 위력으로 설계해야 되는 거예요. 이 신을 통해 차원 초월적인 존재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 이게 ‘구원하는 신’이라는 원래의 내 기획이었어요.”
레 레는 운의 말을 따라가면서 운의 낯빛을 살폈다. 실무자들 조언 운운할 때는 학교를 졸업하고 한창 열을 올리며 연구할 때, 다양한 활동을 할 때 보였던 장난스럽고 쾌활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어렸을 적의 모습은 뒤의 설명에서 배어나왔다.
학교에서도 운은 해탈과 열반을, 신과 초월을 말하곤 했었다. 이곳에서 행복하게 반짝이다가도 다른 무엇에 골몰하며 깊게 침잠하는 모습을 운은 몇 번이고 보여주었다. 다른 곳으로 가는 그 얼굴이 옛날에도 생경했다. 
레 레는 그 생경함이 섭섭함은 아닐까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모자랄 것 없이 빛이 나는데 왜 초월을, 해탈을 꿈꿨을까. 섭섭했지만 좋았던 것도 같다. 저 운이 초월을, 해탈을 꿈꾼다는 건 역설적으로 다른 이들의 가능성을 말해주는 일일 테니까. 
다 만 운 자신에게 운의 성향이 도움이 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조사자적인 주제에 빠진 덕에 정통적인 노선에서 이탈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차원과 변성으로 연구와 생산을 할 수 있는데 그 기획에 왜 ‘신’이니 뭐니 하는 주제를 붙였단 말인가. 
하 기야 레레 자신도 그 신을 ‘어떻게’ 인간형으로 만들었는지, 핵심기술이 무엇인지, 기술상 어떤 문제점들이 있었는지를 묻기보다 왜 ‘신’인지, 그것도 왜 ‘구원하는 신’으로 주제를 설정했는지부터 파고들어갔으니 할 말이 없기는 했다. 
“내가 만든 신의 이상증상 얘기를 하셨죠?” 
레레는 운의 질문에 다시 운에게로 초점을 맞췄다. 
“레레, 정확하게 말해서 이상증상은 나타난 적 없어요. 향기, 지금도 나죠?”
레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향기, 지금도 난다. 여전히, 지나치게 생생하게. 
“내 신들이 개안 전에도 향기를 냈었지만 그거하고 이거가 다르다는 건 당신도 알 거에요. 실제 냄새라면 당신 후각은 벌써 마비돼서 둔해졌겠죠. 하지만 아닐 거예요.”
차가운 기운이 레레의 목덜미로 올라왔다. 
“지 금의 향기는 냄새가 아니라 차원이 비틀어진 데서 오는 효과에요. 신의 기능이 활성화되면 차원들이 조금씩 재배열되죠. 개안은 그 신호고. 신이 눈을 뜨면 영구한 향기가 가능하다고 분명히 명시했잖아요. 말한 대로 되고 있는 건데 그게 이상 증상일 수는 없죠. 드디어 제대로 작동이 되는 거라면 작동이 되는 거지.”
레레는 낭패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무언가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미심쩍음을 배가시키는 것은 운의 얼굴이다. 운의 얼굴은 다시 망가진 신을 껴안았을 때와 비슷한 얼굴로 변해 있었다. 
“뭐, 그건 인정해요. 이상이 있을 수는 있다는 거. 차원이 비틀어졌기 때문에 간섭 현상이 일어날 수 있죠. 차원 내적인 논리로 안 되는 일들이 되는 거거든요. 영구 향기 같은 것도 말이 안 되는 건데 지금 되잖아요? 인지 능력이 초차원적으로 활성화될 수도 있는데 그건 조건 맞추기가 어려워서 신경 안 써도 되고. 아, 신이 완전히 성공하면 일종의 ‘권능’이 행사될 가능성은 있어요. 거기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죠. 그건 꼬투리 잡힐 수 있겠네요.”
레레는 장스트리에 대해 칭찬할 마음이 생겼다. 돈벌이는 원래 잘했지만 위험 관리 역시 잘한다. 귀신같이 조사를 지시했으니 말이다. 
동시에 지근지근한 짜증이 밀려왔다. 짜증은 당연히 운에 대한 것이었다. 
조사자, 연구자, 실무자 등등 모두가 선을 넘는 때가 있다. 자기 자신을 밀어붙이다 보면 다들 선을 넘는다. 문제는 이 제 멋대로의 선 넘기가 대체로 위험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4. 
경계경보가 머릿속에서 울려댔다. 
처음부터 안 울리지 않았다. 울리고 있었는데 향기에 홀려 무시하고 있었나 보다. 
이트는 이트대로 새 소식을 전해왔다. 장스트리의 상태가 좋지 않아 입원을 결정한 모양이었다. 불길한 기운이 강해졌다. 
향 기의 지속에 대해 차원 재배열을 운운하는 설명을 태연하게 받을 수는 없었다. 실제로 눈이 뜨여버린 신의 신체가 향기와 함께 있다. 운의 설명이 맞는다면 그 차원 재배열과 차원간섭이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레레는 자신이 향기를 맡고 있는 것도 불안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운은 천연덕스러웠다. 
“커피 더 마실 거죠?” 
쟁반에 담긴 잔들을 소파 옆 책상 위로 옮기더니 운은 새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뜸을 들이는 동안 운 역시 이트에서 소식이 수신된 것을 받은 모양이었다. 
“장스트리가 아픈가 보군요. 아프다면서 부지런도 하지.”
회장 실무진들에 대한 비아냥거림을 빼놓지 않고 한 마디 한 다음에는 마치 레레의 머릿속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걱정할 거 없어요. 영구향기 때문에 잘못 될 일은 없을 테니까. 영구향기까지는 내가 계산 한 거에요. 내 계측능력은 알잖아요. 연구진이나 실무진들도 그 점은 알고 있고.” 
레 레는 운의 그 말에 반쯤 안심이 되었지만 그만큼 운이 얄미웠다. 운의 계측능력은 알고 있었다. 조사자인 자신은 끝까지 힘들어 하는 분야다. 아울러 알고 있었다던 연구진과 실무진들이 마음에 걸렸다. 그들은 어디 까지를 알고 있는 건가. 알면서도 위험이 없다고 판단했다는 건가. 
“차원재배열은 그렇다 치고 신의 권능은요?”
“그것도요. 크게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에요.”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운은 내린 커피를 레레에게 건네주었다. 
“말 했잖아요. 신의 기능이 활성화되면 그 표시로 개안을 한다고. 그러니까 전원이 들어와서 파란불이 깜빡깜빡하는 정도인거에요, 지금 이건. 실제로 신이 완전히 작동이 되었다면 ‘구원’의 주체가 있어야죠. 차원 초월적으로 변화한 존재 말이에요. 그런데 없거든요. 그러니까 완전 작동에서 유래될 이상증상이라는 건 있을 수가 없어요. ‘권능’이라는 게 나타나려면 에너지의 변이를 수렴시키는 특이점이 있어야 되는데 그게 없으니까요. 한마디로 말해서 이것들은 현재까진 다 예전과 똑같은, 냄새나는 섹스돌이라는 거예요. 게다가 대부분 망가진 섹스돌이지.”
소파 옆 테이블에 기대 선 채 커피를 마시면서 운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나 레레는 그 뒤에 이어진 운의 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없었다. 
운은 책장 옆에 놓여 있던 신의 머리채를 잡고서는 바닥에 떨어뜨렸다. 서너 채의 머리통이 쓰레기가 쓰레기통에 던져지듯 바닥에 떨어졌다. 운은 그걸로 모자랐는지 공을 차듯 머리통을 찼다. 
신 의 머리통은 핑, 날아서는 데굴데굴 굴러가다가 신들이 서 있는 곳에 가서야 멎었다. 신의 머리가 가 닿은 곳의 신들 역시 대개가 파손된 신들이었다. 신들 사이사이에 놓여 있는 것들은 신들의 잘려진 팔, 혹은 발, 몸통 등이었다. 들어왔을 때 눈을 뜨고 있는 신들에 놀라 빛이 닿지 않는 곳까지는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사이 탕, 소리와 함께 운이 또 하나의 머리통을 차는 소리가 났다. 
“운! 뭐하는 짓이에요.”
레레는 목소리를 높였다. 
“왜요?”
운은 반문했다. 
“보다시피. 이상 같은 건 안 일어나요. 그냥 인형이라고요, 지금 현재.”
레레는 화가 났다. 운이 왜 이런 유치한 짓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레 레는 자신의 성향을 알고 있었다. 생명과 사람의 존엄성이라는 구시대의 신화에 아직도 구애받아 결국에는 조사자가 되었다. 자신의 성향이 반사적 반응으로 나올 때 레레는 쓸데없다는 자의식 역시 느끼곤 한다. 지금의 경우가 그렇다. 엄청난 향기를 뿜고 있는 단백질 인형에 무엇을 투사하나 싶은 것이다. 
그 러나 레레는 자신의 기본적인 감각에 대해서는 회의하지 않는다. 원시적 반응일 수 있어도 이 반응은 폭력성에 대한 반사적인 감각이었다. 이 감각을 잃어버릴 때 인간이 얼마나 오만해지는지, 그래서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를 레레는 배워왔다. 
“사람 같아서 거리껴지나요? 어차피 인형인 거 알잖아요. 신은 고사하고 사람도 안 되는 것들인데.”
운은 아직 바닥에 구르고 있는 신의 머리를 차지 않는 대신 마치 공 굴리듯 머리통을 굴리면서 레레의 속을 긁었다. 운은 멀쩡하다가도 가끔 위악적인 행태를 보여 호의적인 사람들을 밀어내곤 했는데, 이건 운의 악덕인 모양이었다.
“여 기에 있는 것들은 공식적으로 다 폐기처리물이에요. 사갔다가 자기들이 망가뜨려놓고 바꿔달라고 보낸 것들에다가 불량품, 전시한 다음에 효용가치가 떨어져 버린 것까지. 멀쩡한 것도 있긴 해요. 재고랑 내가 쟁여놓은 것들도 있으니까. 하지만 대부분 효용가치가 없는 것들이죠. 어떻게 보면 신이라는 이름에 걸맞다 싶기도 하고. 원래 신이 효용이 없으면 바닥으로 떨어지잖아요. 예수 같은 것도 봐 봐요. 신이라고 다녔지만 나중에는 범법자로, 형벌 속에서 죽어갔지.”
레레가 운의 말에 주춤하는 사이 운은 허리를 굽혀 발로 희롱하던 머리통을 들어올렸다. 
“개발자 입장에서는 약간 우습기도 하고. 이 제품에서 중요한 건 이거거든요. 이게 멀쩡한데 폐기처리물이 된 건 말이 안 되죠.”
운은 머리통을 자신과 마주보게 꽉 잡더니 손가락으로 뜨여 있는 신의 눈동자 하나를 파냈다. 운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숨을 몰아쉬며 손가락에 힘을 주는 것을 보면 쉽지는 않아 보였다. 
힘들게 빠져 나와 손바닥에 들어온 눈알은 컸고 빛이 났다. 눈알은 하얗게 타들어 가는 것처럼 빛을 냈다. 눈알이 파내진 구멍에서는 피 같은 붉은 액체가 흘러나왔다.
개 안하지 않은 신들의 눈을 억지로 열었을 때, 눈은 빛나지 않는다. 그 때의 눈은 사람의 눈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눈은 점차 불투명하게 탁해지면서 굳어갔다. 눈에서 시작된 경화가 몸 전체로 퍼지면서 신은 딱딱하게, 정말 인형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다음 가루가 되어 과자처럼 부서졌다. 
신 의 몸에서 붉은 액체가 흘러나왔다는 경우 역시 들어본 적이 없었다. 신의 몸은 잘리거나 파손되었을 때 그 부위만 하얗고 딱딱하게 굳어질 뿐이었다. 사람들이 신의 팔이나 다리를, 몸통을 잘라댔던 것도 그럴 만 했으니 그랬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굳어지지 않는, 피를 흘리는 신의 얼굴이 있다. 두 눈알이 파내진 신의 머리가 책상 위에 놓여졌다. 그 옆에 투명하게 빛나는 눈알 같지 않은 눈알을 하나씩, 운은 놓았다. 
사 람의 머리와 하등 다를 것이 없는 얼굴을 가진 머리였다. 눈알이 사라진 구멍은 깊고 어두웠다. 그 안에서 붉은 액체가 눈물처럼 줄줄 흘렀다. 부드럽고 연한 입술의 두 꼬리에 피 같은 물이 고였다. 운이 잡고 휘둘러 댄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흩어져 있어서 신은 마치 고문당하다 처형당한 것처럼 보였다. 그 처형당한 머리가 제물처럼, 어딘지도 모르는 제단에 바쳐져 있는 형국이었다. 
레 레는 낯설고 거북했다. 왜 당혹스런 연민을, 분노 섞인 어리둥절함을 느껴야 하는가. 자신은 이교도 신전의 잘못된 예배에 들어와 있었다. 신의 머리 옆에서는 여전히 신의 눈이 촛불처럼 빛나고 있었고 그 빛에 운의 얼굴에 드리워진 음영만 뚜렷했다. 
레레는 손을 뻗어 커피 잔을 집었다. 커피 하나만큼은 고마웠다. 이질적인 제전 안에서 일상적인 커피의 향과 미지근한 감촉만이 제 균형을 잡아준다. 레레는 손에 들어온 커피잔을 단단하게 쥐고서 운을 쳐다봤다. 
“운. 하나만 물어볼게요. 정말로 아무 이상이 없을 거라고 얘기할 수 있나요? 전원의 푸른빛이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을 거라고? 예전과는 달라진 점이 뚜렷이 보이는데? 장스트리가 병원에 들어간 이 마당에 말이죠.”
운은 레레를 물끄러미 바라봤지만 다문 입이 열리지는 않았다. 몇 초 간 기다리다가 레레는, 
“알았어요.”
짧게 말을 하고 잔을 놓았다. 
이트가 빛을 냈다. 
평균 경계 범위 초과, 심층조사 필요를 요하는 코드가 이트를 통해 전송되었다.


5.
운이 깊게 숨을 쉬는 것이 보였다. 
길고 깊게 숨을 쉬어서 얼굴은 조용했지만 표정은 어른어른하게 올라왔다. 심정이 어떤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운 은 기대 있던 몸을 세우고서는 신의 머리에 손을 대었다. 빗질하는 것처럼 신의 머리칼을 정돈했고 무심하게 붉은 액체를 닦아냈다. 다행히 붉은 액체는 피처럼 말라붙지는 않았다. 물처럼 쉽게 닦였다. 제일 마지막에는 훤한 공동을 드러내고 있는 신의 눈을 가렸다. 시체의 눈을 감겨주는 것 같았다. 눈이 감겨진 얼굴은 눈두덩이 함몰되어 있었지만 최소한 아까처럼 기괴하지는 않았다. 운이 신의 머리를 정리하는 동안 신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이제 심화 조사로 들어가겠죠?”
운의 행동을 보고 있다가 마지막에 들리는 운의 말에 레레는 긴장이 풀려버렸다. 
운은 일상적인 얼굴로 자신의 앞 소파에 앉아서는, 
“내 연구가 막바지에 이르긴 했네요.”라는 말까지 했다. 
레레는 어이가 없었다. 약간 짜증도 났다. 
기 초조사가 곧 심화조사로 이어진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기초조사에서 미심쩍은 구석이 나오지 않는 연구라는 건 없으니까. 레레도 자신의 질문이 비겁했다는 것을 안다. 어느 연구자가 연구에 오류가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차라리 자신의 질문에 화를 내든지, 아니면 괜한 어깃장을 놓지 않는 게 낫다. 심화조사를 피할 수 없다고 불성실하게 행동하고 답변하는 건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기초조사의 일차 중간 결과부터 좋지 않은 코드를 허용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나중에 닥칠 심화조사에서는 하나하나가 다 꼬투리 잡힐 일인데. 
“남 얘기 하듯 합니다?”
핀잔하자 운은,
“대체적으로 기초조사 받고 심화조사 받고 그러면 도가 되든, 모가 되든 결말이 지어지긴 하니까요.” 라고 말했다. 
레레는 자신이 마음을 쓰는 게 괜한 일인가 싶었다. 
운은 물색없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니 레레는 내 신을 갖고 있나요?”
“아뇨. 없어요.”
“그 럴 것 같았어요. 한 채 보내줄게요. 심화조사 들어가면 제품이 막힐 수도 있잖아요. 수집차원에서라도 갖고 있어요. 재고로 괜찮은 것들 쟁여놓은 거 있거든요.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신이 개안하는 건 어쨌든 수고를 들여야 하는 일이고. 이상증후로 당신한테 나쁠 일은 없을 거예요.”
운은 찡긋 눈짓까지 했다. 
레 레는 한숨을 쉬었다. 운의 말이 맞았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당연히 심화 조사로 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주식에도 영향이 갈 것이고 제품 사재기 같은 것도 있을 것이고, 현실적으로 줄줄이 귀찮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 안에서 운은 또 자신의 성벽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할 모양이었다.
레레는 태세를 가다듬고 운을 쳐다봤다. 
“좋 아요. 다시 시작해보죠. 우선 고마워요. 신을 보내주겠다는 거. 그런데 운. 걱정을 안 할 수는 없어요. 수백 채가 되는 신들이 소위 개안을 했는데. 거의 십년 만에 나타난 일인 건 박사님 자신이 알 거 아니에요. 박사님 말처럼 도대체 무슨 수고가 있었던 건가요? 왜 지금에서야 활성화가 된 거냐고요. 어떤 기술상의 진전이 있었던 거죠?”
운은 소파에 기대앉아 옆의 망가진 신 옆에 팔을 둘렀다. 
“기술상의 진전이라. 글쎄. 그런 건 없어요. 처음부터 지금까지 신에게 따로 손을 댄 적은 없는데. 디자인 쪽은 빼고.”
“그럼 왜 이런 상황이 나타난 걸까요?”
운은 단정한 얼굴로 레레를 바라보았다. 
“레레. 이미 답이 있는 질문을 하고 있네요. 눈이 가려졌을 때 사람들은 답을 보면서도 질문을 하죠.”
레레는 순간 멈칫 했다. 바닥이 닿는 곳에서 헤엄을 치고 있다가 단차 너머 깊은 물로 들어간 느낌이었다. 
“신의 제품 설명에 분명히 적시해 놓았잖아요. 어떻게 사용하면 되는 지를요. 제대로 사용하면 어떻게 기능이 활성화되는 지도요.”
레레를 도와주듯 운이 말을 거들었다. 
신들이 있다. 눈을 뜬 신들이 있다. 과하게 많은, 눈을 뜬 신들이었다. 
지나치게 많아서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하는 점을 잊어버렸다는 걸 레레는 깨달았다. 
운의 말이 가리키는 지점은 사람이었다. 
신의 눈을 뜨게 했다, 누군가가. 
누군가가 수많은 신들의 눈을 뜨게 했다. 
십여 년 동안 끈질기게 신의 개안을 위해 숨을 쉰 사람이 있었을까? 정신 환기 기능은 눈 가리고 아웅 이라고 빈정대며 모든 이들이 섹스돌로 소비한 게 신이었다. 
그러나 하나의 사람이 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신들을 만들고 그 신들의 기능을 믿었으며, 그 결과로 신들을 깨운 단 하나의 사람이. 셀 수 없는 신들의 눈을 뜨게 한 오직 하나의 사람이. 
레레는 운을 쳐다봤다. 
운은 수긍했다.
“그래요. 내가 눈을 뜨게 했어요.”
레레는 잠시 동안 한 말을 생각하지 못했다. 운의 말이 이어지는 게 다행이었다. 
“이렇게 많이 개안 했는데 내가 아직 그대로니까 괜찮다고 한 거예요. 크게 이상 증상이 나타날 일은 없을 거예요. 음. 장스트리는 그렇게 생각 안했겠지만. 해코지 당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레레는 아까 전부터 달아오른 볼이 의식됐다. 첫 단서를 놓친 부끄러움에 말이 잘 안 나갔다. 그래도 헤엄은 계속 쳐야 한다. 미심쩍은 것들은 계속 물어야지 별 수 없었다. 
“장스트리하고, 회장하고 무슨 일이 있었나요?”
운은 슬며시 웃었다.
“있 었죠. 십 이년 전에. 장스트리는 날 폭행하고 강간하려다 미수에 그쳤고, 난 날 강간하려는 장스트리를 죽이려다가 미수에 그쳤으니까. 그래놓고 입 막겠다고 협박하고. 지들 말대로 섹스돌 기능까지 포함해서 다 만들어놨더니 폐기시킨다고 해서 신 발표회도 한 번 취소된 적 있었잖아요, 왜. 지금도 장스트리한테 나는 지우고 싶은 오점이지.” 
운은 가볍게 말했지만 레레는 해일이 덮치는 것 같았다. 
이 미 신에 관한 이야기로도 머리가 복잡했는데 기억의 얼굴을 한 파도들이 연달아 들이닥쳤다. 미심쩍어하던 이사들에게 무표정하게 신을 재가해야 한다고 말하던 장스트리가 기억났다. 세미나나 발표회, 공식석상에서 운과 장스트리 사이의 팽팽하고 날카로웠던 긴장감과 장스트리의 수행 비서관들이 운과 운의 연구동에 촉각을 곤두세웠던 광경도 하나씩 둘씩 떠올랐다. 이번에도 다른 누구보다, 조사관들보다 먼저 반응한 것이 장스트리지 않았나. 
사 사건건 실무진들과 충돌하던 운의 모습이 새삼스러웠다. 별다른 위험 수위 연구를 하지 않는데도 사고가 많이 일어났고 경고도 많이 받았던 운의 연구동, 운 자신에게 일어났던 교통사고와 의료 사고, 그때마다 용케도 해가 없었던 운의 이력들이 머릿속에서 목록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 모든 기억들은 십여 년 전, ‘신’에 대한 발표회 때의 살벌할 정도로 오만하고 도전적이었던 운의 얼굴로 모아졌다. 
레 레는 자신이 분노하는 인간이라는 걸 안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일들에 부딪쳤을 때 레레는 제일 먼저 화를 내곤 했다. 그 분노의 기저에 공포와 불안이 있다는 것을 레레는 안다. 그러나 단지 불안과 공포에서만 분노가 운용되지는 않는다. 분노는 불안과 공포를 넘어 다른 것을 보기도, 다른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운. 이럴 수는, 어떻게…”
레레가 그 다른 무엇을 위해 입을 열자 갑자기 향기가 불길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그리고 정말로 다른 무엇이 도둑처럼 나타났다. 
십 여 년 전의 운이 서 있는 모습이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운의 손에는 기다란 단백제 재단용 제도 나이프가 들려 있었다. 나이프 끝에 맺힌 피가 보였다. 레레가 고개를 돌리자 바닥에는 옆구리를 손으로 막고 있는 장스트리가 뒹굴고 있었다.
그 장면 위로 다른 장면이 겹쳐졌다. 운은 독이 오른 모습으로 연구실 안으로 빠른 걸음으로 들어오더니 세워져 있던 신 한 채에 주먹을 휘둘러댔다. 신이 쓰러졌지만 운은 그치지 않았다. 쓰러진 신을 밟고 차면서 발길질을 해댔다. 나중에는 몇 번이나 굴러간 신 위에 올라타 얼굴을 후려치더니 쥐어뜯으며 눈을 파내려 했다. 격한 감정 때문인지 신의 눈을 파내는 건 어려워보였다. 운은 숨을 몰아쉬며 신과 씨름해야 했다. 
레레는 그 광경을 보는 것이 힘들었다. 마침내 기운 빠진 운이 손을 늘어뜨리는 것도, 한참을 신을 내려다보는 것도, 그러다가 힘들게 몸을 일으켜 신을 안아 일으킨 것도. 
다 만 앎만이 명확하게 찾아왔다. 이 장면들이 십 여 년 전의 단편이었다. 장스트리에게 당한 폭력. 그리고 폭력 뒤에 찾아온 더 큰 위협과 압력에 격분한 운이었다. 만들어 놓은 신을 파괴하려 들만큼 운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때의 신은 그 때의 상처를 가지고도 여기에, 지금도 운의 옆에 있다. 
이 앎이 찾아오자 그 뒤로는 정보라고 부를 수 없는, 기이한 종류의 인식이 연이어 쏟아져 들어왔다. 
운이 신을 앞에 두고 눈을 감은 채 숨을 쉬고 있는 광경은 십 이년 동안의 시간으로, 셀 수 없는 신들과 더불어 흘러갔다. 
장 스트리와 비서진들에 대항해 운 자신도 교활하고 비열하게 협상을 한 뒤 신 앞에서 들이마셨던 운의 호흡은 시궁창에 부어진 독의 냄새를 풍겼다. 비단 장스트리와 비서진들뿐만이 아니었다. 운에 대한 질투와 질시, 방해와 훼방, 별것 아닌 것 같은 악의는 운의 피부로 스며들었다. 운은 혐오와 슬픔, 소진된 쇠약을 신 앞에서 토해내야 했다. 운이 스스로 만들어낸 불신과 원망, 자책과 자학, 원한과 복수심의 숨들은 운 자신이 구역질을 할 만큼 역했다. 운은 숨을 쉬며 스스로 지옥의 문을 열고 닫았다. 
그 러나 독한 것을 토해낸 뒤에 자신이 토해낸 것을 다시 들이마시면서도 운은 신 앞에서 자리를 뜨지 않았다. 레레는 신과 마주한 그 한 숨, 한 숨을 위해 미끈한 제 살을 저며 칼집을 내고, 칼집의 벌어진 상처를 다리 삼아 기어나갔던 운을 안다. 공포와 불안의 나날마저도 운은 신 앞에 나아가기 위한 연료로 아낌없이 아궁이에 처넣었다. 운은 악착같이 신에게로 나아갔다. 
자 기 부상 써클에서 떨어져 몸이 압사될 뻔했던 사고 뒤에, 아드레날린으로 펌핑된 몸으로 헐떡대며 신 앞에 돌아와 쉬었던 가쁜 숨이 있다. 병원에서 잘못 수혈된 피로 노랗게 변한 몸을 가지고, 운은 신 앞에서 숨을 쉬다 기절했다. 약을 찔러 각성된 상태에서, 사람들처럼 신을 섹스돌로 갖고 놀면서도 그 환각과 쾌락의 끝에서조차 호흡만은 맞추려고 킥킥댔던 광기의 숨을 레레는 보았다. 
견딜만한 숨들은 어땠나. 
첫 숨이 있다. 장스트리와의 일이 벌어지기도 전, 시제품인 신에게 호흡 하나 제대로 못 맞췄던 솜털 같은 첫 숨이 있다. 괜찮은 논문을 하나 쓰고 의기양양하게 신을 보면서 들이켰던 힘차고 밝은 숨은 얼마나 되었을까. 새로운 물건과 기술을 보러 갈 생각에 좀이 쑤셔 하면서 신 앞에서 억지로 앉아 있던 얕은 숨도 있었다. 빈정대며 사람들과 싸우고 난 뒤의 신경질적이고 들쭉날쭉한 호흡이 있었으며, 사람들이 표한 호감과 작은 공감에 기뻐하며 숨을 쉬었던 맑고 밝은 공기가 있었다. 
그 독하고 순한 숨들이 쌓이고 쌓여 더 깊숙이 들어간 숨들은 독한 것도 순한 것도 없이 깊이, 깊이, 깊기만 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길고 깊고 가느다란 숨. 
그렇게 영원 같은 숨들이 모여, 마침내 첫 신이, 신들이 개안했다. 
함 께 있었으나 신의 개안을 레레가 알 수는 없었다. 운도, 신도 레레는 알지 못한다. 다만 신들이 눈을 뜨는 것은 마치 꽃이 피는 것과 같다는 것만이 레레에게 주어졌다. 언제, 어떻게 피는지 알지 못하지만 갑자기 드러나는 꽃처럼 신들은 눈을 떴다. 하나의 신이 눈을 뜨고, 또 하나의 신이 눈을 뜨고 어느 때는 몇 명의 신이 갑자기 눈을 뜨거나, 아주 오랫동안 어떤 신도 눈 뜨지 않는 때가 있었다. 
눈을 뜬 신들은 스스로 눈을 뜨거나 감았고, 뜨지 않거나 감지 않았다. 신들이 눈을 감고 있는 가운데 혼자 눈을 뜨는 운을, 혹은 운이 눈을 감았을 때 형형히 켜지던 신의 눈들이 있었다. 그것을 보았다. 
눈 을 뜬 신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자신이 원했던 결과는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실패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운과도 레레는 함께 해야 했다. 그 때의 운도 레레는 모른다. 그러나 사면초가로 몰린 나머지 찢어버리려던 신을 힘이 빠져버린 몸으로 일으켜 세웠을 때처럼, 눈을 뜬 신들 사이에서 실패를 받아들이는 운의 숨소리는 어느새 노랫소리 같았다. 아수라장의 악다구니와 아귀가 느끼는 허기의 허덕거림이 향기와 노래로 뒤섞여 버렸다.
그러다 마침내, 의도도 의지도 없이 지고 피는 것처럼 눈을 감고 뜨던 신들이 어느 숨 하나가 넘어가자 일제히 눈을 뜨는 광경이 엄습했다. 
맡아보지 못했던 향기가 진동을 하고, 맑고 투명한 바람이 신들 사이에서 불었다. 
몇 개의 차원들이 서로 서로 울렸던 신들의 공간. 
모두가 눈을 뜬 신들. 
인식이 꺼지고 시간이 다시 흐르는 곳으로 돌아와서 레레는 운을 마주봤다.
“레레. 나는 지금 기쁘군요.”
운이 말했다. 
운의 얼굴은 순수한 미소였다.


6. 
레레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울어본지가 오래 됐다. 어렸을 때는 왜 우는지 말하기 싫거나 말할 수 없었다. 지금 왜 눈물이 흐르는지 말하기 난감했다. 
모 를 일들은 많다. 알았지만 모르게 되는 일이 가능한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말은 있다. 그러나 그 말은 일종의 말장난일 뿐이다.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오해였다는 고백. 그러나 알았지만 모르게 되는 일이 없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알았지만 이제는 알 수가 없다. 모르는 것이 되어 버렸다. 운과 신들의 개안을 알았지만, 그 경험을 알았지만, 그 앎은 기억으로만 남는다. 
어 딘가로 무엇이 사라져 버렸다. 그 상실에 눈물이 흘렀다. 동시에 우연한 선물처럼 얻은 기억 하나가 반갑고 기뻐서 눈물이 났다. 더해서, 너무 큰 차이 때문에, 시간이 흐르자 다시 상기되는 현실과 인식의 괴리 때문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레 레는 얼굴을 닦았다. 보고 온 것은 운이었고 눈앞에 있는 것도 운이다. 운은 운이 아닌 것 같았지만 역시 자기가 얼마쯤 알고 있던, 웃으며 인사를 하는 사이였던, 운이었다. 이상 증상은 없을 것이고 신경 쓸 필요도 없다고 말한 운에게 따져 물어야 할 조목과 심정이 북받쳤지만 운은 야속하게 말갛기만 했다.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와중에 도와주는 것처럼 이트가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잠시만요. 운.”
“얼마든지. 편하게 해요.”
운은 변함없이 일상적이었다. 그리고 레레는 이트의 수신을 받아들이면서 방금 전까지 울던 게 무색하게 완벽히, 현실로 돌아왔다. 단단하게 속에서 굳어지는 것이 있었다. 나지막하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운.”
“응?”
“심화조사는 곧 들어갈 거예요.”
“알아요.”
“매몰 얘기가 나오고 있나 봐요.” 
운은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레레는 민망함을 느끼지 않으려 했다. 불과 몇 분 전에 위험 신호를 보낸 사람은 자기 자신이었다. 그러나 그걸 차치하고 나자 자신의 고질대로 화가 나고 있었다. 
위 험수위는 위험수위고 그 뒤의 심화 조사는 수순이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매몰 얘기가 나올 수는 없었다. 긴급 매몰은 생물병기나 핵실험이 잘못 되었을 때나 나올 수 있다. 비테라틱 역사에서는 한 번, 단지 한 번의 긴급 매몰이 있었을 뿐이다. 심화 조사를 거치기 전에 먼저 나오는 매몰 얘기는 뒤가 있었다. 이미 운과 장스트리와의 일을 아는 이상, 그 뒤가 짐작이 갔다. 
레 레의 머리는 빠르게 앞으로 달려갔다. 앞으로의 청사진을 그려봐야 했다. 청문회를 열게 된다면 어떤 수순을 밟아야 하는가. 의제는 몇 개로 나누어서 논의해야 할 것인가. 본격적으로 의제들이 상정된다면,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조사관과 실무진과 연구자들은 누구인가. 
먼 저 답을 만들어 두어야 하는 문제들도 있었다. 먼저 신의 위험에 대해서는 어떻게 변호할 것인지가 과제였다. 운이 언급한 ‘권능’은 없다. 의도도, 의지도, 운과 신들에게는 없다. 그러나 이런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어려운 일이다. 하긴, 이 앎을, 이 앎에서 오는 의문을 자기 역시 운에게 질문하고 싶지 않은가. 더해서 연구자 운의 성실성이 문제가 안 되지는 않을 것이다. 머리가 서서히 열을 받고 있었다. 
운 을 눈으로 찾았더니 운은 어느새 일어나 있었다. 걷어차서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신의 머리들을 주워 올리고 있었다. 운의 긴 소매가 운의 몸짓에 따라 바람을 탄 것처럼 하늘거렸다. 주변에 서 있는 신들의 눈은 그런 운을 비추고 서로서로를 비춘다. 여전히 그들은 동요가 없었고 여전히 그들은 제자리에 있다.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다. 소외감과 애틋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좋아 보이기도 했고 답답해 보이기도 했다. 설명을 더 요구하고 싶기도 했고 그냥 그대로 두고 보고 싶은 마음도 강했다. 
분명한 하나가 있기는 하다. 순수한 미소를 레레는 보았다. 이 경이로운 향기만큼 순수한 미소라는 것은 세상에 드물다. 괴상한 심연이긴 해도 평화롭게 보이는 이 광경 역시 더 보고 싶었다. 이 광경을 매몰시킬 수는 없었다. 
레레는 이트를 수습한 다음 운에게 갔다. 
“운. 어, 음. 나는 먼저 행정 처리부터 좀 해봐야 될 것 같아요. 기초 조사 안 끝난 겁니다? 잊으시면 안 돼요. 음. 그리고 준비 더 해놓고 있어 봐요. 질문지 이트로 보낼게요. 심화조사에는 나도 들어갈 것 같은데, 그전에 내가 먼저 알아봐야 할 게 있어요.”
“어쩐지 고생할 것 같은데요. 레레? 부탁해요. 그리고 고맙고.”
자신에게 다가오며 운은 마음 편하게 웃어 보였다. 
자 신이 오자 다가와서 반갑게 포옹을 했던 운을 기억해 내고 레레는 당황해서 고개만 까딱인 채 돌아 나왔다. 조금 더 운과 얘기하고 싶었다. 그런데도 도망치듯 피한다.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레레는 자신이 질문을 계속 한다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까 우려스러웠다. 우선은 현실적인 일을 처리하는 게 수였다. 
일 상은 언제나 어김없다. 레레는 어김없음을 존중한다. 신의 이상증상이 있든 없든, 권능이 발현되든 말든, 그것을 규명해야 하는 일은 일상의 질서를 따라야 한다. 매몰을 시킨다 하더라도 정당한 절차가 있어야 하며 그 과정은 모두가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어떤 기이한 일이 있더라도 사람은 숨을 쉬고 밥을 먹고 내일을 준비하며 여기에는 엄연한 무게가 있다. 
문 을 열고 나오면서야 뒤를 돌아다봤다. 돌아본 광경은 가슴 한 구석이 아리긴 했지만 마음에 들었다. 운은 그 사이 다시 자신의 신 앞에 앉아 숨을 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레레가 연구실을 나서서 연구동 일층 현관에 내려갈 때까지 망막 안쪽에 눌어붙어 있었다. 
운은 어렸을 때 뭐라고도 했던가. 
‘이 세상, 나라는 존재도 마찬가지지만. 얼마만큼 견뎌보고 겪어볼 수 있는 걸까요? 그리고 그걸로 충분한 걸까요?’
운은 수많은 세상과 자신을 어떻게 견디고 겪었는가. 
레레는 운에 대한 자신의 심정이 여전히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동경하면서도 연민하고 우러르면서도 의심한다. 특이한 경험 하나로 너무 쉽게 회의라는 믿음직한 무기 하나를 내려놓은 것이 아닌가 걱정을 한다.
그러나 연구동 구역 밖으로 걸음을 옮기려 할 때, 레레는 그 모든 상념들을 끊어내는 충격에, 
“오, 제발!” 하며 부르짖고 말았다. 
향 기가 사라졌다. 한 순간에 마치 번개처럼 사라졌다. 여태 숨을 쉬던 공기가 갑자기 무거운 물이 된 것 같았다. 갑자기 쓰고 무거운 물이 코로, 폐로 들어차는 것 같아 몇 숨은 허둥대야 했다. 가까스로 예전의 호흡을 확인하자마자 레레는 뒤돌아서서 다시 연구동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숨이 금세 턱턱 막혔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는 게 억울했다. 더 알았어야 했는데. 더, 더 알았어야 했는데.
무엇을 보기 위해 신들은 모두가 눈을 떴나. 
답이 있다. 답이 있었다.
신들이 모두 눈을 떴다. 마지막 신의 개안을 위해. 
긴 복도와 층층의 통로를 지나 운의 연구실에 이르기까지 한탄과 애원의 심사가 번갈아 튀어나갔다. 경험은, 앎은 한 번으로 족하다. 하지만 또 한 번의 앎이 주어질 테고 레레는 그것을 거부할 수 없어 끌려가는 중이었다. 황홀하기도 하고 고역스럽기도 했다. 
레레는 문을 열어젖혔다. 
기쁘다고 말했던 운이 보고 싶었다, 이제 운이 아니겠지만. 
순수한 미소를 보여준 운을 보고 싶었다, 이제는 운이 아니겠지만.
문을 열어젖힌 곳은 모든 신들이 눈을 뜨고 있는 곳이었다. 
신들의 눈은 이미 눈이 아니라 하얗게 빛나는 발광체였다. 
오직 마지막 신 하나만이 천천히 자신의 눈을 뜨고 있었다. 
운은 마지막 신에 맞춰 함께 눈을 떴고, 둘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순간 나머지 신들의 눈은 빛나다 못해 폭발했고, 커다란 향기가 레레를 감쌌으며, 물처럼 투명하게 모든 신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신과 운 역시 이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7. 
운은 마지막 말은 고맙다는 말이었다, 앞에 부탁한다는 말이 붙은. 
레레는 그 말을 자주 상기했다. 운은 무엇을 부탁했고 무엇을 고마워한 것일까. 자신은 그게 안 되는 것 같았다. 원망의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끝에도 운은 제멋대로였으니까. 
운이 스스로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성공을 거둔 덕분에 후폭풍은 레레의 몫이 되었다. 레레는 자신의 몫을 감당하는 데에는 불만이 없었다. 단 그 몫의 내용이 문제였다. 
사건 목격자 겸 당사자지만 사건에 휘말린 이로서, 당 사건에 관한 한 심신 간섭 의심군으로 분류되는 건 좋은 일이 아니었다. 레레는 자신의 진술을 증명할 수 없었고 사건 조사에 개입할 수도 없었다. 
레 레가 배제된 채 꾸려진 사건 조사팀은 서사적으로도 말이 되고 수치적으로도 말이 되고 사실적으로도 말이 되며, 이 모든 것이 정합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긴 했다. 그리고 비테라틱과 사람들은 여기에서 나온 스캔들을 한껏 떠들썩하게 즐겼다. 
운은 고도로 정교하게 설계된 자살에 성공한 셈이었다. 그 자살은 운 자신의 연구동뿐만 아니라 비테라틱 전체의 이트 시스템을 짧은 시간이나마 교란시키는 데에도 성공했다. 운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사 람들은 운의 그런 결벽증에 대해 수군댔다. 자기 시체뿐만 아니라 자신의 대표작인 신의 재고품들을 죄다 파손시켜버린 사실은 자신의 연구 결함에 대해 인정하지 못하는 연구자의 아집으로 도마에 올랐다. 이트 시스템을 날려버린 능력만큼은 인정할만하다는 빈정거림도 있었다. 변성 연구를 한답시고 결국에는 제 속셈을 차려 치부를 한 속물이었다고 비하하는 이들은 운이 과대평가됐었다고 성토하는 이들과 장단을 맞췄다. 그 가운데, 며칠 간 천국의 공기를 제공해줬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운을 비난할 수는 없다며 사라져버린 향기를 애달파하는 이들의 소리도 제법 높았다. 물론 이 모든 것들보다, 모든 이들을 위험에 처하게 한 불성실하고 오만한 미친 연구자라는 분노에 운은 잘근잘근 씹혔다. 그 덩어리진 소음 안에서 레레가 중간에 위험 증후를 포착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어 레레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레레 스스로는 조사관들의 시나리오에서 길을 잃어버릴까 두려웠다.
정 말로 모든 것은 운의 거대한 사기극이 아니었을까. 그 아름다웠던 향기들은 단순한 약물 효과였고 경험했던 모든 일은 약에 취해 본 환각이지 않을까. 운이 사라진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레레가 시험 삼아 만들어 본 시나리오에서도 시체가 남지 않는 일 따위, 문제거리조차 되지 않는 문제였다. 
신 들과 관련된 사항은 더 쉬웠다. 운은 신의 제작자고 제작자가 자신의 발명품들을 가지고 실험을 하다가 오류를 내는 일은 많다. 그 결과로 꽤 많은 양의 재고품들이 파손될 수도 있다. 어차피 눈을 빼버린 신들은 가루가 돼서 사라지는 물건이었다. 그 가루 비슷한 것들만 남아 있으면 무슨 문제란 말인가. 이트 시스템의 정지 역시 크게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호사가들은 능력자라며 떠들어대지만 운뿐만 아니라 비테라틱의 연구자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다들,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한 일이었다. 
레레는 내외로 이 모든 복잡한 시끄러움을 감당해야 했다. 그 속에서 레레는 속에 둔, 단단히 감싼 은밀함으로 자신을 지탱해야 했다. 
종 종, 사실, 혹은 진실한 이야기는 추문의 껍질을 쓰면서, 추문이 되면서 보호되곤 한다. 있는 그대로가 드러났을 때, 있는 그대로의 것은 지나치게 강렬해서 마치 폭탄처럼 터지고 사라지기도 하니까 말이다. 레레는 자신의 이야기가 그대로 노출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모의 사고 실험을 돌리기도 했다. 그 결과를 곰곰이 곱씹으며 레레는 ‘향을 싼 종이’라는, 어딘가에서 본 글귀를 마음속에 간직해 두었던 것이다. 향의 향기는 기색 없이도 종이 너머로 퍼지리라. 
운 에 대한 쑥덕거림은 장스트리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잠잠해졌다. 장스트리가 깨어날 가능성이 없다는 판정이 내려지자 사람들은 새로운 회장과 회사의 변화로 눈을 돌렸다. 장스트리가 깨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즐기기에는 역시나 좋은 화젯거리였다. 비테라틱의 권력이 재편성되는 건 각자에게 실질적인 문제이기도 했고. 세상이 흘러가는 건 화려했지만 한 편으로는 덧없었다. 
레 레는 운의 일이 일단락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휴가를 내었다. 지탱은 해냈지만 박탈감, 무력감이 닥치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밀려들어오는 회한은 우울증에 육박했다. 재충전이 필요했다. 자기에게 남아 있는 것은 운의 미소 정도 밖에 없었으니 우선은 원기를 끌어올려야 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도 생각해 봐야 했다.
레 레는 집 안에 꽃나무 화분을 잔뜩 들여놓았고 달콤한 음식을 찾아다녔으며, 어렸을 적 같이 수업을 들었던 친구들과 만나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구상은 별로 진전이 없었지만 휴식은 그럭저럭 되는 것 같았다. 
택배가 도착한 날은 이런 휴가가 며칠 남지 않은 날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퍼 퓸조사팀이 빠뜨린 건 아니고요. 본사 법무팀에서 맡아가지고 있던 게 있었나 봐요. 운 박사님 유품이에요. 유언장에 개인 재산을 어찌 어찌 분배하라고 지시한 사항이 있었나 봐요. 기준이 뭔지는 도대체 모르겠어요. 저한테도 오긴 왔는데 무슨 책들이 한 가득이었어요. 아니, 미호실장님한테는 비테라틱 주식이 갔는데 나한테는 이게 뭐냐고요. 어떻게 끝에 끝까지 이렇게 엉뚱하신지 그래? 어쨌든 실장님한테는 그게 간 거구요. 음, 안의 내용물 가지고 조사팀이 뭐라 뭐라 하긴 했는데 제가 처리했어요. 사실 법리적으로 문제없는 거거든요. 다 지들 맘대로 인줄 알아. 걔네하고 알력 싸움에서 지면 안 되잖아요? 실장님이 안 계신 덕에 제가 이걸 다 했다니까요? 아니, 제가 무슨 실장님한테 개기는 건 아니고요. 칭찬해 달라고 하는 말이죠, 헤헤헤. 네. 그건 처리 됐어요. 음. 네. 맞아요. 이걸로 운박사님 건은 완전 종료! 그러니까 며칠 더 푹 쉬시고 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실장님, 새회장님 말이에요.”
이트 너머에서 재마는 새 회장에 대해서 한참을 떠들어댔다. 레레는 적당히 재마의 말을 들었다. 재마는 평소에도 정보와 소식을 듣기 좋은 목소리로 전해주었다. 그 목소리는 집안에 들어와 있는 배달꾸러미 위에서 청량한 종소리처럼 울렸다. 
종소리가 그치자 가슴이 대신 떨려왔다. 커다란 흰색 케이스에 담긴 운의 전별이 무엇인지는 안 봐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레레는 포장을 풀고 안에 있는 신을 안아 일으켜 소파에 앉히고서는 한참을 쳐다보았다. 
신에게서는 익숙한 향기가 미약하나마 나고 있었다. 
신은 얼마쯤, 운을 닮아 있는 것 같았다. 
작게, 웃음이 났다. 
“안녕?”
인사를 건네고 레레는 혼자 잠시 무안해 했지만 다음 행동에 망설임은 없었다. 
신의 감은 눈 위에 레레는 손을 얹었다. 
숨소리가 조용히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 f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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