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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고리, 幻

2015.12.31 19:1412.31

고리, 幻



공중 꽃


잠든 나를 깨운 건 바람에 날아온 희미한 향기였다. 잠들어 있는 동안, 기분 나쁜 냄새가 내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그 냄새는 죽은 짐승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악취와 비슷했다. 전에 기르던 고양이가 한여름에 항아리 속에 빠져 죽었다. 온몸이 새하얀 고양이였다. 고인 빗물은 장물처럼 시커멓고, 그 속에 입을 크게 벌린 채 죽어 있었다. 사체를 건져 올리려 고개를 숙이자 냄새가 코를 찔렀다. 따사로운 봄날 오후, 담장 위에 잠들어 있는 모습을 자주 보곤 했는데, 날렵한 짐승도 그렇게 쉽게 항아리에 빠져 죽었다.


어둠 속에서는 한 줄기 빛조차도 선명하듯, 희미한 향기는 역겨운 냄새 속에서 크게 다가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향기를 좇아 걸었다. 호숫가 근처에 이르자, 이 층으로 지은 제법 큰 저택이 보였다. 저택 안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강렬했다. 한밤중에 잔치라도 벌이는지 창가에 사람이 여럿 보였다. 열린 대문을 지나 마당에 들어섰다. 푸른 잔디가 깔린 마당은 이백 평은 족히 넘을 정도로 넓었다. 검은 개가 먼저 알아채고 으르렁거렸다. 고개를 돌려 검은 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덩치를 봐서는 힘센 물소도 능히 물어 죽일 것 같은데, 이내 개구멍 속으로 꼬리를 감췄다. 그때 뒤에서 “메리, 왜 그러니?” 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섯 살쯤 보이는 사내아이였으며, 부르는 소리를 듣고 개 이름이 메리라는 걸 알았다. 한번 꼬리를 내린 개는 사내아이를 보고도 개구멍에서 나올 생각을 못했다.


아이를 뒤로하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으로 이끌었던 향기가 진동했다. 일 층 거실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모두 검은 옷을 입었고, 몇몇은 서 있고 몇몇은 얼굴을 맞대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나는 뒤쪽에 서서 사람들을 구경했다. 아무도 그곳에 내가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때 한 여자가 이 층에서 내려왔다. 그녀 역시도 검은 옷을 입었으며,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과 긴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나이는 삼십 대 초반쯤 보였다. 나는 여자한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낯익은 얼굴인데, 긴가민가했다. 그때 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시간이 됐으니, 이제 시작하자고!” 하고 말했다. 벽에 걸린 시계가 정각 열 시를 가리켰다. 그들이 지금껏 기다린 건 시간이었다.


사람들이 갑자기 분주해지자 나는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여자가 뒤따라 나와 내 옆에 바짝 붙어 섰다. 여자의 몸에서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여자는 팔짱을 끼고 검은 개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목줄을 잡아당겨 개구멍 속에 숨은 개를 끄집어내려고 했다. 아이의 힘으로는 덩치가 큰 개를 끄집어내기에는 어림없었다. 여자가 참다못해 “준아! 메리 좀 그만 괴롭혀. 목 졸려 죽으면 어쩌려고 그러니.” 하고 말했다.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목줄을 힘껏 잡아당겼다. 거실에서 찬송가가 흘러나오자 여자가 먼저 들어가고, 아이도 이내 목줄을 팽개치고 뒤따라 들어갔다.

 

잠시 후, 의식을 마친 사람들이 각자 타고 온 차에 몸을 싣고 하나둘 저택을 떠났다. 생각보다 의식은 빨리 끝났다. 마지막으로 떠난 여자는 두 손을 붙잡고 한동안 놓지 않았다. 나이 차가 있어 보이는 것이 친자매처럼 보였다. 이제 저택에 여자와 사내아이만 남았다. 아이는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이 층으로 올라갔다. 그 사이 여자는 검은 옷을 벗어버리고, 간편한 옷차림으로 바꿔 입었다. 시선이 마당 쪽에 향해 있는 것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초리였다. 나는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아 발길을 돌렸다. 그때 파란색 승용차 한 대가 호숫가를 돌아 저택을 향해 달려왔다. 길이 비포장이라 헤드라이트 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승용차가 서서히 멈추고, 한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조금 전 일행과 함께 저택을 떠났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의식이 행해지는 동안 남자의 시선은 줄곧 여자를 향해 있었다. 여자는 곧장 밖으로 뛰쳐나가 남자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리고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엉엉 울었다.

 

나는 두 사람을 등지고 돌아서서, 호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호숫가에 불꽃이 일어 둥근 원을 그리며 돌았다. 불의 화환을 향해 걸었다. 열 살쯤 보이는 소년이 횃불을 들고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횃불을 돌릴 때마다 언뜻언뜻 보이는 얼굴이 어디서 많이 본 듯했다. 소년은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느끼고, 곧 횃불을 물에 적셔 꺼버렸다. 갑자기 호숫가가 어둠에 묻혔다. 나는 사라진 소년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한참을 찾아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호숫가에 이르러 수면에 비친 얼굴을 보았다. 수면에 작은 파동이 일어 얼굴이 여러 모양으로 일그러졌다. 수면에 비친 얼굴은 조금 전 불의 화환을 돌리고 있던 소년의 얼굴이었다가, 여자를 부둥켜안고 있었던 남자의 얼굴로 바뀌었다.

 

비로소 모든 게 생각났다. 담장 위에 잠들어 있는 고양이를 붙잡아 빗물이 고여 있는 항아리에 빠뜨린 것도 그 얼굴이었고, 나를 목 졸라 죽여 호숫가에 버린 것도 그 얼굴이었다. 수시로 바뀌는 얼굴을 바라보며, 한때 내 아내였던 여자를 껴안고 있는 저 남자는 누구일까 생각했다. 그때 어디선가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어두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늘에 새하얀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한 번도 보지 못한 공중 꽃이었다. 나는 진한 향기에 취해 깊은 잠에 빠졌다.



어느 젊은 무사의 죽음


말발굽 소리가 또각또각 울렸다. 사지를 빠져나오면서 얼마나 뛰었는지 말도 지쳤다. 헉헉거리는 지친 말의 숨소리가 들렸다. 내 고개는 왼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지그시 눈을 뜨고 왼쪽 앞발을 쳐다보았다. 말발굽 위쪽에 작은 상처를 입었다.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말발굽 사이로 스며들어 검게 굳어 있었다. 다행히 상처가 깊지 않아 피는 멎었으나, 상처 부위가 부어올라 통증이 심했다. 얼굴을 맞댄 말의 미끈한 근육에서 땀이 새어 나왔다. 말이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몸이 자꾸 바닥으로 떨어지려고 했다. 입고 있는 갑옷이 묵직해도, 신분이 사무라이라서 벗어던질 수는 없었다. 죽더라도 갑옷을 입은 채 죽어야 했다. 갑옷에 붙은 철판이 철썩거렸다. 안장에서 떨어지면 큰일이라 고삐를 움켜쥐었다. 간당간당한 내 운명은 상처 입은 말에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험한 산중에 떼어놓고 가버린다면 살아남을 가망성이 없었다.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묵직한 철모를 버티려니 목이 뻐근했다. 쇠뿔처럼 철모에 붙은 뿔이 자꾸 나뭇가지에 걸려 거치적거렸다. 정신없이 뛰어올 때는 몰랐는데, 숨을 내쉴 때마다 옆구리가 시큰거렸다. 빗발치는 화살을 헤쳐 나올 때, 적군의 창에 옆구리를 찔렸을 것이다.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 중에서 어느 병사의 창에 찔렸는지 알 수 없었다. 둔탁한 갑옷 속에 입은 얇은 옷이 축축이 젖어 있었다. 붉은 피가 얇은 속옷을 타고 번져갔다. 출혈이 심해서 점점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적군이 사냥개처럼 냄새를 맡고 뒤쫓을지 몰라 잠시도 쉬어갈 수 없었다.

 

말은 숲 속을 걷고 있었다. 지면에서 낙엽 썩는 냄새가 풍겼다. 울창한 숲이 하늘을 가렸다. 숲 속으로 언뜻언뜻 햇빛이 비쳤다. 스며든 햇빛에 칼날이 번쩍거렸다. 하늘을 나는 새가 끼룩끼룩 울었다. 목이 몹시 타서 시원한 물이라도 마셨으면 하는데, 깊은 숲 속에서 마실 물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가다 보면 바위틈 사이에 고여 있는 샘물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곧 날이 어두워질 것이었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밤을 지새울 곳을 찾아야 했다. 뒤따라오는 병사가 한 명도 없는 것은 매복 중이던 적군에게 전멸했다는 뜻이었다. 빗발치는 화살에 맞아 죽어가는 병사들 비명이 귀가에 맴돌았다. 따르던 병사들이 다 죽어 나가는데, 혼자만 사지에서 도망쳐 나왔다는 게 사무라이로서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죽더라도 전쟁터에서 그들과 함께 죽었어야 옳았다. 그랬으면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이었다. 어제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데, 나뿐만 아니라 죽은 병사들 전부 굶주린 상태였다. 두 달 전 보급로가 차단돼 본토에서 식량을 제때 보내주지 못했다. 남아 있는 식량으로 천 명이 넘는 병사가 겨우겨우 버텨왔으나, 끝내 본토에서 날아온 건 퇴각하라는 전갈 한 장뿐이었다.

 

칠 년 전투는 이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내가 본토를 떠나온 건 일 년 전이었다. 본토에는 아리따운 아내가 있었다. 아내는 열여덟 꽃다운 나이였다. 나는 출정을 하루 앞두고 아내와 마주했다. 혼인하고 겨우 두 달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그날이 마지막 인연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찹찹했다. 방석 위에 꿇어앉은 아내도 그 사실을 아는지 한 시간째 아무 말도 없었다. 무심코 돌아보니 담장 옆에 심은 벚나무에서 꽃잎이 한 잎 한 잎 떨어졌다. 내 발치에는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술잔을 비우면서 넌지시 보니 아내의 눈가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빈 술잔에 술을 따르려는 찰라, 눈물이 한 방울 뚝 떨어졌다. 그리고 둥근 술병 주둥이에서 마지막 한 방울이 톡 떨어졌다. 그 소리가 아내의 눈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인지 술 방울 떨어지는 소리인지 알지 못했다. 마음의 준비를 끝낸 아내가 고개를 돌렸다. 나는 아내를 못 본 척 외면했다. 순간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아내는 오른손으로 왼손가락 하나를 움켜쥐었다. 아내의 손가락에는 옥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혼인할 때 예물로 해준 반지였다. 아내는 선혈이 흐르는 손가락을 술잔 위로 가져가 한 방울 떨어뜨렸다. 술잔에 떨어진 선혈은 곧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술잔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목구멍이 타는 듯 뜨거웠다. “남은 술은 승리하고 돌아와 마저 마실 터이니, 치우지 말고 그대로 두시오.” 아내한테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깊은 숲 속을 빠져나왔을 때, 땅거미가 짙게 깔렸다. 근처에 인가 한 채 보이지 않았다. 말도 더는 버틸 힘이 없는지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스르르 눈이 감겨왔다. 여기서 정신을 놓으면 끝장이었다. 정신을 놔버리면 땅바닥에 떨어져 짐승의 밥이 되고 말 것이었다. 고삐를 움켜쥔 팔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졸음이 엄습했다. 벚나무 가지에 앉은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가자 마지막 한 잎이 떨어졌다. 꽃잎은 느리게 지상에 내려앉았다. 그 꽃잎이 떨어지는 찰라 수차례 꽃이 피고 지던 계절이 지나쳐갔다. 순간 귓가에 들리던 말발굽 소리가 멈추었다. 육체가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 손에는 말의 고삐가 쥐어져 있었다. 겨우겨우 실눈을 떴다. 말과 함께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하늘에 별이 총총히 박혀 있었다. 봄날에 핀 벚꽃처럼 별빛이 졌다.

 

“낭떠러지가 참으로 멀도다!”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힝힝, 말 울음소리가 계곡 사이로 울려 퍼졌다.



밤길


이른 아침부터 감나무에 내려앉은 까치가 시끄럽게 떠들다 달아났다. 감나무 밑에는 누르스름한 감꽃이 수두룩 떨어져 있었다. 새파란 감나무 잎사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비라도 흩뿌리려는 듯 까무잡잡했다. 마을 어귀에서 아이들 학교 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방을 마루에 놓고 토방에 쪼그려 앉아 먼 하늘만 바라보았다.

 

이내 아버지가 있는 방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는 아침부터 줄담배를 피웠다. 방문 옆으로 사각형의 작은 창문이 있었다. 창문에는 창호지가 발라져 있었고, 어른 손바닥만 한 투명유리가 끼워져 있었다. 그 손바닥만 한 유리를 통해 밖에 누가 왔는지 내다볼 수 있었다. 창호지는 누렇게 색이 바랬고, 투명한 유리는 손자국과 얼룩으로 지저분했다. 오래 쪼그려 앉아 있었더니 다리가 저렸다. 다리를 펴고 일어나는데, 삼밭에서 커다란 두꺼비가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두꺼비는 피곤했는지 멀리 가지 못하고 돌담 구석에서 몸을 웅크렸다. 눈을 감고 웅크려 있는 두꺼비는 영락없이 돌멩이였다. 나는 녹슨 대문을 밀치고 밖으로 나갔다.

 

“너무 멀리 가지 마라.”

 

둑길을 어슬렁거리는데, 누가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 당도해보니 토방에 흰 고무신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방 안에서 두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의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긴 침묵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잠시 후 방문이 열렸다. 백발노인은 동화책에 나오는 마귀할멈 같았다. 노인과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노인이 가방을 메라고 했다. 아버지는 마당을 지나서 고샅으로 나갔다. 초라한 집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었다. 방 안은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마귀할멈 같은 노인 뒤를 따랐다.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이별이라는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훔쳤다. 언덕 위에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마지막일 것 같은 심정이 들어 뒤돌아보았다.

 

노인은 벌써 정거장에 당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얼른 오라고 손짓했다. 평소 달리는 실력이면 내리막길이라 이삼 분도 채 걸리지 않고 그곳에 당도할 자신이 있었다. 저쪽에서 버스 한 대가 먼지를 날리며 달려왔다. 반대 방향으로 가는 버스라서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먼지에 가려 노인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더는 그곳에 눈물만 흘리고 서 있을 수 없었다. 두 눈 딱 감고 내리막길을 내달렸다. 얼마 못 가서 숨이 차고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았다.

 

노인이 대합실에서 사준 과자를 먹지도 않고 기차에 올라탔다. 노인은 유리창에 머리를 맞대고 잠들어 있었다. 앞자리에 앉은 젊은 여인은 갓난아이를 보듬고 있었다. 기차를 탈 때부터 갓난아이가 칭얼댔다. 배고파서 그런 것 같았다. 옆자리에 앉은 노파가 우는 아이를 힐끗 보더니, 젖을 물려보는 것이 어쩌겠느냐고 말했다. 젊은 여인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얼굴을 붉혔다. 노파는 혀를 찼다. 갓난아이 우는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갓난아이를 다독거리는 젊은 여인은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노파는 부끄러워하지 말고 아이에게 젖을 물려보라고 다시금 말했다. 아이 엄마는 몸을 유리창 쪽으로 돌리고 블라우스 단추를 풀었다. 갓난아이의 젖 빠는 소리가 뒷자리까지 들렸다.

 

열차는 황량한 들판을 지나고, 구불구불 산속을 지나고, 길고 어두운 터널을 덜커덕덜커덕 지났다. 터널을 지날 때마다 매캐한 가스 냄새가 났다. 한참 후 나는 잠들고, 노인은 깨어 있었다. 해가 산등성이에 걸쳐 있었다. 노인이 흔들어 깨우면서, 다음 역에서 내릴 거니까 준비하라고 했다.

 

기차는 어느 작은 역사 앞에서 멈추었다.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은 두 사람 말고 세 사람이 더 있었다. 그들은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느긋하게 역사 안으로 들어갔다. 노인은 남들과 달리 역사 쪽으로 가지 않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가 싶더니, 철로를 건너기 시작했다. 그곳은 역사 반대쪽이었다. 노인이 뒤돌아보며 빨리 따라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역 주변에 콘크리트 담장이 둘러싸여 있었다. 담이 너무 높아서 뛰어넘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노인은 무슨 방도라도 있는지 담장을 따라 한참 걸어갔다. 그곳부터 콘크리트 담장이 끝나고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철조망은 이 미터 간격으로 콘크리트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노인이 멈춰선 철조망 밑에 누군가 깊게 파놓았다. 한눈에 무슨 용도로 파놓은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노인은 철조망 밑으로 기어나가 치맛자락에 묻은 흙먼지를 털었다. 그곳부터 논둑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역사를 빠져나가 이곳으로 돌아오자면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산길을 올랐다. 일정한 간격으로 검게 타르를 입힌 전봇대가 세워져 있었고, 산 중턱에 큰 바위가 있었다. 노인이 바위에 걸터앉으며, 잠깐 쉬었다 가자고 했다.

 

“할머니는 누구세요?”

“그건 알아서 뭐하게. 공부는 잘하느냐?”

“잘은 못 해요.”

“불쌍한 것! 늦었으니 서둘러야겠다.”

 

날이 저물어 어둑어둑했다. 산속으로 들어서자 금방 사위가 어두워졌다. 마을 어귀에 노인 아들이 전짓불을 켜고 마중 나와 있었다. 집에 당도해보니 저녁상이 차려져 있었다. 밥 한 그릇을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밥을 먹을 때 유심히 쳐다보던 여자아이가 눈에 거슬렀다. 나이는 나와 비슷해 보였다.

 

나는 밥을 다 먹고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오줌이 마려워 변소를 찾았다. 변소 옆에 외양간이 있었다. 황소가 두 눈을 부라렸다. 쇠파리가 등짝에 붙었는지 꼬리를 휘둘렀다. 목에 달린 워낭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변소에서 풍기는 냄새가 고약해 구역질이 났다. 변소 형태도 요상했다. 커다란 항아리를 땅에 반쯤 묻고, 볏짚을 섞은 황토로 계단을 쌓아올렸다. 그리고 항아리 주둥이에 사람이 딛고 앉아 볼일을 볼 수 있도록 판자 두 장을 걸쳐놓았다. 머리맡에는 새끼줄이 매달려 있었는데, 볼일을 보고 난 후 일어설 때, 붙잡고 일어서면 편할 듯했다. 눈앞에는 가마니 두 장이 달려 있었다. 변소에는 문이 없었다. 볼일을 볼 때 가마니가 가리개 역할을 했다.

 

“내일 데려다주실 건가요?”

“시간 봐서 오후에 데려다주든가 해야지.”

“오후에 가면 늦지 않겠어요? 밤늦게 도착하면 밤길을 걸어야 할 텐데요.”

“오후 네 시 버스만 타도 밤중에 산길 걸을 일은 없을 게다.”

“고모부는 만나보셨어요?”

“그 인간도 얼굴이 많이 삭았더구나. 저 아이가 열 살이니까 벌써 십 년도 더 지난 일이지.”

 

집 뒤쪽에 대밭이 있었다. 이파리가 바람에 흔들려 소낙비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노인은 코를 심하게 골았다. 노인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나와 여자아이가 누웠다. 여자아이는 금방 잠이 안 오는지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렸다. 바람벽에 매달아 놓은 메주에 곰팡이가 피어 지독한 냄새가 풍겼다. 나는 저녁 때 들은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어머니는 집안에서 결혼을 반대하자 아버지와 도망쳐, 십 년 넘게 연락도 않고 살다 지난겨울 죽었다.

 

다음 날 오후에 그곳을 떠났다. 이번에는 여자아이도 동행했다. 토요일이라서 학교를 일찍 파하고 온 여자아이가 자기도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여자아이가 하도 따라가겠다고 떼쓰니까 마지못해 허락했다. 세 사람은 전날 걸었던 산길을 지나 읍내로 갔다. 흐린 하늘은 한차례 비라도 흩뿌릴 것 같았다. 버스정류장에서 한 시간 넘게 버스를 기다렸다. 우리가 정류장에 약간 늦게 도착했는데, 버스는 몇 분 전에 떠나고 말았다. 여자아이는 기다림이 지루했는지 버스는 언제 오는 거냐고 투덜거렸다. 노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음 버스를 타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그 버스를 타더라도 밤늦은 시간에나 도착할 것이었다.

 

저물녘이라지만, 날이 그렇게 빨리 어두워질 리 없었다. 하늘은 온통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노인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비는 내리지 말아야 할 텐데, 하고 중얼거렸다. 날이 흐려지자 앞차를 놓친 게 더욱 한스러웠다. 버스는 전조등을 켜고 산등성이를 올랐다. 산길은 비포장이라서 땅에 박힌 돌멩이를 밟고 지나칠 때마다 차가 튀어 올라 사람들 엉덩이가 공중에서 춤을 추었다. 산길은 급경사라서 창밖을 내다보면 아찔했다. 차 뒷문 좌석에 앉아 있는 안내양은 머리를 유리창에 맞대고 졸았다. 고개가 멋대로 돌아가면서 선잠을 깨곤 했다. 낡아빠진 버스라서 급회전이라도 할 것 같으면, 차체가 비틀리면서 삐걱삐걱 뼈마디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빗방울이 차창을 세차게 때렸다. 노인의 안색이 어둡게 변했다.

 

나는 여자아이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여자아이가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주었다. 나는 사탕 껍질을 벗겨 입속에 넣고 침을 삼켰다. 노인은 창밖을 내다보며 깊은 상념에 빠져 있었다. 창밖은 온통 새까만 어둠뿐이었다.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버스 와이퍼가 빠르게 작동했다. 운전기사가 방심한 것일까. 차바퀴가 빗물에 미끄러지면서 승객이 화들짝 놀랐다.

 

“기사 양반! 급하더라도 쪼매 조심해서 갑시다. 이 나이에 저승 가기에는 너무 억울하잖소, 헤헤!”

 

인심 좋게 생긴 중년 남자가 너스레를 떨었다. 졸던 안내양도 깨어나 놀란 노루처럼 어색하게 웃었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노인은 인상이 좀처럼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몇 분 후 버스가 멈추었다. 안내양이 뒷문을 열고 먼저 젖은 땅에 내려섰다. 술 취한 사내가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비바람이 차 안으로 몰려들었다. 안내양은 차체를 가볍게 두들기며 “오라이!” 하고 소리쳤다. 술 취한 사내를 떨어뜨린 버스가 다시 움직였다. 안내양은 얼굴에 묻은 빗방울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밖이 어두워 차에서 내린 술 취한 사내는 보이지 않았다. 노인은 여전히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그 이후 버스가 서너 차례 정지했다가 출발하기를 반복했다. 세 사람은 깊은 산 속에서 내렸다. 운전기사가 버스정류장도 아닌 데서 내려달란다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마도 버스정류장을 지나쳐버린 게 분명했다. 그나마 빗줄기가 조금은 가늘어진 게 위안이었다. 세 사람은 버스 불빛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곳에 서 있었다. 금방 머리가 축축해지고 옷이 젖었다. 사방이 온통 어두워서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여자아이는 부르르 떨며 노인의 표정을 살폈다. 움푹 파인 곳에 빗물이 고여 있었다. 여자아이 신발이 고인 빗물에 빠졌다. 노인이 발밑을 잘 보고 걸으라고 야단쳤다.

 

“할머니! 우리 집에 다시 돌아가. 무서워서 더는 못 가겠어.”

 

여자아이가 종종걸음치며 울먹거렸다.

 

“이년아! 그러니까, 뭐 한다고 따라와서는 귀찮게 굴어. 할미 말을 들었으면 이 고생 안 할 것 아녀. 따라오기 싫으면 네년 혼자 돌아가든가 맘대로 해라! 할미는 붙잡지 않을 테니까.”

 

노인은 여자아이가 성가셔 떼어놓았다. 여자아이는 앙알거리면서도 노인 손을 놓지 않았다. 산길을 얼마만큼 내려가서는, 그곳부터는 산속을 헤쳐가야 했다. 날이라도 밝으면 쉽게 헤쳐갈 수 있겠는데, 날이 어두워 도통 앞을 볼 수가 없었다. 노인은 전에 수없이 오르내렸던 길이라며, 갑자기 밤눈이 어두워진 자신을 탓했다. 나는 노인이 산속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뭐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세 사람은 수풀이 무성한 산속을 헤집고 내려가야 할 판이었다. 산속은 불빛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산속에 발을 들여놓고, 얼마 못 가서 여자아이가 미끄러져 뒤로 넘어졌다. 산속은 서 있기 힘들 정도로 가팔랐고, 빗물이 스며들어 몹시도 미끄러웠다. 노인은 나뭇가지를 붙잡고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아이는 손바닥이 찢어졌는지 쓰라려했다. 노인이 여자아이 손을 붙잡았다. 나는 마을에서 산을 타본 경험이 있어 나뭇가지를 붙잡고 내려가는 건 일이 아니었다. 그런 나조차도 어둡고 미끄러워 내려가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공중은 나뭇가지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노인이 산속을 잘 알고 내려가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사람들 왕래가 거의 없던 곳으로 여겨졌다. 칡넝쿨이 나뭇가지와 뒤엉켜 있어서 머리를 수그리고 그 밑으로 기어서 지나야 했다. 머리를 쳐들고 걷다 날카로운 가시에 눈이라도 찔리면 큰일이었다. 튀어나온 가시에 옷자락이 찍히고, 나뭇가지에 가방이 걸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여자아이가 미끄러지면서 비명을 질렀다. 노인이 발을 잘못 들여놓은 게 분명했다. 수풀이 이렇게 우거진 곳은 처음이었다. 한참을 내려갔는데도 불빛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도랑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근처에 계곡 물이 흐르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 외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말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노인은 내려가기를 포기하고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세 사람은 숨을 헐떡거렸다.

 

“할머니! 나 추워.”

“조금만 참아라. 여기만 벗어나면 되니까.”

 

빗줄기는 그치지 않았다. 옷은 빗물에 젖어 속옷까지 축축했다. 내 팔뚝에 여자아이 살갗이 닿았다. 온기가 느껴졌다. 여자아이는 한기를 느끼고 덜덜 떨었다. 언제까지 죽치고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노인은 몸을 일으켰다. 순간 뒤를 돌아본 여자아이가 조금 전보다 더 크게 비명을 질렀다. 이상한 불빛이 보였는데, 자기가 돌아보자 슬그머니 사라지더라는 것이었다. 그 불빛은 두 개의 커다란 고리 모양이었다. 여자아이는 경기 들은 아이처럼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자 노인이 등짝을 아프게 때리며 “시끄럽다!” 나무랐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노인도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험준한 산속에는 맹수가 살 수도 있었다. 살쾡이가 사람 냄새를 맡고 기웃거리고 있는지 몰랐다. 땅에서 낙엽 썩은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내 손바닥은 소나무 진이 묻어 찐득찐득했다. 노인은 도랑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수풀이 하늘을 가릴 만큼 우거지진 않았다. 빗줄기가 가늘어지고 새까만 하늘이 다소 잿빛으로 바뀌었다. 산속을 헤매는 동안 지쳐 도저히 걸을 힘이 없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그때 산 밑에서 불빛이 보였다.

 

“거기 누구 없소. 이봐요!”

 

노인이 소리를 질렀다. 불빛이 산속을 비추었다. 불빛을 보니까 반가워 다리가 아픈 줄도 몰랐다. 노인의 외침을 들었는지 불빛이 이쪽을 향했다. 노인이 다시 한 번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래쪽에서 “여기에요!”하고 대답했다. 세 사람은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산 밑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진즉 도착했어야 하는데 내려오지 않으니까 걱정돼 기다리고 있었다 했다. 세 사람은 산속에서 헤매는 통에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전짓불을 든 남자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냐고 물었다. 노인은 지쳐서 대답도 못하고 손사래만 쳤다. 여자가 노인을 부축해 걸었다. 나는 한쪽 발이 허전했다. 산속을 헤맬 때 신발이 벗겨진 것이다.

 

다음 날 아침에 간밤에 내려온 산을 올려다보았다. 버스 지나가는 소리가 가깝게 들리는 것이 그리 높은 산은 아니었다. 날이 밝으면 반 시간도 채 걸리지 않고 오르내릴 수 있는 높이였다. 산등성이에는 물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다. 간밤에 산속에서 두 시간 이상 헤맸을 성싶었다. 내 무릎은 어디에 부딪혔는지 깨져 바지에 핏물이 들어 있었다.

 

노인은 눈에 무언가 씌운 모양이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까막눈이 되었겠냐고 했다. 그러자 여자가 세 사람이 귀신한테 홀린 것 아니냐며 웃었다. 역시나 귀신의 장난이라고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는데, 여자아이가 보았다는 커다란 고리 모양의 두 개의 불빛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귀신이라면 그런 모습으로 나타날 리가 없었다. 여자아이 손바닥은 나뭇가지에 심하게 긁혀 있었다. 내 한쪽 신발이 산속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터인데,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 보아도 보이지 못했다. 다음 날 남자가 읍내 시장에 가서 까만 운동화를 사다 줬다. 운동화는 발에 맞지 않아 신고 다니기가 불편했다. 나는 부끄러워 말도 못하고, 발에 맞지도 않는 신발을 신고 다녔다.

 

다음 날 노인은 여자아이를 데리고 그곳을 떠났다. 그날 오후 담장 위에 앉아 있던 하얀 고양이가 나를 보더니 부리나케 도망쳤다. 고양이는 낯선 인간의 냄새가 싫었고, 나 역시도 볼 때마다 슬슬 피하는 고양이가 싫었다.



비밀의 반지


내 책상 서랍에는 비밀처럼 간직해온 반지가 하나 들어 있다. 푸른빛이 짙은 이 반지를 손에 쥔 건 오래전 일이다. 어렸을 때 한 해 잠깐 살았던 가옥 뒤뜰 대밭에서 주웠다는 사실 또한 아무도 알지 못하며, 반지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한참 후에 알았다. 그때가 조선이라는 나라와 칠 년 전투를 벌인지 백 년이 되던 해였다. 장사를 벌여 오사카에서 떼돈을 벌어들인 아버지는 오사카 외곽에 있는 가옥 한 채를 사들였다. 오래전부터 눈여겨봐 뒀던 곳으로, 아버지는 돈을 벌면 그 가옥을 사들일 작정이었다. 오래된 가옥이지만, 뼈대가 튼튼해 조금만 손을 봤을 뿐인데, 금세 새집 같았다. 가옥은 볼수록 기품이었다.

 

처음 아버지를 따라 그 가옥에 들어섰을 때, 오랫동안 아무도 들어와 살지 않아 폐가처럼 흉흉했다. 다다미방에는 둥근 다반이 놓여 있었다. 먼지를 걷어내자 어제 만들었다 해도 믿을 정도로 빛깔이 살아났다. 그 다반 위에 술병과 술잔이 놓여 있었다. 술병은 오래전에 비워졌고 술잔은 반쯤 차 있었다. 기나긴 세월이 흘렀는데도 공중으로 흩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게 신기했다. 워낙 술을 좋아하는 분이라, 아버지가 술잔을 보면 또 마시려들 것 같아 마당에 뿌려버렸다. 술이 뿌려진 자리에 붉게 물든 꽃잎처럼 흔적이 남았다. 마당에는 벚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가옥 뒤뜰에는 대밭이 있었다. 대밭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사람을 유혹했다. 나는 뒤뜰을 지나 대밭으로 올라갔다. 빽빽이 들어찬 굵은 대가 하늘 높이 쭉쭉 뻗어 있었다. 바닥에는 잔돌이 많아 나막신이 자주 벗겨져 걷는 데 애를 먹었다. 대나무 밑에는 새털이 뭉텅뭉텅 떨어져 있었다. 새들이 들짐승한테 잡아먹힌 흔적이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신없이 대나무 사이를 걸었다. 얼마나 깊숙이 들어왔는지 알아차릴 겨를이 없었다. 한참을 걷어도 대밭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발을 헛디뎌 나막신 한 짝이 벗겨졌다. 나막신을 찾아서 신으려는 순간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문득 너무 깊이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어 되돌아나가려는데, 입구가 보이지 않았다. 햇빛이 비치지 않으니 어디로 나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찬 기운이 감돌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걸어왔던 반대 방향으로 발목이 아픈 줄도 모르고 무작정 걸었다. 걷다가 나막신이 벗겨지면 다시 주워 신었다.

 

대밭에서 얼마나 헤맸는지 몰랐다. 헤매다 이상한 물체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저기 보이는 둥근 물체는 사람 두개골이 분명했다. 그 옆에 꽃무늬가 수놓아진 기모노가 널브러져 있었다. 빛이 바래고 낡았지만, 꽃무늬만큼은 무척 선명했다. 두려워 한 걸음 뒤로 물러서다 둥근 물체가 눈에 띄어 자세히 보니 푸른빛이 도는 옥반지였다. 쪼그려 앉아 반지를 집으려다 멈칫했다. 돌 틈에 가는 손가락 뼈마디가 박혀 있었다. 반지는 그 유골에서 떨어졌다. 나는 반지를 움켜쥐고 빠른 걸음으로 대밭을 빠져나왔다. 어디선가 아버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뜰에 내가 보이지 않으니까 직접 찾아 나선 것이다.

 

그날 저녁 무렵, 몹시도 많은 비가 내렸다. 그날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사흘 동안 줄기차게 흩뿌렸다. 그날 내가 왜 그토록 많은 비를 맞아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기억나는 건 정신없이 빗속으로 뛰어들었다가 흠뻑 젖었다는 것뿐이다. 그날 밤 나는 지독한 열병을 앓았다. 열병을 앓는 동안 나는 사경을 헤맸다. 열병을 앓은 지 일주일 만에 자리에서 일어나 햇빛을 볼 수 있었다. 오랜만에 햇빛을 보니까 현기증이 일었다. 나는 문지방에 서서 마당에 핀 벚꽃을 바라보았다. 활짝 핀 벚꽃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반지는 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다. 나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마루 끝에 걸터앉았다. 어디서 날아온 작은 새 한 마리가 한참 동안 벚나무 가지에 앉았다 사라졌다.

 

그 가옥에서 그리 오래 살지는 못했다. 한때 많은 돈을 벌어들였던 아버지가 노름에 빠져 재산을 탕진했기 때문이다. 자고 일어나면 돈이 들어오니까, 아버지는 흥청망청 돈 아까운 줄 모르고 썼다. 결국에는 그 가옥마저 남의 손에 넘어가고, 우리 가족은 오사카를 떠나야 했다. 그 이후 아버지는 오사카에서만큼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다. 그나마 수완이 좋아 식구들 먹고 살만큼 돈벌이는 했는데, 아버지 인생에 오사카에서 살았던 때가 가장 화려한 시절이었다는 말을 두고두고 했다.

 

그날 이후, 나는 대밭에서 유골을 봤다는 이야기는 아무한테도 하지 않았다. 가끔 서랍 속에 넣어둔 반지를 꺼내 껴보면, 마치 내 것처럼 새끼손가락에 딱 맞았다. 그 기품 있던 가옥이 전에 어떤 곳이었는지는 살면서 차츰 알았다. 가옥 주인은 백 년 전 조선과의 칠 년 전투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사무라이였다. 그 사무라이한테는 아리따운 아내가 있었는데, 기다려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슬픔을 참지 못하고 자결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하지만 사무라이 아내의 시신은 아무 데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사무라이 아내가 죽었다는 소문 때문인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누구 한 사람 가옥을 돌보지 않았으며, 마당에 심어진 벚나무만 흐드러지게 피었다 졌다.

 

이제 이십 년 넘게 간직해온 이 반지를 주인에게 돌려줘야 할 것 같다. 이번 단오절에도 아이들과 함께 오사카에 다녀올 생각인데, 아버지는 해마다 고이노보리(종이나 헝겊 등으로 만든 잉어 모양의 깃발)를 집 앞에 걸어놓고 아이들을 기다린다. 다른 때보다 좀 더 일찍 출발하면 돌아오는 길에 잠깐 들렀다 올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옥은 지금도 처음 봤던 모습 그대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밤에 대나무 잎사귀가 서로서로 비비며 내던 소리가 귓가에 아득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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