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가작 두세 계

2011.02.26 00:1802.26

-두세 계-
                                           초대장
반갑습니다. 우리는 Human Seed 국제 연합입니다.
우리는 조심스런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당신의 지난 수년 혹은 수십 년간의 행적을 흥미롭게 관찰했으며 인류의 자산으로서의 당신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거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그 비전을 당신과 나누고 싶습니다.
들어오십시오. 우리의 세계로.

• 비밀 유지는 우리들의 최대 무기입니다.
• 가족 혹은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도 비밀은 지켜져야 합니다. (Human Seed가 그들에게 알리겠습니다.)
• 애완동물도 포함됩니다.
• 당신은 인류의 자산임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 여기까지 읽었다면 초대장은 태워서 변기에 내리십시오.
• 위 항목들은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템즈강을 거슬러 오르다 보면 골동품 가게에 들어와 있는 듯 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강을 마주보고 있는 고풍스런 시가지와 런던교, 빅벤 같은 건물들은 세월의 부패마저도 감내한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다. 오래전에 시간이 멈춰버린 풍경 가운데 돌연, 거대한 자전거 바퀴가 강변을 따라 달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실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런던아이(London Eye), 회전 전망 탑이다. 밤이면 눈부신 야광등을 발산하는 현대의 바퀴에, 마치 목덜미를 붙잡혀 현실로 끌려나온 기분이다.
유람선을 내려 석회질의 강물만큼이나 우중충한 하늘을 바라보며 걷는다. 구릉을 넘어 올라가면 탁 트인 잔디 광장이 오른쪽으로 보인다. 해양 박물관을 둘러싸고 있는 관광명소인 잔디밭에는 이제 둥글게 그을린 자국이 벌써 돋아난 생명력에 희미해졌다. 그것이 못내 아쉽다. 그리고 나무 울타리를 따라 언덕 위에 올라서면 마침내 시간의 중심, 그리니치 천문대가 있다.

우리의 짧고 먼 통화.
“뭐해?” 내가 말한다.
“이제 자려구.” 그녀가 말한다.
“벌써……열시구나.”
“응.”
“오늘은 뭐했어?”
“작업실 갔는데 천장에 물이 샜어.”
“천장에서?”
“응.”
“보일러 관이 문제일거야. 위층에 올라가서 얘기해봐.”
“사람 불러서 공사했어. 다음 주엔 다시 작업할 수 있을 거야.”
“잘했어.”
“알아.”
“그리고 뭐 했어?”
“친구랑 밥 먹고 책 좀 보다가 제임스랑 잠깐 만났어.”
“제임스? 남자야?”
“수십 번씩 말하게 하는 구나.”
“장난이야. 근데 꼭 남자 모델이 있어야 돼?”
“응.”
“그래……그럼 작업실에 전화 한 번 걸게. 제임스랑 할 말이 있어.”
“재미없어.”
“지금 혼자 있는 거 맞아?”
“닥쳐.”
“장난이야.”
“이제 자야해.”
“응……춥진 않아?.”
“추워. 그치만 괜찮아.”
“그래. 잘 자.”
“자기도. 아니, 좋은 하루 보내.”
“고마워.”
찰칵.

경도 0을 가로지르는 본초 자오선. 남극과 북극의 꼭지에서 녹아내린 시간의 물줄기. 우리는 그 선을 사이에 두고 지름 249센티미터의 아이작 뉴턴, 천체 망원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세계가 공인한 선 위에서 우리는 손을 맞잡았지만, 실은 위태로웠다. 이 확연한 경계선 위에서 나의 왼손은 그녀의 오른손을 붙잡았지만, 우리의 나머지 손은 360‘의 각도로, 39만 킬로미터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다는 게 너무나 확연하여, 사진으로 나마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내 오른손은 겨우 브이를 그려보였다.

오전에 사진을 현상했다. 오른쪽 귀퉁이에 낡은 구두를 신은 발이 땅바닥을 밀어내는 자세로 멈춰있는 걸 발견했다. 기억을 가다듬어 봐도 뚜렷이 생각나진 않았지만, 젊은 커플의 추억에 잡티를 남기지 않으려고 배를 내밀며 펄쩍 피하는 노신사의 모습이, 잘린 나머지 부분에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그 발을 한참 들여다보며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발이 있어 사진은 정지된 과거에 있지 않고, 1초 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착지할 노신사의 모습과 어색하게 손을 풀며 사진기로 다가갈 우리의 모습이 퍼니 비디오의 슬로우 장면처럼 자꾸만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 사진을 꺼내기 좋도록 수첩에 끼워 재킷의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오후엔 특별한 일정이 없어 시가지를 산책했다. 여전히 도로는 막히고 택시는 노란색이고 사람들은 빨간불에 황급히 도로를 건넜다. 호텔에서 주는 저녁은 지나치게 풍성해서 우리들은 되레 다 빈치의 그림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당황스럽고 슬픈 기분이었다. 식사 후 스카이라운지에서 독일 부부가 준비해온, 아이들의 홈 비디오를 시청했다. 돋보기 같은 안경을 똑같이 낀 형제는 두꺼운 물리학 책을 골몰해서 읽거나 아빠에게 물고기형 잠수정의 운동 역학에 대해 설명하고 마당에서 비틀거리며 어수룩하게 자전거를 타기도 했다. 부부는 무대에 나와 이야기 하면서도 한쪽이 울면 쌍둥이처럼 나머지 한쪽도 슬며시 눈물을 닦았다. 그들은 아이들을 그리워하면서도 대견해하는 듯 보였다. 자리로 돌아가는 부부에게 조용한 박수가 나왔다.
호텔 입구로 들어서다가 갑작스레 플래시가 터져 놀랐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 둘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로비—호텔엔 우리들뿐이다—에 들러 카운터 뒤에 걸린 전광판을 봤다. 날짜에서 분까지 나타내고 있는 타이머 시계는 약간의 불협화음이 있긴 했지만, 누군가의 현실적인 주장으로 무심코 눈에 띄지 않을 이곳에 설치됐다.
7D:13H:27M
나는 물론 설치에 찬성하는 쪽이었지만, 막상 이렇게 보니 초 단위가 없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0분으로 바뀌고 나면, 선체에서 빠진 키를 붙잡고 갑판을 우왕좌왕하는 선원들처럼 속수무책일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60초 동안을. 하지만 그 시간에 로비를 서성거릴 정도의 바보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피곤해서 그만 방으로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돌아본 로비는 내가 누울 침대처럼 쓸쓸했다. 24M.

잊어버렸던 대화의 조각.
“……저건 무슨 의미야?” 내가 말한다.
“뭐가?” 그녀가 말한다.
“하늘 부분에 있는 저 선 말이야.”
“뭐 같아?”
“글쎄……약간 기울은 각도로 봤을 때……”
“아야. 아파. 하고 나서 꼭지 만지지 말라니까.”
“미안. 저 각도로 봤을 때……네 짝가슴의 반영?”
“충멍아. 저건 풍경화야.”
“그럼, 보이는 데로?”
“그렇다구.”
“난 안보였는데.”
“난 보였어.”
“내 얼굴은?”
“네 얼굴이 뭐.”
“내 얼굴에선 뭐 보이는 거 없어?”
“만족감.”
“너도?”
“난 별로.”
“체.”
그녀가 웃는다.
“삐지지마. 이리로 와. 안아줘.”
시간아 멈춰라. 멈춰라. 시간아.
“유학 갔다가 돌아오면 결혼하자.”
“응.”
“시골에서 그림 그리고 자기는 글 쓰고 애기도 낳고.”
제발.
“안 될 거야.”
“응?”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왜?”
“이건 꿈이잖아. 내 해마가 기억을 정리하고 있을 뿐이야. 네 가슴도 사실은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이 더 작았어.(그렇게 변한다) 그러니까 미래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마. 넌 무의식이 만들어낸 발로일 뿐이야.”
“그걸 어떻게 알아?”
“프로이트.”
“나 말인가?”
그녀는 사실 프로이트. 프로이트의 가슴은 짝짝이. 끔찍한 악몽.

오전에 작은 소동이 있었다. 딸이 생존 인류로 뽑힌 아일랜드 남자였는데 술에 잔뜩 취해 있었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길고 며칠 동안 제대로 자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술에 취하면—거의 매일 밤—아일랜드 국가를 불렀다.
“In valley green or towering crag- Our fathers fought before us-"
노래는 자주 끊겼고 그때 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딸 내놔! 내 딸! 보상을 해! 이 사실을 다 알릴거야. BBC에 전화를 할 거라고. 두고 봐! 색슨족들아- 폭군을 뒤흔들어라-”
몇 명이 다가갔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협회의 건장한 남자들이 술 취한 아일랜드 인을 떠 매고 식당을 빠져나갔다. 우리는 다시 조용히 아침을 먹었다. 직원들은 모두 친절했다. 화도 내지 않았다. 그저 우리가 받아들이고 입을 다물기만을 바랐다. 그것이 우리를 더 주눅 들게 만들었다.
아침을 먹고 단체로 회전전망탑을 타러 갔다. 조금 더 가까워진 하늘은 여전히 짙은 구름으로 하늘 너머를 가리고 있었다. 우주선과 교신 했을 때, 그녀가 처음 보여준 것이 지구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파란색 구슬이 아닌, 대륙과 바다로 이루어진 거대한 지구본 같았고, 우주선의 각도 때문에 대각선으로 그늘 져 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낮과 밤을 동시에 보는 것은 묘했다. 밤의 지구에서는 간헐적으로 뭉친 불빛이 문명의 흔적을 우주로까지 내뿜어댔다. 그녀의 손이 지구를 어루만졌다. 내가 수백 명의 사람들과 우주선으로 교신을 시도하고 있는, 희미하게 반짝이는 외딴 도시를 만졌다. 조금 더 다가온다면 창밖으로 보이는 고속도로의 가로등과 그녀와 거닐던 거리의 네온사인 까지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초속 10킬로미터로 그녀는 멀어져만 갔고, 지구에 실린 나는 초속 30킬로미터로 빙빙 돌며, 그녀의 온기를 힘겹게 회상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관람차에서 내릴 때 쯤 잠이 깬 아일랜드인은 취기가 가셨는지 젊잖게 앉아서 숙소까지 돌아왔다. 그는 우주선에 탄 딸이 3살일 무렵 이혼한 아내에게 맡긴 이후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딸이 썼다는 두꺼운 책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모두가 방으로 올라갈 때까지 로비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날 밤 이메일을 하나 받았다.
‘**호텔에 머물고 계신 여러분께.’
메일을 열어보니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씌어 있었고 어떤 프로그램이 자동 실행되었는데, 로비에 있는 것과 같은 타이머였다. 아마 누군가의 짓궂은 장난인 것 같았다. 1분이 지나자 찰칵 소리를 내며 숫자가 줄어들었다. 나는 그 시계를 위젯 삼아 바탕화면 한쪽에 놓아두었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모니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찰칵.
5D:6H:33M.

삑, 하고 부저가 울면 그녀가 깨어난다. 눈을 깜박이고 몸을 부르르 떤다. 2분 30초.
지징-, 하고 부저가 울면 그녀가 잠든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천천히 감긴다. 33초.
그녀가 잠들고 깨어나는 장면들이 가득한 영상을 본다. 비디오테잎에 화면을 담아온 뚱뚱한 백인 남자는 이것이 ‘일종의 훈련’이라고 말한다. 난생처음 보는 첨단 장비들을 커다란 비디오테잎에 녹화해 왔다는 게, 비디오데크를 들고 허둥지둥 계단을 올라오던 남자의 모습이, 차가운 기계 속에 잠긴 그녀를 티비를 통해 봐야 한다는 사실이, 지난 반년동안 이해해보려 해왔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백인 남자가 현관 앞에 서서 처음 건넨 말 “안녕하세요.” 만큼이나 낯설고 어색하다.
남자에게 꽉 낀 양복을 벗으라고 권한다. 이마의 비지땀을 훔치며 사람 좋은 웃음으로 사양하는 그에게 이번엔 시원한 캔맥주를 건넨다. 우리는 소파에 앉아 캔을 하나씩 비우고 일어난다. 옷을 챙기면서 남자는 고향에 사는 부모님은 아무것도 모른 채 목장 일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럭키맨’이라면서. 문을 나서는 그가 남긴 말 “안녕히 계세요.”
한 번 더 비디오를 돌려 본다. 삑, 그녀가 깨는 시간. 1초, 2초, 3초.

해양 박물관 광장은 오늘, 유난히 푸르다. 난 얼떨떨한 기분으로 완만한 언덕을 오른다. 긴장한 탓에 땀이 쥐어짠 스펀지처럼 솟구친다. 주머니엔 손수건조차 없다. 정신없이 짐을 싸면서, 공항까지 택시를 타고 가면서, 비행 공포증으로 이륙 30초 전에 기절 할 때 까지 닦지도 않고 눈물콧물을 흘리며 울었던 기억이 난다. 얼굴을 닦아준 스튜어디스에게—복도 건너편 자리의 꼬마애가 말해줬다—고맙다는 말을 경유지에 내려서야 할 수 있었다.
언덕 너머로 우주선의 뾰족한 꼭대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줄지어 걷던 사람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언덕 밑에서 커다란 환호성을 들었을 때, 장막이 벗겨졌음을 알았다. 우주선의 몸체는 발사대, 지지대와 연결되어 절대 떠오를 수 없을 것 같은 육중함을 드러냈다. 지지대 주위로 임시 관제탑과 연료 탱크, 조명, 후폭풍 유도기 같은 부속 건물들이 서 있다. 사람들은 플라스틱 울타리와 경찰들이 만든 경계 뒤에 모여 앞으로 보게 될 장관에 대비해 사진기와 캠코더, 핸드폰 같은 걸 하나씩 들고 있다. 세계에서 온 방송사들도 단상을 만들거나 사다리 위에 올라가 우주선의 모습을 보여주고 리포터가 마이크에 대고 소리를 지르고 있다.
난 사람들을 피해 그리니치 천문대로 올라간다. 잔디와 박물관이 훤히 내다보이는 옥상이 있기 때문이다. 벌써 몇 명의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들과 가능한 떨어진 곳에 주저앉는다. 하얀 몸체의 우주선과 까맣게 모인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 사람 중에 몇 명이나 우주선에 가족을 태웠을까. 몇 명의 친구가 탔을까. 몇 명의 애인이 탔을까. 나는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을 둘러본다. 어떤 슬픔이나 분노의 징후는 찾아 볼 수 없다. 시계를 본다. 발사가, 머지않았다.

“금방 돌아가지 못 할 것 같아.”
수화기 너머로 그녀가 말한다. 조금은 들뜬 목소리다.
“무슨 소리야?” 내가 말한다.
“사실은, 비밀이야.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되는데.”
“나한테도 안 된다구?”
“응. 너한테도.”
“이럴 거야?”
“알았어. 실은, 놀라지마, 나 우주여행하게 됐어.”
“우주……라니?”
“그래 우주! 자세한 건 다음에 얘기해. 길게 통화 못할 것 같아.”
“잠깐만. 그럼 언제 오는데?”
“우주 갔다 와서. 또 전화할게. 끊어”
전화가 끊어지고 나서도 나는 멍하니 수화기를 들고 있다. “잘 하셨습니다.”
반대편 소파에 앉아있던 남자가 말한다. “아내 분께는, 비밀로 하셔야합니다.”
그 남자의 얼굴을 살펴본다. 단단한 성벽 같은 얼굴엔 조그만 틈도 보이지 않는다. 믿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더, 믿기 힘들다.
나는 중얼거린 것인지 그에게 질문을 한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지구가, 멸망한다는 겁니까?”
성벽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어둡고 커다란 방에 앉아 스크린을 통해 영사된 화면을 바라보았다. 단상 위에는 세련된 복장의 약간 곱실거리는 머리의 중년 남자가 화면이 바뀔 때마다 여러 가지 설명을 늘어놓았다. 지난 수개월 동안 익히 들어온 얘기였을 테지만, 사람들은 잠자코 듣고 있었다.  선정된 사람들의 사진과 그들의 업적들이 슬라이드로 보이고 남자는 선정 경위와 분야 및 차후 이 인물이 이루게 될 비전에 대해 이야기했다. 전 세계의 모든 분야에서 남다른 두각을 드러낸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명확한 기준의 메디컬테스트를 통과해야만 했다.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동․식물의 DNA와 지식을 효과적으로 운반하기 위해 그들이 노력한 것들을 보았다.
“이것은 하나의 진화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즐거운 듯이 사람들에게 인류의 도약을 즐길 것을 권했다. 간접적인 조력자가 된 것에 감사하라고 했다. 누군가 숨죽여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카운트다운은 거침없다. 사람들이 거기에 따라 외치고 숨죽이고 또 외쳤다. 투,투. 원,원. 제로,제로. 언덕 밑에서 나눠준 귀마개를 낀다. 후폭풍 유도 장치로 거대한 화염이 뿜어져 나오면서 땅이 흔들린다. 중력의 추를 벗어던진 하얀 몸체가 둥실, 역사상 가장 커다란 우주선이 불을 뿜으며 솟구친다. 그것은 순식간에 하얀 점이 되어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녀가 떠났다.

스카이라운지에서 작은 전시회가 열렸다. 대부분 복사본이나 사진이었지만, 조형 작품에서 순수미술까지 다양한 작품이 있었다. 일곱 살 때 클래식을 작곡했다는 음악 신동의 난해한 음악이 회장 안을 은은하게 감쌌다. 아내의 그림도 커다란 사진으로 몇 개인가 걸려 있었다.
“좋은 그림이군.”
아내가 그린 ‘Husband' 라는 제목의 추상화 앞에 서 있을 때, 어떤 남자가 다가와 그렇게 말했다.
“Husband 이신가 보군?” 그가 미소 지었다.
나는 그렇다고 했다. 그는 한잔 하자며 나를 바로 끌고 갔다. 우리는 위스키를 마셨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도저히 못 들어 주겠군.” 하고 말했다. 회장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는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키더니 말도 없이 회장 안으로 사라져 버렸고, 잠시 후 귀에 익은 음악이 꽝꽝 울려 퍼지더니 돌아왔다.
“진짜 음악입니다.” 그가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비틀즈군요.” 내가 말했다.
“비틀즈, 좋아하십니까?”
그가 너무 정색을 하고 물어 나는 웃었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나요.”
리듬에 따라 고개를 끄덕이며 그는 미소 지었다.
“이 화이트앨범은 특히 좋지요. 혹시 그거 아십니까?”
“어떤 것 말인가요?”
“화이트 앨범은 흔히 비틀즈 최고 명반으로 꼽히지만, 당시에 그들은 불화가 극에 달해있었지요. 앨범 커버도 없이 음반을 낸 게 그런 이유였습니다.”
“그건 처음 듣는 얘기군요.”
“완벽한 것이 항상 최선은 아닌 법이오.”
그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무언가 할 말이 더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잠자코 위스키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솔직히.” 위스키 잔을 테이블에 던져 놓으며 그가 말했다. “지금 이 상황이 난 마음에 들지 않소.”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지 몰라 나는 가만히 있었다.
“우린 좀 공통점이 있는 것 같소. 그러니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봅시다. 나도 아내를 우주선에 태웠소. 그녀는 디자이너요.”
“그렇군요.”
“웃기는 건.”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혼자서 실소를 내뿜었다. “내 아내는 웹디자이너라는 거요. 물론 아주 잘 나가는 디자이너지. 하지만 당최 우주에 웹디자이너를 데리고 가서 무슨 볼일이 있다는 거요?”
그는 위스키를 한잔 더 주문했다.
“그들은 마구잡이식으로 탤런트들을 긁어모아 우주로 날려버린 거요. 물론, 아내라도 살아남았다는 건 나도 기쁜 일이오. 하지만 지난 수개월 동안 그들이 세뇌한 것처럼, 진정한 유토피아가 저 세계에서 열릴까? 난 잘 모르겠소. 사람들이 이렇게 파티 따위나 열고 있다는 것이 역겹다는 거요. 그 쪽 생각은 어떻소?”
“전 여기도 그다지 지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웃었다. “말이 통하는 친구로군. 방에 가서 한 잔 더 하는 게 어떻소?”
나는 좋다고 했다. 그의 방에는 맥주가 가득했고 탁자 위에 노트북이 몇 대나 켜져 있었다. 그는 맥주를 몇 잔 마시고는 곧 곯아떨어져 버렸다. “우리는……버려진 거요. 그걸 알아야 해…….” 그는 이런 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남은 맥주를 마시며 방안을 살펴봤다. 노트북 옆에 인쇄된 종이가 몇 장 있었는데, 투숙객들의 이메일 주소였다. 노트북에 예의 그 프로그램이 실행되어 있었다. 3D:2H:10M. 크리스마스 선물의 주인공이 그였던 모양이었다. 또 한 대의 노트북에는 영상 편집 프로그램이 실행되어 있었다. 한창 작업 중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나는 그것을 실행해 보았다. 그건 일종의 뮤직비디오 같은 것이었다. 무중력 실에서 훈련하는 장면이었다. 아마 그의 아내일 빨간 머리의 여자가 빙글 빙글 돌며 물을 마시고, 천천히 한 바퀴 굴러서 천장에 착지하고, 양팔을 허우적거리는 장면이 비틀즈의 ‘Across the Universe’에 맞추어 편집되어 있었다. 나는 노래가 끝날 때까지 우두커니 서서 그의 매력적인 아내가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우린 버려 졌어……” 그는 아직도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침대 밑에 떨어진 이불을 그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취기가 올라 거리를 조금 걸었다. 해가 궂은 하늘 너머로 지고 있었다. 별다른 목적 없이 큰 길을 따라 걸었다.
가판대 신문에 내가 실려 있었다. 구석에 실려 있고 얼굴을 가려 놓았지만, 틀림없는 나였다. 호텔에 들어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신문을 사 강변의 카페에서 읽었다.

<‘씨앗’ 호의 비밀. 이상한 관광객들.>
[도시괴담수첩] ‘씨앗’ 호 탑승자들의 가족들이 한 호텔에 머물고 있어……그들은 무엇을 하나?
최근 **호텔의 인터넷 예약 서비스는 단 한 건의 거래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빈 방이 없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오기는 하지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최근 본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호텔은 나사와 HS라는 실체가 불분명한 업체에 글자 그대로 ‘통째로’ 빌려져 있는 상태다. 투숙인들은 놀랍게도 일주일전 떠들썩하게 발사된 씨앗호 탑승자들의 가족들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사진1과 사진2를 살펴보면, 30분 간격으로 같은 복장의 사람이 둘씩 짝지어 호텔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것은 흔히 순찰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진3은 최근 이들이 런던아이에 탑승하며 관광을 즐기는 모습이다. 사진4의 동양인은 씨앗호에 탑승한 유명한 미술가의 남편으로 알려져 있다.
투숙객들의 일주일간 행적을 살펴보면, 대부분 대수롭지 않은 바보 같은 관광이나 호텔 근처를 산책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비밀 관광’에 대해 정부는 어떠한 입장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들의 행적이 의심스러운 것은 씨앗호가 알려진 대로 단순 관광 여행이 아니라는 의혹이 불거져 나오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전 러시아 우주국 관계자의 얘기를 통하면 탑승자들은 최소한 육 개월 이상 고도의 훈련 과정을 마쳤으며, 커리큘럼엔 ‘급속 냉동 극복 훈련’이라는 항목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히틀러가 핵무기에 대비해 순수혈통을 지키기 위해 연구 지시를 했다는 훈련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또 ‘이것은 거대한 음모다. 인류는 커다란 위험에 놓인 것이다. 우주선이 발사된 이후, 시간이 얼마나 있을 지 알 수 없다. 나도, 당신도 늦었다.’ 라고 말했다. 지금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정신병원에 수용된 상태이다.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런 고도의 훈련들엔 막대한 자금이 지출되기 마련이다. 본지는 최근 입수한 우주항공국의 예산 지출 내역서를 분석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언론에 발표한 내역이 상당히 축소한 규모라는 점이다.
본지는 탑승자 가족들의 관광비도 세금으로 지출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나라의 세금이 사사로운 관광에 쓰여도 된다는 말인가? 이것에 대해서는 보다 정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다음 주 도시 괴담 수첩은 최초로 ‘씨앗호, 세금을 싣고 떠나다.’ 편으로 2주 연속 연재됩니다.-

신문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강변을 걸었다. 또 사진이 찍힐까 걱정이 되었지만, 그러면 또 어떠냐는 생각이 들었다. 강물을 바라보면서 우주선을 생각했다. 같은 속도로 점점 멀어지고 있는 쇳덩이를. 무중력의 공간을 부유하고 있는 육상 선수를, 떠다니는 과학 신동들과 동식물들의 DNA를, 떠다니는 물감들 사이를 헤엄치는 그녀를. 강물은 시시각각 모습을 달리했다.
방에 돌아와서 오랫동안 샤워를 하고 잠이 들었다. 오랫동안 걸었던 탓인지 나는 감기가 들어 버렸다. 고열에 시달리며 꿈과 현실사이를 오갔다. 얼마나 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몇 시간인지 며칠이 흘렀는지. 나는 몽롱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다만 그녀의 세계를 생각하고 있었다. 새로운 세계에 안착한 쇳덩이는 새로운 생명을 싹틔울 것이다. 지구에서 엄선한 것들로 이루어질 세계는 어떨지 생각했다. 재능이 넘치고 건강한 사람들만이 살아가는 곳. 열등이 없는 세계는, 얼마만큼 평화로울지. 흐릿한 눈으로 시계를 보려 애썼다. 그곳에 나는, 아니 우리는 없었다.

안녕.
잘 지내고 있지?
우주선은 이제 너무 추워.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어. 모두들 고통스러워하고 있어. 하지만 나는 괜찮아. 졸음이 쏟아져도 이렇게 머릿속으로 너에게 이야기 하고 있으니까! 줄곧 이렇게 해오고 있어. 자기가 어떻게 지내고 있을 지 무척이나 걱정 돼. 하지만 자기는 아주 현명한 사람이니까 잘 헤쳐 나갈 거라고 생각해. 지난 몇 달 동안 무척 힘들었어. 이상한 훈련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 아마 내가 무중력실에서 떠다니거나 수영하는 장면을 너도 봤겠지. 밝게 보이려고 애썼어. 걱정하지 않았으면 해서 말이야. 자기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 전화, 성의 없이 받아서 미안해. 실은 너의 목소리가 정말 듣고 싶었어. 하고 싶은 얘기도 많았어. 하지만 자기에게 이야기하게 될까봐 무서웠어. 그래서 그랬던 거니까 용서해 줄 거라고 생각해. 마음 넓은 남편이니까. 그렇지? 지금은 뭘 하고 있어? 밥은 잘 먹고 있는 지 걱정이야. 거긴 맨 느끼한 음식뿐이잖아. 우리 남편표 볶음밥이 먹고 싶어. 돌아가면 해줄 거지? 깜짝 놀랄 사실이 있어! 비밀이었지만, 이제 얘기해줄게. 너도 이제 곧 아빠가 돼! 같이 영국에 왔을 때, 나 임신했어. 벌써 육 개월 째야. 심장 소리가 들리지? 꼭 들려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돼버렸어. 알려지면 우주선에 타지 못하게 될까봐 무서웠어. 그래서 아기가 죽게 될까봐. 꽁꽁 숨기고 버텼어. 결국 우리는 해냈어! 우리 아이를 데리고 내가 꼭 살아남을 게. 그러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 살아남아서, 자기의 흔적을 다른 세계에 남겨 놓을 거야. 우리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많이 낳을 거야. 그럼 자기는 살아 있는 거야. 영원히 살아 있는 거야. 그렇지? 나랑 함께 있어 줄 거지? 무척 추워. 온몸에 감각이 없는 것 같아. 지금쯤, 어디 까지 왔을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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