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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독자우수단편심사단 김이환과 적어(赤魚)입니다.

전체적으로 글이 적은 달이었습니다. 덕분에 심사단의 수고는 줄었지만, 보다 다양한 글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순간적으로 멋진 착상이 번득이면 단숨에 글을 써낼 것만 같은 흥분이 찾아오지만, 그 착상으로 뼈대를 세우고 살을 붙이면서 소설 한 편을 완성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번 달엔 착상에 비해 허술한 구성이 아쉬운 글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모든 분의 건필을 기원합니다. 

이번 달에는 qui-gon님의 <광야>와 레몬님의 <물속 아래 잠긴 시간>을 가작으로 선정하였습니다.


공기를 마시는 벌레 - 장피엘

A 흑염소가 죽는 사건과 하얀 옷을 입은 여자의 등장으로 이야기가 시작합니다. 사건 안에 사건이 있는 액자 식 구성인데 이 구성이 글에 어울리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어울리지 않기도 합니다. 소년과 소녀의 죽음, 갑자기 사라진 사내, 밤나무와 벌떼 등이 등장하는 호러로서는 이런 구성이 좋고 이미지와 이야기가 중첩되면서 기괴한 분위기를 잘 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소재들이 유기적으로 얽혀 있지 않습니다. 마지막의 벌레가 등장할 때까지 궁금증은 유지되지만 결말을 읽어도 과거의 일과 현재의 일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결말을 궁금하게 하는 흐름은 좋았습니다만, 정말 독자를 무섭게 만드는 결말이었으면 더 좋겠습니다.

B 단편보다 장편이 더 어울릴 호흡을 가진 글입니다. 그런데 공기를 마시는 벌레의 무서움만을 보여주는 글로는 장황하고, 벌레에서 파생되는 사건의 서사로 보기엔 기승전결이 명확하지 않아 단조롭습니다. 이 글의 정수는 공기를 마시는 벌레의 기괴함을 보여주면서 독자에게 전달하는 오싹함입니다. 그렇다면 독자의 공포를 유발하는 긴장감 조성이 중요할 것 입니다. 초반에 전개되는 염소 사건은 긴장감을 효과적으로 형성하여 독자를 매혹시키지만 이후에 너무 많은 사건이 등장하면서 긴장감을 없애버립니다. 그래서 아쉽게도 전체적인 글이 밋밋해져버린 것 같습니다. 핵심적인 사건 한두 개를 개연성 있게 연결하여 긴장감을 고조해 나가서 결말을 맺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식사진전 - 목이긴기린그림

A 사진을 먹어서 그 가치를 알 수 있는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그는 독특한 맛의 사진을 만나고, 사진가가 그의 후배임이 드러나면서 이야기가 흘러갑니다. 결말에 이르기까지 주인공이 하는 일이 특별히 없는 것 같습니다. 주인공은 별다른 사건을 만들지 않습니다. 더 좋은 맛의 사진을 찍을 수 있을 텐데 아쉬워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이야기의 결말로서는 다소 심심한 사건입니다. 좀 더 극적인 사건이 있었으면 합니다. 사진에 대한 소설이지만 사진의 이미지보다는 맛이 중요한 소설이라는 점이 독특합니다. 이런 아이디어나 맛에 대한 묘사는 좋았습니다.

B 이 글에서는 ‘사진의 맛’을 느끼는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사진을 맛보는 능력은 독특한 능력입니다. 이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상황은 다양하고도 재미있게 펼쳐질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글의 주인공은 그냥 그런 능력만 있을 뿐, 눈으로 사진을 감별하는 것과 판이하게 다르거나 재미있는 상황을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이 소재를 다시 한 번 활용하셔서 조금 더 독특한 사건이 펼쳐지는 글을 써보시는 것도 연습으로 좋을 것 같습니다. 사진의 맛으로 범인을 알아내는 탐정이라든가, 어느 날 낯선 사람의 사진을 씹었는데 이상한 맛이 나서 추적해 봤더니.....등 재미있는 구성이 얼마든지 가능한 소재인 것 같습니다. 비슷한 소재를 사용하였기에 참고할 만한 만화로 ‘냄새를 보는 소녀’를 추천합니다.


42번째 지구의 대니 그린트 - 카엘류르

A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팬픽션입니다. 머리끈에 대한 엽편이었다가 히치하이커의 내용으로 연결되는 부분은 흥미로웠습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B 머리끈 부분이 재미있네요. 요키 외계인(썩을 지랄견)의 머리끈 부분이 특히 많은 웃음을 자아내는 것 같습니다.


젊은 기사, 스티그마르 폰 동찬 이야기 - 엠제이

A 미래 세계에 기사가 존재한다는 가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글은 현재 20, 30대의 힘든 삶을 소재로 삼았고, 그런 글이 흔히 그렇듯이 동찬의 불행한 삶을 블랙 코미디 분위기로 풀어놓습니다. 시작은 주인공의 나레이션이었다가 갑자기 배경이 미래로 넘어가면서 주인공이 바뀌는데, 이것은 마지막에 반전을 만들긴 하지만 다소 뜬금없다는 느낌도 듭니다. 왜냐하면 주인공이 미래를 본다는 설정 자체가 이미 큰 사건인데, 이것에 대한 설명은 없이 갑자기 별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로 빠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마지막 반전에서 상관이 있는 이야기임이 밝혀집니다. 주인공이 미래의 일을 빗대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현재의 주인공에 대한 설명이 더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세탁기 전쟁이나, ‘기사’와 택시 ‘기사’의 말장난 등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많은 단편이었습니다.

B 현실을 노골적이고도 직설적으로 풍자한 글입니다. 소설 형식을 갖추었지만 문학적인 카타르시스보다는 억압된 삶에 대한 실제적 카타르시스가 목적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흔히 시사만화에서 제공하는 촌철살인의 대리만족을 소설형식으로 늘어놓은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작가의 의도한 목적에 소설형식이 썩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아 아쉽습니다.


광야 - qui-gon

A 노아의 방주를 노아의 방주를 지켜보는 인물의 시점에서 다시 풀어냈습니다. 문장이나 이야기도 좋고 안에 담긴 깊이도 있습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가 조금 어렵습니다. 등장인물에 대한 설명이 없거나 설명이 구체적이지 않은데, 소설의 설정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고 가정하고 글을 진행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성서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저는 조금 어렵기도 했습니다. 물론 쉽고 재미있는 글을 의도한 것이 아니고 성서를 재해석하는 의도의 글이라면 이것을 단점이라고 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글의 문장이나 전체인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단단함이 소재와 잘 어울리는 점은 좋았습니다.

B 노아 이야기에 나그네 나필(네피림, 거인족)이 등장하여 신에게 선택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가 무엇인가 항변하며 고뇌합니다. 신에게 선택받지 못한 자의 증오와 질투는 그 극적인 요소로 인해 많은 창작물의 소재로 사용되어왔습니다. 그래서 신선함은 적은 편입니다만, 극적인 요소에 어울리는 화려한 수사로 이 글을 매력적으로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종교용어를 그럴 듯 해 보이는 수사로 남발한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정언, 시방영토, 다섯 욕심과 일곱 감정(사단 칠정)이 노아 시대에 어떻게 등장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노아시대로부터 한참 후대에 발생한 조로아스터교의 신, 앙그라 마이뉴와 아후라 마즈다의 이름을 나필이 언급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작으로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물속 아래 잠긴 시간 - 레몬

A 아버지의 폭력과 이어진 병환으로 고통스러운 주인공의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힘든 성장의 시기를 물에서 만난 친구와 함께 이겨냅니다. 친구는 물에 빠진 주인공을 살려주기도 하면서 동시에 감정적으로 무너져가는 주인공에게 힘을 주고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갑니다. 주인공의 불행한 가정사에 월드컵 등 현실 속의 사건이 겹쳐집니다. 글은 이런 사건을 물의 이미지와 함께 몽환적으로 엮고 있습니다. 조금 더 글이 선명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지금은 읽기 버거운 느낌도 가끔 듭니다. 하지만 이미지가 전체적으로 아름답고 수채화 같은 느낌의 소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B 힘든 삶에 저항할 힘이 없을 때, 사람들은 종교나 점 혹은 초현실적인 것에서 위로와 힘을 얻고자 합니다. 연약한 어린 아이들의 경우엔 자신을 보호하고 지켜줄 수 있는 상상 속의 친구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주인공의 마음을 지지하고 지탱해주는 친구는 ‘강’입니다. 그 친구는 강의 속성을 지닌 인격으로 보이기도 하고 단순히 주인공이 의인화한 강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친구에 대한 감정이 순수해 보이는 한편, 소녀적인 감성을 넘지 못하여 자칫하면 유치하게 읽힐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와 환상의 경계에 ‘강’을 두고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잘 살린 글입니다. 

가작으로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대가 없이 사랑케 하소서 - Serinus

A 멸망해가던 지구에 뜬금없이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구호품이 떨어집니다. 처음엔 선물인 줄만 알았지만 대가가 있었습니다. 태양이 사라진 것이죠.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결말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인과 관계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사람들이 모른다는 결말이 좋은 결말 같진 않습니다. 그저 글이 뚝 끊어졌다는 인상을 더 주기 때문입니다. 더 결말 같은 결말을 맺었으면 합니다.

B 머릿속에 떠오른 건물을 짓기 위해서 구체적인 설계도가 필요하듯이 머릿속에 떠오른 착상을 글로 옮길 때에도 구체적인 구성이 중요합니다. 지구에 석유고갈 위기가 닥쳤다-외계인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다-그 대가는 태양빛의 인수였다-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태양을 모른다. 주요한 이 네 꼭지를 연결해가는 알레고리가 허술한 점이 안타깝습니다. ‘사랑’, ‘아이들은 태양을 모른다.’ 등 감성적인 분위기 형성에만 너무 집중하신 것은 아닌지요?


릭 더 월드 워커 - Aro

A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던 주인공이, 사실은 자신이 애니메이션 속의 주인공이었음을 깨닫는 이야기입니다. 흔한 소재이지만 이 글에서는 흥미로운 방식으로 재밌게 잘 풀어냈습니다. 문제는 이 이야기가 시작하면서 바로 끝난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이어질 멋진 모험의 도입부로는 훌륭한데 아직은 도입부만 있습니다. 이 후로 재미있는 이야기가 이어졌으면 합니다.

B 내게는 ‘릭’이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지만, 나는 ‘릭’이 그의 세계에서 읽은 책의 주인공입니다. 그래서 ‘릭’과 나, 둘 중에서 어느 쪽이 실재인지는 알 수 없게 됩니다. 장자의 나비 꿈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주제는 많은 창작물에서 다루어졌기에 신선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환상과 실재를 평행우주로 설정하여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풀어나간 것이 장점입니다. 


qui-gon님과 레몬님께는 책을 한 권씩 보내드립니다. mirrorwebzine@gmail.com으로 우편물을 수령할 주소, 성함, 전화번호(택배 발송시 필요)를 보내주세요.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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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몬 15.11.01 08:43 댓글

    부족한 게 많았을 텐데,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작으로 뽑아주신 것도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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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ui-gon 15.11.01 09:13 댓글

    작품 선정에 감사드립니다. 사족으로 시대/지리가 다른 종교적 용어가 사용될 수 있었던 건, 작품에서 언급했듯 그의 정신이 과거와 미래의 수만년의 시간을 지나 피안에 가 닿았던 까닭입니다. 더 좋은 작품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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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더 15.11.01 10:10 댓글

    안녕하세요? 10월 8일 업로드한 제 "하늘의 탑"이 심사 제외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9월 6일 업로드했던 젊은나무꾼의슬픔2도 별다른 언급 없이 심사 제외되었을 때는 이전에 올렸던 작품의 수정본이라 그런가 싶었는데, 이번에 새로 쓴 작품도 누락되니 무슨 일인가 싶네요.

  • 니그라토 15.11.01 12:42 댓글

    알렉산더님, '하늘의 탑'의 경우 200자 원고지로 313매 분량이더군요. 거울 독자우수단편은 규정상 150매 이상은 심사해주지 않습니다. 규정 보심 아실 겁니다.

  • No Profile
    알렉산더 15.11.01 20:44 댓글

    니그라토 님 감사합니다. 

  • No Profile
    목이긴기린그림 15.11.02 13:14 댓글

    감상평 감사합니다. 저는 늘 느끼는 거지만 초반에 탈력해서 정작 중요한 부분에서는 힘을 쏟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정진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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