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가작 소녀

2013.11.30 22:5311.30




  납치


 납치된 뒤 눈을 뜬다는 것은, 어찌됐든 고역이다. 납치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고통 때문이다. 창은 뒷머리와 온 근육과 모든 관절마다 그것을 느끼며 깨어났다.

 여긴 어디지?

 창은 고통 속에서도 상황을 직시했다. 방은 좁지는 않았지만 어두웠다. 천장에 달린 넓은 통풍구를 통해서만 희미한 빛이 새들어왔고, 그 너머에서 작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자신은 철제 의자에 묶인 채였고 의자는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낡고 삐걱거렸지만 반들거리는 받침은 이제껏 상대를 많이도 앉혔던 듯하다. 그는 텅 빈 독방에서 눈 뜬 것이다.

 아직 상해 시티다.

 적어도 중국 땅인 것은 분명했다. 공기 중에 하수구 냄새가 배어 있었고 그 속에 희미하게 기름과 상차이 향내가 섞여 있었다. 창은 그것을 근거로 자신이 있는 곳을 추측했다. 지하. 환풍구 너머의 소리는 사람들의 것이었고 벽 바깥에서 공기를 타고 새들어오는 것이 아니었다. 묵직하게 짓눌린 듯한 소리는 위에서 들리는 것이었다. 분명 이곳은 지하실이다.

 지아밍 광장 시장 밑인 걸까? 그가 있던 곳은 시장 좌판이었다. 그러나 정보가 빈약했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벽이 보였다. 한눈에 오래 전에 지어진 벽임을 알 수 있었다. 요즘 상해 시티에서는 적벽돌로 건물을 짓지 않는다. 그러니 이곳은 반 세기 이상 된 건물 안이다. 그렇다면, 만약 자신이 아직 상해 시티 안에 있다면, 납치되어 감금된 장소를 열 곳 이내로 좁힐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살아 나갈 수 있다면 말이지만.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납치한 자들이다.

 내가, 누구의 심기를 건드린 거지?

 그때 불이 켜졌다. 역시나 오래되어 깜박거리는 백열전등이었다. 창은 이제 반대편 철제 문이 열리고 험악한 자들이 뛰어들어와 구타하고 협박할 거라 생각했지만, 뜻밖에 들어온 것은 계집아이였다.

 열두셋 정도 되어 보이는, 게다가 몰골이 흉측한 아이였다. 왼다리는 절단되어 허벅지 아래로 싸구려 나무 의족을 달고 있었고 남루한 짧은 셔츠 아래 드러난 몸에는 수술자국들이 보였다. 장기적출흔이 분명했다. 얼굴은 원래는 하얀 피부였던 것 같지만 씻지 않아 더러웠고 게다가, 오른 눈이 없었다. 눈알을 적출하고 의안도 박아넣지 않아 눈자위가 흉하게 오그라들어 있었다.

 역시나 중국인가.

 세기가 바뀌고 시절이 호전되었다지만 아직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는 곳이 중국이다. 사람을 가지고 어떤 짓이든 할 수 있는 자들이 중국인들인 것이다. 상흔들은 아이가 짧은 삶 동안 어떤 고초를 당하고 어떻게 버텨왔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아이는 의족을 삐걱거리며 조심스레 다가왔다. 낯선 자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는 작은 표정이, 아이의 삶을 증언하고 있었다.

 창은 자신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연민을 느꼈다. 아이를 이런 몰골로 만든 자들은 어떤 자들일까. 나를 납치해 온 자들? 그렇다면 목표에 근접한 것일 수 있다.

 “누구냐 넌.”

 이곳에서 잔심부름이나 하는 아이일 게 분명했지만 창은 정보가 필요했고, 말을 터야만 했다. 그러나 아이가 이곳 출신일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 아이가 서울 말을 배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이는 대꾸 없이 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물컵이 들려 있었다. 창은 고개를 뻗어 물을 마셨다. 아이는 물을 흘리지 않도록 컵을 들어 도와주었고, 잠시 창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는 옷깃으로 창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피나 흙검뎅이 묻어 있었던 듯했다.

 “고맙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지?”

 아이는 흉측한 얼굴로 희미하게 웃었다. 창은 그런 아이를 살폈다. 아이는 그를 마주보고 끄덕이고는 다시 의족을 절며 문가로 걸어갔다.

 창이 뒤에 대고 말했다.

 “가서 내가 깨어났다고 전하렴.” 

 예상대로 아이가 창을 돌아보더니 작게 끄덕이고는 철제문을 나갔다. 

 아이는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기특하게도.



 한참 후에, 아이가 남자 셋을 데려왔다. 창을 납치한 실체들이었다.

 그는 자신을 납치한 자들이 삼합회나 이 지역 폭력배일지 모른다 추측했었다. 혼자 돌아다니는 관광객을 납치해 돈을 뜯어내려는. 그러나 우두머리로 보이는 40대 남자는 배불뚝이에 옷매무새가 단정했다. 그를 위시한 건장한 젊은 사내 둘도 마찬가지였다. 마피아나 폭력배로는 보이지 않았다.

 지하시민조직일지 모른다. 시민의식이라는 옛 가치관만으로 세계를 변혁할 수 있을 거라 믿는 순진한 집단. 그래서 약자일 수밖에 없는, 무지하기 때문에 순수할 수 있는 자들 말이다. 그러나 창은 그런 자들이 자신이 쫓는 자들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직 속단할 수는 없다. 어쩌면 이자들은 신분을 감춘 공안일 수도 있었다.

 40대 남자가 어색한 서울 말로 물었다.

 “당신, 뭐라고 부르지?”

 “창. 당신은?”

 “뤄강(罗岗).”

 그는 구석의 의자를 끌어다 앞에 놓고 앉았다. 공평한 상황은 아니지만 대화를 시작할 시간이었고, 뤄강이 먼저 말했다.

 “당신 얼굴을 보니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하군, 그건 당신이 단순한 관광객이 아니라는 뜻이지.”

 “내가 관광객이라고 말한 적 없는데?”

 “조용, 내 말 아직 끝나지 않았어. 우리는 그 동안 이 동네를 들쑤시고 다니는 당신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그래서 그 동안 당신을 지켜봤어…… 자, 이제 몇 가지 질문을 할 거야. 우리는 당신이 순순히 답해주길 바래, 알겠나?”

 “이걸 풀어준다면 보다 친절하게 답해줄 텐데.”

 뤄강이 노려보았고, 창은 씨익 웃었다.

 “표정을 보니 풀어줄 것 같진 않군.”

 “말장난은 사절이야. 당신은, 서울 시티서 들어온 거요?”

 “그렇다고 생각해서, 서울 말로 묻는 것 아닌가?”

 “확인하려는 거야. 당신이 어디서 온 건지는 확실히 확인해야 할 중요한 문제거든. 다시 묻지, 당신은 서울 시티서 들어왔나?”

 창은 그저 끄덕이는 것으로 확인시켜 주었다.

 “왜 왔지, 이곳엔?”

 “누구를 찾으러.”

 “누굴?”

 “잘 알 텐데?”

 창은 뤄강을 직시하며 말했다. 목표에 접근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지만, 그러나 뤄강 역시 만만치 않았다.

 “내가 이 질문을 하는 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어. 우선 우리가 당신이 찾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거나,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에 당신에 대해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지. 자 말해보지, 누굴 찾는 거지?”

 창은 좀 더 나가 보기로 했다.

 “당신들이 납치한 사람.”

 “납치라,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뤄강은 표정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그는 경험 많고 사람을 상대할 줄 아는 자였다.

 창은 잠시 주춤했지만 이내 풀어놓기로 했다. 패를 얻기 위해선 자기 패를 먼저 보여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말했듯이 나는 서울 시티서 왔소. 누군가를 찾기 위해. 난, 사립탐정이오.”

 “사립탐정?”

 뤄강은 의아하니 보다, 이윽고 끄덕였다.

 “아, 이해했어. 이곳엔 사립탐정이란 말이 없거든. 사설공안은 있지, 공안과 결탁해선 사람들을 쥐어짜는 자들.”

 “나는 정부를 위해 일하지 않소.”

 “그럼?”

 “내 의뢰인을 위해 일하지.”

 “그게 누구지?”

 “의뢰인을 밝히는 건 계약 위반이야.”

 창은 뤄강의 다음 패를 기다렸다. 자신이 목표에 근접한 것이길 기대하면서.

 “그러니까. 당신은 서울 시티의 사립탐정이며, 어떤 자의 의뢰를 받고 누군가에게  납치된 어떤 사람을 찾아서 상해 시티로 들어온 거란 말인가?”

 “이해가 너무 빠르시네.”

 “그게 누구지?”

 창은 태연히 묻는 뤄강을 보며 내심 당황했다. 목표가 아닐지 모른다는 불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2주 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창의 혼란을 눈치 챈 뤄강은 뒤에 선 남자들과 계집아이를 보며 끄덕이더고는 다시 창을 보았다.

 “대답을 못 하는군, 그럼 다른 식으로 묻지. 그래, 당신은 그를 찾았나?”

 창은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상대는 ‘그를’ 이라고 말하고 있다.

 “뭐, 아직은.”

 “그럼 찾을 수 있을 것 같나?”

 “그럴 거요, 그게 내 일이거든.”

 뤄강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창은 그것이 비웃음이란 걸 눈치 챘고, 뒤따르는 직감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뤄강이 말했다.

 “이곳 지아밍에는 여러 소문들이 떠돌아 다니고, 그 중 몇몇 소문은 우리가 관심 갖는 것이야. 이해 하겠나?”

 “그런데?”

 “이건 당신이 이곳에 온 목적과는 관계 없는 것일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에겐 도움 되는 문제일 수도 있어. 그래서 하는 질문이니 솔직하게 대답해주기 바래.”

 “솔직한 질문이라면.”

 “분명한 답을 원하는 솔직한 질문이야…… 당신의 의뢰인은, 그를 데려오라고 했나?”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하겠는데?”

 “당신이 찾는 그를 찾게 되면 집으로, 그러니까 서울로 데려오라고 했느냔 말이야. 아니면…….”

 “아니면?”

 “그를 죽이라고 했나?”

 “그게 무슨…….”

 창은 멈칫했다. 이 대화 자체가 이 남자, 뤄강의 의도였던 것이다. 질문은 솔직하지 않았고 이중적이었다.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답을 묻고 있었다. 이들이 창이 찾는 자들이 아니라면 무시할 수 있었지만, 뤄강이 그의 목표가 맞다면, 그렇다면 의뢰의 목적이 뒤바뀔 수도 있는 커다란 질문이었다.

 창은 그것을 눈치 채자 언제나처럼 직감이 일었다.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뭔가가 잘못됐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의뢰인은 그저 ‘찾아내라’ 고 했던 것이다. 창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으며 속으로 되뇌었다.

 젠장, 어디서 잘못된 거였지?






  의뢰


 “그다지 정의로워 보이진 않는데?”

 의뢰인이 말했다. 창을 만나자마자 농이랍시고 던진 말이다.

 창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청계천변 노천카페 테이블 앞에 앉으며 의뢰인을 살폈다. 최고급 슈트를 걸치고 양 어깨에는 거들먹을 짊어진 40대 초반의 남자. 창은 그가 진짜가 아님을 알았다.

 “정의로운 탐정을 찾으셨다면, 잘못 찾으신 것 같은데?”

 “아니, 가장 유명한 해결사를 찾았지. 최근 파울로 장관 살인사건을 해결했더군?”

 “내가 유명한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유능하긴 하지.”

 창은 먼저 이 자의 콧대를 꺾어야 대화가 제대로 진행될 거라 생각했다.

 “서로 바쁜데, 젊은 사장님의 의뢰 내용을 먼저 풀어보실까 변호사 양반?”

 예상대로 의뢰인이 눈이 커졌다.

 “어떻게 알았지? 내 메일을 해킹하기라도 한 건가?”

 “당신 얼굴을 보니 대번에 알 수 있겠는데?”

 창의 말에 의뢰인이 어깨의 거들먹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역시나 심부름꾼임을 증명하는 행동이다.

 “어떻게, 우리 쪽에 대해선 아무 것도 알리지 않았는데…….”

 창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당신은 탐정협회에서 날 조회해 메일을 보냈소. ‘창 탐정, 일을 맡기고 싶다’ 라는 짧은 내용으로 시간과 장소만 일방적으로 통보했지. 하지만 사람들은 보통 그런 식으로 의뢰하지 않아. 협회에 나를 조회한 자에 대해 물어봤지만 알려줄 수 없다고 하더군. 그래서 의뢰인이 거물일 거라 생각했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창은 씨익 짓궂게 웃어 보였다.

 “실은 20분 전에 미리 와 있었던 것뿐이오.”

 “내가 도착하는 걸 지켜봤다는 거요?”

 “일을 맡기려는 자가 어떤 인간인지는 알아야 했으니까. 지켜보니 현다이의 매머드가 당신을 내려주곤 가버리더군. 현다이 매머드는 관용차로 많이 쓰이고 특히 서울 시티 내 다국적 기업들이 애용하는 차지. 그래서 의뢰인이 대기업에 있는 자일 거라 생각했소. 하지만 당신이 그쪽에 속해 있다면 운전기사는 돌아가지 않고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었겠지? 해서 내 진짜 의뢰인이, 기업 내 거물인 의뢰인이 당신을 시켜 내게 일을 맡겼다고 생각한 거요.”

 “내가 변호사라는 것은?”

 “기본적인 관찰을 한 것뿐이오. 당신이 끼고 있는 반지, ‘리케의 링’ 이잖소? 자신들이 권력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조직의 전통에 얽매이는 법이지. 이제는 사라진 예전 육사생들이나 끼던 반지를 본떠 법조인들이 끼고 있으니까.”

 변호사는 끄응 신음을 터뜨렸다. 기분 나쁘다는 뜻은 아니었다.

 “맞소, 난 그룹 내 법률자문 변호사요. 내 보스가 젊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소?”

 “당신 슈트를 보고 짐작해본 것뿐이오. 허풍이 먹힌 거지. 당신의 그 최첨단 나노실크 소재 슈트, 로로 피아나 제품이지? 올해 파리와 뉴욕 시티 기업인들에게 인기를 끌었다는 그 트랜드 슈트. 하지만 그런 튀는 디자인은 전통을 따지는 늙은 회장님이 좋아할만한 컨셉이 아니지. 트랜드를 추구하느 젊은 오너라면 또 모를까. 위뢰인은 그룹 후계자 정도 되려나? 후계자 수업 중인 계열사 CEO나 이사진 정도?”

 창은 태연히 말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내가 사람은 제대로 찾아온 것 같군... 난 테렌스 준이오.”

 “원한다면 그렇게 불러드리지, 미스터 준.”

 그의 표정에서 역시나 본명을 감추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눈에 띄게 고분해졌다.

 “이해해 주길 바라오. 내가 속한 곳은, 그러니까 그쪽 그룹은... 개인사가 알려지는 걸 극히 꺼려 해서 말이오.”

 창은 벌써부터 그런 성향의 다국적 대기업이 어느 쪽일까 가늠하기 시작했다. 

 “이해하오, 또 대가만 맞는다면 난 입을 다물 거고.”

 “물론 대가는 충분할 거요.”

 “의뢰 내용은?”

 “내 보스의 딸이 납치 됐소.”

 “그런 기사는 본 적이 없는데?”

 “당연히 통제 했지.”

 창은 그저 끄덕였다. 한 세기 전부터 국가를 쥐락펴락했고 이제는 도시 정부들을 손안에 쥔 다국적 대기업들이 언론을 통제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3주 전에 보스의 딸이 사라졌소, 이후 아무 소식도 없고……”

 “딸의 이름은?”

 준은 창을 향해 으쓱 했다.

 “뭐, 그냥 소녀라고 합시다. 열다섯 먹은 어여쁜 소녀.”

 피해자 신상조차 알려주지 않겠다? 그리고선 찾아 내라고?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는 모두 줄 거요. 그러나 당신이 피해자와 그 가족에 대한 것을 최소한으로 알았으면 하는 것이 우리의 요구요.”

 “계속해 보시지.”

 “그 일이 발생했을 때(딸이 사라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로부터 ‘당신 딸을 데리고 있다’ 라는 메시지를 받았을 때 말이오) 보스는, 그러니까 당신과 나의 의뢰인은 열을 받았소. 자신을 도발한 자들에게 화가 났거든.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흥분이 가라앉으면서 생각을 바꾸었소. 그것을 전화위복으로 삼으려 했지.”

 “전화위복?”

 “그렇소, 그건 우리 쪽에서 그자들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는 뜻이오.”

 창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단순히 돈을 노린 납치가 아니군.”

 “보스는, 그룹 내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자들 중 하나의 짓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그게 누구냐고는 묻지 마시오, 말했지만 우린 당신이 내부 사정을 최소한으로만 알길 바라고 그것이 많은 정보를 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오. 아무튼, 보스는 경쟁자들을 주시하면서 뒷조사를 했고 소녀가 납치되어 있을 거라 의심되는 곳의 리스트도 뽑았소. 제주 시티와 상해 시티. 두 곳 다 경쟁자들의 자회사와 중국 공장이 있는 곳이오.”

 “그러니까, 그룹 내 경쟁자가 의뢰인의 딸을 납치했고, 자신들의 계열사가 있는 다른 도시에 감추어 두었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할 일은?”

 “당연히 소녀를 찾아내는 거지. ”

 “그 일을 내게 맡기는 이유는? 상대에 대해 그 정도까지 파악했다면, 직접 찾는 것이 빠를 텐데?”

 “유능한 탐정이라면 그 질문을 할 거라 생각했지.”

 “고맙군.”

 준이 비웃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건 단순 납치가 아니라 그룹 내 정치적 문제요. 그쪽도 딸을 잃은 보스의 반응을 주시하고 있을 거요, 보스도 그걸 알고 있고. 당신에게 이 일을 맡기는 건 뒤를 노리는 작전이오. 경쟁자에게 자신의 수를 읽히지 않고, 먼저 소녀의 안전을 확보한 뒤에 반격하려는 거지.”

 “알만 하군.”

 창은 의뢰인이 소녀의 안전보다는 후계 놀음에 더 열을 올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인상을 받았다.

 “당신의 일은 후보지들을 돌아보고 소녀의 위치를 찾아내는 거요, 위험한 임무는 아니지.”

 “거 다행이군.”

 준은 서류봉투를 테이블 위에 놓고 창 쪽으로 밀었다.

 “안에 소녀에 대한 이미지와 소녀가 납치되어 있을 거라 생각되는 예상지들 정보가 들어 있소. 그리고 직통 전화기도. 명심할 것은, 소녀를 발견하면 조치를 취하지 말고 보고만 하시오. 그 다음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역시나 정치적인 이유 때문인가?”

 “당신의 안전을 위한 거라 생각해 주시오.”

 준이 비웃으며 말했다. 이제 다시 거들먹을 짊어지고 있었다.

 “위험하지도 않고 소녀를 찾기만 하면 되는, 그 일에 대한 조건은?” 

 준이 의뢰비용을 말했다. 창이 기대했던 것보다 많았지만, 좀 더 올려 제시해 보았다.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 정도도 푼돈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창은 좀 더 올려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어서서 악수를 청했다. 준이 창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럼, 거래가 성사된 거요.”

 “입금 먼저. 그 다음부터 움직일 거요.”

 창은 준의 손을 힘주어 잡으며 말했다.

 “걱정마시오, 오늘 안에 선금이 입금될 테니.”

 의뢰인과 헤어진 창은 건물 내 화장실로 들어갔다. 왼손으로 품에서 스캐너를 꺼내 조심스럽게 오른손을 스캔했다. 창과 악수했던 의뢰인의 지문이 나타났다. 스캐너가 지문을 인식하고 데이터로 변환하는 동안 창은 세면대에서 뜨러운 물을 틀어 손을 씻었다. 의뢰인을 만나기 전에 뿌려두었던 인조피부가 녹아 벗겨지기 시작했다. 창은 그것들을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렸다.

 데이터 변환이 끝나자 창은 그것을 유미호에게 전송하곤 전화를 걸었다. 

 “여어, 정의의 탐정 양반, 잘 지내시나?”

 유미호가 여전하게 비꼬며 웃었다. 악의는 없었다.

 “지문 하나 스캔해서 보냈어. 신원 확인, 얼마나 걸리겠어?”

 “이보라고, 아무리 친구라지만 경찰을 그런 식으로 활용하면 쓰나.”

 그러면서도 대가를 말하자 낄낄대며 웃었다.

 “신분을 위장한 자가 아니라면, 합법적 서울 시티즌이라면 24시간 내에 나올 거야.”

 “좋아, 부탁해.”

 집으로 돌아온 창은 서류봉투를 열었다. A4 크기의 플렉시블(flexible) 스크린과 같은 크기의 종이 문서, 그리고 핸드폰이 들어 있었다.

 스크린을 켜자 먼저 숫자가 뜨더니 카운트다운되기 시작했다. 04:59, 04:58, 04:57, 04:56…… 의뢰인은 창이 데이터를 보관하는 것조차 원치 않았다. 숫자들이 아래쪽에 자리잡더니 소녀의 모습들이 슬라이드되기 시작했다. 환하게 웃는 클로즈업 몇 장, 고급 저택 풀장에서 수영복을 입은 전신 몇 장, 그외 스냅 사진 몇 장. 모두 소녀의 일상을 보여주는 모습들이었다. 유명인이나 연예인은 분명 아니었지만 그렇게 보일만큼 예쁜 아이였다. 특히 클로즈업 사진의 웃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는데, 오드 아이가 짓는 눈웃음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였다. 홍채 이색증은 아닌 것 같았고 아마 요즘 아이들에게 유행인 것 같았다.

 창은 의뢰인이 딸을 언론에 노출시키지 않고 애지중지 키우는 중이었으리라 생각하며 소녀의 모습들을 뇌리에 담아두었다. 5분이 지나자 데이터가 파기되었고 플렉시블 스크린까지 오그라들며 새카맣게 타버렸다. 창은 그것을 휴지통에 버렸다.

 다음은 핸드폰. 작고 평범한 전화기였고 저장된 번호는 하나뿐이었다. 앱들을 살펴보았지만 기본 앱들 뿐이어서 창은 작업공구를 꺼내 핸드폰을 분해해 보았다. 역시나 기판에 위치추적기가 붙어 있었다. 위치추적 앱이 아니라 아날로그 방식을 쓴 걸 보면 나름 머리를 쓴 것이다. 창이 아날로그적 인간이라는 것을 간과하긴 했지만.

 위치추적기는 창을 손바닥 안에 두겠다는 뜻이었다. 믿지 못해서라기 보다는 상황을 꿰뚫고 있어야 안심하는 자들이었다.

 창은 어떻게 할까 하다가 그냥 두기로 했다. 의뢰인 쪽이 준비를 한답시고 한 것이니 당분간 자기들끼리 만족하며 창을 감시하도록 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돌발상황이 생긴다면 창이 그것을 역이용할 수도 있다.

 소녀가 납치되어 있을 예상지들을 살펴보기 시작했을 때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은행계좌에 선금이 입금되었다.

 “확실하군, 마음에 드는데?”

 이어서 알람이 울렸다. 입금된 계좌에서 곧바로 700 가까이 빠져나갔다는 알람이었다. 자신을 감시하는 것은 의뢰인뿐만 아니라 금융권도 있었다.

 창은 허탈하니 중얼거렸다.

 “정말 확실한 놈들이라니까.”



 창은 나름 기준이 있었다. 그것은 형사 시절부터 몸에 밴 것이었고 독립한 이후에는, 조직이라는 기댈 곳이 없어진 후에는 보다 확실하게 지키는 기준이었다.

 의뢰인을 먼저 파악하라.

 사건을 의뢰하는 자들은 대개 정보를 감추기 마련이다. 뒤가 구린 자들일수록 그렇다. 창으로선 그것을 알아야 일을 쉽게 풀어가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었다.

 다음날 유미호로부터 변호사에 관한 자료가 받은 창은 의뢰인에 대해 파들어갔다. 먼저 변호사. 스기하라 고 태식이라는 이름이었다. 30대 후반 나이에 일찌감치 변호사를 개업한 자였고, 법조계 내에서는 더 이상 위로 올라갈 욕심도 능력도 없고 현실에 안주하는 부류였다. 하긴 대기업 법률자문이라면 괜한 욕심 따위는 안 부려도 될 것이다. 충직한 개가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테니까.

 창은 스기하라가 속한 법률회사가 자문하는 대기업들을 찾아냈고, 그들 중에서 진짜 의뢰인을 찾아냈다. 스기하라가 직접 담당하고 있었다. 

 스테판 Lee 재수. S&H Bio 부사장이자 S&H 생명공학연구소 상임이사.

 S&H 그룹 계열이라면 의뢰인이 자신을 감추려 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그들이라면 자신들이 가십거리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한 세기 전부터 한국에서 이미 다국적 기업으로 자생한 S&H는 지구연방 시대에 들어와서도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일찌감치 패러다임이 IT에서 생명공학으로 옮겨가리라는 것을 알고 선점했기 때문이었다. 정보는 그들의 것이었다.

 S&H Bio는 그룹 내 주 계열사 중 하나였고 S&H 생명공학 연구소는 그 핵심기반이었다. 그러고보니 몇 년 전 S&H Bio가 이미 완성된 게놈지도를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배아복제 사업에 착수한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 아직 법적 장벽과 윤리적 저항에 부딪치고 있지만 사람들은 조만간 그들의 계획이 가시화할 것이라 예측했다. S&H가 추진하는 사업이니까, 시티 정부는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스테판 Lee는 그룹 후계 구도에서 우위에 서게 될 것이다. 

 그때는 정치가 아니라 전쟁이겠군.

 그들의 후계 다툼이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지만 사건은 단순해 보였다. 스테판 Lee 재수의 경쟁자들 중 하나가 그의 딸을 납치했다. 스테판은 적이 누구인지 예측했고(어쩌면 그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뒷조사를 했다. 딸이 갇혀 있을 곳도 파악했다. 그는 경쟁자를 엿먹일 방도를 구상하는 중이고, 그 전에 딸을 찾으려 한다. 경쟁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그래서 창이 고용된 것이다.

 창은 위험성을 고려해 보았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대기업은 마피아 조직이 아니다. 그들은 힘이 있지만 그것을 남발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품위 있게 자신들의 폭력을 행사한다.

 아마도 예상지들에서 한동안 수소문해야 할 것이다. 소녀를 찾아내 스기하라에게 연락하기만 하면 된다(그 후엔 그들이 그룹 내 군대를 침투 시키겠지). 창의 역할은 거기까지다.

 스테판의 가족은 아내와 딸뿐이었다. 딸은 열 다섯, 이름은 세아. 창이 찾아야 하는 소녀다.

 창은 소녀에 대해 검색해 보았지만 도움될만한 것은 나오지 않았다. 네트가 정보의 바다라는 말은 옛말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스테판과 같은 상류층은 네트 안에서도 자신들만의 울타리를 쳐놓고 있다. 그 세계에서도 그들은 상류층인 것이다. 전문가를 끌어들인다면 정보를 얻어낼 수 있겠지만 창의 능력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최근 기사는 찾아낼 수 있었다. 차단할 수 없는 큰 사건이었기 때문이었다. 2년 전 소녀가 개인 항공기 추락으로 죽을 뻔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소녀는 아버지의 재력과 첨단의료기술로 살아남았다. 사건은 조용히 지나갔고 흔적이라곤 계열 항공사 임원들의 해임 뿐이었다. 기사는 단순 사실만 전달했고 이후 벌어진 일들은 통제되었는지 다른 기사들을 찾을 수 없었다.

 단순한 사건이었지만 찜찜한 게 없지는 않았다. 바로 상해 시티.

 소녀에 대해 파악한 창은 제주 시티와 상해 시티 중 어느 쪽을 먼저 팔지 살폈는데, 스기하라의 정보와 맞지 않는 것이 있었다. 상해는 S&H Bio의 대규모 생명공학연구소가 있는 곳이었다. 그는 그곳들이 분명 경쟁자들의 자회사와 중국 공장이 있는 곳이라고 했다. 아마 그는 창이 사전조사를 하리라곤 예측 못했을 테지만, 잘못된 정보는 잘못된 상황으로 연결되는 법이다.

 정보대로라면 스테판의 경쟁자는 소녀를 납치해 스테판의 연구소가 있는 곳에 숨겨두고 있다. 그 의도가 뭐지? 그곳에서 어떻게 스테판을 압박하려는 거지? 그들 사이의 정치적 문제와 관련 있는 것이겠지만, 창은 찜찜함과 함께 어떤 직감이 일었다. 그곳에 뭔가가 있다.

 창은 거기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상해

 

 상해 시티는 20세기 SF영화에 등장하던 도시가 아니다. 산성비가 내리고 건물마다 무국적의 간판들이 덜렁대며 그 아래에는 희망을 포기한 사람들이 정처없이 돌아다니는, 그런 디스토피아가 아니라는 뜻이다. 상해 시티는 지구연방 정부도시들 가운데 중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도시 중 하나다. 도시는 여전히 바벨탑마냥 천상을 향해 치닫는 중이었고 거리의 사람들은 생기가 넘쳤다.

 그러나 거대한 도시 외곽으로 갈수록 양상이 바뀌었다. 북쪽 자딩구(嘉定区)와 칭푸구(青浦区) 외곽의 지아밍(假名) 자치현은 상해 중심과는 달리 아직 혼잡했다. 창이 임무를 시작해야 하는 동네였다. 

 옛 창녀촌처럼 온통 붉은 조명의 호텔에 짐을 푼 창은 느긋하게 도시를 파악했다. 지아밍 시내는 다국적 연구단지들과 암시장들이 블록마다 교차하고 있었고, 현재와 20세기가 혼재되어 있었다. 창은 그 어수선함이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이곳에는 자신들의 삶을 개척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흘을 관광객들과 뒤섞여 돌아다니면서 깨달은 것은 소녀를 찾는 것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대륙 시티들이 부활시킨 호구제도 때문이었다. 지아밍은 S&H Bio의 상해 주재 생명공학연구소가 들어오고 연관된 다국적 기업들과 제약공장 단지가 쫓아 들어오면서 새롭게 부상하는 중이었지만 호구제도 때문에 슬럼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시티정부 입장에서는 통제할 수 없는 인구를 통제하려는 정책이었지만 다국적 기업들을 보고 밀려들어온 대륙 내 외지인들은 아우성이었다. 사람들은 시민권을 요구했고 상해 시티 정부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만 했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하루가 다르게 태업과 폭동으로 자신들의 불만을 표출했다. 소외를 인정한 자들은 소수민족 중심으로 마피아들을 결성했고 그들에 의해 온갖 범죄들이 들끓고 있었다. 지아밍은 상해의 그림자였다.

 창은 그러한 상황을 스기하라에게 보고했다. 그는 소녀를 찾는 것이 늦어지면 여러모로 좋지 않다는 의앙스를 풍겼다. 창은 2주 안에 소녀를 찾겠다면서 의뢰인을 안심시켰다.

 그를 위해 창은 먼저 소문을 냈다. 그는 S&H Bio 생명공학연구소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사람을 찾았다. 소녀의 신상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고  S&H 그룹과 관계된 사람이라고만 했다. 당연히 건질 것은 없었다. 지아밍에 새로 파견된  S&H 그룹 사람은 없다는 식이었다. 창은 이틀 동안 인근 술집들을 돌아다니며 같은 수소문을 했고, 곧바로 반응이 왔다. 창은 도시 곳곳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들을 느낄 수 있었다.

 창은 기다렸다. 유괴범들이 소녀를 이곳으로 데려왔다면 지금쯤 S&H 그룹 사람을 찾는다는 창의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그들은 행동을 취할 것이다. 창은 그때를 기다렸다.

 1주일이 지나고 황사가 내려앉기 시작했을 때, 창은 감시가 붙었음을 눈치챘다. 감시자는 황사 속에서 능숙하게 모습을 감추었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었다. 창이 목표로 한 자들일 수도 있고 그저 외부인을 노리는 토박이들일 수도 있었다.

 이틀 전에 창은 그자를 확인했다. 얼굴은 동양계였으나 몸집은 서양인처럼 크고 다부졌다. 창은 하루 동안 그를 확인하면서 소녀를 찾는 일을 계속했고, 확신이 서자 그를 유인했다. 지아밍 중앙 광장에서 공장 지역으로 그를 끌어들였다. 사람들과 골목들 사이를 지나 인적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기다렸다. 그는 처음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미소를 지어보였다. 미행을 들킨 것을 감추려는 미소였다.

 창은 그가 목표한 자가 아님을 직감했다.

 “변호사 양반은 잘 계시나?”

 그는 으쓱하더니 대로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무슨 상관이야, 그런 작자들이야 언제나 잘 살고 있지.”

 말본새로 보아 의뢰인의 직속은 아니었다.

 창은 용병일 거라 생각했다. 의뢰인 쪽에서는, 자기들 딴엔 은밀하게 준비하고 있었으니 경쟁자를 의식해 그룹 내 군대를 끌어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역시 창처럼 아웃소싱 용병일 터였다.

 “그래, 날 쫓아다닌 이유는?”

 “테렌스 준이 제안하길, 탐정 하나가 누굴 찾아낼 거라더군. 그 탐정이 다치지 않게 돌봐주라던데?”

 “내 몸 하나는 간수할 수 있어.”

 “미행을 눈치챈 걸 보니 그럴 것 같긴 해.”

 창은 스기하라가 자신을 미행하도록 시킨 것일까 생각해보았다.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창이 소녀를 찾아내면 출동하라는 임무를 주었을 것이다. 아마 조급한 용병이 혼자 오버하고 있는 것이리라.

 역시나 그가 말했다. 

 “며칠 지켜보니 아직 일을 못 끝낸 것 같던데, 목표는 언제쯤 찾을 수 있지?”

 “당신이 얼쩡거리리지만 않으면 금방 찾을 거야.”

 “오케이, 더 이상 방해하지 않고 쥐죽은 듯 대기하고 있지. 하지만 언제든 이 스네이크 팀을 찾으라고, 5분대기조처럼 달려올 테니까.”

 그는 골목을 나가려다가,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아, 당신. 이름이 본명인가?”

창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다시 한 번 이름을 바꾸던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용병한테까지 놀림 받는 이름이라면 바꾸는 것이 나았다.

 창은 대꾸하지 않고 물었다.

 “당신 팀은 몇이지?”

 “나까지 셋.”

 “괜찮겠나? 목표가 몇인지 아직 파악 안 됐는데.”

 “안심해, 내 팀은 정예라고. 꼬맹이 납치범들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

 그는 씨익 웃고는 손을 흔들며 걸어갔다.

 “몸조심하라고, 정의의 탐정씨.”

 그 뒤 며칠 사이로 황사가 심해졌다. 가시거리가 몇 미터도 안 될 정도였다.

 창은 황사 속을 걷고 있었다. 짙은 안개 속에서 점점 초조해지고 있었다. 소녀에 대한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었고 이곳에 있다는 확신도 받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창은 지아밍을 떠나지 못했다. 이곳에서 소득이 없다면 다음 유력지 제주 시티로 떠나야 했지만, 알 수 없는 직감이 그를 붙들어놓고 있었다.

 지아밍 시민들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적지 않은 이들이 S&H에 적대적이었다. 다국적 대기업으로 인해 도시가 성장하고 있었고 그들의 그림자 안에 머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유입되었지만 사람들은 그들과 융화하지 못했다. 

 그거야 어떤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창이 미련을 놓지 못하는 것은 시선들 때문이었다. 스네이크 팀은 창을 지켜보는 시선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밀집한 가게 안쪽의 그림자마다 골목의 모퉁이마다 창을 지켜보는 시선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하나가 아니었다. 어떤 시선은 호기심이었고 어떤 눈초리는 경계와 증오였다. 창은 그 시선들을 눈치챘고, 그것이 소녀와 관계 있음을 직감했고, 일부러 자신을 노출시키며 기다렸지만 허사였다. 그들은 창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는 가운데 시간이 지나갔고, 창은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으며, 황사는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 속에서 길을 잃은 것이다.

 안개 속에서 꼬맹이 하나가 걸어나왔다. 녀석은 곧장 창에게 다가와 물었다.

 “미스터 창?”

 창이 끄덕이자 녀석이 쪽지 하나를 내 보였다. 비뚤한, 엉성한 글씨체로 한글이 써 있었다. ‘사람을 찾고 있나?’

 창은 소년을 쫓아갔다. 녀석을 상황파악 못하고 혼자서 떠들어댔다. 덕분에 황사 속에서 모습을 감췄다 드러냈다 하는 녀석을 놓칠 염려는 없었다. 창은 방향을 가늠했고 사람들 떠드는 소리와 상차이 향내가 짙게 배어나는 것으로 보아 광장 옆 시장일 거라 짐작했다. 

 “어디까지 가는 거냐.”

 창이 물었다. 녀석이 멈추더니 창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쏟아냈다. 그리고는 개구진 표정으로 슬금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창이 쫓아가려 하자 녀석은 재빠르게 몸을 돌리더니 황사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녀석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창은 드디어 반응이 왔음을 알았고, 어떤 식으로 대처할지 판단했다. 촌뜨기 관광객처럼 행동하며 의중을 떠 볼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대응해볼 것인가.

 그러나 판단은 그들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려 있었다.

 창은 경계하며 짙은 황사를 주시했다. 사람들 떠드는 소리 속에 언뜻 남자의 형체들이 보였고, 창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위압적인 형체들을 보며 이자들이 대화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둘 또는 셋. 대응할 수 있는 수였다. 하지만 그것이 옳은 행동일까? 창의 역할은 이자들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소녀를 찾는 것이다…… 그때 눈 앞이 번쩍거렸고 뒷머리가 깨져나가는 듯한 얼얼함을 느꼈다.

 정신을 잃을 때까지, 창은 몇 번이나 섬광을 보았다.






  소녀


 창은 여전히 의자에 묶인 채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다시 홀로 내버려졌고, 혼란스러웠다. 혼란 속에 질서를 부여해보려 애썼다.

 뤄강은 몇 시간 동안 창을 몰아붙이며 그가 지아밍에 들어온 목적과 의도를 캐려 했다. 창 역시 진실을 털어놓으며 정보를 끌어냈다. 그가 파악한 것은 뤄강이 S&H Bio를 고발하려는 시민단체 우두머리라는 것이었다. 한 세기 넘게 존재해 왔고, 스스로 다국적 기업의 힘이 얼마나 센지만 확인시켜 주는 미미한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나 대개 순진한 이들이 그렇듯 뤄강 역시 완강했다. 자신들의 신념이 거대 악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고 믿음은 자신들을 과격하게 만들었다. 창이 눈치 채기로, 뤄강 집단은 최근 S&H Bio에 타격을 줄 뭔가를 입수했다. 아직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지만, 조만한 뇌관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창이 그런 자신들을 무력화하기 위해 파견됐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단언하듯 말했다.

 “당신은그를 찾지 못할 거요, 우리가 내놓지 않는 한.”

 창은 뤄강 집단이 꾸미는 일에는 관심 없었지만, 그 엇갈린 대화 속에서 뭔가를 직감했고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고민했다. 분명 자신의 임무와도 관계된 것이었다.

 독방 어둠이 깜박거리며 불이 켜졌다. 창이 눈부심에 적응하는 동안 문이 열리며 계집아이가 들어왔다. 손에는 요우티아오 두 개와 또우지앙 그릇이 들려 있었다. 의족 때문에 걸을 때마다 또우지앙이 넘쳤고 창 앞에 왔을 때는 반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계집아이는 요우티아오를 또우지앙에 찍어 창에게 먹여주었다. 창은 먹으면서 아이를 살폈다. 왼눈은 여전히 겁먹은 채였고 적출된 오른눈은 여전히 공허했다.

 끼니를 때우고 고맙다고 하자 아이는 그저 수줍게 웃었다.

 “눈은 어떻게 된 거지? 다리는?”

 아이가 다시 두려움을 품으며 주저했다.

 “괜찮아, 말해도 돼.”

 아이는 망설이다가, 또는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모르는 듯 하나 뿐인 눈동자를 굴리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원래부터 이랬어요.”

 “무슨 뜻이지?”

 “원래부터 아팠다고요. 그래서 밖에도 나가지 못하고 병원에서만 살아야 했어요. 아빠가 그랬어요, 내 안에 있는 어떤 바이러스 때문에 몸의 기관들이 썩어간다고…… 그래서 그때마다 썩어가는 부위와 장기를 떼어내야 했어요. 2년 전 깊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보니 다리가 없어졋어요. 또 한달 후에는 눈이 없어졌죠.”

 창은 아이에게 호기심이 일었고, 그리고 의심했다. 지난 세기 동안 의학의 발달로 인해 보다 강력한 바이러스들이 창궐하긴 했지만 그런 바이러스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네 아빠는, 이곳에 있니?”

 “아니요, 뤄강 아저씨가 나를 데려왔어요. 뤄강은, 아빠가 나쁜 사람이랬어요.”

 창은 끄덕이다가 아이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구나.”

 “모르겠어요, 그냥 나는….”

 “아빠가 보고 싶니?”

 “아뇨. 그치만 언니는 보고 싶어요.”

 “언니?”

 계집아이가 끄덕였다. 그리곤 혼자 상기되며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빠는 나에게 쌍둥이 언니가 있다고 했어요. 내가 병원에만 있어야 해서 만날 수 없었던 언니요. 하지만 내가 눈 적출 수술을 받고 깨어났을 때, 언니가 한번 문병을 왔었어요. 그때 언니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죠. 나는 언니를 보자마자 언니가 좋았어요. 그러니까 언니는, 너무 예뻣어요. 그리고 건강했어요. 아파서 병원에만 살았던 나와는 너무 달랐죠. 나는 언니한테 반했어요. 우리 언니는, 너무 예쁜 눈을 가지고 있어요.”

 아이는 진정으로 기쁜 미소를 지었다.

 “아저씨도 언니를 보면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창은 아이의 눈을 보았고, 자신이 기억하는 소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같은 또래라는 것 외에는 너무나 다른 아이들이었다.

 “넌 몇 살이지?”

 “네 살이요.”

 창은 잠시 혼란스러웠고 혼란은 총소리와 함께 끊겨버렸다.

 바깥이었다. 문 밖에서 반격하는 총소리와 비명소리가 간격을 두고 들려왔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졌다. 순간 창은 모든 것을 관통할 수 있었다.

 창은 놀라 어쩔 줄 모르는 계집아이에게 소리쳤다.

 “이걸 풀어줘, 어서!”

 계집아이는 겁먹고 뒷걸음질쳤다.

 “풀어주면 안 된댔어요, 뤄강 아저씨가.”

 “젠장, 그럼 어서 숨어!”

 계집아이는 이해 못하고 창을 보았다.

 “널 찾으러 온 거야, 어서 숨으라고!”

 그러나 겁에 질린 아이는 어쩔 줄 몰라했고, 그 사이에 문이 열리며 용병들이 들이닥쳤다. 스네이크와 부하들이었다.

 스네이크는 창의 꼴을 보더니 이죽거렸다.

 “내가 탐정 씨를 보호해 주겠다고 했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하지 않나?”

 “핸드폰.”

 위치추적기를 한번은 활용하려 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창은 그가 어떻게 나올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스네이크는 부하에게 창을 풀어주라고 끄덕이고는 계집아이의 작은 얼굴을 잡고 살폈다.

 “제대로 찾았구나, 꼬맹이.”

 부하 하나가 창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창은 스네이크를 주시했고, 그는 고글에 달린 카메라를 조정했다. 상황을 중계하고 있었다. 그는 허리춤의 단검을 꺼내 가차 없이 아이의 목을 그었다.

 창은 비명을 지르며 부하를 걷어차며 스네이크를 향해 몸을 날렸다. 뒤에서 한팔로 목을 끌어안고는 놈의 허리에 찬 권총을 빼 머리에 겨누었다. 부하들이 반사적으로 소총을 겨누며 창과 대치했다. 창은 놈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 너희와 나의 차이가 뭔지 알아?”

 그런 상황에서 오는 차이는 분명하다. 녀석들은 대장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망설이기 마련이고 창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예상대로 놈들이 시선을 교환했고, 그 틈을 이용해 창은 둘을 쏘아 쓰러뜨렸다. 이어 스네이크에게서 떨어지며 총을 겨누었다.

 스네이크는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했다.

 “이봐 탐정, 뭔가 오해가 있나본데. 당신과 우리 임무는…….”

 “시끄러워.”

 창은 방아쇠를 당겼고 고꾸라지는 고깃덩이를 뛰어넘어 아이를 살폈다.

 아이는 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목을 부여잡고 떨고 있었다. 창이 아이의 목을 눌렀지만 주체할 수 없이 피가 새나왔다. 

 아이는, 계집아이는 피로 젖은 자기 손을 보며 말했다.

 “피네요, 피가 많이 나와요.”

 “말하지 마.”

 그러나 창은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도 아는 게 분명했다.

 “저 사람들은 누구예요?”

 “네 아빠가 보낸 자들.”

 “뤄강 아저씨가 맞았네요. 정말로 나쁜…….”

 아이가 콜록 피를 토했고 창의 얼굴에 튀었다. 화가 치밀 만큼 뜨거운 피였다.

 “아저씨는 이, 이름이 뭐예요?”

 “창…… 저스티스 창.”

 “그게, 이름예요?”

 아이가 어이없단 듯 웃음을 터뜨렸다. 창은 이제 이름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럼 아, 아저씨는 좋은 사람인 거네요?”

 “그냥 웃기는 이름일 뿐이야.”

 얼마나 웃겼던지 아이는 하나뿐인 눈에 눈물까지 맺혔다.

 “어, 언니가 보고 싶어요. 뤄강 아저씨가, 아빠에 대한 증언하면 언니를 만날 수 있다고 했는데…… 언니의 예쁜 눈을 보고 싶었는데.”

 “그건 네 눈이었다.”

 “그, 그럴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어요.”

 아이의 눈에 두려움과 기쁨이 교차했다.

 “그럼 나는, 언니의 일부가 된 거네요. 그렇죠?”

 창은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그것만으로도 기뻐한다면.

 아이가 편안해질수록 창은 오히려 몸을 떨었다.

 “넌 이름이 뭐지?”

 “나는, 나는……”

 “괜찮아, 괜찮아 아이야. 말하지 마.”

 창은 아이의 떨림이 미약해지는 걸 느꼈고 그것을 붙잡으려 자기도 모르게 떠들었다.

 “그냥,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목마를 때 물을 갖다 줘서, 배고플 때 빵과 콩국을 줘서 고맙다고. 이제 그 고마움을 어떻게 갚지?”

 아이가 떨림을 멈추었다. 그와 함께 창은 자신도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한없이, 무작정 가라앉았다. 한참 후에 아이가 여전히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창은 그 젖은 눈을 감겨주며 다시 중얼거렸다.

 “어떻게 갚아야 하지?”






  뒷맛


 그의 네 번째 저택의 드넓은 뒤뜰에는 북쪽에서 공수해온 침엽수들이 심어지고 하늘을 배경으로 인공 설원이 펼쳐져 부분적으로나마 툰드라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명화와 골동품으로 저택을 장식하는 것은 지난 세기의 유행이었고 요즘은 지구촌 풍경의 단면을 옮겨다 놓는 것이 트랜드였다.

 반면 저택 앞쪽은 사시사철 마이애미의 날씨로 관리되는 그쪽 풍의 풀장이 있었다. 그 곁에 야외 바가 마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뒤쪽 풍경에 비한다면 주인을 위한 실용적인 장소였다.

 그가 이 네 번째 저택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은 저택 자체가 센텀타워 103층 꼭대기에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사생활을 온전하게 보호받으며 아래 세상을 굽어볼 수 있었다. 거기서 오는 자부심은 다른 저택들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는 마이애미의 날씨에서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잠수한 채 풀장을 왕복했다. 그는 서울 시티 3월에 마이애미 날씨를 즐기는 것은 어딘가 인위적인 느낌이었고, 다음 주에는 마이애미의 저택으로 가 며칠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고개를 들었는데 수면 위로 남자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수영장 가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출발점에 도착해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자 남자가 말했다.

 “내가 누군지 알겠소?”

 그는 기억을 잠시 더듬어보곤 끄덕였다.

 “스기하라가 고용했던 탐정이군. 그 용병이, 이름이 뭐였더라? 그래, 스네이크. 그 독사라는 자가 투입작전을 중계해준 걸 봤지. 게임처럼 리얼하더군.”

 창은 그가 풀에서 나오는 걸 지켜보며 말했다.

 “리얼했다고, 게임처럼?”

 “단어 선택이 잘못 됐나? 그냥 재미 있었다는 뜻이야.”

 그는 고개짓으로 까딱하며 말했다.

 “이쪽으로.”

 창은 스테판을 따라갔다. 그는 야외 바에서 술을 꺼내 잔에 따랐다. 창은 그가 시간을 벌려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그는 태생이 상류층이었다. 행동거지마다 자신감과 여유가 흘렀다.

 그가 얼음을 띄운 칵테일 잔을 건넸지만 창은 받지 않고 물었다.

 “왜지?”

 “어디서부터 알고 싶은 거지?”

 “일부러 딸을 복제한 건가?”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야. 4, 5년 전인가, 우리 연구진이 체세포 복제를 속성시키는 기술을 보고했거든. 이전 기술보다 나름 진일보했는데, 대리모 없이 인공 수정해 성장기를 단축시킬 수 있는 기술이었지. 나야 당연히 결과물이 보고 싶었고.”

 스테판은 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는 파라솔 벤치에 가 앉았다. 그리고는 느긋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구연방 정부는 아직도 인간 윤리니 뭐니 사소한 걸로 제 발목을 옳아맨 채 법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주지 않았어. 그래서 내 딸의 것을 이용해 조용히 한번 만들어봤을 뿐이야. 일종의 프로토 타입이라고 할까…… 하지만 그것 덕을 보기도 했지. 2년 전 내 딸이 사고를 당했을 때, 그것 덕분에 딸아이가 완치될 수 있었거든.”

 “그런 사실이 소문날까 봐, 딸이 납치됐다는 식으로 일을 맞긴 거군.”

 “지아밍의 보잘 것 없는 시민단체 하나가 그걸 빼돌렸거든. 예나 지금이나 걸리적거리는 자들이라니까. 하지만 당신 덕에 잘 끝났지, 그 점은 고맙게 생각해.”

 그는 창을 올려다보며 강자의 미소를 보였다. 창은 자제하며 말했다.

 “꼭 그런 식으로 해야 했나?”

 스테판이 무슨 뜻이냔 듯 보았다.

 “당신 정도면 시민단체 따위는 컨트롤할 수 있었을 거고. 어차피 누더기가 된 아이, 그낭 그렇게 살아가게 두어도 됐을 텐데…… 죽여야만 했느냐고.”

 “이건 논리의 문제가 아니야, 자존심의 문제지.”

 이번에는 창이 무슨 뜻이냔 듯 그를 보았다.

 “내가 그걸 만들었어. 내 딸의 DNA 하나로 그걸 창조했다고. 그런데 그게 기껏 만들어 준 에덴동산을 빠져나간 거야. 창조주의 말을 어기고 하찮은 뱀을 따라 에덴에서 도망친 거지. 그런데도 내가 가만히 있어야 했겠나? 이 스테판 Lee가? S&H의 후계자가?” 

 창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태생적으로 상류층이었고 그들만의 논리가 있었다. 자신이 그것을 깰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내가 질문을 하지, 여긴 왜 온 거지?”

 “뭣 좀 물어보려고.”

 “궁금한 것은 다 알려준 것 같고, 다른 이유가 있어 보이는데?”

 그가 다 알고 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매력적인 미소였다.

 “보너스가 필요해?”

 “말했잖아, 물어볼 것이 있다고.”

 “궁금증이 해소된 것이 아니었나? 그래, 뭐지?”

 “그 아이, 이름이 뭐였지?”

 스테판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창도 그런 반응일 거라 예상은 했었다.

 “고작 그것이 궁금했던 거야? 이봐, 그런 것에 이름 같은 게 있을 턱이 없잖아. 연구진은 P 타입- 뭐라고 부르는 것 같긴 하던데…… 당신, 생각보다 감상적이네?”

 창은 말없이 그를 지켜보았다. 그가 스스로 오만을 즐기도록 내버려둔 뒤 총을 꺼내 겨누었다.

 그는 당황한 듯했지만 아직 여유를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의뢰인을 찾아와 총을 겨누는 해결사라, 버릇 없는 자로군. 왜지…… 아하, 그것이 불쌍했다? 그래서 뭐, 복수라도 해주기로 약속했나? 그런 거야?” 

 “아니, 일일 뿐이야. 비록 의뢰인에게 시간이 없었지만, 난 그 작은 소녀가 의뢰를 했을 거라 생각해.”

 그가 창을 비웃은 다음 말했다.

 “대가는? 내가 그 열 배를 주지.”

 “한 잔의 물과 요우티아오 두 개. 그리고 반쯤 넘쳐버린 또우지앙 한 그릇.”

 스테판은 이해 못하는 눈으로 쳐다보았고, 창은 그 역시 그럴 거라 예상한 터였다.

 이전 의뢰인은 회유가 통하지 않자 이번에는 협박을 했다.

 “당신 실수하는 거야, 나를 건드렸다간 당신은 살아남지 못 해.”

 “나도 그 점을 고려했어.”

 창은 점차 두려움이 깃드는 그를 확인하며 말했다.

 “당신들은 내게 비밀리에 일을 맡겼지? 당연히 나에 대한 정보는 최소화 해서 가지고 있을 거야. 아마 날 지칭하는 단어라곤 ‘해결사 C’ 정도겠지. 해서 내 정체가 드러날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판단했지. 그래도 만일을 대비해 그 날 스네이크가 중계했던 고글의 메모리를 보관하고 있어. 그러니 당신이 죽어도 그룹 차원에선 시끄러워 지는 걸 바라지 않을 거야. 어쩌면 그룹 내 당신의 경쟁자는, 그런 자가 있다면 오히려 반가워 하겠지. 또 이곳에 오기 전에 조사해보니 저택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지 않았더군. 당신이 사생활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그것을 향유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 거기에는 세상에 당신을 건드릴 자가 없다는 오만도 한 몫 했겠지……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내 존재를 알고 있는 변호사 스기하라 뿐인데, 내가 손에 착용한 인조 피부에는 그의 지문이 찍혀 있어.”

 그는 이제 여유 따윈 내버리고 공포에 질렸다. 창은 그가 충분히 공포를 즐기는 걸 지켜본 후에 방아쇠를 당겼다. 그는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았다. 자신에겐 절대 그런 일이 벌이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자의, 그 때문에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창은 한번 더 총을 쏴서 그럴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뒷맛이 썼다. 창은 아이의 이름을 알지 못해서 그런 거라 생각했다.

 “뭐야, 당신?”

 창은 뒤를 돌아보았다. 소녀였다. 창이 임무를 위해 각인해두었던, 아이의 본래 모습이었을 아름다운 아이.

 아이는 비틀대며 다가오더니 늘어진 시체를 살피곤 창을 보았다. 그러나 제 아빠의 죽음에도 놀란 표정 따위는 없었다. 상황파악 못할 만큼 천진한 것인가, 아니 약물에 취한 것이다. 약에서 깨어나면 창의 얼굴 조차 묘사하지 못할 것이다. 창은 그 점에 안심이 되었다.

 소녀가 말했다. 

 “귀찮게 됐네…… 나도 죽일 거야?”

 창은 소녀를 보며 아이를 생각했다. 저 매끈한 다리 하나는 아이의 것이었고, 저 오드 아이의 갈색 눈은 분명 아이의 것이었다. 다시 괜한 연민이 일었다. 한 아이의 귀중한 것이 헛되이 소비되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내가 물었잖아, 나도 죽일 거냐고!”

 “아니, 넌 건드리지 않을 거다. 그 아이가 널 좋아했거든.”

 “무슨 개소리야?”

 소녀의 태도에 창은 뭔가가 끓어올랐다. 그건 약물 때문만은 아니었다. 본연의 모습에 관한 거였다.

 “그럼 어서 꺼져, 감상적인 대사 같은 거 늘어놓지 말고.”

 창은 총을 들어 쏘았다. 소녀의 몸뚱이가 풀에 빠졌다가 떠올랐고, 물 속을 붉은 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죽음까지 아름다운 소녀였다.

 창은 잠시 소녀를 지켜보았고, 잠시 저택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총을 떨어뜨리고 저택을 걸어나갔다.

 여전히 뒷맛이 썼다. 창은 씁쓸함을 자아내는 툰드라 풍경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P.S.  본 작품은

'독자 중장편' 페이지(2011.4.10)에 올렸던 <여자를 믿지 마라> 주인공의 연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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