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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하나의 공간

2003.07.26 03:5407.26


제2호 독자 우수 단편 후보작은 창간일부터 7월 20일 자정까지 올라온 글로 총 네 편이었습니다. 비록 단편 수는 많지 않았지만 모두 좋은 단편이었다는 점이 기쁩니다.

특히 세상의 중심은 감각적이고 뛰어난 수작으로 하나의 공간과 함께 어느 작품을 우수 단편으로 뽑아야 할지 편집부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직 불안정하지만 독창적이며 재치있는 문장도 돋보입니다.

하나의 공간은 형식미에 비해서 내용이 아쉬웠습니다. 제목도 조금 더 생각했더라면 좀 더 깊이 있고 내용과 어울리는 상징적인 제목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구요. 하지만 문장의 완성도와 이야기 형식과 내용의 균형이 잘 맞는 좋은 작품이었기에 우수 단편으로 추천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빡살님의 강은 단편 소설이라기 보다는 이미지의 잔상 쪽에 가까웠지만 역시 좋은 글이었습니다.

루나님의 습작은 아직은 미숙하지만 다음 글을 기대하고픈 글이었습니다. 건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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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 kimduhm@empal.com )
  


  사방에 빨간색 매트리스가 붙은 공간에서 내 몸은 다시 공중에 떠올라 있었다. 내가 왜 순간적으로 '다시'라는 단어를 생각했는지 알 수 없다. 팔과 다리를 옆으로 뻗어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지만 그래도 몸이 조금씩 좌우로 기우뚱거렸다.
  
  치수가 커서인지 꽤 헐렁한 검은색 옷을 입었고 역시 검은색 가면까지 쓴 상태였지만 이곳에는 거울까지 치워진 상태이기 때문에 아직 내 모습을 전체적으로 볼 수 없었다. 나는 팔과 다리를 버둥거리며 가까스로 한쪽 벽에 몸을 기대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발로 벽을 박차면서 맞은편 벽이 있는 곳까지 가보려 했지만 삼 분의 일도 채 가지 못한 상태에서 다시 몸의 중심을 잡기 위해 공중에서 팔과 다리를 버둥거렸다. 그러다가 한 번 팔다리를 붙여 쭉 펴보았더니 몸이 제자리에서 옆으로 두세 바퀴 회전했다. 순간적으로 팔다리를 벌려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머리에 힘을 준 상태에서 고개를 천천히 뒤로 젖히자 서서히 바닥에 서 있는 자세처럼 내 몸이 일으켜졌다. 하지만 간신히 몸을 세우자마자 곧 공중으로 느리게 몸이 치솟더니 천장에 붙어 있던 매트리스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혔다. 그 바람에 다시 몸의 균형이 무너졌고 얼른 팔 다리를 움직여 등이 천장에 닿도록 만들었다.
  
  사실 나에게 있어 벽과 바닥, 천장의 구분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모두 빨간색 매트리스로 덮여 있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내 몸이 천장에 붙어 있는 상태라면 이곳은 바닥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리고 몸을 움츠려 마치 무릎을 굽혀서 바닥에 앉는 것처럼 그대로 천장에서 취해보았다. 천장에 앉아 습관적으로 머리카락을 쓰다듬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머리까지 덮인 검은색 옷 때문에 머리 전체를 한번 만져보고는 곧 손을 내려놓았다.
  
  나에게는 천장 역시 바닥과 마찬가지의 공간일 뿐이라는 생각을 한 뒤부터 몸이 천장에 닿은 상태에서도 더 이상 균형을 잃지 않았다. 나는 이곳에서 자유롭게 공간 전체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만 연습하면 된다. 벽과 천장을 걸어다니고, 그 밖에도 공간에서 몸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방법만 알아내면 되는 것이다.
  
  앉은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발을 옮겨 천장을 걸어다녔다. 지나치게 천천히 걸었던 탓도 있었겠지만 공간 역시 꽤 넓었기 때문에 나는 천장을 한 바퀴 돌고 나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걷는 동안 마치 외줄을 타는 것처럼 습관적으로 팔을 양쪽으로 벌렸다가 내리는 동작을 반복했다. 계속 움직여보기 위해 이번에는 좀더 빠른 속도로 천장을 걸어다녔다. 날고자 하는 욕구가 지나쳐서도 안 되고, 반대로 공중을 날 수 없을 것이라 체념해서도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내 몸은 바닥에 붙어 있는 매트리스조차 제대로 밟고 서 있지 못할 것이다. 날 수 없을 것이라고 체념할 때 내 몸은 공중에 붕 떠오르게 되고, 곧이어 날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몸의 중심조차 잡지 못하고 공중에서 버둥거릴 것이다. 하지만 분명 공중을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몸이 갑자기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몸이 어떻게 공중에 떠 있을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다시 공중으로 떠오르기 위해 바닥에서 몇 번 힘차게 껑충거려보았을 뿐 몸이 공중에 뜰 수 있는 방법이나 기술을 찾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벽에 붙은 매트리스를 더듬으며 혹시 밖으로 통하는 출입문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러면서 출입문이 어쩌면 천장에 설치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매트리스를 붙잡고 벽을 오르려는 시도를 했다. 천장을 이리저리 훑어보니 중앙에 있는 매트리스 중 다른 부분들과는 달리 한 곳이 약간 주황빛을 띠는 것처럼 보이는 곳이 있었다. 어쩌면 저 부분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출입문 역할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도구 같은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천장까지 닿을 수 있는 방법은 찾을 수 없었다. 방법이라고는 내가 공중을 날아서 저곳까지 올라가는 것뿐이었다. 나는 몇 발자국 걷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갑자기 움직임이라는 것에 대해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나는 손과 발만 외부에 노출되어 있을 뿐 몸 전체가 검은색 옷과 가면으로 가려진 상태였다. 그래서 손톱과 발톱의 길이를 통해 이제부터라도 시간의 흐름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여보기 위해 앉은자리에서 일어나 발을 내딛었지만 곧 주저앉고 말았다. 매트리스 표면이 오른쪽 엄지발가락을 감쌀 때마다 통증을 느꼈다. 바닥에 앉아 손으로 엄지발가락의 발톱 주위를 만지자 심한 통증을 느꼈다. 발톱 끝이 이미 살을 파들어가면서 자라고 있었다. 발톱을 깎아야 하는데 이곳에는 그럴 만한 도구가 없었다. 또다시 일어나 절뚝거리며 몇 걸음 걸었다. 바닥이 딱딱했더라면 엄지발가락의 통증을 덜 느꼈을 텐데 매트리스의 탄력이 너무 좋은 탓에 걸을 때마다 발이 움푹 들어가면서 통증이 더 심해졌다. 어쩔 수 없이 오른쪽 발은 뒤꿈치만을 바닥에 닿게 하면서 걸어야 했다. 습관적으로 머리카락을 만지기 위해 손을 머리 쪽으로 가져갔지만 머리까지 뒤덮은 옷 때문에 만질 수 없었다. 발톱의 통증이 사라져야만 이곳을 나갈 수 있는 출구를 찾기 위해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손톱과 발톱의 길이 변화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계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때부터 어쩌면 나는 발톱의 통증을 우려했을지 모른다.
  
  육안으로 보기에 발톱의 길이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방을 한 바퀴 도는 동안, 나는 어떤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성별을 분간할 수 없는 누군가의 음성이었다. 하지만 분명 낯설지 않은 사람의, 내지는 사람들이 내는 귀에 익은 음성이었다. 소리는 여자의 음성 같기도 하고, 어느 여자 목소리를 흉내내는 남자의 조작된 음성 같기도 했다. 나는 방 안을 걷는 동안 들려오는 소리를 속으로 되뇌어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두리번거리며 계속 무언가를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바닥에 앉아 내가 들었던 소리를 기억해내서 그것의 의미를 생각해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 소리를 다시 기억할 수는 없었다. 소리를 다시 기억해내려 해도 도무지 소리 자체가 떠오르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선 조금 전에 들었던 소리부터 다시 떠올려보기 위해 입으로 계속 무언가를 웅얼거렸지만 언어로 그 소리를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소리가 입 밖으로는 튀어나오지 않았다. 소리를 흉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단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는 사실만 기억할 수 있을 뿐이었다. 성별을 분간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여자의 음성이었다고 짐작되던 소리의 정체가 어쩌면 출구를 찾을 수 있는 단서일지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에서, 다시 한 번 소리를 듣기 위해 공간을 걷기 시작했다. 설사 소리의 해독이 출구를 찾는 결정적인 단서까지는 아닐지라도 어떤 식으로든 이곳과 연관이 있을 것임에는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는 잠시 후 너무나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저 매트리스가 붙어 있는 벽 중에서 어느 한곳을 향해 돌진하면 외부 세계로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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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소리를 들은 뒤로 나는 마치 현기증을 느끼듯 저절로 몸을 몇 번 바닥에서 휘청거렸다. 그리고 빨간색 매트리스가 붙은 공간에서 내 몸은 다시 공중에 떠 있었다.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상태에서 천천히 몸을 편 후 조심스럽게 발을 천장에서 뗐다. 그러자 몸이 조금 아래로 내려오다가 공중에서 멈췄다. 팔을 아래로 뻗어 몸에서 힘을 빼고 있었는데 갑자기 자석에 이끌리듯 몸이 오른쪽 벽의 매트리스를 향해 빠른 속도로 끌려갔다. 벽에 부딪힐 때 충격을 덜 받으려고 필사적으로 몸을 움츠렸지만, 벽에 부딪히는 순간 비명을 지르면서 동시에 헛구역질을 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이 바닥으로 미끄러지듯 내려가더니 바닥에서 한 뼘 정도의 높이에서 멈춰진 채 몸이 바닥 쪽으로 쓰러졌다. 그럼에도 내 몸은 바닥에서 한 뼘 정도 높이의 공중에 떠 있는 상태였다. 쓰러진 상태에서도 계속 헛구역질을 하면서 손으로는 바닥을 짚으려고 매트리스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몸을 바닥에 붙이기 위해 천천히 팔을 구부렸다. 하지만 몸이 다시 위로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움켜쥔 매트리스를 결국 손에서 놓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발광하듯 소리를 지르며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그러자 몸이 점점 위로 떠오르더니 곧 천장에 붙어버렸다. 발광을 멈추자 내 몸 역시 천장의 매트리스에서 한 뼘 정도 내려와 멈췄다. 나는 또다시 몸이 벽 쪽으로 끌려가게 될까봐 나름대로 최대한 움직임을 자제했다. 그나마 몸이 바닥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일지라도 어느 정도 안정을 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닥을 내려다보며 차츰 호흡을 가다듬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한 것 자체가 실수였다. 몸이 어느새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결국 위치가 정반대로 바뀌고 말았다. 천장에서 한 뼘 정도 떨어진 높이에서 눈앞에 있는 매트리스만을 쳐다볼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됐다. 가까운 거리에서 빨간색을 계속 쳐다보고 있으려니 점차 매트리스의 색이 검은색으로 변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차라리 눈을 감고 있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나마 빨간색의 매트리스라도 보기 위해서 실제 눈을 감지는 않았다. 그때 매트리스 표면에 약간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미세하긴 하지만 표면 전체가 고르지 못하고 울퉁불퉁해 보였다. 자세히 보니 매트리스 표면의 돌출된 부분이 작은 정사각형 모양을 띠면서 규칙적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매트리스 표면에 있는 단순한 모양의 나열이 분명 낯익은 벽지를 연상시켰다. 그리고 표면의 색만 빨간색일 뿐 매트리스의 무늬는 분명 내가 오래 전에 살았던 곳의 벽지 무늬와 똑같다는 생각까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단편적이지만 그곳에서 생활하던 모습들이 영상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밥을 먹기 위해 쏜살같이 몸을 일으킬 때를 제외하고는 현기증 때문에 항상 빨간색 매트리스가 깔린 침대에 누운 채, 한 쪽 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방 안이 무척 더웠기 때문에 하루종일 등뒤에다 선풍기를 틀어놓았다. 가끔 전화벨 소리나 초인종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지만, 나는 침대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형광등을 하루종일 켜놓고 있었기 때문에 잠이 들어서도 가끔씩 형광등의 소음을 느꼈다. 그리고 손톱으로 벽지를 긁어대기도 했던 탓에 벽지의 정사각형 무늬가 어긋나 있는 부분도 있었다. 침대에 누운 자세에서 고개를 조금만 뒤로 젖히면 항상 드레스 한 벌이 의자 등받이에 걸쳐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침대가 있는 벽 맞은편에는 유난히 손톱이 긴 여자 모양의 마네킹이 여러 개 놓여 있었는데, 그것들 모두가 똑같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게다가 마네킹의 얼굴에는 모두 한 여자의 실제 크기만하게 현상된 얼굴 사진이 가면처럼 붙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가능하면 그쪽을 쳐다보려 하지 않았다. 마네킹을 쳐다보기만 하면 마치 누군가가 내게 말하는 듯한 웅얼거리는 소리가 음산하게 들렸다. 그래서 나는 항상 마네킹이 있는 곳을 피해 반대쪽으로 몸을 돌려 누워 있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웅얼거리는 소리 역시 말 그대로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무슨 소리인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주 가끔씩 마네킹 있는 곳까지 걸어가 그것의 입에 귀를 갖다대고는 했다. 그래도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을 때에는 역시 아주 가끔씩 의자 등받이에 걸쳐 있는 드레스를 직접 입고, 책상 위에 쌓인 똑같은 사진들 중에서 한 장을 집어 얼굴에 붙이고는 마네킹들 옆에 서서 더 조심스럽게 귀를 대보기도 했다.
  
  이 말은 언젠가 친구가 나에게 했던 말과 똑같았다. 친구는 어느 날인가 내가 하는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다고 했다. 내 귀에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들렸지만, 친구는 내게 왜 계속 웅얼거리기만 하느냐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물었다. 그 뒤로 나는 여러 사람에게서 그런 소리를 들어야 했다. 드레스를 사기 위해 들어갔던 상점의 점원 역시 내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분명히 점원에게 마네킹이 입고 있는 드레스를 사겠다고 말했지만, 그녀의 귀에는 내 말소리가 웅얼거리는 소리처럼 들렸던 것이다. 상점의 점원은 내게 여러 가지 질문을 했고, 나는 그저 마네킹이 입고 있는 드레스를 사겠다고만 대답했을 뿐이다.
  
  침대에 누운 채 나는 벽지를 만지거나 아니면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넘기고 있었다. 그럴 때면 가끔 현기증 때문인지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몸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이는 상황보다는 그나마 침대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던 상태가 어쩌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몸에 힘을 준 상태로 공중에 떠 있는 것이 아닌데도 숨이 가쁠 만큼 피로를 느꼈다. 매트리스 표면은 어째서 낯익은 벽지와 흡사한 모양을 하고 있는지, 벽지를 긁어대면서 지내던 시절에 왜 나는 그렇게 행복해했는지, 혹시 벽지와 관련된 생각들이 단지 아직까지 이 공간에서의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환영은 아닌지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기로 했다. 물론 이곳에 대해서도 의심을 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공간의 능력에 대해 의심을 하려 한다면 공간은 나를 벽 쪽으로 내동댕이칠 것이다. 아무튼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사방에 빨간색 매트리스가 덮여 있는 바로 이곳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이 상태에서도 언젠가는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차츰 공간에 익숙해져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하나의 소리를 들었다. 음계에서 말하는 시나 도의 음 높이 같으면서도 정확히는 알 수 없을 만큼의 모호한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내는 소리 같았지만 성별조차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소리가 일정한 형태로 이어졌다. 높이의 변화도 없는 매우 단선적인 음이었지만 그 순간 나는 잠시 소리의 출처에 대해 계획적인 의심을 했다.
  
  내가 이곳에 등장하던 때에 맞춰 소리 역시 이미 울리고 있었는지, 아니면 지금 이 순간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당연히 지금 듣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부터 가져보았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그동안 소리라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다. 아니, 어쩌면 소리를 듣게 된 시점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보다는 소리를 만든 자는 나일 것이고 이 소리를 내가 들을 수 있도록 해주는 능력은 마땅히 공간이 갖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어쩌면 나는 이 소리뿐만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소리를 만들어놓았을지도 모른다. 단지 공간의 특수성 때문에 조금 변화가 있겠지만, 아무튼 소리는 이곳에 오기 전부터 내가 이미 만들어놓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만들어놓고도 잠시 생소한 음처럼 느꼈을 것이다. 내가 만든 소리임에도 나 자신이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이 소리가 지금의 나를 제대로 대변해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오래 전에 만들어놓았던 소리들 중에서 공간은 단지 자기 취향에 맞는 소리를 선택해 듣고 있는 중이다. 내게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간이 듣기 위해서 소리들 중의 하나를 선택해 듣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생활하는 모습이 지금과는 전혀 다르던 때에 만들었던 소리를 지금 공간이 듣고 있다는 것은 아마도 공간이 소리를 이용해 내 정신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한 수작임에 분명하다. 내 정신을 계속 과거의 상태로 묶어두려는 수작일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이 순간 또 하나의 소리를 만들고 있을지 모른다. 소리 자체가 나에게는 또 다른 혼돈이다.
  
  이런 계획적인 의심을 통해 이제 소리는 나에게 영원히 모호한 대상으로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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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은 사방에 빨간색 매트리스가 붙은 공간이다. 나는 줄곧 이곳에서 검은색 옷을 입고 역시 검은색 가면까지 쓴 상태로 공중에 떠 있었다.
  
  무작정 '얼굴에 씌어진 가면을 벗어야 한다'고 생각한 이유를 밝혀보고 싶었지만, 이미 '얼굴에 씌어진 가면을 벗어야 한다'는 말이 떠오르자마자, 나는 얼굴에 씌어진 가면을 무작정 벗어버리고 싶었다. 사실 내가 과연 가면을 벗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 때문에 이미 손은 얼굴 쪽으로 올라와서 성급하게 가면을 벗기고 있었다. 단 한 번의 손동작으로 가면은 벗겨졌다. 그리고 손에서 떨어져나간 가면도 내 몸과 마찬가지로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공중에 떠 있었다. 가면을 벗은 상태가 되자 그제야 저 가면이 왜 내 얼굴에 씌어 있었는지 궁금했다. 가면이라도 쓰고 있어야 할 만큼 내 외모에 대해 스스로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던가, 아니면 정체불명의 영웅이 되고 싶어서 우선 가면부터라도 쓰고 있어야 했던가.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높이는 변하지 않은 채 천장을 마주보고 있던 자세가 천천히 뒤집히면서 이번에는 몸이 반대로 천장을 등진 상태가 되었다. 몸이 뒤집혀지자마자 바닥으로 침이 몇 줄기 쭈욱 떨어졌다. 가면을 이렇듯 쉽게 벗은 것에 대해 고민을 해보고 싶었지만 그럴 때마다 어이없게도 웃음만 계속 나왔다. 사실 가면은 내 얼굴에 씌어져 있건 씌어져 있지 않건 상관없었을 것이다. 두려워하지 않는 것들은 그리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지 못한다. 가면은 단지 그 안에 감춰진 얼굴에 대한 호기심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공간에서 벌어지는 상황 때문에 생각은 곧 중단되고 말았다.
  
  똑같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이 마치 투명 인간처럼 벽을 통과해 공간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걷고 있던 여자들이 잠시 나를 올려다보더니 재빨리 맞은편 벽으로 빠져나갔다. 그 순간 나는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의 얼굴에 저마다 동일한 여자의 커다란 얼굴 사진이 붙은 것을 보았다. 밖으로 나간 여자들 중 몇몇은 단지 자신의 몸만 벽을 통과했고 드레스와 사진은 벽에서 미끄러져 고스란히 공간 안에 남아 있기도 했다. 그러면 뒤이어 또다시 한 무리의 여자들이 벽을 통과해 들어와서는 바닥에 떨어진 드레스와 사진을 들고 가거나, 아니면 자신이 입고 있는 드레스와 바꿔입기도 했다. 사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드레스들은 내가 보기에 똑같은 사진처럼 서로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그녀들이 벌이는 행동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녀들의 행동을 지켜보는 동안 내 몸이 조금씩 바닥 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는지, 어느새 내가 공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았다. 저들이 왜 저렇게 엉뚱한 행동을 하는지 궁금했다.
  
  "이봐요. 당신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겁니까?"
  
  한 무리의 여자들이 우르르 벽을 통과해 들어오더니 손으로 자신의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처음의 속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마치 나를 피하듯 일제히 맞은편 벽을 통과해 빠져나갔다. 그럼에도 아직 한 벌의 드레스와 사진 한 장은 여전히 바닥에 남아 있었다. 사람들이 나타남으로써 나는 또 한 번 생각하는 시간을 방해받은 것이다.
  
  잠시 머리에 경련이 일어났다. 미간을 찌푸리면서 머리에 힘을 주었지만 경련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또다시 침 줄기가 바닥에 몇 번 떨어지자, 갑자기 두개골 쪽으로 피가 몰리는 듯한 섬뜩함을 느꼈다. 신경을 정수리 쪽으로 집중시키면 저절로 눈이 질끈 감길 만큼 그 부위에 통증을 느꼈고, 신경을 관자놀이에 집중시키면 양쪽 관자놀이가 서로 오그라들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가끔 귓속에서도 통증을 느끼고는 했는데.' 귓속의 통증은 안구 안쪽까지 신경을 자극하면서 머리의 경련을 더욱 격렬하게 만들었다. 현기증일지 모른다. 머리의 경련 때문에 목 부위에서 무언가 스멀거리는 듯한 감촉을 느꼈다. 그리고 땀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또다시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이 벽을 통과해 들어왔다. 먼저 들어온 여자들은 나머지 여자들이 모두 들어올 때까지 차례대로 벽에서 몇 걸음 비껴 서 있었다. 마지막 사람까지 들어왔을 때 내 몸은 그녀들이 서 있는 벽 쪽으로 이동해가면서 서서히 일으켜졌다. 나는 벽을 등지고 선 채 드레스를 입은 한 무리의 여자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들 중에서 몇 걸음 앞쪽에 서 있던 여자가, 몸은 움직이지 않은 상태로 고개만을 백팔십 도 비틀어 뒤에 있는 여자들에게 말을 했다.
  
  "모두 천장 쪽을 봐주세요. 우리는 이곳에서 저 사람의 명령대로만 움직이면 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조차 저 사람의 명령에 의한 것이기도 합니다. 저 사람의 명령대로만 잘 움직여준다면 우리 모두는  또 한 번 완전히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저마다 자신의 움직임에 대해 의심하지 마시고 그대로 행해주십시오."
  
  드레스를 입은 무리들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한 쪽 벽에 서 있을 뿐이었다. 모두 조금 전에 자신들에게 고개를 돌려 말하던 여자의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현혹된 듯했다. 말하는 여자를 비롯한 모든 여자들은 더 이상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없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 역시 움직이지 않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이제는 이곳에서 달리 움직이고 싶은 생각 따위도 들지 않았다. 어쩌면 말하는 여자가 했던 조금 전의 말과는 반대로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이 지금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조종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체 누가 누구를 조종하고 있는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나의 이런 생각 또한 저 여자들의 명령 때문일 수 있다.
  
  말하는 여자와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나는 여전히 서로의 눈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느 틈에 내 위치는 공중에서 바닥 쪽으로 더 내려왔다. 그래서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이 손만 뻗으면 어렵지 않게 내 다리를 붙잡을 수도 있었다. 이제는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 모두가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음이라는 여자의 결혼식 날까지도 내 몸은 보기 흉하게 말라갔다. 어쩌면 하룻동안은 더 보기 흉하게 말라가고 있었을지 모른다. 나의 이런 모습 때문에 그녀는 결국 자신의 결혼식에 나를 초대하지 않은 것이다. 살이 계속 빠지고 있었다기보다는 차라리 몸이 거멓게 타들어간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른다. 하지만 몸이 왜 이렇게 계속 말라가는지에 대한 이유를 나는 알지 못했다. 다만 어느 날인가 잠을 자기 위해 침대에 누워 있던 중 불현듯 살이 빠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다음날 습관적으로 거울을 보았을 때 이미 내 모습은 낯설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몸이 낯설게 변하기 시작한 때가 그나마 이음이 나를 떠난 후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흉한 모습을 이음에게 보여줄 용기는 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음이라는 여자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것에 대해 그녀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내 모습은 비참했기 때문에 당연히 나 역시 외출을 꺼려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 대신 나는 결혼식이 시작되는 시간에 맞춰 치수가 큰 검은색 연미복을 입고, 흉한 모습 때문에 얼굴의 대부분을 가릴 수 있는 가면까지 쓴 채 방 안에 놓여 있던 의자에 앉아 그녀의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그리고 예식이 끝난 후 드레스를 입은 이음이 한 남자와 함께 식장을 나설 즈음 나 역시 의자에서 일어나 두 사람에게 꽃가루를 날리며 다른 이들처럼 손뼉을 쳐주었다. 그러고 나서 침대 맞은편 벽 쪽에 놓인 여러 개의 마네킹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마네킹에게 입혔던 각각의 드레스를 벗겨 바닥에 떨어뜨렸다. 이제는 이음에게 드레스를 입힐 필요가 없었다. 결혼한 이음에게는 내가 간직하고 있던 드레스 따위가 더 이상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현기증 때문에 나는 가면과 검은색 연미복을 벗지도 못하고 곧장 침대로 가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순간적으로 결혼식 장면이 떠올랐지만 마찬가지로 쉽게 잊어버렸다가 지금 다시 같은 장면이 떠올랐을 뿐이다. 그리고 생각이 끝나자마자 무리들 중에서 한 여자가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그 여자를 따라 손뼉을 치기 위해 손을 움직이려 했을 때, 무리들 중의 말하는 여자가 먼저 내 발을 잡더니 뒤이어 다른 여자들도 내 발을 붙잡기 위해 서로를 밀쳐댔다. 나는 그녀들에 의해 너무나 쉽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공중에 떠 있던 가면 역시 내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툭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말하는 여자가 판단하기에 나는 아무래도 공중 생활이 부적합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또한 날고자 하는 욕구가 너무 강렬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나는 바닥에 누운 채 우연히 무리들 중에서 말하는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올려다보았고, 그녀의 얼굴이 분명 낯익은 얼굴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단지 낯익은 얼굴이라는 것뿐 정확히 누구와 닮은 얼굴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누구와 닮은 여자의 얼굴 사진인지는 알 수 없었다.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이 조금 전 내 발을 붙잡고 있었을 때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녀들의 긴 손톱을 보았다. 그래서 지금 다시 그녀들의 손을 올려다보니 저마다 손톱의 잘라야 할 부분이 1센티미터는 족히 될 만큼 길게 자라 있었다. 내 몸이 바닥으로 끌어내려진 뒤로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은 또 한 번 서로를 밀치며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중 한 여자가 바닥 한 곳에 떨어져 있던 가면을 들고 와서는 내 얼굴에 강제로 씌웠다. 사실 그녀가 가면 씌우는 것을 내가 손으로 저지하지는 않았지만 그러고 싶은 의지는 충분히 있었다. 그럼에도 나 역시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오히려 재미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면이 완전히 씌어진 후에야 나는 씨익하고 한 번 웃음을 지어보였다.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 모두가 자신들 뒤에 있는 벽에 등을 기대고 일렬로 섰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일어서지 못한 채 바닥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그녀들이 한쪽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동안 한 여자만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내 옆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자신도 나와 나란히 그 자리에 누웠다. 그와 동시에 벽 쪽에 서 있던 여자들도 일제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니, 분명 미리 계산된 행동인 것처럼 바닥에 털썩 주저앉지는 않았다. 몇몇의 여자들은 드레스의 펄럭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매우 조심스럽게 매트리스 바닥에 앉았다. 그러고는 미리 계산된 행동인 것처럼 모두들 바닥에 누워 있는 우리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옆 사람과 소곤대는 소리나 혹은 움직임에 의해서 드레스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따위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나는 바닥에 누운 채 가끔씩 고개를 돌려 옆의 여자를 흘끔 쳐다봤다. 옆에 누워 있는 여자를 포함해서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자들 모두는 전혀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바닥에 옆으로 누워 있는 동안 점차 허기를 느꼈다. 밥을 먹기 위해 습관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할 즈음 옆에 누워 있던 여자가 나를 한 손으로 내리눌렀다. 나는 순간적으로 이곳이 벽지를 긁어대며 보냈던 침대 위라고 착각한 것이다. 그러고는 서로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누워 있는 상태에서 손톱으로 매트리스 표면을 긁어대고 있는 동안 나와 함께 누워 있던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거멓게 타들어간다는 표현이 적합할 만큼 내 얼굴은 보기 흉했지만 가면으로 가려진 이상 이 여자는 그러한 사실을 새삼 확인하기 위해 내 얼굴에 씌어진 가면을 벗기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여자는 더 이상의 움직임을 취하지 않았다. 잠시 후 말하는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에게 다가왔다.
  
  "가면 안에 감춰진 저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애쓰지 마세요. 그렇게 할 수 없거든 당신은 자리로 돌아가세요."
  
  이 말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발음되었다. 옆에 앉아 있던 여자는 말하는 여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 벽 쪽의 무리에게로 갔다. 그리고 뒤이어 무리 중에 있던 다른 여자가 내게로 다가왔다.
  
  또다시 말하는 여자의 매우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발음되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여, 이 여자의 이름은 이음입니다. 당신은 결국 이곳에서 이음이라는 여자와 결혼할 수 있게 되었군요. 당신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축하할 일입니다. 사실 드레스를 입고 있는 우리 모두의 이름은 이음입니다. 당신이 우리들을 이음이라고 생각하는 이상 우리는 모두 이음입니다. 그렇지요?"
  
  이음이라는 이름을 가진 말하는 여자 역시 말을 마치고 무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나는 처음부터 이음이라는 여자와 결혼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나는 이음의 팔을 붙잡고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팔짱을 낀 채 빨간색 매트리스로 뒤덮인 공간 전체를 천천히 돌았다. 그러는 동안 벽 쪽에 앉아 있던 여자들도 한 사람씩 일어나 앞쪽을 향해 인사를 했다. 공간을 네 바퀴째 돌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걸음걸이는 조금도 빨라지거나 아니면 더 느려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벽 쪽에 앉아 있던 여자들도 저마다 자신의 차례가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 계속 인사를 했다. 그러다가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걸음을 멈췄다. 갑자기 엄지발가락에 통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벽 쪽의 여자들이 인사하는 방향을 따라 우리도 멈춰 선 자리에서 정중히 인사를 했다. 그럼에도 정확히 표현하자면 내가 인사를 하려는 순간 이음은 잠시 머뭇거리는 듯했다.
  
  내가 이음과 결혼식을 올리는 지금, 벽 쪽에 있는 무리들은 이제 이음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인사하는 행위를 멈추고 우리에게 손뼉을 쳐주어야 했다. 드레스를 입은 무리들은 이제 하객이 되어야 했다. 나는 이음과 함께 몸을 돌려 다시 한 번 드레스를 입은 무리들을 향해 정중히 인사를 했다. 하지만 이번 역시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음은 하객들을 향해 제대로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하객들을 향해 인사해야 함에도 오히려 자신만이 이곳에서 유일한 하객인 것처럼 나를 향해 손뼉 치려는 동작을 잠시 취했다.
  
  드레스를 입은 무리들은 모두 이음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내 옆에 서는 순간에는 저마다 이음이 아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마네킹에게 입혀놓은 드레스를 벗겨 바닥에 떨어뜨리듯 이음이 입고 있던 드레스를 조심스럽게 벗겼다. 그리고 벽 쪽에 있는 무리들에게 다가가, 마찬가지로 입고 있던 드레스를 모두 벗겼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드레스를 벗긴 행동을 후회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우려했던 대로 드레스를 벗게 된 여자들은 더 자유롭게 내 주위를 맴돌았다. 이곳을 빠져나가려고도 하지 않은 채 한 곳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힐끔거리며 불규칙하게 주위를 맴돌았다. 마치 공간에 갇힌 나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내 몸이 언제 다시 공중에 떠오를지 모른다. 나는 한 쪽 벽을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오른쪽 어깨가 벽에 붙은 매트리스에 세게 부딪히는 순간 나는 윽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그러자 드레스를 입지 않은 여자들도 일제히 한 쪽 벽을 향해 뛰어갔다. 여기저기에서 윽하는 비명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또다시 반대쪽 벽을 향해 뛰어갔다. 저들은 공간에 갇혀 허우적대는 나를 조롱하고 있었다.
  
  나는 드레스를 입지 않은 여자들을 붙잡기 위해 공간을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드레스를 벗기듯 그녀들의 몸을 갈기갈기 찢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내 행동을 보며 오히려 그녀들이 더욱 공격적으로 변해갔다.  더 무섭게 괴성을 지르며 내 옷을 갈기갈기 찢듯이 달려들었다. 얼굴에 씌어진 가면만 멀쩡했을 뿐 이미 내가 입고 있던 검은색 옷은 보기 흉하게 찢겨졌다.
  
  나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그녀들이 좀더 쉽게 옷을 찢을 수 있도록 팔다리를 그녀들 앞에 들이밀기도 했고, 옷을 찢는 놀이에 싫증 나지 않도록 사방으로 팔짝팔짝 뛰면서 그녀들의 흥미를 돋우기도 했다. 그리하여 내 몸은 완전히 발가벗겨졌다. 하지만 내가 입을 수 있는 옷은 아직 이곳에 한 벌 남아 있었다.
  
  나는 한 쪽 바닥에 떨어져 있는 드레스를 집어 손으로 계속 만지작거렸다. 드레스를 입지 않은 여자들은 저마다 멈춰 선 자리에서 내 손을 쳐다보았다. 나 역시 그녀들을 한번 흘끔 쳐다보자, 드레스를 입지 않은 여자들은 자신이 입고 있었던 드레스 쪽으로 느리게 뒷걸음질했다. 그리고 우리는 동시에 각자의 드레스를 조심스럽게 입었다. 물론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이음의 얼굴 사진까지 집어 내 얼굴에 붙였다. 바닥에는 찢겨진 검정색 옷 조각들만이 어수선하게 널려 있었다. 이제는 나도 저들과 마찬가지로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되었다. 나 역시 드레스가 매우 잘 어울리는 이음이다. 이제 이곳에는 모두 이음뿐이다. 나는 살아 있는 이음이 되었다.
  
  모두들 공간 여기저기로 흩어진 상태에서, 어느 이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불분명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변조해서 말했다.
  
  "이곳에는 빠져나갈 수 있는 출구가 없습니다. 어디에도 밖으로 통하는 출입문 따위는 없으니까요. 이곳은 문을 통해 들락거릴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그러니 오직 이곳에서만 출구를 찾으려 하지 마세요. 오히려 출구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이곳을 나갈 수 있는 문은 다른 곳에 만들어져 있다구요. 우선 침대에서 일어나요. 어서요! 그래야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방에 있는 마네킹들을 제발 치워버려요. 그것들은 그저 마네킹일 뿐이에요. 그것들은 살아 있는 내가 아니라 당신이 갖다놓은 마네킹일 뿐이라구요. 이제는 나를 잊어버리세요. 이제는 제발 내가 되려고 하지 마세요. 어서 빨리 침대에서 일어나요. 당신이 보는 것들은 한낱 마네킹일 뿐이에요. 환상이라구요! 마네킹의 얼굴에 내 사진을 붙여놓은 것에 불과한 거예요. 이곳 어디에도 살아 있는 나는 없습니다. 그러니 벽에 붙어 있는 사진들까지 모두 떼버리세요. 이제 제발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세요. 누구든지 좋으니까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세요. 그러면 당신은 틀림없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밖으로 통하는 출입문은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 집에 있다구요. 그러니 오직 이곳에서만 출구를 찾으려 하지 마세요. 이곳은 나도 없고 출구도 없는 곳입니다. 당신은 지금 이곳에 있는 게 아니니까요."

        
        나는 마네킹의 입 가까이에 대고 있던 귀를 손으로 한 번 매만졌다. 분명히 어디선가 웅얼거리는 듯한 소리가 음산하게 들려왔지만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서 나로서는 도저히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입고 있던 드레스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조심스럽게 걸쳐놓았다. 가면 위에 덧씌워진 사진 때문에 호흡하기가 약간 곤란했다. 얼굴에 붙였던 사진을 떼어내 손으로 조심스럽게 편 다음, 책상 위에 쌓인 다른 사진들 위에 역시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그리고 가면을 벗어 거울에 한번 얼굴을 비춰볼까 하다가, 동시에 얼굴이 보기 흉하게 변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쏜살같이 빨간색 매트리스가 깔린 침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침대 위에는 검은색 연미복이 마치 누군가가 옷을 찢으려고 달려들어 여기저기 움켜쥐었던 것처럼 심하게 구겨진 상태로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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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분명 이음이라는 여자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다. 하지만 내 몸은 오래 전부터 계속 보기 흉하게 말라가고 있었다.
  
  나는 이음의 결혼식이 시작되는 시간에 맞춰 미리 검은색 연미복을 차려입기로 했다. 그래서 심하게 구겨진 검은색 연미복을 꽤 익숙한 솜씨로 다림질했다. 그리고 다림질한 연미복을 입어보니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옷이 커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럼에도 나는 치수가 커서 내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검은색 연미복을 입은 후 드레스가 걸쳐진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잠시 의자에서 일어나 등받이에 걸쳐져 있던 드레스를 집어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의자에 앉아 그녀의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도중 엄지발가락에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별 다른 생각 없이 발에서 눈을 떼고는 다시 방 안에서 드레스를 입은 이음을 바라보았다.
  
  예식이 끝나고 이음이 한 남자와 함께 식장을 걸어나갈 즈음 나는 현기증 때문에 가면과 연미복을 벗지도 못하고 곧장 침대로 가 누울 수밖에 없었다. 누워 있으면서도 현기증 때문인지 계속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곳은 사방에 빨간색 매트리스가 붙은 공간이다. 나는 줄곧 이곳에서 검은색 옷을 입고 역시 검은색 가면까지 쓴 상태로 공중에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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