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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길동무

2004.08.28 01:5208.28

미로냥



신월의 밤에 찬 물에 달을 어리우고 낯을 씻으면 좋은 길동무를 얻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경이 때마침 신월이 하늘에 기우뚱 걸린 걸 올려다 보며 그 이야기를 꺼냈을 적에 이미 길동무가 되어 적적한 산길이나마 떠들썩하니 지나는 참이던 두 사람이 왁자하게 웃었다.
  
  “이런, 경 군은 보기와는 달리 미신을 믿는구먼?”
  
  그렇게 말을 꺼낸 것이 진 모라는 이름의 사내로, 서울 친척에게 들르러 가는 길이라 하였다. 풍채 적당하고 웃음소리가 호탕한 진 모는 시골에선 제법 내노라 하는 집안 아들이라 하였다.
  
  “경 군은 장사치니까 아무래도 그럴 수 밖에 없을 테지요.”
  
  웃으며 조용히 받는 사람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려 땋은 사내로 이름을 현 모라고 했는데 얼른 보기에는 뺨이 복사빛이고 입술이 붉어 남장한 미인 같았다. 진 모가 괜히 말을 꺼내면 현 모는 부채를 흔들어 말이 나쁘게 흐르지 않도록 갈무리를 짓곤 하였는데 경은 신월이 눈썹처럼 물에 어린 것을 말끄럼 바라볼 뿐이었다.
  
  “말씀하신 대로 저는 장사치라, 시골 영감들의 미신 따위도 소홀히 넘길 순 없답니다. 장살 허고 다닐라 치면 이 고개 넘을 때랑 저 고개 넘을 때가 온 달라서 말입지요.”
  
  찰랑, 물에 손목을 담그고 경이 물방울을 퉁겼을 때였다. 유난히 검은 하늘에 들러 붙은 푸른 나무 그림자가 아스스 바람을 타듯 몸 떨더니 수풀 사이에서 자그마한 그림자가 하나 튀어 나왔다.
  
  “아저씨!”
  
  세 사람은 일순 얼어 붙었다. 허황하다 치부를 했을 지언정 신월 밤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운나라 사람이면 세 살 아이부터 신월 밤 길동무 이야길 듣고 자라곤 했으니까. 진 모는 웃지 못했다. 현 모는 부채를 흔들지 못했고, 경 모는 내려 놓은 어깨짐 쪽에 손을 가지고 간 채 침만 꿀꺽 삼켰다. 신월 밤에 달 그리매 묻은 물에 낯을 씻으면 길동무를 얻게 된다 하였다. 뉘인가 모르는 목소리로 자신을 부를 적에 고개를 돌려 화답하면 그 목소리의 주인이 뉘라도 개의치 않고 자신의 동아리에 끼워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냐!”
  
  분명 아이 목소리였다. 이런 시간에 이런 곳에 아이가 있을 리 없다. 이매망량이냐, 혹은 오래된 서책에나 전해오던 요망한 짐승이냐. 먼저 답하고 돌아본 것은 경이었다. 진과 현은 경이 먼저 돌아본 후에야 비로소 숨을 돌리며 경이 보고 있는 방향을 함께 보았다.
  
  “단휘.”
  “단휘……?”
  
  여자아이였다. 짙은 비색 머리카락이 장식 하나 없이 길게 늘어졌고 얼굴은 한 밤인데도 달 대신 빛날 것처럼 희었다. 그러나 그 옥지환 같은 머리카락보다도, 흰 박꽃 닮은 얼굴보다도 눈에 먼저 뜨이는 것은 유난히 크고 검은 눈이었다. 크고, 여리고, 둥글고, 검어서 그믐 같다. 단휘는 표정 없는 얼굴로 억양 없이 말했다.
  
  “아저씨. 나랑 같이 가 줘.”
  “어린애가 왜 이런 밤에 예 있는 거냐? 썩 돌아가.”
  “싫어.”
  
  단휘는 단박에 잘라 내고는 경의 옷자락을 움켜 쥐었다.
  
  “난 아저씨랑 가야 해. 벌써 신월을 세 번이나 보냈는데 아무도 나랑 같이 가 주지 않았단 말야. 이게 마지막 신월 길손이니까 더는 놓칠 수 없어. 아저씨가 날 베어 버린다고 해도 난 같이 가야 해.”
  “섬뜩한 소릴 하는 아일세?”
  
  경은 고개를 저었다. 현이 표정을 감추고 있던 부채를 거두어 뒷짐을 진 손바닥을 앞으로 내 타악, 소리 나게 쳐 보였다. 그리고는,
  
  “뭐 어떻습니까? 경 군. 같이 가십시다.”
  
  한다. 진도 특유의 웃음소리로 와하하 웃고는 거들었다.
  
  “그럽시다, 경 군. 이런 어린앨 숲에 두고 가는 것도 사람 도리가 아닐 테니.”
  
  딴은 그렇다 싶어 경도 이내 두 손을 들고 말았다.
  
  “하기사. 두고 가는 건 꺼림칙하겠지요, 역시. 적어도 사람 사는 말 까진 데려다 놓아야 속이 풀릴 것이니.”
  
  등짐을 메고 앞장을 서자 단휘는 경의 뒤에 찰싹 들러 붙어 종종 걸음을 친다. 장사치 노릇을 한 것도 한 해 두 해의 일이 아니라, 경의 걸음은 어지간한 장정이래도 흉내 못 내리만치 날랜 편이었는데 단휘는 놓치기는커녕 땀 한 방울 어리지 않고 따라 왔다. 경은 혀를 내둘렀다. 이거, 아무래도 사람 새끼가 아닌 모양이로구나. 허나 신월의 길동무에게 무엇을 따져 묻는 것은 묵계를 거스르는 일이므로 경은 날이 밝을 무렵 마을 어귀가 보일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진과 현은 한참 뒤쳐졌다.
  
  “경 군, 경 군! 천천히 좀 갑세다!”
  “경 군!”
  
  어귀에 이르렀을 때 단휘가 경의 앞으로 나섰다. 경은 부는 바람이 단휘의 옥색 머리카락을 숲을 흔들듯 온 힘을 다해 흐트러뜨리는 것을 보았다. 통이 좁고 무늬가 없는 흑차 빛깔 치맛자락이 상처 많은 정강이에 걸려 푸드덕거린다. 허리까지 늘어진 저고리 깃이, 꽁꽁 쪔매 나비 장식을 단 옷고름이 뒤엉킨다.
  
  “경 군!”
  
  담배 냄새가 배인 목소리를 가진 진이 왼 편에 섰다.
  
  “경 군. 보았나?”
  
  모처럼 부채를 거두어 산 버찌 냄새가 물씬 풍기는 현이 오른 편에 섰다. 두 사람이 양쪽에서 경의 귀를 쥐고 수군거렸다.
  
  “경 군, 여울세.”
  “경 군, 저건 여우라네.”
  
  여우.
  경은 눈살을 찌푸렸다. 인간 같지 않은 아이니 실제 여우의 화신이라 하여도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가, 고 운을 틔우니 기다렸다는 듯 진이 말했다.
  
  “잡세.”
  
  현도 말했다.
  
  “잡세.”
  
  두 사람의 눈을 뉘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반짝였다. 함께 길동무를 삼은 날로부터 두 사람이 눈이 이토록 생기 있게 일찍이 빛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어떻게 잡는단 말입니까?”
  
  기가 막혀 물었다. 제 아무리 귓것이라지만 신월 밤에 얻은 길동무를 잡자니, 그것은 오래된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뿐 아니라 인간과 귓것 사이, 인간과 하늘 사이에도 예란 존재하는 법이라고, 경은 배웠다. 혼자 산길을 넘나들 때 괜한 기원을 올리게 되는 서낭 나무 앞에서, 혹은 험난한 절벽을 지나다 발을 헛디뎌 생과 사를 넘나들다 목숨을 건졌을 적에, 경은 은혜 갚음을 잊어선 인간 아니라고 누누이 일렀던 조부모를 떠올렸다. 헌데 이 자들이 무어라 하는 것인가.
  
  “경 군, 경 군은 모르겠는가? 저것이 바로 옥여우인게야.”
  “옥여우?”
  “그래. 옥산에만 산다는 긍지 있는 족속인데, 진작 씨가 마른 걸로 알았더니 근자에 갖은 짐승들이 튀어 나오는 데 섞여 같이 나온 모양야.”
  
  진이 입술을 혀로 핥았다. 본디 운은 왕의 땅으로, 삿된 것이 뭇 사람의 눈에 뜨일 만큼 흔히 다니지는 않았다. 운을 세운 시황이 하늘의 명을 받들어 푸른 안개 마마와 계약을 맺으니, 그로하여 온 보천에서 사람을 먹는 요수와 사람을 죽이는 요초가 사라졌다. 허나 두어 해 전부터 급작스레 물이 마르고 햇볕이 날카로워지며 괴이한 짐승들이 하늘을 뒤 덮었다. 사람 다니는 길에 기이한 풀이 돋는 일이 흔했고 사람 사는 집 지붕에서 불길한 징조를 안은 짐승이 울음소리 내는 일도 흔했다. 예서 불이 나고 제서 땅이 갈라지니 사람이 버티지 못하고 제 집을 버렸다. 가는 곳마다 역병이 돌고 물이 드물지 않은 곳 없으니 운의 하늘이 끝났다는 한탄마저 공공연한 것이 된지 오래였다.
  
  “저 옥색 머릴 보면서도 옥여우 생각을 아니 했단 말인가? 옥여우가 무슨 마음을 품고 사람 말엘 다니러 온 건지는 몰라도 우리는 한 몫 잡을 걸세.”
  
  진은 함박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현은 곁에서 부채로 낯을 반이나 가리고 있었지만 눈매가 반달을 그리는 걸로 보아 진 못지 않게 즐거운 모양이었다. 경은 자신의 소매를 쥔 진을 뿌리치려 하였다. 누누이 들어 왔다, 신월에 맺은 길동무는 제 아무리 삿된 것일지언정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고. 이 땅은 기실 인간만의 땅이 아니었다고, 눈에 자주 뵈지 않았던 것들도 본디는 이 땅의 한 주인이었다고.
  
  “아저씨, 이쪽이야. 오늘은 더 가지 말구 이 말에서 묵어, 응?”
  
  단휘가 달려와 떠들었다. 진과 현은 언제 악한 생각을 했는가 싶도록 표정을 재빨리 바꾸었다. 헛기침을 하는 현 쪽을 단휘는 할끔 치어다 본다. 그리고는 못 본 척 경의 등짐 끈을 쥐고 뒷걸음질로 이끌었다. 동그랗고 큰 눈 위로 아침 볕을 받은 옥색 머리카락이 짙푸른 그리매를 드리웠다. 팔랑팔랑 바람이 불고 머리카락은 날리고 단휘의 동작은 가벼워서, 경은 다시금 그녀가 진실로 인간 아닌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옥산 여우. 그런 건 전설에서나 나오던 것을 세상이 혼란해 지자 다른 뭇 요수와 마찬가지로 옥산 여우마저 눈 앞에서 계집애 형상을 두르고 뛰노니는 것일까.
  
  “아적 때인 것을 왜 머물자구 하는 거냐? 더 가야 해. 충실히 걷지 않으면 저쪽 내를 넘을 수가 없단 말이다.”
  “안 돼. 가면 안 돼. 단휘는 이 말서 받을 게 있어.”
  
  말을 마치고 단휘는 손가락으로 길을 가리켜 보였다. 바싹 마른 길에서 먼지가 피고 저만치에서 사람 그림자가 이쪽으로 달려 든다. 사람은 곧장 단휘에게 무릎을 꿇었다.
  
  “빌렸던 물건을 받으러 오셨나이까, 아씨.”
  “응. 빌렸던 물건을 받으러 왔어.”
  
  무릎을 꿇은 사람은 툭 치면 고스란히 흰 재로 주저 앉을 듯한 꼬부랑 노인이었다. 이도 빠져 발음이 새고 눈은 움푹 들어간 데다 코는 주름으로 덮여 광대뼈와 뺨 사이에 파묻혀 있었다. 노인은 검고 작고 가늘었다. 지팡이를 팽개치고 단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이마를 땅에 탁탁 힘 없이 내리 치더니, 노인은 말했다.
  
  “아아, 아씨. 여기, 여기 있습니다. 일전에 마을에 짐승이 나려 자식이 죽고 흩어지는 마당에도 이 물건만은 늙은 몸으로 품어 지켜 왔으니 받으십시오.”
  
  노인이 내민 것은 낡은 보자기에 싼 자그만 것으로, 단휘는 물건을 받자 마자 소매를 흔들어 노인 앞에 누런 것을 한 움큼이나 떨어뜨렸다. 소매에서 잘그락잘그락 떨어지는 것은 얼른 보기에는 익은 볍씨 같은데 바닥에 닿는 순간 퉁기는 것을 보면 황금이 분명했다. 세상에나, 하고 탄성을 지른 것은 노인 뿐이 아니었다.
  
  “보, 보았소? 경 군. 저 황금을!”
  “황금!”
  
  진과 현이 목소리를 죽여, 그러나 그 환희와 경탄만은 숨기지 않고 수군거렸다. 경도 물론 보았다. 단휘가 소매를 흔들자 떨어지는 황금을, 그리고 단휘가 황금을 떨군 바로 그 소매 안에 거두어 들이는 ‘물건’을.
  
  “저 물건이 무엇일까? 경 군. 궁금하지 않은가?”
  
  그것은 현이었다. 부채를 접어 경의 어깨 짐을 툭 두들긴다. 단휘는 이쪽을 돌아 보았다. 역시 아무런 표정도 떠 있지 않았다. 총기 어린 검고 깊고 크고 기이한 눈은 깜박일 뿐 어떤 감정도 품고 있지 않다.
  
  “단휘, 아주 오래 전에 이걸 네 조상에게 잠깐 빌려 준 거였는데 벽하 마마께서 가로 막아서 단휘, 가지러 올 수 없었어. 이제야 이걸 받았으니 보답을 하는 거야. 가지고 가. 그리고 살아 남아라.”
  
  노인은 몇 번이고 바닥에 이마를 찧고는 주섬주섬 황금을 쓸어 치마폭에 쌌다. 몸을 일으켜 길을 따라 황급히 마을로 돌아가며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단휘는 경의 옷자락을 쥐었다.
  
  “물을 건너면 안 돼, 오늘은. 단휘의 길동무가 되어 주었으니까 하늘 흐름을 누설하는 거야. 오늘은 물 건널 수 없어.”
  “무슨 소리냐! 이 길은 백 날도 더 지나다녔어. 저쪽 개울은 말라 비틀어진 지 오래란 말이다. 비는 한 달에 하루도 잘 비치지 않아, 큰 비는 지난 두 해간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그런데 왜 건널 수 없다는 거지?”
  
  진이 그렇게 따졌다. 단휘는 답하지 않고 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못 건너. 네가 잔뜩 지니고 있는 그 변변치 않은 문서 따위는 몽창 잃고 말 터이니 해 주는 이야길 고맙게 받아라.”
  “이 요망한 것이!”
  
  진이 주먹을 휘두르려 했을 때 현이 그것을 막았다.
  
  “자, 진 형. 진정하시오. 어디 어린 아일 상대로 그러면 쓰오?”
  
  하고는, 경이 단휘의 이끌림을 따라 마을 쪽으로 걸어가는 새에 목소리를 낮추었다.
  
  “진 형, 단 번에 두들겨 팬다고 될 일이 아니오. 저 옥여우는 황금을 품고 있으니 황금을 실컷 얻어낸 후에 때려 잡아 가죽을 벗깁시다.”
  
  나중에 두 사람은 경에게 함께할 것을 요구했다. 경은 머뭇거렸다. 아무리 여우라지만 아이 모습을 하고 있는 데다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다. 빌려 주었던 물건을 돌려 받고는 황금까지 내어 준 여우를 이유도 없이 죽인다니 꺼림칙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경은 어린 시절 조부모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반복했다. 이 땅은 왕이 서기 전에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었다, 요수도 요초도 인간과 함께 태어나고 죽었으며 작금에도 눈에 자주 뜨이지 않을 뿐 망량이매마저 죄 한 땅의 주인이라는 이야기였다. 단휘는 좋은 여우다. 소매를 털어 황금을 내는 여우 이야기도 자주 듣지 못하였지만 그걸로 사람을 돕는 여우 이야기도 흔하지 않다. 그러나 단휘는 그렇게 했다. 그런 아일 죽인다니 응당 하늘의 벌이 있을 것이다.
  
  “겁쟁이. 우리 일을 방해하지 마시오!”
  
  진이 외쳤다.
  
  “어리석긴! 여우는 요물이우. 경 군, 하늘이 시황을 내리실 제 짐승이 노니는 걸 금하도록 허락하신 큰 뜻을 모르겠소? 요수와 요초를 왕의 땅에서 거두도록 하신 뜻 말이오.”
  
  현이 외쳤다.
  
  “그래도 아니 됩니다. 이 방을 얻은 것도 단휘가 아까 그 노파와 아는 까닭이었습니다. 단휘 아니었으면 이 말 사람들은 이방인을 받아 들이지 않았을 겁니다.”
  
  경이 변호했지만 진과 현은 비웃었다.
  
  “애당초 물도 없는 내를 건너지 못하게 한 것이 그 여우요. 경 군은 여우에게 홀린 것이로군.”
  “홀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 정신입니다.”
  “아니야, 군은 홀렸어!”
  “홀리지 않았습니다!”
  
  경의 등에 식은땀이 쭉 흘렀다. 진과 현은 숙덕거리더니 이내 기름진 눈동자를 굴리며 경에게 제의했다.
  
  “그러면 경 군, 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오. 여우한테 가서 길동무를 해 주었으니 삯을 달라고 하란 말요. 여우의 황금을 얻어 오시우. 그럼 믿어 주겠소.”
  
  믿지 않아도 좋다, 고 왜 말하지 못했을까. 문을 열고 나서며 경은 후회하였지만 이미 때가 늦어 버렸다. 등 뒤에서 잘 하고 오오, 하는 목소리가 두 개 겹쳐 날아 들었다. 경은 사립 바깥에 오도마니 서서 서녘 하늘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단휘에게 다가갔다.
  
  “길동무 삯을 받을 거야, 아저씨?”
  
  먼저 물어주어 경은 마음이 조금 놓였다. 길동무를 해 주는 걸로 대가를 받는 것은 길잡이들이 업으로 삼아 하는 일이지 장사치가 하는 일이 아니었다. 경은 들인 땀 없이 대가 얻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지만 진과 현은 틀림없이, 빈 손으로 돌아온 경을 여우 홀렸다며 죽일 지도 몰랐다. 경은 더벅머리를 벅벅 긁었다. 단휘가 미소라도 떠올려 주면 좋으련만 매촘한 입매는 영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검은 눈이 똑바로 경을 본다. 과연 여우로구나. 경은 생각했다. 털이 달린 귀가 없고 날씬한 허리며 풍성한 꼬리 대신 곱단한 계집아이 모양을 꾸리고 있어도 여우는 여우였다. 단휘의 눈이 짐승의 것처럼 불을 냈다. 신월이 뜬 하늘은 아직 온전히 어둡지도 않은데 달을 가릴 구름은 한 점도 없다. 하늘은 거울만큼 맑았다. 그렇게 맑고 고운 하늘이 두 해 넘게 계속되어 작물이 마르고 사람이 죽었다. 물이 없는 땅은 숨이 끊어지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삯으로 돈을…… 황금을……”
  
  경은 말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눈 앞의 이 계집은 여우다. 아무리 가련해 보이고 아무리 선해 보여도 결국 여우다. 왕의 땅에 인간 말고 다른 건 필요가 없었다, 모두들 없었던 때가 더 좋았다고 말하지 않는가. 벽하 마마가 사라지기 전에는 요마와 요초가 땅을 덮지 않았고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난 탓으로만 살해 되고 잡아 먹히지 않았다. 그때에는 비가 제대로 왔다. 강에서 바다로 물이 끊이는 일 없었다. 그러니 여우는 잘못된 것이다. 그러니 짐승은, 기이한 풀은, 없어도 좋은 것이다.
  억지다.
  경은 속에서 불쑥 치미는 기분을 억눌렀다. 억지다. 억지를 부리고 있다. 요마도 요초도 인간 땅을 어지럽히려고 나타난 것이 아니다. 이 땅은 본디 인간만의 것도 아니었다. 이 여우는 그냥 여우일 뿐이다.
  
  “황금을!”
  
  얼른 황금을 얻자. 소매를 떨치면 황금이야 얼마든 줄 수 있을 터이니 단휘에게 차라리 황금이나 얻고 모를세라 멀리 보내 버리자. 죽임 당하기 전에 멀리멀리 여우로 화해 자유로이 달려 사라지라고 말해 주자.
  
  “나는 잠시나마 용의 기운을 빌어 이 땅에 비를 줄까 하였어. 그런데 아저씨는 겨우 내 소매나 떨쳐 달라 청하는 거야?”
  
  거짓이다. 여우 따위가 비를 부를 수 있다면 이 땅이 왜 이렇게까지 말라 죽어가는데 아무도 도우려 하지 않는 것인가. 왜 모두가 하늘이 옥좌를 버렸다고 말하는 것인가. 하늘이 버린 일이라면 여우 따위가, 기껏 소매를 떨칠 줄 알고 신월 밤에 길동무를 기다려서야 인간을 만나러 올 수 있는 여우 따위가 행할 수 있을 리 없다. 경은 고개를 흔들었다.
  
  “황금을 줘!”
  “바란다면 얼마든 주겠어. 여우는 황금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단휘는 양쪽 소매를 흔들었다. 쌀알만한 황금이 후둑후둑 쏟아져 단휘의 발치에 쌓였다. 황금은 쏟아지고 또 쏟아졌다 되로 퍼 놓은 것처럼 쌓여 모래무지를 닮은 자그만 봉우리를 만든다. 단휘의 무릎 높이로 쌓인 황금을 향해 진과 현이 달려들었다.
  
  “황금! 황금을 더 줘!”
  “황금을 줘!”
  
  단휘는 소매를 거두었다. 황금을 한 아름 안아 옷자락이며 소매며 봇짐에 게걸스레 퍼 담던 두 사람이 몸을 일으켜 단휘의 옷가슴을 휘어 잡았다.
  
  “요망한 옥여우! 너를 모를 줄 아느냐?”
  “네 가죽을 벗겨야겠다. 어서 황금을 더 내!”
  
  단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한다, 이제 없다, 고. 진은 짧은 칼을 꺼낸다. 현은 부채를 펼쳐 뒤로 물러선다.
  
  “이건 은으로 만든 칼이다. 옥여우 년! 네 년 목을 따 버릴 테다!”
  
  은으로 된 칼이 단휘의 목에 닿았다, 경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안 돼! 단휘를 죽이지 마!”
  
  나뭇잎 즙 색깔 피가 한 방울 단휘의 목을 타고 흘렀다. 단휘의 옥색 머리카락이 빛을 뿌렸다, 빛은 물방울처럼 산산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빛은 둥글고 찬란하고 수가 없었다. 경은 저도 모르게 달려들어 진을 밀어 내 놓고 자신도 반대 쪽으로 나동그라졌다. 빛에 눈이 부셔 손바닥으로 시야를 가렸다. 가린 시야에서 웃음소리가 와르르 쏟아졌다.
  
  “단휘!”
  
  목소리는 현의 것이었다. 현이 부채를 던지며 웃음소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경은 빛 속에서 비색 털을 가진 크고 아름다운 여우를 보았다. 여우는 아홉 개 꼬리를 가지고 있었다. 현을 향해 여우는 후, 하고 입김을 불었다. 현은 억 소리를 내며 바스라졌다.
  공기 속으로, 바스라졌다. 마를 데까지 마른 나뭇잎처럼.
  
  “꺼져라, 귓것아! 사람을 홀리는 것이 제법 행색이 과하구나.”
  
  단휘, 옥여우는 하, 하, 하, 하, 웃었다. 현은 쪽처럼 푸르고 불처럼 붉은 주름을 가진 커다란 지네로 변해 제가 걸쳤던 옷을 감싸고 돌았다. 몸을 비틀다 저만치 메마른 논으로 기어간다. 퉤, 하고 단휘는 지네를 향해 침을 뱉었다. 여우의 침은 유리새 빛깔이었다. 푸르고 투명한 것이 묻은 지네는 경의 새끼손톱만 한 크기로 오그라들어 흙과 죽은 풀 사이로 파고들어 사라졌다.
  
  “갖은 귓것이 여우를 노리고 인간을 노리는데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 돼.”
  
  단휘는 다시 계집애 모습으로 돌아와 목덜미를 닦았다. 위험했다, 고 덧붙인다. 아저씨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꼼짝없이 천 년 닦은 술법을 잃을 뻔 했다고, 그렇게 말하는 단휘는 비로소 웃었다.
  
  “아저씨, 불을 하나 빌려 줘.”
  
  어디서 났는지 제법 폼을 잡고 곰방대를 물기에 불을 만들어 주었더니 주먹만 한 연기를 허공으로 뿜어 놓았다. 연기는 흐트러질 듯 풀어질 듯 야청색 하늘로 솟아 오르더니 이내 비구름이 되어 마을 하늘을 덮었다. 진은 죽어 얼굴이 허옇게 떴다. 단휘는 혀를 찼다. 지네 꼬임에 넘어간 걸 여우라고 살릴까 보냐, 고 말할 뿐이다. 경은 측은하여 진을 산 기슭에 묻었다. 그 즈음 비꽃이 피었다. 혀를 내어 머금을라 치면 단 맛이 날 것 같다. 두 해 만에 비가 내려, 마을 쪽이 수런거린다. 살아 남은 사람들이 모처럼 웃을 테다. 단휘는 인적 드문 산 속으로 걸어 가며 묻지 않은 것을 말한다.
  
  “이 물건은 여우 단지다, 속엔 판관이 들었지. 이 판관은 여우의 물건인데 진세에 오래 머문 탓에 그만 망가지고 말았어.”
  
  단휘는 보자기를 풀고 이가 빠진 사발 속에서 도마뱀을 닮을 검푸른 것을 집는다. 자신의 흰 팔뚝에 ‘판관’을 올리자 판관은, 단휘의 살갗을 뚫고 꾸물꾸물 사라져 버렸다. 경은 놀라지 않았다. 단휘는 재주를 넘어 여우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가 빠진 사발은 텅 빈 채 경의 발치를 굴렀다. 경은 사발을 주워 들었다. 젖은 흙과 숯 냄새가 풍겼다.
  
  “분명 빌려준 판관이 둘이었거늘, 품으로 돌아온 것은 하나이니 망가진 판관을 몸에 지니고 도망친 녀석이 있을 터.”
  “단휘. 옥산으로 돌아가나?”
  “붉은 달 너머로 판관을 거두러 가야겠어. 늦지 않으면 좋으련만.”
  
  본디로 돌아가는 것뿐이야, 라고 단휘는 말했다. 본디 이 땅이 인간만의 것 아니었던 것을 모를세라 눈 감겨 두었다가 이제사 환히 드러날 뿐이라고. 수백 해 동안 왕의 힘이 땅을 덮어 귀허의 검은 것과 열고야의 흰 것이란 서책에나 전해올 뿐이었으나 이제는 한 땅의 주인 되어 돌아오는 것뿐이라고.
  
  서까래 아래 그늘진 부분에도 마루 아래 먼지 사이에도 그것들 있어 왔으니 새삼 놀라고 새삼 혐오할 일이 아니다. 경은 어린 시절 들었던 조부모의 이야기들을 다시 떠올렸다. 세 사람이 길동무 삼으면 반드시 그 사이에 귓것이 스미는 법이라고, 한 사람이 달을 치어다 보면 반드시 그 곁에 귓것이 바람 행세 하며 스치고 지나는 법이라고. 밤 꿈자리를 어지럽히는 목소리들마저 그저 허황한 것이 아니니 겸허히 절 하며 살아내라고. 분명 그리 말하였더랬다. 경은 달리는 단휘의 뒤를 따라 뛰었다. 단휘는 할끔할끔 경 쪽을 돌아 보며 멈추는 일 없이 달렸다. 산길은 가파르고 습하고 어두웠다. 나뭇가지 따위가 이마며 어깨며 종아리를 긁고 지났다. 숨이 턱에 찼을 무렵 단휘는 두 치 앞에 멈추어서 다시 여자아이 모습을 꾸렸다. 이번에는 인상이 다르다, 머리도 옥색이 아니다.
  
  “나는 단휘, 옥산의 마님이다.”
  
  먼 곳에서 굉음이 들렸다.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찢어지는 짐승 목소리가 허공을 울린다. 비는 하마 잦아들고 있었다. 경은 비로소 자신이 갈 길 아닌 다른 길로, 단휘 뒤 쫓아 왔음을 깨달았다. 참으로 여우에게 홀린 것인가. 뒤를 돌아 보았을 때 멀찍이, 아침에 단휘와 함께 들렀던 그 마을이 보이고 그 위로 새카맣게 짐승이 뒤덮이는 것 역시 보였다.
  
  “어째서 마을을…… 네 짓이냐?”
  “아냐. 물이 마르고 비가 운의 하늘을 비껴가고 짐승이 크게 들끓는 것은 이 땅에 용이 없기 때문이지 한갓 선인의 탓이 아니다.”
  “그러면 왜 나를 구했지?”
  
  물을 건너러 가지 말아라 이른 것은 이 때문이다. 판관을 거두러 나오는 길에 신월 길동무로 경에게 나타나 곁에 붙었던 지네를 물리친 것도 결국은 단휘다. 경은 물었다, 여우란 굳이 인간을 위해 사역하는 생물이 아님을 아는 탓이었다.
  
  “오래 전에 물이 마른 호에서 죽은 거북을 본 일이 있지?”
  “거북?”
  “이 땅에 용이 없어 죽어 가는 건 비단 인간만이 아니다. 풀도 꽃도 나무도 죄 마른다. 개와 고양이도, 여우도 고라니도 거북도 모두 죽는 것이야.”
  “거북이라면, 일전에 들렀던 마을에서 본 것 말인가?”
  
  장사치니까 그렇다, 고 진이 말했었다. 몰랐으면 모를까 눈에 뜨인 것이니 바다에 있을 큰 것이 예까지 와 죽은 것부터 인연이려니 여기고 묻어 주련다는 경에게. 그래도 경은 외면하고 지나질 못해 그 거북 거두어 흙에 돌려 주었더랬다. 제 몫의 한 모금 물 뿌려 주었을 뿐 술 한 잔 부어 주질 않고 그저 잊어 버렸건만.
  
  “그래. 장래를 보기 위해 거북을 잡아다 쓰는 이가 많아서, 뉘인가는 그런 용도로 바다를 뒤진다더군. 그 거북이 내 휘하는 아니되 친근하게 지내는 바다 사령이 모쪼록 그대를 부탁한다며 당부를 해 주시었어.”
  
  그 뿐이야, 라고 단휘는 말하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바람을 부르고 구름을 지어 하늘로 오르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표대처럼 너울거렸다. 어쩌면 바람을 만드는 것마저 그녀일 것이다. 경은 눈 인사 하고 떠나는 그녀를 망연히 올려다 보다 용기를 내어 물었다.
  
  “저, 함께 가면 안 될까?”
  
  단휘는 소리를 내어 웃고,
  
  “붉은 달을 넘을 터인데 살던 땅을 버리겠다는 것이야? 난 잃은 ‘판관’을 얼른 거두러 가야 해. 그 다음에도 생각이 있다면 동행 삼아 주지.”
  
  사향내만 남긴 채 지평선 너머로 쏘아 놓은 살처럼 날았다.
  
  걸음 옮기는 경의 손에 아직 들려 있던 그릇이 챙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조각은 물방울로 변하고 보자기는 경의 발치에서 여우 털로 변해 젖은 땅에 들러 붙었는데 문득 바람에 실려온 것처럼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 신월에, 물이 남아 있는 곳에서.”
  
  경은 힘차게 걸어 산을 넘기 시작했다. 신월의 밤에 물에 어린 달로 낯을 씻으면 길동무를 얻을 수 있다. 인간도 영물도 혹은 이 땅에 속하지 않은 것도 함께 길을 걷는 데에는 차별이 없어, 달은 공평하게 빛을 내린다.
  
  다음 신월에,
  달을 담은 물이 남아 있는 곳에서.
  
  
  
  :: 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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