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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망각의 단검

2012.02.24 23:2002.24



[1]

  돛을 내리는 소리에 비로소 배가 정박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몇몇 선원들은 스페인어도 아니고 영어도 아닌 이상한 말을 구사했는데, 난 한참이 지나도 그 사투리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배는 분명히 멈추고 있었다. 나는 지난 두 달 동안 갑판 아래에서 거의 나오질 않았고 선원들과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으므로, 배가 카리브에 있는지 신대륙에 있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마침 더 이상 소금기로 끈적거리는 이불과 썩은 바닷물이 고인 선실의 냄새를 견딜 수 없어서 밖으로 나왔다. 항구의 불빛은 해무에 젖어 초점을 잃고 있었다. 흔들리는 불빛을 따라 내 마음도 위태로웠다.
  이제 그만 내릴까? 생각을 해보면 여기처럼 완벽한 곳도 없다. 무슨 땅인지도 어느 바다인지도 모르고 말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몇 주 동안 여기서 떠돌다가 지혜로운 랍비라도 만나서 내 고민을 털어놓은 다음 운 좋게 무역선을 얻어 타고 다시 남중국해 근처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의 고통이 조금은 치유될 것이다.
  배 위에서의 생활이 힘에 부치기도 하였다. 사실은 그게 땅을 밟고 싶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두 달 전 배에 오를 때에는 고행으로 마음을 다스려 보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런데 이제 육체적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중도 포기를 하고자 하면서도 핑계를 만들고 있는 나 자신이 사뭇 간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내리기로 결심하니 거침이 없었다. 이름 모를 항구도시가 눈앞에 있었고, 앞서 내린 선원들이 모두 다 얼굴이 새카만 무어(Moor)인이었음에도 나는 그 뒤를 따라 나섰다. 나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함께한 선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선장은 못내 아쉬운 얼굴이었으나 내 등을 두드리는 그의 손에 미련은 없었다.
  “인연이 되면 또 보세, 젊은 친구.”
  리스본의 부두에서 만난 그 선장은 갑판 청소를 하는 대가로 나를 배에 태워주었다. 동양인인 내가 동지중해 연안에서 무역을 하는 그 선장과 우연히 라도 다시 마주칠 일은 아마 없을 테지만, 콧수염이 소금에 전 뱃사람들은 아무리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도 설득력 있게 말하는 재주가 있었다. 나는 세월이 흐른 후에 어떤 신비로운 힘에 의해서 그 선장을 다시 만나게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로 작별인사를 나눈 건 배 위에서 친해진 인디언 노인이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배를 타고 있었다는 그는 기름먹인 가죽에 꽁꽁 싸 두었던 담배를 건넸다. 가끔씩 갑판에 기대서 나누어 피우던 것이었다.
  “영감님, 건강하시오.”
  나는 의례적으로 또 보자는 말을 덧붙이려다가 끝내 삼켜버렸다. 나에겐 선장과 같은 소년적 감수성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이별의 감정을 희롱하기에는 내가 지고 있는 마음의 짐이 너무 무거웠다. 노인은 나에게서 금세 시선을 거두었다.
  선착장에 내리자 이국의 하늘 아래로 계절풍이 불었다. 정박하고 있던 배들이 피곤한 듯 삐걱거렸다. 때는 초저녁이어서, 방파제를 건너온 노을이 연안의 가스등 불빛과 닿고 있었다. 안개가 짙게 깔려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뒤섞여 뿌옇게 보였다. 나는 의연히 서있는 남국의 나무 아래에서 노인이 준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 노인은 익숙하지 못한 담배 연기에 기침을 하는 나를 보며 껄껄 웃곤 했다.
  ‘여기는 어떤 왕이 다스리는 곳인가.’
  나는 애써 다른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와 나의 외로운 싸움이었기에 이길 수 없는 것이었다. 구름이 아내의 얼굴로 보였고 담배 연기가 아내의 머리칼 같았다. 젖은 공기 속에서 연기는 천천히 흩어졌고 마침내 모두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공허하게 사라지는 담배 연기를 보자 그녀가 세상을 떠나던 때의 기억이 떠올라, 나는 몇 모금 채 빨지도 못하고 귀한 담배를 꺼 버렸다. 나는 돈이 별로 없었다. 시장에 가서 당장 먹을 빵을 사고 나자 여관비가 부족했다. 하지만 불안하지는 않았다.
  내가 정체불명의 행상인을 만난 것은, 노숙할 곳을 찾아 비린내 나는 비탈길을 헤매고 있을 때였다. 그 늙은이는 아프리카의 주술사 가면을 쓴 채로 주택과 상점이 자리 잡은 골목에 앉아있었는데, 그의 앞에 펼쳐진 비취색 담요 위에는 이상하게 생긴 단검이 하나 놓여있었다. 곁에 있는 양피지에는 엉뚱하게 히브리 어인 듯한 글자로 약간의 설명이 붙어 있었다. 범상치 않은 그 모양새에 흥미가 동한 나는 가만히 그 행상인에게 다가갔다.
  일단 영어로 인사를 했지만 그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고,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상인들이 자주 쓰는 이탈리아 말로 인사를 하자 그제서 그는 나를 쳐다보면서 자리를 권했다. 그의 피부색은 어두웠고 억양은 다소 독특했지만 무어 인은 아닌 것 같았다.
  “이거, 파는 거요?”
  내가 묻자, 늙은 행상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시 한 번 그 단검을 살펴봤다. 불꽃처럼 휘어지고 꺾인 칼날은 터키 인들이 쓰는 반달모양의 도검을 연상시켰다. 굵고 뭉툭한 손잡이의 말미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무슨 단검이기에 이토록 특이합니까?”
  그러자 그는 아주 귀한 물건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듯 주위를 가볍게 훔쳐 본 다음에, 손가락으로 단검 옆에 있는 양피지를 가리켰다. 내가 글자를 읽지 못하자 그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것은 망각의 단검이오.”
  노쇠했지만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는 두 손으로 단검을 받쳐 들고서 내가 더 자세히 볼 수 있도록 앞으로 내밀었다. 때가 타고 칠이 벗겨진 손잡이를 보니, 오래된 골동품인 것 같았다. 하지만 칼날만은 아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망각의 단검?”
  의문스러운 눈으로 나는 직접 단검을 쥐어보고자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행상인은 재빨리 칼을 다시 내려놓았다.
  “조심하시오. 이 칼에 조금이라도 찔리면 기억을 잃어버리니까.”
  진지함을 과시하려는 듯이 가면 안쪽에서 그의 눈이 빛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 단검이 어느 이름 모를 왕조의 사연 많은 유물 쯤 되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나는 이 단검에 관한 이야기가 자못 궁금해졌다. 척 보아도 그 행상인은 시장에서 늙은 몸이었다. 이상한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도 그렇고, 알아볼 사람 있을 리 없는 히브리 어를 써 놓은 것도 다 고도의 상술일 터였다. 그는 돌멩이조차 성자의 유골로 둔갑시켜서 팔아치울 능력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을 잊고 몰입할 만한 흥밋거리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늙은 행상인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여전히 진지하고 차분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당신이 이 도시에 오게 된 것도, 그리고 골목길 구석에 있는 나를 찾아온 것도, 모두 이 단검이 당신을 불렀기 때문이오.”
  “말해 두지만 저는 돈이 없어요. 그냥 구경만 하는 겁니다.”
  너무도 확신에 찬 목소리였기 때문에 나는 한마디 쏘아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행상인의 입에서 맥 빠지는 푸념과 욕설이 튀어나올 거라고 예상했지만 뜻밖에도 그는 무덤덤했다.
  “단검이 당신을 불렀다는 건, 당신 스스로가 무언가 간절히 잊고자 하는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오. 뭔가 지워버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기억이 있소?”
  늙은 행상인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 없냐는 질문에, 나는 당연히 아내의 죽음을 떠올렸다. 그것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 괴상한 기행의 직접적인 이유이기도 하였다. 배 위에서도, 낯선 땅 위에서도 나는 하루도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었다.
  “날이 저물어 가니 내일 다시 오시오. 나는 이만 접어야겠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묻고 있는 나를 뒤로하고 행상인은 단검이 놓인 담요를 접어서 품에 넣었다. 내가 불러 세울 틈도 없이 그 노인은 골목길의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철수하는 타이밍마저 계산된 것이었다면 참으로 무서운 노인이었다.
  그 날 밤에 나는 악몽에 시달렸다. 하지만 이상하게 잠은 깨지 않아서 오전이 다 지나갈 때까지 가위에 눌린 채 소리 없이 신음을 해야만 했다. 아내가 죽던 밤이 재현되었다. 나는 정오를 알리는 성당의 종소리가 들릴 때까지 몇 번이고 저항할 수 없는 무기력함을 느끼며 몸부림쳤다.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초봄의 선선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등은 흥건히 젖어 있었다.
  마지막 하나 남은 인디언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나는 기억을 더듬어서 어제 저녁에 행상인을 만났던 시장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의 그 자리에 늙은 행상인은 송장처럼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던 단검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 것도 놓이지 않은 빈 담요만이 그의 앞에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물건이 팔렸습니까?”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을 불쑥 들이밀면서 내가 물었다. 그러자 행상인은 가면 너머로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똑바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미 주인을 만난 물건이니 파는 곳에 내 놓을 수는 없지”
  “돈 가진 건 없고, 옛날부터 지닌 반지 하나가 있는데 이걸로 되겠습니까?”
  끈질기게 상술을 펼치는 그 노인이 얄미워서 한 번 그를 떠보기로 했다. 그러자 행상인은 흥정을 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대뜸 품에서 천에 감싼 단검을 꺼내 내밀었다.
  “이건 주인을 찾아가는 물건이니 값을 매길 수는 없소. 다만 주인 될 사람은 이 물건의 내막에 대해서 알아야만 하오. 시간이 있다면 잠시 앉아서 이 늙은이의 말을 좀 들으시오.”
  평범한 노인이 아니라는 건 어제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던 바였지만 비싸 보이는 물건을 선뜻 건네 는 걸 보니 어딘가 수상했다.
  “장물이오?”
  “장물이라면 장물이지. 원래는 사람이 만질 물건이 아니니까.”
  그리고 행상인은 망각의 단검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행상인의 말에 따르면, 망각의 단검은 말 그대로 찔리면 기억을 잃게 되는 단검이었다. 이어진 설명은 신화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이 물건이 생겨난 건, 그 옛날, 우리들의 신이 아직까지 인간들의 기도를 들어줄 때였소. 태고에 인간들의 기도는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오. 하지만 인간들이 물질적인 진보를 경험하면서 기도는 아주 복잡해졌지. 그 중에 제일 많았던 것이 뭔지 아시오?”
  “부자가 되게 해 달라거나, 권력을 쥐게 해 달라거나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오. 제일 간절하고 제일 빈번했던 기도는, 자신들의 기억 일부를 지워달라는 것이었소. 신은 처음에는 사명감을 가지고 시간이라는 엄격한 잣대를 사용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억을 과거의 것부터 조금씩 지워 주었다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망각이라는 능력을 지닐 수 있게 되었소. 하지만 사람들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쉴 새 없이 자신의 기억을 지워달라고 기도했지. 세월이 흐르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머릿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기억을 지워달라는 기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특히 인류가 수렵생활에서 농경생활로 전환하였을 때를 기점으로 그러한 기도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소.”
  신앙으로부터 자유로운 나에겐 흥미 있는 이야기였다.
  “신이라 해도 기억을 일일이 지워주는 일이 매우 귀찮아졌겠군요.”
  “그렇지. 하지만 우리들의 신은 자신의 일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소. 인간들의 기억을 정기적으로 지워주지 않을 경우 끔찍한 결과가 발생할 테니까.”
  “모든 인간들이 미쳐 버리거나, 간신히 미치지 않은 인간들은 모두 신이 되겠지요.”
  만담을 하듯이 맞장구를 쳐 주자, 늙은 행상인은 눈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될 것이오. 사실 첫 번째는 별 상관없는 일이지만, 두 번째는 아주 큰일이지. 젊은이도 알다시피 우리의 신은 질투하는 신인데, 새로운 신이 나타나서 자신의 자리를 넘보게 된다면 어디 그게 될 법이나 한 일이겠소? 그리하여 뭔가 좋은 수가 없을까 하고 고민을 하던 신 앞에, 어느 날 대천사로 변장한 악마가 모습을 나타냈소. 물론 신은 전지하시므로 대천사가 악마라는 걸 간파하셨겠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오. 어쨌든 악마가 썩 괜찮은 조언을 했기 때문이지.”
  “그게 바로 이 단검이 탄생한 배경이군요.”
  “그렇소! 악마는 바로 인간에게 자신들의 욕구를 스스로 해결하게끔 해주자고 제안을 했소. 기도를 하는 대신, 단검으로 스스로의 살을 찌르게 하자는 거였지. 물론 신은 곧바로 계획을 실행에 옮겼고, 전능하신 우리의 신께서 망각의 단검을 만들어 내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소. 인간들의 기도가 매우 귀찮았던 신은, 처음에는 모든 인간에게 단검을 하나씩 쥐어줄 생각이었다오. 하지만 곧 생각을 바꾸어, 각 도시마다 단검 하나가 배당될 정도면 족하다고 판단했지. 인간들이 망각의 단검을 남용해서 전부 백치가 된다면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오. 생각해 보시오. 만약 당신이 신이라면, 몇 만 년 동안 지루하게 지켜보았던 인류문명의 발전을 처음부터 다시 구경하고 싶겠소?”
  “그러한 설명은 필수적이겠군요. 이 단검의 희소성을 역설하는…….”
  “젊은이가 아주 비뚤어진 심보를 가지고 있군. 내게 단검 하나 팔아먹자고 없는 신화를 꾸며서 이야기할 재주는 없소. 어쨌든, 신은 세상에 존재하는 도시의 수만큼 단검을 만들었소. 신은 이것을 악마에게 넘겨주어 세상에 뿌리도록 했지. 하지만 악마는 이 단검을 세상에 전달하지 않았다오. 악마는 모든 인간들이 미쳐버리거나 새로운 신이 등장하는 것이 재밌을 거라고 생각하고 신을 속였던 것이오. 모르긴 몰라도 그 악마의 이름은…… 그만둡시다. 그거야 성경을 뒤져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니까. 결국 악마는 모든 단검을 폐기해 버리고 신에게는 이를 세상에 전달하였다고 말했소. 전지전능하지만 그 사정만은 까맣게 모른 신은 악마의 말을 믿었지. 따라서 더 이상 인간들의 기도를 들어줄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 귀를 닫아 버렸고, 인간들의 기억을 지워주지도 않았소.”
  늙은 행상인의 이야기는 재미있었지만, 아직까지 나는 그가 단지 솜씨 좋은 장사꾼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모종의 비밀결사 수장쯤 되는 사람으로서 진짜로 신성한 유물을 홀로 계승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행상인은 내가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인간들이 기억을 잃어버릴 수 없게 되자, 여러 가지 부작용이 발생하게 되었소. 젊은이가 말한 대로 기억을 무한대로 쌓아가게 된 사람들은 다들 미치거나, 신이 되었지. 하지만 후자의 사람들도 엄격한 의미의 신이 될 수는 없었소. 전지하기는 했지만 전능하지는 못했으므로, 그들 역시 마지막에 가서는 예외 없이 미쳐 버렸다오.”
  “그게 언제쯤이지요? 역사에 그렇게 찬란했던 집단광기의 시대는 없었던 것 같은데요.”
  “박식은 오만을 수반하는 법인데 젊은이 역시 예외가 아니구려. 역사는 승자의 손끝에서 춤추는 까닭에 오늘날 기록이 없을 뿐이라는 걸 모르는가? 아아, 젊은이에게 내 주장을 강요할 생각은 없으니 원컨대 종교인을 쳐다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경멸하지는 마오.”
  “그럼 대체 승자는 누구입니까?”
  “물어 뭐 하오? 당연히 미치지 않았던 사람들이지. 인간들은 기억의 범람 상태에 어떻게든 적응을 하려고 노력했소. 대부분이 자살로써 평온을 얻었지만 극소수의 사람들은 각고의 노력 끝에 기억을 잃는 능력을 얻게 되었다오. 마치 세포에 돌연변이가 생기듯이, 그들은 자신들도 알 수 없는 연유로 인해 그러한 능력을 얻게 되었던 것이오. 바야흐로 망각이라는 것이 재능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가 도래하였소. 어떤 사소한 기억이라도 그것을 잃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 특별한 자로 취급되기 시작했지.”
  “전능하신 신께서도 그것마저 예상하지는 못하신 모양이군요. 가만 두면 될 것을 뭐 굳이 단검까지 만들 생각을 하셨을까요?”
  “데미우르고스(demiurgos : 조물주)께서도 피조물의 복잡성에 대해서는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신 것이오. 하지만 그러한 복잡성 역시 결국 그분이 창조하신 것이므로 이 늙은이의 설명은 신성모독이 아니라오. 하지만 불경스러운 건 사실이지. 젊은이가 무신론자라는 걸 신에게 감사해야겠군.”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장사꾼으로 늙으면 관상 보는 재주쯤이야 생기는 법이오.”
  장난스러운 나의 물음에 행상인은 껄껄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인디언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내가 성냥을 건네자 그는 불을 붙인 다음 이야기를 계속했다.  
  “요컨대 더 이상 신의 은총에 기댈 수 없게 된 인간들은 스스로 죽음을 택하거나, 스스로 기억을 잃는 수밖에 없었소. 망각이라는 돌연변이적 능력은 처음에는 뛰어난 몇몇 인간들에게만 부여되었지만, 인간은 언제나 그랬듯이 결국 조금씩 진화했지. 그래서 수 세기가 지난 다음에는 거의 대부분의 인간이 자유자재로 망각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또 수 천 년이 지난 다음에는 인간들 모두가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망각을 할 수 있게 되었소. 그리고 어느새 망각을 하지 않는 것, 즉 특출한 기억력을 가진 것을 재능으로 여기게 된 오늘날에 이른 것이라오.”
  “배경설화는 그 정도로 됐고, 이제 이 단검 이야기로 돌아가도록 합시다. 정리하자면 결국 이런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겠지요. 천사로 가장한 악마에 의해 죄다 폐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눈앞에 있는 이 단검만큼은 모종의 드라마틱한 사정으로 인해 끈질기게 살아남아 현존하는 유일무이한 망각의 단검이 되었다고. 더 짧게 정리하자면, 결국 이 단검은 한마디로 굉장히 비싼 물건이라는 거 아닙니까. 난 이 단검의 주인으로 정해졌으니, 그 돈을 내야 할 테고.”
  “별로 드라마틱한 사정은 아니오. 단검을 모두 다 폐기한 줄로만 알고 있던 악마는, 최근에 와서야 그가 실수로 단검 한 자루를 인간 세상에 떨어뜨렸다는 걸 알게 되었을 뿐이지. 지금 이 시간에도 악마는 남은 단검 하나를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대륙과 대양을 뒤지고 있다오. 조만간 내게로 찾아올지도 모르오. 이 단검을 지니고 있는 자는 항상 악마로부터 추적을 받아 왔으니…….”
  늙은 행상인은 일부러, 보물지도를 발견하고서 뒤쫓아 올 해적들을 무서워하는 뱃사람 마냥 벌벌 떨었다. 그가 장난을 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 잘 짜인 비극의 주인공처럼 행세하는 그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우습기도 하고, 인류의 원죄를 상징하는 단검을 품고 있는 자신이 범지구적 규모의 희생을 감수하고 있다는 뉘앙스가 느껴지는 바람에 나는 빈정대지 않을 수 없었다.
  “신도 속여먹는 악마가 그깟 단검 하나 아직 못 찾았을까요? 못 찾은 게 아니라, 그냥 그만 둔 거겠죠.”
  “몇 번 손에 넣은 적도 있었지만, 결국 잃어버리고 말았소. 악마들은 모두 용의주도하지만 의외로 덤벙대는 법이오. 그렇지 않고서야 그들이 신과 다를 게 뭐가 있겠소? 젊은이는 악마를 만나 본 적이 없어서 모르는 모양인데, 나는 젊었을 때 남미의 초혼제에서 악마를 실제로 봤기 때문에 잘 알고 있소. 혹시나 해서 충고컨대 자고로 악마를 만나려면 브라질의 주술사한테 달려가는 게 제일 빠른 법이오.”
  “히브리 어로 쓰인 성경에 등장한다는 악마가 어째서 삼바 리듬을 타고 나타난답니까?”
  “젊은이는 겉보기엔 영민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둔하구만. 음악에는 바벨탑이 필요 없다는 걸 모르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주문은 그 언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거기에 담긴 진심이 중요한 거요. 유럽의 연금술사들이 국적 불문하고 죄다 아브라카다브라만 외웠다 하더이까? 동그라미 안에 오망성만 잘 그리면 에스키모 민요로도 능히 바포메트(Baphomet)를 불러낼 수 있는데, 삼바 리듬 따위가 뭐 대수요? 마음만 먹으면 성경책 위에 그려진 꼬맹이의 낙서에서도 튀어나올 수 있는 게 악마들이오.”
  평생 시장에서 혀를 굴려왔을 터인 늙은이를 내가 혀로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만담을 그만두고 좀 더 논리적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어쨌든 새삼스럽게 이제 와서 단검을 찾을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악마는 인간들이 모두 미치거나 신이 되는 걸 구경하려고 했다면서요.”
  “본래 악마라는 족속은 오로지 재미를 위해서 살아가는 법이오. 그들은 재미를 위해서라면 집요하고 끈질긴 관심을 보이지. 재미를 위해서라면 감히 대천사로 변장을 한 채 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조차 망설이지 않는다오. 생각해 보오, 젊은이가 그 악마라면, 인간 세상에 떨어뜨린 그 한 자루의 단검이 어떤 인간에 의해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을지 궁금하지 않겠소? 그리고 혹시라도 그 단검을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방치되어 있다면, 그걸 가져다가 어떤 이유로든 고민을 하고 있는 인간 곁에 슬그머니 가져다 두고 싶지 않겠소?”
  “그건 그렇지만, 들고 다니면 악마가 쫓아오는 단검 따위를 누가 사려고 하겠어요? 찔리면 기억을 잃는다는 둥, 신이 만든 거라는 둥 하는 데까지는 괜찮았지만, 이건 좀 멀리 나가신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좋은 상술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내가 아직도 젊은이한테 이 단검 하나 팔아먹자고 이러는 것 같소? 내가 처음부터 마음먹고 혀를 놀렸다면 젊은이는 지금쯤 단검을 자기한테 팔아달라면서 내 바지를 붙잡고 애원하고 있었을 거요. 대금을 마련하기 위해 선박회사 금고를 털거나 왕족을 납치해 인질로 삼았겠지. 그러다가 결국 처형당했을 테고. 그런 사람들이 한 둘은 아니었소.”
  늙은 행상인은 짐짓 위엄 있는 목소리로 꾸짖듯이 말했다. 그의 엄포가 농담인지 진담인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새삼스레 민망해진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전에도 말했듯이 이 물건은 돈으로 사고파는 것이 못 되오. 다만 이제 주인을 만난 듯하여 내가 젊은이에게 넘겨주고자 함인데, 그 전에 이 물건에 얽힌 이야기를 대충 해 주어야 할 것 같아서 설명을 한다는 게 조금 길어진 것이오.”
  “이걸 그냥 주신다는 겁니까?”
  수를 써서 물건을 팔아보려는 상인과 한바탕 농을 나눈 다음 끝에 가서는 결국 돈 한 푼 쓰지 않고 툴툴 털고 일어남으로써 약을 올려 줄 계획을 가지고 있던 나로서는 허탈감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썩 괜찮아 보이는 단검을 하나 얻었다는 기쁨도 없지 않았다. 행상인은 거의 다 타들어간 인디언 담배를 돌바닥에 비벼 끄면서 말했다.
  “그렇소. 처음에 말했듯이, 젊은이가 이 단검에 이끌려 여기까지 찾아온 건 젊은이에게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기 때문일 것이오. 물론 이 단검으로 살을 찔러서 기억을 지워버리든지, 아니면 그냥 안고서 살아가든지 그건 젊은이 마음이오. 이젠 나도 이 고약한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 있어서 후련하오. 누구에게든 줘 버리고 싶었지만, 또 아무에게나 줄 수야 있나. 젊은이라면 현명하게 사용할 것 같으니 믿고 맡기겠소.”
  나는 조금씩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어느새 내 손에 쥐어져 있는 낡은 단검은 어딘지 모르게 예사 물건이 아닌 것 같았다. 단검에 홀린 듯, 나도 모르게 그만 진지한 얼굴로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살짝만 찔려도 기억을 모두 잃어버립니까?”
  “깊게 찔리면 찔릴수록 더 많은 기억을 잃게 되오. 칼날이 뼈에 닿으면 자기 이름을 잊고, 골수에 닿으면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도 잊게 되오.”

[2]

  나는 고민에 잠겨 먹는 것도 잊은 채 며칠을 보냈다. 내 손에는 항상 늙은 행상인으로부터 건네받은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칼자루 끝에 새겨진 짐승의 얼굴은 하루 종일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쏘아보고 있었고 나는 혹여 그 짐승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두려워 시선을 보낼 수 없었다. 눈이 마주치면 스스로를 찌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날씨는 점점 안 좋아져서 행상인과 헤어진 다음날부터 계속해서 비가 내렸다. 나는 어떤 날은 비만 간신히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 하루 종일 누워있기도 했고, 어떤 날은 언덕에 올라가 빗물을 삼키고 있는 깜깜한 바다를 한참동안 바라보기도 했다. 매일 밤마다 악몽은 더 심해져서 자다가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깨어나기도 했다. 열흘 째 되던 날, 나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단검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행상인의 설명으로 미루어 보면, 깊이 각인된 기억은 살가죽을 조금 찌른다고 지워지지 않을 터이다. 내가 아내에 관한 기억을 잊기 위해서는 모르긴 몰라도 칼날이 뼈를 긁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고통스럽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커다란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는 작은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법이 아닌가.
  하지만 단검을 사용할 장소는 나의 고향, 나의 집, 나의 침대 위가 아니면 안 됐다. 연고도 없는 낯선 이국땅에서 기억을 잃고 아침을 맞는다면 스스로를 추스를 수 없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도시를 떠나기로 했다.
  이름 모를 항구 도시는 안개로 나를 맞이하더니 떠나는 날에는 빗물로 배웅을 했다. 떠나기로 마음먹은 날에는 조금씩 빗줄기가 약해지기 시작했지만, 낮 동안에는 아직 배가 떠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으므로 온종일 부두가 한산했다. 나는 바다를 마주한 어시장 건물 앞에 앉아 주머니를 뒤졌다. 운 좋게 피우다 만 인디언 담배꽁초가 하나 남아있었다. 축축한 꽁초를 하염없이 바닷바람에 말린 후에 불을 붙였다. 고약한 냄새가 났다.
  저녁이 되어서야 나무로 된 선착장에 햇빛이 들었다. 하루 종일 구름 속에 숨어있던 해는 지친 듯이 수평선 아래로 잠기려 하고 있었다. 출항을 하려는 작은 배를 둘러보다가, 나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나를 이 도시까지 태워 주었던 늙은 선장이었다. 그러나 선장은 나를 보고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바다를 누비며 회자정리와 그 반대에 수없이 연마된 탓일 거라고 생각했다.
  “또 보는군, 젊은이. 인연이 닿았나 보군.”
  “어쩐 일로 다시 오셨습니까?”
  “날씨가 너무 안 좋아서 돌아왔네. 먼 길을 갈 때에는 날을 잘 골라야 하는 법이지.”
  “그럼 오늘은 출항하실 예정입니까?”
  “그렇다네. 비가 그쳐가는 것 같으니까. 자네도 여기서 볼 일을 다 봤으면 함께 가세. 자네만큼 갑판 잘 닦는 사람도 없다네.”
  “동쪽으로 항해하신다면 이번에도 신세를 좀 지겠습니다.”
  “서쪽으로 왔으니 갈 곳은 동쪽밖에 더 있겠나. 어서 건너오게.”
  나는 작은 보트에 몸을 실었다. 무어인 선원 몇 명이 뒤따라 탑승했고, 곧이어 사람들은 노를 젓기 시작했다. 작은 보트는 부두와 점점 멀어지면서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정박한 범선으로 다가갔다. 선원들이 모두 범선 갑판 위에 오르자, 커다란 배는 나무와 밧줄이 부대끼는 소리를 내면서 해가 있는 곳의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항구의 불빛들은 빗물에 번져 서툰 수채화처럼 뒤섞였다. 나는 멀어지고 있는 그 도시에서 보냈던 며칠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문득 담배가 생각나서 주머니를 뒤졌지만, 마지막 남은 담배는 이미 방금 전에 피워버린 후였다.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내게 말을 걸었다.
  “하나 피우겠소?”
  속내를 읽힌 것 같아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내게 배 위에서 담배를 건네주었던 예전의 그 인디언 노인이 서 있었다. 나는 까닭 없이 반가워 얼른 담배를 받아든 다음에 물었다.
  “영감님도 배에 계속 타고 계셨습니까?”
  그러나 노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 늙은이를 알고 있소?”
  “며칠 전 제가 이 배에서 내릴 때 담배를 좀 주시지 않았습니까. 저를 못 알아보시겠습니까?”
  담배를 흔들면서 설명을 했지만 노인은 여전히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한참을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나 싶더니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그는 당황하는 내 얼굴을 보고 호탕하게 웃었다.
  “나이가 들어서 건망증이 심하다오. 그래도 내가 담배까지 줬는데 젊은이 얼굴을 잊어버리겠소?”
  나는 노인의 얼굴에서 장난기를 알아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대수롭지 않은 골탕이었지만 오랜 기간 계속된 타지 생활로 면식 있는 사람이 아쉬운 처지였기 때문에 문득 서운한 느낌이 들었다.
  “성냥도 다 떨어졌으니 하나 빌려주시지요.”
  나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주머니를 뒤지는 노인으로부터 낚아채듯 성냥을 넘겨받았다.
  “기분 상했다면 미안하오. 하지만 요샌 정말로 깜박깜박 한다오. 선장 얼굴도 가끔은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있어.”
  “그러시겠지요.”
  나는 내심으로는 유쾌했지만 건성으로 대답했다. 노인은 여전히 웃으면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사실 선원들 얼굴 잊어버리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지. 더 중요한 건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내가 이 배에 얼마동안 타고 있었을 것 같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20년째 이 배를 타고 있소. 어디서 내려야 할지를 잊어버렸거든.”
나는 또 그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지만, 방금 전까지 웃음에 젖어 있던 그의 표정은 이내 굳어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석양이 가득 쏟아져 눈가의 주름은 모두 붉게 채워져 있었고 회색이었던 수염은 금양모피(金羊毛皮)로 변해 있었다. 긴 날숨을 따라 터져 나온 담배 연기가 습한 저녁 공기에 뒤섞여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뱃사람이 아니고서야 그 광활함에 위축될 수밖에 없는 무서울 정도로 긴 수평선을 쳐다보면서도, 그는 마치 자기 집 앞마당을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그 표정은 수평선을 모두 덮고도 남을 사연을 간직한 사람만 지을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사연이 무엇인지 물을 수 없었고 짐작할 수 없었지만 공감은 할 수 있었다. 짐짓 머나먼 수평선을 향해 의미 없이 던져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시선이 사실은 그 너머에 있는 자신의 고향을 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머나먼 그의 대지가 두 눈에 거울처럼 고스란히 비쳐 있었던 까닭이다.
  “오히려 내릴 곳을 잊기 위해서 배를 계속 타고 계신 건 아닙니까?”
  말을 맺자마자 나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노인은 입 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이 건망증을 보게. 내가 또 거꾸로 얘기한 모양이구만. 젊은이 말이 맞지.”
  노인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깊게 꺼진 눈가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단검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노인의 짐이 너무 무거워 보였고, 단검의 비밀을 나 혼자서 간직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만약에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허허, 그럴 수 있다면 예전에 다 잊고 이 배에서도 내렸겠지.”
  나는 품에서 단검을 꺼내 노인에게 보여주었다. 갑자기 눈앞에 날카로운 쇠붙이가 등장하자 장난기 섞여있던 그의 눈이 이내 가늘어졌다.
  “이 단검에 찔리면 기억을 잃게 됩니다. 믿을 수 없겠다면 악마가 이 단검을 쫓아서 우리 앞에 나타날 때까지 한 번 기다려 보도록 하지요.”
  그러나 노인은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동양의 민간신앙인가?”
  “정말입니다. 이 물건을 저에게 넘긴 행상인만큼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할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제 말을 믿으셔야 합니다.”
  “어째서?”
  “이 단검이 영감님의 유일한 구원이니까요.”
  고향을 떠나 먼 곳을 배회하는 자가 가지고 있는 아픈 과거라 하면 그것은 통상적으로 고향땅에서 오래 전에 발생한 모종의 비극적인 사건, 그것도 가까운 사람의 파멸이나 죽음을 수반한 사건일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가 그 사건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거나 애초에 그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일 터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나는 노인에게 일종의 동질감을 느꼈다. 그는 인디언이었고 나는 중국인이었지만, 머나먼 이국의 땅에서 또 다른 타지인과 동질감을 느끼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심지어 나는 그 노인이 품고 있는 과거가 무엇인지 알 필요도 없었다. 그것은 내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진심으로 노인을 구원하고 싶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나는 분명히 노인을 구원하고 싶었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대 그것이 내 의중의 전부는 아니었다. 내가 노인에게 단검을 권한 동기는 노인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 9할이었지만 나머지 1할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것은 내가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는 악마적 본성이었다. 바로 그 단검의 실효성을 검증해 보고 싶다는 비겁하고 음흉한 욕구가 바로 그것이었다. 스스로 피를 흘리는 게 두려웠던 것은 아니다. 어차피 나는 단검으로 뼈를 찌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무서운 것은 단검에 찔린 직후의 상황이었다. 기억을 얼마나 잃게 될 것인가? 아내에 관한 기억들뿐만 아니라 혹여 나의 이름마저 잊게 되는 건 아닐까? 더 나아가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마저도 잊게 되는 것은 아닐까? 잊고자 하는 부분만 지워내기 위해서는 얼마나 깊이 찔러야 하는 걸까? 혹시 찌르는 순간 눈앞에 악마가 나타나서 나의 영혼을 거두어 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면 이제 와 일신을 걱정한다는 것도 희극적인 일이었다. 애초에 내게 악마가 거두어갈 영혼이 남아있기나 할까?
  “젊은이의 말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오. 나도 이젠 지쳐가던 참이었소. 이거야 말로 가장 확실한 방법이 아닌가. 다만 이 늙은이도 인간이다 보니, 약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오.”
  노인은 단검을 받아 쥐면서 이야기했다. 노인의 그 말을 나는 당시에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믿어주신다니 다행입니다.”
  노인이 별다른 의심 없이 단검의 효력을 믿는 것이 반가우면서도 신기했다. 어차피 우리는 지금 이름조차 모르는 바다 한가운데를 표류하는, 백인과 무어인으로 가득 찬 범선 위의 인디언과 중국인이었다. 이 상황에서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뱃머리의 조각상에 대고 절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노인은 미신을 믿는 선원으로 가득찬 배 위에서 20년을 보냈으니, 믿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지도 몰랐다.
  노인은 잠깐 뱃머리에서 수평선 너머를 바라봤다. 그는 내가 넘겨준 단검을 오른손에 꼭 쥐었다.
  “고맙네 젊은이. 이젠 해방될 수가 있겠어.”
  노인이 뒤를 돌아보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단검의 끝을 자신의 목젖으로 가져갔다. 그 순간 나는 단검에 관한 노인과의 짧은 대화에 오해가 개입되었음을 깨달았다. 노인은 단검으로 스스로를 찌른다는 설명을 자살의 의미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내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달려갔을 때에는 이미 단검이 노인의 힘없는 목덜미 속으로 파고들어간 후였다. 솟구친 피가 갑판과 난간을 뒤덮었다.  

[3]

  비는 그쳤어도 구름은 밤이 되도록 걷히지 않았다. 달이 있었지만 바싹 말라붙은 초승달이어서 파도조차 비추지 못했다. 별들도 구름에 덮여서 하늘은 온통 먹빛이었다. 먼 바다로 나오자 육지의 불빛도 보이지 않았고 수평선은 어둠에 지워졌다. 하늘과 바다는 하나로 합쳐져서, 갑판에 서있어도 배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인지 심해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것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노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뱃사람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 노인이라면 언제든 제 목을 찌르더라도 놀라울 게 없다는 눈치였다.
  나는 노인의 핏자국이 묻어있는 뱃머리에 서서 초승달을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에 내닫는 습기 찬 바람과 물살 가르는 소리 덕분에 나는 배가 꽤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서쪽으로 기울어가는 초승달은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얼음을 날카롭게 갈아놓은 듯한 그 초승달이 마치 내 가슴에 박혀있는 아내에 대한 기억처럼 답답하고 무겁게만 느껴졌다.
  “심란해서 잠이 오질 않는 모양이지?”
  나침반을 들고 나타난 선장이 내 옆으로 다가오면서 말했다.
  “그 노인은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이었으니 그다지 신경 쓰지 말게. 오히려 자네가 자유를 준 거야.”
  그는 눈으로는 한 손에 든 나침반을 노려보면서 다른 손에 든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그것은 술이 아니라 식초를 탄 물이었다. 지난 정박지에서 사과나 라임을 구하지 못하면 선원들은 종종 그러한 임시방편으로 괴혈병을 예방하였다.
  “이 단검에 관한 이야기는 들으셨습니까?”
  나는 단검을 꺼내 뱃머리의 난간 위에 올리면서 물었다.
  “노인이 죽고 자네가 선원들에게 상황을 설명할 때 이야기하는 걸 나도 들었네. 악마가 따라다니는 망각의 단검이라면서?”
  “선장님은 그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믿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저는 믿습니다. 믿을 수밖에 없구요.”
  그러자 선장은 술잔을 내려놓고 웃음을 지었다. 식초를 마시느라 찌푸린 얼굴로 미소를 짓자 우스꽝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뱃사람이 미신을 좋아하긴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그럴 듯한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는 미신일 때 하는 이야기이네. 뱃사람들은 항상 속을 준비가 되어 있고 스스로도 그걸 잘 알고 있지만, 미신이 터무니없는 내용이면 맥이 다 풀리고 만다네. 그것만큼 뱃사람들이 싫어하는 것도 없지. 그건 그렇고, 뱃사람도 아닌 자네가 그렇게 믿게 되었다니 그걸 자네에게 팔아치운 사람은 정말 혀 놀림이 대단한 모양이군.”
  “돈 받지 않고 넘겨주었는데요?”
  “그렇다면 사람을 죽인 흉기라서 급히 처분을 할 필요가 있었던 모양이지. 증거를 없애려고 말이야.”
  “웬걸요. 이틀 동안 이 단검에 관한 전설을 주구장창 이야기하던데요.”
  “그런가? 그렇다면 자네에게 단검을 준 그 사람이 바로 악마인 모양이지.”
선장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악마는 오로지 재미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족속이다>라는 행상인의 말이 떠올라,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했다. 정말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게 정말 기억을 지우는 단검이라면, 그 노인은 죽기 직전에 모든 것을 다 잊고 편안하게 떠날 수 있었겠군. 자네도 언젠가 그 단검으로 기억을 지울 생각이었겠지? 그렇다면 그 노인에게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느냐고 물어보지 못한 게 참으로 아깝겠구만.”
  선장은 별다른 의미 없이 한 말이었지만 나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노인께서 뭔가 깊은 사연을 갖고 계신 것 같기에 도움을 드리고자 단검을 보인 것인데 갑자기 그걸로 목을 찌르시니 얼마나 당황을 했는지 모릅니다.”
  “자네는 그 단검이 기억을 지우는 효력이 있다고 노인에게 설명을 했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선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 노인은 자네의 말을 일종의 은유라고 생각을 한 모양이네. 말하자면 자네는 노인에게 단검을 내밀면서 죽어야만 기억이 지워질 거라고 이야기를 한 셈이지.”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 아주 깊숙이 찌르기만 한다면야, 기억을 지우지 못하는 단검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목숨까지 함께 거두어가니까 문제이지요. 제가 너무 경솔하게 행동을 한 것 같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자네를 탓할 생각은 없네. 그 노인은 누구든지 동기를 마련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거야. 20년 동안 내가 지켜봤으니 잘 알고 있네. 그 노인이 바보스러울 정도로 융통성이 없었지.”
  선장은 남은 식초물을 한 모금 마신 다음 내게 내밀었다. 나는 한 모금을 삼켰다.
  “뱃사람들이 미신을 믿는 건, 정말로 믿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네. 옛날에 뱃사람들이 먼 바다로 항해를 할 수 있게 되면서 괴혈병을 처음으로 앓기 시작했을 때, 그 원인을 아무도 몰랐지. 처음에는 배 위에서 굶어 죽은 선원들이 저주를 내린 거라고 생각을 했어. 그래서 주술사를 불러다가 부적을 쓰기도 하고 굿을 하기도 하고, 제물을 바치기도 했다네. 해적들은 괴혈병이 전염병인 줄 알고 잇몸에서 피가 나는 선원들은 모조리 다 죽여서 바다에 던지기도 했지. 그러면 조금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심리적인 효과였다네. 뱃사람으로서 이런 말을 하면 좀 우스울지 몰라도, 나는 미신을 믿지 않는다네. 미신은 우매한 자들에게 심리적인 안정을 줄뿐이지, 눈앞에 벌어진 문제를 진짜로 해결해 줄 수는 없다네.”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악몽 같은 과거를 잊기 위해서는 그 노인처럼 목숨을 끊는 수밖에 없을까요?”
  “잊고자 하는 것을 잊는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네. 그저 칼로 자기 살을 찌르고 벤다고 해서 자신의 과거가 씻어진다는 건 있을 수 없어. 나는 그 노인의 행동을 이해하네. 그는 자네의 말을 믿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과거를 지우는 값으로 스스로의 목숨을 내놓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네. 나는 자살을 한 자에게 손가락질부터 하는 부류가 아닐세. 혹자는 남겨진 사람들을 저버리고 무책임하게 죽음으로 도피를 했다면서 비난을 하지만, 자살을 한 자의 고뇌는 남겨진 자의 슬픔에 비할 바가 아니므로 꼭 그렇게 생각할 것도 아니지. 과거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서 죽음을 선택했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네. 다만 우린 저울질을 할 때에 신중할 필요가 있어. 양쪽 접시에 반드시 올라가야 할 것들만 올리는 것, 그걸 제대로 하지 못하면 섣부르게 죽음에 호소하게 되지. 하지만 힘든 상황이 오면 사람들은 판단력이 흐려지고 정신력이 약해지기 때문에 언제나 정확한 저울질을 할 수는 없다네.”
  “죽은 후에는 후회를 할 수도 없고 후회를 해도 돌이킬 수 없으니, 지난날의 저주스러운 기억으로부터 도망을 치면서 살까 아니면 영면을 택할까 하는 고통스러운 고민이 끝나지를 않습니다.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생각하지만, 만에 하나 이 단검이 정말로 기억만을 지워준다면야 그것보다 더 좋은 건 없지 않겠습니까? 이 단검을 알지 못했을 때라면 몰라도, 이제 알게 된 이상 저는 죽을 수는 없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자네가 고향에 도착해서 그 단검으로 스스로를 찔러보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 단검이 정말로 고통스러운 과거의 기억만을 지워준다고 하더라도, 그 후에 자네에게는 무엇이 남을 것 같나?”
  “당연히 안식이 오겠지요. 평안한 나날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네. 안식의 다른 말은 <지나간 고통에 대한 기억>이라네. 자네가 고통스러운 과거를 잊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던 수많은 세월들이 통째로 사라진다면, 자네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를 않아. 이 단검은 자네의 고통을 지울 뿐만 아니라, 자네가 고통을 겪었다는 기억마저도 흔적 없이 지울 것이 아닌가?”
  “하지만 저는 지금 너무 힘이 듭니다.”
  “지금의 자네는 고통스러울 것이네. 그러나 자네가 지금을 극복하고 나면 진정한 의미의 안식이 자네를 찾아올 거야. 나는 자네의 아픈 기억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그것이 과거에 있었던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네. 그리고 자네는 나보다 더 오랫동안 살겠지. 강가의 모래알 같이 많은 것이 사람의 날이니 시간이 흐르면 어떤 상처도 조금씩 치유가 될 걸세.”
  선장은 내 어깨를 두드린 후에, 술잔을 들고 뱃머리를 떠났다. 며칠 전 배에서 내리는 나를 배웅하며 등을 두드렸던 그 손길과 똑같았다. 왠지 그는 내가 이 단검을 안고서 다시 배로 돌아올 것을 예상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이 단검이 정말로 악마가 찾는 망각의 단검이라면, 나는 이 단검으로 스스로를 찌름과 동시에 고통스러운 기억을 모두 잊고 잠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눈을 뜬 후에는 처음 보는 단검을 누군가에게 팔거나 어딘가에 버릴 것이다. 그 후에 나는 얼마간 평온하게 생활을 하다가, 또다시 깊은 고뇌에 빠지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 고뇌가 무엇이 될지는 모르지만, 선장의 말대로 사람의 날은 수업이 많으므로 나는 죽기 전까지 분명히 또다시 죽을 것 같은 고통과 번민에 빠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때 나는 분명히 그 고뇌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니, 그것은 내가 이미 한 번 도망을 쳤고 그로 인해 깨우칠 기회를 갖지 못한 까닭이다. 또다시 방황을 하게 될 것이고 만약 악마가 단검을 손에 넣었다면 나에게 슬며시 접근해서 다시금 단검을 내 손에 쥐어줄 터이다. 천치처럼 평생 동안 도망만 치면서 반복하여 자신의 몸뚱이를 찌르는 인간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만큼 재밌는 게 또 어디 있겠는가?
  어쩌면 나는 지금 이미 그 과정을 반복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선장의 말처럼 나에게 이 단검을 넘겨준 행상인이 정말 악마였다면 말이다. 나는 또다시 등줄기가 오싹하여 단검을 꺼내들고 두려운 마음으로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전혀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던 초승달은 어느새 수평선 아래로 모습을 감춘 후였다. 마치 나의 과거 그 자체 같아 밉상스럽게만 보였던 달이 사라지자 뜻밖에도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기억도 역시 나의 일부였다. 그것을 도려낸다고 해서 죽은 아내가 살아서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망각은 아무 것도 해결해 주지 못할 것이다. 견뎌내지 못하면 선장의 말대로 영원히 안식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배 위에서 나는 홀로 바다와 맞섰다. 사방에는 검은 하늘과 검은 수평선뿐이었다. 몸은 배를 따라 위아래로 넘실대는데, 나를 흔드는 것은 그 규모만큼이나 두려운 거대한 대양 그 자체였다. 그러나 나는 몇 시간이나 어둠을 노려보며 그러한 흔들림에 몸을 맡겼다.
  희미한 빛이 수평선을 따라 퍼지기 시작했을 떄, 나는 다시 고개를 떨어뜨려 단검을 쳐다보았다. 나는 단검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가늘게 떨면서 울부짖고 있었다. 마음이 돌아선 주인을 향해 마지막으로 발버둥을 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면 그것은 모두 나의 환각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결심을 더욱 공고하게 할 뿐이었다.
  하늘은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이제 뱃전에 부서지는 파도와 머나먼 수평선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나는 천천히 단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조금씩 새어나오기 시작하는 수평선 너머의 햇빛을 향해서, 온 힘을 다해 단검을 던졌다. 햇빛이 배를 정면에서 비추었기에 눈이 부셔서 앞을 제대로 쳐다 볼 수 없었고, 파도 소리가 너무 거칠었던 탓인지 단검이 바다에 빠지는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다만 그 단검이 나를 영원히 떠난 것은 분명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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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제목 날짜
가작 우주 시대의 고찰 2012.10.20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2.08.3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1 2012.07.27
우수작 아랫집 남자가 매일 저녁 같은 시간 담배를 피운다 2012.07.27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3 2012.06.29
가작 멀더, 스컬리를 찾지 말아요 2012.06.29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3 2012.05.25
우수작 별의 끝과 시작을 이어서 2012.05.25
가작 육아 스트레스 2012.05.25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2.04.27
가작 되살아나는 섬1 2012.04.27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6 2012.03.30
가작 12광년의 고독 2012.03.30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3 2012.02.24
가작 망각의 단검 2012.02.24
가작 영구평화론 2012.02.24
가작 불멸에 대하여 2012.02.24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4 2012.01.27
가작 곶자왈에서 2012.01.27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1 2011.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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