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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청혼

2004.02.27 23:1602.27


이 달 독자 단편은 저번 달과 비슷한 점이 많이 보였습니다.
아마추어에게 흔히 기대하는 신선함이 부족하고
주제를 생각하기 보다는 글에 너무 힘을 주는 면이 많으며
또한 그 힘을 주는 것이 유려하고 아름다워서 그 자체만으로 아름답기보다는
읽어 내려가는 데에 지장을 주는 정도 수준에 그쳐서 오히려 역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잘 쓴 글처럼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jxk160님의 청혼은 이야기가 주제를 향해 모이지 않고 있습니다.
주제를 드러내놓고 말할 필요는 없지만 감을 잡기도 어렵습니다.
청혼이라는 주제를 말할 때에 필요한 이야기에 남자인 '그'가 들어가는지,
이 이야기가 그 두 사람의 이야기일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남습니다.
시점이 계속 바뀌는데 독자가 시점이 변화했다는 사실을 쉽게 알기 어려우며
단지 이야기로만 봐서는 이야기가 어디서 시작하며 어디서 끝나는 지도 불분명합니다.
모든 이야기가 교과서처럼 기승전결이 드러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글이 그저 막연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글에 '무언가'를 담고자 하는 면이 돋보입니다.
건필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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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혼
jxk160 ( sandmice@hanmail.net )



  가게 앞에 개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강아지 넷은 풀려 있고 어미 두 마리만 묶여 있다. 묶인 개들이 눈을 마주치자 짖었다.
  마을버스 정류장 바로 건너편에 있는 가게였다. 개들이 일차선 도로를 막고 있었다. 도로라고 해도 흙길이였다.
  시골은 아니다. 공기 냄새에서 쇳소리가 난다. 그러나 개들의 발 밑에 깔린 흙에서는 핥아보고 싶은 아픔이 있다. 고개를 수그리자 강아지 둘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개들이나 고양이들의 발을 제일 좋아했다.
  고양이는 무엇을 잡으려 할 때 안으로 탁 꺾이는 부드러운 발바닥이 좋고, 개는 조곤조곤 짚는 튼튼하고 큰 발이 좋다. 특히 강아지들의 큰 발이 좋다. 발이 크면 몸도 크게 자라리라.
  개는 크게 짖다가 그가 강아지 둘을 쓰다듬기를 반복하자 입을 다물고, 대신 조금 갈색빛이 도는 눈으로 이쪽을 본다.
  개들과 함께 살았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누가 돌을 던진다.
  어미개가 앉은 채 빤히 바라본다. 눈길 끝에 아이가 있다. 그는 구부정히 앉아서 뒤돌아 본 자세로, 어미개처럼, 아이를 빤히 쳐다본다. 남자아이는 빳빳한 옷을 입고 서서 어느 주차장에서 주운 자갈 몇개를 손 안에서 굴리고 있었다.
  아이와 눈이 마주치자 아이는 고개를 숙인다. “위험하잖니. 내가 맞을 뻔 했잖아?” 그는 부드럽게 달랜다. 아이는 강아지 두마리가 그의 곁을 떠나서 따라오자 소리를 지르면서 발길질을 했다. 강아지 눈이라도 다칠까봐 그는 반쯤 일어서있고 어미개가 잇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강아지들은 아직 순해서 적의가 없었기 때문에 아이는 심술맞게 우월해져 있었다. 아이가 강아지 배때기를 발로 차자 강아지는 제가 잘못한 줄 알고 풀이 죽어서 도망간다. 어미개가 잘잘못을 따지는 눈으로 석수처럼 근엄해진다.
  “하지 마라. 자기보다 약한 걸 괴롭히면 안 된다.” 그가 뻔한 소리를 하는데 아이는 어미개 눈빛에 더 화가 난 것 같다. 묶인 것 앞에 와서 얼쩡거리다가 한번 물릴 뻔 하고는 멀리 가서 돌을 던졌다. 그게 그의 손에 맞았다.
  그는 좀 얼떨떨하고 화가 난다. 어른은 낯모르는 아이가 던진 돌에 손을 맞거나 하는 게 아니다. 아이가 흩뿌린 일의 뒷처리를 맡는 건 부모들의 일이지, 낯모르는 아이와 어른의 관계란 가르치고 배우는 것 뿐이란 말이다. 어미개가 힘없는 자기 어미라도 되는 양 생떼를 부려대는 걸 보고 있자니 그는 문득 패륜의 징후까지 느끼고 말았다. 맙소사, 이건 내가 유치한 거다. 어쨌거나 그는 주의를 주는 게 서른 살이 넘은 자기 의무라고 못 박았다.
  “돌을 함부로 던지면 안 돼. 봐라.” 그가 좀 까진 손등을 보여주면서 타박을 놓았다.
  “그깟 것 밴드 붙이면 되잖아요.”
  “그런 게 아니잖니.” 그는 짐짓 화가 난 척 말했다. “내가 지금 바이올린 케이스 들고 있는 거 안 보이니? 조그만 돌이라도 잘못 맞으면 돌이킬 수 없게 다칠 수가 있단다. 사람 몸은 약해. 내가 바이올린을 켜서 먹고 사는데, 너 때문에 바이올린을 다시 켤 수 없게 되어버렸다면 너는 어쩔거니?”
  “하지만 안 그렇잖아.”
  “네가 어떻게 알아? 봐. 어, 어? 검지 손가락이 전혀 안 움직이네.”
  “공갈치는 거예요?”
  “정말이야, 보라니까.”
  아이는 그의 손을 흘끔흘끔 노려보았다. 그는 이제 어쩔까 싶어 아이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가 말을 이었  다. “장난으로 돌 던졌는데 개구리가 죽는다는 얘기도 있잖니. 지금 말한 건 농담이지만 개들한테도 그러는 거 아니야. 개들 눈에라도 맞았으면...” 아이는 퍼뜩 그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개새끼! 내뱉고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는 허탈해져서 아이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요즘 애들이란!
  강아지 한두마리가 아이 뒷발굼치를 따라 돌았다. 아이가 멈춰서서 저리 가! 할 때 그는 아이 눈매가 붉어져 있는 것을 알았다. 벤츠 한대가 무서운 속도로 흙길을 거슬러 올라왔다.
  그는 개들은 어쨌거나 아이부터 밀어치웠다. 아이는 벽 쪽으로 밀리자 군화발에 밟힌 것처럼 소리를 지르면서 그를 몇 대 때렸다. 아이 손가락들이 정통으로 눈에 들어왔다.



  누나가 침대 옆에서 사과를 깎고 있었다. 누나는 그 후에도 반투명한 오줌통을 한손에 들고 그의 아랫쪽을 책임져주었다.
  먹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고 들었던 얘기만큼이나 병원 밥은 맛이 없었다. 침대를 세워놓고 시간을 보내려고 해도 허리가 아파서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며칠째인가는 남자 한명이 찾아와서 자기 부인이 일으킨 일에 대해 사과하고, 조심스럽게, 그러나 당신도 피할 수 있는데 피하지 않은 책임이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구멍가게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고, 벽에 납작하게 기대기만 했어도... 그는 어떤 멍청한 애새끼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남자는 그렇다면 그 애의 집안과 연락을 해서 협상을 해 보는 게 어떻냐고 말했다.
  남자가 떠난 후 그는 허리가 아파서 도로 침대를 낮추어야 했다. 그의 누나와 남자가 이야기한 결과 입원비와 수술비 삼분지 일을 부담해주는 정도로 끝내기로 했다. 그는 제법 억울했지만 그 남자의 아내도 그 일로 죽었다고 하니 그만해서 입을 닥치지 않기도 찜찜했다. 남자의 아내는 자신도 몰랐던 뇌출혈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누나에게 부탁해서 직장에 전화를 했다. 이미 무단결근으로 기록된 지는 사나흘쯤 지났을 터다. 상사가 받아서 괜찮다고 하더니 매우 미안한 말투로 그래도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워둘 수는 없다고 했다. 그는 알았다고 하고 막막한 심정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누나가 어떻게 연락을 했는지 사흘쯤 더 오줌을 받아내고 나니 아이와 아이 엄마가 면회를 왔다. 누나가 아이 엄마와 이야기를 한 후,아이 엄마가 아이 등을 떼밀어 그의 침대 곁으로 보냈다.
  아이는 입을 꾹 다물고 절대로 죄송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이 엄마가 기묘하게 인상을 쓰자 겨우 침대 매트리스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툭 뱉어냈다. “아저씨, 나 때문에, 미안.”
  “존댓말을 제대로 써야지.” 엄마가 속삭였다. 아이가 고개를 숙였다. “저 때문에, 죄송합니다.”
  “괜찮아.”
  아이가 겁에 질려 있는 것 같기에 그는 몇마디 덧붙였다. “괜찮아. 아무 짓도 안 해.”
  아이가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했다. 그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무 짓도 안 한다니까?”
  “하지만 아저씨 화났잖아요. 나한테.”
  “그래.”
  쉽게 말이 나와버린 것에 그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말못하게 화가 난 건 사실이다. 애를 그 따위 버릇으로 키워놓고는 이제와서 사과를 존댓말로 하랍시는 애 엄마 얼굴도 보기 싫다. 누나가 협상인지 협박인지를 잘 해서 돈이나 얼마쯤 받아냈으면 좋겠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애 얼굴이 걸렸다. 애는 자신이 왜 우는지 알지 못하고 울고 있었다. 그 무지에 벤츠속의 괴질이 겹쳐 보였다.
  어린애 것이 될 수 없는 무지였다. 그는 순간 그 애가 어떤 병이 옮은 것인가 생각했다. 어머니가 손을 내밀자 아이 몸이 활처럼 팽팽해지더니, 병실 밖으로 걸어나갔다.





0.

  “안녕.”
  조용한 친구가 인사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용한 친구는 좋은 반찬으로 된 밥 한 끼를 차려주었다.


*


  “삼백 미터 이하 지점에서 낙하산을 펴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지금 일 키로미터 상공이니까, 사초 후에는 낙하산을 펴야 합니다. 끈 위치는 아시죠? 그럼, 첫번째 분부터, 하나, 둘, 셋, 낙하! 대기하시는 분 아직 나오시지 마세요.”



*

  “돌아갈 거야?”
  “응.”
  그녀는 나머지 대화를 상상한다. 내게 일일이 말할 필요 없어 - 그녀가 말한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네가 물어놓고서. 장난 반 섞인 한숨으로 조용한 친구가 응수한다. 그녀는 각기 조금씩 다른 상상을 반복하며 돌아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어떻게하면 상처줄 수 있을까? 조그만 분노가 가슴 속에 파문을 일으키고서, 점차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돌아보았을 때 친구는 이미 없었다.


*


  고글 너머로 한기가 닿는다.
삼백 미터 이하 지점에서 낙하산을 펴지 않으면 죽거나 크게 다친다. 처음 스카이 다이빙 하는 사람들을 봤을 때는 그렇게 떨어져 내리는 육체에 낙하산 끈을 당길 저력이 감춰져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끈을 당기는 마지막 힘은 공포에 질린 생존 본능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직접 해 보면 삼백미터까지 그것은 선택에 불과하다. 당길까 말까... 그건 죽을까 말까와는 다르다. 끈을 당기지 않으면 십중팔구 죽겠지만 그건 십미터 앞에서 끈을 당겨도 마찬가지다. 삼백 미터 상공에서, 끈을 당기거나 말거나 몸에 닿는 건 허한 공기밖에 없는 곳에서, 그건 너무 애매하다.
  내려가서 낙하산을 개키고 옷을 벗고, 어쨌거나 땀이 나 버린 몸을 씻고 나오자 상대편이 얼굴을 찌푸린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좀 어리둥절해졌다.
  “무슨 일이야?”
  “미팅 오늘 저녁인 거 몰라?”
  “저런.”
  그는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한 후, 허둥거리기 시작한다. 지금이 오후 네시다 보면 한시간 반 밖에 남지 않았다. “입을 옷도 없는데.” “어쩔거야? 그 체육복 입고 갈래?” “그건 심하지. 할 수 없다. 어차피 여름 옷 하나는 사야 하니까 손해는 아니라고 치고.”
  상대가 쇼핑백을 맡겨준다. “뭐야?” “그럴 거 같아서 가져와 봤다. 그거 괜찮을 거 같으면 그냥 입고 나가라.” “고맙다.” 그는 얌전히 옷을 받아 입었다. 허리는 약간 컸고 어깨는 뻑뻑했다. 그는 자기 체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상갓집과 파티장 중간 쯤에 있는 정장을 입고 카페에 나갔다. 여학생들이 주스를 마시고 있다가 안녕하세요 했다. 남자들 쪽은 엉거주춤 인사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앉고 보니 그의 맞은편엔 키가 좀 큰 여학생이 앉았다.
  양 편은 각자 인사를 나누었다. “안녕하세요.” 키 큰 여학생이 손을 내밀었다.




00.

  “잘 왔어.” 서른 살의 그녀가 문을 열고 그의 어깨를 탁탁 쳤다. 그가 그녀에게 가볍게 입맞췄다.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그는 그녀를 웃게 만들었다.
  그는 그녀의 웃음을 볼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든다. 어차피 웃음이란 걸 알 수 없다. 아기들은 볼 근처 어딘가를 잘만 찔러주면 웃는다. 누르면 들어가는 익은 감같이.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그건 오히려 안심이 된다. 기계 버튼을 누르는 것 같은 인과관계식의 반응이다. 그러나 평범한 어른의 웃음은 기분나쁘다. 웃음은 왜 저렇게 허리가 꺾어지게 동적인 걸까. 미소는 왜 저렇게 앉았다가 금방 날개 접고 떠날까. 눈을 감아버리고 싶게 어른어른하다. 어디서 온 지도 모를 것이 뺨을 한대 때리고 사라지는: 자신이 웃고있는 것은 더욱 더 그런 느낌이다.
  어쨌거나, 그녀의 웃음이 특히 기묘한 건 어설퍼서다. 웃고 있다는 것만 그럭저럭 알아볼 수 있게 해 주는 웃음. 그건 기호에 가깝다. 기호라는 건 애초에 상대를 배려하기 위한 게 아니던가.
  그녀를 웃게 해 주려는 생각이 사라진다. 그는 그저 자연스럽게 그녀의 몸을 탐하기로 한다.
  어딘지 혹독한 느낌이 드는 섹스가 끝나고 나자 그녀가 그를 말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도 나란히 누워서 마주보았다.
  이렇게 눈을 마주치면 그녀는 당황한다. 그러면서 당황하지 않으려고 망설인다. 이런 되지도 않는 문장이 그녀에게는 성립 가능하다. 왜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문장에서 한발 더 망설여버리는 걸까. 그들은 서로 눈을 마주쳐 본 기억이 거의 없다. 그도 한참 눈길을 맞대고 나서야 그 점을 깨닫는다.
  “그거 알아?” 그녀가 한참만에 말한다.
  “뭘?”
  “나 전과자인 것.”
  그는 조금 고민하다가 말한다. “아니. 처음 알았어.”
  침묵이 흐르길래 그가 좀 생각하는 척을 하다가 말했다. “아니, 괜찮아. 그런 거 상관없잖아.” 당연히 상관없다. 그게 단어 외로 무엇을 뜻하는지 그는 잘 모르기 때문에. 막연한 무게만 알고 있는 상태로는 무게에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가 없다. 그래서 무조건 그 무게를 부정부터 해 보고 싶어진다. 상관없다고 하자 그녀가 눈을 부릅뜨고 그는 자기가 무슨 말을 잘못했나 불안해진다. 그녀는 그의 가슴께로 눈길을 옮기며 말했다.   “그래. 고마워.”
  그 말이 자기 가슴의 살코기를 향한 것처럼 느껴져서 그는 좀 생소한 기분이 든다. 침대 시트를 만지작거리면서, 그는 그녀가 잠들 때까지 지키고 있었다.
  다음날 둘은 말없이 한 상에서 아침을 먹었다. 그녀는 그를 마중하면서 뜬금없이 개 알레르기가 있냐고 물어왔다.
  “개? 하필이면 개야?”
  “글쎄. 그냥 한번쯤 키워보고 싶어서.” 그녀가 망설이듯이 말했다. 그는 어깨를 한번 으쓱해보이고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그녀의 집으로 가려던 차에, 그는 졸업한 학교에 한번 들르기로 했다. 자료가 몇권 더 필요한데 이왕이면 잘 아는 곳의 도서관을 쓰는 게 좋다.
  정문으로 들어와서 도서관 쪽으로 올라가는 길에 맹도견 몇마리를 데리고 서 있는 노인을 보았다. 끈에 묶여있는 개들은 정확히 도구처럼 보였다.
  풀려있는 강아지들과 아무렇지도 않은 어미개들은 어떨까. 어미개가 목걸이를 차고 있기에 더 어울리는 풍경이다. 편입되어있고 우리와 닮았으되 우리는 아닌 것들. 그런 개들이라면 한번 건드려보고도 싶다. 증오해보고도 싶다. 그는 대신 맹도견 한 마리를 멈춰서서 잠시 쓰다듬어 보았다. 맹도견은 소리도 내지 않고 올려다보았다.
  이런 개를 그녀는 좋아할까 생각하니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정문을 뚫고 들어오는 SM5가 보였다. 차는 검은색이였다.
  벤츠 안에는 괴질이 들어있었다. 촉매가 들어있었다. 그 순간 세계는 촉매를 증거하는 푸른 용액이였다.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SM5 안에 있는 괴질을 보고 싶었지만 그 차는 갑자기 속도를 높이지도 않았고, 차속에 탄 사람은 맹도견처럼 얌전하게 갓길에 주차를 했다. 그 자동차는 너무도 쉽게 문법에 속해 있었다. 그는 흥미를 잃고 맹도견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선글라스를 벗자 노인은 그렇게 늙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네를 삼촌이라고 부르면서 한 쪽에서 남자가 다가왔다. 남자는 어깨가 작고, 몸이 길고, 턱과 목 근육이 빈틈없었다. 눈매가 자기 눈동자를 짓누를 만큼 날카로왔다.
  그는 입을 다물고 묵묵히 서 있었다. 십팔년이 지났고 그는 훨씬 나이를 먹었을 것이다. 지금 저 남자는 서른 셋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인다. 그건 그때 그의 나이다. 게다가 나는 어려서 그의 나이를 정확히 판단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남자는 주인과 함께 도로 끝으로 걸어갔고 맹도견들이 자분자분 그들을 따라갔다. 그는 맹도견의 발품새를 노려보고 있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문을 두드려서 그녀가 나오지 않자 그는 한참 기다렸다. 꼭 문이 잠기어 있으리란 법은 없지만 잘못하면 피투성이의 난감한 상황에 마주칠 수가 있다. 그래서 그냥 기다렸다.
  기댄 벽이 차갑게 느껴질 즈음 그녀가 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는 그에게 시디 한 장을 넘겨주었다.
  “고마워.” 그가 받아들자 그녀는 오늘은 그냥 집에 가라고 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빠져나왔다. 그가 가고 나자 그녀는 몇 시간동안 거실 의자에 앉아있었다.




  맹도견들이 머릿속을 쿡쿡 찔러서, 그는 다시 한번 그 거리에 가 보기로 했다. 그러나 정작 다 달아서 그는 실망했다. 개들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도로는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구멍가게가 있던 자리는 큰 슈퍼로 변했는데 원래 있던 것이 신축된 것인지 새로 입주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는 개들을 찾아서 하릴없이 동네를 두어바퀴 돌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그날 따라 버스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다 그 자로 보였다. 짧은 머리의 안경 끼지 않은, 얼굴빛 깨끗한 삼십대의 남자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흔들리던 그였다. 그게 조금 지나자 안경과 상관없이 비슷한 느낌의 삼십대로 좁혀지더니 이제 그 자의 젊은 시절, 그 자의 지금 모습일 법한 오륙십대의 모습, 혹은 그 자가 무슨 일로 하여금 폭삭 늙어버렸을 때의 모습이 될법한 백발의 노인들까지도 그의 마음을 괴롭혔다. 그리고 그 일이라는 게 무슨 일이냐,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일일 게 뻔하단 말이다. 그 자는 그렇게 늙어서는 안 된다.
집에 와서 청탁받은 연설문 번역 다섯장을 마치고 그는 창 밖을 보았다. 왜 번역을 직업으로 삼았느냐, 나온 과가 영문과였고 줄이 있는 게 출판사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왜 영문과에 갔느냐, 성적에 맞춰서 갔던가 어쨌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 상관없는 건 바로 자신이다. 그는 괜스레 기억해냈다. 고등학교 때 즈음, 쓸모없는 유리를 주워와서 서랍 안에 보관했던 시절을. 몇달 전 쯤 그녀의 집 문을 두드렸을 때 그녀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문이 열려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냥 들어갔고 그녀의 방 문 앞에 이르러서는 자기 팔목을 열심히 긋고 있던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배려하듯이 웃으면서 칼날을 집어넣었다. 그녀는 곧바로 그에게 섹스하자고 했다. 그는 응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는 자해하는 인간들이 싫다. 그런 놈들은 모두 머저리인 것이 틀림없다. 그 자신을 포함해서. 그녀가 옷을 벗기 시작하자 그도 포기하고 버클을 끄르기 시작했다.
  일이 끝나고 나서 나란히 누워서 그가 물었다. 그녀는 여전히 그의 가슴 살코기를 보고 있는 채였다.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그러니까 심지어 그 가슴 살코기에게도, 별로 호감도 뭣도 가져본 적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도 그 사실에 반감이나 호기심을 가져본 적은 없지만 물으려면 물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둘은 만나면 섹스밖에 하는 게 없고 섹스가 끝난 후에는 언제나 품에 묻히듯이 해서 서로 잠든다. 왜 너는 내게 온 거냐고, 둘의 일이 그녀에게만 책임이 있는 듯이 물어본다. 그녀는 그 책임 전가를 생색도 내지 않고 간단하게 받아들여 준다.
  “그걸 물어보면 우린 깨지는 거야. 그래도 좋아?”
  “그건 싫어. 하지만 내 멋대로 추측하는 건 상관없지? 어때? 넌 창문 닫기가 귀찮아서 나한테 온 거야. 내가...” 그는 이불을 끌어올려 그녀의 어깨를 덮어주며 말한다. “이불을 끌어올려 줄 테고, 넓은 등판 살코기들로 바람도 막아 줄 테니까.”
  “글쎄...” 하고, 웅얼거리고서 그녀는 눈을 감는다. 그녀가 눈을 감으면 그는 그녀가 자고 있다고 생각해주어야 한다. 글쎄... 라고, 그녀의 지식이 허락했다면 그녀는 그 말을 도이치어나 이탈리아 어, 최소한 영어로는 중얼거렸을 것이다.
  그녀는 기분이 되면 몸을 칼이나 유리로 그어대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를 만난 후 부터는 섹스할 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팔목 아랫부분만 긋고, 토시나 긴 옷으로 잘 덮어두고, 언제나 문을 열어둔 채 잠을 잤다. 그녀는 딱 한번 자살 시도를 했고 그 자국은 손목 안쪽에 있다. 그녀는 그때도 문을 열어두었다고 한다. 대답을 회피하기 위해.
  “제대로 그은 것 같은데. 어떻게 살아났어?” 그가 물었을 때 그녀는 눈을 깜박이다가 대답했다. “내기를 했어. 문을 열어두고, 누가 구해주면 계속 살고 구해주지 않으면 죽기로.”
  “구해준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물었을 때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녀가 사실은 자고 있지 않다고까지 생각해 보기는 너무 귀찮았기 때문에, 그도 그저 잠을 청했다. 그러나 그때 그는 희미하게 분노를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신경질이 아니라 진짜 분노.
  그가 잠에서 깨었을 때 그녀는 방에 없었다. 옷을 꿰어입고 나가보니 그녀는 거실 의자에 앉아있었다. TV를 바라보는 곳에 있는 등받이 의자. 십 평도 채 안 되는 거실에 탁자 한개, 탁자 오른편에 등받이 의자 한 개가 더 있었다. 오른편 의자는 쓰지 않은 지 오래 된 것 같았다.
그는 깨어나기 직전에 그녀에 대해 희미한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났다. 그녀가 그렇게 도이치어처럼 한국어를 발음하게 된 것이 언제부터더라. 그녀가 무슨 이유론가 눈을 부릅떴던 그때부터가 아닌가... 그리고 잠이 깨자 그는 반사적으로 옆을 더듬었으나 자리는 차가웠다. 자기 손의 움직임 때문에 그는 완전히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니까, 자리가 차갑다는 건 그녀는 침대에 없다는 거지? 그 분명한 인과관계 앞뒤를 부유하던 다른 생각들은 모두 지워지고 말았다.
  그녀는 TV에 비치는 아침 뉴스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탁자 오른편 의자를 응시하며, 누군가 나 말고 이 집에 들르는 사람이 또 있는 거야? 물으려다가 귀찮아져서 그만두었다. <귀찮아져서> 정도가 정확하다. <우스워져서> 라고 해도 무언가를 긍정하고 마는 거고, 그런 질문을 묻고 싶어지게 만드는 상식적인 일상에 말려드는 거다.




  그녀는 거실에 앉아서 기다렸다.




  맹도견을 데리고 있는 노인은 학교를 꽤 자주 들락거리는 듯 했다. 노인을 삼촌이라고 부르던 그 남자가 여기 교수일지도 모른다. 그가 자료를 얻으려고 도서관에 올 때마다 올라가는 그 가파른 오르막길을 노인도 개들과 함께 꾸준히 오르내리고 있었다. 가끔 그 서른두서너살의 사내도 달려와서 노인과 함께 걷곤 했다.
그녀는 그와 만나기 싫은 날이면 문만 빼꼼 열고는 시디 한 장을 내밀었다. 그게 그의 발걸음에 대한 보상이었다. 그는 그녀와 음악 취향이 맞았으므로 시디만 받고서도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나이 탓인지 음악은 몇번 들으면 싱거워지는데 그녀는 요즘 들어 자꾸 시디만 빌려주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집에 전처럼 자주 가지는 않게 되었다.
  그는 언젠가 자기도 뭔가를 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그녀의 집에 갈 때마다 책을 한권씩 빌려주곤 했다. 물론 그 자신이 번역한 책은 열외였다. 그녀는 고맙다며 받아갔다. 그는 그녀가 책들을 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책꽂이엔 책이 많았지만 그와 아무 관련이 없는 것들이었다. 사실 그가 좋아하는 책도 그녀의 책꽂이에는 많이 있었지만 그는 그 책들의 제목을 읽으면서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낙하산을 펼치기 직전의 아무래도 좋은 분노밖에는 책들에 날카롭게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가끔씩, 그녀와 자신이 연결되어 있는 것은, 그 분노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은 하곤 했다.
  도서관에서 내려오는 길에 그는 개들이 흙바닥에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제 턱의 갈기같은 털을 제 발등에 올려놓고서. 가슴이 철렁해서 들여다보자 도서관 오르는 길에는 잔잔한 흙모래가 어질러져 있었다.
  구멍가게 앞 흙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주택 단지 하나밖에 없었다. 주택들은 가계당 칠십 평에서 백평 사이였고 땅값은 쌌지만 유지비는 비쌌다. 어린애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사건이 지나고 나서 몇번이나 같은 길을 지나면서 천천히 묵직하게 깨달았다. 자기 어머니 아버지가 그렇듯 오르막길 꼭대기에 올라앉은 사람들이란 올라앉아 있느라 대단히 조심스럽다는 것을. 그러니까 그 벤츠가 올라오는 모양이 무거운 물체의 빠른 속도가 내포하는 파괴성 이상으로 공포스럽게 보였다 해도 그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벤츠 안에는 괴질이 들어있었다. 촉매만을 증거하는 푸른 용액처럼 - 아이는 자기보다 훨씬 나이든 상대의 눈알을 후려쳐 놓고서야 겨우 그의 시야를 느꼈다. 상대는 이상하리만치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아이는 겁이 덜컥 났다.
  맹도견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나이들고 단단한 손길이 보였다. 맹도견 주인의 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시선을 올려 그 얼굴과 마주쳐놓고는 한참동안 정신을 빼 놓고 있었다. 상대가 이 쪽을 보지 않는다는 것을 핑계삼아 그 자를 가만히 노려보기 시작했다. 전에 보았던 서른 두어살의 사내도 함께 있었다. 아마 두 노인을 서로 소개하고 있는 듯 했다. 새로 나타난 자는 오륙십살 정도로 보였고 얼굴이 거칠게 늙은 축이였다. 그 자는 맹도견의 주인을 형이라고 불렀다.
  아,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저 남자가 그 자를 닮았구나. 두 노인은 친척일 지도 모르지. 그러면 저 남자도 그 자에게는 친척 뻘이 되겠지. 하지만 그랬다고 닮아버린단 말인가? 그는 또다시 혼란을 느꼈다. 이번에는 훨씬 깊고 절망적인 혼란이였다. 얼마만큼 상관이 없어야 족하겠는가? 아니, 애초에 나는 그 자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였던 거다. 아니다. 말을 잘못했다. 완전히 잘못했다. 그 자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였던 거다.
  맹도견 일행이 걷기 시작했다. 대출한 책이 마침 그다지 무겁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그는 그네들을 찬찬히 쫓아갔다. 그네들은 그다지 빨리 걷지 않았고 개들은 미행자를 냄새맡지 못했다. 그네들은 학교 후문으로 나가더니 신호를 기다려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는 호흡을 참고서, 맹도견 주인의 친구를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는 사람에게 초능력따위 결코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지만 그가 바로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초능력은 발현된다 해도 치외법권상인 무의식 차원에서만 다루어질 수 있을 터였다. 그는 열심히 그 자의 등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어떤 멍청한 자동차도 그 자의 몸뚱아리를 깔아뭉개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 자는 성실하게 걸어서 도로를 다 건너갔다.
그는 문득 신호등을 올려다보고 녹색 신호가 다해가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네들을 더 따라가고 싶기도 하고, 어차피 버스 정류장도 건너편에 있다는 걸 떠올렸다. 몇걸음 뛰다가 그는 택시 한대의 공주거리내에 들어왔다.
  그는 적당히 튕겨서 넘어졌다. 치이고 나니 부아가 나서 어디 끝까지 더 해 봐라 싶었다. 그래서 몇대 더 달려와주지 않을까나 기다렸지만 차들은 그를 걱정하느라 모두 멈춰있었다. 그는 그냥 일어나서 도로를 마저 건너기로 했다. 그러나 무릎을 펴는 순간 주변이 휭 돌더니 그는 그만 까무라쳐버렸다.





000.

  그는 TV를 보지 않는 사람이다.
  대학 때 기숙사에 있을 때부터 그 시끄러운 상자를 혐오하게 되었고, 잡지나 신문으로 침대에서 뒹굴면서 볼 수 있는 것을 꼭 앉아서 폼잡고 보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팝콘이나 한 봉지를 다 처먹고 살이 뒤룩뒤룩 찌게 되는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의 집에도 TV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TV 구입을 위해 돈을 지불하기는 했다. 그녀는 8인치짜리, 칼라인지 흑백인지도 알아볼 수 없는 TV를 사다놓고 경비실 직원이 모니터 들여다보듯 들여다보면서 앉아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무슨 영화에 나왔던 것처럼 그녀는 입이 없어져버릴 것 같았다. 그녀는 TV를 볼 때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얼굴에 안경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선심쓰는 기분으로 14인치 TV를 살 돈 반액을 빌려주었다. 그리고 그날 밤 섹스를 하기 전에 그녀와 함께 TV를 봤다. 오징어와 맥주도 사 놓았는데 그녀는 죽어라도 TV만 보았다. 케이블 채널같은 건 깔지 않았고 유선 방송에서 나오는 뉴스밖에 그 시간엔 볼 것이 없었다. 마침 부모를 죽인 아들이 양 손에 묶인 채 화면에 드러났다. 저놈 저거 왜 그랬을까. 그가 중얼거리며 그녀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자 그녀는 이상한 침묵처럼 굳어있었다.
  왜 그랬을까. 그건 그녀가 자기 목숨으로 끊어 삼키고 있는 질문같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런 느낌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떨떠름해졌다. 그녀는 그가 옆에 있든지 말든지 언제나와 똑같은 태도로 계속 TV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맨 마지막 순간에 그를 한번 돌아보고는 천천히 무슨 표정을 했다. 그가 중간에 눈길을 피하지 않았더라면 볼 수 있었을 어떤 표정을.
  그는 새삼 되새긴다. 전과자... 그러자 고리가 탁 맞아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 고리의 연결 원리는 알 수 없다. 철사를 마구 쑤셔넣다보니 작동되던 열쇠 구멍처럼.
  아물아물한 정신이 돌아오면서 그는 TV 소리를 듣는다. 천장 구석에 달린 TV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TV를 분명하게 의식하게 되면서 어떤 기억에 대한 욕구가 몰려들었다. 그날 밤 그녀와 섹스를 했던가? 하지 않았다. 그러고보면 그녀와 그는 섹스만 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언젠가 곁에 없는 그녀를 반사적인 손길로 더듬으려 들었던 기억이 난다. 언제였더라? 어떤 실마리를 잡았을 때다. 음모에 걸려든 것처럼 손을 뻗자마자 그 실마리는 잊어버렸다. 남은 건 어른어른한 감각 뿐.
  TV가 떨떠름하게 반짝거렸고 다시 돌아보니 그녀는 여느때같은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날은 한없이 어두워졌다. 열한시쯤이 되자 TV를 끄고 둘은 침대 위로 올라갔다. 어둠 속에서 그녀가 무어라고 했다. 그는 기분이 좋아져서 그냥 자 버렸다.
  그래, 둘은 그날 섹스를 하지 않았다. 그녀가 기분좋은 말을 했기 때문이다. 하루종일 푹 젖어 있어도 좋을 만큼 기분좋은 말. 뭐라고 했더라, 마라투나. 다윈. 갈라파고스. 이구아나 비슷한 말. 뭐더라? 진화.
  진화... 외로움. 외로움. 그 단어가 익숙하게 감긴다. 그는 도태된 종이였어.
  불쑥 한 문장이 떠올랐다.
  그는 그 문장이 자신이 한 말인지 그녀가 한 말인지 잘 구분할 수 없다. 순간 연달아 말들이 폭발한다. 진화를 위한 마음이 아이를 낳게 하다니, 로맨틱하잖아 - 맞아,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전혀 별스러울 얘기가 아니다.
  TV를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허탈감이 금방 사라졌다. 갑작스런 졸음이 그를 덮친다. 아니 그의 코 앞에서 얼쩡거리기만 한다. 그 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는 생각한다. 꼭 그 날만이 아니더래도, 둘이 섹스밖에 해 오지 않았을 리가 없다. 둘은 칠년동안 만났다. 어쨌거나 많은 이야기를 했을테고 가끔은 진지해져버렸을 게 뻔하다. 그러나 그 중 섹스만이 진짜였다. 그런데 그 같잖은 대화 하나가 갑자기 나타나서 둘은 만나서 섹스만 했다는 거의 개념화된 이야기를 잠시나마 공중부양 시켜버렸다.
  결국 그 속에서 우리 둘은 뭔가를 공유하고 있었던 거다. 머릿속이 번쩍한다. 우리가 만난 건 운명이었다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치기 전에 그는 얼른 속을 접어넣는다. 좀 더 현실적인 상상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 그 의자. 그가 한번도 앉아본 적 없는 그 오른편 의자는 함께 아이를 낳고 싶은 상대를 위한 걸까?



  “점심.” 그녀가 말했다.
  “배고파?”
  “아주 많이.”
  “알았어. 기다려.” 조용한 친구가 말했다.
  조용한 친구는 맨발을 꼿꼿이 세우고 찬장에서 냄비를 꺼냈다. “냄비같은 걸 머리위에 올려놓고 지랄인 거야?” 한마디 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고기 냄새를 맡으면서 그녀는 거실에 앉아있었다. 그녀는 냄비를 조용한 친구의 머리 위에 떨어뜨려서 죽여버리고 싶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녀는 또 친구의 등어리를 꼭 안아보고 싶다. 목덜미에 코도 부벼보고 싶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 친구가 접시 두개를 팔에 끼고 돌아온다. 친구는 냄새가 번진다고 거실 창문을 열어젖힌다. 발코니에 널어둔 빨래 냄새가 침입해왔다.
  친구가 고동색 눈을 깜박이다가 자리에 앉는다. 청바지를 닮은 면바지를 입고 있다. 친구가 의자에 앉자 접힌 종이같은 주름이 생기는 바지. 반팔 윗도리가 몸에 매달려서 달랑달랑한다. 윗도리는 눈부신 청색이다. 그러나 사람을 해칠 만큼 눈부시지는 못한 청색.
  “다이어트는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너는.” 그녀가 며칠전에 자기 몸무게에 대해 불평하자 친구가 한 말이다. 그러더니 오늘 삼겹살을 구해와서 볶아버렸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입안에 퍼 넣는다. 맛은 있다.
그녀는 친구가 물만 마시고 있는 모습을 흘끔흘끔 본다. 뭐라고 하고 싶다. 무엇에 대해서? 그녀는 포크를 내민다. “너는 안 먹어?”
  “난 배불러.” 친구가 고개를 젓는다.




  졸립고 TV가 부추겨서, 탁자 오른쪽 의자는 TV 주위를 붕붕 떠다니기 시작한다.
  예컨대, 하고 탁자 오른쪽 의자는 공상해본다. 그녀는 전과자다. 그녀에게는 애인이 있었다. 이름은 명인이라도 좋고 정수라도 좋다. 친구는 삼년 전에 죽었다. 그녀와 싸우고 죽었다. 아니 실은 그녀가 죽였다. 그녀는 마땅한 형을 살았지만 여지껏 심한 죄책감을 느낀다. 그녀는 애인이 살아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매일매일 생각한다. 애인은 살아서 돌아왔다. 그녀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한다. 그러나 애인의 얼굴을 보자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녀는 애인이 어떤 이유로도 죽지 않은 것을 안다. 그리고 어떤 이유로도 살아있지 않은 것을 안다. 그녀는 애인이 애인조차 아니였던 것을 안다.
그녀는 돌아서서,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왔으면 밥 좀 해 주고 가라고 한다. 애인은 투덜거리면서 그녀의 냉장고를 뒤져서 무말랭이와 깻잎무침을 놓고 접시밥을 차려준 뒤, 자기도 한 접시 들고 탁자 오른편 의자에 앉는다. 애인이 “우리 아이는 언제 만들거야?” 하자 그녀는 TV를 꺼 버리고서, 깊은 침묵에 잠겨든다. 두 팔로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잘 먹었어.”
  “그거 고맙네.”
  친구가 씩 웃는다.
  그녀는 빈 접시를 탁자에 내려놓고 입을 닦는다. 딱 좋은 양이었다. 친구는 찻잔 나머지를 들이키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칼을 걷어 올리다가 눈물을 떨군다.
  “왜 울어?”
  “네가 싫어.”
  친구가 한숨을 쉰다. “그건 이미 알고 있어. 그게 울 일이야?”
  “그러게. 내가 오늘 기분이 좀 이상해. 너 그만 가 봐.”
  친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사라진다.




  오른쪽 의자는 내려앉아서 꽉 막힌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는 지금 외로울 여지가 없다. ...처럼. 의자는 근거들을 좀 더 많이 모아서,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첫째. 그녀는 아이에 대해 말했다. 그러면 첫번째 공상은 유효하다. 그러나 둘째. 그녀는 도태된 종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애인은 다른 종이다. 인류와는 다른 종. 선구자적인 종이다. 어떤 돌연변이 때문에 그에게는 공포가 없다. 외로움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 자가 누군가의 애인일 수는 없을테니 일단 친구라도 해 두자. 친구는 미지를 미지인 채로 남겨두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는 그러한 진화를 성공했고 결국 지금 친구는 그 자신으로서 완벽하다.
  그러나 친구는 완전히 완벽하지는 않다. 모든 무지를 비추려면 합당한 빛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낮이 되어 모든 것이 드러나도 그 속에 태양은 드러나지 않듯이. 친구는 한단계 진화했을 뿐 결여가 존재할 가능성은 여전하다. 친구는,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녀에게서 드러나는 무언가에 의해 다른 빛의 존재를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다른 빛을 향해 도망칠 수 없다. 그건 나방류의 하위 동물이나 하는 짓이다. 그는 스스로 진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할 수 없다. 그건 그의 능력 밖이다. 그는 아이를 남길 수도 없다. 그는 속이 텅텅 비어서 죽는다. 그는 도태된 종이다.
  등받이의 나무 장식을 침대 가장자리에 부딪치기 직전에 오른쪽 의자는 되뇌인다. 그렇게 잘난 그라면 시간쯤은 돌아다닐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동물의 한통짜리 시간과 인간의 세겹짜리 시간을 비교하면서 그는 진화라는 것에 대해 확신해버리고 만다. 서울에서 강원도가듯이 한발짝 훌쩍 뛰면 한시간 두발짝 훌쩍 뛰면 두시간. 먼 곳은 오래 걸리고 가까운 곳은 조금. 그녀 주위를 그는 그런 식으로 한없이 맴돌고 있으련지도 모른다. 정말로 나방처럼. 그렇다면 살아돌아올 필요도 없겠다. 그렇다, 이 가정이 더 유효하다.
  가장자리에 머리를 시원하게 부딪치면서 그는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올려다보자 TV는 아직도 켜져 있다.
  머리를 슬슬 문지르면서 그는 한쪽 눈만 찔끔 떠 본다. 흰 천장이 보인다. 그는 버튼을 눌러 침대를 삼십도로 조절한다. 주위를 돌아보자 이인실 병실인 걸 알겠다. 그는 전후의 일을 생각한다.
  햇볕 때문에 차도에서 노랑내가 올라왔다. 그는 그 한가운데에 뻗어 있었다(기억은 희미하지만 그랬던 것 같다). 남자 향수 냄새가 진하게 나는 사람이 그를 깨우길래 정신을 차렸다. 잊을 수 없는 얼굴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도 그 순간은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서, 얼른 다시 기절하기만을 바랬다. 그가 얼굴을 찡그리고 있자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사람이 말했다.
  “괜찮나? 내 조카가 차가 있는데, 병원에 데려다 줄 수도 있다 하는데.”
  “느이 조카 차 자랑하나. 갸 운전도 잘 못해. 일일구나 눌러라!” 옆에서 역정을 드는 소리도 있었다. 조카라는 작자가 뒷짐을 지고 괜히 이리저리 걸어다녔다. 그쯤해서 그는 도로 기절했다. “아이구, 야 좀 봐라” 하는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렸다.
  병원에서 눈을 뜨자 곧 의사와 면담을 할 수 있었다. 별건 아닌데 두개골에 좀 금이 가서 처치를 해야겠단다. 뇌를 보호하는 뼈에 금이 간게 별 게 아닌게 맞나 싶긴 했지만 아무튼 얌전히 마취당한 채로 처치를 받았다. 실에서 나와서 시계를 보니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흘러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뇌혈종이 생길 뻔 했단다.
  하루쯤 지나자 누이가 그의 침대 옆 간이 소파를 차지했다. 누이는 입원비를 먼저 묻더니 입이 쩍 벌어졌다. 누이는 그 후 며칠동안 발빠르게 쏘다니더니 차 주인이 협상을 원한다는 소식을 가져왔다. 그래도 만약의 경우를 위해 증인도 몇명 구했다면서 이름들을 늘어놓았다. 이름을 말해봤자 알 리가 없었으므로 그는 손을 내저었다. 누이는 그러거나 말거나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그 중에 이문형씨는 너를 한번 보고 싶다고 하더라. 그때 널 병원에 데려다 주신 분이라던데? 많이 안 좋아보였는데 괜찮은가 하고. 자기는 아들이 없는데, 꼭 자기 아들같다나.”
  “서른살이나 된 아들? 귀엽지도 않겠다.”
  “뭐 어때? 너한테 호감 갖고 있으면 좋은 거지.”
  누이가 조잘거리면서 사과를 깎아주었다. 병원에서 과일은 먹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그는 거절했다. 누이가 사과를 모두 먹어치웠다. 그러고보면 누이는 조금 살이 쪄 있었다.
  “누나 조금 살쪘다?”
  “살이 안 찌겠냐? 남편이 얼마나 잘 해 주는데.”
  “그거 다행이네.” 그러고보니 그는 문득 누이에게 연락을 자주 못 해준 게 미안해졌다. 전화벨이 울리자 누이가 사과를 줏어먹던 손가락 끝을 쪽쪽 빨고서 수화기를 집어올렸다. 누이는 다섯살 여자애처럼 웃으면서 전화를 받는 습관이 있다. 하지만 상대에 따라 다음 말은 천차만별이다. 바라지 않던 사람의 경우 웃음기가 쪽 빠져버리고 지나치게 담백해진다. 꼭 내용이 아니더래도, 누이가 용건만 톡톡 뱉어내고 끊을 때 알아봤다.
  “그 차 운전자야?”
  “응. 내 참, 네가 불이 점멸할 때 건넜으니까 일부 책임이 있다나? 미친놈 아니니? 면허 딸 때 필기는 어떻게 붙었나 몰라.”
  “면허를 아주 옛날에 땄나보지.”
  “도로교통법이 그렇게 쉽게 변하니? 그때도 똑같았을 걸?”
  누이의 입에서 도로교통법이란 단어가 도로록 굴러가자 신기해서 헛웃음이 나온다. 누이는 이제 귤을 까느라 여념이 없다. 그는 마음에 뭔가 걸려있는 것을 느낀다. TV로 고개를 들자 산산히 사라졌다가, 아주 한참 후에 오히려 조밀하게 모여든다. 가슴이 두근, 하면서 그녀가 TV를 보고 있던 모습이 떠오른다. 선명하다기보다는 정교하게. ...그녀는 지금 외로울 겨를이 없다. 나처럼. 귀와 눈을 막고 남자를 외면하고 있다. 애인도 아무것도 아닌 그 남자를.
  그는 몸 속에 이상한 증이 돌아다니는 것을 느낀다. 누이가 수화기를 다시 집어드는 것도 알지 못했다. 누이가 호들갑을 한창 떨어대는 대목에서야 정신을 차렸다. 누이는 수화기를 내려놓지도 않은 채로 말했다. “이문형 씨 지금 오셨단다. 간호사 전화야. 면회가도 되냐고 해서 된다고 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누이에게 나가달라고 했다. 누이는 제가 옆에 있어야 한다며 어린애처럼 웃었지만 그가 강경하게 나오자 기분이 상한 듯 했다. 과일 봉지를 챙겨서 엉덩이를 뒤흔들며 나가버렸다. 이문형씨가 그 엉덩이 끝을 맹한 눈초리로 뒤쫓다가 들어왔다.
  그 얼굴로부터 쫓아나온 기억이 그를 먹어치운다. 그의 몸이 허우적댄다. 그는 말해야 한다. 그 자가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라 확언했는데도 아이가 공포에 질려버린 이유를. 그 자가 자신이 화가 났다고 인정한 것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였는지를. 아이가 몇십년간 어떻게 질린 삶을 살았는지를. 죽음을, 근원적인 미지를, 그때부터 당신이 내게 공포의 대상이 아닌 외로움의 대상으로 주어 버렸다는 것을.




  눈부신 청색 티셔츠. 신선한 면바지. 친구는 아름다웠다. 참, 정말로, 대단히,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표현 저편이 가리키는 피안처럼.
  친구가 떠난 자리는 비어있다 - 문장 하나가 머릿속에 떠오르길래 그녀는 얼른 지워버린다. 떠난다는 얘기가 성립된다면 돌아온다는 개념이 먼저 성립되어야 한다. 친구는 시간을 돌아다닐 수 있고, 그런 친구를 위한 개념들은 없다. 그래서 다른 문장이 떠오르자 마자 그녀는 고개를 털어버린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네가 <너>로 화해 이 문장의 원소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완벽한 존재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무슨 짓을 해도 닿지 않을 것이다. 내버려 둔 사이 그녀의 조용한 친구는 혼자서 그녀를 사랑하다가 혼자서 죽었다. 햇볕이 유리창 위로 자갈처럼 끓어오르던 날, 친구는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친구가 눈이 가늘어지길래 그녀는 조용한 친구도 햇빛 때문에 눈이 부실 수가 있는건가 생각했다. 친구는 가는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다가 그녀가 보는 앞에서 몸이 새카맣게 터져서 죽었다.
그 눈이 미움이였던가 그녀는 간혹 선득하다. 미움이라면 어느 정도의 미움이였겠는가.
  그러나 그에게는 공포가 없었고 결국 그는 무언가를 미워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 눈부신 듯한 고통은 무엇이였는가.
  그가 죽은 직후 그녀는 한동안 머리가 비어있었다. 다음날 아침 자동 얼람으로 되어 있던 TV 소리에 조금씩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느날인가 베개를 꼭 껴안았고 눈을 감았다. 베개를 장님처럼 안고 입술을 가져다 댔다. 조용한 친구는 시간을 걸을 줄 안다. 아직 죽기 전의 친구는 언제라도 타박타박 걸어 그녀를 만나러 올 것이다. 조용한 친구를 다시 만나면 그녀는 친구의 목에 팔을 감을 것이다. 친구의 볼에 볼을 대고 머리를 쓰다듬을 것이다. 손끝을 세워서 친구의 등에 사랑한다고 사십번을 쓸 것이다. 그 모든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는 이미 죽었다. 그러므로 문제는 그게 아니다.
  그녀는 요 며칠간 그랬던 것처럼, 방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자해조차 하고싶지 않았다.
  사흘쯤 뒤에 조용한 친구가 나타나서 말했다. “안녕.”
  그녀가 가만히 있자 친구는 다시 말했다. “배 안고파? 밥 줄까?”
  친구는 다시 말했다. “울었어?”
  “배는 아직 안 고파.” 그녀가 곧 차분하게 말했다.
  친구가 차려준 밥을 꾸역꾸역 입속에 처 넣으면서 그녀는 몇십번씩 말을 삼켰다. 진화욕이 아이를 낳는거야. 좋지 않아? 좋지 않아? 멋지지 않아? 그 후 친구를 만날 때마다 그녀는 속을 눌렀다. 되뇌고 되뇌다가 못해 웬 엉뚱한 남자에게 털어놓기도 했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친구가 오기만 며칠간을 기다렸다. 친구에게 밥반찬을 몇그릇씩이나 몇가지씩이나 달라고 해서 위 속에 밀어넣었다. 밥알을 오지게 씹을 때마다 그녀는 오늘이야말로 아무렇게나 말을 꺼내도 좋다고 생각한다. 시작만 하면 말은 터져나올 것이다. 진화욕이 아이를 낳는 거야. 좋지 않아? 너 외로움이 뭔지 알아?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고 느끼게 하는 유전자야. 그 본능이야.
  사람에게는 두 가지밖에 없어. 공포와 외로움. 공포란 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아니겠니. 그건 두려움과는 다르잖아. 두려움은 알고 있는 과정에 대해서 각오하는 거야. 공포는 자기 상식을 넘어서는 것에 대해 공상조차 하지 못하는 거야. 미지의 것은 무서워. 그러나 결여된 것을 찾으려면 미지의 것이 아니고서는 안 돼. 당연하잖아? 결여감을 느낀다는 건 이미 아는 것 만으로는 모자란다는 거니까. 확립된 자기 자신만으로는 모자란다는 거니까. 자신을 진정으로 확립해야 하지. 그래, 너처럼 되는 게 사실 이상적인 거야. 하지만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 결코 자신 속을 찾지 않아. 처음에 좀 찾는 척을 하더라도 곧 귀찮고 힘들어서 못 하겠는 거야. 아니, 힘들다는 건 장난이 아니야. 매번 그 공포를 이겨내야 하는 거잖아. 무엇도 어느 무엇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자신이 그저 자기 자신인 채로는 모든 것이니까 골치가 아파. 정의할 수도 없는 그저 모든 것 말이야. 하지만 남들 앞에 있을때 자신이라는 건 문장 주체인 나일 뿐이야. 우리는 살귀 위해 문법을 만들었거든. 그래서 남을 찾아내고 미지성을 단순화시키지. <너>와 <나>는 다른 단어니까, 그러므로 너와 나는 다르니까, 그래서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라고. 우리의 문법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미지를 우리 사이사이의 다양성으로 대체시키면 이제 문장속의 원소로 다룰 수 있는거야. 그렇게 편입시킨 채 우리 자신은 안심하고, 미지를 미지로 남겨둔다. 원소는 원소인 채로 남겨둔다. 우리가 모르는 우주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세포들이 우리가 조종할 수 없는 과정으로 결합하게 놓아둔다. 우리를 닮은 아이들이 나온다. 이제 우리는 닮았기에 안심한다. 우리는 죽는다. 아이들은 자란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걸 알겠니. 너와 나는 서로 달라. <우리>가 모르는 건 그 때문이야. 그러므로 우리가 모른다면 그것은 네 잘못이기도 한 거야. 아니 네 잘못이 많은 거야. 나는 잘 하고 있으니까. 나는 아프歐? 나는 슬프니까. 나는 살아있으니까. 네가 나빠. 나와 다르면서 나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살아있는 내 밖의 네가 나빠. 그걸 알겠니. 네 잘못이야. 그러니까 네개는 내 잘못이야. 자 따라해 봐. 내 잘못이라고. 그럼 내가 말하는 거야. 미안해. 미안해... 그걸로만, 거기까지만 해도 우리는 서로 끌어안고 또 우리는 그래봤자 하나구나 서로 참 사랑하는구나 할 수 있는거야.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그녀는 가끔 밥을 먹다 울었고 친구는 왜 우냐고 물었다. 하기사 요즘은 지쳤는지 묻지도 않는다. 그녀는 오늘 왠지 TV를 켜기가 싫다. 아직 밝은 창 밖을 바라보고 있자 부엌 쪽에서 기척이 느껴진다.
  “또 왔어?”
  “저녁도 해 줄까 해서. 어때?”
  “상관없어.”
  돌아보자 친구가 부엌에서 맨발을 곧추세우고 있다. 그녀는 생각한다. 친구는 참 아름답다고.
  아름답지 않을 리가 없다고. 청색 티셔츠. 단이 빳빳한 면바지. 그리고 아기같은 발바닥과 가르면 맑은 피가 새하얗게 솟아나올 목덜미. 검푸른 머리카락, 밝은 뺨, 고운 코, 선이 뚜렷한 입술, 엉망인 듯 순결한 인상. 그녀는 조용한 친구에게 다가가는 상상을 한다. 조용한 친구의 목에 가만히 입술을 대는 상상을 한다. 손 안에 가득 들어차는 차갑지도 따스하지도 않은 머리카락.
  그녀는 상상속의 장면이 멀어져가는 것을 느낀다. 아무래도 변할 것은 없다. 그래서 그녀는 직접 일어나서 다가선다. 뒤에서 등을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말하자 그가 돌아보고 웃는다.
  그녀는 친구가 웃는 것을 처음 본 것 같다. 아마도 예수는 웃지 않았다는 말을 그녀가 신봉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친구가 나도 사랑한다고 속삭인다. 그녀는 그 다음의 말을 안다. 결혼할까? 하고, 딱딱하고 부드럽고 빛이 맺혀 간들거리는 은색 반지를 내미는 것이다.
  친구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긴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녀는 그날 밤 잠시 그 남자에 대해 생각한다. 번역사 일을 한다는 것 밖에 이름도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 그 남자도 무언가 전과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남자는 지금쯤 자신이 죽였거나 살려준 상대를 만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상대는 그 남자에게 직업이 뭐냐 결혼은 했냐 애는 몇이냐 따위를 줄줄 물어댈 것이다. 남자는 서른이 넘었는데 결혼을 하지 않은 자기 처지에 좀 당황할 것이고, 그녀 이야기를 할 지도 모른다. 상대는 그럼 어서 그 여자를 잡아서 결혼하라고 면박을 준다. 좋은 보석상을 몇군데 소개시켜주고 상대는 자리를 뜬다. 남자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멍하니 앉아있다가 자신이 만족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언젠가 남자는 정말로 반지 카탈로그를 뒤질지도,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문법은 얼마나 많은 미지를 전제하고 있는가.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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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rror 04.03.21 14:46 댓글 수정 삭제
    jxk160님에게 상품 - 박완서님 단편집과 밤을 사냥하는 자들이 전달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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