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가작 모든 것이 폭로되었다

2014.03.01 15:4703.01

모든 것이 폭로되었다.

 

세상의 종말은 고요하게 올 것 같아요. 혜성이 충돌하거나, 갑자기 빙하기가 몰려와 다 얼어 죽는 식으로 요란하지 않게, 그냥 전구가 팍하고 나가듯이.

 

선화는 팍하고라고 말할 때 손가락을 튕겼다. 나는 그저 웃으며 맥주잔을 비웠다. 회식은 3차까지 이어졌고, 우리 둘 다 너무 많이 마신 상태였다.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았기에 선화와 나는 같이 택시에 올랐다. 내가 먼저 내리려 할 때 선화가 집 앞에서 한잔 더 하고 가자고 했다. 그녀와 나의 집은 버스 한정거장 거리였다.

나는 비어있는 맥주잔을 노려보았다. 초점은 갈피를 못 잡았고 테이블 위에서 내 몸을 버티고 있는 팔꿈치도 자꾸 미끄러졌다. 팔꿈치는 떨어지려는 몸을 힘들게 일으켜 세웠지만 그러다가도 다시 미끄러졌다. 마치 시지프스처럼 말이다.

선화는 동글동글한 얼굴을 손으로 괴고 빙그레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대리님, 많이 취하셨네요. 나도 취했는데.

 

나도 취했는데라고 말 할 때 그녀는 슬쩍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사물이 겹쳐 보일 정도로 취했는데 어째서 그런 모습들은 또렷하게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말했다.

 

일어날까요? 내일도 출근해야 하니까.

 

술을 마시면 더 달착지근해지는 그녀의 목소리에 이끌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대 앞에서 서로 계산하겠다는 가벼운 실랑이를 벌인 뒤 거리로 나오자 가을바람이 몸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선화의 집은 좀 전의 맥줏집에서 3~400미터도 안 떨어진 곳이었지만 중간에 보안등이 없는 골목을 지나가야했다. 집 앞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하자 그녀는 샐쭉 웃었다.

 

빌라 앞까지요? 아니면 방 안까지요?

 

자꾸 장난치면 회사 앞에 데려다 놓는 수 있다?

 

그녀는 깔깔 웃으며 가볍게 내 어깨를 툭 건드렸다. 살짝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나보다는 훨씬 멀쩡한 걸음걸이로 앞서가는 선화의 뒷모습을 보자니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내 어깨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키의 그녀는 걸음이 빨랐다. 종종 그녀는 한참 나를 앞질러 걷다가 뒤를 홱 돌아보며 빨리 오라고 재촉하곤 했다. 처음 반했던 것도 그 표정 때문이었다.

지금은 과연 그것뿐이었나 생각해볼 때가 있다.

빌라 앞에서 선화는 건물 출입문의 보안장치 번호를 수차례 잘못 눌렀다. 그녀는 경고음이 울릴 때마다 신경질을 냈다. 통통하다는 표현이 좀 아슬아슬한 몸은 펜슬스커트와 블라우스로 감싸여있었다. 그녀의 벗은 몸을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뭐 어쩌겠는가. 나만 그런 것도 아닐 테고.

담배가 중간쯤 타들어 갔을 때야 유리문이 열렸다. 선화는 소리 없이 웃으며 내 쪽을 향해 팔을 흔들었다. 문이 닫히고 난 다음에도 그녀는 계속 서있었다. 나는 팔을 휘저어 빨리 올라가라고 손짓한 다음 걸음을 돌렸다. 빌라로 들어서는 골목의 초입까지 나와서 뒤를 돌아보았을 때에도 계단참이 보이는 통유리 창으로 불빛이 보이지 않았고 그녀의 방에도 불은 켜지지 않았다. 잠시 불안한 생각이 든 나는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건물 입구의 유리문 뒤에는 아직도 그녀가 서 있었다. 근접센서가 달린 전등은 꺼져있는 상태였다. 나는 유리문을 두드렸다. 벽에 기댄 채로 눈을 감고 있던 그녀가 눈을 떴다.

 

빨리 올라가라고.

 

나는 입모양으로만 말하며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선화는 발그레한 얼굴로 웃었다.

유리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소리 내어 물어보았다.

 

괜찮아? 얼른 올라가

 

갑자기 선화는 유리문에 얼굴을 들이대었다. 몸을 못가누고 그대로 문에 머리를 부딪치는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유리문에는 작은 흔적이 남았다. 아침에 선화가 새로 발라보았다고 자랑하던 립스틱이었다. 기억이 맞는다면 아마도 버건디 핑크일 것이다. 립스틱자국을 보며 어린 시절 방학 때 가곤 했던 시골의 이모님 집이 떠올랐다. 돌담을 지나면 나오는 우물에 장난삼아 돌멩이를 던지던 기억이 났다. 그때의 철퍽하는 물소리가 가슴속에 울렸다.

 

아침에 눈을 뜨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단지 아프다는 느낌밖에 없었다. 하지만 눈을 뜨고 몇 초정도 지나자 그것이 단순히 숙취로 인한 두통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머릿속에 거대한 터널이 뚫린 기분이었다. 터널은 텅 비어 있었고 동시에 가득 차 있었다. 텅 빈 터널을 가득 채운 것은 공포였다. 그것이 나의 것이었는지 은래의 공포였는지 알 수 없었다. 어째서 은래를 떠올린걸 까? 침대를 보니 은래는 자리에 없었다. 하지만 어디에 있는지 무얼 하는지 나는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아침식사를 준비하려고 주방에 있었다. 정확하게는 된장 한 숟가락을 물에 풀어 냄비에 부으려던 순간이었다. 아랫배를 찌르는 고통이 찾아왔고 그것은 나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공포는 고통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내 것이 아닌 고통을 내가 느낄 수 있다는 것에서 찾아왔고, 온전히 내 것일 뿐인 고통이 남에게 전달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공포가 다가왔다.

 

은래와 나는 모든 것이 연결되었다.

 

귓가에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서로 다른 방송을 하는 두 개의 라디오를 동시에 틀어 놓은 것처럼. 그리고 시야도 겹쳐보였다. 내 눈에 누군가의 시야가 덧씌워진 것 같았다. 나는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도 알 수 있었다. 은래의 것이었다. 그리고 은래도 마찬가지였다. 은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일으키려던 몸을 다시 침대에 뉘었다.

 

이게 뭐야.

 

은래의 질문이 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지금, 당신 맞지?

 

모르겠어. 갑자기 왜 그러는 거지?

 

돌이켜보면 우린 그 상황에서 알맞은 질문조차 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오해가 잘못된 대답이 아닌 잘못된 질문에서 비롯하듯이 말이다.

 

몸이 안 좋아서 출근을 못하겠다는 전화를 하려 했지만 갑자기 찾아온 이 연결을 해명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집밖으로 나가자는 생각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은래의 모든 것, 그녀가 보는 것, 그녀가 듣는 것, 그녀가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의 감촉, 그녀의 아랫배에 불쾌한 먹구름처럼 자리하고 있는 생리통까지 고스란히 내 몸으로 전달되고 있는 마당에 그녀와 멀리 떨어지는 것만이 사태의 올바른 해결방법처럼 느껴졌다. 먹는 둥 마는 둥 아침식사를 서둘러 마쳤다. 그녀와 나는 머릿속을 비우려는 참선자처럼 묵묵하게 밥상 위에만 집중했다. 수면위로 떠오르려는 풍선을 계속 물속으로 밀어 넣듯이 우리는 그렇게 고되고 헛된 짓을 하며 아침식사를 마쳤다.

전철역으로 가는 거리는 이상하게 한산했다. 마을버스조차도 운행을 멈춘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거리로 나와야 하는 이들은 모두 조심스러웠다. 사람이 적은 거리는 그나마 머릿속의 웅성거림이 잦아들었지만 전철역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게뭐지?이게뭐야?당신누구야?당신누군데왜남의머릿속을멋대로들여다봐?나가!나가!나가!저리가!싫어!싫어!싫어!

 

플랫폼으로 내려갔을 때 응급환자가 발생하여 잠시 열차운행이 지체되고 있으니 양해 바란다는 역무원의 방송이 플랫폼 안을 울려 퍼졌다. 구급대원 두 명이 한 중년 여인을 들것에 실어 나르고 있었다. 구급대원들의 피로와 당혹감은 그들이 들고 있는 들것의 무게보다 훨씬 무거웠다.

 

이게 무슨 일이야.

 

정제되고 정제된 언어로 표현해도 오직 그 질문 밖에 할 수 없었다. 추석연휴 때나 볼 수 있는, 자리가 드문드문 비어 있는 출근길 전철 안의 풍경에 나는 좋아 해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맞은편에 앉은 여중생은 헤드폰의 볼륨을 최대로 올려놓고 고개를 무릎 위 가방에 파묻고 있었다. 여중생의 이름은 유빛나였다. 어제까지 인피니트 오빠들의 신보를 공구하기 위해 모아야 할 돈을 계산하며 아빠의 지갑을 몰래 털 것인가, 아양을 떨어 지갑을 열게 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잠들었다. 아침에 그녀는 아빠에게 모든 계획을 들켰다. 아빠가 지갑을 열어 돈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빛나의 아빠도 몸이 아프다며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갔으니까. 빛나는 아이팟의 정지버튼을 누른 다음 나를 노려보았다.

 

미안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씨발, 재수 없게…….

 

나는 이어폰을 가지고 나오지 않을 것을 후회했다. 옆자리에 앉은 남자는 필사적으로 머릿속에서 생각을 지우려는 듯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바닷물을 퍼내려는 사람 같았다. 마치 그렇게 해서 바닷물을 다퍼낼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비명으로 다른 이가 자신의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으며, 손으로 바닷물을 퍼내어 바다가 사라지기를 기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축축한 손이 쓰다듬던 조카의 허벅지 감촉이 느껴졌다. 불쾌함과 쾌감이 동시에 엄습했다. 남자는 흠칫 놀라 자리를 일어나 문가로 갔다. 그는 자살을 결심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폰을 켜고 포털사이트를 열었다. 텍스트와 이미지로만 이루어진 창에 집중하자.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타이르며 눈에 띄는 대로 기사를 클릭했다. 어제 있었던 경기의 시구장면 사진을 열자 탄탄한 허벅지와 도저히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 같지 않은 가슴을 자랑하는 신인여배우의 시구 장면이 보였다. 사진 속에서 팬티라인이 안 보이는 게 좋으니 타이즈 안에 팬티를 입지 말라던 매니저에게 한마디 항변도 못했던 그녀의 후회가 들려왔다. 기사를 송고하던 기자가 그녀의 사진을 엉덩이 부분만 확대 해 놓고 빳빳하게 발기한 성기의 촉감에 즐거워하던 느낌도 그대로 느껴진다. 나는 차라리 정치면의 기사를 클릭 하려다가 도저히 비위를 감당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이폰 마저 꺼버렸다. 어서 전철이 목적지에 도달하기만을 바랐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할 수만 있다면 손으로 머리를 후벼 파서 뇌를 꺼내고 싶었다. 겨우겨우 도착한 회사 건물 로비에 설치된 대형 텔레비전에서는 뉴스 속보로 비행기 추락사고를 전하고 있었다. 뉴스를 전하는 앵커도 당혹하고 있었다. 자신이 오랫동안 감추어온 비밀스러운 성적 취향이 지금 이 순간 화면을 보는 모든 이들에게 알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며 그는 천천히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260명이 탑승한 비행기의 추락 사실을 담담하게 읽어 내려가던 그의 목소리가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거의 울먹거릴 지경이 되자 그는 시선을 떨구며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로비에 있던 나와 이십여 명의 사람들도 혼란의 와중에도 그의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수치스러움과 당혹, 애도와 비애가 한꺼번에 퍼져갔다. 그것은 전파처럼 무차별적으로 개인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어왔다. 듣기 싫어도 들리는 버스안의 지금은 라디오시대 방송처럼 말이다.

로비의 사람들은 서로 시선을 피해가며 움직였다. 눈을 감아도 조금만 집중하면 다른 이들의 시선을 통해 로비 곳곳을 들여다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대로 눈을 감고 엘리베이터까지 걸어가 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타인의 시선을 그런 식으로 훔치기는 싫었다. 아니, 엘리베이터에 오를 마음조차 안 들었다. 전철 안에서도 괴로웠기에 도저히 좁은 공간 안에 사람들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17층에 있는 사무실까지 계단으로 걸어 올라간다는 것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하지만 오늘 같은 상태라면 계단이 사람과 마주 칠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비상계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의 웅성거림 들은 비상계단에 다다르자 아주 조금이나마 잦아들기 시작했다.

계단으로 오르기로 한 것은 다시 생각해봐도 잘 한 결정이었다. 7층쯤 올라서자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고 등은 땀으로 축축해졌다. 13층 정도 올라갔을 때는 그냥 엘리베이터로 올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여기까지 올라온 게 아까워서 오기가 발동했다. 17층의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나는 사무실에 있는 다른 이들도 나와 같이 가쁘게 숨을 몰아내시고 축축한 피부에 눌어붙은 셔츠의 느낌에 불쾌해 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는 동안 누구도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단지 나와 마주치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작고 불쾌한 웅성거림 들이 머릿속을 울렸다. 그것은 전철 안에서, 로비에서 느끼던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무실은 곳곳이 빈자리였다. 예상대로 오늘 아침 병가를 쓰겠다며 자리를 비운 직원들이 대다수였다.

탕비실에서 나오는 선화는 블라우스 자락을 손으로 잡아 펄럭였다. 내 등에 눌어붙은 셔츠의 촉감을 그녀도 느꼈는지 계속 아, 덥다. 왜 이렇게 덥지? 라는 소리가 계속 되었다. 풍만한 가슴을 부드럽게 감싸 안은 브래지어의 촉감이 느껴졌다. 나는 황급히 신경을 딴 데로 돌리기 위해 그룹웨어의 로그인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마치 처음으로 계정을 받고 감격과 호기심속에서 첫 로그인을 하는 신입사원처럼 말이다.

 

안녕하세요, 대리님?

 

선화가 소리 내어 인사한줄 알고 그녀 쪽을 돌아보았지만 이미 그녀는 자신의 텀블러를 들고 자리에 앉아있는 상태였다.

 

공기 중에 수많은 언어들이 떠돈다. 당혹과 공포의 언어들이다. 애써 태연한척 얼굴을 굳히고 귀를 닫으며 무표정을 지키려 애쓰고 있다. 하지만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이 폭로되었다. 사무실 안에는 선화를 상상하며 자위를 한 남자만 일곱 명이 넘었다. 10대 때 낙태 경험이 있는 여직원이 두 명이었고, 성병에 걸려본 남자 직원은 세 명이었다. 늘 글로벌 마인드를 강조하며 직원들의 F 발음과 V발음을 지적하던 차장의 어학연수 경력은 거짓말이었다. 은밀하게 갖고 있던 욕망들과 거짓말들은 아무런 보호막 없이 사무실 안을 질주 하고 까발려졌다. 점심시간도 되지 않아 세 명의 직원들이 몸이 안 좋다며 조퇴를 했다. 차장은 별 말없이 그들의 조퇴를 허락했다. 그도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매일 아침 선화의 애무를 상상하며 자위를 한다. 그리고 이제 선화를 포함하여 사무실 모두가 그 사실을 안다.

모두가 모두를 외면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선화만은 지사의 보고서들을 정리하고 그룹웨어에 올라온 공장별 출하보고서를 정리하고 있었다.

 

메신저보다 빠르고 좋네요.

 

선화는 구체적인 언어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물론 소리 내지는 않았다.

 

뭐라고?

 

물에 적신 스폰지를 목덜미에 들이대듯 선화의 정신이 다가왔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거리에만 영향을 받는 게 아니었어요. 가까운 공간에 있을 때 무차별적으로 정신이 연결되지만 먼 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구체적인 매개체가 있으면 선택해서 연결이 가능해요. 가령 메신저창의 프로필 사진 같은 걸로요. 지금 영천공장에 있는 정민씨랑 얘기 하고 있어요. 메신저나 전화를 안 쓰고요.

 

나는 그룹웨어의 초기 화면에만 집중하기 위해 애썼다. 그렇지 않다면 어제 유리문에 남겨진 선화의 립스틱 자국을 다시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수포로 돌아갔다. 영천공장의 라인별 출하량 정보가 머릿속에 들어옴과 동시에 립스틱자국이 남긴 심장의 쿵쾅거림이 사무실로 퍼져갔다. 나 역시 조퇴를 신청하고 싶었다.

그때 수천만 가닥의 실중에 하나가 끊어졌다.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누군가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머리가 지르는 비명은 성대를 울리는 비명보다 더 빠르고 멀리 퍼졌다. 모두가 순간적으로 죽음의 순간을 체험했다. 25층 빌딩에서 몸을 던지는 죽음 말이다. 여기저기서 비명과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그제야 오늘 처음으로 선화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안의 슬픔이 고스란히 나에게 왔다.

 

버텨요. 갑자기 온 것은 갑자기 사라질 거예요.

 

그녀의 말처럼 갑자기 온 것은 갑자기 사라지지 않았다.

 

사흘이 지나서야 사람들은 소리 내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목소리를 높이면 사방을 떠돌아다니는 침묵의 언어들을 몰아낼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국경과 인종, 언어의 장벽은 이 전염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그것들은 모두 무력했다. 인류사를 통틀어 가장 막강했던 장벽들이 하루 만에 무너졌다. 오바마가 의료보험개혁을 추진하게 된 진정한 동기를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당신은 신문에서 오바마의 사진만 들여다보면 된다. 당신이 알파벳조차 모른다고 해도 상관없다. 당신은 언어로 구체화 되는 정보 이외에도 더 많은 것들을 이해하게 될 테니까. 아니, 그것이 진정한 이해인지는 나도 자신이 없다. 단지 이렇게만 말하겠다.

당신은 모든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아는 것도 아니고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느끼는 것일 뿐이다. 언어가 완전히 무의미 한 것은 아니었다. 몇몇 물리학도들은 호킹이나 와인랜드와 접촉을 시도하였다. 그들은 전화나 인터넷의 도움 없이 오직 그들이 쓴 논문을 들여다보는 것 만으로 저자들과 자유로운 대화를 나누었다 호킹은 자신의 방대한 정신세계를 열어 보여주었다. 대화에 참여했던 이들은 그의 좌절과 욕망을 이해하고 그것이 우주에 대한 이해로 뻗어 나가는 과정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학생들처럼 우주보다는 여배우들의 옷 속에 감춰진 세계에 더 관심이 많았다. 정신적 집단 강간도 벌어졌다. 자살률이 압도적으로 치솟았다. 길을 가다가 처음 보는 이에게 어릴 때 누나의 속옷을 입에 물고 수음을 한 기억을 들키게 된다면 어떤 기분이겠는가? 한 명의 자살은 그와 싫든 좋든 가깝게 연결되어 있던 이들의 정신에 충격을 불러왔고, 연쇄자살을 막을 길은 막을 방법이 없어 보였다. 각국의 정부는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움직였다. 복잡한 관료체계가 무너지고 신속한 의사 통합이 이루어지면서 치안대책이 강화되었지만 효과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방송, 전화, 인터넷망은 거의 무용지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60억 개의 채널을 열어놓은 라디오가 되어 버렸는데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은래가 나의 고등학교 동창인 석준과 관계를 맺은 적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은 필연적으로 벌어질 일이이었다. ‘연결이 시작된 첫날부터 그녀가 필사적으로 숨기고 싶어 했던 것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 역시 은래도 알게 되었다. 내가 울산으로 출장을 간 사이에 석준이 집에 왔었다. 먼저 집으로 오라고 한 것은 은래였다. 둘은 식탁 앞에서 첫 번째 정사를 했고, 두 번째는 침실, 세 번째는 욕실에서였다. 은래는 집안 구석구석, 나의 손길이 닿는 곳에서 나를 몰아내려는 듯이 석준을 몰아붙였다. 그리고 그것이 처음도 아니었다. 은래는 나를 미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석준과의 정사장면을 촬영하여 나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나는 이제 그것을 알게 되었고, 그녀의 입에 들어온 석준의 성기가 주는 느낌도 알 수 있었다. 녀석의 허풍보다는 작았지만 단단했다. 사실은 그 점이 더 화났다.

 

은래는 하루 종일 수면제의 도움을 받아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잠이 들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아니, 최소한 잠을 자는 동안은 자신의 정신이 외부와 연결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꾸는 악몽은 고스란히 집안에 있는 나에게 전달되었다. 그녀는 나에게 수십 번 난도질당했다. 석준 앞에서 옷을 벗고 난 다음 이불속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칼을 든 내가 있었다. 그녀의 꿈속에서 나는 늘 잔인한 살인마였다. 어째서 그녀는 내 용서를 구할 생각을 하지 않는가? 꿈속에서조차 말이다.

은래가 붉은색 동굴을 헤매는 꿈속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욕실로 갔다. 욕조에 차오르는 물을 보고 있자니 이곳에서 은래가 석준과 벌인 일들이 떠올라 마음이 갑갑해졌다. 욕실의 타일 조각들이 만나는 곳마다 그녀의 신음소리가 새겨져 있었다. 거울 속에는 흥분과 수치심, 죄책감으로 뒤범벅이 된 은래의 얼굴이 있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석준의 얼굴은 희미하고 뭉개져 보였다. 욕조에 들어가 뜨거운 물속에 몸을 담근 나는 눈을 감고 아무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썼다. 벽을 타고 들어오는 이웃집들의 웅성거림과 멀리서부터 날아오는 누군가의 비명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랐다.

 

똑똑, 계세요?

 

선화였다. 나는 그녀의 시야를 훔치지 않기 위해 욕조 밖으로 나온 내 발가락에 집중했다.

 

깜짝이야.

 

아 대리님도 목욕중이셨어요? 나도 벗고 있는데.

 

장난치지 마.

 

진짜에요, 찜질방 와있는데 확실히 한산해서 좋네요. 요즘에는 어디를 가나 이렇지만. 이거 되게 편하죠? 핸드폰 보다 훨씬 편해요.

 

선화는 텅 빈 사우나에서 온탕 안을 헤엄치고 있었다.

 

느껴져요?

 

그녀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부드럽게 애무했다. 딱딱해진 유두의 감촉이 나의 손끝에도 느껴졌다. 나는 화난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장난치지 말라니까?

 

그녀의 정신에서 웃음소리가 퍼져 울렸다. 선화는 욕탕의 벽에 기대어 발을 첨벙거렸다. 따뜻한 물이 주는 안도감과 즐거움이 나의 것인지 선화의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남자들이 섹스에 대한 생각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는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지만 들어서 아는 거랑 직접 느끼는 거랑은 다르네요. 상상이 현실이었다면, 저는 정말 몸이 남아나지 않았을 것 같아요.

 

나는 부끄러웠다. 달리 다른 표현으로 우회 한다 하더라도 본질은 그것이다. 나는 부끄러웠다.

 

괜찮아요, 중학교 때부터 제 몸 위로 전교의 모든 남자애들이 지나갔을 거예요. 선생님들까지 포함해서요. 늘 익숙했어요. ‘선화는 참 성숙하구나.’ 하면서 어른들이 바라보는 눈길 말이에요. 정확하게는 가슴이 참 먹음직스럽구나.’겠지만요. 고등학교 때는 저보고 박음직스럽다고 했던 애도 있었어요. 표현 재미있지 않아요? 먹음직스럽다도 아니고 박음직스럽다 라니. 사물함이나 화장실 벽 같은데 써놓은 낙서가 아니라 제 면전에서 직접 말했어요. 그래서인가, 별로 놀랍지는 않아요. 오히려 홀가분한 것도 있어요. 사무실에 다른 언니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게 되었다는 것과,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저를 걸레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죠. 좀 더 다른 사람들을 알게 된 것 같아서 좋아요.

 

긍정적이라서 좋네.

 

선화는 내 대답속의 냉소도 같이 읽었다. 그녀의 정신이 내 안으로 부드럽게 밀려 들어왔다. 그것은 따뜻하고 초록색이었다.

 

미안해요, 보려고 한 게 아닌데.

 

다들 그러니까 일부러 사과할 필요 없어.

 

은래 언니가 미워졌어요?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아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요. 대리님 안에서 언니가 사라져가고 있는 것 같아서요.

 

생각하면 괴로우니까 떠올리지 않으려는 것뿐이야.

 

선화는 고요하게 자신의 정신과 시야를 열어보였다. 그녀는 한 권의 책이 되어 내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책은 생각보다 두껍고 무거웠다. 야한 그림으로 표지가 덧 씌워진 백과사전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의 표지는 그녀의 육체를 닮아 있었다. 마음속 깊은 곳의 욕망을 끄집어 올려내는 힘이 있었다. 그녀의 표지는 읽는 사람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첫 장을 넘기면 무거운 흙빛으로 가득 채워진 페이지를 만나게 된다. 뒤엉킨 선들로 가득한 페이지들이 수십 장 이어져 있었다. 선들은 방향도 없고 형체도 없다. 나는 끝을 알 수 없이 뒤엉킨 선들로 가득한 페이지를 넘기다 어느 순간 공백뿐인 페이지들을 만나게 되었다. 공백이 그녀의 전부가 아닐 거라는 생각에 나는 좀 더 빨리 페이지들을 넘겨본다. 모두 공백들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하나의 형체를 만났다. 잠시 안도해보지만 그것은 커다란 바늘일 뿐이다. 끝이 0에 수렴하는 날카롭고 거대한 바늘, 그리고 다른 쪽 끝에는 눈이 보인다. 눈에서 바늘이 튀어 나온 사람들이 보였다. 그것은 그녀에게 가방을 집어 던지며 걸레 같은 년아라고 소리 질렀던 그녀의 친구였고, 심야 버스 안에서 그녀의 가슴을 주무르던 대학선배였으며, 매일 아침 그녀의 입에 자신의 성기를 밀어 넣는 상상을 하던 차장이었다. 바늘이 달린 눈을 한 사람들의 페이지를 지나다보면 내 모습도 볼 수 있다.

그것은 희미한 선으로만 그려진 실루엣뿐이었지만 내 모습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에게 나는 텅 빈 공간에 희미한 선으로 그려진 흐릿한 윤곽일 뿐이었다.

비로소 나는 선화가 왜 나에게 자신의 책을 읽게 해주었는지 알 것 같았다.

 

색칠공부 같지 않아요?

 

선화는 질문했고 나는 대답을 알았다.

나는 은래라는 책을 읽어야만 했다.

 

수면제 기운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은래는 회색구름처럼 느리고 무겁게 움직였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고 있는 내 모습을 본 그녀는 내가 집을 나가려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란 것도 곧 알 수 있었다.

 

바다에 가자.

 

나 죽이고 당신도 빠져죽겠다고?

 

삼일 만에 목소리를 낸 그녀는 갈라지고 말라있었다. 마음속에 희미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애써 그것을 차가운 북풍으로 바꿔보려 했다.

 

좀 조용한 곳으로 가 있자.

 

어차피 회사에 가서도 정상적인 업무는 힘들었다. 경영진의 절반 이상이 자살한 마당에 회사 걱정을 한다는 것은 무의미해졌다.

차에 간단한 캠핑장비를 챙기고 마트에 들러 식료품 몇 가지를 살 예정이었지만 계획대로는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정신을 이리저리 굴려 가까운 곳에 문을 연 식료품점이 있나 찾아보았더니 차로 10분 거리를 달려야 나오는 주택가 어귀에 작은 구멍가게 하나가 겨우 문을 열어 놓고 있는 정도였다. 5년 전에 남편과 사별한 할머니 혼자서 지키고 있는 가게였다. 가게에 들어섰을 때 나와 은래는 가게안의 눅눅한 냄새보다도 고독에 압도되었다.

과거는 시들었고 미래는 회색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나는 책 한 권이 나와 은래 앞에서 펄럭였다. 기쁨과 희망의 언어로 쓰인 페이지들은 모두 물에 젖어 번지거나 빛에 바래져 있고 남은 페이지들은 모두 회색이었다.

은래와 나는 컵라면과 생수 몇 병을 산 다음 차에 올랐다.

공항 고속도로로 접어드는 길로 가기 위해 시내를 달리는 동안 은래와 나는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운전에만 집중하기 위해 일부러 내비게이션을 끄고 달리며 주변 차들에서 흘러나오는 웅성거림에 귀를 기울였다. 도로 위는 욕설로 가득 차 있었지만 서로 가깝게 다가가지 않으려는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욕설 속에는 탄식과 분노, 증오가 잡음처럼 섞여들어 왔다. 공항고속도로에 접어들었을 때 은래는 다시 잠들었다. 마치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잠을 선택한 사람 같았다. 그녀는 해변가에서 나에게 머리채가 잡혀 물속에 처박히는 꿈을 꾸었다. 꿈속의 그녀는 울고 있었지만 나는 웃고 있었다.

펜션의 여주인은 마뜩찮은 표정을 지으며 방을 내주었다. 표정을 보지 않아도 그녀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불안함을 어찌 할 수는 없었다.

 

뒈지려면 지네 집구석에서 뒈지지 왜 여기까지 와서 지랄이여.

 

그녀는 은래의 마음만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에게도 나는 희미한 선으로 그려진 흐릿한 형체일 뿐이었다.

펜션은 거의 모든 방들이 텅 비어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웅성거림 들이 들리긴 했지만 그것은 시내에 있을 때보다는 견딜 만 했다. 해가 질 때까지 은래는 계속 졸리다며 잠속으로 도망쳤다. 방 한쪽에 이불도 깔지 않은 채 허리를 구부리고 누운 그녀를 보니 이렇게 앙상했나 싶었다. 바다로 향한 베란다에서 남은 담배 반 갑을 다 피운 나는 그녀의 옆에 누웠다. 은래의 등 뒤에서 그녀의 목덜미를 보고 있자니 그 여름날이 떠올랐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들러붙어 있던 목덜미 너머로 들려오던 노랫소리가 들렸다. 지금 은래는 꿈을 꾸지 않고 있었다. 회색의 실타래 같은 그녀의 안으로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보았다.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며 나는 석준을 찾아보려 했다. 그 곳에 석준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얼굴은 흐릿해서 내가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석준이 분명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겨보았다. 자칫하면 금방 부스러져버릴 것 같은 페이지들을 넘겨보았다. 나는 여전히 흐릿하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안의 내가 흐릿해졌을까? 그 지점이 궁금하여 계속 페이지를 넘겨보고 싶지만 그것은 의미 없는 일이었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나는, 그녀 속의 나는 이미 형체를 잃어버릴 정도로 흐릿해져 가는 존재였다. 그녀가 석준의 손을 잡아끌던 날 밤에도 그녀는 석준의 얼굴을 보지 않고 있었다. 차 안의 공기가 그녀의 숨결로 덥혀지고 있는 동안에도 그녀는 차창 밖만 보려 했지만 그곳에는 뿌연 안개뿐이었다. 그녀는 성기 주변이 아팠지만 입으로는 계속 멈추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 그녀는 내 모습을 떠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내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다. 내 형체 위로 석준의 얼굴이 떠오를까봐 그녀는 룸미러에 비친 자신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깨달은 사실들이 있었다. 은래는 석준과 정사를 벌일 때마다 거울이 있는 곳 만 골랐다. 늘 자신의 표정을 볼 수 있는 곳 말이다. 남편의 고등학교 동창과 함께하는 쾌감에 도취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싶어 했다. 석준의 얼굴은 애써 시선 안에 두지 않으려 했다. 내가 그녀의 기억 속에서 석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던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나는 은래의 기억 속에서 거울에 비친 그녀의 얼굴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녀는 화가 날 정도로 예뻤다. 정말이다, 석준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의 육체가 아니라 정신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 내가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아내의 얼굴을 그놈은 보았을 것이다. 흥분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뺨과 수치심으로 찌푸려진 눈썹, 죄책감으로 가득한 눈은 내가 볼 수 없었던 얼굴이었다. 나는 그 눈을 다시 한 번 더 들여다보기로 했다.

조용히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손길에 잠을 깬 그녀는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나는 영원히 은래를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녀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다 보러 가자.

 

나는 말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래는 원피스 자락을 걷어 올리고 모래사장 위를 걸었다. 발목을 간지럽히던 파도의 끝자락이 멀어질 때마다 그녀는 바다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내심 큰 파도를 기대하며 서성거렸다. 발가락 사이로 밀려들어오는 모래의 감촉을 느끼던 그녀는 파도를 피해 종종걸음으로 내 곁에 왔다가 다시 멀어지다가를 반복했다. 그녀는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렸다. 내가 그것을 읽어주길 원하는 그녀는 자신의 책을 내 앞에 펼쳐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읽지 않고 그대로 펼쳐둔 채로 바람에 펄럭이게 그냥 놔두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시를 썼지만 영원히, 그녀조차도 그 시를 읽을 수 없었고, 썼다는 기억조차 할 수 없었다. 바람은 책장을 펄럭이게 하였고 파도는 그녀의 시를 쓸어갔다. 낱말들은 포말 위를 부유하며 떠돌았다. 그것들은 가까워졌다가 멀어져 갔다. 영원히 읽을 수 없는 시들은 그렇게 거품과 함께 부셔져갔다.

당신은 질문 할 것이다.

모든 것을 읽을 수 있는데 왜 아무것도 알 수 없단 말인가.

나는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나를 읽을 수 있어도 알지는 못한다. 우리는 겨우 그 정도 존재다. 은래가 보고 싶어 했던 내 얼굴도, 필사적으로 잡고 싶어 했던 내 흐릿한 형체에 자신의 얼굴을 덧씌우려 했던 노력들도 모두 지금 저 앞의 파도처럼 휩쓸려간다.

화내지 말아 달라. 나는 부탁하고 싶다.

내 앞에서 지금 모래장난을 치며 파도에 지워질 시를 쓰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아 달라. 그렇게 말하고 싶다.

 

선화의 말처럼 종말은 손가락을 튕기듯이 가볍고 고요하게 다가온다.

하나가 될 수 없었던 것들이 조용하게 뭉쳐지는 시간동안 우리는 흐느끼고 서로를 증오했다. 한사람 몫의 정신도 겨우겨우 버텨내는 육체는 곧 붕괴될 것이다. 감당하기 힘든 타인의 고통과, 증오, 불안, 환희, 희망, 숭고함, 얄팍함 들은 파도가 되어 우리를 씻겨 낼 것이다.

저항해도 소용없다.

우린 겨우 그 정도 존재이다.

은래는 내 곁으로 다가와 앉는다.

 

발 시려.

 

그녀는 이미 내 발에도 느껴지는 차가운 감각을 알고 있지만 일부러 입을 움직여 말해본다.

나 역시 소리 내어 말해본다.

 

괜찮아.

 

그녀는 웃는다. 마치 웃음을 처음 발견한 사람처럼 웃는다.

 

우리는 파도를 바라보며 바람을 타고 떠도는 웅성거림 들에 귀를 기울인다. 세상은 한권의 책이 되어 수 억 페이지를 펄럭이고 있다.

 

아파 갖고 싶어 하고 싶어 싫어 그랬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하지마 해 왜 그랬어 알아 아니야 넌 몰라 알 수 있어 죽여버리고 싶어 죽을거야 나를 죽여줘 죽여줘 죽여줘 모르겠어 모르겠어 모르겠어 모르겠어 모르겠어 모르겠어 모르겠어

 

흐느끼는 파도가 밀려온다.

그렇게 세상은 슬픔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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