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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숲으로

2005.01.28 20:4001.28

장단점이 각기 다르면서 장점만큼 단점도 뚜렷한 글 두편을 두고
어느 글을 선정해야 할지 많이 고심했습니다.
두 편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글이라는 결론에 두 편 모두 뽑기로 했습니다.

숲으로가 앞은 더 기대가 되는 측면이 있었으나
화자가 숨긴 비밀이 끝에 너무나 맥아리없이 지나가면서 맥없는 결말을 유도했습니다.
특히 제목을 '숲으로'라고 지었다면 전체적으로 숲이라는 심상이 작품을 지배하는 걸 기대했는데
역시 주제와 결말이 맥없이 끝나면서 잠시 언급되고 그쳐서
전체적으로 괴리감이 있습니다.

독자의 흥미를 유발시킬 만한 부분이 많았는데
제대로 살린 부분이 없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실제로 '마리아'와 영현이 구인을 낳았던 게
직접적으로 연결이 안됩니다.

직접적으로 주제를 드러내지 않고
간접적으로 주제를 보여주고 싶어했거나
작가가 주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걸 회피한 걸로 보입니다.

논쟁적인 주제였던 만큼,
그리고 하나의 계기로 세계 전체가 뒤집히는 얘기였던 만큼
정면대결하는 장편이었거나 그 주제를 압축적으로 보여 줄 수 있는 다른 소재였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단편으로 다루기에 넘치는 주제라는 걸 알고 편한 길을 택한 느낌이랄까요.

붉은 낙타는 숲으로보다 구성면에서 더 안정적이었습니다.
문장은 아주 꼬이거나 읽기 힘들 정도는 아니지만
아직 미숙한데도 스스로 틀을 한정지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이야기하기 조심스럽지만 특정 작가가 떠오르는 문체이기도 했습니다.
구성은 단순하고 패턴적이지만 그래도 끝까지 밀고 나갔습니다.
전체적으로 이 이야기가 펼쳐지는 세계가 확실하지 않아서인지
이야기가 붕 뜨는 감이 있습니다.
특히 붉은 머리 여자와의 관계라든가 캐릭터리티가 너무 관념적이라서
전체적으로 실제로 벌어진 일이라기보다는
사념 속에서 벌어진 일을 다루는 듯 실체감이 없습니다.

선정을 축하드리며 두 분은 게시판에서 "진아"혹은 "mirror"을 클릭하신 후
쪽지 보내기 기능으로 연락가능한 이메일 주소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
이지문



영현은 한숨을 쉬며 안락의자에 몸을 묻었다. 내키지 않는 손길을 뻗어 헬멧을 쓰자 익숙한 압력이 관자놀이를 살짝 조여왔다. 몸을 뒤척여 되도록 편한 자세를 취했다. 이제부터 적어도 이십 분은 터미널에 붙어 있어야 할 터였다. 오른쪽 귓속 깊숙한 곳에서 가늘고 율동적인 울림이 시작되었다. 영현은 눈을 감았다. 하나, 둘, 셋. 눈을 뜨자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전혀 맥락이 닿지 않는 이미지들이 주르륵 풀려 나오기 시작했다. 영현은 끝에서 두 번째로 투사된 히메나 에르난데스 풍의 추상화에 주의를 집중했다. 디잉. 정연하게 늘어서는 아이콘들 사이에서 형사 48호 법정을 선택했다. 즉각 자그마했던 방이 시야 가득 확장되었고, 다음 순간 영현은 법정의 변호인 석에 있었다. 거의 동시에 맞은 편 검사석에 박재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법정 안을 휙 둘러보더니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영현에게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영현이 형식적인 답례를 보내는 동안 방청객들이 한꺼번에 입장하기 시작했다. 기자들, 피고인의 친지들, 그리고 신수론자들과 보호론자들. 마지막으로 이민재가 창백하게 굳어진 얼굴로 피고석에 나타나자 웅성거림이 높아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장중한 종소리와 함께 판사가 입장하자 방청객들의 웅성거림이 강제 소거되어 장내는 다시 조용해졌다. 판사가 사무적인 어조로 개정을 선언했다.  

기소장 낭독과 보조를 맞추어 증거들이 제시되었다. 피고 이민재. 32세. 다국적 제약기업 메디넥스의 선임연구원. 메디넥스의 사유재산으로서 연구소 외 반출이 금지되어 있는 실험용 구인(舊人)을 절취해 자택에 2개월 간 은닉했음. 그리고 그 구인과 성관계를 맺던 도중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현행범으로 체포됨. 형법 제 1402 조 및 제 331조 위반,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 대한 법률 제 5조의 10항에 해당함.

이어서 메디넥스 연구소 경비 시스템 담당자와 전임상 연구센터 책임자, 신고를 한 이웃집 주민과 이민재를 체포한 경찰관이 검사 측 증인으로 출두해 동시증언을 시작했다. 영현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범행사실은 너무나 명백했고 영현이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형량을 좀 줄여보는 것 정도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박재훈이 검사라니, 최악이었다.

영현은 시선을 들어 맞은편을 보았다. 박재훈은 네 명의 증인들에게 절묘한 시간차를 두어가며 질문을 던져 바라는 대로의 진술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정의감에 불타고 열성이 넘치는 법의 수호자. 박재훈이 보여주고 싶어하는 바로 그 이미지였다. 영현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쉬었다. 유도심문을 하고 있다고 항의할 수도 있었지만 되려 역효과를 낼 것이 뻔했다. 이민재가 들쑤셔 버린 것은 가장 위험한 벌집이었기 때문에.  

형법 제22장 성풍속에 관한 죄중 제 1402조. 구인과 성관계를 가진 자는 무기 뇌파등록 말소에 처하며 형의 집행 후 50년 간 감형 또는 사면을 금한다. 통칭 수간금지법(獸姦禁止法)이었다. 하지만 그 조문 뒤에 숨겨진 진짜 의미를 말해주는 것은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 대한 법률 제 5조의 10, '형법 제 1402조에 규정된 죄를 범한 자중 특히 이성(異性)의 구인과 성관계를 가진 자는 전이(電耳)적출형에 처한다'라는 항목이었다. 거기 비하면 특수절도 쯤은 곁들이에 불과했다. 원래는 대략 일, 이년의 뇌파등록정지였고 이번 경우에는 어차피 전이적출형을 받을 것이 확실시되니 얼마간의 벌금이 덧붙여지는 정도에서 수습되었어야 했다. 문제는 이민재가 전혀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지난번 공판에서 그는 자신의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부정하는 것도 모자라, 다시 똑같은 상황에 처한다 해도 주저 없이 마리아-이민재가 그 구인에게 붙인 이름이었다-를 구출해낼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덕분에 신수론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대부분의 보호론자들까지 등을 돌려버렸으며, 악화된 여론을 업고 기세가 등등해진 박재훈이 '죄질이 나쁘고 재범의 우려가 높다'는 이유로 공공연히 사형을 언급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불현듯 영현은 짙은 피로감를 느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방청석을 꽉 메우고 있는 신수론자들도, 보호론자들도, 기자들도. 영현은 신수론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모든 이종을 마음대로 사용할 권리를 신이 부여했다니, 웃기는 소리였다. 불과 백년 전 구인들이 자신들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칭하면서 써먹었던 바로 그 논리였다. 하긴 99.98 퍼센트 동일한 DNA서열을 갖고 있으며 몇 세대 전까지만 해도 심심찮게 혼혈아가 태어나곤 했던 직계조상 종을 동물로 규정해 사용하는 데 신의 뜻 이상 가는 명분이 어디 있겠는가. 보호론자들도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구인에 대한 인도적 처우라거나 보호구역 설정이라거나...... 겉으로는 그럴싸했지만 결국 구인을 별개의 종으로 간주해 이용대상으로 본다는 것에는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구인을 실험용으로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며 제약회사와 자동차회사를 비난하다가도, 제 몸이 아프면 구인을 써서 실험한 약품을 쓰고 겨우 두블록 떨어진 가게에 갈 때도 구인을 태워 충돌실험을 거친 자동차를 타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증거용이랍시고 법정 한가운데에 띄워 놓은 마리아의 홀로그램이었다. 희멀건 빛깔의 피부와 부숭부숭한 솜털, 부자연스럽게 납작한 이마를 가진 그것은 전혀 다른 종의 생물이었다.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단절. 전이가 없다.  

영현은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다. 보고 있기가 괴로웠다. 언뜻 이민재의 집에서 압수된 어린이용 이미지보드가 생각났다. 마리아를 집에 숨겨두었던 이 개월 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울적해 하는 마리아를 위해 이민재가 가져다준 것이었다. 이민재의 이미지 4 개, 실험실 풍경 3개, 음식 이미지 2개, 그리고 157개의 숲 이미지. 부서져 가는 회색 고층 건물들 틈새에 자라난 거칠고 검푸른 숲은 조잡하게 그려진 다른 이미지들과는 달리 정교하고 사실적이었다.

영현의 상념을 깨며 다섯 번째 증인이 나타났다. 이민재의 대학동창이었다. 그는 이민재가 명석했지만 외곬수 경향이 있었다고 증언했고, 박재훈은 논지를 교묘하게 비틀어 이민재를 비타협적이고 이기적인 인물로 만들어갔다. 이제 움직일 때였다. 너무 늦어도 안 되고, 너무 서둘러서 필요이상 시간을 주어서도 안 된다. 뒤통수를 치는 것은 상대가 승리를 확신하고 있을 때 가장 효과적인 법이니까. 영현은 바닥기기 패턴으로 말을 걸었다.

[박재훈씨-일평생-살아가면서-제일-피하기-힘든-게-뭔지-알아]
[무슨-소리야]
[한-번-생각해-봐]
[죽음-이잖아]
[죽는-건-맨-마지막-단-한-번-뿐인걸-그보다-훨씬-피하기-힘든-게-있어-바로-우연이지]

박재훈이 짜증을 냈다. 쓸데없는 소리, 라는 느낌. 이 패턴으로 감정까지 표현할 수 있다니 과연 박재훈이었다.

[글세-저번에-마리아가-우연히도-신민희란-사람-이야길-하지-뭐야-자기-외할머니-언니라더군-증조할머니가-숲으로-도망쳐오기-전에-낳은-딸이래]

박재훈의 감정파동이 갑자기 밋밋해졌다. 역시 알고 있었던 거로군. 다섯 번째 증인이 퇴장하고 여섯 번째부터 열 한 번째 증인이 증언을 시작했다. 30초쯤 후 영현은 여덟 번째와 열 번째 증인에게 반대 심문을 하면서 박재훈에게 결정타를 날렸다.

[난-정말-놀라-버렸지-뭐야-누가-짐작이나-했겠어-우등-중의-우등-박재훈-검사님-증조모께서-구인이었다니]
[말도-안-되는-소리-허위사실-유포-명예훼손-이야]
[아-그래-그럼-댁하고-마리아-미토콘드리아-DNA가-완벽하게-일치하는-것도-우연이겠네- 상당히-독특한-SNP-패턴-이던데-그게-우연히도-14조-분의-일의-확률로-들어맞은-거란-말이지]

영현은 반대심문을 간략히 끝냈다. 검사측 증인들이 퇴장하자 뒤이어 영현이 요청한 증인 세 명이 입장했다. 영현의 질문에 따라 그들은 이민재가 어릴 때부터 동정심이 많고 온화한 성격이었다는 것, 메디넥스에서 일한 6년 동안 언제나 흠잡을 데 없이 성실했다는 것 등을 말했다.

[원하는-게-뭐야]
[타협-하자구]

박재훈은 그런 것이 명백한 범법행위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며 반박하기 시작했다.  

[이민재는-현행범이야-게다가-반성하는-척도-안-하니-정상참작도-불가능해]
[알아]
[그럼]

영현은 잠깐 망설였다. 과연 이게 잘 하는 것일까. 마음먹고 오긴 했지만 어쨌든 이민재는 자신에게 맡겨진 피고였다. 조금이라도 가벼운 형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현은 이민재가 말하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비록 구인일지라도 그녀를, 혹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맹세했던 사람들은 예전에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맹세는 언제나 지켜지지 못했다. 단 한번의 예외도 없이. 지금은 이민재도 마리아를 사랑한다고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몇 년쯤은 계속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시간이 지나 열정이 식으면 그녀의 참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다. 음성언어, 그것도 한정된 음역밖에 사용할 수 없고 이해력은 열 살 짜리 수준이며 한번에 한 가지 밖에는 생각하지 못하는 존재. 순수하고 사랑스럽기만 하던 그녀가 열등하고 저능한 존재로 보이기 시작하는 데에는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결국에는 한 때 눈을 멀게 했던 열정이 저주스러워지고, 귀찮기만 한 그것을 어디로든 치워 버리고 싶어질 것이다. 21년 전에 최명식이 그랬듯이. 영현은 수련시절에 판례집에서 보았던 최명식의 얼굴을 떠올렸다. 선량한 인상에 평범해 보이던 그는 자기네 가정부였던 구인에게 반해 혼인신고를 제출했었다. 엄청난 물의를 빚은 끝에 승인이 거부되자 최명식은 그녀를 진실한 영혼의 반려라고 선언하고 동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4개월 뒤 집 뒤뜰에서 강간 살해당한 구인 여자의 사체가 발견되었을 때, 최명식은 '그것'이 순종하지 않아 버릇을 가르친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 이후 가사보조용이건 애완용이건 개인에 의한 구인사육은 전면 금지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 사건은 극단적인 예였지만 영현이 결심을 재확인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다. 망설이는 사이 박재훈의 패턴에 미심쩍은 빛이 짙어졌다. 괜히 경계심을 자극해서 좋을 것이 없었기에 영현은 얼른 말했다.

[마리아]

박재훈은 의외라는 느낌을 지었다.

[안락사-시키자고-할-생각이었잖아-그냥-언급하지-말고-넘어가-줘]
[그럴-수는-없어]

물론 네 지지기반인 신수론자들이 그런 요물은 죽여 없애야 한다고 아우성을 치겠지.

[알고-있겠지만-마리아는-합법적으로-육성된-실험-동물이-아냐-넷에-흘리면-메디넥스-에서-안-좋아할-걸]

그쪽하고 껄끄러운 관계가 되는 건 장차 정계로 진출하고 싶은 사람한테는 절대 반가운 일이 아니고 말야.

[그냥-언급만-안-하면-돼-다음은-내가-알아서-할-테니까]

메디넥스와는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비싸게 먹히는 제대로 육성된 실험용 구인 대신 야생 구인을 불법 포획해 전임상실험에 사용한 사실이 알려지면, 신약승인은 완전히 물 건너가고 천문학적인 개발비가 날아갈 테니까. 그러니 박재훈만 모른 척 넘어가 주면 마리아는 원래 포획되었던 지역에 슬쩍 방사될 예정이었다.  

[동의한-걸로-생각할게]

박재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판사가 상황을 정리하고 속행을 명하자 박재훈이 최종논고에 들어갔다. 동시에 이민재도 허락된 최후진술을 시작했다. 영현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 확실한 선처를 호소하기 시작했다.  

“피고의 행위는 명백한 수간입니다. 어떤 궤변으로도 합리화될 수 없는 파렴치하고도 부도덕한 범죄이며, 우리 사회의 존립기반을 뒤흔드는 중대한 일탈행위인 것입니다.”
“세상물정에 어두운 피고는 실험동물로서 가혹한 처치를 당하는 구인에게 동정심을 느껴 우발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마리아는 동물이 아닙니다. 정상인보다 낮은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어떤 동물보다 뛰어난 지능과 언어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분명히 인간입니다. 단지 우리와 조금 다른 인간일 뿐입니다.”

영현은 입으로 제 무덤을 파고 있는 이민재에게 약간의 연민과 함께 음울한 분노를 느꼈다. 저 남자는 모르고 있다. 왜 사람들이 유전자 풀을 교란시킬 수 있는 모든 연구활동을 불법화하고, 구인과의 접촉을 차단하는 것도 모자라 수간 금지법 같은 것을 만들어 내는지. 일면 광기로까지 보이는 그런 행동들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민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긴 이해 못하는 게 당연할지도 몰라. 저 남자는 마리아를 만날 때까지는 완벽한 인생을 살아왔으니까. 영현은 머리 한 구석에서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 일만 없었다면 나 역시 그럴 테지. 우리가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 구인과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벽이 얼마나 얇은지 상상조차 못 했을 거야.

재판이 끝났다. 이민재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영현은 항소를 포기했다. 아무도 마리아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영현은 헬멧을 벗었다. 귓속이 욱신거렸고 눈도 아팠다. 긴장으로 굳어진 등을 펴면서 영현은 그 날의 마지막 한숨을 쉬었다. 박재훈 같은 부류를 적으로 만드는 것은 현명한 짓이 못 되었다. 능력으로 따지자면 상위 1% 중에서도 수위권에 드는 야심가의 혈통 컴플렉스를 캐내서 등쳐 먹었으니, 두고두고 보복 당할 것이다. 그것을 잘 알면서도 이런 짓을 한 데는 물론 이유가 있었다. 어리석고 감상적인 이유가.

흐릿한 초음파 사진이 강박관념처럼 떠올랐다. 납작한 이마와 돌출된 미추를 가진 5개월 된 태아. 납득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었다. 자신과 남편의 혈통 모두 모계, 부계 3대조까지 완벽했다. 그런데 왜? 어째서 내 아이가? 그 날의 당혹스러움, 수치심, 그리고 발 밑이 꺼져들어가는 듯한 두려움은 세월이 지나도 때때로 악몽으로 나타나 영현을 소스라쳐 깨어나게 만들었다.  

심호흡을 하자 좀 진정이 되었다. 관자놀이를 문지르면서 영현은 이미지보드에 그려진 검은 숲과 태어나지 못한 아이를 생각했다. 어둑하게 우거진 숲으로 들어가는 마리아의 뒷모습을 상상하자 문득 영현은 그 곳에서였다면 그 아이도 무사히 태어날 수 있었을까, 궁금해졌다.


SNP : Single Nucleotide Polymorphism
댓글 5
  • No Profile
    이지문 05.01.31 11:39 댓글 수정 삭제
    부족한 글을 선정해 감평까지 주시니 기쁩니다. 말씀하신 내용은 깊이 새겨 향후 지침으로 삼겠습니다. 참, 영현이 구인 아이를 낳은 일과 마리아의 사건을 맡게 된 것은 별개의 일로서 전혀 연관이 없는 것 맞습니다. 하지만 그런 내용을 한번에 독자에게 이해시키지 못한 건 모두 제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니까 변명의 여지가 없네요.
  • No Profile
    ida 05.01.31 21:27 댓글 수정 삭제
    아아. ... 다시 읽게 되어 기뻐요. 멋집니다.
  • No Profile
    미로냥 05.02.01 01:42 댓글 수정 삭제
    저도 이것, 전에 읽을 것 같은데 그때 굉장히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다시 읽어서 기뻤어요:-)
  • No Profile
    이지문 05.02.01 12:00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하지만 좀 쑥쓰럽네요......
  • No Profile
    mirror 05.02.25 19:43 댓글 수정 삭제
    이지문님께는 쾌걸 조로가 전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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