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가작 악몽

2014.02.01 10:4802.01

까마귀의 귀를 찢는 울음소리 탓에 잠을 설친 지 어언 한 달 째였다. 점차 적응이 돼 가는 와중에 다른 정체 모를 날짐승까지 합류해 내 수면을 방해했다. 밤은 이제 내가 잘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나는 그 밤들을 악몽이라 부르기로 했다. 악몽은 나를 섬세하게도 괴롭혔다.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라 치면, 급작스레 걸려오는 지환이의 전화처럼 나를 깨웠다. 나는 그 밤이 싫어서 늘 받지 않는 지환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태동처럼 울리던 통화연결음이 끊기면, 또 다시 악몽이 찾아들 것 같아 연신 전화를 했다. 내 밤은 그랬다.

 

나는 결국 지환이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내가 아무리 전화 걸어도, 그는 연락조차 없었다. 그의 집으로 가는 길은 너무 익숙해서 눈을 감고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보도블록의 빨간 부분만을 발끝으로 세며 지환이의 집으로 향했다. 너머로 보이는 산등성이의 윤곽은 손질한 지 꽤 된 짐승의 털 같았다.

 

그와 나는 이 동네에서 함께 자랐다. 우리는 종종 저 산을 함께 오르곤 했다. 동네 어른들이 뱀 나온다며 겁을 줘도, 간혹 바닥에 떨어진 밤 가시에 살갗이 찢어져도, 함께 손을 잡고 산을 휘젓고 다녔다. 그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도 저 산을 올랐다. 언젠가 지환이가 변하면서 내 손을 잡고 함께 떠나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르는 와중 신발에 흙이 묻지 않도록 주의하는 건, 거의 본능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나는 깨끗한 것이 진저리나게 싫었다.

 

그의 집은 폐허처럼 적막했다. 지환이와 연락이 끊긴 지 벌써 삼일 째였다. 보통 이런 일이 없던 터라 더 의아했다. 불시에 찾아들어 나를 놀라게 하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진다는 건 여간 수상한 일이 아니었다. 인기척 없는 현관을 지나쳐 문 앞에 섰다. 보기 싫은 이름이 우편함에 꽂혀 있었다. 바로 큰엄마의 이름이었다. 그 이름은, 떠올리기 싫은 내 상처를 세게 후볐다.

 

*  *

 

아빠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일찍 돌아가셨다고 했다. 나는 엄마와 단 둘이 작은 원룸에서 생활했다. 나는 유치원도 가지 않고 그냥 방 안에서 혼자 놀곤 했다. 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다가 내가 선잠에 들었을 때야 겨우 집에 돌아왔다. 잠깐 잠에서 깨어난 후는 어김없이 악몽이 찾아들었다. 그래서 그 끔찍한 꿈들은 내 유년의 추억과도 같았다. 엄마는 나를 안아주는 법이 없었다. 엄마, 나 배고파. 내가 덤덤하게 요청해도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일하느라 지친 몸을 이불 위에 누이고 시체처럼 고요히 숨죽였을 뿐이었다. 엄마는 마치 없는 사람처럼 이불과 동화되었다. 나는 엄마가 가져온 봉지에서 라면 하나를 꺼내 혼자 끓여 먹었다. 자극적인 냄새가 좁은 방 안을 가득 메워도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 날 엄마가 사라졌다. 다른 남자와 재혼을 했다는 사실을 들은 건, 근 오백 밤이 지나서였다. 그 후로는 낮이 밤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밤은 어둠 속 괴물의 아가리가 되어 나를 아주 간단하게도 집어삼켰다. 나는 빛없는 그 속에서 내 모습도 잊어버렸다.

 

나는 친척들의 회의 끝에 큰아빠 댁에 맡겨졌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우리 아빠의 형이라고 했다. 큰아빠는 생전 처음 보는 나를 깨끗한 백화점에 데려가 깨끗한 옷을 사주고, 차이니즈 레스토랑에서 자장면 한 그릇을 시켜주었다. 늘 시장에서 산 옷만 입어본 내게 백화점 옷은 신세계였다. 또한 중국집이 아닌 차이니즈 레스토랑도 난생 처음 와보았다. 큰아빠는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지만 어쩐지 부산스럽게 느껴졌다. 기다란 얼굴형과 돌출된 구강구조 탓에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몰랐다. 큰아빠는 입가에 원모양으로 자장면을 묻히고 먹는 나를 그저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그 눈빛의 의미를 헤아리지 못했다. 그 첫 만남의 외출 끝에 큰아빠 댁에 당도했을 때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큰엄마의 서슬 퍼런 눈초리였다. 큰엄마의 처진 큰 눈 주위에는 주름이 가 있었다. 나를 보며 웃는 그녀의 모습에 손끝이 저려왔다. 그 눈빛은 흡사 정적을 주시하는 맹수 같았다.

 

큰엄마는 내 옷이 더럽다는 이유로 얇은 회초리를 들었다. 내 몸에 얇은 실금이 갈수록 악몽의 빈도는 증가했다. 내 악몽 속에서도 큰엄마는 내 발을 짓이겼다. 배를 주먹으로 내려치고 머리칼을 잡아당겼다. 뽑힌 머리카락을 내 얼굴에 집어 던지기도 했다. 큰엄마는 평소에도 내가 지나간 자리를 걸레로 훔쳤다. 그냥 방 안에 얌전히 있으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난, 좁은 내 방 침대 위에서 한껏 몸을 웅크렸다.

 

야, 내가 얇은 옷 입지 말라고 했지? 큰엄마는 내가 조금만 노출이 있거나 속이 비치는 옷을 입으면 불호령을 내리며 옷가지를 갈가리 찢었다. 그 탓에 나는 여름에도 온 살갗을 뒤덮는 두터운 스웨터를 입어야 했다. 원래 몸에 열이 많은 터라 매일을 땀띠에 시달렸다. 짓무른 피부가 스웨터의 실과 엉겨 붙기 일쑤였다. 그 이야기를 큰엄마에게 했다가 더 세게 얻어맞은 적이 있어서, 나는 늘 참았다. 큰엄마는 이웃의 시선에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동네 주민들에게 내가 햇빛 알레르기가 있어 피부를 보호해야 한다고 해명했다. 이웃들은 큰엄마의 실체를 몰랐다. 그녀는 욕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었다. 큰엄마의 히스테리는 내가 큰아빠와 밖에 다녀온 날에 극도로 심해졌다. 나는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무릎을 꿇고 빌었다. 큰아빠는 새어나오는 내 숨죽인 울음소리에도 방문 한 번 열어보지 않았다. 그럴 바에는 제발 나를 데리고 나가지 말라고 외치고 싶었다.

 

맞은 자리에 딱지가 서서히 떨어져 나갈 즈음, 큰엄마의 먼 친척 아이가 이 집에 왔다. 그의 부모가 외국에 가는 바람에 몇 년 간 맡아주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 방 문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바깥 상황을 관찰했다. 그 남자아이의 옷에는 흙과 김칫국물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큰엄마는 그 아이를 때리지 않았다. 입을 벌리고 그 놀라운 광경을 주시하다가, 그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화들짝 놀라 방문을 닫았다. 그 아이는 덥수룩한 머리칼을 지니고 있었다. 두 눈은 뱀처럼 길게 찢어져 있었다. 나를 바라보던 갈색의 눈동자를 떠올리다가 쭈그려 앉았다. 흐트러짐 없이 각 잡힌 방안 풍경이 내 숨을 턱 막히게 했다. 목을 감싸 쥐고 공기를 힘겹게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이 밤은 도통 가실 줄 몰랐다.

 

그 아이의 이름은 지환이었다. 나는 그와 같은 초등학교를 다니게 됐다. 내가 앞서 걸으면 지환이는 내 뒤를 멀찍이 따랐다. 신발에 때 묻지 않게 애쓰는 나와 달리, 지환이는 거침없이 발길을 옮겼다. 신발 얼룩의 개수는 내게 그어질 실금의 수와 동일했다. 그는 그렇게 나를 지나쳐 학교로 향했다. 우리의 입장은 반전되어 내가 그를 쫓는 형국이 되었다. 지환이는 잡힐 듯 말 듯 나와 거리를 유지했다. 밀고 당기는 우주의 법칙처럼, 우리는 공전하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마주칠 수 없었다.

 

급식으로 카레가 나왔다. 나는 카레에 들어 있는 감자를 정말 좋아했다. 큰엄마가 카레를 해주는 일은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매일 저녁밥을 라면만 끓여주었다. 내게 있어 학교 급식은 매일의 특식이었다. 감자를 숟가락으로 떠 입 안에 넣으려는데, 그만 상의에 툭 떨어지고 말았다. 그 순간 아주 놀랍게도 밥맛이 싹 가셨다.

 

나는 그대로 화장실로 향해 카레 자국을 물에 헹궜다. 비치된 비누를 필사적으로 묻혀 비볐지만 오히려 번지기만 할 뿐 자국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 무늬 없는 흰 티셔츠의 적나라한 얼룩은, 그야말로 화룡정점이었다. 집중하지 않으려 해도 한 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두 손으로 자국을 가리며 나오는 내 앞에 누군가 바투 다가섰다. 지환이는 갑자기 윗도리를 벗더니 내 손에 쥐어주었다. 지환이의 새하얀 맨몸을 주시하다가 그 자리에서 내 웃옷도 벗었다. 그리고 그의 옷을 천천히 꿰어 입었다. 나는 갈아입은 지환이의 옷에서 특유의 체취를 맡았다. 그는 얼룩 묻은 옷을 입고 환하게 웃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같은 크기의 손을 잡고 다녔다.

 

시간이 지날수록 큰엄마의 폭력 수위는 나날이 높아졌다. 어느 날은 숨도 쉬지 못하게 때릴 때도 있었다. 주로 큰아빠가 내 선물을 사왔을 때나, 내 방에 들어와 자는 걸 보고 갔을 때였다. 내가, 그냥, 가만히, 있으랬지. 스타카토로 끊어 말하는 큰엄마의 덤덤한 목소리가 내 고막을 쳤다. 그러나 그녀의 발길질은 오히려 흥분에 가득 차 있었다. 습관처럼 두 손을 거칠게 비비며 연신 사과했다. 내 옷가지를 갈가리 찢어발기던 그녀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큰엄마는 내 가슴을 쥐어짜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래, 너도 여자라고 크는구나. 그리고는 우악스레 내 아랫도리를 벗기기 시작했다. 바지에 쓸리는 살갗이 쓰라렸다. 곧 큰엄마는 내 삼각팬티까지 끄집어 내렸다. 바깥에 노출된 허벅지가 잔잔하게 떨려왔다. 큰엄마의 손길에 배려라고는 없었다. 그녀는 내 사타구니를 바라보더니 안도가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그 사건이 있기가 무섭게 사타구니에서 굵은 털이 나기 시작했다. 큰엄마는 내 몸에 무슨 변화가 일어나기라도 하면 발작하듯 달려들었다. 내가 털이 난다는 걸 알면, 전처럼 손으로 쥐어뜯을지도 몰랐다. 그 야수 같은 몸동작을 보고 싶지 않아, 내 손으로 털을 하나하나 뽑았다. 피부 조직이 뜯겨지는 것 같았지만 그녀에게 맞는 것보단 나았다. 가끔은 뽑다가 피가 나기도 했다. 내 다리 사이는 늘 빨갛게 부어 있었다. 내 침대 아래에 구불거리고 굵은 털이 쌓이면 덩달아 입 꼬리가 올라갔다. 큰엄마는 내가 털이 자라는 걸 모를 테니까.

 

지환이와 산에 갔다가 집에 오늘 길에 같은 반 남자 아이들을 마주쳤다. 오락실 가자는 말에 나는 고개를 젓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지환이의 손을 놓고 집으로 향했다. 지금은 큰엄마가 장보러 갈 시간이었다. 집에 들어가 신발을 닦고 옷을 갈아입으면 안 맞을지도 몰랐다. 나는 아무도 없는 집을 좋아했다. 혼자 있는 빈 집에선 어쩐지 좋은 냄새가 났다.

 

소리를 한껏 죽여 집에 들어온 후 옷을 갈아입었다. 한겨울에나 입을 법한 두터운 니트였다. 이 니트를 입으면 젖꼭지가 두드러져 보이는 걸 막을 수 있었다. 보니까 다른 여자아이들은 얇은 옷을 입어도 젖꼭지가 비치지 않던데, 나는 그 비밀을 알 수가 없었다. 안에 얇은 옷을 여러 겹 껴입었구나하고 생각하곤 했다.

 

목이 말라 부엌에 가는데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집에 아무도 없는데. 미간을 찡그리며 한손으로 가슴을 쥐어짰다. 이 고통은 좀체 익숙해지지 않았다. 내가 하면 큰엄마가 직접 내 몸에 접촉하지 않아도 되니까 하는 행위였다. 촉각을 세워 발끝으로 걸으면 발소리가 거의 안 났다. 내가 발소리만 내도 그녀가 고함을 질러 자연스레 체득된 노하우였다. 나는 살금살금 걸어 안방을 지나쳤다. 그런데 안방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그 말은, 큰엄마가 지금 집에 있다는 소리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 소리의 출처가 정말 큰엄마인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녀가 집 안에 있는 게 있다면 그냥 지환이가 있는 오락실로 도피할 생각이었다. 복도를 지나 세탁실 앞에 도착했다. 나는 코너에서 목만 내밀어 눈을 끔벅였다. 푸석한 머리카락을 집게 핀으로 고정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큰엄마는 쭈그려 앉아 무언가에 심히 열중하고 있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의 출처는 그녀가 맞았다. 콧바람이 들락날락하는 소리가 귓가에 선연했다. 큰엄마는 입으로 거친 숨결을 내뱉었다. 나는 두 눈을 크게 떠 그녀가 하는 양을 살폈다. 큰엄마는 지환이의 별무늬 트렁크 팬티에 코를 박고 제 가슴을 쥐어짜고 있었다.

 

*  *

 

지환이는 늘 화분 아래에 열쇠를 두었다. 그 화분을 들어 올리자 역시 칠이 벗겨진 열쇠가 사선으로 놓여 있었다. 문을 열자 오랫동안 묵힌 먼지 냄새가 훅 끼쳐왔다. 그 냄새 사이에는 지환이 특유의 체향이 드문드문 묻어 있었다. 그건 그녀가 코 박고 느꼈던 팬티 냄새와 같을지도 몰랐다. 현관에 놓인 탈취제를 마구잡이로 분사하며 집 안에 들어섰다. 집 안은 어수선한 모습 그대로였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어쩐지 낯설고 기묘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집 안 어느 곳에도 지환이의 행방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지환이의 방에 가 침대 위에 누워 눈을 감았다. 여기 누워 있으면 왠지 잠이 잘 올 것 같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지기만 했다. 누워서 몇 시간을 있다가 집을 나섰다. 행방이 묘연하기만 했다. 내 손을 붙잡던 그의 단단한 손이 그리워졌다.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어릴 적 우리가 자주 갔던 뒷산이었다. 별로 높은 봉우리가 아니라 오르는 데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오르는 길에는 내가 제일 피해 다녔던 밤송이가 포진해 있었다. 밤송이를 밟으면 더러 신발 밑창에 구멍이 뚫릴 때가 있었는데, 그걸 큰엄마가 발견하는 날에는 큰 소동이 벌어졌다. 두 손바닥이 헐 정도로 빠르게 손을 비벼야 하는 것이었다.

 

정상에 도착하자 나이 지긋한 노부부와 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 셋이 기구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나란히 앉아 기구를 타곤 했다. 오르려면 더 높이 오를 수 있지만, 여기서 ‘야호’ 외친 후 집에 내려갔었다. 그때 마주잡은 두 손을 잊지 못했다.

 

여기 없다면 진짜 어디에 있는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나와 지환이의 행동반경은 그렇게 넓은 편이 아니었다. 얇게 입어 가슴의 정점이 시렸다. 불어오는 바람이 옷을 스칠 때마다 몸을 한껏 웅크렸다. 긴장하고 있던 어깨 근육이 뻐근했다. 그럼에도 곤두서는 유두를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와 버리고 말았다. 지긋지긋한 큰아빠 댁에서 가출한 후로 힘겹게 얻은 집이었다. 산 아래인 데다가 준공된 지 한참 되어 운 좋게 싼값에 구할 수 있었다. 침대 위에 앉아 있다가 근래 날이 쌀쌀해짐을 느꼈다. 다락방에 있는 열풍기를 꺼내야 될 듯 싶었다. 장판이 있긴 했지만 오래되어 그렇게 온기가 강하진 않았다.

 

삐거덕 대는 관절을 두드리며 굼뜨게 걸음을 옮겼다. 잘못 만지면 가시가 박히는 나무 사다리를 타고 오르자 허리를 반쯤 굽혀야 하는 다락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리를 굽힌 상태로 열풍기를 찾고 있으려니 꼬리뼈가 둔중하게 아파왔다. 바닥이 더러웠지만 그냥 주저앉았다. 그리고 바닥에 길게 그어져 있는 핏자국을 발견했다. 피가 흐르는 무언가를 질질 끌고 간 것 같은 흔적이었다. 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그 흔적의 끝을 따라갔다. 다락의 가장자리로 갈수록 핏자국은 옅어졌다. 검붉은 색의 자국은 끊겼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 끝에는, 마치 풍선처럼 생긴, 정체모를 찢어진 고무와 모서리에 피가 묻은 두꺼운 책이 널브러져 있었다.

 

내 집에서 살인사건이라도 일어난 게 틀림없었다. 저 두꺼운 책은 내 침대 맡에 있던 책이었다. 나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경찰에 연락했다. 삼일 째 잠자던 휴대폰은, 지환이에게 닿지 못하고 결국 경찰서와 연결되었다.

 

경찰들은 내 예상보다 빨리 집에 도착했다. 그들은 이곳저곳을 면밀히 살피며 내게 이것저것 물었다. 나는 넋이 나간 채로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냥 서 있었다. 경찰관은 비닐에 책과 고무를 넣고 혈액을 채취했다. 응고되어 까맣게 변색된 피는 왜 몰랐나 싶을 정도로 넓게 퍼져 있었다. 경찰들이 떠난 집은 평소보다 배 넓어보였다. 나는 침대에 새우처럼 웅크려 눈을 감았다. 또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웅웅대는 냉장고 소리만 내 유일한 말동무가 되었다. 냉장고에 뭐가 들었더라…….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꿈을 꿨다. 꿨다는 사실만 인지할 뿐, 깨고 나면 기억나지 않는 악몽을. 아무리 머리를 잡고 떠올려내려 해도 소용없었다.

 

경찰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여러 번 내 집을 들락거렸다. 나는 그럴 때마다 저 핏자국이 지환이의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 상상은 하면 할수록 헛구역을 불러 일으켰다. 그럴수록 지환이에게 전화를 거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전화를 걸었다. 가득 채워놓은 배터리가 방전될 때까지 계속, 계속.

 

지환이는 큰엄마의 매질에서 나를 여러 번 구해주었다. 원래 깨끗하지 않은 지환이는 혹시 내가 옷을 더럽힐 경우를 대비해서 청결을 고수했다. 큰엄마는 나와 지환이가 옷을 바꿔 입어도 눈치 채지 못 했다. 그렇게 무던히도 위기를 넘겼다.

 

어느 날 부턴가 지환이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나와 엇비슷하던 눈높이가 달라지고, 목소리가 한껏 굵어졌다. 그리고 혼자 방 안에 틀어박히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것 때문에 섭섭함을 느끼긴 했지만, 혼자 노는 것도 익숙하기에 그리 상관없었다. 그는 변해도 내 손은 어김없이 잡아주었다. 지환이는 거의 자라지 않는 나와 달리 금세 훌쩍 커져버렸다. 이렇게. 그러면서 그와 나의 손 크기는 어긋나버렸다.

 

경찰 조사는 계속해서 이뤄졌다. 경찰관 한 명이 내게 경찰서로 함께 가자고 했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경찰차에 올랐다. 경찰서에 도착한 난 퍼붓는 질문 세례와 마주했다.

 

피해자와는 무슨 관계입니까? 냉장고 안에 뭐가 들어 있었는지 아십니까?

 

나는 두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뭐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을 멀뚱히 듣고만 앉아 있던 난 인상을 찌푸렸다. 피해자가 누군데요?

 

강지환.

 

난 눈을 깜빡이는 걸 의도적으로 멈췄다. 공기 중에 노출된 눈동자가 시려왔다. 아니길 바랐던 것이 사실이 되어 내 시야를 가려버렸다. 경찰관은 서류를 뒤적이더니 손을 저었다. 아직 조사 완벽하게 끝난 것 아닙니다. 가보세요.

 

지환이가 간 곳을 찾았지만 더 이상 따라갈 수 없었다. 우리의 손은 어긋나다 못해 아예 떨어져버렸다. 난 경찰서 근처의 공원 벤치에 앉아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리고 최근의 지환이의 행동을 떠올렸다. 지환이는 기이하리만큼 내게 자주 전화를 했다. 그리고 우리 집도 제 집처럼 들락거렸고, 가끔은 자고 가기도 했다. 그런데 그건 과거에도 종종 했던 일들이라 그리 특별할 게 없었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환이가 죽었다. 그 문장이 내 머릿속을 휘저었다.

 

집 안에 틀어박혀 나가지 않았다. 다락방의 핏자국은 제대로 지워지지 않아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위에 누워 눈을 감았다. 밤이 왔다. 그런데 잠들 수가 없는 밤이었다. 어디선가 뚝, 뚝, 물새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인지 피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온몸을 축 늘어뜨리고 찾아들 악몽을 기다렸다. 막 잠에 빠져들려는 찰나 거칠게 현관을 두드리는 소음에 눈을 떴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언뜻 지환이를 본 것 같기도 했다.

 

아진 덜 깬 눈을 비비며 1층에 내려갔다. 방 안은 치우지 않은 쓰레기들로 가득 차 있었다. 현관문 앞에 다가가 섰는데, 또 누군가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문에 체인을 걸고 열자 그 사이로 손이 불쑥 들어왔다. 경찰입니다, 문 여세요. 나는 또 군말 없이 문을 열었다. 거의 본능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열자마자 두꺼운 손이 나를 제압했다. 나는 화들짝 놀락 바르작거리며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붙잡힌 손에 순식간에 수갑이 채워졌다. 나는 입을 벌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험악한 인상의 경찰 몇이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이번에야 말로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갔다.

 

강지환씨 살인사건 용의자로 지목되셨습니다. 영장도 발부했고요. 증거도 이미 다 확보되었습니다. 형사의 말투는 감정 없는 사람처럼 딱딱했다.

아. 내뱉은 내 목소리는 습기 없는 장작처럼 메말라 있었다. 목을 두어 번 가다듬고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증거가 뭔데요? 그러자 마치 짜인 각본처럼 내 앞에 무언가가 놓였다. 그건 바로 내가 발견하고 신고했던 책과 고무였다. 그 증거물들과 형사를 번갈아 보기를 반복했다.

 

지문이 일치합니다. 지문, 내가 썼던 물건인데 지문이 일치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기분 나쁜 티를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형사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한 장의 사진을 내 앞에 올려놓았다. 문이 활짝 열려 있는 내 냉장고 사진이었다. 여기서 강지환씨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신에도 지문이 발견되었습니다.

 

모든 증거들이 내가 범인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 그런 사건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환이는 그냥 내 곁에서 사라졌을 뿐이었다. 나는 그를 결코 붙잡은 적이 없었다. 나는 취조실 의자에 몸을 기대 눈을 감았다. 잠을 제대로 못 자 몰려온 피로감이 나를 덮쳤다. 수갑이 차여 있어 불편한 손을 꼼지락 대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리고 생생한 악몽이 내 눈 앞에서 재현되었다.

 

나는 집에서 한가로이 책을 읽고 있었다. 그 책은 형사가 증거물로 제출했던 바로 그 책이었다. 검은색 양장본에 무려 천여 장에 달하는 두께를 자랑하고 있었다. 나는 한껏 집중하고 있었다. 그 때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액정을 확인하자, 지환이었다.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내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나 네 집 놀러가도 돼? 지환이는 어쩐지 들뜬 목소리였다. 우리는 소리마저 상반되었다. 뭐 안 될 것도 없다 싶어 괜찮다고 하자, 1초도 안 돼서 초인종이 울렸다. 지환이가 집 앞에서 바로 전화를 건 것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그가 내게 성큼 다가왔다. 지환이의 큰 키 탓에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숨소리로 판단하여 그가 보통 상태가 아님은 알아보았다. 희미하게 술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지환이가 너무 가까이 다가와서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쌀쌀한 바람이 열린 문 사이로 불어 들어왔다.

 

야. 한 음절,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얼굴을 치켜들었을 때, 그는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입술을 가득 덮은 미끈하며 축축한 감각에 몸을 곧추세웠다. 지환이는 다짜고짜 내 입 안에 혀를 밀어 넣어 헤집었다. 내 입가는 금세 침으로 범벅되었다. 나는 정신을 못 차리다 곧 두 팔로 지환이를 밀어내었다. 하지만 그는 미동도 없었다. 오히려 한 손으로 내 가슴을 움켜쥐었다. 머리가 아찔했다. 지환이는 다급한 손길로 내 윗옷을 말아 올렸다. 나는 어느 샌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지환이가 무얼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계속 큰엄마가 떠올라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큰엄마가 지환이의 팬티에 코를 박고 킁킁대던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오버랩 되었다.

 

지환이는 내 고무줄 바지를 끌어내렸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어떤 상자를 꺼내더니 다급하게 뜯어냈다. 그건 꼭 풍선처럼 생긴 고무였다. 내가 걸치고 있는 건 팬티밖에 없었다.

 

그가 내 팬티에 손을 대는 순간 무언가 번쩍 하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지환이는 머리에 피를 흘리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내 손에는 피 묻은 책이 들려 있었다. 지환이가 나를 이상하게 만들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려는 나를 계속 데려가려고 하는 건 바로 그였다.

 

나는 책을 지환이의 배 위에 올리고 그의 한 쪽 다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 무거운 몸체를 질질 끌며 옮겼다. 나는 변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가 좋았다.

 

눈을 뜨니 밤이었다. 간만에 한숨 푹 자고 깨어난 것처럼 개운했다. 나는 크게 기지개를 켜며 하품했다. 정말이지 지긋지긋한 꿈들의 연속이었다. 주위가 어두워서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산란하게 만드는 까마귀의 비명소리는 이제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부르튼 입술의 각질을 씹으며 생각했다. 그동안 나를 괴롭히던 악몽의 정체를 드디어 알게 되었다. 드러난 적은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건조한 손을 마주 비비며 몸을 축 늘어뜨렸다. 이제 악몽이 아닌 진짜 꿈을 꿀 수 있을까.

 

 

내가 너를 죽였나? 아마 그랬나 보다. 그래도 나쁜 결말은 아니었다. 드디어 내가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젠 나도 행복할 수 있을 것이었다. 변하지 않고 이 모습 그대로. 부디, 좋은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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