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가작 Flash

2011.07.30 00:3307.30

Flash

#1
창문 바깥,
오토바이가 지나가는 소리에는 타인의 말이 섞여있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달리는 것에 의지가 들어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오토바이의 엔진이 부르짖는 가솔린의 불완전 연소에도 모두 의미가 있는 거다. 내게는 그만큼 불쾌한 일도 없다. 밤은 길고, 낮이 짧은 건 단지 오늘의 계절이 겨울이어서가 아니다.

해는 여전히 하늘을 지배하고 있다.



#2
아버지에게 병마가 달라붙는 건 비생산적인 일이라 여겼기에 평소에 잘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광대뼈가 도드라지고, 눈이 퀭하고, 팔에는 바늘이 꽂혀있고, 환자복을 입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그게 실제로 일어났을 때조차 나는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여겼다.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한 아버지를 한 번도 찾아가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달라붙은 병마로 괴로워하는, 힘들어하는 아버지는 꿈속에서도 합성되지 않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다.
공무원 세월 20여 년 동안 술과 담배, 그리고 친구에게서 떨어진 적이 없었던 아버지는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나보다 집에 일찍 들어왔었다. 시간은 오후 10시 40분. 어른들이 즐겨 사용하는 반어법의 논리에 따른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어둠을 턱까지 덕지덕지 칠한 아버지의 얼굴을 맞닥뜨렸다. 아버지는 옆구리에서 혹이 만져진다고 말했다. 암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앞서 언급했지만 아버지는 누가 보아도 건강한 사람이었다. 설령 신이 잘못하여 불치병을 내려줬어도 아버지에게는 단순한 몸살감기에 불과한, 그런 재미없는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몸살감기조차 운동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실제로 그걸 실행으로 옮기는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이보다 더한 병일 거라고는 추측조차 해보지 못한 거다.
의사인 형은 검사결과를 이렇게 설명했다.
-아버지. 현대인들은 누구나 4가지 정도의 병을 가지고 있어요. 엄청 건강해 보이는 사람조차 사실 병을 가지고 있는 거죠. 겉이 아무리 건강하게 보여도 속이 아플 수 있어요. 그러니까 아버지, 아프다는 건 정상이에요.
가문에서 처음으로 배출한 의사인 형의 말은 기묘한 설득력이 있었고, 아버지는 그때부터 자신이 병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시인했다. 아프다는 걸 순순히 받아드리는 아버지를 보며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병이 있다는 걸 정상으로 취급해버리는 논리를 수긍해버리면 이 세계를 의심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무서웠다.
아버지가 정말로 아파보이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토록 좋아하던 술과 담배를 끊자 친구들은 자연스레 멀어졌다. 아버지는 매일같이 만나던 친구들 대신 어머니를 자주 찾았다. 그건 아버지가 병에 걸렸다는 결정적 증거였다. 항암치료가 시작되면서 머리카락이 빠졌고, 눈물도 함께 새어나왔다. 부모님은 물론, 내 눈에서도, 베게에 묻어있는 머리카락들을 보면 버텨낼 재간이 없었던 거다.
다행스럽게도, 아버지는 병마를 떨쳐냈다. 현대의학은 12번의 항암치료와 2번의 수술, 다시 10번의 통원 치료를 통해 암덩어리를 떨쳐낼 수 있게 해주었다. 아버지가 암선고를 받은 지 60개월. 햇수로는 5년째의 일이었다.
그 5년 사이에 우리 가족에게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어머니는 성모 마리아의 배후를 봐주는 존재가 전지전능하다 믿었고, 형은 인턴에서 레지던트로 올라갔고, 나는 군대를 다녀왔고, 아버지는 말수가 줄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변화는 가족 모두가 영양제를 먹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현대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다는 질병 4가지를 이겨내기 위한 수단이었고 일종의 제의였다. 그렇기에 나도 빠질 수가 없었다. 아침마다 수저 옆에 놓여있는 비타민을 먹지 않으면 어머니는 곧 울어버릴 것 같은 눈을 했다. 또 누군가가 아프다면 나는 견딜 수가 없다는 의사의 표현이었다.



암은 제거 이후 5년 동안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아야한다. 그 사이에 재발하지 않는다면 그제야 완치가 된 것이라 여긴다. 아버지의 통원치료가 끝난 다음 내게는 새로운 일과가 생겼다. 한 달에 한 번은 근처 종합병원 내과에 들려 아버지가 복용할 약을 타는 일이었다. 그곳에 가야하는 일도 내게는 인정할 수 없는 어떤 것과 연계가 있는 것 같아서 싫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내가 가는 게 가장 합리적이다. 가족 구성원 중 오직 나만이 대학생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병원 가는 일을 지독히 싫어했지만 대학생이라는 명찰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병원에 가기 싫어하는 까닭은 단순하다. 어떤 냄새가 나를 자극한다. 나는 그것에 대해 몇 번이고 어머니에게 설명했지만, 그리고 몇 번이나 더 설명할 수도 있지만 내 장황한 묘사는 항상 알코올 냄새 범주에 머물렀다. 거기서 벗어나려고 해도 그럴 수 없다는 걸 곧 인정하고 말았다. 확실히 그 냄새는 코를 마비시킬 정도의 강력한 알코올 냄새가 섞여 있다. 그것의 강도를 쉽게 설명하자면 콧속에 박혀있는 수산시장의 비린내조차 내쫓아버릴 정도로 독하다. 살균제의 일종임을 자랑하듯 자기 자신의 냄새를 제외한 모든 것을 죽여 버린다. 그걸 인식해버리면, 순간 세상이 싫어진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그래서 다른 때와 다르게 오전에 가야만 했다. 다른 날과의 차이가 있었다면 고작 이 정도다. 내과 접수는 1층이 아닌 2층 원무과에서 해야 한다. 계단을 오를 때는 몰랐다. 2층 로비로 들어서려던 순간 시계에 들어온 바글바글한 아이들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1층으로 다시 내려가 버렸다. 아이들이 싫은 게 아니다. 그네들은 절대 혼자서 병원에 오지 않는다. 무료하게 모여 있는 어른들이 싫었다. 현기증이 밀려온다. 1층 로비의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잠깐 심호흡을 하고 일어섰다. 차라리 빠르게 용무를 보고 나가는 게 훨씬 낫다.
다시 2층으로 통하는 계단으로 들어서려는데 저절로 걸음이 멈춰졌다. 요컨대, 공기가 다르다. 앞서 설명했던 냄새가 코로 들어와 점막에 착착 달라붙는다. 뒤로 물러서자 알코올 냄새는 약해졌고 사람들의 향기들이 콧속에서 뒤섞였다. 구역질이 난다. 엘리베이터는 어디지.
후우. 낭비다.
단칼에 계획이랍시고 생각한 우회로를 차단하고 다시 계단이 있는 공간 안으로 들어간다.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2/3쯤 폐에서 공기를 내보낸 다음 숨을 멈췄다. 계단을 2개씩 껑충껑충 뛰어올라갔다. 스무 개가 넘는 제단들을 넘어 도착한 2층 로비 원무과에 아버지의 이름을 대고 접수하자 잠깐 기다려달라고 한다. 약만 타러 온 거니 곧 부를 거다. 이건 경험에 의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사람들이 몰려있는 의자들 근처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구토를 할 것만 같았다. 구석진 곳의 모서리에 기대 아버지의 이름이 호명되는 걸 기다린다. 냄새는 아직도 콧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래도 약해졌다는 게 큰 위로가 되었다. 손바닥으로 입을 가린다. 이것만으로도 조금 진정이 된다는 기분이 든다. 이 냄새는 분명 병원 전체, 구석구석에 머무르면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그저 구역질을 유발시키는 역겨움의 근원일 뿐이다. 언젠가 나도 이것들의 도움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아버지와 같은 암에 걸린다면, 치료를 하지 않고 그냥 죽음을 기다리겠다. 암이라는 것도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치는 내 이면의 모습이라 생각해보면, 도저히 싫다고 도려내버릴 수 있는 남의 얘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조금만 기다리라던 간호사의 말대로, 사람은 이처럼 많았지만, 내 순서는 금세 돌아왔다. 약을 타기 위해 필요한 처방전을 받아 원무과로 가니 2800원을 내라고 했다. 아버지가 준 카드 대신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 계산하자 세 장의 종이를 내게 건네준다. 한 장은 영수증이고 나머지는 약국에 줘야할 처방전이었다. 이제 머릿속에서는 여기서 어서 나가라는 명령어만 주르륵 입력된다. 다시 1층으로 내려가야 한다. 아까 지났던 계단으로 들어서자 아래층에서 누군가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다 눈이 딱― 마주쳤다.
그건 까마귀 같았다. 길조? 아니, 일본의 풍습이던가. 흉조? 아니, 그건 서양이잖아. 아 그래. 여긴 서양식 병원이니, 서양의 룰을 따라야겠다― 같은 오만가지 잡다한 연상들의 이어짐을 단칼에 끊어내고 미지의 것을 두려워하는 평범한 인간이 되기로 한다. 교과서적으로, 도망치는 거다. 뒤로 한걸음 주춤 물러서자 이래선 안 된다는 무엇인가가 내 다리를 붙잡았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던 그것이 내 움직임에 맞춰 왼발을 계단 위로 올린다. 한 칸 위로 다가왔다. 그리고 정지. 코가 뻥 뚫렸다. 그것이 움직이기가 무섭게 계단에서 머물러있던 비상식적인 냄새가 바깥으로 빠져나가려고 한다.
서둘러 다시 안으로 들어가자 까마귀 같은 것은 원래의 층으로 내려갔다. 냄새를 움직이던 미풍도 멈춰 섰다. 그 안에서 움직이는 대기는 내 폐에서 나오는 날숨뿐이었는데. 숨을 마셔야 했다. 그럴 필요성은 대단했지만 그러기가 어려웠다. 아이러니 하게도 필사적으로 호흡을 참는 까닭은 살고 싶어서다. 날개라고 여겨졌던 부분이 살짝 움직이자, 희끗희끗한 천이 보였다. 그러자 겨우 숨이 트였다. 현실로 돌아왔다. 그 안에서 떠오른 청색 글자는 병원이었다. 매의 눈이 날 살렸다. 발이 움직였고, 저 아래에 있는 건 그냥 지나치자고 생각했다. 내가 계단을 내려가자 그것은 아까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같은 층에 도달하자 두려움마저 사라졌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긴장감이 사라지자, 감각도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땅바닥을 밟고 있다는 느낌은 물론이고, 같은 층에 머무르기 전부터 후각은 이미 마비된 상태였다.
무서웠던 탓에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나는 다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까마귀일리가.
내 키만 한 까마귀가 있을 리 없다. 세상은 그처럼 만만한 곳이 아니니 뒤에 있는 요 새까만 물체는 깃털 망토를 두른, 그냥 사람일리, 그냥 환자일리가 없다. 납득해버리자 이상하게도 움직일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내가 지나쳐 나머지 계단을 내려가려고 하자 그것이 나를 잡아당겼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세계 군.
그것이 내게 말을 걸었다.



#3
-저승차사 유예입니다.
자신을 소개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쇠사슬이 그르렁그르렁 웃는 것처럼 들렸다. 쥐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간신히 대꾸했다.
-거짓말. 나 아직 건강―하다고 말을 하려다가 주먹으로 얻어맞은 것처럼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사람 인생, 한 치 앞도 모르는 일이라고 아버지를 통해 배우지 않았던가.
-당신이 무엇을 걱정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모두 쓸어 담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자 넋을 잃고 만다. 이 사람이라면 정말 따라가도 되겠다고 믿어버리게 된다. 그러면 끝이다. 하지만 이래서 사람들이 순순히 따라가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해버린다.
통각이 움찔, 화들짝 놀라 물러났다. 아, 움직였다. 나뿐만 아니라 그녀도 함께 움직였다. 까만 깃털 망토 안에서 나온 손가락은 유난히도 새하얗다. 마치 뼛조각처럼. 그게 내 볼을 쿡 찌른 것이다. 차갑다. 뜨겁다.
-아닙니다.
-아니라고?
그녀는 천천히 고갤 가로저었다. 명백한 부정이다. 안심해도 되려나.
-당신을 기다렸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건 데리러 온 것과는 다른 겁니다.
이번에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승차사의 기분을 감히 상하게 할 생각이 없다. 그러니 이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는 게 좋겠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것도 겁나서 입을 다물고 있자 유예가 화제를 돌린다.
-일단 여기서 나갔으면 합니다.
그녀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같이 가고 싶지가 않았다. 나를 데리러 온 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유예와 나 사이에 쌓인 신뢰의 높이는 계단 위에 떨어진 먼지 수준이다. 내가 머뭇거리자 유예의 표정이 구겨진 낙엽처럼 변했다. 주먹을 쥐자 마른 낙엽들이 조각조각 부서져 바닥에 떨어진다. 그런 모습이 연상되자 수명이 줄어들 것만 같았다. 간담이 절로 서늘해진다.
-세계 군. 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도와주십시오.
그건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명백한 강요다.



유예와 함께 1층 로비로 나가자 병원 전체로 지독한 알코올 냄새가 퍼졌다. 어른은 물론 아이들까지 입을 막거나 코를 붙잡고 미간을 찌푸린다. 들리는 말소리는 냄새를 맡지 못하는 뉴스 아나운서 밖에 없다. 그는 살인적인 물가 상승에 대해 말하고 있었지만 귀를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짜 살인적인 게 내 뒤를 따라오고 있기 때문이다. 알코올 냄새가 익숙해야할 간호사들마저도 침묵하게 만드는 절대적인 요소는 사실 냄새가 아니다. 평소보다 과한 알코올 냄새에 반응한 게 아니라, 단 하나의 존재를 눈으로 발견했기 때문이다. 병원 측 최대 불청객인 저승차사가 가져온 두려움이 전염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해졌다. 왠지 내가 죄인인 것 같다.
-시끄럽군요.
-거짓말. 이처럼 조용한 적이 없었다고.
-사람의 소리는 시끄럽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사람 아닌 것의 소리가 가득합니다. 그 소리는 나를 불쾌하게 만듭니다.
누군가 서둘러 Tv를 껐다. 접수처에 있던 간호사였다. 그녀에게 유예가 고개를 숙여 고맙다는 표현을 하자 화들짝 놀라 리모컨을 떨어트린다. 물건을 놓쳐 허전한 손은 여전히 부르르 떨고 있다.
나는 바깥으로 나가기 전에 리모컨을 주워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간호사는 반응도 없다. 어쩌면 폐기처분될지도 모르겠군. 이렇게 조용한 까닭은 어느 작가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동화가 일으킨 파문 탓이다. 저승차사는 소리에 민감해서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에도 짜증을 낸다. 그러니 숨소리조차 내면 안 된다. 대충 이런 이야기다. 물론 난 믿지 않는다.
계속 여기에 있으면 여기 있는 모든 이가 질식사할 것 같아서 서둘러 바깥으로 나갔다. 유예는 조용히 내 뒤를 따라온다. 병원 밖으로 나오자 이번에는 세상이 조용해졌다.
‘단절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알아차린 것 같군요.
유예는 단번에 내 반응을 파악했다. 거미줄에 걸린 나비가 된 느낌이다. 벗어나려고 파닥파닥 날개를 펄럭이면 오히려 더 숨통을 조여 온다. 그러니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말았다. 그녀가 내 옆으로 다가오자 목덜미가 서늘해진다. 오늘은 덥지 않으니 이마에 있는 건 아마 식은땀 같다.
-심장마비에 걸릴 거 같아. 좀 떨어지면 안 되겠어?
-실례.
다시, 그녀가 내 볼을 쿡 찔렀다. 이번에는 느낌이 좀 다르다. 얼음송곳이 쑥 들어갔다가 나왔다. 그리고 세계가 다시 노래한다. 이어졌다.
-기억나십니까.
잊을 리가 있나.
-당신은 부친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조건으로 그만큼의 수명을 오구신에게 바쳤습니다. 그때 당신을 인도한 게 바로 나였습니다.
-그때는 우락부락한 해골이었는데.
그녀가 양팔을 들어 올리자 까만 깃털 망토 안의 청색 글씨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부끄러운 것인지 지렁이처럼 꿈틀거린다. 살짝 드러난 겨드랑이 부분의 글자들은 나비처럼 날개를 펄럭이기도 한다.
-확실히, 당시와는 다르게 죽음에 대한 관념이 유연해졌군요. 바람직합니다. 당신은 당신 생각만큼 오래 살지는 못할 테니까요.
자신의 몸을 확인한 유예의 말을 들으니 헛웃음이 나왔다. 내게 남아있는 수명은 그녀의 설명대로다. 구체적인 숫자는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바리데기, 그 사람이 바로 오구신이다. 그분은 인간의 수명은 천기이기에 보통 사람은 듣는 순간 잊어버리게 된다고 설명해줬다. 유년 시절의 좋은 추억처럼. 인간이 오래 기억하는 건, 온갖 나쁜 기억들 뿐이다.
-날 데리러 온 게 아니라면 뭐야? 차사가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불안해한다고. 민폐야.
-내 용무는 이미 밝혔습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때 그랬지. 거래는 거래답게 오고가는 게 있어야 한다고.
오구신은 죽기 직전이었던 아버지의 수명을 연장시켜줬다. 갑자기 암이 사라지는 기적과 같은 방법이 아닌, 의심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기적으로. 그게 인간에게 주어진 것들이 힘을 행사하는 방법이라고 했었다.
-당신의 수명을 돌려줄 수는 없습니다. 이미 지불된 것이라 어쩔 수 없죠. 이쪽은 결과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줄 생각입니다. 어떻습니까?
-마음에 안 들어. 애초에 그쪽과 이쪽의 가치기준은 상이하게 다르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실망하진 않을 겁니다.
나는 배팅을 포기했다.
-거절은 선택사항에 없겠지. 내가 뭘 하면 되는데?
-아무것도.
무심한 표정이 기가 막혀 숨을 들이켰다가 짧게 끊어 뱉었다. 그녀는 눈을 한 번 깜빡인다.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건 당신의 운이니까요.



#4
병원 근처의 약국으로 가는 동안 유예는 사람이 가진 ‘운’에 대해서 설명해줬다. 모든 사람은 운명의 실과 별개로 저마다의 ‘운의 별’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에 따라 빛날 수 있는 시기가 정해졌다고 한다. ‘운의 별’이 가진 빛은 은은(隱隱)하여 쉬이 알아볼 수 없는 성질을 지녔는데 시간, 장소, 판단의 3요소가 딱 맞았을 때 최고의 빛을 발하여 마치 후광처럼 반짝인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2009년의 K선수처럼?
-누굽니까, 그게.
-아니. 신경 쓰지 마.
-김소월 시인은 죽은 이후에야 빛을 발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도 죽은 이후에나 빛을 발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지요.
약국 안으로 들어가자 귀여운 남자아이를 데리고 있던 아줌마가 비명을 지르려다가 간신히 입을 막았다. 그녀의 반응이 사람들의 이목을 이쪽으로 집중시켰다. 물론 그들이 관심을 갖는 건 내가 아니라 뒤따라 들어온 유예이다. 새까만 깃털 망토를 두른 그녀의 모습에 사람들은 저마다의 망상을 퍼트리며 두려움에 젖어간다. 그녀는 약국 안이 조용한 게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설명하는 목소리의 톤이 한층 가벼워졌다. 허나 내용은 전혀 가볍지 않다. 나는 약을 주문한 다음 의자에 앉아 그녀의 설명을 계속 경청했다.
-물론 다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행운의 이면에는 불행도 있지요. 어떤 수를 써도 꼭 손해를 보거나, 꼭 죽게 되는, 그런 별도 있습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협조를 구한다면서 꼭 나쁜 걸 얘기해야겠어? 무서워지잖아.
-알고 싶어 하는 건 당신 아니었습니까.
-그래. 알려줘. 꼭 내가 알아야 하는 것만.
-아니요. 그렇다면 됐습니다.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군요. 네, 알 필요가 없습니다.
앞을 바라보며 말하던 그녀가 갑자기 툭툭 내 옆구리를 찔렀다. 내가 왜냐고 묻자 그녀는 접수처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가 그쪽을 바라보자 약사가 황급히 접수처 밑으로 몸을 숙인다. 사람들에게는 유예가 어떻게 보이기에 이토록 무서워하는 것일까. 가서 약봉지를 잡으니 접수처 밑에서 손이 불쑥 올라온다. 왠지 이게 더 무서웠다. 약사가 손바닥을 보여주는 게 아무래도 돈을 내놓으라는 뜻인 것 같았다. 약봉지를 보니 아버지의 이름 옆에 작은 글씨로 5,800원이라고 적혀있다. 기가 찼다. 돈을 지불하고 뒤를 돌아봤을 때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유예의 앞에 아까 봤던 귀여운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심지어 그 둘은 대화를 하고 있었고, 아이는 까르륵 웃기까지 했다. 약국의 구석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있는 아이의 엄마가 불쌍해졌다. 카운터에서는 듣기 어려운 작은 목소리로 나누는 대화가 금세 끝났고, 아이는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면서 엄마의 품으로 돌아간다. 과하게 기뻐하는 거 같았다. 새파랗게 질린 아이의 엄마는 버럭 화를 내려고 했지만 저쪽에 있는 차사의 존재가 무척 신경 쓰인 탓인지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무사히 돌아온 아이를 꽉 끌어안는다. 아마 저 엄마의 가슴에는 화병의 씨앗이 자라고 있을 거다. 내가 걸어가자 유예는 차분한 목소리로 묻는다.
-용무는 끝났습니까?
집으로 가져다놔야 완전히 끝나는데. 하지만 유예가 거기까지 기다려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가시죠. 시간은 언제나 부족합니다.
이 정도면 많이 기다려준 겁니다. 이걸 완곡하게 표현한 거겠지. 나는 한숨을 내뱉었다. 조만간 분명 땅이 꺼질 것이다.



저승차사와 이동하는 건 마치 꿈과 같은 경험이다. 위기에 처한 공주를 구하기 위해 ‘하필이면 그 타이밍’이라는 것에 맞춰 등장하는 어느 나라 소식통 빠른 왕자님 같은 경험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나는 진짜 꿈을 말하고 있다. 꿈속에서 나는 갑자기 숲속에 있다가도,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면 산 정상에 서 있기도 하다. 그것도 반팔차림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바다가 보이고, 다음 순간 바다 위에서 서핑을 할 때도 가끔이지만 존재한다. 허나 앞서 이야기한 어떤 경우에도 이동하는 과정이 세세하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가끔 끊임없이 길을 걷고 꿈을 볼 때도 있지만, 심지어 그것마저도 내가 어떻게 그 길 위에 도달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항상 그렇다. 이 길을 걷고 있다는 걸 인식할 때면, 나는 이미 너무 자라 있었다.
숨 쉬는 게 답답했다. 좋지 않은 냄새가 코를 찌른다. 알코올 같은 게 아니다. 이건 아마 무언가 썩는 냄새. 공기는 이동하지 않고 한자리에 머물러 있다. 주변은 사물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어둡다? 아니, 어두운 게 아니다. 빛은 분명 존재하는데 눈으로 들어오는 양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여기는 어딜까. 좁다는, 갇혀있다는 압박감이 온몸으로 전해진다. 그래. 갇혀있다는 표현이 이 장소를 표현하기에는 가장 적절하다.
-여긴 어디야.
-보이지 않습니까.
-어둡잖아. 네가 보이는 게 고작인데.
유예는 내 앞을 떠나지 않고 서있다. 왜소하지만 믿음직한 등이다. 적어도 돌연사할 걱정은 없을 거 같다. 나는 움직여보려다가 멈췄다. 좁다는 게 이상했다. 내 주변에 적어도 벽 같은 건 없었으니까.
-움직이는 게 어려워.
-이해합니다. 정상이니 걱정 마십시오.
-아니, 정상이니 뭐니 해도 이래서야 널 따라갈 수 없잖아.
‘묶여있다’로 느낌을 고치자. 그렇게 생각하니 상황이 한결 이해하기 쉬워졌다. 유예는 내 눈을 멀게 하고 움직임마저 묶어둔 거다.
-편의를 위하여 시계를 조절했는데 지나치게 강했나보군요.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움직이지 못하게 된 건 예상대로입니다. 가만히 계십시오.
고마워 정말 죽겠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는 건 이런 의미였나.
-냄새가 견디기 힘들어. 기왕이면 후각도 마비시켜줬으면 좋겠는데.
-거절합니다.
말문이 잠깐 막혔다.
-왜? 위험하기라도 한 거야?
-물론, 그렇습니다. 보이지 않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하진 않겠죠. 갑자기 움직일 수 없게 된 것도 정상이 아닙니다. 그 상태가 오래가면 근육이 괴사하고 시신경에도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됩니다.
-……. 이봐. 그런 위험한 거라면 애당초 하지 말았어야지.
-인간의 뇌는 시각적인 정보를 가장 강하게 받아드립니다. 이건 오히려 당신을 위한 가장 적절한 조치죠.
-그렇다고 눈을 영원히 멀게 할 셈이야? 그리고 근육이 뭐?
-걱정 마세요. 아슬아슬해질 때까지만 즐길 생각입니다.
-너 방금 중간에 무시무시한 발언을 한 거 같은데.
-설마요. 기분 탓일 겁니다.
기분 탓일 리가 없지만, 정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구토를 유발시키는 역겨운 냄새가 시종일관 새로워진다. 이를 테면 온갖 썩은 내의 뷔페 현장에 뚝 떨어진 느낌이랄까. 고개를 돌리면 전혀 다른 냄새가 코를 찌르니 위액이 저절로 역류하려 한다. 무엇이 썩어가고 있고, 무엇이 이미 썩었는지 구별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냄새는 쉽게 맡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식당 뒷골목에 있는 쓰레기통에서도 맡아볼 수 없는 냄새. 생선 비린내보다도 자극적이고 암모니아보다도 독하다.
-가르쳐줄 수는 없어?
-물론 알려줄 수는 있습니다. 다만 후회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원합니까?
유예는 정말 걱정스럽다는 어조였다. 저승차사가 산 사람을 걱정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조금 감동을 받았고, 아주 무서웠다.
-아니. 뭐― 잠깐.
손으로 입을 급하게 막았다. 계속 말해서인지 갑자기 어지러움이 올라와 뇌를 때렸다. 구역질이 식도를 거슬러 솟구친다. 토해야한다는 생각이 불을 땐 아궁이처럼 활활 타오른다. 그런데 무섭다. 한 번 게워내면 두 배로 괴로워질 것 같은 불안감이 토악질을 억누른다.
인간의 뇌는 보는 걸 가장 강하게 받아드린다고? 좋은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동하기 전에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유예는 내 운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니 내가 여기서 뭘 할 필요는 없는 거다. 목줄을 한 개처럼 얌전히 있어주는 게 그녈 돕는 거다. 만족시키는 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참기가 어렵다. 비틀거리는 건 다리에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말 기절할 것 같아서다.
-괜찮습니까?
유예가 손을 뻗어 날 부축한다. 얇은 옷감 위로 그녀의 온도가 전해진다. 더없이 차갑다. 더없이 뜨겁다. 이건 쓰러져도 좋다는 그녀의 의사표현으로 봐야하는 건가.
-조금만 참으면 됩니다. 곧 끝납니다.
-뭐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영민한 사람이니.
흐흐. 침과 함께 헛웃음이 이빨 사이로 튀어나온다. 한번 쓰윽 닦아보지만 소용없다. 침은 다시 나온다. 영민하다고? 내 평생 그런 소린 처음 듣는다. 아니, 똑똑하다는 단어조차 생소한 인생이었다. 분명 날 지나쳐야 할 단어다. 그런데 발치에 머물러있는 걸 보니 역시 나를 지칭하는 모양이다.
-웃기지 마. 난 전혀 모르겠다고.
-당신이요?
그녀가 나를 놀리듯이, 의도적으로 말꼬리를 높여 말한다.
-아버지의 죽음이 예견되자 한 발 앞서 우리 앞에 나타나 거래를 제시한 당신이? 오구신께서 박장대소를 터트리시겠군요.
-그만 웃어. 제길. 퉤. 침이 그치지가 않잖아.
쓰윽. 그녀가 날 잡아당겼다. 흐릿하게 그녀의 웃는 얼굴이 정면에서 보였다.
-이제 됐습니다. 덕분에 방금, 마지막 별이 올라갔습니다.
미안. 못 들었어.
-뭐라고?
-아니. 괜찮습니다. 이제 기절해도 좋다는 말이었습니다.
고마워.
맘껏 기절해본다.



#5
벚꽃만을,

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떨어지면서 바람에 흩날리는 그 가벼움을 찬미한다. 완연한 봄이 찾아오면 길가의 가로수들은 죄다 벚꽃처럼 보인다. 조만간 세상이 이 가벼움에 취해 흔들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바람이 강하게 불었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세상 어디에 있을 지도 모르는 신을 향해. 하지만 바람이 한 차례 파도처럼 밀려와도 사람들의 시선에 밟힌 꽃잎들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한 자리에 계속 머물러 끝까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낸다. 감성은 거기서 그쳐 나아가지 못한다.
저승차사, 유예는 병원 화단 안쪽에 있었다. 그녀는 목련 나무의 둥치 근처에 서서 사람들이 정신 팔린 바깥의 풍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애초에 그때 그녀는 인간의 모습도 아니었다. 새까만 망토를 뒤집어쓴 백골에는 눈이 없으니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턱이 없다. 그래서 더 알기 쉬웠다. 그녀가 바로 죽음이 지척으로 찾아왔을 때야 볼 수 있다는 저승차사라는 걸. 말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몸이 저절로 다가갔다. 근질거렸다. 조바심이었고, 조심성이 없었고, 조급해할 필요도 없었는데, 아마 그건, 어려웠기 때문일 거다. 저승차사라는 것에 대해서.
모두가 벚꽃에 혼이 빠져나가 목련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는데, 그녀, 그러니까 유예만이 근처에 서서 바람을 쐬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접근한 거다.
-묘지기?
서있는 게 아니라 쭈그리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내 목소리에 반응한 유예는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기지개를 펴며 일어섰다. 사람들은 그제야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렸고, 바람조차 멈춰버릴 정도로 세상은 고요해졌다.
-내가 보입니까?
-누구를 데리러 온 거야?
-보이는군요. 당신, 곧 죽을 사람입니까? 아니면 관계자?
그녀의 말에 나는 아버지를 떠올리고 말았다.
-아버지를 데리러 온 거야?
묘지기였던가. 유예를 처음 봤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까닭, 아마도 그건 그녀 주변에 떨어져 있는 하얀 꽃잎들 때문일 거다. 바람에 굴하지 않고 제자리를 찾아 떨어져 자기 주위에만 흔적을 남기는 모습에서 나는 쓸쓸함을 발견했다. 떨어질 꽃잎은 아직도 많은데 아무도 그 녀석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게 꽃, 묘지처럼 보였다. 관심 받지 못해 죽어가는 것. 그래서 유예는 녀석의 곁에 찾아와 쭈그리고 있었던 거다. 기다렸던 거다. 나는 거기서 아버지의 잔영을 본 거다. 그리고 아까 그곳에서, 유예의 마지막 말에서, 나는 그때 만났던 쓸쓸함과 재회했다.
잠. 아니. 기절에서, 실신한 상태에서 깨어났을 때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오더라. 보였다. 세계가. 아주 또렷하게.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팔을 들어 올려 이마 위에 올려놓았다. 하늘은 더럽게 새파랗다. 구름은 또 더럽게 새하얗다. 이건 반칙이야. 그렇게 생각한 순간 시계가 희뿌옇게 변했다. 나는 잠깐 짐승이 되기로 했다.
-괜찮을 겁니다.
유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들리지 않았다. 나는 감정의 역류 속에 충분히 젖어있고 싶었다. 그래야 다음은,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대답이 없자 그녀는 내 곁으로 다가와 머리맡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둔탁하지만 금속음이 나무에 부딪치는 소리. 음료수 같았다.
-수분보충이 필요할 거 같아 가져왔습니다.
서술어가 상당히 거슬린다. 짐승 같은 흐느낌을 멈추고 손바닥으로 두 눈을 비볐다. 세상은 간신히 깨끗해졌다.
-설명해.
세상은 여전히 더럽다.
-설명?
아마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을 거다.
-설명 말입니까?
유예는 내 요구를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알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 알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래도 빠진 게 있다.
-내가 보지 못했던 거.
-그거라면 이미 설명하지 않았습니까. 마지막 별이 올라갔다고.
차사는 그렇게 표현하는 건가.
-거기서 몇이나 죽은 거야. 악보의 음표만큼? 백사장의 모래만큼? 하늘의 별만큼?
-안심해도 좋습니다. 당신의 운 때문에 죽은 건 그 사람 한 명 뿐이었으니까요. 조금은 위로가 되었습니까?
-또 필요해?
-물론입니다. 죽음을 원하는 이들이 세상에는 아주 많습니다.
원한다- 라. 팔을 치우고 누워있던 벤치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지금까지 목소리가 나왔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상표를 알 수 없는 음료수를 홀짝이고 있었다. 커피음료처럼 보였는데 내가 알고 있는 건 아니다. 유예가 가져왔다는 출처불명의 음료는 한약재처럼 쓰다. 유통기간이라도 지난 것인지 살펴봤지만 그것마저 찾을 수가 없었다. 단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내 혀가 이상해진 건가.
-유통기간은 오늘까지입니다. 그래서 가져올 수 있었죠.
어디서 가져왔는지가 아까부터 계속 궁금했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설마 쓰레기통은 아니겠지. 나는 일부러 엄지의 끝을 입에 갖다 댔다. 손톱 끝을 살짝 깨물면서 혀로 손가락을 핥았다. 미미하지만 짠맛이 난다.
-유아로 퇴행한 겁니까.
비웃음처럼 날아온 화살을 받아친다.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군.
-감사해야할 겁니다. 당신은 우리와 관계를 맺어 여러모로 이익을 봤으니까요. 그러니 괜히, 시비 걸지 마십시오.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에 수긍하면서도 의심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들은 철저한 등가교환을 요구한다. 내가 지금 당장 닥쳐주기를 원하는 건 그만큼 알아서는 안 될 커다란 것을 숨겨놓았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그녀가 몸에 뿌리고 다니는 향수 냄새 탓에 일부러 연기를 하지 않아도 몸은 저절로 위축된다. 알코올 냄새가 새로워진다. 그걸 잊으려고 쓰디쓴 커피 한 모금을 다시 홀짝였다. 싹 잊어버릴 정도로 딱 알맞게 쓰다.
-다음은 뭐야?
그녀가 음료를 내려놓는다. 목재와 금속의 중간소리가 귀에 꽂힌다. 갑자기 주위가 싸늘해졌다.
-똑같습니다. 늘 그렇듯, 또 누군가가 죽는, 그런 익숙한 일입니다.



이번에도 똑같이, 어떻게, 어디로 이동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방금 전보다 더 추웠고, 주변은 풀 한포기가 귀한 바위산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고산지대로 이동했을 거란 애매한 추측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자 두통이 쏟아졌다. 두서가 없어 혼란스러운 문맥들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대뇌피질을 긁어댄다.
나는 누군가를 죽이는데 필요한 도구로써 여기에 왔다. 이번에는 보였고, 움직일 수도 있었다. 아무런 제한이 없는 게 이상할 정도로 자연스럽다. 알코올 냄새가 강한 바람에 밀려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연해진다. 그 소리가 귓가에 휘파람처럼 들릴 정도다. 자유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웃겼다. 요상한 표현이다.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은 더없이 파랗다. 손을 뻗으면 잡고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하늘이 가깝다고 느껴졌다. 크레파스를 들고 회색빛으로 칠하고 싶다. 차라리 비가 내렸더라면, 기분이 좀 더 나아졌을 텐데.
-춥습니까?
-조금, 조금. 참을 수 있어.
유예는 허공으로 손을 내밀더니 시계방향으로 손목을 돌린다. 마치 밸브를 잠그는 것 같다. 그 동작을 5번 하고나자 그녀는 다시 팔을 내렸다.
-기온을 조절했습니다. 이게 한계치이니 참으십시오.
-더 따뜻하게 하면 기상이변이라도 일어나?
농담이었는데 아무래도 진짜인지 그녀의 표정이 진지하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이 주변만 조절할 수 있다는 개념이 아니니까요. 지구는 하나죠. 흔히 아이들이 부르는 것처럼.
따뜻했던 봄날은 지나가고 내 마음처럼 서늘한 바람은 바늘이 되어 볼을 쿡쿡 찌른다. 아까는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폐는 하얀 김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나는 황량한 바위산 주변을 둘러보다가 바위와 자갈의 축제 속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건 단어 그대로 점이었다. 불길한 붉은 점. 하나, 아니 여러 개가 피로연의 바닥에 뿌려진 꽃잎처럼 길을 따라 이어져있다. 바위산의 반대 방향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건 분명 핏자국이다.
-이번에는 볼 생각입니까?
그렇게 묻는 걸 보니 오히려 유도하고 있는 것 같아 꺼림칙하다.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이 죽음이 나와 관계된 거라면 나는 그걸 지켜봐야할 의무가 있―을까. 그게 맞는 걸까. 이게 차라리 권리라면 관심 없는 척하면서 거부할 수도 있을 텐데. 마치 투표처럼. 후우. 어느 쪽이어도 기분이 좋진 않다. 결국, 누군가는 죽는다.
-앞서 말했지만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곳에 당신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겐 충분한 도움이 되니까요.
-김전일이 된 기분이군.
-네?
-아. 모르겠군. 그런 녀석이 있어. 같이 여행가면 관계자들이 죽거나 다쳐야만 하는 만화의 주인공이지. 내가 지금 그런 상황에 처한 거 같아서. 아니, 그런 상황이군. 웃겨서 말이 안 나오네.
-웃지 않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만.
그녀의 말을 끊었다. 말려들었다. 나는 소매로 눈가를 닦아낸 다음, 유예에게 부탁했다.
-안내해줘. 어디에 있는지.
그러자 유예는 손가락으로 핏자국을 가리켰다. 내가 눈빛으로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안의 늪은 한층 더 깊어졌다.
점철된 핏자국을 따라 길을 걸었다. 앞서 가고 있는 유예라고 딱히 다른 건 없다. 심지어 약간 지루한 감이 있을 정도다. 그녀의 가벼운 걸음걸이는 아침운동 겸 가벼운 사색을 하러 나온 관광객 같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내가 보고 있는 것과 같은 핏자국을 따라가고 있는 걸 보니 앞장서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유예가 갑자기 사라지면 어떻게 하지라는 불안감 때문에 침묵을 다짐한다. 말에서도. 행동에서도.
얼마나 걸었을까를 철학적으로 계산해보자면, 현재부터 칸트까지 거슬러야할까. 처음에는 플라톤을 만나는 것도 기꺼이 감당하겠노라고 생각했지만 헛소리다. 밑창이 얇은 신발을 신고 바위산을 걸으니 피곤이 두 배로 나를 괴롭힌다. 벌써 물집이 잡힐 거 같다. 칸트에서 다시 토마스 아퀴나스까지 걸어가는 동안 내 발바닥이 제발 쉬자고 애원했다. 나도 더 이상 걷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다. 유예에게 쉬자고 말하려다가 숨이 막혔다.

왜 하필, 지금 이때, 당신이 거기 있는 겁니까.



#6
잘못 본 게 확실하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봤을 때는 유예가 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업어줄 생각은 없습니다만.
-누가 누굴?
오기가 생겨 괜히 지껄여본다.
-힘들면 도와줄 생각은 있습니다.
-아니. 괜찮아. 남자 체면이 있으니, 잠깐, 그냥 쉬면 될 거야.
갑자기 쉬기 때문인지, 여기가 고산지대이기 때문이지, 현기증이 밀려왔다. 두 손으로 무릎을 꾹꾹 누르면서 버틴다. 숨을 고른다.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자 유예는 자신의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쭉 기지개를 편다. 깃털 망토 안의 환자복이 보이자 갑자기 헛웃음이 나왔다. 아직도 저걸 입고 있는 것을 보니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졌다. 친근하다니. 이 무슨 망언인가. 다케시마 수준이다. 후우.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숨을 고른다. 아, 제길. 그래도 곧 죽을 거 같다. 다시 걸을 생각을 하니 정말 이게 마지막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발을 움직이려는 찰나, 저 멀리서 사람들이 보였다. 사람들. 산더미 같은 짐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우리와 반대 방향, 그러니까 산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었다. 직감적으로 저들이 실종자를 수색하는 팀이 아닐까라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나는 유예를 불렀다.
-왜 그러죠?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지어봤자 도와주지 않을 겁니다.
아차, 턱을 움직여 경직된 얼굴 근육을 풀었다.
-저 사람들 보여?
-네, 보입니다.
-우리랑 목적이 같은 사람들 같은데, 아니야?
빛이 사라졌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세상 어디에도 빛은 없다.
-그래서요?
생각지도 못한 반문에 숨이 막히고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아내가 사실은 나보다 여자를 더 좋아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의 충격일까. 아니, 그딴 걸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눈가 근육이 경련하면서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저들과 우리는 목적이 다릅니다.
숨통이 트였다. 나는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핏자국을 바라봤다. 이건 저들이 오는 방향으로 이어져있다. 이곳으로 오면 안 된다. 그들에게 돌아가라고 말해야한다. 위만 쳐다볼게 아니라 가끔은 바닥도 봐야한다고 말해야한다. 말이 안 통하면 어쩌지? 젠장! 지금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잖아! 나는 서둘러 그녈 앞질러 뛰어갔다. 사람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온갖 소리를 지르면서 그들에게 달려간다. ‘이상하다’라는 생각은 사실, 내가 그녀를 지나치면서 들었던 묘한 한숨소리 때부터 했다. 그들은 나를 지나쳤다. 철저한 무시였다. 없는 것처럼. 공기처럼. 심지어 육체적인 접촉도 불가능했다. 몇 번이고 그들의 어깰 붙잡아보고, 근심어린 얼굴에 침도 뱉어보고, 산이 무너져라 소리도 질러봤지만 소용없다. 멀어지고, 통과하고, 소멸하고, 어떤 것도 앞서가는 그들에게 닿지 못한다. 아무도 내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심지어 그들은 유예도 못보고 지나간다. 저승차사를 모를 리가 없는데. 여긴 그런 세계인데. 어째서?
유예는 내 앞까지 와서야 천천히 고갤 가로저었다. 역시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새들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중이다. 유예처럼 새까만 깃털을 두르고 있는 새들은 마치 훈련받은 우수한 견공님처럼 주변을 둘러보면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이름 모를, 그러니까 잡초겠거니 생각하고 지나쳐버릴 풀포기를 손에 쥐고 쓰러진 남자가 있었다. 천국을 향해 필사적으로 기어 올라가려는 퍼포먼스처럼, 그의 모습에서는 절망적일 정도의 처절함이 보였다. 아직 살아있다.
-저 남자에게는 암이 있었습니다.
입안이 메말라간다.
-하지만 암은 그의 생명을 앗아가지 못했습니다. 인간들이 흔히 기적이라 불리는 영광이 그에게 내려왔습니다. 그는 살 수 있었지만, 그의 아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때부터 남자는 다시 산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나라에 있는 모든 산을 올랐지만 그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산은 아직 충분히 많았습니다. 그렇게 산을 오르고 싶었던 까닭은 아내가 묻자, 남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산 정상에 올라 묻고 싶은 게 있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속으로 생각했다. 왜 저보다 먼저 아들을 데려가신겁니까.
-그리고 오늘 남자의 수명이 다 했습니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그의 아들이 연장해준 수명이 다한 것이지요.
말을 마친 유예는 나를 바라본다. 이를 악물고 대꾸하지 않는다. 어떤 단어라도 내뱉으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걸 마음으로부터 수긍할 거 같았다.
-한 번도 아버지의 병문안을 가지 않았지만, 사실 아들은 자신의 수명을 때어다가 아버지의 삶을 연장한 효자였습니다. 하고, 말할 수 있을까요.
쓰러져있는 남자의 떨림이 멈췄다. 새들이 기다렸다는 듯 움직인다. 종종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간다. 유예가 살짝 팔을 들어 올리자 새들의 고개가 일제히 이쪽을 바라본다.
-이러지 마.
침묵을 깨고 애원한다.
-이게 우리의 보상입니다. 저승차사가 되십시오, 세계군.
부탁이 아닌 명령조였다. 이후 어떻게 되리라는 건, 지금까지 이어졌던 이야기대로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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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그가 기울어졌다 2011.12.3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1 2011.11.25
가작 채취선 2011.11.25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6 2011.10.28
가작 거미에게 나비를 2011.10.28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7 2011.10.01
가작 아마존 바이러스 2011.10.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5 2011.08.26
가작 외계인2 2011.08.26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3 2011.07.30
우수작 꿈꾸는 문들의 도시 2011.07.30
가작 Flash 2011.07.30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5 2011.06.25
가작 자동차 (본문 삭제)4 2011.06.25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3 2011.05.28
우수작 최고의 밤(내용 삭제) 2011.05.28
가작 히키코모리 방콕기 2011.05.28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6 2011.05.02
우수작 늙은 소녀 2011.05.02
가작 온기 2011.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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