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우수작 인생설계도

2004.10.30 00:4110.30

이 달에 올라온 글은 전체적으로 너무 평범했습니다.
늘 들리는 이야기의 반복에 새로운 접근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원형님의 글은 경이감이 부족합니다. 경이감은 문학의 기본입니다.
역시 소재와 이야기 진행이 진부합니다.
독자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을 보여주지 못해서 흡입력이 떨어집니다.
피감시자는 이야기도 재미있고 많은 습작을 거친 안정적인 문장도 돋보였습니다.
하지만 쉽게 예상되는 반전을 뛰어넘는 이야기 구도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유키사마님의 죽음을 부르는 남자이야기도 조금 식상한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마지막 대사 부분은 없는 족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합니다.

우울중독님의 인생설계도는 아주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주인공의 시점이 자연스럽고 세부적인 장면을 잘 살린 점도 돋보였습니다.
우수 단편 선정을 축하드리며 앞으로도 좋은 글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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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중독



  나는 반사적으로 왼 손을 들어 머리를 꾹꾹 눌렀다. 편두통이다. 뾰족한 바늘이 머리 속의 한 곳만 문신을 파듯이 집요하고 섬세하게 찔러댔다. 책상에 엎드려 자는 사이에 누군가가 머리 속에 바늘을 집어넣은 게 분명하다. 고통은 왼손에 감긴 손목시계의 초침이 째깍거리는 소리에 더 커진다. 평소라면 들릴 리가 없지만 유독 머리가 아플 때에는 초침의 째깍거림이 들린다. 아마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그런 모양이다. 나는 진저리를 내며 오른손에 들린 진로계획표를 바라봤다. 그러나 두통 때문에 집중이 되지 않는다. 미간을 찡그려 봐도 마찬가지였다. 아스피린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약국에서 아스피린을 살 수는 없다. 그런데 왜 아스피린을 사면 안 되지? 이렇게 아픈데? 지금 난 금방이라도 교실 뒤로 달려가 벽에 머리를 들이받으며 성난 투우마냥 씨근거릴 준비가 되어있다. 한마디로 미치기 직전이다. 또 그렇게 해서 두통만 가신다면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이런 상태임에도 나는 아스피린을 사지 않는다. 그런 결심은 정신이 빚어낸 굳은 의지가 아닌 몸을 쭈그러들게 만드는 공포가 이유다. 나는 몇 번이나 상상했던 가설을 떠 올린다. 집 앞에 약국에 가서 아스피린을 산다. 약사는  내 이름과 주민번호를 물어볼 테고 신분확인 후에 친절하게 아스피린을 건 내 준다. 나는 행복해하며 약국을 나선다. 약사는 내 뒷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며 키보드를 두드린다. 모니터에는 내 신상명세가 떠 있다. 빈 칸에 새로운 글이 추가된다. 20xx년 5월 11일. 아스피린 2알 구입. 이것은 내 인생계획표에 영향을 미칠게 분명하다. 겨우 아스피린 2알에 내 인생이 바뀌진 않는다고 생각하려 해도 그렇지 않을 거라는 확신도 없기에 결국 포기하고 만다. 내 만성적인 편두통이 들통 날 지도 모른다는 편집증적인 관념을 갖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바로 내 눈앞에.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해보기도 하고, 머릿속을 비워보기도 하고, 마음을 진정시켜 보기도 했다. 그러자 어느 순간 지끈거림이 사라졌다. 내 노력의 결실이 아닌 그냥 시간이 지났기에 그랬다. 시간은 만병통치약이다. 두통이 어느 정도 가시고 나자 진로계획표를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집중해서 한 글자도 빠짐없이 읽었다. 사실, 3번이나 읽었다. 나는 읽는 행위 외에 나 자신을 납득시키는 작업을 해야 했다. 그리고 4번째 시도 끝에 드디어 나를 납득시키고야 말았다.

“빌어먹을!”

  이를 악다문 채 지른 소리는 나 혼자만이 들을 정도로 작았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반 아이들은 각자 자신을 납득시키는 작업을 하거나 이미 끝내고 진로에 대해 고민을 하는 모습이다. 다들 자신 이외엔 관심이 없었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 진로계획표를 반으로 접어 책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책상에 머리를 문댔다. 생각을 정리하자. 진로계획표는 앞으로의 교육방법과 향후 직업 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발휘한다. 그리고 졸업 계획표에 상당부분 수정되어 거기에 써 있는 대로 교육을 받고 행동하게 된다. 그것은 20살이 되어 나오는 인생계획표의 뼈대가 되는 직업 부분을 담당한다. 인생계획표는 인생설계부-보통 설계부라고 부른다-에서 제작한 인생설계도에 따른 하나의 거대한 계획표이다. 설계부에선 세상을 아우르는 하나의 통합된 설계도를 제작하여 개인에게 그 설계도대로 행동하게 지시한다. 숙련공들은 세상이 굴러가는데 고장이 없게끔 부품들을 교체하고 낡은 톱니에 윤활유를 바르고 작동여부를 점검한다. 계획표는 개인의 인생을 결정한다. 개인의 나이, 성격, 체력, 사교성, 특징, 지능, 사회적응, 발달과정을 토대로 개인의 교육, 직업, 취미, 특기, 결혼, 출산, 육아, 노후대비까지 모든 것이 계획표대로 되어 있다.
  나는 계획한 대로 주 3번 저녁 7시에 집에서 영어 과외를 받고, 계획대로 지정된 대학에 진학하고 계획한 대로 취미생활을 즐기고 계획대로 결혼을 하고 계획대로 아이를 낳을 것이다. 어쩌면 자식의 성별까지 정해져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개인보다 설계도가 우월하고 절대적이다. 진리이며 완전성이다. 종교이고 신이다. 자기합리화를 마치자 불안감이 야기한 흥분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생각해보니 불안감이 느껴질 이유가 없다. 나는 안전하다.  진로계획표대로라면  k대학에 진학한 뒤 심리학과를 졸업한 다음 심리상담가로 활동하다 31살에 진로계획부에 부속되게 돼 있다. 이른바 임원 코스라는 중산층 정도의 부를 쌓게 되는 진로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기쁨의 환호성을 지를 정도이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종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다. 후문을 나와서 횡단보도를 건너 오른쪽으로 발을 틀어 걷는다. 늘 학교가 끝날 시각엔 늘어선 아파트 단지가 햇빛을 가려 길에는 그늘이 진다. 그늘지대를 벗어나면 다시 횡단보도를 건넌다. 그런 다음 직선거리로 300m정도를 걸어가면 집에 도착한다. 문득 정해진 곳으로만 걷는 나에게 짜증이 났다. 늘상 계획표대로만 행동할 뿐이다. 그러자 내 안에서 오래된 의심이 피어난다. 사실은 이 길로 걸으라고 지시를 한 사람은 없잖아. 단지 이 길이 가장 빨라서 다니는 게 아닌가? 계획표는 다니는 길까지 정해놓진 않는다. 정말로 그럴까? 그렇지 않다. 나는 학교를 다니는 동안 한 번도 다른 길로 다녀보지 않았다. 그것이 구속받고 있다는 증거다. 바닥에는 선이 그어져 있어 나는 그 선으로만 다니게 되어 있다. 선은 나를 구속한다. 나는 팔을 걷어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소문에 의하면 시계 속에 위치추적 장치가 내장되어 있다고 한다. 각 지역마다 곳곳에 송신탑이 설치되어져 있고 내 위치는 정보부의 감시원의 모니터에 표시되고 있다. 기계에는 평소 나의 이동반경이 입력되어 있어서 내가 평소 다니던 길을 벗어나면 그 행적이 그대로 기록될 것이다. 아무도 모르지만 이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아니, 비밀이 아니다. 사실이다.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나는 손목시계를 풀어 바닥에 던진 후 발로 자근자근 밟는다. 그리고 부서진 시계의 부품을 유심히 찾는다. 그럼 위치추적 장치가 보일 것이다. 이것은 상상이 아니다. 현실이다. 진실이다. 나는 시간을 확인한다. 4시 32분.  
  집으로 걸어가는 길 한쪽에 화단이 있다. 여태껏 보고도 아무 느낌 없이 무관심으로 봐 왔기에 없는 거나 다름없다. 화단에는 꽃이 만발해 있었다. 나는 멈춰 서서 그 꽃을 유심히 바라봤다. 땅 속을 뚫고 나온 무성한 가지 끝에 분홍과 하양이 서로 번지고 겹치고 묻어있다. 나는 이 꽃의 이름을 생각해 본다. 진달래던가? 진달래라고 말하긴 했지만 진달래 외에는 다른 꽃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진달래가 봄에 피던가? 여름에 피지 않나? 나는 이 꽃이 언제부터 심어져 있었는지를 모르겠다. 설사 내가 태어날 때부터 있었다 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무관심했으니까. 어느 순간 충동적으로 깨닫게 되는 사실은 나의 무덤덤함에 비례해 큰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갑자기 꽃의 이름이 알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거의 동시에 알지 못할 거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알 방법이 없다. 타인에게 묻는 행위는 예의가 아니다. 물을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 상대방은 날 의심할 것이다.
  나는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다 알고 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 외엔 나는 더 알 필요가 없다. 그런데 모른다는 건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묻는 행위는 모르는 것, 즉 알지 못하는 것을 알려는 행위임이다. 알지 못하는 것은 알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난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안다. 난 모르는 것이 없다.
하지만 알고 싶다.

묻지 못한다면 책을 찾아보면 된다. 집 근처에 구립 도서관을 생각났다. 집 근처니까 괜찮아. 시간도 얼마 안 걸린다. 나는 멈춰 세운 발을 힘겹게 떼어냈다. 내 마음은 끝없는 걱정으로 가득 찼다.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걷고 있었다. 걱정과 불안 속에서 빠져나와 다시 발을 멈춘 곳은 도서관의 중앙 홀이었다. 도서관에는 의외로 사람이 많았다. 남의 이목을 끄는 행동을 하지 않는 이상 날 주시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홀의 구석구석을 살핀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간다. 엘리베이터 옆에는 안내도가 붙어 있다. 자료실은 2층이다. 계단을 타고 2층 자료실로 움직인다. 자료실 입구에는 도서관 사서가 업무를 보며 입구로 들어오는 이용객 하나하나를 흘겨본다. 소심한 나는 저 사서들도 감시자들이 아닐까 의심한다. 긴장감에 심장이 요동친다. 나는 되도록 의심이 가지 않게끔 자연스럽게 사서를 지나쳤다. 물론 그것은 나의 희망일 뿐이다. 자연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몸이 뻣뻣하게 굳었으니까. 사서가 내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이상하게 보지 않았길 바란다. 자료실 내에 들어선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자료실에는 서적들이 가득한 책장이 열을 맞춰 놓여 있다. 각 책장의 열에는 책의 종류가 큼지막이 써 있고 그 밑에 하위분류의 서적의 종류가 써져 있다. 서적은 분류별로 각 방에 나뉘어져 있었다. 방이라기보다 칸막이로 구분해 놓은 것이지만 뭐라 부르건 상관없다. 칸막이로 만든 구역에는 역시 번호가 부여되어 있다. 그런 숫자가 76번까지 있다. 총 76개의 방이 있다는 의미이다. 나는 그제서야 손에 쥐어있는 열람표의 의미를 깨달았다. 자료실에 들어서기 전 열람권을 신청하기 위해 단말기를 이용해야 한다. 단말기에 내 신상명세를 입력하자 단말기는 열람표를 지급했다. 열람표에는 몇 개의 번호가 적혔다.
3 24 25 60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것은 이용 가능한 서적의 종류였다. 나는 3 24 25 60번의 번호가 부여된 구역만 출입할 수 있다. 그리고 3 24 25 60에 비치된 책들만 읽을 수 있었다. 당연했다. 나는 3 24 25 60외에 다른 것을 알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아직 실망은 이르다. 나는 일말의 기대감을 품고 열람표에 적힌 숫자의 구역을 전부 둘러봤다. 심리학이나 교육학, 인류학, 철학 등의 책들이 보였다. 식물학은 없었다. 실망이 엄습해왔다. 나는 단지 식물도감만 잠깐 훑어보길 원할 뿐이었다. 그저 하교 길에 만발한 꽃의 이름을 알고 싶었다.
나는 휴게실 의자에 앉아서 음료수를 마셨다. 손에는 열람표가 들려있다. 손에 들린 열람표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러면서 열람표를 보지 않는다. 학교에서 받아 든 학년 진로계획표를 보듯이 보지 않고 있었다. 나는 날 납득시킨다.

“혹시 24번이 있니?”

옆자리에서 누군가 그렇게 말한다. 24번이 어쨌다는 걸까. 나는 손에 들린 열람표에 24번이 적혀 있음을 알았다. 이것과 저 말이 상관이 있는 건가. 나는 고개를 들어 말이 들려 온 쪽을 돌아본다. 내 또래의 남자아이가 날 보고 있다. 그는 내가 자신을 바라보자 유쾌한 표정을 지었다. 유쾌한 입이 벌어졌다.

“24번이 맞구나.”

그는 24번이 무슨 중요한 비밀암호나 되는 듯이 반복하여 말했다.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럼 난 ‘13번이군’ 이라고 말해야 되나. 어쩌면 암호가 맞을지도 모르고 상대는 자신의 정체를 밝힌 다음 비밀조직에서 내린 임무를 전해줄지도 모른다. 정부에 테러를 가할 지도 모른다. 설계도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세상을 설계하는 위대한 시계공들을 없애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왜 이런 무슨 웃기는 망상을 하고 있는 걸까. 짧은 망상을 끝낸 나는 그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반문하자 그는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24번이 심리학이지? 사실 내가 읽고 싶은 책이 있어서 그래. 하지만 난 24번은 들어갈 수 없거든.”

그는 대담하게도 솔직히 말하고 있었다.  알 필요가 없는 것을 알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내게 왜 접근한 걸까. 내가 사람이 좋아 보이나. 아니면 나도 모르는 것을 알고 싶다는 사실을 눈친 챈 걸까. 나는 그의 눈을 보았다. 불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나를 믿기에 그런 걸까. 내가 그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믿고 있는 것일까. 그는 유쾌한 미소를 짓고 있다.    

“넌 몇 번인데?”

나는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내심 그가 내가 원하는 번호를 가지실 속으로 빌면서.

“35 39 42 53 번이야.”

나는 실망했다. 원하는 번호가 없어서가 아니다. 나는 식물학이 몇 번인지 모른다. 그에게 물어봐야 할까. 다행이 그가 먼저 답한다.

“아. 동물학 식물학 사회학 영문학이야.”

그가 어째서 그런 종류의 책을 읽을 수 있는 지는 중요하지 않다. 식물학이 있다. 그걸로 다다. 그가 식물도감을 펼쳐 보며 꽃 이름을 중얼거린다 해도 나하곤 상관없다.

“그래서 말인데. 필요 없다면 열람표를 주지 않을래?”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는 내게 기회를 줬다. 열람표에는 인적사항이 기재되어 있질 않다. 단순한 인증번호만 적혀 있어서 남의 걸 바꿔치기 해도 들통 나지 않을 확률이 높다. 바꿔도 좋은 건지 나는 갈등한다. 갈피를 못 잡는다.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다.

“좋아. 대신에 네 열람표과 교환하는 조건이라면.”

어렵게 내린 결정이라는 것을 모르는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건을 수락한 그는 자신의 열람표를 내게 내밀었다. 열람표를 건네받은 나는 그에게 내 열람표를 건네줬다.

“고마워. 나중에 보자.”

  그는 마치 해질 무렵에 헤어져서 내일 다시 만나게 되는 친구처럼 인사를 하고는 사라졌다. 저런 부류와의 만남은 은밀한 거래가 많은 만큼 위험도 많다. 유혹에 넘어가지 말자. 절대로 그를 만나지 않겠다. 나는 그렇게 다짐했다. 외도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자료실에 들어선 나는 곧바로 식물학 서적이 비치된 24번 구역으로 갔다. 열람표를 검사하는 사서의 매서운 눈매도 피했다. 검사를 무사히 통과하자 맥이 풀린다. 나는 의심받지 않도록 느긋하게 책을 둘러본다. 여러 종류의 책들이 책장에 들쭉날쭉 꽂혀 있다. 식물재배법이나 농사 짖는 법 파종법을 배우는 책등 각양각생의 책들 중에서 내가 고른 책은 식물도감이다. 두꺼운 하드커버로 덮인 책을 천천히 개봉한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신중히 넘긴다. 목차를 유심히 읽어 내려가며 진달래를 찾는다. 찾았다. 158쪽. 페이지를 뭉텅이채로 넘긴다. 손에 땀이 배여 책장을 넘기기가 쉽다. 힘겨운 여정 끝에 158페이지에 도달했다. 눈에 띄는 컬러로 진달래의 사진이 보인다. 내 예상이 맞았다. 그 꽃은 진달래였다. 책에는 진달래목 진달래과니 하며 학술명과 자세한 설명이 쓰여 있었지만 나는 대충 훑기만 하고 책을 덮었다. 흥분으로 몸이 들썩인다.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지만 입매가 양쪽으로 벌어진다. 안면 근육이 땡긴다. 나는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하며 도서관을 나왔다. 홀가분하다.
  작은 승리의 도취감에 취한 나는 손목에 감긴 시계를 쳐다본다. 시계는 완전성의 상징이다. 완성품인 시계처럼 이 세상도 완성품으로 만들기 위해 인생설계부는 정밀한 설계, 신속한 복구, 수리, 불량품 교체 등의 작업에 애쓴다. 설계사들은 인간의 발전엔 관심이 없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영속된 유지이다. 그것은 시계를 보면 알 수 있다. 시계는 원운동을 하며 움직인다. 원운동에는 끝이 없다. 그냥 계속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시간은 설계도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시계 속에서 사람들은 인권과 자유를 보장받으며 살아간다.  
  나는 인권과 자유에 대해 생각한다. 교과서에서 인권과 자유에 대해 가르친다. 인권과 자유는 존재한다. 그러나 모든 법보다 위에 있는 인생설계부는 인권과 자유를 박탈한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생각해야겠지만 사실 인생설계부는 인권과 자유를 박탈하지 않는다. 인생설계부는 법 위에 있다. 인권과 자유는 법 아래에서 효력을 발휘하기에 교과서가 틀리진 않았다.  인권과 자유는 지금도 보장되고 있다. 인권은 집단사회 속에서만 인정된다. 개인은 인권이 없다. 인권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받는 것이다. 이 세상에선 자신의 인권을 인정받기 위해 누구든 기꺼이 사회의 부속품이 된다. 자유는 낭비다. 사람들은 보다 많은 자유를 원한다. 그들에게 자유의 진짜 의미는 퇴색한지 오래다. 그들은 음식을 낭비할 자유를 원한다. 돈을 낭비할 자유를 원한다. 시간을 낭비할 자유를 원한다. 주말에 쇼핑을 하고 값비싼 레스토랑을 다니고 하루 종일 TV를 볼 수 있는 자유를 원한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나는 그것을 알았다. 무엇이 나를 구속하는지. 아스피린 2알을 사지 못하는 것이 누구이고 미래를 두려워하는 게 누구인지. 인생설계부는 원래 있지도 않다. 내 불안심리가 만들어낸 가상의 기관이다. 모든 것은 사람들이 날 보는 시선과 기대, 미래에 짓눌려 망상에 의지하는 나의 두려움의 산물이다. 그것은 나이다.
나는 시계를 끌러 오른손에 쥐었다. 시계의 고동소리가 들린다.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시계를 쥔 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그리고 힘껏 바닥을 향해 시계를 내리쳤다. 시계는 멀쩡했다. 시계의 내구성을 확인한 나는 발을 들어 시계를 짓밟았다. 유리가 깨지고 시계바늘이 부러지고 톱니바퀴가 박살난다. 짓뭉개진다. 호흡의 흐트러짐 없이 나는 간단히 시계를 부셔버렸다. 허탈할 지경이다. 그리고 허탈감이 사라지기 무섭게 기쁨의 감정이 솟아났다. 나는 나 자신에게서 해방됐다. 나는 발을 떼어 망가진 시계를 내려보았다. 그리고 허리를 굽이고 손을 뻗어 부서진 시계를 집어 들었다. 시계는 내 손바닥 안에서 형체를 잃고 바스러졌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시계다. 아니, 이젠 평범하진 않다. 그것은 이제 시계가 아니었다. 어떤 고지식한 시계애호가가 내 앞에 나타나 내 손에 놓인 물체를 시계라고 주장하며 억지를 부린다면 나는 그를 진정시키며 시계로 인정하는 대신 앞에 ‘고장 난’ 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한다고 충고해 줄 것이다. 그런데 고장 난 시계는 시계가 아니다. 결국 타협의 선에서 그와 나는 동시에 만족할 것이다. 나는 검지를 움직여 고장 난 시계를 흩뜨려 놓았다. 태엽이며 바늘이 고루 섞였다. 부서진 부품들이 표면에 들어난다. 나는 부서진 부품들을 보며 시계의 내부를 상상해본다. 고고학자가 화석을 가지고 공룡의 모습과 연대를 구성해 나가듯이 시계를 구성해 나간다. 나는 구체적으로 해부도를 그려보기 위해 부품들을 자세하게 관찰한다. 그런데 부품들 속에서 이상한 물체가 보였다. 나는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그 물체를 조심히 들어올렸다. 부품 속에서 나온 것은 네모난 정방형의 검은 물체였다. 그것은 금속성을 띄고 있어 보이기도 했다. 물체의 표면에는 글씨 같은 표식이 흰 색으로 써졌다. 어디서 많이 보던 물체라고 생각하던 나는 문득 그것이 무엇을 닮았는지 떠올랐다. 그것은 마치 칩 같았다. 아날로그시계에 있을 리가 없는.
머리가 아파온다.      
                  
    
댓글 2
  • No Profile
    아이 04.10.31 15:01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글 읽는 내내 왠지 기분이 나른해지더군요. 이런 상태 좋아합니다. 또 읽을 수 있기를...
  • No Profile
    mirror 04.11.15 16:55 댓글 수정 삭제
    우울중독님에게는 밤을 사냥하는 자들이 전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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