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우수작 아르바이트

2014.05.31 04:1005.31

여자아이들이 사춘기에 들어서는 것만큼 머리 복잡해지는 상황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 이런 상황은 말이야 창작하는 사람에겐 쓸 만한 창고로 작용해. 일찍이 여기에 대해 누가 조사해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자아이들은 분명히 자기 아빠가 짐승으로 보이는 때가 와. 아주 넌더리가 나도록 말이야. 내가 확신해. 그 전조증상은 생각지도 못했던 한가로운 어떤 날 갑자기 아빠 어깨가 좁아 보이면서 시작하는 거야. 그 단계를 만나면서 문제파악이 채 여물기도 전에 아빠 허물을 찾게 되지. 아빠가 TV속 예쁜 여자한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본다든가 하다가는 이내 밥맛이 뚝 떨어져버려. 하지만 뭐 그게 대다수 걱정거리가 되진 않아. 대부분이 그 상태를 지속하지 않고 철이 들어버리니까의식하기도 전에 말이지.”

어젯밤 쉬지도 않고 떠들어대던 친구의 수다가 묵직한 꿈속까지 따라와 괴롭혔다. 자면서 저 말이 몇 번을 돌았을까? 어젯밤 친구가 정말로 저런 말을 했었던가? 온 몸이 생명을 새로 발급받은 듯 익숙함과는 거리가 멀게 아주 서서히 작동했다. 진통제를 삼켰을 때 예상치 못하게 약기운이 빨리 도는 것처럼 의식이 모아지며 현실감각을 찾았다. 집을 넓게 쓰는 딸의 기척이 느껴졌다. 지난밤의 기억들이 흐트러진 퍼즐조각처럼 짜 맞추기 어려웠다.

늦었다고 여겨졌던 어젯밤 내 귀가시간의 불과 몇 분 전 딸아이는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와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는 중이었다. 한 손에 들린 핸드폰으로 친구와 통화를 하며 문 밖으로 얼굴만 내밀어 눈인사만 하고는 다람쥐처럼 쏙 들어갔다. 나는 어깨와 옷단 여기저기를 들춰 배어있는 술 냄새를 확인했다. 소주부터 막걸리까지 그 밤에 나를 둘러싼 것이 사람들인지 술이었는지 가늠하는 것이 무의미했다. 술 냄새가 서로 뒤섞였는지 제3의 악취로 발효되어 포근한 실내 공기를 떠돌았다. 그 중에 하나 불협화음처럼 섞이지 않는 냄새도 떠다녔지만 알아낼 길은 없었다. 아마도 취한 중에 누군가가 권해온 색다른 술을 마신 모양이다.

술 취한 아버지의 모습은 나와 딸아이 모두에게 익숙한 풍경이 아니었다. 평소와 분명히 다른 모습에 대해 딸아이는 적으나마 할 말이 있을 것으로 여겼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방으로 들어가 물먹은 스펀지 같은 몸을 침대에 걸터앉고 얼마 뒤 화장실로 들어가는 딸아이의 모습이 문틈으로 스쳤다.

피부가 정말로 매끈매끈해졌어. 완전 대~. 그렇다니깐.”

딸아이가 뭔가 중대한 일로 정신이 팔려있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는 기운을 짜내 방문을 닫았다. 이불이 무거운 몸을 늪처럼 삼키려 들었다. 혼미해지는 중에 딸아이의 말소리가 화장실을 울리고 천장을 탄 다음 내 귀에 부스러져 내려왔다.

내일부터 너도 가자. 정말 쉽고 돈도 벌지, 예뻐지지.”

그 뒤로 벅적대는 공간에서 떠들던 친구의 말소리가 반복재생으로 머릿속을 맴돌았다.

TV속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온 거실에 퍼졌다. TV하단부분을 지나는 어마르관련 자막뉴스 하나에 멈칫 시선을 빼앗겼으나 슥 지나가는 자막이 더 빨랐다. 리모콘은 또 어디로 간 건가? 항시 부산한 딸아이는 리모콘을 두는 곳이 매번 다르다. 새벽 늦게까지 거실 바닥에 엎드려 뒹굴 거리다가 아무데나 풀썩 던지는 습관을 아주 어릴 때부터 고치지 못했다. 그렇다고 TV를 즐겨보는 편도 아니었다. 아이돌가수들의 노래가 밤낮으로 쏟아져 나오는 채널을 틀어놓고는 늦게까지 핸드폰으로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런 잡스러운 부분들을 걷어내고 나면 제법 철이 든 모습을 보일 때가 있으므로 나는 아이를 나무라는 대신 차라리 내 방에서 헤드폰을 쓰고 잠이 오기 전까지 평화로운 음악을 듣는 습관을 만들어버렸다. 물론 어젯밤은 예외였지만내가 여느 때의 아침처럼 온전하다는 마음을 약간 담아서 화장실 문을 두드리고 딸을 불렀다. 물소리가 뚝 끊겼다.

지은아~ 지은아~ 리모콘!”

나 머리감아요! ! 소파 틈에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소파 구석 틈에 말뚝처럼 박혀있는 리모콘을 뽑았다. 그래도 아빠를 위해 뉴스채널로 돌려놓고 화장실을 갔으니.

소리를 줄이려 할 때 조금 전 놓쳤던 자막뉴스의 머리꼭지를 보았다.

‘3인조 어마르족 청년들 빈집털이 기승 혼자 사는 여성 성폭행 시도

새로울 것도 없지만 어마르관련 소식을 언제쯤 안 들을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오긴 할까.

수 만 마리 벌들을 거실에 풀어놓은 것 같은 소음을 제거하자 전화가 울려댔다. 난 리모콘을 방금 뽑았던 곳에 다시 박아두고 내 방으로 걸어갔다.

아이구~ 부장님, 백수가 되신 우리 부장님~”

이과장이다.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습관적으로 벽시계를 보았다. 일곱 시 반. 평상시 같으면 사무실에서 신문 펼쳐보며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을 시간이라 내가 궁금할 것이다. 동료직원 험담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 이과장은 역시나 자잘한 사무실 내 대립을 중재해줄 내가 없으니 답답해 미치겠다고 칭얼대는 어린아이처럼 떠들어댔다.

이런 멍충이이젠 이과장 네가 해야 돼. 중립을 지키라고. 결국 그게 최선이야 오케이?”

이따 한가하신 때 들르십쇼~ 서랍에서 만년필 나왔습니다. 군인이 총을 놓고 다니셔~”

딸아이가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늦겠다고 총총대면서 거울 옆 드라이어를 집어 들고서는 방에서 전화를 받고 있는 나와 조용해진 거실을 건성으로 살폈다.

시음용 샘플도 사무실에 그득하니 몇 병 챙겨 가시고요. 짜식들잘 보이겠다고 아주 발악들을 해요 그냥

딸아이는 직장인들만이 발휘할 수 있는 시간 쪼개기 능력이 자신에게서 피어오름을 실감하는지 출근 전 집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절차를 빠르게 마치고 후다닥 현관문을 나섰다. 방학기간동안 집에서 내내 퍼져 지내거나 밖으로 놀러만 다닐 줄 알았는데 친구들끼리 아르바이트를 다닌다니.

딸아이의 성장과정 중 처음 겪는 일인 만큼 우려해야 할 사항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순 없었다. 안전문제야 뭐 친구 아이들끼리 낮 동안 떼로 몰려다닐 테고, 아이의 교우관계가 상당부분 원만한 편이므로 걱정스러운 내색을 보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지만 안심하기 곤란한 것이 하나 남아있다. 아이들을 대거 아르바이트로 채용한 기업은 바로 내가 17년간 몸담던 회사의 브랜드가치를 넘보는 얄팍한 어마르들의 대표적인 기업이었으니

딸아이가 아직 세상에 나오기도 전부터 어마르의 명성은 자자했다. 당시 대부분 사회적 여론은 이 반갑지 않은 시기가 장기적인 고민거리로 이어갈 것이라는 예상을 하지 못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유전자가 절반이 섞이건 그 반에서 반이 섞이건 간에 얼마가 되었던지 모조리 어마르로 간주하는 관행을 보이는 특성을 지녔다. 아주 미약하게나마 혈통을 잇는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기며, 스며들기 생존법을 체득해 왔다는 것은 이미 드러난 사실이었다. 그 바꾸기 힘든 근본적인 속성 탓에 전쟁기간이 쓸데없이 길지 않았던가. 전 지구적 차원에서 그들에게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활동을 허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정치인들은 현실의 이면을 봐야했다. 대기업의 거미줄 같은 협력사에 협조하는 값싼 노동력은 정말 솔깃한 제안이었으니까.

예전 같으면 분주한 아침을 함께 치른 뒤, 차에 딸아이를 태우고 학교까지 한 정거장 남은 구간에서 내려주었다. 친구들이 느낄 위화감이라든가 교육상이라든가 뭐 그런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요 며칠은 아침이면서도 시간 남아도는 나를 남겨두고 딸아이는 뒷모습을 보였다. 언제 저렇게 커버렸을까.

더 이상 바쁜 아침은 나와는 상관이 없음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지 못한 상황에서 입고나갈 옷은 어떤 것이 좋을까 잠시 고민하느라 거실 한가운데에서 몇 초를 허비했다. 무난한 패션무난한 패션재킷은 걸쳤지만 넥타이를 매지 않은 내 모습이 거울 앞에 마주보았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채 윙윙대는 딸아이의 핸드폰을 보았다. 아뿔싸. 녀석은 대체

보도기자를 연결해서 사건현장 소식을 전하는 뉴스가 화면에 가득한 채 흔들렸다. 현장감을 살리려는 영화장면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잠시 들 때 쯤 딸아이의 핸드폰이 또다시 울리며 테이블을 떨게 했다.

아빠, 응 친구 꺼나가실 때 TV는 전선 뽑아야 돼요. 리모콘 내가 갖고 나왔어.”

 

나의 또 다른 이름으로 작용했던 회사 직책 하나를 버렸을 뿐인데 부서 직원들은 벽 하나가 사라진 다른 얼굴로 나를 맞아주었다. 이정도 자연스러운 대면은 업무관련 아이디어를 얻는데 분명히 상승효과로 이어질 것이다. 이런 줄 알았으면 오래전에 도입할 것을.

어서 오십시오 최시인선생님.”

뭐가 이리 길어?”

그럼 어떻게 불러드리는 게 편하십니까?”

몰라, 알아서들 부르지만 시인선생님 이런 건 하지마라. 낯간지럽게 무슨

이과장이 미리 챙겨두었다던 펜을 집어 재킷에 꼽자 보고 있던 이과장이 검지를 가로젓더니 얼른 제자리로 돌아가 서류함에 있던 시집을 꺼내들고는 뽀르르 다가와 표지를 펼쳐 보였다.

“1번의 영광을 저에게.”

부서 직원들이 너나할 것 없이 시집을 꺼내서 이과장 뒤로 줄을 섰다. 만년필만이 갖는 품위 있는 무게를 느끼며 내미는 책표지마다에 조심스럽게 사인을 해주었다. 그리고 곧 누군가 발령받아 서먹하게 나타나겠지만 며칠 전까지 내 자리였던 책상 앞에 모여들어 내 시집을 상장이라도 된 듯이 들고는 기념사진을 남겼다. 기분이야 썩 괜찮았지만 익숙하진 않았다.

이과장의 지시로 남자직원들이 술 담긴 박스를 양손에 들고 내 차로 향할 때 여직원 하나가 종이 소주잔에 인색하게 담겨진 술을 쟁반에 여러 개 담아서 가운데 테이블에 두었다.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우릴 본다면 단체로 시럽제 감기약을 나눠 마시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전하셔야 되니까 과음은 금물입니다.”

, 최 시인님의 인생승리를 위하여!”

우리 부장님의 건강을 위하여!”

모두의 건강과 총무부의 무궁한 발전과 그리고 새로운 꼰대를 위하여!”

코끝을 간질이는 휘발하는 성질을 제외한다면 역시나 감기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살짝 낯설고도 아주 독한 향이 오래 돌았다. 그리고 텁텁함 뒤에 기분 요상해지는 청량감이 밀려온다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그 느낌은 오묘하게 입속을 맴돌다가 끈덕지게 남아있으려는 이질적인 느낌을 남겼다. 뭐랄까 생각이라 할까, 지능이라 해야 할까. 내 입맛이 기억하는 술에 대한 상식을 여러 발짝 비켜가게 만들었다. 맥주보다는 아주 맑지만 소주에 댄다면 여러 단계 짙은 빛깔을 내는 그 술은 국내를 중심으로 시작해서 머잖아 전 세계 부유층 시장을 상대로 대대적인 마케팅 전략을 갖고 있다고 한다. 실험성이 높다 못해 겁 없이 덤비는 자들이니 당연히 그러고도 남을 것이라 생각했다.

부장님, 낙원으로 가시지요.”

~냥 음주운전 충동이 일어난다. 올라가자. 이젠 이 신선놀음도 끝이로다.”

 

내뿜는 연기가 바람을 타고 내 쪽으로 오자 이과장이 재빠르게 자리를 옮겼다. 바람이 눈에 보인다면 갈지자를 그리며 멋대로 달려드는 모습일 것이다. 술은 내가 마시고 바람이 취하다니. 빌딩숲 높은 곳에서 도심을 내려다보며 여러 올 추억을 눈에 담았다. 나와 함께 보낸 세월을 굳건히 버텨준 빌딩과 그 가장 높은 곳에서 만났던 지난날의 많은 마찰과 자잘한 암투 그리고 각자의 성장 등 몰려드는 추억들이 헤아릴 수 없이 빠르게 스쳐갔다.

우리부장님 가장 아쉬운 건 뭡니까?”

글쎄 뭘까?”

제가 아는 우리 부장님은 아주 보수적인 분이에요. 뭐 우리끼리 얘기도 많이 하셨지만 어마르가 걱정되긴 하죠?”

쉽지 않을 거야. 아무리 막는 시늉 해봐야, 어쨌든 국가정책을 등에 업고 덤벼드는 것을 언제까지나 방치할 순 없는 노릇이잖아. 그래도 엮이는 건 정말 마음에 안 든다.”

저기 보십시오. 아니 저쪽 네 거기.”

최근까지도 멋들어진 등산복을 입고 산을 오르는 외국인 남녀모델이 그려져 도심의 많은 눈길을 사로잡던 네모난 옥상 광고판이 해체되어 골조만 간신히 남았다. 항상 있던 것이 어느 날 바람처럼 사라진다면 그제야 사람들은 잃고 싶지 않은 마음과 새로움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이과장도 들은 소문을 옮기는 것일 뿐이라 했다. 바로 저 광고판 해체작업이 끝나고 나면 조금 전 우리가 마셨던 술병 조형물이 세워져 빙빙 돌아갈 것이라고.

하긴 뭐 딴 것도 죄다 그렇지만 쟤들은 뭘 해도 엽기예요. 술 이름 혹시 보셨어요? ‘소녀예요 글쎄술병 한 가운데에 한글로 소녀가 딱! 뭐 광고도 섹슈얼리즘으로 밀어붙인다고 한다는데요. 저 앞 교차로에 접촉사고 맨날 나는 건 아닌지히힛

어마르를 옹호할 이유 같은 건 없다만, 소녀들이 만들어서 소녀 아니겠어? 우리 딸내미도 저기 알바중이니까.”

만약에 우리 두 사람이 만화 속 주인공이었다면 이과장의 이마에 지금 타격표시 하나쯤 그려져 있을 것이었다. 이과장은 자신의 발언 중에 문제의 소지가 없었는지 빠르게 되짚지만 특이사항이 없다는 것에 안도하는 눈치였다.

아니 부장님, 다른 알바자리가 없답니까? 왜 하필

뭐 별 일 있을까.”

라고 말은 했지만 이과장이 염려하는 바엔 무리가 없었다. 사회여론이 보는 어마르에 대한 시각은 그저 안심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라는 짙은 편견이 흐르고 있으므로, 굳이 필요하지 않다면 접촉을 꺼리는 선에 머물러 왔으나 오늘 아침 뉴스를 본 나를 포함한 대다수 시민들은 이제부터 대단히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들을 굳혔을 것이다. 어차피 잠시 후에 알바중인 딸아이를 만나 핸드폰과 리모콘을 교환해야 하지만 기왕지사 들른 김에 아이들의 담당자나 근무환경을 살펴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대박 나십쇼 최 시인님!”

대박나려면 사업을 해야지 왜 시를 써?”

정말 운전해도 괜찮은지 살짝 염려스러운 선에서 차를 움직였다. 주차장의 직각으로 난 출구를 빠져나갈 때 뒷좌석에 놓였던 박스들이 한데 쓸려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중심가를 벗어나면서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주유소가 각자의 색깔로 줄지어 나타났고 빌딩숲은 빠르게 사라져갔다. 건립한지 수십 년을 버텨온 추레한 건물들이 대로를 사이에 두고 휙휙 지나쳐갔다. 언제나 그렇듯이 초행길은 목적지 주변에 다 온 다음부터 헤매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최선생, 지금이 몇 년 도~?”

미안하지만 지금 그것보다 시급한 일이 있어.”

프로 술꾼도 아니면서 뭣 때문에 그렇게 버텼어?”

사실 지금도 알딸딸해.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어디 좀 왔어.”

지도에도 나올지 의심스러운 샛길을 따라가다 대로와 합류하고 곧바로 다시 빠져나와 원점으로 돌며 술과 시인에 관해 생각했다. 전혀 다르게 불리고 다른 이름을 갖지만 밀접한 것. 똑같은 원재료로 만들지만 패스트푸드와 보양식으로 불리는 닭과 같은 것 말이다. 술은 시인을 지탱하는 연료인가? 이에 대해 내가 발견한 공통분모는 몽롱이었다. 하나는 몽롱의 세계로 인도하는 에너지로 작용하고 하나는 몽롱의 세계에 스스로 들어가야 한다. 시를 이해하는 저변이 얕은 주제에 무슨하긴 뭐 술은 이해하나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내 머릿속은 지금 생각을 여러 페이지로 나누어 고민과 걱정을 이어갔다.

퇴사하기 전부터 협회 홈페이지에서 간단히 메시지만 주고받다가 가까워진 동료시인은, 시끌벅적한 식당 모임에서 동갑내기 친구를 만났다고 혼자 들떠서는 술잔을 내밀었다. 건너 테이블에서 지나치게 수줍어하던 체구가 작은 여인에게도 다가가 우리 셋이 동갑내기다. 서로 인사 하고 잘 지내라고 밀어붙였다. 작은 여인과 나는 몸을 반만 돌려 슬쩍 고개인사만 했다. 그 뒤로도 흘러간 몇 개월 동안 모인 자리에서 우린 그런 식으로만 인사했고 대화다운 대화는 없었다. 세대를 뛰어넘은 시인집단은 그렇게 모이고 그렇게 마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점차 모임에 대한 회의가 찾아왔다. 비록 설익은 철학에 비닐 같은 옷을 입힌 꼴이었지만, 하나만 결정해야 할 때라는 마음속 울림에 따라 술이 아닌 고독을 벗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기로 말이다. 하지만 그 생각이 견고하지 못하다는 생각 또한 남았다. 훗날의 작은 변수로 찾아올 상황대처를 염려하여 어느 정도 번복의 가능성은 열어두어야 하지 않을까. 주류집단의 강점을 무시할 수 없는 때가 언제고 고개 쳐들어 다가오면 저항 없이 백기를 드는 것 말이다.

눈을 뜨고서도 발견하지 못한 과속방지턱을 밟고 지나는 순간 뒷좌석의 박스들이 지뢰라도 밟은 듯 한차례 들썩였다. 여러 박스 중 하나에서 들려온, 마음에 들지 않는 파열음을 내 귀는 놓치지 않았다. 비상등을 켜고서 도로 가장자리 적당한 곳을 찾았다. 낡은 컨테이너와 타이어가 멋대로 쌓인 너저분한 카센터의 안 보이는 곳에서 한 남자가 비죽 얼굴을 내밀었다. 나는 당신의 고객이 아니라는 의미로 조금 더 차를 몰아 어정쩡한 곳에서 멈췄다.

처음 넣었을 때와는 달리 흐트러져있는 박스들을 하나하나 열어보았다. 뭐랄까 일반적인 술병세트의 박스구성과는 많이 달랐다. 병문안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들고 갈만한 알로에세트라던가 당근주스 같은 한 손안에 들어오는 유리병들이 지네모양으로 고정된 틀 사이마다 박혀있었다. 전체 다섯 박스 중에 가장 아래에 깔려있던 박스모서리가 약간 젖어있는 것이 보였다. 마치 폭탄 다루듯이 그것을 꺼내어 땅바닥에 놓고 열어보았다. 촘촘히 박힌 술병 열 개중에 두 개가 부딪혀 하나만 깨졌다.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환하게 웃고 있는 긴 머리 아가씨의 허리부분에 금이 쩍 갈라져 있었다.

소녀라니

이미 새어나와 흘러버린 술 냄새가 피어올랐다. 손가락 끝으로 깨진 부분을 튕겨보니 깨진 유리조각 하나가 쉽사리 떨어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그것을 받쳐 들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바로 앞 꽁꽁 묶인 쓰레기봉투 여러 개가 던져진 전봇대 아래에 술병을 얌전히 놓았다.

온전한 소녀 마흔 아홉 개의 용도에 대한 답은 간단히 나왔다. 딸아이를 만난 후 곧바로 아지트로 가면 틀림없이 몇몇이 앉아 대낮부터 술 마실 구실을 찾고 있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소녀들을 내려두고서 바로 뜨는 것이다. ‘소녀들을 벗 하시오. 나는 소녀들이 시집갈 때까지 나타나지 아니하리니라고 한 마디 남겨두면 좋을 것 같았다.

내비게이션이 알려주기 몇 초 전에 목적지를 간파할 수 있었다. 높다랗게 솟은 저장탑 두 개가 나란히 허공을 받쳐 버티었고, 묶어 고정시킨 꼬질꼬질한 현수막은 펄럭대고 있었다. 현수막에서 색 바랜 어마르의 상표로고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출입문에서 하나 둘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자 나는 차를 멈추고 잠시 지켜보기로 했다. 먼발치서 보니 죄다 비슷해 보이는 아이들이 어느 기점부터 몇 곱절로 불어났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소란스럽게 수다를 이어갔고 그 아이들을 싣기 위해 공장 뒤편에서 승합차 여러 대가 움직였다. 일에 대해 할 말들이 많은지 아이들은 저마다 팔다리를 허옇게 걷어 올리며 서로에게 보여주며 떠들어댔다. 그리고 모습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A조 학생여러분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따 밤 열시까지 오는 거 다들 아시죠? 친구들 많이 데리고 오세요.”

딸아이가 B조라는 것을 자동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럼 저 아이들은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일을 한 것이고딸아이는 여덟시부터 여덟시까지 열 두 시간씩업무시간이 아이들에게 과중한 편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적어도 내가 볼 땐 아이들 중 그 누구도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매우 활발히 움직여 승합차에 오르며 여전히 장난질하고 생기들이 돌았다.

승합차들이 내 옆을 지나 멀어지고 잠시 후 경비실에서 옷이 너저분하고 구부정한 노인 하나가 나오더니 주변 모든 것에 관심 없는 모양으로 터벅터벅 건물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얼른 차에서 내렸다.

거리계산을 잘못 한 탓에 노인을 놓치고 말았다. 그는 이미 건물 뒤편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그가 나온 경비실을 유리창 너머 들여다보았다. 추레하고 정리되지 않은 내부 상황이 보이고 누군가의 콧노래 소리가 들렸다. 기웃거려 기척을 내 보기도 하고 유리를 자동차 열쇠로 두드려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반응은 없었다. 더구나 출입문을 흔들어보았지만 안에서 잠겨있었다. 나는 경비실을 빙 돌아 뒤편에 작은 창 하나가 열린 것을 보고는 그리로 돌아가 까치발을 들어서 내부를 보았다.

노인과 같은 옷을 입었고 나이를 가늠하기는 어려웠지만 그가 어마르인 것은 단 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귀에 이어폰을 꼽은 채 볼펜을 마이크처럼 들고 서서는 눈을 감고 알아듣기 어려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TV에서는 가린 곳이 하나도 없이 몸을 노출한 여자가 목욕하는 장면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내가 술 때문에 얻은 피로는 시간상으로 봤을 때 이미 지난 일임을 상기했다. 난 충분히 온전한 상태인 것이다. 하지만 TV속 벌거벗은 여자는 내 건강상태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목욕하는 여자는 어릴 때부터 보아온 딸아이의 친구가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심장이 요동쳤다. 때마침 어마르가 눈을 떴다. 잠시 얼떨떨하게 서서 창문 밖의 내 모습과 TV를 번갈아 살피던 어마르가 화들짝 정신이 들어 알아들을 수 없는 욕지기를 날리며 출입문을 따려 했다.

스톱!”

어마르 경비를 따돌리기 위해 전력으로 달리다가 노인이 사라졌던 반대쪽 컴컴한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건물을 돌아서자마자 갑자기 바닥이 온통 끈적거려서 마치 끈끈이 위의 쥐가 된 듯 당혹스러웠다. 어마르는 스톱과 어마르어 욕설을 섞으며 달려왔다. 어마르는 내가 모퉁이 바로 뒤에 숨은 것을 모르고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고, 마침 벽에 빼곡하게 늘어선 것이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약수통처럼 생긴 것마다 소녀의 인쇄물이 부착되어 있었다. 나는 그중 하나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가 어마르가 모퉁이를 돌자마자 냅다 던져버렸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묵직한 소리와 함께 어마르 목의 각도가 틀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양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바닥에 누워 기절해버렸다. 나는 주변을 살피며 어마르의 옷을 뒤져 뭔지 모를 열쇠뭉치를 꺼냈다.

망할미개한 놈들

내부로 통하는 문이라면 아무데나 따고 들어갈 심산으로 둘러보는데 노인이 몇 걸음 앞에서 멍청히 서 있었다. 서로 건물의 반대방향을 돌아 만나버린 노인이 내 모습과 바닥에 누운 어마르와 그 옆에 나동그라진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지만 이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유령처럼 나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제야 노인이 술에 절어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공장이라 하면 으레 뭔가 가동되는 소음으로 가득 찰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곳은 지나칠 정도로 조용한 편이었다. 내가 어느 통로로 들어왔는지 여기가 어디쯤인지 파악이 어려웠다. 아무 곳이나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이면 뚫고 들어갔다. 그러다가 제자리를 계속 돌지 몰라 지하로 통하는 약간 작은 문을 찾아내어 몸을 숙이고 들어갔다. 사람들 말소리가 들려왔다.

시켜먹을까?”

한국음식 정말 지겨워요.”

얼씨구 이놈들 봐라? 많이 컸다~ 많이 컸어. 뭐 먹을까 미리 생각해 둬.”

누군가 어마르 직원들을 이끌고 내 머리 위 허술한 철창을 밟으며 지나갔다. 그들은 누구도 예외 없이 지저분해 보이는 작업복 차림이었다. 안에 직원들은 몇 명이나 더 있을까? 누군가 밖에 누워있는 어마르경비를 발견하면 어찌 되는 것일까? 나는 왜 곧바로 경찰서로 가지 않고 이러고 있을까?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 아까 TV로 봤던 딸아이의 친구는 내 착각으로 잘못 본 것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증거증거개만도 못한 어마르놈들.

작은 문을 통해 지하로 내려온 것은 잘못된 생각임을 알아챘다. 여기는 시설직원들이 점검 차 다니는 통로일 것이다.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생각이 미치자마자 누군가가 다급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직감으로 일이 틀어져간다는 것을 알았다.

거기 누구야?”

순간 나는 간이 콩알만 해졌지만 이대로 있다가 꼼짝없이 잡히기보단 행동에 나서는 길을 택해야했다. 한 녀석이고 어마르가 아니었다. 나는 천장을 타는 쥐처럼 왔던 길을 조용히 되돌아 나갔다. 그리고 조금 전 지나왔던 작은 문을 붙들어 그가 머리를 밀고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녀석은 내게 겁을 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스르릉 쇠뭉치 같은 것을 주워드는 소리가 들리고 얼마 되지 않아 그것으로 벽과 난간을 내리치며 다가왔다. 몸을 낮추고 있는 내 얼굴 앞의 난간까지도 그 울림이 제법 큰 파장으로 전해왔다. 그럴수록 심장은 쿵쾅대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서 와라 어서 와.

나는 문이 처음부터 열려있었던 것처럼 속이기 위해 문 뒤로 숨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녀석은 코앞까지 와서는 심히 의심스러운지 문으로 숙여 들어오기를 주저했다. 대신에 한 번 더 문틀을 세게 두들겼다. 쩡 하는 소리가 귀청을 때리고 그것이 거대한 스패너임을 확인했다. 떨리는 손이 진정했으면 좋겠지만 뜻대로 되진 않았다. 마음속으로 타이밍을 맞추며 어서 저 머저리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다가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문을 닫아 내리쳤다. 아까 차 안에서 들었던 술병 깨지는 소리보다 수백 배는 컷을 타격소리에 소름이 쫙 끼쳤다. 숙이고 들어올 때 정수리부분을 때릴 것이라 예상했지만 경계를 늦추지 않으려던 녀석은 피범벅이 된 안면을 움켜쥐고 다시 한 번 들어왔다. 두 번째로 강하게 내리치자 그 충격에 경첩이 떨어져버렸다. 피투성이 얼굴을 감싸고서 욕지기를 내뱉는 녀석을 앉은 채 발로 밀어내고 거의 기다시피 위층으로 올라왔다. 후들거리는 손으로 재킷에 넣어두었던 열쇠뭉치를 꺼내들고는 여태 가본 적이 없다고 확신이 드는 문을 찾아 열려 했지만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문을 따고 들어가자마자 이번엔 어마르 두 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둘은 피가 잔뜩 묻은 채 갑자기 나타난 내 몰골에 놀라서 저들끼리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나는 옆에 놓인 뭔지 모를 온갖 집기를 쓰러뜨리고 던지며 덤벼댔고 그들은 뒷걸음질 쳤다. 평소 폭력을 일삼는 사람일 리가 없는 나였지만 평균 체격이 지구인보다 열세한 어마르를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나는 지금 독을 품은 아빠이기도 했다. 한 녀석의 턱을 발로 차서 쓰러뜨리고 남은 놈의 멱살을 잡았다.

애들 어딨어? 소녀! 소녀들 어디?”

놈을 팽개치고 달렸다. 불과 몇 미터 거리에 셔터가 보였고 셔터 옆의 버튼을 부서져라 세게 눌렀다. 마음은 급하지만 셔터는 그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 느긋하게 한 번 철컹 소리를 내더니 천하태평으로 천천히 말려 올라갔다. 셔터가 끝까지 올라가는 것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몸을 옆으로 굴릴 틈만 보이면 바로 들어가려 했지만 셔터 반대편엔 이미 버티고 있는 여러 다리가 보였다. 차마 그들 사이로 돌진할 순 없었다. 뒤에선 죄다 비슷하게 생겨먹은 어마르 몇 놈과 정신을 차리고 따라온 경비가 합세했다.

 

분별하기 어려운 잔몽의 이미지들이 겹치기를 반복하다가 그것이 한데 묶여 붕 떠오르기도 하고 바닥없는 어둠 속으로 잠수함처럼 가라앉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떠오르다가 곳곳에 균열이 생기면서 흩어져갔다. 숨을 내쉬는 내 호흡을 의식하자 균열들은 읽기 어려운 활자덩어리들처럼 변하며 잠시 뒤부터 두런대는 말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어딘지 모를 작은 사무실이었다. 나는 접는 철재의자에 앉혀 있었고 내 양손은 허리 쪽에서 교차된 채 케이블타이로 고정되어있었다.

감히 어딜 함부로 들어와? 뱀술로 만들어줄까?”

셔터 뒤에 서있던 놈들 중 하나였다. 빠른 판단이 요구되는 순간, 가장 우선적으로 제압해야 한다는 생각에 놈을 때려눕히고 멍청한 어마르들을 돌파하려다가 붙잡힌 것이 기억났다. 그리고 뒤에서 합세한 놈들 중 하나가 소화기를 들고 설치던 모습까지. 얼마동안 짓밟혔을까 온 몸에서 통증이 밀려왔다. 내 발 옆에는 뚜껑을 딴 소녀들이 빈병이 되어 여러 병 놓여있었다. 어쩐지 맞은 것하고는 별도로 몸이 이상하다 했더니. 놈들은 나를 앉히고 강제로 입을 벌려 술을 부어버린 모양이다. 술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다.

아저씨가- 들어와선 안 되는 곳에 들어왔고 시끄럽게 했잖아. 쥐도 새도 모르게 확 죽여 버릴 수도 있는데, 며칠 안에 경찰은 뜰 거고그래서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 중이야.”

내 앞에서 한쪽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춘 채 건들대는 놈이 주먹을 쥐어 내 얼굴을 가볍게 툭툭 쳐댔다.

보내줘라엉겁결에 들어왔고, 뭐 본 것은 없어.”

이놈들 앞에서 딸 얘기를 꺼내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나는 놈이 무서워 시선을 피하는 시늉을 하면서 짧은 순간마다 주변을 살폈다. 분명 사무실임엔 틀림없지만 샘플박스를 수북이 모아두어 창고나 다름없는 활용공간이었다. 파티션으로 가려진 뒤편은 어떻게 되어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유리창에 반사된 모니터 하나는 몇 초마다 장면이 바뀌도록 설정해놓은 CCTV가 틀림없었다.

아저씨 있잖아아까 얌전히 기절해 있을 때 지갑 꺼냈거든? 알고 있지? 우리도 ○○물산 정보공유 사이트 접속 되는 거부장이셨더구만

시간을 지체할수록 불리해질 터이므로 어서 활로를 찾아야 했다. 나는 놈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며 실제로 머리가 심하게 아팠지만 더욱 아픈 시늉을 하며 몸을 바로 세웠다. 아주 근소한 차이로 내려다보이는 가까운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려진 서류더미들 사이로 일회용 라이터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다시 몸을 움츠려 팔다리가 제대로 기능하는지 조심스럽게 점검했다. 언제 행동할까 기회를 넘보는 중에 놈의 핸드폰이 울렸다. 놈이 번호를 보며 받을까 말까 잠시 망설이던 그 틈을 노렸다.

나는 세포 하나하나까지 온 힘을 짜내어 의자에 붙은 채 라이터로 돌진했다. 놈의 얼굴이 찌푸려지며 죽일 듯이 달려들었다. 돌린 몸으로 라이터를 쥐는데 성공하자마자 허리에 발길질이 강하게 들어왔다. 내 몸은 강펀치에 맞은 샌드백처럼 거꾸러지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놈의 씩씩대는 소리가 공포로 다가왔다. 의자는 떨어질 줄을 모르고 그대로 옆으로 누운 채 발길질을 당했다.

놈이 소매를 걷어붙이는 타이밍에 라이터를 쥐지 않은 손으로 짧게 바닥을 더듬었다. 그리고 아직 몇 모금 정도 남겨진 소녀하나의 입구를 찾아 잽싸게 불을 붙였다. 이내 내 손이 익을 만큼 화염이 분출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몸을 달싹여 그것을 박스더미로 굴렸다.

이 새끼가!”

불과 1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를 굴러가는 술병은 내용물을 한줄기 쏟으며 박스로 굴러갔고 곧바로 샘플박스에 불이 옮겨 붙었다. 놈은 처음엔 발로 밟아서 불을 끄려고 했다가 여의치 않자 작업복을 펼쳐들고 불길을 사정없이 내려쳤다. 불은 빠르게 번져 박스더미 한 면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나는 맞은 곳이 아픈 줄도 모르고 일어나 몸을 돌려 불길에 등을 밀어 눌렀다. 동시에 천장의 스프링클러가 방화수를 쏟았다. 물과 불 사이에 섞여버린 나는 극심한 고통이 한계점에 다다를 때 즈음 케이블타이가 끊어졌음을 알았다.

나는 놈이 불을 끄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서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창문너머로 아까 봐두었던 CCTV를 다시금 보았으나 어디로 달려가야 하나 길을 찾기는 곤란했다.

핸드폰도 없었다. 놈들이 지갑을 뒤질 때 건드린 모양이다. 눈앞의 통로를 향해 무작정 달려갔다. 통로 끝 어디로 통하는지도 모를 문 앞에서 잠시 망설여야 했다. 이전 상황이 되풀이된다면 이젠 방법이 없을 것이다.

개 같은 자식들, 다 죽여 버리겠다!”

휘청대는 몸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대걸레를 발견하고는 발로 차 두 동강을 내버렸다. 대걸레는 죽창처럼 날카롭게 부러졌다. 움켜쥔 손에서 심각한 통증이 전해왔다. 문 뒤편에서 얼쩡대면 누구라도 배를 뚫어버리려는 심산으로 문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문이 열렸다.

꺄아악!”

여자아이들이 일제히 질러대는 소리가 듣기 괴로운 공명을 일으켰다. 아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하얀 가운 차림이거나 벗은 몸을 가운으로 가리기에 바빴다. 머리에도 전부 똑같은 하얀 수건을 덮고 있어서 구분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좀비영화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 같은 내 모습은 아이들에게 가히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얘들아! 괜찮아, 놀라지 마! 지은아! 지은아 어디

? 아저씨

딸아이 친구를 만났다. 몰골이 엉망이지만 아이는 다행히 나를 알아보았다.

지은이 아직 안 나왔는데조금 더 있겠다고

그래? , 너 핸드폰 좀 줘볼래?”

지은이 오늘 핸드폰 안 갖고 나왔다고 했는데?”

응 알아, 경찰 부르려고.”

경찰서에 전화를 걸자 경찰은 이곳에 화재신호가 수신돼서 이미 소방차가 출동했을 것이라 했다. 나는 급한 마음에 말을 더듬으며 경찰력이 긴급히 필요하다는 말을 간신히 남겼다.

딸아이 친구는 지은이가 있다는 곳을 손가락을 뻗어 알려주었다. 내가 쳐들어온 통로의 정확히 반대편 문이다. 나는 이동하기 전에, 낡아빠진 책상들이나 냉온수기까지 무게가 나갈 만한 것들을 모아 들어온 문을 봉쇄했다. 짐작컨대 문은 밖에서만 열리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어마르 몇 놈 말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하지만 이정도면 시간을 끌기엔 충분했다. 나는 얼른 반대편 문으로 달려갔다. 아이들은 대체 무슨 상황인가 의아한 눈으로 내 이상한 행동을 지켜보았다. 예상대로 문은 열리지 않았다. 부러진 대걸레를 바닥에 팽개치고는 주변 소화기를 집어 들어서 손잡이를 여러 차례 내리쳐야만 했다.

딸아이가 아직 있다는 뭔지 모를 공간과 연결되는 통로엔 건물외곽이 보이는 창문이 있었다. 이미 바깥엔 소방차와 순찰차, 사설경비업체 출동차량까지 들어서 온갖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분주한 움직임을 보였다. 불길이 잡힌 것인지 실내에선 가늠하기 어려웠다. 만약 상황이 아직 이라면 아이들의 대피로도 확보해야 했다. 초소에서 몇 발짝 걸어 나온 경비 노인은 구부정한 몸으로 뒷짐 진 채 표정 없이 관망하고 있었다.

이젠 안심이 되었다. 딸만 찾으면 된다.

 

진하고 달큰한 냄새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그 냄새 사이로 흥얼대는 콧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딸아이의 소리가 틀림없지만 발길이 멈칫했다. 조금 전 아이들이 걸치고 있던 것과 똑같은 가운이 바로 옆에 놓여있었다.

지은아~! 지은아~! 거기 있니?”

콧노래소리는 멈춰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었다. 미심쩍지만 가봐야 한다.

과학실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메스실린더를 어마어마한 크기로 확대해 만들어놓은 것들이 판테온신전 기둥처럼 줄지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마다 윗부분이 구부러져 걸 수 있도록 만들어진 사다리가 하나씩 붙어있었고, 알 수 없는 탁한 액체가 가득 담겨져 있었다. 하나하나 지나쳐가다가 딸아이를 찾았다.

딸아이는 마지막 메스실린더 안에 들어있었다. 잔거품이 바글바글 올라오는 메스실린더 안에서 딸아이는 발을 차 두둥실 떠오르기도 하고 팔다리를 휘저어가며 기분 좋게 유영하고 있었다. 딸아이가 전혀 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이 다가가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시인친구가 술주정하며 떠들던 말들이 귓가에 맴돌았다. 혹시 딸아이가 나를 짐승 보듯 하는 순간을 아직 만나지 않았다면 바로 지금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나는 가운을 집어 들었다.

딸아이는 자신 앞의 유리벽이 만들어놓은 굴절 때문에 나를 얼른 알아보지 못했다. 여전히 콧노래를 부르다가 옆에서 접근해오는 사람 실루엣을 감지하고 그것이 친구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자마자 당황해서 소리치며 발버둥을 쳤다.

지은아! 지은아! 아빠야! 아빠!”

딸아이가 진정하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눈은 다른 곳을 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딸아인 허둥대다 발이 미끄러지며 내용물을 여러 모금 마셔버렸을 것이다. 나는 돌아서서 딸아이가 나를 알아보기를 기다렸다. 첨벙대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아빠?”

아이가 사다리에 미끄러지기라도 할까봐 염려되었지만 돌아볼 순 없었다.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고 한다. 다른 애들보다 더 예뻐지려는 욕심 때문에 혼자 여기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근데 아빠리모콘은 탈의실에 있는데

문제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아이는 그제야 내 몰골이 엉망임을 알아채며 많이 놀랐다. 가운을 다 입은 딸아이를 먼저 샤워장으로 보내야 하나 잠시 고민했었지만 그대로 밖으로 나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아빠 혹시 봤어?”

아니.”

영화처럼 경찰들이 문을 부수며 들어올 것이라 생각했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경봉과 가스총 등으로 무장한 경찰들이 마치 처음 이용하는 식당에 들어서는 것처럼 주변을 살피며 들어와 딸아이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통증이 더 심해져있는 양팔을 들어 올려보였다.

신고잡니다. 옆방엔 아이들이 많이 있고요. 공장 관계자들 명단확보를 서두르시고, 공장 구석구석 촬영부탁 드립니다. 그리고 저는 조사에 충실히 응하겠습니다.”

나와서 보니 건물 한 동이 절반정도 그을려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부축하자 나는 안심하며 몸을 의지했다. 이동식침대에 몸을 눕히기라도 했다간 그대로 의식을 잃을 것 같아서 불편한 자세로 걸터앉아있었다. 공장 건물에서 누군가가 실려 나오는 것이 보였다. 나에게 당했던 어마르중 하나일 것이다. 그 뒤로 옷부터 머리까지 죄다 그을려버린, 사무실에 같이 있던 놈이 경찰에게 뭔가 다급하게 설명을 하며 나오는 것이 보였고 경찰은 그래그래~ 경청하는 모습을 보이며 메모를 하고 있었다. 딸아이가 감기에 걸릴지 걱정되었다. 옷도 못 갖춰 입고 나와 버렸으니. 뒤편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소방관들과 의료진 중에 여자목소리가 들려서 딸아이를 부탁하려 했으나 목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소방관들은 화재진압 이후에 곧바로 아이들을 건물에서 최대한 먼 곳으로 이동시켜 통제했다. 여전히 아이들은 저마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거나 별 것 아닌 주제를 가지고 크게 웃어댔다. 어느 틈에 딸아이가 가운을 여미며 친구들 틈으로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 다급하게 돌아가는 사건 현장과는 전혀 상관없는 즐거움이 아이들에게 넘쳐났다. 아까 A조 아이들이 보였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팔다리를 꺼내 보이며 서로 자랑하고 감탄했다.

소방관일 것이라 판단되는 누군가가 아이들의 가방과 옷가지를 소녀가 새겨진 큰 상자에 담아서 밖에 꺼내놓자 아이들은 통제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물건을 찾으러 달려갔다. 그 뒤 먼 거리를 두고서 경비노인이 구부정한 자세로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뭔가 열심히 메모를 하는 경찰을 데리고 경비실로 가야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동식침대에서 내려 땅에 발을 딛자 말로 다 못할 통증이 온 몸에서 밀려왔다. 경찰은 다음 문장을 만드느라 고심하다가 눈앞에서 다리를 질질 끌며 꼴사납게 다가오는 나를 발견했다. 딸아이가 달려와 내 앞을 막아섰다. 머리가 여전히 마르지 않은 채였다. 아이가 감기에 걸릴까 걱정되었다. 딸아이의 젖은 머리칼을 지나온 바람결에 절은 술 냄새가 진동했다. 아이는 내 앞에서 웃으며 리모콘을 내밀고 있었다. 반숙이 되어버린 내 손이 움찔 움직였다. 경찰은 나와 딸아이를 잠시 번갈아보다가 입에 볼펜을 물었다.



xere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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