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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환타지 소설

2003.11.28 22:0611.28

6호 독자 우수 단편은 루나님의 환타지 소설입니다.

환타지 소설은 제목과 내용이 조화를 이루어서 서로를 보완하는 역할을 하는데 일견 평범할 수 있는 단편에 환타지 소설에 흔히 나오는 인터뷰 기사 형식을 액자로 넣고 거기에 제목을 닮으로써 이야기인 동시에 '작가가 하고 싶은 말', '다시 생각해보자고 던지고 싶은 말'을 전하는 매개체로써의 역할을 하는 단편입니다.
이 방식은 '이야기'나 문학이란 작가의 존재를 거칠게 드러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인위적이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노골적으로 이런 액자 구조를 취함으로써 오히려 거부감은 덜하고 해석의 여지도 더 주었습니다.
이런 작업은 단편이 아니면 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라는 점에도 의의가 있습니다.
단 앞에 액자로 쓴 인터뷰에서 나온 '싱글즈'등의 언어 문제 등을 담은 단편으로 치기에는 내용이 지나치게 독립적으로 완결되어 있으면서 연관이 덜한 게 흠인 듯 합니다.
액자와 그림이 너무 헐겁게 연결되어 있달까요.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대개 독자라면 다 캐치해낼 수 있을 법 한데 평범한 단편을 판타지 소설으로 해석을 해서 효과를 노린 것이라고는 해도 연관이 너무 약합니다.
똑같이 평범한 일상을 다룬 단편이었다 해도 앞에 인터뷰 기사에서 다룬 문제를 잘 녹여 낼 수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 싶은 아쉬움이 남네요.

아래는 환타지 소설의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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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



  "이것이 이번 여행 중에 구상하신 소설이신가요?"

  "그렇습니다."

  "제목이 싱글즈(singles)라고 되어 있는데 이게 무슨 뜻입니까?"

  "제가 소설을 위해 만들어낸 '영어' 란 언어로 된 단어입니다. 이 '영어'에 대해선 앞으로 제가 쓸 소설에서도 많이 나올 것이고, 영어사전도 만들어서 여러분께 보여드릴 예정입니다."

  "오, 이계의 언어까지 만드시다니, 정말 철두철미하시군요!"

  "별말씀을. 그건 기본중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구상하는데 있어서, 그 세계의 언어 하나 쯤은 만들어 둬야 하지 않을까요? 그 부분을 너무 간과하는 분들은 '설정'에 있어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렇군요. 아무튼, 그 부분은 넘어가도록 하구요. 이 글은 참으로 환타지 소설의 역사상 특이하기 그지없는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대한 설정집을 보며 읽지 않고는 하나의 단어도 그냥 넘길 수 없으니 말이죠. 예를 들어 '시네코아' 라는 단어가 나오고 '영화'란 말이 나오는데, 여기에 대한 아무런 주석도 달려 있지 않고 그냥 넘어가 버립니다. 이건 좀, 독자에 대한 배려의 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는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화자가 이계의 인물로 되어 있습니다. 전지적 시점에서 쓰여진 소설이 아니란 얘기죠. 그렇다면 당연히 이계의 인물인 화자가 자신의 세계에서 일상적으로 쓸 말에 대해 부연설명을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주석을 다는 것 또한 구차한 일입니다. 거기에 대해 알고 싶다면 설정집을 보아야지요. 저는 다시 말하지만 '진정한' 환타지소설을 쓰고 싶은 겁니다. 대중들의 입맛에만 발맞추는 삼류소설을 쓸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삼류소설이라.. 그건 너무 심한 표현이 아니신지요? 그렇게 말하시지만, 소설 자체는 우리 언어로 쓰여졌지 않습니까? 화자가 이계의 인물인데도요. 그런 논리로 따지면 이계의 인물이 대체 어떻게 우리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저도 사실 그 부분에서 갈등을 많이 했습니다. 진정한 환타지 소설을 쓰려고 하는 나로서 당연히 저 글은 내가 만든 언어인 영어로 기록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고 말이죠. 최소한 화자들이 말하는 부분이라도요. 그리고 정말 내 글을 읽고 싶다면 독자들은 영어사전을 보고 읽으라고 해야 할테고 말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저는 근본적인 모순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직면했습니다. 그게 무언고 하니, 어차피 이 소설은 나의 상상에서 나온 것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계'를 우리와는 분리된 무엇으로 보이도록 만들려고 애를 쓴다한들, 결국에는 우리와 완전히 분리된 무엇이 될 수는 없다는 얘기지요. 그래서 그 부분에서는 타협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이 부분을 추궁하신다면, 저로서도 그다지 할 말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네, 그렇군요. 하긴 그것은 모든 환타지 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가질 수 밖에 없는 딜레마 아니겠습니까? 아 물론, 선생님과 같은 종류의 환타지 소설을 쓰는 분들에 있어서요. 자, 아무튼, 이렇게 저희 잡지사의 요청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설은 잘 싣겠습니다!"

  이들의 만남이 있은 후, 그 다음 날 환타지 소설 전문잡지 <세계를 가다> 6월호에는 다음과 같은 단편과 함께 그들의 질의응답이 실렸고 그를 둘러싼 찬반 논쟁은 환타지 소설계를 오랜만에 뜨겁게 달구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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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싱글즈(Singles)

  때는 저녁이었다. 종로 시네코아에서 지인들을 만나 영화 싱글즈를 보고 나오는 나의 발걸음은 가볍지만은 않았다. 싱글즈라는 영화가 심각했던 건 아니다. 영화는 재밌었고 한편 유쾌하기도 했다. 두 30대 여성인 친구를 중심으로, 아니 그 둘 중에서도 특히 '나난'(뒤집어보니까 '난 나'이다)이란 이름의 여성을 중심으로 짜여진 스토리도 좋았고 천편일률적이지 않은 점도 좋았다. 오랜만에 괜찮은 영화를 보았다는 느낌이었다. 다만 그리 멀지도 않은 옛날, 내가 만났던 사람이 그 영화의 주인공 나난과 오버랩되면서 나는 그녀의 기억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그녀와 만날 때, 나는 상당히 예쁘다고도 할 수 있는 그녀와 비슷한 외모의 연예인이 누가 있을까 생각해보곤 했지만 마땅히 딱 맞는 사람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몇년이 지난 지금 나는 나난을 보면서 그녀를 떠올렸다. 이제야 딱 그녀와 닮은 사람이 누구라고 말할 수 있겠다고, 그녀가 누구와 닮았는지 말해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내 곁에 없다.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녀가 지금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있을지, 혼자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다시 그녀에게 돌아갈 수는 없다. 나와 그녀를 잇는 인연의 끈은 이제 끊겼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때가 생각난다. 아직 인터넷이 그다지 대중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PC통신이 여전히 우위를 점하고 있던 시절, 나는 평소 잘 가지 않던 채팅방으로 들어가 방제도 보지 않은 채 아무 번호나 쳐서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냥 아무 곳이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을 원했던 나는 세번인가 네번째 시도만에 어느 방에 머무를 수 있었다.
  그곳엔 나를 빼고 두 명의 사람이 있었고 조금 뒤에 한 사람이 더 들어와 4명이 되었다. 원래 있던 여자 둘에 나중에 들어온 남자 둘. '비목'이란 닉네임으로 채팅을 하던 그녀와의 첫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우리 넷은 얘기를 하다가 말이 잘 통하는 걸 느꼈고 곧장 번개를 하기로 했고 그 주의 토요일이었던가, 우리는 신림역 몇 번 출구에선가 만날 수 있었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이 뭐였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그저 그녀의 모습은 눈에 확 들어왔고 예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그런 외모였다. 그런 그녀의 외모에 시선이 끌리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난 그녀에게 별 감정이 없었다. 그런데 서로 사는 곳을 말했을 때, 나는 그녀가 나와 참 가까운 곳에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 번개로 만난 사람들 중에 내 근처에 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기에 신기하면서도 무척 반가웠다. 거기에 더해서 그녀와 나는 나이도 같았다. 나는 휴학중인 대학생이었고 그녀는 직장을 다니는 직장인이라는 차이점은 있었지만 위와 같은 공통점으로 우리는 좀 더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우리들 패거리는 그 뒤에도 채팅으로, 번개로, 자주 만났고 거기에 몇 사람이 더 추가되기도 하고 빠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는 그녀와 가까운 탓에 모임이 끝나고 그녀가 얹혀 살고 있는 아파트까지 바래다 주고 헤어지곤 했다. 만남은 오래 이어졌다. 그녀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새 직장을 구할 때까지 쉬고 있는 동안에는 같이 pc방에서 24시간 넘게 밤을 새며 채팅을 하기도 하고 그녀가 핸드폰으로 문자를 날리면 난 새벽 3시에도 자전거를 타고 그녀가 있는 아파트로 달려가 벤치에 함께 앉아 그녀가 꺼내온 캔맥주를 같이 마시기도 했다. 그녀가 어떤 느낌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르지만, 나는 그녀와 보내는 그런 시간들이 너무나 즐겁고 행복했다. 난 딱히 친한 친구가 없었고 친구와 단둘이 많은 시간을 보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성친구는 물론 말할 필요도 없었다. 몇개월이 그렇게 흘렀고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눴다. 주로 나는 듣고 그녀는 말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점점 그녀에 대해 깊이 알아갔다.


  그녀는 참 많은 남자들과 사귀었지만 항상 사귐이 오래가지는 못하는 그런 타입의 사람이었다. 그녀와 만나면서 그녀에 대해 좋아하는 마음이 많이 생긴 나였지만 그런 그녀의 특성(?)을 알게 되면서 나는 내가 그녀와 단지 친구라는 것이 참 다행스럽게 생각되었다. 그녀는 내가 그녀를 만나는 동안에도 새로운 남자를 사귀었다가 헤어지는 모습을 실황중계로 보여주었다. 한번도 아니고 두번이나. 그리고 그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그녀와 함께 있었고 그 모든 과정을 직접 지켜보았기에 좋아하는 마음이 생긴 뒤에도 절대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긴, 내가 그런 데에는 '정말 좋아한다면 좋아한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고 안 하는 게 좋다'는 개인적인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튼 나는 그덕분에 남자로서는 그녀와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밖에도, 그녀는 참 부자가 되고 싶어했고 그렇게 되어 자기 주위의 사람들을 모두 행복하게 해줄 수 있기를 소망했다. 그리고 항상 그런 소망에 비해 자신의 현재 모습은 미래조차 불투명한 상고 졸업생이라는 것에 안타까워 하며 소위 명문대라는 곳을 들어가 놓고도 휴학만 하고 있는 나를 보며 항상 '내가 너 같으면 정말 이렇겐 안 살거다' 라며 핀잔을 주곤 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정말 너랑 나랑 바뀌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고 말하곤 했다. 대학에 가보고 싶어 하면서도 공부하는 건 참 힘들어 하며 결국 포기하고 하루 하루를 그저 흘러보내듯 보내던 그녀는 스스로를 항상 '바보'라고 부르곤 했다. 대학까진 다 들어가 놓고 공부가 하기 싫어 휴학만 하고 있던 나와 함께 우리는 두 명의 작은 '바보'였고 우리의 만남은 바보들의 행진이었다.


  그런 그녀와 첫번째로 만남이 끊어지게 된 계기는 처음 번개 멤버였던 여자 둘, 남자 둘 중 남자 둘에서 나를 뺀 다른 한 사람, '좋은앙마'라는 닉네임을 쓰던 그 사람이 그녀를 좋아하게 되면서 부터였다. 그는 우리보다 나이가 네 살 많았고 그녀를 만나기 시작한 뒤 어느 시점부터 그녀의 집앞까지 찾아가 그녀를 찾는 일이 잦아지게 되었다. 그녀는 그를 오빠로서는 좋아했지만 사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고 결국 그가 계속 집 앞으로 찾아오자 연락을 끊게 되었다. 그리고 운명(?)의 그날, 그녀가 처음 살던 집에서 나와, 친구 한 명과 함께 돈을 모아 얻은 월세집에서 집들이가 있던 그날, 그는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다. 술에 취해 그녀에게 왜 나를 피하냐고 소리지르고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주위의 다른 집에서도 소리를 치며 난리가 난 것이었다. 그녀는 이젠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고 나는 그 곳에서 일종의 갈림길에 섰었다. 그와 그녀 사이에서 한 명을 편들어 주는 일. 나는 그 갈림길에서 그의 편을 들어주며 '다 이해하니까 그만하자'고 말했다. 그리고 그 때 그녀가 한 말.

  '이해한다니 뭘 이해한다는 거지?'

  그 때 그녀의 분노로 가득한 섬뜩한 눈빛에 나는 아직 내가 그녀를 다 알고 있는 게 아니었음을 확인하며 그저 돌아서야만 했다.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우리는 1년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다. 마치 서로 약속이나 한듯이. 나는 우리의 만남이 그것으로 그렇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뒤 내가 그녀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서 통화를 했을 때 그녀는 내게 '왜 전화 안했냐'며 화를 냈다. 나는 '왠지 내가 전화하는 걸 니가 싫어할 것 같아서' 라고 말했고 그녀는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는 그녀의 그런 반응에 '그럼 넌 왜 안했는데?' 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냥 그만 두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1년만에 다시 만났고, 1년만에 만났는데도 마치 어제 헤어진 사람을 만난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그 뒤로도 우리는 참 자주 연락을 끊었다가 다시 만나곤 했다.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면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서로 말하곤 했다. 그녀는 그동안 또 누구를 사귀었다가 헤어진 얘기며, 자기의 여자친구들 얘기-그녀가 나를 그녀의 여자친구들에게도 많이 소개시켜주었었다-와 일 얘기들을 푸념하듯 말하곤 했다. 나는 여전히 주로 듣는 쪽이었고 그녀는 말하는 쪽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관계는 어찌보면 참 희안하게도 계속 이어졌다. 그녀는 항상 내가 당연히 그녀에 대한 모든 일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여겼고, 나도 왠지 내가 그녀에 관한 모든 일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많은 일들이 지나갔다. 화이트데이날 생애 최초로 누군가에게 한 상자에 20만원 하는 꽃상자를 보낸 대상도 그녀였고, 그녀가 같이 일출 보자며 표를 예매하게 해서 단 둘이 일출 보러 동해안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여전히 그녀에게 '좋아한다'는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 말이 모든 만남의 끝을 의미하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리고 사실 난 그녀가 날 좋아해주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녀가 행복하게 살게 되는데 조금이라도 도와줄 수 있기를, 키다리 아저씨 같은 존재로서 내가 될 수 있기를 바랬던 것이다. 우리 두 바보는 종종 이런 얘기를 하며 놀곤 했다.

  '내가 복권 1등 당첨되면 내가 얼마 가지고 나머진 다 너 줄게'

  '내가 만일 100억이 생기면 50억을 널 줄게'

  모두 꿈같은 얘기였고 이런 얘기 끝에는 항상 그녀의 이런 말이 나오곤 했다. '너나 나나 인생이 참 불쌍하다'고. 약간 낙오된. 그래서 약간 서글픈. 혹은 약간은 황폐한. 그러나 꿈을 꿀 수는 있는 그런 두 사람이었다. 나는 참 그녀에게 동지애 비슷한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가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랬기에 항상 그녀에게 '넌 분명히 좋은 사람 만날 거야.' 하고 말해주곤 했다. 만일 내가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었다면 모르지만 나는 그녀의 신세타령 상대가 되어 줄 순 있을 망정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나는 일단 돈이 없으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믿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지 어언 5년이 흐른 어느날. 다시 오랜만에 그녀를 만나기 시작했던 나는 그녀에게 입학 선물로 노트북 컴퓨터를 사주겠다고 공언하였다. 그녀는 마침내 어느 전문대학 야간부의 컴퓨터학과에 입학하였고 등록금은 그녀 스스로 마련을 하였는데 막상 컴퓨터를 살 돈이 마련되지가 않았던 것이다. 처음엔 그녀 집에서 주겠다고 하셨지만 나중에 돈이 없다고 발뺌을 하셨다. 그녀의 어머니는 친어머니가 아니었고 그녀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고민하고 있던 그녀에게 내가 사주겠다고 하자, 그녀는 감격해 했고 나도 그녀를 도울 수 있게 되어 무척 기뻤다. 그러나 막상 그 말을 해놓고 되돌아 보니 내가 몇백만원을 마련할 방법이라곤 자퇴하고 등록금을 되찾는 방법 뿐이었다. 나는 거기서 또 다시 어떤 선택의 갈림길에 서야만 했고, 나는 학교 교학부에 자퇴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돈을 그녀에게 건네주지는 못했다. 은행에 돈이 입금된다고 한 날이 되기 전, 집에서 그 사실을 알고 부랴부랴 자퇴를 취소시키셨고 나는 그녀를 만날 면목이 없어 그녀에게 돈을 건네주고 만나기로 한 그날, 졸리다는 핑계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전화통화가 되었을 때, 나는 그녀에게 그간의 사정은 말하지 않은 채로, '생각해 봤는데 돈은 도저히 못 줄 것 깉다'는 말만을 남겼다. 그녀는 '네가 얼마나 냉정한지 알겠어'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그날 나에게 너무나 고마워 한바탕 파티 준비까지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어쩌면 나에게 뽀뽀라도 해주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내가 그녀에게 이젠 더 이상 아무 도움도 될 수 없는 녀석이라고 느꼈고, 그렇다면 그녀 곁에 내가 있을 이유가 없다고 느꼈기에 그녀가 날 싫어하게 하고 싶었다. 그녀는 어차피 또 누군가를 만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돈도 많고 그녀를 끔찍히 사랑해 주기도 하고 착하기도 한 동화속 왕자같은 사람을 만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아니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 줄 수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렇게 연락이 끊어진 뒤로 2년이 흘렀다. 그녀의 전화번호는 여전히 내 핸드폰 저장번호 '1'번을 차지하고 있고, 돈이 생기면 넣어주기 위해 알아두었던 그녀의 계좌번호는 아직도 수첩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그녀와의 만남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리고 어느날 그녀의 메일함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훔쳐보았을 때-우리는 서로의 메일 비번도 알았다-그녀가 또 다시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것으로 정말 모든 것을 기억속에서 지워버렸다.


  
*              *              *



  많은 상념이 머리속을 스쳐 지나간 후,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여전히 종로 거리 위에 서 있었다. 지인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 속에 남겨진 것은 나 혼자 뿐이었다. 머리속에 어른거리는 나난의 얼굴에 겹쳐지는 그녀의 얼굴을 완전히 뒤로 하고 나는 걸음을 옮겼다. 세상엔 많은 싱글이 살고 있다. 그리고 그들 모두 나와 같은 기억 한 두 개쯤은 가지고 있겠지... 내 모습은 어느새 군중에 묻혀 버렸고, 내일이면 나는 새로운 모습으로 깨어날 것이고, 어느 날인가는 또 다시 오늘처럼 옛날 일을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나는 문득 혼자

  '어쩌면 나와 그녀의 인연은 아직 끝난 게 아닌지도 몰라'

   하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떠올리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웃음이 언제 있기라도 했냐는 듯, 무표정한 모습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가로등이 거리를 아름답게 비추는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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