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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t.s 엘리엇의 편지

2004.12.30 00:1012.30

이 달에 가장 눈에 띈 글은 나비 이야기와 엘리엇의 편지였습니다.

t.s 엘리엇의 시는 '중심 제재'라는 시랑, 주인공이 가진 힘에 대한 묘사 같은 부분이 진부하면서도 신선한 느낌이 좋았습니다.
다만 이야기 진행에 개연성이 부족하고 한 주제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깊이가 없기 때문에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중심 제재를 잡는 솜씨가 좋았고 무엇보다 발전 가능성이 엿보였습니다.

나비 이야기는 한 인물의 기구한 운명의 '서막'이고 사건이란 인물이 홀로 떨어지는 것, 그것도 액션이 없이 떨어지는 것뿐인 데다 전체적인 분위기도 매우 정적이라서 지금까지는 매우 좋은데 이게 계속 이어진다면 어떤 모습이 될지 예측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의 세계가 어떤 건지, 아이와 황제의 관계는 어떤 식으로 발전할지가 전혀 안 나왔으니까요.
전체적으로 문장과 서술은 안정되어 있고 글이 깔끔한 동시에, 이 글이 장편 프롤로그라면 그 뒤가 기대되는 두근거림은 안겨 줄 수 있는 글 같습니다만 여기까지, 라는 느낌이었습니다.

선정을 축하드립니다.
요한님은 'mirror' 나 '진아'에게 쪽지로 메일 주소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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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0

  나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잠자리 속에서 이상한 모습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몸이 태아처럼 하나의 기준 점으로 둥글게 말려 있었다. 왜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한참동안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어제 지은 시가 떠올랐다. 그 시의 화자는 나비가 되고싶은 애벌레였다.
  “결국 나비가 되는 3연은 짓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이 모습으로 있었던 것이다. 나비가 되지 못한 모습으로. 애벌레의 모습으로. 이렇게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다. 차디찬 돌 벽에 갇혀서 조그만 창 하나로 바깥을 볼 수밖에 없는. 결국 자유롭지 않는 돌의 껍질에 싸여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는 이 돌 벽을 벗어 날 수 없다.”

  1

  시를 써오면서부터 항상 들어오던 생각이 있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시를 지어도, 그것은 항상 현실의 근사치 밖에 되지 못했다. 현실의 복제품에 다름 아니었다. 항상 현실의 최상이었고, 시는 그것을 따라갔다. 그런데 왜 시를 쓰는 것일까?

  “그거야 현실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을 느낄 수 있잖아.”

  같이 시를 배우던 동문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지만, 난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같은 사물은 같은 느낌을 주기 마련이다. 게다가 현실을 표현하는 시가 현실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동문의 표정은 늘 나를 괴롭혔다. 약간은 환희에 찬 그 미소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면 너는 왜 시를 쓰는데?”

  동문의 질문에 나는 한참이나 머뭇거렸다. 그때까지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엄격한 부모 밑에서 계속 법학공부를 독촉 받다가 결국 집을 나와 선택한 곳이 국문과였고, 자연스럽게 시를 쓰게 되었다. 독일이 미국을 점령한 이후엔 사회 비판적인 의식이 싹터 더욱 불타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왜’라는 질문은 머릿속에 싹트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그게 ‘왜’ 자연스러운 것이었는지도 의문이었다. 아무런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라고 변명하기엔 조금 달랐다. 나는 잊으려 노력한 것이었다.

  “나는 왜 시를 쓰는 것일까?”

  불행하게도 동문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책망하는 듯한 표정 역시 짓지 않았다. 그는 단지 미소를 머금으며, 약간은 시선을 멀리 두고, 속삭였다. 그 속삭임은 바람결에 날아가 버릴 만큼 가벼운 것이었지만, 그 바람은 나를 괴롭게 했다.

  “그것에 대한 답을 알기… …이지 않을까. 그래서 좀더 자유롭게… 하려고…”

  저공비행 하는 비행기 탓에 불행히도 들을 수가 없었다.-또는 듣지 않았을지도-


  2
  깨트림

  내가 깨트린 물건은 지금까지 3개가 있다. 가장 처음 깨트린 것은 아버지가 아끼던 화병이었다. 그 화병은 오래된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했다. 애지중지 아끼던 것이었고, 아버지의 선반 위에 늘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13세의 나에게는 그것은 반항의 수단이 되었다. 아버지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반항을 하지 못했던 나는 소심한 반항으로 화병을 깨트렸다. 화병은 세상이 깨어지는 듯한 소리를 나며 산산조각이 났다. 덜컥 겁이 난 나는 어설프게 넘어지는 흉내를 내어보았지만, 불행히도 그때 아버지는 보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화병을 깨트린 나는 아버지의 눈초리를 그대로 직면해야 했다.
  내 속을 꿰뚫어 볼 듯한 그 눈빛에 한참이나 식은땀을 흘렸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전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독일군이 만든 잠전(潛電)무기가 이런 게 아닐까 하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더욱 겁이 났던 것은 아버지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나는 소심한 반항을 성공-고등학교에 들어가라는 것에 대한 반항이었음에도- 해보지 못한 채, 법과대를 위한 고등학교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학교에서 나는 과학을 곧잘 했다. 물론 법학 쪽은 늘 낙제였다.

  두 번째 깨트린 것은 사진이 들어있는 펜던트였다. 15세 첫사랑의 사진이 고스란히 박혀있었다.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곤 약간의 조롱 기를 담은 채 말했다.

  “날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데?”

  난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고, 별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 당시 유행하던 시를 짓는 풍토는 나를 물들였다. 게다가 법과대쪽과 경쟁의 분위기였던 국문 쪽에 난 자연스레 속해있었다. 그래서 나도 시를 지었다. 약간은 비굴하게 말했다.

  “시를 지어줄 수 있어”

  그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나 내가 시를 읊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약간의 용기를 내어 즉석에서 시를 지어보았다. 그 시의 내용은 지금 와선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흔하고 흔한 연애 시에 다를 바 없었다. 그녀 역시 그렇게 느꼈었나 보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떠났다. 나는 펜던트를 바닥에 팽개쳤고, 펜던트는 산산조각이 났다. 그것이 두 번째였다.

  세 번째는 거울이었다.

  3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시가 현실의 근사치가 아니라, 또 다른 현실이라면? 이라는 생각. 아마도 동문의 그 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에는 현실에선 느끼지 못하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그것을 힘겹게 인정했다. 일단 인정을 하고 나니 쉬웠다. 시는 현실의 근사치가 아니었다. 시는 현실의 복사본이었다. 그것도 데깔꼬마니 마냥 반 접혀서 이상한 모양을 나타내는 그런 복사본. 그래서 시는 현실이 주지 못하는 그 무엇을 준다. 간단한 논리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가 나에게 나타났다.

  게르힐 미륜

  이탈리아계 독일인인 그녀는 집시의 피마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집시의 피에는 오래 전부터 섞여든 마법사의 피가 있었다. 멀린의 열 세 번째 밤의 딸은 집시가 되었다. 그녀는 나의 말을 얌전히 들었다. 밤의 장막이 펼쳐진 들판에서 그녀는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별빛이 쏟아질듯 반짝이며 그녀를 비추었다. 그녀의 얼굴 반에는 화톳불의 붉은 빛이 비쳐 복숭아 빛으로 반짝였다. 그리고 그녀의 작지만 두툼한 입술이 움직였다.

  “당신을 이해해요. 엘리엇”

  그녀는 진정 나를 이해해 주었다. 나는 그녀의 말에 의해 아버지에게 억압받았던 나의 무엇이 해방되는 기분을 느꼈다. 팽팽하게 조여졌던 가슴이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문득 밤의 서늘함이 가슴속에 스며들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연스럽게 입에서 시가 흘러나왔다. 노래가 되었다. 춤이 되었다. 밤이 되었다. 그녀는 나의 노래에게 맞춰 춤을 추웠고, 그리고 밤이 되었다. 시가 되었고, 노래가 되었다. 그녀는 마법사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시라던가, 노래라던가. 현실이라던가, 구분은 무의미해졌다. 그녀를 만나고 난 뒤 난 깨달았다. 그 구분은 정말 펜선 보다 얇았다. 독일인이라던가, 미국인이라던가. 모두 하나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마치 그녀처럼. 그녀의 피에는 미국인의 피도 흐르고 있었다. 동양계 피 역시. 그녀에게 이르면 모든 구분이 무의미해졌다. 나는 깨달았다.

  그녀는 마법사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거울을 깨트렸다. 시가 현실의 반영이었고, 현실이 시를 비춘다면, 나는 그 사이에 놓인 무한거울을 깨트려버렸다. 그것이 내가 세 번째 깨트린 것이었고, 내 인생의 가장 큰 현실-시-이였다.

  4

  손끝에서 황홀하게 피어나는 꽃을 보며 나는 피곤함을 느낄 수가 없었다. 몇 시간째 탈고로 지쳤지만, 금새 개운해졌다. 시가 현실이 되는 것은 마법 같았다. 새벽 또는 황혼 저녁 빛으로 빛나는 황조롱이를 닮은 꽃은 새초롬하게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나는 그 잎새가 그리는 표정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륜은 순수하게 나를 축하해주었다. 솔직히 고백하지만, 그 시를 지으며 미륜의 모습을 상상했었다. 시에서 피어난 꽃이 미륜을 닮은 것은 필연이었다. 그녀는 내가 시를 짓는 곁에 서서 나를 얌전히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가끔씩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으로 내 머리를 쓸었다. 그녀의 손목에 쟁그랑거리는 팔찌에서는 민트향이 났다.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그 행복함은 곧바로 나의 시에 반영되었고, 늘 나의 시에서 태어나는 것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그녀가 떠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5

  미국은 패전했다. 결국 연합전선은 무너지고 말았다. 독일은 과학적인 무기들로 연합전선을 공격해왔고, 물량으로 버티던 연합군 측은 지고 말았다. 독일의 잠전(潛電)무기는 유럽의 습한 날씨에는 굉장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독일의 순수이성주의는 곧 세계적으로 주창되는 가치가 되었다. 그리고 ‘자유’보다는 ‘기준’이 우선시 되었다. 기준이 있다는 것은 선과 구분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싫어했다.
  우려했던 일이었지만, 결국 나에게도 소집명령이 내려졌다. 미국인인 데다가 과학에 소질도 있는 나는 어쩌면 독일인의 실험정신에서 어린양이 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따라오기로 결정했다. 군용트럭에 웅크리고 타던 우리 둘은 앞으로 펼쳐질 회색빛 미래에 대해 두려움에 떨었다. 그래도 그녀는 나보다 의연했다. 떠돌던 그녀의 힘은 나보다 강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 와중에도 미소를 띄며 나에게 시를 지어볼 것을 권했다.

  나는 따스함의 시를 지어 몸을 봄처럼 따스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내가 그 봄에 잠이 들었을 때, 그녀는 꿈처럼 사라져 버렸다. 내가 눈을 비비며 깨어났을 때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절망감에 그녀를 찾아다녔지만, 그녀가 벌써 떠나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었다. 힘이 나지 않았다. 버틸 자신이 나지 않았다. 공장의 굴뚝이 가득히 솟아나 있는 이 곳은 내가 살 곳이 못되리라 생각되었다.

  “그깟 여자 잊어.”

  유럽인이었던 제를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공장기름때가 잔뜩 묻은 아이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공터틈새를 뛰어다녔다. 그러다 나를 발견하고는 나에게 와르르 달려든다. 이미 내 시가 현실이 되는 것을 알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나는 그 아이들을 위해 억지 미소를 지으며 시를 만들었다. 그 시는 장난감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었다. 거짓 희망을 줄뿐이었다. 그래서일까. 그 장난감은 곧 망가졌고 잊혀졌다. 그러자 문득 잊혀졌던 고민이 들었다.

  “나는 왜 시를 쓰는 것일까?”

  동문의 대답을 듣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다. 답을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결국 ‘왜’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었다. 나는 시를 현실로 만들 수는 있지만, ‘왜’라는 질문에는 답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화병의 모양이 문득 생각이 들었다. 굉장히 동양적으로 생긴 화병이었다. 주둥이가 미려하게 올라가 적절하게 멈추어져 있었다. 사람의 모습 같았다. 그리고 아마 그 화병에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긴 선이 몇 줄 그어져 있었고, 꽃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 꽃의 모양이 기억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 꽃을 보며 웃던 기억은 났다. 그 엄격한 아버지도 그 꽃을 보면 미소를 머금곤 했다.

  “나는 왜 시를 쓰는 것일까?”

  “바보”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는 샐쭉하게 혀를 내밀며 말했다.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그런데 아이는 그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주먹을 앙쥐던 아이는 메롱 하고 달아나 버린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피식 웃었다.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나의 처지에 대한 시였다. 점점 말려 들어가는 인생의 고리에 빠져버린 미궁의 탐험자에 대한 시였다. 그러나 나는 그게 나의 현실과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거리는 나의 능력으로 좁혀져 갔다. 나는 점점 빠져나올 수 없는 고리로 자처해서 들어가고 있었다. 나올 수는 없을 것이다.

  “엘리엇.”

  나는 고개를 들었다. 굴뚝 연기 틈으로 비친 햇살이 눈이 부셨다. 뿔테안경의 그는 아버지를 닮았다. 그는 다시 한번 나를 불렀고, 그제야 나는 대답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나에게 물었다.

  “네가 꽃을 만드는 시인인가?”

  어느새 그런 별명이 붙었나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뿔테안경을 쓸어 올리며 다시 물었다. 그는 연신 땀을 흘리고 있었다. 굴뚝연기에 의해 더워진 탓이리라.

  “어떻게 하다 그런 능력을 얻게 되었지?”

  “글쎄요.”

  그가 분명 고위당원일 거라 예상했지만, 예사롭게 대답했다. 오히려 그랬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가로젓었고, 그것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덥군. 이렇게 더운 건, 굴뚝 연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너의 능력은 이해가 되지 않는군. 전혀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말하지 않겠나?”

  “글쎄요. 혹시 이런 말 들어보셨나요?”

  “미카일.”

  “미카일씨는 이런 말 들어보셨나요? 시는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다.”

  미카일은 하늘을 흘깃 올려다보았다. 연기 틈으로 하얀 새가 날아가고 있었다. 하얀 새의 색은 검은 연기에 더욱 두드러졌다. 나 역시 그 새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그래서 미카일의 첫말을 놓쳐버렸다.

  “…거울이란 것이 있다는 거로군.”

  “네?”

  “믿을 수 없어. 이성적으로 불가능해.”

  그는 순수이성주의자였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설명해줄 말이 없어졌다. 마법사하며, 자신과 세상의 거리를 두어 거울을 깨뜨리는 법. 등등. 그는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나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정하지 않으면 이룰 수도 없다는 것을 그는 모른다. 나는 손을 들어 보였다.

  “세상엔 믿을 수 없는 일도 많은 법입니다. 미카일”

  미카일은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유심히 나를 살피는 듯 했다. 나는 아무렴 어떠냐는 심정으로 그의 눈빛을 마주쳤다. 더군다나 이미 희망이던 미륜이 떠나버렸지 않는가. 아. 그래. 나는 미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안되었다. 아무리 떠나버렸지만, 순수이성주의자에게 미륜의 존재는 그들의 사상을 깨는 것이었다. 말하면 안되었다. 한참 나를 보던 미카일은 뿔테안경을 고쳐 썼다.

  “좋아 그렇다고 하지. 그런데 왜 하필 너지?”

  “시인은 왜 시를 쓰는 것일까요?”

  “뭐?”

  “시인은 왜 시를 쓰는 것일까요?”

  “흠. 그거야 시인들이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이겠지.”

  “저도 그러했습니다.”

  나는 슬프게 말했다.

  “저는 시와 세상이 하나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나의 사랑이 그녀에게 닿기를 바랐습니다. 시처럼 자유롭기를 바랐습니다. 글이라는 억압 속에서 자아와 세상의 끈을 끊고 달아나기를 바랐습니다.

  “시를 쓰고 싶었습니다.”

  6
  엘리엇의 편지


  미륜.
  나는 당신을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사방이 막혀진 이 곳에 와서야 나는 용서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곳은 매우 춥습니다. 돌 벽의 차가움은 늘 서슬 퍼렇게 나를 위협합니다. 밖을 지키는 간수는 연신 나에게 재촉합니다. 나의 시가 가진 비밀을 밝히라고 합니다. 하지만 나는 말 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저도 알지 못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나로 하여금 시를 쓰도록 했던 것일까요? 나의 시가 어떻게 현실이 되어갔던 것일까요? 아직도 확실히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문득 생각하기로, 당신이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당신을 이해해요. 엘리엇”

  당신의 그 말이 요즘 꿈에서 늘 들려옵니다. 그러나 또한 떠나갑니다. 목소리가 늘 그렇듯이 바람결에 흩어져버립니다. 당신은 나를 이해했던 것입니다. 내가 했던 말, 내가 했던 생각. 사랑. 인생. 그 모든 것을 당신은 이해했던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미륜. 당신은 진정 나에게 사랑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세상도 그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왜 시인이 시를 쓰는 지. 왜 사람이 살아가는지. 왜 세상에는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일이 일어나는지. 기적이라고 불리는 작은 행운들을. 어느 순간 같은 곳을 보게되는 사랑의 눈맞춤. 또는 입맞춤처럼. 발걸음 같은 행운들을. 그래서 나는 결심합니다.

  시를 쓰자

  이것이 당신에게 보내는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가 될 듯 합니다. 왜냐면 저는 더 이상 구속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한참이나 어려졌지만 곧 3연을 완성할 것입니다. 3연이 완성되면 저는 이곳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작은 기적으로 기억되겠지요.

  밤이 깊어갑니다.
  스치우는 바람이 찹니다.

  더 이상 제 앞에는 벽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벽은 천천히 허물어져 갑니다. 그리고 글자처럼, 시처럼. 변해갑니다. 사라져갑니다. 미륜. 저도 이해합니다. 시가 세상이 되는 것처럼. 세상이 시가 되기도 합니다. 저도 완전히 이해합니다.

  “자유로운 나비는 꿈결처럼 날아갑니다.“

  -당신의 시인 앤디로부터-

  7
  게르힐 미륜

  나비가 날아왔다. 빛 바랜 천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던 그녀는 그 나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비는 곧 빛무리로 깨어지며 시로 변했다. 그녀는 그 시를 들었다. 읽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엘리엇….”

  멀린의 열 세 번째 밤의 딸은 묵념처럼 말했다. 그녀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온전히 밤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낮의 엘리엇과는 함께 할 수 없었다. 자조적인 웃음이 흘러나오며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등위로 나비가 나타난다. 마치 별빛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생겨났다. 그리고 그 나비는 추운 밤하늘을 날았다.

  자유로운 나비는 꿈결처럼 날아갔다.

댓글 3
  • No Profile
    진아 05.01.03 20:04 댓글 수정 삭제
    요한님께.
    게시판에서 작성자 이름 진아나 mirror을 클릭하시면 쪽지쓰기 기능이 나옵니다.
    연락 가능한 메일 주소 보내주세요. ^^
  • No Profile
    로스 05.01.22 09:28 댓글 수정 삭제
    무슨 뜻인지 확실히 모르겠지만 안다면 훨씬 감동적일듯.
  • No Profile
    mirror 05.01.28 21:11 댓글 수정 삭제
    요한님께는 환상문학 걸작 단편선이 보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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