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가작 백수광부지가

2015.10.01 04:1410.01



 백수광부지가
 白首狂夫之歌
 
 
 
 
 
회음후 한신이 반역을 도모하기에 장락궁에서 참하였다.
고조 유방이 이어 한신의 빈객 괴철을 잡아들이라 명하였다.
 
보름 후 백발의 미치광이 노인이 장락궁 뜰에 섰다.
 
 
 
 
소인을 살려주겠다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소인이 어찌 영명하신 폐하를 의심하겠습니까? 명을 내리고 거두는 것은 모두 폐하의 뜻이십니다. 폐하가 살리겠다 하시면 죽이라 명하신 적이 없게 되는 것이요, 죽이겠다 하시면 살려주겠노라 약조한 적이 없게 되는 것. 이 마당에 폐하를 의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이 늙은이는 다만 폐하께서 내거신 조건이 재미있을 따름입니다.
왜 한신에게 폐하를 배신하라 간했는지 바른대로 대면, 소인을 살려주시겠다고요.
예. 이건 재미있는 일입니다. 예상 밖의 일이지요. 폐하께서 지금 ‘바른대로 대라’고 명하신 게 맞습니까? 다른 이도 아닌 저 괴철에게 말입니다. 폐하께서는 혹 듣지 못하셨는지요. 소인이 한신의 면전에 침을 뱉고 탕 그릇에 소변을 갈긴 것을. 지붕 위에 올라 닭 흉내를 내다 스스로 시황제라 우겼던 것은요?
제 광증을 본 누구도 제가 미쳤음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저는 한신의 곁을 무사히 떠날 수 있었지요. 상석에서 물끄러미 저를 내려다보는 한신 앞에서 네 발로 기어나갔습니다. 혹여 그가 저를 붙잡을까봐, 실성하지 않은 것 아니냐고 따져물을까봐 성문을 넘을 때까지 절대 몸을 곧추세우지 않았답니다.
그렇게 제가 한신에게 올린 천하삼분의 계도, 왕위에 오르라는 충언도 모두 헛소리 ― 한줄기 먼지바람이 되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제 입은 썩어가는 혀를 봉한 관이 되었고, 제 몸은 대낮에 헤매는 혼백이 되었지요. 저는 오로지 대역죄를 피하기 위해 빈객으로서의 명줄을 끊고 말았습니다. 그게 벌써 칠팔년 전 이야기지요.
헌데 이제와서 바른 정신으로 옛 언행의 연고를 밝히라니요. 그간의 미치광이 괴철마저 명줄을 다하는 건 물론, 아차! 똑 그대로 대역죄를 뒤집어쓸 것 아닙니까.미치광이로 죽느냐 폐하의 칼날에 목이 달아나느냐. 그렇게 피하려 애썼건만 폐하께서는 기어이 저를 잡아와 위기에 빠트리시는군요. 외줄다리에서 오른쪽으로 넘어지나 왼쪽으로 뒹구나 구덩이에 떨어지는 건 매한가지라면 광대가 무엇하러 재주를 부리겠습니까?
…아니, 소인이 실언했습니다. 폐하의 변덕조차도 백성에게는 은혜인 것을. 제 혓바닥이 아직도 누군가에게는 흥정할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그 누군가가 다른 이도 아닌 폐하라니 정말 재미있는 일입니다. 오늘 늙은 몸이 뜻밖에 성은을 입고 보니 과연 천자의 위엄이 사해에 두루 미침을 깨닫는군요.
그렇다면 자비로우신 폐하. 기왕 은혜를 베푸셨으니 한 가지만 더 허락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이제 괴철이 성심껏 폐하의 질문에 답할 것입니다. 제 답이 성에 차신다면 저에게 한신의 시신을 내주시어 거두도록 해주십시오. 답이 영 시원치 않다면? 하하.폐하께서 외로운 시체 두 구를 거두어주시는 게지요. 이 늙은이를 살리시든 죽이시든 폐하의 선정에 누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저 시체 치우는 수고를 더느냐 늘리느냐일뿐. 자. 한바탕 떠드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그럼 이야기를 처음으로 돌려보지요. 정확히 이렇게 하문하셨지요? 어찌 한신에게 역심을 품게 하였는가. 폐하께서는 기실 이렇게 말씀하고 싶으신 게지요. 너는 왜 한신을 죽게 만들었느냐. 왜 짐이 한신을 죽이게 만들었느냐. 한신을 죽게 만든 건 네 주제 모르는 망상이었다는 걸 인정해라.
허나. 폐하. 저는 억울합니다.
한신이 최후를 맞은 것은 그가 제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 한신을 참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폐하를 배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역심을 품었기로 죽일 수 밖에 없었노라 말하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저 괴철을 붙들어 온 이유가 한신의 역심을 만천하에 공표하기 위해서라면, 저 또한 손을 들어 이렇게 외치겠습니다.
나 괴철이 한신 대장군을 왕으로 삼으려 한 것은 바로 그대, 유방 때문이라고.
지금 천하의 주인은 제 사냥개까지 삶아먹는 걸신이라고 말이외다.
허어. 폐하. 지금 용안이 어떠한 줄 아십니까? 눈자위에는 핏줄이 그물처럼 퍼졌고 입술은 폐가 문짝처럼 뒤틀려 있군요. 질긴 낯가죽 아래 시커먼 기운이 꿈틀대는 것이 딱 백읍고 고기를 눈앞에 둔 주왕이십니다. 애꿎은 용안을 쓸어봤자 소용없습니다. 가죽은 닦을수록 맨얼굴이 드러나기 마련이니까요. 아아. 역시 이 늙은이가 잘못 본 게 아니었군요. 폐하를 이렇게 가깝게 뵈오니 모든 것이 확실해집니다.
네. 오래 전 소인은 폐하의 이런 얼굴을 뵌 적이 있습니다. 찰나였지만 도저히 한 눈으로 흘릴 수 없었지요. 소인이 감히 왕을 하나 더 세우기로 마음먹게 된 건 바로 폐하의 맨얼굴을 본 탓이었습니다. 어라. 발뺌 하십니까. 기억이 나지 않으신다니 똑똑히 불러드리지요. 8년 전. 연나라 땅. 한신 대장군의 등 뒤에서 소신이 본 것을.
 
때는 한신 대장군이 막 연을 정복한 직후입니다. 바야흐로 대장군의 위세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바람과 산천이 모두 한마음이 되어 대장군을 지지해주었을 때이지요. 길도 없는 진창에서 대군을 쏟아내는 천재 전략가. 강을 등에 지고도 승리하는 불패의 장군. 그 때 천하에 우뢰처럼 울린 이름은 서초패왕 항우가 아니라 이 젊은 대장군의 것이었습니다. 하물며 폐하 당신, 당시 한중왕 유방의 이름은 댈 것도 아니었지요. 한신이 정복한 장수 중 한신이 이끈 병사들이 바로 유방의 군사였다는 것을 기억한 이가 몇이나 되었을까 싶군요. 한신의 승리는 당신과는 상관없는, 한신 자신만의 것이었으니까요.
한신 당도. 네 글자에 연왕 장고는 단박 성문을 열었고, 대장군의 군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연을 접수했습니다. 기실 아군의 태반이 부상자이며 창검은 이가 나가 있었지만 군기만은 최고였지요. 바로 그 배수진의 주인공들 아니겠습니까. 잡졸들마저 눈에 총기가 반들거리고 대열은 한치 흐트러짐이 없으니 연의 어느 장수도 아군의 초라한 몰골을 비웃지 못했습니다. 대군을 움직이는 데에는 북 한 번 두들기면 충분하고 함성을 내지르는 데에는 깃발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충분하였지요. 아. 천하에 그러한 군대는 다시 없을 겁니다. 저 항우마저도 그런 부대는 키우지 못했을 겁니다.
폐하가 도적처럼 숨어들어오신 때는 바로 그러한 와중이었습니다.
연왕은 우리가 머무는 내내 크고 작은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그의 태도는 은근했으나 뜻은 확실했지요.
‘그대들은 무혈 입성해 온 이들이다, 떠날 때까지 누구의 피도 뿌리지 말아라.’
연의 무기고를 열어 우리 병졸들에게 무기와 갑옷을 주고, 고깃국을 먹여 그들을 살찌웠습니다. 매끼 식사마다 정성이 극진했지요.
‘그대들은 천하 명장이 직접 길러낸 정복군이다. 그러니 다음 정복지로 속히 떠나라.’
하하. 나쁘지 않은 처세술입니다. 과연 항복을 유도하라던 광무군의 계책이 이해가 갔지요. 조왕 진여였더라면 절대 이렇게 순순히 협조하지 않았을 겁니다.
덕분에 장이는 더욱 바빠졌지요. 당신의 명에 따라 복속지의 수습을 맡고 있었는데 이미 정복자 한신의 군대는 다음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으니까요. 아군의 창검은 이미 제나라로 향해 있었고 무수한 염탐꾼이 대군의 진격로를 살피고 있었지요. 연일 군량을 모으고 작전회의를 하는 틈에 정복한 땅을 속속들이 파악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대장군 휘하 모든 장수와 책사들, 저 괴철까지도 며칠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지요. 하루라도 더 빨리, 한 발자국이라도 더 멀리. 지금 이 기세를 멈추어서는 안된다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골목길 싸움을 하는 어린 영웅들처럼 들떠있었던 겁니다. 하여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지요. 한중왕께서 직접‘왕의 사자’로 변장하여 나타날 줄이야.
하필 그날은 연왕이 마지막 대연회를 연 날이었으니. 폐하께는 그야말로 가는 날이 잔치 날이었던 셈이었지요?
 
그 새벽 대장군의 침소를 지키던 병졸들은 모두 참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었겠습니까? 폐하께서 친히 '몰래 들어오고자' 하신다면 못 알아보는 것이 그 뜻에 순종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만 수상한 낌새를 감지하고도 보고치 않은 것은 큰 문제였습니다. 왕이 파견했다고 해도 사자는 사자일뿐. 일개 사자가 대기소도 아니고 대장군의 개인 침소로 곧장 들이닥치는데 막지 못하다니요. 심지어 병졸 중 하나는 폐하의 기세에 밀려 앞장을 섰다지요. 시키는 대로 발소리까지 죽여 가며 말입니다. 사자의 복색을 한 자는 누구나 잠든 대장군 머리맡까지 안내한다는 게 알려지면 어찌 대장군의 안위를 지키겠습니까? 적들에게 보이기 위해서라도 엄히 벌할 수밖에 없었지요.
“형양을 잃었소.”
장이와 제가 소식을 듣고 대장군 침소에 당도했을 때에는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나 있었습니다. 우뚝 서 있는 폐하의 발치에 사자의 겉옷이 떨어져 있었고 대장군이 부복해 있었지요. 지금도 선명히 기억합니다. 우리 대장군의 꼴이 얼마나 가관이었는지. 흐트러진 머리에 금관이 얹혀있고 옷과 신의 끈은 다 풀려 있는 꼴이란. 이크. 저 술버릇이 기어이 동티가 나는 날이 오는구나. 소인은 무릎을 꿇으며 몰래 혀를 찼었지요. 대장군은 한 번 흥이 나면, 특히 승리 후 주연일 때에는 절대 술을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종에게 업혀 들어오기 전까지는 누가 말리든 결코 자리를 떠나는 법이 없었죠. 그 후에는 또 세상 모르게 곯아떨어집디다. 그 날도 역시 제때 눈을 뜨지 못한 게지요.
천하 반 쪽 따위 술동이 비우듯 술술 들이킬 기세였던 장군이 장난치다 되게 혼쭐 난 어린애처럼 얼이 빠져있었습니다. 아마 그때까지 자신이 왜 무릎을 꿇었는지도 몰랐을 겝니다. 그건 사실 장이나 저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형양을 잃었다 – 폐하의 군대가 패하였다는 것은 이해했으나 그것이 곧 폐하께서 하늘에서 뚝 떨어진 비결을 설명해내지는 못했으니까요.
“기신이 나를 대신하여 죽었소. 내 수레에 올라 내 옷을 입고 대신 항우군 사이를 달렸단 말이오!”
기신? 기신이 누구였더라?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건 형양의 아군이 폐했고, 폐하께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것뿐이었지요. 폐하께서는 답답하다는 듯 소매를 휘두르셨지요. 그 손에 들린 대장군의 인수와 부절을 보았을 때에야 저는 사태의 심각함을 깨달았습니다. 대장군도 대장군이죠. 아무리 술에 취했기로 인수와 부절을 빼앗기는 것도 몰랐더란 말인가. 만약 저 인수를 훔친 게 어느 하극상을 꿈꾸는 장수였더라면 어쩔 뻔 했는가. 아니. 상황은 그보다 더 심각했지요. 대왕은 이대로 대장군을 해임하려는 것인가? 대장군을 죽이려는 것인가?
“눈이 있으면 보오. 내가 살아있는지. 나는 형양에서 이 곳까지 저승 문턱을 넘어 왔어!”
과연 폐하의 무릎 아래는 흙먼지가 잔뜩 엉겨 있었습니다. 쉬지 않고 말을 달려오신 게지요. 당시 폐하의 모습은 피로와 분노를 개어 만든 인형같았습니다.
“자네가 지원군을 보내지 않은 탓이야.”
대장군이 대답했지요. 잠기운이 가시지 않았으나 따박따박 이치에는 맞는 소리였습니다.
“대왕. 보고 올렸다시피 제 임무는 북방 평정입니다. 지금 제가 운용하고 있는 군세는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최소한의 것입니다. 또한 이 군을 전부 쏟는다 해도 형양성의 전세를 역전하기에는 부족한 만큼, 병력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시끄럽소! 그대는 내 군을 끌고 나가놓고 내가 위험에 빠졌을 때 한 번 돌아보지도 않았어. 그대는 내 대장군이 아니야!”
쾅! 인수가 나무 상에 부딪혀 날아가는 소리가 꽤 요란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폐하의 벽력 같은 고함이 더 대단했지요. 대장군이 무릎 꿇은 그대로 천천히 기어가기 시작했을 때 저는 그가 용서를 빌려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을 하기는커녕 입도 떼지 않았지요. 그저 구석으로 굴러간 인수를 주워와 대왕에게 두 손으로 바쳤을 뿐.
그때, 폐하의 표정이 달라졌습니다. 방금 전까지 저승 문턱을 너머 온 괴물인 듯 굴던 폐하가 진짜 괴물을 본 것처럼 주춤했지요.
“한신 휘하 보병 3만은 지금부터 내 지휘 아래 움직인다.”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 인수를 넘겨 받고 명을 내리셨을 때에는 진정 노련하다 감탄이 나왔더랬습니다. 3만. 보병 3만이라니. 그3만은 대장군이 이끄는 군의 핵심이었습니다. 그 보병을 제외한 신병은 1만 사천. 대와 연 땅에서 새로이 모집한 신병이 절반. 소 상국이 보낸 노약자가 절반이었지요. 제 땅에서 만들어낸 역전의 군대를 폐하는 한 순간에 집어삼켰습니다. 아. 이 분이 기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신 것은 이를 위한 것이로구나. 한 장수를 잃었으니 한 군대를 앗아가도 할 말이 없게 하려는 것이로구나. 폐하. 그때 저는 폐하의 영명하심을 사무치도록 깨달았답니다.
보병 3만을 잃는다는 것은 이후 전진이 불가함은 물론 현 정복지 유지마저 어려워진다는 뜻이었습니다. 지난 며칠간 우리가 뜬눈으로 새운 밤이 다 헛것이 되는 순간이었지요. 그러나 이미 내려진 명을 어찌 주워담을 수 있겠습니까. 대장군도 침통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역시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폐하께서 부른 장수들이 속속 폐하와 함께 떠날 차비를 할 때에도 조용했지요. 글쎄. 그때 대장군이 아쉬운 소리를 했다면 폐하께서 손속에 사정을 두셨을까요? 아니면 대장군의 지위까지 빼앗았을까요.
“대장군.”
아무튼 폐하께서는 아직 그를 대장군이라 부르셨지요. 폭우는 다 지나갔다는 듯 툭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편히 대하셨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마치 미리 언질을 주고 방문한 집안 어른처럼 말이지요. 장이와 저도 폐하를 따라 어색하게 웃었습니다. 그렇게 되고보니 문제는 한신, 아직도 어딘가 얼이 빠져있는 대장군이 되어있더군요. 그는 아닌 밤중 벼락을 맞은 사람 같기도 하고, 골똘히 생각에 빠져 꿈속에서도 골몰하는 사람 같기도 했습니다.
폐하께서 결국 한 소리 하셨었지요. 기억하십니까?
“어찌 그대는 말이 없나?”
“무엇을 아뢰리이까?”
“불쾌한 것 아닌가? 내 그대가 키운 군졸을 그대로 삼켰는데.”
 
― 그대가 키운 군졸. 그대 휘하 장수아닌가. 자네 것이라 말하고 싶은 거 아니냔 말일세. 어디 그대가 이런 낯을 하고 있어서야 저들이 순순히 나를 따라올지 모르겠군.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폐하가 당도했을 때에는 정수리부터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면 그때에는 등을 타고 소름이 주욱 올라오더이다. 아.역시 상황은 끝난 것이 아니었구나. 이제부터 시작이로구나. 조마조마하며 대장군의 기색을 살폈지요. 그리고 우리 천하 명장께서는 역시나 최악의 패를 내버렸고 말입니다. 대장군의 얼굴은 너무나 개운했습니다.
“신이 생각해보니 형양 방면이 몹시 위급하고, 대왕께서 급히 군사를 보충하신 것 또한 당연한 조치입니다. 불쾌할 것이 없습니다.”
“당연한 조치다?”
“예. 하지만 저 한신이 미욱하여 아직 의문이 풀리지 않은 부분이 있기로, 잠시 그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참입니다.”
폐하께서는 한껏 너그러운 얼굴로 한신을 바라보고 계셨지요.
“저로서는 폐하께서 왜 신분을 속이기까지 하여 새벽에 몰래 들어오셔야 했는지, 그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무엇 때문에 굳이 남의 집 물건처럼 폐하의 물건을 취하십니까?”
아. 이 미련한 자야.
“저는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대왕께서 차출하신 3만도 조나라를 정복하기 전까지는 오합지졸이었으니까요. 남은 군도 다시 키우면 됩니다. 제 땅으로의 진격이 다소 늦어지겠으나 이 또한 변수 중 하나이지요. 저는 병사도 장수도 얼마든 다시 길러낼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얼마든지 정병을 길러낼 수 있다? 지금 자네에게 남은 게 고작 노병에 부상병 뿐인데도 말인가? 내가 병졸 하나 남김 없이 모조리 쓸어가 버린다면? 예 자네 혼자 남아서도 제를 공략할 수 있겠나?”
“예. 대장군 직만 유지할 수 있다면 신은 할 수 있습니다.”
네. 바로 그때였습니다. 제가 폐하의 용안을 확인한 것은. 붉게 충혈된 눈에서 지금까지와는 전연 다른, 생생한 불길이 일더이다. 내키는 대로 고성을 지르던 입이 빗장 질린 문처럼 굳게 다물어져 있더이다. 밤새 가물가물하던 촛불은 여전하건만 폐하의 낯에는 그림자가 두 겹 세 겹 덧씌워진 듯 했습니다. 익히 알고 있던 기운이었지요. 저잣거리 부랑자들과 건달 강도들, 칼자루 쥔 자라면 툭툭 내비치던 살기. 폐하가 젊은 시절 풍패의 건달 두목이었을 때 지었을 법한 표정이 생생히 떠올라 있었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노련하게도, 표정에 그만치 드러난 살의를 직접 행동으로 옮기시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폐하께서는 아무 답도 하시지 않으셨었지요. 그저 손에 들린 인수와 부절을 새삼 내려다보시며 흥, 코웃음 쳤을 뿐.
 
얼레. 폐하. 전연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계시는군요. 아까도 말씀드렸듯 아무리 낯가죽을 쓸어봤자 본색은 벗겨지지 않습니다. 그때 폐하를 유심히 보던 이가 저와 한신 대장군 뿐이었다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대장군은 그때도 이후에도 놀라울 정도로 폐하의 심기를 헤아리지 못했으니까요. 폐하가 어째서 야음을 틈탈 수 밖에 없었는지. 왜 모든 병졸들이 보는 앞에서 대장군 인수를 빼앗을 수 없었는지. 폐하께서 무엇을 초조해하고 무엇을 걱정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아니. 폐하가 굳이 인수를 빼앗은 이유조차 이해 못했을 겁니다.
차라리 대장군이 거기서 불쾌함을 가장했다면 폐하의 분노를 피할 수도 있었겠지요. 폐하께서 자신에게 얼마나 심대한 일격을 가했는가, 폐하께서 자신에게 인수를 걷어가시니 얼마나 두려운가 엄살을 부렸다면 말입니다. 형양을 지원하지 않은 것을 사죄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허나 폐하의 힘이 자신에게 미침을 두려워해야 마땅했습니다.
무릇 부강한 나라의 왕조차도 바깥에서 공을 쌓은 대장군을 적대하기 마련입니다. 하물며 당시의 폐하처럼 약세의 주군이라면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폐하는 지금 막 성도 장수도 잃고 단신으로 도망쳐와 권위라고는 없는데, 반면 장군 한신은 적과 아군을 가릴 것 없이 왕보다 더욱 추앙받고 있으니…….
맞습니다. 저는 폐하께서 왜 한신을 죽이고자 했는지 잘 이해합니다. 한 왕의 대장군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여 오래 살기를 바랄 수는 없지요. 그 자리에서 알 수 있었습니다. 대장군은 난이 평정되는 즉시 죽는다. 항우가 죽는 그 때가 한신의 운도 다 하는 날이라고.
이대로라면 한신은 분명 억울히 살해당하고 만다. 그렇다면 어찌 해야 할까. 괴철이 그때에 이미 나이가 많았는데도 마음을 정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더군요. 폐하께서 3만 정병을 이끌고 떠나셨을 때, 저는 결정을 마친 상태였지요.
한신을 왕으로 만들자. 봐라. 한 번 군을 이끌고 나와 정벌치 못한 나라가 없는 영웅이다. 지금 그가 왕이 아니라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 천하의 주인이 정해져 있지 않다면 그 자리는 상대를 죽이는 데만 급급한 자들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영웅에게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야말로 대의 아닙니까? 그가 누구의 아래 있을 수 있는 자가 아니라면, 위로 올라서면 그만 아닙니까. 세 나라를 연달아 쳐 무너뜨린 것은 한신 한 사람의 공적인데 왜 그가 폐하 당신을 무서워해야 합니까? 폐하께서는 제 생각이 틀렸다 보십니까? 폐하를 모신 재상 소하가 처음 폐하를 위해 군을 일으켰을 때에도 같은 생각이 아니었을까요? 아니, 시골 패현의 건달이었던 폐하보다는 천재 지략가 한신을 왕으로 추대하겠다는 게 훨씬 이치에 닿는 생각 아닙니까?
 
괴철도 이제는 압니다. 미망이었지요.
듣자 하니 한신은 이 장락궁에서 죽음을 맞았다지요. 사형을 집행하신 건 폐하가 아니라 황후셨다고요? 칼을 든 궁녀들에게 둘러싸여 난자당해 죽었다 하던데……. 제가 선 바로 이 자리쯤일까요?
허어. 황후께서는 참으로 잔인하십니다. 개 한 마리 제대로 잡아본 적 없을 궁녀들의 어설픈 칼질로 사람을 저미다니요. 한신 그 자도 참으로 독하지요. 맨 정신으로 그 칼날을 다 받고 있다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지 못하고. 차라리 궁녀 하나의 검이라도 빼앗아 저항해보지를 못하고.
그는 정녕 여기 불려와서까지 제가 왜 죽는지 몰랐던 모양입니다. 이 늙은이에게는 한신의 마지막 모습이 훤히 뵈는 군요. 아마도 백정 앞에 붙들린 소 같았겠지요. 백정이 칼을 가는 모습을 뻔히 보면서도 그 칼이 기어코 저를 죽일 것이라고는 깨닫지 못하는 송아지 말입니다. 그럴 수밖에요. 회음후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폐하께서 왜 자신을 제거하려는지 이해 못했을 겁니다.
그가 천하를 도모하라는 제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지요. 몰이해.
폐하께서 정병 삼만을 빼앗아가신 후, 그는 자신이 한 말대로 기어이 제마저 정복해냈지요. 그가 제 땅에 주둔한 후 수없이 간언했습니다. 유방에게 보내는 지원을 중단해라. 항우에게 비밀히 서신을 보내라. 유의 깃발을 내리고 그대의 깃발만 써라. 한신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폐하가 저를 제의 가왕으로 봉해주었으니 되었다는 식이었습니다. 물론 답답했지요. 울분이 터졌지요. 허나 한신에게 왜 제 말을 저버리느냐 따질 수는 없었습니다. 빈객 괴철의 책략은 이미 때를 잃었고, 남은 건 미치광이 괴철뿐이었으니까요.
광기를 부려 그의 곁을 떠난 후에야 그가 왜 그런 젊은이였던가 조금 이해가 가더이다. 그는 남 아래 서지도 못하지만 남 위에 설 수도 없는 사람이었던 겁니다.그가 우리보다 너무 젊었고, 우리의 대의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세대가 없던 자이기 때문에…….
폐하. 이 늙은이는 물론이요 폐하 역시 지나간 시대, 진 제국 이전의 사람입니다. 항우는 육국 시대의 마지막 계승자였지요. 그랬기에 우리는 육국을 그리워하고 진에 대항해 봉기했습니다.
그러나 회음후는 달랐지요. 그는 진의 압정 하에서 자란 자. 뿌리 뽑힌 거목의 둥치에서 뻗은 가지였습니다. 그에게는 진 제국의 관리나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어른들이나 다 남이었던 겁니다. 그는 우리 육국의 후예들이 어째서 진에게 정복당할 수밖에 없었는지, 진이 왜 육국 백성을 아울러 다스릴 수 없는지 꿰뚫어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육국 시절에 대한 미련을 가진다는 뜻은 아니지요. 어려서부터 가진 것 없었던 그에게는 미련을 가질 것도, 지켜야 할 이도, 그리워할 곳도 없었습니다. 그저 자기 홀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만 중요했을 뿐.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에게는‘저 혼자서’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의란 것이 어찌 홀로 세울 수 있는 것일까요.
대의라는 것은 의외로 소소하고 어리석은 감정들에 그 뿌리를 두곤 합니다. 모친의 품에 대한 그리움이나 고향 마을에 대한 향수. 이웃을 보듬고 내 가족을 배불리 먹이고 싶다는 마음. 예. 폐하라면 잘 이해하고 계시겠지요.
회음후에게는 그러한 것이 일절 없었습니다. 폐하. 아십니까? 대의가 ‘회복해야 하는 것’인 이유를. 회복해야 하는 것이기에 줄기차게 지향할 수 있고, 그렇기에 커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로지 새롭고자 하기만 한다면 어디에도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얽매이지 않는다면 꾸준히 밀어붙일 수도, 사람을 모을 수도 없을 겁니다.
한신에게는 매일 곳도 그를 붙잡을 자도 없었지요. 그가 전략을 이해하는 만큼 타인을 이해할 수 있었다면 달랐을 겁니다. 제가 발붙인 땅과 부대끼는 사람들을 제 전략의 도구로만 보지 않았다면 폐하께 그리 굴지는 않았을 겁니다. 항우가 과거에만 속한 용사라면 그는 미래에만 몸을 실은 떠돌이였습니다. 우리들 현재를 사는 사람들로서는 언제나 전후방 저 멀리 보일 뿐. 잡을 수는 없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이 노인은 떠도는 바람결에 혹해 신세를 망친 미련한 자일 뿐. 네 귀퉁이 헤지고 끈 떨어진 연일 뿐이지요. 이제 곧 바람이 지고 나면 어느 들로 굴러 떨어져 산산이 흩어질 겁니다.
그러니 폐하. 안심하십시오. 이제 거리 왈패 유방의 민낯을 아는 이는 몇 남지 않았습니다. 폐하가 저를 죽이신다면 한신의 죽음이 억울했노라 말할 이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폐하가 어째서 한신을 죽였는지 이해하는 사람도 남지 않겠지요.
 
긴 이야기였습니다만 결국은 여기가 제 생사의 갈림길인 듯합니다. 폐하께서 저를 죽이신다면 이는 괴철이 폐하의 민낯을 보았기 때문일 겁니다. 혹은 살리신다해도 역시 같은 이유이겠지요. 폐하. 괴철을 어찌하시렵니까? 덧없이 미치광이 하나의 목숨을 취하시렵니까, 폐하를 이해하고 있는 마지막 사람의 수명을 좀 더 늘려주시렵니까?
저는 어느 쪽이든 여한이 없습니다. 모두 털어놓고 나니 몸이 한뜻 가벼워 이대로 어느 바람결에든 실려갈 듯 합니다. 폐하께서 정녕 뜻밖의 선물을 주신 겁니다. 호송수레에 갇혀 나흘을 시달리는 동안 여러 가지 상황을 상상하며 각오를 다졌더랬습니다. 폐하의 속내가 무척 궁금하기도 하더군요. 체포한 즉시 목을 치면 될 것을, 무엇하러 이 늙은이를 잡아오라는 것일까. 한신의 남은 측근이라도 색출하는 건가. 아니면 이 괴철이 다른 제후에게도 반역의 불씨를 붙이지는 않았나 의심하는 건가. 사흘째 밤 쯤에는 모든 걸 포기해버렸지요. 아무렴 어떠랴. 고문 중에 죽어지기나 하면 다행이다. 그리 마음을 정리할 때쯤 수레가 관중에 닿더이다. 그런데 정작 궁전 뜰 안에는 형틀도 옥리도 없었지요. 그리고 폐하께서 친히 제게 말도 안 되는 약조를 내거셨고 말입니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에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폐하께서 한중왕 시절에도 유자들 말 농간을 싫어하심을 뻔히 아는데, 황제가 되었다고 해서 달라지셨을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요. 차라리 제 혀를 한 치씩 자른다고 하면 모를까. 이야기를 시작할 때에는 그마저도 각오 했더랬습니다. 언제 혀가 뽑혀도 비명은 지르지 말자고 속으로 다짐했었지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마치고보니 한신을 떠난 이후 처음 제가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그간 이 입 안의 혀가 몹시 징그러웠는데 오늘 보니 폐하 앞에서 마지막으로 놀리기 위해 남아있었나 봅니다. 폐하께 평생 공을 세운 사람 중 제가 제일 큰 상을 받은 것 같습니다. 무릎 꿇고 감사드립니다.
하필 이 낡은 연이 이러한 특등 성은을 누리고 있다니. 생각하면 이 또한 오묘하고 유쾌한 일입니다. 진정 사람의 내일은 알 수 없으니, 아. 천하의 향방은 어디로 향할까요. 저 괴철이 묻히는 곳은 어디이며, 한신의 저며진 시신을 거두어주는 것은 누구의 몫이 될까요.
저승의 한신에게는 그것이 보일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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