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나는 도서관 사서를 납치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모든 일이 잘 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겁을 집어먹었고 나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납치범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나는 곧 그녀에게 납치한 후의 일 같은 것은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키고 말았다. 그 후로부터는 상황이 역전되어 나는 그녀가 하는 말들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무척이나 고로케를 좋아했기 때문에 나는 갓 튀겨낸 고로케를 구하기 위해 언제나 빵집 문이 열리자마자 그곳에 가서 종이 가방 가득 고로케를 사와야 했다. 빵집 직원이 ‘고로케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라고 물으면 나는 ‘제가 아니라 제가 납치한 도서관 사서가 좋아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이야기 한 것인데 그 말은 어쩐지 나를 성실한 괴짜처럼 보이게 하여 빵집 직원들 사이에서 나의 평판은 꽤 호의적인 것이 되었다.

그녀는 카레 고로케, 불고기 고로케, 카툰식 고로케, 호메로스 식 고로케를 가리지 않고 먹어치웠다. 특히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호메로스 식 고로케는 그 이름에 걸맞게 매우 비싼 가격을 자랑하고 있었다. 어찌보면 그런 터무니 없이 비싼 가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호메로스 식 고로케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하루는 이제 그만 돌아가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슬쩍 현관문을 열어놓고 외출한 적도 있었다. 일을 마친 뒤 내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데 열중해 있었다. 내가 현관문을 닫고 들어오자 그녀는 어김없이 ‘고로케는?’ 하고 물었다. 내가 ‘오늘은 고로케가 다 떨어져서 버터빵을 사왔는데 괜찮을까?(버터빵은 내가 좋아하는 빵이었다. 사실 그때쯤 나는 고로케라면 냄새조차 맡기 싫었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라고 말하자 그녀는 한동안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소리쳤다. ‘이봐, 납치범 아저씨. 당신 때문에 내 인생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기나해?’로 시작하는 장광설이었다. 그녀의 말들은 곧 거실을 가득 채우고 허리까지 차오르더니 결국에는 턱밑까지 불어나 숨을 턱 막히게 했다. 그녀가 ‘알겠어?’ 하고 말했을 때 나는 이미 집에서 뛰쳐나온 뒤였다.

늦은 시간까지 영업하는 빵집을 찾아 나는 한동안 동네를 헤매고 다녔다. 도로에서 마주치는 모든 차들이 나처럼 고로케를 사러나온 것처럼 느껴지는 밤이었다. 겨우 발견한 24시간 빵 집 앞에는 놀랍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줄은 무척이나 길었다. 앞에 서 있던 한 남자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머리털을 제외한 얼굴전체의 털을 기르고 있었다.

"고로케 사러오셨죠?"

나는 어떻게 알았냐는 듯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표정에 다 써있네요.’ 하고 말했다.

“그럼 그 쪽도?”

털보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도서관 사서를 납치했습니다. 우리 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죠. 사람 사는 것이 거기서 거기 아니겠습니까?”

내 입에서 영문을 알 수 없는 ‘그렇군요.’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가 물었다.

“그 쪽 사서는 어떤 고로케를 주로 먹습니까?”

“호메로스 식 고로케입니다.“

“그렇다면 안타깝군요.”

“네?”

“저곳을 좀 보세요.”

나는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전광판이 달려있었다. 고로케 별로 남은 수량을 표시하는 숫자가 카운트 되고 있었다. 나는 호메로스 식 고로케의 남은 수량을 확인했다. 3개였다. 앞에는 아직 스무명 쯤되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호메로스 식 고로케를 먹지 못한 그녀는 밤새도록 ‘이봐, 납치범 양반.’으로 시작되는 장광설을 쏟아놓을 것이 분명했다. 익사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 때 호메로스 식 고로케의 남은 수량을 나타내는 숫자가 3에서 2로 바뀌었다. 나는 혀를 깨무는 심정으로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얼마 못가 숫자는 2에서 1로, 잠시 후에는 1에서 0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의 입에서 나지막한 비명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나에게 털보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나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너무 실망하지 말게. 위기는 기회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것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말을 하는 것조차 귀찮아져서 ‘그런가요?’ 하고 대꾸했다.

“그렇지. 나라고 이런 일이 없었겠나? 그래서 나이든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중요한 것이네. 자, 나랑 같이 한 잔 하러 가지 않겠나? 어쩌면 내가 좋은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나는 거절할 기운도 없어서 그를 따라갔다.

털보가 나를 데려간 곳은 근처의 포장마차였다. 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앉자마자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애초에 납치를 하는 것이 아니었어.’ 내 입에서는 탄식처럼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털보는 그런 나를 잠자코 바라보며 빈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기운내게.” 그가 말했다. 포장마차 주인 아주머니도 한마디 했다.

“젊은 사람이 얼굴에 핏기가 다 사라져가지고는 안돼보이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기운내요. 재료 좋은 것으로 골랐으니까.’

그녀는 양념된 고갈비가 담긴 접시를 건넸다. 나는 그것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기분에 어울리지 않게 맛이 좋았다.

‘정말 맛있네요.’ 하고 나는 말했다.

‘뭘.’ 하고 아주머니가 대답했다.

“혹시 고로케도 잘 만드시나요?”

나는 무심코 그렇게 묻고 말았다. 아주머니가 칼질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전에 수제 고로케 집을 했다는 건 어떻게 알았나?’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나와 털보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나는 입안에 고인 침을 한 번 삼키고 말했다.

“그럼 혹시 호메로스 식 고로케도 만들 줄 아시나요?”

“왜, 먹고 싶어?”

그녀는 썰어놓은 야채들을 냄비에 담으며 물었다.

“네. 정말로 먹고 싶습니다. 혹시 지금 만들어 주실 수는 없을까요? 돈은 2배 아니, 3배라도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눈썹을 찡긋하고 위로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만들고 싶어도 재료가 없어.”

“어떤 재료죠? 호메로스 식 고로케에는 대체 뭐가 들어가는 겁니까?”

나는 애가 타서 물었다.

“아, 정말 모르는거야? 고로케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모르는 사람은 없을텐데?”

“그게 말이죠. 좋아하기 시작한 것이 며칠 전부터라서요”

“그렇게 급한거야?”

“네. 정말 목숨이 걸려있다고 할만큼 먹고 싶다고 할까요. 못참겠습니다······.”

“흐음.” 하고 그녀는 나와 털보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뭔가 사정이 있는 모양이구만. 그런데 구하기가 쉽지 않을거야. 더군다나 지금은 새벽이니까. 그래도 정말 먹고 싶으면 구해봐. 아직 내 실력도 녹슬지는 않았을 거야.”

“감사합니다. 그런데 필요한 재료가 뭐죠?”

“그건 말이지······.”

털보는 흔쾌히 나와 동행해주었다.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나도 호메로스 식을 먹어본지는 꽤 오래되어서 말이지.’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포장마차 아주머니의 말을 떠올렸다.

“호메로스 식 고로케가 왜 그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인지 알아? 그 이유는 거기에서 도무지 한가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맛이 나기 때문이야. 마치 고대 그리스의 대서사시처럼 말이지. 탐욕과 분노, 위대함과 비굴함, 사랑과 질투, 애증과 죽음이 뒤섞인 맛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 맛을 설명할 길은 그것을 직접 먹어보는 것 밖에는 없을 거야. 그러한 맛을 한꺼번에 낼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단 하나, 사람의 기억뿐이지. 만약 그 쪽이 호메로스 식 고로케를 꼭 먹고 싶다면 누군가의 싱싱한 기억을 내게 가져다주면 돼. 그럼 나는 그것을 다른 재료들과 뒤섞어 인간 감정의 모든 맛이 뒤섞여 있는 고로케를 만들어 줄테니까.”

일은 그렇게 되었고 나와 털보는 무턱대고 누군가의 ‘싱싱한 기억’을 찾으러 새벽 밤거리로 나오게 된 것이었다. 우리는 목적지도 없이 찬바람 속을 걷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나였다.

“대체 사람의 기억을 어디서 구해야 할까요?”

털보는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말했다.

“싱싱한 기억이라···그건 어쩌면 뇌를 말하는지도 모르지. 싱싱한 뇌. 즉 어린아이의 뇌를······.”

“끔찍한 소리하지 마세요.”

나는 손을 내저으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럼 자네는 뾰족한 수라도 있나?” 하고 털보가 물었다.

“기억이 꼭 뇌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뇌라는 것은 기억을 보관하는 장소일 뿐이고 막상 기억의 본체는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을까요?”

“어떤 모습?”

“글쎄요. 아마도······.” 나는 말꼬리를 늘이며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평소에 좋지 않았던 머리가 급한 상황에 닥쳤다고 해서 갑자기 좋아질 리도 없는 것이었다. 그 때 문득 눈에 들어온 가게의 간판이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래?” 하고 털보가 나를 보았다.

“저길 봐요!”

나는 손을 들어 간판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누구나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큼지막한 글씨로 ‘기억 삽니다. 팝니다.’ 라는 입간판이 서 있었다. 우리는 눈을 깜박거리며 가게 앞으로 다가갔다. 시트지로 가려진 내부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털보와 나는 마주 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목울대로 침을 꿀꺽 삼킨 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게의 내부는 얼핏 도서대여점을 연상시키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곳에는 많은 책들이 있었다.

“어서오세요.”

20대 중 후반으로 보이는 여인 한 명이 우리를 맞이했다. 나는 가볍게 목례하고 소근 거리듯 말을 꺼냈다.

“기억···팝니까?”

“네?”

그녀가 다시 물었다. 나는 위법을 저지르려는 사람처럼 조금 위축되었다.

“그러니까, 여기가 기억···을 파는 곳이 맞습니까?”

나는 더듬거리며 말하고 있었다.

“네. 팔기도 하고 사기도 한답니다.”

그녀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털보를 돌아보았다. 그는 가게의 책들을 구경하는 척 뒤돌아서 있었다.

“어떤 걸로 드릴까요?” 하고 그녀가 생글거리며 물었다.

“그게, 요리를 하려고 하는데요.”

“아, 호메로스 식 고로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바로 그겁니다.”

털보가 뒤에서 끼어들었다.

“그렇군요. 얼마나 필요하시죠?”

“네?” 하고 나는 되물었다.

“얼.마.나. 필요하시냐구요.”

그녀가 다시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 아마 열 개정도 만들 분량이라고 할까요? 아무튼 그렇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녀는 카운터 뒤 쪽에 있는 작은 문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분유통 같은 것을 들고 나왔다. 그것은 크기도 모양도 반짝임도 분유통 같았다.

“분유통 같네요.”

옆에서 털보가 말했다.

“보통의 용기는 아닙니다. 기억이라는 것은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쉽게 변질되어 버리기 때문에 특수한 재질의 용기가 필요한 것이지요. 조리하기 직전까지는 열지 마세요.”

나는 은빛으로 빛나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죠?’ 하고 물었다.

우리는 기억이 담긴 통을 들고 가게를 나섰다. 나는 마음이 놓여 털보와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가 문득 커다랗고 검은 형체와 충돌했다. 그것은 길 한가운데서 움직이지 않고 상대방이 자신에게 부딪혀 오기를 기다린 듯 했다. 놀란 나는 무심결에 기억이 담긴 통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용기는 아스팔트 지면과 부딪혀 뚜껑이 열렸고 은색의 가루들이 바닥에 일부 쏟아졌다. 나는 서둘러 그것을 집으려고 했으나 이미 거대한 검은 형체는 고개를 숙여 그것을 핥아먹고 있었다. 그것은 검은 색의 거대한 개였다. 나는 뒤로 물러섰다. 개는 무척 맛이 있는지 허겁지겁 입 주위에 은색가루를 잔뜩 묻히며 그것을 먹고 있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다가가려고 하면 검은 개는 무서운 기세로 으르렁거렸다. 우리는 통 안의 것들이 빠른 기세로 개의 입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통이 비었는지 개가 입 주위를 핥으며 고개를 들었다. 개는 한층 관대해진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다음 순간 그 커다란 검은 개는 두발로 일어섰다. 그리고 말했다.

“어쩐지 뻐근하구만.”

나는 경악했다. 힐끗 옆을 보니 털보가 다리를 후들 후들 떨고 있었다. 개는 그대로 서서 우리를 바라보았다. 몹시 눈치가 보이는 상황이었다. 나는 개가 다음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개는 아쉽다는 듯 계속 입 주위를 핥고 있었다. 그 때 옆에서 ‘멍! 멍!’ 하는 소리가 들렸다. 털보였다. 아마도 그는 ‘너는 개인가? 아니면 사람인가? 정체를 밝혀라.’ 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당황한 나머지 그런 소리를 낸 것이었다. 개는 입 주위를 핥는 것을 멈추고 털보를 바라보았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개가 입을 열었다.

“무례하군요.”

그런 뒤에 개는 두발로 걸어서 골목 뒤편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시 후 털보가 침울하게 말했다.

“미안하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괜찮습니다. 제가 부주의 했던 탓이죠.”

나는 통을 집으며 말했다.

“그건 그렇지.” 하고 털보가 말했다.

우리는 다시 기억 상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점원은 마치 처음 본 것처럼 우리를 향해 ‘어서오세요.’하고 다시 인사했다. 나는 그녀에게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녀는 입을 조금 내밀고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포장된 기억은 그게 마지막이었는데···구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방법이죠? 반드시 구해야 합니다.”

나는 목을 빼고 물었다.

“그게···꽤 위험한 방법이라서요.”

그녀가 머뭇거리며 이야기 했다.

“뭐라도 하겠습니다.” 하고 옆에서 털보가 말했다.

그녀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살짝 미소지었다.

“그럼 따라오세요.”

그녀는 조금 전 기억이 담긴 통을 가져왔던 곳의 문을 다시 열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계단 조심해요.”

그녀가 말했다. 우리는 꽤나 오래 계단을 내려갔다.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어머니의 자궁 속만큼이나 깊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형광등의 스위치를 올렸다. 갑자기 들이닥친 빛 때문에 나는 잠시 동안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차츰 우리가 서 있는 공간이 시야에 들어왔다. 꽤나 넓은 곳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생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거대한 박쥐였다.

“시선을 피하지 마세요. 녀석에게 우리가 명확한 의지를 가지고 온 인격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녀가 말했다. 나는 박쥐와 마주보았다. 감정이라고는 깃들어있지 않은 듯한 눈과 쪼그라든 얼굴이 매우 끔찍스러웠다.

“이 녀석은 기억박쥐라고 불리는 녀석입니다. 녀석들은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의 기억을 끌어 모아 동굴 속에 보관하죠. 그리고 그것에서 영양분을 섭취합니다. 이 녀석은 그 중에서도 기형적으로 머리가 좋은 녀석입니다. 보통은 이런 식으로 인간과 거래를 하려는 녀석은 없으니까요.”

그 말을 듣고 나서 본 박쥐의 얼굴은 방금 전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그럼 이제 어쩌죠?”

나는 물었다.

“녀석은 사람들의 기억을 주식으로 삼고 있지만 한 번에 매우 조금씩만 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식사 후에 남은 것들은 따로 보관해 두곤 하죠. 그러니까, 당신은 여기서 격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과거를 회상해 주셔야 해요. 그럼 저는 박쥐가 먹고 난 나머지를 이 통 안에 담겠습니다. 보통 우리는 숙련된 기억 제공자들을 통해서 이 작업을 하고 있지만 당신이 급하다고 해서 온 것이니 어떻게든 해보세요. 제가 도움 드릴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니까.”

“잠시만요.”

털보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제가 전에 연기를 좀 했었습니다.”

"잠깐, 연기를 하라는 것이 아닌데······."

그녀가 말했지만 털보는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곧 한 쪽 손으로 이마를 매만지며 감정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박쥐는 한 쪽 귀를 쫑긋거리며 흥미롭다는 듯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곧 털보는 감정몰입에 성공한 듯 고개를 들고 대사를 읇조리기 시작했다.

“······!”

한동안 그를 지켜보던 박쥐는 곧 상한 음식이라도 먹은 듯 캑캑대며 바닥에 침을 뱉기 시작했다.

“역시 그만하는 게 좋겠어요.”

그녀가 털보의 연기를 제지했다. 털보는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이번에는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런 계획도 없었지만 털보의 연기를 본 후라서 약간 자신감이 붙은 상태였다. 나는 의식을 머릿 속에 집중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억 하나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20년도 더 지난 과거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시점에 왜 그 기억이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나는 당시 중학생이었다. 그 날 내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집에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대로였다. 부모님은 일을 하러 나가셨고 고등학생이었던 누나는 아직 집에 돌아올 시간이 아니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그리고 책가방에서 케이스에 든 CD한 장을 꺼냈다. 급우에게 빌려온 것으로 이미 반 아이들 사이를 한 바퀴 돌아 내게까지 도착한 음란 CD였다. 인터넷이 보급되어 있지 않았던 시대였다. 나는 CD안의 영상을 재생시켰다. 그곳에 한 여자가 나타나 옷을 벗기 시작했다. 여자가 알몸이 되기도 전에 이미 내 바지의 가운데 부분은 불룩해져있었다. 곧 화면 속에 남자 2명이 나타났고 그들은 거칠고 자극적인 방식으로 행위를 시작했다. 나는 바지와 속옷을 무릎까지 내리고 있었다. 남자들은 행위가 고조됨에 따라 점차 과격해지고 있었다. 그들은 여자의 뺨을 때리는가하면 목을 조르기도 했다. 내가 이상함을 느낀 것은 세 번째 남자가 등장했을 때였다. 한 남자는 행위를 계속했고 다른 하나는 여자의 머리 쪽으로 가서 그녀의 두 팔을 잡았다. 그 때 세번째 남자가 손에 송곳 같은 것을 들고 화면에 등장했다. 남자는 잘 보라는 듯 카메라를 향해 송곳을 내밀고 흔들기도 했다. 그 때까지도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지려고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는 송곳의 날카로운 끝으로 여자의 배를 찔렀다.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두 남자들에 의해 단단히 구속되어 있는 상태였다. 남자는 여자의 몸에 송곳으로 계속 상처를 냈다. 나는 거기서 동영상을 종료했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입을 벌린 채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영상 속의 여자는 피투성이가 되었고 남자들은 행위를 계속했다. 지옥 같은 광경이었다. 그 때 누군가가 뒤에서 비명을 질렀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고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누나였다. 그녀가 방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황급히 바지를 걷어 올리고 동영상을 종료시켰다. 그리고 방에서 뛰쳐나왔다. 누나의 비명은 그 후로도 한동안 계속 들려왔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내가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불 속에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그 날 몸이 안 좋아서 학교에서 일찍 조퇴했던 참이었다. CD 안의 동영상은 급우들에게 들은 것과는 전혀 딴판인 것이었다. 그들이 말한 것은 훨씬 일반적인 음란물이었던 것이다. 어딘가에서 CD가 바뀐 것이 분명했다. 그 후 한 달가량 누나는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해명을 해보아도 속수무책이었다. 그 후 누나와 나의 관계는 서서히 회복되었지만 이전처럼 서로를 흉금 없이 대하지는 못하게 되었다. 우리 둘 사이에 존재했던 본질적인 무엇인가가 어긋나버린 느낌이었다. 나는 이러한 이야기를 박쥐에게 털어놓았다. 사실에 대한 가감 없는 솔직한 고백이었다. 털보와 점원도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들었다. 박쥐는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의 주름투성이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빛이 어려 있었다. 그는 양손을 마주대고 비벼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그곳에서 은색 실뭉치 같은 것이 생겨났다. 박쥐는 자신의 발 밑으로 몇 개나 그 실뭉치를 만들어 두었다. 박쥐가 손을 움직이는 것을 멈추자 직원이 다가가 실뭉치를 주워 통에 담았다.

“이걸로는 부족한데.”

그녀가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럼······?”

“조금 더 털어놓아 보세요.”

털보와 그녀가 기대감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크게 한 번 끄덕거리고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제가 자주 들르던 전자오락실의 잔돈교환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열여덟살쯤 되었을까요? 밖이라고는 나가본 적 없는 사람처럼 피부가 하얀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열여섯이었던 저는 수줍음 많고 전자오락을 좋아하던 사춘기 중학생이었습니다. 저는 그녀가 불의의 사고로 다리를 못 쓰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꽃다운 나이에 늘 어두운 전자오락실 구석에 박혀 TV나 보며 잔돈을 바꿀 리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언제나 담요로 가려져 있는 다리와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그늘은 이런 저의 이런 믿음을 부추기기에 충분했습니다. 저는 그녀를 보기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전자오락실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게임 실력도 나날이 좋아져 곧 500원만 있으면 하루 종일 오락실에서 시간을 때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락실 뒷문으로 빠져나오다가 저는 보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평소 불량한 것으로 잘 알려진 동네 형과 긴 키-쓰를 하고 있는 장면을 말입니다. 그녀의 손에는 미성년자로서 피워서는 안 될 담배까지 들려있었습니다. 저는 그녀의 다리를 보았습니다. 언제나 숄에 가려져있던 그 다리는 너무나 매끈하고 아름답게 스커트 밑으로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견딜 수 없었습니다. 다음 날부터 저는 그녀가 있는 오락실에 가지 않았습니다. 대신 언덕 위에 새로 생긴 크고 넓은 오락실로 옮겼죠. 저는 곧 화려한 게임들에 정신을 빼앗겨 그녀를 잊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아버지의 회사가 이전하게 되어 저희 가족은 그 동네를 떠나게 되었죠. 이것이 저의 초라한 첫사랑의 기억입니다.”

나는 말을 마치고 박쥐를 바라보았다. 그 생물은 이미 자신의 주위에 은색 실뭉치를 듬뿍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너무 배가 불러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표정이었다. 점원 또한 만족스러운듯 ‘충분하겠군요.’ 하고 말했다.

우리는 박쥐에게 안녕을 고하고 다시 긴 계단을 통과해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직원과 헤어진 우리는 다시 포장마차가 있는 곳을 향해 걸었다. 손에는 분유통을 닮은 은빛 통이 들려있었다.

포장마차 아주머니는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쳐놓은 상태였다.

“이제 기억만 넣으면 완성이야.”

우리는 가져온 통을 그녀에게 건넸고 그녀는 그것을 다른 재료들과 섞어 곧 먹음직스러운 고로케를 튀겨냈다.

“수고했어. 먹어봐.”

그녀는 털보와 나의 몫을 접시에 담아내었다. 늘 사다주기만 했지 직접 호메로스 식 고로케를 먹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것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그 맛은 몹시 먹먹하고 그립고 한편으로는 유쾌하면서도 눈물이 찔끔 나는 잘 파악할 수 없는 맛이었다. 어쩌면 ‘삶의 맛.’이라는 말이 그 맛에 어울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맛은 ‘그래. 살아가는 거야.’ 라는 다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쨌거나 맛있었다. 털보는 이미 두 개째의 호메로스 식 고로케를 입안에 집어넣고 있었다. 아주머니가 내게 ‘재주가 좋군.’ 하고 말했다. 그녀는 최소한의 비용만 받았다.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나는 그녀의 침대 맡에 고로케가 담긴 봉투를 놓아두고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소파로 가서 몸을 뉘었다.

다음날, 나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나는 주방으로 가서 두 명분의 복숭아 에이드를 만들었다. 평소에는 내 잔에만 듬뿍 넣었던 과즙을 그녀의 잔에도 듬뿍 넣었다. 나는 그것들을 들고 그녀가 있는 방으로 갔다. 방문을 열었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여전히 잠들어있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침대 맡에는 고로케가 담긴 종이봉투가 그대로 있었다. 커튼 틈새로 들어온 부연 빛이 그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잠시 동안 그 평화에 깃들듯 눈을 감았다. 그렇게 한동안 서 있던 나의 머릿속에 문득 어젯밤의 일들이 떠올랐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참을 수 없이 부끄러운 기분이 찾아왔다. 나는 종이봉투를 열어 고로케를 허겁지겁 입 안으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잠에서 깬 그녀가 ‘뭐 하는 거야?’ 하며 놀라서 물었다. 그러나 나는 먹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봉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마지막 호메로스식 고로케를 입 속에 쑤셔 넣었다. 목이 메어 복숭아 에이드를 벌컥 벌컥 들이키는 나를 그녀가 허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 몫의 에이드까지 다 마셔버리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 내게 그녀가 소리쳤다.

“이봐, 납치범 양반!”

(끝)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alh84002@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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