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우수작 달과 육백만 달러

2005.05.28 02:0005.28

매달 독자우수 단편은 전달 20일부터 업데이트 되는 달 19일까지 올라온 글 중에서 선정됩니다.

요한님의 “레퀴엠”은 먼저 현대를 배경으로 하면서 나오는 하게체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초반부터 계속 나오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주제가 되지 못하고 설정처럼 다룬 듯 했습니다. 살면서 갖게 되는 본질적인 의문에 대한 이야기를 다뤄 궁금증을 일으킨 것에 비해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결말이 지어졌습니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 자체도 상당히 피상적으로 다루어 역시 설정 중 하나로밖에 취급을 안한 걸로 보였고요. 개연성보다는 편의성만 생각한 듯한 진행이었습니다.
주인공은 왜 죽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지, 어떻게 죽음을 남에게 주고 있는 건지, 수사 이야기가 딱 한 구절 나오는데 도대체 이 사람은 무슨 능력이 그렇게 좋아서 그걸 다 빠져나가는 건지, 인상 좋은 사람이랑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보니 그도 철학적이고 나도 철학적이라는데  애매모호하게 뭉개고 지나가니 주인공도 상대도 전혀 지성적인 것 같지 않습니다. 사건 진행이 전체적으로 모호했습니다. 글에 공을 들였다는 느낌을 받기 어려웠습니다.
좀 더 거시적으로 말하자면 이게 단편이었다면 죽음 자체에 초점을 더 맞추고 작가가 말하
고자 하는 바가 뚜렷해야 했고 이게 장편(혹은 옴니버스)의 프롤로그라면 좀 더 명확한 사건이 있고 캐릭터가 뚜렷해야 했는데 이도저도 아니었습니다.

rubycrow님의 “여름의 공기는 너무 뜨거웠다”는 사족이 너무 많았습니다.
갈등, 고민, 상황 등이 너무 피상적으로 묘사 되어서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보였습니다.
인물들의 갈등이나 대화가 선문답이나 이론적 논쟁이기 때문에 그런 걸로 사건이 일어난다고 설득력을 주기에는 전개도 약했습니다.
글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어디에 조명을 주어야 하는지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Nitro님의 “내 안의 산타클로스”는 완성된 단편 소설로 보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믿음을 어른이 되어서까지 잃지 않고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이야기가 되기 힘들지 않나 합니다.
이런 작은 소품은 특히 세밀한 부분을 어떻게 묘사하느냐로 좋은 글이 되는가, 밋밋한 글이 되는가가 갈리지 않을까 합니다.
정말로 믿음이 이루어진 것에 초점을 두거나, 커서도 변치 않은 동심을 그리거나, 한 쪽을 잡은 후, 더 구체적이고 세밀한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미소짓는독사님의 “작은 문학도의 이야기-환상, Fantasy”는 이를테면 환상과 현실의 위치바꿈이었는데요. 이런 식의 이야기 구조가 한 때 환상(환타지)동호회에서 유행했던 건 넘어가더라도, 단지 위치를 바꾸는 것만으로 정말로 다른 관점이 보일 거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쉽지 않나 싶습니다. 상황을 역전시킴으로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건지, 무엇을 비판하고 싶은 건지를 더 염두에 두셨으면 합니다.

왁슘튤람님의 “정상과 비정상”은 일단 열심히 쓴 글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실체감이 없는 상태에서 공포를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이야기에 비해 문장에 힘을 너무 많이 줬습니다.
일단 너무나 유쾌한 애들만 모인 2학년 7반도, X군의 캐릭터리티도 전혀 현실에 있을 법하지 않은데다가 X군이 했던 말과 꿈 사이에 논리적 연관성이 그렇게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주제와 소재가 완전히 괴리되어 있었습니다.

미하번님의 “노을은 결코 붉지 않다”는 독자가 얼만큼 아는지, 다른 말로 글을 쓰는 이가 얼마나 더 써야 하는지를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작가가 실제로 독자가 알아야 할 사항들을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듯 했고, 결국 현실성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그저 막연하게 슬픈 이야기를 쓰려한 흔적만 남습니다.

꼬마양님의 “발디엘”은 성경의 틈새에 있는 한 인물을 발굴한 건 좋은데, 그 뿐이었습니다.
성경 구절을 조금 늘린 것 이상 다른 의미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중세의 전설처럼 이야기를 더 재미있게 만들었다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moodern님의 “미팅”은 입술, 스타킹, 마스카라, 체육복 같은 식으로 사람 이름을 지우고 이미지를 넣었다면 좀 더 우화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체가 있는 것, 실재하는 것에 대한 갈망, 관념적인 것에 대한 지긋지긋한 감정 같은 게 보이긴 하는데, 그러면서 글은 매우 관념적이라는 것이 모순으로 다가왔습니다.
“초능력자들”은 사고를 만지작거리고 글쓴이가 본 무언가를 표현했다는 것 외에 다른 의미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스아님의 “독수리”는 프로메테우스와 독수리라는 고전적인 소재에서 이제까지 조명받지 않았던 소재인 독수리를 제목으로 삼았다면 응당 독수리에게 무언가 더 비중을 주었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듣고 또 들은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가 아니라요. 소재가 참신하면 테마가 진부해도 어느 정도 받쳐 주지만 이 글은 제목을 잘못 붙였거나 제목에 어울리는 글을 쓰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대화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는 이야기의 시작이지, 이야기의 완성이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pilza2님의 “딸이 피는 뒷동산”은 글솜씨도 전개도 안정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심장이 없네요.
적당한 예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쁘게 만들어진 인형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과 거의 흡사하게 만들어졌고 아름답지만 생명이 없는 존재요. 그저 꾸며졌을 뿐입니다.
글을 쓰신 분이 이야기도, 여기 나오는 인물에도 애착을 갖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나친 애착도 곤란합니다만.. 열정도, 속에 닿는 그 무엇도 없습니다. 많은 아마추어 습작가들의 글, 아주 유치한 글에서도 읽힐 수 있는 그것이요.
글을 쓴 이가 쓰지 않은 것을 읽는 이가 읽을 수는 없습니다. 글을 쓴 이가 느끼지 않는 것을 읽는 이가 느끼기 어렵습니다.

hirurika님의 “이웃집 가족”은 가벼운 꽁트였고, 그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재미있었습니다. 제목이 좀 더 톡톡 튀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게 아쉽지만요.

곽재식님의 “달과 육백만 달러”는 제목이 옥의 티였습니다. 제목 자체는 재밌는데 이야기와 아주 잘 어울리지는 않아요.
전에 올리신 글들도 좋았습니다만 글이 더 좋아지신 것 같아 읽으며 즐거웠습니다.
최근 봐온 글에서 ‘읽는 맛’이라거나 그 뒤가 궁금해지게 만드는 ‘이야기의 법칙’에 대해서 알고 있는 글은 정말 드물었으며 그 점에서 탁월했습니다.
결말도 아주 좋았구요. 처음부터 끝까지 붙잡고 읽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좋은 글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진아나 mirror을 클릭하신 후 연락 가능한 이메일 주소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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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1.

"내가 니 아빠다."

다스 베이더가 아닌 다음에야, 이런 대사를 하는 사람은 대체로 굉장히 난처한 입장에 빠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괜히 어설픈 파스텔 톤으로 페인트칠한 이 어린이 보호시설에서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를 보면서, 내가 한 사람의 아버지임을 아득할 만큼 강하게 느꼈다.

이런 장면을 상상해 보자. 눈부시게 밝은 햇살이 강렬한 한 여름날이 있다 .도시 빌딩의 알루미늄 외벽들이 달아 오르고, 아스팔트가 지글지글 녹는 듯한 더운 날씨. 길가에 가득한 차들에서 피어 오르는 열기와, 더위에 찌든 거리의 사람들이 땀 흘리며 걷고 있다.

그런 여름날이, 갑자기 세상에 거대한 장막을 치는듯, 삽시간에 깜깜하게 어두워진다. 저 멀리 서편에서부터 갑자기 뭉게뭉게 검은 먹구름이 확 몰려오더니, 시내 전체를 저쪽 끝부터 이쪽 하늘 끝까지 구름들이 다 뒤덮어버리는 것이다. 길가던 사람들이 갑자기 놀라서 저마다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하늘을 주욱 가로지르며 번개가 확 친다. 그리고 세상을 울리는 천둥소리와 함께 정신나간듯이 엄청난 소나기가 퍼부어 대는 것이다.

내가 종로구청 복지과의 류은정씨에게 "전화받으시는 분이, 이원 어린이 생부 되시죠?"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느낀 그 마른하늘에 날벼락 떨어지는 느낌은, 적어도 그 정도의 배경효과가 필요한 강도였다.

이제 겨우 새 직장에서 자리잡고, 지난 일년 반 동안 사귄 아가씨와 내년 봄에 결혼하기로 했는데. 아니, 왜, 애가, 어떤, 대관절, 무슨 소리냔 말이다.

"아니, 아니, 똑바로 다시 한 번 말씀해 보세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 친자식이 있다구요? 저, 저, 잠깐만. 제 이름하고 주민등록번호하고 한 번 확인 해봐주시겠습니까?"

몇 번이고 확인을 하고 난리를 쳐 봤지만, 정해진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여기가 텔레비전 주말드라마 속도 아닌데, 나에게는 나도 모르는 숨겨둔 딸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완전히 공황상태에 빠진 나는, 반쯤 넋이 나가서 터벅터벅 구청을 향해 길을 나섰다. 나는 길을 걸으면서 곰곰히 내 인생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돌아보았다. 나름대로 큰 사고를 안내고 살려고 주의하면서 살아오지 않았는가. 궁색한 구석에 몰린 채 버스를 타고 가면서, 그 동안 모든 술먹고 필름 끊긴 나날들을 하나 둘 다 집대성하여 헤아려 보기도 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영문인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종로구청 복지과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다가, 서류에서 그녀의 이름 석자를, 참으로 오랫만에 보는 순간. 이야기의 내막은 단숨에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주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대학시절 동료였다.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지구물리학 연구실에서 공부를 하다가 산학연 합동 프로그램에 지원했고, 기상청에서 일을 하면서 박사학위 과정에 있게 되었다.

그때가 아마, 여름 태풍내습기 대비 총점검이 막 끝나는 때쯤이었을지 싶은데, 마침 굉장히 큰 환경학회가 수원에서 열려서, 이 바닥의 온갖 인사들이 다 모이게 되었다. 물론 많은 옛 친구들과 은사님들, 은사라고 부르기 싫은 교수들이 줄줄이 나타났고, 기상청에서 한동안 일하고 있던 나는 아주 오랜만에 학교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친구들이 나이가 확 들어 보이는 순간만큼 서글픈 것도 없다. 물론, 내가 나이를 먹는 느낌이 드는 생일이 돌아오는 때나 새해가 밝아올 때 쯤도, 괜히 이 날 이 때까지 내가 뭘 해오고 살았나 하는 생각에 사무치긴 한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가 옛날의 그 모습대신 세상의 바람과 물결에 닳고 닳은 모습일 때의 비감은 그런 사무침을 능가한다.

저 깊은 밤마다 같이 호젓한 도로에서 마지막 버스를 기다리던 친구가, 몇 번씩이나 의과대학 편입학 시험에 낙방하고 사방으로 웅크라든 모습을 볼 때. 혹은 언젠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실험실 안에서 바깥으로 창 밖을 보며 창을 세차게 두드리던 빗방울들을 같이 바라보던 친구가, 어렵사리 얻은 직장에서 답답한 인생을 느끼며 한숨을 쉬는 모습을 볼 때는, 굉장히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시원하고 유쾌했던 그들이, 어느새 삶에 꼬이고 이런저런 일에 마음속 억울함이 차서 기가 죽은 낯빛이 된 것을 보면, 참, 세상이 이러한가 싶다.

언제나 내 마음속에는 어린 날들의 기억으로만 남아있던 그런 친구들의 모습이, 안타깝게 그 날개가 꺾이고 다급한 인생에 쭈그러든 모습으로 발견되는 일은 그처럼 꽤나 감흥이 크다. 그것은 그 친구들이 그만큼 괴로운 만큼, 동시에 내 주변과 내 삶의 부분들이 날개가 꺾이는 모습이 되는 것이며, 또한, 그들과 비슷한 길을 걸어온 내 자신이 그만큼 무너져 내린 게 되는 것임을, 눈 앞에 들이미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그녀만은 아직도 옛날의 그 밝은 얼굴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많은 옛 친구들 가운데 단연 빛을 발하는 것이었다.

"나름, 나도 논문 낸다고 요며칠 계~속 밤 샜어."

하는 말을 하는 만큼, 그녀의 오른쪽 눈에 좀 충혈기가 있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경쾌하게 흘러가는 말소리와, 괜히 눈을 흘기며 표정을 만들어 대답하는 그 모습은 예전 그대로였다. 더군다나, "내가 머릿결은 작살이지." 라며, 한 번도 염색 안했다고 자랑스러워하는 그 머리칼을 손으로 훑고는, 웃을 때, 그 웃는 소리가 굉장히 듣기 좋았다. 자신감 넘치는 청량한 웃음소리이기도 했지만, 또 좀 바보 같고 어린애 같은 흐흐흐. 이기도 했다. 그녀의 눈을 보면서 이야기하고 서 있던 그 짧은 시간 동안, 복잡하고 골치 아픈 세상에서, 여기는 여전히 밝고 신나게 걸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그처럼 들었던 것이다.

"그래, 다음에 또 보자."

며 마지막으로 손을 흔드는 그녀와 눈이 딱 마주치고 자리에서 돌아서고 나서는, 그야말로 나는 한동안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한 삼일밤을 그녀가 나오는 꿈만 달아서 꾼 나는 뭔가 조치를 취해야 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나서 취한 일련의 조치들은 소위 말하는 외교적 수사를 넘어서 현실적 영향권의 폭을 넓히는 발빠른 행보로 진전되었으며, 그 결과, 그로부터 2개월 후인 "태풍내습기"가 되자, 그녀와 나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같이 만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 만남은 육개월 정도 이어졌다. 그녀의 손을 잡고 햇빛이 사이사이로 바람을 따라 들어오는 여름 가로수길을 걸을 때, 더위를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좀 눈이 부셔서 얼굴을 살짝 찡그리고 있었다. 그 때 그녀의 그 옆모습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나는 이 잠깐 동안, 사람을 쉬게 하는 느낌이 드는 여름바람이, 아주 편안한 기나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내 삶에 이런 좋은 시간이, 그리고 이렇게 좋은 그녀가 내 곁에 얼마나 오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도 잠깐 했다.

나는 그 때, 내가 기상청에서 일하고 박사학위를 딴다고 설치고 돌아다니다가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나앉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자주했다. 그럼 갑자기 나이만 가득 먹은 실업자가 되겠지. 그럼 이제 다시 처음부터 어디 연구비 남는 대학의 연구보조원자리나 뒤지고 다녀야 하지는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과연 그 때도 그녀가 내 곁에 있어 줄까.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그걸 도무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과학인재육성사업의 핵심역량인재후보로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는 학생이었다. 어영부영하다가 운이 좋아 덥석 그 돈자루를 움켜잡은 학생들은 그녀말고도 꽤 있었지만, 그녀는 그뿐만 아니라 실제로 실력도 엄청난 학생이었다.

내가 기상청의 국지기상도 분석에 끙끙대고 있을 무렵에, 그녀는 벌써 성층권 난기류에 관한 논문을 몇 편씩 완성한 후였고, 내가 덜덜 떨면서 겨우겨우 교수님들 앞에서 과제발표를 할 때, 그녀는 캘리포니아의 어느 리조트에서, 유창한 영어로 지구 자기장 격변에 대해 미국 공군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의 자부심과 자존심은 굉장했다.

그런 그녀가 삐끗 잘못해서 내가 퇴물이 되면 나를 거들떠 보기나 할까? 나는 그게 굉장히 불안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한 번 만날 때 마다, 두 배씩 더 일하는데 노력을 퍼붓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지수함수의 기하급수적 확장은 당연히 말도 못하게 무서운 것이어서, 그녀와 만난지 한두달쯤이 지나자 나는 일주일 내내 깨어있는 시간과 꿈꾸는 시간 동안 항상 대기순환과 태양복사만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 내가 삶의 함정에 빠져서 징징거리게 될 때, 그녀는.

"바로 그럴 때 내가 출동하는 거야."

라고 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정이 든 두 사람의 관계란 것은, 한 사람의 성공전선이 나자빠져서 툴툴거린다고, 한심하게 여기고 부끄러워하며 짜증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다시 힘을 얻도록 용기를 북돋워 주는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업에 발목이 접질려져 두려움에 질려 울고 싶을 때, 옆에서 그래도 항상 내편에서 든든하게, 내가 아직 저력이 있다고 말해 주는게 그녀 자신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왼손으로 앤초비 피자 한조각을 뜯어 먹으면서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이상하게 나는 그녀의 그런 말을 듣고 나자, 더 미친듯이 공부와 일에 매달렸다. 아마도 처음 내 넋을 잃게 한 그녀의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그녀와 나 사이에는 꽤 먼 마음의 거리가 있었는지 싶기도 하다.

그렇게 일에 미친 시절, 지하철 2호선의 막나가는 아침시간에 태양광 스펙트럼에 따른 성층권 흡수율 따위를 계산하고 있는 사람은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나뿐이었을 거라고 장담한다. 나는 조그마한 메모지 한 장과 펜을 들고 계산을 했으며, 새로운 생각이 떠오를 때 마다 그 때 그 때 말로 중얼중얼해서 녹음했다. 처음에는 옛날 텔레비전 시리즈의 명탐정 같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러고 돌아다니다가 가만 내 꼴을 보니 그냥 맛간 놈 같았다.

어이없게도 그러다가 나는 한 두어번 그녀와 대판 싸웠고, 메모지 계산과 그녀의 손을 잡고 걸을 권리 사이에서 정신 제대로 못 차리고 왔다갔다 했다. 그리고는 어느 날 그녀에게 잠시 헤어져 있자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 그게 아마 그녀의 자존심에 다이너마이트를 던졌을 것이다. - 그 "잠시"가 지나자, 그녀는 나 대신 세상에서 두 번째로 한심해 보이라면 서러울 만큼 한심하게 생긴, 무슨 턱수염을 기른 비리비리한 놈과 같이 다니고 있었다. (참고사항: 따라서 오랜만에 내 앞에서 일 관계로 누군가를 소개하려 한다면 무조건 턱수염 없는 사람을 소개하라. 아직까지도 나는 그 녀석의 그 비열한 얼굴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일주일에 두 번 그녀를 만나는 시간이 없어진 충격은 실로 막대했다. 나는 괴로운 마음에 사로잡혀 괜히 그녀와 자주 걷던 길, 반경 5백미터 이내에 접근하지 못했고, 한동안은 연구과제에서 그녀가 연구하던 분야의 이야기 용어만 몇 마디씩 나와도 괜히 그녀 생각에 논문 읽기를 멈추곤 했다. 나는 최대한 그녀와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했다.

빛나는 경력으로 박사학위를 따고 교수 자리를 노리고 있던 꿈은 참으로 허망한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대충 기상청 쪽 일이 끝나는 대로, 한 외국 항공사의 기술직으로 취직해버렸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보란 듯이 온갖 아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괜히 고별 파티를 하고는 싱가폴 지점으로 날아와 버렸던 것이다.

일년 내내 여름이었던 그 나라에서 몇 년을 보내고 한국에 돌아와보니, 역시 시간이 가장 좋은 약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무렵이 되자 나름대로 그녀에 대한 번뇌 없이 다시 적응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싱가폴에서 했던 일들은 성과가 나쁘지 않게 풀려 나갔고, 또 무엇보다, 그녀와 만나던 반년 동안 온몸에 베었던 일중독자 습관이 그 때까지도 계속 남아있었기 때문에, 내 일은 진행 경과가 좋았다. 곧 나는 아는 선배 하나, 총애하는 상사 한 명 없는 이 업계 종사자치고는, 꽤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개미처럼 일하다 보니, 나름대로 통장에는 잔고가 쌓여갔고, 대학 선배에게 소개 받은 한 아가씨와 만나다가 여유로운 마음으로 청혼했던 것이 작년 연말이었다.

그런 상태의 나에게, 이제 바람처럼 등장한 또 하나의 여인이 있었으니, 이 여인의 바람은 태풍내습기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고 있던 나에게 사라, 셀마와 매미를 다 합친 만큼의 충격과 공포를 주었다. 이 여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나와 키 차이가 일백 센티미터가 넘게 나고, 나이 차이는 20년이 넘어가는, 아직 한국어 구사가 자유스럽지 못한, 학위라고는 내수유치원의 종이접기반 경력이 전부인 사람이다. 옛 그녀가 낳은, 그녀와 나의 딸, 이원이었다.

복지과 직원과 보호시설 담당자인 어떤 아주머니가 나에게 아이 심리상태와 나의 법적 의무에 대해서 굉장히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나는 "예", "아니오", "그래요", "그렇군요" 로 꼬박꼬박 대답하긴 했지만, 무슨 말인지 도무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도대체 그녀가 언제 어떻게 아이를 낳았고, 왜 그걸 나에게 이야기 하지 않았는지, 그 생각만 했다.

이원. 그녀와 내가 언제 농담으로 아이가 생기면 이런 이름은 어떻겠는가 했던 이야기에서 나왔던 이름이었다. 복지과에서는 아이는 보호시설에 법원심리가 끝날 때까지 있어도 되고, 구청의 관리감찰하에, 일단 집에 데려가도 된다고 했다.

이상하게 내 눈에 그곳의 파스텔톤 페인트칠이 굉장히 우울해 보였기 때문에, 나는 즉시 이원이는 내가 데려가겠다고 했다.

나는 이원이의 손을 잡았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의 손 중에서 가장 작은 손이 내 손에 잡혔다. 갑자기 내가 손을 잡자 이원이는 좀 놀라는 것 같았지만, 내 손이며 팔이 너무 커서 뭐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나는 이원이의 손이 따뜻한 것을 느끼는 순간, - 나도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보편적으로 어린 아이들의 손은 굉장히 따뜻하다 - 갑자기 이상하게 뭉클하고, 울컥하고, 싸아해서, 눈물이 그렁그렁하려고 했다.

"나랑 집에 가자."
"어, 그럼 우리집에 다시 가는 거예요?"

이원이가 처음으로 나에게 말했다. 다섯 살짜리 치고는 말이 똑똑했다. 그렇지만 역시 다섯 살짜리 같은 방방뛰는 말투도 아니었다. 너무 얌전했고, 조금 겁먹은 거 같기도 했다.

"아니, 옛날 집 말고, 내 집. 새 집에. 여기보다는 더 살기 좋을 거 같거덩."

이원이는 별 말도 없이 내 말을 잘 들었다. 옷가지를 넣은 짐가방 하나와 분홍색 곰인형 하나를 챙겼다. 나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일단 하늘이 트인 밖에 나가서 바람을 좀 쐬고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하고, 바삐 이원이와 함께 구청 밖으로 걸어 나왔다.

세종로의 넓다란 길에 서 있는데, 밖에 나왔지만 막막한 느낌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나는 이원이를 보고 말했다.

"내가 어디 잠깐 앉아서 홍차라도 한 잔 마시면서 혼란한 정신을 좀 다잡아야겠다. 좀 같이 가주라...... 어...... 넌 아이스크림 사줄까?"
"나 아이스크림 별로 안좋아 하는데."
"우유는 먹냐?"
"우유."

우유는 먹는다는 말인지 아니라는 말인지. 우유가 어쨌다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눈에 보이는 데로 보다 보니 일단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아예, 저...... 뭐 홍차 종류는 없나요?"
"예?"

항상 스타벅스에서 홍차 이야기를 하면, 종업원들은 저런 목소리로 "예?" 하지. 또 깜빡했다. 뭐 자기들 메뉴를 자기가 한 번 유심히 읽어 보고는 뭐라고 자기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한다.

"그냥, 아이스티 한 잔 주시고요. 우유도 한잔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아이스티 한 잔하고, 우유 하나 주문하셨구요~"

"하셨"다음에 "구"에서 기묘하게 억양을 높일 때 나는 이원이를 다시 한 번 쳐다보고 말을 덧붙였다.

"아 참, 우유는 너무 뜨겁게 하지 말아주세요."

어릴 때 따뜻한 우유 마시다가 입술이나 혀나 입천장 데면 굉장히 싫었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나는 머릿속을 웅웅하게 하는 소란스러운 스타벅스 중앙자리를 피해서, 그나마 가장 조용할 것 같은 자리에 자리를 잡고, 이원이와 마주 앉았다. 이원이에게 우유를 손에 쥐어 주었지만,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이 없는지 그냥 가만 들고 만 있었다. 내 아이스티는 한모금 마셔보니 굉장히 무성의하게 만든 것 같았다.

나는 찬찬히 이원이를 들여다보았다. 누가 뭐래도 옛날 그녀의 모습을 많이 닮아서 정말 굉장히 예뻤다. 창가쪽 자리에서 햇볕이 갑자기 들어와서 눈부셔 얼굴을 잠깐 찡그릴 때는, 그 때 그 여름 가로수 아래에서 그녀의 얼굴이 그대로 다시 떠오르는 것 같았다. 저 아이가. 내 딸. 내가 저 아이 아버지. 이름은 이원. 머릿속에, 빵집에서 새 빵이 나왔습니다~ 하는 종소리처럼 선명하게 계속 딸랑딸랑 그런 말들이 울렸다.

이원이는 그녀를 많이 닮았지만, 속눈썹이나 조그마한 손의 모양 같은 것은 또 나를 닮기도 한 것 같았다. 한쪽 눈을 조금 더 크게 뜨는 모습은 정말 나랑 비슷했다. 이원이의 그런 모습은 이 아이의 얼굴을 아주 순하고 착해 보이게 했다. 너무 조용한 모습이 굉장히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또 그 조그마한 것이 당당하면서도 똑똑한, 그녀와 똑 같은 눈동자로 세상을 쳐다 보고 있는 것을 보니, 안심이 되고 좀 자랑스럽기도 했다.

이원이는 태어난지 19일째 되던 날, 서울시 국회의원인 심 선생 부부의 양녀로 입양되었다고 한다. 다소 대외선전적인 면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심의원은 모범적으로 세 명의 아이들을 입양해서 잘 키우고 있었고, 그것으로 명망도 높은 사람이었다. 아마 좋은 곳에 이원이를 보내려고 그녀가 백방으로 노력한 모양이었다. 심의원은 막내딸로 이원이를 받아들였고, 생부와 생모를 가르쳐 주고는 아이의 이름에 내 성을 그대로 쓰게 하면서 이원이를 키우고 있었다.

이제 다섯 살이 된 이원이의 삶이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 것은, 대통령과 쓸데없이 힘을 겨루던 한 정파가 비틀거리게 되면서부터였다. 거기에 이리저리 잘못 줄을 서다보니 심의원은 입지가 굉장히 이상해져 버렸고, 얼마전 재보궐선거에서 이겨보려고 무리를 한 결과, 불법과 합법의 경계를 너무 위험하게 드나들게 되었다.

결국 심의원과 그 일파는 재보궐선거에서 참패, 대패, 완패했고, 심의원의 불법사안은 한방에 그를 몰락시키기 위해 비밀리에 낱낱이 파헤쳐지게 되었다. 심의원은 마침 그 비밀 수사에 대한 정보를 옛 친구를 통해 긴히 입수했고, 그는 서둘러 모든 걸 접어버리고 온두라스인지 에콰도르인지로 도피해버렸다는 것이다.

결국 심의원에게 명의를 빌려 주어 기업체, 동산,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던 심의원의 가족과 친지들은 줄줄이 구속당했고, 애매해진 이원이는 몇몇 사람들의 집을 거치다가 결국은 구청 복지과에 떨어진 것이었다. 그러자 구청 복지과에서는 아이의 생모와 생부에게 연락을 시도하게 되었고, 그녀와는 연락이 도무지 닿지 않았던 반면, 나와는 연락이 닿았던 것이다.

"곰, 이름도 있냐? 이름이 뭐야."

나는 이원이가 들고 다니는 곰인형을 가리키며 물었다. 뭐라도 말을 좀 시켜보고 싶어서 물었던 것이다. 이원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직 나를 경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두어번 다시 물어보자. 이원이는 그냥 툭 곰인형 이름만 말했다.

아.
이원이 곰인형의 이름은, 나의 이름 이었다.

내가 아이스티를 다 마시고, 이원이는 우유를 두 모금 정도 마시고 평소 좋아하던 서울우유가 아니라는 것에 실망감을 느끼고 나서, 우리 부녀는 스타벅스를 나섰다. 그 커피가게를 나서자 그 밖에는 갖가지 후폭풍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우선 나는 부모님께 이원이 이야기를 해야 했다. 나는 아주 비겁한 수법을 사용했는데, 부모님이 계신 충청도 옥천까지 이원이를 일부러 데려갔던 것이다.

부모님은 깜짝 놀라셨지만, 어여쁜 손녀딸이 어색해 하는 표정으로 내 손을 잡고 서 있는 모습을 보고는 뭔가 많은 감동을 받으신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의외로 부모님은 "저 놈이 저런 비슷한 형식의 대형사고를 왜 하나 안치나 했다"는 식으로, “니놈이 이럴 거 같았어.” 하며 몇 번 한숨을 쉬고는 "그래 뭘 어떻게 도와주랴"로 나오셨다.

어머니께서는 이원이를 옥천에 남겨놓고 서울로 돌아가라고 하셨지만, 어린이 보호시설에서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짐을 챙기던 그 조그만 이원이 생각이 나기에, 이 아이의 "보호자"를 또 바꾸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일단 직장일을 좀 어떻게 해 놓고는 애엄마랑 연락을 해 볼 때까지는 내가 어떻게든 이원이를 데리고 있겠다고 했다.

"애 보는게 그렇게 쉬운 일인 줄 아냐."

어머니는 한사코 만류하셨다. 하지만, 이원이를 보는 일이 아니라도 쉽게 흘러가는 일이 이제부터 뭐가 있을지.

서울에 올라가서 나는 회사 VP와 이야기를 했다. 직업이 기술연구직인지라, 사실 꼭 자주회사에 나올 필요는 없었다. 나는 일단 임시계약을 해서, 일단 1년간은 연봉을 4할만 받으면서 재택근무를 하고 가끔 회의 때만 나오기로 했다. VP가 연봉 절반으로 해주기만 했어도 기분상으로 좀 잘 풀린 듯 할 텐데, 사실 이런 식으로 갑자기 재택근무를 하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인지라, 연봉협상은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다.

다음으로 나는 내 약혼녀에게 이원이 이야기를 했다. 내가 뭔가 설명을 많이 하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선배에 대한 소문이 많아서...... 나는 그래도 선배를 믿었거든요...... 그런데......"

아니, 도대체, "나에 대한 소문" 이라니? 싱가폴에서부터 줄기차게 일밖에 모르고 살아온 내가 무슨 소문에 휘말려 있단 말이냐. 나의 약혼녀에게 나는 그렇게 짧게 파혼을 당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나가다가 다시 돌아와,

"썩은 놈."

한 마디 하더니 나를 두 대 두들겨 팼다. 아주 아팠다.

"씨."

그녀는 짜증을 확 내며 마무리로 나에게 물컵의 물을 확 끼얹어 버렸다. 참 고맙기도 하지.

한편 나는 우선 이원이를 다시 내수유치원에 보내기로 했다. 최근 얼마간 온갖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 굉장히 정신이 없었을 텐데, 그나마 옛날부터 다니던 유치원이라도 다시 다니는게 적응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었다.

유치원 선생님의 증언에 따르면 이원이는 유치원에서 굉장히 활발한 아이였다고 한다. 친구들하고도 잘 놀고, 싸우는 아이들이 있으면 자기가 말려주기도 하고 화해시키기도 한단다. (기특하기도 하지. 이원이는 외교관이 될지도 모른다.) 종이접기반에서도 잘했고, 또 선생님들이 가르쳐주는 노래 같은 것들도 열심히 하는 편이라고 했다.

의원이었던 양아버지의 저택에서 쫓겨나고 여러 곳을 전전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충격을 먹거나 성격이 이상해져서 말수가 너무 적어지지 않을까 나는 조마조마했다. 그렇지만 며칠 계속 유치원 선생님과 접선/조사한 결과. 유치원 안에서 이원이는 여전하다고 했다. 그 조그마한 녀석이 강철 같은 영혼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얼굴에 득의양양한 웃음이 피어 올랐다. 안심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집에서는 너무 조용했다. 잘 기억은 안나지만 내가 식탁보다 키가 작았을 무렵에, 나는 지구의 절반쯤을 파괴해버릴 기세로 온갖 난리를 치며 사방을 헤집고 다녔던 것 같다. 그런데 이원이는 곰인형하고 조용조용히 이야기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게 너무 불안해서, 일부러 이원이에게 자꾸 말을 시키고 뭔가 이원이가 좋아할만한 음식을 구해오려고 설문조사를 하고 그랬는데, 이원이는 나를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원래 나는 난동부리는 아이들을 참 싫어하는 편이었으나, 이원이가 또래 답잖게 너무 조용하자 나는 초조하기도 하고 겁이 나기도 하고 그랬다.

결국 이원이와 나는 싸우면서 친해졌다. 이원이가 곰인형 이름과 내 이름이 같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싸움의 시작이었다. 아마도 이원이의 엄마인 그녀가, 곰인형에 괜히 내 이름을 붙여서는 이원이와 같이 전했던 것 같다. 이원이는 자기가 태어날 무렵부터 항상 동고동락해오던 그 곰인형의 이름이 나와 같다는 사실이 뭔가 탐탁치 않았나 보다.

"아빠, 이름을 바꿔요"

이원이는 내가 개명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비록 지금은 임시직으로 주저 앉았지만, 그래도 나는 다국적 항공사에서 수 명의 A급 팀원들을 이끌고 과제를 진행해나가고 있지 않은가. 그런 사람보다야 주민등록되어 있지도 않고 아무런 경제활동을 하고 있지도 않은 곰인형이 이름을 바꾸는게 훨씬 합리적이다.

"그냥 무난하게 곰식이. 이런거 어떻겠냐. 아니면 경쾌하게 '탕' 이런 이름. 그러니까, 곰탕 이라고 부르는 거야. 어감이 좀 그런가? 아니면 좀 현대적인 느낌이 나게, SK텔렉곰. 이런 것도 좋을 것 같고."

이원이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는 이원이에게 온갖 방식으로 내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수를 써보았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본지 4년여가 지난 이 아이는 타협하려 들지 않았다. 이원이의 입장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그 이름이던 곰인형이 이름을 바꾸는 것보다, 얼마전 자기 앞에 나타나 “내가 니 애비다”했던 내가 이름을 바꾸는게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리하여, 이원이는 가끔 곰인형을 붙들고 내 이름을 - 그러니까 곰인형을 - 부르면서 "배는 안고프니?" "책 읽어 줄까?" 같은 말을 한다. 나는 계속 당하면서도 그럴 때마다 나를 보고 하는 이야기인줄 착각하고 자꾸자꾸 놀라서 "응?" "뭐?" 하면서 대답을 하곤 했다.

애초에 나는 내가 책장을 넣어두던 방을 비우고 거기를 이원이 방으로 만들어 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책장을 다 들어내고 나니, 그 방은 책 냄새가 가득했고, 왠지 먼지구덩이 같이 느껴졌다. 거기다가 좀 습기가 찬 거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햇빛이 별로 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내방을 이원이에게 주고, 내가 책장 대신 그 방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내가 자던 침대는 자리가 좀 높아서 이원이가 올라가기가 약간 힘들었다. 일단 임시로 이원이가 디디고 올라갈 수 있는 쿠션을 하나 가져다 놓았다. 내 방 한쪽 벽면에는 비틀즈의 LP가 주욱 붙어 있었는데, 이원이는 그것을 유심히 바라 보았다.

“이게 Yellow Submarine 앨범인데, 우리나라에서 처음 대량 유통된 비틀즈 앨범이야. 내가 갖고 있는 것도 그 한국발매 판본이지. 여기 보면 폴매카트니 콧수염이 까만색이지? 이게 한국발매 판본 특징이거덩.”

하고 설명을 하는데, 이원이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고 보니,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의 얼굴들과 Beatles For Sale 앨범의 눈빛이 내 어린 딸을 쳐다 보는 게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이 아이가 밤에 잘 때마다 A Day In The Life 의 울리는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모습이 상상되자, 이건 아니다 싶었다.

“별로다 그치?”

내가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데, 이원이는 아주 마음에 있게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그 LP들을 다 떼어내서 어둡고 컴컴한 깊은 상자 한 구석에 넣었다. 매카트니 형님 미안합니다. 제가 그래도 종종 꺼내서 들을께요. 이원이 취향은 잘 모르겠으나, 디즈니 애니메이션 캐릭터들로 그 벽이 채워지거나, 어쩌면 포케몽이나 디지몽의 강아지떼 같은 것들이, 60년대 록큰롤 정신의 보금자리를 장악하게 될 듯 싶었다.

이튿날 이원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왔는데, 온몸에 이상한 두드러기 같은 것이 나 있었다. 나는 질겁을 했다. 세탁기에 확 잡아 돌린 빨래에 쓰인 세제가 문제였다. 평소 미량만 넣어도 강력한 파괴력으로 옷의 때를 말끔히 제거해 주는 명약이어서 잘 쓰는 세제였는데, 이게 어린애 피부에는 아주 안 좋았나 보다.

미안한 마음이 엄습해왔다. 이래서는 당장 내일 이원이가 입을 옷이 없었다. 아무렇게나 대강 집히는데로 옷을 사는 내가 5세 여아 아동복에 대해 일말의 감각을 갖고 있을 리 만무했다. 고민 끝에 나는 근처 대사관에서 일하고 있는 고등학교 선배에게 전화를 해서 도움을 청했다. 내 딸에 대해 언급했을 때 선배는 “뭐?” “뭐라고 다시 한 번 말해봐” 하면서 몇 번 다시 물었고, 그리고 나서는 두 말도 하지 않고, 일이 끝나자마자 교보빌딩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아, 유진 선배 진짜. 진짜 고마워요.”
“야씨, 넌 이게 또 뭔 짓이냐. 하여간 만날 때 마다 황당한 충격을 줘요.”

유진 선배는 대뜸 보자마자 나를 쥐어 박았다. 고등학교 때 같은 동아리였던 유진 선배는 그 때 후배였던 나를 좋아했고, 나도 항상 방긋방긋 웃는 이 선배가 싫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고등학생다운 어설픔으로 그냥그냥 아무 이야기 없이 시간을 보냈고, 꽤 긴 시간이 흐른 지금 선배는 내가 인생의 혼란에 휩싸였을 때마다, 항상 냉철한 한 마디 조언을 남겨주는 멘토가 되어 있었다.

“어, 니가 이원이구나. 야. 너 진짜 이쁘게 생겼다.”

유진 선배는 이원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손을 잡으며 말했다. 최근 만났던 사람 순으로 11명이, 11명 모두, 나를 보자 마자 욕을 한 마디하고, 바로 그 다음에 내 옆에 있는 이원이에게 칭찬을 했던 것 같다.

“애 빨래를 그렇게 아무렇게나 하면 어떡하냐.”
“나도 진짜 놀랬어. 어디로 갈까. 애 옷인데 그래도 좀 좋은 거 사 입혀야 되지 않으까?”
“못난 애비가 괜히 좋은 옷 사주고 양심을 달래려는게지.”
“선배, 쫌.”

유진 선배는 백화점에서 이원이에게 이런 저런 옷들을 골라 주었다. 나는 어릴 때 옷가게에서 어른들이 이거 입어봐라 저거 입어봐라 하는 게 무진장 귀찮았던 것 같은데, 이원이는 별 불평불만이 없었다. 되려, 이원이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며 은근히 패션에 대한 탐구를 하고 있는 듯 하기도 했다. 하기야, 나는 저 나이에 상의는 항상 핫도그 캐첩 같은 것을 묻히고 있었고, 바지는 항상 고기 잡으러 다닌다고 시냇가를 돌아다니다가 어디 진흙구덩이에 빠진 상태였으니.

유진 선배는 전남편이 키우고 있는 아들이 생각나는지, - 생각 안날리가 없을 것이다. – 아주 꼼꼼히 유진이 옷을 챙겼다. 선배는 나는 잘 모르는, 옷감에 뭐가 몇 퍼센트가 들었냐, 땀이 차면 뭐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도 매장 직원에게 세세하게 캐 물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가을에 일본 학회에 가서 발표할 때 입을 양복 정장을 살 돈을 전부 풀어서 이원이 옷들을 샀다.

“저녁 먹어요. 내가 그 때 선배랑 맛있게 먹었던 양고기 또 사주께.”
“애가 그걸 먹냐?”
“예?”
“이원아. 이원이는 뭐 좋아해?”

이원이는 그냥 선배를 쳐다보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얘, 뭐 좋아하니?”
“글쎄… 그게…”
“넌 무슨 애아빠가 돼가지고 애가 뭐 잘먹는지도 모르냐?”

아무래도 오늘은 면박의 연속이었다. 뭘 먹을지 고민도 할 겸, 그리고 좀 더 배가 고플 때까지 기다릴 겸 해서, 우리는 일단 덕수궁을 거닐면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해질녘의 덕수궁은 조용하면서도 또 활기에 차 있었다. 우리는 석조전 앞 분수대 앞에 앉았다. 이원이는 분수대 앞으로 가서 분수 물에 손을 씻고 있었다.

“어쩌냐… 일단은 걔랑 어떻게 연락이 닿아야 될텐데.”
“그게… 좀 알아보니까 이원이 낳고 얼마 안 돼서 유학 나갔다나 봐요.”
“이메일도 있고 인터넷도 있는데 그래도 찾아보면 연락이 되지 않을까.”
“몰라요. 아마 일부러 연락을 다 끊은 것 같아요.”
“에휴… 걔도 좀 마음 고생이 심했겠냐.”
“……”

저절로 한 숨이 나왔다. 애써 항상 상상을 피하고 있는 장면이, 이원이를 낳을 무렵에 고민하고 괴로워 하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내 마음속에서 항상 옛날 경쾌한 자신감의 상징이던 그녀가 혼자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남에게 맡기기까지의 과정은, 그 자세한 상황은 전혀 짐작할 수 없었지만, 굉장한 죄책감 무더기로 다가왔다.

이원이는 손을 다 씻고 나자, 손수건을 꺼내서 손을 정성스레 닦더니, 이제는 다시 얼굴을 씻고 있었다. 조그마한 손으로 “푸, 푸” 소리를 내면서 얼굴에 물을 묻히는데, 허리를 많이 굽혀서 새로 산 옷에 물이 튀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주변에 있는 아이들 중에 단연 제일 귀엽고 예쁜 아이였다.

“넌…… 무슨…… 이원이 태어날 때 그때 넌 뭐하고 있었냐?”
“싱가폴 있을 때지 싶은데…… 솔직히 나도 잘 이해가 안가요. 나한테 연락하기 어렵지 않았거든요. 그때까지만 해도 핸드폰 전화번호니, 메일주소니 다 유지하고 있었고……”
“너 씨, 또 개랑 헤어질 때 또 막 할말 못할 말 막한 거 아냐?”
“아녜요. 절대 아녜요.”
“니가 니가 가끔 막말 하는 걸 알긴 아냐?”
“그때는 아니었어요. 내가 걔를 얼마나 좋아했는데요.”

결국 우리는 굉장히 달콤한 푸딩을 주는 프랑스 식당에 가서 무슨 이름 복잡한 감자 요리를 먹었다. 이원이도, 유진 선배도 아주 만족스러워 했다. 나는 “무슨 감자 으깬 것의 값이 이모양이냐” 하는 생각에 안 만족스러워 했다.

유진 선배와 이원이 옷을 산 다음날, 나는 그녀에 대한 추적을 좀 새로운 각도로 일신하여 추진해 나가기로 했다. 우선 오랫동안 항공사 근무를 하느라 잊고 있었지만, 모든 과학 검색의 첫발은 NDSL이요, 두번째 발은 SciFinder 아니던가. 나는 지난 몇 년간 그녀가 출판했을 논문을 학술지에서 주욱 검색해보기로 했다.

이니셜이 흔한 이름이었기에, 검색 된 논문은 굉장히 많았다. 한국 사람뿐만 아니라, 비슷한 발음의 중국 사람 논문들이 대거 검색되어서 너무 양이 많았다.

나는 주로 저녁마다 이원이에게 줄 사과를 깎는 등의 일을 하면서, 그 논문들을 하나하나 차곡차곡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원래 사과는 그냥 물에 씻어서 껍질째 먹곤 했는데, 애한테 그 농약 덩어리를 먹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요즘에는 꼬박꼬박 깎아서 먹곤 했다. 사과 깎는데 별로 익숙하지도 않은데 괜히 눈으로 논문을 읽으면서 손을 움직이다가 손을 다친 일도 몇 번 겪었다.

한 스무편쯤의 논문을 논문 주제의 분류와 연구 성과의 수준별로 정리해나가자, 대강 내가 찾고 있는 그녀가, 그 많은 동명 이인 중에 누구인지 가닥이 잡혀나가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이 번에는 주제를 좁혀서 검색을 다시 했고, 그 결과를 찬찬히 살펴 보면서, 메모지에 저자들의 소속기관과 연구가 진행된 연구소의 위치를 하나 둘 체크해 나갔다. 그렇게 찾아보니, 대체로 그녀의 논문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논문들을 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걸 보니, 한국을 떠난 뒤로 그녀의 연구는 그야말로 탄탄대로를 달리며 일취월장하였고, 지금은, 나 따위 어줍잖은 과학자에 비하여, 저 하늘의 별처럼 높은 곳에 올라가 있었다.

한편 이원이와 나와의 관계도 차츰 좋아졌다. 나는 어린애들이 집안이나 도시 구석에만 박혀 있는 것이 참 안타까웠다. 뭔가 자연이 좀 넘쳐나는 그런 곳이 아이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있는 종로 이 동네에는 변변한 어린이 놀이터 하나 없었고, 그나마 나는 이원이를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라도 있는 곳에 데려가고 싶어서, 고궁이나 삼청각 쪽을 같이 산책하곤 했다. 이원이는 그렇게 산책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고, 내가 나무 이름이나 꽃 이름 같은 것을 가르쳐 주면, 나름대로 신기하게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한 번은 새벽 2시쯤에 이런 일도 있었다.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으으음?”

눈을 뜨고 보니, 문앞에 이상한 허연 약 1M 내외의 물체가 유령처럼 거기에 서 있었다. 무슨 외계인 같아서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히이익-”

나는 움찔하여 몸을 돌려 누웠다. 더듬거려서 안경을 쓰고 다시 보니, 그건 곰인형을 들고 흰 잠옷을 입고 있는 이원이었다. 아직 나는 다섯살짜리 아이가 나와 같은 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잠잘때는 깜빡 잊는 것이다.

이원이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눈에 눈물을 글썽글썽하고 있었다.

“왜? 무서운 꿈 꿨냐?”

이원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한 번 훌쩍하는 소리를 냈다. 나는 결국 책장을 놓을 곳이 없어서 책장과 같이 이 방에 기거하고 었었다. 그리하여 덩치가 좀 큰 탓에 자리가 부족해서 방에서 대각선으로 누워 자는 형편이었다.

“니 방으로 가자. 내가 재워 주께.”

이원이는 엄청나게 무서운 꿈을 꾼 모양으로 내 다리에 찰싹 달라 붙었다. 나는 몽유병 환자처럼 졸린 눈으로 이원이를 붙인채로 비실비실 걸어서, 이원이 방이자, 옛 내방으로 갔다. 이원이는 쿠션을 밟고 폴짝폴짝 뛰어서 침대 위로 올라갔다. 나도 오랜만에 옛날 내 침대에 누웠다.

아…. 악마 편했다. 대각선으로 잘 필요도 없고. 왠지 방의 기온도 적절한 것 같고. 상쾌하고. 자리도 폭신폭신하고. 잠이 절로 오는 거의 겨울잠 자는 곰의 동굴 같은 안락함이었다. 하지만 이 아이가 잠들기 전에 그냥 드르렁드르렁 코골며 잘 수는 또 없었다. 내 어릴 때 기억에 따르면, 무서운 꿈꾸다 깨어나서 부모형제를 찾았을 때, 그들이 먼저 잠들어서 그 숨쉬는 소리만 적막한 가운데 들려오면, 왠지 더 무섭기 때문이었다.

“야, 무서워 할 필요없어. 니네 아부지한테 그런 것들은 꼼짝도 못하거덩.”
“갑자기 걔네들이 막 나와서……”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야. 그건 내가 직접 안 나서고 니 곰인형이 나서도 가볍게 해치울 수 있을 걸. 진짜야. 유진이 아줌마한테 내일 아침에 전화해서 물어봐.”

아무래도 케이블 만화채널에서 독수리오형제를 심야시간에 본 것이 화근이었던 듯 하다. 어젯밤 편에 굉장히 게렉터 유니폼이 무시무시하게 묘사된 장면이 있었다. 애한테 그런 걸 보여줄 이유가 없었는데, 애비가 돼 가지고 내가 재미있다고 빠져서 그걸 끝까지 보고 있었으니. 나는 어릴 때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머리 긴 아줌마 배우들이라면 무조건 사시나무떨 듯 두려워 했건만, 이원이에게는 게렉터의 초록색 스판덱스 옷들이 무섭게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다.

나는 이원이가 뭘 좋아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이원이는 학용품을 아주 좋아했다. 학용품에 그려진 갖가지 캐릭터들도 재미나 보인다고 생각했고, 이원이는 알록달록한 색연필들이 말끔하게 손질되어서 자기가 써 주기를 기다리며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그 모습 자체를 아주 좋아하는 것 같았다.

대형 할인 매장을 찾으면 항상 맥주 판매대를 지나치지 못하던 나는, 이원이 덕분에 대신 꼭 공책이나 스케치북 같은 것을 하나씩 사게 되었다. 이원이는 그 때만큼은 나이에 맞지 않게 꽤 심각한 표정으로 곰돌이푸우가 그려진 제품과 피터 더 래빗이 그려진 제품 사이에서 꼼꼼히 내부를 이리저리 살피며 고민하곤 했다.

그리하여 이원이가 24색 크레파스를 샀을 때, 나는 갑자기 다시 공포감을 느꼈다. 이원이는 이번에는 피터 더 래빗을 골랐는데, 그 크레파스로 진지하게 몇몇 작품들을 제작해 나갔다. 물론 내 딸이 그림을 그리는게 무슨 공포감의 원인이랴. 문제는 그 모습을 보자, 나는 여섯살이 되면, 유치원에서 엄마 얼굴 그리기를 한다는 게 생각이 났던 것이다.

그건 안된다. 그건 60년대 영화에서부터 줄기차게 울궈먹던, 애 마음에 상처주기 장면 아닌가. 나는 옛날 그녀의 그 밝고 환한 웃는 얼굴 속에 아직까지 영혼의 한 부분이 잠식당해 있는 상태지만, 이원이는 자기랑 꼭 닮은 그녀의 그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않은가. 찾아보면 대학교 졸업 앨범에 사진이 하나 있긴 하겠지만, 그건 사진도 좀 이상하게 나왔거니와 그런식으로 엄마 얼굴을 가르쳐 준다고 해서, “자~ 오늘은 엄마 얼굴 그리는 시간이예요. 어머, 이원이는 왜 아무것도 안 그리고 있니?” 하는 그 장면의 강도가 좀 더 완화될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논문 추적 작업에 한층 더 박차를 가했다. 아니, 나는 아예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 예전에는 구글로 검색을 하거나 E-mail로 답을 구하던 것들을 왠만하면 그냥 시계보고 여기저기에 국제전화를 해대면서 해결했다. 나는 하루에도 열두번씩,

“아, 데이빗, 플리즈 콜 오아 이메일 미-“

하면서 밤을 지새우곤 했다.

결국 결론은 그녀가 최근 호주 다윈에 있는 한 연구소로 자리를 옮겼을 것이라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한가지 안타까웠던 것은, 왜인지 이 연구소에서는 그녀의 신상을 공개하기를 꺼려했고, 구체적인 증빙서류가 확인되기 전까지는 아무런 사항도 확인해 줄 수 없다는 이야기만 반복했다는 점이다. 그녀 정도 되는 연구원이면, 오히려 떠들썩하게 이름을 광고할 법도 한데, 이상하게 최근 근황을 공개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다시 구청 복지과를 찾아 이원이에 대한 서류를 잔뜩 뽑고, 번역사무소에 가서 영어로 번역한 뒤에 공증까지 받아서 서류를 잔뜩 만들었다. 항공사 직원이었던 나는 그동안 회사에서 적립해두었던 포인트를 털어 과감한 행보를 내딛기로 결심했고, 이원이와 나. 우리 부녀는 호주로 가는 비행기표를 샀다.

엄마를 만나러 지구 반대편 남반구로 날아간다는 이야기를 하자, 이원이는 오랜만에 처음 보여주었던 그 지나치게 얌전하고 조용하고 좀 겁먹은 것 같은 표정을 다시 지었다. 그리고 그 때 들고 나왔던 그 가방에 나와 같이 다시 짐을 쌌다.

“잘 해. 또 이상하게 오바하지 말고.”
“알았어요.”
“제발 좀 걔 입장에서 생각하고.”
“알았다니까요.”

호주로 떠나기 전날 밤에, 유진 선배는 내게 전화를 해서 몇 번이고 주의사항을 강조해 주었다.

이원이는 다음날 새벽 아주 일찍 일어나서, 또 내 방으로 왔다. 그 모습을 보자, 이번에는 나도 금새 잠이 달아났다.

“그래, 엄마 보러 가야지.”

그리하여 우리는 일어난 김에 그냥 길을 나섰다. 이원이와 나와 이원이의 곰은, 이른 새벽, 아직 공기가 차가운 가운데, 공항 버스에 올랐다.





2.

이원이가 기내식으로 준 빵을 잘 먹지 못했다는 것만 빼면 다윈까지 오는 길은 무난했다. 우리 회사 승무원들은 대체로 좀 불친절한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 비행기에서는 이원이가 화장실을 사용할 때 아주 친절하게 잘 도와 주었다. 많이 고마웠다.

비행기 안에서 이원이는 창가쪽에 앉고 나는 통로 쪽에 앉아 있었다. 잠을 자고 있는 이원이의 모습 뒤 배경으로, 비행기의 동그란 창문과, 창밖에 펼쳐진 파란 하늘과, 흰 구름들이 눈에 들어왔다. 조그만 코로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하면서 자고 있는 이원이는 정말 천사 같아 보였다.

이원이는 지난 밤에 설레서 잠을 잘 못 잤는지, 비행기 안에서는 그렇게 줄곧 자기만 했다. 오히려 내가 문제였다. 나는 별별 생각과 상상에 마음이 불안의 극을 달렸다. 마침 음악을 들으려고 헤드폰을 썼더니, 옛날 그녀와 자주 같이 듣던 스티비 원더 노래가 나왔다. 입에서 아아아… 하는 탄식이 막 나올 것 같았다.

내가 싱가폴로 도망을 가고 정신 없이 일을 하느라 묻혀 있긴 했지만, 나는 사실 아직도 그녀를 이만큼이나 사랑하고 있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힘들게 이원이를 떼어 놓고, 그래도 국회의원 중에서도 반듯한 사람에게 보냈다고 자기 마음을 달래면서 겨우겨우 마음을 다져놓고 있었을 텐데. 그녀에게 어떻게 이원이가 지금은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쪽배에” 노래 짝짜꿍 1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키만 싱겁게 큰 나에게 맡겨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할 것인가.

결론적으로 나는 잠도 별로 자지 못하고, 만리타지에서 수년 만에 그녀를 만나는데 대한 마음의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엄마에게 지금 이원이의 모습을 어떻게 보여주어야 할 지에 대해서 계획도 세우지 못한 채, 다윈에 착륙할 때까지 그야말로 전전반측했다.

다윈은 지독하게 햇살이 강한 곳이었다. 그곳의 여기저기를 찾아 다니면서 그녀에 대한 소식을 추적한 첫 날, 잘못해서 이원이는 일사병에 걸릴 뻔 했다. 그 어린 것이 그래도 엄마를 만나겠다고 투정도 부리지 않고 고분고분 나를 따라 계속 아무 말 없이 걸었다. 저녁에 호텔에서 이원이를 씻길 때, 빨갛게 부어 오른 그 작은 발을 보자, 나는 솔직히 말하면, 안들키게 살짝 울었다.

호주에 와 있는 한 대학원 동기의 도움으로 나는 이원이와 함께 연구소까지 찾아 갈 수 있게 되었다. 연구소에서는 내가 제출하는 출생증명서와 입양각서, 친자확인 증명서 같은 것들을 꼼꼼히 확인하고 나서, 결국 그녀의 기록을 내어 주었다.

그녀가 맞았다. 그녀는 증명사진 특유의 있는 듯 없는 듯 엷은 웃음을 띈 얼굴로 서류 위에 붙어 있었다. 언제 찍은 사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그 밝은 느낌만은 여전해 보였다.

“아빠. 손 아파...”

나도 모르게 이원이의 손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꽉 들어갔던 것이다. 나는 갑자기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막 말도 못하게 휘몰아쳐 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최고 대우를 받는 수석 연구원이었고, 아직 미혼이었고, 다윈의 요트 정박장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Ok. She’s her. Right person. Can I, May I meet her, now? Or I can wait a couple of hours or a few days.”
“Unfortunately, you can’t.”

연구소 사무실에 있는 그 대머리 영감은 그렇게 말했다. 왜? 왜? 이유인 즉슨, 그녀가 지금 이 연구소에, 그리고 다윈에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외부인사에게 공개될 수 없는 과제의 수행 때문에, 하필이면 “벌리헤즈”에 가 있다고, 이 좀 웃기게 생긴 대머리 아저씨는 정말로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절대 안된다고 했는데, 사정사정해서 나는 이원이에게 줄 그녀의 사진을 한 장만 복사해 달라고 했다. 내가 굉장히 끈질기게 매달렸고, 햇빛과 더위에 지친 이원이의 불쌍한 표정도 위력을 발휘해서, 그 대머리 아저씨는 이원이에게 처음으로 엄마 사진을 줄 수 있었다.

이원이는 말없이 그 사진을 한 동안 바라보더니, 가져온 스케치북을 꺼내 그 사이에 끼워 넣었다.

다윈에서 그녀를 찾지 못한 것 때문에 실망이 크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가 제대로 자리잡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서 충분히 기뻤다. 그 대머리 아저씨를 통해서, 적어도 이제는 그녀와 계속 연락은 할 수 있을지 싶었다. 이원이가 유치원에서 배운 영어로,

“Thank you, sir.”

하는 것에 완전히 감동 먹은 이 아저씨는 우리 부녀의 편이 되어서, 자기가 최대한 벌리헤즈 쪽에 말을 잘 해놓을 테니까, 거기 가서 다시 증명 서류들을 늘어 놓으면, 분명히 그녀를 만나게 해 줄 거라고 이야기를 했다.

이원이나 나나 그날 다윈에서 똑같이 실망했다. 하지만 역시 우리 둘은 똑같이 다시 기운을 내서 다윈에서 골드코스트를 향해 날아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골드코스트에는 서퍼스 파라다이스에 우리 회사의 사무실이 하나 있었기 때문에 좀 더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싱가폴에서 나에게 큰 빚을 졌던 동료 하나가 시드니에 있었는데, 그 친구가 그 사무실에 전화를 해준 것이 꽤 힘을 발휘했다.

일단 서퍼스 파라다이스에서 하루를 쉬고, 다윈의 대머리 아저씨가 가르쳐 준 벌리헤즈의 연구소로 향했다.

“OK, I knew you are commin’. And everything is fine. Please wait for a day.”
“For a day?”
“We are different from Darwin. This is a national security area, and we got lots of things to check.”

벌리헤즈 연구소에서 서류를 접수하는 것까지는 일단 일사천리로 들어갔는데, 굉장히 중요한 과제가 진행중이기 때문에 내부 연구원과 접촉을 하려면, 확인을 철저히 해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꼬박 하루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도 실망감이 컸지만, 이원이는 기운이 쭉 빠지는지, 얼굴색이 좀 안 좋아지는 것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어쨌거나, 우리는 여전히 그녀를 만나지 못했고, 그냥 서퍼스 파라다이스로 돌아와야 했다. 그날 오후에 나는 에스플레네이드의 온갖 사무실과 교민 연락시설들을 다 뒤지고 돌아다니면서 하루라도 빨리 그녀를 만날 방법을 찾아 봤지만, 대체로 헛수고였다.

하루. 하루가 연기되었을 뿐인데, 나는 엄청 실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멀리 멀리 그녀를 찾아오고 있는데, 그 옛날 그 때처럼 도무지 그녀와 나와의 거리는 좁혀지지가 않고 있었다. 그 때, 그 여름에 그녀의 손을 잡고 가로수 아래를 걸을 때. 그 때 잡았던 손을 놓아 주는 게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원이가 많이 실망하지 않게 하려고 애써 기분 좋은 모습을 보이려고 했다. 우리는 카빌 애브뉴의 여기저기를 구경하면서 맛난 과일 아이스크림과 기막힌 열대과일 주스를 마셨다. 그리고 이원이는 굉장히 귀엽게 생긴 코알라가 그려진 색연필과 필통도 샀다.

양고기 케밥을 저녁으로 먹고 우리는 길을 걸어서 해변으로 나왔다. (유진 선배에게 한마디: 이원이 양고기 맛있게 잘만 먹는다.) 끝없이 길게 펼쳐진 서퍼스 파라다이스의 해변은 아주 보기 좋았다. 나는 구두를 벗어 들었고, 이원이를 슬리퍼로 갈아신게 했다.

한쪽으로 고층빌딩들이 해안선을 바라보며 줄지어 있는 가운데, 눈부시게 하얀 모래가 저녁 햇살을 반사했다. 파랗고 시원하고 상쾌한 바다에서 높고 넓은 파도가 천천히 밀려와 부서졌다.

이원이의 손을 잡고 같이 맨발로 걸음을 옮겼다. 밀려온 바닷물은 시원하지만 너무 차갑지 않게, 내 발과 작은 이원이 발을 차례로 적셔 주었다. 이곳 바다는 공기의 느낌이 시원했다. 모래는 유난히 곱고 깨끗해서 부드럽게 발바닥에 밟혔다.

이원이는 신기해 하면서 파도가 왔다갔다하는 자기 발을 내려다보며 계속 걷더니, 해변에 있는 불가사리 같은 것을 하나 밟고는 무서워서 저쪽으로 도망갔다가 다시 왔다.

“그건 그냥 불가사리야.”
“어… 안 물어?”
“안 물어. 무서워할 필요 없어.”

이원이는 나랑 자리를 바꿔서 서고는 내 오른손을 자기 왼손으로 잡았다.

해가 지고 있는 바다는 눈부신 오렌지 색으로 그 빛을 반사했다. 원래 내가 해지는 모습과 노을빛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한쪽 치마가 살짝 젖은 이원이와 함께 걷고 있는 그 저녁, 바닷가 모습은 평생에 잊혀지지 않을 만큼 깊게 마음속에 남는 듯 했다.

한참을 걷다가, 이원이는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를 조용히 불렀다.

“고향땅이 여기서 얼마나 되나
푸른 하늘 끝 닿은 저기가 거긴가
아카시아 흰 꽃이 바람에 날리니
고향에도 지금쯤 뻐꾹새 울겠네”

나는, 내일 참으로 오랜만에 그녀를 만나면, 여기에 다시 와서, 그녀와 나와 이원이와 함께 다시 저녁 바닷가를 걸으며 이야기를 해보겠다고 생각을 했다. 어떻게 되든 그렇게 걸으면서 한 번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내 인생에 남을 순간이 될 거라고 상상하면서.

이튿날. 나는 다시 벌리헤즈의 연구소를 찾아 갔다.

“OK. Everything’s so fine. You are confirmed as a family member and you are fully qualified to meet our researcher personally.”
“Thank you. Thank you.”
“But,”

저 발음이 내 엉덩이나 직원 자신의 엉덩이를 가리키는 말은 필시 아닐 것이다. 왠 말이냐.

“But, she is now on a isolated project. Neighter you nor we can contact with her.”
“I can’t understand. What kind of project is it?”
“It is in area of an embargo. We can not announce it till……”
“……”
“Till tomorrow.”
“Then if I wait for one more extra day, then…….”
“Then you can know what project she involves with.”
“Can I meet her then?”
“I can’t say. But as long as the project goes on, you can’t meet her.”
“OK. OK. How long the project will be?”
“We can’t say now. After the embargo……”

나는 그만 짜증이 확 몰아 닥쳤다. 그녀를 하루 더 못 보는 곳은 이 먼 곳까지 찾아와서 한 번 더 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일이 되어도, 그녀를 볼 수 있는 보장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러고 나서 도대체 그녀의 프로젝트라는 것이 끝나는게 언제가 될지 기약조차 할 수가 없다는 것은 심하게 막막한 일이었다.

“We know your situation, and we fully understand your feeling. We can do everything we can do for telling your situation to her. As soon as possible we will provide a sort of measure to communicate you with her.”

내 처지가 불쌍해 보이는지, 연구소 직원은 계속 나와 연락을 취해서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그녀와 통화라도 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지만, 그것은 내 실망한 마음을 별로 달래주지 못했다. 왜, 저 사람은 영어로 이야기를 하는지. 엄마를 만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왜 내 입으로 다시 통역해서 이원이에게 한 번 더 들려줘야 하느냔 말이다.

나는 내 연락처를 직원에게 남기고는, 완전히 풀이 죽어, 그 길로 쿨랑가타 공항으로 향해서 시드니로 가는 비행기표를 끊었다. 이제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는 수 밖에 없었다.

그 날 쿨랑가타 공항에서 우리는 저녁으로 맥도날드의 치킨 샐러드를 먹었다. 평소 항상 좋은 식성으로 음식을 잘 먹어치우던 나는 아무 입맛도 없어서 그냥 플라스틱 포크로 풀조각들을 쿡쿡 찔러댈 뿐이었다. 맛, 하.나.도. 없었다.

그러고 있자니, 이원이가 내가 불쌍해 보이는지.

“아빠, 이거 먹어.”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방울 토마토를 하나 골라 주었다.

나는 허리를 숙여 이원이의 머리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이원이는 얼굴을 좀 찡그리며 손을 머리에 가져갔다. 아무래도 입에 샐러드 드레싱 묻었던 것이 이원이 머리칼에 묻었지 싶다. 나는 기운차리고, 힘 냅니다. 하고 속으로 두 번 외쳤다. 아무렴. 저 악명 높은 싱가폴 지사의 일중독자 엔지니어 아니었던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아빠가 되겠다는데, 누가 나를 막겠는가.

시드니에 와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사고는, 이원이와 나는 호주에서 마지막 밤을 오페라 하우스 앞의 야외 식당에서 보낼 계획을 세웠다. 오페라 하우스에서 같이 좋은 공연을 볼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았는데, 그 날의 상연작은 푸치니의 나비 부인이었다. 이원이가 지겨워 할 것 같기도 했지만, 그녀를 찾느라 다섯 살짜리 아이와 함께 세상을 뒤지고 있는 내가 보면 또 정신을 못 차릴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시드니에서는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만족할만한 오페라 공연 대신에, 전혀 다른 각도에서 훨씬 더 놀라운 소식이 우리 부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사실 언제 어떻게 시드니를 찾건, 다른 방문자들에게도 항상 마찬가지이겠지만.

시드니에 도착해서 분주한 퀸 빅토리아 몰을 지나 서큘러 키에 도착하는 동안, 나는 전혀 의외의 방향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그녀에 대해서 알게 되었던 것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그녀에 대해, 그것도 그렇게 깜짝 놀랄 만한 상황으로 그녀 소식을 알게 되자 나는 꼭 꿈을 꾸는 기분이 된 것 같았다.

“이원아, 잘 하면, 엄마 얼굴은 어떻게 한 번 오늘 밤에 볼 수 있을 거 같다.”
“정말?”
“엄마가 너무 멀리 있어서 직접은 못 볼거 같고……”

나는 오페라 하우스 계단에 앉아서 이원이와 핫도그를 먹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오페라 하우스 계단에서 서큘러키의 유람선들을 보면서 햇살을 받는 일은 여유롭고도 즐겁다. 나는 어린애처럼 들떠서 말하고 있었고. 이원이는 어린애…로서 들떴다. 그렇게 덤벙거리다가 나는 또 핫도그 케첩을 옷에 묻혔고, 이원이는 살짝 나를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녁때 나는 일찌감치 좋은 자리에 자리를 잡고, 이원이와 함께 편안하게 마지막 저녁을 들었다. 조용하고도 흥겨운 남미 음악을 연주하는 이 야외 식당은 시드니의 야경과 오페라 하우스의 밤 경치, 그리고 태평양의 모습과 아주 잘 어울렸다. 이원이는 테이블 위에 켜둔 등유 램프를 신기하게 바라 보았다.

“Canción para la sen:orita hermosa.”

세 명의 마리아치 악사들이 그렇게 말하면서 우리 곁에 와서 이원이를 바라보며 음악을 연주해 주었다. 스페인어를 알 길이 없는 나는 무슨 가사인지 알 수 없었지만, 노래는 굉장히 좋았고, 이원이에게도 그랬던지, 역시 방긋 방긋 웃으면서 고개를 까딱까딱하였다.

아홉시가 되었다. 기다리던 시간이었다. 식당에서는 바닷가에 펼쳐 놓았던 스크린에 프로젝터로 뉴스를 틀어주기 시작했다.

“이원아, 저기 봐, 엄마 나왔네.”

이원이는 스케치북을 꺼내서 끼워 두었던 그녀의 사진을 꺼냈다. 뉴스 자료 화면속에 소개된 그녀의 이름과 국적이 소개되었다. 우리가 그토록 찾던 그녀였다. 그녀는 갈색 유니폼을 입고 네 명의 다른 동료와 함께 서 있었다. 곧 그녀는 충격방지용 우주복을 겹쳐 입은 모습으로 우주왕복선 파이어리 피닉스호에 천천히 걸어 들어 갔다. 오늘 아침에 방송된 화면이었다.

“Now, we got the news that Fiery Phoenix successfully get on the Earth orbit. Repeat. Now we got the news that Fiery Phoenix successfully get on the Earth orbit.”

아시아 태평양 협력 우주사업의 우주왕복선 파이어리 피닉스호가 안전히 궤도에 진입했다는 소식을 뉴스 아나운서가 전했다. 그러자 야외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던 사람들 모두는 환호하면서 박수를 쳤다. 일본 사람 두 명, 호주 사람 두 명, 그리고 그녀가 탄 우주선은 벌리헤즈 근처의 우주기지에서 성공적으로 발사되었고, 드디어 순조롭게 궤도 비행에 들어간 것이다.

이원이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이 엄마라니,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나는 텔레비전 화면에 표시된 그림과 숫자들을 보고, 재빨리 조그마한 메모지를 꺼내서 계산을 했다. 나는 이원이 옆으로 갔다.

“저기 하늘에 달 보이지.”
“응.”
“달 옆에 반짝반짝하는 되게 밝은 별 보여?”
“응.”
“저게 엄마야.”

이원이는 뭔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닌게 아니라 곧 뉴스에서도 달 옆에 보이는 밝은 반짝이는 것이 우주왕복선 파이어리 피닉스호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뭐라고 한 마디씩 했다. 이원이는 그 별이 엄마라는 사실을 듣고 한 참 조용하게 있더니. 갑자기 울먹울먹 하다가, 눈물을 쏟으면서 뭉개지는 발음으로 말했다.

“그럼, 그럼… 엄마가 죽은거야?”

이원이는 엉엉 소리를 내어 울었다. 내가 처음 구청 복지과 직원을 찾아가 만났을 때에도 그저 좀 겁먹은 표정으로 조용히 있던 이원이가. 다윈에서 그 뜨거운 햇볕 속에서 발이 퉁퉁 붓도록 걸으면서도 생글생글 웃던 아이가. 어제 저녁에는 나보고 토마토 먹으라고 하던 그 아이가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꺼이꺼이 울고 있었다. 나는 괜시리 눈물이 나서, 나도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아니야. 아냐. 이원아, 그게 아니라, 엄마가 우주비행사라서 우주선을 타고 저기 가 있는 거야. 우주왕복선 궤도는 지구에서 2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거든. 그래서 우주선 모습이 제대로 안보이고 그냥 반짝반짝하는 별처럼 보이는 거야. 그리고 지구 정지궤도는 지구가 도는 속도랑 똑 같아서 우주선이 안 움직이고 가만히 그냥 별처럼 떠 있는 거처럼 보이고.”

이원이는 내가 말하는 동안에도 목놓아 울었다. 나는 이 아이가 이렇게 우는 모습을 보자, 어떻게 보면 좀 우스운 상황인데도 이상하게 자꾸만 눈물이 났다. 내가 한참을 얼르고 달래자, 이원이는 차츰 잦아들면서 울음을 그쳤다. 내 평생 전공분야 이야기를 일반인들에게 하면서 그렇게 기분이 극적이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울음을 그친 이원이는 훌쩍이면서 텔레비전 화면과 밤하늘을 번갈아 보았다.

“엄마는 언제 또 텔레비전에 나와?”
“잠깐만, 잠깐 기다려보자.”

이원이는 훌쩍거리면서 말했다.

“OK, we just set up television communication here, let’s see the heroes and the heroine in Fiery Phoenix.”

앵커가 말하자, 텔레비전 화면은 우주왕복선 안의 승무원들을 비추어 주었다. 처음으로 선장인 호주인 남자가 나왔고, 두 번째로 그녀가 자리를 잡고 화면에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우주왕복선의 승무원들이 나오자, 사람들의 환호성이 다시 한 번 서큘러 키를 온통 채웠다.

“엄마다.”

이원이가 화면을 보고 말했다. 나는 이원이를 무릎 위에 앉히고 그 까만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꼭 끌어 안았다.

우주선에서, 텔레비전 카메라를 보고 손을 흔드는 그녀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데도 여전히, 그 어리고 밝은, 시원한 웃음이 가득한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지금 밤하늘,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어린 딸과 꼭 같이.


-- 2005년 4월 대사관에서
댓글 7
  • No Profile
    mirror 05.05.28 18:51 댓글 수정 삭제
    이 달에도 단평이 늦었습니다.
    기다리신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말씀 올립니다.
  • No Profile
    05.06.01 11:36 댓글 수정 삭제
    ... 여... 영어...;;
  • No Profile
    진아 05.06.03 11:28 댓글 수정 삭제
    곽재식님.. 게시판에서 진아, mirror 중 하나 클릭하셔서 연락 가능한 이메일 주소 쪽지로 보내주세요. ^^
  • No Profile
    왁슘튤람 05.06.23 18:02 댓글 수정 삭제
    Thanks for evaluation, chief, you pointed out all the flaws of my story, my mind was in a big damn hurry to distribute my fundamental message. 평가 감사합니다. 소설의 흥미성이라는 중요한 한 요소를 망각한 채 설파 메시지에만 급급했군요, 그 메시지라는 게 쉽게 재미로 포장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은 둘째로 치고.. 그 결과 이야기 자체보다는 문장력에 치중하게 된 것이고.. 또 x군이 말한 꿈과 소설에서 다루는 꿈과는 논리적 연관성이 없다는 것 외에도 전체적으로 논리성이 부족하지요. 하지만 2학년 7반 아이들과 x군의 character들이 전혀 현실에 있을 법하지 않다는 말씀은 왜 그런 것이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전 아직 고등학생입니다 ; 게다가 내성적인. 그래서 쓰면서도 학교에서 한 번도 사교적이지 못했던 내가 이런 내용을 쓰면 비현실적이 되지 않을까 했는데 혹시 그런 측면에서의 비현실성입니까? 그럼 수고하세요,.
  • No Profile
    mirror 05.07.04 01:42 댓글 수정 삭제
    댓글 확인이 늦었습니다. ^^

    글을 쓸 때 실제 존재하는 걸 모델로 한다고 해서 현실감을 획득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실제 존재하는 걸 모델로 했다면, 상당히 세심하고 깊이 있는 관찰 결과에 따른 묘
    사가 있어야 합니다.
    혹은 아무리 괴팍하거나 특이한 현상을 다룰지라도, 우리가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감성이나 보통 생각할 법한 논리에 맞추어서 펼쳐진 이야기라면 읽는 사람에게 현실성을 가지고 다가올 수 있는 법인데 둘 다 부족했습니다.

    캐릭터가 그다지 입체적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이란 한 가지 면만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요.

    세상은 단면적이지 않고 그중에서도 인간들이나 청소년은 더욱 그럴 텐데, 한 단어로 몽뚱그릴 수 있는 집단이란 존재하지만 그걸로 끝나는 집단이란 실재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때 공통되게 가지고 있던 신조 하나는 바로 '무슨 일이 있건 항상 즐겁고 유쾌하게 생활하자'는 것이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무언의 동의를 서로에게 나타내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거기에 대해서 반감을 드러내거나 하지 않고 1년 동안 정말 참다운 평화가 지속될 수 있었다. 그렇다. 우리 반은 그런 반이었다. 마치 2학년 학생들 중 성격이 지나치게 쾌활하고 낙천적인 학생들은 모두 7반으로 모여들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쾌활하던 아이들이 끼리끼리 모이자 그 정도가 '비정상'이라고 칭해도 좋을 정도로 고조되었다.

    본문중 2학년 7반에 대한 묘사에서 따왔습니다.
    2학년 7반이 그렇게 유쾌할 수 있는 이유,
    예를 들어 "이상하게도 우리는 사이가 좋았다. 그건 그 담임 선생님이 유난히 공부를 강조한 데 대한 반발일지도 몰랐다." 라든가
    그런 분위기를 주도하는 애 몇이 있었는데 걔네들이 영향력도 실력도 막강했다든가
    끝없이 반 전체를 웃기는 익살맞은 애가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구체적인' 이유가 있었다면 좀 덜 비현실적이었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이유를 적지 않으신 건 아니지만, 설득력이 약합니다.
    특별한 이유 없이 그랬다, 라는 건 소설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정말 현실이라면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 밖에 없겠지만요.
    처음에도 쓴 말입니다만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린다고 해서 그것이 소설 속에서 현실감을 획득하게 되는 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야기 전개에 숨어 있는 논리 전개 과정을 다시 뜯어 보고 숙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건필하세요. ^^
  • No Profile
    mirror 05.07.04 08:11 댓글 수정 삭제
    곽재식님께는 "환타지 읽기 Reading Fantasy 중단편선 1" 보내드렸습니다.
  • No Profile
    왁슘튤람 05.07.15 18:49 댓글 수정 삭제
    댓글 감사합니닷~, 저도 확인이 늦었군요. 충고 감사합니다. 앞으로 결과에 앞선 필수적 원인을 독자와 구체성을 위해 기술하려고 노력하겠으며, 넓은 행간을 독자가 알아서 이해하겠지 라는(사실 정확히 서술해도 이해할 것이란 기대를 안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안일한 생각은 버리고 최대한 좁힘과 동시에 논리성 확보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나 저 소설은 그렇게 한다해도 그리 대중적인 작품은 되지 못할 듯 싶습니다, 하하..;
    어쨋든 조언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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