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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채취선

2011.11.25 23:4811.25

레지나는 귀에 꽃은 연필을 만지작거리며 지금까지 괴발개발 써 놓은 기획노트를 검토하는 중이었다. 연필은 일종의 과시였다. 혹은 그녀의 아버지가 이름 높은 지구의 토목기사출신이고 그녀에게도 엔지니어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싶은지도 몰랐다. 귀에 걸어놓은 연필이라는 것은 그런 진부한 상징이었고 토드가 보기에도 그냥 액세서리였다. – 토목기사들도 휴대용 태블릿을 쓴다 - 기획노트라는 것도 어차피 필름이지 종잇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연필이 사용될 때가 다가올 것이다. 레지나의 계산에 의하면 문명의 이기를 버린 클래식한 상황이 연출될 테니까.

“괜찮아 보이지?”

레지나가 토드를 보면서 자신의 기획노트를 보여줬다. 어차피 낙서처럼 이리저리 갈겨써서 뭔 내용인지 반도 못 알아볼 지경이었지만 토드는 그냥 고개를 끄덕거렸다. 레지나는 당연하다는 듯 웃고는 저 멀리 스카이라운지 건너편에 희미하게 빛나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페이스 터미널에서 보는 태양은 말 그대로 콩알만큼 작았다. 레지나에게 있어서 이렇게 멀리까지 우주에 나와본 적은 이번에 처음이었고, 경험에 있어서는 토드도 오십 보 백 보였다.

“30분 뒤에 채취선하고 미팅이야. 그때부터 찍는 게 어때?”

“좋아. 선장하고 먼저 합의를 한 거야?”

“아직, 동시에 하는 거지. 진짜 날것 같은 맛이 있어야지. 다큐는.”

레지나의 톡톡 튀는 말투와 특유의 성조는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한산한 시간대에 왕래도 드문 화물 터미널의 몇 안 되는 인원들도 그녀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자신만만한 어조, 그리고 불굴의 추진력은 그녀를 다루기 힘들고 거친 프로듀서라는 명성을 가져오게 만들었다.

‘실력이 있으니까.’
토드의 생각마냥, 그녀는 능력을 과대 포장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컨셉을 잡으면 절대로 현장에서 타협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루나(LUNAR)TV의 프라임타임을 2년 넘게 석권했던 것 아닌가. 물론, 그녀의 얼굴과 기압복에 가려진 탱탱한 엉덩이도 남자들이 그녀를 주목하는데 일조를 하게 만들었지만 그건 엄밀히 말해 [부가효과]였다.

토드 맥칼리스터와 레지나 한은 환상의 키스톤 콤비였다. 뛰어난 기획력과 환상의 연출력, 그리고 뛰어난 영상미. 수십억의 시청자가 어린 가수와 저급한 포르노에 찌들어 있다 해도 영상전파에서 메시지를 찾는 사람들은 늘 수요가 들끓었다. 다큐멘터리. 시사대담, 품격 있는 여행정보 등등 레지나가 루나TV의 척추를 세웠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모든 사람들과 직원들이 최연소 부사장으로 올라설 것이라고 믿었으니까, 최소한 1년 전까지만 해도.

“저기 있군.”

레지나의 가벼운 발걸음을 쫓으며 토드는 디지털 카메라를 어깨에 둘러멨다. 묵직한 중량감이 갈빗대까지 느껴졌다. 영상원을 졸업한 이후 한번도 만져 본 적 없는 구닥다리 물건이었다. 자신의 동료는 이미 터미널 끝의 한적한 곳에서 두 명의 사내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고 토드는 촬영버튼을 누르고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경계하는 표정의 훤칠한 키의 사내 두 명이 레지나와 대화하는 장면이 천천히 뷰파인더에서 확대되었다.

“부탁은 받았지만, 예정에 없는 상황이군요. 채취선 촬영이라니.”

회갈색 머리의 마른 사내가 미간을 찌푸린 채 레지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지나는 그런 상황쯤은 염두 해 두었다는 듯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무리한 요구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가치는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우주 채취선이라는 것이 평범한 일은 아니니까요.”

“엄밀히 말하자면 성간재취선 입니다. 그리고 성간채취선을 운용하는 회사도 많습니다. 우리 같은 민간업자에게 위탁할 바엔 그런 곳을 찍는 게 나을 텐데”

“채취회사들은 흑성광물 채취만 하는 걸로 알아요.”
레지나가 웃으면서 말했다. 딱딱한 분위기의 취재원을 풀어주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잘 통하는 것은 역시 미소였다.

“그리고 우주공간에서 자원채취를 하는 건 순전히 민간인들의 몫이죠. 더군다나 익시온은 그 방면에서는 최고라고 하더군요.”
또한 천천히 상대방을 띄워주면서 분위기를 주도할 수 있는 정보의 습득이 있어야 한다. 레지나는 확실히 이런 방면에서는 본능적인 감각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일격.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만한 가치가 있을 거예요. 성간채취선의 일에 대한 단가책정에도 나중에는 상당한 도움이 되겠죠 취재의 가치가 있을 만큼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라면.”

“확실히 성간채취는 어렵고 위험한 일입니다.”
선장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풀리자 엄숙해 보이는 대학교수 같은 인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말이 안 통할 사내는 아닌 것 같아 토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중이었다. 초로의 사내는 젊은 아가씨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부담스러운 건 두 사람의 안전입니다. 전함 같은 종류는 아니더라도 그 이상의 위험도가 있는 우주선입니다.”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럼 서명이라도 하시구려.”
레지나는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품에서 두 사람의 서명이 들어간 각서를 선장에게 들이밀었고 선장은 그 각서를 받아 들더니 뒤에 서 있는 항해사를 바라보았다. 사람 좋게 생긴 항해사는 어깨를 들썩거렸고 선장은 짧게 한숨을 쉬더니 레지나를 바라보았다.

“객기가 대단한 아가씨군. 소정의 성과가 있기를 바라겠소. 신입선원을 충당하러 왔다가 엉뚱한 일만 생기는군. 좋습니다. 익시온(Ixion)에의 승선을 환영합니다.”

레지나는 활짝 웃으면서 토드를 바라보았고 토드는 ok사인을 보냈다. 레지나는 토드에게 뒤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면서 한 마디를 잊지 않았다.

“마지막에 내가 웃는 장면은 컷(cut)해버려.”

-2-

채취선 익시온은 상당한 크기의 화물채취선이었다. 투박하고 넓적한 모습의 고래상어처럼 생긴 형태는 옛 대개척시대의 디자인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지만 끊임없는 개보수가 이뤄진 듯 실내는 최첨단의 기기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선장 존 터커는 둘러보는 레지나와 토드에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는 중이었다.

“민간 채취선은 기업의 채취선보다 한 발 앞서서 장비를 취득해야 합니다. 그래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죠. 훨씬 매몰비용이 많이 듭니다만 진일보한 채취력으로 자원을 선점하는 것만이 생존방법이니까요.”

“근사해. 그림 좋을 것 같아.”
토드의 귓속말에 레지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뭐라고 했어. 감이 좋아.”

그 때 기관실 통로가 열리고 항해실이 드러났다. 레지나와 토드는 순간 저절로 입에서 나오는 탄성을 가눌 수 없었다. 이층 높이의 함교부터 아래의 일반 기관실까지 전면부가 모두 강화탄성유리로 되어 있었다. 거의 건물 5층 높이에 맞먹는 규모로 전방 180도 가까운 시야각을 몽땅 강화탄성유리로 마감을 한 것이었다. 스페이스 터미널의 경치와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아마 크루즈선도 이 정도 규모의 선외창을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엄청나군요. 육안으로 우주를 보면서 항해 한다니……이건 스페이스 오페라에나 나오는”

“해적선같지요? 아버지의 작품이죠. 익시온은 저희 집안의 충실한 종복이었습니다. 그 동안의 개보수 중 가장 많은 돈이 투자된 것도 이곳입니다.”

선장의 함교 아래로 항해사들과 기관장들의 콘솔룸이 연결되어 있었다. 2층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아래층의 넓은 공간은 화물칸까지 직통으로 이어지는 구간인 듯싶었다. 대부분의 선원들이 우주공간을 직접 볼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건 대박이야.”
토드의 귓속말에도 레지나는 멍하니 앞에 펼쳐진 암흑의 공간과 그 가운데서 조금씩 명멸하는 빛무리의 광경에 넋을 잃고 있었다. 이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감동이었다. 비벤디 자식들, 너희에게 감사한다. 이렇게 끝내주는 광경을 보게 해 주다니! 선장 존 터커는 함교를 벗어나 천천히 선원들을 레지나에게 소개시켜주었다. 아무래도 뱃사람들 특유의 쾌활함과 폐쇄성은 지구인들이 바다를 맨 처음 다녔을 때부터 전해지는 유전적 형질인 듯 했다. 총 인원 40명, 그 중 재취작업반이 28명이었다. 중형 어선치고는 상당히 많은 규모의 인원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의 사내들로, 이쪽 방면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가들임이 틀림없었다.

“이직율이 높은가요?”

“거의 없소. 이분들은 아버지 대부터 배를 탔지요. 결원은 사고가 났을 때뿐이라오.”

모두 짧은 머리에 작업복을 입고 출항에 대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웅웅거리는 엔진소리가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레지나와 토드도 일단 취재를 멈추고 자신들의 배정시트로 가야만 했다. 선원들은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호흡도 척척 맞았다. 선장은 별다른 말을 하지도 않았지만 구호나 눈짓 한마디에 모든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엄정한 기강 하나로 선장의 능력은 보여지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존 터커는 상당한 사람이었다.

“출항 전에 간단한 의무체크를 해 봅시다. 닥터 그루퍼드가 해 주실거요.”

흰색 가운을 입고 여기저기 반창고를 붙인 피곤해 보이는 턱수염의 중년인이 앞의 복도에서 손을 들고 일행을 맞이했다. 반창고를 붙인 의사라니, 레지나는 속으로 웃음이 나왔지만 그루퍼드의 검사 역시 일반 외과의를 상회하는 숙련된 솜씨였다. 이 배에는 진짜배기들만 모여있군. 레지나는 내심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의 여신에게 감사했다. 비벤디사(社)에 루나TV의 주식이 헐값으로 매도되지만 않았어도, 그 덕에 보도국의 반이 갈리지만 않았어도 그녀는 지금 달의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었을 것이다. 비벤디사에 저주 있으라! 얼마나 통한의 눈물을 침대 시트에 뿌렸던가? 화성의 방송국을 전전하면서 다니는 프리랜서의 삶이 얼마나 배고팠던가? 그 때는 믿지도 않는 모든 신들에게 원망의 화살을 쏟아 부었지만 지금에 와서야 그들이 자신에게 눈길을 주기 시작한 것 같았다. 예나 지금이나 좋은 프로그램 하나면 과거의 명성을 되찾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번 다큐멘터리로 최소한 화성 네트워크에서 권토중래를 노릴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엔 다시 지구권 입성이다! 레지나 한.

“무슨 생각을 하기에 기분이 그렇게 좋소?”

“예?”

그루퍼드의 회색 눈동자가 레지나를 올려다보았다.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안경 너머의 지적인 외모가 경계심을 풀어주는 모습이었다. 오호, 이 배의 인간들은 모두 하나같이 근사하군.

“근사한 경험일 것 같아서요. 이런 기회가 와서 감사해요.”

“누구에게? 행운의 여신에게?”

“속을 들여다 보시는군요.”
매력적인 미소가 레지나의 얼굴에서 넘쳐 흘렀지만 그루퍼드는 히죽 웃더니 엄지손가락으로 의무실의 뒤를 가리켰다. 함선 캐비닛 하나가 구겨진 채 서 있었다. 레지나가 그것을 보는 동안 그루퍼드는 말을 이었다.

“행운의 여신 뿐 아니라 운명의 여신에게도 기원하시오. 예측불허요.”

“무슨 일이 있었죠?”

“지난 항해에서 8등급 소행성이 익시온의 후미를 강타했죠. 나랑 간호사는 재수없는 환자를 응급처치 중이었거든. 나는 허공에서 굴러서 이마가 깨졌고”

그루퍼드는 자신의 이마를 만졌다.

“나보다 재수없던 간호사와 환자는 저기 처박혔지. 보기 드물게 사려 깊은 간호사였는데. ”

의무검사를 마치고 온 토드와 레지나는 말없이 좌석에 착석했고 선장은 그들을 보더니 슬쩍 웃음을 지었다.
“그루퍼드가 겁을 준 게로군요. 그 양반의 특기죠.”

“지난 항해에 사고가 난 건 맞나요?”

“그건 사실입니다. 언제나 위험한 항해요. 늘 예상변수를 벗어나는 일이 생기죠.”

“항상 좋지만은 않다니까.”

“조용히 해.”
토드와 레지나의 투덜거림을 듣던 존 터커는 조용하라는 투로 오른 손을 들어 보이며 옆 좌석에 착석했다. 엔진의 소음이 커지며 조금씩 선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선장은 레지나에게 안심시키듯 말을 걸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합니다. 두 분은 기도나 하시오.”

“믿는 신은 없어요. 선장님은 신을 믿겠죠?”

“나는 이성과 과학을 신봉하오. 규명되지 못한 불가사의는 해독하지 못한 좌표와 같은 거라고 믿지요. 세상의 모든 문제는 논리로 풀릴 때가 옵니다.”

존 터커의 말에 레지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뱃사람 치고는 합리적이시군요. 저도 동의해요. 이성만이 인류 최후의 무기죠.”

선장은 계기판을 쳐다보며 말을 끊었다가 다시 레지나를 쳐다보았다.

“우주는 워낙 넓어서 가끔 예측범위를 벗어나곤 하지만 말이죠.”

-3-
비좁은 공간 덕에 두 명에게 각자의 방은 준다는 것은 어렵다면서 난색을 표했지만, 어차피 작업적인 부분에 피해를 주기 싫다며 레지나는 당차게 거절했다. 토드는 양 손을 펴면 닿을 것 같이 작은 방 안에서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영상을 다시 살펴보는 중이었다.

“어때, 색감은?”

“원래 옛날 물건들이 칼라는 훨씬 낫다고. 이 정도라면 오프닝부터 사람들의 엉덩이를 붙일 수 있어. 성모님께 감사할 일이지.”

“성모 마리아가 아니라 내 판단에 감사해.”

토드는 카메라에서 눈을 떼고 레지나를 바라보았다. 기압복을 벗고 짝 달라붙는 속옷만을 입고 뷰파인더를 응시하는 레지나의 숨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여전히 레지나는 변한 것이 없었고 매력적이었다. 루나TV의 보도국장으로 올라가기 전 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뜨겁기 그지 없는 사이였다. 토드는 오른손을 천천히 그녀의 허리에 둘렀다. 하지만 그 손은 레지나의 오른손에 의해 가볍게 제자리로 돌아오고 말았다.

“지금 이럴 때 아니야.”

“여전하군.”

“공은 공이고 사는 사야.”

토드의 입술이 찌푸려지더니 고개를 끄덕거리고 다시 카메라를 돌아보았다. 보도국장에 올라간 뒤에 눈 한 번 주지 않던 여자였는데 지금이라고 뭔가 달라질 일은 없지. 따라온 내가 멍청했다니까. 토드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지나는 가느다란 허리에 손을 얹고 토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자기랑 놀러 온 것도 아니고 난 그럴 맘도 없어. 한 단계 올라갈 생각으로 온 거야. 자기도 그러려고 여기까지 온 거잖아? 사람이 냉철하게 행동하라고”

레지나의 검은 눈은 깜박거리지도 않고 말투 하나 바뀌지 않은 채였다. 늘 회의나 사석에서나 이런 식의 레지나에게 토드는 꼼짝도 못했다. 고개를 흔들고 손을 든 것은 역시나 토드쪽이었다.

“알았어. 충분히 알았다고. 손가락 하나 안 건드린다고.”

“행선지 위치부터 시작하는 걸로 해. 그나저나 어디로 가는 지를 알 도리가 없군.”

“선장에게 그건 안 물어봤나?”

“아까 살짝 물어봤는데 영 말을 안 해주더라고. 대충 갈아입었으면 나가자. 한시가 급해.”

“알겠습니다. 명령대로 합죠.”

“비꼬지 말고.”

채취선 익시온은 명왕성 근처의 화물 터미널을 빠져 나와 안드로메다와 시리우스 사이의 행성간을 항해하기 시작했다. 이미 워프를 한번 한 상태였지만 선장은 해도만을 유심히 살펴볼 뿐 목적지에 대해서는 일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레지나 역시 화물브로커를 통해 실력있는 채취선이 있다는 말만 들었을 뿐, 그 이상의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해서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존 터커는 거기까지 이야기를 하는 것은 꺼려하는 눈치였다.

“우리는 앞으로 워프를 두 번 더 합니다. 거기까지만 알아두십시오.”

통상적인 화물선은 워프를 극히 꺼렸다. 아무래도 선체와 선원들에게 무리가 가기 때문이었다. 의아한 표정의 레지나를 보더니 존은 고개를 끄덕이고 설명을 해 줬다.

“우리 같은 민간채취선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겠소. 더 많은 채취량을 얻기 위해서 더 깊숙한 곳까지 항해하고, 더 위험한 곳에서 작업을 하는 수 밖에 없어요. 대량채취를 하는 기업들의 관심 밖에 있는 곳에 가서 말입니다.”

“그래서 필요 없는 하이퍼 점프를……”
선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습니다. 항행좌표와 통상의 연료소모만 봐도 경험 있는 선원들은 대충 어느 구역인지 좌르르 읊을 수 있는 사람이 우주엔 숱합니다. 더 심한 경우는 채취활동영상만 보고, 그 주위의 별들과 항성, 암석군을 통해 어딘지 까지 알아내는 경우도 있어요.”

“설마……”

“설마가 아니라 사실이오.”
선장은 잠시 바깥을 살펴보더니 레지나에게 말했다.

“인간은 가끔 말도 안 되는 사실을 가능하게 만드는 재능이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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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레이션을 조절해야……아니, 컨셉 자체를 조정해야겠어.”

“무슨 문젠데?”
레지나는 귀에 걸린 연필을 입에 물고 질겅질겅 씹어댔다.
“내가 예상했던 것과 달라. 우주의 장엄하고 불가항력인 위험 앞에서 싸워나가는 사람들. 이런 컨셉이었는데 이 배에 탄 사람들은 내 생각과 전혀 달라. 바늘 하나 꽃을 데가 없이 완벽하게 자기 일을 숙지하고 나가잖아. 차라리 프로페셔널을 강조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어느 일이건 거칠 것 없이 나가는 마초들의 컨셉으로.”

토드도 레지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상당한 수준이더군. 최고수준의 뱃사람들일거야.”

“최고수준이지. 불안해 보이지도 않고, 폐쇄적이지만 음울하지도 않고. 굉장히 이성적이야. 합리적이고. 맘에 들어.”

토드는 레지나를 보더니 싱긋 웃었다.
“뭔가 돌발상황 같은 게 벌어지길 바란 모양이네.”

“사실……그런 게 들어가면 좋잖아. 화면에 긴장요소도 들어가고. 다민족 구성원들인데 종교나 언어로 싸우는 것도 없고. 완벽해.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집단이잖아.”

토드는 레지나의 말을 듣다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여긴 기도실이 없어.”

“응?”

“이 정도 규모의 우주선이면 종교시설이 하나 정도 있을 법 한데……기도실이 없더군. 선원 중에 종교를 가진 사람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아. 그 흔해빠진 로사리오 하나 걸고 있는 이가 없어.”

“맘에 드네.”

“맘에 들어?”

토드는 자신의 목에 걸고 있는 십자가를 보여주었지만 레지나는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해결되지 않는 논쟁은 시간낭비야. 하지만 너도 알잖아. 난 그런 거 안 믿는다는 거. 규명되지 않은 진실만 존재할 뿐이야. 존도 나랑 같은 생각이던데? ”

“존? 언제부터 선장을 존이라고 불러?”

“이상한 생각 말라니까.”

갑자기 천장의 조명이 붉은 빛으로 바뀌었고 함내 스피커가 울리기 시작했다. 산뜻한 효과음과 함께 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함내를 울리기 시작했다.

“스네이크 아스테로이드 200시 부근에 감지. 채집원과 함교 승무원들은 대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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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석더미들이 빠른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맴돌이를 하는 중이었다. 거대한 흑성을 뒤로하고 운석들은 줄줄이 연이어 일정한 궤도를 돌면서 회전하며 선을 이루고 있었고 멀리서 보면 커다란 톱니바퀴 두 개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우로보로스(신화 속 두 마리 뱀이 서로의 꼬리를 문 형상)같군요.”

“뫼비우스의 띠에 더 가깝지요.”
레지나의 탄성에 가까운 독백을 듣던 존 터커가 옆에서 그녀의 말을 받았다. 토드 역시 처음 보는 장엄한 광경에 카메라를 돌리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장엄하군요. 우주의 신비라는 것이……”

“신비할 건 없습니다. 빅뱅이나 행성충돌로 일어난 균일한 질량과 성분의 암석군이 같은 속도로 튕겨 나오다가 다른 흑성의 중력부분에서 위치에너지와 가속도의 변화로 회전을 하는 것뿐이죠. 운동에너지가 산란되면 흑성 고리의 테가 될 겁니다. 저런 식의 모습을 보이는 건 몇 주 걸리지 않습니다.”

토드는 샐쭉하니 입을 다물었다. 고리타분한 설명이 함교에서 이루어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1층에서는 사람들이 벌떼처럼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채집셔틀이 발진을 준비하고 선장의 명령을 기다리는 중이었고 익시온은 천천히 꿈틀대며 돌아가는 소행성에 최대한 근접하고자 궤도를 수정하며 접근하는 중이었다. 토드는 카메라를 열어 함교의 대형 창을 찍기 시작했다. 거대한 익시온의 함창은 찍을 만한 것을 다 보여 주었고, 우주복을 입고 선외 촬영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에 토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존 터커는 마이크를 잡고 채집반에게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근처의 스피커를 활성화 시켰다. 선장의 오른손이 천천히 위로 들렸다.

“작업시작. 출선”

함내에 청아한 음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정지한 익시온에서 작은 채집선들이 천천히 거대한 뱀을 향해 전진하며 앞의 기계팔을 뻗기 시작했다. 함상에 울려 퍼지는 현악은 고음악(古音樂)이었다. 토드가 귀를 쫑긋 세웠다. 바하의 관현악모음곡 3번.  ‘G선상의 아리아’

행성들의 궤도에 맞춰 각각의 채집선들이 같은 속도로 행성의 궤도에 들어서며 레이저와 기계팔로 조금씩 암석들을 커팅하며 부순 뒤 입과 같은 채굴창으로 밀어넣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다시 궤도를 이탈하고 다시 들어가기를 여러 번, 뒤로 은은히 보이는 백색 항성빛에 비춰진 흑성과 채취선의 모습은 흡사 거대한 꽃을 향해 몰려드는 벌들, 수면 아래 맴도는 작은 물고기들 같았다.

“아름답군요.”

“음악 덕분이죠. 채집반원들의 긴장을 누그러뜨리고 통신 감도를 확인하는 겁니다. 그래야 제 지시사항이 전달될 수 있으니까요.”

존 터커는 함교에서 쉬고 있는 게 아니었다. 천천히 움직이는 채집선 열 두척을 모두 확인하며 모든 상황을 체크했다. 뒤에서 날아오는 파편들부터 시작해서 어느 부분으로 가라는 주의사항까지 하나하나 각 채집선에 일러주고 있었다. 열 두대의 우주선은 존의 수족처럼 우주공간을 누비고 있었고, 감독의 지시를 받은 선수가 경기장을 누비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허튼 지시라고는 하나 없는 완벽 무결한 지휘가 바하의 음악과 어우러져 장엄하기까지한 장면을 연출했고 이 정도 되면 채취가 아니라 예술행위라고 불러도 무방했다. 레지나는 존 터커의 옆 모습을 넋이 나간 듯 바라보는 중이었다. 선장이 아니라 태고의 기술을 지닌 장인(匠人)을 대하는 눈빛이었다. 이 아가씨 넋이 나갔군. 하지만 이건 정말 끝내주는 프로그램이야. 이 장면만 한 시간을 틀어줘도 대박이 나겠어. 토드는 레지나와 채집광경을 번갈아 보면서 가슴이 쿵닥거리는 것을 느꼈다. 일생일대에 보기 힘든 광경을 찍는 중이었다. 이건 가편집본만 틀어줘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할 예정이었다.

“미스 한”

“예?”

“이 정도로도 충분한 촬영분량은 나오지 않겠습니까? 이 이상은 저의 채취선만이 가는 채집지입니다. 상당히 위험할 수 있죠. 여기서 미스 한이 원하신다면 항로를 다시 틀어서 입항하겠습니다. 저 정도의 이리듐과 스칸듐이라면 본전치기는 되거든요.”

“아뇨, 존. 전 계속 보고 싶어요.”

존이라는 호칭에 토드는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정작 선장은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아니, 신경을 쓰지 못한 것 같았다. 레지나를 보는 선장의 눈빛은 심각했다.

“저런 아스테로이드는 애들 장난입니다. 닥터 그루퍼드에게 희생자 이야기는 들으셨겠죠?”

레지나는 입을 앙다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맙소사. 저 표정은 대체 뭐야, 토드가 아는 한, 레지나의 가장 큰 단점은 결정을 번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능력 있는 자들의 아킬레스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밀어붙였다. 아무리 옆에서 뜯어말려도 듣지 않았다. 아마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비벤디가 그녀를 잘라낸다고 할 때 자신의 프로그램을 전부 스스로 날려버리지 않았던가?

“레지나, 잠깐 나 좀 봐.”
토드는 그녀를 불러 선장하고 조금 떨어진 곳으로 데려갔다. 레지나는 살짝 토드를 흘겨보았다.

“여기서 귀환하는 거 어때? 차라리 숏 프로그램으로 담는 방법도 있잖아.”

“뭣 때문에 그러는 거냐?”

“사실 위험한 일이잖아. 닥터 그루퍼드도 그렇게 말하고.”

“위험한 일이니까 찍는 거지. 언제부터 입맛에 맞는 일만 하게 된 거야, 토드? 선의야 당연히 안전에 대한 걱정이겠지만 외부인원도 아닌 우리가 무슨 걱정이야?”

“간호사도 충돌로 죽었다는 말 못 들었어?”

피곤한 대화라는 표정이 레지나의 얼굴에 역력했다.

“간호사랑 우리랑은 달라. 우리는 존 옆에 있을 거잖아. 존이 알아서 조치를 취해줄 거야. 저 정도 빈틈없는 사람 만나기 힘들어.”

“존은 무슨 존이야?”

“너 질투하는구나. 예전에도 그러더니. 프로답게 굴어.”

토드의 입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막혀버렸다. 늘 이럴 때는 정확하게 토드의 아킬레스건을 물고 늘어졌다. 사실 레지나의 요청만 아니었어도 작은 케이블TV 에서 영상감독으로 별 불평 없이 살고 있던 토드였다. 네가 부탁했잖아. 절박하다고 했잖아. 하고 싶은 말이 목 울대까지 치밀어 올라왔다.

“내가 부탁할 사람이 너 밖에 없었잖아. 조금만 더 도와주면 안 돼?”

인상을 있는 대로 쓰고 있던 토드였지만 이미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왜 늘 레지나하고는 이런 식인 거지. 이런 일 때문에도 루나 TV를 떠났던 것이었는데. 레지나는 싱긋 웃으며 토드의 어깨를 툭 치고 다시 선장에게로 다가갔다. 토드는 그런 레지나의 뒤를 보면서 참담한 감정과 함께 짜증이 물밀 듯 솟아올랐다. 레지나는 무언가 선장과 말하고 싱긋 웃었고, 선장은 토드를 힐끗 바라봤다. 그는 토드의 마음 속 근심걱정을 듣기라도 한 듯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고심하며 거대한 창문을 바라보더니 스읍 하고 입을 다시는 소리를 내며 두 사람에게 돌아섰다.

“좋습니다. 두 분. 하지만 정말 지금부터는 안전제일입니다. 제 명령에 절대 복종하십시오.”

“물론이죠. 존”

토드는 레지나의 환해진 얼굴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4-

시공간의 뒤틀어짐은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이번 워프는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먼 항행거리를 뛰어넘은 것이 틀림없었다. 레지나는 메슥거리는 속을 겨우 추스르며 점점 사물의 시공간이 제 상태로 돌아와 자신의 손이 세 개에서 두 개, 하나로 돌아오는 광경을 천천히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쯤인지 알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익시온만의 채집터일 것이다. 아마 연방에서 금지한 항행금지구역 어디쯤이리라 생각했다. 종종 채취선들과 모험가들은 연방의 규율 같은 것을 무시하곤 했다. 사실, 광활한 우주에서 누가 규제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비척거리며 자신의 워프 캡슐에서 나온 레지나는 선상의 조명이 환하게 밝혀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 했다. 하지만 조금 눈에 익은 뒤 살펴보니 그것은 인공조명이 아니었다. 함교에 도착한 레지나는 그것이 항성들과 수많은 태양들의 플레어(flair)에서 나오는 자연광임을 깨달았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수 많은 크고 작은 태양들의 사이를 교묘하게 중력의 밸런스를 타고 익시온은 항해하는 중이었다. 석양과도 같고 일출과도 같은 빛이 전후좌우상하에서 끝임 없이 쏟아져 내렸고 수많은 유성과 소흑성들이 스치듯이 익시온 옆을 같이 날고 있었다. 이미 함교에 카메라를 들고 온 토드는 플레이버튼을 누르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거대한 유리창을 응시하며 성호를 긋는 중이었다.

“작은 은하계가 생성되는 모습을 두 분은 보고 있는 겁니다.”

선장 존 터커가 뒤에 서 있었다. 새롭게 생기는 작은 항성들이 유기체와 성간물질이 모여 가스덩어리가 되고 천천히 회전하며 굳어져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익시온은 그 사이에 떠다니는 광물을 얻으러 온 것이었다.

“여기서 어떻게 채취를 합니까?”
토드의 질문에 선장은 갑판장을 불러 토드에게 사출과정을 보여줄 것을 명했다. [사출]이라는 과정은 여타 채취선에서 들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갑판장을 따라나가는 토드에게 레지나는 손짓을 했다.

“기계과정을 꼼꼼하게 찍어서 가져와봐. 설명 잘 듣고.”

“같이 안 가게?”

“난 이쯤에서 인터뷰를 해야지. 선장에게 항해의 고충과 작업배경 같은 걸 조사할 거야. 선장의 얼굴은 나중에 찍어서 넣으면 되는 거고.”

토드의 한쪽 눈썹이 찡긋 올라가자 레지나의 눈이 날카롭게 바뀌었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안 하던 짓을 하네.”

“뭐가 안 하던 짓이야? 어차피 많은 분량을 넣어봐야지. 나중에 일이 어떻게 될 지도 모른다고. 지금 갈라져서 찍을 수 있을 때 찍자는 거야. 너도 컨셉은 잡고 찍을 수 있잖아. 더군다나 그냥 설명 듣는 건데 둘이 갈 필요가 있어?”

토드는 뭔가 말을 하려다가 버릇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모습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도가 지나친 것 같았다. 오히려 유람 나온 것 같은 태도는 너라고 레지나. 하지만 지금 그런 말을 했다간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격 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레지나의 눈은 목표를 찾은 짐승처럼 무섭게 번득이고 있었고, 그것이 애정이나 관심이 아닌 작품에 대한 열망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토드는 천천히 갑판장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레지나와 선장이 선장실 쪽으로 옮겨가는 실루엣이 긴 일광(日光)의 그림자를 타고 바닥에 깔리고 있었다.



“익시온의 채광량은 상당하다고 정평이 높던데요. 화물 터미널에서도 명망이 높고요.”

“누구나 숨겨놓은 어장이 있기 마련이오. 그리고 노하우도 있는 것이고.”
존 터커는 겸손히 말했지만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녹아있었다.

“이 일을 시작한 건 가업이기 때문이죠.”

존 터커는 커피를 레지나에게 권하며 선장실의 의자에 앉았다. 선장실도 함교처럼 선창이 뚫려 외부를 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아버지, 그리고 제 위의 두 누이들도 모두 채취업에 종사했어요. 모두 우주에서 돌아가셨고 아마 저도 그럴 겁니다. 위험부담률이 높은 건 사실이지만 매력적이고 부가가치도 꽤 되니까요.”

레지나는 흘끗 선장실의 벽을 장식한 사진들을 보았다. 선장 존을 꼭 닮은 엄숙한 표정의 아버지와 미모의 누이 둘이 익시온의 유니폼을 입고 웃으며 찍은 사진이 정 가운데 걸려있었고 그 옆에는 젊은 시절 아버지와 찍은 존 터커의 사진이 같이 보였다. 졸업식 가운을 입고 잇는 터커는 호리호리하고 앳된 순진한 눈망울의 청년이었다. 선장은 사진을 올려다보는 레지나를 보고 웃음을 지었다.

“트론헤임에서 지질학을 전공했죠. 아버지도 원래 뱃사람이 아닙니다. 트론헤임의 행성궤도학 교수였지요. 당신이 직접 답사를 나섰다가 장래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이 일을 시작하신 거고요”

“놀랍네요. 학자 집안이 사업을 이어가다니, 우주의 불가사의함에 끌리신 건가요.”

“우주의 모든 건 규명가능 하다는 게 아버지의 신조셨지요.”

존 터커는 선장실의 창문 밖으로 불타는 항성을 보고 있었다. 강화 파이버글라스의 코팅을 뚫고 주홍색 빛이 선장의 각진 얼굴을 붉게 물들여 마치 무성영화의 주인공 같은 실루엣을 레지나에게 선사하고 있었다. 존 터커는 말을 이었다.

“크고 넓고 광대할수록 사람은 공포심을 느낍니다. 하지만 하나하나 세밀한 부분부터 살펴 들어가면 모든 것은 원칙과 법칙이 있지요. 그게 자연의 이치고 과학이죠. 그렇게 되면 공포는 사라지는 법입니다.”

“냉정하고 목표지향적이군요. 원래 성격이 그러신 건가요?”

존 터커의 붉은 얼굴은 천천히 창문에서 아버지의 사진이 있는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태양풍에 휘말려 아버지가 좌초된 게 10년 전이죠. 선체 골조가 보일 정도로 익시온이 망가졌지만 그 배를 끌고 터미널까지 오셨어요. 제가 임종을 지켰습니다.”

선장의 목소리는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웠고, 감미로울 정도로 조용하게 선장실을 울렸다.

“아버지는 유언하셨죠. 어떤 것도 두려워 말고 시작하라고. 사람의 감정에서 두려움은 발생하고, 두려움은 무지에서 시작된다고. 무엇인지 알게 되면 두려움 대신 기대감이 함께 할 거라고 말입니다.”  

사진을 올려보는 선장의 모습은 여느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제서야 레지나는 선장의 얼굴에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자랑스런 아버지를 둔 아들만이 가질 수 있는 얼굴, 그리고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는 아들의 표정. 레지나는 존 터커의 각진 턱선을 손가락으로 만져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이해해요. 저 역시 그런 식으로 지금까지 인생을 버텨왔으니까요.”

레지나의 속삭이는 듯한 말에 존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천천히 아름다운 PD를 응시했다.

“미스 한은 이해하실 것 같았습니다. 사실 이런 곳까지 나서서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는 것은 용기 이상의 확신이 있어야 하니까요.”

레지나는 존 터커를 보면서 활짝 웃었다. 타이밍을 봐서 웃는 것이 아닌 진짜 함박웃음이었다.

“저랑 선장님은 통하는 곳이 많네요.”

“존이라고 부르십시오.”


-        -  -

“뭐 별다른 거 없어요. 그냥 어뢰관 비슷하다고 보시면 돼.”

갑판장이 보여준 것은 선수에 위치한 사출드라이브, 말 그대로 어뢰관이나 다를 바 없는 기계였다. 토드는 천천히 카메라로 찍으면서 이런 게 여기 왜 필요한지 갑판장에게 물었다.

“중량물을 쏘는거야.”

“중량물이오?”

갑판장은 손뼉을 치고는 손가락으로 드라이브 옆의 커다란 통들을 가리켰다.
“행성이 초기에 생길 때 원심력을 가지고 일정 중량들이 뭉치거든. 그 때 계산해서 필요한 자원만큼의 밀도와 무게를 넣은 물건을 그곳에 쏘는 거야. 그럼 원심력과 질량보전에 의해 다른 게 밖으로 튀어나오지. 계산은 컴퓨터가 하고 쏘는 건 사람이 쏘는 거야. 쾅! 하고.”

“뭐가 튀어나오죠?”

“정제된 광물. 순도 100%의 희토류금속, 혹은 제2, 제3 천이금속. 그런 거지.”

“와, 그럼 아예 빌딩만한 걸 때려 넣으면 대박일텐데 왜 그렇게 안 하는거죠?”

갑판장은 무식하다는 표정으로 토드를 흘겨보았다.

“그랬다간 행성자체가 박살 나고 순식간에 성간물질이 우주선을 덮칠걸? 딱 일정 수준만큼만 쏘는 거야. 그게 기술이라고 보시면 돼.”

토드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그림자처럼 닥터 그루퍼드가 뒤에서 나타나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그는 슬쩍 웃으며 토드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반창고를 붙인 채 피곤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어떻소. 생각보다 대단하지요?”

“놀라운 기술이군요. 이 정도일 줄은 알지도 못했고 예상하지도 못했습니다.”

“우주의 신비에 다가서는 것으로는 역부족이지.”

토드는 카메라를 끄고 닥터 그루퍼드와 함께 천천히 함수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갑판장은 슬쩍 그루퍼드를 쳐다보고는 천천히 두 사람에게서 멀어졌다.

“의외로군요. 의사선생님이 우주의 신비 운운한다는 것은.”

“죽음을 목도하고, 사고를 접하다 보면 생명에 경외심을 가질 수 밖에 없고 인간 오성의 한계를 체험할 수 밖에 없는 거지.”

“이 배에 승선하신 분들은 모두 우주를 잡아먹을 기세던데 말입니다.”

“우주가 사람을 잡아먹겠지. 설마.”

수염이 까끌하게 자란 닥터 그루퍼드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토드는 첫 만남에서 그가 이야기해 준 사고를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가슴의 묵주를 손에 잡았다. 그루퍼드의 눈동자가 가슴의 십자가를 예리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사람이 아무리 위대하다 한들”
그루퍼드는 토드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제어하지 못하는 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오. 신을 찾거나 돌파할 길을 열거나, 혹은 그 앞에 적절하게 굴복하거나 하는 것이죠. 누가 옳다고 이야기할 수 없어요.”

“신을 믿으시나요?”

“믿을 수 밖에. 그게 정의롭건 악신(惡神)이던.”

토드는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고 의도하지 않은 질문을 닥터 그루퍼드에게 던지고 있는 자기자신을 발견했다.

“왜 승선을 하게 되셨나요? 그냥 연봉 때문에?”

“처음은 연봉이었소. 귀찮은 환자들을 안 봐도 되니까. 뭐 그런 것도 있지만……불가항력인 우주의 신비를 보고 싶다는 열망도 있었고.”

“우주의 신비를 보셨겠군요.”

닥터 그루퍼드는 슬쩍 웃으면서 눈으로는 토드를 쳐다봤다.

“신물 나게 봤지. 그러면서도 이젠 빠져나갈 수 없소.”

“못 빠져나간다니요?”

눈이 동그래진 토드의 질문에 그루퍼드는 양손을 휘휘 저어댔다.

여기도 세상의 병원하고 다를 바 없더라고. 의사는 늘 맞닥뜨린 현실 앞에 초라해지고, 사고자를 보면서 신의 섭리를 보는 과정도 똑같고. 신의 은총을 느끼는 거도 똑같고. 신의 축복을 느끼는 것도……”

그루퍼드는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토드는 슬슬 이 의사와 같이 걸어가는 게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강철 같은 선장 밑에 맛이 간 의사라니. 그냥 촬영에 필요한 질문을 할 것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고가 많이 일어났습니까?”

“위험지역에서의 사고는 늘 일어났지. 사고사도 꽤 있었고”

그 때, 선실에 다시 붉은 색의 조명이 환하게 들어왔고 선내 스피커가 낭랑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선장의 목소리가 선내에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해당 기착지에 도착했다. 전원 함교로 집합 후 사출을 준비하라”

웅웅대는 소리와 함께 일사 분란하게 승무원들이 함교쪽으로 뛰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토드는 그들의 모습에 반사적으로 카메라를 켜고 승무원들을 찍기 시작했고, 피사체에 집중한 탓에 닥터 그루퍼드의 마지막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앞으로도 있을 거요.”

-        6-

토드가 함교에 올라갔을 때, 이미 레지나와 선장은 나란히 선 채로 거대한 함외창을 통해 정면에 펼쳐진 풍광을 감상하는 중이었다. 선장은 익히 아는 듯 했지만 왠지 모르게 턱선이 굳게 닫혀 있었고, 레지나는 멍하니 강화유리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토드 역시 카메라를 든 채로 멍하니 풍경을 볼 수 밖에 없었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작은 신성(新星)이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처음 태어나는 별이 틀림없었다. 그것도 아주 조그맣게 빛나는 내핵처럼 보이는 빛나는 구형의 물체만이 확연히 들어왔다. 별의 탄생, 그것도 아주 초기의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것에 의해 토드와 레지나가 놀란 것은 아니었다.

성간물질로 보이는 거대한 검은 성운이 그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수 많은 발이 달린 불가사리 모양의 성운은 천천히, 일정한 파동을 그리며 신성의 핵을 둘러싸고 있었고, 마치 어루만지듯 작은 별을 돌리며 조금씩 주변의 먼지들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흡사 점토로 공을 만드는 어린아이의 손처럼 조악해 보였지만 가느다란 팔들이 여기저기에서 새로운 별을 만들 재료를 찾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검은 성운의 한 가운데에는 검붉은 빛이 조금씩 희미하게 점멸하고 있었다. 익시온이 조금씩 다가갈수록 성운의 모습은 점점 거대해져 갔다. 바람에 찢긴 검은 커튼이 우주공간을 막고 너풀대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이게 뭐죠 존……”

레지나의 속삭이는 듯한 소리와 얼어붙은 눈동자와는 별개로 존 터커의 목소리는 딱딱했지만 명료하게 설명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관찰과 조사에 의하면 저 검은 성운은 일종의 창조주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창조주라고 해 봤자 일종의 성간물질을 집합시켜서 원심력을 주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죠.”    

“맙소사”
토드가 성호를 내리그었다. 지금까지 봐왔던 우주공간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괴이한 기분이 온 몸을 훑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발이 안 움직일 때, 온 몸이 긴장되고 입술이 마르기 시작하는 것처럼. 레지나가 선장의 팔을 꼭 잡고 있는 것을 그때서야 확인했지만 토드는 입 밖으로 아무런 말도 낼 수 없었다. 눈에 비친 광경은 너무나도 강렬했다. 선장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맨 처음 저 존재를 발견한 것은 제 아버지입니다. 행성궤도학 연구 도중 빅뱅이 아닌 성간물질의 균일한 조합으로 태어나는 신성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발견했죠. 특정 부근에서 일정하게 만들어지는 별들 말입니다. 그래서 찾아내게 된 것이죠.”

갑자기 선내의 스피커를 통해 튜바소리처럼 낮은 금속음이 웅웅 소리와 함께 들리기 시작했다.  기묘한 진동이 익시온을 타고 흘렀고 토드는 자신의 몸을 타고 낮은 저음이 웅웅 거리며 공명하는 소리를 들었다. 조금씩 울림이 커지는 느낌이었지만 선장은 개의치 않고 설명을 계속했다.

“그리고 성운은 일정한 패턴에 맞춰 진동음을 발산합니다. 불균형적인 분자구조나 구성물질의 충돌 때문일 것이라고 가정합니다만 저 진동음은 다른 지역에서 개체가 접근해 올 때 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럼 살아있는 것 아닙니까?”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으니까요”

선장의 컴퓨터의 기계음처럼 단어와 단어 사이를 딱딱 끊어서 말하고 있었다. 레지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선장을 쳐다보았다. 선장 역시 레지나를 보면서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또 하나의 효용을 발견하셨죠. 신성의 제조를 맡는 성운이라면 사출관을 통한 사출채쥐가 저 성운에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가정 하에 말입니다.”

이번에는 토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능한 가정이었다. 레지나는 토드를 쳐다보았지만 토드는 곧 설명해 주겠다는 듯 손가락을 펴 보였다. 선장은 두 사람에게 자리를 옮기자고 제안했고, 두 사람은 토드가 촬영했던 함수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함수에는 대다수의 승무원들이 모여 아무 말 없이 바로 머리 위에 펼쳐진 검은 성운의 펄럭거림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선장은 말 없이 선원들에게 손짓으로 사출관을 제어하게 시킨 뒤 뒤따르는 두 취재원에게 말을 계속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아버지의 가정은 사실로 입증되었죠.”
채취선 만한 거대한 통 하나가 어뢰처럼 사출관의 위에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희귀금속들이 순도100%의 형태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토드는 성운을 쳐다보고 다시 카메라를 돌려 선장의 얼굴을 찍기 시작했다. 선장의 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카메라를 흘끗 쳐다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게 된 건 우연한 사고 때문이었죠. 많은 과학자들의 빛나는 성취처럼 말입니다. 아마 아버지는 맨 처음에 인간적인 슬픔을 견디지 못하셨을 겁니다.”

선원들이 사출관에 장착된 통 위로 올라갔다. 철컥 소리를 내더니 작은 출입구가 잠수함의 해치처럼 기묘하게 통 위에 나타났다. 속이 비어 있었던가? 토드는 갑자기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선원들은 일상적인 일처럼 아무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선장의 딱딱한 설명조의 말투는 점점 톤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다음에 일어난 기이한 반응에 매료되신 뒤, 조금씩 실험을 계속 하신 거예요. 맨 처음엔 광물, 식물, 동물들로 대체를 해 봤지만 궁극적으로 저 성운의 추출물을 최대화 시키기 위한 최적의 조합은……”

갑자기 토드는 굳센 팔들이 자신의 양 어깨를 누르는 것을 느꼈다. 디지털 카메라가 함교의 바닥에 떨어졌다. 동시에 레지나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역시 토드와 마찬가지로 두 명의 선원이 레지나의 양 팔을 잡고 누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토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체를 진동시키는 웅웅소리는 점점 커져서 마치 파이프 오르간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째지는 듯한 선장의 목소리는 명확하게 두 사람의 귀로 파고들었다.

“인간의 뉴클레오티드 배열의 보다 단단한 결합형.  XX염색체를 가진 형질의 유기체가 활성화된 채로 사출될 때 가장 추출율이 좋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무슨 소리야!”

“뭐라고요 존?”
토드와 레지나가 날카롭게 외치며 선장을 쳐다보았지만 존 터커는 더할 나위 없이 침착하게 두 사람의 말에 대답했다.

“수많은 실험의 결과요. 개인적인 희생도 뒤따랐고.”

“존! 미쳤어요?”

“감성적으로는 이해불가 하지만, 투입과 산출에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한 임상실험의 산물이오.”  

토드는 함선의 바닥에 무릎의 꿇린 채 코가 닿을 정도로 굽혀진 상태였고, 레지나는 억센 두 선원의 힘에 의해 천천히 통, 아니 원통형 관으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리저리 발길질을 해 대며 욕과 비명을 동시에 질러댔다. 이리저리 발로 선원들을 차고 밟았지만 요지부동이었다. 토드는 눈을 치켜 뜨고 레지나와 그보다 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검은 불가사리를 바라보았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주여,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 때 레지나의 고함소리가 들려왔고 한 사내의 손을 깨물기 시작했다. 선원은 비명을 질러댔고, 당찬 레지나는 손가락을 잘라버리겠다는 듯 눈을 치켜뜨고 입 한 가득 손을 넣고 깨무는 중이었다. 그 때 그림자처럼 한 사내가 몸싸움을 벌이는 레지나 앞을 가로막았다. 닥터 그루퍼드였다.

“이오네스가 훨씬 애를 먹였지.”

그루퍼드는 히죽 웃으며 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사려 깊고 현명한 여자였거든”
눈동자가 다 드러나도록 한껏 눈을 크게 뜬 그루퍼드가 레지나를 노려보았다.

“신을 만날 시간이야. 천사 아가씨.”

그루퍼드의 이마와 두 팔에 붙인 반창고가 레지나 한의 눈에 강렬하게 각인되어 들어왔다. 어느 새 그의 손에는 작은 주사기가 들려 있었고, 레지나는 자신의 팔과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두 사내가 쉽사리 통 안에 레지나를 넣고 해치를 봉하자 선원들은 모두 천천히 뒤로 물러서서 반원형의 유리천장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선장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웅웅대는 저음을 뚫었다.

“스피커 온, 사출 개시”

“이 개새끼들아! 날 꺼내지 못해!”

선내에 레지나의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것과 동시에 쾅 하는 사출음이 울렸다. 레지나의 목소리는 비명으로 바뀌었고 어느새 천장 유리창에서는 빠른 속도로 검은 성운의 붉은 가운데 입으로 돌진하는 원통의 물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자의 비명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욕과 저주, 그리고 울음과 비명이 계속 들려왔고 토드는 자신이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비명소리가 점점 신경질적인 웃음소리로 바뀌었고 울음과 딸꾹질 소리,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욕설이 들리는 가운데 검붉은 커튼 사이로 원통이 사라지는 광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마치 새끼 새의 붉은 입이 모이를 받아먹는 것처럼.
토드는 선원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벌리고 원통관이 성운에 삼켜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미소 짓고 있었다. 토드는 전신에 소름이 좍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지옥도였다. 이건 꿈이야. 빌어먹을. 토드 맥칼리스터, 정신차려라.

순간 헉 하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다시 들려왔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웃음소리와 비명소리, 점점 숨을 거세게 몰아 쉬는 소리과 함께 신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레지나는 육체적인 고통이라도 당한 듯 꺽꺽 거리는 소리를 지르더니 점점 신음소리가 거칠어졌고 높은 비명과 욕설이 섞여 나오기 시작했다. 무언가 입을 막는 듯 가뿐 숨소리만이 전해질 때도 있었고 순간적인 고통이 밀려오는 듯 헉헉대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밀려나왔다. 하지마, 제발, 레지나의 목소리는 간헐적으로 들러왔고 신음소리는 어느 새 길게 하나로 이어지며 익시온의 선체에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토드는 자신의 몸이 떨리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끊길 듯 말 듯 이어지는 레지나의 신음소리와 기묘한 울림에 자신이 몸이 반응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동시에 머릿속이 점점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미 그를 잡고 있던 손은 거두어진 뒤였다. 토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선장은 비롯한 모든 선원들은 환하게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토드 역시 의지와는 상관없는 쾌감이 온 몸을 지배하는 것을 느꼈다. 온 몸을 떨게 만들던 중저음은 이제 공장의 터빈처럼 굉굉대며 머릿속을 메아리치기 시작했고 모든 사람들 역시 몸을 떨기 시작했다. 몸이 찢어질 것 같았다. 털 하나하나가 곤두서고 이빨이 딱딱 부딪힐 만큼 강렬한 쾌감이 몸을 비비 꼴 정도로 스며 나왔다. 심장이 미친 듯이 펌프질을 하고 있었다. 머리가 텅 비면서 몸이 엄청나게 뜨거워지고 있었다.  쾌감 때문에 몸이 고통스럽다는 생각을 해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선원들 역시 신음소리를 내며 접신한 무당처럼 몸들을 사시나무처럼 흔들고 있었다. 토드도 자신의 사지가 부들부들 거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오 주여, 성모 마리아여. 이것은 대체……

그때였다. 스피커를 찢을 듯한 여인의 교성과 찢어질 듯한 비명이 터져나오는 순간 엄청난 소음이 익시온을 휘감았고, 더불어 폭발한 진동은 무형의 폭탄처럼 사람들을 일시에 휘청대게 만들고 있었다.

토드는 온 몸의 힘이 풀린 채 땀범벅이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팔다리가 저절로 경련을 일으켰다. 선원들 역시 비틀거리고 있었다. 오직 꼿꼿하게 서 있는 사람은 존 터커 선장 하나뿐 이었다. 토드의 머리는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죄의식과, 그 죄의식을 넘어서는 강렬한 쾌락이었다. 그 때, 조용하고 감정 없는 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울려 퍼졌다.

“작업 시작, 출선준비”
선장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토드는 반사적으로 함교의 대형창을 쳐다보았다.
검은 불가사리의 붉은 입에서 뭔가 밝게 반사되는 물건들이 긴 행렬을 이루며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번쩍이는 희토류 금속, 제2 천이금속, 제3 천이금속, 빛나는 욕망의 덩어리들.

“채집원은 승선하라! 마이크를 열어둬라!”

선장은 조용히 오른손을 들었고, 이미 단련된 선원들은 몸을 추스리고 바이킹의 후예들처럼 작은 채집선에 겁 없이 몸을 실었다. 청아한 현악기의 소리가 함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고 곧 아름다운 소프라노의 음성이 아련하게 우주공간에 깔리기 시작했다. 토드는 나직하게 혼잣말을 읊조렸다. 그는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 환희의 눈물이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행복한 넋이여……”

모차르트의 ‘엑슬타테 유빌라테’와 함께 채집선들은 빛나는 보석들을 향해 나비처럼 날아올랐다. 검은 성운은 불가사리 같은 팔들을 안으로 거두며 조용히 잦아드는 중이었다. 자그맣게 새로 태어난 별의 붉은 빛이 일출처럼 익시온의 창으로 밀려들기 시작했고 채집선은 아침 햇살 위를 우아하게 맴돌고 있었다. 선장은 오른손을 여전히 하늘을 향해 뻗은 채 말없이 붉은 하늘을 응시하는 중이었고, 불굴의 이성과 의지를 가진 철인의 뒤로 짙은 그림자가 뻗어내려 우주선의 뒤까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참으로 장엄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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