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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식물의 집

2011.03.26 00:5103.26

식물의 집



그는 가방을 메고 현관문을 나섰다. 그의 집은 지은 지 이십 년이 넘은 이 층짜리 단독주택으로, 외벽에 덧바른 페인트칠이 깡말라 들떴고, 일 층과 이 층 사이에는 빗물이 흘러내려 까맣게 얼룩졌다. 사람을 불러서 손을 봐야 하는데 귀찮아 내버려뒀더니만 집이 엉망이었다. 현관문을 나서면 바로 화단이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나무 하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바람 한 점 없는데 잎사귀가 팔랑거렸다. 화단에 심어진 나무는 석류나 매실 같은 유실수가 대부분인데, 나무들이 집 쪽으로 가지를 뻗어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듯했다. 이곳 나무들은 성장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한 해만 관리를 안 해도 나무들끼리 가지가 뒤엉키고 말았다. 그중에 무화과나무 성장이 유독 빨라서 이 층 창문까지 가지가 뻗었다. 바람 부는 날에는 잔가지가 유리창을 따닥따닥 두들겨 자는 사람을 깨웠다. 그의 아버지가 살아 있었으면 이 층 창문까지 가지가 뻗도록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이 집을 구매한 건 사 년 전이다. 평생 남의 집만 전전하다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가지고 있는 돈이 모자라 빚까지 내서 이 집을 샀다.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는 마당에 화단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집 안에 식물이 없으면 허전하다며 마당 절반 이상을 뜯어내고 그곳에 어린나무를 하나둘 가져와 심었다. 원래 땅이 비옥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지나치게 많은 비료를 줬기 때문인지 나무들은 심은 그날부터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랐다. 같은 해에 심은 다른 어린나무는 기껏해야 몇 센티미터 더 자랐을 뿐인데, 이곳 나무들은 수령이 십 년 이상 된 나무들보다도 더 우람했다. 그리고 지금이 사월이니까 새싹이 한창 움터야 정상이나, 이곳 나무들은 벌써 한여름 잎사귀처럼 파릇파릇했다. 나무가 그렇게 빨리 자랄 줄 몰랐던 그의 아버지는 재작년 봄부터 투덜거리며 나뭇가지가 일정 선을 넘으면 그 즉시 잘랐다. 같은 나무라도 이곳 나무들이 훨씬 단단해 가위로는 어림도 없고 톱이라야 쉽게 잘렸다. 올봄에는 제멋대로 자라게끔 뒀더니만 어느새 이 층 창문까지 내돋았다.
그는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집 앞 골목에 빨간 스포츠카가 세워져 있었다. 스포츠카는 올봄에 새로 뽑았는데, 지난겨울 그의 아버지가 출근길에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기에 가능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으나, 퇴직금에다 사망보험금까지 합쳐 꽤 많은 돈이 통장에 들어와 위로를 받았다. 아버지가 그동안 모은 돈을 집 장만하는 데 다 쏟아 부은 터라 처음부터 통장에 돈이 남아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빚이 없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큰돈이 통장에 들어와 아버지와 삼십 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한 번도 느끼지 못한 고마움을 처음 느꼈다. 그전에도 아버지한테 고맙다는 말은 했지만 어디까지나 돈을 타 쓸 때뿐이고, 진심으로 우러나서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면 대학 졸업하고 몇 년째 취직도 못 한 그에게 잔소리만 늘어놓았다. 그는 아버지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집을 나가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걸 잘 알기에 무조건 참아야 했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는 처음부터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밖에 나가서 몇 시간 동안 땀 흘리며 일하느니 듣기 싫어도 잔소리를 잠깐 듣고 마는 게 훨씬 나았다. 어쨌거나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 건 안타까운 일이나 거금이 통장에 들어왔으니 전화위복인 셈이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집을 나간 뒤로 아버지와 단둘이 살아왔기 때문에 거금은 고스란히 그의 차지였다.
그는 통장에 들어와 있는 돈을 한 푼도 안 쓰고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올봄에 처음으로 스포츠카를 사는 데 썼다. 그동안 공무원시험 준비한다고 바빠서 돈을 쓸 일도 없었다. 서른이 넘어서야 겨우 공무원시험에 합격하고, 올봄부터 근무하는 그에게 스포츠카는 누가 보더라도 사치였다. 그가 사치인 줄 알면서 값비싼 스포츠카를 산 건 전적으로 그녀 때문이다. 공무원시험 준비하면서 만난 그녀는 시험에 붙으면 차부터 사라고 말했고, 그는 그녀와의 약속을 지켰다. 영업사원이 새 차를 가져온 날,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은 그녀였다. 그리고 차를 사고도 통장에 꽤 많은 돈이 남아 있었으나, 그 돈으로 가방을 사지는 않았다. 가방은 아버지가 쓰던 걸 물려받았다.
지난해 봄, 그의 아버지는 다니던 회사에서 이십 년 근속한 기념으로 감사패와 함께 명품 가방을 선물로 받았다. 평생 명품이라는 걸 모르고 살아온 그의 아버지도 가방에 붙은 로고가 얼마나 유명한지는 잘 알았다. 새 가방이라서 아까워 쓰지도 못하고 장롱 속에 고이 모셔두다시피 하다가, 그날 처음 꺼내 들고 출근하다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그는 집 근처 독서실에서 연락을 받았는데, 병원에 도착하고 보니 아버지는 구급차에 실려 오는 도중에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그때 간호사가 다가와 아버지가 죽기 전까지 꼭 껴안고 있었다면서 검정 가방을 건넸다. 그는 처음 보는 거라서 건네받아 요모조모 살펴보았다. 손끝에 닿는 느낌이 무척 부드러운 것이 명품다웠다. 내용물은 낡은 만년필과 수첩 그리고 인감도장이 전부였는데, 수첩에서 아버지 회사 이름과 함께 이십 년 근속기념이라는 글씨가 적힌 쪽지가 나왔다. 아버지가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이십 년 근속기념으로 감사패만 받은 줄 알았지 선물로 명품 가방을 받은 줄은 전혀 몰랐다. 가방은 새것이나 다름없어서 나중에 직장에 들어가면 메고 다니기로 하고 잘 간수했다. 무엇보다 명품이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는 운 좋게 공무원시험에 합격해 집 근처 동사무소로 발령받았다. 출근 전날 장롱 속에 넣어둔 가방을 꺼내 왁스를 먹였다. 먼지 하나 묻지 않아서 굳이 왁스를 바를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오랜 시간 장롱 속에 넣어둬 꺼림칙했다. 역시 왁스를 바르고 나니까 때깔이 살아났다. 그날 이후 출근할 때나 외출할 때는 항상 가방을 메고 나갔다. 휴대전화나 열쇠고리뿐만 아니라 주머니에 들어가는 아주 작은 것까지도 넣고 다니다 보니 이제는 밖에 나갈 일이 생기면 가방부터 챙겼다. 그리고 아무리 잘 챙기더라도 깜빡하고 하나둘 빠뜨리게 마련인데, 소설책만큼은 절대로 빠뜨리지 않았다. 근무 중에 일이 없다고 멍하니 앉아 있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소설책이라도 읽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지금껏 근무 중에 소설책을 읽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책 읽을 시간 없을 만큼 일과가 바쁘게 돌아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한가해서 괴로웠다. 아무리 신입이라지만 누구 한 사람 그에게 일을 맡기려고 하지 않았다. 하물며 커피 심부름조차 다른 사람한테 시켰다. 조그만 동네라서 민원인이라고 해봐야 어쩌다 한두 명인데, 뭘 해야 할지 모르니 그는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옆으로 살짝만 돌려도 반짝반짝 빛나는 머리 때문에 ‘문어대가리’라는 별명을 얻은 계장이 정면으로 보였다. 계장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기분 나쁘게 히죽히죽 웃었다.
동사무소까지 먼 거리도 아닌데, 그는 꼭 차를 가져갔다. 좁은 골목에 차를 세워두면 누가 긁고 가지 않을까 불안하기도 하지만, 차를 몰고 가야 출근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가방을 뒤적거렸다. 가방 안에 들어 있어야 할 무선 리모컨이 보이지 않았다. 가방에 없는 걸 확인하고 주머니를 뒤졌다. 하지만 윗주머니 아랫주머니 다 뒤져봐도 무선 리모컨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잡히는 건 조금 전 잠그고 나온 집 열쇠뿐이었다. 차 열쇠는 무선 리모컨과 한 고리에 달려서 무선 리모컨을 찾지 못하면 차 문을 열 수가 없었다. 그는 어제 차 문을 잠그고 곧바로 가방에 넣은 걸 떠올렸다. 그 뒤로는 차를 몰고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무선 리모컨은 가방에 들어 있어야 했다. 가능성은 적지만, 방바닥에 떨어져 있을지 모르니 일단 들어가 찾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무선 리모컨을 찾지 못하고 책상 서랍에 넣어둔 예비키를 찾아서 밖으로 나왔다. 그때 한 꼬부랑 노인이 유모차를 밀며 느릿느릿 걸어왔다. 낡고 지저분한 유모차였다. 그는 노인이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며칠 전 출근길에 봤던 그 노인이었다. 그때도 낡은 유모차를 밀며 지나갔는데, 얼핏 보니 속이 텅 비어 있었다. 하여튼 노인은 아침마다 빈 유모차를 밀며 온 동네를 싸돌아다녔다. 순간 노인이 입을 헤벌리고는 “아이가 귀엽지요? 손녀딸이라오.”라고 말했다. 그제야 그는 노인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더 지체하다가는 지각할지도 몰라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그는 출근 시간에 십 분 늦었다. 지각해서 한소리들을 줄 알았는데 다들 본체만체 지나갔다. 십 분 늦은 걸 가지고 걱정하는 자신이 한심스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붙잡았다.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문어대가리였다. 별수 없이 잔소리께나 듣겠구나 싶었는데 뜬금없이 근무한 지 며칠 되었냐고 물었다. 그는 머뭇거림 없이 바로 오늘로 딱 한 달째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계장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그럼 오늘 회식을 해야겠군.” 하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오늘 회식한다고요?”
그는 하필이면 왜 오늘이냐는 표정이었다.
“응, 우리는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면 한 달째 되는 날 무조건 회식을 하거든. 왜? 다른 직원들이 말하지 않던가?”
계장이 고개를 쳐들고 빤히 쳐다보았다. 문어대가리가 다른 날보다 유난히 반짝반짝 빛났다. 그는 이렇게 갑자기 회식 날짜를 잡아도 되는 거냐고 따져 물으려다 그만뒀다. 이제 겨우 한 달 지났을 뿐인데, 계장한테 나쁜 인상을 심어줘서 좋을 게 하나 없었다.
“지금 가서 동장님한테 말씀드려야겠네.”
계장은 그의 생각은 들어보지도 않고 냉큼 동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저녁때 약속이 있어서 다음날로 미뤄야 하는데, 동장실로 쫓아 들어갈 수도 없고,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일이 완전히 꼬이고 말았어!
책상 위에 가방을 내려놓고 어제 그녀와 통화한 내용을 떠올렸다. 바쁘다고 뒤로 미루자는 그녀를 겨우 설득해 오늘 저녁때 만나서 함께 식사하기로 했다. 지난해 임용고시에 합격한 그녀도 새 학기부터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래서 시간 내기가 쉽지 않다고 볼멘소리를 냈다. 모처럼 잡은 약속인데 계장 때문에 취소하려니 속이 쓰렸다.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걸었다. 회의 중인지 전화를 받지 않아서 약속을 취소하는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때 계장이 사무실에 들어와 손가락으로 ‘오케이’ 신호를 보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얄미운지 손가락을 콱 물어버리고 싶었다.
그날 근처 식당에서 삼겹살을 먹었다. 다른 직원들은 맛있다고 허겁지겁 먹기 바쁜데, 그는 몇 점 먹지도 못하고 바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군침은 도는데 속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니 도저히 삼킬 수가 없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직원들은 이 맛있는 고기를 왜 안 먹느냐는 듯 쳐다보았다. 빈속에 술만 잔뜩 마셨더니 머리가 빙빙 돌아 주점에 가서 놀자는 손을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옷을 벗어 던지고 침대에 누우려다 속이 울렁거려 바로 화장실로 뛰어갔다. 몇 점 먹지도 않은 고기를 다 토해낸 후에야 겨우 속이 진정되었다. 물통에 달린 손잡이에 손을 올리자 ‘쏴’ 하고 물이 쏟아졌다. 그런데 변기가 막혔는지 물이 차오르기만 할 뿐 빠져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침까지도 멀쩡했던 변기가 왜 갑자기 막힌 걸까. 한 번만 더 물을 내리면 넘칠 것 같아 포기했다.
다음 날 아침 집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다. 그는 눈을 비비며 책상 쪽으로 걸어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녀가 다짜고짜 어제 왜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따지듯 물었다. 그는 어제 아침에 약속을 취소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말했고, 그녀는 받지 못했다며 신경질을 부렸다. 그러면서 어제 저녁때 휴대전화는 왜 꺼놨냐고 소리쳤다. 그는 그런 기억이 없어서 얼른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확인했다. 그녀 말대로 전원이 나가 있었다. 더 말해봐야 서로의 감정만 상할 뿐이라서, 그는 미안하다 말하고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그녀가 화를 누그러뜨리고, 오후에 집으로 찾아오겠다고 말했다. 그때야 그는 오늘이 토요일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몇 시까지 올 건데?”
“세 시는 넘어야 도착할 거야. 그때까지 청소나 하고 있으라고. 난 집구석 더러운 건 절대로 못 참는 성미니까.”
전화를 끊고 그는 막힌 변기가 생각나 화장실로 갔다. 그대로 뒀다가는 그녀한테 무슨 소릴 들을지 몰랐다. 그녀는 지저분한 여관방 변기를 보고는 기분이 잡쳐 두말하지 않고 나가버린 적도 있었다.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변기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뚫어놔야 했다. 그는 집에 있는 압축기로 손쉽게 뚫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해보니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그냥 뚫렸을 텐데, 아마도 변기 속에 무언가 단단히 막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는 압축기를 내려놓고 어찌해야 할지 궁리했다. 남자 체면에 이런 일 가지고 사람을 불러서 뚫어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순간 방법이 떠올라 옷장에서 세탁소용 옷걸이를 가져와 곧게 폈다. 그걸로 들쑤시면 뚫리지 않을까 싶었다. 팔을 걷어붙이고 가는 철사를 변기 속으로 집어넣었다. 막힘없이 쑥쑥 들어가더니 손목이 잠기고 나서야 무언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손목에 힘을 줘 막혀 있는 걸 꾹 눌렀다. 그러자 변기에 가득 차 있는 물이 시원스레 빠져나갔다. 아무래도 어제 저녁때 토해낸 고깃덩이가 막히지 않았나 싶었다.
그는 화장실을 청소하고 진공청소기로 집 안 구석구석 쌓여 있는 먼지를 없앴다.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 않아서 걸레가 금방 더러워졌는데, 일 층 거실은 아버지 돌아가시고 처음 걸레질했다. 청소는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일 층 청소를 마치고 이 층 방을 청소하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그는 한 손에 걸레를 든 채 그녀를 맞이했다. 오는 길에 마트를 들렀는지, 들고 있는 봉지에 저녁때 해먹을 재료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는 소파에 앉아 그녀가 요리하는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집 안에 다양한 음식냄새가 풍기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음식솜씨가 좋지 않았고, 그는 음식 만드는 게 귀찮아 주로 시켜먹었다. 냉장고에는 시장에서 사온 김치와 마른반찬 몇 가지가 전부였다.
날이 어두워지자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졌다. 그는 이 층 방으로 그녀를 데려가 부둥켜안았다. 얼마 만에 안아보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지난겨울 아버지 시신을 화장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녀 손에 이끌려 여관방에 들어갔다. 그날은 그럴 마음이 없었는데 그녀가 먼저 하자고 했다. 그 이후에도 몇 번 만났지만, 그녀는 가벼운 입맞춤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옷을 벗겼다. 볼록 튀어나온 가슴은 아름다웠다. 부드러운 혀로 흥분시킨 후, 단단해진 음경을 그녀의 몸속에 집어넣었다. 그녀가 반응을 보이자 그는 더욱더 세차게 상체를 움직였다. 순간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처음 했을 때도 아프다고 했지만, 지금처럼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그녀는 더는 통증을 참지 못하고 거칠게 밀어냈다. 그는 무안해 어쩔 줄 몰라 했다.
“오늘은 도저히 안 되겠어. 손으로 해줄 테니 이쪽에 누워.”
그는 침대에 드러누워 그녀가 하는 대로 가만있었다. 그녀가 음경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동안 그의 시선은 유리창을 향해 있었다. 유리창에 빗줄기가 흘러내렸다. 바람에 팔랑팔랑 흔들리는 무화과나무 잎사귀가 꼭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 그때 음경 쪽에 심한 통증이 느껴져 눈을 지끈 감았다. 통증은 점점 심해지더니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순간 화산폭발이 일어나듯 음경에서 엄청난 양의 정액이 뿜어져 나왔다. 그녀는 침대 시트에 떨어진 정액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뒤로는 음경이 발기하지 않았다. 아무리 만지작거려도 음경에 반응이 없자 그녀가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몸에 이상이 생긴 건 음경뿐만이 아니었다. 엄청난 양의 정액을 뿜어낸 후, 가슴이 무언가에 짓눌린 듯 답답했다. 그는 발기가 안 되는 음경보다 답답한 가슴이 더 불안했다. 자다가도 심장이 멎을 것 같은 통증이 느껴져 몇 번이나 깼다.
며칠 후, 그는 계장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일찍 퇴근해 병원을 찾았다. 계장은 그의 표정을 보고는 순순히 그러라고 했다. 병원에서 혈액뿐만 아니라 엑스레이, MRI 검사까지 다 받아봤지만, 담당의사는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몸이 피곤하면 일시적으로 그럴 수 있으니 휴식을 취하면 곧 괜찮아질 거라는 말만 늘어놓았다. 병원 문을 빠져나와 집으로 가는 동안 심장마비로 쓰러진 아버지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는 건 아닌지 두려웠다. 집에 도착해 그녀한테 알려야 할 것 같아 휴대전화를 찾았다. 오늘 병원에 간다고 했으니까 그녀도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휴대전화는 없었다. 어제저녁 때 그녀와 통화하고 책상 위에 둔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이후 어디에 뒀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무선 리모컨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는데 휴대전화까지 없어지고 나니까 기분이 찝찝했다. 지난번 변기가 막힌 것도 수상했다. 토해낸 고깃덩어리라고 해봐야 아주 조그만 것인데, 그것 때문에 막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조금씩 가슴에 통증이 느껴져 그는 약국에서 받아온 약을 먹었다. 약을 먹었는데도 통증은 가라앉지 않고 점점 더 심해졌다. 결국, 그는 통증을 참지 못하고 나뒹굴었다.
하룻밤 사이에 그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얼굴이 핼쑥해 다 죽어가는 사람 같았다. 다행히 그날 이후 며칠 동안은 아무 증세도 없이 지나갔다. 여느 때처럼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퇴근하면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사무실에서는 한 달이 지나고 두 달 가까이 되는데도 여전히 아무도 일을 맡기려고 하지 않았다. 다른 직원들도 한가한 건 마찬가지나 자기 일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혼자만 하는 일 없이 멍하니 앉아 있으니까 무척 따분하고 졸렸다. 꾸벅꾸벅 졸다 눈을 뜨면 문어대가리가 웃고 있었다. 그는 수치심을 느끼고 얼굴을 붉혔다.
“퇴근준비 안 해요?”
그는 일과 시간이 지난 것도 모르고 있다가 여직원이 알려줘서 알았다. 여직원은 나이가 네 살이나 더 많은데도 여태 미혼이었다. 다른 동사무소도 그런지 모르지만, 퇴근 무렵 동장실 정리정돈은 말단 직원인 그의 몫이었다. 그는 여직원을 힐끗 쳐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장실로 향했다. 동장은 벌써 퇴근하고 자리에 없었다. 책상 위에 널려 있는 서류를 정리하고 창문을 닫았다. 바닥은 깨끗하니까 쓰레기통만 비우면 될 것 같았다. 그는 파란색 쓰레기통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왔다. 건물 뒤쪽에 패지를 태우는 간이소각장이 있었다. 그는 뚜껑을 열고 패지를 버리려다 구겨진 사진 한 장을 발견하고 펼쳐보았다. 동장과 다정하게 서 있는 여자는 사무실 젊은 여직원이 틀림없었다. 나이는 이십 대 중반으로 상당히 미인이었다. 설마 했는데 동장과 젊은 여직원이 사귄다는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며칠 전 그는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다가 남자 직원 둘이서 이야기 나누는 걸 엿들었다. 한 직원이 동장과 여직원 관계를 이야기했고, 다른 직원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사진을 구겨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사진 속에서 봤던 그 여직원이었다. 한 손에 서류 뭉치를 들고 있었는데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일부러 피하는 눈치여서 그는 쓰레기통을 비우고 얼른 자리를 떴다. 왜 울었을까.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주머니에 들어 있는 구겨진 사진이 그 까닭을 말해주는 것 같아 씁쓸했다. 그가 오기 전까지 동장실 청소는 그 여직원 담당이었다. 동장은 아직도 그 여직원이 청소하는 걸로 알고 있으며 일부러 사진을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린 게 분명했다.
그는 가방을 메고 밖으로 나왔다. 그때까지 젊은 여직원은 보이지 않았다.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빠져나오는데 젊은 여직원이 터벅터벅 걸어왔다. 그는 차를 세우고 버스정류장까지 태워주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여직원이 “그럴 필요 없어요!” 하고 쌀쌀맞게 말하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전 날 분실하고 새로 사지 않아서 휴대전화가 없었다. 새로 사려면 시내까지 나가야 하는데 귀찮았다. 그녀가 전화를 받으면 만나서 저녁이나 먹자고 말할 생각인데, 신호만 갈 뿐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참 후에 전화가 자동으로 끊겼다. 그녀는 성교 중에 통증을 호소한 뒤로 전화를 잘 받지 않았다. 어쩌다 받더라도 바쁘다 말하고 바로 끊어버렸다. 한밤중에 뭐가 그리도 바쁘다는 것인지. 싫으면 싫다고 말하면 될 것을 꼭 그런 식으로 대답해야 속이 시원할까.
새벽녘에 그는 잠을 깨 비명을 질렀다. 며칠 동안 잠잠하다가 또다시 통증이 찾아왔다. 비명을 질러도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러다 미치는 게 아닌가 싶어 두려웠다. 통증이 차츰 가라앉자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 너머 보이는 나뭇가지에 잎사귀가 무성했다. 한 달 사이에 나무들이 부쩍 자란 듯 보였다. 지금 속도로 자란다면 나뭇가지가 이 층 주택을 뒤덮는 건 금방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나뭇가지로 뒤덮인 집을 상상했다. 잎사귀에 가려 햇빛이 전혀 스며들지 않고, 나뭇가지가 대문을 막고 있어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상상만 해도 끔찍해 몸서리쳤다. 그리고 곧 깊은 잠에 빠졌다.
다음 날 그는 심한 가려움증을 느꼈다. 온몸이 다 가려운데 사타구니 쪽이 유독 심했다. 손을 집어넣고 마구 긁다가 손끝에 무언가 닿아서 바지를 내리고 보았다. 음경에 파란 새싹이 돋아 있어서 생각 없이 뽑았더니 해파리에 쏘인 것처럼 따끔했다. 그래도 뽑으니까 시원했다. 조금 있으니까 이번에는 겨드랑이가 심하게 가려웠다. 그는 입고 있는 옷을 모두 벗어 던지고 거울 앞으로 가서 온몸에 난 새싹을 하나하나 뽑았다. 새싹을 모두 뽑고 나니까 가려움증이 말끔히 사라졌다.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빼앗겨 서둘러 집을 나섰다. 화창한 아침인데도 나뭇가지가 지붕을 뒤덮고 있어 어두컴컴했다. 그나마 나뭇가지가 대문까지 뻗어 나오지 않아 문을 열고 나가는 데는 지장 없었다.
대문을 빠져나와 차 있는 쪽으로 걸어가다 꼬부랑 노인과 마주쳤다. 노인이 유모차를 멈춰 세우고 “아이가 귀엽지요? 내 손녀딸이라오.” 하고 저번과 똑같은 말을 했다. 그 역시도 처음 보는 듯한 표정으로 유모차를 바라보았다. 유모차에 꼬마가 앉아 있어서 귀엽다는 말을 하려는데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황급히 차 문을 열고 들어가 거울을 보았다. 입속에 혀는 보이지 않고 파릇파릇한 잎사귀 하나가 돋아나 있었다. 이번에도 생각 없이 잎사귀를 뽑으려다 심한 통증을 느끼고 그만뒀다. 생살을 도려내도 그렇게까지 심하게 아프지 않을 것이었다. 순간 잎사귀를 뽑아버리면 영영 말을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그는 잎사귀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조심 입을 다물고 차창 밖에 서 있는 노인을 보았다. 노인이 그의 행동을 유심히 보고 있다가 흡족한 표정을 짓고는 다시금 유모차를 밀었다. 그런데 조금 전에 봤던 꼬마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멀어져가는 유모차를 바라보며 “내가 헛것을 봤어!” 하고 중얼거렸다.
그는 차를 몰고 천천히 골목을 빠져나갔다. 매일 다니던 길인데, 어디로 가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이 길이 맞다 싶어서 한참 가다 보면 처음 보는 삼거리가 나오고, 저 길이 맞다 싶어서 가다 보면 이번에는 길이 막혀서 더는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차를 후진해 반대편으로 빠져나와 다시 우측으로 차를 몰았다. 그쪽도 처음 보는 곳이었다. 이러다 길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게 아닌가 싶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더운 날씨도 아닌데 이마에서는 진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사람들한테 길을 물으려 해도 말이 나오지 않으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몇 바퀴나 동네를 돌고 돌아 겨우 동사무소에 당도했다. 십오 분이면 충분한 거리를 무려 한 시간 넘게 걸렸다.
그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직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제자리로 갔다. 그때 계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걸어왔다.
“자네 지금이 몇 시인 줄 아는가?”
계장이 제법 위엄 있는 목소리로 다그쳤다. 그는 죄송하다는 말을 하려다 입속에 든 잎사귀가 떠올라 얼른 입을 다물었다. 순간 잎사귀가 씹혀 눈물이 핑 돌았다. 혀를 씹었을 때보다도 더 아픈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죄송하다는 말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냐?”
계장이 언성을 높이자 그는 별수 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여기가 조그만 동사무소라고 우습게 본 거야? 여기는 자네가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나오기 싫으면 안 나와도 되는 그런 곳이 아니야. 자네 같은 사람 때문에 모든 공무원이 놀고먹는다는 소릴 듣잖아.”
계장이 씩씩거리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고개를 돌려 직원들 표정을 살폈다. 그런데 요전 날 소각장에서 봤던 젊은 여직원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어디로 갔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나이 많은 여직원이 따라오라고 했다. 그는 두말하지 않고 여직원 뒤를 따랐다. 고분고분한 그의 행동이 마음에 들었는지 여직원은 공문서 발급요령을 착실히 가르쳐주고는 “오늘부터 당신이 여기 앉아서 일하세요.” 하고 말했다. 그는 전에 있던 젊은 여직원에 대해 물으려다 말았다.
그는 일하는 동안 가려움증에 시달렸다. 참기 어려울 때는 화장실로 달려가 살폈다. 가슴과 등짝에 제법 많은 새싹이 돋아나 있어서 변기 뚜껑에 걸터앉아 일일이 뽑았다. 막 돋아나려는 곳은 손톱으로 박박 긁었다. 얼마나 세게 긁었는지 일어나면서 보니까 곳곳에서 피가 새어나왔다.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문어대가리가 잔소리를 늘어놓을 게 뻔해 대충 마무리 짓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역시 그를 바라보는 계장 시선이 곱지 않았다.
일과가 정신없이 지나갔다. 종일 화장실과 사무실을 들락거렸다는 것만 생각날 뿐 다른 것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집까지 잘 찾아왔다. 오후에도 잠깐 헤매기는 했지만, 아침과 비교하면 매우 양호했다. 옷을 갈아입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려는데 갑자기 번호가 생각나지 않았다. 수첩에 번호가 적혀 있는 걸 떠올리고 책상 서랍을 뒤졌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수첩은 들어 있지 않았다. 이제 말을 할 수 없는 처지라서 그녀가 전화를 받더라도 소용없다는 걸 떠올리고 쓴웃음 지었다. 몸이 피곤해 침대에 누웠다. 온갖 상념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아침에 길을 헤매던 장면과 일을 그만둔 젊은 여직원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그러고 있으니까 졸음이 쏟아졌다. 이대로 잠들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어디선가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그건 자신이 분실한 휴대전화에서 나는 소리였다. 소리가 창문 밖에서 들리는 것으로 봐서 나뭇가지에 휴대전화가 걸려 있지 않나 싶었다. 소리는 깊은 잠에 빠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따르릉 따르릉’

며칠이 지나도 그는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계장은 며칠째 출근을 하지 않는 그가 걱정돼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아 수화기를 내려놓고 직접 집으로 찾아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오후 계장은 차를 몰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에는 한 번도 가본 적 없지만 주소만 있으면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동사무소에서 그의 집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닌데, 골목이 꼬불꼬불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좁은 골목에 들어서자 낯익은 차가 눈에 띄었다. 골목 중간에 세워져 있는 빨간 스포츠카는 분명히 그의 차였다. 스포츠카 뒤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오는데, 꼬부랑 노인이 유모차를 밀고 와 “아이가 귀엽지요? 내 손녀딸이라오.”라고 말했다. 계장은 유모차가 텅 빈 걸 확인하고 정신 나간 노인네라고 생각했다. 노인은 유모차를 밀고 저만치 가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파릇파릇한 잎사귀가 낡은 주택을 뒤덮고 있었다.
계장은 대문에 붙은 문패를 확인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초인종 소리만 크게 들릴 뿐, 대문은 좀체 열리지 않았다. 집 안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아서 도로 돌아가려다 혹시 몰라서 대문을 밀어보았다. 반대편에 무언가 받쳐져 있는 것 같은데 힘껏 밀면 열릴 것 같기도 했다. 계장은 두 손을 대문에 대고 있는 힘껏 밀었다. 그러자 조금씩 대문이 열렸다. 한 사람 겨우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틈이 벌어지자 잽싸게 몸을 밀어 넣었다. 마당에 들어선 계장은 나뭇가지가 주택을 뒤덮고 있는 걸 보고 화들짝 놀랐다. 대문이 열리지 않은 것도 나뭇가지가 뻗어 나와 입구를 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계장은 벌어진 입을 한동안 다물지 못했다. 심장박동이 갑자기 빨라져 바로 나갈까 하다가 집 안에 사람이 있을지 몰라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거실 천장과 벽면이 온통 식물줄기로 뒤덮여 온실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계장은 화장실 문 틈새로 잎사귀가 삐져나와 있는 걸 수상히 여기고 고개를 내밀었다. 놀랍게도 변기 속에서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계장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가 줄기가 이 층에서 내려온 걸 확인하고 천천히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줄기를 따라 올라가다 보니 이 층 방문 앞에 이르렀다. 반쯤 열린 문을 밀치고 들어가려다 바닥에 종이 한 장이 떨어져 있는 걸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건 소설책에서 떨어져 나온 낱장이었다.

말은 씨앗이다.
가슴 속에 묻어둔 말이
싹을 틔우고 줄기로 자라나
육신을 뚫고 나온다.

낱장을 집어 들고 중간쯤 적힌 글귀를 읽는 순간 전화벨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계장은 귀를 틀어막으며 침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침대 위에 무언가 있는데 그곳에서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식물은 가만있지 않고 꿈틀꿈틀 움직였다. 그대로 있다가는 식물한테 잡아먹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서둘러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하지만 현관문에 다다르지도 못하고 줄기에 붙들리고 말았다. 줄기는 빠른 속도로 계장을 휘감았다. 계장은 필사적으로 발버둥쳤지만 그럴수록 기운만 빠질 뿐이었다. 결국, 계장은 줄기에 목이 졸려 숨을 거두었다. 시끄럽게 울리던 전화벨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다음 날 오후, 초인종 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식물은 누가 찾아왔다는 걸 알아차리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잠시 후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에 누구 없어요?”
식물은 여자 목소리를 듣고 잎사귀를 파르르 떨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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