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우수작 천칭

2003.09.26 17:4209.26

제4호 독자 우수 단편은 8월 21일부터 9월 20일 자정까지 올라온 14편의 단편 중에서 선정되었습니다.
좋은 작품이 많았던 만큼 어떤 작품을 선정해야 할 지 꽤 오래 고심해야 했습니다.

아이님의 '천칭'은 죽음이라는 사건과 일상성 사이의 균열을 시간대의 오버랩을 통해 풀어간 점은 좋았으나 이미 실험된 모더니즘 기법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한 점이 아쉬웠습니다.
그렇지만 마지막까지 고심한 다른 두 작품보다 상대적으로 짜임새가 있고 실험적이었습니다.
우수작 선정을 축하드리며 앞으로도 아이님의 좋은 글을 많이 보게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azderica님의 '목이'는 안정적이며 탄탄한 구조에 언어 및 배경과 캐릭터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이라면 주제의식과 그 주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이 조금 상투적이지 않았나 싶은 점이었습니다.

빡살님의 '여름 밤의 망상'도 좋은 글이었습니다만 이미지의 스케치에 가까웠습니다.

jxk160님의 'Hug'와 金鷄王님의 '던져진 길들 위에서'는 유사한 장단점을 가지고 있는 글이었습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 의식과 글쓰기에 비해서 전반적인 글의 완성도가 아쉬웠습니다.

루나님은 현재 계속 성장해 나가시는 단계인 것 같아 글을 보며 즐거웠습니다. 건필하세요. :)


---------------------------------
아이 ( kimduhm@empal.com )



  '재판은 오전 9시에 진행될 예정이다. 그러니 늦어도 8시까지는 법원에 도착해야 한다. 재판이 진행되는 시간보다 일찍 법정에 들어섬으로써 재판에 대한 나의 높은 관심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고조는 법정에 일찍 들어서서 초조하게 재판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는 것으로도 재판관이 절대 살인자들을 가볍게 심판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검사 역시 한 시간이나 일찍 법정에 도착한 자신을 의식해서라도 살인자들을 결코 가볍게 신문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만일 재판관이나 검사의 판결이 조금이라도 살인자들을 옹호하는 쪽으로 비친다면, 방청석에 있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한 시간이나 일찍 법정에 들어선 고조의 행동 때문에라도 이번 판결은 무효라며 거칠게 난동을 부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고조는 오히려 이성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재판관과 검사, 살인자들을 번갈아가며 노려볼 작정이었다. 그런 행동이 판결에 대한 자신의 관심과, 그리고 살인자들에 대한 증오의 표현으로 매우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재판관과 검사는 마치 자신들이 죄인인 듯 고조의 눈을 피해 법정을 서둘러 빠져나갈 것이고, 살인자들은 자신을 노려보는 고조의 침착하면서도 냉정한 눈빛에서 살기를 느낄 것이다. 게다가 폐정이 되고서도 고조가 한동안 법정을 떠나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그 소식을 전해들은 살인자들(재판관과 검사 포함)은 고조의 분노 덕분에 정신적으로 심한 압박감에 시달릴 것이다.  
  비록 살인자들의 형량이 자신의 생각보다 가볍다고 느껴져도, 고조는 절대 법정에서 소란을 피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누군가 자신을 법정에서 끌어낼 때까지 고조는 침묵으로 일관할 생각이었다. 자신의 분노를 표현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오히려 그것이 가장 섬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시간 미리 법원에 도착해서 재판에 대한 관심을 사람들에게 내비칠 것. 설사 살인자들에 대한 판결이 생각보다 가볍게 내려져도 절대 동요하지 말고 침착하게, 그것도 침묵을 지키면서 재판관과 검사, 살인자들을 노려볼 것.'
  재판관과 검사는 한 시간이나 일찍 법정에 들어선 고조를 의식해서 살인자들을 심판하는 데 다소 부담을 느낄 것이다. 원칙보다 더 심한 신문과 판결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 고조는 그들이 느낄 부담감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 고조는 다음에 벌일 행동도 미리 생각해두었다. 만일 검사가 고조 자신을 의식하지 않고 살인자들에게 가벼운 신문을 한다면, 또한 재판관이 한 시간이나 일찍 법정에 들어선 자신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살인자들에게 가벼운 형량을 내린다면, 분명히 방청석은 소란스러워질 것이다. 그리고 입회한 경찰관들이 그들의 소란을 저지할 것이다. 하지만 고조는 침묵으로 일관한 채, 재판관과 검사를 마치 죄인처럼 노려볼 작정이다. 그리고 살기를 느낄 만큼 섬뜩한 시선으로 오히려 살인자들을 노려볼 작정이다. 그렇게 되면 재판이 끝난 후에도 재판관과 검사, 살인자들은 고조의 눈빛 때문에 정신적으로 심한 압박감에 시달릴 것이다. 이처럼 고조는 그들이 시달리게 될 압박감을 이용하기로 했다.  

  자신이 법정에 한 시간 일찍 도착하는 것만으로도, 재판관과 검사는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자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고조는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살인자들은 결국 중형을 선고받을 것이 분명했고, 그럼에도 고조는 역시 침묵을 고수한 채 조용히 법정을 나설 생각이었다. 그리고 혹시 자신의 예상대로 재판 결과가 나지 않고 재판관이나 검사가 살인자들에게 가벼운 형량만을 선고한다면, 고조는 나름대로 부담감이나 압박감을 이용해 살인자들(재판관과 검사 포함)에게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는 상당히 희박하리라고 고조는 생각했다. 자신이 한 시간이나 일찍 법정에 도착하는 것만으로도 재판관이나 검사는 고조를 상당히 부담스러워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일종의 압박감으로 작용해, 결국 재판의 판결은 고조를 만족시켜줄 것이 분명했다. 재판이 끝난 뒤에도 고조는 계속 침묵만을 고수하면 되는 것이었다.  


  2

  자명종이 고장난 상태였음에도 정확히 아침 6시 30분에 고조는 눈을 떴다. 덕분에 외출할 준비를 30분만에 끝마친다면, 고조는 예상대로 재판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법정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법정에서는 갈색 양복 대신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는 것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심리를 보다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고조는, 주저 없이 옷장에서 검은색 양복을 꺼내 입었다. 마침 옷장에는 깨끗하게 손질된 검은색 양복이 여러 벌 걸려 있었다. 고조가 외출할 준비를 모두 끝마친 시각은 정확히 7시였다.
  현관문을 열기 위해 잠금 장치를 풀고 나서 손잡이를 막 돌리려는 순간, 고조는 갑자기 팔에 쥐가 났는지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손잡이를 돌려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호흡을 멈춘 채 껑충 뛰다시피 몸을 날려 집 안에서 빠져나왔다. ('곧장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고 요약해도 무방하다. 그만큼 그의 동작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졌다.) 고조는 왼쪽 바지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손잡이 부분과 그 위쪽에 달린 보조 잠금 장치에 각각의 열쇠를 꽂아 두 번씩 돌려가며 꼼꼼히 잠금 상태를 확인했다. 그러고 나서 마지막으로 손잡이를 돌려 현관문을 열어보았다.
  고조는 아파트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다다랐다. 엘리베이터는 이미 고조가 타야 할 층에 세워져 있었으므로, 곧장 버튼을 눌러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시간은 이제 겨우 7시 10분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상태라면 8시까지 법정에 들어서려던 계획은 물론이고, 잘하면 8시 전에 도착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재판관과 검사가 느낄 부담감이나 압박감은 이로 인해 더 커질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검은색 양복까지 입고 나타난 자신 때문에 법정의 분위기는 더 한층 고조될 것이고, 그런 분위기를 의식해서 재판관과 검사는 남다른 사명감에 불타 살인자들을 신문하고 판결할 것이 확실했다. 이런 생각 덕분에 고조는 갈색 양복 대신 검은색 양복을 입고 나온 자신의 결정을 스스로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런 만족감과 동시에 고조는 잠시 검은색 양복의 출처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은 검은색 양복을 구입한 기억이 없음에도, 옷장에는 여러 벌의 검은색 양복이 깨끗하게 손질된 채 걸려 있었다. 그리고 양복을 꺼내면서도 고조는 마치 습관처럼 그 옷들을 훑어보았다. 벽에 걸린 액자를 대하듯, 옷장 안의 검은색 양복 역시 고조의 눈에는 꽤 익숙한 것이었다. 자신이 꾸었던 꿈을 그대로 그렸다는 어느 화가의 그림은 오래 전부터 한 쪽 벽에 방치되듯 걸려 있었다. 유리 표면의 먼지 때문에 이제는 그림 자체도 꿈처럼 희미하게 보였다.  
  고조에게 있어서 그 그림은 벽의 일부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 그림을 벽에서 떼어낸다면 분명 방 안 전체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일대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그만큼 그 그림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그럼에도 지금처럼 벽에 걸린 상태에서의 그림의 지위는, 그저 벽의 일부일 뿐이었다. 그림은 고조에게 너무 익숙한 물건이었다. 고조는 습관처럼 그 그림을 대할 뿐이었다. 그리고 고조는 옷장 안에 있던 여러 벌의 검은색 양복을 보면서 마치 벽에 걸린 그림을 대하듯 동일한 감정으로 그 옷들을 쳐다보았던 것이다. 이처럼 검은색 양복이 옷장 안에 있는 것은 그림이 벽에 걸려 있는 것만큼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것이 고조는 뒤늦게 검은색 양복에 대한 출처를 의심하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고조는 옷을 구입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출처에 대한 의문은 검은색 양복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림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조는 자신이 그 그림을 언제부터 한 쪽 벽에 걸어놓았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단지 그 그림은 언제나 그곳에 걸려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검은색 양복에 대한 고민은 사라졌다. 출처 따위가 문제될 것은 없었다. 검은색 양복 역시 벽에 걸린 그림처럼 언제나 옷장 안에 걸려 있었을 것이다.

  고조는 아파트 현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현관 앞 계단을 내려오다 잠시 멈춰 섰다. 그 사이에 서너 명의 사람들이 고조 옆을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고조는 그때까지도 움직이지 않고 멈춰 있었다. 그 사이에 서너 명의 사람들이 고조 옆을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또다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빠져나왔다. 그들은 고조를 지나쳐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고조는 그때까지도 움직이지 않고 계단에 서 있었다.  
  고조는 아파트 현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현관 앞 계단을 내려오다 잠시 멈춰 섰다. 그 사이에 서너 명의 사람들이 고조 옆을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고조는 그때까지도 움직이지 않고 멈춰 있었다. 그 사이에 서너 명의 사람들이 고조 옆을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또다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빠져나왔다. 그들은 고조를 지나쳐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고조는 그때까지도 움직이지 않고 계단에 서 있었다.
  '오전 7시 10분일 것이다. 이제 계단을 마저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전동차를 타기 위해 역까지 가야 한다. 하지만 뛰어갈 필요는 없다.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5분만 걸어가면 지하철역에 도착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이 계단부터 마저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전동차를 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계단을 내려가는 것은 아파트 복도를 걷는 것만큼이나 편안한 동작이다.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이 계단을 오르내린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동작이 그들을 불행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지금쯤 나는 계단을 내려가고 있을 것이다.'
  고조는 아파트 현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현관 앞 계단을 내려오면서 잠시 시계를 쳐다보았다. (7시 10분) 8시까지 법원에 도착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고조는 전동차를 타기 위해 역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하철역까지 가는 데에는 5분이면 충분했다.
  계단을 내려온 다음 몸을 왼쪽으로 90도 튼다. 그리고 곧장 211걸음 걷는다. 이번에는 몸을 오른쪽으로 45도 정도 틀어야 한다. 그 상태에서 60걸음 걷는다. 여기까지 걸어왔다면 그는 이제 아파트 단지를 벗어난 것이다. 이제부터는 몸을 다시 왼쪽으로 45도 정도 틀어서 곧장 367걸음 걸어야 한다. 지하철역 입구는 왼쪽에 있다. 그러니 몸을 다시 왼쪽으로 90도 틀어 5걸음, 그리고 또 한 번 왼쪽으로 90도 틀어 3걸음 뒤에 나타날 64개의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그는 지금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전동차를 타기 위해서라면 조금 더 걸어야 한다. 계단을 내려온 상태에서 곧장 15걸음 걷는다. 몸을 왼쪽으로 90도 틀어 26걸음 걷는다. 그의 앞에는 왼쪽으로부터 세 번째, 그리고 오른쪽으로부터는 여섯 번째인 개표 기계가 버티고 있다. 그것을 통과하자마자 곧장 34걸음 걷는다. 그리고 몸을 왼쪽으로 90도 틀어 5걸음 걷는다. 또 한 번 몸을 왼쪽으로 90도 틀어 3걸음,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39개의 계단을 내려간다. 이제 그는 그곳에서 전동차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시간은 정확히 5분이 흘렀다.  
  7시 15분, 고조는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전동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고조가 사람들 사이를 오가는 행동에 싫증을 느낄 즈음, 마침내 전동차가 역 안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음이 들렸다. 고조는 길게 늘어선 줄의 맨 끝으로 걸어갔다. 고조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전동차가 들어오기만을 숨죽이고 기다렸다. 하지만 신호음이 들린 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전동차는 역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초조해 하는 사람은 고조 혼자뿐이었다. 몇몇 사람만이 줄에서 이탈해 의자 쪽으로 걸어갔을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계속 전동차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표정 역시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였다. 고조는 다시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전동차가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역무원의 실수로 신호음이 잘못 울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고조는 사람들 사이를 오가던 행동을 멈추고, 한 쪽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섰다. 만일 전동차가 오지 않으면 하루 종일이라도 이곳에 서 있을 것처럼, 사람들은 무기력하게 어느 한 곳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고조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고조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었다. 지금 이곳에는 움직임도 없고 소리도 없었다. 고조는 피로감을 느꼈다.  
  전동차가 역 안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음이 들렸다. 다시 사람들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조도 늘어선 줄의 맨 끝으로 걸어가, 그들처럼 경직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뒤이어 전동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다시 경직된 자세를 풀었다. 그들은 멈추지 않고 역을 통과해버린 전동차를 향해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단지 경직된 자세만을 푼 채 여전히 전동차를 기다릴 태세였다. 몇몇은 조금 전에 자신들이 앉아 있던 의자로 되돌아갔다. 고조는 또다시 피로감을 느꼈다. 더 이상 전동차를 타고 싶은 생각도, 그리고 법원에 가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신호음이 울린다 해도 전동차는 이곳에서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조는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놓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단지 꿈일 뿐이라고 중얼거렸다.  
  '전동차는 절대 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법원에 가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해서 이 모든 것이 거짓이다. 이곳이 사라질 동안만 나는 여기에 남아있으면 된다. 꿈은 그런 것이다.'
  고조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7시 20분) 자칫하다가는 8시까지 법원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았다. 고조는 지하철역을 빠져나가 택시를 잡아타기로 했다. 아무래도 전동차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고조가 막 걸음을 옮기려 할 즈음, 또다시 신호음이 들려왔다.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전동차를 타기 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고조는 이번 한 번만 더 전동차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고조는 그들을 따라 전동차를 타기 위해 줄의 맨 뒤에서 경직된 자세를 취했다.  

  전동차 안은 약간 후텁지근했다. 고조는 출입문에 몸을 기댄 채, 손으로 양쪽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전동차 안의 열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전동차를 탔다는 안도감 때문에서인지 고조는 잠시 나른함을 느꼈다. 고조는 몸을 반대로 돌려 차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비뚤어진 넥타이를 고쳐매고 머리를 매만졌다. 고조는 법정에서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재판 과정을 지켜보리라고 다짐했다. 방청객들 사이에서 '어떻게 저리 태연할 수가 있지'라는 말이 새어나올 만큼, 고조는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줄곧 냉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재차 다짐했다. 다시 출입문에 몸을 기대면서 조금은 안정감을 찾았는지, 고조는 습관적으로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주머니 안에서 네모로 접힌 종이 쪽지가 손에 잡혔다. 꺼내 보니 그것은 고조가 오래 전에 어느 신문 기사를 오려놓은 것이었다. 물론 고조는 그 종이를 보자마자, 그것이 어떤 기사인지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종이가 어떻게 해서 바지주머니에 들어가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고조는 전동차 안을 잠시 훑어본 다음, 조심스럽게 신문 기사를 펼쳐보았다.


  장님인 50대 사내 자신의 아파트에서 피살

  25일 이웃집 아주머니에 의해 발견된 시체는 54세의 고유기씨로, 10년 전 부인과 이혼하고 아들(고조, 26세)과 단 둘이 생활했다고 한다. 발견 당시 고씨는 갈색 양복을 입고 있는 상태였고, 전깃줄로 손발이 묶인 채 바닥에 엎드린 자세로 죽어 있었다고 한다. 얼굴 쪽에서부터 흘러내린 피 때문에, 고씨의 얼굴이 마치 피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고 아주머니는 말했다.  
  경찰은 장님인 고씨가 왼쪽 이마에 여러 차례 흉기로 찔린 상처가 있었다고 말했다. 텔레비전 위에 놓인 공구 상자가 열려 있는 것으로 봐서, 범인은 손발이 묶인 고씨의 왼쪽 이마를 드라이버로 여러 차례 찌른 것 같다고 말했다. 드라이버는 고씨의 두개골을 뚫고 들어가 뇌까지 손상을 입혔다.  
  한편, 사망 시각은 이웃집 아주머니가 고씨를 발견하기 다섯 시간 전인 오전 11시인 것으로 밝혀졌고, 갈색 양복을 입고 있었던 것으로 봐서 외출을 하려던 것 같다고 전했다.  
  경찰은 "죽은 고씨의 아들이 고씨가 죽기 하루 전에 아버지와 심하게 말다툼을 한 후 집을 나갔다는 이웃 사람들의 말을 들었다. 우선 고씨의 아들을 찾는 데 수사력을 집중시킬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고씨가 살던 아파트 주변 역시 철저하게 수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경은 "주변 불량배들이 고씨가 장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게다가 고씨의 아들이 전 날 고씨와 말다툼을 한 후 집을 나간 사실까지 미리 알고는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고조는 신문 기사를 접어 주머니에 넣은 후, 왼쪽 집게손가락으로 자신의 왼쪽 이마를 여러 차례 찔러보았다. 찌를 때마다 한 쪽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로 통증을 느꼈다. 그럴수록 고조는 집게손가락에 더욱 힘을 주었다.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려올 즈음, 고조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았다. 사람들은 모두 고조를 외면하고 있었다. 고조는 다시 몸을 돌려 차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졌다.  
  사람들은 모두 고조가 서 있는 곳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고개를 돌리고 있는 방향으로 고조가 움직이면, 그들은 일제히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고는 했다. 고조가 움직일 때마다 그들의 고개도 고조가 움직이는 반대 방향으로 일정하게 움직였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 지나치다 싶을 만큼 사람들은 여러 차례 고조를 외면했다. 설사 그들의 행동이 우연이라 해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고조가 그들로부터 소외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고조로서는 모든 것을 자기 방식대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 때문에 고조는 결국 자신이 살인자라고 믿게 됐다. 더 이상 고조는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전동차를 내릴 수도 없었다. 고조는 반드시 8시까지 법원에 도착해야 했다. 한 시간 일찍 법정에 들어서서 살인자들에게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해야만 했다.  
  고조는 사람들을 노려보면서 옆 칸으로 옮겨갔다. 사람들은 여전히 고조의 시선을 피해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고조가 옆 칸으로 들어섰을 때, 그곳에 있던 사람들 역시 고조의 시선을 피해 일제히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조는 천천히 앞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처럼 위협적인 시선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이제 더 이상 고조는 갈 곳이 없었다.  
  마지막 칸에서 걸음을 멈춘 고조는 잠시 주춤하다 출입문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차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넥타이가 비뚤어졌고, 머리 역시 많이 헝클어진 상태였다. 고조는 전동차에서 내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넥타이와 머리 모양을 매만졌다.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소리나게 아니면 숨죽인 채 울고 싶었지만, 고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차창 앞에 서서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살인자들조차 섬뜩해 할 만큼 당당한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주어야 했다.  

  전동차 출입문이 열렸다. 전동차에서 내린 고조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7시 50분) 8시까지는 충분히 법원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한 시간 일찍 법정에 들어섬으로써 재판관과 검사에게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는 생각 때문에 고조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또 한번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지하철역을 빠져나오자마자 고조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눈을 감고 걷기 시작했다. 눈을 감은 채 곧장 법원을 향해 걸어갔다. 마치 눈을 감은 상태로 법원을 수없이 왔다갔다해본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걸음을 내딛었다.  
  앞쪽을 향해 곧장 367걸음 걷는다. 울퉁불퉁한 보도블록 밟힌다. 보도블록 위에서 멈춰 섰다가, 보행음이 들리면 22걸음 걷는다. 그러고 나서 다시 울퉁불퉁한 보도블록이 밟히면, 2걸음 앞에서 몸을 오른쪽으로 90도 튼다. 이제 약간 경사진 길을 올라야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내딛으면 된다. 354걸음이 될 때까지 서두르지 말고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내딛으면 된다. 그러면 8시 전까지 그는 법원 정문에 도착할 수 있다.


  3

  고조는 오늘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났어야 했다. 그리고 법원에 갈 준비를 끝마친 다음, 늦어도 7시 10분에는 집을 나섰어야 했다. 그래야 8시까지 법정에 들어설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조가 오늘 잠에서 깬 시간은 7시 30분쯤이었다. 물론 그 시간에 눈을 뜬 것만으로도 고조에게는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고조가 갖고 있는 자명종은 항상 11시에 울릴 수 있도록 바늘이 맞춰져 있다. 그리고 자명종의 울림 바늘은 3개월이 지나는 동안 단 한 번도 다른 위치로 움직인 적이 없었다.  
  자명종이 언제나 아침 11시에만 울려댔기 때문에, 반드시 아침 11시에 일어나야 할 필요가 없으면서도 고조는 3개월이 넘도록 자명종이 울리는 시각인 아침 11시에 눈을 떴다. 아침 11시에 일어나기 위해 자명종을 그 시각에 맞춰두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3개월 전 그날부터 고조는 자명종의 바늘을 11시에 울릴 수 있도록 고정시켜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전 날 작동시켜놓은 자명종은 다음 날 아침 11시에 어김없이 울려댔고, 그 소리에 맞춰 고조는 눈을 떴다. 이러한 행동이 3개월 동안 지속됐을 뿐이다. 그러니 이제는, 자명종을 3개월 전 그날부터 11시에 맞춰놓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고조가 매일 아침 11시에 일어난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3개월 전에는 아침 11시에 일어나야 할 어떤 이유가 분명 있었겠지만 이제는 3개월 전 그날 자명종을 아침 11시에 맞춰놓았다는 이유 때문에, 고조가 아직도 매일 아침 11시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해야 옳다. 그때 만약 고조가 자명종을 아침 11시에 울릴 수 있도록 작동시키지 않았다면 고조에게서 이런 습관적인 행동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고조는 잠을 자기 전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습관적으로 자명종의 버튼을 눌러 울림 기능을 작동시켰고, 역시 습관적으로 다음 날 아침 자명종 소리와 동시에 눈을 떴다.
  고조에게 있어서 11시라는 것은 더 이상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죄책감에서 비롯된 우연적인 행동, 그 우연적인 행동의 연속을 통해 자신의 죄를 용서받으려는 속죄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고조에게 있어서 11시는 다만 자명종이 울리는 시각일 뿐이었다. 자명종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고조는 습관적으로 눈을 뜰 뿐이었다. 그리고 그 이상의 의미를 고조는 알지 못했다.

  고조가 오늘 아침 7시 30분에 눈을 뜬 것은 분명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자명종은 여전히 11시에 울릴 수 있도록 작동되어 있었다. 고조는 서둘러 법원에 갈 준비를 했다. 그나마 빨리 움직인다면 9시 전까지는 법원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부담감, 고조는 자신이 어제 생각했던 그 부담감을 떠올렸다. 재판관과 검사가 느낄 부담감을 자칫 자신이 법정에서 느끼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한 시간이나 일찍 법정에 들어섬으로써, 재판관과 검사가 그런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부담감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이로써 계획으로만 끝나고 말았다. 그들은 9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도착한 자신을 보면서 절대 부담감 따위를 느끼지는 않을 것임이 분명했다. 오히려 한 시간 일찍 법정에 도착해 재판이 진행되기를 차분히 기다리지 못한 자신의 행동을 보며, 그들(살인자들 포함)은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눈을 흘깃 것이라고 생각했다. 재판에 대해 자칫 무관심한 듯 보일 수 있는 고조의 행동 때문에 재판관과 검사는 혀를 끌끌차며 그를 비난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재판이 진행되는 내내 고조는 재판관과 검사의 눈을 피해 더 괴로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한다. 그들(살인자들 포함)의 눈빛은 분명 고조에게 부담감으로 작용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담감도 고조가 9시 전에 법정에 들어섰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었다.
  9시 전까지 법원에 도착하려면 늦어도 8시에는 고조가 집에서 출발했어야 했다. 하지만 고조는 8시가 훨씬 넘은 시각에, 그것도 몇 번을 망설이다가 겨우 8시 30분쯤에 현관문을 열 수 있었다. 그리고 현관문을 연 후에도 고조는 현관문 주위를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그곳에서 맴돌기만 했다. 열려진 현관문을 통해 집 밖과 집 안을 구분지으면서 그 사이를 지루하게 넘나들기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9시가 다 되어서야 고조는 서둘러 현관문을 걸어잠그고 아파트 복도를 걸어갔다. 그럼에도 고조가 불과 한 시간만에 외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기적처럼 7시 30분에 잠을 깬 고조는 8시 전에 벌써 외출할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그리고 외출할 때면 반드시 입어야 하는 갈색 양복도 꺼내 입고 이미 정각 8시에 현관문의 손잡이를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대로라면 고조는 절대 오늘처럼 한 시간만에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갈색 양복을 입은 채, 변함없이 현관문을 여는 데에만 한 시간이 넘게 걸렸을 것이고, 현관문을 연 뒤에도 고조는 두 시간 가까이 그 경계를 넘나들며 외출에 대해 망설였을 것이다. 그리고 가까스로 아파트 복도에서 현관문을 걸어잠근 뒤에도, 고조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와 현관문의 잠금 상태를 확인하는 동작을 약 30분 가까이 반복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세 시간 삼십 분 동안, 고조로서는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 때문에 자기 혼자 현관 앞에서 그것과 실랑이를 벌이다 겨우 그날 외출에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그나마 고조가 외출에 성공할 확률은 다섯 번에 한 번 꼴로 매우 희박했다. 기어이 외출하기를 포기하고 다시 현관문을 여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니 오늘처럼 단 한 시간만에, 그것도 다섯 번에 한 번 꼴로 성공할 수 있는 외출을 이렇게 간단히 성사시켰다는 것은 말 그대로 기적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다.

  9시에 현관문을 나선 고조는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엘리베이터는 다섯 개 층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동안 고조는 불안한 듯 계속 현관문 쪽을 쳐다보았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현관문의 잠금 상태를 걱정하는 눈치였다. 고조는 고개를 들어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것을 표시해주는 숫자를 잠깐 쳐다보았다. 이제 세 개 층만 더 내려오면 엘리베이터의 문은 고조 앞에서 열릴 것이다.  
  고조는 다시 고개를 돌려 현관문 쪽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자신이 평소보다 너무 서둘러 나온 탓에, 틀림없이 자신이 현관문을 잠그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심을 떨칠 수 없었다. 외출에 대한 망설임에서는 벗어난 상태였지만, 현관문의 잠금 상태를 확인해야 하는 불안감에서는 아직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고조는 계속 망설이고 있었다. 지금 현관문의 잠금 상태를 확인하러 간다면, 엘리베이터는 아마 고조가 타야 할 층에서 잠깐 멈춘 후 곧이어 문을 닫고 아래로 내려가거나 다시 위로 올라갈 것이 분명했다. 이 시간에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벌써 9시가 넘은 시각이라서 고조는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몸은 조금씩 현관문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제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은 두 개 층의 여유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순간 고조는 현관문까지 갔다오는 데 걸리는 시간과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시간을 빠르게 계산해보았다.  
  '지금 서 있는 위치에서 복도 끝에 있는 현관문까지의 거리는 약 30걸음 남짓이다. 뛰어가면 5∼6초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뛰어가면서 왼손으로 바지주머니에 있는 열쇠를 꺼낸다면, 현관문 앞에 도착해서 손잡이를 돌려보고 보조 잠금 장치에 열쇠를 꽂아 잠금 상태를 확인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2초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엘리베이터 앞까지 도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포함, 현관문의 잠금 상태를 확인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총 14∼16초가 걸릴 것이다. 빠르면 14초안에 일을 마무리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14초의 시간만 주어지면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엘리베이터의 속도다. 엘리베이터의 속도가 그리 빠른 편은 아니라 할지라도, 한 층 내려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2초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게다가 층수의 여유라고는 고작 두 개 층밖에 없는 상태여서,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후 문이 열렸다 닫히는 데 걸리는 시간을 포함한다고 해도, 겨우 9∼10초 정도면 엘리베이터는 아래로 내려가거나 아니면 다시 위로 올라갈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계산대로라면 4∼5초의 시간을 더 확보해야 현관문의 잠금 상태를 확인한 후 가까스로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현관문의 잠금 상태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재판은 이미 예정대로 정각 9시에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 있다. 내가 있는 바로 위층에서 누군가가 엘리베이터를 타면 되는 것이다. 지금 엘리베이터 안에는 사람이 아무도 안 탄 상태다.'  
  고조가 처음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을 때, 그것은 분명 다섯 개 층 위에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고조가 화살표 버튼을 눌러 엘리베이터를 작동시켰을 때에야, 그것은 비로소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물론 도중에 엘리베이터가 멈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고조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다섯 개 층 위에 올라가 있는 엘리베이터를 작동시키려고 화살표 버튼을 누르려 할 때, 그 층에서 누군가가 고조의 손동작과 거의 동시에 엘리베이터를 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고조가 화살표 버튼을 누르자마자 엘리베이터는 조금의 오차도 없이 곧바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고조가 생각해낸 가능성은 이런 것이었다. 만일 위층에서 누군가가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화살표 버튼을 누른 상태라면, 엘리베이터는 그 사람 때문에 위층에서 잠시 멈출 것이다. 곧이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위층에 있는 사람은 엘리베이터 내부를 훑어본 다음, 걸음을 옮겨 엘리베이터를 탈 것이다. 그리고 타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엘리베이터였기 때문에, 위층의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자신이 내릴 층의 번호가 새겨진 1이라는 버튼을 누를 것이다. 그 다음,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습관처럼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누를 것이다. 그가 닫힘 버튼을 누르면 엘리베이터는 조금 전 문이 열리던 속도와 일정하게 다시 출입문을 닫고 아래로 내려올 것이다. 이제 지금까지의 시간을 계산해보면, 엘리베이터가 어느 한 층에서 멈췄다가 다시 움직이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고조는 4∼5초 정도로 보았다. 거기에다 위층의 누군가가 한 사람이 아니라 그 이상이라면 시간은 더 늘어날 것이 분명했다. 이처럼 누군가가 만일 위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탄다면, 그 타는 시간을 포함해서 엘리베이터가 바로 아래층에 있는 고조를 태우기 위해 잠시 멈췄다 다시 문이 닫히기까지의 시간은 고조가 현관문의 잠금 상태를 확인하고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인 14초와 일치했다. 그러므로 고조가 현관문의 잠금 상태를 확인한 후 아슬아슬하게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고조는 곧장 현관문 쪽으로 달려갔다.
  물론 고조가 생각한 가능성은 이미 그것 자체만으로도 실현 가능성이 매우 희박했다. 그럼에도 고조가 현관문 쪽으로 달려간 이유는 자신이 생각한 그 가능성의 확신 때문이 아니라, 단지 현관문의 잠금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바로 위층에서 누군가가 엘리베이터를 타면 된다는 가능성, 그것보다 더 실현될 확률이 적은 가능성을 생각했더라도 고조는 분명 현관문 쪽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가능성조차 생각해내지 못했더라도, 그는 자신의 불안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분명 현관문 쪽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이처럼 고조가 생각한 가능성은, 그것 자체로서의 실현 가능성보다는 단지 불안감에 의해 떠오른 일종의 반사적인 생각일 뿐이었다. 현관문까지 뛰어가는 짧은 시간 동안 고조는 자신의 왼쪽 바지주머니에 들어 있는 열쇠를 매우 자연스럽게 꺼냈다.

  아파트 현관 앞에서 고조는 잠시 시계를 쳐다보았다. (9시 15분) 재판은 이미 예정대로 시작했을 것이다. 고조는 서둘러 현관 앞 계단을 내려갔다. 자신 때문에 혹시 재판이 조금 지연되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 않고 설사 재판이 진행 중이라 하더라도, 고조는 무조건 법원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계단을 다 내려온 고조는 길 건너편에 서서 자신이 살고 있는 9층 복도 쪽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면서 고조는 습관적으로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주머니 안에서 네모로 접힌 종이 쪽지가 손에 잡혔다. 그 순간 고조는 등 쪽에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그것 때문에 몇 번이고 자신의 등뒤를 돌아다보고는 했다. 그리고 고조는 다시 현관문의 잠금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아파트 쪽으로 달려갔다. 엘리베이터가 위층에 올라가 있었기 때문에 고조는 9층까지 비상 계단을 이용해 단숨에 올라갔다.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우수작 환타지 소설1 2003.11.28
우수작 검은 것은 아름답다1 2003.11.01
우수작 천칭 2003.09.26
우수작 무엇을 먹을 것인가 2003.08.30
우수작 하나의 공간 2003.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