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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Eyes on Me

2004.04.30 23:3904.30

미로냥님의 글은 치밀한 구성없이 큰 줄기만 마련한 이미지 나열에 가까운 글입니다.
요소와 요소 사이를 치밀하게 연결해서 큰 그림을 만드는 스타일이 아니라 커다란 줄기만 마련해 놓고 이미지들을 주욱 옮기는 느낌입니다.
그림으로 치면 파란색과 노란색을 칠한 후 멀리서 보면 초록으로 보일 것을 예상하는 형식같은 느낌이랄까요.
끝까지 다 읽으면 마음에 남는 인상은 있고, 강렬할 수도 있는 글이지만 미로냥님의 글에서 많이 보이게 되는 이미 고착화된 특징이 작품을 완성도 있게 하기엔 아직 미숙한 느낌입니다.
일단 읽는 사람을 생각하고 쓴 글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자신의 세계에 빠져서 쓴 글로 일필휘지로 ‘필’을 받아 써 내린 글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글쓴이는 많이 고민하고 힘들게 오래오래 썼을지 모르지만 읽는 입장에서 글이 산만한 점에서 그런 감상을 받게 됩니다.

Eyes on Me는 논리성이 부족해 전반적으로 흐르는 절망과 소외와 처절한 분위기가 어디서 비롯한 건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글에서 너무 많은 설명을 하는 것도 좋지 못하나 아버지, 어머니, 전쟁 등이 중간중간 힌트처럼 잠시 나왔다 스쳐갈 뿐이고 그것들을 가지고 이어 맞출 수 있는 이야기가 너무 비어 있습니다.
논리성과 개연성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조금 부족한 느낌을 받습니다.

Eyes on Me는 거울이라는 이벤트 소재로 쓴 글인데요. 거울이라는 소재를 다르게 해석하려고 한 작품입니다. 거울=비친다는 것을 가지고 실제의 거울이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거울이라는 소재를 승화시켰고 감성을 잘 전달하는 작품이었습니다. 문장 또한 안정되고 탄탄합니다.
앞으로도 건필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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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냥


  *

  동쪽에서부터 병사들의 행렬이 길고 길게 이어졌다. 어제 한 명 지나던 이가 열로 스물로 끝 없이 불어났다. 아무도 그들을 눈여겨 보지 않았다. 목을 길게 빼고 언덕에 앉아 있는 계집애는 미친년 뿐이었다. 언제나 배가 부른.

  왕이, 돌아온다!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맨발로 성루에 올라 그렇게 외친 자의 머리를 깨 부수었다. 부서진 머리가 키들키들 웃으며 다시 외쳤다.
왕이, 돌아오신다!

  *

  11월 위령제를 며칠 앞두고 달이 다 탄 양초러럼 문드러졌다. 쪽빛을 한 바가지 뒤섞은 하늘이 둥그렇게, 산 위로 솟아 올랐다. 달이 가리키며 얌전히 꺼지는 쪽이 서녘이다. 달이 걸린 하늘은 요상하게 더 어둡다.
  풍습에 따라, 나는 동네 계집애들과 함께 초롱을 들고 밤 마실을 놀았다. 엄마가 처녀 적에 들었다던 청색 종이 초롱이 마침 부서진 참이었다. 탁자에 부딪히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아귀가 벌어졌다. 그 전 부텀 너덜거린걸, 뭐, 하고 아무렇게나 소리쳤다. 넌덜넌덜 했단 말이야, 하고 버럭 외쳤다. 초롱 없이 마실을 나서자 아이들이 보고 웃었다. 초롱은 필요 없다. 달이 아직 밝으니까, 초롱 같은 걸 들다니 겁쟁이, 하고 말했다. 사내들이나 하는 말이다, 고, 누군가 다시 말했다. 아이들은 웃었다. 까르륵 석류 터지는 소리로 웃고 초롱을 흔들며 달려갔다. 나는 등이 떠밀린 사람처럼 걷는다. 집 쪽을 돌아다 본다. 쇠락한 성은 달이 가는 쪽으로 기우뚱하다. 해가 뜨는 곳, 동쪽에는 공동묘지들이 새파랗게 걸려 있다. 산이 드문 지평선에 주렁주렁 묘지들이 입을 다문 채 걸렸다. 위령제가 가까워 등불 수가 무덤 수보다 많다. 초롱을 든 계집애들이 떼를 지어 노래를 부른다.

  가라 가라 가라 가라 걸을 때 땅에 닿지 않는 이야
  가라 가라 가라 가라 웃을 때 뒤통수가 보이는 이야
  가라 가라 가라 가라 심장에 달이 비치는 이야
  가라 가라 가라 가라 눈 안에 사랑하는 이를 담지 못하는 이야
  가라 가라 가라 가라

  “초롱도 없는 계집애는, 끼워 주지 말아!”

  가라 가라 가라 가라
  가라 가라 가라 가라

  아이들은 존재와 결렬을 구별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있음도 부재도 모호하게 생각하여 가슴에 품은 것을 실제하는 것으로 만들 줄 안다. 어른이 되어 아이일 적을 기억해 볼 때 희뿌옇게 점막처럼 성기고 초점이 없는 인상은, 아이에게는 일상이다. 초점 없는 시선 초점 잃은 마음 초점 버린 기억, 아이들은 초롱을 들고 너울너울 밤을 춤춘다. 죽은 자들은 한 번도 제 목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위령제가 다가오고 달은 이울었다 다시 살아난다. 달은 뼈로 되어 있다. 죽은 사람의 뼈는 거기 없다. 죽지 않은 사람들의 해골을 짠 바닷물에 담그면 달이 되어 날아간다 하였다. 그 사람의 눈깔은 별이 된다고. 아이들만이 그들을 보았다. 춤을 추던 다리를 멈추고 초롱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아이들은 하늘로 치솟아 떠올랐다 순식간에 꺼져 사라지는 달을 향해 노래를 불렀다. 아이들의 노래만이 위령제를 이 땅에 부를 수 있다.

  “초롱 없는 계집애는 돌아가!”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해.”

  흑장미 빛깔 공단 치마를 둥그렇게 부풀리며, 나는 춤을 추었다. 푸르고 붉은 달빛이 쏟아져 기름처럼 번들거린다. 아이들은 핏빛 초롱을 흔들었다. 불길이 너울너울 춤을 춘다. 위령제는 망령처럼 서 있는 성 위로 까마귀 날개를 달고 찾아 들었다. 가라, 가라, 가라, 하고 위령제는 운다. 가라가라가라, 이미 이 땅에 속하지 않는 자야. 있지, 저 먼 동쪽에는 야만인이 산다. 그들의 창은 네 할애비의 엉치뼈라더라. 그 창을 휘둘러 네 애비를 죽였어. 산 채로 해골을 따서 차디찬 바닷물에 담가 저희들이 쓸 달을 만든다더라. 봐라, 저 달, 동쪽에서 뜨잖느냐.

  아 무 도 살 아 돌 아 오 지 못 해

  나는 말하였다. 그것 봐, 어머니, 아버진 오지 않을 거여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둬. 하지만 듣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는 어제와 같이 오늘도 내일도 어쩌면 영원동안 박제될 예정인 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처녀 적에 들고 공동묘지 곁을 뛰놀았던 초롱은 부서졌고, 어머니의 딸은 맨발로 초롱 없이 춤을 춘다. 아 무 도 살 아 돌 아 오 지 못 할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생각은 발화한 불꽃처럼 무덤 위를 떠돌았다. 이울어진 달은 이울어진 성을 매달고 휘청였다. 아 무 도 살아있지 않은 위령제에 아 무 도 죽지 않는다. 아 무 도 죽은 이들에 관해 말할 수 없는 위령제에 아 무 도 죽지 않은 이가 위령제를 즐기는 법을 알지 못한다. 그것 봐, 어머니, 아버진 이제 안 올 거예요. 멀고 먼 동쪽으로 낡은 은빛 갑옷을 입고 늙은 나귀를 끌고 떠난 그 날부터 다시는 올 수 없었던 거예요. 벌써 야만인들의 창에 해골이 따여 바닷물 깊숙이 쳐 박혔을 거여요. 부글부글 피거품이 올라 먼 동쪽 물고기들의 아가미를 물들였을 거여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저기 우리 성 낡은 꼭대기와 풍화하여 금이 간 벽마다 아금아금 깃들은 위령제 그림자들이 속삭여 가르쳐 주지 않아요? 아 무 도 살 아 돌 아 오 지 못 할 거라고. 그러니까.

  “어머니. 초롱이 깨어 졌어요.”

  진주가 박힌 팔걸이 의자에 장식 인형처럼 앉은 어머니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푸른 에메랄드 눈동자는 허공에 가 멎었고 길게 드리운 금발 위로 먼지들이 달빛을 받아 점멸한다. 모아 쥔 두 손은 기도서 책장을 쥐고 있는 채 한 치도 움직이지 않는다. 어머니, 초롱이 깨졌단 말이에요, 초롱 없는 계집앤 위령제에 춤을 출 수 없는 걸요. 나는 어머니의 포실한 젖가슴을 어루만진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소리로 어머니는 어제도 오늘도 영원동안 속삭인다. 내 영혼이 부르짖나니 참된 것이야말로 삿된 것을 쳐 부숴 승리하는 것이요, 내 주의 찬란한 눈동자가 가 없는 감로주를 나리는 날 상한 백골들마저 새 살을 얻어 고향을 밟으리라 이르노니.

  “……얘야, 네 아버지는 아직 오지 않으셨니??br />
  죽은 이여 죽은 이여
  거기 서 있어도 내 거울에는 비치지 않아
  죽은 이여 죽은 이여
  머물러도 붙잡아 줄 수 없어
  가라 가라 가라 가라 잊혀져 버린 이여
  가라 가라 가라 가라 머무를 수 없는 이여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무너진 창 너머 산 등성이가 푸르스름한 빛으로 물든다. 수백 수천 영혼들이 위령제를 위해 날아 돌아온다. 까마귀 나래에 묻어 연기 냄새가 난다. 포탄 냄새가 난다. 동쪽에서 달이 돋고 동쪽에서 해가 태어나고 동쪽에서, 죽은 자들이 돌아온다. 나는 부서진 초롱 곁에 동그랗게 모여 서서 수근거리는 영혼을 본다.

  *

  위령제의 밤에 초롱을 밝게 켜는 것은 망자를 슬프게 만들기 위함이다. 죽음을 부정하고 존재를 확신하던 자를 절망하게 만든다고. 붉고 푸른 빛 앞에 제 윤곽이 그림자를 만들지 않는 것을 깨닫고 비로소 자신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하였다. 위령제는 망자의 천도를 비는 축제였다. 죽은 달이 가장 백골 다운 빛깔로 번쩍이며 으스스한 달무리를 두르면 위령제가 시작 한다. 가라 가라 가라 가라 죽은 이여 죽은 이여 가라 가라 가라 가라 죽은 이여 죽은 이여

  “아가씨. 아가씨. 같이 놀자.”

  흠칫,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린다. 행렬을 비집고 새끼 비둘기처럼 새빨란 입을 맞춰 노래하는 소녀들을 밀치고, 나는 서쪽 문을 향해 달린다. 서쪽 문으로 초롱을 든 소녀들이 천천히 걸어 나간다. 위령제 노랫소리가 하늘을 메운다. 선회하는 영혼들이 급강하한다. 영혼들은 초롱의 가호를 받고 있는 소녀들의 머리카락을 아쉬운 듯 흔들다 다시 치솟아 오른다. 까마귀 나래 소리가 펄럭인다. 깃폭이 찢어진다. 누군가 웃는다. 누군가 운다. 나는 일곱번째 계집애를 떠다 민다. 초롱이 꺼진다. 초롱을 짓밟고 바깥으로 뛰어 나간다. 지평선을 향해 뻗은 무덤 길을 달린다. 어떤 아이는 무덤 길에서, 해가 지는 방향으로 달리는 검은색 장례 마차를 본다. 마차의 뒷꼭지를 목표로 달리기 내기를 했던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위령제의, 거의 다 이지러져 새벽 햇살과 별반 다르지 않은 빛의 달이 무덤길 끄트머리에 달려 있었다. 앙상한 나무들이 뼈를 드러내고 덜걱거렸다. 먼 동쪽에는 야만인들이 산다. 야만인들은 산 심장을 좋아했다. 야만인들은 위령제에 쓸 달을 만들어 하늘로 날려 보냈다. 달은 산 자의 백골이라고 했다. 안식 없는 죽음을 위해 수 많은 사내가 창을 들고 동쪽으로 떠났다. 산을 넘어간 자들은 검은 장례 마차를 향해 달린 아이들과 똑같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검은 장례 마차에서 피리 소리가 난다고 말했다. 무덤 사이에서 회색 쥐 한 무리가 달려 나오고 피리 부는 소리가 나면 가장 어린 아이부터 자지러지게 웃기 시작하면서 지절지절 춤을 추었다. 막 떼를 입힌 무덤 곁에서 한 아이가 흰 거품을 물고 넘어지면 무덤 사이 마구 자란 풀들이 바람을 타고 춤 추었다. 장례 마차는 꼭 그 순간에 달려 오는 것이다. 아이들 사이를 지나 말발굽 소리 대신 철걱철걱 회중시계 소리를 내며 자장가를, 반드시 피리로 연주하며 지나는 것이다. 아이들은 마차를 향해 달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동쪽 야만인의 땅으로 황금 십자가를 찾아 떠난 사내들이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위령제의 밤에는 달을 삼켜라
  황금 거울 은 거울 한 없이 내다 걸린 창공의 열매
  아무 것도 비추지 않는 달
  황금 거울 은 거울 한 없이 내다 걸린
  망자의 열매
  거울 앞에 그림자를 남기리
  초롱을 잃은 위령제의 공주
  죽은 이들을 기억하라황금거울은거울창공의열매위령제의초롱을잃어 버린 공주
  망자의 딸
  위령제의 밤에 달을 삼켜라

  스산한 바람이 분다. 까마귀 날개들이 달을 가리고 지나친다. 무덤 위에 한 개씩, 달처럼 반짝이는 백골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까마귀는 백골의 눈을 쫀다. 공허를 쫀다. 나는 턱이 갈비뼈에 걸린 백골과 엉치뼈가 없는 백골과 머리를 손에 든 아홉 명의 백골과 함께 춤을 추었다. 백골은 셋이 더 있었다. 그들은 까마귀 날개를 달고 있었다. 날개를 찢어 버려, 외발이 아닌 것은 필요 없어, 눈이 없는 녀석아. 까마귀 날개를 밟고 까마귀 춤을 추었다. 황금색은색찬란한, 거울들이 쏟아졌다. 은 비가 왔다. 금 비가 왔다. 아이들의 세게는 모호한 것들로 지어져 있었다. 사라질 이슬처럼 맑은 것들이 아이들을 감싸, 그것 너머로 세상을 본다. 허황하고 굴절된 것들이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세상을 만든다. 확신을 가지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들이 산 것과 죽은 것들 사이를 떠돈다. 아이들은 언제나 위령제의 숨소리를 듣는다. 위령제는 아름답고 고혹적인 신사였다. 가슴은 홀쭉하고 입술은 창백해 언제나 눈동자를 빌려 줄 수 있었다. 아이들은 세상에 있을 리 없는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에 그 기준의 결렬로 있을 수 없는 존재들이 초대 받는다. 아이들은 언제나 없는 것을 본다. 넋이 나간 듯이 바라보고 있는 검은 숲 사이로 혹은 쭉 뻗은 무덤길 가장자리로 잠시 스치는 바람을 보듯 백골과 검은 장례 마차를 본다. 피리 소리를 듣는다. 시간이 아이들을 기르고 천천히 그 특별하고 애매한 시선을 앗아 가겠지만 아주 긴 시간이 흐른 후에도 그들은 위령제의 달이 하강할 때 인류의 기원을 기억한다. 고개를 갸웃대며, 어찌하여 그토록 모든 것이 모호했던가, 스스로 묻는 순간에.

  어머니.
  아 무 도 살 아 돌 아 오 지 못 해
  요?

  달맞이 꽃밭에 엉긴 이슬을 모조리 밟아 터뜨리며, 나는 꽃물이 든 맨발로 백골을 부쉈다. 부서진 백골들이 하늘로 솟아 은하를 타고 흘러 사라졌다. 반짝이며 쏟아지는 은의 비 금의 비 유리의 비들이 내 머리카락을 장식한다. 나는 달을 잃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본다.

  어머니, 아무도 살아 돌아올 수 없
  는 건가요?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하늘을 올려다 보며 나는 처음으로 거울을 얻었다.

  위령제의 밤에는 달을 삼켜라
  황금 거울 은 거울 한 없이 내다 걸린 창공의 열매
  아무 것도 비추지 않는 달

  *

  거울에 비친 나는 어머니를 닮았다. 내 검푸른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친다. 나는 오랫동안 거울을 본다. 거울을 던져 깨뜨린다. 거울 깨지는 소리는 스스로 빛을 낸다. 태양처럼 일 순간 찬란하게 불타 오른다.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나는 깨진 조각을 삼킨다. 거울은 없고 나는 더 이상 비치지 않는다. 나는 다른 거울에 나를 비춘다. 거울에 비친 나는 어머니를 닮았다. 아무도 살아 오지 않는다. 먼 동쪽, 해와 달이 떠 오른다. 내 검푸른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친다. 나는 오랫동안 거울을 본다. 까마귀들이 떼를 지어 마을을 지난다. 허공을 가른다. 위령제는 끝나지 않는다. 초롱을 잃어 버리는 사람은 미친 사람 뿐이다. 부서진 초롱은 백골이 먹는다. 거울을 던져 깨뜨린다. 거울 깨지는 소리는 스스로 빛을 낸다. 찬란하게 불탄다. 재는 남지 않는다. 거울 조각들은 새로운 거울을 낳는다. 피가 흐르는 입술을 어루만진다. 나는 더 이상 비치지 않는다. 거울은 없다. 나는 다른 거울을 찾아 걷는다. 동그랗게 성 안 계단을 따라 걷는다. 빙글빙글 돌며 거울을 깨뜨린다. 피리 소리가 난다. 거울에 비친 나는 어머니를 닮았다. 좁은 길을 달리는 검은 장례 마차는 휘장을 걷지 않는다. 아이들은 달린다. 빙글빙글빙글빙글 거울에 비치는 내 얼굴은 어머니를 꼭 닮았다. 내 검푸른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친다. 나는 거울 표면을 쓰다듬는다. 좀 더 큰 거울이 필요해, 하고 속삭인다. 나는 거울을 던진다. 깨뜨린다. 거울 파편 하나 하나가 모두 살아 있는 물고기의 비늘처럼 펄떡거린다. 나는 냉정한 눈으로 깨진 거울을 본다. 숨을 허덕이며 거울은 죽는다. 죽은 거울을 먹으러 위령제가 찾아 온다. 달이 떨어진다. 은 비가 온다.

  어머니, 나를 봐요.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으실 거예요.
  왕은 오지 않아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아요.
  어머니의 텅 빈 눈동자에는 아무 것도 비치지 않는다. 먼지들이 거울 파편처럼 명멸한다. 나는 자지러지게 운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찾아 오지 않았다. 달이 떨어진다. 은색의 비가, 거울 파편들이, 수천 수 만 떨어져 내린다. 나는 피를 토한다. 먼 동쪽에서 해와 달이 떠오른다. 새로운 백골이 하늘을 굴러 지나다 말라 버린 호수로 떨어진다. 나는 홀로 서 있다. 어머니의 화장대로 다가가 손수건으로 거울을 닦았다. 어머니, 나를 봐요. 어머니, 나를 봐 줘요. 나는 거울에 비친 나를 본다. 나는 어머니를 닮았다. 내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친다.

  *

  나는 달을 마신다. 달을 마신다. 달을 마시며 초롱 없이 춤춘다. 사내의 품에 안겨 발버둥 친다. 발목을 접지른다. 달을 마신다. 은 거울 금 거울 하염없이 떨어져 하늘에서 비가 내려 찬란하게 반짝이는 유리 조각들이 심장을 부순다. 혀를 부순다. 온 몸이 질척거린다. 나는 사내를 걷어 찬다. 자지러지게 웃는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나를 봐요. 사내의 눈에 나는 비추지 않는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나를 봐요. 나는 달을 마신다. 달에 비친 내 얼굴은 어머니를 닮았다. 내 눈동자에 내가 비친다.

  [어머니가 알고 계셔?]
  [아가씨……]
  [어머니가 알고 계셔? 알고 계셔? 알고 계셔?]

  누가 나를 눈에 담았지? 누가 나를 비추었지? 누가 나를 담아 비추어 망자가 아니게 만들어 주었지? 누구야, 누구야, 누구야, 나는 소리 쳤다. 누가 나를 사랑하는 이야? 누가 나를 눈 안에 담은 이야? 나는 늦은 가을 갈대처럼 떨었다. 아무도 나를 눈에 담지 않았다. 그 날의 나를. 은 달 금 달이 벼락 같이 떨어져, 일억 개의 파편으로 부서지던 날의 나를.

  *

  동쪽에서부터 병사들의 행렬이 길고 길게 이어졌다. 어제 한 명 지나던 이가 열로 스물로 끝 없이 불어났다. 아무도 그들을 눈여겨 보지 않았다. 목을 길게 빼고 언덕에 앉아 있는 계집애는 미친년 뿐이었다. 언제나 배가 부른.

  왕이, 돌아온다!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맨발로 성루에 올라 그렇게 외친 자의 머리를 깨 부수었다. 부서진 머리가 키들키들 웃으며 다시 외쳤다.
  왕이, 돌아오신다!
  나는 그의 머리를 부수었다. 죽어, 죽어, 죽어, 닥쳐, 나는 외쳤다. 그리고 다시 어머니 방으로 달려간다. 위령제가 끝나고 망자들의 향기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기울어버린 성 꼭대기 음산한 돌무지에도 부서진 촛대에도 곰팡이가 피지 않는다. 나는 미친 듯이 떠돌아 어머니 방문을 연다. 어머니는 꽃처럼 피어나 자신 몫의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다. 분을 바르는 뺨이 화사한 복사빛이다. 나는 달려가 어머니를 부른다. 어머니, 나를 보세요. 어머니, 아버지는.

  왕이 돌아오신대. 네 아버지가 돌아온대. 내 남편이 이제사 오신단다. 나를 품에 안아 주실 거야. 내 눈을 들여다 보아 주실 거야. 왕이 돌아온대.

  황금거울은거울위령제의초대받지못한공주초롱이없는공주달을삼켜라달을삼켜라가라가라가라머무르되거울에는비친적없는이여망자여
잊혀진 이여

  위령제 노랫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피리를 분다. 검은 장례 마차를 본다. 나는 어머니의 탐스러운 머리타래를 쥔다. 어머니 나를 보세요 나를 보아 주세요 아무도 그 날의 나를 담지 않았다 아무도 그 날의 나를 보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의 목을 조르고 어머니의 뺨을 뜯는다 어머니의 입술을 찢는다.
  어머니 거울이 필요 해요
  거울에 비친 내 눈에는 내가 보여요 나를 담고 있어요 어머니 나는 어머니를 닮았어요

  위령제의 밤에는 달을 삼켜라
  황금 거울 은 거울 한 없이 내다 걸린 창공의 열매
  아무 것도 비추지 않는 달
  황금 거울 은 거울 한 없이 내다 걸린
  망자의 열매

  어머니어머니 거울이 필요해요 내게 거울을 주세요 나를 비출 것이 필요해요 나를 비추는 눈이 필요해요 어머니어머니 나를 보세요
어머니의 거울로 나를 보세요
  나는 어머니의 탐스러운 눈알을 어루만졌다. 어느 책에도 쓰여있지 않을 법한 기묘한 소리가 손목을 타고 흘러 가슴 한 가운데를 벌떡벌떡 때렸다. 나는 어머니의 눈에서 치솟는 검붉은, 혹은 달처럼 새파란 피를 황홀하게 감상한다. 피리 소리가 들린다. 치맛자락이 물든다. 위령제 노랫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진다. 핏줄이 선 두 개의 눈을 입 안으로 밀어 넣으며, 나는 날개를 펼친다. 수직으로 솟아 올라 무너진 성루 위에 선다. 어머니 나는 어머니를 많이 닮았어요 거울을 들여다 보면 어머니를 꼭 닮은 내 눈동자에 내가 비쳐요 어머니 어머니의 눈에 나를 담아 주어요 아아, 어머니.
  위령제의 흰 거울이 하강한다. 희고 투명한 백골이 발치를 뒹군다.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도 내게 거울을 주지 않는다. 나를 비추는 것은 아무데도 없다. 거울에 비추지 않는 달이 휘영청하다. 달이 뜬다. 위령제는 끝나지 않는다. 나는 달을 삼킨다. 흰 거울을 삼킨다.
댓글 2
  • No Profile
    mirror 04.05.01 11:49 댓글 수정 삭제
    미로냥님은 거울 편집부 (intoamirror@mirror.pe.kr) 로 주소, 우편번호, 받으실 분 성함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 No Profile
    mirror 04.05.12 22:02 댓글 수정 삭제
    미로냥님에게는 쾌걸 조로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전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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