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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늙은 소녀

2011.05.02 11:5005.02

늙은 소녀

나는 밥을 한 가득 밀어 넣었다. 밥은 아밀라아제로 분해되고, 분해된 밥은 혀로 목구멍으로 내려가고 식도를 따라 꾸역꾸역 위로 밀려들어갔다. 잘 절여진 배추를 한 조각 주욱 찢어본다. 밥이 가득한 입을 열고 함께 밀어 넣는다. 발효가 잘 된 배추는 또 한 번 발효되기 위해 이빨로 뭉개지고 밥과 함께 넘어간다. 꽁치의 대가리를 잘 발라내고 가시만 빼고 훑어 씹는다. 잔가시들은 문제 될 것이 없다. 씹혀서 역시나 몸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위는 격렬한 운동을 통해 영양분을 흡수시키고 십이지장을 거쳐 소장으로 음식물들을 보낸다. 열량은 에너지로 사용되고 사용되지 않은 영양은 지방으로 남는다. 과다 섭취된 영양을 태우기 위해 운동을 한다. 처음에는 7km 정도로 천천히 뛰다가 13km로 빠르게 달리기 시작한다. 먹지 않았으면 움직이지 않아도 될 불필요한 운동이다. 그나마도 20분이 지나기 전에 몸은 지방을 태우지 않는다. 그것은 최후의 최후에 써야 할 영양소로 이것은 모순이다. 애초에 쓰여지지 않아 저장된 것을 몸은 무엇이 소중하다고 끝에서야 불태우기 시작한단 말인가. 지방은 효율이 높다. 탄수화물이나 단백질 대비 더욱 많은 에너지를 낼 수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나의 몸은, 우리의 몸은 효율을 추구하지 않는 것인가. 더러는 나의 의문에 대해 신의 뜻을 이야기 했고 수치로 정당화했지만 나는 이 이론들을 모두 받아들이지 못했다.

연구는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가장 최적화 된 필수 영양소와 열량 값을 찾아내어 그 값만큼의 알약을 만들었다. 알약은 생각보다 컸지만 목으로 넘길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아주 오랜 기간 이 약속을 지켰다. 알약은 내 몸이 돌아가는 충분한 에너지를 제공했고, 이 기나긴 임상실험이 끝나고 나면 틀림없이 명예와 부가 뒤따라 올 것을 의심치 않았다. 이것은 도전이고 반동이며 혁명이다. 먹는 즐거움은 비효율적이다. 이미 인간은 허락된 용량의 뇌를 모두 가동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다. 세 단계의 쾌락 중 가장 저급한 쾌락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최고의 쾌락을 얻을 수 있다. 저급한 쾌락에 묻히기 쉬운 고급의 쾌락은 몸을 움직여서는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알약이 인간의 문명 수준을 한 단계 올려줄 것이라 믿었다. 불필요한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깊게 생각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믿었다.

내가 이 실험이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인지한 것은 오랜 시간이 훌쩍 지나간 어느 날이었다. 뇌의 운동은 활발히 계속되고 있었으나 이미 다른 쪽에는 감각이 없어지고 난 후에 불현듯 날짜가 궁금해진 그 때에 나는 실험이 실패했음을 인정했다. 오직 뇌만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고,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철학적 즐거움으로 충만해 있는 순간 입을 떼어 이 위대한 발견을 찬양하려 해봤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내 입에서 나온 낮고 기괴한 괴성이 꿈처럼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그그하는 울림이 나의 이성을 배반했다. 그것은 인간이 아니다. 말을 할 수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알약을 먹으면서 충분히 입 주변 근육을 단련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털어 넣는 동작이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켰다. 식도의 움직임까지는 괜찮았는데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굳어버린 것인가. 심한 혼란에 빠져 몸을 일으켰다. 주변에는 빈 병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생각에 빠진지 얼마나 지난 것인가. 오동나무로 잘 짜여진 화초장에는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고 먼지는 식탁에도 침대에도 어느 곳에도 있었다. 드리워진 커튼을 제쳐 빛이 들어오게 해 보았다. 달빛이 너무 눈이 부셔 나는 고개를 돌려 빛을 외면했다.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에 먼지 조각이 떠다녔다. 내가 앉아 있던 의자는 네 다리 중 하나가 심각하게 썩어 있었다. 습기다. 나는 천장과 벽지를 둘러보았다. 코를 찌르는 곰팡이 냄새가 심하게 나는데 벽지는 이미 검은 곰팡이 위로 하얗게 또 다른 곰팡이가 피어올라 손쓸 수 없이 망가져버렸다. 어딜가나 냄새가 솟아올라서 코끝을 간질였다. 가난의 냄새이자 반지하의 냄새. 돌아가는 머리만큼이나 솟구쳐 오르는 먼지와 곰팡이와 포자들. 보이지 않는 포자들은 번식을 위해 습기를 머금고 낙하할 곳을 찾아 헤맸다. 단백질과, 풍부한 영양소가 가득한 그 곳으로.

내가 먹는 것을 최소화 한 채 살아왔을 때에도 계절은 흘렀다. 작은 - 아주 작은 창을 가끔 빗소리가 때리곤 했다. 빗소리는 타다닥 타다닥 춤을 추다가 빈틈으로 스며들었다. 얇게 발린 벽지의 사이로 빗물이 고이면 우리는 그것을 더 이상 빗물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혹은 눈이 쌓이기도 했다. 바람이 불기도 했다. 날카로운 바람은 창틀을 이리저리 흔들어대다가 자리를 피했다. 방 안은 바람과 격리되어 공기는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자기들끼리만 움직였다. 이곳은 나의 집이었고 누구도 내 집과 나의 계약을 무단으로 침범할 수 없었다. 이 계약은 대략 황금 한 덩어리의 가치였고, 나는 그것보다 더 높은 가치를 생산하기 전까지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내 뇌가 생각한 것들을 글자로 옮기는 것.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필요했다. 나는 곰팡이 핀 다리와 팔을 움직여 일어났다. 제쳐진 커튼의 틈으로 들어온 빛이 팔과 다리를 간질이자 오랜 시간 내 뇌와 함께 해온 몸이 바스라져 비명을 질러댔다. 뇌의 움직임은 생각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만, 몸이 움직이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더러 살점이 떨어져 꼴이 우습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움직여야 했다. 나의 머리는 앉아 있는 동안 우주를 탐험했다. 우주는 머리 안에도 있었고 새로운 별과 불명확한 암흑 물질들이 가득한 세상을 유영하는 동안 인류에게 필요한 많은 지식들이 내 머리 속에 차곡히 쌓였다. 이제 마지막 단계로 내 몸을 움직여 이 글을 쓰고 나면 나는 나의 지식과 새로운 발명품, 새롭다고 하기에는 조금 오래 된 발명품을 드디어 온전히 우리의 것으로 할 수 있을 터였다. 오, 인류. 그것은 매우 거창한 음파의 떨림이었으나 여전히 내 혀는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남은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나는 펜을 집어 들어야 했다. 기대와는 다르게 펜을 집어 든 손이 펜의 모양대로 움푹 패였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펜 안의 잉크가 이미 굳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대로 펜을 손에서 놓았다. 잠시 손 안에 머물러 있던 펜은 기괴한 곰팡이들과 함께 떨어져 내렸다.

삐-  삐 -
이명이 나의 귀를 괴롭혔다. 곰팡이와 함께 부서져 내리는 소리였다. 한 동안 눈을 감으니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제 나는 좀 더 머리를 굴려야 했다.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바로 내 움직이지 않는 혀와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언어라고 불리는 개념이었다. 언어는 사회에 따라 움직인다. 가장 유연하고 가장 적응을 잘 하는 개념으로 우리의 시간만큼 오랜 시간을 살아 왔다. 그렇다면 나의 시간은 지금의 개념과는 상충되는 흐름을 보였기 때문에 이 시간의 흐름을 굳이 계산해 보지 않더라도 언어는 통용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소리는 그 나름대로의 형태를 가지지만 그 형태를 결정하는 것은 시간이다. 시간이 언어를 도태시키고, 새롭게 형태를 변환하기도 한다. 이 개념을 긴 논문으로 쓸 자신이 있었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변한 몸을 어떻게 인류에게 받아들이게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언어를 쓸 수 없다면 인간의 오래 된 개념을 지금의 내 모습과 적용해야 했다. 거울을 본 내 모습은 문자 그대로 썩어 있었고, 드문드문 곰팡이가 피어 있었으며 그것은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었다. 깊은 습기를 머금은 그것들이 햇빛과 반응하여 움직이고 있었다. 무리해서 움직인 관절부분은 이미 안의 근육과 뼈를 드러내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한계까지 자라 이제는 자란다고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계속 머리를 굴렸다. 이 상태로 가장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쉬운 개념은 단 하나였다.

사람들은 그래서 나를 좀비라고 불렀다. 썩었고, 살아있으나 살아있지 않았으며 군데군데 살점이 떨어져나간 흉측한 외모와 어떠한 공격에도 죽지 않는 시체를 의미하는 개념이지만 실상 나는 시체가 아니었고 다만 생각보다 오래 살고 있는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최소한의 신체대사활동과 격렬한 뇌의 활동으로 세상과 자아를 단절시키는 것에서 이루어진 우연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발성 기관이 굳어버린 관계로 누구에게 이 사실을 알려줄 수는 없었다. 서인도의 제사장이 마약을 통해 사람을 사람이 아니게 만들었다면 나의 마약은 깊은 생각이었다. 강한 햇빛에는 오래된 몸뚱이가 견딜 수 없었기에 나는 부득이하게 움직이게 될 경우 밤에만 움직였다. 그래서 사람들의 공포는 배가되었고, 마을에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아무도 밤에는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미치광이와 성도착자와 인간의 마음을 잃은 괴물들이 활동을 시작하는 밤에 나는 유일하게 이성적인 존재였으며 그들이 신경 쓰지 않는 지적 생명체였다. 내가 밤에 어디론가 향한 것은 이론의 시험이었다. 곰팡이가 자라는 내 몸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나는 가끔 밖으로 나가 바람에 날리는 내 몸의 일부를 바라보면서 바람으로 대변되는 공기의 흐름, 사람들의 숨이 어떻게 공기에 위화감 없이 스며드는지에 대해 연구했다. 때로는 닭이나 돼지를 잡아 그들이 내 생각대로  인간들이 말하는 고차원적인 유희에 대해 자각을 하고 있는지 연구하기도 했다. 물론 그것이 주는 영양적 요소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아직 알약은 남아 있었고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돼지를 한 마리 잡아 돌아오는 날에 나는 한 소녀가 그 어둠 속에 서 있음을 알아챘다. 소녀는 겨우 나의 허리춤보다 조금 큰 키를 지녔고 붉고 작은 입술과 반달처럼 휘어진 눈매무새와 눈에서 조금 떨어져 매무새와 같이 휘어져 떨어지는 눈썹, 높지 않지만 부드럽게 인중과 연결되어 사나운 느낌이 전혀 없는 코를 가진 전형적인 소녀였다. 특이한 점이라면 앞머리 쪽으로 바짝 붙여 머리카락을 모은 뒤 복잡하게 꼬은 머리모양인데 어머니가 이 소녀를 굉장히 아끼고 있음을 의미했고, 답답해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이었는지 양 끝부분은 머리색과 같은 끈으로 매어 늘어뜨렸다. 커다란 모자로 포인트까지 준 소녀의 옷은 달빛에 반사되어 보아도 좋은 옷감을 사용해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많은 공을 들였으며, 바꾸어 말하자면 소녀는 이 밤중에 이곳에 나와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그녀는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다.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은 인간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으니까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뒤의 무언가, 어디의 어딘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커다랗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 보고 있었다. 나는 걷다가 내가 다시 틀렸음을 눈치 챘다. 그녀는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소녀에게 관심이 생겼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녀의 뒤로는 아무것도 없었다. 돌로 잘 다져 깐 거리와 드문 드문 서 있는 불빛들, 창가로 번져 나오는 따뜻한 색의 입자들과 음식 내음까지 어느 것도 소녀에게 위해가 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뒤로는 아무도 없었다.
“괜찮으세요?”
나는 손에 쥔 돼지의 시체를 떨어뜨렸다.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고 싶었으나 여전히 이지를 잃은 듯 느껴지는 괴성만이 목에서 흘러나왔다. 돼지의 시체, 쥐어 짠 목에서 나온 핏물이 돌 틈을 적시고 있었다. 나는 안타까움에 손을 뻗었다. 소녀는 돌과 돌만을 밟으며 나에게 걸어왔다. 어린 시절 하는 장난 같은 것이다. 앞으로 내딛다 주춤거리는 나에게 소녀가 타박거리는 작은 발걸음으로 재게 달려왔다. 나는 주춤거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소녀에게 나의 낡은 보금자리를 인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나는 작게, 또 위협적으로 괴성을 질렀으나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앞에 섰다. 싱그레 웃으며 소녀는 무언가를 내밀었다. 소풍갈 때 사용하는 바구니다. 하지만 바구니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소녀는 어쩌면 나에게 머릿속을 떠다니는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는 펜이 될 수도 있었다. 발성 기관의 탈락으로 실패한 실험을 발표하게 해 줄 하나의 펜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바라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닌 듯 했다. 그녀는 앉아 있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 작은 창문을 열고 먼지를 털어내고 바닥을 쓸어냈다. 축축하게 젖은 걸레로 벽에 가득 찬 곰팡이를 닦아 낸 뒤 짐짓 냄새를 맡아 보고는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다. 오랜 시간 한 자리를 맴돌던 공기는 소녀에 의해 집 밖으로 쫓겨나고, 시간을 건너 뛰어 현재의 바람이 방을 가득 채웠다. 낮의 공기는 밤과 다르며, 좀 더 따뜻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소녀는 오랜 시간 물에 먹은 장작 대신 어디선가 불을 일으키는 도구를 가지고 왔다. 며칠간이나 계속 된 청소였다.
청소가 끝나고 방이 정리되고 나서야 나는 생각보다 방이 커다랗다는 것을 알았다. 실상 생각을 하는데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쾌적한 환경이 싫은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생각을 하는 시간에 다른 것을 하는 것이 비생산적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으니까. 소녀는 매일 찾아왔다. 나의 집이 어디인지 알고 나서는 전혀 거리낌 없이 찾아왔다. 아침이나 점심이나 저녁이나. 종잡을 수 없이 찾아왔기에 나는 소녀 때문에 더욱 밖에 나갈 일이 없어졌다. 소녀는 그 무엇보다도 신기한 대상이었다. 나는 소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소녀는 항상 빈 바구니를 들고 나를 찾아왔다. 그러고는 청소를 하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 별 의미 없는 행동을 하고는 다시 방 밖으로 나갔다. 집으로 돌아갔다고 짐작은 할 수 있었지만 확신은 할 수 없었다. 어느새 나의 생각은 소녀로 가득차고 있었다. 우주의 탄생도 암흑 물질의 존재도 긴 인류의 역사에서 그들 나름대로 적어 내려갔던 기록의 반복에 대해서도. 그 어떤 거대한 질문도 이 모호한 궁금증 앞에서 서서히 잊혀져가기 시작했다. 소녀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소녀와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나오는 목소리는 지독하게 낮고 끌어서 간신히 내뱉는 신음소리뿐이었다. 그러면 소녀는 나에게 가끔 터져 나오는 괴음을 듣고도 별 반응이 없었다. 내가 그 오랜 시간 생각해온 어떤 지식도 소녀와의 대화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안타깝다. 나는 이전에는 과학자였고 철학자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이제는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몸이 다 썩어서야 나는 썩은 팔로 다리로 예술을 하고 싶었다. 이 불명확한 사랑을 표현하는데 그 만큼 적절한 것도 없었다. 명확하지 않은 사랑은 예술을, 명확한 사랑은 과학을 낳는다. 단순한 정보로 이루어진 나의 생각은 실상 언어로 바꾸지 않으면 어디에도 실체화 할 수 없었지만 실은 굳이 언어로 표현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었나. 나는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려 했지만 소녀를 연구하고 나서는 다른 방식, 비언어적인 표현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사람을 만나 소통하리라 예상하지 못했었던 때와는 다른 상상이었다. 소녀의 빈 바구니에 나는 무언가를 채워 넣으리라 다짐했다.

그 이후 소녀와 나는 얽히게 되었다. 소녀가 나에게 찾아 온 순간부터 소녀는 나의 행동을  결정했다. 어쩌면 그 반대일수도 있었다. 소녀는 무슨 일에서인지 한 동안 나에게 오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빈 바구니에 무언가를 채워 넣으리라 다짐했던 그 이후의 일이었다. 오랜만에 나는 계속 외출을 했다. 알약을 먹고 채워놓은 에너지보다 더 많이 움직였다. 이번의 외출도 실험의 범주에는 속했으나 이전의 연구나 실험과는 본질적인 부분이 달랐다. 내 달라진 생각은 소녀에게 속해 있는지에 관한 실험이었다. 평생을 생각으로 대체해오면서 나는 무한한 숫자를 상상하고 사람의 생각을 대입해갔으나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효율은 떨어졌고 지금에 와서는 틀을 넘어 다른 영역으로 넘어가버린 것에 대해 사유했다. 몸은 썩어갔지만 정신은 맑아졌다. 나는 좀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고 이번엔 움직이기 위해 가축을 잡았다. 소와 돼지와 개는 별 다른 어려움 없이 내 손아귀에 들어왔고 좀 더 움직이기 위해 나는 생으로 그것들을 뜯어먹었다. 입가에는 핏자국이 선명했고 어쩌다 만나는 사람들은 나의 접근을 더욱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소녀를 찾기 위해 다가가면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거나 악을 쓰면서 나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나를 피하고 도망가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나는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쪽에서 도망을 치려했으나 강력한 사람들의 힘 앞에 넘어져 바둥거리는 일이 많았다. 여전히 사람들은 내 소리를 이해하지 못했고 기껏 날 밀쳐 넘어뜨린 사람들도 내 모습을 보고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달아나버리곤 했다. 사람들은 제각기 모여 불꽃을 들어 어둠을 밝혔고 내가 걸어 다닐 공간은 점점 줄어만 갔다. 나는 드디어 초조해졌다. 소녀는 보이지 않았고 나는 이제 견딜 수 없었다. 내 머리에서도 호르몬이 분비 되는 것인지 궁금했다. 이것은 소녀에 관한 움직임인지 새로운 영역에 관한 궁금증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나는 견딜 수 없었다. 불은 좀 더 많이 들렸고 거리는 온통 불빛으로 넘실거렸다. 어두운 골목의 한쪽에서 나는 쥐 한 마리를 손에 든 채 낮게 울었다. 불빛 중 하나가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소리쳤다. 괴물이 나타났다! 나는 문드러진 다리를 부여잡고 뛰기 시작했다. 불빛 너 댓개가 뒤에서 쫓아오고 있는 것을 느꼈지만 마음보다 다리는 너무 느렸다. 만약 내가 여기에서 잡힌다면 오랜 시간 생각해온 것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소녀의 빈 바구니는 채워질 수 있을 것인지 상상했다. 이것은 확률이다. 내가 잡혀서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오면 빈 바구니가 채워질 확률. 가능성이 없는 확률. 아니면 지금 내가 잡히는 순간 바구니가 채워질 수도 있다. 과학이면서 예술. 좀비이면서 인간. 확률이면서 소망이다. 너무 높게 올라가면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썩은 시체로 받아들여질 때도 그런 일은 일어났다. 내 지식들도 이 두 가지가 뒤섞여 이제는 구분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혹시 내가 계속 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나는 좀비가 되었을지 생각해보았다. 이럴 거라면 바싹 말라서 미라가 될 걸 그랬다. 그랬다면 말이 쇠로 바뀌고 쇠가 날아오르는 시대에 나는 연구대상이 될 것이었다. 어쩌면 고도의 기술이 내 괴성을 언어로 바꾸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깊은 고통에서 나는 처음으로 후회했다. 불빛이 넘실거리고 무언가가 몸 속으로 틀어박혔다. 나는 고래고래 괴성을 질러댔고 순간 누군가 나를 잡아끌었다. 소녀였다. 나는 소녀의 바구니 속에 무언가를 넣었다. 쥐인가, 아니면 내 몸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소녀는 자신이 며칠 간 심하게 아팠다고 했다. 내 몸에 틀어박힌 막대기는 스스로 빼 버렸지만 막대기에 찔린 곳이 안에서부터 썩어 들어갔다. 그러나 딱히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영양분은 섭취하자마자 빠져나갔다. 구멍이 뚫린 몸에서 밖으로 알약이 떨어졌다. 소녀는 몇 번이나 나에게 다시 알약을 밀어 넣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한 가득 밥을 밀어 넣던 때가 그리워졌다. 소녀는 나에게 돌아온 이후로 계속 집안을 청소했다. 이 집에서 가장 썩은 냄새를 풍기는 것은 나였는데. 소녀에게 묻고 싶었지만 나는 여전히 대화 방법을 찾지 못했다. 소녀는 웃는 얼굴로 내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주기도 했다. 나는 어째서 소녀가 이리도 호의적인지 궁금했다. 아주 오래 전, 한 사람과 그 아이가 떠올랐다. 정말 빛나던 시절이었다. 나는 매우 영리했고 그때는 그들이 필요하지 않았었다. 인류와 과학과 새로운 세계의 발견이 가져다 준 희열. 그 강렬한 감각에 그들은 놓여있지 않았다. 나는 내가 바라던 새로운 세계가 소녀에게 있음을 알았다. 소녀는 분명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이다. 그것은 아주 긴 얘기였다. 나는 입을 벌려 낮게 소리 질렀고 소녀는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다가 싱긋 웃었다. 다음 날 그녀는 잡는 부분이 옴폭 패인 펜 하나를 나에게 선물해 주었다. 그것이 내 이야기를 알아들어서였는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이번에는 좀 더 힘을 주어 펜을 잡아보기로 했다. 나는 길고 긴 숫자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3011222819209510202010829201

모두 예전의 나를, 썩기 전의 나를 규정하던 숫자였다. 그 아래로 나는 계속 숫자를 써내려갔다. 소녀도 옆에서 빤히 나의 숫자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다 쓰고 나서 내 앞에 놓인 종이에는 의미 없는 숫자만이 길게 늘어서서 나를 비웃고 있었다. 소녀는 내 손을 다시 잡고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사랑
사랑
김숙자
사랑
사랑
나는 그냥 바라보았다. 소녀가 쓴 것인지 내가 쓴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간신히 대화가 이루어 진 것 같다고 느꼈다. 명예와 부를 바랬었는데, 좀비가 되어버린 나를 소녀는 알고 있었을까. 핏대 선 눈으로 어쩌면 한 쪽 눈은 이미 떨어져 나가 없을지도 모르는 얼굴의 그 구멍에서 나는 울었다. 왜 이제야 후회라는 감정을 배운 것일까. 방 안은 차가웠고 냄새나는 몸은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다. 차라리 소녀가 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추운지도 냄새나는지도 모른 채로 긴 연구를 계속해 나갔을 것이었다. 나는 내가 깨달은 마지막 연구를 소녀에게 실행해보기로 했다. 내 움직임이 소녀를 규정하는 순간을 찾고 싶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어떤 물체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론. 누군가는 양자역학이라고 부르고 누구는 사랑이라고 불렀던 실험. 나는 종이를 찢어 가슴에 채워 넣었다. 나의 이 행위는 어디에서 어떤 결과를 야기할 것인가. 제어할 수 없는 행동은 확률적으로 소녀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애석하게도 그 글씨 이후로 한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때까진 내가 살고 있는 곳을 찾지 못했고, 내 가슴을 막아놓은 종이는 문드러져 점점 썩어 들어갔다. 누군가가 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알약을 통째로 집어 삼켰다. 알약은 가슴을 통해 사랑이라고 수도 없이 적혀진 종이를 세차게 때리며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러자 사람들이 쳐들어 왔다. 이것은 내가 야기한 일인가. 실험의 성공 유무를 알 틈도 없이 누구는 소리를 지르고 누구는 작은 창문을 쨍그랑 깨어버렸다. 튄 유리 파편은 가슴에 박혔다. 가슴의 종이를 빼내고 사람들은 크게 울부짖었다. 그것은 내가 내 뱉는 소리와 다를 것이 없었다. 영화에서처럼 사람을 해치고 나와 같은 존재로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나는 가만히 있었다. 내가 물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알아서 그렇게 변해가는 듯 했다. 그 낡은 필름에서, 흑백의 어딘가에서 뛰쳐나오던 괴물과 같이. 나는 찔리고 또 찔렸다. 익숙한 고통은 내 눈을 감기고 고통 속에 생각은 휘발되어 사라졌다. 사라지는 것이었구나. 원래 생각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결국 형태로 남기지 못한 기억들은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남겨진 기억은 무엇이 있을까. 그 긴 고통 속에 나는 몸부림쳤다. 쏟아지는 알약들이 내 머리를 채워가기 시작했다. 원래는 바닥에 마구 흩어져 있어야 할 것들이었다. 어째서 내 머리를 채우고 있는 가. 알약은 최소한의 영양분으로 나의 기억을 가두기 시작했다. 위대한 발견도 깊은 사유도 지워져갔다. 일곱 겹으로 단단하게 코팅된 알약은 한 번 가두어 놓은 기억을 다시는 내놓지 않았다. 그 즈음에 눈을 잠시 감았다 떠 보니 이미 아무도 없었고 어두워졌으며 깨진 창문의 틈새로 그림자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은 마치 사람처럼 나왔다. 하아아. 나는 그 소리가 너무 이질적이어서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거친 사람들이 내 방을 엉망으로 망가뜨린 그 날, 소녀는 바구니에 무언가를 담아가지고 왔다. 입술을 빨갛게 물들이는 데에 쓰는 립스틱이다. 매우 진한 색을 지닌 그 립스틱을 꺼내 내 입술에 가져 댄 소녀는 해맑게 웃었다. 나는 그제야 소녀의 눈에 비춰진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더욱 가까이 나에게 다가선 소녀는 립스틱으로 말라버린 입술을 천천히 칠해갔다. 나는 어떻게도 움직이지 못하고 소녀의 가늘고 떨리는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이제 예쁘네요.”
소녀는 립스틱을 내 던지고 물끄러미 내 얼굴을 바라본다. 그리고 나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다시 내 얼굴이 소녀의 동공에 비친다. 합쳐진다. 0과 1이, 공기와 공기가 립스틱의 냄새가, 소녀의 냄새가 합쳐져 흘러간다.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았던 소리는 그제서야 꿈틀거리고 무한한 생각이 혀끝으로 몰렸다가 이내 어디론가 사라진다. 나의 높은 철학적 성취는 어디에 있나. 과학적인 발견은 어디에 있나. 이전까지 생각에 불과했던 것들이 현실로 튀어나온다. 그리고 부딪힌다. 그것은 나의 생각일 뿐이다. 나는 예전으로 돌아간다. 소녀는 그녀가 되어 급하게 나를 따라잡는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녀를 향해 빳빳하게 날을 세운다. 너도 나와 같으면 안 될 것이다. 입술 사이로 무언가가 흘러내리지만 닦아낼 수 없다. 겨우 이 시간이 되어서야 오랫동안 나를 지탱해온 집이 무너지고, 먼지만 쌓였던 머리가 유의미하게 바뀐다. 그것은 매우 오래 전의 일로 생각 했었는데 실은 그렇지 않았다. 바깥의 사람들은 나를 좀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아주 오래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잠들어 있는 이 후 나는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그렇게 방안의 한 가운데에서 마치 이 방의 일부분처럼 그렇게 존재했다. 이를 위해 알약이 만들어졌었다. 반짝, 하고 알약이 몸속에서 작용하는 순간에 움직일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 힘은 강렬하게 나를 끌어 들이는 기억의 빈틈으로 움직였고 나는 그 틈에서 소녀를 만났다.
그녀는 다시 립스틱을 들어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내 얼굴을 칠하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 칠해져 갔고 이제는 입술이 아니라 내 얼굴 전체를 칠하고 있었다. 무엇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이 낡아버린 얼굴에. 나는 그만 소녀를 멈추고 싶었다. 이제 나의 이야기를 들어다오. 아주 긴 이야기이고 썩어버리기 전 내 몸에 관한 이야기란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작은 알약에 갇혀버리고 말았지. 놀랍게도 소녀는 내 생각을 눈치 채고 망설임 없이 테이블 위의 작은 알약을 단숨에 집어 삼켰다.
“이것 말고 맛있는 음식을 드시는 게 좋아요.”
그녀의 눈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동자에 비친 나의 얼굴이 보였다. 소녀의 눈에 차라리 썩어 들어가는 나의 모습이 비춰졌었더라면. 그랬다면 더 편했을 것이다. 늙고 병들어 광대뼈가 앙상하게 나온 저 노인이 정녕 나의 모습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영양소를 채워주는 알약은 항생제가 되고, 가슴의 뻥 뚫린 구멍으로 종이 대신 호스가 박혔다. 나는 급격하게 쪼그라들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천장을 잡으려 했다.

삐- 삐- 삐- 삐-
다시 소리가 들리고 사람이 보였다. 나를 손가락질 하던 사람들. 펜으로 창을 만들어 찔러 대던 사람들. 연구는 모두의 이름으로 발표되었으나 실상은 내가 모든 것을 다 했다. 나는 억울한 마음에 소리쳤지만 누구도 나를 바라봐주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니 아무도 없었다. 사람과, 나의 아이는 어디로 갔는지 궁금했다. 맨 발로 밖을 뛰쳐나와 미친 듯이 걸으며 외쳐댔다. 의미 없는 사람의 이름을. 누군가가 무언가를 부르는 것 같기도 했다. 숙자야, 이제 그만 혀. 숙자야, 이제 그만 혀. 나는 내 귓가로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하고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평생을 연구했다. 다들 안 될 것이라고 했지만 나는 해냈었다. 그리고 그 이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며칠을 아무 것도 먹지 못하다 작은 창으로 슬며시 들어오는 햇살에 정신이 번쩍 났다. 부엌으로 나가 봤지만 부엌에는 아무도 없었다. 혼자서 반찬과 식은 밥을 꺼내고 한참이나 물끄러미 식탁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의자에 앉아 수저를 들고 나는 밥을 한 가득 밀어 넣었다. 밥은 아밀라아제로 분해되고, 분해된 밥은 혀로 목구멍으로 내려가고 식도를 따라 꾸역꾸역 위로 밀려들어갔다. 잘 절여진 배추를 한 조각 주욱 찢어본다. 밥이 가득한 입을 열고 함께 밀어 넣는다. 발효가 잘 된 배추는 또 한 번 발효되기 위해 이빨로 뭉개지고 밥과 함께 넘어간다. 나는 넘어 간 음식물을 다시 토해버렸다. 화장실로 미친 듯이 달려가 입 안을 헹구고 거울 속 얼굴을 바라보았다. 화장기 없는 늙고 주름 진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이론에 따르면 내가 한 행동은 반드시 연관되지 않게 느껴지는 어떤 존재에게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계산할 수 없다. 이전의 나는 이 이론을 신봉하지 않았지만 무엇이든 나의 생을 지탱해 줄 것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끌어 들여 보기로 했다. 어떠한 지배적인 수식도 나의 삶을 예측해주지는 못했다. 나의 연구는 나의 생각에 따라 이루어졌으나 어디에서부터 뒤틀려 버린 채 여기에 섰다. 내가 무엇을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주 초기의 사소한 일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째서 나의 인생은 비선형성을 띄게 되었는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책의 어느 페이지를 열어 남은 인생을 걸어보자. 그러자 어느 새 옆에 서 있던 좀비가 깔깔 웃으며 이야기 했다. 너에게 너의 인생이란 것이 있었니?

정신을 차리니 소녀는 나를 안고 펑펑 울고 있었다. 우는 것은 진부한 감정표현이란다 소녀야. 너는 이렇게 지루하게 살지 말렴. 다시 내 손은 예전처럼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가슴은 여전히 뻥 뚫려 바람이 새어 나왔고 소녀가 울며 나에게 먹이는 알약은 무의미하게 다시 쏟아져 내렸다. 소녀야, 그만해라. 소녀야, 그만 혀. 너무 과한 영양분이란다. 그건 하루에 한 끼를 먹기 위해 만들어진 덩어리였다. 누군가가 내 가슴에 차가운 구멍을 내기 훨씬 전부터 내 인생은 그 순간에 끝나 있었고 그 이후의 삶이 그저 썩어 가는 좀비의 삶이었을 뿐이었다. 나는 소녀에게 속삭였지만 소녀는 이전처럼 내 말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집요하게 들려오는 소리는 여전히 아무 감정 없이 높낮이도 없이 내 귓가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아, 일생동안 나를 가장 많이 속이는 것이 누구였는가. 바짝 마른 입술로 나는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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