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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어서 그런지 분량이 적은 달이었습니다. 최근 사회 분위기 탓인지 계층의 불균형이나 박탈감, 인간의 가치 등에 대한 주제가 눈에 띄는군요. 이번 달에는 무거운 주제나 흥미로운 소재를 등장시킨 글이 많았지만, 그에 비해 튼튼한 얼개가 많이 아쉬웠습니다. 새해에 더 발전된 글로 만나뵙기를 기대해 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03호에서는 우수작 없이 가작으로 kuchiblue님의 ‘그가 기울어졌다’를 선정하였습니다. 더욱 건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11월 16일부터 12월 15일 자정까지 올라온 총 10편의 글 중 심사대상이 된 글은 5편이었습니다. 심사대상에서 제외된 작품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분량미달: 회한의 궁정 (먼지비, 원고지 40매), 아이러니 (쿼츠군, 원고지 33매), 게이트에 이르는 이치(윤소아, 원고지 53매), 안녕 하루 (너구리맛우동, 원고지 40매)
2) 해외번역작: 미아(매리 앨리노어 윌킨스 프리먼 작, 구자언 옮김)



배달의 기수 강필중 by 빈군
A: 본인이 하고자한 이야기를 충분히 잘 풀어내어 전달했더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많이 남는 글입니다. 이 이야기의 대칭축은 강필중과 젊은 의사입니다. 두 사람은 계층의 차이로 대비되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패자와 모든 것을 얻는 승자가 되는 듯이 보입니다. 이러한 과정에 기득권에 대한 저항의식이 아닌 패배의식이 놓임으로서, 이야기의 귀결은 희망이라기보다 분노로 흘러가게 되지요. 전반부에서는 여자친구와 강필중 사이에 일어나는 심리적인 사건에 초점을, 후반부에서는 외부사건인 전염병에 초점을 두면서 두 사람이 관계를 외부사건과 이어가면서 확대하는 듯이 보이지만 얼개가 좀 더 자연스러웠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연애감정과 배신이 전염병과 관련된 사건과 자연스럽게 이어져야 할 것 같은데, 그저 과거에 그런 사이였다는 것 이상의 얼개가 없어 보이는군요. 그래서 다만 가진 것이 없는 강필중을 여자친구마저 잘난 놈에게 빼앗긴 철저한 패배자로 만들고 싶은 설정 이상이 아닌 점이 아쉽습니다. 또한 대화를 따옴표 안에 넣지 않고 처리한 특별한 이유를 찾을 수 없어서 고개가 갸웃거려지는군요.


B: 글을 읽고 난 다음의 느낌은 주인공이 참 운도 억세게 없는 불쌍한 사람이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작가분이 의도한 것이 그것이었을까요. 초반에는 여자친구의 어머니의 ‘생명의 은인’ 이었던 자신이 의사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면서 여자친구 역시 의사에게 가 버리는 상실이 그려지고, 후반부에서는 전염병의 확산을 막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지만 본인은 백신 접종이 늦어져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채로 죽어가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군요. 그가 전염병에 감염된 것이 다름아닌 그 옛 여자친구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는 것이 비극을 더욱 극대화합니다. 결과적으로는 가진 것 없이 잘난 여자를 사랑했다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남자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되네요. 주인공의 심리에 밀착해서 그의 상실감과 좌절감을 생생하게 그려낸 솜씨는 압권입니다.
다만, 이야기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면서 작가가 의도한 것이 정말 어느 쪽이었을까를 생각하게 합니다. 중심 사건 두 가지가 똑같은 무게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쉽네요. 오히려 후반부의 전염병이 확산되어가는 상황에 무게를 주고 여자친구와의 앞 사건을 좀 더 간단하게 다루었으면 어땠을까요. 그렇게 하더라도 강필중의 비극은 충분히 잘 그려졌을 것 같습니다.


가치의 기준 by 이정도
A: 글의 분량에 비해 주제를 명확히 드러내지 못한 점이 매우 아쉽다 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길게 이어져 가지만, 주제와 관련이 없는 무의미한 대화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많아서 단편에서 굳이 이렇게 대화를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 의문스러워지기도 합니다. 글의 주제는 ‘인간의 가치’로서 매우 무겁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가치가 ‘성적 가치’로 흘러가는 바람에 그에 대비되는 남자의 가치를 묻는 질문에서 무거운 주제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군요. 게다가 전반부 대화에서 대부분의 분량을 사용하고, 후반부에 아내가 등장하면서 나머지 이야기를 후다닥 전개해서 끝내버린 것은 너무 성급하고 손쉬운 것은 아닌지요?


B: 사채업자가 도박 중독 환자에게 돈을 받으러 나타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돈을 내 놓으라는 협박 후에 갑자기 전화를 해서 1억을 빌려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내라고 하지요. 세대교체의 압박감을 산만하게 늘어놓더니, 돌연 돈 대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라는 철학적인 과제를 던집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별거중인 아내와 한 번 자게 해 주면 빚을 탕감해 주겠다는 제안을 하는군요.
비슷비슷한 내용의 대화가 압축 없이 산만하게 이어지다보니 원고지 90매 정도의 단편 소설인데 길다고 느껴집니다. 사채업자의 대사는 TV나 연극에서 한껏 폼을 잡고 말할 대사처럼 힘이 들어 있지만 그런 대사가 이어지다보니 효과가 떨어져 버리지요. 주인공이 장기 밀매에 돈을 빌릴 곳까지 없어진 인생 막장이라는 것도 주인공의 독백이나 서술에서가 아니라 사채업자의 입을 빌어서 나옵니다. 이런 긴장감 없는 글에서 아내가 사채업자와 잘 것인가 말 것인가의 긴장감이 살아날 수 없죠. 주인공 1인칭의 글인데도 주인공의 심리는 치밀하지 못하고 사채업자의 대사는 산만하며, 아내의 대사와 행동은 인형처럼 현실감이 떨어집니다.
단락 단락마다 ‘나’의 기분과 주변의 상황을 덧붙여 보시면 어떨까요. 그러면 이 글이 얼마나 대화에 의존하고 있는지, 대사가 얼마나 과다한지 보일 것 같은데요. 필요 없는 대사를 과감히 압축하시고, 주인공을 포함한 인물들의 심리, 주변의 상황, 사건에 좀 더 집중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재귀공방 by 윤소아
A: 파종, 씨앗, 미래간섭 등 흥미로운 단어가 등장하면서 방대한 설정의 일면을 엿보게 합니다. 그러나 설정이 충분히 풀어지지 않아서 이러한 소재들이 어떻게 작용하고 서로 연관되어 지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군요. 설정에 대한 설명이 충분히 풀어졌더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설정이 인물이나 이야기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 점도 아쉽습니다. 오히려 이 글의 핵심은 천재급 아니면 절대동안, 노력형 준천재인 등장인물들의 소개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받습니다. 매력적인 인물에 압도되지 않고 즐기면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도 작가의 몫이겠지요.


B: 거대한 세계의 일부를 맛본 것 같은 단편이었습니다. 미래인지능력과 미래간섭능력을 사용한 ‘파종’이라는 설정이 신선합니다. 다만 천재이며 자신의 연구를 계속하고자 하는 열정에 가득한 주인공 신카르노와, 그들을 질투하는 동료들, 주변의 배경인물들이 지나치게 평면적인 것이 아쉽군요. 세계의 설정이 제대로 이야기에 녹아들지 못해서 마지막까지 ‘파종’이 무엇인지, ‘씨앗’이 무엇인지 독자가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도 아쉽습니다. 탄탄한 묘사와 안정적인 서술이 매력적인 글입니다만, 계속해서 독자의 의문은 풀리지 않고, 신카르노는 그 의문을 덮어둘 정도의 매력적인 주인공은 아니군요. 천재를 질투한 주변인물들은 많은데 그들 모두에게 초연한 신카르노는 인간적으로 매력이 없습니다. 신카르노만의 독특한 개성이 있다면 꼭 인간적이지 않아도 매력적인 주인공일 수 있겠습니다만, ‘천재’라는 것만으로 인물이 매력적이 되지는 않지요. 자신이 구현한 세계와 설정을 독자에게 어떻게 다가가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덮어씌우기 by 강민수
A: 이야기 자체는 썩 신선하다고 할 수 없지만, 구체적인 묘사나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전개로 인해 독자들이 수월하게 읽을 수 있는 글입니다. 그러나 (   ) 속에 불필요한 설명이 들어가는 형식 등은 완결한 문장으로 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합니다. 소설이라기보다 인터넷 기담 서술의 발전형태로 느껴지는 것도 조금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B: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C는 자신의 범죄를 숨기기 위해 연쇄살인사건의 하나로 자신의 사건을 위장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에게 들키고 맙니다. 이 아이러니는 자신이 죄를 덮어씌우려고 했던 연쇄살인범의 죄 전체를 자신이 덮어쓰는 상황으로 전개되어 버리지요. 다수의 범죄를 저지른 살인자가 덮어씌우는 솜씨는 우발범죄 1건의 C보다 훨씬 치밀하군요. 자신이 덮어씌우려고 했던 죄를 더 크게 덮어쓰게 되는 아이러니가 제목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다만 이런 상황이 너무나 평이하게 서술되었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C가 우발적으로 살해하게 되는 상황 뒤에 사건을 위장하는 동안, 그리고 자신이 연쇄살인마로 몰리는 상황이 전혀 긴장감 없이 다루어지고 있네요. 보다 C나 R의 심리에 밀착했다면 더 흥미로운 글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가 기울어졌다 by kuchiblue
A: 택배박스에 담긴 배우자들에 대한 추억이나 기억 혹은 욕망 등 복잡한 상념이 지진이나 바람 등으로 실체화 되어 나타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다채로운 시도가 가능한 글이고, 다소 서툴게 주제를 다루긴 하지만 작가가 주제를 명확히 알고, 그것을 향해 꾸준히 나아가는 점에서 많은 가능성을 가진 글이라고 하겠습니다. 다만 글이 조금 더 덜 산만하였으면 좋겠고, 대화에서 어느 것이 누구의 말인지 구분할 수 있도록 문법을 지켜서 정확히 표현하면 어떨까 합니다.


B: 현실의 배경으로 바람과 지진이라는 환상적인 요소가 개입되는 상황이 매력적입니다. 아내가 집을 나간 남편의 추억 속에서는 바람이 불고, 애인과 헤어진 ‘나’의 세계에는 지진과 기울어짐이 있습니다. 자신의 상황을 직면하지 못하고, 상황을 해결할 수도 없는 ‘나’와 ‘남자’의 세계가 만나면서, 1층의 방은 돌풍과 지진을 함께 맞이하지요. 그제서야 두 사람은 함께 눈물을 흘리고, 자신들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환상이 마무리되고, 텅 빈 택배가 도착하면서 ‘나’ 역시 현실이 ‘기울어지는’ 대신 남자친구의 얼굴이 ‘기울어지는’ 환상을 마지막으로 봅니다. 일상 속의 충격적인 사건이 환상으로 상징화되고, 갈등이 해결되는 과정이 신비롭게 그려졌습니다만, 다소 산만한 서술, 대화의 주체의 모호함 등의 단점이 두드러지게 눈에 들어오는 글이기도 합니다. 감수성 풍부한 묘사와 서술이 등장인물의 개성과 만날 수 있다면 더 매력적인 글이 되지 않을까요. 건필을 기대합니다.


103호 독자 우수단편 가작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거울 독자우수단편에 선정되신 분들께는 책을 한 권씩 보내 드립니다. euseoha @ gmail. com 으로 우편물 수령할 주소, 성함, 전화번호 (택배 발송시 필요)를 보내 주세요.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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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uchiblue 11.12.31 15:09 댓글 수정 삭제
    정말 감사합니다^^ 더욱 더 건필하겠습니다 2012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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