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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꿈의 해석

2003.12.26 19:5212.26

이번에 가장 고심했던 글은 미로냥님의 이어지는 단편들과 jxk160님의 꿈의 해석이었습니다.
미로냥님과 jxk160님의 글은 여러 면에서 대조적이었습니다.
미로냥 님의 글은 말하는 바가 명확하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 있고, 그 명제가 강력하고, 주인공들이 그걸 체현합니다.
미로냥 님의 글의 장점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쉬운 점이라면 사람 마음을 진짜로 움직이기 위해서 필요한 뿌리와 뒷받침이 약합니다.
주인공들은 멋진 신념을 가지고 그것을 지키며 살지만 '어떻게' 그걸 지키는지, 그걸 지키기 위해서 어떤 고생을 감내하는지가 적게 나타나고 그래서 한 편만으로는 부족하고 독립적이지 못한 연작 세 편 (졸업, 묘지 앞에서, 공주님)을 봐야만 비교적 명확해 집니다.
그렇기에 한 편을 뽑아야 하는 입장에서 눈에 띄는 한 작품을 선정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반면에 꿈의 해석은 디테일이 살아 있는 작품입니다.
형인이라는 캐릭터와 그걸 보면서 자꾸 가벼운 마찰을 일으키는 화자가 잘 그려졌습니다.
다만 특별한 역할이 없는 조연이 너무 많았습니다.
등산이랑 장어, 홈페이지 등의 장치들로 이어지는 심리의 흐름이 좋았고 그 불편한 느낌 때문에 어쩌면 비약이라고 볼 수도 있을 마지막 문단이 보완이 됩니다.
다만 여기서 “그래서 그것이 어떻다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떠오릅니다.
말하기보다는 보여 주는 것에 충실한 글로 보입니다만 좀 더 드러내주는 면이 있었다면 하는 점이 아쉽습니다.

jxk160님은 편집부 ( intoamirror@mirror.pe.kr )로 메일 한 통 보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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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xk160 ( sandmice@hanmail.net )



  눈이 오고 있었다.
  만화같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 고 말하고 싶었지만, 실은 흔하디 흔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과 비의 경계 사이에 살얼음장 하나를 두고 있는 것 같은 위태로운 눈, 자연과는 너무 멀고 오히려 사람과만 가까운 것 같은 눈이라 누군가는 꼭 내일의 출근을 걱정하고 누군가는 꼭 자전거 통학이 불편할 것에 대해 투덜거려야만 저 존재가치가 충족될 것 같은 그런 눈.
  자연 현상이라는 것은 이미 어느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모든 투덜거림을 덮어버릴 만한 눈은 어느 정도의 혹한에서야 내릴 수 있을까 : 아마 모두가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릴 만한 혹한이여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집과 난방장치를 가지고 있다.
  눈은 중세때 쯔음엔 이미 반 죽은 상태였을지도 모르겠다.
  첫 눈은 아니다. 첫 눈은 11월 중순쯤에 내렸다. 눈이 오는 걸 보고 샤워를 시작했는데, 샤워를 마치고 옆방 사는 형인과 마주쳐서 “밖에 눈 오더라.” 말하자마자 창 너머 지붕들에는 먼지 하나 쌓였던 흔적이 없었다. 형인은 내가 거짓말쟁이라면서 나를 신나게 무안주었다. 그리고 시들해지자 덧붙였다. “왜? 눈이 진짜 왔으면 또 어쩌게? 넌 자전거 끌고 통학하는 주제에 뭐가 좋다고 눈 오더라, 하냐.”
  “딱히 좋다는 건 아니였는데.” 나는 어설프게 웃어보였다.
  아무튼 그, 11월 중순의 되다만 첫눈 이후로 처음 내린 눈, 흔하디 흔한 눈이 냄새나는 풍경처럼 창 밖에 쌓인 날 밤 그네들은 내 기숙사 방에 모여있었다. 그네들이라는 건 여기서는 이제 이형인과 나와는 달리 팔년 전부터 여기에 살고 있던 중국 사람 제인과 중학교때부터 여기 살던 한국사람 신애.
  이 사람들은 내 방이 겨울에는 제일 따뜻하고 좋다고 생각는지 한번 들어오면 나갈 줄을 몰랐다. 신애는 보석맞추기 게임을 내 컴퓨터에서 플레이하고 있었고 제인과 나와 이형인은 침대와 카펫에 제멋대로 앉아서 떠들고 있다. 이게 세시간 째. 내가 이 사람들이 쳐들어오기 전까지 혼자서 뭘 하고 있었는지도 잊어버렸다. 그 망각만큼의 울화가 마음 속에 꾸역꾸역 쌓여간다.
  “헤에...” 하고 흘리는 제인의 웃음을 마지막으로 화제거리도 다 떨어졌는지 침묵이 흘렀다. 내가 발음이 좋지 않은 영어로 말했다. “이제 나가달란 말이야, 이놈들아.”
  “아, 그런데.” 제인이 도로 말문을 텄다. 내가 한숨을 쉬었다.
  “식물도 비명을 지른다며?”
  “응.” 내가 억지로 대답하자 신애가 웃었다.
  “그러면 샐러드를 어떻게 먹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형인이 내 얼굴을 살피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랄까, 나는 소스를 바른 장어 쪽이 좋다.





  이형인. 한국에서도 나는 이 친구와 여행을 갔던 적이 있다. 물론 신혼 부부도 아니고, 단 둘은 아니라 몇몇 친구들이 더 있었다. 하지만 이 친구가 가장 끈질겼다. 산에서는, 고작 왕복 네시간짜리 산행이었는데, 나는 송충이나 쐐기라도 목덜미에 떨어질까봐 깃 끝까지 단추를 잠그어두고 있었고, 나머지 친구들은 익숙치도 않은 산행길에 힘이 빠져서 왜 산을 오르는지도 잊어버린 채 묵묵히 따라왔으며, 이 친구는 그러게 몇번이나 말했는데도 캐쥬얼화를 신고와서 타박타박 걷다가 소리쳤다. “야, 힘들어 죽겠다!”
  “이게 힘들면 어쩌누? 꼭대기까지 한시간은 더 남았다.”
  내가 면박을 주자 뒤에 멀쩡히 따라오던 애들까지 쉬다 가자고 주저앉았다. 형인은 방긋 웃었다. “하지만 야, 진짜 힘들어 죽겠어.”
  이십분 후. 스키장 리프트 승강장에서 리프트 하차장을 올려다보듯이 우리는 팔백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애들이 말없이 내 손과 밧줄을 꽉 잡고 눈 쌓인 계단참 한발 한발을 딛었다. 이형인은 처음엔 맨 꼬리에서 걷고 있더니만 어느새 내 코앞을 스쳐 나보다 더 위에 올라갔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아무에게도 도움받지도 않고 우리중엔 맨 처음으로 계단 꼭대기에 올라가서, 그 친구는 땀을 식히고 있다가 우리 일행이 다 도착하자 빙 둘러보면서 말했다. “야, 힘들어 죽겠어!”
  산을 다 올라가서 다 내려갈때까지 그 친구는 결코 내 도움을 받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번씩 나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진짜 힘들어 죽겠어!”
  언제나 그 친구가 나를 돌아보면서 말했기 때문에 나는 그 친구가 우리 중 맨 앞에 있을때만 그 소리를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다른 친구의 뒤에 올 때는 형인은 결코 아무 소리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새침한 얼굴로 조용히 따라오다가 좀 힘겨운 코스가 나올 때면 그는 용케 나를 앞질러갔다. 그리고 꼭대기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가 아주 똑똑한 발음으로만 말했다. “야, 힘들어 죽겠어!”
  산행이 끝나고 그 힘들어 죽겠다던 형인이 힘든 값으로 먹어야겠다는 장어 구이를 먹으러 우리는 여관에 들르기 전에 식당부터 갔다. 그 친구가 먹어야겠다는 건 사실 받아먹어야겠다는 뜻이다. 자기 부모의 돈으로부터 혹은 자기 무능한 처지로부터. 받아먹어도 정당할 만큼의 인권, 그렇다, 말 그대로 힘들어 <죽겠다>고 등산 내내 주장한 바가 설마 거기에 있는 것인가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소설을 읽듯 하는 편견이라고 생각하고 지워버렸다. 형인은 우리를 그 지방 특유의 소스를 바르지 않고 굽는 장어구이 집으로 끌고갔고 그 장어 구이를 무지막지하게 먹어치우더니 그날 밤 화장실에서 토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우리가 멀뚱하게 눈을 뜨고서 걱정하고 있는 거실로 걸어나와서 그는 아주 똑똑한 발음으로 외쳤다. “난 왜 이렇게 운이 없는 거야!”
  나는 그때 생각하기를 이 친구가 서울에 돌아가면 또 장어를, 오늘과는 비교도 안 될만큼 굉장한 장어를 먹고 싶어하겠구나 여전히 소설이라도 쓰듯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야 한 일이지만 의외로 그게 맞아떨어졌다. 소설을 쓰듯하는 예감, 소설을 읽듯하는 편견. 하지만 그건 이 이형인이라는 친구에게는 제법 들어맞는다. 이 친구 자신도 소설을 많이 읽고 쓰는 취미를 가진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산에 간 다음날 우리는 바다도 갔다. 바다에 간 다음날에는 짐을 쌌고 미리 끊어둔 기차표를 이용해서 서울로 돌아왔다. 보드라운 알집같은 기차 속에서 친구 둘은 조용조용 수다를 떨다가 잠이 들었다. 나나 이형인은 네시간동안을 귀에 꽂은 음악에 흘려보냈다.
  여관에서는 사흘동안이나 샤워를 한 적이 없으니 우리는 기차를 타고서야 각자의 방식대로 샤워를 한 셈이다. 샤워를 갓 마치고 자기 팔꿈치 안쪽에서 나는 체취보다도 엷은, 일상. 극장은 항상 영화를 영화로서만 보존한다. 기차도 마찬가지다. 그럼으로서 극장이나 기차는 우리의 사생활을 보호한다고, 나는 사실 생각하지 않고 공상했다.
  서울에 돌아와서 우리 넷은 각각의 집으로 돌아갔다. 방학이 끝나고는 우리 넷은 각각의 학교로 흩어졌다.
  이형인과 나만은 같은 학교에 다녔는데, 이형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꼬여서 나를 학교에서도 한시간, 집에서도 한시간 걸리는 비싼 장어집으로 데려갔다. 다른 친구들은 부르지 않은 걸 보니 내가 제일 친근했던가, 혹은 본능적으로 나를 제일 만만하게 여겼던가 했을 것이다. 어느쪽이건 마음에 들진 않았다.
  우리는 각기 먹은만큼 돈을 내기로 했다. 자리를 안내받을때부터 식당 문을 나설때까지, 형인은 내내 자기도 자기몫의 장어값을 내기로 했으니 네가 그르게 지불하는 것은 하나도 없지 않냐는 식의 의기양양한 태도를 취했다. 나는 문득문득 네가 아니였으면 나는 위장이 터질 정도로 멍청하게 밥을 처먹으려고 이 식당에 올 일 자체가 없었어, 말하면서 이 작자의 대가리에 물을 부어주면 어떨까 하는 공상을 했다. 그는 식사가 끝나고 나자 술 한병을 시켰다.
  종업원이 와서 대나무통 가장자리에 뚫린 입에서부터 술을 따라주었다. 종업원은 엉덩이에 딱 달라붙은 감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 치마 아래부터 툭 튀어나온 허벅지의 양감은 음란하거나 가난할 것도 없이 그저 눈부시게 육체적이였다. 나는 얼른 술잔을 비워버리고서 진저리를 쳤다. 이형인이 “햐, 역시 민속주가 최고지 않냐!” 했다.
  “그래, 장어는 맛있냐?” 내가 물었다.
  “좀 짜긴 하다 야. 그래도 맛있네.” 그가 몹시 똑똑한 발음으로 말했다.
  곰살맞게 고개를 갸웃하고, 짭 하고 한점 집어먹고, 짐짓 진지하게 입 안에서 향취를 굴려본 후 똑똑한 발음으로 그가 말했다. 그가 나머지 장어를 먹고 내가 남은 반찬을 더 집어먹고 우리 둘다 술잔을 기울이면서 대화를 하는 내내 나는 회칼로 자살해버리고 싶은 마음을 죽이고 있었다.




  산에 간 다음날 우리는 바닷가에 가기로 했다. 겨울 바다, 발음은 공허하지만 가서 볼 건 하나도 없다는 걸 우리 모두 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공허한 발음을 좋아하는 사람들로서 여럿이서 가면 공허는 희극이 되기 십상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게 우리 공허의 약함인지 사람들의 강함인지 혹은 사람들의 약함인지 그것도 모른 채로도.
  그런 것들을 모른 채로 무언가를 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저 무언가를 싫어하거나 좋아했을 뿐이다. 아무튼 나는 겨울 바닷가의 강풍에 대해 좀 과장해서 떠벌렸고 애들은 두툼한 점퍼 하나씩은 챙겼다. 바닷가에 가서, 사람의 뇌같은 모래를 밟으면서 우리는 하릴없이 떠돌았다. 바람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서 있는 것도 심심치는 않았다.
  “방파제까지 가 볼까?” 다른 친구 한명이 말했고 나를 위시해서 다들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형인도 좀 탐탁잖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는 방파제 끝까지 갔고 일부러 점퍼 자락을 열어젖혀 수평선을 싣고 오는 바람을 맞았다.
  이형인이 머리카락을 걷어내면서 말했다. “별로 센 바람도 아니네.”
  “그래?” 내가 반문했다.
  “그래. 재미없다 야.” 이형인이 말했다.
  눈과 비의 경계 사이에 살얼음장 하나만 두고 있는 것 같은 - <힘들어 죽겠어>와 <재미없다 야>. 내 지나친 편견은 그 말들을 그렇게까지 재구성해냈다. 그렇기에 서울 그 장어집에서 내 마음이 그렇게까지 좌절로 끓어오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야, 그런데.” 화제가 지칠 때쯤이면 언제나 제인이 고개를 쳐들고 말을 꺼낸다.
  “이 학교 자살하는 사람 많다며?”
  “응. 하지만 미국 대학들은 어디나 그런 경우가 많으니까, 특별할 건 없지 뭐.” 내가 말을 받았다. 제인이 끄덕거렸다.
  “하지만 자살할만큼 뭔가가 힘들면 누군가한테 말하는 게 낫지 않아?”
  “그럴지도 모르지만 꼭 누가 해결해주리란 법도 없고...”
  “그래도 나는 웬만큼 힘들면 누가 들어주는 게 좋더라구. 친구들한테 제법 상담하는 편이야.”
  “연수는 그런 타입이 아니지.” 형인이 끼어들었다.
  “쟤는 딱 서른살 전에 자살할 타입이야.” 형인이 내 미래에 암시를 걸어주었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나는 형인 쪽을 돌아보았다.
  “형인, 넌 어떤데?” 신애가 게임을 하다 말고 물었다. 형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말 안하는 타입.”
  그래? 나는 형인의 얼굴을 지그시 들여다보려다가 만다.
  “나 초등학교 다닐 때 중국에서는, 애들이 선생님이나 부모한테 많이 얻어맞았는데...” 제인이 어느 틈에 또 화제를 바꿔놓는다.
  “요즘은 안 그러게 됐다더군. 한국은 어때?”
  “한국도 요즘은 훨씬 덜하다더군. 하지만 나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부모한테 맞는 애들이 있었던 것 같아.” 습관적 구타라고 하고 싶었지만 내 영어가 모자랐다.
  “어떤 식으로?”
  “멀쩡하게 생긴 애였는데, 도자기를 머리에 깨버리는 경우도 있었고 오빠가 주먹으로 뺨을 때리는 경우도 있었어. 그래서 울고 있으면 시끄럽다면서 또 한번씩 나와서 발로 차고 들어갔대.”
  “무슨 드라마같은 얘기네.”
  게임을 하고 있던 신애가 싱겁게 웃었다. “드라마같은 얘기가 아니라 드라마에만 나오는 얘기잖아.”
  “아니, 그건 아닌데.” 나도 싱겁다고 생각하면서도 딱히 웃어넘기기는 싫어서 말했다. 그러자 신애가 갑자기 팩 토라졌다. “그렇게 진짜같이 좀 얘기하지 마.”
  나는 입을 다물었다. 어느 순간 형인과 눈이 마주쳤다. 형인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미소지어보였다. 쟤는 진짜 장어맛을 몰라, 하는 것 같은 미소.
  그날 바닷가에서 먹었던 생장어구이가 갑자기 기억에서부터 위장 속으로 치밀어올랐다. 넌 그게 진짜 장어맛이라고 했지. 실제로 맛도 괜찮았어. 하지만 소스를 얹지도 않고 장어를 굽는 법이 어딨어!
  “나갔다 올게.” 내가 일어섰다. 제인이 어디가냐고 물었다.
  “너네도 케익 먹을래? 아직 베이커리 열었을텐데 몇조각 사올게.”
  “눈 뚫고 갔다오게?”
  “이제 별로 오지도 않네 뭐.”
  나는 서랍 속에서 자전거 열쇠를 챙겼다.





  지금은 두개 뿐이지만 석달 전까지만 해도 형인은 홈페이지가 세개 있었다. 좋아하는 연예인의 팬페이지 하나, 소설쓰기 홈페이지 하나, 감상과 비평이 주로 된 홈페이지 하나. 어느 홈페이지나 간단한 메뉴 맨 끝에는 회원들만 관람 가능한 형인의 일기장이 있었다.
  형인은 일기에 모든 것을 쓴다. 일기를 읽을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일이라도 가차없이 써넣어버린다. 그러나 그에 관해 무어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일기에 불과하고 그 점을 존중해주지 않으면 그의 적이 될 것이므로. “한 사람의 일기장도 존중해주지 않는 사람과 어떻게 사귀겠어?” 그는 말했다.
  어쨌거나 그 성지를 흙발로 건드리지 않는 한 그는 훌륭한 홈 주인이였고 그의 세 홈은 소규모 치고는 나날이 번창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일기도 읽게 되었으리라.
  그의 일기장에는 이인칭 대명사가 참 많이 나왔다. 너와 오늘 술을 마셨다. 네가 빌려준 책을 오늘 읽었는데 참 재미있더라. 오늘은 네 생일이였다. 네가 그렇게 말했던 것이 기억에 남아서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그가 주체인지 네가 주체인지 알 수 없는 어둠 덩어리같은 글. 골치가 아파져서 그에게 물었더니 그는 다만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일기 속에서는 모두 <너>라고 지칭하는 것 뿐이라고 했다.
  내용에 대해서 치사하게 굴지 말랬겠다 - 그럼 <왜 그렇게 부르는데?>같은 질문을 할 수는 없고.
  일기도 텍스트니까, 상호 커뮤니케이션 차원에서나 질문해보자.
  “그 <너>들이 다 읽는 사람 입장에서 분간이 되겠어?”
  “분간이 안 되니까 재미있는거지.” 그는 혀를 날름거리면서 웃었다.
  “본인들이 뭐라고 하지는 않고?”
  “그네들도 재미있어하는 걸.”
  나는 결국 그의 지인들은 모두 돌았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 수학 학원에서 나는 그를 처음 만났다. 한달 후 쯤에는 우리는 서로의 학원 영수증을 위조해줄 만큼 서로에 대해 안심하게 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학원은 다니지 않으면서 그 시간에 만화방이나 떡볶이 집에 앉아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형인은 내게 그의 홈페이지 주소들을 가르쳐 주면서 거기 가입해달라고 했다.
  가입하라는 게 아니라 가입해달라. 묘한 뉘앙스였다. 아무튼 내가 가입 신청을 하자 그는 처리를 미뤄두고 다음날 내게 직접 물었다.
  “너 아이디가 이상하던데. 글자 깨진 거 아니야?”
  “아아, 아니야. 숫자 영 다섯개로 나오지? 내 아이디 어딜가도 그거야.”
  그게 뭐야? 물어올 법도 했는데 그는 묻지 않고 가만히 내 얼굴만 들여다보았다. 그의 일기장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서였겠거니 하고 넘겼다.
  고등학교 삼학년이 되어서 나는 그의 일기장 속에서 처음으로 너가 되었다. 허나 나로서는 남의 공상속에서 너로 독백되는 것이 몹시 부담스러워서 우리 사이는 조금씩 소원해져갔다. 그러던 것이 같은 대학이 되고 나자 서로 진주라도 찾은 양 반가워서 도로 친해지고 말았다.
  그는 어쨌거나 깨끗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것을 내가 확신하는 까닭은, 그가 그 사랑을 한없이 감추려고만 들기 때문이다. 치부로 여겨지는 사랑은 보통 진실하다. 입김이 보일 만큼의 어느 겨울날, 포장마차에서 돼지껍질과 함께 소주를 마시다가 그는 그 욕망을 노골적으로 토해냈다. “우리가 공허를 왜 사랑하겠어?”
  “글쎄.” 내가 얼버무렸다.
  “난 내가 그런 걸 사랑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너는 왜 그런데?”
  “그건 공허가 결여이기 때문이야. 결여라는 건 더럽혀질 수가 없는 것이거든.”
  그는 진심으로 자조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런가, 좋은 생각이다 하고 말하면서 고개만 끄덕거려 주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건 그의 아이디어만은 아니었다. 그건 그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때 겨울바다에 갔던 친구들 모두가 한번씩은 꿈꿔본 적 있는 것이었다. 예컨대 우리네 사춘기적 꿈처럼, 미안하다는 유서만 남겨놓고 손목을 끊는 꿈같은 것.
  하지만 그러려면 죽어야만 하고 우리 부모가 살아있는 젊은이들은 죽으려면 죄를 지어야만 한다. 더구나 우리는 살 수 있다면 언제까지라도 살고 싶었다. 그러매 생각건대, 밤에 문득 찾아오는 지분지분한 외로움과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죽을 것 같은 무의미로만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느냐하고. 우리는 그 외로움에 목메어 죽을 것 같을 때마다 각자의 썩은 방에서 꿈꾸었고 무언중에 그 감각을 통해서만은 서로를 만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상처입히기 싫었기 때문에. 그 다음날 형인의 홈에 들러보니 형인은 그 아이디어를 한편의 소논문처럼 정리해서 그대로 일기에 써 놓았다.
  다음 날 학교에서 그는 내게 부끄런 얼굴로 속삭였다. “어땠어?” “무엇이?” “그 일기에 써 놓은 거... 어떻데?” 내가 말했다. “그래서 너는 결코 숫자로만 된 아이디를 가질 수 없는거야.”
  그는 즉시 일기를 지워버리고 그 홈페이지를 닫았다.
  좌석의 눈을 털어내고 자전거에 올라탄다. 바지 중간이 젖어서 오줌싼 꼴로 보이는 것을 상상한다. 곤란한 상상.
  우리 학교는 치안이 좋지 않다. 앞으로도 뒤로도 양 옆으로도 둥글게 뻗은 학교 부지 여기저기에는 폭행범이 숨어있거나 강간범이 숨어있거나 했다. 두달에 한번씩 안전기획부는 하릴없이 학생들에게 메일을 보냈다. 이런 사람에게 누구누구가 얻어맞아서 광대뼈가 부러졌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조심하라니, 아무래도 철갑이라도 사서 입고다니란 말인가보다. 그렇대도 학교는 철갑을 사 입을 돈을 배급해야 했다. 그런데 밑에는 한마디가 더 있다. 발견하면 꼭 신고해주십시오.
  다음 달에는 검은 바지를 입은 누구누구가 무슨무슨 거리에서 총을 난사했다는 메일이 왔다. 다행히 이번에는 조심하란 말은 없고, 거리에서 마주치게 되면 피하십시오. 나는 범인을 피하기도 전에 마주치게 되는 모순까지 해결할 머리가 없으므로 아예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아무튼 그 수많은 범인들 중 체포된 사람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어본 채로, 혹은 그렇게 범죄가 저질러지고 또 체포되는 경우는 이 지역에서는 너무 흔해서 발표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멀쩡히 그런 저런 거리들을 나다니며 쇼핑을 하고 케이크를 산다. 학생들이 특히 케이크를 사러 자주 들르는 곳은 흑인 지역과 백인 지역의 중간쯤에 있는 품위있는 베이커리다. 아주 맛이 좋은 무스케익을 팔고 있으며, 기숙사 동에서는 자전거로 십오분쯤 걸린다. 가로등이 켜져있는 빨간 블록의 거리와 가로등이 거의 켜져 있지 않은 빨간 블록의 거리가 각각 십분과 오분.
  나는 케익을 사러가는 길에 가로등이 켜져 있지 않은 빨간 블록 거리를 지난다. 될 수 있으면 빨리 지나고 싶다. 시간은 아홉시 반이고 눈이 오는 가운데 더할 수 없이 어두컴컴하다. 골목 길, 그림자로만 두 사람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자전거를 멈추었다.
  목소리로 보아 두 사람은 남녀인 것 같았다. 둘이 거리에서 안고 꿈틀거리는 거야 이 지역에서는 흔한 일이래도 한쪽이 한국말을 내뱉았기 때문에 내 머릿속에서 더이상 이것은 이 지역의 일로 간주되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안전기획부에서 온 메일을 생각했다. 키 백팔십쯤 되는 흑인, 턱수염이 있고 눈썹 끝에 고리를 꿰었고 검은 바지차림... 나는 식물이 비명을 지르건 말건 내가 샐러드를 좋아하기 때문에 샐러드를 먹는다고 말하고 싶었다. 곰은 난폭하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곰돌이를 발명하는 건 너무 치사한 노릇이라고.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건 항상 우리 곁의 바로 그 사람들이며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의지로 그들을 외면하고 있다고. 거의 아무 생각없이 나는 남자가 흉기를 꺼내들고 있는 팔목에 손을 댔다.
  남자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나는 소름이 끼쳤다. 발음 나쁜 영어로, 스탑 잇... 더듬거리려는데 남자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돌아보니 학교 문장을 가슴에 단 경찰 둘이 서 있었다.
  “요즘 순찰을 돌고 있어요. 이 거리에서 저런 경우가 많다는 정보가 있어서요.” 경찰 하나가 말했다. “큰일 날 뻔 했네요. 다른 경찰을 불러서 에스코트 해 드리겠습니다.” 통통한 경찰이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다른 경찰은 무전기로 어디다 연락을 하더니 순찰차 옆에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자전거와 케익에 대해 고민하면서 기다리다가 결국 경찰이 한눈을 파는 사이 자전거에 올라 타서 혼자 케익 가게로 가 버렸다.
  이렇게 해서 신애의 문제는 해결되었다. 나는 중얼거리듯이 생각했다. 그러고나자 마음이 한결 유쾌해진다. 유쾌해진다? 그 말은 어딘지 성적인 쾌락을 연상시킨다. 질척질척한 거리를 미끄러지면서 나는 내가 서랍을 열어서 여자의 질을 여는 열쇠를 가져왔다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토론은 객관적 진리와는 거리가 멀고 헤겔과 쇼펜하우어는 동시에 위대하다. 어둠속으로 폐달을 깊이 밟으려는데 순찰차 한대가 경적을 울린다.
  “당신은 에스코트가 필요합니다.” 나는 얌전히 기차에 올라탄다.





  기숙사 방에 돌아왔지만 이미 애들은 각자 방에 돌아가고 없다. 문을 두드리자 한명씩 나와서 접시에 케익을 받아간다.
  생각없이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자 네가 접속해서 말을 건다. <안녕>.
  경찰도 흑인도 강간당할뻔한 아가씨도 건드릴 수 없는 네가 <안녕>이라고 한다. 너는 대뜸 <너 요즘 내 홈들에 잘 안오더라> 한다. 그건 그렇다. 네 홈페이지 하나가 폐쇄되었을때 나는 왠지 기분이 상해서 네 다른 홈에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대로 말하기는 이상하고 적당히 지어낸 변명을 타자치는데 네가 이어 말한다.    <가끔가다 느끼는 건데.>
  너는 힘들게 말한다. <너, 날 경멸하는 건 아니냐?>
  <아니야>라고 쳐 놓고서 내가 얼마나 꼴사납게 울었는지 내 방문 네 방문 문 두개 건너편에 있는 너는 모른다. 스크린 앞에서 우는 건 이제 지긋지긋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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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실제로 소스 없이 구운 장어를 먹은 적이 있지만, 그 장어는 여
기서는 순수하게 소재로서만 썼다고 단언합니다. 누구에게건 다른 오
해가 없기를. 나는 그 장어가 정말 맛있었고 같이 먹었던 사람들에게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고 관련된 아무것에도 전혀 불만 없습니다.

댓글 2
  • No Profile
    mirror 04.03.21 15:14 댓글 수정 삭제
    두 권.. 보내드렸는데 뭐였는지 생각이 안나네요.;;;
  • No Profile
    jxk160 04.03.25 17:37 댓글 수정 삭제
    엇..^^; 이문구씨 관촌수필과 황석영씨 중단편집이었습니닷. 다시 한번, 고마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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