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가작 아마존 바이러스

2011.10.01 00:4710.01

   1

   그 결정은 쉬움 그 자체였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아쉬움 쪽으로 저울이 기울었다. 만약 결정을 내리던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다른 선택을 하도록 자신을 설득할 것이다. 아니, 협박하고 강요해서라도 그 결정적 순간을 파괴시킬 것이다.
   “앞을 똑바로 보세요.”
   안내자의 음성이 혜정을 현실로 이끌었다.
   하늘을 가린 거인의 진녹색 손바닥들, 땅을 폭격처럼 뒤덮은 갈색 융단, 끝없이 이어지는 아름드리 기둥들, 전 세계 인터넷 망처럼 복잡한 패턴의 거미줄, 눈물을 머금은 듯 촉촉한 대기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기괴한 웃음소리, 헉헉대는 자신의 숨소리와 긁히고 쓸려서 따가운 상처들. 혜정을 둘러싼 모든 것이 그녀를 옥죄어왔다.
   “아마존이라니, 내가 아마존이라니.”
   그 순간, 그녀의 몸이 함정에 빠진 듯 푹 꺼져들었다.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와 영화를 보러가기로 한 날, 그녀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당연히 남자의 전화일 거라 생각했고 그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그녀는 경쾌한 코맹맹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남자의 목소리가 무겁고 둔탁했다.
   “저 오늘 못나가요.”
   그녀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으나 이내 걱정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대답이 없었다.
   “말해봐요.”
   매니큐어를 바르던 손이 멈칫했다.
   “말해줘요.”
   이윽고 대답이 들려왔다.
   “우리 그만하죠.”
   어깨에서 수화기가 미끄러져 내렸다. 수화기에서 넘어온 ‘우리 그만하죠’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매니큐어 브러시를 든 손이 바르르 떨렸다. 공들여 칠한 손톱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아세톤을 어디에 뒀더라?’
   그녀는 아세톤을 못 찾으면 곧 죽을 사람처럼 화장대를 뒤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혜정은 자신이 죽은 것이라 단정했다. 주변이 온통 붉은 빛이었고, 찐득찐득한 액체가 그녀의 몸을 뒤덮고 있었으며, 시큼하고 톡 쏘는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몸에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시력이 완전히 돌아오자 그녀는 동그란 양 무릎을 볼 수 있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태아처럼 웅크린 자세를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죽는다는 건 태어나는 것과 비슷하구나.’
   혜정은 눈알을 굴리며 천사가, 부처가, 시바가, 하데스가, 염라대왕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별다른 사건 없이 더디게 시간만 흐를 뿐이었다. 정신이 몽롱해졌고, 옷이며 머리카락 등이 서서히 녹아내렸으며, 슬슬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배고픈 걸 보니 아직 살아 있나봐.’
   혜정은 머리를 굴려 피자를, 카레를, 라면을, 김치찌개를, 밥을 떠올렸다. 갑자기 붉은 벽 한 곳이 찢기며 신선한 바람과 빛이 들어왔다.

   그녀는 습관처럼 외출준비를 끝마쳤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기엔 망설여졌다. 표를 버리자니 돈이 아까웠고, 혼자 영화를 보는 건 왠지 안타까웠다. 현관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는데 발치에 놓인 구두 한 켤레가 눈에 밟혔다. 오늘을 위해 어제 산 빨간 구두였다. 문 쪽을 향해있는 구두코를 보자 콧등이 시큰거려왔다.
   비어있는 옆자리를 볼세라 서둘러 입구에서 나눠준 안경을 썼다. 어쩌다 이 꼴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문득 남자의 스쳐지나듯 보인 심각한 표정이 입체적으로 떠올랐다. 그녀가 자신은 결혼을 하면 바로 직장을 관둘 거란 소릴 한 직후였다. 남자에게 자기가 현모양처감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낸 작전이었지만, 남자의 표정변화에 그녀는 급히 생글거리며 “왜요? 맞벌이해야 돼요?”하면서 작전을 변경해야만 했었다.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새드무비’라는 팝송이 생각나서였다. 그러나 그녀는 눈물은커녕 눈 깜박일 틈도 없이 화면에 빨려 들어갔다.

   “큰일 치를 뻔 했어요.”
   현지 가이드인 김이 말했다. 옆에는 웬 수염 덥수룩한 백인남자가 서있었다. 그가 영국의 유명한 식물학자라고 소개한 김은 지금 혜정이 누워있는 곳은 이 분의 오두막이며, 날이 밝는 즉시 그녀를 병원으로 호송할 계획이라고 장황하게 설명하였다. 김의 설명이 끝나자 학자가 뜬금없이 혜정의 이름을 영어로 어떻게 쓰는지 물어보았다. 영문을 몰랐지만 혜정은 그가 건넨 메모지에 ‘Hye-Jung'이라 적어주고는 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김이 학자에게 통역을 해주었다. 그러자 학자는 수염 달린 아이 같은 얼굴이 되더니 사진첩을 하나 가져왔다. 첫 번째 사진은 어떤 거대한 꽃 옆에 아이가 앉아 있는 사진이었다. 학자의 말을 김이 통역 해주었다.
   “이 꽃은 자이언트 라플레시아라고 세상에서 가장 큰 꽃이에요. 그리고 이건 식충식물 네펜데스입니다.”
   영국태생 식물학자의 이야기는 이내 삼천포로 빠져버렸다. 아마존강 유역에 곤충 따위가 아니라 재규어나 맥을 잡아먹는 거대한 식물이 있을 거라 믿었던 유년시절에서부터, 이곳에 터를 닦기까지의 유구한 스토리였다. 혜정은 이야기를 끊고 질문에 대한 답을 요구하고 싶었지만 수염 덥수룩한 백인남자의 열띤 연설과 보면 볼수록 어수룩해 보이는 동양남자의 진지한 통역이 이루어내는 앙상블을 떼어놓는다는 것은 어쩐지 죄악 같아서 가만히 듣기만 했다.
   ‘아, 나는 커다란 꽃에 갇혀 있었던 거구나.’
   그녀는 스스로 결론을 내려야 했다.

   영화를 관람한 후로 그녀는 밀림에 대한 열병을 앓게 되었다. 특히 밀림을 다룬 영화나 다큐멘터리에 탐닉하기 시작했는데, 제목만으로 ‘정글피버’라는 영화를 보았을 정도였다. 그녀는 영화를 보는 내내 밀림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영화는 바람피우는 흑인남자 얘기만 실컷 떠들어대다 끝나버렸다. 주인공남자가 부인이 누운 침대로 기어들어가는 엔딩장면을 보며 그녀는 텔레비전 화면에 리모컨을 냅다 던져버렸다.
   그 다음으로 그녀는 직접 밀림을 구현해보고자 했다. 집안 가득 화분을 들여놓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인간이 남자한테 차이더니 식물인간이 되어버렸다’라는 친구의 험담에 가까운 농담을 듣고서도, 그녀는 마치 자신이 보살피는 화초들이 가엾은 중생인마냥 보살미소를 띤 채로 이파리들을 하나하나 닦아 나갈 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나중에 크면 왕자님 만나러 가려 모았던 유럽여행자금에까지 손을 대게 되었다. 인터넷에 아마존여행 패키지가 뜬 것이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여행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어느 댓글에 따르면 그것은 지구온난화와 더불어 정글이 이슈화되면서 파생된 불순한 상품이었다. ‘4대강 알바냐?’ 밑의 댓글이었다. ‘무상급식 알바냐?’ 그 밑의 댓글이었으나, 둘 다 그녀의 알 바는 아니었다.

   상공에서 내려다 본 밀림은 말 그대로 빽빽한 식물의 세계였다. 도시에 길들여진 사람을 비롯하여 그런 사람들에게 길들여진 개나 소 같은 동물은 절대 와서는 안 될 곳이었다. 어지러움을 느낀 혜정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무임승차하는 바람에 머릿속이 제멋대로 어질러져 있었다.
   그렇다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마냥 즐거운 것도 아니었다. 성인여성을 집어삼킬 만큼이나 커다란 식인식물이 학계에 보고되었고, 병실에 누운 채로 찍힌 그녀의 사진은 인터넷을 떠돌며 그녀에게 ‘왕꽃선녀’라는 별명을 안겨주었으나 곧바로 ‘사진 속의 여자가 선녀는 아니지 않나’라는 중론이 힘을 받게 되면서 ‘왕꽃녀’로 단계조정까지 거친 상태였으며, 그놈의 인터넷은 세계 방방곳곳 안 터지는 곳 없이 사람 속을 터지게 만드니 말이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못생겼다고 얼굴로 주먹을 받아본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얼굴 때문에 주목을 받아본 경험도 없던 혜정으로서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들킬 염려만 없다면 뎅기열을 핑계로 귀국을 미루고 싶을 정도였다.
   혜정은 열병에 걸린 듯 한껏 달뜬 상태로 브라질행 비행기에 오르던 때를 떠올렸다. 할 수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그녀에게 닥쳐올 무시무시한 시련을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이쯤 되면 설득하거나 강요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자신이 겪은 일을 조곤조곤 들려주면 될 거였다.

   재정난에 쪼들려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던 한 여행사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아마존여행 패키지의 신청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늘 그렇듯 관심은 무관심의 반대말일 뿐이었다. 행동, 특히 지갑을 여는 행동을 요구하기에 그들의 ‘아바타가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비행기에 타시겠습니까?’라는 선전문구는 무척이나 위험해 보였다. 누구도 여행사의 마루타가 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 인원부족을 이유로 여행상품을 취소시키려는 여행사측을 어르고 달래 죽어도 할 수 없다는 투의 각서까지 쓰고서 여행길에 오르는 그녀만은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공항 대기석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이번 여행을 일종의 관문이라 생각했다. 아마존에 가면 영화에서 본 것처럼 이제까지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버릴 으리으리한 수련을 하게 될 것만 같았다. 물론 영화에서처럼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가 원한 것은 누구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끔 커다란 익룡을 타고서 돌아오는 것이었다.
   마침내 탑승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게이트로 들어서며 배웅 나온 이 하나 없는 뒤를 괜히 한 번 돌아보았다. 사람들 뒤로 거대익룡에 걸터앉아 손을 흔들어 주는 여자가 있었다. 환영하는 이 하나 없을 오지로 떠나며 그녀는 미래에서 온 자신의 환영을 보았다. 물론 자세히 보았더라면 가지 말라고 손을 휘젓는 것임을 알 수 있었을 테지만.

   2

   화장실 거울을 통해 본 얼굴이 간장을 한 사발 들이킨 사람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낯가림이라도 생길 것처럼 낯선 얼굴이었다. 스물아홉 해 동안의 변화보다 지난 일 년여에 걸쳐 일어난 변화가 큰 탓이었다. 혜정은 긴장을 떨치기 위해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켰다.
   “언니, 녹화 시작한대요.”
   밖에서 코디네이터 최의 음성이 들려왔다.
   “응, 나갈게.”
   혜정은 다시 한 번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달걀만 한 달걀형 얼굴, 쌍까풀 진 큰 눈에 살짝 쳐져 있어 온화해 보이는 눈매, 하이힐에 올라선 듯한 코, 금방이라도 거짓말을 쏟아낼 것 같은 새빨간 입술. 마치 거울이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쩜 이렇게 예쁠까!”
   감탄이 절로 나왔다.

   어느 아침, 첫 번째 변화가 그녀보다 먼저 일어나 있었다. 침대에 누운 채로 아침방송을 보던 그녀는 무심코 머리께로 손을 가져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머리카락이 만져지는 것이었다. 반 쯤 감겨져 있던 눈이 번쩍 떠졌다.
   “모자요. 머리가 빨리 자랐으면 좋겠어요.”
   텔레비전을 통해 그녀가 했던 말이 들려왔다. 아마존에 다녀와서 가장 달라진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실례지만 모자를 한 번 벗어주실 수 있으실까요?”
   사회자의 넉살에 방청객 아주머니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녀는 화장대 앞으로 갔다. 거울에 긴 생머리를 한 여자가 서있었다.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에 넣고 죽 훑어보았다. 샴푸광고에서나 볼 수 있는 부드럽고 윤기 있는 모발이었다. 여러모로 신기한 아침이었다. 자신의 달라진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먼저 확인했다는 점도 그렇고, 하룻밤 사이에 머리카락이 이렇게나 자라있다는 점도 그랬다. 왠지 기념이 될 것 같아 그녀는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와, 정말 대단하네요! 이렇게 변해도 생명엔 지장 없는 거 맞죠?”
   가수 현이 놀라울 정도로 놀란 표정으로 외쳤다.
   “이 사진들을 다 직접 찍으신 거예요?”
   그러면서 개그맨 전은 과장된 동작으로 사진들을 품에 쓸어 담는 시늉을 했다. 그의 행동은 배우 송에게 ‘아실만 한 분이 왜 이러시냐’며 저지를 당했다. 될 수 있는 한 크게 웃어달라는 작가의 당부가 떠오른 혜정은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그러니까 혜정 씨가 아침에 일어나서 맨 처음 하시는 일은 사진을 찍는 거군요?”
   배우 송이 물었다.
   “아, 요즘은 안 찍는데요.”
   “왜요?”
   “이제 다 변한 거 같아서요.”
   별 이야기 아니었는데도 가수 현과 개그맨 전과 배우 송이 폭소를 터트렸다.

   횡단보도에서, 정류장에서, 지하철에서, 영화관에서, 식당에서, 카페에서, 명동 한복판에서 사람들은 마치 눈 덮인 길을 바라보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면 황급히 눈길을 치우곤 했다. 그들은 그녀가 부딪치거나, 미끄러지거나, 밟거나, 가리거나, 쏟거나, 깨거나,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리더라도 그녀를 어여삐 여겼다.
   예뻐지니 예쁨 받는 것은 거저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얼굴이 변하는 만큼 세상도 변해갔다. 미의 파도가 실어다 준 신세계에서 그녀는 사랑을 얻고 슬픔을 선사하는 샤롯테였다. 그녀에게 있어 예쁨은 곧 기쁨이었다.
   그녀의 미모가 연예인 뺨을 내키는 대로 후려칠 수 있게 되었을 때쯤 그녀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그녀의 아마존여행을 소재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취재를 허락했다. 그리고 외출준비를 하듯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거울에 웬 여배우 하나가 들어앉아 있었다.

   “혜정 씨 본인이 직접 해야겠구나하는 생각이 딱 들더라고요. 저도 그렇지만 혜정 씨도 인생이 확 바뀌는 시점이란 걸 느꼈을 겁니다.”
   감독 구가 슬쩍 장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모 제약회사의 기획실장이자 회장 손자인 장은 혜정의 얼굴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혜정의 신경이 온통 장에게 쏠려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녀가 이때껏 받아본 관심 중 가장 중요한 관심이었으니까. 잘하면 한남동, 혹은 평창동행 특급열차에 몸을 싣게 되거나 못해도 광고 계약 건 하나는 따낼 수 있을 거였다.
   “오늘 방송은 어땠어요?”
   장이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혜정이 답하려는데 구가 끼어들었다.
   “네, 녹화가 아주 잘 나왔습니다. 마지막에 보인 눈물도 좋았고, 하하, 이 친구 배우로 대성할 겁니다.”
   “배우는 단계인 걸요.”
   혜정이 수줍게 웃었다.

   그녀가 영화 ‘아마존 아가씨’에 캐스팅된 것이 기사화 되자 인터넷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그녀도 모르는 과거사진이 인터넷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당연히 성형의혹이 불거졌다. 사람들은 그녀의 진심이 담긴 농담을 기대했다. 그녀가 예능프로에 나와 자신의 과거사진을 꺾으며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가시화 되길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는 진실을 택했다. 기자회견을 열어 ‘나는 성형하지 않았고 저절로 얼굴이 변한 것일 뿐’이라 밝힌 것이다.
   그녀의 돌발행동에 영화사에서는 난리블루스가, 한반도에는 난리테크토닉이 일었다. 그녀의 중도하차 여부를 두고 제작자와 감독 간에 실랑이가 벌어지는 와중에, 아직 촬영도 들어가지 않은 영화의 안티사이트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그중에서도 ‘아진요’라는 이름의 사이트에서는 소송을 준비 중이라고 협박까지 해왔으며, 그것이 알고 싶은 프로그램과 무슨 수첩인가 하는 프로그램, 심지어는 국가정보원에서까지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촬영을 시작할 수 있었던 건 불안을 느낀 투자자들이 자금을 회수하는 틈을 치고 들어온 모 제약회사의 기획실장이자 회장 손자인 장 덕분이었다.

   집 앞에 어김없이 응원편지가 쌓여있었다. 사람들의 180도 바뀐 태도가 신기해 항상 편지의 글자 하나하나를 소리 내어 읽던 그녀였으나, 지금은 빡빡한 스케줄 덕분에 피곤이 몰려와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혜정은 팬레터들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졌다. 그렇지만 마치 오래된 남편처럼, 잠은 축 늘어진 그녀의 육체를 외면했다. 가만히 누워서 눈이 충혈 되는 과정을 느끼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희미한 휴대전화의 진동음이 들려왔다. 그녀는 내팽개쳤던 핸드백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장의 전화번호가 찍혀 있었다. 피식, 웃음이 났다. 온종일 각설탕 같은 미소를 짓는 것이 그녀의 일이었지만, 이렇게 진심에서 우러나온 웃음은 오랜만이었다.
   “네, 정혜정입니다.”
   “주무시고 있던 건 아닌가 보네요.”
   “그 쪽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장의 호방한 웃음이 넘어왔다.
   “드디어 내일이군요. 전 혜정 씨를 믿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하루 먼저인 점, 꼭 기억해둘게요.”
   이번에는 혜정의 애교 섞인 웃음이 넘어갔다.

   유일한 투자자가 된 장이 맨 처음 한 일은 그녀의 상대역을 교체하는 것이었다. 남자주인공이 귀공자 타입에서 코믹하고 짜리몽땅한 배우로 바뀌자 시나리오작가의 입이 한 발은 튀어 나왔다. 단기간 내에 수정해야 할 부분이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작가는 노골적으로 그녀에게 진상을 부렸고, 그녀의 연기에서 엿보이는 어두운 잔상을 파악한 장이 작가를 갈아버렸다. 연이은 해고사태에 새는 바가지마냥 어수선 했던 촬영장분위기가 단박에 수선되었다.
   들끓는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장은 그녀를 미국으로 보내 테스트를 받게끔 했다. 그것은 공정성을 기하는 동시에 전 세계에 충격을 가하는, 고도의 전략이었다. 과학자, CSI요원, 마술사, 특수효과 전문가로 구성된 팀이 꾸려졌고, 그녀는 촬영 틈틈이 미국으로 날아가 실험실 원숭이가 되어야 했다.
   가지고 놀던 공이 한반도 밖으로 굴러가자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가장 먼저 감을 잡은 것은 언론사였다. 그 감은 해외진출 운동선수나 한류 연예인과는 게임이 안 될 정도로 강력한 월드스타 탄생에 대한 예감이었다. 연일 그녀에 대한 찬양기사가 쏟아지니 사람들은 예전 기사들은 나 몰라라 했다.

   3

   오랜만에 마주하는 카메라였다. 혜정은 카메라를 돌려 찍힌 영상을 확인해보았다. 우측면에서부터 좌측면까지, 여전히 아름다웠다. 이런 미모를 그저 마모시키고만 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액정화면 속 얼굴이 씨익 웃어 보였다. 화면 안에 웬 여우 한 마리가 들어앉아 있었다.
   혜정은 카메라를 핸드백에 집어넣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거실에는 파출부 안이 스팀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혜정과 눈이 마주치자 안은 까딱 눈인사만 주고는 끝이었다. 혜정은 자신만 눈치 채게끔 은근한 유세를 부리는 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한마디 쏘아주고 싶었지만, 안방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을, 마음은커녕 눈에도 들이고 싶지 않은 노파가 떠올라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
   혜정이 들어서자 노파가 눈으로 혜정을 스윽 한 번 훑었다.
   “한 번 돌아봐라.”
   혜정은 반 바퀴째에서 눈을 한 번 희번덕거렸다가 미소 띤 얼굴로 얼른 바꿔 반 바퀴를 마저 돌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노파의 시선이 그녀의 핸드백 쪽을 향하고 있었다. 혜정은 노파의 시선이 엑스레이선이라도 되는 양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핸드백을 뒤로 감추었다. 노파가 혀를 끌끌 찼다.
   “그 물건 너무 튄다.”
   혜정은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중계에 못지않은 전 지구적 방송에 쭈글쭈글한 대머리 과학자가 나와 ‘속임수를 찾을 수 없었으며, 우리는 이 현상이 연구할 가치가 있다는 데에 동의했다’라고 말하는 순간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커다란 발자국을 남겼다. 사람들의 관심은 단숨에 그녀에게서 ‘Hye-jung’에게로 넘어갔다.
   세계에서 돈 좀 굴리고 머리 좀 굴린다는 투자자들이 아마존으로 향했을 때에는 이미 상황이 종료된 상태였다. ‘Hye-jung’ 주위 3킬로미터의 소유주가 유학파 출신의 추장 아들에서 한국의 모 제약회사 기획실장인 회장 손자에게로 넘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의 발길이 ‘Hye-jung’에서 그녀 쪽으로 돌려졌다. 그러나 그 역시 한 발 늦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결혼식엔 카메라 개수가 하객 수보다 많았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등장하자 노란 머리, 빨간 머리, 검은 머리, 흰 머리, 벗겨진 머리의 취재진들이 몰려들어 플래시 세례를 퍼부었다. 그녀는 몹시 행복했다. 그녀의 어릴 적 꿈인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는 공주님’이 이루어진 것만 같았다.

   운전하는 내내 혜정은 룸미러와 백미러를 번갈아 보며 뒤를 확인했다. 파파라치, 혹은 노인네의 프락치가 붙어 있을지도 몰랐다. 신호에 걸려 정차했을 때에는 옆 차를 의식해 괜히 뭔가를 찾는 척 글러브박스를 뒤지기도 했다. 혜정은 세상의 모든 눈들이 두렵게 느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향해있지만은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새카만 선글라스 속에서 그녀의 눈동자는 언제나 바삐 움직였다.
   장은 호텔 로비에 나와 있었다. 혜정을 발견하자 그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 까딱거렸다. 그녀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장의 붉어진 얼굴이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표정만은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장이 손을 잡으려 했지만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사람들 많아.”
   그의 음성은 그녀만 알아들을 만큼, 그리고 그녀가 알아듣게끔 낮고 따끔했다.

   결혼식 직후에 장은 그녀에게 배우를 그만 둘 것을 요구했다. 그녀로서도 배우는 단계였을 뿐 목표가 아니었으므로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러나 지금 회사가 중요한 갈림길에 놓여있으니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대목에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배우생활을 계속 하는 편이 영화제작 일을 하는 데에는 훨씬 더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신혼여행지를 아마존으로 택한 것은 장의 아이디어였다. 그녀의 반대를 예상했는지 그는 일정을 모두 잡은 후에야 그녀에게 통보해왔다. ‘Hye-jung’ 근처에는 별장이 딸린 연구소가 세워져 있었다. 그녀는 신혼여행 내내 그 꽃과 마주쳐야 했는데, 사실 그녀에게는 그 꽃의 존재가 여간 껄끄러운 게 아니었다. 특히 꽃의 찢어진 부분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도 오른쪽 가슴이 저릿해져왔다.
   장은 커다란 자궁처럼 보이는 꽃을 사랑스런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다. 꽃에게 질투를 느낀다는 것이 우습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종종 저 꽃을 꺾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세상에 단 하나 뿐인 꽃을 없애버릴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Hye-jung’보다 충실한 연구대상이 되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자진해서 신약개발실에 출근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곧 세상이 바뀔 거야. 우리가, 우리 아마존 바이러스가 세상을 바꿀 거라고. 응? 술이 비었네.”
   장이 말했다.
   “그만 마셔요.”
   혜정이 말했다.
   “그냥 마셔요, 응? 좋은 날이잖아. 안 그래, 천리마실장?”
   장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천에게 눈짓을 주었다. 천은 종업원을 불러 메뉴판을 가져오게 했다. 장과 천이 메뉴판을 보며 옥신각신 와인을 고르는 동안 혜정은 테이블 밑에서 문자를 보냈다. 잠시 후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두 남자가 동시에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장의 눈은 곧바로 메뉴판으로 돌아왔고, 천의 눈은 휴대전화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 사이 와인은 2005년산 골든아이 피노 누아로 결정되었다. 오바마 취임식에 썼다며 장이 고집을 피우던 종류였다.
   “저는 나온 김에 쇼핑이나 하다 들어갈게요.”
   혜정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장을 한 번 노려봤다. 그러나 장은 듣는 둥 마는 둥 잔을 채우고 있을 따름이었다.
   “적당히 마셔요.”
   천 쪽을 향해서는 웃음을 흘려주었다. 천의 얼굴이 방금 따른 와인처럼 붉게 타올랐다.

   처음에는 부창부수 격으로 장과 그녀의 호흡이 썩 잘 맞았다. 신혼생활의 대부분을 신약연구실에서 보내야 했지만 그녀는 싫은 내색 한 번 내비친 적이 없었고, 장과 시집식구들 또한 그녀의 작은 의사표현 하나 내친 적이 없었다. 그러나 투자대비수익이 손톱만큼도 나오지 않자 그들의 감춰두었던 발톱이 튀어나왔다. 순식간에 그녀의 지위는 굴러들어온 호박에서 깨진 수박쯤으로 하락했다.
   그때 등장한 것이 천이었다. 그는 짐을 싸서 나가는 연구원이 하나 둘 늘어갈 무렵에 오히려 신입연구원으로 지원해온 케이스였다. 게다가 그의 전공은 약학이나 생물학이 아니라 이론물리학이었다.
   천은 달리는 말만큼이나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연구소에 들어오자마자 한 달간을 그 동안의 실험데이터를 분석하며 지냈다. 자연스레 그의 별명은 천리마가 되었다.
   “요놈 때문이네요.”
   한달 후 브리핑에서 드디어 천이 입을 열었다. 그가 ‘요놈’이라 표현한 것은 ‘Hye-jung’의 소화액에서 발견된 바이러스였다. 하지만 그동안의 임상실험, 그러니까 사회적 지위나 재력을 이용해 임상실험자 자격을 따낸 여자들이 수차례 소화액에 푹 담겼다가 나왔을 때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던 터였다.
   “물론 보통은 인간의 면역체계에 의해 별다른 힘 한번 쓰지 못하고 제거됩니다. 그게 건강한 부잣집 마나님들이 아름다워지지 못한 이유입니다.”
   천은 그녀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저 쪽의 아리따우신 여성분은 당시 아마존탐험에 무척 지친 상태였습니다. 이 바이러스는 인간의 면역력이 약화되었을 때에는 엄청난 속도로 증식하게 되지요.”
   좌중의 끄덕거림이 엄청난 속도로 증식되기 시작했다.

   “왜 웃어?”
   혜정이 말했다.
   “아뇨, 좀 웃긴 생각이 나서요.”
   천이 말했다.
   혜정이 카메라를 작동시키고는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천의 팔이 그녀의 뒷목을 감싸왔다.
   “아마존 바이러스요. 줄이면 AV인데, AV에는 남자들만 아는 다른 뜻이 있거든요.”
   “뭔데?”
   “어덜트 비디오의 약자이기도 하죠.”
   “어덜트 비디오?”
   “흔히 말하는 야동이요. 지금 당신이 찍으려는 거.”
   혜정이 웃었다.
   “그럼 지금 내가 바이러스에 감염돼서 이런다는 거야?”
   “모르죠.”
   천이 웃었다.

   장은 아마존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유전형질변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질 약, 즉 예뻐지는 약의 이름을 ‘비너그라’로 명명했다. 미의 여신 비너스와 제약업계의 전설이 되어버린 비아그라를 조합해 만든 이름이었다. 가격은 999달러로 책정했다. 참말로 유치한 이름이고 치졸한 가격이 아닐 수 없었지만, 사실 예뻐지는 약에는 별다른 전략이 필요하지 않았다. 막말로 사막 한가운데에 막사를 쳐놓고 “예뻐지는 약, 1억 달럽니다!” 막 이래도 팔릴 물건이니 말이다.
   또한 장은 종교, 윤리적 규제와 과학적 임상검증 부분에 관해서도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그동안 ‘Hye-jung’의 소화액에 몸 한 번 담그려고 온갖 암투와 로비를 벌이던 고위층 여성들의 행태를 봐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온 세계의 종교계, 인권단체, 식약청, 무역협정, 그린피스, 무장단체, 성형외과 의사들이 연합해 덤빈다하더라도 거뜬히 이길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비너그라의 등 뒤에는 세계인구의 절반인 여성동지들과 또 다른 절반인 남성조력자들이 있을 것이므로.
   오히려 장이 신경을 쓴 쪽은 비너그라의 복제방지에 대한 부분이었다. 그는 바이러스의 특성중 하나인 무한 증식성을 제어할 방법을 찾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녀는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 장처럼 미국을 살 기세로 벌릴 달러에 대한 기대 때문이 아니라, 이제 한 가정의 부인으로서, 며느리로서 인정받게 되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 일가의 생각은 달랐다. 신약물질이 그녀의 몸에서 나온 게 아니었으니 외려 그녀는 손실을 일으킨 투자대상일 뿐이었다.
   그녀는 복수를 결심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상품이 장사꾼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복수란 자신의 상품가치를 싸구려로 전락시키는 것이었다. 그녀는 연구소에서 함께 살다시피 하며 이미 정분이 나있던 천을 이용하기로 했다. 천과의 정사를 카메라에 담아 전 세계에 무료로 배포하리라 마음먹었다. 다운로드 횟수가 미미하면 컴퓨터바이러스를 통해서라도 널리 퍼뜨리리라 생각했다.

   4

   간만에 타는 버스였다. 필수품이나 다름없었던 선글라스를 벗고 외출에 나선 것 또한 오랜만이었다. 차창에서는 화창한 봄 날씨가 상영되고 있었다. 혜정은 자리에 앉아 봄을 보는데 여념이 없었다. 근 5년 동안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보운전자처럼 앞만 보고 달려온 것에 대한 아쉬움이 몰려왔다.
   ‘초보미녀’
   혜정은 자신의 등에 그런 문구를 붙여놨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예쁨 받고 자란 여자들처럼 자신의 아름다움을 당연시하다 못해 무시하는, 그런 시크함을 그녀는 가질 수 없었다. 지금이라면 어렴풋이 감을 잡을 수 있겠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이제는 사람들이 그녀를 쳐다봐주지 않았다.
   눈두덩에서 느껴지는 아랫목처럼 뜨뜻한 햇살이, 렌즈색 하늘이 아닌 하늘색 하늘을 보는 것이, 무엇보다 자신의 얼굴에 1,2초 정도만 머물다 떠나는 타인의 시선이 혜정은 마음에 들었다.

   천과의 정사가 담긴 카메라는 고스란히 장의 손으로 넘어갔다. 명백한 배신이자 백신행위였지만 천을 탓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그녀 또한 그를 이용하려 들었으니 말이다. 어떤 심리가 작용했는지 모르겠으나, 그 후로 장과 천은 불알 두 쪽처럼 가까워졌다. 둘은 비너그라 개발의 막바지 작업에 몰두하는 한편, 그녀에게는 좋은 경찰 나쁜 경찰처럼 번갈아가며 연락을 해왔다.
   그 사건이 있은 후로 그녀는 장 일가에게 투명인간 취급을 당했다. 그들은 그녀에게 한 마디 말은커녕 눈길 한 번 건네지 않았다. 파출부만이 눈인사를, 그것도 하루일과중 하나라는 듯 건성으로 주고 말뿐이었다. 초등학교 때에도 당해보지 않은 왕따를 결혼 후에 당하게 될 줄은, 그녀는 꿈에도 몰랐다.
   “그러던지. 하지만 내 도움은 바라지 말고.”
   그녀가 별거 이야기를 꺼냈을 때 장은 툭 던지듯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그 날로 장 일가의 저택에서 나와 버렸다. 트레이닝복 차림에 모자를 눌러 쓰고서 마치 가벼운 조깅이라도 뛰듯이 밤길을 뛰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조깅은 백 미터 달리기로 변했다. 몇 개의 방범초소와 우렁찬 대형견들의 짖는 소리를 지나 차들이 다니는 도로변에 와서야 그녀의 뜀박질이 멈추었다.

   천의 전화였다. 혜정은 휴대전화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몇몇 승객들의 독을 바른 화살촉 같은 눈빛이 그녀에게 날아와 꽂혔다. 그들의 눈에는 시끄러우니 어서 전화를 받으라는 독촉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통화버튼을 밀어냈다.
   “네, 정혜정입니다.”
   “어디에요?”
   때마침 다음 버스정류장을 알려주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천은 그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가지 마요.”
   윤중로에는 벚꽃이 한창이었다. 작고 하얀 꽃을 단 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혜정의 눈동자가 그것들을 따라 잠시 흔들렸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가지 않는 편이 당신한테 이로울 거예요.”
   너무도 미련했다. 천에게 미련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끝까지 남자에게 기대보려는 자신의 기대심리가 역겨웠다. 혜정은 봄을 향해 활짝 벌어진 꽃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꽃이라면 지긋지긋했다.

   그녀가 예전모습으로 돌아온 것은 그녀가 붉은 꽃 속에 들어갔다 나온 지 꼭 5년째 되는 날의 일이었다. 미인으로 거듭나던 때와는 달리 원상복귀는 단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졌다. 마치 얼굴에 도둑이 든 것 같았다. 두 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킨 그녀는 거울을 샅샅이 뒤져 뭐 남은 것이 없나 살펴보았다. 그러나 은근히 마음에 들던 입술 옆 애교 점 하나까지 깡그리 사라진 뒤였다.
   몸매를 확인하려고 거울에서 한 발짝 물러선 순간, 그녀는 두 눈을 믿지 못해 두 손까지 동원해야 했다. 그녀는 웃옷과 브래지어를 동시에 까뒤집었다. 언제 이장했는지 두 개의 젖무덤 중 오른쪽 것이 밋밋해져 있었다. 말 그대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뭔가 집히는 구석이 있어 휴대전화의 국어사전 애플리케이션을 실행시켰다.

   아마존(Amazon):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자 무인족(武人族). 여자만으로 나라를 이루고 전쟁과 사냥으로 생활을 하면서 일정한 때에 다른 종족의 남자와 관계하여 자식을 얻는데, 아들일 경우 죽이거나 불구자로 만들었다고 한다. 활쏘기에 지장이 없도록 오른쪽 젖가슴을 도려내었다고 하여「가슴, 즉 유방이 없다」는 의미를 가진 아마존으로 불린 것이다.

   “아마존이라니, 내가 아마존이라니.”
   그녀가 중얼거렸다.

   혜정은 방송국 옆 공원 벤치에 한참을 앉아있어야 했다. 몇몇의 남자들이 담배를 바람처럼 피우고 종종걸음으로 떠나갔다. 일곱 번째 남자가 공원 쪽으로 다가왔다. 황피디였다. 혜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다.
   “정, 혜정씨?”
   “오랜만이네요.”
   “아이고, 참.”
   황은 놀란 표정을 애써 감추지 않았다. 곧이어 그의 눈이 그녀의 가슴 쪽으로 내려갔다.
   “뽕이에요. 확인시켜드려요?”
   “아뇨, 아뇨. 그러실 것까지야.”
   황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리곤 뭔가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인 듯 미간을 찌푸렸다.
   “취재 안하실 건가요?”
   보다 못한 혜정이 물었다.
   “그게 알아보니 무턱대고 건드릴 게 아니더라고요. 그 비너그라인가 하는 약의 존재도 불투명한 상황에서 말이죠.”
   “뭐라던가요?”
   “네?”
   “웬 미친 여자가 하나 갈 테니 잘 구슬려서 돌려보내라고 하던가요?”
   황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제가 사람을 잘못 봤네요.”
   혜정이 말했다.

   외모와 함께 자신감이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배우로 복귀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던 생각도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먹고 살아야할 날이 무서워졌다. 일자리를 구해야 했지만 어느덧 서른 중반이 된 별거녀를 뽑아줄 회사는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위협을 느낀 달팽이처럼 집 안에 틀어박혔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비너그라가 시판된 후의 일을 상상해보았다. 999달러면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달러 빚을 내면 구입할 수 있는 가격이었다. 세상 여자들이 모두 예뻐졌다가 5년 후에 본모습으로, 그것도 가슴 한 쪽이 사라진 채로 돌아오는 상상을 하며 그녀는 즐거워했다.
   ‘그때 남자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여자양궁이 인기종목이 되려나? 큐피트하고 아마존이 양궁시합을 하면 누가 이길까?’
   이런저런 실없는 생각을 하는 가운데, 그녀는 바늘로 오른쪽 가슴을 찔러오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통증은 점차 강해지다가 나중에는 숫제 쇠뿔로 들이받는 것 같기까지 했다. 그녀는 신음을 토해내며 침대 위를 굴렀다.
   고통을 느끼지만 아픈 곳이 없다는, 즉 상처를 치유할 물리적 방법이 없다는 점은 그녀를 정신없이 뉘우치게끔 만들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떠오르는 대로, 죄란 죄는 죄다 고해성사를 하기 시작했다.
   “남자에게 복수하기위해서 다른 여자들이 희생을 치를 순 없어요. 진실을 알려야만 해요. 그녀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 해요.”
   마지막 고백과 함께 그녀의 환상통이 물러갔다.

   “그립지?”
   전화를 걸어온 장의 첫마디였다.
   “왕년의 정혜정이었다면 방송국에서 이런 푸대접은 안 했을 텐데, 그치?”
   “그 정혜정이라면 이런 당신 말에 쩔쩔 맸겠죠.”
   혜정이 씩씩하게 맞받아쳤다.
   “어유, 쌈닭이 다 되셨네. 그것도 바이러스 부작용인가?”
   “부작용은요, 이게 작용인데.”
   “해보자 이거지.”
   “해보자 이 거지 같은 새끼야.”
   좀 유치한 구석이 있었지만 장에겐 제대로 먹혀들었다. 수화기에서 장의 씩씩거림이 들려왔다. 혜정은 그대로 전화를 끊어 장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속이 다 시원했다. 있지도 않은 오른 가슴에서 찌릿찌릿 오르가슴이 느껴져 왔다.

   외출준비를 끝마치는데,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백팩을 어깨에 걸고서 마지막 점검을 하기 위해 거울 앞에 섰다. 달덩이 같은 살덩이 얼굴, 쌍까풀 없이 찢어진 눈에 살짝 올라가 있어 성깔 있어 뵈는 눈매, 치마를 들친 듯 잽싸게 주저앉아버린 코, 살짝 겁주기만 해도 진실을 불어버릴 것처럼 얇은 입술. 거울은 가차 없이 진실만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얼굴은 자신감으로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라는 인식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생겨났다. 문득 그 내막이 궁금해진 그녀는 국어사전을 실행시켰다. 그리고 자신감을 찍어보았다.

   자신감(自信感): 자기를 믿는 감정

   지금껏 信을 身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자신의 무지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녀는 현관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마치 극장 문을 나서는 때처럼 눈부신 빛이 망막에 부딪혔다. 그녀가 세상 밖으로 한 걸음 내딛자 햇살이 그녀의 벗은 얼굴을 토닥여 주었다.
   그녀는 앞을 똑바로 보고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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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제목 날짜
가작 그가 기울어졌다 2011.12.3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1 2011.11.25
가작 채취선 2011.11.25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6 2011.10.28
가작 거미에게 나비를 2011.10.28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7 2011.10.01
가작 아마존 바이러스 2011.10.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5 2011.08.26
가작 외계인2 2011.08.26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3 2011.07.30
우수작 꿈꾸는 문들의 도시 2011.07.30
가작 Flash 2011.07.30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5 2011.06.25
가작 자동차 (본문 삭제)4 2011.06.25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3 2011.05.28
우수작 최고의 밤(내용 삭제) 2011.05.28
가작 히키코모리 방콕기 2011.05.28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6 2011.05.02
우수작 늙은 소녀 2011.05.02
가작 온기 2011.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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