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가작 누이의 초상

2014.06.15 16:5506.15

재작년 여름에 있었던 일이다. 기말고사가 끝난 다음날 B가 치킨을 사들고 자취방으로 놀러 왔다. 이번에는 꼭 힛갤에 입성하겠다 어쩌고 하는 실없는 소리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며 맥주를 마시다 보니까 슬슬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졸린데다 배까지 부르고 하니 만사가 귀찮아져서 휴지로 손가락을 대충 닦아내고 방구석에 널브러졌다.

 

마려워 죽겠는데 화장실 문을 열어보니 대리석 천사들이 소변기를 전부 차지하고 서서 하염없이 물줄기를 뿜어대는 꿈을 꾸었다. 대변 칸에는 황당하게도 변기가 없었다. 나는 끝없이 늘어선 대변 칸을 하나하나 열면서 그냥 바닥에다 처리해 버릴지 계속 변기를 찾아야 할지를 초조하게 고민하다가 깼다. 눈을 뜨자 화장실은 사라졌지만 요의는 그대로였다. 꿈에서 전자를 택해 괄약근을 늦춰 버리면 현실에서도 지도를 그리게 되는 건가, 볼일을 보면서 그런 꿈을 꿀 때마다 막연히 품곤 했던 의문을 떠올렸다가 이내 변기물에 흘려보내고 나왔다.

 

선배, 물 이거밖에 없어요?”

 

최후의 한 방울까지 털어먹느라 생수병을 거꾸로 들고 흔들던 B가 물었다. 여태 컴퓨터를 붙들고 있었는지 눈이 벌갰다. 날이 슬슬 더워지기 시작하니 끓여먹기가 뭣해 학교에서 좀 받아온다는 것을 깜빡했더니 그새 다 마셔버린 모양이다.

 

없어. 그냥 맥주 먹어.”

 

맥주가 어딨어요. 선배가 다 마셔 놓고는.”

 

소복히 쌓인 닭뼈 옆을 빈 맥주병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저걸 내가 다 마셨던가. B는 멋대로 냉장고를 뒤져 작년 고리짝에 얼렸지 싶은 얼음을 트레이째 꺼내 왔다. 한동안 고물 냉장고와 구닥다리 컴퓨터가 붕붕거리며 이중창을 하는 가운데 간간이 얼음 씹는 소리가 와드득와드득 추임새를 넣었다. 미지근한 장판 위에 누워서 그걸 듣고 있자니 어쩐지 나까지 회가 동했다.

 

나도 하나 줘봐라. 근데 넌 뭘 그렇게 열심히 봐?”

 

도시전설요.”

 

, 여기 아직 남아있었네. 진짜 오랜만이다.”

 

느적느적 다가가 얼음을 집으려는데 모니터에 유명 괴담 사이트가 떠 있는 게 보였다. 중학생 때 나도 자주 드나들던 곳이어서 아직 건재한 걸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B옆에 앉아 같이 괴담을 읽었다. 실화괴담 위주의 사이트라 그런지 도시전설은 양이 적었다. 그나마도 앞의 몇 개를 제외하면 빨간 마스크처럼 너무 유명해서 식상해진 것들이 대부분이라, 우리는 곧 밑에 있는 투고괴담란으로 옮겨 들어갔다. 창작 괴담을 올리는 곳이었는데 게시물 양은 도시전설보다도 적었다. B는 첫 글부터 정주행하기 시작했다. 씹을 얼음이 다 떨어지니 입이 허전해졌는지 이건 너무 뻔하다느니 이건 앞부분만 거창했지 시시하다느니 제멋대로 감평을 남기면서.

 

게시판 중간쯤에 화가 할아버지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대학로에 초상화를 그려 파는 노인이 나타난다. 한 여대생이 길거리에서 떨며 손님을 기다리는 노인이 안쓰러워 초상화를 그리기로 한다. 완성된 그림은 섬찟하리만치 생생해서 마치 살아있는 사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감탄한 여대생이 돈을 내려고 지갑을 꺼내는데 노인이 만류하며 묻는다. 돈은 됐으니 혹시 그 초상화를 자신에게 줄 수 없겠느냐고. 자신은 오랫동안 공모전을 준비해 왔지만 지금껏 낙방만 해 왔다. 그런데 학생이 나한테 영감을 주었다. 저 초상화라면 틀림없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면서.

 

노인의 간곡한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한 여대생은 초상화 대신 노인의 자화상을 받기로 한다. 자신의 초상화가 젊은이다운 생기로 가득했다면 노인의 자화상은 반대로 세월의 더께 같은 것이 고스란히 쌓여 있는 수작이었으니까. 할아버지가 유명해져서 언젠간 이 그림을 비싸게 팔 수 있게 되길 바랄게요. 노인에게 이 말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온 여대생은 화장을 지우느라 거울 앞에 섰다가 기절해 버린다. 자신이 일흔도 더 넘어 보이는 노파로 변한 게 아닌가. 이후 대학로를 지나는 사람들은 초상화를 그려 파는 젊은 화가를 보게 된다는 줄거리의 글이었다. 밑에는 뭔지 모를 여섯 자리 숫자 일곱 개가 쭉 쓰여 있었다.

 

이건 어떻더냐고 물었더니 도시전설 흉내를 내려고 한 거 같은데 그럴싸한 맛이 없어서 틀렸다, 단순한 괴담이라기엔 별 임팩트가 없으니 그저 그렇단다. 글짓기라곤 초등학교 쓰기 시간에 해 본 게 전부인 중학생의 글이니만큼 조악하다면 조악한 것도 당연하겠지. 나는 B의 손에서 마우스를 빼 즐겨찾기해둔 블로그를 클릭하며 말했다.

 

그거 내가 쓴 거야.”

 

 

이제와서 새삼 극락왕생을 빌어주기도 민망할 만큼 오랫동안 이승을 떠돌던 귀신이 있다. 그녀는 종종 사극 촬영장에 나타나 살아생전의 향수를 달랬던 것 같다. 시대를 막론하고 심지어 퓨전 사극에까지 출몰했다니 단순히 호기심에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오래 전에 R이라고 하는 역덕이 그녀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일이 있었다. R은 당시 인기리에 방영 중이던 모 사극을 통렬하게 까는 글을 쓰다가 그녀를 발견했다. 극의 전체적인 흐름부터 등장인물의 세세한 언행까지 하나하나 실제 역사와 대조해 가며 실컷 물어뜯은 다음 복장의 고증오류를 꼬집느라 세 번째로 영상을 돌려 보던 R의 눈에 우연히 그녀가 들어왔다. 그녀의 옷차림은 그가 보기에도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으므로 R은 그녀의 캡쳐를 글 끝부분에 올리며 비아냥거렸다. 쓸데없이 이런 엑스트라한테 신경쓸 여력이 있었으면 주인공들 갑옷이나 좀 어떻게 할 것이지 운운.

 

그러자 사극이 무슨 다큐냐는 태클과 광고글, 글 내용하고 일절 관련없는 악플 틈바구니에 누군가 이런 댓글을 달았다. 나 저 여자 다른 방송사 사극에서 본 거 같다. 조선 후긴데 혼자 긴 저고리 입고 있어서 똑똑히 기억한다. 몇 사람이 동조했다. 얼마 전 종영한 다른 사극에서 봤다는 사람도 나왔고 영화에서 봤단 사람도 나왔다. 이밖에도 나는 어디서 봤느니, 옷이 바뀌지 않는다느니 하는 댓글이 꾸준히 달리자 호기심을 느낀 R은 최근 몇 년간 나온 사극을 몽땅 뒤진 끝에 7할 가량의 작품에서 그녀를 찾아내는 기염을 토했다. R은 그녀가 나온 장면을 일일이 캡쳐해서 블로그에 올렸는데, 복장이 전부 똑같았거니와 그림자가 없는 사진까지 몇 개 있었기에 한동안 방문자 수가 치솟았다. R은 그녀에게 월리라는 애칭을 붙여 주었다.

 

나 이 귀신이랑 같이 드라마 찍었어. 초등학교 6학년 때.”

 

R이 월리를 찾느라 방학을 불태우고 있을 무렵 PD모씨 또한 우연히 그녀를 목격했다. 벽화 속에서 막 걸어나온 듯한 그녀의 고아한 아름다움과 기묘한 분위기를 마음에 들어한 모씨는 당시 기획 중이던 드라마에 그녀를 캐스팅했다. 그것도 자살한 처녀의 원혼 역으로.

 

우와, 귀신을 캐스팅해요? CG안 써도 되니 좋았겠네요. 설마 주연?”

 

R이 올린 캡쳐들을 훑어보던 B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아니, 단역이었어. 마지막에 잠깐 비중있게 나오긴 했지만.”

 

출연료는 어떻게 했대요? 지전이라도 태워서 주던가요?”

 

무슨 소리야. 귀신인 줄 알았으면 애초에 캐스팅이 됐겠냐.”

 

찍을 때 들통나지 않았어요? 그림자도 없는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이따금 주인공들 근처에 나타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역할을 했는데, 그녀에게 그림자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사실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별달리 이상한 점이 없었으니 눈여겨보거나 뇌리에 담아둘 만한 것도 없었던 것 아니겠나. 촬영장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으나 누구도 그녀가 귀신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딱 한 번, 촬영장에 구경 왔던 어떤 여자가 귀신 분장을 한 그녀를 손가락질하면서저건 진짜라고 소란을 피우다 기절한 일이 있긴 했지만 그 말을 진지하게 믿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다른 배우들처럼 분장도 멀쩡하게 받았고 의상도 갈아입었으니까. 어쩐지 누구씨 옆에만 가면 소름이 돋더라며 조연 배우 Y가 능청을 떤 게 전부였다.

 

분장도 받고 의상도 갈아입었다고요? 그거 진짜 귀신 맞아요?”

 

나는 잠자코 새 창을 띄웠다. 드라마 제목 뒤에 처녀귀신을 붙여 검색하니 여자가 소란피운 사건을 다룬 뉴스 기사들이 떴다. 이미지로 들어가자 피투성이가 된 남자 옆에서 웃는 그녀의 캡쳐가 잔뜩 나왔다. 다른 에피소드에 나온 귀신도 몇 보였지만 그녀의 캡쳐가 월등히 많았다. 나는 그녀가 원한을 풀고 단정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장면을 찾았다.

 

비슷하긴 한데 글쎄요그냥 닮은 사람 아닐까요?”

 

R이 올린 캡쳐와 나란히 놓고 보여줬지만 한쪽은 민낯인데다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에도 차이가 있어 인상이 사뭇 달랐기에 B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자식이 의심은. 아까까지 지전을 태우네 어쩌네 태평한 소리를 하던 놈이 뭘 그리 꼬치꼬치 따지고 앉았어?”

 

아무도 귀신인 줄 몰랐다면서요. 선배가 그렇게 확신하는 게 더 이상한데요 전. 그 여자 때문에? 선배 원래 그런 거 잘 안 믿었잖아요. 아니면 혹시 그때 뭔가 봤어요 선배도?”

 

이야기가 재미있게 돌아간다 싶었는지 B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물었다. 녀석의 말대로 그 드라마를 찍기 전까지 나는 귀신 같은 건 믿지 않았다. 여자가 소란을 피웠을 때만 해도, 백주대낮에 배우를 진짜 귀신으로 착각하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 사람인가 싶었을 뿐이었다. 그 일이 아니었더라면 분명 그녀의 정체라던가 내력은 까맣게 모르고 지나갔겠지. 저런 어설픈 괴담을 지어낼 일도 없었을 테고. 나는 그 날 있었던 일을 천천히 곱씹으며 그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사실을 털어놓았다.

 

“…봤다기보단 들었지.”

 

 

클라이막스의 사냥개 추격신을 찍느라 주연부터 엑스트라까지 총동원되어 한창 바쁘게 뛰어다닌 직후였다. 새벽부터 이어진 강행군에 지친 나는 잠시 짬이 나자 한숨 잘 생각으로 좀 외진 방을 찾아들어갔다. 냉방장치 하나 없는 한옥 방이었는데도 바닥에 누우니 놀랄 만큼 서늘했다. 팔베개를 하자마자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잠결에 팔이 저려 까무룩 돌아눕는데 밖에서 누군가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말씨가 예스러웠던지라 잠이 확 달아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예스러우면서도 보통 사극에서 쓰는 말투랑은 또 미묘하게 달랐던 것 같지만, 어쨌든 그때는 촬영 다시 시작한 줄만 알고 벌떡 일어났다.

 

근데 듣다 보니 어째 이상한 거야. 너는 10년이 넘게 그 얼굴을 해갖고 괜찮겠냐, 요즘은 동안이 대세라 오히려 더 잘 나가는 것 같다. 한동안은 더 버틸 수 있을 거다.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했거든? 그 다음에 남자가 이러더라니까. 젊은이나 늙은이로 둔갑하는 건 쉽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어 보이게끔 조절하는 건 아무래도 힘들다. 자칫하면 하루아침에 팍 삭은 꼴이 되니 외려 의심을 사지 않겠냐, 동안이 빨리 늙는단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나."

 무슨 말인가 싶어 방문을 살짝 열고 내다봤더니 '월리' Y가 툇마루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한동안 도란도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던 귀신이 물었다. 나를 왜 여기 끌어들였느냐고. Y는 대답 대신 기둥만 몇 번 쓰다듬다가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이 집은 의원 댁이었소. 지금은 없어졌지만 저 아랫동네엔 큰 기루도 하나 있었고. 어느 해 겨울에 나는 여자로 둔갑해 기생 노릇을 했다오. 날이 추워지면 눈밭에 거꾸로 처박혀서 궁색스럽게 쥐나 잡아 연명하는 것보단 기생질을 하는 편이 훨씬 낫거든. 종일 인두겁을 뒤집어쓰고 사람 흉내를 내는 게 번거롭기야 하오만, 좋아하는 술도 실컷 마실 수 있고 바보 같은 사내들은 돈까지 싸들고 와 양기를 바치는데다 매일 따뜻한 이부자리에서 잠들 수 있지 않소.

 

허나 그 때는 아무래도 지금보다 솜씨가 서툴러서, 잘 때 시나브로 꼬리를 내놓았던 모양이오. 빠진 머리카락이 터럭으로 변하기도 부지기수였고. 그러자 한 방을 쓰던 언니가 연신 재채기가 나고 눈물 콧물이 쏟아진다며 이 댁 의원을 불렀다오. 처음에는 의원도 고뿔인 줄만 알고 약을 썼소만, 일주일이 지나도 영 떨어지지를 않으니 다른 연유가 있나 의심하기 시작하더구려. 의원은 결국 내가 여우라는 사실을 눈치챘지. 짐승 터럭이 가까이 있으면 그렇게 병이 나는 사람이 있다 하더이다. 그때는 그런 병이 있다는 것조차 까맣게 몰랐는데 지금은 흔히들 알고 있더구려. 알레르기라던가, 요즘엔 또 알러지라고 바꿔 부릅디다. 어쨌거나 내가 요새 꿈자리가 뒤숭숭하다며 둘러대고 방을 바꿨더니 언니는 깨끗이 나았다오.”

 

여우는 정체를 들켰으니 골치아픈 일이 벌어질까 봐 걱정했다고 한다. 요물을 퇴치한답시고 도사라도 불러 소란을 피운다면 더는 그 기루에 있기 힘들어질 테니까. 하지만 의원은 주색이 과하면 건강을 해치니 적당히 해 두고 이따금 본모습으로 돌아가 쉬라는, 지극히 의원다운 충고만 남기고 돌아갔단다.

 

“나는 이렇게 대꾸했소. 기생질을 그만두면 모를까 내가 대관절 어디에서 본모습으로 돌아가 편히 쉴 수 있겠느냐고. 그랬더니 의원이 다음날 집으로 나를 불러들이더구려. 한껏 치장하고 거문고까지 안고 갔는데 글쎄 됐으니까 잠이나 자다 가라는 것 아니겠소.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부를 터이니 여기서 쉬라나. 뜨끈뜨끈한 아랫목에서 오래간만에 꼬리도 내놓고 사지를 쭉 뻗고 잤더니 날아갈 것 같았소만 아무리 그래도 불러 놓고 잠만 재우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더이다. 나는 꽤 몸값이 높았으니까. 해서 두번째로 찾아갔을 때부터는 의원을 이리저리 추궁해보기 시작했소. 세간에 여우 구슬을 삼키고 사람을 보면 명의가 된다느니, 여우 신발을 얻으면 대낮에 그림자를 감출 수 있다느니 하는 헛된 소문이 있지 않소. 틀림없이 나한테 달리 바라는 게 있을 거라 생각했지.”

 

여우의 말을 들은 의원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나는 다른 잡기는 모르고 다만 허황된 이야기를 꾸며 쓰는 것을 낙으로 삼아 왔다. 그런데 요즈음은 어찌 된 일인지 아무리 해도 그럴싸한 내용이 떠오르질 않아 고민이다. 그대는 신통한 여우고 오래 살았을 터이니 기이한 일들을 많이 보고 들었을 것이다. 나에게 심심풀이 삼아 몇 가지만 이야기해 준다면 고맙겠다고.

 

나는 명색이 글쟁이라는 놈이 남의 이야기를 가져다가 손 안 대고 코를 풀 심산이냐. 보아하니 요사이 서책 읽는 것이 큰 유행이라니까 너도 거기 끼어 한몫 잡아 보려는 모양인데, 내가 해 준 이야기가 저자에서 잘 팔린다면 그까짓 화대 몇 푼으로는 입을 씻지 못하리라고 짐짓 농을 하였소. 그랬더니 의원이 정색을 하고는, 나도 공으로 가져다 쓸 생각은 아니다. 나름대로 고치고 더하여 새 이야기로 환골탈태시킬 것이니 그런 말 말라지 않겠소. 게다가 한몫 잡다니 당치않다. 서책이 유행이라고는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돈이 되는 길고 긴 소설 이야기지, 내가 쓰는 것처럼 짤막짤막한 이야기책은 취급해 주는 업자도 없으니 그저 여기 드나드는 환자들이나 무료함을 달래고자 들춰볼 뿐이다. 그것도 장기판 바둑판을 남들이 다 차지하고 있어 도저히 할 일이 없을 때나 그런다고 덧붙이더이다. 하니 나도 좀 무안했던지라 순순히 이 이야기를 해 줄 요량으로 물었지. 아이 떼는 화공에 대해 들어보았느냐고.”

 

그것은 기녀들 사이에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로, 나이든 퇴기 중에는 어렸을 때 화공이나 그의 그림을 실제 봤다는 사람까지 몇 있었다면서 Y는 서두를 떼었다. 그네들의 말에 따르면 화공은 옛 사람처럼 고름 없이 허리띠로 묶는 저고리를 입었는데, 땋지도 않은 긴 머리를 그대로 늘어뜨린 채 빛바랜 자색 두건만 하나 쓰고 있어 차림새가 다소 묘했다고 한다.

 

그자는 젊은 여인과 노파의 초상을 들고 이 고을 저 고을을 전전하며 그림이 필요한 사람은 없느냐 묻고 다녔소. 그러다 부르는 집이 있거든 들어가 그림을 그려 주고 숙식을 해결했다더구려. 민화나 춘화부터 고상한 산수화까지 못 그리는 그림이 없었다지만 그자가 제일 많이 그렸던 건 기생, 그것도 화류병에 걸렸거나 아이를 가진 창기의 초상이었다오. 그자가 그런 기생들의 초상을 그려 낙관을 찍기만 하면, 온몸에 발진이 돋아 다 죽어가던 사람이라도 말끔히 낫고 아이도 핏덩이가 되어 깨끗이 흘러나왔다는 거요. 하여 기녀들도 그자를 아이 떼는 화공이라 부르며 잘 대접해 줬지.”

 

어느 해 가을에 화공은 기생으로 이름난 유경에 갔다가 상아라는 기녀의 초상을 그리게 된다. 상아는 당시 나라에서 제일 가는 무기였는데 화공이 찾아오자 이렇게 물었다. 공께 신통력이 있다 들었는데 혹 병이나 아이 말고 다른 것도 떼어주실 수 있겠느냐고.

 

상아는 자신은 장차 늙고 병들어 버림받는 것이 가장 두려우니 자신의 늙은 모습을 그려 없애달라 청했소. 그렇게만 해 준다면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사례해 드리겠다면서. 화공은 흔쾌히 승낙하고 석 달 동안 상아의 거처에 머무르며 초상화를 그렸다오. 초본은 젊고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였지만 윤곽을 올리고 채색을 하면서 검버섯이며 주름을 그려넣으니 완성했을 때는 완연한 노파가 되어 있었다더이다.”

 

상아는 화공에게 보통 초상화 한 점 그리는 삯의 다섯 배를 내고 만일 스물다섯이 넘도록 용모가 그대로라면 전 재산의 반을 드리겠다는 증서까지 써 준다. 그러나 화공은 둘 다 거절하면서 다만 자신이 그린 그림만을 받아 갔다.

 

상아는 의아해했소만 원래 화공은 아이를 지울 때도 돈을 받지 않고 그림만 가져갔기에 별 생각 없이 노파 그림을 내주었소. 그러면서 내심 의심했지. 돈은 필요없다고 하는 걸 보면 늙지 않게 해준다는 말은 아마 거짓말이었나 보다 하고. 하기야 그림 한 점 그리고 영원히 젊을 수 있다니 지나치게 형편 좋은 소리 아니오.”

 

예상과는 달리 상아는 이후 정말로 늙지 않는 몸이 된다. 또래 기녀들이 하나둘씩 영락하여 운 좋게 대갓집 첩실로 들어간 몇몇을 제외하면 더러는 병들어 죽거나 수급비로 떨어지고 잘해야 주막을 차리거나 동기들에게 가무를 가르치며 목구멍에 풀칠을 할 때까지, 그녀만큼은 눈가에 잔주름 하나 생기지 않았다. 상아는 열여덟 나이로 요절했다.

 

어쨌든 내가 그리 물었더니 의원이 그거라면 잘 안다, 노기들한테 간혹 보고들은 것 중기이한 일이 없었느냐 물으면 열에 아홉은 그 화공 이야기를 하는지라 물릴 지경이었다며 손사래를 치더이다. 해서 나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지. 그렇다면 젊은 여인의 초상에 얽힌 사연도 들어보았느냐고.”

 

생전의 버릇이었을까, 이야기가 거기까지 이르자 무심히 듣고 있던 귀신이 고개를 살풋 기울여 귓가에 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Y는 딱히 신경쓰는 기색 없이 말을 이었다.

 

기녀들 사이에는 그것이 상아의 원래 모습이라고 알려져 있었소만 이는 사실이 아니지. 한 번 그려 낙관을 찍은 사람은 두 번 다시 화폭에 담지 않았다잖소, 그 화공은.”

 

이렇게 해서 여우는 의원한테 초상화의 내력을 들려주었다고 한다. 그것은 의외로 그림 속 여자가 아니라 그 오라비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어느 부잣집 맏아들이었는데, 괴질에 걸리는 바람에 어렸을 때 절로 요양을 보냈다는 모양이다.

 

부자의 처는 그렇잖아도 아픈 아이가 도중에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느냐고 크게 반대했소만, 그 해 겨울이 유난히 춥고 길었던지라 기침 끝에 피를 토할 정도로 아들의 병세가 악화되니 보내는 수밖에는 없었다는구려. 부자는 그 절이 따뜻한 지방에 자리한데다 공기도 좋고 근처 산에서는 좋은 약초까지 많이 나온다, 여기에 고명한 스님께서 밤낮으로 독경을 해 주시니 죽을병을 고치고 돌아온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다면서 아내를 달랬으나 실상은 아들의 회생을 반쯤 포기한 터였소. 마지막으로 부처님께나 한번 매달려 보자는 심산이었던 게지. 혹시 옮는 병 아닌가 하여 하인들도 쉬쉬하는데다 둘째를 가진 부인이 아들의 간병에만 매달리다 건강을 해칠까 염려했던 것도 있었고. 처도 어느 정도는 이를 눈치챘던지라 아들을 배웅하며 대성통곡하는 모양이 꼭 상여 보내는 사람 같았다더이다.”

 

아들은 절로 가서도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다행히 나이를 먹을수록 병세에 차도를 보였고, 열여덟 살이 되자 완전히 나아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돌아온 지 채 1년도 안 되어 그는 다시 앓아눕고 만다. 전처럼 열이 오르고 기침을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음식을 제대로 넘기지 못해 하루하루 말라 갔다. 낮에는 넋 나간 사람처럼 방에 틀어박혀 멍하니 벽만 쳐다봤고 밤에도 깊이 잠들지 못해서 새벽녘까지 뒤척거리지 않으면 악몽을 꾸거나 가위에 눌리기 일쑤였다.

 

부자는 이전에 아들을 버리다시피 절로 보냈던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지라 이번만큼은 어떻게든 낫게 해 주고자 백방으로 노력했소. 부자의 처는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부모가 수소문하여 용하다는 의원도 불러 보고 스님이며 점쟁이를 청해다 독경도 시켜 보았지만 전부 허사였다오. 게다가 아들까지 자기 병은 자기가 잘 안다, 이런 걸로는 어차피 고칠 수 없으니 물리라면서 약을 쏟아 버리는 등 치료를 거부하니 이러다가는 장성하여 겨우 돌아온 자식을 하루아침에 도로 잃을 판국이라 내외가 발만 동동 굴렀다더이다."

 

그 무렵 백일기도를 드리느라 근처 절에 드나들던 부자의 처는 묘한 소문을 듣게 된다. 정월부터 그 절에 어떤 화공이 묵고 있는데, 누구네 할아버지가 중병에 걸려서 죽거든 절에 봉안할 심산으로 초상화를 그려달라 했더니 다 그리자마자 병이 나았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가는 길에 남기는 초상화니만큼 잘 좀 그려 달라고 가족들이 부탁했소만 그자는 병자의 모습을 그대로 화폭에 옮겼다오. 옷은 땀이며 오물로 얼룩지고 해골처럼 비쩍 말라 시커매진 얼굴에 퀭한 눈은 저승사자라도 본 사람마냥 부릅뜬 채 타액을 흘리면서 숨을 헐떡대는 노인의 그림을 본 가족들은 크게 노했지. 그러나 더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소. 화공이 초상화에 낙관을 찍으니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던 노인이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팔을 들어올렸던 거요.”

 

오랫동안 자리보전을 했던 탓에 자유롭게 운신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지만, 몸의 마비나 의식의 혼탁 같은 병증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 화공이 어디 큰 절 주지의 제자였는데 불화를 배우다가 신통력을 받아서 어떤 병이건 그림으로 그려 떼어낼 수 있다더라, 그 화공이 파리하고 야윈 병자의 모습을 그려 낙관을 찍기만 하면 병자가 즉시 말끔하게 낫는다더라. 소문은 금세 사방으로 퍼져나가 절에는 불공을 드리려는 사람보다 화공을 만나려는 사람이 더 많이 찾아올 지경이었다. 부자의 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거금을 들여 앞서 초상화를 청한 환자들을 무른 뒤 화공을 불러왔다.

 

신이한 화공이 온다 하니 식솔부터 바깥에 사는 하인들까지 그자를 구경하러 몰려왔다 하더이다. 뭐 겉으로 봐서는 그저 머리를 풀어헤쳤을 뿐인 평범한 젊은이였다니 개중에는 실망하고 돌아간 자들도 많았을 테지만. 그때는 아직 상아의 초상도 없었고 다만 짊어진 화구 상자 옆면에 여우를 한 마리 그려 내보이고 다녔다는구려.”

 

얼마간의 북새통을 뒤로 하고 부자의 처는 손수 화공을 아들의 방으로 안내했다. 부자의 딸이 아픈 오라비를 대신하여 화공을 맞아 주었다.

 

딴에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 오라비가 무료하지 않게끔 말벗이 되어 드리겠노라며 기특한 소리를 했소만, 실상은 저 화타 같다는 화공이 어떻게 그림을 그릴지가 더 궁금했겠지. 허나 화공은 남매를 보더니 이리 말하는 것 아니겠소. 아드님의 병환은 틀림없이 고쳐 드리겠으니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아무도 훔쳐보지 못하도록 주변 사람을 전부 물려 달라고. 누이는 볼이 부어서 물러갔을 거요. 후후.”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아들은 화공을 사기꾼이라 단정하고 초상도 그리지 않으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의 병은 다름아닌 상사병이었으니까. 아들이 절에 가 있는 사이 누이동생이 태어났는데, 돌아온 아들은 열여덟에 처음 만난 누이에게 연정을 느껴 고민하던 끝에 그만 마음의 병을 얻었던 것이다. 하지만 부모가 간곡히 부탁하는데다 화공까지 만일 병이 낫지 않는다면 돈은 받지 않겠다, 초상화 한 점 그린다 치면 손해볼 것도 없지 않겠느냐고 설득하자 간신히 치료에 응한다.

 

아들은 그래도 여전히 의심을 버리지 못하여 미리 으름장을 놓았소. 나중에라도 부모님께 허튼소리를 하거나 재물을 요구했다간 즉시 관아에 혹세무민하는 사기꾼이라 고발을 하겠노라고. 화공은 사기꾼이라니 당치않다, 자신은 단지 이 눈으로 본 것만을 그릴 뿐이라면서 두건을 풀어 한쪽 눈을 가렸소. 그림을 그리겠다는 자가 어찌 눈은 가리느냐 물으니 화공이 이리 답했다더이다. 원래 심병은 이러는 편이 더 또렷하게 보이는 법이라고.”

 

아들이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서먹서먹하게 지내던 무렵 누이가 절 구경을 시켜주겠노라고 오라비를 끌고 나간 일이 있었다. 이런 데 절은 시골과는 달라서 볼거리가 쏠쏠하다면서. 갖가지 가게들이 즐비한 번화가를 누비던 누이는 오라비를 놀려주고 싶었는지 오늘이 자신의 생일이라 거짓말을 했다. 부모님과 쭉 편지를 주고받았기에 오라비는 누이가 가을에 태어났음을 알고 있었으나 속는 척 가진 돈을 털어 비단 향낭을 하나 사 주었다. 나이 찬 아가씨가 아니라 너댓 살 먹은 아이들이 액막이용으로나 찰 법한 우스꽝스러운 물건을 일부러 포장까지 해 달래서 진지하게 선물하니 누이가 풀어 보고는 한 방 먹었다며 파안대소했다. 고향 땅은 봄이 늦어 골목마다 연분홍 살구꽃이 소복소복 쌓였는데 누이의 손끝에는 아직도 봉숭아 꽃물이 남아 있었다. 첫눈 내릴 때까지 이 빛깔을 간직하고 있으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진다기에 꽃잎을 말려 두었다가 오라버니의 쾌차를 빌며 몇 번이고 다시 들였습니다. 이렇게 완쾌되어 돌아오신 것은 다 제 공덕인 줄 아십시오. 어찌 이리 늦게까지 꽃물이 남아 있느냐 물으니 누이는 새삼스레 소맷자락 밑으로 손을 숨기며 그리 답했다.

 

화공은 아들을 앞에 두고 딱 한 번 봤을 따름인 누이동생을 보고 그린 듯 똑같이 그려냈소. 그자가 향낭을 든 누이의 손끝에 주홍을 칠하니 아들은 견딜 수 없었는지 전부 털어놓았다더이다. 그날부터 쭉 누이를 마음에 품어 왔다, 부탁이니 이 삿된 마음을 어떻게든 해 달라고. 그러자 화공은 채색까지 다 마쳐 놓고 짐짓 물러나는 시늉을 하였다오. 이제 여기에 낙관만 찍으면 도련님을 괴롭히던 마음은 틀림없이 사라지겠지만 원래 상대가 누구건 처음 마음에 둔 사람과 맺어지기란 어려운 법이니 이는 또래 젊은이라면 으레 겪는 일이라, 굳이 이런 그림을 그리지 않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나을 병이다. 어차피 두 분 다 과년하시니 머지않아 각기 혼례를 올릴 테고, 그러는 사이에 지금의 이 번뇌도 점차 가라앉을 거라면서. 아들이 그걸 몰라서 앓아누웠겠소. 누이가 곧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거라니 불에 기름을 부은 셈이지.”

 

아들은 주저없이 낙관을 찍어달라 청했다. 그림이 완성되자 누이를 연모하는 마음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누이의 얼굴을 보아도 아무런 감정이 솟지 않았기에 그는 한달음에 달려가 부모에게 고했다. 저분 덕택에 이제 제 병은 깨끗이 나았노라고.

 

부자는 화공에게 원하는 것이 있으면 뭐든 주겠노라 말했소. 그러나 화공은 다른 것은 필요치 않으니 그저 여기서 그린 그림이나 가져가면 족하다고 답했지. 하지만 은인을 이대로 보내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면서 부자가 거듭 재물을 권하니 화공이 이리 청했다는구려. 그렇다면 아드님께서 제 그림을 한 점 사 주셨으면 좋겠다고.”

 

이리하여 부자의 아들이 사나워 보이는 호랑이 그림을 한 점 사자 화공은 매우 기뻐하며 누이의 그림을 가지고 돌아갔다고 한다.

 

"하지만 몇 년 뒤 아들은 사냥을 나갔다가 자신의 사냥개에게 물려 죽게 되오. 짐승에게는 사나워도 사람한테는 도둑이 든대도 으르렁 소리 한 번 내 본 적 없는 순하디순한 개였는데, 갑자기 무언가에 씌인 듯 날뛰기 시작하더니 말리려는 아들의 목덜미를 단번에 물어뜯어 죽였다고 하더이다. 부잣집 하인들 중 몇몇은 개가 날뛰던 동안 그림 속의 호랑이가 사라졌다가 아들이 죽자 돌아왔는데 입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며 수군거렸다오."

 

내 오라비를 팔았구나. 썩을 놈.”

 

Y가 이야기를 마치자 귀신이 툭 내뱉듯이 대꾸했다.

 

허락도 없이 남의 가정사를 소재거리로 던져 주면서 그래 생색을 냈더냐. 있는 이야기 없는 이야기 잘도 꾸며다 붙여서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딱히 질책하는 투는 아니었다. Y가 너스레를 떨었다.

 

이거 왜 그러시오. 누님이 나한테 이 얘기를 처음 해줬을 적에 누님 입으로 그러지 않았소. 누님은 하도 오래 묵어서 가끔 나라도 이렇게 이르집어 주지 않으면 이름이고 가족이고 다 까먹겠다고. 나야 그렇게 한 번 신세를 지워 두면 행여 나중에 그 의원이 누님의 전이라도 근사하게 하나 지어 줄까 싶어 그랬지.”

 

기왕 그럴 마음이 있었거든 제대로나 전할 것이지, 왜 오라비가 개에 물려 죽었다 하였느냐. 내 오라비는 화공이 돌아가고 나서 몇 달 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거늘. 하기야, 이제와서 따지는 것도 부질없는 짓이다만. 애당초 그림을 그려 병을 고친다는 화공부터가 얼토당토않으니. 설령 그런 화공이 정말로 있었다 한들 그 때 오라비의 병을 그렸다던 자가 진짜였는지 사기꾼이었는지도 확인할 길이 없고. 어쩌면 나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한 것이 아닌가. 오라비는 다른 중병을 얻었을 뿐이고 단순히 죽기 전에 초상이나마 남겼다가 세상을 뜨거든 절에 봉안할 생각으로 화공을 불렀던 건지도 모르겠구나. 자진한 것은 병을 비관하여 나쁜 마음을 먹은 탓이고. 나머지는 내가 구천을 떠돌다 주워들은 풍문을 꿈으로라도 꾼 것인지, 누가 알겠느냐.”

 

아니오 누님. 그 화공은 진짜였을 거요. 우리 족속 중 하나가 어떤 한량을 홀려서 정신을 오락가락하게 만들었다가 그림 속에 갇혔던 적이 있었소. 화공한테 호랑이 그림을 샀다가 개에 물려 죽은 사람이 바로 그 한량이라오. 그 화공 얼굴에 호환당할 상이 뚜렷했는데 그림을 팔자 그것이 한량한테 옮겨갔다 하더이다. 나는 누님과 헤어지고 나서 용케 달아난 그 여우와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자가 누님의 초상화를 봤다고 했소. 갇힌 이래로 쭉 화공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노라며. 그 여우가 말하기를 상사병은 나았을지 모르겠으나 대신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겼으니 오래 못 갔을 거라 그랬지. 연모하는 정도 집착도 열정도 모두 그림 속에 갇혔으니 이제 그자는 자기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하고 생에 대한 열망도 잊게 될 거라면서. 딱히 원한도 망집도 없는 누님이 이승에 이렇게까지 오래 남아 있게 된 건, 어쩌면 그 그림 속에 고스란히 갇힌 오라버님의 마음 탓이 아닐까 싶소. 그런 곳에 붙들리지 않았던들 지금쯤 퇴색하여 흔적조차 남지 않았을 것을.”

 

“나는…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어린 나이에 적적한 시골로 가 좋은 시절을 병상에 누워서만 보낸 오라비가 가여워 살갑게 대했을 뿐이었는데. 오라비가 죽은 뒤로 나까지 기침병이 생겼기에 화공을 다시 불렀다가 그자가 같은 사람을 두 번 그릴 수 없다 하여 연유를 묻기 전까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 깊고 무거운 마음을 품었으면 어찌 내게 말 한마디 없이 세상을 등졌단 말이냐. 차라리 붙들고 애원이라도 해보지 않고.”

 

귀신의 어조는 그러나 시종일관 남의 일 말하듯 담담했다. 사람의 감정 같은 것은 몇백 년의 세월을 지나보내면서 같이 쓸려나갔다는 듯이. 그래도 할 수 있었다면 한숨 정도는 길게 쉬지 않았을까. 한동안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가 물었다. 그래서 그 의원이 내 오라비 이야기를 어떻게 바꾸어 놓더냐고.

 

"오라비를 화공으로 만들고 누이가 죽는 식으로 바꾸더이다. 적당히 악당도 한 놈 집어넣고. 옛날 어느 마을에 화공과 누이가 살고 있었는데 누이는 몹시 아름다워 혼기가 되자 집 앞에 중매 서러 온 이들이 매일 긴 줄을 이룰 지경이었소. 하지만 화공은 좀처럼 누이를 시집보낼 생각을 하지 않았지. 누이 또한 혼인에 뜻이 없었는데 실은 오누이가 서로를 사랑하여 몰래 정을 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오. 그렇게나마 오라버님의 원을 풀어 드렸달까."

 

어느 날 오누이가 으슥한 곳에서 입을 맞추는데 동네 유지의 아들이 그 모습을 몰래 훔쳐보고는 누이를 협박한다. 순순히 자신의 정인이 되지 않으면 아까 본 것을 다 밝히겠노라고. 안 그래도 나이가 차고 넘치도록 통 혼인할 생각을 않는 오누이를 눈치 빠른 동네 아낙들이 수상히 여기고 있던 터라, 여기에 몹쓸 소문까지 퍼지면 자칫 오라비의 일도 끊어지고 마을에서 쫓겨나게 될까 두려워한 누이는 그자의 말을 거역하지 못했다. 그자가 누이를 겁탈하고 오라비가 특별히 주문하여 선물해 준 값비싼 비단 향낭까지 빼앗아 가니 견디다 못한 누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유서를 보고 사정을 알게 된 오라비는 누이의 마지막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며 복수를 결심한다. 그러자 누이의 혼이 초상화에 깃들었다가 밤마다 빠져나와 그자의 동향을 살펴 오라비에게 알려 주었다. 적당한 때가 되자 누이의 혼은 매일 그자의 꿈에 나타나 향낭을 내놓으라고 들볶는다. 애초에 그자는 향낭을 누이가 정표로 준 것이라 떠벌리고 다닐 속셈이었으나 누이가 죽자 구설수에 오를까 걱정하여 숨겨 두고 있었다. 그런데 누이가 매일 꿈에 나타나니 그자는 향낭에 귀신이 붙었다고 여겨 팔아치우려고 마음먹는다. 마침내 그자가 향낭을 가지고 나오자 오라비가 미리 훈련시켜 풀어둔 개가 향냄새를 맡고 달려와 그자를 물어 죽였다.

 

내가 지나가는 말로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 것 아니냐, 사람을 죽일 정도로 크고 사나운 개라면 눈에 띄었을 텐데 어떻게 몰래 훈련을 시키며 구설수에 오를까 두려워했다는 자가 어찌 향낭을 몰래 버리던가 다른 사람을 시켜 팔지 않고 손수 들고 나왔느냐 물으니, 의원은 소설인데 좀 봐 주면 안되겠느냐고 우는소리를 하면서도 어김없이 앞뒤가 맞게끔 고쳐 놓더이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건만 이야기를 고쳐 짓느라 고심하는 모양이 제법 대견하기에 그때부턴 나도 한층 진지하게 품평해 주었다오. 귀신이나 오라비가 직접 그자를 죽이지 않은 것은 흥미로우나 이대로 끝낸다면 그저 무난한 귀신의 복수담이 아니겠느냐고. 그랬더니 의원이 뒷이야기를 만들어 붙이더이다. 향낭가게 주인이 오라비가 주문했던 향초 배합을 외워 두었다 같은 향낭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는 거요. 개에 물려 다치거나 죽는 사람이 속출하자 지방관이 들개 소탕에 나섰지.”

 

Y는 어쩌다가 개가 오라비의 통제를 벗어났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약을 먹여 산속에 버렸는데 미처 죽지 않았다던가, 멀리 사는 사냥꾼한테 팔았는데 도망을 쳤다던가. 보통 들개는 떼지어 다니는데 이 개는 단독으로 사람들을 공격한데다 시신도 뜯어먹지 않은 점을 수상히 여긴 지방관은 마침 새 향낭을 사는 사람은 반드시 개에 물린다는 괴소문이 돌자 피해자들을 다시 면밀히 조사해 본다. 모두가 특정 가게에서 새로 팔기 시작한 향낭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지방관은 가게 주인을 의심하여 추궁했고, 주인은 오라비의 비법을 따라 향낭을 만들어서 팔았다며 실토한다. 오라비의 뒤를 캐던 지방관은 사건의 내막을 알고 그를 체포했는데, 오라비는 죗값을 치르겠노라며 개를 유인하는 미끼 역을 자청하여 이후 벌어진 소탕 작전 중 덤벼드는 개를 찌르고 자신도 죽는다. 유언에 따라 오라비의 재산은 피해자들에게 전부 보내지고 시신은 누이의 초상과 함께 화장된다.

 

의원이 이 글을 마무리지을 즈음 나는 기루를 떠나려 했소. 날씨도 풀렸고 기생 노릇도 그쯤되니 질렸거든. 하여 마지막으로 찾아갔을 땐 슬쩍 운을 띄워 봤지. 그만치 공을 들였는데 정말로 이야기만 받아갈 셈이냐고. 허나 의원은 끝내 나와 살을 섞지는 않았다오. 다만 내 이름이나 알려달라 하더이다. 언젠가 책을 내게 되거든 필명으로 삼겠다나. 내가 의원의 글을 몇 가져다 기녀며 한량들에게 보였더니 그것이 어찌어찌 돌고 돌아 제법 입소문을 탄지라 관심을 보이는 업자까지 나타나지 않았겠소. 가르쳐줄테니 귀를 대라 하였다가 작별의 뜻으로 입술을 포갰지.”

 

익어 터진 홍시가 따로 없더라며 Y는 킬킬 웃었다. 자기가 여우 꼴을 하고 있으면 목덜미고 꼬리고 잘만 쓰다듬어 댔으면서 참으로 별스럽다고.

 

나는 또 놀러와도 되겠느냐 물었소만 그 뒤로 의원과 다시 만난 일은 없었다오. 까맣게 잊고 지내다 문득 찾아와 보니 벌써 사람은 다들 흩어지고 집만 덩그러니 남았더구려. 헌데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 내가 배우 노릇을 하고 있자니 마침 의원이 쓴 소설을 가지고 드라마를 만든다는 게 아니겠소. 얄궂게도 촬영지는 이 동네였고. 게다가 여기에 누님까지 캐스팅됐으니 퍽 재미있는 일 아니오. 처음 알았을 땐 나도 꽤 놀랐다오. 나야 여기 한 자리 차지하느라 농간을 좀 부렸소만 누님이 나오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거든. 해서 내가 누님이 귀신이란 걸 눈치 못 채게 술법을 썼지. 혼백을 잠시 육화시키는 주술인데 예전에 어떤 정신나간 도사가 몽달귀신을 성불시켜 주겠답시고 이걸 써서 자리를 마련해 주었더니만 승천하기는커녕 다시 하게 해달라며 극성을 떠는지라 아주 학을 떼었더랬소.”

 

화제가 바뀌어 둘은 한동안 도깨비니 도사니 하는 그쪽 세계 이야기를 나누다 귀신이 먼저 일어났다. 오늘 촬영은 글렀으니 자신은 이만 가보겠노라고. 나중에 가 보니 뭐가 고장났다던가 해서 실제로 그 날 촬영은 중단되었기에 꽤 신기했다.

 

 

"먼저 귀신 소동도 있고 해서 그거 할 때 꽤 시청률이 높았어. 지방관이랑 처남이 주인공인 추리물 비슷한 거라 개에 물려 죽은 시체를 조사하는 장면부터 시작했는데 오빠가 완전 악역으로 나왔지."

 

드라마에서 사람들을 해친 개는 인근 사냥꾼이 기르던 개였는데, 이후 소설에서처럼 개에 물려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속출하자 사냥꾼은 억울하게 관아로 잡혀 간다. 나는 사냥꾼의 아들 역을 맡아 지방관에게 아버지의 무고를 호소하고 개를 잡아들이는 데 일조했다. 수사망이 좁혀 들어오자 오라비는 진상을 은폐하기 위해 향낭가게 주인을 살해하고 사냥꾼마저 해쳐 죄를 뒤집어씌우려다 덜미를 잡힌다. 그는 최초 피해자인 화공이 누이를 겁탈하고 향낭을 훔쳤기에 죽였다고 진술했으나, 오라비의 처형장에 나타난 누이의 망령은 망나니의 칼을 붙들어 열 번이 넘게 목을 쳤는데도 오라비의 숨이 붙어 있게끔 만든다. 결국 오라비는 피투성이가 되어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는다.

 

귀신을 볼 수 있는 지방관의 처남은 누이의 망령이 화공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따라간다. 누이의 망령은 처남에게 오라비가 저지른 만행을 밝히고 초상화 속으로 사라진다. 화공에게 향낭을 정표로 주었더니 질투에 눈이 먼 오라비가 자신을 겁탈하며 계속 그자를 만난다면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기에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노라고.

 

"누이의 망령이 망나니의 칼을 붙드는 장면이 진짜 압권이었어. 망나니가 목을 칠 때마다 무표정한 얼굴로 날 밑에 손을 넣다가 피를 쏟으며 버둥거리는 오라비를 보고서 깔깔 웃었거든."

 

처남은 누이가 오라비의 목을 치지 못하게끔 애쓰는 줄 알고 측은한 표정을 짓지만 곧 그녀가 무슨 짓을 하는지 깨닫고선 경악하여 몸을 떤다. 그 장면을 찍을 때 그녀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그야말로 귀기가 서려 있었기에 구경꾼 역의 엑스트라 대부분이 오싹한 표정을 지었던 기억이 난다. 나로서는 처남 역을 맡은 Y가 더 무서웠으므로 내 옆에 서 있던 Y가 바르르 떨며 두려워하는 연기를 하자 좀 가증스러웠지만. 드라마가 그럭저럭 인기를 끌자 곧 의원이 썼단 소설도 모 드라마 원작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잠시나마 서점의 가장 좋은 자리에 깔리게 되었다. 의원도 저세상에서 감개무량하지 않았을까.

 

내가 거기까지 이야기했더니 B는 뭔가 핀트가 어긋난 반응을 보였다.

 

"귀신 누님의 오라버니 말인데, 그게 그렇게까지 혼자서 끙끙 앓을 일이었을까요? 옛날 귀족들은 근친혼도 자주 했다던데.”

 

Y가 여우라니 말도 안 된다거나 꿈꾼 거 아니냐고 묻는 게 보통 아닌가? 하긴, 이 녀석은 연예인에 통 관심이 없으니 Y가 누군지도 모르겠군.

 

“아무리 그래도 친남매끼리는 결혼 못 했을걸. 동생한테 정혼자가 있었는지도 모르고. 아니면 단순히 지나치게 소심한 인간이었던가.”

 

“근데 선배는 왜 어설프게 그런 괴담을 만들었어요? 아까 했던 얘길 그대로 쓰는 편이 훨씬 나았을 텐데. 그 여우가 말했다간 간을 뽑아 죽이겠다고 협박이라도 하던가요?”

 

비슷하다. 귀신이 가고 나서 Y는 기지개를 쭉 펴더니 생각났다는 듯 몸을 돌려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황급히 문을 닫으려 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뱀 앞의 개구리마냥 몸이 굳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문틈으로 Y가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엿듣고 있었던 거 다 안다 꼬마야. 입을 함부로 놀렸다간 간이 뽑혀 죽을 줄 알아라. 아니, 알고 있었으면 왜 끝까지 나불나불 떠드는 건데? 지금 생각하면 3류 악당도 아니고 자기 쪽에서 실컷 얘기해 놓고는 공갈이라니 이게 무슨 경우인가 싶지만 그때는 정말 무서웠다. 나를 들여다보던 Y의 눈은 고양이처럼 동공이 세로로 찢어져 있었으니까. 내가 하얗게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자니까 Y는 곧 눈웃음을 치면서 물러났다. 농담이다, 어차피 그런 얘기 해 봤자 아무도 안 믿을 테니 말하든 말든 맘대로 하라면서.

 

"그러고선 가나 싶더니 금방 되돌아와서 이러더라. 그래도 혹시 모르니 3년 동안은 입단속을 해달라고."

 

나는 Y의 그 눈만 떠올리면 자다가도 경기를 일으킬 지경이라 감히 그 때 일을 이야기할 엄두도 못 냈다. Y가 내 눈을 들여다보면서 무슨 주박을 건 게 아니었을까.

 

"화가 할아버지는 내 나름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였던 셈이지. 그거 쓰면서 암호로 Y는 여우라는 메시지를 숨겨 놨었거든. 글 밑에 숫자가 암호 푸는 힌트고. 인터넷 뒤져서 무슨 아나그램인가? 아스키 코드? 뭐 그런 걸로 만든 암혼데 지금은 어떻게 푸는지 생각 안 나."

 

화가 할아버지 괴담은 사이트 한구석에 조용히 묻혔고 암호를 푼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걸 쓰자 나는 그런대로 속이 후련했다. 3년이 지나자 공포는 거짓말처럼 사라졌으나 이번에는 내 쪽에서 별로 이야기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Y의 말대로 해 봤자 누가 믿어 줄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역덕의 블로그가 없었더라면 아마 B에게도 말하지 않았겠지.

 

 

여름 방학 동안 B는 화가 할아버지라는 제목의 단편만화를 그렸다. 여대생 대신 젊은 직장여성이 두 살 난 딸 사진을 초상화로 그려 달랬다가 귀갓길에 기겁한 남편의 전화를 받고 기절한다는 내용으로 각색해서. 노인이 초상화를 완성한 시점부터 그로테스크하게 흘러가는 분위기가 일품이었다. 남편이 전송해준 주름투성이의 아기 사진은 기괴하다 못해 기분나쁜 느낌까지 들었다. 만화가 일베에 올라 토할 것 같다는 댓글이 줄줄이 달리자 B는 기뻐하며 나에게 밥을 샀다. B가 후기에 원작이라며 내가 쓴 글을 링크해둔지라 그쪽도 덩달아 조회수가 올라갔다. 덕분에 내 글은 여기저기로 퍼져나가 다른 버전까지 몇 생겨났다. 그림을 바꾸는 순간 여대생의 손이 주름투성이로 변했다거나 지하철에서 할머니 여기 앉으시라는 말을 듣고 자신이 노파가 됐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가벼운 변형부터 시작해 애꾸눈 할아버지가 시력을 빼앗아 갔다, 휠체어에 탄 노인이 다리를 그렸는데 그림을 바꾸는 순간 여대생이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더라, 할아버지가 아니라 백발의 젊은 여자였는데 그림을 바꾸자 여대생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 버렸다, 여기서 파생된 듯 대머리 할아버지에게 여대생이 머리카락을 몽땅 빼앗긴다는 개그 버전까지 나온 걸로 알고 있다. 암호를 푼 사람은 역시 아무도 없는 것 같았지만. B도 뭔가 암시하고 싶었는지 마지막 컷에 도로 젊어진 화가 얼굴을 Y와 비슷하게 그렸는데, 댓글에 Y의 이름을 쓴 사람은 거의 없었고 대다수가 모 아이돌 멤버 닮았다고만 하기에 새삼 나도 늙었나 싶어 조금 슬펐다.

 

Y는 그 드라마를 찍은 뒤로도 3년간 데뷔 때와 전혀 다른 점이 없는 외모 덕에 뱀파이어니 외계인이니 하는 소리를 들으며 활동하다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잠적해 버렸다. 벨기에로 사랑의 도피를 했다는 설부터 고향별로 돌아갔다는 설까지 온갖 소문이 난무했지만 이제는 잠잠해졌다. 지금쯤 어딘가의 고급 호스트바 같은 데 들어가 호의호식하고 있지 않을까. 귀신은 소름끼치는 연기로 한동안 주목을 받았지만 그 에피소드가 끝나자 관심은 급속히 사그라들었다. 인터넷에는 여전히 그녀에 대한 기사와 캡쳐 사진들이 떠돌고 있지만 10년도 더 묵은 그런 옛날 글을 누가 굳이 찾아 읽겠는가. 월리 덕분에 일약 네임드가 된 역덕은 왕성하게 활동하다 끝도 없는 키배질에 드디어 진절머리가 났는지 B가 만화를 올리던 무렵 갑자기 블로그를 폭파해 버렸다. 이제 증거도 없으니만큼 내가 B에게 들려줬던 이야기를 다시 할 일은 없을 것 같다. 다만 나는 지금도 사극을 볼 때면 어딘가에 끼어들어 있을지도 모를 월리를 찾느라 애를 쓰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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