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가작 너 자신을 알라

2015.03.02 01:0803.02


생명 공학 기업 크레이들 사(社)의 채용 면접은 가상 사이트에서 이루어졌다. 예정된 시각이 되자 빈 의자에 한 청년의 형상이 나타났다.

“안녕하십니까, 안서언이라고 합니다.”

서언의 눈에는 아무런 장식 없는 하얀 방에 앉아있는 네 명의 면접관이 보였다. 실제 모습인 서언과 달리 면접관들은 맨 왼쪽부터 각각 희(喜), 노(怒), 애(哀), 락(樂)을 표현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안서언씨.”

가장 왼쪽에 있던 ‘喜(희)’ 가면의 입이 움직였다. 초승달 모양을 유지하면서도 부산스럽게 들썩이는 그 움직임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서언은 오히려 거부감이 들었다.

“최종 면접까지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면접은 이렇게 가상 사이트에서 저희 임원진과 몇 가지 질문을 주고받는 것으로 진행됩니다. 아, 이 가면은 아바타 같은 것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喜는 만연한 미소에 걸맞는 듣기 좋은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그보다 본사인 콜로니-크레이들에 직접 오는 것이 아니라 실망하진 않았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꽤 아쉬웠습니다만,”

서언은 여유로움이 과해 거만해 보이지 않도록 신경 썼다.

“더 좋은 기회로 가볼 수 있겠지요.”
“하하, 아직은 대답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군요.”

가면의 턱을 쓰다듬으면서 喜가 말했다.

“사실 재작년까지 최종 면접만큼은 본사에서 진행했었습니다만 지구에서 이곳, 라그랑주점 L4까지 반나절 가량이 걸리지요. 장시간의 우주 비행이 지원자들의 컨디션을 떨어트리더군요.”

동의를 구하듯 喜는 다른 세 사람을 보았다. 가장 오른편의 樂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을 보였다.

“아실거라 생각합니다만  저희가 콜로니에 반쯤 갇힌 채 수도승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이트를 통해 면접을 진행하게 되었으니 아쉽더라도 가상현실로 만족해 주시기를.”

喜가 말을 마치자 방 안이 어두워졌다. 천장이 오목하게 올라가고, 벽 사이의 모서리들이 사라지면서 반구가 되었다. 서언은 고개를 들었다. 투명한 반구 너머에 거대한 토러스와 그 안쪽의 구가 여덟 개의 철제 살로 연결된, 바퀴처럼 보이는 거대한 구조체가 떠 있었다. 서언은 그것이 거대한 거울에 비친 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는 콜로니의 커맨드 센터인가요?”
“예, 최상층인 전망대입니다. 돔 바깥의 우주가 아주 근사하게 구현됐죠? 아, 지금은 태양은 가려둔 상태입니다. 눈이 부시면 불편할 테니까요. 사실 반사되는 태양 빛이 강해서 저렇게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진 못합니다. 실제론 위쪽이 막혀있죠.”

喜가 손을 들어 머리 위를 가리는 시늉을 했다.

“크레이들 사의 기술이 지구보다 몇 년이나 앞서 있다더니, 사실이었군요.”
“덕분에 실제 전망대에 와서 실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서언은 가상의 우주에서 눈을 떼고 가면을 쓴 면접관들을 보았다. 그들의 등 뒤로 손바닥만 한 지구가 천천히 몸을 틀고 있었다.

“그 말씀을 들으니 너무 선명해서 되려 이질감이 느껴지네요.”
“가상이 아닌 실제의 우주를 본 적이 있습니까? 요즘 지구권에서는 궤도 엘리베이터의 전망대가 인기 명소라고 들었습니다.”

아주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서언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이미 아실지도 모르지만….”

네 개의 가면, 그 여덟 개의 검은 눈구멍이 서언을 향하고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에서 서언은 불길함을 느꼈다.

“사실 저는 콜로니 크레이들에서 태어난, 크레이들 사의 디자인 베이비입니다.”

또다시 침묵이 고이기 전에 그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부모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죠….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가장 기술이 앞서 있던 회사는 귀사였기에 어머니는 크레이들사로 발걸음 하셨습니다.”
“안서언씨가 올해로 26살이던가요.”

깊게 잠긴 목소리는 약간의 쇳소리를 머금고 있었다. 서언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음울하게 쳐진 눈꼬리의, 哀(애)의 가면을 쓴 면접관임을 단박에 알아챘다. 그는 깍지 낀 손을 들어 입을 가리고 있었다.

“26년 전이면 우리 회사가 최초로 무성 생식 사업을 시작하면서 모든 설비를 스페이스 콜로니로 옮긴 이후군요.”
“예. 어머니는 제가 백일을 넘기자마자 콜로니에 머물다 지구로 돌아오셨습니다. 석 달, 짧다면 짧은 기간이지만 우주에서 태어나 우주에서 살았던 것이지요.”
“보통…”

哀가 손을 내리자 눈꼬리만큼이나 깊게 쳐진 입꼬리가 드러났다.

“저희는 6개월에서 1년 정도 콜로니에서 생활하면서 아이의 건강 상태를 관리하는 것을 권장합니다만, 어머니께서는 상당히 이르게 돌아가셨군요.”

서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하루라도 빨리 지구로 돌아가야만 했다고…. 아버지의 무덤에 저를 데려가고 싶으셨겠지요.”
“합격하게 된다면 서언씨는 26여 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게 되는군요.”

樂(낙)의 쾌활한 목소리가 가라앉던 분위기를 환기 시켰다. 활짝 입을 벌리고 웃는 가면을 향해 서언도 가볍게 웃어 주었다.
   
“따지자면 그렇군요. 그 시절에 찍어둔 사진도 없어서 제가 콜로니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어머니께 들은 단편적인 얘기나 언론에 공개된 사진뿐이지만요.”
“그렇다면 장소를 바꿔볼까요.”

어둡던 천장은 파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 위로 스며 나온 그림 같이 하얀 구름이 하나 둘 흘러갔다. 이어 양 벽이 사라지고 어느새 길게 뻗은 골짜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골짜기를 따라 도로와 건물이 휘어올랐다.

“우리 콜로니의 내부입니다. 기왕이니 잠시 구경이라도 할까요?”

네 명의 면접관과 한 명의 면접자는 나란히 텅 빈 거주구의 거리를 걸었다.

“이곳은 외부인이 접속할 수 없는 특설 사이트라 우리밖에 없지만, 실제 콜로니는 정오를 지난 참이라 북적거리고 있을 겁니다. 지구는 오전이던가요?”

樂이 고개를 돌려 물었고 서언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한국은 저녁입니다.”
“그렇군요. 아, 여기가 예비 부모들이 머무는 거주구에요.”
“예비 부모들이요?”
“예. 저희는 콜로니 내의 의뢰인들을 예비 부모들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들을 ‘고객’이라고 부르는 것을 ‘아이’가 들으면 마뜩잖겠죠. 아닌가요?”

서언은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시점에서 생각하시는군요.”
“그럼요. 솔직히 말하면 마케팅적인 부분도 분명 있습니다만, 회사는 크레이들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책임을 느끼고 있어요. 자, 느긋하게 둘러보시죠. 아마 26년 전 그때와 크게 바뀐 곳은 없을 겁니다.”
 
단층의 집들이 계단식으로 구획된 도시는 흰색과 녹색이 보기 좋게 어우러져 있었다. 집집마다 마당이, 곳곳에 공원이 있어 당장 서언이 살고 있는 도시보다도 녹지가 많아 보였다.

“어때요, 그리운 기분이 드나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멋쩍게 웃으며 서언은 목덜미를 긁적였다.

“사원들이 머무는 곳은 따로 있나요?”

서언의 물음에 喜가 대답했다.

“예, 거주구는 나뉘어 있습니다. 크레이들에는 번화가가 따로 없고 두 곳의 상업지역이 의뢰인 거주구와 사원 거주구 사이에 있습니다.”

그것으로 잠시 대화가 끊겼다. 햇살이 따사로워 서언은 고개를 들었다. 태양은 보이지 않았고, 쾌청한 하늘이 있었다.

“뭔가 있습니까?”
“아뇨, 해가 없구나 해서요.”
“아, 그것은.”

喜가 곧게 뻗은 골짜기의 끝을 가리켰다.

“지금쯤이면 저쪽에서부터 오고 있을 겁니다. 물론 디스플레이가 그런 것이고 광량은 시간에 맞춰 조절됩니다.”
“이곳에선 태양이 움직이는 거 군요.”
“그런 셈입니다.”

서언은 발밑을 보았다. 새삼 발끝이 멀게 느껴졌다.

“콜로니의 중력은 지구와 비슷하다고 들었습니다만….”
“예, 지구와 같은 수준으로 0.9G에서 1.0G 사이를 오갑니다. 바깥으로 나가보죠.”

喜의 말에 모두 걸음을 멈췄다. 콜로니 내부는 어느새 콜로니 바깥으로 바뀌어 그들은 우주 속 외벽 위에 서 있었다. 등 뒤에는 지구가, 9시 방향에는 태양이 있었다. 머리 위 거대한 반사경이 태양을 향해 기울어져 있었다.

“서언씨가 입사하게 된다면 주로 이곳에서 작업하게 될 겁니다. 물론 그때는 지금처럼 맨몸이 아니라 우주복을 제대로 입어야 하겠죠.”

그렇게 말하며 喜가 발을 두드렸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는데 서언은 그게 진공 상태임을 고려한 것인지 혹은 기술의 문제인 것인지 궁금했으나 묻지는 않았다.

“이 거대한 토러스가 회전하여 생긴 원심력이 크레이들의 중력이 되는 겁니다.”
“태양광이 토러스를 회전시킬 정도가 되나요?”
“아뇨.”

喜는 커맨드 센터로부터 길게 뻗어 내려가는 축대의 끝을 가리켰다.

“동력은 저기 아래쪽에 있는 핵융합 발전기에서 나옵니다. 태양광은 콜로니 내의 전력으로 쓰이고요. 서언씨는 여기 외벽을 오가면서 토러스와 커맨드 센터의 외벽과 접합부를 점검하거나 축대를 정비하게 될 겁니다.”

물론 합격하게 되면요, 라고 덧붙이며 喜는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는 콜로니가 멈춰 버리는 것이 지구의 천재지변과 맞먹는 일입니다. 물론 만일의 사고를 대비해 모든 신발의 밑창에는 흡착물이 붙어 있긴 합니다만…. 어디까지나 예비 책에 불과하죠. 그 때문에 콜로니에서 안전상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축대의 발전기와 이 외벽입니다. 그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일부분이라도 외벽이 부서지게 되면 전체의 영향이 가기 때문인가요?”
“맞습니다.”

喜가 고개를 끄덕였다.

“격벽을 촘촘하게 만들어 두긴 했지만, 붕괴되기 시작하면 격벽 폐쇄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테러를 당하게 되거나 혹은 결함에 의해 파손되면 곧장 대형 사고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런 까닭에 이 외벽으로 나오는 건 아주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어요. 그런데….”

樂의 커다란 입 구멍에서 터져 나온 깊은 한숨이 서언에겐 매우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중에서 민간인인 주인공이 아무런 제재 없이 쉽게 콜로니 외부로 나가는 장면이 있더군요. 아, 혹시 보셨습니까?”

서언의 눈앞에 새까만 우주가 어른거렸다.

“몇 달 전에 개봉했던 영화인데 모르나요? 아버지를 살해하고 그 유산을 모두 빼앗은 삼촌에게 복수한 주인공이 수사망을 피해 지구를 떠나 콜로니로 도망친다는, 햄릿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입니다만….”

서언은 입꼬리를 끌어당겨 미소를 지어냈다.

“예, 봤습니다. 썩 잘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었지요. 당장 우주 속 콜로니를 구현한 것만 봐도 지금 이 가상 사이트보다 못한 것 같네요.”
“확실히 우리 회사의 기술이 많이 앞서 있긴 하죠. 하여간, 그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안 들었던 건 바로 그 콜로니가 우리와 같은 스탠포드 원환식이었다는 점이에요.”

樂은 조금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콜로니에도 여러 형태가 있는데 꼭 스탠포드 원환 식으로 만든단 말이죠. 창의력 부족이라고 봐요. 거기다 크레이들은 지구의 그 어느 국가 보다도 철저한 신원 확인을 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취재 부족이죠. ”

樂의 가면이 서언을 향해 기울었다.

“우리 회사에서 거주하고 있는 인구수를 알고 있나요?”
“대략 1만 5천여 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樂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회사의 사원들은 콜로니에서 거주해야만 합니다. 사원과 그들의 배우자, 자녀들이 대략 7천여 명 정도 되죠. 또 크레이들에 머물고 있는 예비 부모들, 또 예비 부모였었던 부모들과 크레이들에서 태어난 그들의 아이가 5천여 명. 그리고 이 인공 도시를 유지하기 위한 인력이 3천 명 정도 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한쪽 무릎을 꿇어 자세를 낮춘 뒤 토러스를 두드렸다.
   
“지구에서라면 유명 대학의 재학생 수 정도밖에 안 되죠. 하지만 여기는 지구의 그 어느 환경보다도 열악한, 극한의 장소입니다. 우주에서의 만 오천명이 주는 무게감은 지구의 그것과 차원이 달라요.”

樂의 말이 끝내자 喜가 거들었다.

“지구와 거의 동일한 중력을 제공하고, 온화하고 안정된 기후와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기술 아래 높은 수준의 치안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시스템과 기술을 통해 철저히 관리하고 있고요.”
“그런 첨단 도시를 범죄자의 온상지로 묘사하다니 개탄할 노릇이죠.”

팔짱을 끼며 樂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런 영화적 과장에 일일이 반응하면 오히려 구린 곳이 있어 보인다는 게 홍보실의 의견이라 대응하고 있지는 않아요. 구설수에 오르지 않으려면 언급 자체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니까요. 거기다 영화는 영화일 뿐, 실제로 따라 하는 사람은 없을 테고요.”
“그럼요, 없겠죠.”

서언의 목소리가 작아졌으나 樂을 비롯한 면접관들은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그래도 전 그 영화의 추격 장면이 꽤 인상 깊었는데요.”

뒷짐을 진 채 한 발짝 떨어져 있던 哀가 말했다. 喜와 樂은 몸을 틀었다.

“주인공이 감시 시스템에 잡히지 않으려고 팔에 부착된 ID 칩을 제거하던가요. 고작 그것만으로 시스템에 잡히지 않는다는 건 어설펐어도 장면 자체는 과격해서 좋더군요. 그런 뒤 콜로니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까?”

서언은 哀가 자신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다고 느꼈다.

“아, 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였죠.”

서언이 대답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주인공을 잡기 위해 콜로니까지 찾아온 형사도 뒤쫓아 왔지요. 두 남자가 각자 지구와 태양을 등진 채 외벽 위에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장면도 꽤 강렬했어요. 뭐, 실제로 그런 구도는 나오지 않지만요.”
“정작 그 뒤에 벌어진 난투극은 고증에 충실해서 우스꽝스러워졌죠.”

樂은 아주 천천히 주먹을 날리는 시늉을 보였다.

“두꺼운 우주복을 입은 두 남자가 느릿느릿 주먹을 주고받는 와중에 화면에 자꾸 걸리는 안전줄은 개 목줄 마냥 어찌나 거슬리던지….”
“압권은 형사가 주인공의 헛발질을 피하다 그대로 콜로니에서 떨어져 나간 마지막 장면이었죠.”

한숨이 묻어나오는 樂의 목소리와 달리 哀의 목소리에선 되려 기이한 활기가 느껴졌다. 그들을 앞에 두고 서언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떨구고 있었다.

“오히려 서언씨의 영상 쪽이 더 영화 같았다고 해야 하겠군요.”

喜의 목소리에 서언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예?”
“지구로 돌아갔던 이후로는 우주에 나와 본 적이 없습니까?”
“네… 없습니다.”
“그렇다면 더 굉장하군요. 지난 주에 본 실무 평가에서 상당히 높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커맨드 센터 위로 커다란 영상 화면이 나타났다. 화면 속에는 우주복을 입은 누군가가 벽을 딛고 서 있었다. 헬멧의 유리 너머로 서언이 얼굴이 보였다.
 
“지금 보이는 것이 테스트 당시의 영상입니다만, 어떤 테스트였습니까?”
“저곳은 지상에 있는 무중력 센터의 훈련소인데,”

서언은 손을 들어 영상 화면을 따라 사각형을 그렸다.

“보시다시피 육면체의 방입니다. 저 안에서 면에서 면으로, 서로 붙어 있는 면이 아닌 떨어져 있는 면으로 이동해서 각각의 면에 준비된 과제들을 해결하는 테스트였습니다.”

면접관들의 시선은 화면 속 서언에게 향했다. 화면 속 서언은 흔들림 없는 자세로 벽에서 반대쪽 벽으로 이동했다. 정확하게 손을 뻗어 안전바를 잡고 몸을 가누는 그 모습에서 머뭇거림은 느껴지지 않았다.

“능숙하네요.”

樂이 한마디 내뱉었을 때 영상 속에서는 서언이 허리춤에 있던 기구를 이용해 나사를 풀고 있었다. 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숙련도가 아주 높았다는 게 실무진의 평이었습니다. 경력자와 다를 바 없는 수준이었다고요.”
“예. EVA 훈련과정은 모두 마스터 했습니다.”

喜가 손을 내저었다.

“그건 지원자들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정도 준비도 하지 않은 지원자는 서류도 통과하지 못하죠. 우리는 서언씨가 다른 지원자들에게는 없는 걸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건…,”

서언은 적당히 가볍게 들리기를 바라며 목소리를 냈다.

“우주에서 태어났으니 타고난 게 있는 것 아닐까요.”
“흐음.”

그것만으로는 반응을 알 수 없었다. 喜의 입술은 여전히 반달처럼 휘어져 있었으므로.

“연구팀이 관심을 가질 만한 이야기군요. 크레이들 태생과 우주 적응도의 관계도라.”
“어, 이거 정말로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樂은 흥미로운 듯이 말했으나 곁에 있던 哀가 짧게 한숨을 내쉬는 것을 서언은 놓치지 않았다. 음울하게 처진 입이 움직였다.

“우주에 적응하는 데 걸리는 기간은, 어느 정도 평균치가 있긴 합니다만 제각각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들쑥날쑥합니다. 그럼에도 공통적으로, 급격히 능숙해지는 순간이 있어요.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하는, 아주 강렬한 계기가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능숙하게 그리고 보다 빨리 적응하게 되죠.”

다시 여덟 개의 심연이 서언을 향하고 있었다.

“서언씨에게도 그런 계기가 있었습니까? 남들과는 다른 경험이 있는 건 아닌가요?”
“아뇨….”

다급히 입술 밖으로 나온 것은 목이 따가울 만큼 잠긴 목소리였다. 서언은 목을 가다듬고 다시 대답했다.

“특별히 기억에 남은 경험은 없습니다. 다만 훈련을 받던 때에도 자질이 있다고 스스로 느끼기도 했고, 또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에 평가에서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답을 마친 서언을 물끄러미 보던 哀는 잠시 뒤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서언씨 같은 사람이 스스로 찾아와 주어서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서언은 가볍게 웃으며 시선을 내렸다.

“혹시 어머니를 원망한 적은 없었습니까?”
“예?”

지금까지 한 마디도 없던 怒(노)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의 목소리는 저음에다 치켜 올라간 눈꼬리만큼이나 날이 서 있었다. 사이트는 다시 변하여, 처음의 면접실로 돌아왔다.

“자신이 디자인 베이비라는 걸 알았을 때가 언제인가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서언은 긴 머리를 늘어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어머니의 모습이 몇 년 전의 일인지를 가늠해보았다.

“8살, 아니 6살 정도에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비교적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었군요. 보통은 청소년기를 전후로 알려 줄 텐데요.”
“시기가 일렀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충격을 받진 않았나요? 자신에게 인공적인 조작이 가해졌다는 것에 대해서요.”
“말씀하신 대로 너무 어렸던 탓인지, 그 당시에는 디자인 베이비로 태어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서언은 잠시 젊은 시절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너는 아버지의 유지를 잇기 위해 태어난 거야.’ 

“나는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어머니는 제가 태어나기를 바라셨던 거라고요.”
“어머니와 유대가 깊었던 모양이죠?”
“물론입니다. 어머니는 저의 유일한 가족이고, 그건 어머니께도 마찬가지니까요.”
“그런 어머니를 지구에 두고 본인은 우주로 떠나려는 건가요?”

날카로운 怒의 목소리가 어머니의 모습을 흩어버리며 깊게 파고들었다. 서언은 입을 벌린 채 굳었다.

“모르셨습니까? 사원과 함께 크레이들에서 거주가 가능한 것은 배우자와 자녀뿐, 그 외에는 직계 가족이라도 거주는 물론 방문조차 제한됩니다.”
“아뇨…. 알고 있습니다.”

怒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그런데도 우리 회사에 지원한 건가요? 제가 느끼기에 이서언씨는 특별히 우리 회사가 진행하는 계획들에 큰 뜻이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제가 생명공학에 무지하고, 학문과는 거리가 멀긴 합니다만 아무런 생각 없이 크레이들에 지원한 것은….”
“아뇨, 제 말뜻은,”

怒는 손을 들어 서언의 말을 끊었다.

“이서언씨는 우리 회사에 입사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스페이스 콜로니에 거주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그렇게 당황할 필요 없어요.”

다독이듯 怒가 손을 까닥였다.

“문제 삼는 게 아닙니다. 드문 일도 아니고요. 크레이들의 모든 사원이 생명공학에 정통할 필요는 없을뿐더러, 실제로도 그렇죠. 전공자가 아닌 사람에게, 또 그 일과는 무관한 업무를 하게 될 사람에게 그런 비전을 요구하는 건 과도한 건지도 모르죠.”

서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怒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서언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怒의 말은 계속되었다.

“아무리 첨단 기술을 이용해 지구와 다를 바 없는 환경을 만들어도 우주는 우주. ‘지금 지구가 아닌 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회사는 사원들에게 많은 것을 제공하고 또 보장하지만 그만큼 사원들은 많은 것을 버리고 와야 합니다. 서언씨의 경우는 어머니가 될 테고요.”
“버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주 잠깐 침묵이 고이는 것과 동시에 서언과 怒의 시선이 마주쳤다. 검고 깊은 그 어둠 속에서 서언은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절실하게 지구를 떠나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다는 건가요? ”
“독립…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생활적인 부분에서든, 정신적으로든 자립해야 하고, 그건 우주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요?”

아니, 여기선 마찬가지라고 대답해야 했어.

서언은 마른 입술을 적셨다. 한동안 말이 없던 怒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대답, 감사합니다.”
“저도 이어서 질문 하나 하죠.”

樂이 몸을 앞으로 당겼다.

“크레이들 사의 기술을 통해 태어난 당사자로서 우리 회사의 일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디자인 베이비로서…말인가요?”
“혹은, 지금과 같이 인간의 유전자를 조작하고 복제하는 시대를 사는 세대로서요.”

서언은 잠시 숨을 고르며 준비한 대답을 빠르게 되뇌었다.

“귀사의 광고는 언제나 기혼자이며 자녀가 있는 배우들만이 모델로 나오고 있지요.”
“예, 이번 모델 역시 아이 사랑으로 유명한 남배우와 그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소년은 우리 크레이들 사에서 무성 생식으로 태어난 아이구요.”

서언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런가요?”
“이건 오프 더 레코드지만, 우리 회사의 광고 모델은 모두 의뢰인들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을까 생각은 했습니다만….”
“뭐, 공공연한 이야기지요. 그의 경우 지난 달에 그 사실을 방송을 통해 공개해서 화제가 되지 않았던가요?”
“아…. 지난 달에는 잠시 멀리 여행을 갔던 탓에….”
“전 지구가 들썩인 사건을 몰랐다니, 어디 오지에라도 갔었나 보군요. 아무튼, 그래서요?”

樂이 계속 하라는 시늉을 했다.

“아, 예.”

서언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답변을 이어갔다.

“모델은 계속 바뀌어도 마지막 멘트는 늘 하나더군요.
‘당신 안에 있는 수많은 가능성. 당신에게 주어졌고, 이제 당신이 당신의 아이에게 전해줄 가능성을 만나세요.’”

서언은 말을 끊은 뒤 천천히, 면접관 한명 한명 보았다.

“저는 귀사에게 있어서 유전자란 가능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도 그 생각에 동의하구요. 여러 가지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그 선택권을 내가 가지고 있을 때,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을 택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서언씨는 종교가 있습니까?”

喜가 물었다.

“아니요, 없습니다.”
“많은 종교인이 본사가 아직 지구에 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우리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유전자를 조작하고, 인간을 복제하며 신의 영역에 도전한다고요. 그런 관점에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서언은 잠깐 생각에 잠긴 뒤 대답했다.

“크레이들 사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건 아니지요. 어디까지나 가지고 있는 것 내에서 선택하고 조합하는, 말하자면 발전의 한 형태라고 봅니다. 더 나은 미래를 스스로 선택하는 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권리입니다.”
“그것을 가능성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인간의 자만은 아닐까요?”
“자신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게 죄악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네 사람 중 그 누구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침묵을 깬 것은 哀의 목소리였다.

“우리 회사의 사훈을 알고 있나요?”
“사훈 말씀이십니까? 분명 ‘너 자신을 알라’….”

서언의 입이 더는 움직이지 않자 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리스의 유명한 격언이죠.”

哀는 책상을 노크하듯 두드렸다.

“여기 커맨드 센터 최하층에 도킹 스테이션이 있죠. 도킹하고 내려섰을 때 어느 위치에서든 이 문구가 세겨진 청동판이 바로 보이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가 두드리는 것을 멈췄다.

“어째서 그 격언을 사훈으로 삼았을 것 같습니까?”
“그건….”

서언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귀사가 지금과 같이, 이 분야에 있어서 가장 높은 위치에 올라오게 된 것은 인간 자신의 비밀을 가장 많이 밝혀냈기 때문이지요. 인간은 인간 자신에 대한 모든 비밀을 풀었고, 그 결과 자신의 운명까지도 자신의 손에 넣게 되었다…일까요?”
“인간이 인간에 대한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나요?”

哀의 물음에 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야 할 것들은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시대에선 자신과 자신의 자식에게 발현될 수 있는 재능이나 질병을 알고, 재능을 극대화하거나 질병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제어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필연입니다. 비밀을 모두 다 풀었다고 할 만큼, 아직 모르는 것들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알고 있기에 지금의 귀사가 있는 거겠지요.”
“예, 확실히 그렇군요. 회사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喜의 입이 움직였다.

“무성 생식, 즉 인간 복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서언은 喜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진 것을 느꼈다.

“인간을 복제하는 것 또한 하나의 선택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것에 관해서도 인간이 신이라도 된 양 오만에 빠진 것이 아니라고, 서언씨는 단언할 수 있습니까?”
“원본과 복제의 관계에 관해서 물으시는 거라면 별개의 타자라고 생각합니다만….”
“한 일화를 들어보겠습니다.”

다른 세 명의 면접관의 가면이 喜를 향했다.
   
“어느 날 한 여자가 크레이들을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어디서 어떻게 구한 것인지 냉동 보존한 체세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던 것은 그 세포의 주인은 여자가 아니었고 또한 그녀와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타인의 것이라는 사실 뿐. 신원 확인을 거치며 짐작 가는 바는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서언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확인해 볼 수는 없었나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저희는 당사자의 동의 없이 유전 정보를 열람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확실하지 않은 짐작만으로 수사를 요청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었고요.”

喜는 검지를 세웠다.

“여자가 요구한 것은 하나뿐이었습니다. 비용이 얼마가 들어가든 상관없다. 이 체세포를 이용해서 클론을, 복제인간을 낳게 해달라.”
“낳게 해달라구요?”
“예. 이상하지요. 회사로서는 그리 좋아하는 표현은 아닙니다만, 보통 ‘만든다’고 하지 ‘낳는다’고 하지는 않으니까요. 더욱이 복제, 그러니까 무성 생식을 하는 경우 인공 자궁을 쓰는 것이 일반적임에도 이 여성은 한사코 자신이 낳길 원했습니다.”

喜는 거기까지 말하고 가만히 서언을 보았다.

“여자의 방문은 우리에게 큰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아이는 태어나도 괜찮은가? 이 출생이 아이에게 불행을 불러오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나? 의뢰를 수락할 결정권을 가진 임원진 사이에선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누군가는 누가 봐도 불행해 질 게 뻔한 운명을 가진 아이는 태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怒가 말했다.

“누군가는 무성 생식을 전면적으로 중단해야 한다고 했죠.”

哀가 말했다.

“누군가는 아이가 불행해지고 행복해지는 것은 회사가 판단할 소관이 아니라고 주장했어요.”

樂이 말했다.
잠시 침묵이 감돈 뒤 다시 喜가 물었다.

“이서언씨가 크레이들 사의 오너라면 어떤 결정을 내리시겠습니까?”
“저라면….”

서언은 생각하기에 앞서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열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여자가 원하는 대로 낳게 하겠습니다.”
“어째서인가요?”
“그러한 출생이 불행이 될지 아닐지는 알 수 없습니다. 태어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식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이의 의지가 아니어도?”
“자신의 의지로 태어난 아이가 있던가요? 자연 생식이든, 유전자 조작을 받았든, 무성 생식으로 태어나든 아이는 부모의 의지로 태어납니다.”

서언은 잠시 생각한 뒤 덧붙였다.

“물론 불행한 사고를 통해 태어나기도 하지만요. 어느 쪽이든, 모든 탄생은 아이 자신의 의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아이의 의지에 달린 것이고,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면 속 구멍을 통해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음에도 서언은 그 너머로부터 오는 강렬한 시선들을 느꼈다.

“답변 감사합니다.”

무감정한 목소리로 喜가 말했다.

“덧붙이자면 그 이후 회사는 본인이 직접 제공한 경우에만 무성 생식을 하는 것을 명확히 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喜와 哀와 樂의 시선이 怒에게로 모였다.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눈빛의 교환도 없었으나 서언은 무언가가 그들 사이를 오고 갔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큐 싸인 같은 무언가가.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물어보겠습니다. 아까 영화 얘기를 했었죠….”

怒는 잠시 뜸을 들이는 듯 혹은 생각하는 듯 턱을 문질렀다. 이어지는 말을 기다리며 서언은 침을 꼴깍 삼켰다.

“영화의 각본을 다시 짜볼까요? 어디 보자…. 먼저 영화의 시작은 아버지가 삼촌의 손에 살해당하는 장면에서 시작했죠. 여기서 말입니다. 아버지와 삼촌이, 그러니까 이 형제가 쌍둥이이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怒는 서언을 봤고, 서언은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예… 쌍둥이요.”
“그중에서도 일란성 쌍둥이라고 해봅시다. 아시다시피 일란성 쌍둥이는 자연적 복제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양쪽이 원본이자 복제이므로 선후를 가릴 수 없지만, 하여간 동생이 형을 죽이고 맙니다. 이 살인의 이유가 원한인지, 과욕인지는 서언씨의 몫으로 남기겠습니다.”

대답없는 서언의 시선이 서서히 내려갔다. 이번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는 듯 怒의 말은 계속되었다.

“이 쌍둥이 동생은, 형이 가진 지위와 유산 모든 것을 손에 넣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어떨까요. 형에게는 아내가 있었지만, 피를 물려받은 자식은 없었다고 바꿔봅시다. 사실 그렇기때문에 형의 것을 물려받았는지도 모르겠군요. 또 영화와 같이 동생이 형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고전의 반복에 불과하니 여기서는 그러지 않기로 하죠.”
“그렇다면 아내는….”
“아내는…. 그래요, 아내는 어땠을까요? 사랑하는 남편이, 그와 똑같은 얼굴을 한 시동생에게 살해당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필시 본인조차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원한에 사로잡혔겠지요. 원통하고 또 원통하지 않았을까요.”

서언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가 복수를 기도한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남편이 빼앗긴 모든 것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겠죠. 아내가 계획한 복수는 어떤 것이면 좋겠습니까? 자신의 손으로 남편의 원수를 갚는 것?”

미동 없는 서언을 대신해 怒가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았을 겁니다. 남편이 당한 만큼 그대로 갚아 주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怒의 가면은 떨고 있는 서언의 손을 향하고 있었으나 개의치 않는지, 혹은 보지 못했는지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남편의 한을 풀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남편 스스로 복수하는 것이겠으나, 그것은 불가능하지요. 유령이니 하는 비과학적인 이야기는 이 자리에선 제쳐놓읍시다.”

막을 바꾸는 듯이,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햄릿 왕에게는 원수를 갚아 줄, 그의 피를 이은 햄릿 왕자가 있었지만 남편과 여자 사이엔 아이마저 없었어요. 그렇다면 이때 여자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이번에는 침묵이 오래 이어졌다. 서언은 고개를 들었다. 여덟 개의 눈이 모두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벌리며 서언이 말했다.

“설마 복제를…. 남편의?”

怒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었다.

“여자가 준비한 것은 남편의 체세포가 아니었습니다. 죽은 남편의 시신에서 체세포를 얻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복수를 계획하기 전에 화장했을 수도, 혹은 시신이 애당초 온전하게 남지 못했을 수도 있지요. 아니, 처음부터 그것이 목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죄송합니다, 무슨 뜻인지 도저히….”
“여자가 복제하려던 것은 남편의 원수이자 동생인 남자의 체세포였습니다.”

서언의 입이 벌어졌다. 주먹 쥔 손이 심하게 흔들렸다.

“여자가 열 달간 품어 낳은 아이는, 여자와 그녀의 죽은 남편 사이의 아들로서 자라났습니다. 아이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알고 있을까요?”
“아니…, 아뇨….”

목이 막히는 것인지 숨이 막히는 것인지 혹은 둘 다 인지, 서언은 알 수 없었다.

“저는 아무것도….”

怒는 서언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래요, 그렇다고 해둡시다. 아무것도 모른 채, 아이는 성장하면서 어머니로부터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네…. 끊임없이.”

서언은 떨리는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죽어가던 순간의 표정이 어땠는지…. 그리고 누가 아버지를 비명도 지를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죽음으로 몰아넣었는지를 매일 밤마다, 끊임없이….”
“아이는 복수를 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건…!”

서언이 고개를 들었다. 목을 비집고 나온 것은 비참하게 갈라진 소리였다.

“절 보고는 귀신이라도 본 듯이 뒷걸음치다가 떨어져 나간 거였어요! 손 쓸 새도 없이 중력에 끌어 당겨져 지구로…!”
“그것이 사고든, 고의든.”

서언의 말을 끊으며 怒가 말했다.
 
“죽은 남자의 쌍둥이 동생 역시 죽음을 맞았고 26년에 걸친 여자의 복수는 완성되었습니다. 남편이 자신의 얼굴을 한 동생에게 살해된 것처럼, 그 동생은 자신의 젊은 시절과 똑같은 얼굴을 가진 청년에게 살해되었습니다.”

서언의 표정이 일그러져감에도 怒는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부터가 질문입니다. 이 아이는 햄릿이 그러했듯 삼촌을 죽인 것일까요? 아니면 오이디푸스가 그러했듯 아버지를 죽인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클로디어스가 그러했듯 자신의 형을 죽인 것일까요. 이서언씨는 대답할 수 있습니까?”
“난…나는…. 어머니로부터 아무것도 듣지 못했어요…. 모르는 일이라구요.”

몸을 웅크리며 서언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하여 우리는 그 오래된 격언을 끊임없이 상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언은 흠칫 놀라 喜를 보았다.

“당신들 무슨 속셈이죠? 이 면접도 처음부터, 모두 다 알고서…!”
“알아서는 안 되는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답을 얻을 수 없는 수수께끼는,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든 답을 내려야 하죠.”

차분히, 哀가 말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났을 수도, 앞으로 일어날 수도 있는 수수께끼입니다. 어떤 가능성을 택할지는 당신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은 정해져 있습니다.”

면접관들은 차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樂이 말했다.

“내일, 한국 시각으로 정오에 공식 통보가 갈 겁니다. 그 사이 당신이 답을 내던, 내지 않던 그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가상의 방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네 개의 가면만이 마지막까지 남아 서언을 바라보았다.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구설수에 오르지 않으려면 아예 언급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처음부터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이 말입니다.”

하나로 네 개의 가면이 하나로 합쳐지며 추하게 일그러졌다.

“합격을 축하합니다, 이서언씨. 당신이 요람으로 돌아올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네 사람의 목소리가 허공 속에 흩어지고 그 자리에는 어둠만이 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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