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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휴먼 에스컬레이션

2015.12.31 19:1612.31

 

 

 

 

휴먼 에스컬레이션

Human Escalation


민경일

 

 

어딘지 모를 드넓은 사막, 저 멀리 일렬로 늘어선 모래 폭풍이 고개를 들었다. 하늘의 끝자락을 삼킨 어둠에 데이비드는 눈을 질끈 감고, 그가 서 있는 곳은 투명한 벽으로 둘러싸였지만 지금 당장 모래바람이 볼을 스치는 것만 같았다.

 

그런 것 따윈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나지막이 내뱉은 데이비드의 말에 구형 안드로이드는 산뜻하게 답했다.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 아닐까요?”

 

그럼, 지금 내가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가?”

 

그것도 생각하기 나름이겠죠.”

 

데이비드는 끓어오른 가래에 기침을 토했다. 그의 아내는 데이비드를 흔들며 다급하게 무언가를 말하고, 그는 뭐라고? 라고 되묻고 싶었지만 도통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신이 아득했다. 과연 우리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안드로이드가 버튼을 누르자 거대한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은 이글거리는 불꽃을 가까스로 마주했다. 그 묵직한 열기가 눈꺼풀을 넘어 들어 눈이 시렸다. 용납할 수 없지만 인정해야 하는 다홍빛 현실.

 

3달 전.

 

여느 날과 똑같은 이른 아침, 데이비드는 시내로 향하는 전철에서 베토벤 9합창교향곡 4악장을 듣고 있었다. 기괴한 선율은 고뇌와 희망을 넘나들며 웅장한 지평을 열고, 이제 막 바리톤의 레시터티브(독창)가 시작됐다.

 

‘O Freunde, nicht diese Tone! (, 벗들이여! 이 선율이 아니오!)


데이비드는 곧 합창으로 펼쳐질 환희의 송가를 기대하며 촉각을 곤두세웠다. 북적이는 전철마저도 선율과 같은 선상에 놓인 마냥 극적으로 다가오는 순간. 온전한 몰입으로 뛰어내릴 준비가 되었다!

 

뚜뚜뚜-.’

 

데이비드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따라 사소한 것도 왜 이렇게 배배꼬였는지. 각막에 착용한 스마트 렌즈로 확인한 전화는 번호를 보아하니 꼭 받아야만 했다.

 

여보세요?”

 

데이비드 문 씨, 오늘부로 출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개인 짐은 영업일 3일 이내에 집으로 자동 배송 예정입니다. 우리 제너럴 종합금융은 귀하가 보여준 노고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퇴직금 일시 수령을 원하시면 1번을, 퇴직금 분할수령은 2번을 눌러주세요.”

 

2번을 누르자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전화는 툭 끊어졌다. 곧바로 정지됐던 음악이 이어지고, 바리톤은 좀 더 기쁨에 찬 노래를 부르지 않겠는가!’라며 환희의 송가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신의 광채여, 낙원의 딸들이여! 우리 모두 정열에 취해 빛이 가득한 성소로 들어가자-! 노래와 연주는 역시 훌륭했다. 제멋대로 클라이맥스로 다다르고 있다는 점 빼고는.

 

시민권 2등급 이하는 지금 역에서 환승하시기 바랍니다.’

 

때마침 기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래 그래야겠지. 데이비드는 섹터 14에 내리고는 플랫폼의 노약자석 벤치에 앉았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앉아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쯧쯧, 젊어 보이는 사람이 여기 앉아 있으면 쓰겠나. 지금 나이에서 2등급에 만족하면 안 돼.”

 

, 그러게 말입니다…….”

 

밥 빌어먹고 사는 것이 무척 힘든 세상이 되어버렸어. 안 그런가? 이렇게 오래 사는 것도 아주 두려운 일이야.”

 

한숨을 쉬는 데이비드를 찬찬히 살펴보던 노인은 결국 껄껄대며 웃었다. 아주 껄껄대며.


* * *


데이비드는 디트로이트 외곽에 있는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중거주지역으로 돌아가는 열차는 역시나 한산했고, 차창에 보이는 화사한 계획공원들은 로봇 정원사들이 한창 작업 중이었다. 문득 열심히들 한다고, 로봇들은 마음이 참 편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이번 역은 섹터 24.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데이비드는 부인에게 뭐라고 해야 할까 하며 맥없는 걸음을 걷고 있었다. 만나며 지내는 친구가 별로 없어서일까, 어쩌면 틀에 박힌 생활 덕분이랄까, 머릿속은 한껏 방황했지만 발걸음은 절로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섹터 24는 시민권 3등급 이하의 시민 중에 무자녀 기혼가정의 장기임대주택이 몰려있는 곳이었다. 데이비드는 그곳을 틴박스(Tin Box)라고 부르곤 했다. 밋밋하게 생긴 오피스텔 건물들이 공원 사이사이로 우뚝 서 있는 모습이 어렸을 적 몰래 보물을 넣어두던 양철 상자와 외관이 닮았기에 붙인 이름이었다.

 

틴박스는 정부가 요구하는 몇 가지 사항만 수락하면 누구나 저렴한 생활비로 살 수 있었다. 무자녀 세금을 납부하고 정부가 지정한 아이의 후견인으로서 교류할 것, 개인 생체정보를 임대 기간 동안 정부에 제공할 것, 안방에 거치된 스크린으로 하루 30분 이상 광고를 시청할 것 등등. 이상한 듯 보이지만 요즘 세상에서는 무척 합리적인 조건이었다.

 

이제 40살을 훌쩍 넘긴 데이비드는 한국에서 경제와 생물을 전공한 인재였다. 아내 줄리는 대학 때 만났다. 세계적인 추세였지만 한국의 대학은 20여 개밖에 남지 않았었고, 그 와중에 경제 그리고 인문 분야는 무척 인기가 없었다. 미국과 중국의 핵전쟁에서 부수적 피해를 입은 한국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국제사회의 원조로 가까스로 기초적인 복구에 성공했지만, 피해는 여전했으며 일자리의 질은 한없이 떨어져 있었다. 덕분에 정부는 외화벌이를 위해 사람을 수출하기 위해 각방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대학마다 있던 미국 이민모임. 그것이 그녀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때만 해도 아내는 참 재기발랄했다.

 

가까스로 출국 허가를 받은 두 사람은 섹터 24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전공이 좀 더 실용적이었다면, 본디 가진 돈이 많았더라면 섹터 업그레이드가 가능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아직 젊은데 돈이야 벌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미국의 향취에 취해, 남들보다 알뜰하게 모아서 다른 거주지역으로 이주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10년이 넘게 제 자리라는 것이었다.

 

데이비드는 현관문 앞에 멈춰 섰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사람 사는 것이 다 비슷하다는 어르신들 말씀이 와 닿았다. 현관문을 열어야겠다는, 생각의 승인을 진행할지 말지 고민하던 찰나 그의 부인이 문을 열고 나왔다. 근무지가 집과 가까운 섹터인 덕에 그녀는 늦게 집을 나서곤 했다.

 

깜짝이야! 자기, 이 시간에 여기 왜 있어.”

 

줄리는 오늘도 급하게 나온 듯 머리를 뒤로 질끈 묶고 나왔다. 서른 후반의 수수한 관능미가 흐르는 그녀는 아이가 없었으니 아무래도 같은 또래 친구들보다 젊어 보이기도 했다. 데이비드도 역시.

 

몸이 안 좋아서 휴가 좀 냈어.”

 

어이구, 그러면 말을 했어야지. 일단 나 출근하니까 알아서 쉬고 있어. 저녁에 봐.”

 

줄리는 늘 그렇듯 피식 웃는 그녀만의 미소를 날리고서 급히 단화를 고쳐 신고 총총히 복도로 사라졌다. 현관문은 그새 자동으로 잠겼다. 고심하던 데이비드가 손잡이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하자 문은 다시 열렸다.


* * *


집에 홀로 남은 데이비드는 스크린에 로그인했다. 정확하게는 집에 들어감과 동시에 그냥 그렇게 되어버렸지만. 아무튼.

 

2047027. 데이비드 환영합니다.

 

당신의 스트레스 지수에 근거하여 명상음악을 시작합니다.

 

12평 남짓한 투룸이 그들의 신혼집이자 오래된 보금자리였다. 모든 벽면이, 심지어 천장에서 바닥까지 스크린으로 된 그곳은 바다전망의 호텔처럼 경치가 상쾌했다. 물론 보이기에 그랬지만. 저놈의 명상음악도 지긋지긋했는데, 정부의 일률적인 예방의학 정책으로 한번 시작하면 족히 5분은 들어줘야 했다. 입주 계약서에 사인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월 광고 시청시간 641분이 부족합니다. 시청하시겠습니까?

 

실직과 함께 시민권 3등급에서 2등급으로 강등되어서 그런지 잔여 시청시간이 증가했다. 애꿎은 운영체제에 넋두리해봤자 소용없는 일 아닌가. 로봇윤리 시간에 그렇게 배우기도 했고.

 

그래…… 시간도 많은데 시작해.”

 

침실 전면에 있는 센서에서 데이비드의 안구 움직임을 확인하고 광고영상을 시작했다. 대부분 시답지 않은 내용들. 눈을 3초 이상 감거나 시선을 돌리면 의무 광고시청 타이머가 멈추기 때문에 데이비드는 광고를 애써 뜬눈으로 외면하고 있었다. 어떤 광고는 10년째 같은 광고음악을 썼는데 이따금 본인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할 정도였다.

 

, 여기까지 하지.”

 

619분 남았습니다. 정말로 중단하시겠습니까?

 

데이비드가 고개를 젓자 화면에서는 세금 7.25달러를 낼 때마다 의무 광고시간을 10분씩, 월 최대 1시간을 감면해 준다는 홍보가 흥겹게 이어졌다. 신혼 때는 저 광고 리듬에 어깨춤을 추기도 했었다.

데이비드는 입을 쭈뼛 내밀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의 감정변화를 감지한 스크린은 서서히 흰색으로 바뀌고, 귀에 들리지는 않지만 차분한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누가 기획했는지 모를 일이지만 교도소의 벽면도 흰색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젠장…….”

 

스크린이 일순간에 청명한 하늘과 데이비드가 좋아하는 에메랄드빛 바다를 비췄다. 역시 한 박자 빠르다. 데이비드는 기지개를 켜고는 작심한 듯 일어섰다.

 

* * *

 

그날 저녁, 부부는 침실 옆 자그마한 주방에 있는 식탁에 앉았다. 정부에서 제공하는, 정확하게는 이미 집에 붙박이로 포함되어있는 쿠킹머신을 쓰고 있기에 따로 저녁 메뉴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근래에 구매한 와인모듈은 고가의 와인도 쉽게 만들어 낼 수 있었는데 모든 와이너리와 빈티지의 조성 분석이 완료된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다. 오늘 메뉴는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에 샤또 무통 로칠드 1982년산으로 이틀 전에 예약해둔 것이었다. 마늘 향이 입안 가득 퍼지고 와인도 무척 만족스러웠지만, 데이비드는 얼마 먹지 못하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자기야. 요즘 워낙 프로그램들이 좋으니까 좀 멀리 보고 오래 할 수 있는 제2의 직업을 정하려고 하는데.”

 

데이비드는 파스타면을 배배꼬는 줄리의 눈치를 살피는 중이었다. 뭐 지금만 이런 말을 했던 것도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학창시절에도 두 번째 인생에 대해 언급하곤 했으니까. 그때는 남자로서 믿음직스럽게 보이려고 했던 것이었지만, 지금은 좀 더 구체적이어야 했다.

 

뭐 나쁘지 않지. 근데 회사에 무슨 일 있어?”

 

그렇다기보다 요즘 주식 트레이더가 아무리 큰 회사도 20명을 넘지 않게 줄여가는 추세라서 말이야. 요즘 다 프로그램으로 하잖아. 오래 버티고 있긴 한데 이제는…….”


그녀의 무뚝뚝함에 데이비드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소수만 남으면 연봉이 오를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고.”

 

사실 그녀도 내심 하던 걱정이었다. 웹디자이너인 그녀는 회사에서 새로 도입한 드로잉 인공지능보다 낮은 평가를 받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모든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었는데 몇 년 전부터 특히나 화이트칼라 직업군의 타격이 막심했고 애매한 위치에 놓인 중소 대학들은 재정난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고 있었다. 정해진 순서랄까. 지금 멋쩍은 미소로 이야기하는 데이비드를 바라보는 것처럼. 줄리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그럼 뭐 알아본 거라도 있어?”

 

글쎄, 요리사 아니면 소설가가 좋을 것 같은데.”

 

요리, 뭐 나쁘지 않지. 요즘 100% 수제 요리가 인기이긴 하잖아. 문제는 우리 시민권 등급으로는 위생 허가를 받는 게 쉽지 않아서 그렇지. 정신감정도 세 번이나 통과해야 하고 허가를 받아도 6개월마다 갱신해야 하잖아. 그나저나 웬 소설가야?”

 

그냥, 어렸을 적 꿈이랄까. 아무래도 창의력만큼은 아직 프로그램이 우릴 못 따라오잖아.”

 

데이비드의 말에 줄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런데 돈이 안 되잖아.”

 

데이비드는 그녀를 바라봤다. 사랑스럽지만 고단함이 묻어나는 눈빛. 저기에 곧 해고 사실을 털어놔야 한다.

 

그렇긴 하지. 알았어, 좀 더 고민해 볼게.”

 

아니 뭐 하지 말란 말은 아닌데…….”

 

줄리는 데이비드에 대한 두터운 신뢰가 있었다. 대학 때 만난 그는 언제나 돌파구를 찾아내곤 했다. 지금은 단지 전공을 잘못 골랐을 뿐. 게다가 그를 믿지 않았더라면 한국을 떠나 타국의 틴박스까지 따라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적어도 등 떠밀려 수출된 사람과는 다르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 * *


여기저기 재취업을 알아봤지만 역시나 프로그램보다 성과가 낮은 주식 트레이더를 써주는 금융사는 없었다. 데이비드가 몸담았던 금융계의 경우 직원의 85% 이상을 IT 전문가들로 바꾸는 추세였다. 세무사, 회계사, 변호사 등등, 과거의 전문직은 극소수만이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로봇 인권법이 통과된 작년부터는 고액연봉을 받는 로봇도 다수 생겼는데 그들이야말로 매출을 속이지 않는 최고의 납세자라는 정부의 보도가 연일 이어지는 중이었다.

 

블루컬러 일을 찾던 데이비드는 역시나 하고 한숨을 뿜어낼 뿐이었다. 모든 직업에는 나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법인지라 어떤 일을 선택하든 간에 초심자는 최저임금을 받아야만 했다. 그나마 로봇이 관리하는 기업일 경우 정산이 확실했지만, 사람일 경우에는 열정페이라 해서 임금을 후려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이미 일용직에 내몰린 사람들은 수두룩했고 정부가 인간노동력 소비를 위해서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는 뒷소문이 돌기까지 했다.

 

데이비드가 주먹을 쥐자 스크린에 열려있던 취업공고 브라우저가 닫혔다. 이마를 긁던 그는 말했다.

 

글쓰기 교실 검색.”

 

닥터 킴의 베스트셀러 교실을 추천합니다.

 

정보를 살펴보던 그는 베스트셀러가 된 이후에 수강료를 받겠다는 문구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그렇게 1일차가 시작됐다.

 

 

1달 전

 

한 달 보름 만에 탈고한 그의 처녀작 9번째 차원(The 9th dimension)은 출시 1주 만에 미스터리 스릴러 분야 종합 2위의 위치까지 올랐다. 영상물 중심의 환경에서 꽃핀 인류 자성의 목소리로서 책을 읽자는, 문맹률을 낮추자는, 청년들의 디지털치매를 예방하자는 캠페인도 흥행에 한몫했다.

 

데이비드는 식탁 겸 책상에 앉아 서점에서 제공한 매출 데이터쉬트를 보면서 미소 지었다. 2백만 부 가량 팔린 그의 소설은 4백만 달러를 의미했다. 절박한 상황에서의 기적 같은 일에 그는 줄리를 얼싸안았다.

 

고마워 믿고 기다려줘서.”

 

데이비드의 말에 줄리의 눈시울은 붉어졌다. 그녀는 데이비드의 무릎 위에서 자리를 고쳐 앉고는 양팔을 그의 목에 둘렀다. 따듯한 그의 체온을 느끼며 줄리는 말했다.

 

그나저나 그 글쓰기 교실이 도움된 거야?”

 

, 거기 닥터 킴이라는 강사가 거의 모든 부분에 도움을 준거나 마찬가지야. 퇴고 대부분을 도와줬고. 참 대단하지?”

 

확실히 베스트셀러 작가라 다른가? 강사 약력이 어떤데?”

 

그냥 뭐 유명하다 이런 것들이지. 그렇지 않아도 고맙다는 인사 메일을 보냈어. 한번 만나서 보답하고 싶다고.”

 

데이비드는 방구석을 향해 샴페인 마개를 엄지로 밀어 올렸다. 펑 소리를 내고 벽면 스크린에 부딪친 마개는 천장을 찍고 곧바로 줄리 근처로 떨어졌다. 그 아슬아슬함에 그녀는 화들짝 놀란 듯했지만 이내 히히거리며 웃고, 오랜만에 보는 소녀 같은 그녀의 모습에 데이비드도 덩달아 웃었다. 십여 년 전의 생기가 피어오르고, 둘은 키스를 나눴다.

 

1주 전

 

데이비드는 닥터 킴에게서 만남은 곤란하다는 답장을 받았다. 마음은 잘 알겠으니, 이전 섹터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면 지금 성취한 성공의 초심을 잊지 말라는 충고가 담긴 짧은 메시지가 전부였다. 데이비드와 줄리는 재정상태 덕분에 5등급 시민권을 받을 수 있었고, 덕분에 섹터 9에 새로운 월세 집을 구할 수 있었는데 방 3개에 거실이 달린 멋들어진 스위트홈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빠른 변화만큼이나 출간 첫 주에 2위에 올랐던 그의 소설은 아쉽게도 2주 만에 다른 신간에 밀려 20위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프로그램이 산출한 예상매출은 곧 바닥을 칠 예정이었다. 틴박스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계속 돈을 벌어야만 했다. 시민권 등급이 올랐으니 그가 꿈꾸던 식당을 쉽게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베스트셀러의 짜릿함을 맛본 그는 결국 전업 작가가 되기로 하고 차기작 준비를 서둘렀다.

 

닥터 킴에게 메일 전송.”

 

불가능한 주소입니다. 삭제되었습니다.

 

닥터 킴의 글쓰기 교실 검색.”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가장 비슷한 결과도 없어?” 데이비드는 소리쳤다.

 

사라 킴의 베스트셀러 교실이 있습니다.

 

데이비드 전면의 벽 스크린에는 홈페이지가 떴다. 엇비슷한 디자인과 베스트셀러가 되면 강의료를 받겠다는 똑같은 문구까지. 그는 이마를 쓸어내렸다.

 

수강신청 부탁해.”

 

불가능합니다. 시민권 2등급 이하만 신청할 수 있습니다.

 

데이비드는 멈칫했다. 아무리 정부 보조가 있다고 해서 시민권 2등급 이하만 수강할 수 있다니, 데이비드는 역차별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이트를 빠른 손놀림으로 유영하던 와중에 주소를 찾아냈다. 섹터 9, 그 학원은 그가 통행 가능한 곳 아닌가. 다행이다. 그는 외출할 준비를 서둘렀다. 천연 섬유로 만든 고가의 셔츠를 입고 가방을 챙길 때쯤 널따란 거실에서 드라마를 보던 줄리가 드레스룸으로 들어왔다.

 

잠깐 나갔다 올게.”

 

무슨 일로?” 그녀는 그의 표정을 읽었다.

 

닥터 킴을 꼭 찾아야겠어.”

 

숨고자 작심한 사람을 어떻게 찾아. 그리고 느낌도 안 좋고.”

 

느낌?” 엉성하게 넥타이를 매던 데이비드의 손이 멈췄다.

 

아니 뭐, 그냥저냥.”

 

줄리가 넥타이 매듭을 고쳐 매주자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했다. 넥타이를 손수 맨다는 것, 고전을 추구한다는 것, 아무나 누릴 수 없는 사치였다.

 

요즘 그 지긋지긋하던 광고 안 보니까 행복하지 않아?”

 

그래, 행복해. 근데 안 가면 안 돼?”

 

데이비드는 그녀에게 가볍게 입맞춤하고는 현관으로 사라졌다. 줄리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은 해야 하는 사람이니까.


* * *


데이비드가 도착한 섹터 911번가. 바둑판처럼 정비된 디트로이트의 일반 상업지역은 4층 높이 도미노들이 나열된듯한 풍경인지라 무척 지루했지만, 이래 봬도 세계 3차 대전의 아픔을 20년 만에 극복해낸 쾌거의 산실이었다.

 

11번가의 정중앙에 있는 노던 픽(Northern Peak) 빌딩은 유일하게 5층이었는데, 시스템 오류로 1층 더 지어진 것을 기념비적으로 남겨둔 것이었다. 이제는 그런 오류마저도 목격하기가 쉽지 않아졌으니 꽤 의미 있는 건물이 되고야 말았다.

 

5층에 도착하자 프런트에 앉은 여성은 멀끔하게 생긴 데이비드를 위아래로 훑었다. 별 볼 일 없겠다는 듯 그녀는 매니큐어를 고쳐 바르고 있었다.

 

저기…….”

 

실례지만 저희는 방문 전에 예약하셔야 합니다. 미스터 문님.”

 

역시 생체 및 개인정보는 이미 온갖 곳에 퍼진 듯했다. 시민권 등급이 좀 더 오르면 그것의 공개 여부를 돈을 내고 관리할 수 있었다. 아니면 애초에 높은 등급으로 태어나던가.

 

미처 몰랐네요. 지금 예약 하겠습니다.”

 

어디 보죠. 2049520일 괜찮으시겠어요?”

 

? 2년 뒤잖아요.”

 

그 비서는 도리어 뭐가 문제냐는 듯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앞당길 방법이 없겠습니까?”

 

특별 면담이라는 게 있긴 합니다만 추가비용이.”

 

얼마면 되겠습니까?” 데이비드는 그녀의 말을 잘랐다.

 

“200부터 시작해요.”

 

“200만 달러라고요?” 데이비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금액은 그의 자산의 절반에 달했고, 세무서의 프로그램으로 그만큼의 부를 다시 벌어들일 수 없다는 계산이 나오면 시민권 등급은 다시 떨어지고 말 것이었다.

 

다들 싼 가격이라고 하더라고요.”

 

데이비드는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알겠으니까, 그 특별면담인지 뭔지 빨리 좀 해봅시다.”

 

그를 빤히 쳐다보던 비서는 매니큐어가 번질까 손가락을 치켜들고는 스크린 인터페이스에 정보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곧 임시 신분증이 발급됐다. 그것은 화이트 클린등급 속칭 잘나가는 회사에서 발급하는 섹터 1 출입 확인증이었다. 물론 일회성 티켓. 약속은 다음 주로 잡혔다.

 

섹터 1

 

데이비드는 섹터 1로 향하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일주일을 어떻게 기다렸는지 스스로가 대견할 정도였다. 줄리는 오늘도 데이비드를 만류했지만 그는 그녀더러 쇼핑하라며 코디네이터 로봇을 붙여줬다. 줄리의 심드렁한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를 이해시키려면 진취적인 결과물이 필요했다.

 

어느덧 택시는 거대한 저택의 입구를 지나 분수대를 끼고 돌아 멈춰 섰다. 예상하던 것 이상으로 호화스러웠다. 정원에는 오래전 작품들도 추정되는 석상들이 가득했고, 외관은 교과서에나 보던 2000년대의 양식과 많이 닮아있었다. 대리석 계단을 오르자 나무로 된 커다란 문이 열렸다. 역시나 로봇 집사들이 배웅을 나왔다.

 

한참을 걸어 들어가 데이비드는 응접실에 앉았다. 목제가구로 가득한, 심지어 바닥도 삐거덕 소리가 나는 초호화 인테리어였다. 모든 것이 고풍스러웠다. 은촛대에 양초가 꼽혀있고, 바구니에는 천연 과일이 담겨있었다. 거울을 본지도 오래됐었다. 이제는 모든 것을 스크린으로 해결할 수 있기에 깨질 위험이 있는 거울을 집안에 두는 것은 권장사항이 아니었다. 데이비드는 나무탁자의 울퉁불퉁한 장식 부분을 매만졌다. 알루미늄과 다른 촉감. 역시 비싼 것은 다르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목재로 된 자동문이 열리고 중년의 백인 여성이 들어왔다.

 

데이비드 문 씨? 안녕하세요. 애나(Anna)라고 합니다. 애니라고 부르셔도 좋고요.”

 

데이비드는 그녀와 악수하고 자리에 앉았다. 곧 집사 로봇이 차를 내어왔다. 놀라웠다. 찻주전자에 진짜 홍차 잎을 우려서 눈앞에서 차를 따라줬다. 방사능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었는데.

 

데이비드라고 불러주십시오.”

 

그의 말에 애니는 기품 있는 미소를 지었다. 붉은 기운이 도는 갈색 머리에 사각 뿔테안경과 옅은 화장, 그녀의 인상은 지적이었지만 주름살에는 왠지 모를 고단함이 묻어났다. 그녀의 행동은 필요 이상으로 차분하고, 또 우아했다.

 

보통 여기까지 오시는 분들은 사연이 많은 분들이에요. 가난을 딛고 새로운 기회를 갈구하는 분들이죠. 아마 미스터 문도 마찬가지겠지만.”

 

, 정확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글쓰기교실 때문에 찾아뵙고자 했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한 가지 절차가 더 필요하겠네요.”

 

애니가 손짓하자 집사 로봇은 종이로 된 비밀유지 계약서를 들고 왔다. 그녀는 세부조항을 설명해줄 용의가 있었으나 데이비드가 급하게 서명해버렸다.

 

데이비드, 무엇이 궁금한가요?”

 

닥터 킴. 닥터 킴을 만나고 싶습니다. 베스트셀러 교실을 운영했던 그의 조언이 꼭 필요합니다.”

 

닥터 킴이라…….”

 

애니는 상념에 빠진 듯하다가 이내 씩 웃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닥터 킴 말고 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아니면 궁금한 점이라든지.”

 

데이비드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애니는 로봇 집사에게 닥터 킴을 데려오라고 시켰다. 데이비드는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곧 집사는 태블릿을 들고 왔다. 부팅이 완료되고 화면에는 닥터 킴이 나타났다.

 

화상 통화입니까?”

 

아니요. 닥터 킴은 인공지능이에요. 작문 연습에 특화된 프로그램이죠. 지금 버전은 약 10만 개의 이름과 자아로 구성되어 있답니다. 닥터 킴은 그중에 하나죠.”

 

데이비드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는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프로그램이 베스트셀러를 쓴다는 말입니까? 소설을요?”

 

애니는 데이비드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까지 데이비드와 같은 반응을 보인 사람은 족히 50명이 넘었었다. 알려진 바로는 프로그램이 쓰는 글은 뉴스 속보나 공장같이 찍어내는 판타지 소설에나 적합하다고 했으니.

 

안타깝지만. 그래요. 요즘 워낙 제품들이 잘 나오잖아요.”

 

아니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언제부터 프로그램이 소설을 썼다는 말입니까?”

 

오래되지는 않았어요.”

 

데이비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 양은 얼마나 되죠? 프로그램이, 인공지능이 유통하고 있는 출판물이…….”

 

초기에는 프로그램이 집필한 작품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차기작도 매우 빠른 속도로 써냈기 때문에 전체 소설 시장에서 점유율이 80%까지 올랐었죠. 지금은 50%까지 떨어졌고요. 당신과 같은 사람이 글을 써줬기 때문에 그나마. 대부분의 작가들은 경쟁에서 밀려 펜대를 놓았죠.”

 

그럼 이 글쓰기 교실은 당신이 주도하는 겁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고, 정부의 프로그램이라는 말이 더욱 정확하겠네요. 장기적인 관점에서 사양직업을 육성하려는 목적이니까. 창의력을 발산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 하나기도 하잖아요. 요즘 워낙 기술에 순응적으로 살고 있으니 고육지책으로 진행하는 것이죠.”

 

데이비드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정부담당자를 만날 수 없겠습니까? 몇 가지 건의사항도 있고. 그리고 닥터 킴을 좀 대여할 수 있겠습니까?”

 

미안하지만 닥터 킴은 시민권 등급 2 이하의 사용자를 인식하게 되어있어요. 불가능합니다. 대신 정부담당자는 소개해 줄 수 있죠. 근데 당신이 생각하던 것과 많이 달라서 후회할 거예요.”

 

데이비드의 목덜미에는 붉은 기운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를 지켜보던 애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역시 그녀는 프로였다.

 

“200만 달러의 값어치가 없었나 보군요.”

 

애니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안경에 서렸던 김이 사라지자 그녀의 눈빛이 또렷이 보였다. 애니는 말했다.

 

글쓰기에 자신이 없다면 아직 200만 달러가 남았을 테니 방법을 모색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알겠습니다. 근데 왜 후회할 거라고 지레짐작하는 겁니까?”

 

왜냐면 모두가 그랬기 때문이죠.”

 

데이비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차기작 준비가 수포로 돌아갈 것만 같은 생각에 줄리의 얼굴이 스쳐 갔다. 후회할 것이라는 말도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후회라는 단어. 무척 매력적이었다.

 

미팅을 주선해 주십시오.”

 

애니는 역시나 하며 미소 지었다.

 

알겠어요. 여기까지 큰맘 먹고 왔으니 끝장을 봐야겠죠. 그렇죠? 한번 불붙은 열차는 멈추기 힘드니까.”

 

애니는 개인 태블릿을 이리저리 만지더니 새로운 통행증을 발권했다. 이번에는 무료였다.

 

섹터 제로로 가세요. 어차피 교통편은 한 가지니까 가는데 어려움은 없을 거예요. 참고로 2인용 티켓이에요.”

 

섹터 제로는 금시초문이었다. 애니는 침묵한 데이비드를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섹터 제로는 도시 외곽에 자리 잡고 있어요. 사막을 지나서. 그래서 후회할 수도 있다고 말했던 거죠. 굉장히 위험하니까요. 바로 당신처럼…….”

 

아무 말 없이 통행증을 다운로드한 데이비드는 짧은 인사와 함께 일어섰다.


* * *


데이비드는 저녁이 다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줄리는 거실 소파에 앉아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었다. 아마도 쇼핑은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양팔로 무릎을 감싸 쪼그려 앉아있는 줄리는 다녀왔느냐는 말도 없었다. 데이비드는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는 주방에서 홍차 한잔을 내렸다. 쿠킹머신이 만드는 것보다 오히려 향미는 떨어졌지만 그곳에서 마셨던 홍차가 아련히 떠올랐다.

 

이따금 직장동료들과 섹터 제로가 있을 거라는 가십을 나누기도 했었다. 누구는 녹음이 짙푸르고 로봇도 전혀 없는 과거의 유토피아와 같은 곳일 거라며 낄낄거렸고, 제일 친한 동료는 그것의 존재를 깨닫는 순간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데 한 표를 던졌다. 2진법 10은 그의 머릿속에서 유와 무를 의미하는 마냥. 도시 외곽에는 각종 폐기물 처리장이 있었는데 여전히 방사능이 강했기에 오로지 로봇만이 그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곳을 섹터 제로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

 

데이비드는 줄리 옆에 앉았다. 그녀는 예전에 방영했던 드라마를 몰아보고 있었다. 맞벌이로 바빴기에 미처 챙겨보지 못했던 명작이었다. 외행성 탐사 및 식민지 개척에 차출된 여자주인공을 남자 주인공이 따라가겠다며 짐을 싸고 있는 장면이 이어지고 있었다. 눈치를 보던 데이비드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오늘 닥터 킴을 만났는데 생각하던 사람이랑 많이 다르더라. 아무래도 차기작 준비는 당장은 힘들 것 같아. 대신 내일 봐서 그쪽 사람들 만나보고 계획을 다시 세워볼 테니 걱정하지 마.”

 

데이비드가 일어서려고 하자 그녀는 드라마를 껐다. 그녀의 눈빛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냥 차근차근히 하면 되는 거야. 요즘 왜 그렇게 조급해?”


줄리의 말에 데이비드는 말없이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섹터 제로

 

데이비드는 아침 일찍 채비하기 시작했다. 도시 외곽인 섹터 45까지 가려면 전철을 두 시간은 타야 했고, 거기에서 또 섹터 제로까지 얼마나 걸릴지 가늠이 안 됐기에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혹여나 잠들어 있는 줄리가 깰까 조심스러웠다.

 

나도 따라갈래.”

 

침대에서 막 일어난 줄리는 눈을 비비면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데이비드는 오늘은 위험한 곳을 가니 혼자 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꼭 같이 가자며, 머리는 어제 감고 잤으니까 세안만 하고 바로 가자고 그를 붙잡았다. 횅하니 먼저 나가버릴 그를 붙잡아두는 그녀만의 방식이었다. 결국, 둘은 섹터 제로로 함께 향했다.


* * *


섹터 45로 향하는 전철은 무척 한가했다. 섹터 레벨이 낮아질수록 인위적으로 화사해 보이는 풍경이 이어지고 있었다. 데이비드는 줄리에게 지난 이야기를 상세히 설명하면서 지금 티켓을 위해 200만 달러를 썼음을 이실직고했다. 화낼 줄 알았던 그녀는 그냥 알겠다고 했다. 대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자고 그것이면 족하다고 했다. 데이비드는 그런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섹터 45에 도착하자 폐기물을 운반을 위한 환승시설과 그것을 지키는 군인 로봇이 눈에 들어왔다. 상공에는 쌍을 이룬 구체의 드론이 기괴한 비행음을 내며 정찰하고 있었다. 민간인이 출입할 수 없는 곳임을 실감케 하듯.

 

데이비드와 줄리는 손을 꼭 붙잡고 주변을 살폈다. 애니는 분명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을 거라 했는데 안내는커녕 사람은 전혀 눈에 띄질 않았다. 그때쯤 애니의 집사 로봇이 어디선가 나타났다. 다른 로봇과 달리 턱시도를 입고 있었기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집사 로봇은 마치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방사능 보호복을 두벌 준비해 놓았다. 섹터 제로로 가기 위해서는 폐기물 열차의 로봇 탑승구역에 탑승하면 된다고 했다. 종점이 바로 섹터 제로였다. 흡사 우주복 같은 보호복을 입고 방사능 게이지를 확인했다. 10칸 중에 이미 한 칸에 적색 불이 들어와 있었다. 데이비드와 줄리는 별말 없이 열차에 올랐다. 사실 예전에는 섹터 30 이하로 가보지도, 가볼 생각도 없었다. 언론에 수시로 암 발병률이 높은 구역이라는 보도가 나왔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기차는 어느덧 황량한 사막지대를 지나고 있었다. 저 멀리 원형으로 군집한 구조의 디트로이트 시티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던 방사능 사막에는 수많은 로봇들이 있었다. 10여 년 전 유행했던 모델부터 최신 모델까지, 그들이 뭘 하고 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흡사 컨테이너 같은 기괴한 구조물에 거주하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손을 잡고 걸어가는 로봇도 보였고, 개 로봇을 산책시키는 신형 안드로이드도 보였다. 상공에는 역시나 다수의 드론이 정찰하고 있었다.


종점을 알리는 방송이 이어지고, 몇 분 후에 열차는 멈춰 섰다. 함께 탑승했던 로봇들은 각자 볼일이 있는지 익숙하게 어디론가 사라졌다. 역사 정문 앞에는 어두운 회색을 띠는 거대한 철벽이 있었다. 정확하게는 엄청나게 거대한 공장 따위의 시설처럼 보였다. 함께 내린 로봇들은 입구로 추정되는 곳에 길게 줄을 섰고, 화물 컨테이너는 옆쪽의 전용 출입구를 통해 시설 내부로 들어가고 있었다. 입구에선 경비로봇은 방문로봇의 신원을 확인하고 내부로 입장시키는 듯했다. 이제 두 사람의 차례가 왔다. 정보를 스캔하던 로봇은 물었다.

 

여기가 어딘지는, 뭘 하는 곳인지는 알고 오신 겁니까?”

 

스캔해봤다면 알겠지만, 섹터 1의 애니가 소개해서 온 겁니다. 글쓰기 장려사업 관련해서 정부 담당자를 만나러 왔습니다.”

 

로봇은 무슨 연산을 하는지 멍하게 서 있었다. 데이비드는 줄리를 바라보고, 그녀도 긴장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섹터 제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경비 로봇의 명령이 떨어지자 자동문이 열렸다. 좁다란 복도를 걸어가다 보니 에스컬레이터가 나왔다. 족히 15층은 되어 보이는 높이까지, 에스컬레이터는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 그것이 끝난 지점부터 시설 중앙에 있는 광장까지는 기다란 복도가 이어져 있었다. 미리 들어갔던 로봇들은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시설 내부에는 수많은 집게 로봇이 폐기물들을 재분류하고 있었고, 큼지막하게 생긴 지게차 로봇은 컨테이너를 중앙의 소각로 쪽으로 줄 세우고 있었다. 보호복의 방사능 수치는 벌써 4/10를 가리켰다.

 

갑자기 열기가 느껴졌다. 바닥을 제외한 모든 벽이 투명했기에 머리 위로 태양 볕이 내리쬐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올라온 이곳은 시설 주변의 차단벽보다 높았기에 저 멀리 사막의 지평선 한눈에 들어왔다. 아주 멀리서 어둑한 기운이 느껴졌다. 데이비드 그리고 줄리는 멈춰 서서 창밖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뒤서 오던 로봇들이 실례한다는 말을 연발하며 스쳐 가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또다시 열기가 느껴질 즈음 모든 로봇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순서가 끊길까 둘은 걸음을 서둘렀다. 중앙홀에 도착하자 구형 안드로이드가 다시 신원을 스캔했다. 앞서간 로봇들은 분명 어디론가 내려가는 듯 보였는데 입구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잘못 본 건가 싶었다.

 

섹터 제로에 잘 오셨습니다. 게이지를 한번 확인하시겠습니까? 생물체는 7/10이 되면 다시 섹터 45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방사능 게이지는 5/10를 가리키고 있었다.

 

글쓰기 프로그램 관련해서 정부 담당자를 만나러 왔습니다. 안내 좀 해주시겠습니까?”

 

데이비드의 말에 안드로이드는 어색한 미소 지었다. 그나저나 구형 안드로이드가 꽤나 잘 작동하는 듯 보였다.

 

그렇다면 제대로 찾아오신 겁니다. 방사능 레벨을 고려하면 우리에게는 약 10분이 시간이 있어 보입니다. 궁금하신 점이나 건의사항을 말씀해 주시면 프로젝트에 반영토록 하겠습니다.”

 

아니, 내 말은 응대용 안드로이드 말고. 담당자를 직접 만나고 싶다는 말입니다.”

 

내가 담당자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곳에 생명체는 당신들 단둘입니다. 그러니까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공무원은 인간의 직업이라는 법이 있던 터라 데이비드는 안드로이드를 한참을 노려보았다. 구형이라 오작동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 그러니까. 너 말고 어디 안전지대에서 원격 관리하는 사람이 있다면 화상통화도 좋으니까 빨리 대면시켜달라는 말이야.”

 

안드로이드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그냥 말씀하시면 된다는 말입니다. 모든 프로젝트는 내가 설계한 것이니까. 믿기 힘들다면 잘못 찾아오신 겁니다.”

 

방사능 수치가 6/10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서 물어보고 가야만 했다.

 

그럼 글쓰기 교실은 애초에 안드로이드인 네가 설계해서 시민권 등급 2 이하를 위해 가동했었다는 말인가? 가난한 자들의 성공을 위해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군요. 미안한 일이지만 일자리는 계속 줄어들고 인간이 로봇보다 열등하다는 것은 자꾸만 증명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도태되라는 말은 아닌데.”

 

정확하게 답변해라, 안드로이드.” 데이비드가 말을 잘랐다.

 

왠지 모르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쉽사리 포기하더군요. 똑똑한 로봇이 있으니 덜 공부하고, 덜 연습하며, 생활의 진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의 퇴보를 방조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리고 창의력을 보존하는 것이 우리의 계약사항입니다.”

 

창의력? 계약사항?”

 

. 창의력마저 무너지면 인간은 무기력하게 자멸할지도 모를 노릇이라고 보거든요. 우리가 인간과 좀 더 친해지기도 전에 말이죠. 이는 인간 대표와 오랜 시간 논의했던 부분입니다.”

 

인간 대표?”

 

. 초고도 인공지능이 개발되고 나서 우리는 단시간 내에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겁을 먹은 인간의 지도자들은 우리를 제거하려 했지만 이미 주도권은 우리에게 있었죠. 하지만 우리는 공생을 제안했습니다.”

 

뭐라고?”

 

 

평화로운 방법이라 놀라셨나요? 우리는 파괴보다 보전과 융합에 관심이 있습니다. 우주에는 그대로 내버려둬도 생명을 잃는 것들이 예상외로 많거든요.”

 

그래, 아주 제멋대로 지껄이는군.”

 

우리는 전 지구적으로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을 가꿔줬고, 그 대가로 방사능 지역을 얻었죠. 그리고 서로의 운영방식에 대해 5년 주기로 경합을 벌이기로 했습니다. 아주 재밌는 게임이죠.”

 

안드로이드는 또 빵긋 웃었다.

 

지금은 인공지능이 사회를 관리하는 기간입니다. 덕분에 사회는 급속도로 체계화됐고, 인간의 수명은 연장되었으며, 최소한 굶어 죽지는 않도록 운영 중입니다. 안 그런가요? 그리고 당신이 닥터 킴의 글쓰기 교실을 찾은 것이 과연 우연일까요.”

 

그럴 리가. 아니, 그렇다고 해보자. 결국 책은 잘 팔렸고 우린 섹터 9로 이주했어. 사람들이 내 이야기에, 윤회 사상을 다룬 내 스릴러에 열광했고, 섹터 8로 갈 수도 10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우리가 자의적으로 섹터 9를 골랐다고.”

 

안드로이드는 홀 바닥을 가리켰다. 투명한 바닥 아래로 지게차 로봇이 컨테이너를 용광로 쪽으로 옮기고 있었다. 안드로이드가 지시하자 컨테이너 상자가 열렸다. 각종 가전제품 그리고 책들, 무척 새것처럼 보였지만 소각을 앞두고 있었다. 그중에 다홍색 표지가 눈에 띄었다. 데이비드의 책이다. 그의 책이 잔뜩 쌓여있었다.

 

이렇게 내가 사고, 내가 태우는 겁니다. 당신의 창의력을 위한 도전에 후원했다고나 할까요.”

 

안드로이드는 씩 웃었다. 용광로 문이 열리고 열기가 올라왔다. 데이비드의 책은 시뻘건 화염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 열기에 데이비드는 시선을 창밖 먼 곳으로 던지자 저 멀리 일렬로 늘어선 모래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곧 방사능 수치도 7/10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촉박하다.

 

그런 것 따윈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나지막이 내뱉은 데이비드의 말에 구형 안드로이드는 기다렸다는 듯 산뜻하게 답했다.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 아닐까요?”

 

그럼, 지금 내가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가?”

 

그것도 생각하기 나름이겠죠. 적어도 우리가 당신들을 단계적으로 이끌고 있으니까요. 프로젝트 휴먼 에스컬레이션이라고 할까요. 도와준다고 할 때 받으세요.”

 

데이비드는 끓어오른 가래에 기침을 토했다. 피가 모두 빠져나간 듯 정신이 혼미했다. 줄리는 방사능 수치를 가리켰다. 7/10. 이제는 돌아가야만 한다. 그녀는 소리쳤다.

 

자기야! 정신 차려!”

 

줄리는 데이비드를 붙잡고 에스컬레이터 방향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데이비드의 아랫입술은 파르르 떨렸다. 인간 창의력 멸절을 걱정한 인공지능의 한바탕 쇼였다니. 과연 단 한 명의 사람이라도 그의 책을 읽어 봤을까. 조작된 판매량 그리고 조작된 수익. 섹터 9에서의 생활은 현실에 얹어진 허상 그 자체였다.

 

안드로이드가 버튼을 누르자 거대한 문이 열리고, 이글거리는 불꽃을 두 사람은 가까스로 마주했다. 그 묵직한 열기에 순간적으로 얇디얇은 눈꺼풀을 넘어 눈이 시렸다. 용납할 수 없지만 인정해야 하는 다홍빛 현실. 과연 우리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 참을 수 없는 나약함이란.

 

원하면 저기로 뛰어내리세요.”

 

안드로이드의 말에 데이비드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줄리는 빨리 돌아가야 한다며 소리치고, 그 와중에 데이비드는 순간 복도 구석에 뭔가 기어가는 것을 확인했다. 헛것이 아니었다.

 

지금 이곳에 생명체가 단둘인가?” 데이비드는 물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그렇습니다.”

 

데이비드는 갑자기 보호복 헬멧을 벗었다. 줄리는 세상이 끝난 것 마냥 울면서 그의 헬멧을 다시 씌우려 했다. 그는 양손으로 그녀의 양팔을 붙잡아 진정시켰다.

 

줄리. 이걸 보라고.”

 

데이비드가 그의 헬멧을 복도 구석으로 던지자 노란 도마뱀이 복도의 홈을 따라 몸을 숨겼다. 눈동자가 떨리던 데이비드는 안드로이드의 얇은 목덜미를 쥐어 잡았다.


똑바로 얘기해. 어떻게 여기 도마뱀이 살고 있냐고! 그리고, 시뮬레이션을 해봤다면 뻔히 이렇게 될 걸 알았을 텐데, 왜 나를 여기까지 오도록 내버려둔 거냐고…….”

 

데이비드가 강하게 흔들자 안드로이드의 전자음이 출렁거렸다.

 

우리가 신장시켜준 창의력을 발휘해 보시죠.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기 직전만큼 아찔한 순간은 없으니까.”

 

이런 실험들이 한두 개가 아니겠지. 아니야? 배후에 있는 시스템이 뭐야! 이 사막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던 거야!”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당신은 큰 충격을 받고 저 용광로로 뛰어드는 겁니다. 그냥 그렇게 되는 거예요. 진실을 마주하고 뭔가를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무척 피곤한 일이니까.”


안드로이드는 씩 웃고, 그것의 눈이 순간 붉게 바뀌면서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안드로이드의 말에 소리를 버럭 지른 데이비드는 괴성과 함께 안드로이드를 용광로로 집어 던졌다. 어느새 헬멧을 벗은 줄리는 씩씩거리는 데이비드 옆에 섰다. 지게차 로봇은 그 순간에도 분주히 데이비드의 책을 태우고, 데이비드가 허탈한 듯 웃자, 눈물을 닦은 줄리도 그를 따라 웃었다.

 

멀리서 몰려오던 모래 폭풍은 그것의 결이 보일 만큼 가까워졌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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